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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꾼의 사명(에스겔 3장 17절~21절)

by 【고동엽】 2023.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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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꾼의 사명(에스겔 3장 17절~21절)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숫군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케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 네가 악인을 깨우치되 그가 그 악한 마음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는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존하리라. 또 의인이 그 의에서 돌이켜 악을 행할 때에는 이미 행한 그 의는 기억할 바 아니라. 내가 그 앞에 거치는 것을 두면 그가 죽을지니 이는 네가 그를 깨우치지 않음이라. 그가 그 죄 중에서 죽으려니와 그 피값은 내가 네 손에 서 찾으리라. 그러나 네가 의인을 깨우쳐 범죄치 않게 하므로 그가 범죄치 아니하면 정녕 살리니 이는 깨우침 을 받음이며 너도 네 영혼을 보존하리라.




파수꾼이란 주로 밤에 불침번을 서면서 사람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일명 파수병이라고도 하며, 요즘은 보초병이라고도 부릅니다. 그의 지위란 높은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군인 중에 제일 계급이 낮은 수준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지식이 많거나 인격이 훌륭한 것도 아닙니다. 다만 그가 맡은 책임이 막중하기에 중요한 직책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저는 보초병에 대한 끔찍한 추억이 있습니다. 6․25당시 최일선에서 근무할 때, 어느 날 새벽에 밖으로 나가보니 보초병의 머리가 없어진 것입니다.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더욱 놀란 것은 그 곳에 있던 수백 명의 군인들이 그 밤에 무사했다는 것입니다. 정말 다시 생각해도 섬찍하고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파수꾼의 책임은 곧 생명의 문제입니다. 이 한 사람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을 수도 있고 편안하게 살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파수꾼의 절대 조건은 첫째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맑은 정신으로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둘째는 "현명한 통찰력이 있어야 합니다. 작은 소리에도 민감하고 상황에 대한 판단이 빠르고 정확해야 합니다. 허깨비를 보고 지레 겁먹어도 안 되지만 안일한 판단은 화를 초래할 수도 있으므로 현명한 판단력이 있어야 합니다. 셋째는 "건강해야 합니다." 정신이 희미하여 오락가락 한다든지 하룻밤을 서 있을 정도의 육체적 건강이 없는 사람은 보초를 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몸도 마음도 건강하여 맑은 정신으로 그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넷째는 "투철한 사명감이 있어야 합니다." 비록 지위는 말단일지라도 오늘밤에 주어진 그 사명은 어느 사단장 못지 않게 귀중한 사명임을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나 하나로 해서 전체가 살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다는 사명감이 확실해야 파수병으로서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예언자를 파수꾼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적으로는 예수님의 제자가 된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파수꾼이라 부를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 모두가 파수꾼과 같은 귀한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파수꾼과 같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다음 세 가지의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첫째, 복음은 들음에서 난다는 것입니다.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가르치라"(겔 3:17). 우선 말씀을 듣고, 그리고 하나님을 대신하여 다른 사람을 가르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파수꾼은 다른 사람들이 듣지 못하는 음성을 먼저 듣고,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먼저 보는 자라야 합니다. 그리고서는 듣지 못하는 자에게 듣게 하고 아직도 깨닫지 못하는 자에게 깨닫게 해서 어리석은 자들을 깨우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파수꾼의 사명입니다. 복음은 반드시 들음에서 납니다. 자기 스스로 구원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이 자기 스스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잡아 올려서 구출할 수 있겠습니까? 