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돌아가기 |
제 5권 한경직 목사 설교예화 153편 |
151 슬픔 중에 얻는 은혜
제 오래된 목회 경험 가운데서 많이 보았습니다. 어떤 아들과 딸들을 보면 부모가 살았을 때는 그렇게 열심히 믿지 아니하고 부모의 속을 썩힙니다. 그러다가 부모가 세상을 떠납니다. 큰 슬픔을 당하게 됩니다. 그 때야 비로소 아들과 딸들은 깨달아서,“내 믿음의 어버이가 나를 위해서 얼마나 기도했고 얼마나 믿음의 생활을 원했던가 이제 앞으로는 어버이의 믿음을 계승해야 되지 않겠는가”하고는 새사람이 됩니다. 약한 가운데서, 슬픈 가운데서 주님의 은혜를 받아 오히려 부모보다 더 크게 주님께 봉사하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실패와 궁핍(窮乏) 가운데서도 주의 능력이 온전히 나타납니다. 우리 가운데도 이런 고통의 가시를 가슴에 품고 사는 이들이 상당히 있을 줄 압니다. 낙심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원망하지 마세요. 자포자기하지 마세요.“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하는 족한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으면 그 가시야말로 큰 축복의 디딤돌이 되는 것입니다.
주의 능력은 약한 가운데서 온전히 이루어져 사람의 생각을 초월하는 위대한 역사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약한 데서 온전하여지는 능력>에서
152.우월감
세계 인류의 일치성을 기억해야 합니다. 세계 인류는 한 조상 아담의 후손으로 실상은 한 종족입니다. 기후와 환경에 따라서 얼굴의 모습과 피부와 키가 크고 작음의 차이는 있지만 실상 다 한 혈통으로 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실에도 불구하고 현실을 보면 어떤 민족이나 소위 민족적 우월감, 민족적 편견을 가지고 삽니다. 이것은 백인만 아닙니다. 황인 도 그러하고 흑인도 그러합니다.
153.제일 일등 되는 종족
제가 어떤 책자를 보니 아프리카의 하렌 파크라고 하는 흑인 부족이 하나 있는데 이 사람들은 흑인 가운데에도 키가 작고 가장 원시적인 사람들이긴 하나 그 사람들과 얘기해 보면 자기네가 세계에서 제일 먼저 지음을 받았고 일등 되는 종족이라고 자랑한다고 합니다. 이 부족만이 아닙니다.
세계 민족이 다 이와 같은 우월감을 가지고 삽니다. 우리 한국사람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일본 사람은 외(猥)놈 이라고 불렀고 중국사람을 되놈이라고 불렀고 서양사람은 양비자 혹은 양코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154.황인종 이야기
아마 여러분께서는 이런 얘기를 들었을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으실 때에 진흙으로 빚어서 불에다 구웠다고 합니다. 그 분이 진흙으로 빚어서 불 속에 넣어 굳는데 넣고 나서 조금 후에 꺼내니 좀 덜 익어서 섧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진흙으로 빚은 후에 불에 넣었습니다. 이번에는 좀 오랫동안 두었습니다. 그리고 꺼내보니 새까맣게 타 버렸습니다. 이것은 너무 익었구나 하고는 다시 진흙으로 빚어서 불에 넣었다가 적당한 시간에 꺼내니 꼭 알맞게 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설익은 것은 백인종이 되었고 너무 익은 것은 흑인종이 되었고, 꼭 알맞게 익은 것은 황인종이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얘기를 누가 지어냈는지는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두말할 것 없이 황인종이 지어냈습니다.
우리 한국에 옛날부터 내려오는 속담 가운데 사람마다 저 잘난 재미에 산다고 하는 속담이 있습니다. 민족마다 저 잘난 재미에 삽니다. 그런데 사실은 어떤 민족간에나 우수한 사람도 있고 열등한 사람도 있습니다. 선한 사람도 있고 악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민족적 편견을 버리고 우리는 대우와 칭찬을 베풀도록 힘써야 될 것입니다.
특별히 후진 민족일수록 그 지리적, 역사적 원인이 있으므로 적극 협조해서 같이 발전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새 시대, 우주시대에 사는 우리 마음의 태도입니다. <한 혈통으로>에서
155.주님을 아는 사람
시편 34편 8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니라”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맛보라는 말입니다. 수박이 단지 안 단지 알려고 할 때 제일 쉬운 방법이 무엇입니까? 물론 보아서도 알 수 있고 만져보아서도 조금은 알 수 있으나 잘 알려면 먹어 보는 것이 제일입니다.
체험을 해서 우리가 진리를 알게 됩니다. 이와 같이 주의 말씀대로 행해 보아야 그 말씀이 진리인 줄 알게 됩니다. 예수 님과 같이 동행해 보아야 예수 님께서 진리이신 것을 압니다.
