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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본래의 모습(사도행전 2장 37절~47절)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멘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들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오늘은 우리 교회가 창립 9주년을 맞는 주일입니다. 열 한 명으로 시작한 작은 가정 교회가 이제 낮 예배 출석 교인만도 만 명이 넘는 큰 교회로 발전했습니다. 오늘이 있기까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큰 은혜를 감사하며 참 교회의 본래적인 모습을 다시 한번 생각하는 것은 깊은 의의가 있을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 있었던 대표적인 교회의 예표로 네 가지를 들 수 있습니다. 첫째는 '노아의 방주'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멸망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저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방주를 예비하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방주에 올라탄 사람들은 모두 구원을 받습니다. 방주를 만드는 것도 믿음이요, 올라타는 것도 믿음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 얻는 그 구속사적 사건이 노아의 홍수와 방주에 나타납니다. 이것이 교회 본래의 역사적이 모습입니다.
둘째, '광야 교회'입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을 향해 나아갑니다. 홍해를 건너고 요단강을 건널 때까지 광야에서 40년 동안 유리 표박합니다. 애굽에서 때묻은 그들의 생활 풍습과 영혼이 깨끗하게 정화되는 기회입니다. 광야에서 영적 출애굽이 이루어지는 것이요, 장차 누리게 될 영원한 축복의 생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곳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계명을 받습니다.
셋째, '예루살렘 성전'입니다. 이 성전에는 제단이 있고, 제사하는 의식이 있었습니다. 많은 죄인들이 찾아와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제사 드림으로 속죄함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 성전은 회개하고 죄 사함 받는 교회를 예표합니다.
넷째, 곳곳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의 '회당'입니다. 회당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강론하는, 그리스도인들의 훈련 도장으로서의 교회입니다.
어느 신문기자가 구세군의 창시자 윌리엄 부스에게 "다가오는 미래에서 가장 큰 위험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을 때 그는 대답했습니다. "교회가 이 세상에서 중생 없는 용서를 말하는 철학적 기독교와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를 소개하는 것이요, 성령 없는 종교, 하나님 없는 정치, 지옥 없는 천국을 소개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큰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참 교회의 모습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는 예루살렘에 있었던 첫 번째 교회, 그 교회의 모체로 돌아가서 교회의 참모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교회의 특징이 오늘 우리가 교회를 생각하는 가장 중요한 척도가 될 것입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우리 교회 앞에다 '소망교회 예배당'이라 써놓은 것을 보실 것입니다. 굳이 '예배당'이라고 한 이유는 제 어린 시절의 교회에 대한 향수이기도 합니다. 당시 교회는 모두 예배당이라고 썼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건물이 교회는 아닙니다. 건물을 지어놓고 이것이 '교회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건물이 있어야 교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건물 없는 교회가 얼마나 많습니까? 교회 건물이 따로 있고 교회 시설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란 다만 모여서 예배하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보다 '예배당'이라는 이름이 더 바른 이름이다 싶습니다. 건물만을 교회라고 할 수 없듯이 '사람들 모이는 곳이 교회다'라는 생각도 착각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인 종교 단체로서의 조직체, 어떠한 행정 기구나 구조를 가리켜 교회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혹은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 친교하고, 구제하고, 사랑, 봉사하면 이것이 교회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 그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참 교회란 과연 어떤 것이겠습니까?
교회의 근본은 살아 계신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두세 사람만 모여도 그리스도가 계신 곳이 교회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의미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어느 구석에서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그리스도의 체취를 느낄 수 있어야 교회입니다. 우리가 이 자리에 나온 목적이 무엇입니까? 친구를 만나러 나왔습니까? 교회가 아니면 친교할 곳이 없어서 나왔습니까? 교회 나온 목적이 있다면 오직 하나,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길이 여기 있고. 그리스도와 사귀는 길이 여기 있다고 믿기에 우리가 교회에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는 하나님과 만남의 역사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가끔 "어떻게 해야 교회가 부흥됩니까?"하고 묻는 분들이 있습니다. 저도 그 물음에 대하여 딱부러지게 대답할 수 없습니다.
다만 한가지 원칙적으로 할 말은 있습니다. "교회로 교회 되게 하라." 교회 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가 계시는 것입니다.
