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돌아가기 |
제 2권 한경직 목사 설교예화 150편 |
1.거짓 선지자와 십자가
제가 듣건대 전에 어떤 거짓 선교사가 자기는 하나님의 선지자라고 외치면서 자기의 말을 들르라고 부르짖었는데, 그의 이마에는 은으로 만든 둥글 한 것으로 가리고 다녔다고 합니다. 왜 그것으로 가리고 다니느냐고 물어 보면, 만일 그것을 떼면 거기에는 하나님의 빛이 나타나서 그 빛을 보는 사람이 눈이 어두워서 소경이 되는 까닭에 부득이 그 곳에 은으로 만든 것을 붙였다고 말 하드랍니다. 그러나 이 사람이 잘 때에 그를 따라가던 사람이 그것을 한번 뜯어보았습니다. 몰래 뜯어보니까 그 이마에는 다른 것이 아니고 문둥이 흔적이 있더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알지 못할 때에는 죄가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죄에 속았습니다. 죄의 마력에 끌렸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본 우리는 죄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추악하고 우리 주님까지 이와 같은 고통을 받게 하였던 그 죄의 정체를 알게되었습니다.
죄의 다스리는 권세가 역시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십자가를 다시 한 번 바라볼 때에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서 우리 주님이 그 고난받으신 것으로 하나님의 그 무한하신 사랑 즉 자기의 살을 찢고 자기의 피를 흘려서 우리를 구속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볼 때에는, 우리는 죄에는 죽었지마는 의에는 다시 살게 되는 것입니다.
2십자가의 빛
우리가 예배당 뜰에 나가서 서울 사방을 돌아보면 여러 가지 것이 보입니다. 삼각산이 보이고, 여러 가지 고층 건물이 많이 보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밖에 나가서 그것을 먼저 보지 말고 오늘 같이 해가 잘 비칠 때에 해를 한참 쳐다보세요. 그러다가 다음에 사방을 돌아보십시오. 그렇게 하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아니합니다. 해를 본 눈은 다른 것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아니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그 십자가에서 비치는 하나님의 사랑,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자기는 십자가에 못 박고 원수 된 사람의 죄를 용서하여 달라고 하는 그 기도의 음성,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나서 그 다음에 세상 것을 바라보십시오. 세상 것이 보이지 아니합니다. 전에는 향락이 귀해 보였지마는 물질도 보이지 아니합니다. 전에는 지위나 권세 같은 것들이 그렇게 귀해 보였지마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한참 바라보다가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 보이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죄에는 죽고 의에는 살아서 오직 십자가를 바라본 사람의 눈에는 오직 십자가만이 밝은 빛으로 그 심령을 채우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 오직 하나님의 의, 오직 하나님의 뜻이 그에게만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와 십자가>에서
3.리빙스톤의 기도
만일 우리의 이 서울이 그리스도를 온전히 영접한다고 하면, 이 서울에 대해서도 두 가지 결과가 나타날 것입니다. 첫 째는 의로운 성이 될 것이요, 죄가 없어질 것입니다. 깨끗한 서울이 될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참된 화평과 평강이 있을 것입니다. 만일 우리 전체, 우리 온 나라가 그리스도를 영접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 나라의 진정한 왕이 되시고 우리 나라를 다스린다고 하면, 우리 국가 전체의 의와 평강의 축복이 있을 것입니다. 종려 주일은 그리스도를 우리 왕으로 영접하는 주일입니다.
제일 먼저 아프리카에 가서 복음을 전파하다가 세상을 떠난 리빙스턴이 바로 세상을 떠나기 전 날 아침 아니면, 그 날 아침에 마지막 일기를 남긴 것이 있는데, 거기에 적혀 있는 간단한 기도 가운데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한 것이 있습니다. “오! 주여, 내 왕이여,” 이런 말로 기도를 했습니다. 리빙스턴은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의 주요, 자기의 왕으로 모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고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고 충성을 다하였습니다.
오늘 이 의의 깊은 종려 주일, 우리 하나 하나가 우리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왕으로 영접하고, 우리 나라가 그리스도를 왕으로 영접해서 그리스도를 높이고, 그리스도를 섬기고,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고, 그리스도에게 충성을 다하는 축복이 같이 하시기를 바랍니다.
<평화의 왕>에서
4.영원히 거하는 생활
우리가 영원히 거하는 생활을 하려고 하면 꽃과 같이 떨어지는 이 세상에 근거를 두어서는 안 됩니다. 영원히 서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의 생활의 근거를 두어야 될 것입니다. 일시 일시 변하는 인간의 명상이나 인간의 사상에 두지 말고, 변하지 아니하는 우주의 지표 적 진리가 되는 이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의 생활의 근거를 두고 살아야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읽은 이 요한 1서 2장17절을 다시 들으십시오.“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이처럼 이 세상은 지나갑니다. 그 정욕도 지나갑니다. 그렇지마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는 것입니다.
제가 오래 전에 북경 구경을 한번 했습니다. 고궁을 구경하고 별궁도 여러 곳을 가서 구경하는데, 한 곳에 가니까, 그 안내자가 하는 말이 아름다운 궁궐 가운데 어떤 한 방을 가리키면서 그 방이야말로 청조 말기에 가장 사치하고 호화롭고 세도를 부리던 서태후(西太后)가 살던 방이라고 합니다. 그 방에는 아무 것도 없고 낡은 침대와 베개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안내자가 웃으면서 하는 말이 그렇게 호화롭고 사치하고 그렇게 세도하던 서태후가 마지막에 남기고 간 것은 그 베개 하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지나갑니다. 세상에 권세도 지나갑니다. 세상의 영광도 지나갑니다.
저는 이번에 미국에 가서 30여 년 전에 제가 졸업한 대학을 한번 더 방문하는 혜택을 가졌습니다. 집은 여전합니다. 캠퍼스도 여전합니다. 오히려 더 아름다워졌습니다. 집도 여러 채를 더 지었습니다. 그러나 마음 가운데 한가지 섭섭한 것은 30여 년 전에 저를 가르쳐 주던 은사는 볼 수 없고, 다만 이 도회에 아직까지 살아 남아있는 은사는 80노인 밴드벨드 박사라고 하는 한 뿐이었습니다. 여러 은사들은 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지나갔습니다. 이렇게 이 세상은 지나가는 세상입니다
제가 이번에 세 주일 남짓하게 한국을 떠나 있다가 돌아왔습니다. 그러니까 잠깐 다녀온 셈입니다. 돌아와서 서울을 돌아오게 될 때에 한 가지 마음속에 일어나는 감상은 삼각산은 여전합니다. 한강도 여전합니다. 그러나 한국의 정계를 보면 완전히 변했습니다. 옛 정부는 지나갔습니다. 세상은 이렇게 지나가는 것입니다.
정권뿐이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이와 같이 지나갑니다. 권세도 지나가고, 일대의 문화도 지나가고, 예술도 지나가고, 주의와 사상도 지나가고, 모든 유행도 지나갑니다. 너무 유행만 따르지 맙시다. 어떤 이들은 요즘 데모만능인 줄 생각합니다. 청춘도 지나갑니다. 청춘을 자랑하지 맙시다.
저는 6·25때 유엔군이 평양을 점령한 뒤 곧 따라갔습니다. 저는 서성리 교회에 가서 예배를 보라고 그래서 서성리 교회에 가서 예배를 보며 설교를 했습니다. 옛날 이야기니까 이런 말을 해도 괜찮을 줄 압니다. 예배를 다 보고 여러분과 인사를 하는데 알 분도 있고 모르는 분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얼굴이 까맣고 자그마한 어떤 할머니가 저한테 인사를 하면서“저를 알겠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저는 이런 경우를 좀 많이 당합니다. 암만 생각해도 생각이 안 납니다. 그래서 미안하지마는 저는 정신이 없어서 미쳐 생각이 안 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할머니가 하는 말“저를 모르겠어요? 저는 저 남산 모루, 전에 목사님이 남산 모루에 와 계시지 않았습니까? 거기 있을 때 그 교회에 다니던 아무개올시다”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 때 40년 전에 그 남산 모루에서 알던 그 아무개는 얼굴이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주 아름다운 얼굴을 한 잘 생긴 여자 가운데 하나로 저는 생각했었습니다. 그랬는데 3, 40년 후에 보니 전혀 알 수 없었습니다.
청춘도 지나갑니다. 세상만 지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정욕도 지나갑니다. 우리 속에 있는 욕망도 연령을 따라서 지나갑니다. 어릴 적에 있던 욕망이 좀 크면 사라집니다. 청년시대의 욕망이 노년이 되면 지나가고 맙니다. 우리의 정욕도 환경의 변함에 따라서 또한 변합니다. 모든 것이 지나가는 세상에서 지나가는 욕망을 가지고 사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5.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
그러나 여러분, 지나가지 아니하는 것을 여기 한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인간 역사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개인의 생활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옛날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 가운데도“창천 유이 생남자( 蒼天有義 生男子) 란 말이 있습니다. 푸른 하늘에 뜻이 있어서 남자를 내었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뜻이 있어서 우리를 이 땅에 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그 뜻을 찾아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 하나님의 경륜대로 사는 사람, 하나님의 뜻을 바로 찾아서 그대로 행하는 사람은 영원히 없어지지 아니하고 거하겠다고 여기에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여 주신 것입니다.
전에 제가 평양에서 학교에 다닐 때에 흔히 대동강변 그 청루벽 아래와 모란봉과 을밑대와 그런 곳에 자주 산보하였습니다. 산보를 할 때에는 가끔 이런 생각이 납니다. 대동강의 물결은 그 시시각각으로 변합니다. 또 항상 끊임없이 아래로 흘려갑니다. 그렇지마는 한편에 높이 솟은 모란봉이나 을밑대 청루벽은 변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물결과 같이 흘러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하지 아니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은, 이 만세 반석 위에 생의 근거를 둔 사람은 영원히 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원히 거하는 생활의 비결은 첫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둘째는 영원한 주의 말씀에 근거를 두어야 도겠습니다. 셋째는 영원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여야 되겠습니다.
6.하나님의 손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 번은 어떤 교우가 자기 목사에게 가서 묻기를“어찌해서 주님께서 가룟 유다 같은 이를 택하셨습니까? 그건 이상하지 않습니까?”이렇게 말하였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들은 목사는 곧 대답하지 못하고 조금 생각하더니 서서히 대답하는 말이“나는 그것보다 더 이상한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주께서 왜 나 같은 사람을 택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누구나 스스로 자기자신을 솔직히 하나님 앞에서 반성할 때는 오직 자기가 죄 덩어리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사실 택함을 받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이상한 일일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믿는 사람 공통의 경험인 줄 생각합니다.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부족을 열심히 살펴 볼 때에는 과연 예수 님의 제자들이 한 번 말씀한 바와 같이“누가 능히 구원을 얻으리이까?”하면서 탄식할 수밖에 없는 줄 생각합니다. 좀 더 양심이 예민하면“나는 쓸데없는 사람이야 나 같은 죄인이 어떻게 구원을 얻을 수 있으랴”이렇게 낙심하기도 쉬운 줄 생각합니다. 혹은 자포자기 할 수도 있는 줄 생각합니다. 그러나 과히 그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는 줄 압니다. 구원은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근본적으로 주님께 있습니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나는 그리스도라 그리스도 내가 저희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너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그리면서 계속해서“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 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하셨습니다. 내 손에서 빼앗을 수 없고 그 다음에 다시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십니다. 우리 택함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 아버지의 손안에 있습니다.“아무도 내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이것은 우리가 분명히 압니다.
7.하나님의 선한 손
제가 오래 전에 당한 경험을 한 가지 말씀해 드리겠습니다. 제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은 항상 주저하지마는 오래 전 이야기이니까 괜찮은 줄 압니다. 제가 신의주에서 교회 일을 볼 때에 무슨 일이라고 다 말할 필요는 없지마는 한 번은 크게 마음이 상했습니다. 그만 낙심이 나서 일할 마음도 없어지고 용기도 없어졌습니다. 집에 돌아와서 나 혼자 잇는 방에 들어와서 그저 정신없이 방바닥에 넘어졌습니다. 넘어져 있는데 이상합니다. 지금까지 생각해도 확실히 모르지요. 제가 그 동안 잠깐 잠이 들어서 꿈인지 아닌지 모르지마는 이상한 것을 보았습니다.
제 자신을 보았습니다. 제 자신이 어떤 길을 갑니다. 길이 대단히 험합니다. 또 어떻게 피곤한지 알 수 없습니다. 그 이상 더 갈 수 없습니다. 너무 피곤해서 오른편 쪽으로 그만 쓰러졌습니다. 그러니까 난데없이 어떤 큰손이 ― 30년 전에 본 일이지마는 어제 본 일 같아요 ― 아마 사람의 손의 10배나 큰손이 오른 쪽에 와서 넘어지는 저를 얼른 붙들어서 일으켜 주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너무 피곤해서 왼쪽으로 또 넘어집니다. 또 다른 손이 왼쪽에서 못 넘어지게 붙듭니다. 앞으로 꼬꾸라집니다. 또 두 손이 앞으로 와서 앞으로도 꼬꾸라지지 못하게 합니다. 그냥 계속해서 그 험한 길을 이 손이 붙들어서 가게 합니다.
그런 저 자신을 보다가 깨어서 성경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읽은 성경이 이상하게도 에스라 7장 9절입니다.“정월 초하루에 바벨론에서 길을 떠났고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어 오월 초하루에 예루살렘에 이르니라”이것은 에스라의 이야기입니다. 에스라는 멀리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갔던 자기 동포와 같이 정월 초하룻날 예루살렘을 향해서 길을 떠났습니다. 먼 광야 길입니다. 원수가 많은 험악한 길입니다. 그런 길인데도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어 오월 초하루에 넉 달을 걸어서 예루살렘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우리의 천성 행로가 이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주를 믿고 주를 따라가는 길도 마치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을 향해서 가는 길처럼 황막한 광야 길입니다. 때때로 험한 준령이 우리의 앞을 막습니다. 장강대야(長江大野)가 우리의 앞을 막습니다. 때때로 함정이 잇습니다. 때때로 원수가 복병 하여 우리의 길을 기다립니다. 연약한 우리가 이 길을 갈 수 잇는 방법은 오직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선한 손이 우리를 도우심으로 승리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손은 선합니다. 아버지의 손은 만 유의 손입니다. 아버지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 없습니다. 예수 님께서도 십자가 위에서 세상을 떠나실 때 아버지께 자신의 영혼을 부탁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아버지의 손에 여러분의 심령을 부탁하세요, 살 때에도 아버지의 손에 부탁하고 세상을 떠날 때에도 아버지의 손에 우리의 영혼을 부탁합시다. 우리 사람은 약합니다. 나를 믿다가는 실패합니다. 언제 넘어질지 모릅니다. 마귀는 우리보다 강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손에 의지하시기를 바랍니다. <여호와의 손>에서
8.하나님을 경외하라
미국의 유명한 목사요 또 초대 프린스턴 대학의 학장으로 잠깐 지낸 조나단 에드워드라고 하는 이가 있습니다. 한 번은“진노하신 하나님의 손에 잡힌 죄인”이라고 하는 주제로 설교하였습니다. 그 설교하는 말 가운데 마치 죄인이 진노하신 하나님의 손에 잡힌 것은 어떤 사람이 아주 흉측한 벌레를 손에 잡고 장차 불에 던지려고 하는 것 같은 운명에 있다고 하는 말을 우리에게 남긴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은 죄인을 반드시 벌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육신만 벌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죽은 후에 영혼까지도 지옥 불에 던져서 형벌 하시겠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혹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인데 어떻게 세상에서 잠깐 지은 죄 때문에 영혼을 형벌 할 수가 있을까? 그것은 너무 심하지 않은가?”그러나 이 진리는 보통 성경에 가르친 말씀도 아닙니다. 예수 님 자신이 분명히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을 보면 얼마나 확실한 사실인가 하는 것을 우리가 미루어 알 수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 30절에“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마태복음 25장 41절에는“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는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 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마가복음 9장 47-48절에는 주님께서 친히“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 하게 하거든 빼어 바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 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니라”분명히 말씀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우리가 두려워해야 됩니다. 참으로 두려워할 자는 하나님 한 분밖에 계시지 아니하십니다.“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9.모세의 신앙
그러면 사람은 어찌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까? 그 이유는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육신의 눈으로 보이지 아니합니다. 그러니까 잊어버립니다. 그러니까 못 보시는 줄 압니다. 전파도 보이지는 아니합니다. 공기도 보이지는 아니합니다. 보이지 아니하는 실체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람의 영혼도 보이지 아니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모세의 신앙을 기록할 때에 이런 말로 기록했습니다.“그는 보이지 않는 자를 보이는 것같이 하여 살았다”고 말씀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우리의 눈으로 보이지 아니하나 우리의 눈으로 보이는 것과 똑같이 그 앞에서 사는 것이 참된 신앙 생활이올시다. 신앙 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비록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으나 하나님께서 나를 내려다보시고 하나님께서 나와 같이 계신 것을 언제나 의식하면서 생각도 하고 말도 하고 사는 것이 신앙 생활이올시다. “눈을 지으신 자가 어찌 보지 못하겠느냐?”성경이 우리에게 경고하여 주십니다.
우리와 같이 성경을 분명히 배우지 못했던 옛날 사람의 말 가운데도 암실기심이라도 신목여전(暗室欺心 神目如電)어두운 방안의 속이는 마음일지라도 신의 눈이 번개처럼 밝게 본다고 하는 옛날 사람의 경고가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보시는 것이 제가 지금 이 자리에서 여러분을 보는 것보다도 더 분명히 보십니다. 저는 여러분의 외모만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마음을 들어다 보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 분을 경외하면서 사는 것이 참된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은 X광선보다도 더 밝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이는 사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까닭은 하나님 앞에서 옳은 생활을 하는 이에게 대하여 사람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10.제2의 기회
한번 실수는 병가의 상사라고 하는 우리 한국의 속담이 있지 않습니까? 실수와 실패는 곧 인간의 것이올시다. 그렇지만 회개하고 다시 일어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제2의 기회를 주십니다.
운동 같은 것도 그렇습니다. 어떤 선수가 달리다가 넘어진다고 할 지라도 다시 일어나서 경주를 계속하는 사람이 최후의 승리를 얻습니다. 전쟁도 그렇습니다. 첫 번 전쟁에 패전했다고 낙심할 것이 아닙니다.
2차대전의 역사를 지금도 여러분께선 생생히 기억하시지마는 연합군 측에서 처음에는 다 패전하였습니다. 유럽에서는 프랑스 영국 할 것 없이 독일에게 첫 번 전투에서는 전부 패전했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다시 유럽을 점령하고 히틀러도 온전히 굴복시킨 것입니다.
태평양전쟁도 역시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일본에게 영국과 미국이 아주 참패를 당했습니다. 진주만이 다 부서지고 말레이시아를 다 빼앗기고 싱가포르를 다 점령당하고 필립 핀도 다 점령당하고 마지막에 맥아더도 쫓겨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다시 돌아왔습니다. 다시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최후 승리를 거둔 것입니다. 이것은 전쟁뿐만 아닙니다. 사업도 그렇습니다. 사업도 우리가 실패했다고 낙심할 것이 아닙니다. 다시 일어나는 사람이 마지막에 성공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믿고 나갈 때에 나는 원하지 아니하지만 모르는 가운데 유혹이 들기 쉽고 죄악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렇지만 내가 시험에 드는 것을 아는 대로 곧 뉘우치고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두 번째 은혜를 주시고 두 번째 기회를 주셔서 그런 사람을 통해서도 위대한 역사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11.둘째 축복의 기회
우리가 실패를 했거나 시험에 들었을 때 기억 할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낙심하지 아니 할 것입니다. 악한 마귀는 시험에 들기 전에는 우리에게 거짓말을 합니다. 죄라고 하는 것은 조금 지어도 괜찮다면서 더러 시험에 들기를 귄 합니다. 하지마는 정작 시험에 한번 듭니다. 그 다음에는 마귀의 말이 변합니다. “옳지 너 죄지었지? 이젠 소망 없어 누가 다시 너를 신용하겠니? 누가 너를 다시 사람으로 보겠니? 누가 너를 용납하겠니? 아주 정말이야”이렇게 마귀가 시험합니다.
죄지었을지라도 회개하면 하나님께서는 둘째 축복의 기회를 주십니다. 탕자가 탕자로서 갖은 죄를 지었습니다. 허랑 방탕한 죄를 지었습니다. 그렇지마는 돌아올 때에는 아버지께서 두 손으로 영접해서 환영했습니다. 삭게오 같은 사람이 민족을 배반하고 요즘 말로 부정 축재를 하였고 여러 가지 죄를 지었지마는 온전히 회개할 때에 주님께서는 영접해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신 것입니다. 심지어 십자가에 달렸던 살인 강도가 죽기 전에 회개를 할 때에 주님께서는 그 강도를 낙원에 데리고 갔습니다. 시험에 들어 한 번 죄 지었다고 낙심할 것이 아닙니다. 돌아보면 하나님께서 두 번째 은혜를 주시고 두 번째 축복을 반드시 주시는 것입니다. <제2의 기회>에서
12.성결한 생활
전에 어떤 경관이 거지통에 가서 거지들을 전부 조사하는데 제일 먼저 있는 거지를 만나서“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니까? 얼른 대답하는 말이“내 이름은 김백억이올시다”순경이 그 말을 듣고“김백억이야, 금백억이 거지통에서 사나?”아마 아버지는 그 아들을 낳은 다음에 너무 기뻐서 이 다음에 돈 많이 모으고 잘 살라며 이름을 백억으로 지은 모양입니다. 그랬더니 이 백억이라고 하는 녀석이 마지막에는 거지통에 삽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귀한, 아름다운, 보배로운, 거룩한, 이름을 주셨으면 이 이름에 합당한 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성도(聖徒)이름을 가지고 속도(俗徒)의 생활을 해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그러면 성도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길게 말할 필요가 없는 줄 압니다. 우리는 성경의 교훈을 통해서, 또한 지난날의 2천여 년 동안 기독교 역사를 통해서, 특별히 거의 완전한 자리에 올라섰다는 여러 성자들의 생활을 통해서, 이 성도의 모습이 어떠하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대강 짐작해서 깨달을 수가 잇습니다. 우선 무엇보다도 그들의 생활의 첫째 특색은 성결 이올시다. 거룩하고 깨끗한 것이올시다. 시편 24편에“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 고, 곧 손이 깨끗하며 뜻을 허탄(虛誕)한 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다시 말하면 손이 청결하고 마음이 청결하며 뜻이 청결하고 입이 청결합니다.
전에 어떤 성자는 정한 마음을 회복하기 위해서 추운 겨울에 얼음 구멍에 그 몸을 던진 분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어떤 성자는 자기의 몸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서 옷을 벗고 가시덤불에 뒹굴어서 자기 몸을 괴롭게 함으로 자기의 마음에 깨끗한 것을 회복한 성자들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산 물고기는 짠 바닷물에서 살지마는 그 살은 짠물에 배지 아니합니다. 참 성도는 더러운 속세에서 살지마는 더러운 물이 그 마음에 배어 들어가지 않도록 해야 될 것입니다.
그럼으로 에베소서 5장 3절에 사도 바울은 이런 말로 에베소 교인들을 권면하였습니다.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이것은 성도의 마땅한 말입니다. 성도의 모습의 첫째 특색은 성결함에 있습니다. 그 마음이 성결하고 그 입이 성결하며 그 뜻이 성결하고 그 행실이 성결해서 더러운 세상에 살지마는 그 생활을 깨끗이 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13.화평한 생활
그리고 이들 성자의 생활을 살펴볼 때에 둘째 특색으로 나타나는 것은 화평(和平)이올시다. 시편 34편에“생명을 사모하고 장수하여 복 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누구뇨 네 혀를 악에서 금하며 네 입술을 귀사한 말에서 금할지어다.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화평을 찾아 따를 지어다”화평을 구하는 말입니다. 주님께서도 산상보훈에“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성도의 모습의 둘째로 뛰어나게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은 회평입니다. 그 마음속에 화평이 있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화평이 잇고, 그 말이나 성품에 화평이 있고, 그 생활이 화평을 구하는 생활, 이것이 특별히 뛰어나는 성도의 모습인 것입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아니하고 욕을 욕으로 갚지 아니하며 어떠하든지 악을 선으로 이기는 이러한 사실입니다. 분한 마음이 나도 그 마음을 참고 원한을 마음 가운데 오래 품지 않고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여 주는 그 화평의 마음이 곧 성도의 모습인 것입니다.
14.성 프랜시스와 슈바이처 이야기
전에 성 프랜시스가 자기의 제자들과 같이 어떤 산간에 살 때에 어느 날 저녁 프랜시스가 잠깐 나간 사이에 그 산중에 있던 도둑 몇 사람이 들어와서 그 제자들을 보고 먹던 떡이 있으면 좀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제자들이 대단히 노해서“이 도둑놈들아, 너희들이 일해서 먹지 아니하고 도둑질해서 먹다가 마지막에는 우리 선생님의 마른 떡까지 빼서 먹으려고 왔느냐?”하고 제자들은 대단히 책망해서 쫓아버렸습니다. 프랜시스가 돌아왔습니다. 제자들이 그 사실을 보고했습니다. 그 보고를 다 듣더니 프랜시스는 오히려 자기 제자들을 책망하면서“도둑이건 도둑이 아니건 배고픈 사람에게 떡을 주는 것은 우리가 마땅히 할 일인데 너희들은 왜 떡을 주지 아니했느냐? 떡을 내어 주면서“이제 이 덕을 가지고 산에 가서 그 도둑을 찾아서 이 떡을 먹이고 돌아 오라”그래서 이 제자들은 밤 세도록 찾아다니다가 마침내 도둑을 만나서 그 떡을 다 먹였다고 합니다. 그 도둑들이 얼마나 고마운지 이 제자들과 같이 프랜시스에게 와서 죄를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되어서 그 가운데는 프랜시스의 유명한 제자가 된 사람도 있습니다. 화평을 사랑하고 죄를 용서해 주고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갚아서 죄인을 구원하는 것은 성도의 모습이올시다.
지금 아프리카에 가 있는 슈바이처 박사가 이런 말을 한 번 했습니다. 자기가 본래 자라난 교회에 어떤 잘 믿는 교인이 한 분 계신데 이 분은 자주 귀가 멀어서 설교는 전혀 듣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언제든지 예배당에는 꼭 출석합니다. 한 번은 물어봤다고 합니다.“당신은 설교 한마디도 듣지 못하면서 뭘 하려 예배당에 늘 옵니까?”“우리 믿는 사람들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그 사도신경에 있는 성도의 교통을 믿는데 내가 비록 설교는 듣지 못하지마는 성도들이 모이는데는 같이 가서 성도의 교제를 나누고 함께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은 마땅히 내가 성도로서 할 것이 아닙니까?”성도의 교통을 중하게 여긴 것입니다.
15.무아의 봉사
그리고 이 성자들의 생활을 살펴 보건대 셋째 특색은 무아의 봉사입니다. 말없는 봉사입니다. 앞에서 프랜시스 이야기를 했지마는 왜 프랜시스를 성자라고 합니까? 그는 자기가 없는 봉사를 합니다. 병자를 도와주고, 김 못 매는 이 있으면 김 매주고, 추수 미처 못하는 사람이 있으면 가서 추수를 해주는 등 자기가 없는 봉사를 했습니다. 하와이에 문둥이들만 사는 섬에 가서 일생을 바친 다미안을 왜 성자라고 합니까? 자기가 없는 봉사를 하였습니다. 20세기에서 우리 기독교도들 가운데 성자라고 이름을 들은 이는 제가 기억하는 대로 아마 서양에는 아프리카에 가서 일생 일하는 슈바이처 박사이고 동양에서는 몇 달 전에 세상을 떠난 일본의 가가와 도요히꼬(賀川豊彦) 목사일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이 다‘내’가 없는 말없는 봉사를 하였습니다. 봉사가 귀하지마는‘나’라고 하는 것이 들어가면 봉사의 가치가 없어집니다. 성경의 말씀과 같이 향기로운 기름에 죽은 파리가 빠진 것과 같습니다. 내가 모른 봉사, 내가 없는 봉사. 이것이 성도의 모습의 특별한 특색인 줄 생각합니다.
제가 몇 해 전에 아프리카 캐머룬에 가서 순회할 때에 어떤 곳에 가보니까 전부 흑인만 있고 선교사는 지금 두 집밖에 없는데 그 중 한 가족은 안식년으로 미국에 들어가고 그 흑인만 사는 동네에 미국 여자 선교사 혼자서 병원을 차러놓고 의사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들으니까 본래 그 여자의 아버지가 개척 선교사로 그 곳에 와서 의사 활동을 하다가 열대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어머니도 이어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딸 하나만 남았습니다. 이 딸이 아버지의 뜻을 이어서 미국에 돌아와서 의학 공부를 하고 의사가 되어서 아버지의 사업을 계속하기 위해 그 흑인들만 사는 그 곳에서 홀로 그들에게 봉사하는 광경을 볼 때 제 마음 가운데 과연 여기에 성도의 모습이 있구나 하고 큰 감격을 받았습니다.
<성도의 모습>에서
16.이전투구와 용두사미
함경도서 오신 교우 많이 게신데 좀 미안하지마는 전에 어떤 사람들이 팔도 사람들의 성격을 이야기하다가 함경도 사람들의 성격을 평한 것을 보면 이전투구(泥田鬪狗) 라는 말로 비평했습니다. 무슨 뜻인고 하니“진흙 밭에 개 싸움하는 것 같다”는 말입니다. 그 말을 얼른 들을 때에 함경도 사람을 욕하는 말이라고 들을 수 있지마는 절대로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욕하는 말이 아니고 칭찬하는 말인 줄 생각합니다. 진흙 밭에서 개 싸움하는 것을 보면 그저 이 놈들 싸움 붙은 다음에는 멎지 않습니다. 그저 그냥 싸움만 계속합니다. 아마 대부분이 함경도 사람의 성격이 한 가지 무엇을 시작하면 중간에 놓지 아니하고 그냥 끝까지 하는 그 성질이 있는 모양입니다
한편 우리가 용두사미(龍頭蛇尾)라는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말을 그대로 풀면 머리는 용인데 꼬리는 뱀이란 말입니다. 처음에는 엄청나게 일을 벌려 놓아 큰 일을 하는 것 같으나 끝은 후지 부지 얼버무린 부진한 형상을 뜻합니다. 시작은 좋게 나왔다가 그 다음에 사그라집니다.
17.석수와 큰 바위
여러분, 석수가 큰 바위를 깨뜨리는 것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석수가 큰 바위를 깨뜨려 부수려고 할 떼, 맨 처음 쇠못을 하나 대고 방망이로 첫 번 땅 때리고 나서 보아야 아무 틈나는 것이 없습니다. 두 번 때려도 마찬가지로 아무 틈나는 것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 같아서는 못하겠다고 그만 둘 것입니다. 그러나 석수는 그렇지 않습니다. 한 번 때리고 두 번 때리고 세 번 때리고 마지막에 금 날 때까지 때립니다. 마지막에는 큰 바위가 깨뜨려지고 맙니다.
18.모니카의 끈기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가 15년 동안 낙심하지 아니하고 계속해서 기도하고 권면하는 가운데 마지막에 가서 아들이 회개하지 않았습니까? 모니카는 이 은전을 찾은 것입니다.
이 은전을 찾으니 이 여자가 제일 먼저 무엇을 하겠습니까? 여기 자세히는 없지마는 은전을 갖고 보니 처음에는 빛이 번쩍 번쩍 났었는데 지금은 형편없이 되었습니다. 먼지가 묻고 녹이 쓸고 더러워 졌습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손수건 같은 것으로 빡빡 닦아서 아주 반들반들하게 빛냈습니다. 그리고 보니 황제의 화상이 환하게 빛이 났습니다.
