영의 목회자 마3:13-17
▲공관복음의 예수님 이야기를 살펴보면,
공생애의 시작에
-요단강 수세 이야기
-광야에서 시험 받으신 이야기가 공통적으로 나옵니다.
공관복음이, 이 두 사건을 공생애 초기에 설정한 것은
복음서 저자들의 사고를 반영한 것입니다.
‘사역자는 마땅히 이래야 합니다’는 저자들의 사고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면, 하나님의 종의 사역의 원칙은,
하나님의 사역을 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해 져야 합니다
는 말을, 메시지로 던져주는 것입니다.
요단강에서 세례 받으시는 이야기는,
사람들이 늘 붙여온 제목은 "예수의 세례" 혹은 "세례를 받으시다" 입니다.
No! 이것은 세례를 받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이야기입니다.
둘은 초점이나 관점이 다릅니다.
이렇게 오해하기 때문에, "왜, 예수가 세례를 받아야 하느냐?"는 질문이 생기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자주 이런 질문을 던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성령 충만의 사건으로 보면, 그런 질문이 사라집니다.
“예수는 누구냐?”
"영의 사역자" "성령으로 충만한 사역자"
이것이 사역자의 가장 기본 전제조건입니다.
당신이 사역자라면, 또는 사역자의 길을 꿈꾸고 있다면 스스로 질문해 봅시다.
‘나는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 위에 임하는,
그런 성령의 기름부음(세례)를 받았는가?, 그리고 계속 받고 있는가?’
▲그렇다면, 왜 복음서는 "성령"에 대하여 그렇게 드물게 언급하고 있는가요?
1) 예수를 주인공으로 삼았기 때문에, 생길 수밖에 없는 현상입니다.
사사 건건 성령을 언급하면서 예수의 행적을 그리면,
예수는 마치 껍데기인 것 같은 인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한계적인 인간의 언어로 묘사를 하다 보면,
성령으로 충만했던 예수를 그리기보다는,
예수 안에서 활동했던 성령에 집중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에 대한 언급을 줄이고,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님께 집중했던 것입니다.
2) 복음서가 쓰여질 즈음, 이미 예수는 제 2격의 신적 인물로 인식되었습니다.
이러한 인식은, 예수를 독립적인 인물로 그리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서에 남겨져 있는 성령에 대한 언급들은
이러한 후대의 경향에도 불구하고 남아있는 흔적들입니다.
이러한 흔적들은 예수가 성령으로 충만했던 한 인물임을 보여줍니다.
그의 모든 사역의 비밀은, 바로 이 성령 충만에 있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예수님의 사역을 구체적으로 보면,
1) 치유, 축귀 사역 (마12:22-30, 특히 28절)
예수는 자신의 치유 사역과, 축귀 사역의 힘을.. 성령으로 보았습니다.
2) 가르침의 사역
눅4:18~19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예수님의 최고, 최대 사역은 당연히 ‘가르침’ 이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나타난 결과였습니다.
3) 개인적인 삶
예수님의 내적인 평화와 기쁨은 성령에서 온 것입니다.
예수님이 거룩한 뜻을 위해서 헌신할 수 있게 만든 것도 성령이셨습니다.
자기 마음에, 내적인 평화와 기쁨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남들에게 내적인 평화와 기쁨(복음)을 전달해 줄 수 있겠습니까?
특별히 예수님 위에 임하신 성령을, ‘번개, 화끈한 불, 회오리 바람’ 등으로 표현하지 않고
‘비둘기처럼 임했다’는, 말씀도 의미심장합니다.
비둘기가 상징하는 것은, 평안, 평화, 내적인 안정입니다.
성령의 사람은, 천둥과 번개같은 능력을 발휘할 때도 있지만, 이는 특수한 경우이고,
대개는 평소에 온유하고, 온화롭고, 따뜻하고, 안정적입니다.
이게 성령의 사람의 증거입니다.