구원은 밖으로부터 옵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인간 가운데 오셔서 사랑의 손길을 내밀 때, 그 사랑에 대한 바른 응답이 있어야 구원의 역사는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즉 객관적인 진리와의 만남과 이에 대한 진실한 응답에서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씨뿌리는 비유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아무리 좋은 옥토라도 땅이 혼자서 곡식을 낼 수는 없습니다. 밖에서 씨를 뿌려야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늘 장애자들 중에서 청각장애자가 가장 안타깝게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진리를 들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세상에는 진리를 바로 듣지 못해서 어리석어지고, 고집스러운 불쌍한 심령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자기들 나름으로는 무엇인가 안다고 하지만 아직 몰라서 그렇습니다. 좀더 알면 겸손하고 온순해집니다. 아는 중에 더 깨달으면 온유해집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들어야 할 것을 듣지 못하고 깨달을 것을 깨닫지 못하는 많은 심령이 우리와 함께 있음을 명심해야겠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실 때에 일곱 마디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일명 '가상칠언(架上七言)'이라고도 합니다. 여기에서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저들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옵니다"라고 무지함에 대한 용서를 간구하셨습니다. 저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죄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변에서도 답답할 정도로 모르기 때문에 저지르는 잘못이 많습니다. 몰라서 스스로 자기 생명을 멸망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선교란 그런 의미에서 모르는 자를 알게 하고 깨우치게 하는 것입니다. 사실 알고 보면 누가 믿지 않겠습니까? 몰라서 죄가 되고, 몰라서 파멸하는 것입니다. 죄 중에 가장 무서운 죄가 무식의 죄입니다. 그렇다면 먼저 깨달은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현대인에게 있어서 범하기 쉬운 세 가지 죄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가 "배우지 않는 죄"입니다. 도대체 누군가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기성 세대는 젊은 세대로부터 배워야 하고, 젊은 세대는 기성 세대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그런데 서로 배우지 않겠다고 등을 돌리고 있는 것이 오늘 우리들의 현실입니다. 둘째는 "배운 바를 실천하지 않는 죄"입니다. 말할 때 보면, 모두가 선생으로 이론이 정연하나 실천이 없습니다. 아는 바에 비해서 행하는 것이 그렇게 부족할 수가 없습니다. 셋째는 "가르치지 않는 죄"입니다. 뜨거운 마음으로 꼭 가르쳐야 하겠다는 열정이 없단 말입니다. 오래 전에 읽은 논문 중에서 "부모를 어떻게 가르칠까"하는 특이한 제목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부모님도 가르쳐 드려야 합니다. 옛날 어른이시므로 오늘날의 문화권 안에서 필요한 것은 알려드려야 되지 않겠습니까? 걸핏하면 주책 부린다고 제외시키지 마시고 바로 알려드려서 무식하지 않도록 효도해야 합니다. 어느 노모가 평생을 우상만 섬기고 절에 열심히 다녔습니다. 그 자녀들은 교회에 나오면서 어머님께 교회에 다니자는 권유를 못했다고 합니다. 너무나 열심히 불공을 드리시니 노하실 것을 염려하여 아예 전도는 한마디도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어머님의 마음이 변했습니다. 아무래도 자식들이 하는 것을 따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교회에 나가기로 결심했다는 것입니다. 자식들의 결정이 당신보다 지혜롭다고 생각되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모르는 이에게는 가르쳐야 하며, 이것이 전도입니다.
둘째, 공생공존(共生共存)한다는 교훈입니다.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케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겔 3 : 18)----피값을 나의 손에서 찾으신다는 충격적인 말씀입니다. 여기 불쌍한 한 영혼이 있습니다. 전하는 자가 없어 복음을 듣지 못했고, 듣지 못했으니 믿을 수가 없어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구원받지 못한 이 책임을 먼저 복음을 받은 우리들에게 물으시겠다는 것입니다.
"피값을 네 몸에서 찾으리라"----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혼자서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천당에는 아예 혼자 갈 생각을 하지 말라는 농담도 있지만 사실입니다.
열왕기하 7장에 보면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북쪽 수도인 사마리아 성이 아람 왕 벤하닷에게 포위되었습니다. 아람 군인들이 작전상 물과 식량을 차단하고 사마리아 성을 포위하여 성안에 있는 사람들은 굶어죽게 되었습니다. 성 밖에서는 진을 치고 그들이 죽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이 장면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침내는 배고픔이 극에 이르러, 자기 아이들을 잡아먹기까지 했다는 것입니다.