말씀대로 살아야 진리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156.‘트라이’와‘프루브’
전에도 제가 이런 얘기를 한 것 같지만, 서양의 어떤 여자는 늘 성경을 읽을 때 줄을 치면서 어떤 구절에 영어로 P자와 T자를 썼다고 합니다. 그래서 누가 물었다고 합니다. “그것이 무슨 뜻입니까?”그녀는 대답하기를“T자는 영어로 트라이(try)라는 뜻이고 P자는 프루브(prove)라고 하는 뜻이라”고 하였습니다. 트라이라는 말은 내가 해 보았다는 말이고 프루브라는 말은 해보니 그대로 되더라고 하는 뜻입니다. 그런 사람이 사실 주님의 말씀을 아는 사람입니다. 주님을 아는 사람입니다. <참 제자의 도>에서
157.쿼바디스
나를 위해서 자기 몸을 주신 주님을 깨닫게 될 때에는 이 몸은 주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로마 교회에 나가면 쿼바디스라고 하는 작은 교회가 있습니다. 그 교회에 전설이 하나 있습니다. 쿼바디스란 말은“어디로 가십니까?”라는 뜻입니다.
로마에 큰 핍박이 있을 때에 베드로가 로마 성을 빠져 나와 멀리 교외까지 나왔습니다. 나오다가 환상을 보았습니다. 예수 님께서 마주 오십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물었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예수 님이 대답합니다 “나는 로마에 들어가서 성도들과 같이 고난을 받으려고 한다” 이 말을 듣고 베드로는“주께서 어찌 다시 고난을 받으시겠습니까, 내가 돌아가 받겠습니다”하고는 로마로 다시 들어가서 순교하였다는 얘기입니다.
모든 순교자는 문자 그대로 그 몸을 바쳤습니다. 그 생명을 바쳤습니다 <자기 몸을 주신 그리스도>에서
158.사랑의 헌신
벌써 오래 전 일입니다. 제가 신학교를 미국에서 마치고 폐가 약해져서 미국 서 남방 뉴멕시코 주 알바버치라고 하는 작은 도시에 있는 장로교 요양원에 가서 한 2년 동안 치료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 있는 동안에 한 번은 거기에 와서 오래 치료하던 환자 한 분이 세상을 떠나서 저녁에 추도 예배를 드린다고 해서 저도 참석했는데 그 추도 예배의 다른 순서는 다 잊어버렸지마는 그 예배 도중에 고인의 젊은 부인이 조가를 직접 부르던 모습은 지금까지도 잊혀지지를 않습니다. 찬송가를 독창하였는데 그 독창을 통해서 많은 은혜를 받았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 때에 세상을 떠난 이는 신학교에서 공부를 하다가 폐가 약해져서 그 요양원에 치료하려 오게 된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대학에 다니던 시절에 사귀어 장래에 가정을 이루기로 서로 약속한 여자가 있었답니다. 그 분이 이처럼 병으로 공부를 못하게 되니 대학을 졸업한 그 여자는 멀리 버지니아 주에서 그 곳 까지 와서 병원 원장의 서기 일을 보면서 그 환자의 치료비를 대주고 사랑하는 이를 간호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몇 달 후에 불행히도 그 남자의 병이 중해져서 의사는 얼마 살지 못하겠다고 최후의 선언을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여자는 목사님을 찾아가서, 자기는 일생을 이 남자와 같이 하기로 약속을 하였는데 그의 병이 악화되어 며칠밖에 살 수 없다고 하니 이 남자의 성이라도 인계 받을 수 있도록 결혼식을 올려달라고 간청했다는 것입니다.
미국 풍속에 의하면 결혼하는 경우에는 남자의 성을 여자가 받아서 아무 게 부인이라 합니다.
목사는 처음에 좀 주저했지마는 부탁이 간절하고 또 서로 사랑하고 있는 것이 확실함으로 결국 허락을 했습니다. 마침내 남자는 침대 위에 누어있고 여자는 신부로 단장을 하고 병실에서 결혼식을 거행하였습니다. 그 후에도 그 여자는 병원에서 계속 일 하면서 이 남자를 극진히 간호하였습니다. 그 정성에 의해서인지 결혼식을 한 후에 그 남자는 무려 8년을 더 살았습니다. 침대에 누운 채로 8년을 더 살았던 것입니다.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 여자는 “내가 지금 까지는 한 남성을 위해서 내 온 몸과 마음을 바치며 봉사해 왔지마는 이제는 이 병원에 들어오는 모든 환자를 위해서 내 일생을 바치겠습니다”고 말했습니다.
