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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하나님의 소원(미가 6장 6절~8절)

by 【고동엽】 2023. 3.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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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소원(미가 6장 6절~8절)

이스라엘 나라와 우리나라는 여러 가지 면에서 비슷한 점이 많은 것 같습니다. 지정학적(地政學的)으로도 그렇고, 정치, 경제, 문화 등 여러 측면에서 유사한 점을 많이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강대국들 사이에 낀 조그마한 나라로서 수없이 외침을 겪어온 그 수난사(受難史)가 비슷합니다. 아시는 대로, 이스라엘 나라는 오늘의 말씀이 기록된 주전(主前) 8세기 무렵만 해도 북쪽에는 바벨론이 위협적으로 버티어 있고 남쪽에는 애굽이 있습니다. 강대국들끼리 티격태격할 때에도 그 사이에 끼여서 애매하게 수난을 겪어야 했고, 툭하면 이 나라가 쳐들어와 짓밟고 저 나라가 들이닥쳐 노략질하고 늑탈하였습니다. 거의 이러한 수난으로 점철된 것이 이스라엘의 역사입니다. 그리하여 오늘날도 본국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은 고작 5백만 정도이고, 세계 곳곳에 흩어져 살고 있는 사람이 더 많아서 1천 5백만이라고 합니다. 해외에서도 그 민족은 말못할 고난을 숱하게 겪어 왔습니다.
어느 이스라엘 사람은 자기가 쓴 책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온 세계가 이스라엘의 원수다'라고요. 오죽하면 이런 소리까지 하겠습니까? 드나나나 수난 속에서 오늘에 이른 민족이올시다.
오늘의 말씀을 기록한 미가 선지가 활약하던 그 때에도(이사야 선지도 같은 시대에 활약했습니다마는) 이스라엘은 날로 부강해지는 북쪽의 바벨론에 큰 위협을 받고 있었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로 갈라져 있던 이스라엘은 안팎으로 다 무너져 가는 실로 어려운 형편에 있었습니다. 밖으로는 시시각각 침략의 위협이 다가드는데, 안으로는 온갖 사회적인 부패와 부조리가 만연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제 이러한 어려움을 정치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 듭니다. 바벨론에 조공을 바치는 하편, 애굽에도 조공을 바치면서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러나 애굽이 그렇게 호락호락 도와주는 것도 아닙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라안은 정치적으로 어수선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바벨론에 속한 사람, 애굽에 속한 사람, 또는 수리아에 속한 사람, 어디에 속한 사람…… 해서 정치적인 배경을 업고 날뛰는 자들이 들끓었습니다. 그런가하면 아무 데도 속하지 말고 마지막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싸워서라도 독립성을 지키자는 극렬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건 역부족입니다.
이 같은 정치적 타락을 보면서 선지자는 외칩니다. '바벨론을 두려워하지 말라. 애굽을 의존하지 말라.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라. 하나님 앞에만 바로 서면 이 나라는 지켜질 것이다!' 하고 목이 터져라 외칩니다. 이것이 선지자의 메시지였습니다.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경제도 타락했습니다. 상거래(商去來)는 공정을 상실했습니다. 사인들이 저울눈을 속이고 관리들은 부패했습니다. 종교는 형식뿐인 의식만 남고 속속들이 병들었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이 설치는가 하면 제사장들은 형편없이 타락했습니다. 저들은 출애굽의 역사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모세의 하나님, 다윗 왕의 하나님, 다윗 왕국을 세우신 하나님을 믿고 있으면서, 그 믿음 자체가 변질될 때에 진실이 없는 의식(儀式)만 남게 되었습니다. 회개 없는 제사만 성행하였습니다. 예나 오늘이나 종교가 타락할 때에는 겉치레만 남게 마련입니다. 나의 이기적인 소원을 풀겠다고 청탁 뇌물의 성격을 띤 제사에만 열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이 제물(祭物)을 드림으로 복을 받을 것이다. 많이 드렸으니 많이 주실 것이다----이래서 야단스럽게 성행하는 제사,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양이나 수염 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사 1:11-13)."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엄히 꾸짖으십니다.
