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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선택받은 자의 윤리(골로새서 3:12-15)

by 【고동엽】 2023.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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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받은 자의 윤리(골로새서 3:12-15)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고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또한 너희는 감시하는 자가 되라

 

 

 

성도 여러분,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하게 사는 것이겠습니까? 잘산다는 것과 행복하게 산다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흔히 잘사는 것 같아 보이지만 불행한 사람이 많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을 선택하겠습니까? 좀더 나아가서 인간답게 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역시 인간은 인간이기에 인간적 행복이 따로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동물적 욕망을 충족시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비인간적인 생활 속에서 찾을 수 없다는 것도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가장 인간적으로, 사람답게 사는 길이 어디 있으며 또 행복의 길이 어디 있겠습니까? 몇 가지로 생각해봅시다.

가장 행복할 수 있는 길은 욕망을 억제하는 데 있습니다. 아무래도 우리 인간은 동물적 욕망을 지니고 있는데, 이 욕망에 그대로 다 무방비 상태로 따라가서는 안됩니다. 먹고 싶다고 다 먹고, 가지고 싶다고 다 가지면 불행해진다는 말입니다. 욕망의 노예가 되어가고, 동물적 인간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쉽게 말해서 우리는 성욕을 제어할 줄 알아야 합니다. 소유욕을 자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상한 것은, 다 가지지도 못하면서 더 가지려고 하고 다 먹지도 못하면서 더 먹으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생각하면 그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더욱더 이상한 것은, 가질수록 욕망은 한층 더 높아집니다. 많이 가질수록 욕심이 더 많아집니다. 이 많은 욕심의 노예가 된 사람, 참 볼품없습니다. 불행한 사람입니다.

제가 아는 어느 분도 그래요. 몇 십억을 가졌는데 현금 한푼 없이 오막살이에 살아요. 먹는 것도 비참해요. 그 땅 한쪽 팔아도 되겠는데, 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나이도 벌써 팔십이 가까웠어요. 도대체 어쩌자는 것일까요? 등기부에 '이 땅은 아무개 땅이다'라고 써놓으면 어떻고 안 써놓으면 어떻습니까? 더 볼 것도 없고 더 가져야 할 것도 아닌, 정말 불필요한 것일 뿐입니다. 성경에 있는 말씀대로 우리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언제나 족하게 있는 줄로 알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내일을 걱정할 것도 없고, 과거를 염려할 것도 없습니다. 오늘 하루하루, 일용할 양식으로 충분합니다. 왜 우리는 어느 사이에 이렇듯 욕망의 노예가 되었습니까! 더 되려고, 더 가지려고, 더 높아지려고 하면서, 스스로 불행의 함정으로 빠져들어 가는 것입니까? 욕망을 스스로 다스릴 수 있을 때에 행복은 있는 것입니다. 가진 것을 족한 줄로 여기는 자에게 행복은 있습니다. 내가 가진 것을 제일 좋은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후회가 없어야 합니다. 적어도 내 나름대로의 이상을 가지고, 그 이상을 지향하면서 직선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종종 본의 아니게 이런 말 저런 실수를 해놓고는 뒤늦게 야 후회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아이고,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이런 후회에 자꾸만 사로잡혀 사는 사람은 참으로 불행한 사람입니다. 반대로 '그때에 그러기를 잘했지. 잘 선택했던 거야.

내가 참 잘한 것이었지'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후회해보아야 이미 지나간 일입니다. 그럼에도 이것을 고치지 못하고, 계속 후회라는 고통 속에 매여 있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세 번째는, 행복한 사람을 볼 때에 나도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라면 행복한 사람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정결함이 있습니까? 나는 나대로 따로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까? 내 이웃이 잘되고, 내 친구가 잘되고, 내 친구의 자식이 잘될 때, ', 참 잘되었구나'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같이 행복합니까! 아니면 배가 아파서 잠을 못 잡니까? 무릇 시기 질투에 매여 있는 사람은 영원히 불행합니다. 그런 사람이라면 행복은 아예 바라지도 말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는 행복이 있을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 잘되는 것을 볼 때에 마치 나의 일인 양 마음으로부터 함께 기뻐할 줄 아는 마음가짐이 되어야만 비로소 행복하다는 것을 잊지 말 것입니다. 시기와 질투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은 평생가도 어느 때 한번 참 평안을 맛보는 법이 없습니다. 남 잘못되었다는 소리 들으면 그로 해서 또 마음이 아프고 남 잘되었다고 하면 질투하느라 괴로우니, 그 언제라고 행복하겠습니까? 불행한 사람입니다. 윤리라고 하는 것은 그렇습니다. 위험으로부터 무관할 수 있으며,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으며, 후회 없는 선택을 해나갈 수 있을 때에 사람에게는 인간다운 바른 생이 열리는 것입니다.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이고, 순간적 욕망에 끌려 사는 사람은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철학자 쇼팬하우어는 양심에 다섯 가지 요소가 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오분의 일은 타인에 대한 두려움, 오분의 일은 종교적인 두려움, 오분의 일은 선입견에서 오는 두려움, 오분의 일은 허용으로부터의 두려움, 오분의 일은 관습상의 두려움이라고 했습니다. '양심은 두려움이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틀렸습니다.