그 후에 이 분이 병원을 위해서 어떻게 열심이었던지 그 병원의 총무가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그 일을 봅니다. 온 병원의 어머니가 된 것입니다
제가 몇 해 전에 이 부인을 특별히 방문하기 위해서 알바버치에 내렸던 일이 있습니다. 또 제가 지난 삼월에도 미국 남방을 여행할 때에 전화로 이 부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왔습니다. 거이 80이 됐는데 지금까지 일하고 있습니다. 그 부인의 일생을 보면 문자 그대로 깊은 밤에 기도한 찬송과 봉사의 생활을 계속해온 것입니다. <깊은 밤에 기도와 찬송>에서
159.볼기 맞는 우상
제가 전에 어떤 책을 보니 어떤 지방에 가서 선교하던 선교사가 어느 아프리카 토인 부락을 지나가다가 깜짝 놀란 일을 당했다고 합니다. 가만 보니 그 부락의 한 토인이 자기 옆에 늘 모시고 다니던 우상을 나무에 거꾸로 매달아 놓고 볼기를 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선교사가 놀라서 이렇게 당신이 섬기던 우상을 매달아 놓고 볼기를 칠 수 있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러니까 그 토인이 대답하는 말이, 내가 이 우상을 10년이나 섬겼는데 복은 하나도 주지 않고 화만 주니 이런 우상을 어떻게 섬기겠느냐고 했답니다. 이런 종교사상을 가진 이들이 지금도 상당히 많은 줄 압니다.
160.집도 못 지키는 하나님?
전에 들으니 어느 부인이 몇 주일 동안 교회에 잘 나오다가 갑자기 안 나오기에 그 교회 권사 님이 찾아가서 사연을 물었다고 합니다.“왜 잘 나오시다가 안 나오십니까?”“나는 이제 안 나갑니다. 글세 지난 주일날 문을 걸고 교회 다녀오니 도둑놈이 와서 모두 다 가져갔습니다. 그래 집도 못 지키는 하나님을 뭣 하려 섬기겠습니까?”이런 유치한 종교사상을 가진 이가 지금도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어떤 때에는 감사하지만 얕은 생활을 하는 이들도 상당히 많이 있는 줄 압니다.
그 반면에 사도 바울과 같이 범사에 감사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성경의 교훈대로 모든 일에 감사하는 생활을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을 만듭니다. 기독교 신앙이 꼭 지혜 있게 만든다고 보증하기 어렵지요. 꼭 지식이 많은 사람을 만든다고 보증하기 어렵지요. 돈을 잘 버는 사람으로 만든다고 보기도 어렵지요. 그러나 누구든지 참된 기독교 신앙을 가지게 되면 그는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이 됩니다.
161.감사의 안경
외부 세계, 혹은 환경은 안경의 빛깔에 따라서 다르게 보이는 것과 같습니다. 검은 안경을 쓰면 모든 것이 검게 보입니다. 그러나 분홍안경을 쓰면은 모든 것이 분홍색으로 보입니다. 믿음의 안경을 쓰고서 보면 모든 일에 감사할 것이 있습니다. 검은 구름에도 햇빛이 비치면 아름답고 무지개가 나타납니다. 근심의 안개, 슬픔의 구름에도 그리스도의 빛이 비추면 빛나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성 프랜시스의 태양의 노래를 기억하시지요, 그 노래의 내용을 보면, 그는 햇빛을 위해서 감사드립니다. 오곡백화를 위해서 감사를 드립니다. 산해어별(山海魚鼈)을 위해서 감사를 드립니다. 형제자매를 위해서 감사를 드립니다. 마지막에 드릴 감사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죽음을 위하여 감사를 드립니다. 죽음을 자기의 자매라고 부르면서 이 죽음을 주시니 감사한다고 하였습니다. 죽음도 주안에서의 죽음은 감사로 변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참된 신앙은 감사한 마음으로 우리 가슴에 채워 줍니다. <폭풍우 중에 감사>에서
162.리빙스턴의 충실한 종
아프리카의 유명한 선교사 리빙스턴이 그 곳에 가서 얼마나 큰 일을 하였습니까? 마지막에 외딴 곳에서 홀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리빙스턴이 아프리카에서 일 할 때에 열심히 그를 도왔던 흑인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 분이 자기 친구를 모아 가지고 리빙스턴의 시체를 항구가 있는 곳까지 수 천리를 걸어서 운반하여 영국으로 가져와 온 영국이 그 유해를 맞아 유명한 웨스트민스터 예배당에서 훌륭한 장례를 차렸습니다. 그 때에 시종 리빙스턴을 따라다니면서 그를 도왔던 웨인 우리잇이라는 키가 작은 흑인이 런던까지 따라와서 그의 장례를 지냈습니다. 그때에 물론 모든 사람들이 리빙스턴을 존경하고 그를 추모했습니다. 그러나 오로지 리빙스턴만 찬양한 것이 아닙니다. 리빙스턴을 따라서 종시 충성되게 리빙스턴과 일생을 같이한 그 흑인 동역 자를 역시 크게 존경하고 찬양했다고 합니다. 왜? 리빙스턴은 그가 받은 바의 재능에 충성을 다한 사람이올시다. 이 흑인 일군도 자기가 받은 바 은사에 대해서 역시 똑같은 충성을 다한 사람이올시다.