마찬가지로 성신께서 이와 같이 잃은 보배인 인간의 심령을 찾은 다음에는 제일 먼저 하는 것이 그 심령을 깨끗하게 하십니다. 닦아주십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다시 온전히 보일 수 있도록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해 주십니다. <잃은 보배를 찾다>에서
19.대리석 십자가에 새겨진 ‘오직 예수’
제가 어떤 책을 보니 스위스에 있는 유럽의 제일 높다고 하는 알프스 산 어떤 높은 봉우리에 흰 대리석으로 아름답게 십자가를 해 세웠다고 합니다. 그 대리석 십자가 위에는‘오직 예수’란 글자를 새겼다고 합니다. 그 대리석 십자가를 어떻게 세우게 되었냐? 일찍이 어떤 분이 자기의 가족을 데리고 스위스에 피서를 갔다고 합니다. 어떤 날 그 분이 자기 사랑하는 딸을 데리고 알프스 어떤 높은 봉우리에 등산을 하였습니다. 높은 산꼭대기를 조심조심해서 올라갔지마는 그만 실수해서 그 사랑하는 딸이 발이 미끄러져서 높은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고 합니다. 결국은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분의 슬픔은 말할 수 없었습니다.
한 여름 서늘한 스위스에서 평안히 지내려고 피서 갔다가 이와 같은 참변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 분은 돈이 많은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돈이 위로가 되지 못했습니다. 이 분은 지위도 상당한 분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지위도 위로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 때에 그이에게 참된 위로를 주신 분은 예수밖에 없는 것을 그 분이 절실히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리고서는 그 산봉우리 위에 큰 대리석으로 십자가를 세우고 거기다가 새기기를‘오직 예수’우리에게 최후의 소망과 위로를 주실 분은 오직 예수 한 분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오직 예수만 의지합시다. 돈을 의지하지 맙시다. 세력을 의지하지 맙시다. 오직 예수만 믿고 의지합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봅시다. 베드로처럼 세상 물결을 바라보지 맙시다. 세상의 어떤 것도 바라보지 맙시다. 예수만 바라봅시다. 세상의 다른 것을 따라가지 맙시다. 오직 예수만 따라갑시다. 이것은 개인에게 있어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국가도 역시 그런 줄 압니다. <오직 예수>에서
20.피얼스 박사의 증언
어떤 목사 수양회를 할 때에 피얼스 박사가 오셔서, 보통 신문에 나타나지 아니하는 사실, 특별히 쿠바에서 된 일을 우리에게 말 해 준 적이 있습니다. 서인도 제도에 중국 사람이 상당히 많이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쿠바에도 중국 사람이 많이 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과히 만치 않았는데 특히 1948년 이후로 중공군이 중국 본토를 점령하면서부터 중국 본토의 피난민들이 쿠바에 와서 사는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그 가운데는 믿는 사람의 수가 많다고 합니다. 자연히 그럴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 쿠바가 중공을 승인합니다. 특별히 중공에서 사람을 데리다가 쿠바를 전폭적으로 적화 계획을 한다고 합니다. 이 사람들이 와서는 미리 다 조사해서 누가 카스트로 정부를 지지하며 반대하는지 조사하는데, 제일 먼저 중국사람부터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중국 사람 가운데 이 적색 정부를 지지하지 아니하는 사람은 모두 색출해서 중국 본토로 보낸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중국 본토에서 피난해 갔던 사람들이, 특별히 믿는 사람들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쿠바의 신자들이 밤낮 자지 않고 눈물로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분명히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대는 언제 어느 곳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직면하고 이것을 분명히 깨닫고, 깨어서 여기에 대비하면서 살아가야 될 것입니다. 깬 사람은 잠꼬대하는 법이 없습니다. 꿈속에서 잠깐 있던 일, 같은 일 때문에 싸움하지 않습니다. 큰 원수가 있는데 작은 원수를 맺지 않습니다. 깬 사람은 기도합니다. 나라를 위해서, 세계를 위해서, 내 가정을 위해서, 내 영혼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기도합니까? 혼자만 기도할 것이 아닙니다. 모여서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구역에서 구역끼리 모여서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가정에서는 가족끼리 모여서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제일 기도하기 좋은 시간은 새벽입니다. 새벽 기도회에 여러분 가운데 몇 분이나 나오십니까? 새벽 기도회에 참여 못하는 것은 늦잠 때문에 못합니다.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깨어서 기도합시다.
깨여있는 사람은 자기의 책임을 합니다. 자기의 책임은 우선 감당합니다. 만일 우리가 다 깨었다고 하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남한에 복음을 전파하는 문을 크게 열어 놓았을 때에, 무엇보다도 이 기회를 이용해서 한 마음 한 뜻으로 전파합시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때를 당하여 자지 말고 깨어 있으라고 간절히 권면하고 격려합니다.
21.하나님의 물통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집에 귀한 아들이 하나 있는데 다른 것은 다 좋아요, 그런데 이 사람의 나쁜 버릇은 늦잠 자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아무리 일어나라고 해도 안 일어나고 늦잠을 잡니다. 그래서 한 번은 너무 답답해서 그 이웃에게 가서, 좀 불량한 사람이 그 동리에 있는데 그 사람 앞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니까“예, 제가 내일 아침에 깨워들이지요”“그렇게 하겠나”그렇게 하겠습니다.“그럼, 그렇게 해보게”
그 이튿날 아침에도 해가 중 낮이 되었는데 안 일어납니다. 그 불량한 사람이 왔습니다. “일어났습니까? 아직 안 일어났어“제가 깨어 보지요, 물통 하나 있습니까?”물통을 가지고 우물에 나가더니 찬물을 가득 받아 가지고 들어와서 문을 활짝 열더니 다짜고짜로 찬물을 얼굴에 좍 끼얹었습니다. 그러니까 그토록 곤하게 잠자던 사람이 후다 닥 일어나더랍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깨어 기도하라고 여러 번 권면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파수꾼을 통해서 우리 믿는 사람에게도 격려하고 안 믿는 사람에게도 경고하며 여러 번 경고합니다. 깨어서 기도하면 시험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아니하면 저는 무서워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물통을 들고 와서 전부 물을 끼얹을지 누가 압니까? 그런데 그 물통이 공산당일지 어떻게 압니까? “깨어 있어 기도하라”
<깨어 기도하라>에서
22.신교의 자유가 있기까지
오늘 종교 개혁 주일을 당해서 우리 신교를 믿는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여기에 대해여 알 만한 몇 가지를 특별히 하나님께서 도우시는 대로 생각하고자 하는 바입니다.
여러분께서 아시는 바와 같이 제1세기에 주님께서 오시고 오순절에 성령께서 임하신 후 온 사도들과 믿는 사람들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복음이 당시 로마 제국에 널리 펴지게 된 것입니다. 유대 사람들의 핍박이 먼저 있었고, 그 다음에 로마 정권의 핍박이 가혹했지마는, 당시의 믿는 사람들은 담대히 사방에서 복음을 전파해서 주 후 313년에는 기독교도 온전한 신앙의 자유를 로마 제국에서 얻게 된 것입니다. 그 후 몇 해가 되지 아니해서 기독교는 당시 그리스도를 믿는 콘스탄틴 황제에게 의해서 국교로 인정을 받게 되었고, 그 때부터 전 로마 제국이 신봉하는 유일(唯一)의 종교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 후에 불행이 로마 제국이 분열되어서, 로마 시를 중심으로 하는 서 로마 제국이 이루어졌고, 콘스탄틴노불을 중심으로 하는 동 로마 제국이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교회의 정치상 발전도 그 영향을 많이 받아서, 서 로마 제국의 판도 안에 있는 교회들은 점점 콘스탄틴노불에 있는 대주교가 통치하게끔 된 것입니다.
그 후 몇 세기를 내려오면서 그 두 교회 사이에 큰 교리 상 차이는 없지마는 대체로는 교권의 충돌로 말미암아서 동편에 있는 교회와 점점 멀어지다가 마지막에 1054년에 불행하게도 동 교회와 서 교회가 완전히 분열된 것입니다. 그래서 11세기부터, 지금으로 말하면, 동편 유럽과 중동지대에 있는 교회를 정통교회 혹은 헬라 정통 교회라고 하는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고, 로마 시를 중심으로 하는, 다시 말하면 로마 교회의 다스리는 서 로마 제국 판도 안에 있는 교회를 로마 카톨릭 교회라고 부른 게 된 것입니다.
23.카톨릭의 자취
본래 카톨릭(Catholic)이라고 하는 말은 라틴말로‘일반적’이라고 하는 뜻입니다.‘세계적’이라고 하는 뜻입니다. 지금 우리가 이따금 쓰는 에큐메니칼이라고 하는 말과 뜻이 대동소이합니다. 그래서 사실은 11세기 까지 내려오는 동안은 부분적으로 인도의 말토마 교회라든지, 애굽의 콥틱 교회든지, 혹은 수리아 교회가 분열되었지마는 기독교 전체는 대체로 이 카톨릭교회라고 하는 이름 아래에 내려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다가 11세기에 동서교회가 분열된 까닭으로 그 다음부터는 서편에 있는 교회만을 로마 카톨릭 교회라고 하는 이름으로 역사상 불리우게 된 것입니다.
그 다음부터 유럽은 대체로 이 서 교회, 로마 카톨릭 교회의 지배아래 있게 되었는데, 여러 암흑 세기를 지나오면서 불행히 이 서 교회가 많이 부패하게 되었습니다. 신덕(信德)이 없는 사람들이 교황이 되고, 주교가 되고, 혹은 신부가 되며, 심지어 교직을 매매하게끔 되었고, 여러 가지로 부패해 내려오다가 16세기초에 와서는 심지어 사람이 죄 사함을 받는데 속죄 표를 사면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다고 하는 이론이 성립되게 되었고 그와 같은 일을 교황청에서 감행하게끔 된 것입니다.
24.루터와 종교개혁
본래 마틴 루터는 독일 색슨이라고 하는 지방에서 광부의 아들로서 가난하게 났는데, 그러나 그 때에 신앙의 법대로 경건한 가정에서 났습니다. 어렸을 적부터 아주 엄격한 신앙지도를 받았고, 소학교와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가서 졸업한 후에는, 그 당시에 흔히 하던 대로 자기의 몸을 온전히 하나님께 바칠 뜻으로 수도원에 들어가서 수도사가 되었습니다. 수도사가 된 얼마 후에, 신부로서 안수를 받으면서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성경을 강의하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그가 맡은 과목은 시편과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였습니다. 이와 같은 성경과목을 가르치면서 연구하는 동안에 점점 깨닫게 된 것은 당시 교회의 교훈과 행사가 성경의 교훈과 많은 차이가 있다는 것을 스스로 발견하게끔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청년 신부는 마음 가운데 많은 고민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때마침 로마 교황이 성 베드로(St, Peter)라는 큰 예배당을 짓기 위해서 모자라는 돈을 모금하는데 속죄 표를 선전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볼 때에 이 청년 루터는 더 침묵을 지킬 수가 없게되었습니다. 그래서 95조의 그릇된 점을 지적하면서 속죄 표 파는 것을 반대했고, 그 당시의 소위 참 회개라고 하는 모든 것에 대한 반대를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은혜로 죄 사함을 허락하여 주시는 것인데 속죄 표를 사서 어떻게 죄 사함을 받을 수 있겠느냐고 반대를 하게끔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니까 처음에 비텐베르크 작은 교회에서 시작이 되었지마는 이 소식이 온 유럽에 펴지게 되었고 종교개혁의 불길은 요원의 불과 같이 온 세계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교황은 자기의 정치적 세력을 이용해서 물론 능력으로 탄압하기를 시작했습니다. 마지막에는 신교들도 부득이 핍박을 받다 못해 싸울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소위 종교전이 16세기 와 17세기에 많아졌습니다. 스페인 같은 데서는 종교재판소에서 신교 사상을 가진 사람을 전부 일일이 심사해서 학살한 수가 얼마나 많은지 부지기수입니다. 프랑스 같은 나라에서도 1572년 8월 23일, 성 바돌로매 제일(祭日)때는 갑자기 구교도들이 일어나서 7천명에서 1만에 달하는 많은 신교도들의 생명을 파리에서 학살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30년 전쟁이 일어나서 오랫동안 끌다가 마침내는 1648년 웨스트팔리아 조약에 의해서야 비로소 유럽에서 신교도들이 양심대로 주를 믿을 수 있는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 말을 여러분에게 하는 것은 양심대로 믿을 수 있는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하여 얼마나 값비싼 희생이 지불되었는가 하는 것을 우리가 깨닫고,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신교의 자유가 있다고 하는 것을 감사할 수밖에 없는 까닭에서입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에서
25.구교 국가의 신교 핍박
신앙의 자유를 어떻게 보느냐? 물론 이 20세기에서 구교가 신교를 무력으로 탄압하려는 생각은 안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래도 사실을 사실대로 알아야 되겠는데 현재 20세기에서도 구교가 절대 다수인 나라에서는 신교가 핍박을 받는 교회가 많습니다. 가령 스페인에서도 현재 받습니다. 제가 지난번에 갔던 남아메리카 방문 국 가운데 콜롬비아와 같은 나라가 특별히 그렇습니다. 그곳은 천주교가 절대 다수이니까 위에 대통령으로부터 순경에 이르기까지 천주교가 정권을 다 잡았습니다. 핍박하려면 얼마든지 핍박합니다. 콜롬비아에 가서 제가 그 소식을 직접 들어보니 과거 20년 동안에 이와 같은 천주교 나라에서 신앙 때문에 순교를 당한 사람이 118명이라고 합니다. 예배당 66곳이 파괴당했다고 합니다. 이 구교 압박으로 폐쇄 당한 학교가 무려 2백 학교나 된다고 합니다.
먼젓번 피얼스 박사도 교역자 수양회 때 와서 말했지마는 그 자리에서 직접 앉아서 다 적어 가지고 왔습니다. 목사 수양회 때 한 3백 명 모였는데 그 가운데서 구교도 핍박으로 인하여 감옥에 갔던 사람은 손을 들으라고 하니까 62명이나 되었습니다. 자기 예배당 파괴당한 교회가 몇 사람되는지 손들어 보라고 하니까 28명이 들었습니다. 직접 총알에 맞고 매맞은 사람은 몇 사람이냐고 하니까 26명이 손들었습니다. 자기 교인 가운데 순교 당한 그런 교회 목사가 몇 사람이냐고 물어 보니까 24명이 손들었습니다. 이것은 20세기 현재의 사실입니다. 우리 신교가 이런 것을 알고 살아야 되겠습니다.
26.귀한 유전 보전
과거 4백년 동안에 어떤 나라는 신교로 내려 왔고 어떤 나라는 대체로 구교로 내려온 까닭으로, 신교가 일반 국가에 주는 문화의 영향과 구교가 일반 국가에 주는 영향을 역사적으로 연구해 볼 수 있습니다. 가령 북아메리카에 있는 미국과 캐나다는 대체로 신교들입니다. 남아메리카는 대체로 구교 나라입니다. 남북 아메리카의 문화의 수준을 비교해 보세요. 유럽을 보면 저 북구와 영국은 다 신교입니다. 그 아래 스페인과 이탈리아는 거이 다 구교입니다. 그 두 나라들은 문화가 어떠한지 여러분께서 연구해 보면 분명히 신교와 구교가 일반 국가와 문화에 주는 영향이 어떤지를 깨달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한 가지 분명히 기억할 것은 자유를 존귀(尊貴)히 여기는 이러한 민주주의 사상과 미주주의 정치는 신교를 중심한 나라에서 일어난 것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까지 가만히 볼지라도 이 민주주의 제도가 잘 운영되는 나라는 신교가 절대 다수인 나라에 이 제도가 잘 운영됩니다. 남아메리카 여러 나라에도 민주주의 제도는 가졌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언제든지 독재자가 나타나서 항상 어지럽게 됩니다. 구교도들이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볼 때 한국에 있어서 신교도의 사명이 얼마나 중대하다고 하는 것을 꼭 깨달아 알아야 되겠습니다. 과연 우리 한국이 앞으로 자유가 있는 건전한 민주주의로 발전하려고 한다면 어떠한 종교가 우리 민족의 머리를 지배해야 되겠는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이북에서 오신 분이 많습니다. 우리가 아는 우리 나라의 제일 긴 강을 압록강이라고 합니다. 압록강은 백두산 산봉(山峰) 천지라고 하는 못에서 발원됩니다. 그 압록강 물이 천지에서 처음 내려 올 때는 물이 맑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신의주에 오래 살았는데 신의주에서 그 강을 보면 더럽기가 한이 없습니다.
왜 종교 개혁이 일어났어요? 천지와 같이 원지에 돌아가듯 신약의 본원 지에 돌아가서 맑은 순수한 복음의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 종교 개혁을 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귀한 유전을 감사히 생각해서 이 유전을 바로 지키도록 우리가 힘써야 되겠습니다.
<오직 의인의 믿음으로>에서
27.은혜는 물에 새긴다
영국에 유명한 트랜취라고 하는 감독이 있는데 그이가 특별히 예수 님의 이적에 대한 주석을 중심해서 유명한 책을 썼습니다. 이 분이 이적에 대해서 주석을 써 가다가 이런 구절을 썼습니다.“자기가 살펴보는 대로 모든 은혜가운데 감사할 줄 아는 은혜는 아마 제일 드문 은혜입니다”이런 말을 기록한 것을 읽어보았습니다. 이것은 옛날부터 우리 동양에 내려오는 속담과도 과히 틀리는 말이 아닙니다.“원수는 돌에 새기지마는 은혜는 물에 새긴다”곧 잊어버린다고 하는 말입니다. 언제나 국가의 충신이 마르고 가정에 효자가 드물고 사회봉사자가 적고 세상에 참된 신자가 적은 이 진리를 우리에게 웅변으로 증명하여 주는 것입니다.
은혜를 구하는 이는 많지마는 은혜를 받은 다음에 그것을 기억하는 이는 적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우리가 특별히 주의하지 아니하면 우리도 감사하지 아니한 문둥병 자 아홉 사람 가운데 하나가 될 것입니다.“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송하여 그 모든 은택(恩澤)을 잊지 말지어다”자기의 영혼을 스스로 깨우친 것입니다.
또 한 사실을 주의해 보세요. 문둥병 자 열 사람 가운데 아홉 사람이 은혜를 잊어버렸는데 이상스럽게 전부가 유대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실 유대사람과 사마리아 사람을 비교해 보면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이 유대 사람이요, 또 은혜를 깨달아 알 만한 사람이 어떤 면으로 보든지 유대사람이올시다. 이 유대사람이야말로 아브라함의 자손들이올시다. 모세의 율법을 배운 사람들이올시다. 여러 선지자들의 교훈을 들은 사람들이올시다. 매 안식일에 회당에 나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올시다.
그런데 이 유대인 아홉 사람 전부가 은혜를 잊어버렸습니다. 이것도 우연이 아니 줄 압니다. 우리가 한 가지 마음 가운데 꼭 깨달아야할 것은 은혜를 많이 받는 자가 더 잘 잊어버린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됩니다. 물론 예외도 있습니다. 부자 집 자녀들과 가나한 집의 자녀들을 비교해 보면 어떤 집 자녀들이 부모의 은혜를 더 잘 아는가? 부모의 혜택을 많이 받은 부자 집 자녀들인가? 그렇지 아니하면 보통 집 자녀들인가? 예외가 있지만 보통으로 하는 말입니다.
옛날 속담에 외아들이 밥투정을 한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왜 예수 님께서 말씀하실 때에도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 보다 어렵다고 말씀하시고, 주님이 온 것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실 때에 이사야 1장 3절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소는 그 주인을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 도다”내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한다고 말씀했습니다. 은혜를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아마 은혜를 받는 것이 습관이 되어서 으fp 받을 것이라, 이렇게 생각되는 모양입니다.
28.평범 속의 감사
요즘 전기 사정이 좋지 못해 불이 끼지는 때가 많습니다. 어떤 친구가 좋은 등을 준비해서 이런 때 여러분에게 준다고 말하면 그 은혜를 감사히 여길 것입니다. 그 은혜를 항상 잊지 않을 줄 압니다. 그러나 여러분 가만히 생각해보세요. 매일 아침 하나님께서 받은 햇빛을 주실 때에 아침마다 해를 보면서 하나님 앞에 감사를 들이는 분이 몇 분이나 됩니까?
전에 6·25 때 괴뢰군이 여기 들어온 다음에 우리 교우 몇 분의 도움을 받아서 저도 피난을 갔습니다. 한강을 건너서 시흥으로 해서 수원에까지 갔는데 괴뢰군이 들어온 바로 그 날은 아주 맑고 더웠습니다. 많은 피난민들이 수원 거리에서 남으로 남으로 그냥 밀러 내려갑니다. 저도 무리 가운데 섞여서 내려가는데 얼마쯤 내려가다가 보니까 어떤 긴 옷을 입은 성공회 선교사들 두 사람이 큰 물동이에 물을 가득 채워놓고 지나가는 사람마다 물 한 잔씩 부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매우 더운 날 땀을 흘리면서 가던 피난민들은 감사의 그 물을 받아 마셨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그 물 한잔 받아서 마신 생각이 잊어지지 않고 감사합니다. 여러분, 우리 특별한 한국 같은 데는 물의 축복을 받아서 어디 가든지 몇 자만 파면 맑은 생수를 주시는 이 하나님 앞에 물을 마실 때마다 감사를 들이는 분이 몇이나 됩니까? 저도 사실 그런 경험을 한 다음에는 물을 마실 때도 감사의 기도를 올리느라고 힘을 쓰지마는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여러분의 가족 중에 하나가 중한 병으로 앓는데 호흡하기가 대단히 괴로울 때에, 어떤 친구가 산소를 한 통 보내서 그 호흡하는 것을 도와주었다고 하면, 아마 여러분은 그 은혜를 잊지 않고 오래 기억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 넉넉한 공기를 주어서 항상 숨쉬며 살면서 숨쉴 때마다 기도를 들입니까? 이것이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29.요 임금과 격양가
큰 은혜일수록 우리가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작은 은혜는 우리가 어떤 때 기억하지만 큰 은혜일수록 오히려 잊어버리기가 쉽습니다. 옛날 글을 보면 요 임금이 어떻게 정치를 잘 하였는지 모든 백성들은 아무 근심 없이 평안히 삽니다. 그 때 백성들이 격양가를 불렀다고 합니다. 흙을 치는 노래입니다. 그 격양가의 내용이 "경전이식(耕田而食)하고 청정이음(穿井而飮)하니 제은이 어아( 帝恩而於我)하야 하관언(何關焉)고? “우리가 밭을 가라서 먹고 우물을 파서 물을 마시는데 임금의 은혜가 내게 무슨 상관인고?”이게 격양가의 내용입니다.
이것을 보십시오. 그 때 백성들이 요 임금이 너무 정치를 잘 해서 그저 평안해서 잘 사니까 오히려 노래 부르면서 임금의 은혜가 무슨 상관이냐며 그의 은덕을 잊어버렸습니다. 우리 많은 사람들은 아홉 명의 문둥이와 같이 참 죄에서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이 십자가의 은혜를 항상 잊지 아니하고 하나님 앞에 감사를 드립니까? 우리가 깊이 생각하고 조심하지 아니하면 이 은혜를 잊어버리기가 쉬운 것입니다.
<은혜를 잊지 말라>에서
30. 승리의 불과 하나님의 불
두 가지 일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았을 때에 외부로부터 내려오는 이 거룩한 불을 받아서 내 자신을 깨끗케 하든지 그렇지 아니하면 더러운 그대로 있다가 마지막에 소멸하는 불에 멸망을 당하든지 …여러분 어떤 불을 원하십니까? 불은 최후의 승리를 얻을 것입니다. 성도에게는 승리의 불이 되고 악한 자에게는 소멸의 불이 되고…
예레미야는 예레미야 20장 9절에 이 같이 고백했습니다.“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하나님께 대하여 말을 안 하겠다고 생각을 하면 자기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어찌할 수가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의 속에는 불이 탑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로 하여금 예레미야를 만들게 한 것은 그 심령 속에 이 거룩한 불이 붙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전서 9장 16절에 이렇게 고백합니다.“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다” 이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도 심령 깊은 곳에서 이 불이 붙었습니다.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자기에게 화가 미칠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왜? 그 속에 불이 타 올라왔습니다.
예수 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세상에 온 것은 불을 던지려, 땅에 던지려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31.휘트필드와 웨슬레의 기도
영국에 유명한 부흥가 휘트필드는 그 평소의 기도가 “오, 주여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불길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불길, 하나님의 화염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존 웨슬레는 그 당시의 모든 청년들을 향해서 부르짖는 말씀이“네 영혼에 하나님의 불을 붙여라”여러분, 여러분 영혼에 하나님의 불이 붙었습니까? 여러분의 영혼이 빛납니까? 여러분의 영혼이 뜨겁습니까? 여러분의 영혼에 하나님의 불이 붙고 있습니까? 혹은 우리의 영혼이 캄캄하고 우리의 영혼이 냉랭하고 우리의 영혼이 쓸쓸한 자리에 있습니까? “네 영혼에 하나님의 불을 붙여라” 이 거룩한 불이 우리의 심령에 붙어야 합니다.
만일 우리의 심령에 이 거룩한 불이 붙지 아니하면, 여러분, 그 속에 무슨 불이 잇는지 압니까? 탐심의 불, 음욕의 불, 질투의 불이 있습니다. 우리의 심령 속에 거룩한 불이 붙지 아니하면 죄악의 불이 붙습니다. “네 영혼에 하나님의 불을 붙여라”
우리의 심령 속에 위로부터 내려오는 하나님의 사랑의 불이 붙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나라를 사랑하는 이 사랑의 불이 붙어야 합니다. 우리의 영혼에 하나님의 공의의 불이 붙어야 합니다. 의를 찾자, 옳은 대로하자, 옳은 대로 살자는 의의 불이 붙어야 합니다. 우리의 심령 속에 진리의 불이 붙어야 합니다. 이 미신이 많고 죄악이 많은 세상 가운데서 진리를 나타내서 생명들을 구하는 진리의 불이 붙어야 합니다. <거룩한 불>에서
32.회계의 경고
하나님께서 어떤 때에는 우리에게 완전한 회개를 재촉하시기 위해서 직접 간접으로 징계를 하시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경고를 하시기도 하는 것입니다. 어떤 때에는 질병을 통해서, 어떤 때에는 환난을 통해서, 어떤 때에는 천재의 지변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경고를 주십니다. 예수 님께서도 실로암의 망대가 무너져서 열 여덟 사람이 갑자기 몰사한 사건을 들어서 모든 사람에게 경고하는 말씀이“너희도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멸망하리라”하였습니다.
이탈리아에 있는 중세 시대로부터 내려오는 신교회 월텐시안 교회가 있습니다. 이 교회를 처음 설립한 사람은 파티 왈도라 하는 분이올시다 이 분이 젊었을 때에 어떤 큰 연회에 초청을 받아서 여러 젊은 사람과 같이 마음껏 호화롭게 놉니다. 그런 가운데 갑자기 그 친구 중 하나가 어떠한 병으로 그 자리에 쓰려져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광경이 이 청년 왈도에게는 큰 경고가 되었습니다. 온전히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와서 새 사람이 된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모양으로 우리에게 경고를 주십니다. 이런 경고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얼마나 계속해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고 책망하십니다. 분명히 우리가 기억합시다. 하나님께서 비록 오래 참으시지마는 하나님의 인내에도 한정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 시대 사람들이 죄악을 오래 참으셨지마는 최후에는 홍수의 심판을 내리신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크신 긍휼(矜恤)과 자비로써 소돔과 고모라 성의 사람들의 죄악을 오래 참으셨지마는 최종에는 유황의 심판을 내리신 것을 우리가 기억합니다. 하나님께서 경고하실 때에 그 기회가 지나가기 전에 우리는 온전한 작정이 있어야 될 것입니다.
<여호와? 바알?>에서
33.스미스 목사의 생일기도
캐나다 토론토 시에 가면 거기에 피플스 처치(People's Church, 대중의 교회라고 번역합니다) 라고 하는 교회가 있습니다. 이 교회가 특별히 알려지게 된 것은 이 교회의 교인수가 약 3천명 모이는 교회인데 이 한 교회에서 세계 각지에 선교사들을 약 350명을 보내고 그들의 생활비를 부담하고 있습니다. 한 교회에서 선교사 350명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 교회 목사는 오, 제이, 스미스(O, J, Smith)라고 하는 목사인데 이 분이 지금은 연로하셔서 몇 해전에 은퇴하시고 자기 아들이 이 교회의 목사가 되어서 자기 아버지를 계대(繼代)해서 시무하고 있는 그런 교회입니다. 이 스미스 목사는 저도 만나 본 일이 있지마는 참 은혜가 많은 분입니다.
제가 얼마 전에 그의 저서 한 권을 읽는 가운데서 자기가 어떻게 은혜 받은 이야기를 간단히 쓴 것을 읽어보았습니다. 그것은 여러 해 전에 자기가 젊은 교역자로서 하나님의 일을 시작할 떼에 어떤 자가 생일 날 , 특별히 생일날의 염원으로 하나님께 간절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기도의 제목은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이시여, 그저 저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렇게 간절히 기도하면서 “나는 세상의 돈도 요구하지 아니합니다. 무슨 명예를 요구하지 아니합니다. 세상의 향락은 멀리한지 오래입니다. 그러나 내가 한 가지 소원이 꼭 있는데 이 소원은 이 사람이 비록 부족하지마는 아버지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와 같이 간절한 기도를 들이면서 그는 어떻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을 먼저 모시기로 결심했습니다. 예수 님의 말씀과 같이 그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도록 작정했습니다.
“하나님이시여, 나로 하여금 옛날 에녹과 같이 언제든지 하나님과 동행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루만 말고 이틀만 말고 일생토록 몇 시간만 말고 매분 매초 언제든지 하나님을 떠나지 말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을 할 수 있게 하시옵소서. 그리고 하나님께서 슬퍼하실 만한 일은 어떻든지 생각이라도 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성결하고 옳은 생활로 나를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나로 하여금 일부분만 하나님께 바치지 말고 내가 갖고 있는 대로 백 퍼센트, 제 몸과 마음을 온전히 하나님께 바치는 헌신의 생활을 하게 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고 그 때부터 그런 결심을 하고 그대로 꼭 살도록 애를 썼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래 전 그 목사의 생일에 드린 기도가 지금 보면 문자 그대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잇습니다. 그는 과연 일생토록 실수 없이 경건한 목회를 하고 그를 통해서 그 교회가 많은 은혜를 받아서 열매를 많이 맺은 것이 사실입니다.
34.십의 팔조(八條)를 드리는 실업가
이번에 피얼스 박사와 같이 여러분이 왔지마는 빌 존스라고 하는 실업가도 한 사람 따라왔습니다. 이 분이 세계에 다니면서 특별히 실업가나 정계에 유명한 분이나 어린이들에게 전도하는 것이 이 분의 목적이었습니다. 한국에서도 반도 호텔에서 여러분을 다 청해서 한번 전도를 했습니다. 이 분이 간증하는 말을 간단히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이 분은 본래 믿는 가정에서 자라나서 주일학교에 좀 다녔지마는 사업 계로 나가면서 주를 멀리했습니다. 여러 가지 죄악에 빠졌습니다. 다시 말하면 여러 가지로 가정에 풍파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럴 때에 잘 믿는 가까운 친구의 충고를 받아서 다시 믿음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자기의 죄를 회개했습니다. 자기의 아내도 같이 회개를 하고 거듭나서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다음부터 그의 가정은 새로운 가정이 되었습니다. 그의 사업은 전보다 더욱 축복 받아서 더 잘 됩니다. 처음에는 십일조를 바쳤지마는 지금은 10분의 8을 다 주님의 사업을 위해서 바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 수입이 매달 20만 달러나 된다고 합니다.