게다가 자신의 부정한 행위와 죄악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보상심리의 발로로 더 열심히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회개는 없이 마음과 정성이 없는 거창한 제사만 드립니다. 이렇게 해서 자신의 그릇됨을 덮으려고 합니다. 자기 교만에서 비롯된 겉치레 의식을 통하여 백성들의 마음을 사려고 합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바리새 주의자들이 그런 사람들이요, 제사장 사두개 교인들이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헤롯 왕이 아무 신앙도 없이 헤롯 성전을 지은 것도 정치적 동기에서입니다.
그 모두가 종교를 빙자해서 언감생심 자기 교만과 자기 의와 자기 불의를 지켜 가려고 하는 행위들이었습니다. 더욱이 오늘 말씀 가운데는 이교적(異敎的)인 제사 의식까지 빌어와 감히 하나님 앞에 제사 드리는 그런 망령된 모습마저 나타나고 있습니다.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미 6:7)." 이방 사람들에게는 저희 우상에게 바치는 최고의 제사로 맏아들을 끓는 기름가마 속에 던져 넣는 의식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런 방법까지 본떠서 하나님께 어리석은 짓을 하려고 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통하여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모든 형식적인 것을 떠나 본질적인 것으로 돌아가라, 겉치레 의식이 아니라 마음과 정성을 다한 내실 있는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라 하십니다. 예배의 행위 자체에 전념하지 말고 예배하는 자의 사람됨에 마음을 쓰라 하십니다.
여러분, 잘 믿는 사람이란 어떤 사람입니까? 저는 이렇게 대답하겠습니다. 열심히 기도하는 것, 좋은 일입니다. 열심히 찬송하는 것도 좋습니다. 손뼉을 치면서 하나님 앞에 소리높이 찬양하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또 봉사하는 것, 헌금 열심히 하는 것, 다 좋은 일입니다. 또 봉사하는 것, 헌금 열심히 하는 것, 다 좋은 일입니다마는 저는 그런 것으로 평가하고 싶지 않습니다. 잘 믿느냐 못 믿느냐 하는 것은 우선 그의 가정에서부터 평가하고 싶습니다. 그가 가정의 일원으로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그리고 직장에서는 어떻게 생활하고 있는지---거기서부터 평가하고 싶다는 말입니다. 남에게서 신뢰받고 존경받을 만한 신앙적 인격이 되어 있을 때에 그 사람이 예수 잘 믿는 사람입니다. 사람됨이 남들에게 예수 믿을 마음을 불러일으킬 수 있어야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저 사람을 보니 나도 예수 믿어야 되겠다." 이런 마음이 우러나게 해 준다면 그 사람이 참 믿음의 사람입니다. "저 사람을 교인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고로 예배의 행위보다는 예배의 내용, 나아가서는 예배하는 자의 생활 그것이 성전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사회 생활 속에서 열매맺어 나가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예배 의식에, 그 모양이나 규모의 거창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입니다. 수 없는 날 교회에 나오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귀담아 듣지 않는 사람에게 무슨 예배가 이루어지겠습니까? 깨끗한 마음으로, 온유와 겸손으로 마음 문을 열어서 거듭남이 있고 내면적인 성화(聖化)가 있을 때에, 그것이 예배가 아니겠습니까? 그와 같은 인간 자체의 변화, 그리스도적으로 변화하는 내면적인 역사(役事)는 없이, 외형적인 일만 가지고는 결코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없다고 선지자들은 줄기차게 외칩니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제물을 바치게 하는 목적은 외형적인 의식을 보시자는 게 아니다. 오직 이 바치는 것을 통하여 회개와 믿음과 진실성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거기에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깊이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주전 8세기로부터 전해진 선지자들의 메시지를 대략 종합해보면, 아모스는 정의를 외쳤고, 호세아는 희생적인 사랑을 외쳤으며, 이사야는 경건의 실제를, 미가는 의와 공의를 행하여 하나님과 동행하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 가운데도 하나님의 깊은 소원을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바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아서 여기에 응답해야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나라는 어지럽고 사회도 혼란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아무도 치유의 묘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이렇다할 바른 길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격언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앞도 막히고 뒤도 막혔으면 위를 쳐다보라'---이제는 하늘을 쳐다볼 수밖에 없습니다. 내일 아침에 될 일을 예측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무서운 혼란과 파국으로 치닫는 이런 현실 속에서 오늘 우리가 들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은 여기에 있습니다. 미가서를 통하여 주시는 말씀이 여기 있습니다. 당시의 어지러운 정치․경제․문화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메시지가 이것입니다. 살 길은 여기에 있다고 가르쳐 주십니다. 근본적인 해결책은 이것뿐입니다.
