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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친구의 기쁨(요한복음 3:22-30)

by 【고동엽】 2023.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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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의 기쁨(요한복음 3:22-30)구의 기쁨(요한복음 3:22-30)

 

 

이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함께 유하시며 세례를 주시더라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주니 거기 물들이 많음이라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더라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더라 이에 요한의 제자 중에서 한 유대인으로 더불어 결례에 대하여 변론이 되었더니 저희가 요한에게 와서 가로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강 저편에 있던 자 곧 선생님이 증거 하시던 자가 세례를 주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나의 말한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거할 자는 너희니라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런던 타임즈」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의 정의'에 대하여 독자를 상대로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제일 행복한 사람, 제일 행복한 순간, 제일 행복한 일에 대한 독자들의 생각은 이러했습니다.

첫 번째, 바닷가에서 모래성을 막 완성한 어린이가 제일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곧 헐어버릴 것이지만, 아이들은 모래성을 정성껏 만들어놓고는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와'하고 탄성을 지르며 좋아하고 행복해합니다. 두 번째, 방금 아기를 목욕시키고 난 어머니, 방금 아기를 재우고 난 어머니의 뿌듯한 모습이 제일 행복해 보인다고 했습니다. 세 번째, 공예품을 막 완성한 목공이 제일 행복해 보인다고 했습니다. 나름대로 애를 써서 작품을 만들어놓고, 그 성취감에 도취되어 있는 모습이 그렇게 행복해 보일 수가 없다고들 했습니다. 네 번째, 어렵고 힘든 수술 끝에 생명을 살려낸 의사가 제일 행복한 사람일 것이라고 했습니다. 좋은 일을 했다 싶은 그 순간이 가장 행복한 순간일 것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인간됨은 그의 희노애락(喜怒哀樂)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도대체 무엇을 기뻐하며 무엇을 슬퍼하고, 어떤 순간에 기뻐하며 어떤 순간에 슬퍼하느냐----이런 것들이 그 사람의 사람됨을 가늠하는 바로미터(barometer)가 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웃을 일에 웃는 사람은 건강한 사람입니다. 그런가하면 웃지 않을 일에 웃는 사람은 실성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울어야 할 일에 우는 사람은 인격자입니다. 그런가하면 울지 않아야 할 일에 우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현대심리학에서는 현대인이 가지고 있는 고질적인 병의 하나로 다소 생소한 용어인 '실감정언어증(失感精言語症)' 꼽고 있습니다. 감정이 정상이 아닙니다. 감정을 완전히 잃어버렸습니다.

실감정되었습니다. 그런데 말은 많습니다. 잘났다고 떠들어댑니다. 바로 이런 사람이 실감정자요 구제불능자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병들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상적인 감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감정을 잃어버린 채 말이 많은 사람----이것이 현대적인 병의 하나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기뻐하며, 어떤 때에 기뻐하며, 얼마나 기뻐합니까? 대체로 우리는 소유함으로 기뻐합니다. 무엇을 얻었을 때에 그 성취감으로 기뻐합니다. 또한 칭찬을 기뻐하고, 명예를 기뻐하고, 호평을 기뻐합니다. 남이 알아주는 것을 기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존재의 가치를 어디서 찾느냐가 중요합니다. 자기 자신에게서 찾지 못하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을 받는 데서 찾으려는 사람은 유치한 사람이요 불행한 사람입니다. 남이 알아주면 기쁘고, 남이 조금 무시한다 싶으면 죽을상이 되는 사람이라면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나 자신의 진실로, 그 존재 가치만으로 충분해야 합니다. 이 정체감(正體感)이 건강하지 못할 때에 우리는 기뻐할 수도 없고, 행복할 수도 없습니다. 명심할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의 기쁨이란 너무나 이기적입니다. 육체적이고 순간적이고 찰나적이고 비도덕적인 때가 많습니다. 또한 우리의 기쁨은 비사회적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왜 기쁨이 없습니까? 왜 그 기쁨은 순간적입니까? 왜 그 기쁨 자체가 허무합니까? 기쁨의 성격 자체에 문제가 있습니다. 소유의 기쁨은 더 큰 소유를 지향하기 때문에 고통으로 변합니다. 성취감 역시 순간적인 것으로, 더 큰 성취를 욕망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성취감 자체에 노예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기쁨이 없음은 이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는 상대적인 기쁨은 기쁨일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상대적인 기쁨은 건전치 못하며, 나아가 도덕적 심판을 받아야 할 때가 많습니다.