 

양심을 두려움으로 여기는 사람은 불행합니다. 항상 양심의 가책에 쫓기는 사람은 어떤 일에도 행복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도덕성을 지닌 인간의 운명입니다. 양심이 나를 성원해야 합니다. 양심이 나를 기뻐해야 합니다. 양심이 나를 칭찬해야 합니다. 양심과 더불어 기뻐하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기쁨을 누리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런 이유로, 교리 중에서 가장 중요한 교리의 하나가 이것입니다. 양심의 자유, 신앙적 양심의 자유----이 자유를 누리는 자이어야만 행복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문제는 이상적 인간으로 살 수 있고, 사람답게 살아가는 길은 어디 있느냐 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 비결은 무엇이며, 그 동력은 무엇이며, 어떻게 하면 근본적으로 이런 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비법은 이렇습니다. '내가 누구냐?'라는, 자기 존재에 대한 정체감이 분명해야 합니다. 잃어버린 진실을 찾아야 합니다. 도대체 내가 누굽니까? 모르고도 아는 척, 되지 못하고도 된 척, 죄인이면서도 잘난 척…… 이래가지고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스스로 '자기됨'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내가 누구냐'하는 자기 정체를 분명히 인식해야 합니다. 거기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나 한사람 한사람이 누구인지를 가르쳐줍니다. 성경 전체의 주제가 곧 "나는 하나님이요, 창조주다. 너희는 피조물이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유아독존(唯我獨尊)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의 은혜로 태어났고, 많은 사람들 속에서 신세를 지고 삽니다. 흑 누가 스스로를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이라고 생각한다면 착각입니다. 성경은 이따위 착각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너는 피조물이다. 하나님인 내가 있고야 네가 있다. 내가 사랑해서 네가 있고, 내가 도와서 네가 있을 수 있다'---이렇게 가르칩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권세 위에 권세 있고 능력 위에 능력 있습니다.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그것이 첫째요, 둘째는 '구속받은 자'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다 죄인이다. 용납할 수 없게 큰 죄를 지었다. 전적으로 타락했다. 그런데 십자가의 은혜로 너희를 구속했다'라고 우리가 구속받은 존재임을 성경은 강조합니다. 세 번째는 '선택받은 자'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 중에 유독 네가 선택받았다. 네가 사는 환경, 네 처지가 모두 선택받은 것이다'라고 거듭 강조합니다. 오늘의 본문말씀도 우리를 '선택받은 자, 거룩한 자, 사랑 받은 자'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근거로 하여, 선택받은 자답게 자기정체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윤리입니다. 선택의 교리요 예정의 교리입니다.

무릇 교리라는 것은 참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예정론의 대표 격인 칼뱅(calvin, J.)'이중예정론'까지 주장하고 있는데 그 제자들은 평생을 배워도 납득이 잘 가지 않았습니다 어떤 때에는 이해되는 것 같고 어떤 때에는 안되는 것 같고, 이쪽으로 생각하면 말이 되고 저쪽으로 생각해보면 말이 안되고…….

퍽도 답답해하다가 칼뱅 선생이 세상을 떠날 때에 옆에 앉아서 또 물어보았답니다. "그 예정론, 맞는 것입니까?" 칼뱅 선생은 빙그레 웃으면서 "Bible says so."--"성경이 그렇게 말하느니라"라고 답하셨다 합니다.

여러분, 선택받았다는 교리에 대하여 우리가 어떤 때에는 이해가 잘 되지만, 어떤 때에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한가지 말씀 드린다면, 이것이 납득이 잘되는 자는 선택받은 자이고 영 납득이 안되거든 버림받은 자인 줄 아십시오. '선택받은 자'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비사(比辭)를 말하는 중에 제일 마음에 드는 이야기가 있어서 한마디하겠습니다. 부모가 전쟁에 다 죽어, 외돌토리로 살아남은 어린아이들을 모아놓은 이른바 전쟁고아원이 있었습니다. 이 아이들은 모두가 고아들이었지만, 그런 대로 원장님의 사랑을 받으면서 옹기종기 더불어 지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지체 높고 돈 많은 한 부부가 고아원 원장을 찾아와 부탁을 합니다. 양자 삼을 고아를 하나 달라고. 그래, 고아 하나를 선택해주었습니다. 그 부부는 이 아이를 데리고 가서 깨끗이 목욕을 시키고, 좋은 옷을 입히고, 호적에 올려서 그 집 아들로 정식 등록을 시키더랍니다. 그 아이는 아주 잘먹고 잘입고 잘 자면서 정말 훌륭하게 자랍니다. 어느날, 좋은 옷을 입고 옛 친구들을 만나러 고아원에 왔습니다. 다른 아이들이 볼 때에 얼마나 부러웠겠어요? ", 너 참 잘됐다" 이렇게 같이 기뻐 해주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이건 불공평하다. 양자 삼으려면 다 삼든지 아니면 말든지 하지 왜 하나만 데려갔단 말이냐"하고 투덜거리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선택받은' 그 아이는 이제 어느 쪽에 장단을 맞춰야 합니까? 선택받은 그 아이의 입장에서는 과거를 잊어버리고 어떠한 비난이나 평판도 생각할 것 없이 다만 나를 선택해준 분에 대하여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선택받은 자의 신분으로서 그 가문의 전통을 따라 높은 지체로 살아가야 할 윤리적 장래가 있을 뿐입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선택에 관해서는 은혜로운 선택, 은총적 선택을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신명기 76절로 8, 레위기 20장을 비롯하여 성경의 여러 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선택하였다.