살아 계신 그리스도께서 현존해 계실 때에 교회가 교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역사 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시고, 이제 성령으로 강림해 계십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란 무엇이냐 하는 것에 대하여 아주 재미있는 표현을 했습니다. 배구나 농구 경기를 보면 한참 뛰다가 작전타임이라는 것이 있어서 선수들과 감독들이 모여 수군수군하는데, 이것이 바로 교회라는 것입니다. 잠깐 쉬면서 새로운 작전을 계획하는 것, 새로운 지식을 받는 곳, 이곳이 교회입니다. 저는 이렇게도 생각해봅니다. '교회는 주유소와 같다.' 아무리 좋은 자동차라도 기름을 넣지 않고 달릴 수는 없습니다. 달리다가 기름이 떨어지면 다시 돌아와서 주유(注油)해야 합니다. 그래야 제대로 달릴 수 있지 않습니까? 이처럼 우리는 때마다 교회에 모여 이곳에서 새로운 힘, 생명력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어떻게 그리스도가 우리와 함께 계시느냐-----그 존재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말씀이요, 또 하나는 성령입니다.
그리스도의 사건이 말씀 증거를 통해서 끊임없이 믿음 안에서 내게 새롭게 사건화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신 역사가 늘 새롭게 사건으로 다가와야 합니다. 이것이 말씀의 역사입니다.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입니다. 둘째, 성령의 역사로 인해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성령이 위로자가 되시고 해석자가 되십니다. 성령의 별명은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영으로 계셔서 증거 하시고 현존하실 때에 우리가 영의 역사 안에서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리스도와 내가 만남의 관계를 이루고, 신비로운 생명적 관계를 이룰 때, 바로 거기에 교회가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줄여 말한다면 '중생이 있는 곳에 교회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말씀과 성령의 역사가 있을 때, 거기에 중생의 신비로운 역사가 나타납니다. 한사람 한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역사, 나 자체로서 죽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역사, 곧 위로부터 태어나는 중생의 역사가 나타날 때 거기에 교회가 존재합니다. 그리스도가 살아 계신 곳, 그곳이 교회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그리스도 없는 교회가 많습니다. 중생 없는 교회 행사도 많습니다. 성령의 신비로운 체험 없이 이루어지는 열심, 이것이 말썽입니다. 언제나 그리스도의 영이 있고 말씀의 역사가 있는 바로 그 현장에 교회됨의 의미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제 역사적으로 가장 귀중한 임무를 들어봅시다. 사도 베드로 ----- 그는 예수님과 3년 동안을 함께 살았고 3년 동안 따라다닌 수재자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베드로의 생애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런 사람이 어떻게 예수님을 따라다녔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아리송합니다.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그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꽁무니뺐던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변화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그 마음속에 성령으로 임하시니 베드로가 새로운 사람이 됩니다. 비로소 그리스도의 제자가 됩니다. 비로소 성경도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바로 이해하고, 자신도 알고 고난의 뜻도 알게 됩니다. 모든 역사와 사건을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 안에서 해석하는 사람이 됩니다. 이제 그는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거기에 교회가 있었습니다.
본문에 있는 사건을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생각해보면 여기에 깊은 뜻이 있습니다. 설교를 듣기 위해 3,000명이 모였다고 합니다. 3,000명 앞에서 베드로가 설교합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의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36절)." 이것이 설교의 결론입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우리가 무심히 읽어나갑니다마는 다시 한번 생각해봅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사건이 이제 겨우 50일밖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저들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누가 예수님을 죽였는가를. 가룟 유다가 배반했고, 가야바가 고소했고, 빌라도가 재판한 것, 그리고 로마 군인들이 긴 못으로 예수님 손바닥에 못질하고 옆구리를 창으로 찌른 것-----십자가 사건의 원인과 과정을 생생하게 알고 있습니다. 누가 그 사건에 연루되었는지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을 앞에 놓고 '너희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다'고 합니다. 그때에 저들은 마음에 찔려서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고 근심합니다. 만일 제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이렇게 한마디했을 것입니다. "베드로 선생, 말조심하시오! 내가 언제 예수님을 죽였소? 죽인 사람은 엄연히 따로 있는데 왜 나더러 죽였다고 덮어씌우는 거요?" 그러나 본문에 있는 사람들은 베드로의 말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그 설교에 마음 아파합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내가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위하여 죽으셨고 내 의를 위하여 부활하셨습니다'하고 십자가 사건을 나의 사건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본문은 저들이 그렇게 받아들이고 나서 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십자가 사건을 나의 사건으로 받아들일 때, 여기에 구원의 역사가 있습니다.