따라서 예수야말로 성령 운동의 창시자이십니다. 요16:7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 동안의 오해는, 성령 운동은 광신적인 운동이라는 것입니다.
예수의 성령 운동을 보면서 고쳐야 할 점은, 성령 운동은 매우 광범위한 것입니다!
성령의 뜨겁고 격렬한 역사도 있지만, 특별한 경우이고,
대체로 성령의 역사는, 강같이 평온하고 조용합니다.
여러분, 설교시간이나, 찬양시간에 성령이 회중 가운데 임재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때 보면, 장내가 삽시간에 고요해집니다. 모두가 일제히 침묵에 빠집니다.
1) 성령 운동의 신비주의적 요소: 성령의 역사를 인정하고 그와 함께 살자는 것이므로,
이 운동(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에는 신비주의적인 요소가 당연히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신비주의로 일관하는 것은 아니지만, 신비주의를 부인하지 않습니다.
2) 성령 운동의 인격주의적인 요소: 위 ‘신비주의’와 반대적 측면이죠.
성령 운동은 그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의 인격을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성숙시키죠.
갈5:22-23의 성령의 열매는 바로 이러한 점을 암시합니다.
성령 운동은 인격 파탄적인 광신적인 운동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격의 완성을 향해 가는 운동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참된 성령운동 분별법은 ‘인격의 열매가 나타나는가?’를 보면 됩니다.
만약 열광주의, 광신주의만 있고, 성령의 열매가 없다면.. 참된 성령운동이 아닙니다.
신유도 있고, 예언도 있고, 은사도 있고, 기적도 있다는데
사랑, 기쁨, 화평, 인내,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같은 인격의 열매가 없으면,
성령의 역사로 되어진 게 아닙니다.
(다른 영을 통해서도 신비, 이적은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거든요)
3) 성령 운동의 사회적 요소: 성령 운동은 결국 사회적 변혁의 힘을 가집니다.
개개인이 변화되니까, 소금 3%가 물 전체를 짜게 만드는 효과가 나타나는 거죠.
예수님의 운동이 성령 운동이었지만,
결국은 그 사회의 종교적, 정신적, 사회적 부조리에 대하여 위협이 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 운동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예수 운동, 신앙 운동, 부흥 운동, 갱신 운동을 하려면,
진정한 감리교 사역을 하려면, 성령운동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다만 한쪽(은사 쪽)으로 편향되었던 그 동안의 성령 운동을
좀 더 온전하게 해야 할 필요가 있을 뿐입니다.
성령 운동이 제대로 진행될 때, 교회는 비로소 진정한 영성 운동, 진정한 인격 운동,
진정한 사회변혁 운동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 (신앙) 운동이 바로 이런 운동이었기에,
이 운동에 부름받은 우리 사역자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성령에 대한 이해가 바로 되어 있어야 하며, 그 자신이 성령의 충만함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진정한 사역을 이룰 수 없다. 그게 무슨 사역이든지요!
▲성령에 대한 바른 이해
1) 성령을 비인격적인 능력으로 이해하는 경향
성령은 단순한 능력이 아닙니다.
만약 이렇게 되면, 성령 운동은 氣운동과 별로 다를 것이 없게 되죠.
물론, 기 운동에 관한 보고서나, 직접 관찰을 해 보면,
확실히 우리가 눈으로 보지 못하는 어떤 힘들이 있음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 운동은 우주에 존재하는 어떤 능력을 끌어 쓰자는 운동이 아닙니다.
성령은 비인격적 능력이 아닙니다.
성령이 인격적이란 말은, ‘성령의 열매 맺는 삶’과도 일맥상통합니다. 갈5:22~23
산기도 해서 불 받는 것이, 성령의 열매 맺는 것과 만약 연결되지 못하면,
그야 말로 ‘다른 영’에 미혹되기 쉽다는 거죠.