먼저는 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직 공의를 행하라고 하십니다. 의를 외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의를 행하라시는 말씀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조금 더 읽어 나가노라면 10절로부터 이런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악인의 집에 오히려 불의한 재물이 있느냐. 축소시킨 가증한 에바가 있느냐. 내가 만일 부정한 저울을 썼거나 주머니에 거짓 저울추를 두었으면 깨끗하겠느냐" ---저울이라는 것은 공의(公義)의 상징입니다. 저울은 저울의 추가 정확해야 되는 것이 아닙니까? 공정한 추가 있는데도 다른 것을 몰래 주머니에 넣고 있다가 일을 볼 때마다 바꿔치기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나 오늘이나 똑같은 장면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요즈음 우리가 자주 입에 올리는 말에 '부정 식품'이라든가 '불공정한 거래' 같은 것이 있습니다. 바로 이런 물건, 이런 사건들이 공의를 떠난 행위가 된다는 말입니다. 서양 사람들의 식당을 들르다보면, 햄버거 가게에도 저울이 있는 것을 볼 수 가 있습니다. 그 저울에다 '쿼터 파운드(quarter pound)'라고 써 붙여 놓았습니다. '누구든지 의심이 나거든 고기를 이리 가져오시오. 쿼터파운드(4분의 1파운드)가 나오나 안 나오나 달아보고 드십시오'라는 이야기입니다. 매사에 이렇게 좀 떳떳하고 공정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요즘 늘 마음이 개운치 않습니다. 어딘지 꼭 손해를 본 것만 같고 사기 당한 것 같습니다. 잠언 14장 34절에 유명한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의는 나라로 영화롭게 하고 죄는 백성을 욕되게 하느니라"---올바로 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요새도 귀가 따갑도록 듣는 말에 화합이니 단결이니 일치니 총화니 하는 것이 있습니다마는, 이를테면 총화라는 것이 그냥 타협으로 되는 것입니까? 흥정을 한다고 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공의로 되는 것입니다. 이권(利權)을 중심으로 모인 마음은 이권 따라 분열하게 마련입니다. 공의가 있는 곳에만 단결이 있습니다. 너하고 나하고 타협한다고, 또 얼마씩 양보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공의롭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교통법을 잘 지키십니까? 자동차를 타고 다니다 보면 기분 나쁠 때가 여간 많은 게 아닙니다. 아무리 바빠도 신호는 꼭 지켜야 되지 않습니까? 교통신호 지키는 데 계급의 위아래가 있습니까? 교통법 앞에 모든 사람이 공정해야 하는데도, 가끔 보니까 경찰차는 아랑곳없이 지나다닙니다. 선진 외국에서는 이런 경우 고발하면 큰 벌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 일입니다. 한번은 신문을 보고 참 기분 좋게 느낀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한번 같이 생각해 보십시다. 대통령 비서가 교통법규에 걸려 '딱지'를 떼였어요. 이 기사가 신문에 크게 난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장관 비서만 되어도 '딱지' 안 떼입니다. 이것은 작은 문제가 아닙니다. 법 앞에는 만인이 공의로워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공의로워야 하고, 법 앞에 공의롭고, 자기 앞에 진실하고, 남을 평등하게 대해야 합니다.