많은 민족 중에서 이스라엘을, 많은 사람 중에서 아브라함을, 너를 선택하였다'라고, 선택의 교리를 강조합니다. '그런고로 너는 내 말을 들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은총의 선택입니다. 우리는 이에 내포된 중요한 기초적 교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선택'이라는 것은 무자격한 가운데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현실적으르 그렇습니다. 앞서 이야기된 그 고아는 남달리 똑똑한 것도 아니고 특별한 것도 아닙니다. 다만 선택되었을 뿐입니다. 자기 자격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무슨 시험을 본 것도 아닙니다. 다만 그 중의 하나로서 선택받은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누구나 전혀 무자격한 가운데서 선택받았다는 것을 잊지 말 것입니다.

선택받은 자의 기본 자세는 '나는 죄인입니다'하는 마음가짐입니다. '나는 모든 사람과 똑같은 죄인입니다. 나는 죄인 중의 죄인입니다. 나는 구원받을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하필이면 나를 이렇게 강권적으로 구원하셨습니다'하는 마음가짐입니다. 그렇습니다. 내게는 아무런 자격이 없습니다. 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내게는 의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직 은혜로 선택되었을 뿐이요, 주님의 놀라운 능력으로 선택된 것일 뿐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도 은혜요 둘도 은혜입니다. 현재에도 미래에도 은혜 안에 내가 존재할 뿐입니다. 이것이 선택받은 자의 자아의식입니다. 이렇다하게 잘난 것도 없고 특별한 것도 없습니다.

다만 주님께서 나를 택하셨을 뿐입니다. 엄청난 은혜일 뿐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때문에 오로지 감사해야 합니다. 오직 믿음입니다. 그 은혜를 믿어야 합니다.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감사, 오직 기쁨, 그리고 오직 영광만이 그리스도인의 윤리입니다.

너무나 감사합니다. 그러기에 나를 선택한 분에게 나를 위탁합니다. 내일에 당장 어떻게 되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선택된 것만으로 충분히 감사하니까요. 내일 가서 무슨 일을 당해도 상관없어요. 지금 받은 은혜 가지고도 충분하니까요. 더우기 나를 선택한 분에게 뜻이 있습니다. 경륜이 있는, 분명히 목적적 선택이요, 사명적 선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 나 자신을 위탁합니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선택을 받고 고향을 떠납니다. 나그네로 평생을 방황하지만, 그의 기쁨은 충분합니다. 박토에 살든 옥토에 살든, 애굽에 살든 가나안에 살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어디에 살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약속을 믿고 그에게 순종하기만 했습니다. 여유 만만합니다. 그래서 그는 롯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13:9)." 이것이 선택받은 자의 여유였습니다. 초연한 자세였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윤리라는 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당연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수평적 관계에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성경 속의 여러 가지 경험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를 하나 들어봅시다.

 

마태복음 18장에 보면, 만 달란트 빚진 사람이 나옵니다. 그 사람이 갚을 길이 없을 때, 주인이 그 빚을 탕감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감사하다며 인사하고 나가다가,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을 만나자 갚으라고 욕을 보였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만 달란트를 탕감해준 그 주인은 너무도 섭섭해서 이 사람을 다시 불렀습니다.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18:32,33)" 이것이 기독교 윤리입니다. 당연한 것입니다. 내가 저와 어떻게 하느냐고 물을 것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그러한 것입니다.