그럼 산기도, 철야기도 없이도, 불을 받지 않아도, 인격적으로만 올바르면
‘성령의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건가요?
그럴 수는 있지만, 대단히 어려울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로 맺는 인격적 열매와,
자기 천성적 성품으로 맺는 인격적 열매는.. 절대 같을 수 없습니다.
2) 인격적 존재로서의 성령
성령은 우리에게 접촉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인간과 하나님의 공통점은, 영적 존재이기 때문이죠.
하나님의 존재 방식은, 영적인 존재로서 우주에 충만하신 분이시죠.
"하나님"은, 우주에 충만하신, 총제로서의 하나님이시고,
"성령"은, 우리에게 접촉하시는 하나님의 현존(임재)의 한 자락입니다.
내 속에 ‘영’이 있는데, 성령이 내 속에 ‘영’을 통해, 교제하시는 거죠.
▲그렇다면, 성령은 무엇을 하시는가요?
이것은 성령님께 대하여 주어진 이름을 보면 추론할 수 있습니다.
1) 거룩의 영
성령 Holy Spirit 이라는 말 자체가 이 이름(거룩 holy)을 담고 있습니다.
성령 Holy Spirit 이라는 말이 성경에 얼마나 많이 나옵니까.
거룩은 성별(구별됨)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성령은 그 사람을 성별시킵니다.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서 따로 떼 놓습니다!
성령 충만은, 따라서 그 사람을 하나님의 사역에 대하여, 자신을 구별해서 헌신하게 만듭니다.
이러한 헌신은, 그 사람의 인격 자체도 거룩하게 만듭니다.
"카리스마"는 이렇게 만들어진다. 어떤 능력을 받아서가 아니라, (여기서는 ‘권위’를 뜻함)
거룩한 어떤 일에 철저히 헌신된 사람에게는 카리스마가 형성되게 되어 있습니다.
2) 창조의 영
성령은 하나님의 창조에 참여했던 분입니다(창1:2).
따라서 성령은 우리에게 임할 때, 새로운 창조를 행하십니다.
마치 천지창조와 같은 일이, 내 속에도 일어나서, 나를 새로운 피조물로,
또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주시죠.
성령은 우리를 새로운 인간으로 만들어 주십니다(고후 5;17).
그러한 새로운 인간은 성령의 도움 가운데 무한히 창조적인 일들을 해 냅니다.
그러므로 "창조성"의 원천은 성령충만에 있습니다!
마치 황무지를 옥토로 만들어내듯이,
메마르고 척박한 광야에 길을 내고, 강물을 내시듯이
하나님의 성령으로 감동된 사람은,
전혀 차원이 다른 새 일, 새 길을 여는 사람이 됩니다.
왜냐면 성령이 ‘창조의 영’이신데, 그 성령에 감동되었기 때문입니다.
3) 능력의 영(사11:2, 롬15:13)
성령은 모든 능력을 가지고 있는 분입니다.
따라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사람은, 능력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은, 바로 능력의 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빌리 그레함 목사님의 능력의 비결 → integrity
미국 대통령 취임식에서 9번이나 취임 축복 기도를 해 주신 목사님.
약 60년 동안, 그렇게 오랜 세월동안 온 국민에게 존경받는 목사님이었던 비결은
최고 정상의 기독교 지도자라는 높은 위치, 명성 때문인가요?
큰 단체를 이끈다는 그의 리더쉽 때문인가? 그래서 존경받는가? 결코 아닙니다.
그의 영향력은 바로 integrity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성령의 내적 능력이죠.
당신의 마음밭의 순수함을 지켜려고 누구보다 무진장 애를 쓰신 분이시다.
그래서 당신의 시대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영향력을 끼치고 살아오신 능력의 근원이
바로 integrity였습니다.
캐더린 마샬이 쓴 <기도의 모험>이라는 책에
문제는 엄청나게 많은데, 그렇게 평안한 성도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 있어요.