163.하나님 앞에서의 결산
전도서 11장 9절에 이렇게 경고합니다.“청년들이여 네 젊은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을 마음에 기뻐하며 마음에 원하는 길과 네 눈에 보이는 길로 좇아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에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심판할 날이 있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인간에게는 물론 자유가 있습니다. 상인은 상점에서, 직공은 공장에서, 공무원은 관청에서, 국회의원은 국회에서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할 것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일에 심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일찍이 미국에 다니엘 웹스터라고 하는 유명한 정치가가 있었습니다. 그 분에게 어떤 분이 찾아가서 이런 질문을 하였다고 합니다.“당신의 마음속에 들어왔던 모든 생각 가운데 가장 엄숙한 것은 무엇입니까?”그가 얼른 대답하기를“나의 지금 하는 모든 일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때가 있으리라 하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결산 할 때가 있는 것을 기억하고 살아야 합니다. 연말에 아주 중요한 것 한 가지가 잇습니다. 그것은 모든 것을 청산하는 겁니다. 죄로 해를 넘기지 맙시다. 한 분이라도 양심에 거리끼는 죄가 있으면 해를 넘기지 말고 청산합시다. 우리가 연말에 꼭 생각해야 할 것은 끝을 올바로 맺는 것입니다. <영적 생활의 결산>에서
164.홀트 양자회 운동
제가 이번에 미국을 다녀오면서 느낀 것은 우리 사회에서 가장 시급한 것은 전도 운동이요, 둘째는 사랑의 운동입니다. 특히 우리 믿는 사람들은 생활에 있어서 상부상조할 줄 아는 사랑의 운동의 선구자가 되어야 합니다.
저는 바로 지난주간에 유진 오레곤이란 지방엘 가서 홀트 양자회 이사회에 참석하고 왔습니다. 제가 한국에 나와 있는 홀트 양자회의 이사장이란 직책을 맡고 있으므로 본부 이사회에 꼭 참석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이번에 참석한 것입니다.
여러분 홀트씨에 대해서 조금 들으신 분도 계시겠지마는 아마 잘 모르는 분도 계실 겁니다. 이번에 제가 홀트씨의 집을 방문하여 그 사정을 더욱 자세히 알고 왔는데 홀트씨는 별로 큰 교육을 받은 분이 아닙니다. 8학년까지 공부했다고 하니까 우리의 학계로 말하자면 중학교 2학년까지 마친 분입니다. 촌에서 농사 짓던 분이었지만 커서는 진실하게 열심히 일해서 넉넉히 사는 농부였습니다.
그런데 6·25사변 때에 한 분이 와서 유진이란 곳에서 피얼스 박사가 한국사정을 얘기한다고 하니 같이 구경가지 않겠느냐는 권유를 하여 부인과 딸들을 데리고 가서 피얼스 박사의 얘기도 듣고 사진도 보여주는 것을 보았다고 합니다. 한국 고아의 사정이 매우 딱한 것을 알게 되자 돌아오는 길에 부부가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생각하던 중에 피얼스 박사가 “당신 네가 도우려면 한 달에 10불씩 우리 선명회에 보내주면 이것을 받아 가지고 고아 한 사람을 기를 수 있소”하는 말을 듣고 곧 그들로 고아 두 사람을 도와주어야겠다고 한 달에 20불씩을 내어 고아 두 사람을 돕겠다는 신청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을 하면서 부인과 아이들과 종종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렇게만 해 가지고 될까?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고 성경에 말씀했는데 우리가 고아를 이렇게 도와서 될 것인가?”어느 날 좀더 고아들을 도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자 한국에 나올 생각이 났습니다. 한 번 나와서, 부산 대구 서울을 다니며 고아원의 실정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생각하기를“내가 두 아이만 돕는 것으로 될 수 있나. 우리 집은 상당히 넓은데 고아들을 대려다가 기른 다면 얼마나 좋겠나”하는 자기네 아이가 여섯이나 되는데도 아래층을 수리하고 집을 손질하면 아직도 여덟 아이는 더 기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집을 수리하고 한국에 나와 고아 여덟 명을 데려가려고 신청을 했습니다. 자기가 직접 기르려고 말입니다. 그런데 미국에는 양자는 두 아이 이상은 기를 수 없는 법이 있어서 그 법을 고치려고 국회의원과 교섭을 한 결과, 국회에서는 몇 달 안에 그 법을 고쳐주었어요. 마침내 한국에 나와 고아 여덟을 데려다가 자기 아이 여섯과 같이 기르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하니 그 광경을 보고 그를 아는 이들, 교회 교우들, 친척들이 감동을 받아 자기들도 한국 고아를 데려다 기르겠다고 해서 다른 가정에도 보내는 일을 하기에 이르러 소위 홀트 어덥선 프로그램(Holt Adoption Program) ―홀트 양자회라는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 홀트씨는 아이들을 빨리 받아들여 기르기 위해서 한국에 와서 고아원 하나를 세웠습니다. 처음에는 홍제동에 세웠다가 일산으로 옮겼는데 현재도 있어요. 거기에는 언제나 버러진 아이들을 우선 받아서 기르는데 늘 5, 6백 명의 고아가 있습니다. 홀트씨는 몇 해 동안 친히 한국에 나와 고아를 위해 일하다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한국 고아를 위해서 생명을 바쳤어요. 그러나 그 부인과 친구들이 계속해서 이 일을 합니다.