여러분, 요즈음은 노사(勞使) 문제로도 나라안이 늘 시끄럽습니다. 혹은 임금이 적어서 그런다고도 합니다마는, 터놓고 이야기하건대 반드시 임금이 적다고 그러는 것입니까? 기분이 나빠서 그렇습니다. 사람이란 배고픈 것은 참을 수 있어도 기분이 나쁜 것은 참지 못합니다.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사정이 어려워서 다같이 배고픈 걸 좀 참자고 하는 것이라면 얼마든지 참아낼 수 있습니다. 문제는 공의가 무너진 데에 있습니다. 공평성이 없고 정정당당하지 못하기 때문에 기분 나빠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깊이 생각해야 할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山上垂訓)에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 같이 하면 배부를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리고 목마른 것 같이'란 무슨 말씀입니까?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은 기본적인 것이지요. 여러분, 배고플 때 금덩어리 가졌다고 배부릅니까? 물 마시고 싶을 때에는 꼭 물을 마셔야 됩니다. 술도 소용없고 옷도 소용없습니다. 의(義)에는 대치(代置)할 행위가 없습니다. 노우 섭스티튜트(No substitute)---어떤 것으로도 의를 대체할 수는 없습니다. 의는 반드시 의라야만 합니다. 그런고로 공의를 목마른 것같이, 주리고 목마른 것같이, 최우선적으로, 절대적으로, 가장 기본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나아갈 때에, 거기에 생명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의를 행하라---이것이 나라를 살리는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인자(仁慈)를 사랑하며(미 6:8)"라고 하십니다. '인자'란 히브리말로 '헤세드'라고 합니다. 헤세드의 의미는 보통 사랑과는 좀 다릅니다. 일반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이것은 절대적인 사랑이요 불변하는 사랑이요, 제가 표현한다면 한마디로 '큰사랑'입니다. 작은사랑이 아니고 큰사랑, 어른스러운 사랑을 뜻합니다. 창조적이요 능동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는 그 사랑입니다. 탕자의 아버지가 탕자를 그리워하고 기다리는 것 같은 그런 사랑입니다. 어머니가 적자(赤子:갓난아이)를 돌아보고 위해 주는 그런 사랑과 같은 것입니다. 오래오래 기다려 주는 것입니다. 너그럽게 너그럽게 용서하고 품어 주는 것이올시다.
여러분, 비판도 좋고 규탄도 좋습니다. 징계도 좋습니다. 거기에 사랑이 깃들어 있다면 말입니다. 사랑으로 때리는 매라면 누가 마다하겠습니까? 사랑으로 꾸짖는다면 누가 듣지 않겠습니까? 거기에 노기(怒氣)가 있고 살기(殺氣)가 있고 복수심이 있으면 안됩니다. 제가 늘 이야기합니다마는, 강아지를 보고 "아이 헤이트 유(I hate you)"---"나는 네가 밉다"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면서 쓰다듬어 주면 좋다고 꼬리를 칩니다. 그러나 "아이 러브 유(I love you!)" 하고 꽥 소리를 지르면 콱 물어 버립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사랑한다고 말했느냐 미워한다고 말했느냐가 문제되지 않습니다. 사랑의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입니다.
어떤 교육도 어떤 비판도 어떤 훈계로, 사랑으로 말미암은 것만 틀림없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오늘날의 우리의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이겠습니까? 좋은 말들이 참 많습니다. 그 숱한 말들이 가만 들어보면 다 옳아요. 옳지 않은 이야기는 없는 것 같습니다. 다 공감이 가요. 그런데 일이 왜 안 됩니까? 목적도 같다고 합니다. 똑같이 나라를 사랑한다고 그럽니다. 똑같이 정의를 위한다고 합니다. 틀린 말, 그릇된 소리는 한마디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그렇게도 문젯거리가 많습니까? 속속들이 사랑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호세아 6장 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하셨습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교육학에서는 이런 말까지 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나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을 알면 절대로 문제아가 되지 않는다'고요. 여러분, 자녀를 사랑하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사랑한다고 이것저것 하기는 하는데 진정한 사랑이 아닌 것 같거나 사랑의 전달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문제아가 생기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이 이처럼 중요합니다. 정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하나만 있다면 자살하지 않습니다. 절대로 정신병자가 되지 않습니다.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이 내 마음 깊은 속을 아무도 몰라준다고 탄식하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 하나를 얻지 못해서입니다. 이 땅의 문제는, 깊은 곳에 사랑이 없고 그 자리에 오히려 포악함과 잔인성과 권모술수만 들어앉아 있어서 비롯된 것입니다. 참된 사랑이 살아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절대로 생명의 길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제 8절 말씀은 이렇게 맺고 있습니다.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겸손'의 뜻이 무엇입니까? 오늘의 본문을 조금 더 읽어보면 9절 하반절에 "완전한 지혜는 주의 이름을 경외함이니라. 너희는 매를 순히 받고 그것을 정하는 자를 순종할지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매맞을 때 순순히 맞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관계에서 겸손이란 하나님의 징계를 순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 잘하셨습니다. 