하나님에 뜻에 맞는 교회가 되려고 하면 누구든지 자기 재물을 자기 것으로 알지 아니하고 하나님 것으로 알아서 꼭 하나님의 뜻대로 쓸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영락 교회를 보면 때 따라 요구가 심한 곳에 먼저 봉사했습니다. 그러므로 그 때 과부가 제일 불쌍하니까 제일 먼저 도와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도 경로원도 경영하고 모자원도 경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나 사회 가운데 가장 불쌍한 이들을 먼저 도와주는 교회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이래야 하나님의 뜻에 맞는 교회가 되겠습니다. <하나님 뜻에 맞는 교회>에서
35.큰 기쁨의 좋은 소식
전에 아테네에 살던 사람들은 항상 새 것을 듣기 좋아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사실 우리도 다 뉴스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라디오를 듣고 텔레비전을 보고 들으며 신문을 사서 읽습니다. 그런데 이 뉴스 가운데는 큰 뉴스도 있고 작은 것도 있으며, 좋은 뉴스도 있고 좋지 못한 것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또한 어떤 뉴스는 크기는 크지마는 나쁜 뉴스가 있고 또한 어떤 뉴스는 그렇게 크지는 못하지만 좋은 뉴스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리고 어떤 뉴스는 한 사람에게는 크고 좋은 것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나쁜 것도 될 수가 잇는 것입니다.
가령 지난 1945년에 일본이 항복하였다고 하는 뉴스는 우리 한국사람에게는 크고 또한 기쁘고 즐거운 뉴스였습니다. 그러나 일본 사람에게 있어서는 크기는 하지만 그렇게 좋은 뉴스는 아니었을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우주가 생긴 이후 이 인류가 지구에 살게 된 이후에 지금까지 제일 큰 뉴스 제일 좋은 뉴스가 무엇인지 생각하여 보셨습니까? 전 인류 누구에게나 좋은 뉴스가 무엇인지 생각하여 보셨습니까? 자세히 들으세요, 첫 크리스마스 새벽에 이 우주의 최대의 가장 기쁜 뉴스가 전하여 졌습니다. 이 뉴스는 온 백성에게 미칠 전 인류를 위하여 준 뉴스입니다.
여러분, 그 내용을 알기 원하십니까? 들어보세요, 누가 복음 2장 11절에 주의 사자는 계속하여 말합니다.“오늘날 다윗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요한복음 3장 16절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아니하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천지의 대 주재되시는 하나님이 온 세계 인류를 죄악 가운데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 독생자를 하늘에서 이 땅에 내려보내신 이 사실, 이 얼마나 큰 사건입니까? 이것이야말로 이 우주의 최대 뉴스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작은 뉴스는 항상 듣지마마는 이 최대의 뉴스를 듣지 못한 분은 우리 가운데 없습니까? 다른 뉴스를 아무리 들었다고 하지마는 이 최대의 뉴스를 듣지 못하였으면 그는 무식한 사람입니다. 아니 불상한 사람입니다. <0큰 기쁨의 좋은 소식>에서
36.만능 생활의 비결
여호와 하나님께서 무엇을 해라하면“나야 무슨 힘이 있어야 하지 못해. 못해.”왜 못합니까? 믿지 않는 까닭으로 못 합니다.“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할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곡식이 누르러서 거이 쓰러지게 되었습니다. 안 믿는 세계가 우리 믿는 십자가 군병을 부르고 있습니다. 황폐한 한국이 일군을 부르고 잇습니다. 교회가 봉사할 사람을 부르고 있습니다. 국가가 참으로 나라를 위해서 싸울 사람을 부르고 있습니다 패배주의자 되지 마세요. 주안에서 만능의 인물이 됩시다,
37.크롬웰의 일화
청교도 시대에 가장 유명한 지도자 크롬웰이 있었습니다. 영국 역사 가운데서 빛나는 거성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의 생활 가운데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자기가 가장 사랑하던 맏아들이 그만 세상을 떠났습니다. 큰 슬픔을 당했습니다. 모든 하는 일이 뜻대로 되지 아니합니다. 크게 낙심했습니다. 그러던 중 성경을 읽다가 빌립보서 4장을 읽기 시작해서“내가 풍부한데 처할 줄도 알고 내가 비천한데 처할 줄도 알고…”이런 말씀을 읽으면서 가만히 생각하기를“나도 이런 비결을 배웠으면 얼마나 좋겠나”하면서 그는 계속 그 절을 읽어 내려갑니다.
13절에 와서“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이 말씀을 읽게 될 때에는 크롬웰이 갑자기 일어나면서“사도 바울이 그리스도는 오늘 날 나의 그리스도가 아니냐 !,”외쳤습니다.
사도 바울의 그리스도는 오늘날 우리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하지 아니하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에 위로부터 간단없이 오는 능력을 받을 때에는 모든 것을 할 수 잇습니다.
무슨 일을 당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어떠한 환경에 처해 잇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 일에서, 그 환경에서 내가 어떻게 하느냐, 승리하느냐, 그것입니다. 이와 같은 믿음을 가지고 주를 의지하는 가운데 만능의 생활을 할 수 있는 이 축복을 우리가 다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 만능 생활의 비결>에서
38.불쌍히 여기는 마음
우리는 유명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잘 기억합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던 어떤 사람이 험한 산골짜기에서 불한당을 만나서 많은 매를 맞고 모든 소유를 빼앗기고 중상을 입어 인사불성이 되어서 길가에 쓰려졌습니다.
마침 레위 사람이 지나갔지마는 그는 그를 보고 그냥 지나갔습니다. 제사장이 그 뒤를 이어 지나갔지마는 그도 그 넘어진 사람을 보기만 하고 다른 편으로 지나갔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마는 하나님의 사랑은 정녕 알지 못하는 사람이요, 상한 삶을 측은히 여기는 미음이 없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사마리아 사람은 아마 당시에 신학적으로 비판해서 그 믿음이 꼭 옳은지 알 수 없지마는 이 사람은 단순히 사마리아의 사상대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요, 그렇지만 이 사람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이 마음이 그로 하여금 그 자리에 멈추게 하였고 상한 사람을 자세히 살피게 만들었고 자기의 옷을 찢어서 상처를 싸 매주고 자기의 기름을 부어서 상처를 유화(宥和)롭게 하고 자기가 탔던 나귀에 태워서 주막까지 가도록 만든 것입니다. 환난 중에 있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그 마음은 봉사의 중요한 조건입니다.
아브라함 링컨이 청년시대에 배를 좀 탔습니다. 한 번은 뉴올리언즈 시에 우연히 가서 흑노(黑奴)시장을 구경하게 되었습니다. 흑노들의 한 가족이 여기저기로 팔려 가는 그 비참한 광경을 목도한 것입니다. 그때에 그는 동정의 눈물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에 받은 그 인상, 그때에 가졌던 그 동정심은 결국 아브라함 링컨으로 하여금 흑노 해방의 구주로 만든 것입니다.
동정이라고 하는 뜻을 같이 느낀다고 하는 뜻입니다. 남이 배고플 때에 내가 배고픈 것처럼 느끼는 느낌이올시다. 남이 추울 때에 내가 추운 것처럼 느끼는 그 감정, 다른 사람이 어려운 일을 당할 때에 내가 당하는 것과 같은 느낌을 가지는 그 마음, 동정심, 이것 없이 봉사는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 추운 겨울에 방공호에 사는 우리 동포들, 거리에 집 없이 배회하는 불구자들, 병자들, 고아들을 어떤 눈으로 봅니까?
39.협동 정신
하나님께서 우리 사람들은 각각 키도 다르고 얼굴도 다르고, 이렇게 낸 것이 의의가 있습니다. 다르다고 싸우라고 내 것이 아닙니다. 다른 가운데서 피차의 장점을 살려서 협조하는 가운데 하나님께 봉사하고 이 사회에 봉사하기 위하여 이와 같이 만든 것입니다. 우리가 조금이라도 봉사 생활을 하려고 하면 이 협조 정신이 없이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떤 책을 보니 페르시아라는 나라에서는 이상한 새가 있어서 이 새는 날개가 하나씩밖에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혼자서는 날지 못해요. 그런데 이상한 건 수놈의 바른편에는 갈고리 같은 것이 하나 있다고 합니다. 암놈은 왼편에 고리 같은 것이 하나 있다고 합니다. 그 수놈과 암놈이 짝지어 함께 날 때는 썩 잘나라갑니다. 세상에 혼자 하지 못할 일이 많습니다. 아무리 위대하고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자기 혼자서만은 할 수 없습니다. 독불장군이란 말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 협조해야 봉사 생활을 할 수가 있습니다.
40.백절불굴의 정신
어떤 좋은 일을 할지라도 우리가 하여나갈 때는 난관이 반드시 가로막을 때가 있습니다. 요컨대 이와 같은 난관을 만날 때 우리가 어떠한 태도를 가지고 극복하느냐, 하지 못하느냐, 여기에 봉사 생활의 성공이 잇느냐, 없느냐가 달린 것입니다. 불퇴전(不退轉), 물려가지 아니하고, 백절불굴의, 백 번 찍어도 넘어지지 아니하는 정신을 가지고 끝까지 나아가는 이것이 바로 예수 당시에 네 친구들이 중풍 병자를 참으로 도와줄 수 있었던 정신입니다.
에디슨이 백열등을 처음 발명할 때에 이렇게 해 보아도 안 되고 저렇게 보아도 안되고 마지막에는 열흘 동안을 자기 집에 도무지 돌아가지 아니하고 실험실에서 자고 먹으면서 계속하여 마지막에 성공하고야 말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칼럼버스가 맨 처음에 인도를 향해서 간다고 대서양을 향해 나갔을 때 한 달쯤 후에는 선원 전부가 배반하려고 했습니다.“아무리 가야 보이지도 않는 것을 뭘 하려고 가는가? 돌아가자”반란을 일으키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칼럼버스는 낙심하지 아니하고 계속해서 그들을 격려해서 나아간 것입니다. 그 결과만이 그로 하여금 새로운 대륙을 발견할 수 있게 만든 것입니다.
우리 모두 깊이 생각하시고 이 금년 새해에는 우리가 구경꾼 노릇만 하지 맙시다. 이 중풍 병 환자를 그리스도에게 모시고 오는데 아무귀퉁이라도 한 몫 메어서 이 귀한 사명을 우리가 다 같이 협력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잊지 맙시다.
먼저 철저한 신앙이 필요합니다. 둘째는 믿지 않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모든 환난 중에 잇는 이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셋째는 협조 정신이 필요합니다. 넷째는 끝까지 목적을 달성하려고 하는 정력, 충성이 필요합니다. <봉사 생활의 비결>에서
41.어려움에서 승리한 사람들
우리가 잘 아는 존 번연의 생활을 회고하면, 영국에서 청교도들을 핍박하게 될 때에 오히려 복음을 전파한다고 하여. 이 존 번연을 오래 집어넣고 억을 하게 12년 동안이나 옥중에서 썩는 몸이 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존 번연은 거기서 시간을 낭비한 것은 아닙니다. 그 자리에서 은혜를 받고 우리가 이는 <천로역정>이라고 하는 성경 다음으로 많은 사람이 읽는다고 하는 불멸의 저서를 써서 감옥 가운데서도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서 위대한 창조적 생활을 한 것입니다.
몇 해 전에 우리 교회에서도 잠깐 와서 이야기했지마는, 지금 일본에 와서 선교사로 있는 사람 가운데 드 셰이저(De Shazer) 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2차 대전 때에 미국에서 제일 먼저 동경에 와서 폭격한 두리틀 소장이 지휘한 그 폭격기대로 와서 싸운 한 대원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동경에서 폭격하고는 저 중경으로 가다가 중경까지 가지 못하고 남경 부근에서 부득이 낙하산으로 내려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일본 사람한데 잡혔습니다. 근 4년 동안 중국 여러 감옥, 마지막에는 일본 감옥에 와서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의 감옥 생활은 헛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감옥에 사는 동안 성경을 읽게 되었고 성경을 읽는 가운데 온전히 회개한 사람입니다. 자기가 간증하는 대로 전에 유년 주일 학교에는 좀 다녔지만 장성해서는 전혀 교회에 나가지 아니하고 여러 가지 죄를 많이 짓던 사람입니다. 그 감옥에서 죄를 회개하고 그리고 제2차 대전이 끝나자 포로 교환에서 나와 결심한 것은 내가 본국에 돌아가서 신학을 마치고 다시 일본에 와서 일본 사람에게 그가 처음에는 폭탄을 내려 던졌지마는 이번에는 복음을 전파해서 구제를 해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대로 꼭 실행했습니다. 해방된 다음 미국에 돌아가서 공부했습니다 그 다음에 일본의 선교사로 나왔습니다. 선교사로 나와 전도하는 동안 제일 먼저 믿은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일본 포격기대를 영도해서 진주만을 1942년에 먼저 폭격한 그 폭격기의 대장으로 있던 후지다(藤田) 대위입니다. 그 사람 역시 예수를 믿고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였습니다.
우리가 주안에 있을 때에 어떠한 환경에서든지 우리는 창조적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실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될 때에는 역경이나 실패가 문제가 아니요, 질병도 문제가 아니요, 요컨대 이와 같은 자료를 가지고 어떻게 위대한 작품을 만들 수 잇는가 문제입니다.
42.전정(剪定)하는 목적
얼마 전에 대광 학교에서 미술 전람회를 하는데 가서 한 번 구경을 하였습니다. 여러 가지 좋은 작품들이 있어요. 그 가운데 특별히 제 흥미를 끈 것은 어떤 학생들이 만든 공예품이었는데 목수들이 쓰다 내버린 나무 조각을 가지고 작품 하나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어떤 학생은 철공소에서 공인들이 쓰다 내버린 쇠 조각으로 공예품 하나를 그를 듯하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이와 같은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사람 보기에는 변변치 않은 것, 사람 보기에는 쓸모가 없다고 하는 것, 사람 보기에는 그렇게 자랑할 것이 없는 것, 그런 것들을 가지고 아름다운 작품을 만드는 것이 오직 우리가 주안에 있을 떼에만 가능한 것입니다.
여러분, 과일 나무 혹은 사과나 복숭아나무를 기르는 사람은 누구나 겨울에는 전부 가지를 전정(剪定)해주지 않습니까? 다 잘라줍니다. 만일 이 나무들이 우리처럼 감각이 있다고 하면 그 전정을 받을 때 대단히 앞을 것입니다. 이 나무가 전정을 받을 때 아프게 그렇게 많은 가지를 잘라내지마는 그 대신 나무가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는 불평하지 아니 해요. 그 대신 쓸 때 없는 가지로 정력을 보내지 아니하고 모든 정력을 다 열매에 보냅니다. 그래서 사과 알이 커집니다. 그래서 복숭아 알이 커집니다.
사실 정정하는 목적은 열매를 크고 아름답게 잘 맺기 위해서 해줍니다. 아마 어떤 때는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 전정을 더러 해주시는 것 같습니다. 환난도 보내시고 시험도 주셔서 이와 같이 전정을 해주십니다. 이렇게 하는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좋은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서 그와 같이 하시는 줄 압니다.
언제든지 창조적 생활의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43.모래알 가시
너무나 잘 아는 이야기지마는 진주가 어떻게 되는지 아시지요? 진주도 별것이 아닙니다. 진주 속에는 모래알이 있다고 합니다. 겉만 그렇게 아름답지 속에는 모래가 있다고 합니다. 진주 패라고 하는 조개 속에 어떻게 모래알이 들어갑니다. 지금은 인공적으로 넣어준다고 합니다. 그 보드라운 조갯살에 깔깔한 모래알이 들어갔으니까 얼마나 아프겠어요. 그러니까 이 조개가 그 깔깔한 것을 이기기 위해서 생명의 즙을 내서 그 모래알을 싸주고 또 싸주고 또 싸주고…, 여러 해 싸주면 점점 큽니다. 이것이 진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때는 우리의 생활 가운데 모래알과 같이 사도 바울이 말한 육체의 가시와 같이 깔깔하고 아픈 것을 던져 주실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싸고 또 싸서 우리의 영혼이 진주와 같이 아름다운 영혼을 만들기 위해서 그와 같이 하시는 줄 생각합니다.
여러분 잊지 마십시다. 주안에서는 모든 것이 창조의 자료입니다. 주안에서는 모든 것이 찬조의 기회입니다. 서양 속담에“필요는 혹은 곤고(困苦)는 발명의 어머니”라고 하는 속담이 있습니다. 요새 직업이 없어서 걱정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직업이 없다고 불평하지 말고 직업을 만들도록 힘을 쓸 때가 된 것입니다.
제가 어떤 책을 보니까 지금 폐렴을 잘 고치는 페니실린도 본래 곰팡이 가운데서 처음에 발견하고 적출 해 냈다고 합니다. 아무리 곰팡이 같은 죄악 세상에서 사는 사람도 주님께 나오면 귀한 약품이 되어서 다른 사람의 병까지 고쳐줄 수 있는 새 사람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는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상한 갈대를 고쳐서 아름다운 초적(草笛)피리를 만들어서 아름다운 음악의 선율을 네게 하는 권능이 우리 주님께는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상처 입은 몸이라고 할지라도 우리가 우림 주님 앞에 나와서 내 생명을 맡긴다고 하면 주님께서는 그 상한 생명, 그 상한 생활을 변화해서 하늘의 음악을 나타낼 수 있는 귀한 하나님의 자녀를 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자리에 있던지 낙심하지 말 것입니다. 주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서 우리도 창조의 생활을 하여야 될 것입니다.
그래서 작년은 어떠했든지 이 새 해야말로 창조의 해를 삼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도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 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의 생활을 하십시다 <창조의 생활의 비결>에서
44.별과 같이 비치는 사람
사실 우리가 큰 신앙의 기쁨은 이 전도를 통해서 업습니다. 낚시질을 할 때 오래 기다리다가 큰 고기를 낚아 내게 되면 얼마나 기쁠까? 그래서 어떤 사람은 낚시질에 미친다고 합니다. 그렇게 낚시질에 미쳐서는 곤란하겠지만 사실 우리 신앙 생활 가운데서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가운데 내 기쁨이 오는 것입니다. 보스턴의 어떤 건물에 들어가면 담 벽에“이 방에서 본래 디, 엘, 무디(D, L, Moody) 가 회개하였다”하는 그런 글을 붙인 방이 있습니다. 오래 전에 킴볼이라고 하는 한 무명 교인이 전도를 할 때에 어떤 구두 방 앞을 지나가다가 그 구두 방 안에 어떤 젊은 양화 직공에게 전도를 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아무래도 전도하여야겠다는 이 담대한 마음을 가지고 들어가서 그에게 전도했습니다. 그는 회개하고 그 자리에서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이 분이 그 후에 디 엘 무디라고 하는 수천 수만 명을 구원해낸 위대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사실 내가 전도한 사람이 세례를 받고 내가 전도한 사람이 혹 집사가 되고 내가 전도한 사람이 혹 장로가 되는 기쁨에서 더 큰 기쁨은 없을 줄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늘 나라에 가서도 여러 가지 기쁨이 있겠지만 제일 큰 기쁨은 내가 전도해서 예수를 믿은 사람이 구원을 얻어서 천당에서 만나게 될 때의 기쁜 일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다 하늘 나라에 가서 생명의 면류관을 다 받겠지마는 면류관에서 비치는 그 별의 수가, 진주의 수가 사람에 따라 다르다고 합니다
전도를 게을리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지상 명령을 소홀히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전도를 게을리 하는 것은 신자의 태도의 의무를 저버리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 하나가 금년에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됩시다. 다니엘 12장 3절에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말씀했습니다. 지위가 귀하지마는 지위가 높은 사람도 아닙니다. 돈이 있어야 살지마는 돈이 많은 사람도 아닙니다.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인도한 사람이 별과 같이 비칠 것입니다. 우리 다 같이 별과 같이 비치는 사람이 됩시다.
<사람을 낚는 어부>에서
45. 청년의 할 일
이 동산에서 사상 전선을 고요히 살펴보십니까? 4·19 혁명으로 우리 국민의 자유가 전에 보다 더 많아진 것은 실로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할 것은 죄도 자유의 기회를 더 얻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깡패도 자유를 더 얻었습니다. 사창들도 자유를 더 얻었습니다. 그리고 공산당들도 자유를 더 얻었습니다.
얼마 전에 심문을 보니까 소련 수상 후르시초프는 공산당 간부들을 모아 놓고 하는 말 가운데 “우리 공산당은 이제는 전쟁을 할 필요가 없다. 왜 그런고 하니 우리가 전쟁하지 이니 하고도 다른 방법으로 세계를 정복할 수 있기 까닭이다”고 말했습니다. 그 다른 방법이란 두 말할 것 없이 침투 작전입니다. 지금 한국에서는 가만히 살펴보니 공산당들이 달콤한, 소위 중립 통일, 평화 통일의 사탕 바른, 겉은 희고 속은 새빨간 마취약으로 우리 민족을 취하게 하는 중입니다. 아무 딴 생각 없는 사람들도 단지 통일을 갈망하는 가운데서 이와 같은 사상에 도취되는 것이 사실인 것 같습니다. 여러분, 깊이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미국의 새 대통령 케네디가 그 취임 연설에서 마지막으로 미국 국민들에게 부르짖는 말씀이“이 앞으로 여러분은 나라가 여러분을 위하여 무엇을 하겠는가를 묻지 말고 여러분이 나라를 위하여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를 물으라”고 했습니다.
우리 한국도 그렇습니다. 우리 국민이 나라에 무엇을 하여 달라고 요구하기 전에 내가 나라를 위하여 무엇을 할 수 있는 가? 내가 나라를 위하여 무슨 공헌을 할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이 생각하고 이와 같이 노력해야 우리 나라는 유지되고 건설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멸사봉공의 정신을 넣어 줄자가 누구입니까? 십자가를 따르는 우리 청년이 아니면 누구겠습니까? ”
학생 사이에 새 생활 운동이 일어나고 국회의원들 사이에 청빈(淸貧) 운동이 일어나는 것은 다 국가를 위해서 경하로운 일입니다. 이러한 때에 빛과 소금으로 자처하는 우리 기독 청년만 어찌하여 잠잠하고 있습니까? 낮술은 그만두고 밤술이나 먹자고 하는 절주(節酒) 운동, 고급 요리 집에 가서 술을 마시지 말고 대포 집에 가서 술을 마시자고 하는 대포운동, 양담배는 빨지 말고 국산 담배를 피우자고 하는 절연 운동도 애국 운동으로 자긍(自矜)하는 이 때에, 왜 철저한 금주 단연(斷煙)의 기치를 높이 들고 사회 혁신의 봉화를 기독 청년들이 일으키지 못합니까?
“청년들아 일어나라”
우리 주님께서도 우리를 향하여 부르짖습니다. 이 사회는 십자군의 궐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안 믿는 학생들이 심지어 댄스홀, 바 , 카바레 같은 데를 찾아가서 이래서 되겠는가고 외치는 이러한 때에 죄인을 구원하는 복음을 가진 기독 청년들은 왜 잠잠하고 있습니까? 듣는 대로 종로 뒷거리, 도동, 양동, 이태원 근방의 저녁거리에는 사창, 양 마담들이 우글우글 하고 그 죄악의 함정에 끌려 들어가는 산송장들로 길을 메운다고 하는데 왜 오늘날의 기독 청년들은 그런데 가서 옛날 휘트필드나 윌리암 부스처럼 생명의 복음을 외치지 못합니까? “청년들아 일어나라 !”오늘 면려(勉勵)주일을 당해서 우리 주님께서는 외치십니다.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우리 한국 민족 반만년 역사상에 있어서 제일 위대한 시대가 어느 때였는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 때는 삼국시대요, 삼국시대 중에서도 고구려 광개토대왕 시대입니다. 만주에 가서 사시던 분은 광개토대왕의 기념비가 1천 5백 년이 지난 오늘도 웅장하게 선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이 광개토대왕은 18세 나서 왕이 되어 39세에 별세했습니다. 그러나 18세난 제왕이 약 20년 동안에 저 남북 만주(滿洲)를 다 점령하고 남으로 백제까지 내려 와서 진번군을 침범하고 문자 그대로 전 동아를 한 손에 장악하였던 것입니다. 이 사람이 곧 젊은 청년 제왕인 광개토대왕입니다.
여러분, 광개토대왕시대의 연호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 연호는 영락입니다. 그래서 이 시대를 영락 시대라고 합니다. 이 한국 역사상에 있어서 영락 시대야말로 가장 강하던 시대요, 가장 위대하던 시대요, 가장 웅비하던 시대입니다. 여기 앉은 영락교회 청년들은 이 말씀을 뜻 있게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청년들아 일어나라” 이 동산에 할 일이 많습니다. “청년들아 일어나라” 이 동산에 원수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일어나는 청년들을 통해서 자기의 경륜을 이 땅에서 이루시고 온 동아와 세계에서 이루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일어나라 청년들이여 !”
<청년아 일어나라>에서
46.신앙 생활의 표준
'꿈에라도 죄 안 짓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우리는 중생(重生)하였다고 하지마는 아직도 중생 한 처음에는 어린 아기입니다. 어린 아기가 장성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매일 매일 죄에 대해서는 죽고 의에 대해서는 다시 살아서 계속해서 장성해서 점점 거룩한 자리로 나아가야 되겠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특별히 죄를 멀리하도록 노력해야 되겠습니다. 행실로 죄를 범하는 것은 물론 말로나 생각으로도 죄를 범하지 않기 위하여 혹은 스스로의 의식할 수 있는 의식면만 아니고 속에 깊이 있는 잠재의식 속에까지도 죄를 범하지 않기 위해 항상 노력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악한 것은 모양이라도 버리고 어떻든지 죄를 멀리 하도록 힘을 써야 할 것입니다.
미국에 가서 몇 해 공부하다가 온 천년이 한 번 찾아와서 자기의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한 번은 자기가 자동차를 운전해서 어떤 높은 산에 있는 휴양지에 갔다가 그만 너무 피곤했던지 잘못 되어서 자동차가 전복되었습니다. 부상을 당한 이 사람은 그 즉시 정신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다른 사람이 지나가다가 그를 자기 차에 태워서 어떤 병원에 입원시켜서 사흘 만에야 자기 의식을 회복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그 병원에서 몇 주일 동안 치료했는데 온전히 나아서 건강을 회복하여 공부를 계속해서 다 마치고 본국에 돌아왔습니다.
이 경험을 통해서 이 청년은 전에 받지 못하였던 은혜를 흡족히 받았습니다. 그래서 어떻든지 자기는 앞으로는 꼭 옳은 신앙생활을 하려고 애쓴다는 그런 말을 하면서 “나는 행실은 말 할 것도 없고 그저 마음으로도 내 생각으로도 죄 안 짓고, 꿈에라도 죄 안 짓게 해 달라고 항상 기도합니다”그만큼 우리가 죄를 멀리하도록 힘써야 되겠습니다. 그렇지마는 우리는 연약합니다. 이 세상에는 유혹이 많습니다. 때때로 죄를 짓습니다. 내 본이 아니지마는 깨닫지 못할 때 어느새 죄를 범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만일 그런 경우가 되면 우리가 어떻게 할 것입니까?
옛날 베드로가 자기의 뜻은 아니지마는 예수를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지마는 닭의 울음소리를 듣고 자기의 죄를 깨달을 때는 그 자리에서 곧 떠나 밖으로 나가 크게 통곡하며 눈물을 흘리며 회개했습니다. 인수무과(人誰無過)리오, 사람이 누가 허물이 없겠습니까? 허물을 씻고 고치면 됩니다. 우리 믿는 사람이라고 죄를 도무지 안 지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죄를 지으면 곧 그 자리에서 회개하고 그 자리에서 떠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가 점점 성실한 자리로 향상하도록 힘을 써야 마지막에 온전한 자리에 이를 수 있을 것입니다
47.위대한 예술가 미켈란제로의 정신
16세기의 제일 유명한 예술가, 건축가요, 화가요, 조각가인 미케란제로를 한 번은 어떤 친구가 찾아가 보니까. 꽃을 꽂기 위해서 자그마한 함을 하나 만드는데 아주 정력을 다해 시간을 많이 들이면서 만들고 있습니다. 구경하던 그 친구가 작은 꽃 함 하나 만들면서 시간을 많이 보낼게 뭐 있느냐고 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 위대한 예술가가 대답하는 말이"그렇지 않다 나사렛의 목수가 만일 이 꽃 함을 만든다고 하면 불완전하게 만들 줄 아는가? 허술하게 만들 줄 아는가? 나도 이 꼴 함을 온전하게 만들겠다" 이 정신이 그로 하여금 그와 같은 위대한 예술가를 만든 줄 압니다.“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 하라”
이와 같이 위대한 표준을 향하여 나아가는 우리가 어떠한 자리에서 어떠한 책임을 맡았는지 우리도 언제든지 그 책임을 온전히 감당하겠다고 하는 이 정신이 있어야 될 것입니다. 나사렛의 목수가 작은 함을 만들지라도 불완전하게 만들 것 같습니까? 우리 중 공장에서 일하는 직공이 있습니까? 그러면 그 공장에서 어떤 제품을 만들든지 온전한 제품을 만들기 위해서 결심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중 관청에서 일하는 공무원이 있습니까? 공무원으로서 내 책임을 온전히 감당하는 정신을 가지고 감당하시기를 바랍니다. 공무원만 아닙니다. 군인은 군대에서 그러해야 되고, 교원은 학교에서 그러해야 되고, 우리가 어떤 자리에 있든지 그 자리에서 교회의 직분 된 사람은, 목사는 목사로서, 장로는 장로로서, 집사는 집사로서, 평신도는 평신도로서 내 맡은 책임을 온전히 바로 감당하는 정신을 가지고 우리가 감당해야 되겠습니다.
지금 부산에 계시는 채필근 목사님이 종종 이런 이야기를 하지요. 옛날 그 이가 함경북도 경흥 지방에서 캐나다에서 온 선교사들과 같이 전도사 생활을 하면서 전도하려 다닐 때에, 그 때는 구두가 별로 없고 다 짚신을 신고 다닐 때인데, 신이 떨어져서 짚신을 한 켤래 샀습니다. 본래 짚신이 그렇게 보기 좋은 것은 없지요. 그러나 하루 저녁에 몇 켤래 나 삼은 신인지 헐렁헐렁하고 형편없단 말입니다. 그 것을 한 켤레 사서 이렇게 들고 보는 중에 함께 다니던 선교사가 그 짚신을 가만히 보더니 “그 사람은 짚신을 삼지 않고 자기를 그렇게 삼았소”하더랍니다.
48.독수리 새끼와 병아리 새끼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전에 어떤 깊은 산골에 사는 어떤 농부가 산에 나무하려 갔다가 독수리 알을 하나 얻어서 집으로 가지고 왔습니다. 마침 봄이어서 독수리 알을 병아리 깨우는 닭의 품속에 함께 넣어 놓았습니다. 얼마 후에 병아리와 독수리 새끼가 함께 나왔습니다. 병아리가 크는 틈에서 이 독수리 새끼도 점점 큽니다. 병아리는 날개가 있어도 날아다니지 아니하니까 이 독수리 새끼도 그냥 걸어만 다닙니다.
그러다가 어떤 날 낮에 큰어미 독수리가 그 마당 위에 와서 빙빙 돕니다. 병아리들은 무서워서 다 사방으로 헤어졌습니다. 그러나 이 독수리 새끼는 이상하게도 무서운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그 빙빙 도는 독수리를 자꾸만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바라보는 가운데 이상한 충동이 올라오면서 자기도 날아볼 생각이 점점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날아보려고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날개가 힘이 있어야지요. 몇 번 푸덕 푸덕하지만 갈 수는 없었습니다. 큰 독수리는 빙빙 한참 돌더니 도로 먼 데로 가버렸습니다
그러나 그 때부터 이 독수리 새끼는 나도 날 수 있다는 자신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혼자 날개를 너울거리면서 날아가는 것을 자꾸 연습합니다. 매일 매일 조금 더 날고 또 좀더 납니다. 그러다가 열흘쯤 후에 큰어미 독수리가 다시 와서 빙빙 돕니다. 그 다음에는 나도 저렇게 날아보겠다고 날아 올라갑니다. 점점 올라가니까 큰 독수리는 점점 날아서 내려옵니다. 거이 가까이 오는데 그 다음에는 어린 독수리가 힘이 다해서 땅으로 떨어집니다. 그때에 큰 독수리가 큰 날개를 가지고 내려와서 어린 독수리를 날개에 업고 공중으로 날아 올라갑니다.
