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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강이 있을지어다(누가복음 24:36-43)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 저희가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靈)으로 생각하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두려워하여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저희가 너무 기쁘므로 오히려 믿지 못하고 기이히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매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모든 생물은 평안을 원합니다. 사람 역시 누구나 평안을 원하고 있습니다. 소극적으로는 '안정'이라고 말하고 적극적으로는 '평안'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적인 용어로는 '평강' 혹은 '평화'라고 말합니다. 「신곡(神曲)」을 쓴 시인 단테는 '평화란 모든 종류의 화살이 겨냥하는 표적'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모두가 평안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19장 41,42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감람산 언덕 위에서 예루살렘을 내려다보시고 우시며 탄식하십니다. 여기에 우리의 슬픔이 있습니다. 평화를 갈구하면서도 평화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행복을 위하여 새벽부터 밤까지 뛰면서도 아직도 행복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렇게 평화를 갈구하고 평안을 원하면서도 평안의 길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평안의 길을 모를 뿐만 아니라 그 길이 숨겨져 있다고 말입니다. 여기에 큰 문제가 있습니다. 현실이 문제가 아니라 이상에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평안을 지향하는데, 평안이라는 이상 그 자체에 병리적인 문제가 있다는 적입니다. 목적이 잘못되었고, 이상이 잘못되었고, 소원 그 자체가 이미 잘못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평안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아프리카의 어느 추장과 영국에서 온 선교사가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선교사가 "바야흐로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유럽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서로 죽고 죽이고 있습니다"라고 말하자 추장이 이렇게 묻습니다. "몇 사람이나 죽이나요?" 선교사는 할말이 없었습니다. "열 명 죽이나요? 백 명 죽이나요?" "아닙니다." "그러면 천 명 정도 죽이나요?" "역시 아닙니다. 수천 수만 명을 죽입니다." 그러자 식인종 추장은 고개를 갸우뚱거립니다. "백인들은 사람고기도 안 먹는다면서 뭣하러 그렇게 많이 죽입니까?" 그렇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마르크스는 '세계의 문제는 평안'이라고 말하였습니다. 평안하기 위해서는 경제문제가 해결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동물은 분명히 배만 부르면 평안합니다. 그렇게 으르렁대고 약육강식(弱肉强食)의 무서운 싸움을 벌이지만, 배부른 동물은 말썽을 부리는 일이 없습니다. 그 무서운 사자도 배만 채우고나면 바로 코앞에서 토끼가 뛰어놀아도 해치는 법이 없습니다. 문제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아하, 경제문제만 해결이 된다면, 모두가 배부르게만 살 수 있으면 되겠구나. 누구에게나 공정하게 분배되도록만 한다면 세상에는 평안이 올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착각이었습니다. 큰 실수였습니다. 사람은 이러한 점에서 동물만도 못합니다. 동물은 저가 먹을 것만 먹은 다음에는 더는 욕심을 부리지 않는 반면에, 사람은 가지고도 또 가지려 합니다. 다 먹을 수 없을 만큼, 다 소유할 수도 없을 만큼 가지고 있는데도 더 가지려고 합니다. 그렇게 많이 가지고 있을 필요도 없는데 마냥 더 가지려고 하면서 다른 많은 사람들을 괴롭힙니다. 이 때문에 세상에는 평화가 없는 것입니다. 깊이 생각하여야 할 것입니다.
평화에 관한 일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죄와, 회개하지 아니한 죄와, 숨은 죄와, 하늘을 모르고 치솟는 교만으로 눈이 어두워져서 평화에 관한 일이 그만 숨겨지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심판입니다. 평화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기쁨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바른 길에 설 수 없도록 그렇게 심판받은 생명이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돈만 있으면 된다고, 물질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내 아들도 내 손자도 돈만 있으면 평생 평안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얼마나 잘못된 생각입니까? 어리석은 부자와 같은 미련함입니다.
