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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큰 감격에 사는 사람(요한복음 9장 25절~38절

by 【고동엽】 2023.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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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감격에 사는 사람(요한복음 9장 25절~38절)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가지 아는 것은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저희가 가로되 그 사람이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 대답하되 내가 이미 일렀어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 당신들도 그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 저희가 욕하여 가로되 너는 그의 제자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그 사람이 대답하여 가로되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이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하나님이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창세 이후로 소경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 예수께서 저희가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가라사대 네가 인자를 믿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가로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18세기 영구의 건축가 크리스토퍼 렌(Christopher Wren)이 세인트폴 성당을 재건할 때의 일입니다. 여러 해가 걸리는 그 큰 공사를 추진해나가던 어느 날 크리스토퍼 렌은 평상복 차림으로 공사 현장에 나가보았습니다. 그는 채석장에서 돌을 다듬느라고 수고하는 한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습니까?" 이 사람은 묻는 사람 얼굴도 쳐다보지 않고 퉁명스럽게 대답합니다.
"여섯 자 길이에 석 자 폭 되는 돌을 다듬고 있소."
그는 다시 다른 사람에게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이 사람 역시 반갑지 않다는 듯이 건성으로 대답합니다. "다 입에 풀칠하기 위해서 하는 일이오. 벌써 몇 해째 이렇게 돌만 다듬고 있소." 그런데 세 번째 사람은 똑같은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는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집을 짓고 있습니다. 이 거룩한 사역에 한몫하고 있다는 것이 너무나도 감격스러워서 즐거운 마음으로 이 돌을 다듬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세 사람 중에서 어느 쪽에 속한다고 생각하십니까? 평생을 어떤 식으로 살아오셨습니까?
현대인은 지식은 있으나 확신이 없습니다. 많이 아는 것 같아도 자신 있는 일은 한가지도 없습니다. 또한 재산은 있으나 만족감이 없습니다. 권력도 있으나 성취감이 없습니다. 가진 것은 옛날에 비해서 확실히 많아졌습니다. 지나칠 정도로 많습니다. 그러나 기쁨이 없습니다. 사회적으로도 성공한 것 같은데 웬지 행복하지 않습니다. 남들은 내 처지와 내 형편을 몹시도 부러워합니다. 그러나 나 스스로는 내 형편을 저주하면서 살아갑니다. 어쩌면 모든 것으로부터 버려진 존재요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인 것처럼 그렇게 우울한 나날을 보냅니다. 기쁨도 없고 감격도 없습니다. 이것이 현대인의 치명적인 약점입니다.
감격은 깨달음에서 옵니다. 결코 소유의 문제가 아니요 사건의 문제가 아닙니다. 아무리 엄청난 사건이 있고 아무리 큰사랑을 받는다 해도 깨달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감격이 없습니다. 아무 기쁨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진리 위에 서기보다 진리가 내 옆에 있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진리를 이해하고, 진리를 말하고, 진리를 동경하면서도 그 안에 살기는 원치 않습니다.
사랑을 그리워합니다.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구하기도 하고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사랑 안에 살기를 원치 않습니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감격이 없습니다. 감격은 진리 안에 사는 것이요, 사랑 안에서 발견되는 자아인식(自我認識)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신발이 없다고 불평을 했습니다. 있는 신발도 많지만 옷 색깔과 맞지 않고 유행에 뒤떨어진다고 해서 잔뜩 짜증이 났습니다. 그래서 새 구두를 사겠다고 구둣방에 갔는데 역시 못마땅했습니다. 이 구두도 시원찮고 저 구두도 시원찮고…… 그저 신었다 벗었다 하면서 가게 안을 다 돌아보아도 마음에 쏙 드는 구두가 없었습니다.
있는 대로 짜증을 내고 불평을 하면서 다른 가게로 들어가려 하는데 뒤에서 아주 밝은 노랫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고개를 돌려보니 두 다리를 잃은 사람이 휠체어를 타고 노래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문득 생각했습니다. '누구는 두 발이 없어서 아예 신발을 신을 수조차 없는 사람도 있는데 어째서 나는 구두 하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이렇게 불평만 하고 있는 것일까.' 여러분, 불평에는 끝이 없습니다. 깨닫는 자에게는 진정으로 감격이 있습니다. 소유가 아니라 소유됨이요 찾는 것이 아니라 발견되는 것입니다. 내가 찾아서 깨닫는 것이 아니라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편지 가운데서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빌 3:8~9)" 사랑 안에 있는 자기를 발견되려 한다고 고백합니다. 감격은 절대적 사랑에 대한 바른 응답입니다. 가장 온전하고 가장 뚜렷한 구체적인 사랑의 고백입니다.