이분이 어려운 문제에 앞에서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는데
마음에 하나님이 응답을 주시기를 '기다리라' 그런 응답을 주시더래요.
지금 자기는 조급해 죽겠고, 당장 죽을 것 같은데
하나님의 응답은 천하태평 같이 그냥 '기다리라'는 거죠.
그래서 그것도 하나님의 응답이니까, 어떻게 하실지는 모르겠지만
염려하지 않고 그냥 기다렸대요.
근데 한 3일 정도가 지나니까, 그 문제가 많던 것들이 그냥 싹 해결이 되어버린 거예요.
'참 신기하다..'
근데 그때 딱 깨달아지는 것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그리고 무덤에 3일 동안을 계셨어요. 그때는 진짜 다 암울한 것 같아요.
예수님이 죽으셨어요. 무덤에 묻히셨어요. 이제 끝난 거죠.
그 3일이 있었어요. 그리고 부활하신 거예요.
이분이 엄청난 영적인 진리를 깨달은 겁니다.
'아, 주님의 부활 역사 전에 3일 동안의 죽음의 기간이 있었구나'
그때는 그냥 대책 없이 기다려야만 되는 거죠.
그래서 이분에게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영적인 원리가 된거에요.
어떤 문제가 생기고 시험이 생기고 그러면, 진짜 주님께 맡기고 3일을 기다려요.
불평하는 은혜를 뒤집지도 않고, (반항하는) 행동으로 뒤집지도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주님께 정말 맡기고,
그리고 하나님이 어떤 제스처를 주실 때까지, 내게 어떤 싸인을 주실 때까지,
3일을 기다리면... 그러면 지나고 나면 정말 부활의 역사를 경험한다는 거죠.
'아, 주님이 역사하셨구나, 주님이 일하셨구나!'
그 내용이 그 책 속에 참 감동적으로 기록이 되어져 있어요.
4) 진리의 영(요14:16, 15:26 등)
성령은 참된 진리를 밝혀 주시는 분이시죠.
따라서 성령 충만한 사람은, 진리를 옳게 분변하며, 진리를 따라 살아갑니다.
예언자들에게 임했던 영감은, 바로 진리의 영의 영감이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성령은 우리를 새롭게 지으시고, 진리를 알게 하시고,
참된 것을 위해서 능력있게 헌신하게 하시는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성령의 기능을 어느 하나로 편협하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성령의 다양한 기능들을 알고, 그 모든 차원을 경험하는 것이 바로 성령 충만입니다.
이렇게 보면, 성령 충만에 대한 우리의 기존 관념이 얼마나 협소했는지요.
우리는 성령충만이 단지 방언하고, 신유의 능력을 가지는 정도의 일로만 알았던 때도 있었죠.
그러나 그런 것들은 성령 충만의 아주 지엽적인 현상들일 뿐입니다.
성령충만은 좀 더 중요하고, 더 넓은 차원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왜 성령 충만이 하나님의 사역을 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그리고 기본적인 토대인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성령충만은 목회의 모든 분야에 필요한 요소들을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음의 문제는 "어떻게 성령의 충만함을 입을 수 있겠는가요?"
성령 충만의 방법에 대한 오해들
1) 성령 충만은 한 순간에 이루어진다.
그렇게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더 많은 경우에,
성령 충만은 지속적인 영성 생활을 통해서 이루어져 나간다.
2) 성령 충만은 감각적인 현상과 함께 온다.
그런 경우도 있지만, 그것은 예외적인 현상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감각적인 현상이 아니라, 존재의 변화(성령의 열매)입니다.
일례로, 방언의 은사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
더 이상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교인들도 있다고 합니다.
3) 성령충만은 지속됩니다.
No! 성령 충만은 소멸성을 가집니다. 성령 충만의 경험은
그 이후의 영성생활을 통하여 유지되고 더욱 강화되어야 합니다.
재충만을 받는다고 하죠.