또한 지극히 개인주의적으로, 이기적으로 기쁨을 얻고자 하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기쁨은 더불어 얻어야 합니다. 더불어 행복할 줄 모르는 사람은 영원히 행복하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상한 취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못 가진 것을 자기가 꼭 가져야만 좋아하고, 내가 가진 것을 다른 사람이 가지면 배아파서 못 견뎌합니다. 특히 여자 분들 중에는 애써 좋은 옷을 한벌 해 입고 나갔다가, 어쩌다 다른 사람이 똑같은 옷 입은 것을 보면 그 비싼 옷을 내버리고 맙니다. 기분 나빠서 못 입겠다고 합니다.
이런 종류의 사람은 영원히 불행합니다. 구제불능입니다. 오히려 내가 입은 것을 다른 사람도 같이 입고 내가 가진 것을 다른 사람도 가졌다면 더 좋아하고 함께 기뻐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남이 못가진 것만을 좋아하고, 내가 성공하는 것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남이 망하는 것을 즐기고, 남이 넘어지는 것을 보고 좋아하는, 그런 성향의 인간들 때문에 세상이 시끄러운 것입니다. 더불어 행복을 누릴 줄 알고 함께 즐길 줄 아는 것----이를 모르고 산다면 사람일 수 없습니다. 나아가 '현재'의 것만을 즐기려고 할 때에 행복은 없습니다. 미래를 보장받을 수 없는 현재란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누구도 그 평안과 기쁨을 즐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도덕적, 윤리적, 논리적, 정신적인 요소가 다함께 수반되어야 합니다.
성경에서 '평강'이라고 말씀하는 것은 히브리말로 '살롬' 헬라말로는 '에이레네'라고 합니다. 영어로는 'peace'가 됩니다. 이것은 정신적 기쁨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건강, 번영, 행복, 자유, 정의, 화목, 승리--이 모든 것을 통합한 복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일반적인 의미의 '평강'은 이기적이요 물질적인 데 반하여 성경이 말씀하는 '평강'의 특징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의 '평강'은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 즉 종교성이 우선이고 기초가 됩니다. 그리고 도덕적 화평이 그 다음의 내용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말로 번역할 때에는 '평강'이라고도 하지만 '화평'이라고 할 때가 더 많습니다. 왜냐하면 이 말은 하나님과의 관계, 물질과의 관계, 자기와의 관계로써 설명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화평, 이웃과의 화목이라는 관계 안에서 물질과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도 화평의 관계를 이루어갑니다. 이러한 관계성을 가리켜 '복' 혹은 '평강'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십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요 14:27)." 성경에는 평안이라고 번역하였지만 그실 평강입니다. "나의 평강을 너희에게 주노라"--예수님께서 스스로 평강에 계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생각하시는 것은 근본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르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남을 섬기시고 봉사하시고 참으로 비참하게 사시다가 역시나 비참하게 돌아가셨다'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게 생각한다면 답답한 노릇입니다. 신령한 눈으로 바로 이해하고 본다면, 예수님께서는 행복하셨고, 예수님께서는 기쁘셨고, 예수님께서는 영광에 사셨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야말로 가장 행복하였노라고 볼 수 있는 시각이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를 가장 크고 놀라운 눈으로 이해할 수 있을 때에 비로소 평강의 의미와 그 은혜를 함께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평강의 개념과 우리가 가진 평강의 개념이 다릅니다. 그렇다고 이제 우리는 주님과는 관계없는 사람이요, 주님의 평강을 맛볼 수도 깨달을 수도 없을 것이라고 여길 것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모름지기 주님께서 생각하시는 의미의 평강을 바르게 이해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가졌던 평안의 개념이 주님께서 생각하시고 친히 누리셨던 평안의 개념으로 바꾸어져야 합니다. 곧 행복의 개념에 대한 개혁이 있어야 하고 행복 의식에 대한 혁명이 와야 합니다.
여러분, 무엇을 행복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받는 것입니까, 주는 것입니까? 적어도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제자라면 받는 기쁨보다는 주는 기쁨이 크고 받는 복보다는 주는 복을 더 큰복으로 알고, 섬김 받기보다는 섬기는 기쁨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주님의 마음을 이해할 길이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러한 평안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받는 기쁨이 아니요, 섬김받는 기쁨이 아니요, 웃사람 되는 기쁨이 아니요, 부려먹는 기쁨이 아니요, 놀고먹는 기쁨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가만히 보면 사람들은 너무도 평안하기만을 바랍니다. 집도 좀더 평안하고 몸도 생활도 다 평안하기만을 바랍니다. 그래서 요새사람들, 전부 운동 부족으로 병들어 있습니다. 상당수의 질병이 전부 운동 부족에서 연유하는 것이라고 의사들도 말합니다.