또한 요한복음 13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스도요 메시야되신 분께서 그 제자들의 더러운 발을 손수 씻어주셨습니다. 그 다음에 하시는 말씀이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13:14)" '당연히 그러해야 될 것 아니냐! 그것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시는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를 용서했으니 너희가 서로 용서함이 마땅하고, 내가 너희를 사랑하고 너희가 이 사랑을 받았으니 너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옳지 않느냐----당연한 것입니다. 기독교 윤리란 수평적 관계에서 얼마의 가능성이 있고, 얼마의 보상이 있고, 효과가 있고 없고, 질서가 있고 없고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에서 나오는 파생적인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아주 힘있는 윤리입니다. 맥빠진 윤리가 아닙니다. 하나의 구호나 관념 같은 것도 아닙니다. 이 윤리에는 근본적으로 엄청난 힘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이 힘의 근원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아가페의 이 참사랑을 내가 깨닫고 감격할 때에 내가 용서 못할 사람이 없고 사랑 못할 일이 없고 참지 못할 일이 없습니다. 바로 기독교 윤리로써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15:12)" 사도 바울도 말씀합니다. "만일 식물을 인하여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치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식물로 망케 하지 말라(로마서 14:15)." 항상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전제로 사랑을 펴야 할 것입니다. 긍휼, 자비, 겸손, 온유, 인내…… 이것을 행하기에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당연히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아는 어느 장로님이 자녀 때문에 무척 고생을 많이 합디다. 자녀들이 어떻게나 속을 썩이는지 가출은 말할 것도 없고, 있는대로 아버지의 마음을 괴롭힙니다. 그분을 만날 때마다 혹시라도 무슨 말 했다가 마음 상할까봐 위로도 할 수가 없어요. 보기에 민망할 정도로 자녀들이 얼마나 부모를 괴롭히는지 몰라요. 그런데 이상한 것은 정작 이 장로님은 평안하게 사는 것이었습니다.

걱정이 하나도 없는 것처럼 지내요. 하도 신통하고 이상해서 제가 한번 물어보았습니다. "자식이 그렇게 괴롭히는데도 어떻게 그리도 평안해보입니까?" ", 괜찮아요. 내 아버지 어머니가 나한테 베푸셨던 사랑을 생각하면 이건 문제도 안됩니다. 내가 부모님 속을 많이도 썩혀드렸을 뿐더러, 우리 부모님은 정말 나 하나만을 위하여 사셨습니다. 그 많은 사랑을 생각한다면 지금 내 자식들이 속 썩이고 있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넉넉히 참을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이야기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대로 '사랑을 더하라. 모든 것 중에 사랑을 더하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주님께서 용서하신 것 같이 용서하라 하십니다. 자유를 말씀하심입니다. 내가 용서함으로 저를 자유케 함이요, 내가 용서함으로 내가 증오로부터 자유하는 것입니다. 용서함이 없이는 아무도 주님을 뵙지 못합니다.

토마스 버크(Thomas Burke)라고 하는 사람과 프레데릭 카렌디시(Frederic Carendish)라고 하는 사람을 칼로 찔러 죽인 브라디(Brady)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느 농촌에 숨었는데, 농부가 고발해서 브라디는 체포되었고 곧이어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감옥에서 전도를 받고 신앙을 얻어서 예수 믿게 되었습니다. 또 세례도 받았습니다. 자기가 마땅히 죽어야 할 죄인이라는 것을 스스로 고백하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증오는 버리지 못했습니다. 자기를 고발한 그 농부를 미워하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 때문에 이 불행이 왔으니 용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형집행 하루 전날, 자기도 전혀 모르는 한 수녀가 면회 왔습니다. 만나서 하는 말이 "브라디씨, 나는 어떤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고 미워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기도하고 명상하고 애써도 용서할 수가 없어서 너무 괴롭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브라디는 "용서에 무슨 조건이 있나요? 다 용서해야지요." 이렇듯 천연스레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수녀가 말합니다. "나는 지금 당신을 용서합니다. 당신은 내 오빠를 죽였습니다. 당신이 죽인 토마스 버크는 하나밖에 없는 내 오빠입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을 미워했습니다. 그러나 이 시간에 당신을 용서합니다." 이 말을 듣고 브라디는 호되게 충격을 받았습니다. 고개를 떨구고 한참 있더니 그 수녀의 손을 붙잡고 말했습니다. "저를 용서해주십시오. 저는 제가 증오하던, 나를 고발한 그 농부를 지금 용서하겠습니다." 브라디의 얼굴이 처음으로 밝아졌습니다.

여러분, 결코 잊지 마십시다. 내가 용서 못하는 것은, 용서에 힘이 드는 것은 내가 용서받아야 할 사람이라는 것을 잊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엄청난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이 사실을 망각했기 때문에 용서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내가 인내할 수 없는 것도 내가 근본적으로 얼마나 큰 죄인이라는 것을 잊었기 때문에 인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내가 사랑해야 할 사람을 이렇듯 사랑하기가 힘든 것은 내가 그리스도로부터 받고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이 엄청나게 큰 것이라는 것을 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 안에 내가 지금 살고 있다는 것을 망각하고 있기 때문에 사랑의 힘이 없는 것입니다. 선택받고 사랑 받은 자, 그는 쓸모가 있습니다. 그에게 의미가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그에게 큰 사명을 주시고 계십니다. 선택받은 이유가 있습니다.