예컨대 도박판을 벌인 사람들 가운데서 얻어지는 기쁨을 생각해 봅시다. 도박판의 돈이 적어서는 재미가 없다고 합디다. 한 판에 몇천 원 왔다 갔다 하는 것으로는 성에 안 찬다고 합니다. 몇 억이 왔다 갔다 해야 짜릿한 기쁨이 있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 해보십시오. 여기 몇억 대의 도박판이 있습니다. 돈을 모두 딴 사람이 화끈하게 좋아하는 바로 그 순간, 바로 앞에 있는 친구는 아이쿠 망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기쁜 일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식의 기쁨만을 즐기는, 이것밖에 모르는 사람은 참으로 불행한 사람입니다. 내가 기뻐하는 그 시각에 다른 사람은 슬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른 사람의 슬픔은 잊은 채, 내 기쁨만을 누리려고 합니다. 내가 얻는 순간에 다른 사람은 잃고 있습니다. 내가 웃는 순간에 다른 사람은 울고 있습니다. 이런 식의 기쁨이라면, 그 기쁨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정도로밖에 기뻐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그 기쁨 자체에 도덕적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기쁨이란 그렇지 않습니다. 불변의 기쁨이란 그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영원한 기쁨이란 절대로 그런 따위의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어떤 기쁨을 즐기고 있습니까? 오늘의 본문말씀에서 세례 요한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29절)" 이 기쁨이란 무엇입니까? 먼저, 이 기쁨은 절대적인 기쁨입니다. 단적으로 말하면 질투와 시기가 없는 기쁨입니다. 시기와 질투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영원히 불행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정서를 한번 진단해 보십시오. 흔히 우리는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고 말합니다. 정말 사촌이 땅을 사면 시기심이 발동해 배가 아픈 사람이라면, 그는 부하거나 가난하거나 출세했거나 간에 불행한 사람인 것입니다. 영원히 행복을 모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다른 사람의 고통이나 실패를 내가 즐기고 있지는 않은지, 다른 사람의 고통을 통쾌히 여기고 있지는 않은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너의 원수가 망할 때에 기뻐하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네 원수가 망하는 것을 보고 기뻐할 때에 그 재앙을 네게도 내리겠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상대방의 불행을 보고 기뻐한다면 그 기쁨은 좋은 기쁨이 아닙니다. 운동을 해보면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이김으로 기뻐하는 것보다 다른 사람이 실수하는 것을 보고 더 좋아합니다. 그것이 취미인 사람이 있습니다. 나아가 남을 넘어뜨리려고 트릭을 동원하는 등 갖은 애를 다 쓰고, 다른 사람이 여기에 걸려 실수할 때에 통쾌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병적인 사람입니다. 너무나도 불행한 사람입니다. top crazy입니다. 항상 모든 일에 이겨야만 하는 사람, 일등을 해야만 하는 사람, 그렇지 않으면 잠을 못 이루는 사람은 정말 불행한 사람입니다. 명심할 것입니다.

크래머가 쓴 「예수 심리학」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읽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이 책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주제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승부욕이 없으셨다, 이것이 그 주제입니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쉽게들 불행하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배아파서 불행하고, 기분 나빠서 불행한 것입니다. 이 두 마음이 있는 한은 절대로 행복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홀로 광야를 걸어가고 있는 수도사가 있습니다. 마귀가 그 뒤를 따르면서 수도사를 시험합니다. 예쁜 여자의 모습으로 동행하여 유혹하기도 하고, 돈과 명예를 주겠다고 속삭여도 봅니다. 이렇듯 여러 가지 방법으로 시험했지만, 그 수도사는 끄떡도 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길을 그대로 의연하게 갈 뿐입니다. 마지막으로 마귀는 그 수도사의 앞을 가로막고 서서는 "수도사여, 당신의 동생이 방금 알렉산드리아의 주교가 되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렇게도 의연하던 그 수도사의 안색이 별안간 싹 달라지더랍니다. 그렇습니다. 가장 무서운 시험이 바로 이 시기와 질투입니다. 우리는 가장 고차원적인 마귀의 시험이 바로 여기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시기와 질투를 죄 아닌 줄로 생각하고, 병 아닌 줄로 착각하는 데서부터 우리는 구제불능의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의 맥락을 살펴보면 세례 요한이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모든 사람이 세례를 받기 위하여 예수님께로 모입니다. 세례 요한에게 모여들던 사람들까지 다 예수님께로 가버리자 요한의 제자들이 몹시도 불만스러워합니다. 그 결정적인 시간에 세례 요한은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하고 말씀합니다. 그의 말씀대로 요한의 마음속에는 전혀 시기와 질투가 없었습니다. 이렇듯 시기와 질투가 없으려면 자기 처지와 자기 정체와 자기 본래성에 대한 확고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세례 요한은 자기 정체감이 확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신랑의 친구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자신은 신랑의 친구로 신랑의 음성을 듣는 것만으로 즐겁고 기쁘다고 말씀합니다. 세례 요한은 '나는 신랑의 친구다' 하는 분명한 자기 정체감으로 질투를 극복하고, 시기를 이겨나가고 있습니다.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27절)"라는 요한의 말씀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기 정체감이 분명했습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질투하지 않고, '신랑의 친구'로서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때문입니다.