여러분, 아십니까? 지금까지 이 홀트 양자회를 통해서 미국과 서서등 여러 나라에 한국 고아를 보낸 수가 작년까지 5천 명이 넘었어요. 5천 명을 좋은 가정에 들여보내서 잘 자라게 했습니다.
여러분, 이번 이사회에 내가 가서 가만히 보니 이사들이 약 20명되는데 자기네 아이들이 있지만 한국 고아를 두 셋씩 데려다 기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 얼마나 감사한지 알 수가 없어요. 한국사람인 나로서는 깊이 느껴지는 것이 있었습니다.“ 외국사람들이 이렇게 한국의 고아들을 데리다가 기르는데 왜 한국 사람들은 이렇게 할 수 없겠는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어떻든지 사회 안에서 사랑의 운동의 선구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에서
165.심리적 원인
스텐리 존스 박사의 저서를 보면 그런 실제를 많이 열거했습니다. 가령 어떤 젊은 여자가 하나 있는데 그는 무엇을 먹기만 하면 도로 토하고 맙니다. 의사가 아무리 위를 검사해 보아야 아무 병도 없습니다. 심리적으로 그 여자를 분석해 보니 그 속에 자기 시어머니에 대한 미운 마음이 가득해서 결국은 육체적으로 그런 고장이 생긴 것이었습니다
또 어떤 젊은 여자가 갑자기 오를 손을 쓰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의사들이 아무리 진찰을 해보아야 아무 병도 없습니다. 심리적으로 진단을 해보니 자기 어머니에 대한 증오감으로 인해서 그 손으로 어머니를 때릴 마음이 가득하더라는 것입니다. 그 마음을 해소시킨 다음에는 곧 팔을 쓰게 되었습니다.
한국에서도 우유를 많이 먹기 시작하지마는 성난 소에게서 짜 낸 우유를 먹으면 해롭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제가 몇 해전에 미국에서 농장을 가보니 젖 짜는 방을 아름답게 꾸미고 거기에 음악을 트러놓은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성난 어머니가 얘기들에게 젖먹이는 것을 본 일이 있지요.? 그거 아마 좋지 않을 것입니다. 성난 기분 가운데서 나오는 젖이 좋을 리가 없습니다.
우리의 심리적 상태가 육체에 직접 영향을 줍니다. 한국에는 전부터 이런 속담이 있지 않습니까?“사촌이 밭을 사면 배를 앓는다.”어려서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 오랫동안 깨닫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심리학을 배우고 생각해보니 꼭 그렇겠어요. 사촌은 밭을 사는데 나는 못 산 데서 시기하는 마음이 가득하게 되면 위액이 제대로 분비되지 못 할 것입니다. 자연히 소화 불량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배가 아프게 되겠지요.
사실 위궤양이니 하는 병은 육체적 원인보다도 마음의 불안에서 오는 것이라고 합니다.
다른 사람의 죄를 곧 용서해 주지 아니하고 마음에 품고 있는 것은 내 자신에게 큰 손해가 됩니다. 그래서 골로새서 3장 13절에 이렇게 가르쳤습니다.“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에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라”했습니다.
분한 마음을 오래 품고 있으면 내가 손해를 봅니다. 연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한 분이라도 이런 기분 가운데 계시는 이가 혹 있으면 이 시간에 다 용서하시고 풀어 버리시기 바랍니다.