성문 어귀에는 문둥병 환자 네 사람이 있었는데 그들은 평소에 성안의 사람들이 던져주는 식량을 먹고살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성이 차단되어 먹을 것을 갖다주는 사람이 없자, 그들도 역시 굶어죽게 되었던 것입니다. 문둥병 환자들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게 되자, 이대로 굶어죽는 것보다는 포위하고 있는 아람 군의 진지에 들어가서 사정을 한번 해 보자는 지혜로운 생각을 했습니다. 어차피 죽을 것이라면 아람 군이나 이스라엘 군을 가릴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네 사람이 용기를 내어 밤중에 내려가 보니, 뜻밖에도 아람 군은 모조리 철수하고 그 자리에 많은 식량과 금은보화가 남겨져 있었습니다. 웬일입니까? 하나님의 능력으로 아람 군사들의 귀에 많은 이스라엘 군사들이 쳐들어오는 소리가 들리게 되어 그들은 혼비백산하여 황혼에 다 도망을 간 것입니다. 네 문둥이는 오랜만에 포식을 했고, 금은보화를 감추었습니다. 그리고 서로 말하기를 "우리의 소위가 선치 못하도다. 오늘날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어늘 우리가 잠잠하고 있도다. 만일 밝은 아침까지 기다리면 벌이 우리에게 미칠지니 이제 떠나 왕궁에 가서 고하자"(왕하 7:9)고 의논하여 실천에 옮깁니다.
만일 밝은 아침까지 우리끼리만 잘 먹고 편히 지낸다면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실 것이라고 판단하고 곧 길을 재촉하여 복된 소식을 전합니다. 나만 편하고 나만 구원받으면 무사할 리가 없다는 지혜로움이 그들을 살렸습니다. 혼자서는 살수가 없습니다.
에스더 4:13이하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습니다. 수산 도성에 사는 이스라엘 백성이 큰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그 왕궁에는 에스더라는 이스라엘 여인이 왕후로 있었습니다. 왕후의 사촌오빠인 모르드개는 지금 우리 민족이 큰 난관에 부딪혀 며칠 후에는 다 죽게 되었다고 왕후에게 전하면서 "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면하리라 생각지 말라.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비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에 4:13-14)고 무서운 경고를 합니다. 왕후인 사촌 여동생에게 너만 홀로 면하리라고 생각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 혼자만 편하고, 나 혼자만 잘살겠다는 이기적인 생각은 버려야겠습니다. 이런 개인주의가 바로 오늘의 문제입니다. 사회도 국가도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국가는 생각하지 않고 자기 이익만 취해서 어쩌자는 것입니까? 돈 있는 자라고 혼자 살 수 있습니까? 노동자를 죽이면서 기업주만 살 수 있느냐 말입니다. 또한 기업주가 다 죽어 가는데 근로자가 잘 살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저를 살리고야 나도 살고 우리 모두가 함께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혼자서는 절대로 살 수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구원받지 못한 형제의 피값을 우리 손에서 찾으시겠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죽어 가는 사람을 보고도 묵인하면, 그 죄는 간접 살인과 같습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보고 배우지 않습니까? 불한당에게 맞은 사람이 지금 당장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도와주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어려운 형편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보고도 외면하고 지나간다면, 바로 그를 죽이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나만 편하고 잘되겠다고 하늘 아래서 도망할 수 있습니까? 저들의 운명을 내가 책임질 것은 아닙니다만 그 무지함은 맡아야 합니다. 기회는 공평하게 부여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북한을 생각할 때마다 늘 마음이 아픕니다. 북한을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눈물이 나옵니다. 복음을 듣고서도 믿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의 책임이 아니지만, 그들은 들을 기회가 전혀 없습니다. 저는 북한에서 귀순한 사람들을 만날 때마가 물어 봅니다. 당신이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구원이다, 예수다 하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느냐고 말입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듣지 못했다고 말하면서, 언젠가 한 분이 말하기를, 예수귀신을 말하는 자가 있어서 잡혀갔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기가 막힌 일입니까? 그렇게도 많은 방송이 울려 퍼지고 온 세계에 퍼져 있는 복음이, 저 북녘 땅에는 일시적으로도 전파될 수 없으니 안타까운 심정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듣지 못했으니 어찌 구원이 있겠습니까? 그들이 복음을 듣지 못한 책임을 누가 질 것입니까? 물론 남한의 자유로움 속에서도 아직도 복음을 듣지 못해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처음 교회에 나오신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렇게 좋은 예수를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아 몰랐다고 말하는 분들이 더러 있습니다. 주변에 예수 믿는 이웃이나 형제들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권유하는 자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3:13에 보면 "내가 그 집을 영영토록 심판하겠다고 그에게 이른 것은 그의 아는 죄악을 인함이니, 이는 그가 자기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 하였음이니라"고 엘리 제사장에게 심판을 내리시고 있습니다. 제사장 엘리는 자기 아들이 잘못된 길을 가는 것을 보고도 금하지 않은 죄로 완전히 망하고 말았습니다. 나 혼자서는 살 수 없음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저를 살리고야 나도 살 수 있음을 명심해서, 내 힘이 미치는 곳마다 복음을 열심히 전해야겠습니다.