여러분 이것이 우리 믿는 사람의 경험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이 독수리 새끼가 병아리 가운데 사는 것처럼 이 죄악 세상 가운데 살 지만은 우리는 장차 날아 올라가려고 하는 이 하나님의 큰 경륜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이미 된 것입니다. 우리도 날아 올라가기 위해서 힘을 써야 되겠습니다. 최대의 노력을 해야 되겠습니다. 성결하기 위해서, 사랑하기 위해서, 각 방면으로 덕을 구비하기 위하여 노력합시다. 물론 우리의 노력으로는 되지 아니합니다. 결국 우리의 노력은 실패할 것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노력을 거듭할 때에 우리의 힘이 부족할 때는 하나님께서 큰 날개로써, 은혜의 날개로써 우리를 업어서 마지막에 신령한 자리에까지 올라가게 할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표준>에서
49.푯대를 향하여
우리 나라에서 내려오는 속담 가운데“시작이 절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시작이 매우 귀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마치는 것은 시작하는 것 보다 더 귀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것이 귀합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을 이루는 것은 더 귀합니다. 우리가 어떠한 좋은 일을 시작하는 것이 귀합니다. 그러나 이 시작한 일을 온전히 마치는 것은 더 귀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보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마치 경주자가 달음박질 마당에서 달리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경주자가 마지막 모든 코스를 다 달음질해서 그 경주를 마쳐야 한다고 여러 번 여러 가지 모양으로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것은 마치 경주 자들이 마라돈 코스를 향해서 떠나는 것과 비슷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마라돈 경주를 보면 많은 사람이 시작합니다. 그러나 마지막 끝까지 그 코스를 다 마치는 삶은 많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의 경주 장에서도 시작하는 사람은 많지마는 끝까지 마치는 사람은 얼마나 되는 가 또한 의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보면 달리는 사람에게 주시는 권면이 많습니다.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해서 계속해서 달음질하라고 했습니다. 뒤에 있는 죄, 실패한 것을 기억하지 말고 잊어버리고 뒤에 어떠한 생활을 했는지 앞만 보고 달음질하라고 하는 권면이 있습니다.
만일 사도 바울 같은 사람도 회개하기 전 자기가 잘못한 죄를 항상 돌아보았던들 그 경주에 큰 장해가 되었을 것입니다. 성 어거스틴도 전에 자기가 지은 죄를 그냥 돌아보았다면 앞으로 달리는데 있어서 큰 장해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습니다. 뒤에 있는 실패, 뒤에 있는 성공까지도 돌아볼 필요가 없다고 말씀했습니다. <마치려는 결심>에서
50 섣달 그믐날 집에 불을 지른 여인
지금도 잊지 아니합니다. 서울이나 부산에도 화재가 많지마는 벌서 여러 해 전에 제가 신의주에 있을 때에 정월 초하룻날 새벽에 신의주 채소 거리에 큰 화재가 일어나서 백여 점포가 하루아침에, 특별히 정월 초하루 명절날 아침에 전부 불타버렸습니다. 조사해 보니까 그 불은 그저 난 것이 아니고 방화였습니다. 어떤 여자가 불질렀습니다.
그 때부터 10여 년 전에 어떤 촌에서 가난한 청년 부부 두 사람이 농촌에서 소작을 해서는 암만 살래야 늘 밥을 굶게 되니까, 어떻게 도회지로 들어가서 벌이를 해보자고 이사해 왔습니다. 그 채소 거리에 조그마한 방을 얻었습니다. 남자는 지게를 지고 밖에 나가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잇는 일을 다 하고 여자는 그 집에서 조그마한 가게를 만들어 놓고 콩나물과 두부도 팔고 채소와 과일을 파는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안 먹고 안 쓰고 새벽에 일어나고 늦게 자고 그저 아득바득 살기 위해 10여 년 동안을 고생을 하면서 이 여자는 장사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점점 장사가 잘 되어서 한 10년쯤 되니까 돈을 상당히 모으게 되었습니다. 이제 좋은 집을 다른데 장만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니까 이 남자는 가만 보니까 돈도 좀 있게되니 의복도 잘 입을 생각이 나게 되고 가구도 좀 살 생각이 나게 되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가만 집에 와보니까 옷도 잘 못 입고 화장도 잘 할 줄 모르고 밤낮 새벽부터 저녁까지 일만 아는 이런 여자, 그런 여편네를 볼 생각이 점점 적어진단 말이오. 의복도 깨끗이 입고 화장도 잘 한 이런 여자 얼굴만 자꾸 바라다 보인단 말입니다. 그래서 이 남자는 딴 여자 하나를 얻었습니다. 자기 아내가 아득바득 번 돈을 가지고 딴 여자를 얻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여자의 마음이 편하겠습니까? 남편을 책망도 해보고 달래도 보고 별의별 수단을 다해서 남편을 도리 키려고 많은 애를 쓴 줄 압니다. 그러나 이 남편이 돌이키지 아니합니다.
그 섣달 그믐날 밤에 이 날 밤은 꼭 돌아와 달라고 간절히 눈물로 호소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내일은 정월 초하루이고 오늘이 섣달 그믐날이니까, 그날 저녁이야 집에 돌아와 지겠지 하고 밤새도록 기다렸다고 합니다. 열시, 자정이 되어도 안 돌아옵니다. 이 여자는 너무 분하고 너무 화가 나서 “이런 세상을 살아서 뭘 해 ! 아예 이놈의 집에다 불이나 놓고 나도 불타 죽겠다”문을 닫아걸고 불을 놓았습니다. 세상은 이런 세상입니다.
흔히 필요할 때에는 찾지마는 필요 없을 때에는 내버리는 세상입니다. 요새 가만 보니까 부모가 자기 아이를 버리는 경우가 상당히 많은 모양입니다. 얼마 전에 불광동에 있는 홀트 영아원에 가보니까 전부 내다버린 어린 아기만 4, 5백 명이 거기 있습니다. 부모가 내어버렸습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홀트 씨 같은 이가 있어서 어린 아기를 잘 보양해 기릅니다. 거기서 깊이 느낀 것은 부모는 이 아이들을 버렸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아이들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고 홀트 씨의 마음을 감화 감동시켜서 이런 좋은 일을 해서 이 아이들을 기르는 구나 !
51.칼빈주의 신학의 5대 강령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자를 버리지 아니하십니다. 우리가 다 장로교인입니다. 칼빈 신학의 유명한 다섯 가지 조목이 있습니다.
1. 모든 사람은 다 원죄로 말미암아 부패하여 스스로 구원을 얻을 수 없다.
2. 그리하여 더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데 하나님께서 그 가운데서 구원할 사람을 택하신다
3. 이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그 독생자를 보내시고 십자가에서 대속(代贖)의 제사를 드리게 만드셨다.
4. 하나님께서 불가항력의 설령을 택한 사람의 마음속에 보내주셔서 그들로 하여금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믿게 만드셨다( 성령의 감화입니다)
5. 그런 까닭에 택함을 받은 이 성도는 영원히 보존되며 반드시 하나님께서 버리지 아니하시고 구원을 해 주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에서
52.하나님의 약속
로마서 8장을 보십시오.“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끓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 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그러므로 우리도 담대히 말하십시다.“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네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 하리요”
찬송가에 있는 말씀과 같이“온 세상 다 버려도 주 예수 안 버려”주님께서는 우리를 버리지 아니합니다.“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 빛 가운데로 걸어가면 주께서 아니 버리시기로 약속한 말씀 변치 않네”<하나님의 약속>에서
53.청년기의 신앙 생활
이 청년 시대의 마음 밭을 다 옥토라고 볼 수 있습니다. 길가와 같이 굳어지지 아니하였습니다. 무슨 과거의 좋지 못한 습관이나 인습으로 말미암아 굳어지지 아니하였습니다. 편견과 고집의 돌덩이도 별로 없습니다. 세상 재래의 욕심, 모든 허영에 대한 욕심의 가시덤불도 아직 성하지 아니한 때입니다. 양심은 비교적 순결하고 이상은 높습니다. 말하자면 포근포근한 옥토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옥토에 진리의 씨가 떨어지면 싹이 잘 나고 그 싹이 클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천년 시대에 진리의 씨를 받아야 합니다.
어떤 분은 이 청년 시대는 특별히 인간의 영혼이 해탈하는 시대라고 말하는 이도 있습니다. 우리 사람의 육체는 20세가 조금 지나면 그 육체의 장성은 끝이 납니다. 혹 오래 자라는 이는 스물 댓 나기까지 키가 자라지만 보통은 그 전에 키가 자라는 것으로 그치고 맙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이 자라기를 그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영은 계속해서 장성하기를 힘씁니다. 그런 까닭으로 이런 시대에는 까닭 모를 번민(煩悶)과 수심(愁心)과 오뇌(懊惱)속에서 소위 폭풍우 시대를 지나게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것은 자세히 살펴보면 실상은 인간의 영이 하나님을 찾으려고 하는 노력인 것입니다. 그러다가 창조주를 찾아서 인생의 깊은 뜻을 깨닫게 될 때에, 자기의 인생과 귀하신 목적을 하나님께 바치게 될 때에 그의 가슴속에는 큰 환희와 만족과 안심이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54.종교 심리학자들의 증언
종교 심리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신자의 대부분이 이 소년 시대와 청년 시대에 입신하게 된다고 합니다. 즉 신앙에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 역사를 보아도 요셉은 일찍이 하나님께 몸을 바친 사람이올시다. 사무엘이 역시 그렇습니다. 다윗 역시 그렇습니다. 다니엘이 역시 그렇습니다. 이사야도 모든 선지자들이 대부분 소년 시대와 청년 시대에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 앞에 그 몸과 마음을 바친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성경의 역사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 교회의 전 역사를 통해서 다 그러합니다. 유명한 교부 오리겐이든지, 폴리갑이든지, 암부로우스든지, 유명한 성자 성 프랜시스든지 혹은 유명한 종교 개혁가 루터니, 칼빈이니, 혹은 유명한 전도자 무디니, 스펠존이니 이런 모든 사람들이 소년 시대, 청년 시대에 하나님을 찾아 만나고 하나님 앞에 온전히 몸과 마음을 바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젊은 시대는 하나님을 만날 만 시대입니다. 하나님께서 가까이 계시는 때입니다. 하나님을 만날 만한 때에 우리가 찾아야 하겠고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불러서 그를 만나고 그에게 몸과 마음을 바쳐야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제일 먼저 기억할 것은 이 청년 시대에 하나님을 만날 만한 때라고 하는 이 사실이올시다.
55.인생의 분수령
이 청년시대는 일생의 분기점이 됩니다. 일생의 분수령이 됩니다. 그러므로 꼭 하나님을 만나야 할 때입니다. 일생의 방향을 잡는 때입니다. 방향을 바로 잡으려고 하면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를 만나야 될 것입니다.
백두산은 압록강과 두만강의 분수령이올시다. 백두산 산상에 떨어지는 물방울은 조금만 서편에 떨어지면 압록강수가 되어서 멀리 황해 바다로 흘러 들어갑니다. 그러나 조금만 동편으로 떨어지면 그 빗방울이 두만강수가 되어서 동편으로 흐르고 흘러서 마지막에는 동해 바다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 두 물방울이 처음에는 매우 가까운 지척간에 떨어지지마는 그 방향이 다른 까닭으로 한 시간만 지나면 그 거리가 멀어지고 하루만 지나면 수 백 리 떨어지고 며칠이 지나면 수 천리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 빗방울이 분수령에 떨어지게 되는 까닭입니다.
이렇게 청년 시대는 우리 인간 일생에 분수령이 됩니다. 어떠한 방향으로 가느냐, 그 방향을 정하는 시대입니다. 청년 시대는 인생의 분기점이 됩니다. 어떤 길로 가느냐? 그 길을 정하는 때입니다. 청년 시대에 방향을 잡으면 일생을 옳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청년 시대에 방향을 그릇 잡으면 일생을 그르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청년 시대는 일생의 행복과 불행, 성공과 실패의 분기점이 되는 것입니다.
이 청년 시대는 일할 시기입니다. 왜 청년 시대에 하나님을 기억해야 될꼬 하니 이 시대야말로 일할 시기인 까닭입니다. 사람에 따라서 혹은 중년기, 노년기에도 큰 일을 시작하기도 하고 수행하기도 하지마는 대부분의 유명한 사람들의 역사를 보면 이런 이들이 청년 시대에 큰 일을 이미 시작했고 또 일생을 통해서 계속하여 온 것입니다.
56. 휘트필드·스펄존·무디
18세기 유명한 부흥사 조지 휘트필드라고 하는 사람은 이미 스물 한 살 때에 노방 전도로 유명하게 되어서 각 처 광산으로 다니면서 광부들에게 밖에서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역시 영국의 유명한 설교사 스펄존이라고 하는 사람은 열 일곱 살 때에 회개하고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해서 스물 일곱 살 때는 런던에 큰‘메트로플리탄 태버나클(Metropolitan Tabernacle)이라고 하는 예배당을 지어 놓고 그 예배당의 목사로 있은 것입니다. 유명한 미국의 부흥사 디 엘 무디는 스무 살에 YMCA 간사로 있으면서 누구보다도 전도를 열심히 하더니 그 후에 과연 위대한 부흥사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테이버드 리빙스톤 같은 매우 유명한 선교사는 스물 세 살에 혈혈단신으로 흑암(黑暗)의 대륙 아프리카를 향하여 나간 것입니다.
57.칼빈·루터·조지 윌리암스
우리 장로교를 처음에 세웠다는 존 칼빈은 스물 일곱 살에 종교 개혁 시대에 가장 유명한 책, 아마 지금까지도 가장 유명한 신학서‘기독교 강요’를 저술해서 출판하였습니다. 마틴 루터는 스물 일곱 살에 캐슬 교회의 문 밖에다 종교 개혁 95개조를 걸어 놓고 그때 세력이 하늘을 날아가는 새도 능히 떨어뜨린다고 하는 로마 교황을 대적해서 큰 개혁의 외침을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조지 월리암스는 스물 세 살 때에 지금 세계적으로 퍼져서 청년 운동의 선구자가 되어 있는 YMCA를 조직하고 청년 운동을 시작한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이것은 교회 일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다른 방면의 일도 역시 그렇습니다. 유명한 역사의 발자취를 남긴 사람들의 생활을 여러분, 읽어보세요 카테지의 유명한 한니발 같은 사람은 스물 여섯 살에 카테이지의 군사령관이 되었다고 합니다. 알렉산더 대제는 스물 세 살에 왕이 되어서 설은 세 살에 죽었는데 그 약 10년간에 전 유럽을 점령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지중해를 건너서 애굽을 점령하고 인도까지 진군을 한 것입니다. 칼럼버스는 스물 여덟 살에 인도에 가려고 하는 모든 준비를 하여 온 유럽을 다니면서 자기를 후원할 자를 찾아다니게 되었습니다.
58.열 여덟 살에 왕이 된 광개토대왕
먼 데 다른 나라 사람들의 이야기 할 것 없습니다. 우리 한국 역사상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왕이라고 볼 수 있는 고구려 시대의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 영락태황(永樂太皇) 이라고도 합니다 - 은 열 여덟 살에 왕이 되어서 서른 아홉 살에 붕(崩) 했는데 20대에 벌서 남북 만주를 다 점령했습니다.
위대한 인물들이 청년 시대에 벌서 큰 일을 시작했습니다. 신약 성경을 보면 우리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처음부터 청년 중심 운동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갓 삼십 세에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되었습니다. 우리 주님도 30세에 역시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수 님의 제자 열 둘이 전부 30세 안팎입니다. 사도 바울도 젊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름을 받게 된 것입니다. 기독교 운동은 근본적으로 청년 세대의 운동이었습니다.
왜 우리가 청년 시대에 조물주를 기억하여야 되겠어요? 일 하기 위해서, 청년 시대는 열혈(熱血)시대입니다. 일하기에 제일 좋습니다. 청년 시대는 일편단심의 시대입니다. 무슨 일을 위해서 집중하기 쉬운 것입니다. 재작년에 우리 한국에서 4·19 학생 혁명이 있었고 작년에 5·16군사 혁명이 있었습니다. 물론 청년들이 하는 일이라 혹 무리가 없지 않아 있을 수 있지마는 청년의 운동으로 소망이 많은 줄 생각합니다.
청년 시대는 일할 만한 시대입니다. 청년 시대에 우리 교회 안에서도 봉사와 전도와 모든 방면에 일을 하여야 되겠습니다. 청년 시대는 일 할 수 있는 시대라고 하는 것을 잊지 아니해야 되겠습니다. 한 가지 계속해서 여러 청년들에게 특별히 말씀하고 싶은 것은 이 청년 시대는 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내 지나갑니다.
59 인생의 황혼이 오기 전에
여러분이 전도서 12장을 보면 기대한 경고가 굉장합니다.“너는 청년 때에 너희 창조자를 기억하라”이렇게 시작하고 2절에 보면“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그러면서 3절에 보세요.“그런 날에는(인생의 황혼이 오게 되면)집을 지키는 자들이 떨 것이며(손을 가르쳤습니다. 나이 많으면 손이 떱니다) 힘있는 자들이 구부러질 것이며(아마 이것은 척추를 가르친 것 같습니다) 맷돌 질 하는 자들이 적으므로 그칠 것이며(맷돌은 아마 이를 가리킨 것 같습니다) 창들로 내다보는 자들이 어두워질 것이며(창은 눈을 가리킨 것 같습니다) 길거리 문들이 닫혀질 것이며 맷돌 소리가 적어질 것이며(이것은 여러 가지로 해석되는데 길거리 문들이 닫히고 맷돌 소리가 적어지겠다고 하는 거 보니까 귀먹겠다고 하는 소리입니다) 새의 소리를 인하여 일어날 것이며(공연히 나이 많으면 새벽에 일어납니다) 음악 하는 여자들은 다 쉬어질 것이며(아마 성대가 다 쇠하여 지겠다는 말입니다) 그런 자들은 높은 곳을 두려워 할 것이며(높은 곳을 무서워 못 올라갑니다) 길에서도 놀랄 것이며 살구나무가 꽃이 필 것이며(이것 알아듣기 쉽게 말하면 배꽃이 피겠다는 말이요, 머리가 하얗게 되겠다는 말입니다) 메뚜기도 짐이 될 것이며(힘이 없으니까 메뚜기 한 마리가 등에 올라앉아도 대단히 무겁겠단 말이요 !) 원욕(願慾)이 그치리니 이는 이 사람이 자기 영원한 집으로 돌아가고 조문 자들이 거리로 왕래하게 됨이라” 이렇게 되기 전에 조물주를 기억하라는 말입니다. = <청년 시대와 신앙 생활>에서
60.노년기의 신앙 생활
우리 한국 같은 나라에서는 부득이 은퇴할 수밖에 없지마는 다른 방법을 찾아서 하나님께서 힘 주시는 대로 창조적 생활을 하여야 됩니다. 특별히 노년 시대에 교회를 돕고 심방을 하든가 전도를 하든가 하는 모교회의 일은 제일 자유롭고 제일 능률 있게 할 만한 봉사입니다.
작년에 우리교회에 와서 설교한 바 있는 스탠리 존스박사(Dr, Stanley Jones) 는 70이 되었을 때에(그의 나라 법에는 70이면 은퇴합니다) 자기 선교부에 편지를 이렇게 했다고 합니다. 내가 금년 70이니까 부득이 선교사로는 은퇴합니다. 그러나 내가 복음을 전파하는 전도자로서는 도무지 은퇴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냥 나 혼자 이 앞으로 사방으로 다니면서 전도하겠습니다. 이런 편지를 썼다고 합니다. 사실 그이가 지금 일흔 댓 되었습니다. 그러나 온 세계에 다니면서 지금까지도 보음을 전파합니다.
61.소크라테스의 노년기
사실 유명한 철학자 소크라테스 같은 이는 나이 많을 때에 새 악기를 배워서 음악을 했다고 합니다. 고대의 유명한 정치가 케토 같은 사람은 여든 다섯에 헬라 말을 배웠다고 합니다. 여기 이탈리아의 문예부흥시대의 유명한 학자 피토락 같은 사람은 일흔 살 때에 라틴어를 처음으로 배웠다고 합니다.
멀리 갈 것도 없습니다. 우리 교회의 김성무 권사 님은 회갑 지나서 신학을 졸업했습니다. 우리교회 김성준 장로님은 환갑 지난 지 4, 5년 되었는데 금년 신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나이 많을지라도 계속해서 새 것을 배워야 됩니다. 여러 천년들과 접촉해야 됩니다. 청년들의 꿈과 이상에 감화를 받아야 됩니다. 나이 많아도 계속하여 배우세요.
62 염려하지 말고 기도하라
제일 중요한 것이 물론 있습니다. 아무래도 나이 점점 많아지면 육체도 쇠약하여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이런 말씀으로 권면(勸勉)했습니다.“겉 사람은 부패하나 속 사람은 날로 새롭도록 힘쓰라”고. 이렇게 하려고 하면 특별히 여기에 대한 기도가 필요합니다. 시편 71편9절에 보면“나를 늙을 때에 버리지 마시며 내 힘이 쇠약할 때에 떠나지 마소서”이렇게 우리도 기도하십시다. 의로운 길을 가야만 합니다. 잠언 16장 31절에“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의로운 길로 가도록 힘써야 합니다. 너무 염려하지 맙시다.
이사야 46장 4절에 이런 약속이 있습니다.“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안을 것이요 품을 것이요 구하여 내리라”백발이 되기까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품어주시고 보호하여 주시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나이 많아진다고 너무 염려하지 맙시다.
63 타고르의 말
인도의 유명한 시성 타고르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나는 점점 나이가 많아 가므로 내가 젓는 노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이제는 돛대를 높이 달고 바람을 의지하노라”그래야 됩니다. 나이가 점점 많아감으로 내 육체가 쇠약해서 간다고 한탄하지 말고 내 노력을 너무 의지하지 말고, 믿음의 돛대를 높이 달고 하나님께서 바람을 주시는 대로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할 것입니다.
육신의 눈이 어두워질 때에 신령한 눈이 밝아집니다. 하늘 나라를 보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러기에 사도 요한은 젊을 때에 게시를 받지 아니하였습니다. 나이 많을 때에 밧모 섬에 가서 육신의 눈이 보이지 않게 될 때에 하늘 나라의 영광이 그 눈앞에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이런 축복은 누구나 믿음으로 사는 사람에게 다 허락된 축복입니다. 기억하세요. 나뭇잎은 떨어질 때에 제일 아름답습니다. 과실은 가을에 다 익을 때에 제일 아름답습니다. 곡식도 거두게 될 때에 제일 아름답습니다. 햇빛도 서산 낙조가 제일 아름답습니다. 노년 시대는 인격과 믿음이 완숙하고 아름다워질 때입니다. 온유하고, 겸손하고, 진실하고, 원만하고, 이해성이 많고, 온전한 그리스도의 인격을 기를 때입니다. <노년기와 신앙 생활>에서
64. 회개와 사죄
주후 2-3 세기에 교회를 소란하게 하던 영지주의자(노스티시즘이라고 합니다) 등은 주장하기를,“사람이란 영과 육이 합해서 사람이 되었는데 육은 물질이요, 영은 선하지마는 물질은 악해, 그러니까 내가 죄를 지었지마는 이것은 육신이 지었어! 이것은 육신의 책임이지 내 책임은 아니다”이렇게 죄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요사이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죄를 지은 후에 여러 가지 다른 데로 책임을 돌립니다. 어떤 때는 이것을 유전의 책임이다, 나는 유전이 나빠서 이런 죄를 짓게 되었다고 하면서 자기 죄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어떤 사람은 환경의 책임이라고 합니다.“내 처지가, 그저 내 입장이 내 죄를 짓게 만들었어! 나에게 책임이 있나!”이렇게 생각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회에다 돌립니다. 국가에다“ 나사는 사회가 나를 꼭 이렇게 만들었다! 사회가 책임이 있고 국가가 책임 있지 나는 죄 없다”고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여러분 얼마 전에 신문지상에서도 굉장히 떠들어 잘 알지만 유대 사람 6백만이나 학살한 아이히만 같은 사람, 이스라엘 법정에 서서도 당당히 주장했습니다.“내가 죽이기는 하였지만 그야 내 책임인가? 나치스의 책임이지. 나야 죄가 있나? 죄 없다”이렇게 사람들은 사특(邪慝)한 지혜를 써서 죄를 짓고도 죄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이것으로 아담과 하와의 자손이라고 하는 것을 증명합니다.
여러분 기억하시지요? 창세기 3장에 보면 아담이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타나서 “아담아, 어찌하여 네가 이 금과를 먹었느냐?”곧 대답하는 말이“여호와께서 주신 그 여자가 그것을 나에게 주므로 내가 먹었습니다,”여자를 만나서“어찌하여 네가 그 금과를 주었느냐?”여자에게 책임을 추궁했습니다. 여자는 이에 대답하는 말이“그건 제가 그렇게 했나 요,? 뱀이 나를 꾀어서 그렇게 하였지요”저에게는 책임이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죄라고 하는 것은 별 것이 아니고 우리 인간이 진화되기 전에 가졌던 습성이다. 그 것이 무슨 죄가 되나?”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 가운데는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도 죄 없다고 하는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
65.펠라기오의 잘못
주후 4세기 어거스틴 때에 영국 신학자 펠라기오(Pelagius)라고 하는 사람은“사람이 자기가 짓는 죄는 있지마는 원죄는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예수 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자기네가 율법을 잘 지키고 의식을 온전히 지킨 까닭으로 자기들에게 죄가 없는 줄 생각했습니다. 독선주의에 빠져서 남의 죄는 보고 자기의 죄는 보지 못했습니다.
옛날이나 오늘이나 그릇된 신비주의자들 가운데, 혹은 사교도(邪敎徒)들 가운데“나는 벌서 온전한 사람이 되었는데 무슨 죄가 있나?”그래서 어떤 사람은“나는 예수다! 나는 새 주다”혹은 자기는 무슨 감람나무라고 하여 죄 없다고 주장을 하였습니다.
내가 이북에서 들을 때 어떤 사람들은 그런 그릇된 신비주의에 젖어서“우리는 다 온전히 중생하고 이제는 온전해 졌고 죄 하나도 없는데 우리 같은 사람은 남녀 신도가 다 한방에서 동숙해도 좋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우리에게 말합니다.“누구든지 죄 없다고 하면 이런 사람들은 자기를 속이는 것 뿐이라”고 남이 속이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속이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손바닥 같이 분명히 내려다보십니다. 죄 없다고 하는 사람은 마치 매에 쫓긴 꿩이 쫓기다 숲 속에 머리를 박고서 몸통과 깃은 다 내어놓고 저 혼자 숨은 줄 알고 자기는 숨었다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스스로 속이는 것 분입니다.
66.스펄존의 회개
영국의 유명한 설교자 스펄존(Spurgeon) 목사는 일찍이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우리가 어떤 때에 나는 참 죄인이다, 나는 참 나쁘다, 나는 악하다,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러나 기억하여라? 당신은 그것 보다 더 악하다고 하는 사실을”사실 우리가 어떤 때에는 나는 죄인이다라고 내 죄를 깨닫고 부끄럽게 알고 탄식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당신을 보실 때에는 당신이 생각하는 그것보다 더 악한 죄인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67.흉악한 벌레 같은 죄인
미국의 초대 역사의 유명한 인물 조나단 에드워드(Jonathan Edward)라고 하는 목사가 있습니다. 프린스턴 대학 초대학장 가운데 한 분입니다. 그이의 설교 가운데“흉악한 벌레 같은 죄인”이란 말을 썼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 후에 비평을 했습니다.‘아 그 너무 과한 말을 썼다’고
그러나 우리가 깊이 생각해보면 하나님은 빛이 십니다 하나님 앞에는 숨기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날 적부터 지금까지 우리의 말과 우리의 행동과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사상을 다 알고 있습니다. 손바닥 같이 보고 게십니다. 이런 하나님 앞에 우리가 앉았습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내려다보실 때에 우리 속에 있는 모든 생각, 보는 상상, 모든 공상, 모든 망상, 야심, 음욕, 허영심, 공명심, 교만, 시기, 욕심, 이것이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나타날 터이니 사람처럼 흉악한 벌레가 어디 있겠어요? 흉악한 벌레 이상으로 흉악한 것이 우리 인간인 것입니다.
68.디 엘 무디의 일화
미국의 유명한 부흥가 디 엘 무디라고 하는 사람이 한 번은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가 어떤 곳에서 부흥회를 가졌는데 하루 저녁 설교를 마치고 자기 집에 돌아왔습니다. 어떤 청년이 찾아와서 자기를 보기를 원해요. 어떻게 찾아왔느냐고 물어보니 그 청년은 “저는 어떤 회사에서 회계 일을 보는 사람입니다. 제가 그 재무를 보는 가운데 그만 큰 시험에 들어서 주인의 돈 1,500달러를 훔쳤습니다. 오늘 저녁 말씀을 듣고 제가 꼭 이 죄를 회개하여야 되겠는데 1,500백 달러를 훔쳐서 얼마는 쓰고 지금은 950달라 밖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다 있으면 제가 다 가지다 드리겠는데 950달러밖에 없으니 이것 가져다 드릴 수가 없고, 그래서 제 생각은 이것을 가지고 좀 몰래 장사를 해서 이를 남겨서 1,500달러가 된 다음에 이것을 완전히 주인에게 갚으려고 하는데 어떻습니까? 이렇게 의논을 합니다.
그 때 무디 선생 하는 말이“그저 그 생각도 할 수 있기는 하지마는 내 생각에는 그 도적질한 돈으로 장사를 해야 그 장사가 잘 안 될 것 같애 ! 그러니까 그 남은 것이라도 갚을 수 잇는 대로 우선 갚아 들이세요. 그러면 아마 그 주인이 용서해 줄 것입니다.”그러니까 그의 하는 말이“아, 저는 부끄러워서 감이 갈 수 없으니 무디 선생님, 저와 같이 가주십시오”
그래서 이튿날 그이와 같이 회사 주인을 찾았다고 합니다. 가서 무디 선생은 먼저 들어가서 그 사정 이야기를 다 하였습니다. 그 이야기를 다 듣더니 그 주인이“아, 나는 그이가 그런 일을 한 것은 전연 몰랐었다”고.“그러나 이번에 그이가 회개하는 말을 들을 때에 참 내 마음이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다”며“뭐 그 950달러 있으면 그냥 가져오면 내가 다 용서해 주겠다”그 다음에 그 청년을 청해서 눈물을 흘리면서 셋이 같이 앉아 기도를 하고 온전히 주인은 그 청년을 용서 해주고 그 다음부터 그 청년은 옳은 신앙생활을 했다고 하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69.회개와 보상
참 회개에는 할 수만 있으면 보상이 따릅니다. 제 교역 생활에 있어서도 이북에 있을 때에 또는 이남에 있을 때에 여러 청년들이 와서 자기가 이와 같이 남의 것, 남의 물건 안 가질 것을 가졌다고 저에게 와서 자복(自服)을 하면서 도로 돌려준 경우가 많습니다. 안 가질 돈을 썼더라도 그 돈을 도로 찾아준 예도 있습니다. 어떤 이는 관청의 공무원으로 있는데 다른 사람이 다 받았으니까는 뇌물을 다 같이 받았다가 그후에 양심이 너무 무거워서 다시 돌려주려고 하니까는 그 사람을 찾을 수도 없고 그러니 내가 이 돈을 연보를 하려고 하는데 어떻습니까? 이런 무제를 가지고 와서 의논한 청년들도 있습니다. 참 회개에는 할 수만 있으면 봉사하는 것이 참 회개의 열매입니다.