어떤 책을 읽어보니, 전화기도 높은 곳에 놓아두라고 하더군요. 전화 을 때마다 일어나서 받게끔 말입니다. 그런데 머리맡에 두고 누워서 전화를 받습니다. 그렇게 평안하시다가 마침내는 제명도 다 못 채우고 영영 푹 누워지내게 됩니다. 못 일어나게 됩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자동차를 타는 것만 해도 그렇습니다.
제가 여러 해째 자동차를 손수 운전해오고 있습니다만, 가끔 장로님들이 저더러 "이젠 손수 운전 그만하시고 운전기사를 두십시다"라고 합니다. 다 저를 위해서 말씀하신 줄은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그때마다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닙니다. 운전하면서 누리는 이 즐거움을 왜 빼앗으려 하십니까?" 언젠가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보니까 장수 비결에 운전하는 것이 들어 있습디다.
앞에서 운전하는 사람과 뒤에 앉아서 졸고 있는 사람 중에서 뒷사람이 먼저 죽는다고 합니다. 기억해 둘만한 것입니다. 또 저는 개인적으로 뒷좌석에 앉아 있을 체질이 못됩니다. 이상하게도 뒤에 앉아 있으면 30분도 못되어 멀미가 나서 못 견딥니다. 그런데 앞에서 떡 운전대를 잡고 있으면 5시간을 달려도 끄떡없습니다. 얼마 전에도 4부 예배가 끝난 3시 10분에 차를 몰고 대구에 가서 저녁예배 설교를 하였습니다. 손수 차를 몰고 갑니다. 몇 년 전에는 목포까지 가서 저녁예배 설교를 한 적도 있습니다. 그런 것은 얼마든지 할 수 있는데 뒷전에 앉아 있는 것은 잘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일을 하십시오. 새벽부터 밤까지 뛰십시오. 게을러빠지니까 종국에는 병원으로 가고 맙니다. 잊지 마십시오. 부지런히 움직이세요. 모름지기 베푸는 기쁨, 일하는 기쁨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기쁨이라는 것을 앉아서 놀고먹는 기쁨으로 잘못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도 불행하고 주위의 많은 사람들도 불행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행복의 개념, 그 뜻 자체에 혁명이 와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합니다. '샬롬' 하심입니다. 여기에 아주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이 말씀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하신 명령이요 인사요 축복의 말씀입니다. 이것은 흔하게 말하는 축복이 아닙니다. '이대로 될지어다.
평강이 있을지어다'하고 복을 빌고 계심입니다. 이러한 평강의 반대되는 것은 의심과 두려움입니다. 제자들은 평강이 없었기에 고통과 번민 속에 빠져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평강이 있을지어다.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라고 그 원인을 자상히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평안이 없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배고파서 평안이 없는 것이 아니라 두려워서 평안이 없는 것입니다. 두려움이 있으면 평안이 없습니다. 많은 것을 가졌다 하더라도 마음은 평안하지 않습니다. 양심이 편치 않습니다. 하나님의 심판 앞에 평안치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좋은 침대에 누워도 잠이 오지 않고, 좋은 음식을 먹어도 소화가 되지 않습니다. 평안이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두려움이라는 것이 없어야 합니다. 두려움 중에서 으뜸가는 두려움이 무엇입니까? 바로 죽음입니다. 죽음의 공포에 쫓기는 사람에게는 평안이 없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평안할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참된 평안입니다.