'신랑의 친구'는 히브리말로 하면 schoshben이라고 하는데 참으로 재미있는 말입니다. schoshben은 유대의 혼인예식에 있어서 독특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 신랑의 친구는 그 예식에서 몇 가지 일을 맡아합니다. 먼저, 신랑과 신부 사이의 연락을 맡습니다. 옛날에야 어디 전화가 있었나요. 편지를 한다 해도 불편한 점이 여간 많지 않았을 때입니다. 그래서 신랑의 친구가 신랑과 신부가 마음대로 왕래하지 못할 때에 서로 주고받고 싶은 말을 왔다갔다하면서 전해줍니다. 또한 신랑의 친구가 혼인식을 마련하고 초청장도 발송합니다. 특별히 재미있는 일은 신부의 방을 지키는 것도 역시 신랑 친구의 책임입니다. 본래 유대사람들은 저녁에 결혼식을 올립니다. 결혼식을 마치고 신랑은 신부가 기다리는 방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그때까지 신랑의 친구가 신부 방의 문을 잠그고 지킵니다. 신랑이 아닌 다른 사람이 들어온다고 해도 캄캄한 밤이니 잘 모를 수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신랑의 친구가 지키고 섰다가 신랑이 오면 기뻐하면서 문을 열어주고는 그대로 밖에서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랑 신부가 기뻐하는 시간에 그도 함께 밖에서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랑의 친구입니다. 나는 신랑의 친구이다, 나는 내 위치에서 기뻐하고 있노라---위치감각이 분명한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행복합니다. 하나님께로서 받은 바 내 위치에 대한 정체감이 분명한 사람은 행복합니다.

나아가 그 마음이 변하지 말아야 합니다. 처음에는 봉사하는 마음으로 시작했다가 중간에 그 마음이 변하면 안됩니다. 환경이 어떻고 세상이 어떻고, 신랑이 내 기분을 상하게 했다고 해서 마음이 변하고 생각이 달라지면 안됩니다. 어떤 순간에라도 그 신부가 내 아내보다 예쁜데 하는 질투를 품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나는 신랑의 친구입니다. 끝까지 친구입니다. 바로 그 마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저는 직분상 결혼주례를 많이 섭니다. 가만히 따져보니 일 년에 한 이백 번은 하는 것 같습니다. 신랑 신부를 앞에 세워놓고 주례를 하다보면 특별히 서로 너무나도 좋아하는 신랑 신부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좌우간 손을 꼭 붙들고 놓지를 않습니다.

놓으라고 해도 놓지를 않습니다. 하는 수 없이 신랑 신부가 손을 붙든 채 결혼주례를 할 때가 있는데, 서로가 너무 좋아해서 그렇거든요. 이렇듯 좋아하는 시간에 참 딱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신랑의 부모님들은 신랑 신부와 같이 연신 입을 벌린 채 좋아합니다.

그런데 신부의 부모님들은 손수건으로 눈두덩을 닦으며 울고 있거든요. 참 묘한 시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잘 성장한 딸이 좋은 사람 만나 이렇듯 아주 행복해 하는 순간에 왜 부모님은 궁상맞게 우는 것입니까? 왜 그의 기쁨을 함께 하지 못하느냐 말입니다. 왜 아들의 기쁨을 함께 하지 못하고 못된 시어머니가 되느냐 말입니다. 아들이 좋다면 그만이요 딸이 기뻐하면 그만이지요. 왜 여기에 시기 질투를 하느냐 말입니다.

아니라고 부정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전부 질투입니다. 왜 함께 기뻐하지 못합니까? 그의 기쁨이 곧 나의 기쁨이라고 소화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중간에 마음이 변한 것입니다.

무릇 동물은 제 새끼를 사랑합니다. 호랑이도 사자도 코끼리도, 심지어는 고슴도치도 제 새끼를 아끼고 예뻐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새끼 때에는 이렇듯 예뻐하다가 조금만 자라면 미워합니다. 물어서 내어쫓습니다. 이러한 동물성에서 채 벗어나지 못한 인간들이 어렸을 때에는 사랑하다가도 조금만 크면 아버지와 아들이, 어머니와 딸이 원수가 되어버립니다. 이 얼마나 야만스러운 일입니까? 모름지기 사랑했으면 끝까지 사랑할 것입니다.