저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70.술 두 병을 훔친 여인의 괴로움
전에 어떤 여자가 어려서 남의 집에 식모 노릇을 합니다. 아마 그때 그 주인집이 안 믿는 집이었던 모양입니다. 술 두 병을 훔쳤습니다. 그 후 이 여자는 장성해서 출가한 후에 아들 딸 낳고 잘 삽니다. 또 그후에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죄를 다 자복하고 옳은 생활을 꼭 하려고 하는데 항상 이 여자의 문제는 무엇인가 하니 언제나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는 그 술 두 병이 떡 나타나곤 합니다. 하나님께 고백은 하였지만 그 술 두 병은 그냥 있거든요. 아, 이것을 어떻게 하면 좋은가. 생각하다 못해 목사와 의논을 하고서 그거 별 수 없으니 그런 경우에는 그 술 두 병 아주 갖다 주라고. 아 가져다주려니 그 집주인 할아버지 할머니다 세상을 떠나고 없단 말이요. 그 자손들만 사는 집에 가서 그런 이야기를 다 하고 술 두 병을 도로 갖다 주었다고 합니다. 그 다음이야 마음이 평안했습니다.
이렇게 보상할 수 있는 경우면 보상하면 감사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문제를 생각할 때에 심히 마음이 무거운 것은 어떤 죄는 보상할래 야 보상할 수 없는 죄가 많습니다. 다른 사람의 명예를 훼손한 다음에 그 명예를 어떻게 다시 온전히 회복해 줄 수 있는 길이 있습니까?
71.젊은 여 성도의 회개
바로 몇 달 전에 어떤 여자 청년이 예배 필한 다음에 저를 보자고 했습니다. 그 여자의 사정을 들으니까 어떤 회사에 근무하는 여자입니다. 그 집은 잘 믿는 가정입니다. 그러나 그 회사에 책임자로 있는 사람이 큰 시험에 빠졌습니다. 이 여자를 그르쳤습니다. 마음가운데 무거운 마음으로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그가 아무래도 이 자리에 꼭 떠나고 새로운 생활을 하여야 되겠는데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말했습니다. 곧 그 자리를 떠나도록 기도를 하고 그 상대자도 내가 만나고 그 사람에게 꼭 회개하도록 권면을 했습니다.
72.톨스토이의 《부활》
톨스토이의 유명한 《부활》이라고 하는 소설을 기억하실 줄 압니다 청년 귀족이 자기 정욕을 만족하기 위해서 철없는 여자를 그르쳤습니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이 여자는 그 집에서 쫓겨났습니다. 타락하고 타락해서 윤락 여성이 되고 말았습니다. 큰 죄에 빠지고 또 빠졌습니다.
그 후에 이 청년이 알고 보니 몇 해 전에 자기가 그르친 여자올시다. 이 여자를 다시 회복해서 좋은 여자를 만들기 위하여 이 청년이 온갖 수고를 다 합니다. 그러나 일생을 그르친 그것을 다시 보상해 줄 수 없어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죄가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를 멀리해야 합니다. 나의 일생을 그르쳐 준 죄를 무엇으로 보상합니까? 슈바이처가 아프리카에 가서 전도한 동기가운데 하나는 백인들이 흑인들에게 죄를 너무 많이 지어서 내가 이 보상의 하나로서, 백인의 하나로서 나아가서 이 사람들에게 참으로 봉사하겠다는 그 정신이 있습니다.
73.마음속의 큰 기쁨
그래서 어떤 이들은 그가 개인으로 보상할 수 없으니 사회적으로 봉사하겠다고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자기의 죄를 깊이 참회하는 가운데 자기의 일생을 어떤 공공 사업이나 자선 사업이나 문둥병 자를 위하여, 걸인들을 위해서 일생을 바쳐서 참회의 생활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참 회개에는 이 보상이 따릅니다. 먼저 죄를 깨닫고 죄를 하나님 앞에 고백하며 이 죄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남겨진 손해를 할 수 있는 대로 보상할 때 그것이 참 회개입니다. 그는 “미쁘셔서”약속대로 지킵니다. 예수 님의 십자가의 공로를 믿는 이에게 약속대로 죄를 용서하여 주십니다. 시편 32편을 기록한 기자는 이런 자기의 체험을 기록하였습니다.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衰)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 같이 되었나니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야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였나이다”그리고 끝에“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참으로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받을 때에 우리의 마음속에 큰 기쁨이 올 것입니다. <회개와 사죄>에서
74.성도의 유일한 자랑
십자가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원수 된 것을 멸하고 화목을 이루게 한 것입니다. 사실 그 십자가의 수직선은 높은 하늘에서 땅 끝까지 미쳐서 죄는 사함이 되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목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또한 그 십자가의 횡선은 인간괴 인간이 다시 화목하게 되고 인간 사이에 참된 화평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사람과 사람 사이에 화목을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외쳤습니다.“그러나 오직 내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 결단코 자랑할 것이 없노라”
75.독일 어느 예배당의 어린 양
제가 들으니 독일의 어느 예배당 정문 위에는 조그마한 어린양을 돌에다 새겨 놓았다고 합니다. 그것은 그 배후에 이야기가 있다고 합니다. 그 예배당 지붕이 좀 상해서 고치기 위해서 일꾼이 올라가서 일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만 일을 하다가 일꾼 가운데 하나가 발을 헛디뎌서 그 높은 지붕에서 떨러졌다고 합니다. 그 예배당 옆에는 풀밭이 있었는데 거기 마침 양 때가 있어서 풀을 먹고 있었다고 합니다. 떨어진다는 것이 어린 야의 위에 떨어져서 그 양은 눌려 죽었습니다. 그 대신 일꾼은 살았다고 합니다. 이와 비슷하게 그리스도께서 어린양과 같이 우리 대신 죽음으로 우리 인간을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76.모세와 불 뱀
모세가 한 번은 광야에서 불 뱀에 물려서 죽는 사람이 많을 때에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서 구리로 뱀을 만들어서 높이 장대 끝에 달아서 누구든지 그 구리 뱀을 바라보는 사람은 비록 불 뱀에 물렸지마는 죽지 않고 살게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를 우리가 출애굽기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혀서 구리 뱀과 같이 높이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습니다. 그러나 이 죽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가운데서 바라보는 가운데서 바라보는 사람들은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던 사람이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옛날로부터 오늘날까지 죄 사함을 받은 사람은 오직 이 십자가를 바라보는 가운데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사실 큰 은혜를 받은 사람들도 이 십자가를 바라보는 가운데서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섬 프랜시스 같은 이도 십자가 앞에서 십자가를 바라보며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에 신령한 은혜를 받고 죄 사함을 체험을 얻은 것입니다.
77.모라비아 교회 창시자
모라비아 교회를 처음에 설립하고 온 세계, 우리 신교도 가운데 제일 먼저 세계 선교의 봉화를 든 진젠돌프 같은 사람도 자신이 젊었을 때에 어떤 미술관에 들어가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바라보는 가운데서 큰 은혜를 받고 자기의 몸을 하나님께 바치고 새 사람이 된 것입니다. 지금 도덕 재무장회로 전략이 되어서 좀 섭섭하지만 옥스퍼드 운동이라고 처음에 많은 좋은 일을 한 운동이 있습니다. 이 운동을 처음에 일으킨 프랭크 북한, 그 사람도 십자가를 신령한 눈으로 바라보는 가운데서 자기의 죄를 깨닫고, 자기의 교만을 깨닫게 되어 온전히 죄 사함을 얻고 새로운 사람이 된 것을 우리가 다 책에서 볼 수 있습니다.
78.성 프랜시스의 손의 못 자국
우리는 이 렌트 기간에 특별히 십자가를 바라봅시다. 십자가를 묵상합시다. 성 프랜시스는 십자가를 얼마나 묵상하였는지 그 손바닥에 못 자국이 생겼다고 하는 전설이 있습니다. 이 십자가를 우리도 자랑합시다. 이 죄 많은 세상에서 우리가 높이 들 것은 십자가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암흑의 세상에 광명을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십자가밖에 없습니다. 이 불안과 공포의 세상 가운데서 마음의 안심과 평화를 얻을 곳은 오직 십자가 앞에 나아갈 것밖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이 환난과 고통과 죄악과 절망에서 헤매 이는 모든 인류에게 우리 위로 십자가를 높이 들어서 모든 인류들로 하여금 이 십자가를 바라볼 수 있도록 하여야 되겠습니다.
여기에 우리 소망이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의 재생의 길이 있습니다. 여기에 새 사람되는 길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환경이 아무리 험악하고 나의 과거가 아무리 추악하지마는 십자가 앞에 나오는 사람에게는 새로운 소망이 있습니다.
79.밀턴의 명언
존 밀턴이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인간의 영혼의 존귀한 이유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까닭이요, 둘째는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힌 까닭이다” <성도의 유일한 자랑>에서
80.어느 성도의 유언
우리 교우 중에 잘 믿는 어떤 자매 한 분이 장사 차 멀리 갔다가 그만 임산기(臨産期)가 되어서 그 곳에서 해산을 하다가 세상을 떠난 일이 있습니다. 이 분은 잘 믿는 분으로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게 될 것을 스스로 깨달은 다음에는 같이 갔던 자기 남편을 위로하면서 “나는 이제 오래지 아니해서 주님 계신 데로 갈 터인데 나를 위해서 조금도 염려하지 마세요”라고 오히려 남편을 위로하면서“내가 십일조를 드리던 것이 어디 있는데 그것을 교회에 가져다 드리고 또 여전도 회비를 내가 어디에 마련해 둔 것이 있는데 그것도 꼭 여전도회에 가져다 바쳐 주세요”
그 때에 이 부인이 어린애가 일곱이 있었습니다. 여섯이 딸이고 하나가 아들입니다. 일곱 살쯤 아들이 있는데 그 남편보고 이 아들은 잘 길러서 이 다음에 목사가 되게 해달라고 하고 또 자기 육체는 세상 떠난 다음에 영락 묘지에(강원도 외지에서 별세) 좀 불편하지만 옮겨서 꼭 묻어달라고 그런 유언을 하고 고이 잠자듯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에게는 사망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라고 찬송가를 부릅니다.“요단강 건너가 떠나리”이렇게 안 부릅니다. 왜 그런고 하니 믿는 사람에게는 사망도 만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주님을 만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먼저 간 성도를 만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의 사망도 끓을 수 없습니다.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81.죄의 고백과 그 축복
여러분, 이미도 말했지만 다윗은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다윗은 어렸을 적부터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이올시다. 그러나 이런 사람도 큰 범죄를 하였습니다. 이런 사람도 큰 유혹에 빠졌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전감(前鑑)이 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오래 믿었든지, 우리가 얼마나 신앙생활을 하였든지 조심하지 아니하면 누구든지 죄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조심해야 합니다. 또 우리가 어떻게 하여서 시험에 들었다고 하면 우리가 이 죄를 가리려고 할 것이 아닙니다. 이 죄를 덮으려고 할 것이 아닙니다. 곧 그 자리에서 깨달아 아는 대로 하나님 앞에 고백하고 솔직히 자복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죄는 값이 있습니다.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죄를 범한 다음에 값이 없는 줄 스스로 속지 맙시다. 물론 무신론자들은 죄를 부인합니다
82. <주홍글씨》와《세조대왕》
지금부터 약 30년 전에 전 세계적으로 극단의 자유주의 사상이 팽배해질 때에 심지어 예수 믿는 사람 가운데에도 죄를 경히 여긴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에 오스트리아의 유명한 심리학자 프로이드를 비롯해서 많은 심리학자들이 인간의 심리를 깊이 연구했습니다. 육체의 모든 질병을 고치기 위해서 인간의 심리를 연구하기 시작하는 가운데, 그들이 놀랄 수밖에 없는 것은 많은 육체의 질병과 여러 가지 정신적 이상이 어떤 때에는 자기도 모르는 내적 분열과 내적 충돌에 의해서 여러 가지 육체의 질병과 여러 가지 심리적 고장을 일으키는 것을 발견하게 된 갓입니다.
내적 분열, 내적 충돌은 결국은 어디서 원인이 되는 줄 압니까? 속에 죄가 깊이 묻혀 있을 때에, 결국은 속에서 분열이 생기고 내적 충돌이 생깁니다.
어떤 때에는 자기 자신도 잊어버려서 그 죄를 잊어버리지마는 사람의 심령 속에는 죄를 잊어버리지 못합니다. 고통이 생깁니다. 번민이 생깁니다. 오뇌가 생깁니다. 유명한 소설 토스토에프스키《죄와 벌》을 읽어보십시요. 미국의 유명한 소설, 호오돈(Nathaniel Hawthorne)이 지은 <주홍글씨> (The Scarlet Letter) 라고 하는 소설을 읽어보세요. 혹은 우리 한국의 소설 가운데 춘원 (春園) 선생의 <세조대왕>(世祖大王)을 읽어보세요.
죄에는 값이 있습니다. 죄를 지은 다음에 피할 수 없습니다. 값을 낼 수밖에 없습니다. 죄를 지은 다음에는 솔직히 하나님 앞과 또한 부득이 어떠한 경우에는 사람 앞에서라도 온전히 고백하고 죄 사함을 받는 길밖에 다른 길이 없는 것입니다. <죄의 고백과 그 축복>에서
83.모르켄 박사의 강연에서
이번에 버어마에 가서 같이 수양회를 인도할 때에 홍콩에서 일하는 모르켄(David E. Morken) 박사라고 하는 분도 같이 와서 수양회를 인도했는데 그이가 그 때 목사들한테 강연하는 가운데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 오스트레일리아에 어떤 젊은 여자가 불행히 소녀 때에 중한 병을 만나서 그만 처음에 두 다리를 자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그 다음에는 불행히 이 병이 손으로 올라와서 부득이 두 팔을 자를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 여자는 그와 같은 가운데서 믿음이 더욱 독실해지고 은혜를 받아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간절해졌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남의 봉사를 받고 사는데 내가 어떻게 하면 주님을 사랑할 수 있을까? 항상 기도했습니다. 그러다가 팔을 자르고 조금 남은 데에다가 만년필을 붙들어 매고 글쓰기를 연습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자르고 남은 데를 붙들어 매고 글을 쓰는 법을 배웠다고 합니다.
글쓰기를 배운 다음에 이 분이 드러누워서도 편지를 쓰는데, 자기가 전에 안면이 좀 있는 이들 가운데 별로 믿음이 없고 교회에 잘 나오지 아니하는 이런 친구들에게 간절하게 자기의 믿음을 증거하고 전도하는 편지를 쓰기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여자가 가만히 드러누워서 편지를 일년에도 여러 수백 수천 장을 씁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그래서 가만히 누워서 누구보다도 많은 사람의 영혼을 구했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고 하면 어떤 방면으로든지 하나님께 봉사하고 기쁜 소식을 전파하기 위해서 힘쓸 것입니다. <크고 첫째 되는 계명>에서
84.둘째 되는 큰 계명
제가 지금부터 근 30년 전에 청년 전도사로 신의주 제2교회에서 일 볼 때에 우리 가운데 계신지 모르겠습니다만 곽산에 김진근 목사님이라고 계셨습니다. 그 목사님이 한 번 신의주에 들어오셔서 저하고 조용히 함께 이야기할 때에 자기 경험담을 이야기해 준 그 말씀이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습니다.
85.두 목사 이야기
다른 이야기가 아니고 김 목사님이 그 때에 신학을 다 마치고 노회에서 이제 목사 장립(將立)을 받기 위해서 시취(試取)를 하는데 그 때 노회에서 시취하는 법은 무슨 시취 위원이 따로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니고 그저 노회 앞에서 아무나 이 사람도 묻고 저 사람도 묻고 그저 물어서 대답을 잘해야 그 다음에 목사 장립을 시키든 때라고 합니다. 그저 그렇게 시취를 자기와 어떤 다른 분하고 두 분이 받았습니다. 아 그래서 묻는 말을 자기 생각에는 무던히 애써 다 대답을 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여러 목사님들의 태도를 보니까 한국 목사들의 태도는 아 그저 뭐 목사 장립을 받을 수 있겠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그 분위기가 거이 그저 될 듯하더니 아 마지막에 어떤 선교사 하나가 있어서 무슨 말을 하는고 하니 “거 나 보기에는 이 사람들이 아직까지 목사 장립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줄 생각합니다”하면서 반대를 합니다.
아 그러니까 그 때는 특별히 선교사의 발언은 소중히 생각되든 때인데 여러 한국 목사 장로들이 대체로 다 될 줄 이렇게 공기가 돌아가더니 아, 아, 이 선교사의 말 한 마디에 공기가 갑자기 변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는“한 노회 기간동안 연기하기를 동의합니다.”“재청합니다”이렇게 되니까 그만 목사 장립을 못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 일을 당하고 이제 자기 숙소로 돌아오게 되니까 가만히 자기 마음속에 분한 생각이 났단 말입니다. “아니 선교사로 와서 복음이나 전할 것이지 남의 목사 장립하는 데까지 참견할 것이 무엇 있나?”
그러나 얼마 후에 그날 저녁 이 일을 가만히 조용히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생각을 해보니까,“그 선교사와 나와 무슨 개인적인 감정은 조금도 없는데 그가 그와 같이 한 것을 보면 아무래도 그는 경험 많은 선교사인데 내가 아직까지도 좀 부족한 점이 있기에 한 동안 기다리라고 하겠지. 그것은 나를 미워한다 든 가 무슨 다른 생각으로 그런 것이 아닐 것 아닌가”이렇게 생각하여 양해가 되었고, 그리고“그 선교사가 내게 불리한 말을 했지마는 나는 이 노한 마음 분한 마음을 오래 품지 않겠다”하고 그것을 양해를 했단 말입니다. 그랬는데 그 때 똑 같은 일을 당한 다른 한 분은 그 양해가 도무지 되지 않았습니다. 한 달 후에 만났는데도 그 때도 아직까지 분한 마음을 품고“에이! 그 선교사, 그놈! 아, 그저 그 분한 마음을 풀지 못하고 그냥 오래 기지고 있더라고 말했습니다.
길게 이야기할 필요가 없지마는 하여간 그 후에 그 다른 분은 결국은 교회 일을 보지 않게 되었더랍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좌우간 우리가 무슨 일로 분한 마음이 들든지 그때 분한 마음을 풀지 아니하고 오래 두면 손해는 결국 내가 본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고 하니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서 떠난단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내 이웃의 죄를 용서해 주지 않는 태도입니다. 내가 내 형제의 죄를 용서 해 주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도 용서해 주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내 자신을 용서하면 내가 다른 사람도 용서해야 할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또 내가 나 자신에 대해서 시기하는 사람 하나도 없습니다. 자기가 자기 자신 잘 되는 것을 시기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언제든지 시기라고 하는 것은 사랑이 부족한 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86.현미경과 망원경
어떤 사람이 시기는 현미경으로 사람을 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물 같은 것도 보통 눈으로 보면 맑지마는 현미경으로는 암만 맑은 물이라도 자세히 살펴보면 그 속에는 더러운 벌레도 많고 그 외에 여러 가지 더러운 것이 많습니다. 시기의 눈으로 사람을 보면 암만 좋은 사람이라도 여러 가지 결점이 많이 나타난다 하는 그 말입니다.
그 대신 사랑은 망원경으로 사람을 보는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 방금 저 사람이 좀 부족한 것이 있지마는 이 앞에는 대단히 좋은 사람으로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항상 사람은 멀리서 보아야 합니다. 내가 내 자신을 사랑으로 본다고 하면 내가 다른 이웃도 사랑으로 보아야 하는 말이올시다
이것은 소극적으로 하는 말이지마는 적극적으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어떻게 사랑합니까? 우선 우리 자신을 얼마나 귀하게 여깁니까? 주리면 먹고 목마르면 이내 물 가져다 마시고 추우면 이내 외투 가져다가 입히고 더우면 부채질하고 피곤하면 이내 자리에 누어서 쉬고, 또한 병이 나면 이내 약 가져다 먹고, 혹 다른 사람에게 오해받으면 변명하느라고 분주히 돌아다닙니다.
자 우리 자신에 대해서 우리가 그러합니다.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하라고 하는 말은 내 자신을 이렇게 소중히 여기는 것처럼 내 이웃도 소중히 여겨라하는 그 말씀이올시다. 다시 말하면 내 자신을 보호하고 보양하고 평안하게 하고 할 수 있는 대로 내 이웃의 명예나 생명이나 재산을 보존하도록 최선을 다하라 하는 그 말이올시다. <둘째 되는 큰 계명>에서
87.영혼의 닻
배에는 꼭 있어야 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닻입니다. 큰 파도가 일어날 때에 이 닻이 깊은 바다 밑에 박혀있어야 배가 밀리지 아니하고 파선을 면할 수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고해와 같은 세상을 지나가는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꼭 있어야 할 것이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소망이올시다. 소망은 닻과 같다고 그래서 옛날부터 닻은 소망의 한 상징으로 사용되어 온 것이 사실이올시다. 오늘 이 시간, 이 영혼의 닻을 생각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 주시기를 바랍니다.
88.닻과 소망
배마다 닻이 있습니다. 작은 배는 작은 닻, 큰배는 큰 닻이 있습니다. 물론 한강에 떠 잇는 노름 배 같은 것은 닻이 없을 줄 생각합니다. 사실 인생은 노름 배는 아닙니다. 아무리 작다고 할지라도 작아도 바다를 건널 수 있는 배라고 한다면 거기는 반드시 닻이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바다를 반드시 건너야 하는 배입니다. 그리고 사람마다 다 소망이 있습니다. 사실 사람들이 매일 일하고 사는 것은 소망이 있기에 그러합니다. 학생은 소망으로 공부를 합니다. 농부는 소망으로 농사를 짓습니다. 상인은 소망으로 상업을 경영합니다. 실업가는 소망으로 공장을 경영합니다. 부모는 소망을 기지고 자녀를 기릅니다. 사실 모든 활동, 모든 사업의 배후에는 이 소망이 잠재합니다. 모든 노력의 배후에는 이 소망이 있습니다. 특별히 어려울지라도 인내하여 무슨 일을 계속하는 그 배후에는 반드시 소망이 있습니다.
이런 모든 인간적인 소망에 있어서는 설사 이런 소망들이 이루어진다고 해도 우리가 본래 기대하던 것처럼 만족은 없습니다. 바로 여기 어떤 실업가가 새로 사업을 하면서 그가 꼭 이 사업에 성공을 하고 돈을 많이 벌겠다며 자지 아니하고 열심히 일하고 생각하며 많은 수고를 합니다. 그런 이들 가운데 성공 못하는 이들도 물론 많습니다. 그러나 성공한 이들도 더러 있습니다.
그래도 성공한 이들의 경험을 들어보면 그저 사업만 성공하고 돈만 모으면 천하를 얻은 것처럼 생각하지마는 정작 사업에 성공해 놓고 보면 또는 돈도 모아 놓고 보면 기대하던 것처럼 만족은 없습니다. 오히려 돈이 많으므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새로운 문제가 많이 닥칩니다. 시기하는 사람도 많아집니다. 돈을 내라고 하는 사람도 많아집니다. 여러 가지 변태(變態)무쌍(無雙)한 사회는 항상 공포를 가져옵니다. 설사 사업에 성공하고 돈을 모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환멸의 비애를 느낄 수 있습니다.
89.이스트맨의 성공과 자살
여러분, 요사이 웬만한 젊은 사람은 다 사진기 하나씩 가지고 다닙니다. 아마 그 사진기 가운데 여러 가지 종류가 있지마는 아마 이스트맨 코닥(Eastman Kodak)이 제일 많을 것입니다. 이 이스트맨이라고 하는 사람은 미국인으로서 제일 먼저 사진기를 만들었을 뿐 아니라 필름도 제일 먼저 만든 사람이올시다. 로체스터 뉴욕(Rochester New York) 에 가보면 이스트맨 코닥회사(Eastman Kodak Company) 가 한 들판을 점령하고 있습니다. 크게 성공하였습니다. 돈을 몇 억을 모은 모양이지요. 크게 성공하였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사람이 어떻게 크게 성공하고 돈도 많이 모았지마는 마지막에 어떻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결국은 인생의 환멸을 느껴서 마지막에는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이 세상의 소망이라고 하는 것, 바라볼 때는 굉장한 것 같지마는 결국 얻어 놓고 보면 여기에도 참 만족은 없습니다. 공부하는 것도 그래요. 우리가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졸업하고“내가 어떻든지 이번에 꼭 석사가 되고 박사가 꼭 되어야지, 박사 학위를 내가 받아올 테야”열심으로 공부하고 굉장히 노력합니다. 그런다고 다 박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또 그런 이들 가운데 더러 박사가 됩니다. 그러나 혹 박사가 된다고 할지라도 정작 박사가 되고 보면, 그것 뭐 별것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영혼의 닻으로 삼는 이는 어떠한 실패, 어떠한 타락, 어떠한 환난, 어떠한 슬픔이 있을 지라도 움직이지 아니합니다. 그 배가 바람에 밀러 가지 아니합니다. 암초에 부딪치지 아니합니다. 파선하지 아니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절망이란 말은 없습니다. 이 영원불멸의 영혼의 닻을 붙잡아야 합니다. 우리가 다 이 닻을 붙잡았습니까? 내가 과연 이 닻을 붙잡았다고 하면 이 예배당 문 밖에 닻 없는 작은 배를 타고 노도광풍에 시달리는 가련한 우리 민족에게 이 영혼의 닻을 전파하여야 되겠습니다. <영혼의 닻>에서
90.하나님의 승리적 사랑
인간의 여러 가지 고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인간고도 역시 그렇습니다. 혹은 천재, 혹은 지변, 혹은 빈궁, 온갖 불행도 하나님의 사랑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91.성 패트릭과 아일랜드
하나님은 이 모든 것도 초월 통치해서 축복으로 전환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는 하나님이올시다. 아일랜드 사람들은 아디 가서 예배당을 짓든지 성 패트릭기념 예배당을 짓습니다. 그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성 패트릭은 아일랜드의 성자입니다. 전 아일랜드 사람들이 성자를 모시는 그 패트릭이올시다.
여러분, 젊은 시대의 그의 역사를 읽어보면, 그 분은 불행하게도 요셉과 비슷하게 되었습니다. 열 대여섯에 나서 아일랜드의 해적들에게(그는 본래 영국사림입니다) 붙잡혀 갔습니다. 포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여러 해 동안 그 아일랜드에 가서 종노릇을 하였습니다. 그 종노릇하는 것이 계기가 되어 그 후에 패트릭이 거기서 우연히 석방을 받게 되었고 다시 와서는 공부를 계속하였고 공부를 다 한 다음에는 다시 이일랜드에 돌아가서 미신에 얽매었던 전역의 그 무지한 백성들을 온전히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해서 지금까지 아일랜드의 성자가 된 것입니다.
92.드 세이저 선교사와 일본
지금 일본에 나와서 활동하는 여러 선교사 가운데 특별히 드 세이저(Jacom De, Shazer) 라고 하는 선교사가 잇습니다. 이 선교사는 본래 미 공군 폭격 부대의 일원으로 미국 비행기가 일본 동경을 제일 먼저 폭격한 그 두리틀(Doolittle) 비행기에 같이 타고 동경을 폭격한 사람입니다. 그 비행기가 저 중경(重慶) 으로 달아나다가 그만 채 가지 못하고 이 사람이 탄 비행기는 고장이 나서 저 상해(上海)방면에 떨어졌습니다. 다행이 낙하산을 타고 내려와서 죽지는 않았지만 일본 관헌들에게 잡혔습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근 3, 4년 동안 상해, 대련(大連) 혹은 북경(北京) 그 다음에는 일본에까지 여러 감옥으로 전전하면서 말할 수 없는 고생을 당하고 일본 사람들에게 말할 수 없는 학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 그는 성경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 가운데서 은혜를 받았습니다.“일본 사람이 왜 이렇게 포악할까? 이 사람들이 성경을 모르는 까닭이다. 이 사람이 하나님을 모른 까닭이다. 이 사람들에게 성경을 주고 이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할 수밖에 없다”그런 결심을 하였습니다. 포로에서 석방되자 곧 미국에 돌아가서 공부를 해 가지고 일본에 나와서 다시 전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당하는 모든 고난도 그 사랑으로 통치해서 우리를 축복하시는 하나님이올시다. 이와 같은 말을 하려고 하면 한량이 없습니다.
93.파스칼의 명상록
프랑스의 유명한 파스칼(Pascal, Blaise) 이라고 하는 분은 본래 유명한 자연 과학자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도 한 번은 말을 타고 가다가 다리에서 떨어져서 죽을 뻔하고 중상을 입고 치료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지금까지 많은 사람이 읽는 그야말로 불멸의 저서“파스칼의 명상록”을 쓰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승리적 사람>에서
94.무디의 회개 설교와 시카고의 대 화재
전에 유명한 무디 선생이 시카고 교회에서 어떤 주일 저녁 설교를 하는데 ‘회개하라’라는 문제를 가지고 설교를 하다가“자, 이것으로 오늘 저녁은 시간이 다 가서 마칠 수가 없는데 내가 이 문제를 다음 주일에 마칠 터이니 다음 주일 저녁에 다 나오시오”하고 말하면서 설교를 마쳤습니다. 그리고 찬송을 부르는데 갑자기 밖에서 소방차 소리가 나더니 사방에 화광이 충천해서 그 때 그 굉장히 유명했던 큰 화재가 일어나서 시카고 전역이 다 불탔습니다. 그날 저녁에 무디 선생의 설교를 들은 사람 가운데도 불에 타서 죽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경험을 당하고 무디 선생이“내가 왜 그날 저녁에 회개하라고 말하지 않고 오는 주일 저녁에 다시 오라고 했던가!”하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회개할 때는 지금이올시다. 지금이 구원의 날이요, 지금이 회개할 때입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무슨 일을 당할지라도 주님을 만날 준비를 하고 살아야 됩니다. 예수 님의 이 경고를 우리가 기억해야 되겠습니다.
95.리빙스턴과 성 다미안의 십자가 정신
예수 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고난, 육체적 모든 고난을 친히 당하셨습니다. 이사야 53장 4절 이하에“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疾苦)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라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별을 받아서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히 인간고를 통해서 사명을 행하라고 우리에게 권면만 하지 않았습니다. 재난을 당할 때에 회개하라고 경고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친히 자기가 인간고에 참여해서 그 고난을 자기가 당하시고 모든 고난과 죄악 가운데서 전 인류를 구원하여주셨습니다. 십자가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예수그리스도의 제자는 언제든지 이 십자가의 정신을 가지고 수난자의 고난에 같이 참여하면서 그들을 구원하고 그들을 도와주기를 힘써야 될 것입니다. 리빙스턴이 평안한 자기의 나라를 버리고 암흑의 아프리카 대륙에 제일 먼저 가서 몸을 던지며 간 것도 십자가 정신에 의지해서 나아간 것입니다. 성 다미안 같은 사람이 문둥병 자들만 살고 있는 하와이의 한 섬 몰록카이 섬에 가기를 자원해서 일생토록 문둥이와 같이 살며 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마지막에 자기까지 감연이 되어서 죽은 것도 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정신을 대 잇기 위해서 이와 같은 일을 한 것입니다. 수난자와 같이 수난을 나누며 그들의 육신과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정신입니다. <예수와 인간고>에서
96. 감격의 신앙
요한은 요한 일서 3장 16절에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그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조금 내려가서 4장 19절에는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라고 되어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이 사랑의 감격, 그리스도의 은혜의 감격이 서로 요한으로 하여금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사도를 만든 것입니다.
이 감격의 신앙을 우리가 생각하는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이와 같은 은혜를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사도들의 신앙만이 아닙니다. 모든 교우들과 모든 선지자들과 모든 참된 성도들의 공통된 신앙의 특색이었습니다. 어거스틴도 일단 회개한 다음에는 그 일생을 통해서 이 감격이 마음 가운데 있었습니다. 내가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인데 그리스도께서 내 죄를 용서하시고 이렇게 구원하여주셨으니 무엇으로 이 은혜를 보답할까 하는 마음입니다.