4) 성령 충만의 완전한 경지에 이를 수 있다.. 라는 오해!
우리가 죽을 때까지 ‘완전한’ perfect 경지란 있을 수 없습니다.
‘온전한, 성숙한’이란 의미는 되죠.
"충만"이라는 정도가 정해져 있어서,
어떤 신비적인 경험이나 영성적인 노력으로
그 경지에 이르러 완성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충만한 경지에 이르렀다 해도, 더 나아가야 할 경지가 있습니다.
"이만하면 됐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성령은 끊임없이 우리를 더 높은 경지를 향하여 이끄신다.
▲성령 충만을 이루는 법
1) 회심 or 성령체험 or 첫 번째 신적인 경험
벧엘에서의 야곱의 경험(창28:16-17) "여호와께서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두렵도다 이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나님이 내 곁에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경험
이것을 회심이라고 하기도 하고, 성령 체험이라고도 합니다.
자기 첫 경험을 분명히 압니다. 언제 어디서 그러한 회심을 하였는지가 분명히 기억합니다.
(그런데 서서히 그런 깨달음에 이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경우에는 첫 경험이 불분명합니다.
이래나 저래나 ‘성령의 열매’를 보고서, 분별할 것입니다)
이 "성령 체험"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영적인 성장, 성숙 과정에서 여러 번 경험을 하게 됩니다. (야곱도 창28장, 32장, 35장 계속)
하나님의 엄연한 현존(임재), 성령의 강력한 역사를 반복하여 경험하게 되며,
그러한 경험은 그러한 확신을 더욱 강화시켜 줍니다.
먼저는 성령의 역사에 대한 인식, 필요성을 느껴야 합니다.
그런 것 전혀 없이, 그저 예수를 모시는 신앙으로는 부족합니다.
성령을 통해서 지금 역사하시는 살아있는 예수를 만나야 합니다.
어떻게 성령체험을 합니까?
-깊은 기도를 통하여 대면할 수 있습니다.
-말씀 묵상 속에서 대면하기도 합니다.
-찬양 중에 대면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건들을 가운데서도 직면할 수 있습니다.
결국, 영적 눈을 뜨고, 영적 안테나를 높이 세우고 있으면, 그런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가을이 이미 왔으나, 정서가 메마른 사람들은 가을의 흔적을 하나도 느끼지 못하고
이 가을을 보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민한 정서로 가을을 기다린 사람들은
모든 곳에서 가을을 느꼈을 것입니다.)
2) 받은 성령을 계속 유지해 나가는 영성 생활
영성 생활이란, 시작된 성령과 동행의 삶을 더욱 심화시키는 일입니다.
자동차로 연료가 바닥나듯이,
성령도 쉽게 고갈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제 충만해도, 바로 다음 날 고갈되기도 합니다.
따라서 성령의 충만이 목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목회자는 무엇보다 성령충만을 계속 유지해야 합니다.
(‘영성생활을 한다’는 말이 있는데, 같은 뜻으로 봅니다)
목회 활동에 있어서 영성을 풍요롭게 하는 활동을 가장 우선시해야 합니다.
성령의 은사도 사모하지만,
성령의 인격적 열매 맺는 삶도 치중합니다.
혼자서 높은 경지에 이르는 구도적 노력도 가치가 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가치가 있습니다.
그것이 좋은 사람들은 그렇게 해야 합니다.
개신교는 이런 (전통적인) 수도자들이 설 자리를 빼앗아 버렸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영성적인 수준이 낮은 교회가 되어 버렸습니다.
마치는 말
영적인 깊이가 없는 설교, 목양, 교육 등은 결국 목회의 부실화로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목회 활동 가운데서
자신의 영성(성령충만) 생활에 가장 많은 관심과 시간과 정열을 투자해야 합니다.
이것은 결코 이기적인 행동이 아닙니다.