잘되라고 바랐으면 끝까지 잘되라고 빌어주어야 하지 않겠어요? 왜 중도에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까? 마음이 변했기 때문입니다.

시기와 질투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시기, 질투----참으로 무서운 병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제사장들은 모든 유대인과 더불어 메시야를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께서 메시야로 이 땅에 임하셨을 때에는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마침내는 십자가에 못박아버렸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겠습니까? 바로 시기와 질투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좋은데, 사람들이 예수님 따르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제자들도 싫고, 예수님을 좇는 그 숱한 병자와 세리와 죄인과 창녀, 이런 너저분한 사람들이 싫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과 가까이하는 것을 보고 시기와 질투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 때문에 예수님을 영접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시기와 질투가 작용하는 동안에는 마음의 눈이 어두워져서 절대로 마음을 열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시기와 질투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게 했다고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무서운 이야기입니까? 모름지기 우리는 함께 기뻐하는 마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더불어 기뻐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내가 고통 당할 때에 함께 고통을 당하는 사람은 동지입니다.

내가 기뻐할 때에 함께 기뻐해 주는 사람은 친구입니다. 그런데 만일 내가 고통을 당할 때에 기뻐하는 자가 있다면 그 사람은 원수입니다. 내가 기뻐할 때에 괴로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적입니다. 우리는 고통 당하는 자에게 좋은 마음으로 가서 위로하고 고통을 함께 나누고자 하는 사람을 많이 봅니다. 그런데 기뻐하는 자와 함께 기뻐하는 데에는 결정적인 약점이 있습니다. 친구가 집을 샀을 때에 함께 좋아하고, 초대했을 때에 가서 "아이구, 좋구먼!" 한마디를 못해줍니까? 누가 결혼식을 한다 할 때에 함께 기뻐해 줄 수 없습니까? 누구의 아들이 대학에 입학하러 간다고 했을 때에 내 아들은 비록 낙방을 했지만 함께 가서 기뻐해 줄 수는 없습니까? 이 마음이 없고는 결국 그는 행복할 수가 없는 사람입니다. 기쁨은 나 혼자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더불어 누리는 것입니다. 함께 기뻐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왕의 혼인잔치 비유를 드시어 함께 기뻐함의 중요함을 갈파하시고 계십니다. 왕이 자기 아들의 혼인잔치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고 사람들에게 와줄 것을 청합니다. 그 초청을 받은 사람들은 제각각 핑계를 대고 응하지를 않습니다. 심지어는 청함을 알리러 온 종까지도 능욕하여 죽입니다. 이 기쁨에 참여하라고 좋은 마음으로 청했던 왕은 이렇게 거절당하자 크게 노하여 군대를 보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라고 명합니다(마 22:1-14). 그렇습니다. 내 기쁜 마음을 몰라주는 사람은 원수와 같습니다. 여러분, 한번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은 다른 사람의 기쁨에 얼마나 참여하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사랑이 없나니(요 15:13)"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큰사랑이라 하시지 않으시고,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가장 큰사랑이라 하셨을까요? 친구는 경쟁의 대상이요 질투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가장 어렵습니다. 예수님께서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보다 더 큰사랑이 없다고 하신 것은 이 때문입니다.

교육학 용어 가운데 empathy와 sympathy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기서 뒤에 붙는 pathy는 감정을 뜻하므로 empathy는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이해하는 것, 다시 말하면 감정이입을 의미하게 됩니다.

그리고 sympathy는 감정을 함께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름지기 우리에게는 쇠하는 기쁨이 필요합니다. 그는 흥해야 하고 나는 쇠해야 한다는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내가 죽어서 그가 살수 있다면 기쁨으로 죽으리라, 내가 부끄러움을 당해서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갈 수 있다면 얼마든지 당하리라----이것이 사랑입니다. 절대적인 기쁨이 이에 있습니다.

세례 요한의 기쁨은 한마디로 조연의 기쁨이었습니다. 기쁨에는 주연(主演)의 기쁨이 있고 조연(助演)의 기쁨이 있습니다. 하나의 작품에 있어서 주연은 하나요 조연은 다수입니다. 그러므로 모두 주연자가 되겠다고 해서는 안됩니다. 조연자로서 만족할 줄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하나의 작품이 완성되었을 때에 상과 찬사는 주연자가 받겠지만, 조연자도 이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엄격한 의미에서 주님의 구속사적 역사의 주연은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뿐이십니다. 모두는 다 조연인 것입니다. 자기 존재의 조연적 역할의 기쁨을 즐길 줄 모르는 사람은 영원히 행복할 수 없습니다. 이 기쁨에 사는 사람, 이 기쁨에 충만한 사람에게 더 큰 영광과 기쁨이 함께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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