97.인도네시아의 바탁 교회
지금 독립된 인도네시아라고 하는 나라가 있지마는 이 인도네시아라는 나라에 가면 ‘바탁 교회(Batak Church) 라고( 그 이름이 좀 별나지마는) 모두 인도네시아 사람으로 조직된, 어느 다른 선교부의 도움을 별로 안 받는 독립된 큰 교파 하나가 있습니다. 아마 세례교인 수는 약 50만 되는 큰 교파입니다. 그런데 이 교파는 유럽에서 온 어떤 한 사람이 처음에 복음을 전파해서 세웠다고 합니다. 유럽 북부에 있는 어떤 청년이 소년시절에 중한 다리의 병을 만나서 그 때에 의사들 생각에 이 아이의 생명을 구하려고 하면 이 다리를 절단 할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기 부모도 깊이 생각하고 이 아이도 깊이 생각하고 결국 이 두 다리를 자를 것이냐, 어떻게 할 것이냐 하고 많이 생각하는 가운데 이 아이가 한 번 하는 말이“아, 어머니, 성경을 보면 예수 님께서는 다른 사람이 고칠 수 없는 병도 다 고쳐주셨는데 내 다리도 예수 님의 능력이면 고칠 수 있지 않겠어요? 아, 이것 어떻게 고칠 수 없고 내 다리를 자를 수밖에 없습니까?”그리면서 하는 말이“나는 그저 예수 님께서 다리를 자르지 않게 해달라고 모든 것을 맡기고 간절하게 기도하겠습니다”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어머니와 그 아이가 함께 간절히 그 다리가 낫기를 위해서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은혜 가운데서 다리가 나았습니다. 그리하여 “내가 어떻게 하면 이 은혜를 갚을 수 있습니까? 아직까지도 복음을 알지 못하는 나라, 복음을 듣지 못한 나라, 다른 사람이 가보지 못한 지방, 이런 곳에 가서 복음을 전파하겠다”이렇게 작정을 하고 오래 전에 인도네시아에 혈혈단신으로 나와서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해서 그런 큰 교회가 섰다고 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그 건강에 감격한 심정 가운데서 일생을 하나님께 바칠 때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바친 그 심령을 축복하여 주신 것입니다.
98.열 일곱 사람이나 구원한 사람
토리 박사에 대한 이야기를 읽는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전에 그 미시간 호라는 호수에 한 번은 큰배가 파선을 당해서 많은 사람이 물에 빠졌는데 그 가운데서 헤엄 잘 치는 사람이 하나 있어서 혼자서 열 일곱 사람을 건져주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에 대한 기사가 신문에 굉장한 보도를 하여 여러 사람이 그 사람의 이름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번은 로스앤젤리스에서 토리 박사라고(여기 한국에 나왔던 그이의 바로 아버지가 되겠습니다) 그때는 그가 지금 유명한 빌리 그래함과 같이 유명한 목사이었는데 그이가 로스앤젤리스에서 한 번은 설교를 하면서 그이의 이름을 부르면서 참 이렇게 용감한 것을 우리가 배워야 된다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도 힘을 써야 된다고 얘기를 했다고 합니다. 그 설교를 듣던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무슨 뜻으로 손을 드느냐고 하니까“제가 바로 그 사람이올시다”하였습니다. 열 일곱 사람이나 구원한 그 사람이 바로 그 자리에 와서 토리 박사의 설교를 들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토리 박사가 너무 감사해서 강당으로 좀 올라오라고 해서 올려다 세워 놓고 이 분을 소개하면서 아주 참 용감한 일을 했다고 마지막에 묻기를 이 같은 좋은 일을 했는데 이 일을 한 후에 특별히 혹 무슨 느낀 바가 있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조금 생각하더니 “뭐 별로 특별히 느낀 바는 없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것은 내가 그 때 열 일곱 사람을 구해 주기는 하였는데, 그 사람 가운데 한 사람도 나한테 와서 고맙다고 말 한사람은 없습니다”하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보통 인간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커서 이 은혜를 잊어버리기 쉽고 우리가 어떤 때에 은혜를 깨닫는 다고 할지라도 이 은혜를 항상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여러분, 은혜를 깨닫고 기억할 수 잇는 은혜를 받기 위해서 우리가 기도하여야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전에 어떤 성자는 이렇게 기도를 하였다고 합니다. “오, 주님이시여, 모든 은혜를 내게 풍성히 주셨으니 이제 한 가지 은혜를 더 주셔서 감격의 마음을 주시옵소서!” 이 은혜까지 우리가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늘을 볼 때에도 감격한 마음으로 볼 줄 알고, 들을 바라볼 때에도 감격한 마음으로 곡식으로 덮인 들을 바라볼 줄 알고, 가을에 단풍을 바라볼 때에도 감격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길을 가다가 예배당을 볼 때에도 그리스도의 사랑에 감격으로 그 예배당을 바라보고, 높이 솟은 십자가를 바라볼 때에도 그리스도의 사랑에 감격으로 그 십자가를 바라보고, 특별히 독립된 우리 한국의 태극기를 바라볼 때마다 감격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내 사랑하는 부모, 내 사랑하는 처자. 내 사랑하는 친구들, 모든 다른 동포들을 바라볼 때에도 감격한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는 이 감격의 신앙,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모든 것을 바라볼 때에 감격에 넘치는 심정으로 바라볼 수 있는 이와 같은 은혜를 우리가 더 받아야 되겠습니다.
이제 이 앞으로 한 주간 감사 주일을 지내는 동안에 우리 하나 하나가 한 가지 은혜를 더 받아서 이 감격의 믿음을 받기를 바랍니다. 이와 같은 감격의 신앙이 있는 이에게는 불평이 없습니다. 이런 이는 아무리 수고를 하고도 대우를 생각하지 아니합니다. 이런 이는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원한을 품지 아니합니다. 이런 은혜를 받은 이는 범사에 감사합니다. 감격의 은혜를 우리가 받아야 되겠습니다. <감격의 신앙> 에서
99.인생항로의 파선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의 마음속에 지남(指南)침 하나를 주셨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이 곧 양심이올시다. 하나님께서 우리 작은 배, 우리 속에 지남 침을 주셨는데 이것은 곧 양심입니다. 부끄럽지 아니한 착한 양심입니다. 양심은 영혼의 지성소올시다. 양심은 마음속의 촛불이올시다. 밝힙니다. 양심은 마음에 새긴 하나님의 율법이올시다. 양심은 속에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이올시다.“착한 양심을 가져라.”고 권면하십니다. 이 양심이 우리의 생활의 방향을 지시하여 줍니다. 선과 악을 분별하여 줍니다. 시비를 판단하여 줍니다. 갈 길과 안갈 길을 분명히 가르쳐 줍니다.
한 거름 더 나가서 양심은 우리를 격려하기도 하고 혹은 책망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옳은 길을 갈 때에 우리를 칭찬하고 우리의 마음을 평안케 해서 우리를 격려해 주고, 안 된 길을 가려고 할 떼에 우리의 마음을 괴롭게 하고 가책을 주어서 우리를 책망하여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 향로를 바로 가려고 하십니까? 하나님이 주신 양심 그대로의 양심을 지니고 결코 저버리지 맙시다. 양심의 음성을 무시하지 맙시다. 양심의 음성을 거역하지 맙시다. 양심의 음성을 무시하자 맙시다. 아무리 어려워도 양심의 음성에 순종하십시다. 아무리 손해가 나도 양심의 명령에 순복(順服)하십시다. 아무리 부끄러워도 양심의 명령에 순종해야 합니다.
100.양심의 명령에 순복한 쟝발쟝
빅토르 유고의 유명한 <쟝발쟝>의 이야기를 여러분은 기억하시지요. 그 사람은 여러 가지 죄를 많이 지었습니다. 그리고 몰래 도망했습니다. 먼 곳으로 갔습니다. 변 성명 했습니다. 그 곳에 가서 정계(政界)에 투신했습니다. 성공을 해서 그 곳의 시장이 되었습니다. 여러 가지 더러운 죄를 많이 지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다른 도회에 가서 변 성명하고 새 사람으로 시장의 자리까지 올라가서 평안히 삽니다.
그러나 한 번은 심문을 보니까 자기가 살던 그 도회에서 어떤 죄인이 하나 붙잡혔는데 도적질을 하다가 붙잡혀서 그 당국자는 이 사람이 곧 전에 악한 것은 많이 하던 쟝발쟝이라고 인정을 하고 고문까지 해서 자백을 아마 받은 모양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에게 중형을 내린다고 하는 신문의 보도를 보았습니다. 자기는 지금 평안한 시장 자리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신문을 보고 그 날 저녁에 잠을 못 잤습니다. 많은 고민을 하였습니다. 진짜 쟝발쟝은 여기 평안히 있고 무죄한 사람이 내 대신 중형을 받게 되었으니 이것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밤새도록 고민하다가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그곳으로 마차를 타고 달려가서 그 재판장에게 자기가 실상 쟝발쟝이니 이 사람은 놓아주라고 말했습니다.
어려운 일입니다. 부끄러운 일입니다. 많이 손해나는 일입니다. 그러나 양심의 명령에 순복하였습니다. 이리해서 인생 길을 마지막에 바로 갔습니다. 우리가 인생항로를 바로 마치려고 하면 양심의 명령에 순복해야 됩니다. <인생 항로와 파선>에서
101.창조의 하나님
하나님께서 이 천지를 언제 지었으며, 어떻게 지었으며, 얼마나 오묘하게 지었는가 하는 점을 잠깐 생각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 주시기를 바랍니다.
여기 보니“태초에…”그랬습니다. 이‘태초’라고 하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알아듣기 쉽게 말하면‘맨 처음에’입니다. 그 맨 처음은 언제입니까? 영원 전이란 말은 아닙니다. 일정한 시간을 의미합니다. 오래 전에 지었지마는 영원 전부터 이 우주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맨 처음에 지은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과학자들에 의하면, 우리가 사는 이 지구의 연령을 계산합니다. 얼마나 꼭 들어맞는지는 모르지마는 대체로 계산합니다. 그 계산방법이 여러 가지 있지마는 보통 쓰는 방법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102.모든 것은 시작할 때가 있다
금속원소( 金屬元素)가운데 우라늄(U)이라고 하는 아주 신기한 원소를 이용해서 원자탄도 만들고 그 외의 여러 가지를 만듭니다. 이 원소는 이상하게도 그 자체가 방사합니다. 그래서 이 우라늄이라고 하는 원소는 방사를 하면서 변하다가 맨 마지막에는 무엇이 되는가 하면 납(鉛)이 됩니다. 여러 과학자들이 조사한 결과를 보면 약 1천만년마다 이 우라늄이 603분지 1이 납으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이 비밀을 알아 가지고서 지구 가운데 가장 오랜 지층 바위 속에 함축되어 있는 우라늄을 혹 발견합니다. 발견해서 그 가운데 몇 분의 몇이 납으로 변했는가를 조사해서 가장 오래된 지층이 몇 해전에 형성 됐나를 짐작으로 계산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식의 계산에 의하면 제일 오래된 지층이 약 25억만 년 전에 되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조사를 해서 홈즈 박사라고 하는 이는 지구의 연령이 즉 지구가 생긴지가, 창조를 받은 지가 약 33억5천만 년이라고 계산을 합니다 영원은 아니오, 시작한 때가 있다고 말입니다.
태양계의 연령은 38억만년으로 계산을 합니다. 한 걸음 나아가서 이 우주의 연령, 우주의 창조, 시작 연대를 약 100억만 년으로 추산을 합니다. 자, 이렇게 우주가 창조 받은 것을, 영원 전은 아니지만 매우 오래 전에 태초에 지음을 받은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103.우주의 크기
하나님께서 이 우주를 지으셨는데 이 우주를 어떤 규모로 지으셨나, 이 우주가 큰가 하는 것은 특별히 이 20세기에 사는 우리로서 궁금히 생각는 바입니다. 지금 이 시대는 우주를 탐색하는 시대라고 합니다. 우주를 탐색하게 될 때에는 자연히 이 우주가 얼마나 큰가 이런데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물론 옛날에도 우주가 얼마나 큰 것은 대강 짐작했지마는, 특별히 이것도 20세기에 와서야 미국의 마운트 윌손(Mount Wilson) 천문대에 있는 당시 세계에서 제일 크던 1백 인치 태양 관측용 망원경을 사용해서 우주를 살펴보게 되었고 또 바로 20여 년 전에 마운트 팔로마(Mount Palomar)에 있는 천문대에서는 지금 세계에서 제일 큰 망원경 2백인치의 헤일(Hale) 망원경을 통해서 우주를 좀더 자세히 내다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늘 보는 태양은 얼마나 큽니까? 멀리서 보면 태양이 작게 보이지마는 과학자들이 조사한 결과를 우리가 들어보면 태양 자체가 얼마나 큰고 하니 우리가 사는 이 지구 같은 것이 1백만 개나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크다고 합니다. 태양 자체의 그 중량이 얼마나 무거운가 하니 태양계에 속하는 모든 위성을 다 합한 것의 750배나 더 무겁다고 합니다.
또 이 우주가 얼마나 크고 얼마나 피차에 먼가 생각해 봅시다. 광선의 속도가 아주 빠른데 1초 동안에 18만 6천 마일 갑니다. 1초 동안에 18만 6천 마일 가는 이 광선의 속도로 재어보아도 지구에서 태양까지 가는데 8분 19초가 걸린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 지구에서 제일 가까운 다른 별인 항성 알파센타워라고 하는 별에 가려고 하면 이 태양광선의 속도로 측량을 해서 4년 3개월, 다시 말하면 4광년 3개월 가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하늘을 살펴보면 이 항성들이 모여 있는 소위‘갤럭시(Galaxy) 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밤에 나가보면 하늘에 은가루를 뿌린 것처럼 보이는 것, 이것을 우리는 은하라고 합니다. 그 은하수를 망원경으로 보면 그것이 전부 큰 별입니다. 별이 많이 있어서 멀리서 보게 될 때에 이렇게 강처럼, 은하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이 태양에서 속하는 그 은하계가 얼마나 먼가 하면 10만 광년이라고 합니다.
우리 태양은 이 은하 중심에서 3만 3천 광년 되는 거리에 있는데 매초에 2백 마일 속도로 이 은하계의 중심을 돌고 있습니다. 태양도 돕니다. 태양계를 도는데 2억만년이 걸린다고 합니다.
자 그러면 도대체 이 하늘에 별이 얼마나 될까요? 천문학자의 말에 의하면 이 은하계 하나에는 약 1천억의 별이 있다고 하는데 그러면 1천억의 별이 있는 은하계가 대략 몇이나 됩니까? 지금 발견 된 것만 해도 약 1억이 있다고 합니다.
아인쉬타인(Albert Einstein) 박사의 계산에 의하면 그 별의 수가 얼마이고 하니 10의 28자승한 수만 하다고 합니다. 영국의 천문학자 제임스 진스(James Jins)는 보통 사람이 좀 더 이해하기 쉽게 말했습니다. 하늘의 별이 얼마나 많은지 알려면 이 지구의 모든 해변에 있는 모래알을 전부 모아 세어 보면 알 수 있다고 말 헸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이 우주가 그 만큼 큽니다. 그것을 보니 하나님의 살림살이가 굉장합니다. 큰 데만 놀랄 것이 아닙니다. 가만히 이 우주를 살펴보면 과연 오묘하게 지었습니다. 이렇게 대 우주이지만 꼭 조직과 질서가 있습니다. 유성이 항성을 돌고, 항성이 모든 유성을 또 돌고 ‘갤럭시’ 가 또 되고, 그렇게 꼭 조직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일정한 속도가 있고 일정한 궤도가 있어서 꼭 법칙에 의지해서 움직입니다.
그러므로 별이 하늘에 그렇게 많아도 하늘의 교통 사고 나는 법이 없다고 합니다. 아주 오묘합니다. 이렇게 많은 별들이 멀리 있다고 하지마는 법칙이 꼭 통일된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지구의 움직이는 자연 법칙이 다른 별에도 꼭 같이 통용된다고 합니다. 여기에 우주 탐색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104 서로 다른 눈송이
이것은 전체적으로 볼 때에 그렇지마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자연계를 좀 더 자세히 보면 그 가운데도 참 오묘한 것이 많습니다. 금년 겨울에는 눈이 굉장히 많이 와서 우리가 다 놀랍니다. 여러분께서는 그 눈을 좀 자세히 살펴보셨습니까?
그것을 현미경으로 보면 굉장히 아름답다고 합니다. 얼른 보기에는 그저 흰 것이 내려오는 것 같지마는, 자세히 살펴보면 결정체들입니다. 어떤 것은 여덟 모가 나고 어떤 것은 열 두 모가 나고 어떤 것은 여섯 모가 나고 꼭 같이 있는 여러 가지 결정체입니다. 그러나 그 결정체가 모두 같지는 않습니다. 어떤 과학자가 조사해 보니까 약 9백 가지의 다른 결정체가 있다고 합니다.
그 눈송이 하나도 일정한 고안이 있고, 어떻게 아름답게 만들었는지 말로 다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 님이 말씀하시기를“들에 피는 백합화를 보아라”하셨지마는, 백합화 한 송이를 가만히 볼지라도 어떻게 그렇게 아름답게 고안을 했습니까? 또 꽃이 하나 하나 다 다릅니다. 잎사귀 하나 하나를 볼지라도 어떻게 그렇게 고안을 잘 했는지 모릅니다.
요사이 한국에도 방직업이 발달되어서 영등포에서도 양단을 많이 짜는 모양입니다. 그 양단을 보면 고안을 굉장히 아름답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고안들이 어디서 왔는지 압니까? 하나님께서 먼저 고안한 것을 빌어다 쓰는 것밖에 다른 것 없습니다. 그 꽃, 그 잎사귀, 새니 뭐니 다 하나님의 고안을 거저 빌어다 쓰는 것밖에 다른 것 없습니다. 어떻게 아름답게 고안이 잘했는지 모릅니다. 나비 한 마리, 새 한 마리를 볼지라도 어떻게 고안이 잘됐는지 알 수 없습니다. 또 자연계에서 생물도 많고 동물도 많고 식물도 많지마는 피차간 어떻게 조화되어서 살게 만들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에서
105 민주국가와 자유 관념
민주 국가가 잘 건설되려면 몇 가지 요소가 꼭 필요합니다. 그 중 하나가 정당한‘자유 관념(自由觀念)입니다.
자유는 우리 민주 국가의 한 표어처럼 되었습니다.‘자유 진영’이란 말을 씁니다.‘자유 사회’이란 말을 씁니다. 이 관념도 결국은 개인을 존중하는 사상에서 오게 된 것입니다. 전에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은 4대 자유가 있어야 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첫째는 신앙의 자유(신앙)
둘째는 언론의 자유(언론, 출판)
셋째는 공포에서의 자유(공포가 없는 세계)
넷째는 궁핍에서의 자유( 궁핍 없는 사회
미국의 트루블러드(Elton Trueblood)라고 하는 분은 민주주의 사상에 대해서 많은 글을 썼는데, 그는 <자유의 선언>이란 저서 가운데서 여섯 가지 자유를 주장하였습니다.
첫째는 학문(學問)의 자유
둘째는 변론(辯論)의 자유
셋째는 신교(信敎)자유
넷째는 노동(勞動)의 자유(강제 노동이 아니고, 자유 노동을 할 수 있는 자유)
다섯째는 생존(生存)의 자유
여섯째는 봉사(奉仕)의 자유
민주 사회는 반드시 이 여섯 가지 자유가 있어야 되겠다고 그는 주장을 하였습니다. 이 모든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가 진정한 민주 사회일 것입니다. 국민 하나 하나의 이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 민주국가의 지상의 의무인 것도 우리가 기억해야 되겠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정당한 자유 관념이라고 말하는 것은 자유에 대한 그릇된 관념을 가진 이가 많기 때문입니다. 흔히 자유는 그저 마음대로 하는 것이 자유인 줄 아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지 아니합니다. 자유라고 하는 것은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방종이지 자유가 아닙니다. 자유라고 하는 것은 마땅히 행하여야 할대로 행하는 그것이 자유인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이 자유의 관념의 원천이 어디 있는가? 이것은 역시 근본을 더듬어 볼 것 같으면 성경에서 왔습니다.
예수께서 자기가 자라난 나사렛 회당에서 그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시게 될 때에 회당 장이 책을 올렸습니다. 예수 님께서 이사야 61장 1절을 찾아서 이 말씀을 읽으셨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네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 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됨을, 눌린 자를 자유 캐 하고 주의 복된 해를 전하게 하였느니라”
이 말씀을 읽으시고 하시는 말씀이“오늘날 이 말씀이 응하였도다”고 하셨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리해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후서 3장 17절에“주의 영이 계신 곳에 자유 함이 있느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갈라디아 5장에“주께서 저희에게 자유를 주셨은즉 다시는 종의 명에를 메지 말라”고 외쳤습니다.
자유의 적당한 관념을 옳게 가지라고 계속해 말씀하시며“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히려 피차에 봉사하라”고 가르쳐 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자유에 대한 올바른 관념을 가지고 또한 그 원천이 어디 있는 것을 분명히 깨달을 때에 우리가 이 자유에 대한 모든 활동을 바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민주 국가와 자유 관념>에서
106. 발베이도스 섬에서 일어난 일
제가 몇 해전에 북 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 사이에 있는 카리브 바다의 발베이도스라고 하는 섬에 가서 그 지역 여러 섬에 있는 교역자들이 모여 목사 수양회를 하는 자리에 참석했던 일이 있습니다. 발베이도스에 가니까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조그마한 섬인데 아마 한국 이수로 길이가 약 30리, 넓이가 약 20리로 비행기 타고 높이 올라가면 다 보입니다. 이 섬은 참 좋습니다. 언제나 일은 여름 같습니다. 과히 덥지도 아니하고 물론 춥지도 아니하고 언제나 꽃 피고 경치 아름답고 아주 바닷물이 맑고 참 피서하기 좋은 아름다운 곳입니다.
어떤 이가 여기 꽃도 많고 하니까 여기 꿀별을 갖다 놓으면 많은 꿀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꿀통을 갖다 놓으니까 처음에 몇 달은 이 꿀벌들이 꿀을 잘 만들어 옵니다. 그러더니 그 다음부터는 꿀을 만들어 오지 않는 단 말입니다. 왜 그런고 하니 그저 사방에 꽃이요 언제나 벌들이 청밀(淸蜜)을 마음대로 먹을 수 있고 꿀을 갖다 모아 놓을 필요가 없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꿀벌들이 할 것이 없어서 그저 꽃에서 꿀을 먹고는 악착스럽게 다른 사람을 만나는 데로 쏘아 주어서 큰 변이 났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일없는 사람은 이런 꿀벌 비슷해서 공연히 돌아다니면서 다른 사람만 해칩니다. 일은 도덕적 생활에도 필요합니다. 일하는 가운데 만족을 얻고 천재가 다시 되고 내재의 능력이 다시 될 수가 있습니다. 일하는 가운데 향상이 있고 발전이 있고 새 문화가 창조됩니다.
107.오직 하나님을 위해서
어떤 예배당을 짓는 공사장에 가서 여러 사람들이 돌을 깎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가서 그 중 한 석수(石手)를 붙잡고 “당신은 뭘 합니까?” 물어 보았다고 합니다. 그 석수가 얼른“나는 그저 하루에 백원 벌이합니다.”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그 다음에 다른 석수에게 “당신은 무엇합니까?”하니까“나는 돌을 깎습니다”하고 대답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 다음에 또 다른 석수에게 “ 당신은 뭘 합니까?” 이 사람은 “나는 만 유 주 하나님을 위해서 성전을 짓습니다”이렇게 대답을 하였다고 합니다. 보세요, 꼭 같이 돌 일을 하지요, 그러나 그 정신이 얼마나 다릅니까?
우리가 꼭 같이 무슨 일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정신을 가지고 그 일을 합니까?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과 동사하는 것, 이것이 곧 기독교 노동관이올시다.
우리 믿는 사람은 일을 이렇게 봅니다. 무슨 일을 맡았든지 하나님과 의논하고, 하나님의 힘을 입고, 하나님과 같이 일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고, 사실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일한다는 이 신념, 이 이상이 곧 우리 믿는 사람이 노동을 어떻게 보는가 하는 사상인 것입니다.
이런 사상을 가지고 우리가 일할 때는 그 일이 참 기도요, 그 일이 참 예배입니다. 이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와 노동>에서
108. 믿음의 어머니가 남긴 유산
오늘‘어머니 주일’을 당해서‘어머니의 믿음과 그 감화’에 대해서 생각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 주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우리가 기억할 것은, 인간 일생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이는 어머니라는 사실입니다. 인간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는 요소를 흔히 두 가지로 생각합니다. 하나는 유전, 또 하나는 교육이올시다. 흔히 이 두 가지가 거이 지배했습니다. 유전의 견지에서 볼 때에, 자녀들은 문자 그대로 어머니의 혈육을 받아서 납니다. 어머니의 피와 살을 받아서 납니다. 문자 그대로 살이 떨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유전의 영향은 말할 것도 없고, 둘째로 교육의 견지에서 볼 때에도 역시 그렇습니다. 교육이라 하면 가정 교육, 교회 교육, 학교 교육, 사회 교육, 대략 이와 같이 네 가지 종류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는데, 그 중에도 제일 큰 영향을 인격에게 주는 것은 가정 교육입니다. 그 이유는 가정 교육이란 가장 어렸을 때부터 받는 교육인 까닭입니다. 그런데 이 가정교육은 주로 어머니가 책임을 지게됩니다. 어머니는 항상 아이들과 같이 있게 되는 까닭으로, 아버지는 아무리 힘쓴다고 할지라도 그런 기회가 적습니다. 따라서 가정교육의 대부분의 책임이 어머니에게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전의 견지에서 볼 때, 어머니의 영향은 자녀들에게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가장 큰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동서고금을 물론하고 위대한 인물의 배후에는 어머니의 존재를 우리가 발견합니다. 우리가 한국 역사를 읽을 때에도, 신라조의 김유신 장군을 생각할 때는 자연히 그 어머니를 우리가 또한 기억합니다. 고려조의 일대의 충신이었던 정 포은 선생을 생각할 때에는 그 어머니를 또한 기억합니다.
이러한 예는 참으로 많습니다.
이조의 석학으로서 유명한 율곡 선생을 우리가 생각할 때에도 역시 그 어머니를 기억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한국뿐 아니고 어떤 나라도 그렇습니다. 미국의 링컨 대통령 같은 이도 일찍이 말하기를“내가 나 된 것의 전부가, 그리고 장차 되기를 바라는 것의 전부는 오직 천사와 같은 내 어머니의 덕입니다”하는 말을 남겼습니다. 일찍이 헬라의 유명한 알렉산더 대제가 파사에 가서 고관과 귀족들을 다 초대하여서 큰 연회를 베풀었습니다. 그 연회 소에 나갈 때에는 오래 입던 군복을 벗어버리고 일찍이 자기 고향에서 어머니가 친히 짜고 친히 바느질해서 지어준 옷을 입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깊이 우리가 생각하여 볼 때에 누구든지 어머니가 지어준 옷을 입고 다닙니다. 이 말은 무슨 뜻인고 하니 누구든지 자기 어머니의 그 유전, 그 교육, 그 감화로 이루어진 성격, 인격, 생활로 일생을 살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만큼 어머니의 영향이 큽니다. 그러므로 어떤 분은“어머니들은 작은 요람을 통해서 온 천하를 다스린다”는 말을 한 것입니다. 일반적으로도 이럴진대 우리가 영적 방면에서 볼 때에 더욱 그렇습니다.
어머님의 믿음은 자녀의 신앙에 큰 영향을 줍니다.
109.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나카
기독교 역사를 생각할 때에 제일 유명한 믿음의 어머니로서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를 우리가 다 기억합니다. 어거스틴의 고향은 아프리카 북방의 한 작은 동리였습니다. 그 때에는 이 곳도 다 로마의 영지였습니다. 어거스틴은 본래부터 총명했습니다. 재주가 있었습니다. 글공부도 잘 했습니다. 어렸을 적부터 문명이 높았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유감은 믿음이 없습니다. 방탕한 길로 나갔습니다. 그 때 세상 청년들이 걷던 세속의 길로 나갔습니다.
그러므로 경건한 믿음의 어머니 모니카는 항상 이것이 고통이었습니다. 어떻든지 회개하게 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눈물을 흘리면서 간절히 10여 년을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응답은 되지 아니했습니다. 10여 년이나 기도했지마는 그 다음에 된 일을 보면 이 청년 어거스틴이 아프리카 북방을 떠나서 로마로 가자고 합니다. 로마는 물론 정치의 중심이요 문화의 중심지이지마는 또한 음란한 곳이요, 말할 수 없이 부패한 곳입니다. 어머니 모니카는 이 젊은 청년 어거스턴이 로마에 가게되면 얼마나 죄악 가운데 빠질까 염려해서 어떻든지 못 가도록 간절히 권면도 하고 기도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기도하는 동안에 몰래 배를 타고서 지중해를 건너서 로마로 달아났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낙심하지 아니하고 기도했습니다. 도무지 그냥 앉아 있을 수가 없어서 자기도 그 후에 배를 타고서 로마로 쫓아갔습니다. 그 후에 로마에 가서 정착한 것은 아니고, 얼마 동안 머물렀다가 다시 이태리 북방 밀란이라고 하는 곳에 가게 되었습니다. 거기 가서 우연히 그 밀란 교회의 유명한 목사 암브로우스라고 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고, 그의 감화를 통해서 점점 신앙을 갖게 되어 온전히 회개한 이야기를 우리가 잘 알고 잇습니다.
15, 6년을 계속해서 기도한 후에 결국은 그 아들이 회개를 했습니다. 너무 감사해서 그 다음에는 모자가 같이 이제는 고향으로 돌아가자고 작정을 하고 두 사람이 같이 기쁨으로 감사한 마음으로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채 같이 고향으로 돌아오지는 못하고 티벨 강 저 끝에 있는 작은 오스티아라고 하는 동네에 와서 여관에서 묵다가 그만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 소원은 이루어졌습니다. 결국 이 아들이 2천 년 기독교 사상을 거의 지배했다고 볼 수 있는 가장 위대한 교부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의 힘만으로 된 것은 아닙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은혜요, 배후에 어머니의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어거스틴 자신은 이렇게 하나님 앞에 고백을 하였습니다.“하나님이시여, 내가 아버지의 아들이 되었다고 하면 이것은 오직 아버지께서 나에게 이런 어머니를 주신 까닭입니다.”감사를 드린 것입니다. 믿음의 어머니에게 믿음이 같이 따라 갑니다.
110.요한 웨슬레의 어머니 수산나
그리고 물론 우리 교회 역사상에 유명한 믿음의 어머니를 아마 우리가 생각하자고 하면, 감리교를 설립한 요한 웨슬레의 어머니 수산나를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부인은 참 아들을 잘 기를뿐더러 자녀를 많이 길렀습니다. 자녀를 열 아홉을 낳아서 길렀습니다. 이 요한 웨슬레는 열 다섯째로 낳은 아들입니다. 자기 남편은 성공회 목사였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목사로서 뭐 봉급이 많은 이치가 없습니다. 박봉입니다, 자녀들이 이렇게 많으니까 항상 생활이 구차했습니다. 그 구차한 살림에 이 많은 자녀를 가지고, 또 전기에 나오는 대로 읽어보면 국민학교 교육은 4, 5학년까지 거이 가정에서 가르쳤습니다. 다섯 살 되었을 때 벌서 글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글을 해독하자마자 창세기 1장부터 성경을 가르쳤고, 또 규칙적으로 이 많은 자녀들을 잘 길렀으니 그 가운데 요한 웨슬레는 온 영국뿐 아니고 온 세계에 큰 공헌을 한 종교가가 되었고, 차알스 웨슬레는 많은 찬송가를 작곡해서 위대한 음악가가 되었고, 그 밖에 자녀들도 하나 하나가 좋은 인물들이 되었습니다. 믿음의 어머니가 있는 곳에 믿음의 자녀들이 일어납니다.