166.향나무가 찍힐 때 발하는 향수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 같이 못 박힌 강도가“나를 불쌍히 여겨주소서”라고 회개할 때에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시며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이들을 위해서 하신 기도가 뭡니까?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소서. 저들이 자기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
향나무는 자기를 찍는 도끼에 향수를 뿌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 님께서는 문자 그대로 향수를 뿌리신 분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 좀더 그리스도를 본받을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구약의 모든 인물 가운데 예수 님을 가장 닮은 인물은 요셉이라고 합니다. 왜? 요셉이 자기 형들의 죄를 용서해 준 까닭입니다.
서반아에 이런 속담이 있다고 합니다. “선을 악으로 갚는 것은 악마가 하는 일이요, 악을 악으로 갚는 일은 인간들이 하는 일이요, 악을 선으로 갚는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을 본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에베소서 4장 32절에“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고 권면 했습니다.
옛부터 “은혜는 물에 새기고 원수는 돌에 새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은혜는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내가 손해보고 천대받은 것은 다 잊어버리기 어렵습니다. 심지어 가족간에도, 친척간에도, 친구간에도, 적은 일로 혐의를 품고 살기가 쉬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우리 신앙생활에 암과 같은 존재라는 것을 기억해야합니다.
스펄존 목사는 일찍이 이렇게 외쳤습니다. “용서해라. 잊어버리라. 미친개를 파묻을 때에 꼬리를 내놓지 말아라”무슨 말인고 하니 혐의를 아주 없애라는 말입니다.
어떤 분이 아브라함 링컨을 평해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그의 마음은 바다 같이 넓으나 남의 혐의를 둘 방은 없었다”모든 혐의를 아주 잊어버릴 수 있는 그 자리에 이르기 위해서 우리는 힘써야 할 것입니다. 문자 그대로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 줄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힘써야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용서>에서
167.겸손과 위대함의 관계
먼저 이 위대함에 대한 옛 표준을 생각해 보십시다. 제자들은 위대함에 대한 옛 표준의 관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위대해지려면 높은 지위와 권력이 있어야 한다는 사상입니다. 이 사상은 그 때의 제자들만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그 때의 모든 사람이 다 이런 사상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 때의 온 유럽지역을 다스리던 왕을 가이사라고도 하고 그 이름을 어거스트라고도 하는데 그는 그냥 황제라고 부른 것이 아닙니다. 어거스트 대제( 大帝)라고 불렀습니다. 큰 황제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라틴말로 8월을 어거스트라고 하는데 그 왕의 이름이 같은 어거스트니까 8월을 적은 달로 만들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7월이 크니까 8월은 작은 것이 상식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어거스트을 작게 할 수 없다고 해서 2월에서 하루를 떼어다 31일을 만들어 7월도 크고 8월도 크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어거스트는 크다는 관념에서 역서(歷書) 까지 고쳤단 말입니다.
또 그때 팔레스틴 지방을 다스리던 왕은 헤롯왕인데 헤롯왕도 그저 왕이라 하지 아니하고 헤롯 대왕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2천년 전, 로마시대에만 이런 위대함의 표준을 삼아 살아 온 것만은 아닙니다. 역사를 통해서 어느 시대나 다 이러했습니다. 우리 구 한국 시대를 보아도 그러했습니다. 나이 좀 많은 이는 기억하실 것입니다 어른들이 학생들에게 늘 하는 말이“너 글 잘 읽어라 글 잘 읽어서 과거(科擧)봐야 돼 과거해서 벼슬을 해야 돼 그래야 입신양명(立身揚名)하는 법이니까. 큰 권력을 가져! 그래야 크게 돼”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과거 보려고 굉장히 열심히 공부하였습니다.
그것은 우리 한국사회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도 사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소위 현대인들도 그 대부분이 아직까지도 이 위대함에 대한 낡은 표준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관청에서는 계장 보다 과장이 큽니다. 과장보다도 국장이 더 큽니다. 국장보다는 장관이 더 큽니다. 그래서 저마다 장관 되기를 원합니다. 회사에서는 계장보다 과장이 큽니다. 과장보다는 전무가 큽니다. 전무보다는 사장이 큽니다. 저마다 사장이 되기를 원합니다. 또한 옛 표준으로는 돈만 많으면 사람도 큰 줄로 생각합니다. 집이 크면 사람도 큰 줄로 압니다.
이런 표준으로 보면 우리 사회에서 제일 큰 인물이 누굴까? 아마 제일 높은 고층 건물을 지은이라고 대답할 수박에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사회에서도 고층 건물 짓기 경쟁을 하는 모양입니다. 이 표준대로 보면 20세기에 최고로 큰이는 누구이겠습니까? 아마 제일 먼저 히틀러 그리고 스탈린과 무솔리니 등을 곱을 것입니다.