여러분이 부모 된 도리로서 자녀를 사랑합니다. 우리 한국의 부모들이 자녀에게 쏟는 사랑은 다른 나라의 부모들에 비하면 퍽 유별스러운 편입니다. 끔찍이도 마음을 쏟습니다. 자녀를 위해 수고하고 자녀를 위해 희생합니다. 그렇게 수고하고 희생하는 부모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오직 하나, 감격이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사랑한 것만큼 자녀가 기뻐하기를 바랍니다. 내가 희생한 것만큼 자녀에게 즐거움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기대와는 달리 오히려 더 많은 원망과 불평과 짜증이 돌아옵니다. 그래서 피곤한 것입니다.
사랑이 기대하는 바는 감격입니다. 상대방에게 감격이 없으면 사랑을 준 사람이 피곤합니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선물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받는 사람의 얼굴에는 전혀 기쁨이 없습니다. 나는 내 몸처럼 저를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저 사람은 무감동, 무감격입니다. 그래서 세상이 피곤해지는 것입니다.
감격으로 사는 사람에게는 순간순간이 다 축제입니다. 축제가 따로 없습니다. 감격 그대로가 축제인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런데 이 감격은 체험입니다. 지식 이전의 일이요 의지 이전의 일입니다. 아느냐 모르느냐 하는 것과는 이야기가 다릅니다. 이것은 직감입니다. 가장 기본적이고 원색적인 느낌입니다. 이러이러해서 기쁘다 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감격 그 자체가 먼저요 설명은 뒤에 붙는 것입니다. 감격에 무슨 조건이 있겠습니까? 이것은 모든 의지와 지식을 다 초월한 역사입니다.
저는 감격을 두 마디로 요약해봅니다. 하나는 '이 시간을 위해서 내가 있었다'하는 것입니다. 그 동안 고생하고 눈물겨웠던 것, 실패, 모욕당한 일-다 좋습니다. 오늘 이 시간을 위해서 그 모든 일이 있었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감격입니다. 또 하나는 '이제 죽어도 좋다'하는 마음입니다. 앞의 일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미래가 어찌되었든 상관없습니다. '이제 소원을 다 이루었으니까 이대로 끝나도 좋다'하는 감격만이 있습니다.
지난날도 이 감격으로 재해석됩니다. 앞으로의 미래도 이 감격에 따라 조명합니다. 과거와 미래가 함께 만나는 현재적 사건에 몰두합니다. 완전히 여기에 몰입합니다. 여기에는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습니다. 끊임없는 현재의 감격이 있을 뿐입니다. 현재의 만족, 이것이 바로 감격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과거와 미래를 잃어버리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이 있기 위해서'라고 해석하기에 과거도 미래도 다 얻은 것이 됩니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감격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감격을 경험해본 적이 있습니까? 단 한번이라도 이러한 순간을 가져보았다면 그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단 한번도 그러한 감격을 가져 보지 못했다면 그는 세상을 헛살았습니다. 아주 불행한 사람입니다.
오늘의 본문 가운데에 한 소경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9장 전체가 한 가지 사건에 대한 기사를 의미 깊게 다루고 있습니다. 여기 나면서부터 소경된 불쌍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제 그의 나이 마흔입니다. 그는 길거리에서 손을 내밀고 구걸하는 거지였습니다. 여러분, 상상해보십시오. 오늘도 길가에 앉아서 구걸하고 있는데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 일행이 그 앞을 지나갑니다. 웅성웅성 소리가 납니다.
"왜 이리 사람들이 많이 밀려오는가?" "예수라는 사람이 제자들과 함께 지나간다네." 이 소경은 비록 보이지는 않지만 한 무리의 사람들이 점점 더 가까이 오는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내 앞에까지 왔구나' 싶은 그때에 이상한 소리가 들립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묻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원 세상에, 이처럼 모욕적인 말이 어디 있습니까? 장님된 것도 서러운데 게다가 죄 때문이라고요? 날 때부터 장님인 것도 무슨 죄 때문이라는 말입니까? 이렇게 모욕적이고 굴욕적일 수가 없습니다. 제가 그 사람 입장이었다면 아마 한마디 쏘아붙였을 것입니다. 누구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아무 말이 없습니다. 예수님께 눈을 뜨게 해달라고 구한 것도 아니요 기도한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 친히 오셔서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십니다. 여기에 의문이 있습니다. 장님 눈도 눈입니다. 작은 티끌 하나만 들어가도 아픈데 진흙을 바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나 이 사람은 다 참습니다. 그뿐입니까? 당장 눈을 뜨게 되는 것도 아니요 실로암까지 가라는 것입니다. 거기까지는 십리길입니다. 보통사람도 한 시간 걸리는 거리이니 소경의 몸으로는 족히 네 시간 가야 할 것입니다.