111.피얼스 박사의 어머니
제가 이번에 로스앤젤리스에 잠깐 들러서 기독교 선명회 본부에서 같이 예배를 보고 비행장으로 자동차를 타고 나오는데 피얼스 박사가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자기 어머님이 지금 80세가 넘었고 심히 약해서 사실 사람 보기에는 얼마나 더 오래 세상에 계실는지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병원에 입원해 계신데 매일 한 번씩 꼭 가서 어머니를 뵙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내가 사실 단점도 많고 성격상 결함도 많은 사람인데 참 이렇게 하나님께서 나를 불러서 일을 시키고 지금까지 무난히 해 온다고 하는 것이 그저 다 내 어머니가 나를 위해서 항상 기도해 주시는 그 덕택이며 내가 은혜 가운데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이의 배후에도 이와 같은 기도의 어머니가 있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믿음의 어머니 감화가 얼마나 위대하고 그 어머니의 공헌이 교회와 사회와 국가에 주는 공헌이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은 우리가 다 헤아려서 말로 할 수가 없는 줄 생각합니다.
112.필립스 브룩스 목사의 어머니
19세기 보스톤에 성공회 감독으로 아주 유명한 목사가 한 분 있었습니다. 필립스 브룩스라고 하는 목사입니다. 이 목사는 자기 어머니가 세상 떠난 다음에 비석을 해 세우면서 그 묘비에 자기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성경 절을 새겼는데 마태복음 15장 28절을 새겼습니다. 여러분, 마태복음 15정 28절에 무슨 말씀이 있는지 아십니까? 예수 님께서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한 말씀이 거기 있습니다.“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자녀들이 어머니를 장사하고 무덤을 만들고 비석을 만들려고 할 때에, 자기 어머니를 생각할 때에, 무엇보다도 과연 우리 어머니는 믿음이 크신 어머니였다 하는 생각이 날 만큼 믿음의 어머니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실 우리 가정에서 누가 예수를 잘 믿는지는 아이들이 더 잘 압니다. 내가 들으니까, 어떤 가정에서 누가 예수를 잘 믿나 투표를 하여보았다고 합니다. 어떤 자녀가 무슨 말을 하는 지 아십니까?“우리 어머니는 예배당에 가긴 가도 믿음은 별로 없어”아이들은 못 소깁니다. 여러분, 다른 사람 혹 남편까지 속일 수 있지요. 하지만 그 자녀들은 못 소깁니다. 항상 붙어 있으니까, 항상 따라 다니니까.
자녀들이 보기에 자기 어머니의 일생을 회고할 때에 과연 우리 어머니는 믿음이 크신 어머니였다고 자녀들이 생각할 정도로 믿음의 어머니가 됩시다. 그런 은혜를 받으세요. 우리가 다 자녀들에게 유산을 물려주기를 원합니다. 좋은 집을 지어서 남겨 주기도 원하고 돈을 많이 모아서 남겨 주기도 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 것은, 그와 같은 유산은 며칠 갈는지 알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자녀들에게 남겨줄 불멸의 유산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해가 가고 갈수록 없어지지 아니하고 더욱 축복의 근원이 될 불멸의 유산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부모의 믿음이올시다. 우리가 이 불멸의 믿음의 유산을 우리 자손에게 남겨주면 이 유산은 우리 가정과 대대손손이 같이 하면서 우리의 후손을 축복할 것입니다. <어머니의 믿음과 그 감화>에서
113.하나님만 의지하는 자녀
우리가 하나님의 좋은 아들과 딸이 되려고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전적으로 그를 의지할 것입니다. 효자가 자기 아버지 말씀을 의심할 수 있습니까? 효자가 자기 아버지를 의지하지 않을 때가 있겠습니까? 사실 세상의 부모는 요새 보니까 더러 아들과 딸을 내다 버립니다. 하나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 아들과 딸을 끝까지 그 손에 쥐고 보호하여 주시겠다고 약속했습니다
114.성 프랜시스 이야기
성 프랜시스가 처음에 은혜를 받아서 그저 주님의 일 만 하고, 옷도 해주면 가난한 사람에게 갖다주고 이렇게 되니까 자기 아버지는 크게 낙심하였습니다. 자기 아버지는 큰 부자요 포목상 주인이었는데 이 애가 커서 자기의 사업을 계대(繼代)할까 생각했는데 사업을 할 생각은 안하고 돌아다니면서 기도하고 주의 일만하고 도무지 자기가 하라고 하는 일은 안 한단 말입니다. 책망해도 쓸 데 없고 때려도 쓸 데 없어요, 마지막에는 성이 나서“이놈, 내 아들 된 것을 아주 파면해 버리겠다”고 호적에서 빼버리고 그 때 법관에게 가서 그 말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법관도 할 수 없이“이제는 아무개의 아들이 아니라”고 호적에서 빼도록 선언을 했습니다. 그 때에 성 프랜시스가 어떻게 했는지 아십니까? 자기 입었던 옷가지 다 벗어서는 자기 옆에 계신 아버지에게 다 놓으면서“아버지 이것 받으세요, 이 앞으로는 오직 하늘에 게신 아버지입니다.”고 하였습니다.
세상의 부모는 혹 우리를 버릴 때가 있습니다. 하늘에 게신 우리 아버지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끝까지 성 프랜시스를 보호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과연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었다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모든 근심과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에서
115.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환난 날에 하나님께서 자기를 부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부른다”고 하는 말은“찾으라”고 하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큰 환난을 당할 때에도 하나님을 부르고 찾았습니다. 성 프랜시스도 중대한 병에 걸렸을 때 마침내 하나님을 찾게 된 것입니다. 유명한 과학자요 유명한 종교가였던 파스칼 같은 이도 중상을 입고 병상에서 치료를 받는 동안 하나님을 찾게 되었고 마침내 그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로욜라의 생활 역시 그렇습니다. 요나가 탄 베에 큰 풍파가 일어날 때에 그 선장이 잠자고 있는 요나에게 와서 “잠자는 자여 ! 어찜이뇨? 네 하나님께 구하라”고 재촉을 하였습니다. 환난 날에 하나님을 부르고 찾아야 살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환난의 날이야말로 하나님을 찾고 또 만날 만한 때입니다. 개인도 그렇고 민족도 그렇습니다.
환난의 날에 낙심하지 말고, 자포자기하지 말고, 반항하지 말고, 불평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을 부르고 찾아 만나는 가운데 살길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환난의 날에 나를 부르라”고 하는 말은 한 거름 더 나나가서“기도하라”고 하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들이 바베론에 잡혀갔을 때에 오래 잊어버렸던 하나님을 다시 찾게 되었습니다. 느헤미야가, 다니엘이, 에스켈이. 많은 백성들과 같이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환난의 날에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한 것입니다.
116.도버해협의 기적
세계 2차 대전 때에 불란서가 독일 나치스 군데에게 패해버리고 영국에서 도와주려고 건너갔던 30만 대군이 자기들만으로 불가능한지라 영국으로 건너오기 위해서 해협으로 도망 갈 때에 히틀러는 베를린에서 “도망하는 영국 군인들을 아주 전멸시켜 버리라”고 명령을 내리고는 태연히 있었습니다. 그 때에 영국왕 조오지 6세가 온 국민에게“어떻게 하든지 영국 군대를 건져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자"고, 기도의 날을 선포하고 전 국민이 그 날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이상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 날 독일 편에는 큰 폭풍우가 일어서 비행기가 한 대도 뜰 수가 없었고 너무 비가 많이 와서 탱크 한 대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영국 편에는 그 도버해협이 어떻게 잔잔하고 고요한지 거울 같이 맑아서 수많은 배가 29만의 영국 군대를 무사히 영국까지 옮기게 된 것입니다. 그 일 후에 영국 군대를 비롯해서 온 영국 국민이 하나님 앞에 감사의 기도를 드리게 된 것입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하나님의 말씀이올시다.
117.모라비아 교회의 운동
이것이 또한 신령한 면에서도 그런 줄 압니다. 18세기 초엽에 유럽에 있던 신교의 정세를 보면 대단히 암담하였습니다. 천주교의 핍박은 여전히 심했습니다. 그러나 신교도들은 작은 신학 문제로 분쟁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교회는 분열로 침체된 상태에 있었습니다. 전도니 세계 선교니 하는 것은 꿈조차 꿀 수 없던 암흑의 때였습니다. 이 때에 진젠돌프라고 하는 젊은 백작이 있었는데 어릴 때부터 믿음이 독실한 이로 은혜를 받아서 자기의 토지를 개방하고 천주교의 핍박에 쫓겨오는 피난민들을 자기 토지에 정착시키기 시작하였습니다.
얼마 가지 않아서 수백 명이 모이게 되어 이 사람들을 중심으로 그만 교회를 하나 세웠습니다. 진젠돌프는 이 작은 교회의 목사가 되어 피난민과 한가지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를 드렸습니다.“이 핍박이 그치고 신교들 가운데 분쟁이 그쳐서 어떻든지 교회가 부흥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교회가 되게 하여 달라”고 계속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그 결과 1714년 8월 14일 예배 후 성찬식을 할 때에 큰 은혜가 내렸습니다. 하나 하나가 예수 그리스도 앞에 몸을 받치게 되었고, 이렇게 되어서 유명한 ‘모라비아 교회 운동’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 교회는 5, 6백 명의 피난민들이 모여서 조직되었지만, 은혜를 받은 백 여 년 동안에 는 백여 명의 선교사를 세계 각국으로 파송하게 된 것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교회역사를 보면 요한 웨슬레 같은 사람도‘모라비아’교회 때문에 큰 은혜를 받고 새로운 능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해서 영국에는 웨슬레 운동이 일어나고 계속해서 피틀리의 부흥 운동이 일어나서 미국에까지 미치게 되어 18세기 중엽부터 신교의 부흥 운동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19세기는 부흥을 받은 교회가 온 세계에 선교사를 파송해서 선교의 세기가 된 것입니다. 베른훗이라고 하는 조그만 교회에서 피난민들이 모여 간절히 기도한 결과 은혜를 받게 되었고 이 은혜가 세계에 퍼지게 되었고, 이 은혜가 온 세계 백성들에게 복음을 전함으로써 교회역사와 세께 역사에 큰 영향을 주게 된 것입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환난 날에 우리가 하나님을 찾고 죄를 회개하여 간절히 기도하면 이 환난이 변해서 하나님에게 큰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진젠돌프와 이 피난민 몇 사람이 환난 가운데서 기도한 그 기도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세계의 수억의 생명을 구원하는 변화를 가져온 것입니다. <환난의 날과 기도>에서
118.살피시는 하나님
몇 해 전 그리스의 수도 아데네에 갔는데 옛날 천여 년 전에 지은 오랜 예배당이 있어서 구경하려 갔습니다. 거기 헬라 정통교회 들어가면 천주교와 좀 다른 것은 천주교는 예배당 안에 마리아의 성상과 성화를 만들어 놓았지만 그러나 이 헬라 정통교회에서는 성상은 아주 폐지했습니다. 주후 8세기에 아주 폐지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성화만 허락했습니다. 그래서 그 예배당에 들어가면 천장과 담으로 여러 가지 옛날의 성화를 그렸습니다. 그런데 예배당에 들어가면 이 강대, 저 아치 맨 위에 무슨 그림이 있는고 하니 큰 눈(眼)을 그렸습니다. 그래서 그 예배당에 문을 열고 들어서면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이 그 눈입니다. 그 눈이 나를 내려다봅니다. 아마 그 뜻은 이 예배당에 들어오면 누구든지 하나님의 눈이 너를 보신다 하는 그 뜻을 알리기 위해서 그려 붙인 모양입니다. 하나님의 눈은 그 예배당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예배당에도 계십니다.
하나님의 눈은 지금도 우리의 마음을 살펴보십니다. 이 하나님의 눈은 성전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디 가던지, 온 세계에 이 하나님의 눈을 피할 데가 없습니다. 우리 동양의 성현들도 옛날 이런 사상을 좀 깨달았던 모양입니다. 그러기에 고서에 무슨 말이 있는고 하니 신목여전(神目如電) 이란 말이 있습니다. 신의 눈이 번갯불과 같다는 말입니다. 제일 밝은 것이 번갯불 아닙니까? 하나님의 눈이 번갯불과 같이 밝게 우리들을 살피십니다.
하나님의 눈이 우리를 살피시고 나를 보십니다. 내 생각과 내 생활에 있어서 하나님 보시기에 거슬리는 것은 없습니까? 하나님의 눈이 여러분 하나 하나를 지금 보시고 여러분의 양심에 말씀해 주십니까? 사도 요한은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고 하면 스스로 속이는 것이요”
스스로 속이지 맙시다.“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고 의로우사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시고 우리의 모든 불의한 가운데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하나님께서 몰라서 자백하란 말이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시겠다고 하였습니다.
“볼지어다 지금은 구원의 때요,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지금 이 시간 구원을 얻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아직까지 하나님 보시기에 죄를 자백하지 아니하고 자고 새가 알을 품고 있듯 그냥 죄를 마음 가운데 품고 있는 이가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그 죄를 보고 계십니다. 이 시간에 그 죄를 자백하고 내 놓아야 죄 사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눈>에서
119.하나님의 동역자
제가 일전에 어떤 책을 보니 어떤 사람이 자기 신앙 생활에 대한 간증을 했는데 그는 미국에서 음식점을 하나 경영했다고 합니다. 이 사람은 요리법을 잘 공부한 후 그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 적당한 곳에서 개업을 했는데 어떻게 된 셈인지 고객이 도무지 오지를 않더랍니다. 거리에 지나가는 많은 사람 가운데 배고픈 사람도 많을 텐데 자기 집에 들어와서 점심 사먹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주인은 초조했습니다. 이것이 무슨 이유일까? 이 사람이 곰곰이 생각하다가“이거 내가 여러 가지 내 머리로 애써서 하지마는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적구나 내가 이 일을 위해서도 하나님께 기도를 할 수밖에 없다”이렇게 생각하고 주님께 간절히 기도하기를“제가 이 음식점을 시작했는데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저는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해야 됩니까?”간절히 지시해 주시기를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성령의 감화 가운데서 일어나는 생각이“그저 어떤 고객이 오든지 네 아들이나 딸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것처럼 그만한 정성을 가지고 음식을 실속 있고 맛있게 만들고 사랑으로 대접을 하라”이런 생각이 마음 가운데에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하나님의 지도인 줄 믿고 꼭 그렇게 실행을 했더니 누구나 한 번 온 사람이면 꼭 다시 찾아왔습니다. 이렇게 몇 달이 지나니까 그 음식점에 음식 먹으로 오는 사람이 줄을 지어 들어올 정도로 번창하드라고 합니다. 그래서 일변 하나님께 감사를 하면서 “제가 이렇게 축복을 많이 받는데 이제 어떻게 해야 됩니까?”또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 다음에 성령의 감화 가운데서 무슨 생각이 났는고 하니“그저 어떤 사람이든지 네 집에 오는 사람은 음식만 잘 대접할 것이 아니라 신령한 양식도 공급하기를 힘써라. 그저 여러 사람의 사정을 아는 대로 도와주고 봉사할 수 있는 대로 봉사하라”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120.기도로 응답 받은 판사
그 후로는 그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모든 고객을 대합니다. 한 번은 자기 집에 단골로 점심 식사하려 오는 어떤 판사가 들어올 때 보니까 그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고 음식을 갖다 놓아도 무슨 생각에 깊이 잠겨서 음식을 먹지 못합니다. 그래 이 주인이 가서“아 판사 님 ! 무슨 근심이 있습니까? 왜 이렇게 음식을 못 잡수시지요? ”물었더니 그의 대답이“이거 대단히 어려운 이혼 소송 사건이 하나 들어왔는데 이 사람들이 이혼을 하면 그 아들과 딸의 장fork 어떻게 됩니까? 이 기막힌 사정을 어떻게 처리해야 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 말을 들은 주인이 얼른 대답하기를“그거 해결하기 쉬운 방법이 제게는 하나 있습니다.”“아! 그래 그것이 무슨 방법이지요?”그저 기도를 하십시오‘예수 님께서 이런 사건을 맡았다고 하면 어떻게 해결하시겠습니까?’하고 기도를 해보세요”이 말을 들은 판사가 깊이 생각하면서 고개를 끄덕이고 음식을 대강 먹더니 그 이튿날 점심때가 되어서 이 분이 얼굴에 화기가 충만해서 들어옵니다. 이 주인이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아, 내가 당신 말씀대로 하니까 그대로 됩니다. 내가 어렸을 적에 예배당엘 더러 다녀 보았지만 뭐 별로 기도를 못했었는데 이번에 그 가족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고 또 기도하는 가운데 생각나는 대로 꼭 그들에게 솔직히 말했지요. 그랬더니 무사히 해결이 되었어요”
사실 재판도 공정하고 바르게 하려고 하면 하나님과 동역 해야 됩니다. 우리 나라에도 이와 같이 하나님과 의논하면서 공정한 재판을 할 수 있는 법관들이 좀더 많이 생기기를 바랍니다. 무슨 사업이나 하나님과 동역 해야 성공합니다.
121.수술하기 전에 기도하는 민게이 박사
병을 치료하는 것도 그래요. 미국의 저명한 외과 의사 가운데 민게이 박사라고 하는 분이 있는데 이 분이 늘 하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수술은 사람이 하지마는 병은 하나님이 고치신다”물론 약도 사람이 주고 수술도 사람이 하지요, 그러나 고치는 것은 하나님께서만 고치십니다.
이 분은 늘 수술하기 전에 꼭 기도를 하는데 어떻게 되어서 기도를 하게되었냐고 물어보니까 자기의 경험을 이야기하더랍니다. 그는 본래 캐나다의 어떤 가난한 농촌에서 자라면서 참 가까스로 고학을 해서 의학을 공부하고 이제 외과 의사가 되었습니다. 어렸을 적에야 물론 주일 학교에 다녔지만 대학에 다니는 동안 교회에 가는 것을 그만두었습니다. 의사가 된 다음에도 교회에 가는 것은 거이 다 잊어버렸습니다. 기도도 오래 안 했습니다. 그런데 한 번은 멀리 있는 자기 동생에게서 장거리 전화가 왔습니다.
“아! 형님, 빨리 오셔야 되겠습니다. 어머니가 밭에서 일 하시다가 황소에게 받혀서 중상을 입었습니다. 인사 불성이 되었는데 여기 가까운데 있는 의사를 청해서 보이니까 그 이상 수술을 못하겠다고 하며 살 희망이 없다고 그럽니다” 이 소식을 들은 의사가 급히 비행기 세를 내서 간호원과 보조하는 의사를 데리고 특별기로 달려왔습니다. 자기 집이 워낙 시골이라 비행장에 내려서도 여러 시간을 또 자동차로 달려서 집에 도착해보니 아니나 다를 까 연로하신 어머니가 황소에 받혀서 중상을 입었는데 갈비뼈가 여러 개 상한 체 인사 불성이 되어 누워있었습니다.
수술을 해야 되었습니다. 얼른 수술 준비를 하고 자기가 수술을 하려고 하는데 이상하게도 손이 자꾸 떨립니다. 아마 너무 흥분되어서 그렇겠지요, 자기가 의학을 했다고 하면 이런 때 어머니를 위해서 의술을 발휘해야 하겠는데 수술을 하려고 하니까 손이 떨려서 집도를 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진정하려고 해도 진정이 안 됩니다. 그래서 수술을 시작하지 못하고 그 주방 의자에 앉아서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얼마쯤 기도한 다음에는 마음이 진정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여러 시간 걸리는 어려운 수술을 다 마치고 그 어머니가 위험한 가운데서 소생을 했다고 합니다. 그 다음부터 이 분이 자기 신앙을 회복하고 언제 어느 때 무슨 수술을 하든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고서야 하는 그런 습관이 자기에게 생겼다고 하였습니다.
병을 고치는 것도 하나님과 동역 해야 합니다. 사람의 할 부분이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이 동역 해 주셔야 병이 낮습니다.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이나, 상점에서 장사를 하는 것이나, 공장에서 물건을 만드는 것이나, 관청에서 공무원 노릇 하는 것이나, 군대에서 군인 노릇 하는 것이나. 전쟁터에 나가서 전쟁을 하는 것이나. 무엇이나 하나님과 동역 해야 성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동역자>에서
122.마음에 숨은 사람
스티븐슨이라 하는 유명한 소설 가운데 《지킬 박사와 하이드》 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지킬 박사는 유명한 과학자로서 아주 점잖은 분입니다. 자선 사업도 하는 신사올시다. 그러나 그 박사의 마음속에는 숨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하이드라고 했습니다. 하이드란 말은 영어로 숨는다고 하는 뜻입니다. 이 하이드라는 사람이 그 사람 가운데 숨어 있습니다. 그래서 낮에는 그 박사로 나타나지만 날이 어두워지면 이 숨은 사람이 나타납니다. 어두운 거리를 다니면서 나쁜 일을 합니다. 야비합니다. 음란하고 포악합니다. 사람은 하나인데, 겉은 이렇게 점잖은 신사요 박사인데, 그의 마음속에 숨은 사람은 어떻습니까? 이것을 우리가 생각해야 합니다. 보통으로 자기 자신도 자기 마음속에 숨은 사람을 모릅니다.
123.다윗·솔로몬·네로의 숨은 사람
여러분! 다윗의 생활을 한 번 기억해 보십시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좋은 아이였습니다. 착실한 목동으로 자라서 훌륭한 군인이 되었습니다. 좋은 정치가로서 칭송을 받든 사람이올시다.
그러나 그런 사람의 마음에도 음행하고, 억울하게 우리야를 죽인 숨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마 다윗이 젊을 때에 그의 마음속에 그런 숨은 사람이 있을 줄 생각 못했을 것입니다.
솔로몬의 생활을 보아도 역시 그렇습니다. 청년 시대에 무엇을 할지. 부귀를 탐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지혜를 구했습니다. 지혜를 많이 받아서 모든 정치와 재판을 지혜를 가지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성전을 짓고 봉헌식을 거행하며 경건하게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 솔로몬인데 그 후에 보면 이방 여인들을 사랑하기 시작했고 그들을 위해서 심지어 예루살렘에 우상 숭배하는 신당을 짓기 시작했고 그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자기까지 우상을 숭배한 적이 있습니다. 솔로몬의 마음에 이런 숨은 사람이 있을 줄 아마 자기 자신도 몰랐을 것입니다.
로마의 역대 황제 중에 가장 악하기로 이름난 네로는 수많은 그리스도인을 학살했습니다. 전설에 의하건대 시흥(詩興)을 돋우기 위해서 심지어 로마성에 불을 질렀습니다. 많은 사람을 죽였고, 지기 아내, 어머니까지도 죽였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아십니까? 이 사람의 생활의 한 페이지 가운데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맨 처음에 황제가 된 다음에 한 번은 결재서류가 올라왔는데 어떤 사람이 사형을 보고 받아서 황제의 인준을 얻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 때 네로가 탄식하며 말하기를“내가 어떻게 이 사람을 죽이라고 시인을 할 수 있겠는가? 차라리 내가 글을 몰랐다면 좋지 않았겠느냐?”고 탄식을 했다고 합니다. 아마 그때에 자신도 그 후에 역사상에 나타난 흉악한 숨은 사람이 있을 것을 몰랐을 것입니다
제가 몇 주간 전에‘세브란스’병원에서 종합진단을 한 번 해보았습니다. 엑스광선도 여러 번 찌고 혈액 검사도 여러 번 하고 그 밖에 또 다른 검사를 여러 번했습니다. 물론 귀찮기도 하고 괴롭기도 했지만 이런 진단이 필요합니다. 우리 몸에 어떤 때에 병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이것을 미리 진단하지 않으면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혹 병을 치르는 수가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 있는 숨은 사람이 어떠합니까? 숨은 사람의 건강은 어떠합니까? 하나님의 빛은 엑스광선보다도 더 빛납니다. 더 밝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나와서 나 지신을 내어놓고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좌우로 날선 검보다도 더 예리해서 사람의 신혼골수를 쪼갠다고 했습니다. 그러기에 시편 139편을 저술한 시인은 마지막에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시옵소서 내가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옵소서”
내 속의 악한 행위를 내 스스로 모를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 살펴서 이것을 알고 회개할 것은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와 같은 질문을 자문자답해 보세요.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사람이 거듭나지 않고는 하나님 나라를 볼 수가 없다”고 하셨는데 과연 마음속에 숨은 사람이 거듭났습니까? 과연 내 마음속에 숨은 옛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함께 온전히 못 박혀서 죽고 새 사람으로 변화하였습니까? 과연 내가 과거의 나를 청산하고 새로운 방향을 잡았습니까? 과연 내 속에 숨은 사람이 세상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합니까? 돈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합니까? 내 뜻보다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합니까? 스스로 물어 봅시다.
하나님께서 나를 보시는 그 눈으로 내가 나를 볼 줄 알아야합니다. <마음에 숨은 사람>에서
124. 뿌린 대로 거두리라
이조 역사 가운데에 당쟁(黨爭)사를 주의해 읽어보세요. 어떤 사람들은 작당을 해서 다른 사람을 모함합니다. 그 사람이 피를 흘립니다. 몇 해 후에 또 역시 그들이 모함을 받아서 지기의 피를 흘리고 넘어집니다.
전에 어떤 사람이 무고한 자기 아내를 다만 공부 못했다고 이유로 내쫓아 버리고, 알뜰한 공부한 여자를 새 아내로 맞아 왔습니다. 세월이 지나갑니다. 모든 것이 바뀝니다. 돈 있던 것도 다 없어졌습니다. 병까지 났습니다. 그런 때에 그 알뜰하게 맞아 왔던 그 아내가 남편도 버리고 아이도 버리고 다른 데로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사람을 천대하면 자기가 천대를 받습니다. 남의 가슴을 아프게 하면 자기 가슴이 아플 때가 옵니다. 남을 속이면 내가 속임을 당합니다.‘남젭이 제젭이’라고 하는 말이 그 말입니다.‘출어이자 반어이자’(出於爾者 反於爾者)라고 네게서 나온 것이 내게로 돌아간다고 하는 옛 말이 그 뜻을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어제 신문에 월남에 혁명이 일어나서 고 딘 디엠 대통령과 그의 동생이 자살했다고 하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그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반면에, 성령으로 심으면 영생을 거둡니다. 선으로 심으면 선을 거둡니다. 덕으로 심으면 덕을 거둡니다. 의를 심으면 의를 거둡니다. 사랑을 심으면 사랑을 거둡니다. 친절을 심으면 친절을 거둡니다. 자비를 심으면 자비를 거둡니다. 화평(和平)으로 심어야 화평을 거둡니다
125. 어느 의사 이야기
전에 어떤 의사에게 어떤 가난한 여인이 자기의 심히 앓는 아이를 데리고 가서 이 아이 병을 좀 봐달라고 했습니다. 가만히 보니까 병은 중합니다. 이 부인이 돈은 없지마는 이 아이를 그냥 두면 죽을 수박에 없으니 어떻게 이 아이를 불쌍히 여겨서 고쳐 달라고 간절히 부탁합니다. 그 의사가 불쌍히 여겨서 돈 받지 못하고 약값 못 받고 라도 그 아이를 며칠 동안 정성을 들여서 고쳐주었습니다. 그 후 며칠 후에 6·25가 났습니다. 그만 이 의사가 공산당에게 잡혀갔습니다. 꼭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어떤 알지 못할 사람이 나서서 그 의사를 위해서 말을 하면서 이 의사는 이북에서 오긴 했지만 참 좋은 사람이라고 하면서 가난한 아이들 병을 거저 고쳐 주었다고 말을 합니다. 알고 보니 얼마 전에 자기가 돈 안 받고 고쳐준 그 아이의 아버지더라고요. 그래서 살았다고 합니다.
126.‘적선지가에 필유여경’
나치스 독일 사람들이 유대 사람은 수백 수천 수만을 학살하던 떼입니다. 어떤 비행조종사가 자기 비행기 속에서 무엇을 만지고 있는데 어떤 젊은 사람이 상기가 되어서 다짜고짜로 비행기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나는 당신이 살려 주지 않으면 죽겠는데 어서 이 비행기를 띄워서 독일 국경 밖으로 좀 데려다 달라”고 간절히 말했습니다. 이 사람은 유대 사람이올시다. 이 사람의 뒤를 지금 비밀 경찰대가 추격해 왔던 것입니다. 불쌍히 여겨서 얼른 비행기를 띄워 멀리 국경 밖으로 데려다 주고 왔다고 합니다. 물론 그 후에 다 잊어버렸지요. 얼마 후에 제 2차 대전이 일어났습니다. 이 사람 역시 독일에 있을 수 없습니다. 영국으로 가서 연합군의 공군으로 종군하면서 전쟁에 가담해 싸웠습니다. 한 번은 전쟁에 나갔다가 큰 사고가 나서 그만 자기가 탔던 비행기가 떨어지면서 중상을 입었습니다. 뇌를 상해서 도무지 의식이 하나도 없고 중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수술을 잘하는 이를 청해서 수술을 하고 두어 주일 후에야 의식을 회복하고 수술해준 의사를 만나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이런 얘기 저런 얘기하는 가운데 그 의사가 바로 여러 해 전에 자기가 독일 비행장에서 건져준 그 유대사람인 것을 알았습니다.
