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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을 주노라 (요한복음 14장 25절~31절)

by 【고동엽】 2023.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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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을 주노라 (요한복음 14장 25절~31절)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면 나의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니라. 이제 일이 이루기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이 이룰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이후에는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하지 아니하리니 이 세상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저는 내게 계할 것이 없으니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의 명하신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 하시니라.




한 초등학교 어린이가 글짓기 시간에 쓴 글 가운데 이러한 구절이 있었다고 합니다. '살고 싶지 않습니다' ---- 이 어린이는 부잣집 딸이었습니다. 고아가 아닙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엄연히 있습니다마는 불화로 늘 티격태격합니다. 그날 아침에도 아버지 어머니가 싸우는 바람에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한 채 울면서 등교했습니다. 어린이는 번번이 이러한 일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 마음속에 평화가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순진무구한 어린이의 글 속에 이토록 충격적인 글귀가 씌어 있었던 것입니다.
모름지기 마음에는 평화가 있어야 합니다. 마음의 평안처럼 중요한 것이 또 없습니다. 심리학자들에 따르면 마음의 평안에는 다섯 가지의 적이 있다고 합니다. 다섯 가지의 적이 있어서 마음의 평안을 앗아간다는 말입니다. 첫째의 적은 탐욕(貪慾)입니다. 즉 소유욕입니다. 모든 것을 다 가져야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가령 우리가 산에 올랐다고 칩시다. 멀리 내려다보이는 나지막한 야산과 들판의 경치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참 아름답구나' ---- 이렇게 느끼는 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그런데 '저 들이 내 것이었으면……' '내 것으로 만들어야지'하고 생각해서 문제가 됩니다.
다 가질 수도 없지만, 설혹 가졌다 해도 영영히 내 것 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탐욕이 마음의 평안을 앗아갑니다. 둘째는 야욕(野慾)입니다. 성취욕이라고도 하겠습니다. '나는 그렇게 되고야 말겠다' '그것을 꼭 가지고야 말겠다' ---- 지나친 욕심이 마음의 평안을 깨뜨립니다. 우리가 원하는 대로 다 될 수는 없습니다. 원하는 만큼 가질 수도 없습니다. 단지 우리는 크고 넓은 세상의 한 모퉁이에서 무엇인가를 소리 없이 하다가 가는 미미한 존재에 불과합니다. 셋째는 질투입니다. 내가 넉넉함에도 불구하고 남을 질투하고 시기합니다. 내가 못살아서가 아니라 남이 나보다 잘살아서 불만이 많습니다. 질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영원히 평안할 수 없습니다. 넷째는 분노입니다. 자기 마음 다스릴 줄 몰라서 후회가 많습니다. 하지 않아야 될 말을 하고 한 혈기를 부리고는 금방 후회하느라고 괴롭습니다. 분노에 사는 사람에게는 평안이 없습니다. 다섯째는 교만입니다. 진실하지 못합니다. 자기의 자기 됨을 겸손하게 인정하지 못하고 언제나 허황된 교만에 삽니다. 그래서 마음에 평안이 없습니다.
평화가 힘의 근본이 됩니다. 우리는 그동안 잘살아보겠다며 자본과 기술을 축적하고 온갖 노력을 경주해왔습니다. GNP만 높아지면 행복이 저절로 얻어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평화가 필요했습니다. 평화롭지 못한 가운데 만들어진 생산품은 불량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산업사회에도 화평이 먼저입니다. 가정이나 직장, 학교----어디에서든지 평화가 근본입니다. 이 평화가 깨어지고 나면 모든 일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껏 평화가 이처럼 소중하다는 것을 미처 모르고 있었습니다. 생각이야 했겠지만 요즘처럼 피부에 와 닿을 정도로 심각하게 느꼈던 적은 없었습니다. 어느 곳에건 평화가 있어야 합니다. 평화가 있을 때에 창조력이 있고 지혜가 생겨납니다. 평화가 생산의 기초가 됩니다. 건강도 평화에 달려 있습니다. 노벨상 수상자인 알렉시스 카렌 박사는 "근심과 싸워서 이기는 방법을 터득하지 못한 사업가는 일찍 죽는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맞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근심이든 그 근심을 해결할 수 있는 정신적 능력이 자기 안에 있어야 합니다. 이를 감당하지 못하여 술을 마시고, 잠을 못 자고,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은 오래 살지 못합니다. 오래 살 자격이 없습니다. 어떤 근심이든 거뜬하게 소화해 낼 수 있는 자기 나름의 비결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긴장이 평안의 반대 의미가 됩니다. 긴장은 열 가지의 유형으로 나타납니다. 열등감, 불안정감, 역정, 당황, 염려, 짜증, 무기력, 모멸감, 고집불통, 그리고 결핍증 이 열 가지에 해당되지 않는 일이 없습니다. 그리고서야 무슨 평화를 말합니까? 평화 있기를 바랄 수 없습니다. 평안한 마음이 있기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여러분,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기도도 평화로운 가운데 해야 응답이 있습니다. 먼저 마음에 평화가 있어야 합니다. 고요한 평화를 찾고나서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내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고 하나님의 음성이 네게 들려온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우리는 때로 평화와 전쟁을 대결시켜서 생각하려듭니다. 전쟁과 평화, 즉 전쟁이 없으면 평화요 전쟁의 종결은 평화로 이어진다 ---- 이 생각은 착각일 뿐입니다.