지팡이에 의지하여 십리길을 어정어정 걸어가는 그 모습을 상상해보십시오. 여러분이라면 가면서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오늘 아침 일진 사나운 날이다. 이래가지고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다는 말인가' 했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끝까지 믿고 갑니다. 자기 손으로 실로암 물을 퍼 올려서 눈을 닦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눈앞이 열렸습니다!
참으로 굉장한 이야기가 아닙니까? 나면서부터 소경이었던 사람이 눈을 떴습니다. 그는 너무너무 감격했을 것입니다. 성경에는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마는 얼마나 춤을 추었겠습니까? 얼마나 소리를 질렀겠습니까? 얼마나 감격해서 날뛰었겠습니까? 그가 눈을 떴다고 덩실덩실 춤을 출 때에 구경꾼들이 모여들고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이냐, 누가 당신 눈을 뜨게 했느냐'하고 좋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시비가 생깁니다. 왜 안식일을 범했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식일은 어떻게 지켜야 합니까? 낮잠을 자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입니까? 안식일도 생산적으로 지키면 안 되는 것입니까? 예수님 말씀대로 소경이 눈을 떴으니 이것이야말로 참 훌륭한 안식일입니다. 이 기쁜 소식과 함께 모든 고통이 다 사라지고 모든 피곤이 다 풀리는 것입니다. 이 거룩하고 깨끗한 일을 왜 쓸데없는 규례 때문에 비판하고 트집잡는 것입니까? 생각해보면 얼마나 따분하고 답답한 일입니까? 왜 이 감격에 동참하지 못합니까? 왜 함께 축하하고 격려해주지 못합니까?
소경의 마음은 단순한 마음이었습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모함해서 함정에 빠뜨리려고 할 때에 그는 말합니다.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가지 아는 것은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여기에 깨끗한 신앙, 깨끗한 지식이 있습니다. 지식은 근심을 더한다고 합니다. 요새는 너무 많이 알아서 걱정입니다. 별로 필요치 않은 것을 잔뜩 알아 가지고 그것 때문에 골머리가 아픕니다. 그러나 이 소경은 깨끗한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을 보면 어떤 때에 한참 울다가도 좋은 일이 생기면 언제 울었느냐는 듯이 금새 까르르 웃습니다. 그러면 어른들은 울다가 웃다가 창피하지도 않느냐고 핀잔을 주기도 합니다마는 생각해보십시오. 슬프니까 울고 기쁘니까 웃는데 무슨 말이 그리 많습니까? 기쁜 일이 있어도 슬픈 생각 때문에 웃지 못한다면 답답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 친히 말씀하시기를 어린아이 같아야 천국에 들어간다고 하십니다. 어린아이의 마음처럼 단순해야 천국의 기쁨을 체험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단순한 지식, 단순한 마음-거기에 감격이 있습니다. 그 깨끗한 마음에 감격이 있습니다. 그 감격, 그 신앙은 경험에 기초합니다.
경험에 기초한 신앙은 결코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것은 이론이나 신학이 아닙니다. 합리주의적인 변증이 아닙니다. 다만 체험일 뿐입니다. 나를 눈뜨게 한 사람이 누군지, 그날이 안식일인지 아닌지 이 소경으로서는 알 바가 아닙니다. 다만 내 눈이 떠졌다고 하는 깨끗한 체험이 있을 뿐입니다. 그것은 또한 개인적인 체험입니다.
세상이 뭐라 하든 남이 뭐라 하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셨다, 예수님이 내 눈을 뜨게 하셨다는 개인적인 체험입니다. 이 주관적인 경험이 매우 중요합니다. 객관적인 사건이지만 그에게 닥친 체험은 지극히 주관적입니다. 여기에 감격이 있습니다. 남들 기분이 어떻든 나는 기쁜 것입니다.