제가 아는 여집사님 한 분이 언젠가 신앙간증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분 말씀이 교회에 나온 지 15년 되었다고 합니다. 처음 나오기 시작할 때 가장 어려운 것은 졸음이었다고 합니다. 예배 시간에 왜 그렇게 졸리는지 시작부터 끝까지 졸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던 모양입니다. 둘째로 어려운 것은 어쩌다 목사님 말씀을 들어도 '이 말씀은 내 남편이 들어야 하는데, 이 말씀은 시어머니한테 꼭 맞는 말씀인데, 이 말씀은 잘 들었다가 아이들한테 해주어야지'-----이런 생각만 하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여집사님이 중생을 체험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말씀마다 모두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내가 잘못했고, 내가 회개해야 하고, 다른 사람 생각은 나지 않습니다. '어쩌면 이토록 나를 정확히 아실까, 어쩌면 이렇게 꼭 필요한 말씀을 주실까' 하고 모든 말씀을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이다보니 이제 졸리지도 않고 지각도 하지 않게 되었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새롭게 믿게 되고, 자연히 이웃을 사랑하고 봉사하게 되었다고 매우 즐거운 간증을 합니다. 제가 그 이야기를 듣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집사님은 15년 전부터가 아니라 이제부터 예수님 믿는 것입니다. 세례 다시 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
여러분,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교회에 얼마나 오래 다녔느냐, 그것이 그리스도인이냐 아니냐를 결정짓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내 구주로 영접하면서부터, 그리스도와 나의 그런 신비로운 관계가 맺어지는 순간부터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때부터 내 마음과 심령을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이 지배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사건을 내 사건으로 받아들이고,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말씀과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곳에 교회가 있습니다. 나는 십자가 아래 완전히 죽어버리고 그리스도의 역사로 말미암아 중생할 때, 바로 거기에 교회가 있습니다. 요새는 복음 없는 선교가 많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는 봉사도 많습니다. 중생을 모르는 사람들의 프로그램은 또 얼마나 많은지요! 그래서 말이 많고 문제가 많습니다.
혼 없는 몸이 죽은 몸이듯이 말씀과 성령 없는 그리스도인이나 교회는 죽은 것입니다. 교회 본래의 모습을 생각해봅시다. 본문에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했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이것을 헬라 원문으로 보면 모든 혼이 두려워했다는 뜻입니다. 이 두려움-----이 신령하고 경건한 두려움이 교회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임재 의식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여기 살아계시다'라고 하는 회개한 심령의 자기 고백입니다. 교회의 권위 앞에, 그리스도의 살아 계신 역사 앞에 저들은 두려움으로 대했습니다. 이것은 죄로 말미암은 두려움이거나, 저주받을까 하는 두려움이 아닙니다. 은혜로운 두려움이며, 경건한 영적 분위기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에는 기적이 많았습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귀신들린 사람이 깨끗해집니다. 죄로 더러워진 사람이 회개하고 돌아옵니다. 주님을 배반하다가 그 앞에서 당장 벙어리된 사람도 있고 장님된 사람도 있습니다. 이렇게 놀라운 사건들을 대할 때에 저들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하는 엄청난 체험을 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우리는 죽음이 저 멀리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초대교회 사람들의 생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주님의 재림이 눈앞에 있습니다. 저 앞에 있는 영원한 미래가 바로 내 앞에 다가와 있습니다. 이것을 알기에 저들은 심판대 앞에 벌거숭이로 서 있는 것 같은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사도행전 5장 1절 이하에 있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야기를 잘 아실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땅을 팔았습니다. 그런데 팔고 보니 돈이 너무 아까웠던 모양입니다. 아나니아가 반을 감추고 반만 가져다 바칩니다. 이를 보고 베드로가 "어찌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느냐"라고 한마디 하니 그대로 죽어버렸습니다. 또 그 아내 삽비라가 들어오는데 남편한테 일어난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예, 이뿐입니다."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하느냐." 베드로가 이 말을 하자마자 삽비라도 죽어버렸습니다.