오늘날 현대인들도 이런 옛 사상을 가지고 삽니다. 그런데 예수 님께서는 이런 옛 표준을 근본적으로 뒤집어 놓았습니다. 근본적으로 뒤집어 놓았습니다. 높은 자리에서 금력과 권력으로 권세를 부리는 자가 큰 것이 아니고, 오히려 종과 같이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는 이가 크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겸손해서 다른 사람을 많이 섬길수록 더욱 위대하다는 말입니다. 제일 많이 섬기는 이가 제일 위대하다고 합니다.
168.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저는 3년 전, 백림에서 열린 세계전도대회에 참석했을 때 들은 빌리 그래함의 얘기를 잊을 수 없습니다 아마 여러분 가운데도 들으신 분이 계실 줄로 생각합니다. 이런 간단한 얘기입니다.
어떤 호숫가에 개구리들이 많이 모여 있습니다. 그 때 기러기들이 공중에서 날아와서 호숫가에 앉아 물을 먹고 공중으로 다시 나라 올라갑니다. 개구리 가운데 하나가 무슨 생각이 났는고 하니 “나도 저 기러기처럼 공중에 날아 봤으면”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는 기러기에게“얘 기러기야 나도 너처럼 공중엘 오르고 싶은 생각이 있는데 날 좀 도와줄 수 없겠니?”“어떻게 도와주면 좋겠니”“저기 막대기가 하나 잇는데 저 막대기 한 쪽 끝을 네가 입으로 물면 네가 공중에 올라갈 때나도 공중으로 올라갈 것이 아냐 그렇게 해 줄 수 있겠니?”“그러지.”그래서 기러기 한 놈이 막대기 한 끝을 물고 한 끝은 개구리가 물었습니다. 기러기가 날아 올라가니 개구리도 올라갑니다. 호숫가를 한바퀴 빙 날아서 도니까 아래 잇는 수많은 개구리가 부러워서 “저 개구리는 공중을 나라 올랐구나 어떻게 저런 생각을 해냈노”개구리들이 칭찬을 합니다. 개구리가 물고 공중을 날아다니다 칭찬을 하니까 “내가 했지”하고 자랑스럽게 대답을 하고 싶었습니다. 대답을 하려고 입을 열자 어떻게 되겠습니까? 공중에서 떨어졌습니다. 허리가 부러졌다고 합니다. 무슨 말인지 알지요. 아무리 내가 봉사를 잘 해도“내가 했지”이렇게 자랑하게 되면 큰 것이 아닙니다.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 돌릴 것입니다. 그러기에 산상보훈에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 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라는 말입니다. <위대의 새 표준>에서
169.영접하는 마음
오늘 아침에도 읽었지마는“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 고, 곧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청결하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떻게 하여야 마음이 깨끗해집니까?
주께서도 산상보훈에 말씀하시기를“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하여야 마음이 청결해서 하나님을 볼 수가 있습니까? 머리에는 위대한 사상을 가지고 가슴엔 깨끗한 마음을 품는 것 이상에 귀한 일이 어디에 또 있겠습니까. 어떻게 하여야 마음이 깨끗해질 수 있습니까?
170.마음을 씻는 길
마틴 루터가 어느 날 아침에 세수대아에 물을 떠서 손을 씻었습니다. 한번 씻고 두 번 씻고 그냥 자꾸 씻습니다. 옆에 잇는 친구가 이상이 생각해서“왜 손을 자꾸 씻는가?”고 물으니 루터가 대답하는 말이“아무리 깨끗이 씻어도 내 마음은 깨끗이 할 수가 없구려”하고 탄식했다고 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며 베드로에게 오니 베드로는 너무 황송해서“제 발은 못 씻습니다”하고 말했습니다. 그 때에 예수 님께서“네가 씻지 아니하면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씻어 주어야 우리의 마음이 깨끗해집니다. 주님을 영접할 때에, 주님이 우리 마음을 씻어 주실 때에야 우리의 마음이 깨끗해집니다.
171.손잡이 없는 문
예수 님을 영접하려면 몇 가지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내가 먼저 내 마음 문을 열어야 합니다. 요한 계시록 3장 20절에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고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예수 님께서는 우리 마음 문밖에 서서 두드리고 계십니다. 이 성경 구절을 묘사한 폴만 헌트란 화가의 유명한 그림이 있습니다. 굳게 잠긴 문 밖에 서서 두드리는 예수의 모습을 그린 그림입니다.