덕으로 심어야 덕으로 거둡니다.‘유음덕이면 필유양보’(有陰德必有讓)라고 하는 말이 그 말입니다. 숨은 덕이 있어야 양보가 있다고‘적선지가에 필유여경’( 積善之家必有慶) 이라는 글귀 역시 그 뜻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127.많이 심어야 많이 거둔다
성령을 쫓아 심어야 영생을 거둡니다. 또 양에 따라서 거둡니다. 영적 세계에 있어서도 이 원리가 변치 아니합니다. 고린도 후서 6장 9절에 사도 바울이 헌금하는 이야기를 하다가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이런 말을 했습니다. 많이 심어야 많이 거둡니다. 적게 심으면 적게 밖에 거둘 것이 없습니다. 좋은 씨를 많이 뿌리도록 우리가 사(思)언(言)행(行)에 있어서 힘을 써야 할 것입니다. 또 그리고 언제든지 종자보다는 수확을 많이 합니다. 그러기에 예수 님께서도 옥토에 떨어진 씨는 30배, 60배, 100배가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선을 조금이라도 뿌리면 하나님께서는 많이 우리에게 선으로 갚아 주십니다. 그러나 아십니까? 악을 조금이라도 뿌리면 그 악은 많이 거두게 됩니다. 그러기에 호세아 8장7절에 보면“바람을 심고 광풍을 거둘 것이라” 말이 있습니다. 작은 바람으로 심었더니 회오리바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악도 역시 거두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종류를 심든지 항상 조심해서 바로 심도록 힘을 써야 될 것입니다. <추수의 원칙>에서
128.아버지와 아들 목사 이야기
이런 얘기가 있지요. 전에 미국에 어떤 부자 목사가 있었습니다. 아버지도 아들도 각각 교회 일을 맡아봅니다. 어느 주일 날 아버지는 차를 타고 자기 교회로 가고 아들은 자기 차를 타고 자기 교회로 갔습니다. 날이 다 저물 때에 아버지가 먼저 돌아오고 조금 후에 아들이 돌아오더니 아버지의 손을 잡고 하는 말이“아버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합니다. 제가 은혜를 참 많이 받았습니다. 예배를 보고 올 때 어떤 운전사가 차를 몰고 앞으로 달러오기에 그것을 피하려다가 차가 뒤집어 졌지만 저는 그저 핸들만 꼭 잡고 있었습니다. 별로 다치지 않았고 차도 상한 데가 없이 이렇게 돌아왔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아버지가 그 말을 듣고“정말 감사하다”고 하면서 잠시 생각하더니“너만 감사한 것이 아니라 나도 감사하다 나는 아무런 사고 없이 예배를 보고 돌아왔으니 이거 얼마나 감사하느냐!”고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큰 환난 가운데서 하나님의 구원을 받았으면 물론 감사할 줄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또한 우리는 그런 환난 없이 평범한 가운데서 받은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 가도 깨닫고 감사할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129.두 노인의 간증
어떤 분이 감사일 전날 꿈을 꾸었는데 꿈에 천당에 가보았다고 합니다. 얼마나 화려하고 아름다운지 사방으로 돌아다니며 구경을 합니다. 그런데 한 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서서 마치 서로 싸우듯이 큰 소리로 변론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천당에도 싸움하는 사람이 있는가 싶어 곁에 가서 그 에기를 들어보았습니다. 두 노인들이 서로 은혜를 더 많이 받았다고 변론을 하고 있었습니다. 한 노인이 말하기를,
“나는 어려서부터 성질이 나빠서 부모에게도 순종치 않고 학교에도 잘 가지 않아서 나중에는 깡패가 되고 도둑놈이 되어서 나쁜 짓을 하고 살인 강도죄를 짓고도 교도소에서 종신 징역을 받게 되어서 소망이 없었는데 그 교도소에 어떤 분이 들어와서 성경을 전해 주어 그것을 읽는 가운데 예수 님께서 이 세상에 있는 우리 죄인을 구원하려 오셨다는 것을 깨닫고 회개해서 예수 님을 믿고 천당에 오게 되었다”하면서 하는 말이“내가 세상에서 갖은 죄를 지었는데 이렇게 죄 사함을 받고 천당에 오게 되었으니 나 보다 큰 은혜 받은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이요”라고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듣고 있던 다른 노인이 말하기를“그것도 큰 은혜이긴 하지만 내 얘기를 좀 들어보십시오. 나는 어릴 적부터 잘 믿는 가정에서 태어나 유아 세례를 받고 주일학교에도 빠지지 않았고, 열 대여섯 살 났을 때 입교문답을 하고, 주일학교도 가르쳤고, 성가대도 하고 그러다가 집사 책임을 맡았습니다. 그렇게 일하다보니 또 장로 투표에서 장로로 피택 되었습니다. 물론 여러 가지 작은 죄도 지었지만 남처럼 큰 죄는 짖지 않았고. 교회에 봉사하고, 선교사업을 하고, 봉사사업도하고, 교육사업도 하면서 일생을 평안히 살다가 이 천당까지 왔으니 나보다 더 큰 은혜가 뉘게 있단 말이요?”하고 변론한단 말입니다. 여러분도 어느 분이 더 큰 은혜를 받았는지 스스로 판단해 보십시오. 그러나 우리가 명백히 알 것은 이 두 분이 다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우리 가운데 어떤 이들은 환난 가운데서 은혜를 받는 것만 큰 은혜인줄 생각합니다. 혹은 많은 죄를 짓고 회개함으로써 은혜를 받는 줄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닙니다. 우리가 어렸을 적부터 평범한 가운데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크다고 하는 것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무엇으로 보답할꼬!”
앞으로의 생활은 은혜를 보답하는 생활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여기 시편을 기록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 앞에 감사의 기도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하나님 앞에 감사의 예물을 드리고, 봉사의 생활을 해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해야 되겠습니다.
이 은혜를 깨달은 이후에 우리의 생활은 무엇을 하든지 은혜에 대한 보답의 생활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내게 주신 은혜>에서
129.스스로 만족하는 생활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자족의 생활을 할 줄 아는 비결을 배우면 이야말로 큰 보배가 될 것입니다. 디모데 후서 6자에서도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 편지 할 때에 그런 말씀을 하였습니다. 자족한 마음이 있으면 경건에 큰 유익이 되는데 우리 사람이 세상에 올 때에 가지고 온 것이 없고 또 세상에서 갈 때에도 가지고 갈 것이 없다고, 그저 사람이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족한 줄로 생각하는 것이 좋다고, 이런 말씀을 하였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이 어떤 형편에 있든지 자족할 생각을 하는 이 은혜를 받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인 줄 생각합니다. 이 자족에 대해서는 사도 바울만 이렇게 말한 거이 아니고 이 편지를 쓸 때에 헬라의 많은 철학자들 가운데도 이 자족에 대해서 교훈 한 분들이 있습니다.
130.디오게네스와 알렉산더 대왕
특별히 그 당시에 스토익파에 속하는 철학자들은 자족을 그들이 윤리의 최고 표준으로 삼은 것입니다. 모든 행동의 가장 높은 덕은 이 자족에 이르는 것이라고, 이 철학자들은 가르쳤습니다. 보통 우리 동양식으로 말한다면, 어떠한 형편에 있든지 평안한 마음을 가지고 흔들리지 않는 그런 심경에 있는 것이 가장 귀하다고 항상 가르친 것입니다.
그리해서 이 철학자들은 이 자족의 심경에 이르는 길을 간단히 두 가지로 가르친 것입니다.
하나는 모든 욕망을 더는 것입니다. 그들이 늘 하는 말대로 물건을 더 할 것이 아니고 욕망을 덜음으로서 사람은 자족한 생각에 이를 수 있다 이렇게 늘 가르쳤습니다. 이 말씀은 일리가 있습니다. 바로 여기 십만 원 돈이 있는 사람일지라도 자족의 마음을 기진 사람이 있고 백 만원 돈 가진 사람도 항상 부족하다 하는 마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까닭은 한 사람은 돈은 많지마는 그보다 욕망에 더 큰 까닭이이고 그래서 이 사람들은 어떻게든 욕망을 주리는 것이 이 자족의 생활에 들어가는 첩경이라고 항상 가르쳤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는 불교의 소위 욕심을 금하여 온전한 자리에 나간다고 하는 교훈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리해서 그들은 어떤 물건도 원하지 말고 아무 사람도 원하지 말라. 그런 지경에 이르게 되면 그 지경이야말로 온전한 자족의 지경이라고, 심지어 내 생명에 대한 욕망까지도 버리라고, 그래야 온전한 그 자족의 자리에 이른다고 이들은 가르쳤습니다. 그런 지경에 이르렀다고 하는 그 대표적 인물이 말하자면 디오게네스 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은 아주 간단한 생활을 했습니다. 밤에는 무슨 퉁 나무 위에서 잤다고 랍니다.
한 번은 아침에 일어나서 통나무 위에 앉아 있노라니까, 그 때에 큰 세력을 가졌던 알렉산더 대왕이라고 하는 이가 유명한 철학자를 찾아보려 왔습니다. 와서 그 대왕이 하는 말이 “선생님께서 무엇을 원하든지 다 드릴 수 있는데 무엇을 원하는가?” 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대답이“나는 원하는 것이 하나도 없소, 당신이 내 앞에 서서 햇빛을 가리우니 좀 비켜 서 주시기를 바랍니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리에 이르러야 자족의 자리에 이른 것이라고 이 분들이 가르쳤습니다. 또 이 사람들은 자족의 자리에 이르려면 감정을 말살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 무엇을 싫어하고, 무엇을 좋아하고, 슬퍼하고, 아파하고. 이런 감정 때문에 우리 마음에 자족이 깨지고 안심이 깨지니까 이런 모든 감정을 할 수 있는 데로 말살해서 감정을 초월하는 생활을 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가령 쓰던 그릇 같은 것이 깨졌을 때 어떤 부인들은 그것 때문에 마음을 쓴단 말입니다. 아예 마음을 쓰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그릇 깨진 것이 내게 무슨 상관이 있나 이렇게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좀더 큰그릇이 깨져도 그렇게 생각하고 혹, 내가 사랑하며 기르는 고양이 같은 것이 그만 다리가 부러져도 그것 때문에 마음 아파하지 말고, 그것이 내게 무슨 상관이 있나 이렇게 감정을 초월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내 다리가 부러져도 그것이 내게 무슨 상관이 있나 이렇게 생각하라고 그들은 가르쳤습니다.
131.에피크레터스의 일화
여기 그런 방면으로 힘을 쓴 에피크레터스라는 사람은, 본래 종으로서 이 철학을 연구한 사람인데 그 사람에 대한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이 분이 어떤 자리에 있든지 자족한 마음을 가지고 살며 감정을 초월한다고 하는 말을 듣고 나쁜 사람들이 얼마나 초월하나 보자고 하여 그 사람의 다리를 막 비틀었습니다. 그러니 앞을 것 아닙니까? 그러나 아프다는 소리 한 마디도 안 했습니다.
그래도 자꾸 비트니까 이 사람이 하는 말이“당신들이 내 다리를 비틀면 아마 내 다리가 부러질 것 같소”그렇게 말하더랍니다. 아 그래도 이 악한 사람들이 그냥 비틀어서 결국은 다리가 뚝 부러졌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 아프다고 하는 말은 한 마디도 안하고“그렇게 자꾸 비틀면 부러지겠다고 내가 그러지 않았습니까?”그 말만 했다고 합니다.
이 사람들 생각에는 이렇게 감정을 순전히 초월하는 가운데서 큰 자족의 경지에 이른다고 믿고 이렇게 하려고 애썼고 가르쳤습니다. 순전히 인간의 의지의 힘으로써 이런 방면에 이르기까지 성취하기에는 매우 어려운 줄 생각합니다. 몇 사람 안 되는 모양입니다. 또 혹 이런 자리에 이르렀다고 할지라도 사람의 마음이 아파도 아픈 줄도 모르게 되어 버린다면 그게 목석이지 어디 사람입니까? 사실 우리 사람의 마음이 그렇게 되는 것은 원치 않습니다. 그러기에 어떤 사람들은 이 스토익 학자들이 사람의 마음을 광야로 만들어 놓고는 이것이 평화라고, 이것이 자족이라 말한다고 비평한 것입니다.
132.바울의 자족 비결
여기 사도 바울이“내가 어떠한 형편에 있든지 자족을 배웠노라”고 하였는데 어떤 길을 통해서 자족을 배웠습니까? 욕망을 말살해서 배웠습니까? 감정을 말살해서 배웠습니까? 그런 것 아닙니다. 사도 바울의 모든 서신을 연구해 보면 사도 바울은 요망을 말살하지 않고 보다 더 고귀한 욕망을 가지고 그 욕망을 성취함으로 자족을 얻은 것입니다.
빌립보 3장7절 이하를 보면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 깨닫고, 그리스도를 사실 알고 보니 그 지식이 얼마나 고상한지 그 지식을 알고 그리스도와 서로 동행하고 그 그리스도를 소유하게 된 다음부터는 다른 모든 세상의 욕망은 자연히 봄 동산의 눈처럼 쓰러졌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를 알고 보니, 그리스도를 만나고 보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고 보니 얼마나 기쁘고, 얼마나 즐겁고, 얼마나 만족한지 세상의 욕망은 자연히 없어졌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사도 바울이 자족의 생활에 들어간 비결입니다. <일체의 비결>에서
133.작은 일이라도 성실히
작은 것들을 조심해야 됩니다. 작은 일을 크게 알아서 작은 일을 바로 해야 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작은 일에 충성한 자가 큰 일에도 충성하고, 작은 일에 충성하지 못 한자는 큰 일에도 충성 못한다고 말씀했습니다. 비유를 말씀하실 때에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니 내가 큰일도 맡기겠다”고 말씀했습니다. 작은 일에 부지런한 사람이 큰 일에도 부지런합니다. 작은 일에 양심적으로 하는 사람이 큰 일에도 양심적으로 합니다. 좋은 생각은 아무리 작아도 어떻든지 우리 마음 가운데 품도록 힘을 써야 합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인내와 진, 선, 미의 모든 생각은 아무리 작아도 항상 우리 마음가운데 품도록 힘은 써야 합니다. 작은 핑계는 아무리 작을 지라도 어떻든지 우리가 안 하도록 힘을 써야합니다.
134.와나메이커의 친절
여기 지금 YMCA를 재건하느라고 굉장히 힘을 쓰는 중에 있지마는 저는 이 YMCA일을 늘 볼 때마다 본래 이 YMCA에 기부해서 지어주었던 미국의 유명한 기독교 실업가 와나메이커(Warnermaker)라고 하는 사람을 기억합니다. 그 사람의 일화 가운데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그이가 젊어서 어떤 상점에 가서 물건을 하나 샀는데 사 가지고 와서 보니까 자기가 꼭 원하는 물건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 상점에 도로 가지고 가서“이거 내가 꼭 원하는 물건이 아니니 이걸 좀 바꿔 주시요”부탁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상점 주인이 대단히 성이 나서“아, 한번 사간 것을 뭘 다시 가지고 왔는가?”고 하면서 불친절하게 거절을 합니다. 그러니까 이 천년 은 대단히 섭섭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왔다고 합니다.
이 때에 이 청년은 그것 때문에 반발하지 않고 왜 장사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손님에게 불친절하나? 나는 앞으로 친절하게 장사를 해보겠다. 어떤 사람이 물건을 샀다가 다시 바꿔 달라고 해도 기쁜 마음으로 친절히 바꿔주겠다 하는 결심을 하고 작은 상점을 경영하기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문자 그대로 친절 본위로 사업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 사업이 잘 되어서 지금 필라델피아 나 뉴욕에 가 보아도 굉장한 와나메이커 빌딩이 있고 큰 상점이 그냥 있습니다.
작은 친절을 우리가 힘 쓸 줄 알아야 됩니다. 선은 아무리 작을 지라도 하도록 힘을 써야합니다. 그러기에 예수 님께서 말씀하시기를“냉수 한 그릇을 목마른 사람에게 주어도 내 이름으로 주면 상을 잃어버리지 않겠다”고 말씀했습니다. 작은 의무를 바로 하도록 힘을 써야합니다.
135.미국의 한 철도회사 사장
내가 전에 어렸을 때에 어떤 신문을 보니 미국의 큰 철도회사 사장이 죽었는데, 본래 사장이 그 회사에 들어갈 때는 사환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사환으로 들어가서 자기의 맡은 바 책임을 얼마나 잘 했던지 점점 올라가서 마지막에는 그 회사의 사장으로 있다가 죽었다고 합니다.
작은 책임을 바로 하는 사람이 큰 책임도 바로 합니다.
여러분은 다 큰 전도자가 될 수 있을지 그건 모르겠어요. 여기 빌리그래함 목사처럼 한꺼번에 수백 명 수천 명을 회개시킬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줄 압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하나 하나가 개인적으로 내 친구, 나 아는 사람에게 권면해서 그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할 수 있는 개인 전도는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 역사를 본다면 큰 부흥회를 통해서 그 때의 교회가 발전된 것은 아닙니다. 이 믿는 사람 하나 하나가 개인적으로 권면해서 이 작은 개인 전도를 통해서 마지막에 온 로마 제국을 기독교 국가로 만든 것입니다. 작은 의무, 작은 전도를 우리가 힘 쓸 때에 큰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136.스파르타의 교훈
옛날 헬라의 스파르타 나라에서는 항상 그 국민들에게 외쳤던 말이 있습니다.“너희 하나 하나가 벽돌이 되라 산 벽돌이 되라”그것은 그 때 스파르타 사람들이 벽돌로 성을 쌓고 있었는데 너희 하나 하나가 산 벽돌이 되어서 나라를 지키라고 한 뜻입니다.
우리 대한민국 군인은 하나 하나가 민주주의를 지키는 산 벽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의 교우는 하나 하나가 하나님의 나라를 지키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보키 위해 하나 하나가 벽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 하나 하나가 땅에 떨어지는 밀 알이 되면 얼마나 많은 수확을 할 수 있겠는가 여러분, 상상해 보십시오. 우리 하나 하나가 큰 등불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 하나가 작은 촛불이 되어서 여러분이 사는 그 곳을 밝힌다고 한다면 온 한국이 아마 거이 밝아 질 것입니다. 찬송가에 있는 말씀과 같이“천사 같이 말못하고 바울 같이 못하나 네 집 근처 다니면서 건질 죄인 많도다”우리 하나 하나가 개인적인 한 사람의 영혼을 구할 수 있습니다.
이 개인 전도를 통해서 온 국민을 구원하고 온 민족의 대부분이 기독교로 돌아오게 될 때에 자연히 우리 나라의 정치, 경제, 문화 모든 방면에 큰 변화가 생길 것입니다. 우리 한국의 큰 문제는 아직까지 교회가 많다고 하지만 서울의 전 인구로 보면 아직도 열 사람에 하나가 되지 못합니다. 백 명에 일곱 정도입니다. 아이들까지 전부 다해서 백 명에 일곱 명 정도입니다 <작은 일의 날>에서
137. 진리의 책 성경
성경을 주신 목적은 인간을 죄악 가운데서 구속해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고자 하는 것입니다. 왜 성경이 지금 까지 많이 읽히고 보급되나요? 이에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씌어졌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구주 되시는 그리스도를 그려주십니다. 성경의 목적은 인간을 죄악 가운데서 구속하여서 새 사람이 되게 하여 하나님의 자녀를 만들고자 하는 데에 있는 까닭입니다.
이제 성경과 인간과의 관계를 잠깐 생각해 보겠습니다. 먼저 개인적으로 생각할 때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어떤 축복을 받게 됩니까? 물론 여러 가지 고대의 역사와 문화도 배우게 되지만 그러나 제일 큰 축복은 누구든지 읽으면 이 가운데서 구주를 발견해서 죄를 깨닫고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악인이 변해서 선한 사람이 됩니다. 음란한 사람은 성결한 사람으로, 거짓된 사람은 진실한 사람이 됩니다. 살인 강도라도 진심으로 회개하고, 그대로 믿으면 죄 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습니다.
138.위대한 책
세상에 위대한 서적이 물론 많이 잇습니다. 미국의 어떠한 대학에서는 소위 위대한 책에 대한 과목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동서고금을 통하여 위대한 책을 골라 통독을 시키는 그런 학과가 생겼습니다. 플라톤이니, 단테니, 혹은 동양의 논어, 맹자, 도덕경 같은 책들을 한 번 읽어보도록 힘을 쓴다고 합니다. 세상에 위대한 책들이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이 책을 읽어서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을 알고 구주를 만나서 새 사람이 되는 책은 성경 하나밖에 없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에게 생명의 양식이 됩니다. 새 사람이 되었지만 아직 어립니다. 이 어린이가 자라기 위해서는 도덕의 젖이 필요합니다. 말씀의 젖이 필요합니다. 이 성경은 생명의 양식, 도덕의 젖입니다. 성장을 계속해서 읽을 때 심령이 자라고, 건강하고, 힘을 얻습니다. 성경을 읽으므로 모든 유혹과 시험을 이길 수 있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슬픈 일을 당할 때에도 위로를 받고, 사업에 실패하고 낙심할 때에도 새로운 용기를 얻고, 성경을 통해서 새로운 능력을 얻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 성경을 읽는 사람은 매일 매일 좋은 음식을 먹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우리 신앙의 유일한 표준입니다. 전통도, 이성도, 어떤 감정도 신앙의 표준일 수는 없습니다. 오직 성경만이 우리 신앙의 표준입니다. 이단과 사설이 횡행하는 이러한 때에 우리가 어떻게 하면 신앙의 정로(正路)를 밟아갈 수 있는가 ? 성경을 읽고 그대로 믿으면 됩니다.
그리고 성경은 행위의 정확한 표준입니다. 성경에는 지고의 윤리가 있습니다. 최고의 도덕적 법칙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십계명을 비롯해서 산상보훈에 이르기까지 우리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세상에서 행해야 할 모든 구례를 분명하게, 똑똑하게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이렇게 성경은 우리에게 새 사람이 되게 하고, 생명의 양식이 되고, 신앙과 모든 행위의 표준이 됩니다.
139.《벤허》에 얽힌 이야기
전에 허다벌스 잉그설이라고 하는 무신론자가 역시 무신론자의 친구 류 윌리스라는 대장에게 기독교를 반대하는 책을 쓰라고 권면했습니다. 그 권면을 듣고 그런 책을 쓰기 위해서 우선 기독교가 무엇인지 알려고 성경부터 읽어보았다고 합니다.
성경을 읽어 가는 가운데 생각이 점점 변했습니다. 나중에는 회개하고 오히려 성경에 감화를 받았습니다. 마지막에는 그 분이 예수의 생활을 그 유명한 《벤허》라는 책으로 썼던 것입니다.
140.짐 윌슨 박사 이야기
성경의 감화력은 이렇습니다.
성경을 반대하는 사람의 내면을 살펴보면 거의가 성경을 읽어보지도 못한 사람들입니다. 전에 프린스턴에 짐 윌슨 박사라는 유명한 구약학자가 있었습니다. 그 때에 프린스턴 대학의 학생들이 성경토론을 하려 왔습니다. 이 늙은 박사는 웃으면서 “성경토론 하는 것은 좋은데 그래 성경을 몇 번이나 읽어 봤나 요?”하고 물었습니다. 학생들은 한 번도 제대로 읽어보지 못했다고 솔직히 대답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박사가 정색을 하면서 하는 말이“나는 적어도 40년을 밤잠 안 자고 몇 백 번 읽고 연구해서 믿지 못할 것이 없으니 우선 몇 번 읽고 오라”고 했다고 합니다. 보통 성경을 읽지도 않고 반대합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묵상해 보면 어려운 문제는 성경 자체가 모두 대답해 줍니다.
141.성경은 가난한 자의 대헌장
성경이 우리 사회에 주는 영향은 어떠합니까? 바로 내일 모래 12월 10일이 세계 인권 선언일 이고 이 주간이 인격 옹호주간입니다. 한국에 있어서 얼마나 적절한 주간인지 알 수 없습니다.
이 인권 평등의 사상의 원천이 무엇인지 여러분 아십니까? 그것은 바로 성경입니다. 성경이 가는 곳마다 인간의 죄와 무지와 정치적, 사회적 모든 구속에서 해방됐습니다. 노예제도는 없어졌고, 남존여비의 사상이 타파되었으며, 만인 평등의 사상이 사회에 오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성경은 민주주의의 기본이 되었습니다. 전에 토마스 헉슬리의 말과 같이 성경은 가난한자와 피압박자의 대헌장입니다. 인간은 성경 없이 살 수 없는 것입니다.
142.성경은 자유의 대헌장
성경은 자유의 대헌장인 것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성경은 박애와 자선사업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성경을 읽는 사람들이 많이 사는 사회에는 병원이 생기고, 고아원이 생기고, 양로원이 생기고, 적십자사 운동이 생기고, 모든 인도주의 운동이 이러 납니다. 성경이 문화 발전에 큰 공헌을 한 것도 우리가 다 알고 있습니다. 성경이 가는 곳에는 미신을 타파하고 학문의 연구를 권장케 되었습니다.
종교개혁 이후, 누구나 성경을 자유롭게 읽을 수 있게 된 이후 자연과학도 발전되었다고 하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최고의 문학과, 미술과, 음악과 같은 예술은 성경의 감화 가운데서 이루어졌다고 하는 사실도 우리는 압니다.
성경이 가는 곳에 그 사회의 도덕이 향상됩니다. 이렇게 성경은 국가 사회 도덕의 기본이 되는 것입니다. 전에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 때에 어떤 외국 사절이 와서“영국이 이와 같이 흥왕(興旺)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고 물어보니까, 여왕은 책상 위에 놓인 성경책을 가리키면서“저 책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143.성경은 항상 새로운 책
성경은 오래 된 책 같지만 항상 새로운 책입니다. 성경 가운데 새로운 진리가 무진장으로 있습니다. 아직까지도 성경 가운데 우리 인류가 찾아내지 못한 진리가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습니다.
16세기에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새로운 진리가 발견되어서 종교개혁운동이 일어났고 18, 19 세기에는“온 세상에 가서 진리를 전파하라”고 하는 새로운 말씀이 발견되어서 세계 선교운동이 일어났습니다. 20세기에는‘교회는 하나라고 하는 이 진리가 발견되어서 신 구교를 막론하고 이른바‘에큐메니칼’운동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성경은 오래된 책 같지만 항상 새로운 책입니다. 교회는 성경을 중심 하여 부흥합니다.
성경을 상고하는 교회가 성공합니다.
교회는 언제든지 성경을 중심 해야 합니다.
종교개혁의 뜻이 여기 있습니다.
지난주간에 로마에서 제2차 바티칸 회의가 폐회되면서, 미사 때에 라틴어를 쓰지 않고 자기 나라 말을 쓰는 것이 하락되었고, 다른 교회와 결혼하는 것도 허락되었다고 하는 이런 좋은 소식을 듣고 우리가 다 환영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성서의 바깥만 본 것에 불과합니다. 혼상(婚喪)문제, 마리아 예배, 미사문제, 교황 전제정치, 이런 것이 좀더 성경에 가까이 와야 비로소 신구 교회의 합동문제는 선언될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 중심으로 교회가 돌아와야 합니다.
개인의 신앙도 그렇습니다. 이웃 사람이나. 감정에, 또는 행동에 너무 따라가지 마세요. 언제나 성경 중심의 신앙 생활을 해야 실수가 없습니다.
성경을 읽고, 공부하고, 묵상하고, 성경을 전파하고, 성경대로 살고 죽어야만 합니다. <성경은 어떠한 책인가?>에서
144.주님을 닮자
예수 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며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고, 그 갈대를 회복하시고, 그 희미한 불을 돋우어서 큰 등대를 삼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이것이 크리스마스의 정신입니다. 우리가 어느 때에 이와 같은 정신 가운데서 살지 아니 하리 오 마는 특별히 이와 같은 계절을 맞아서 주님의 이 정신을, 이 성품을 우리는 좀 배워야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특별히 이와 같은 계절에 병난 사람들을 위해서, 그 가난한 형제를 위해서, 모든 죄인들을 주님 앞으로 구원해 내기 위해서 우리의 최선을 다해야 되겠습니다. 크리스마스를 축하하는 것도 이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쌀을 모으는 것도 이러한 목적이 있기 까닭입니다. 이 계절에 작은 믿음 잇는 이들을 북돋워 주어야 되겠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솔선수범해서 상한 갈대, 스치고 밟힌 불쌍한 이들을 함께 붙들어 주어야 됩니다.
145.펄벅의《살아 잇는 갈대》
미국의 유명한 여류 소설가 펄벅 여사가 한국에 대한 소설을 쓰셨지요. 펄벅 여사는 더 리빙 리드(The Living Read), 《살아 있는 갈대》에서 우리 민족을 갈대로 보았습니다. 갈대도 살아 있다고 하니 소망은 있습니다. 그러나 매우 상한 갈대입니다. 38선으로, 6·25로, 거듭되는 혁명으로, 거듭되는 실정으로, 경제파탄으로 상했습니다. 그 상처가 깊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낙심하고, 어떤 이는 절망하고, 자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범죄는 더욱더 격증해 갑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해외로 피하려는 사람도 많이 잇습니다. 이 상한 갈대를 구할 이는 누구이며, 이 꺼지는 민족의 혼을 다시 북돋을 이가 누구입니까? 오직 예수 님뿐이며 우리 주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오직 예수 님만이 우리 민족을 다시 살려 밝은 빛을 비치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민족이 다 주님께 나와서 새 사람이 되어야, 주님의 정신을 가지게 되어야, 제3공화국도 바로 건설될 수 있을 것입니다. <상한 갈대>에서
146. 빛의 생활
빛 가운데서 행하는 사람들이 사귐은 무너질 때가 없습니다. 영원히 계속할 것입니다.
우리가 또한 그런 사귐에 대해서 생각할 것은 언제든지 죄라고 하는 것은 사람을 나뉘게 합니다. 부부간에 죄가 들어올 때에 부부도 서로 이혼하는 수가 잇습니다. 부자간에 죄가 들어올 때에 부자도 서로 불상견(不相見)하게 되는 경우가 없지 않아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친구 사이에도 죄가 들어올 때에는 그 친구가 나뉘어지게 됩니다. 빛 가운데서 행하는 사람들의 사귐만이 참으로 영원히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 이 성도의 교제, 성도의 사귐이 매우 필요합니다. 이것은 피차에 도움이 됩니다. 또 한 가지로 힘을 합해서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어두운 세력과 싸울 수도 있는 것입니다.
147.썸바디’와 ‘노바디’
제가 전에도 이런 말을 한 줄로 생각하는데 여기 우리말로는 적절한 말이 얼른 생각나지 않지만 영어에‘썸바디’(Somebody)라는 말이 있고, ‘노바디’( Nobody) 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썸바디 라고 하는 말은‘좀 아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아무개가 우리동네 썸바디하면 좀 아는 사람입니다. 그러나‘노바디’라는 말은‘누군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자 여러분, 우리가 예수를 믿되 어떤 교회의 교인이 되었으면 그 교회 안에서 썸바디가 되어야합니다. 좀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교회에 와서 같이 예배는 보지만 다른 사람이 전연 모르는 노바디가 되면 그것은 성도의 교재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이와 같이 좀 큰 교회에서 그렇게 되기가 쉽습니다.
148. 사귐의 필요성
우리가 이 성도의 교재를 가지는 게 필요한데 성도의 교재를 가지려고 한다면 여러분이 여러 단체에 가입해서 함께 활동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또 여러분이 들어오실 때에 주보를 다 받으신 줄 압니다. 여기 각 성경 공부반의 장소와 시간을 연령에 따라서 참여 할 수 있게 안내해 놓았습니다. 성경공부 시간에 들어가서 같이 성경도 공부하고, 피차에 서로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빛 가운데서 행하는 이들에게 빛의 사귐이 있습니다. 이 사귐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내게도 필요하지만 피차에 사귐을 통해서 힘을 합해 이 세상에서 어두움의 세력과 싸워 이기는 떼도 아주 중요합니다. <빛 가운데 행하라>에서
149 심령의 진공 상태
자연계나 영계에서는 진공 상태를 오래 용납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물병에 물이 하나 가득한 것을 쏟아보세요. 물이 나올 때 콜록 콜록 하는 소리가 드립니다. 왜 그런 소리가 들리는지 압니까? 물병에 물이 가득했는데 물을 쏟으니까 그 병 속에 진공 상태가 됩니다. 비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 밖에 있는 공기가 얼른 그 곳에 들어가 차지하려고 파고 들어가는 소리가 그렇게 납니다.
이 세상에 진공상태가 오래 용납될 수 없습니다. 우리 삶의 심령이 그렇습니다. 사람의 심령에 진공상태가 오래 갈 수 없습니다. 빈집에 흔히 도적이 들기 쉬운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소극적으로 죄를 떠나는 것만이 아닙니다.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여야 그 신앙생활이 건전한 신앙생활이 됩니다.
150.지옥의 행랑방
단테의《신곡》을 읽어보면 단테가 유명한 시인 붜질이라 하는 사람의 인도를 받아서 지옥 구경을 갑니다. 얼마쯤 내림 길로 가다가 보니까 조그만 문이 있는 데 그 문 위에는 이 문에 들어가는 모든 사람은 소망을 버리라는 글귀가 씌어 있습니다. 지옥 속에는 소망이 없는 모양입니다. 안내자의 뒤를 따라서 그 문을 열고 들어가니까 제일 첫 방에 어떤 무리들이 있는데 그들은 슬픈 눈물을 흘리며 탄식을 하고, 원망을 하고, 근심을 하고, 걱정을 하고, 심음을 하고 있었습니다.
단테가 자기 안내자 붜질에게 물었습니다.“이 사람들은 어떤 사람입니까?”그 때에 안내자가 대답하는 말이“이 사람들은 전에 세상에서 살 때에 소위 중립주의자들인데 하나님을 배반해서 나쁜 일을 별로 한 것은 없지마는 하나님을 위해서 좋은 일을 한 적도 없습니다. 그저 세상에서 살 때 꼭 자기만 위해서 산 이기주의자들입니다. 그래서 물론 천국이 이런 사람을 용납할 수 없어 지옥에 부득이 오게되었는데 지옥에서까지 이런 사람들은 멸시를 받아 이렇게 첫 방에 있는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아마 지옥에도 행랑방이 있는 모양입니다. 우tm운 이야기 같지마는 우리에게 큰 경고를 주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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