소중한 자기 존재를 알아야 합니다. 자기 정체감을 분명히 하십시다. 나는 선택받았습니다.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겸손하고, 그러기에 온유하고, 그러기에 참고, 그러기에 용서하고, 그러기에 당연히 사랑을 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여기에 진정한 화평과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선택받은 자의 윤리(골로새서 3:12-15)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고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또한 너희는 감시하는 자가 되라

 

 

 

성도 여러분,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하게 사는 것이겠습니까? 잘산다는 것과 행복하게 산다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흔히 잘사는 것 같아 보이지만 불행한 사람이 많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을 선택하겠습니까? 좀더 나아가서 인간답게 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역시 인간은 인간이기에 인간적 행복이 따로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동물적 욕망을 충족시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비인간적인 생활 속에서 찾을 수 없다는 것도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가장 인간적으로, 사람답게 사는 길이 어디 있으며 또 행복의 길이 어디 있겠습니까? 몇 가지로 생각해봅시다.

가장 행복할 수 있는 길은 욕망을 억제하는 데 있습니다. 아무래도 우리 인간은 동물적 욕망을 지니고 있는데, 이 욕망에 그대로 다 무방비 상태로 따라가서는 안됩니다. 먹고 싶다고 다 먹고, 가지고 싶다고 다 가지면 불행해진다는 말입니다. 욕망의 노예가 되어가고, 동물적 인간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쉽게 말해서 우리는 성욕을 제어할 줄 알아야 합니다. 소유욕을 자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상한 것은, 다 가지지도 못하면서 더 가지려고 하고 다 먹지도 못하면서 더 먹으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생각하면 그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더욱더 이상한 것은, 가질수록 욕망은 한층 더 높아집니다. 많이 가질수록 욕심이 더 많아집니다. 이 많은 욕심의 노예가 된 사람, 참 볼품없습니다. 불행한 사람입니다.

제가 아는 어느 분도 그래요. 몇 십억을 가졌는데 현금 한푼 없이 오막살이에 살아요. 먹는 것도 비참해요. 그 땅 한쪽 팔아도 되겠는데, 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나이도 벌써 팔십이 가까웠어요. 도대체 어쩌자는 것일까요? 등기부에 '이 땅은 아무개 땅이다'라고 써놓으면 어떻고 안 써놓으면 어떻습니까? 더 볼 것도 없고 더 가져야 할 것도 아닌, 정말 불필요한 것일 뿐입니다. 성경에 있는 말씀대로 우리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언제나 족하게 있는 줄로 알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내일을 걱정할 것도 없고, 과거를 염려할 것도 없습니다. 오늘 하루하루, 일용할 양식으로 충분합니다. 왜 우리는 어느 사이에 이렇듯 욕망의 노예가 되었습니까! 더 되려고, 더 가지려고, 더 높아지려고 하면서, 스스로 불행의 함정으로 빠져들어 가는 것입니까? 욕망을 스스로 다스릴 수 있을 때에 행복은 있는 것입니다. 가진 것을 족한 줄로 여기는 자에게 행복은 있습니다. 내가 가진 것을 제일 좋은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후회가 없어야 합니다. 적어도 내 나름대로의 이상을 가지고, 그 이상을 지향하면서 직선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종종 본의 아니게 이런 말 저런 실수를 해놓고는 뒤늦게 야 후회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아이고,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이런 후회에 자꾸만 사로잡혀 사는 사람은 참으로 불행한 사람입니다. 반대로 '그때에 그러기를 잘했지. 잘 선택했던 거야.

내가 참 잘한 것이었지'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후회해보아야 이미 지나간 일입니다. 그럼에도 이것을 고치지 못하고, 계속 후회라는 고통 속에 매여 있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세 번째는, 행복한 사람을 볼 때에 나도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라면 행복한 사람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정결함이 있습니까? 나는 나대로 따로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까? 내 이웃이 잘되고, 내 친구가 잘되고, 내 친구의 자식이 잘될 때, ', 참 잘되었구나'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같이 행복합니까! 아니면 배가 아파서 잠을 못 잡니까? 무릇 시기 질투에 매여 있는 사람은 영원히 불행합니다. 그런 사람이라면 행복은 아예 바라지도 말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는 행복이 있을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 잘되는 것을 볼 때에 마치 나의 일인 양 마음으로부터 함께 기뻐할 줄 아는 마음가짐이 되어야만 비로소 행복하다는 것을 잊지 말 것입니다. 시기와 질투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은 평생가도 어느 때 한번 참 평안을 맛보는 법이 없습니다. 남 잘못되었다는 소리 들으면 그로 해서 또 마음이 아프고 남 잘되었다고 하면 질투하느라 괴로우니, 그 언제라고 행복하겠습니까? 불행한 사람입니다. 윤리라고 하는 것은 그렇습니다. 위험으로부터 무관할 수 있으며,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으며, 후회 없는 선택을 해나갈 수 있을 때에 사람에게는 인간다운 바른 생이 열리는 것입니다.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이고, 순간적 욕망에 끌려 사는 사람은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철학자 쇼팬하우어는 양심에 다섯 가지 요소가 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오분의 일은 타인에 대한 두려움, 오분의 일은 종교적인 두려움, 오분의 일은 선입견에서 오는 두려움, 오분의 일은 허용으로부터의 두려움, 오분의 일은 관습상의 두려움이라고 했습니다. '양심은 두려움이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틀렸습니다.