가가와 도요히코(賀川豊彦)는 일본이 낳은 유명한 종교가입니다. 그의 글을 읽고 감동 받은 분들이 많으실 줄 압니다. 그는 시장 아버지와 첩이었던 기생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집에서 자라기는 했으나 첩의 아들이라고 눈칫밥을 먹어야 했습니다. 본처의 자식들로부터 온갖 멸시와 천대를 받았습니다. 얼마나 저주스러운 생이었겠습니까? 왜 나 같은 것을 낳았느냐고 부모를 원망하면서 성장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이었습니다. 담모퉁이에 우두커니 기대서서 역시 자기 생을 비관하고 있을 때에 북 치고 나팔을 불면서 지나가는 구세군 전도대를 만났습니다. 저들이 전도하면서 외칩니다.
"하나님은 누구든지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가가와 도요히코는 그들 가까이로 다가가서 물었습니다.
"기생 아들도 사랑하나요?" "아무렴요, 어떠한 죄인이라도 사랑하십니다." 그 말을 듣고 그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저도 그가 쓴 글을 여러 번 읽어보았습니다. 그의 글 가운데에는 '나는 기생 아들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이다'하는 이야기가 종종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그 확실한 의식, 그 감격이 가가와 도요히코를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게 한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십니다. 어쩌면 나만을 사랑하시는지도 모릅니다. 그러기에 실패도 있고 절망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지난날의 뼈아픈 체험도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그 사랑이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그렇게 해석할 수는 없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개인적으로 이 사랑을 바로 깨닫고 체험할 때에 감격의 사람이 됩니다.
고침 받은 소경은 그 체험 뒤에 알고자 했습니다. 17절에서는 예수님을 '선지자'라고도 하고 33절에서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람'이라고도 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라는 말도 합니다. 감격에 사는 사람은 진리를 추구합니다. 감격에 사는 사람은 만사를 긍정적으로 봅니다. 그런 사람에게 부정적인 세계는 용납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저에게는 이 장면이 몹시도 슬프게 보입니다. 소경이 눈을 뜨고 기뻐할 때에 왜 저들은 그 기쁘고 엄청난 감격에 동참하지 못합니까? 소경 스스로 간증하는 것처럼 창세 이후로 소경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한 기적은 아직까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으로 인하여 그 엄청난 기적이 베풀어졌으나 어찌하여 너희들은 예수님의 권능을 의심하고 트집잡느냐고 고침 받은 소경은 참으로 답답해합니다. 여러분, 이사람의 간증이 얼마나 소중한 것입니까?
주님 친히 말씀하십니다. 죄인 하나가 회개할 때에 하늘에서 잔치가 벌어진다고 말입니다. 잃었던 양 한 마리를 찾아 가지고 돌아와서 동네사람들을 모으고 '함께 즐기자'고 하는 것-이것이 바로 교회의 모습이 아닙니까? 이 감격을 중심으로 한 축제가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감격을 내가 보고 믿고, 나 또한 거기에 사랑으로 동참하면서 함께 기뻐할 줄 아는 그 자리에 교회 됨의 진정한 모습이 있는 것입니다. 이 축제는 길이길이 이어져야 합니다.
소경은 답답해서 말합니다. 30절을 보십시오, "이상하다"-왜 저들이 기적을 보고도 믿지 않는지 이상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시비에 걸리고 마침내는 출교(黜敎)를 당하게 됩니다.
저들의 법을 보면 출교를 당한 사람은 누가 때려죽여도 살인죄가 되지 않습니다. 그는 출교를 당했습니다. 감격에 사는 이 사람은 외롭고 고독했습니다. 부모도 그의 감격을 이해하지 못했고 돕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저를 만나 위로하시고 당신 자신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사죄의 감격으로 살아갑니다. 주께서 내 죄를 사하셨다, 십자가의 공로로 내 죄가 사해졌다는 감격과 하나님의 자녀 된 감격으로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셨다, 나를 쓰신다 하는 그 은혜와 저 앞에 있는 약속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고 그 감격에 오늘을 삽니다.
그래서 스데반은 죽으면서도 그 얼굴이 천사와 같았습니다.
다윗은 그 감격으로 법궤 앞에서 춤을 추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의 부르심으로 죄인이 사도 되었다는 것 때문에 일생을 바쳤습니다.
삭개오는 그 감격 때문에 자기 재산을 가난한 자들에게 아낌없이 나누어주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그 감격 때문에 무덤을 떠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진 여인도 예수님께서 나를 구속하였다는 감격 때문에 자기 집에다가 비석을 세워놓고 오가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면서 일생을 마쳤습니다.
감격 속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순교도 영광으로, 특권으로 받아들입니다. 은혜에 감격한 생은 매일매일이 축제입니다. 이 축제 안에 화해가 있고 용서가 있습니다. 이 축제 안에 은혜가 있고 능력이 있습니다. 이 능력으로 오늘도 승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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