두 사람 다 들것에 실려 나갔습니다.
이 소문을 듣고 두려워하지 않을 사람이 있었겠습니까? 여러분, 말을 함부로 하면 안됩니다. 함부로 거짓말하고, 함부로 권모 술수를 쓰고, 함부로 생각해서는 안되는 곳이 교회입니다. 사람마다 두려워하는-----이러한 영적 분위기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에게 교회가 있습니다. 현대 교회의 결정적인 약점은 바로 이 두려움이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공회당이나 유흥 장소, 친목회쯤으로 아는 사람들 때문에 큰일입니다. 교회란 그리스도의 영이 현존하는 곳이기에 교회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바로 가까운 이웃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몇년 동안 그 교회에 분쟁이 계속되어 왔습니다. 한 사람 때문에 교회가 늘 시끄럽고 어려웠습니다. 설교하러 나오시는 목사님 넥타이를 잡아챌 정도였으니, 갈 데까지 간 사람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아무도 손을 쓰지 못했습니다. 교회에 경찰을 부를 수도 없고, 참 괴로운 노릇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날도 교회에 와서 한바탕 소동을 일으켜놓고 돌아갔는데 그가 점심을 먹다가 그대로 쓰러져 죽었습니다. 이런 일이 있은 후부터 교회가 몰라보게 숙연해졌습니다. 그처럼 많던 문제도 조용히 해결되었습니다. 비로소 교회가 교회된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에 두려움이 없다면 그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공회당이나 시장 복판에서 떠들듯이 떠들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욕망이 다 무너지고, 나라는 존재가 깨어지는 체험이 있어서 교회입니다.
민수기 14장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통을 참지 못해서 불평합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애굽 땅에서 죽는 건데, 우리 조상이 죽을 때에 같이 죽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 때에 하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민 14:28~29)."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함부로 말한 것이 그대로 내 머리 위에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협소한 민족주의나 굳어진 규례, 전통, 관습, '나'라고 하는 자의 어리석은 고집이 완전히 무너질 때, 거기에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뿐입니까? 방언을 통해서 언어가 소통됩니다. 언어의 장벽이 무너집니다. 마음과 마음이 통해서 내 마음이 그대로 노출되고, 모든 사람의 마음이 그대로 내게 전해집니다. 복음 안에서의 소통-----여기에 진정한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피부로 느끼고 저들이 두려워했습니다.
심판주가 눈앞에 있고 주의 재림이 눈앞에 있는 것을 알고 현재적으로 느낄 때에 저들은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두려워만 했다고 말씀하지는 않습니다. 두려움과 동시에 저들한테는 큰 기쁨이 있었습니다. 모일 때마다 떡을 떼고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거짓과 죄가 물러가고 자기라는 존재로부터의 완전한 해방이 올 때에 저들은 기뻐하고 찬송을 부를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신령한 감격과 기쁨-----이것이 교회였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초대교회가 서로 모이고 유무상통(有無相通)하며 서로 사랑하고 도와주고, 찬송하며 기뻐했지만 그것으로 끝났다는 점입니다. 그것으로 만족하고 전도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교인 수는 날로 더해갔으나 그들은 자기 처지에 안주하려 했습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 핍박을 보내십니다. 야고보가 헤롯 왕의 칼에 순교하고,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습니다. 예루살렘교회에 있던 그리스도인들이 산지 사방으로 흩어집니다. 사도행전 8장을 보면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비로소 복음을 전합니다.
교회는 끊임없이 확장되어야 합니다. 질적으로 양적으로 성장하여야 합니다. 성장하지 않는 교회에는 분쟁이 일어납니다. 썩어버립니다. 성장을 멈춘다는 것은 곧 생명이 사라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을 때에 그 교회는 죽어버립니다. 교회는 끊임없이 자라야 하고 또 자랄 수밖에 없는 생명체입니다. 교회된 본분을 다하지 않을 때에 환난과 핍박이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는 말씀과 성령으로 이루어지고, 중생하고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의 감격과 찬양으로 유지됩니다. 그리고 사랑과 전도와 증거와 순교로 인하여 나날이 확장됩니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재림하실 그 날까지 이 교회는 거룩함을 지키고 주의 뜻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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