 

양심을 두려움으로 여기는 사람은 불행합니다. 항상 양심의 가책에 쫓기는 사람은 어떤 일에도 행복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도덕성을 지닌 인간의 운명입니다. 양심이 나를 성원해야 합니다. 양심이 나를 기뻐해야 합니다. 양심이 나를 칭찬해야 합니다. 양심과 더불어 기뻐하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기쁨을 누리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런 이유로, 교리 중에서 가장 중요한 교리의 하나가 이것입니다. 양심의 자유, 신앙적 양심의 자유----이 자유를 누리는 자이어야만 행복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문제는 이상적 인간으로 살 수 있고, 사람답게 살아가는 길은 어디 있느냐 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 비결은 무엇이며, 그 동력은 무엇이며, 어떻게 하면 근본적으로 이런 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비법은 이렇습니다. '내가 누구냐?'라는, 자기 존재에 대한 정체감이 분명해야 합니다. 잃어버린 진실을 찾아야 합니다. 도대체 내가 누굽니까? 모르고도 아는 척, 되지 못하고도 된 척, 죄인이면서도 잘난 척…… 이래가지고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스스로 '자기됨'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내가 누구냐'하는 자기 정체를 분명히 인식해야 합니다. 거기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나 한사람 한사람이 누구인지를 가르쳐줍니다. 성경 전체의 주제가 곧 "나는 하나님이요, 창조주다. 너희는 피조물이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유아독존(唯我獨尊)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의 은혜로 태어났고, 많은 사람들 속에서 신세를 지고 삽니다. 흑 누가 스스로를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이라고 생각한다면 착각입니다. 성경은 이따위 착각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너는 피조물이다. 하나님인 내가 있고야 네가 있다. 내가 사랑해서 네가 있고, 내가 도와서 네가 있을 수 있다'---이렇게 가르칩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권세 위에 권세 있고 능력 위에 능력 있습니다.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그것이 첫째요, 둘째는 '구속받은 자'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다 죄인이다. 용납할 수 없게 큰 죄를 지었다. 전적으로 타락했다. 그런데 십자가의 은혜로 너희를 구속했다'라고 우리가 구속받은 존재임을 성경은 강조합니다. 세 번째는 '선택받은 자'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 중에 유독 네가 선택받았다. 네가 사는 환경, 네 처지가 모두 선택받은 것이다'라고 거듭 강조합니다. 오늘의 본문말씀도 우리를 '선택받은 자, 거룩한 자, 사랑 받은 자'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근거로 하여, 선택받은 자답게 자기정체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윤리입니다. 선택의 교리요 예정의 교리입니다.

무릇 교리라는 것은 참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예정론의 대표 격인 칼뱅(calvin, J.)'이중예정론'까지 주장하고 있는데 그 제자들은 평생을 배워도 납득이 잘 가지 않았습니다 어떤 때에는 이해되는 것 같고 어떤 때에는 안되는 것 같고, 이쪽으로 생각하면 말이 되고 저쪽으로 생각해보면 말이 안되고…….

퍽도 답답해하다가 칼뱅 선생이 세상을 떠날 때에 옆에 앉아서 또 물어보았답니다. "그 예정론, 맞는 것입니까?" 칼뱅 선생은 빙그레 웃으면서 "Bible says so."--"성경이 그렇게 말하느니라"라고 답하셨다 합니다.

여러분, 선택받았다는 교리에 대하여 우리가 어떤 때에는 이해가 잘 되지만, 어떤 때에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한가지 말씀 드린다면, 이것이 납득이 잘되는 자는 선택받은 자이고 영 납득이 안되거든 버림받은 자인 줄 아십시오. '선택받은 자'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비사(比辭)를 말하는 중에 제일 마음에 드는 이야기가 있어서 한마디하겠습니다. 부모가 전쟁에 다 죽어, 외돌토리로 살아남은 어린아이들을 모아놓은 이른바 전쟁고아원이 있었습니다. 이 아이들은 모두가 고아들이었지만, 그런 대로 원장님의 사랑을 받으면서 옹기종기 더불어 지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지체 높고 돈 많은 한 부부가 고아원 원장을 찾아와 부탁을 합니다. 양자 삼을 고아를 하나 달라고. 그래, 고아 하나를 선택해주었습니다. 그 부부는 이 아이를 데리고 가서 깨끗이 목욕을 시키고, 좋은 옷을 입히고, 호적에 올려서 그 집 아들로 정식 등록을 시키더랍니다. 그 아이는 아주 잘먹고 잘입고 잘 자면서 정말 훌륭하게 자랍니다. 어느날, 좋은 옷을 입고 옛 친구들을 만나러 고아원에 왔습니다. 다른 아이들이 볼 때에 얼마나 부러웠겠어요? ", 너 참 잘됐다" 이렇게 같이 기뻐 해주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이건 불공평하다. 양자 삼으려면 다 삼든지 아니면 말든지 하지 왜 하나만 데려갔단 말이냐"하고 투덜거리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선택받은' 그 아이는 이제 어느 쪽에 장단을 맞춰야 합니까? 선택받은 그 아이의 입장에서는 과거를 잊어버리고 어떠한 비난이나 평판도 생각할 것 없이 다만 나를 선택해준 분에 대하여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선택받은 자의 신분으로서 그 가문의 전통을 따라 높은 지체로 살아가야 할 윤리적 장래가 있을 뿐입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선택에 관해서는 은혜로운 선택, 은총적 선택을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신명기 76절로 8, 레위기 20장을 비롯하여 성경의 여러 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선택하였다.