현재의 목회 현장이 어쩔 수 없이 목회자의 영성의 수준에 의해서 좌우되기 때문에,
목회자의 영성의 수준은 곧 그 교회의 교인들의 영적 복지와 관계됩니다.
그러므로 목회자가 자신의 영성 생활에 대하여 시간을 투자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목회 활동이 됩니다.
L목사의 예: 토요일 하루를 온전히 집안에서 보내는 이유.
모든 교인의 목사이기 때문에! 하루 종일 서재에 파뭍혀 지내면서,
기도와 묵상과 설교 준비에 몰두한다는 것입니다.
교인 중 아무도, 그 어떠한 응급 사태도 이 시간을 방해할 수 없습니다.
이 시간은 목사의 영성 생활에 집중되는 시간입니다. 왜요?
주일 하루 동안의 목사의 말과 행실이 교인들에게 그렇게 중요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또 다른 목회자는, 매주 금요일만 되면, 무조건 기도원에 가서 하루 종일 보냅니다.
가서 잠을 자이 한이 있더라도, 단절을 통한 영성 회복의 시간을 가지며,
아울러 주일 메시지를 준비한다고 합니다.
‘설교 내용’도 준비해야 하지만, 어쩌면 ‘설교자의 영성’을 준비하는 게 더 중요하니까요!
성령의 충만한 상태에 이르고, 그 상태를 지속하려는 모든 노력
1) 기도 생활
영성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도 생활입니다.
벌써 ‘진지한 기도’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영이 병들었다는 초기 단계죠.
그러면 빨리 ‘회개’하든지 해서, ‘진지한 기도’가 나오도록 해야 합니다.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 즉 성령충만한 사람은
그런 자기 상태를 잘 관리한다는 거죠.
약간만 식어져도, 빨리 다시 뜨거워지도록.. 뭔가 조치를 취하는 것입니다.
진지한 기도, 진정한 기도는 성령과의 사귐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기도의 방식도 달라진다.
일방적으로 구하기만 하는 기도에서 → 쌍방적인 대화로,
말로만 하는 기도 → 때로는 묵상적인 기도로 깊이 들어갈 때도 있고,
교회당에서만 하는 기도 → 항상 생활 중에 드리는 기도로 바뀝니다.
더욱이 목사는 중보기도해 주어야 할 사람들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기도가 쉬지 않을 수밖에 없는 것이죠.
새벽에 1시간 이상 길게 기도하고,
그 뒤로 하루 종일 아무 기도도 하지 않는 사람이 만약 있다면,
뭔가 성숙되지 못한 것입니다.
새벽에 1시간 이상 길게 기도하고 나면, 하루 종일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이
새벽에 ‘진지한 기도’를 드렸다는 증거입니다. 그 여운이 계속 남으니까요.
2) 말씀 묵상 및 연구
목사가 가운을 입는 이유는, 평생 연구하는 사람이란 뜻이랍니다.
☞https://rfcdrfcd.tistory.com/12538761
3) 일상 생활
목사가 수도승이 아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상 생활을 해야 합니다.
따라서 어떻게 일상 속에서 영성을 지키고 더 강화시키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인가를
알아야 하고, 그런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 중에 중요한 것은 <단순한 삶>입니다.
‘바쁜 사람은 나쁜 사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바쁘다는 말은, 멈추어 설 시간이 없다는 뜻이고, 성령과의 교제가 적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바쁜 일상생활은 영성을 고갈시킵니다.
제주도 등의 여행을 지혜롭게 하려면, ‘동선을 최소화 해야 한다’는 말이 있죠.
이곳 저곳을 너무 다니다 보면, 정작 여행할 시간이 소진지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기도와 말씀에 전무하는 삶을 살아야 되는데,
동선이 많고 복잡할수록, 기도와 말씀에 전무하는 삶과는 동떨어지고,
그 결과 성령(영성)이 고갈되어, 기도하는 평신도보다 못한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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