경험에서 얻어진 진리이기도 하지만 역사적 사실이기도 합니다.
전쟁이 없다고 해서 평화로운 것이 아닙니다. 조용하지만 거기에도 평안은 없습니다. 우리 땅에서 전쟁 끝난 지가 얼마나 되었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평화를 정착시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무 것도 믿을 수 없는 불신, 미래를 알 수 없어서 따르는 불안, 마음껏 소유할 수 없어서 오는 불만 ---- 불신과 불안과 불만이 가득차 있어서 평화가 없습니다. 전쟁이 없다고 평화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평화, 또 평안이라는 이 말은 사상적으로 둘로 나누어져서 이야기됩니다. 하나는 샬롬(shalom)이요 또하나는 팍스(Pax)입니다.
샬롬은 히브리어로 성경에서 말하는 평안, 즉 히브리사람들의 사상 속에 있는 평안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영어 피스(peace)의 어원이 되는 팍스는 로마사람들의 사상, 즉 로마 철학에서의 평화를 가리킵니다. 샬롬은 하나님의 은총에 기초하고 팍스는 힘에 기초합니다. 경제력이건 정치력이건 큰 힘이 작용할 때의 조용한 상태가 바로 팍스입니다. 누구도 반란을 도모하지 못합니다. 큰소리도 내지 못합니다. 로마사람들은 이 고요함을 평화라고 했습니다. 이 평화는 진정한 평화가 아닙니다. 억압 속에 있는 것일 뿐입니다. 마치 공동묘지의 고요함처럼 모두가 억압에 눌려 조용합니다. 아시다시피 공산 사회가 그렇습니다. 공산당이라고 하는 무서운 힘에 눌려서 온 세계가 마치 조용한 듯했습니다. 그러나 어떠했습니까? 거기에 평화가 있었습니까? 성경에서는 억압에 의한 조용함이나 무사함을 평화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참평안은 자유 안에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함께 자유를 향유할 수 있을 때에 평안이 있습니다. 또한 일부층의 평안이 전체의 평안을 대신하지는 못합니다. 몇 사람은 평안하고 몇 사람은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 또한 평안이 아닙니다. 모두가 평안해야만 진정한 평안이 됩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샬롬의 개념은 하나님의 은총에 기초하고 자유에 근거합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함께 누리는 영육의 평안을 일컫습니다.
본문말씀을 보면 세상이 주는 평안과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안을 대조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27절)" ---- 서로 다르다고 말씀합니다.
한번 비교해 보십시다.
첫째, 세상이 주는 평안은 여건에 좌우됩니다. 돈이 없는 사람은 돈이 있어야 하고 지위가 낮은 사람은 지위가 높아져야 하고 병든 사람은 건강해져야 합니다. 여건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는 평안은 관계에 기초합니다. 어떠한 여건에 있느냐보다는 그 여건과 나와의 관계가 중요합니다. 어떠한 관계를 맺느냐 ---- 바른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여건이 달라져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부부 관계를 예로 들면 남편이 아내의 일을 하고 아내가 남편의 일을 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남편은 남편이요 아내는 아내입니다. 그 관계의 유지, 그것이 바로 평화입니다.