하나님, 옳으십니다" 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징계에 대하여, 그리고 그 계명과 엄한 명령에 대하여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수락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고, 달갑게 매맞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 앞에는 사과를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겸손입니다. 어느 유치원에서 선생님이 자모들에게 재미있는 설문을 냈습니다. '당신의 이 아들딸이 자라나서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하고 묻는 설문이었습니다. 그랬더니 자모들은 저마다 이런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저런 사람이 되길 바란다고 분분하게 꼽는데 한 어머니는 슬기롭게도 이렇게 써냈더랍니다. '미안합니다라고 말할 줄 아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어려운 문제가 너무도 많은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남남끼리 복잡하게 어울려 사노라면 별의별 일을 다 겪게 됩니다. 그런데 이 많은 사람들 가운데 "아이 앰 소리(I am sorry.)" 할 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미안합니다" 한마디면 되겠는데, 이 소리가 그렇게도 힘이 들어요. 이런 사람을 가리켜서 성경은 '목이 곧은 백성' 이라고 합니다. 회개가 별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미안합니다" 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인간관계에서 겸손이란 별것이 아닙니다. "미안합니다" 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사과하러 갔다가 도로 싸우고 오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사과하러 가서 "미안합니다" 했으면 거기서 끝내고 일어서야 되는데, "그러나……" 하고 앉아서는 새삼스레 자기를 합리화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또 "당신은……" 하고 처음으로 되돌아갑니다. 이러니 사과는 하나마나이고 다시금 대판 싸울 수밖에요. 여러분, 비판받는 입장이란 어디까지나 비판받는 입장일 뿐입니다. 여기에는 변명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미안합니다" 한 다음에야 상대방에서 무슨 소리를 하든 달게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겸손하고 사람 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또한 자신에 대해서도 늘 부족하다는 마음을 지녀서 듣는 자세, 배우는 자세, 온유한 자세로 임해야 합니다. 제가 인천에서 목회하던 30여 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그 때는 토요일마다 주일을 위해 목욕탕에 가곤 했습니다. 새벽 기도 마치고 공중 목욕탕으로 바로 가서 목욕을 하고 돌아오는데, 길에서 문둥병 환자를 만났습니다.
평소 우리 집에 자주 오는 분이어서 낯이 익습니다. 그가 나를 반기면서 말합니다. "저어, 사모님은 늘 뵙고 신세를 집니다마는 목사님은 오랜만에 만났으니 두둑이 좀 도와주십시오." 그래서 주머니를 뒤져보니 아무 것도 가진 게 없어요. "이것 참, 아무 것도 없네요, 어쩌지요?" 했더니, "에이, 그러시지 말고 좀 주세요, 목사님" 하면서 물러서지를 않습니다. 맹랑한 노릇입니다. 목사님의 말씀도 믿지 않는 거예요. 하는 수 없이 저는 그 사람을 좀더 가까이 오라고 한 다음, 방금 씻은 깨끗한 손으로 문둥병자의 손을 덥석 붙들어 잡았습니다. 그리고는 불쑥 소리쳤습니다. "정말 없단 말이야!"----그랬더니 이 사람이 "야아, 목사님 참말 고맙습니다. 돈을 얻은 것보다 더 기분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고 굽신거리지 않겠습니까. 못 받아도 괜찮습니다. 사랑이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겸손이 있으면 됩니다.
그 옛날, 링컨 대통령이 남북전쟁을 일으켜 놓고는 일선에 있으면서 마음써야 할 문젯거리가 많았습니다. 답답할 때마다 그는 늘 천막 속에 들어가 있으면서 기도를 했습니다. 기도할 대에는 문앞에 하얀 손수건을 걸어 놓았는데, 그것은 기도가 끝날 때까지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는 표지였습니다. 답답하고 괴로울 때,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의와 인자와 겸손을 다시 인정받는 그런 자리에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를 도우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富)를 바라지만 하나님께서는 의(義)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부자가 되고 싶어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의로운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소위 번영을 운위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겸손을 바라십니다. 우리는 명예를 탐하나 하나님께서는 진실을 주시려 하십니다. 우리는 강한 힘을 바라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랑을 주시려 하십니다. 우리는 능력과 지혜를 구하나 하나님께서는 온유와 겸손과 순종의 사람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예레미야 5장 1절에 보면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의와 인자와 겸손은 그만큼 소중한 것입니다. 이것만 있으면 나라가 굳게 서고 인격이 굳게 서고 가정이 굳게 서고 사업이 굳게 설 것입니다. 주님의 크신 은혜가 이 나라 이 민족에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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