많은 민족 중에서 이스라엘을, 많은 사람 중에서 아브라함을, 너를 선택하였다'라고, 선택의 교리를 강조합니다. '그런고로 너는 내 말을 들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은총의 선택입니다. 우리는 이에 내포된 중요한 기초적 교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선택'이라는 것은 무자격한 가운데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현실적으르 그렇습니다. 앞서 이야기된 그 고아는 남달리 똑똑한 것도 아니고 특별한 것도 아닙니다. 다만 선택되었을 뿐입니다. 자기 자격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무슨 시험을 본 것도 아닙니다. 다만 그 중의 하나로서 선택받은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누구나 전혀 무자격한 가운데서 선택받았다는 것을 잊지 말 것입니다.

선택받은 자의 기본 자세는 '나는 죄인입니다'하는 마음가짐입니다. '나는 모든 사람과 똑같은 죄인입니다. 나는 죄인 중의 죄인입니다. 나는 구원받을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하필이면 나를 이렇게 강권적으로 구원하셨습니다'하는 마음가짐입니다. 그렇습니다. 내게는 아무런 자격이 없습니다. 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내게는 의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직 은혜로 선택되었을 뿐이요, 주님의 놀라운 능력으로 선택된 것일 뿐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도 은혜요 둘도 은혜입니다. 현재에도 미래에도 은혜 안에 내가 존재할 뿐입니다. 이것이 선택받은 자의 자아의식입니다. 이렇다하게 잘난 것도 없고 특별한 것도 없습니다.

다만 주님께서 나를 택하셨을 뿐입니다. 엄청난 은혜일 뿐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때문에 오로지 감사해야 합니다. 오직 믿음입니다. 그 은혜를 믿어야 합니다.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감사, 오직 기쁨, 그리고 오직 영광만이 그리스도인의 윤리입니다.

너무나 감사합니다. 그러기에 나를 선택한 분에게 나를 위탁합니다. 내일에 당장 어떻게 되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선택된 것만으로 충분히 감사하니까요. 내일 가서 무슨 일을 당해도 상관없어요. 지금 받은 은혜 가지고도 충분하니까요. 더우기 나를 선택한 분에게 뜻이 있습니다. 경륜이 있는, 분명히 목적적 선택이요, 사명적 선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 나 자신을 위탁합니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선택을 받고 고향을 떠납니다. 나그네로 평생을 방황하지만, 그의 기쁨은 충분합니다. 박토에 살든 옥토에 살든, 애굽에 살든 가나안에 살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어디에 살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약속을 믿고 그에게 순종하기만 했습니다. 여유 만만합니다. 그래서 그는 롯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13:9)." 이것이 선택받은 자의 여유였습니다. 초연한 자세였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윤리라는 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당연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수평적 관계에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성경 속의 여러 가지 경험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를 하나 들어봅시다.

 

마태복음 18장에 보면, 만 달란트 빚진 사람이 나옵니다. 그 사람이 갚을 길이 없을 때, 주인이 그 빚을 탕감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감사하다며 인사하고 나가다가,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을 만나자 갚으라고 욕을 보였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만 달란트를 탕감해준 그 주인은 너무도 섭섭해서 이 사람을 다시 불렀습니다.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18:32,33)" 이것이 기독교 윤리입니다. 당연한 것입니다. 내가 저와 어떻게 하느냐고 물을 것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그러한 것입니다.