어떤 외과의사에게 수술 받기를 원하는 어느 환자가 찾아왔습니다. 수술 받은 환자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퇴원한 뒤에 얼마 있다가 또 찾아와서 고맙다고 인사를 합니다. 의사 선생님은 인사 받으면서 한편으로 마음이 아플 때가 많다고 합니다. 자기가 알기로는 분명히 3년 뒤에는 재발해서 다시 병원으로 돌아와 영안실에서야 끝날 병인데, 그것도 모른 채 찾아와서 연신 고맙다고 인사를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치료하느라 무던히도 애를 쓰지만 그때마다 잠깐 생명을 연장시키는 것일 뿐, 종당에는 영안실에서 끝나고 마는 것입니다.
죽음의 문제에 대하여 근본적으로 해결을 얻기 전에는 아무도 평안할 수 없습니다. 오직 부활하신 주님만이 말씀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죽음 때문에 두려워하느냐?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를 죽인 저들이 너희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일까봐 그러하냐? 나는 부활이다. 그러므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몰라서 골방에 앉아 벌벌 떨고 있습니다. 미래가 불확실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셔서, 너희는 장차 나와 같이 될 것이라고 확실한 미래를 보증하시면서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저 제자들이 지닌 또 하나의 두려움은 고독입니다. '예수님께서 여기 함께 계시지 않는다. 우리가 예수님을 버렸으니 당신께서도 우리를 버리실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 우리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도망갔으니 예수님께서 우리를 버리시는 것은 마땅하다'해서 두려워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저들 가운데 오셔서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6장 33절에 보면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십니다. 마태복음 28장20절에도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평강이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 하시는 말씀입니다.
또한 저들은 의심에 사무쳤습니다. 부활의 약속을 믿지 못하였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말을 직접 듣고도 믿지 못했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났다고는 하지만 자기들은 못 믿겠다는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예수님께서 비참하게 돌아가시는 모습을 멀리서나마 지켜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죽은 사람이 부활할 리가 없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더우기 믿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인간의 지식이나 상식, 인간의 경험의 한계를 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부활은 인간의 상식이나 경험으로써는 전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얄팍한 인간의 지식의 한계에 매여 부활의 약속을 망각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의심 많은 도마에게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 20:27)"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믿음에 무슨 조건이나 이유가 있는 줄로 알고 있습니까? 믿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이해됩니다. 어떤 이론이나 철학으로 부활을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그 역사적 사건을 믿음으로써 이해할 수 있고, 그 증거를 받아들일 때에만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그러한 사람과 함께 계십니다.
일본의 기독교문학가 엔또 슈샤쿠의 작품에 「침묵」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일본에서 기독교가 핍박받을 때의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한 소설입니다. 줄거리는 대략 이러합니다. 천주교 신자인 농부 두 사람이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자 합니다. 예수 믿는 신앙을 절대 버릴 수 없다는 것 때문에 그만 십자가에 죽게 됩니다. 십자가 형틀에 두 농부의 몸을 비끄러매어서 밀물이 들어오는 바닷가에 박아놓았습니다. 물이 점점 불어나면 급기야 죽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나서 예수님을 부인하라고 협박합니다. 그러나 농부들은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끝까지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이제 물이 점점 허리에서 어깨로, 목으로 자꾸 올라옵니다. 그것을 지켜보던 네덜란드 신부가 너무너무 괴로워서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하나님이여, 저들을 도와주시옵소서. 능력을 나타내주시옵소서. 어찌하여 침묵하고만 계십니까?"하고 울부짖습니다. 신부의 귓가에 하늘로부터 음성이 들려옵니다. "나는 침묵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저들과 고통을 함께 하고 있느니라."
그렇습니다. 나의 고난 속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부활의 예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초대교회 사람들이 그렇듯 용기의 사람이 되고 확신의 사람이 되고 엄청난 증인이 되고 그에 따른 도덕적 생활까지 할 수 있었던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현존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지금도 항상 나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체험하고 의식하였기 때문에 즐거운 마음으로 주님과 함께 죽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참 평화는 부활신앙의 기초입니다 오직 부활신앙에만 참 신앙이 자리합니다. 그러할 때에 기쁨도 평안도 위로도 얻습니다.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믿음이 있었기에 쓸모 없는 사람들이 쓸모 있는 사람이 되고, 비겁한 사람들이 용기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 묻습니다. 참 평안은 어디에 있습니까? 참 평안은 우리가 획득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우리들 안에 찾아오셔서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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