둘째, 세상이 주는 평안은 능력에 의지합니다. 힘이 있어야 합니다. 약하면 억울하고 분해서 못삽니다. 가난해도 억울하고 무식해도 억울합니다. 평안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는 평안은 영적인 상태에 의존합니다. 어떠한 형편에 처해 있느냐를 묻지 않습니다. 문제는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습니다. 참평안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하나님과의 바른 영적 상태에 따라 이루어집니다. 한마디로 죄인은 어떠한 여건에서든 평안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의인은 어떠한 여건에서든 평안할 수 있습니다.
셋째, 세상이 주는 평안은 결과와 그에 따른 성취에 의존합니다. '이 일이 이루어졌으면' '저것을 얻었으면'---- 바라고 원하며 오늘을 참고 견디어나갑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는 평안은 하나님의 축복과 그 과정에 기인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요 축복으로 향한 과정입니다. 그런고로 지금 이대로 충분히 행복합니다. 충분히 평안합니다. 미래에만 평안하다는 것이 아니라 오늘도 평안합니다.
넷째, 문제가 없어야 평안한 것이 세상이 주는 평안입니다. 그러나 하나의 문제가 해결되고나면 그 다음의 문제도 해결되었으면 하고 바랍니다. 끝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는 평안은 고난 중에도 평안입니다. 지금의 형편 이대로 충분히 행복하고 평안합니다.
다섯째, 세상이 주는 평안은 눈에 보이는 것에 의존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는 평안은 영원한 약속에 의존합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그 약속으로 향한 오늘이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세상이 달라져야 하는 것도 변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내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다'라고 생각합니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날 때에도 저녁에 잠자리에 들 때에도 식탁에 마주앉을 때에도 늘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하루하루가 일생 중에서 가장 즐거운 날이 됩니다, 이렇게 고백하며 사는 사람이 성경이 말씀하는 평안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은 일시적이요, 피상적이요, 거짓된 것이요, 상대적이요, 변화무쌍한 것입니다. 즐거운 일이 있다고 하여 즐거워할 것이 없습니다.
어떤 분이 높은 벼슬자리에 올랐습니다. 시쳇말로 출세를 한 것이어서 "축하합니다" 라고 인사를 했더니 "큰 걱정입니다" 해요.
남들은 입을 모아 축하를 해주지만 정작에 당사자는 잠을 못 이룰 정도로 걱정이 태산같다는 것이었습니다. 평안이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평안이라는 것이 다 이렇듯 맹랑합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27절)." 나의 평안 ---- 이것을 잊지 말 것입니다.
내가 평안하지 못하면서 남에게 평안을 주겠다고 한다면 거짓말입니다. 내게 자유가 없으면서 남에게 자유를 부여하겠다고 하는 사람은 거짓말하는 사람입니다. 언제나 내 마음의 평안이 먼저 있어야 합니다. 내 마음에 평안이 충만하고 내 마음이 기쁠 때에야 남에게 기쁨을 줄 수 있는 법입니다. 나는 평안하므로 너희에게 내 기쁨을 주노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습니다.
상황을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십자가를 앞에 두고 계십니다. 불과 몇 시간만 지나면 십자가를 져야 하는 순간이 옵니다. 그 무서운 시간에 예수님께서는 평안을 원하고 계십니다. 죽음이요 굴욕이요 모순이요 부조리한 십자가를 눈앞에 바라보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제자들과의 마지막 만찬자리입니다.
어리석고 무지몽매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요 13:7)." 가룟 유다는 배신했고 베드로는 망언을 하고 있습니다. 내일 아침이면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며 도망갈 작자가 지금은 주님 앞에서 장담을 하고 있습니다.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요 13:37)."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요 13:38)." 이렇듯 비통한 말씀을 하시는 가운데서도 '나는 평안하다. 내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평안은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본문말씀을 자세히 보십시다. "이후에는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하지 아니하리니 이 세상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저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30절)"----엄청난 말씀입니다. 세상 왕이 나를 잡으러 온다, 나로 십자가를 지게 하려고 잡으러 온다, 그러나 나와는 관계가 없다고 하십니다. 그렇다고 도망가시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안지시겠다는 것도 아닙니다. 적극적이고 초연한 화평입니다. 이 의미를 새겨보아야 합니다. 놀라운 말씀입니다. 아무 관계가 없다고 하십니다. 정치적으로 어떻게 되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상황이 거꾸로 변하든 모로 변하든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만민을 구속하시는 거룩한 역사는 반드시 성취될 것이기에 말씀하심입니다. 저 사람들이 나를 죽이는 일은 나와 상관이 없다----이것은 절대적이요 초연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크신 뜻은 어김없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 뜻을 이루기 위하여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치고 계십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에서 보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명을 따르고 계십니다. 겟세마네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 말씀하십니다.