또한 요한복음 13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스도요 메시야되신 분께서 그 제자들의 더러운 발을 손수 씻어주셨습니다. 그 다음에 하시는 말씀이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13:14)" '당연히 그러해야 될 것 아니냐! 그것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시는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를 용서했으니 너희가 서로 용서함이 마땅하고, 내가 너희를 사랑하고 너희가 이 사랑을 받았으니 너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옳지 않느냐----당연한 것입니다. 기독교 윤리란 수평적 관계에서 얼마의 가능성이 있고, 얼마의 보상이 있고, 효과가 있고 없고, 질서가 있고 없고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에서 나오는 파생적인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아주 힘있는 윤리입니다. 맥빠진 윤리가 아닙니다. 하나의 구호나 관념 같은 것도 아닙니다. 이 윤리에는 근본적으로 엄청난 힘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이 힘의 근원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아가페의 이 참사랑을 내가 깨닫고 감격할 때에 내가 용서 못할 사람이 없고 사랑 못할 일이 없고 참지 못할 일이 없습니다. 바로 기독교 윤리로써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15:12)" 사도 바울도 말씀합니다. "만일 식물을 인하여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치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식물로 망케 하지 말라(로마서 14:15)." 항상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전제로 사랑을 펴야 할 것입니다. 긍휼, 자비, 겸손, 온유, 인내…… 이것을 행하기에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당연히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아는 어느 장로님이 자녀 때문에 무척 고생을 많이 합디다. 자녀들이 어떻게나 속을 썩이는지 가출은 말할 것도 없고, 있는대로 아버지의 마음을 괴롭힙니다. 그분을 만날 때마다 혹시라도 무슨 말 했다가 마음 상할까봐 위로도 할 수가 없어요. 보기에 민망할 정도로 자녀들이 얼마나 부모를 괴롭히는지 몰라요. 그런데 이상한 것은 정작 이 장로님은 평안하게 사는 것이었습니다.

걱정이 하나도 없는 것처럼 지내요. 하도 신통하고 이상해서 제가 한번 물어보았습니다. "자식이 그렇게 괴롭히는데도 어떻게 그리도 평안해보입니까?" ", 괜찮아요. 내 아버지 어머니가 나한테 베푸셨던 사랑을 생각하면 이건 문제도 안됩니다. 내가 부모님 속을 많이도 썩혀드렸을 뿐더러, 우리 부모님은 정말 나 하나만을 위하여 사셨습니다. 그 많은 사랑을 생각한다면 지금 내 자식들이 속 썩이고 있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넉넉히 참을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이야기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대로 '사랑을 더하라. 모든 것 중에 사랑을 더하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주님께서 용서하신 것 같이 용서하라 하십니다. 자유를 말씀하심입니다. 내가 용서함으로 저를 자유케 함이요, 내가 용서함으로 내가 증오로부터 자유하는 것입니다. 용서함이 없이는 아무도 주님을 뵙지 못합니다.

토마스 버크(Thomas Burke)라고 하는 사람과 프레데릭 카렌디시(Frederic Carendish)라고 하는 사람을 칼로 찔러 죽인 브라디(Brady)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느 농촌에 숨었는데, 농부가 고발해서 브라디는 체포되었고 곧이어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감옥에서 전도를 받고 신앙을 얻어서 예수 믿게 되었습니다. 또 세례도 받았습니다. 자기가 마땅히 죽어야 할 죄인이라는 것을 스스로 고백하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증오는 버리지 못했습니다. 자기를 고발한 그 농부를 미워하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 때문에 이 불행이 왔으니 용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형집행 하루 전날, 자기도 전혀 모르는 한 수녀가 면회 왔습니다. 만나서 하는 말이 "브라디씨, 나는 어떤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고 미워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기도하고 명상하고 애써도 용서할 수가 없어서 너무 괴롭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브라디는 "용서에 무슨 조건이 있나요? 다 용서해야지요." 이렇듯 천연스레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수녀가 말합니다. "나는 지금 당신을 용서합니다. 당신은 내 오빠를 죽였습니다. 당신이 죽인 토마스 버크는 하나밖에 없는 내 오빠입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을 미워했습니다. 그러나 이 시간에 당신을 용서합니다." 이 말을 듣고 브라디는 호되게 충격을 받았습니다. 고개를 떨구고 한참 있더니 그 수녀의 손을 붙잡고 말했습니다. "저를 용서해주십시오. 저는 제가 증오하던, 나를 고발한 그 농부를 지금 용서하겠습니다." 브라디의 얼굴이 처음으로 밝아졌습니다.

여러분, 결코 잊지 마십시다. 내가 용서 못하는 것은, 용서에 힘이 드는 것은 내가 용서받아야 할 사람이라는 것을 잊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엄청난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이 사실을 망각했기 때문에 용서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내가 인내할 수 없는 것도 내가 근본적으로 얼마나 큰 죄인이라는 것을 잊었기 때문에 인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내가 사랑해야 할 사람을 이렇듯 사랑하기가 힘든 것은 내가 그리스도로부터 받고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이 엄청나게 큰 것이라는 것을 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 안에 내가 지금 살고 있다는 것을 망각하고 있기 때문에 사랑의 힘이 없는 것입니다. 선택받고 사랑 받은 자, 그는 쓸모가 있습니다. 그에게 의미가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그에게 큰 사명을 주시고 계십니다. 선택받은 이유가 있습니다.

소중한 자기 존재를 알아야 합니다. 자기 정체감을 분명히 하십시다. 나는 선택받았습니다.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겸손하고, 그러기에 온유하고, 그러기에 참고, 그러기에 용서하고, 그러기에 당연히 사랑을 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여기에 진정한 화평과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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