셋째, 나의 책임만은 다해야 내 생명이 보존됩니다. "네가 악인을 깨우치되 그가 그 악한 마음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는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존하리라"(겔 3:19). 내가 복음을 전한 후에도 그가 믿지 않는 것은 내 책임이 아닙니다. 믿지 않는 그는 그의 죄악으로 망할 것이나 복음을 전한 나는 책임을 다했으므로 생명을 보존한다는 귀한 말씀입니다. 내가 할 본분을 다 하고서야 살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2장으로 돌아가서 보면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라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 가운데 선지자 있은 줄은 알지니라"(겔 2:5), 그리고 7절에서 "그들은 심히 패역한 자라 듣든지 아니 듣든지 너는 내 말로 고할지어다"(겔 2:7)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들 스스로가 저 사람은 믿을 사람이다, 아니다 라고 심판하지 말고 전하기만 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편견으로 미리 판단해서 아예 전하지도 않는 실수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성도들 중에서 남편은 믿지 않는데 아내만 교회에 나오는 분이 더러 있습니다. 저는 이런 가정을 심방할 때마다 남편에게 전도했느냐고 여쭈어 봅니다. 대부분의 부인들이 쉽게 대답하기를 "목사님, 그 사람은 제가 잘 압니다. 전해도 소용없는 사람이예요"라고 딱잘라 말합니다. 미리 포기하고 전할 생각조차 안 하고 있는 것입니다. 듣든지 아니 듣든지 부지런히 전해야 합니다. 방탕한 아들이라고 포기하겠습니까? 열심히 전해야 합니다. 평생을 괴롭힌 아들도 죽어 가는 마지막 순간에는 어머님의 소원으로 돌아와 회개하고 숨을 거두는 예가 허다히 있습니다. 결국은 돌아오고야 맙니다. 듣든지 아니 듣든지 내 책임은 내가 다해야 합니다. 역효과의 공포에서 해방되어야 합니다. 내가 부족하고 허물이 많아 나의 가책 때문에 전할 수 없다고 말하지 맙시다. 또한 안다 모른다 핑계하지 맙시다. 내가 해야 할 부분이 있는 것입니다. 그가 들을 것이다, 아니다에 돌리지 말고 내게 주어진 임무는 반드시 다해야 합니다.
불신은 죄입니다. 이기심도 죄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 만연되어진 개인주의가 큰 문제입니다. 저를 살리고야 내가 살 수 있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함께 더불어 살아야 합니다. 혹시 여러분들의 믿음이 약해지고 있다고 느끼십니까?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일하지 않는 사람은 마음까지 황폐해져 문제만 일으키게 됩니다. 오늘이라도 당장 입을 열어 내가 미치는 모든 곳에 복음을 전하십시다. 전도하는 그 순간에 나의 믿음은 살아나고 성장하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소속되어 있는 그 곳이 나의 선교지이며 내게 맡겨진 사명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파수꾼의 사명을 바로 감당하게 될 때에 내가 저를 살리고 동시에 나도 산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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