"나의 원(願)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막 14:36)." 절대순종입니다. 적극적인 순종입니다. 거기에 평화가 있습니다. 여러분, 솔직하게 대답해보십시다. 내 마음에 왜 기쁨이 없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짐짓 거역했기에 평화가 없는 것입니다. 돈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어기면서 욕심을 따라갔기 때문이요, 그리스도인의 갈 길이 아닌 곳을 갔기 때문에 지금 와서 고민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 사건 앞에서 온전히 순종하십니다. 그 시간에 임하여 주님께서는 평안하십니다. 불안이 없으십니다.
그 다음에 보면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31절)"이라고 합니다. 아버지 사랑하시는 것을 나타내고자 하십니다. 내가 아버지를 사랑한다 ---- 이 사랑 안에 평안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사랑합니다. 모든 사건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완성됩니다. 주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주시는 잔을 피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사랑하는 아버지가 사랑하는 아들에게 내리시는 십자가입니다. 이 십자가를 받아들이십니다. 아버지를 극진히 사랑합니다. 하나님의 귀한 사랑 속에 이 모든 사건이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평안합니다. 어린아이들을 키우면서 관찰해보십시오. 아이들이 부모님의 사랑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알 수 있습니다.
눈을 감고 잠들 때에도 나의 부모님이 나를 사랑하나 하지 않나 손으로 더듬어봅니다. 사랑을 확인해보는 것입니다. 사랑을 확인하고야 잠이 듭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사랑이 분명하고 내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할 때에 나의 마음 안에 참평안이 깃듭니다.
나아가 주님께서는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하십니다.
어떻게 받을 것입니까? 주님의 사랑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입니까? 오늘의 본문은 말씀하십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26절)." 성령이 사랑을 줍니다. 성령이 화평을 줍니다. 여러분,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이 십자가의 사랑을 깨닫게 합니다. 이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전혀 다릅니다. 세상이 주는 모든 것 ---- 기대할 것이 없습니다. 세상의 어떠한 여건으로도 평안은 주어지지 않습니다.
다만 주님의 거룩한 사랑을 받아들이고 이것을 믿을 때에 모든 고통과 근심이 사라집니다. 그가 나를 사랑하는 것을 내가 알고 내가 그를 사랑하는 것을 알 때에야 그리스도의 마음 안에 있었던 평안을 비로소 내가 받아들이게 됩니다. 누구든지 마음속에 근심이 있다면 증오하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마음속에 어두운 그림자가 있다면 아직도 완전한 사랑을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스운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아주 못된 행동을 하는 남편과 함께 사는 부인이 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남편을 변함없이 사랑합니다. 너무도 기특해서 칭찬을 해주었습니다. "남편 사랑이 극진하시네요. 도대체 어떠한 마음으로 사랑하십니까?" "성경에 씌어 있는대로 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 말입니다." 이것이 부인의 대답이었습니다. 남편을 원수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랑해서야 되겠습니까마는 이것을 분명히 명심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을 사랑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내 마음에 가득 채워서 넘치는 사랑과 감사하는 마음으로 원수까지도 사랑할 것입니다. 그럴 때에야 우리의 마음에 진정한 평화가 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평화를 주셨습니다. 주시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 하십니다.
한 순교자가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집행관이 다가와 죽기 전에 할말은 없느냐고 묻습니다. 순교자가 빙그레 웃으면서 말합니다. "당신의 두 손을 내밀어서 한쪽 손은 내 가슴에 대어보고 한쪽 손은 당신의 가슴에 대어보시오. 누구의 심장이 더 뛰고 있습니까? 당신은 나를 죽일 생각에 몹시 불안합니다. 그러나 나는 이같이 평안하다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다 맡겨버린 이 순교자의 마음은 평안합니다. 참평안은 그리스도와 함께 있고 그리스도 안에만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이 평안은 죽음과 관계없습니다. 죄와도 관계없습니다. 죽음과 죄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영원한 약속만을 바랍니다.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 참평안과 승리가 이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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