어떤 분이 그 그림을 구경하다가 그것을 그린 사람에게 얘기를 했다고 합니다.“이 그림은 썩 잘 그렸는데 한 가지 빠진 것이 있습니다”“그것이 무엇입니까”“여기 문은 있는데 문에 손잡이가 없습니다.”화가가 웃으면서 하는 말이“참 자세히도 보셨군요. 그것은 제가 빠뜨린 것이 아닙니다. 일부러 그리지 않았습니다. 마음 문에는 밖에 손잡이가 없기 때문입니다.”마음 문에는 밖에서 여는 손잡이가 없습니다. 마음의 문은 안에서 나만이 열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의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 님을 영접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님께서는 지금도 마음 문 밖에서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마음 문을 열지 아니하면 그 책임이 내게 있는 것입니다. 고집, 편견, 교만, 적은 지식을 가지고 마음 문을 그냥 닫아 두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를 영접하라>에서
172. 천사가 인정한 성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 어떤 곳에 성자가 한 분 있었습니다. 그의 생활은 깨끗하고 덕이 되어서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천사들까지 이 성자의 생활에 감동을 받아서 땅으로 그를 찾아 내려왔다는 것입니다. 그의 생활을 잘 살펴보니 과연 성자입니다. 그래서 천사들은 그에게 은혜를 더 주려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렇게 신앙생활을 잘 하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앞으로는 그대가 기도하기만 하면 무슨 병이나 다 낫고 죽은 자라도 살릴 수 잇는 권세를 드리려고 합니다”그러자 성자는 잠시 생각하더니“감사합니다마는 저는 그 은혜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까“인간의 병을 다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는 일은 하나님께서 친히 하셔야지 제가 할 수 잇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니 저는 그 은혜를 사양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천사들은 다시 물었습니다.“그럼 그대가 말만 하면 어떤 죄인이라도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되게 하는 권세를 드리려는 데 이것은 어떻습니까?”성자는 똑 같은 대답을 했습니다.“저는 그 은혜도 받을 수 없습니다”“왜 그러시오?”“그것은 성령의 역사이니 성령께서 하셔야 할 일이지 어찌 제가 그 일을 하겠습니까?”천사들은“그렇다면 그대는 무슨 은혜를 원하시오?”라고 물었습니다. 성자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예, 한가지 은혜가 있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 어떻든지 죄를 짓지 않고 선을 행하되 그 선을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고 행할 수 잇는 은혜를 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얼마나 겸손한 마음입니까? 아무리 우리가 좋은 일을 하되 그 일을 내가 한다는 것을 알게되면 아무래도 거기서는 개운치 않은 무엇이 있게됩니다. 그래서 이야기의 결론은 이렇게 맺어집니다. 즉 천사들은 의논 끝에 그 성자에게 그의 그림자 뒤로 비칠 때 그 그림자에 들어가는 모든 병자와 죄인들이 고침을 받고 새 사람이 되게 하는 은혜를 주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다 여러 가지 은혜를 다 사모해야 합니다. 꼭 받을 능력도 다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제일 귀한 것은 예수 님의 마음을 우리의 마음에 받는 일입니다.
온유하고 겸손한 그 마음을 받는 일입니다. 이런 은혜를 받은 이가 모인 가정은 언제나 화평할 것입니다. 이런 은혜를 받은 이들이 모인 단체는 언제나 한 마음 한 뜻으로 일하게 될 것입니다. <새해에 새 마음>에서
173.편견 된 마음의 눈
우리의 마음 눈을 가리우는 것들이 있습니다. 첫째로 욕심이 그것입니다. 정욕, 물욕, 권세욕, 명예욕 등 온갖 욕심이 우리의 눈을 가립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 눈을 가리우게 될 때에 우리는 올바르게 보지를 못합니다. 때로는 친구도 못 봅니다. 민족도 못 봅니다. 나라도 못 봅니다. 심지어는 하나님도 못 봅니다. 이리하여 죄를 짓습니다.
둘째로 편견, 선입(先入)주견(主見) 따위도 언제나 우리의 눈을 가립니다. 갈레리오가 코페르나쿠스의 지동설을 주장할 때에 얼마나 고난을 당했는가 하는 것은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소위 문화인들이 편견 때문에 새로운 사실을 보지 못했습니다.
제임스 심슨이라는 분이 클로로포름을 마취제로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발견했을 때 당시 의학계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쳤다는 이야기도 유명한 사실입니다. 편견이 당시 의학자들의 눈을 가렸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사실이나 진리에 당면할 때 내가 그것을 무슨 이유로 반대하는 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어떤 진리에 입각해서 반대하는가, 아니면 편견 때문에 반대하는가 말입니다.
셋째로 시기나 미움 같은 감정이 언제나 우리의 마음 눈을 가립니다. 그래서 요한 1서 2장 11절에는“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시기나 미움에 사로잡히면 사리를 바로 보지 못합니다. 바른 판단을 못합니다. <새해에 밝은 눈>에서
174.학대받는 자들
우리는 6·25를 계기로 해서 얼마나 많은 기독교 신도들이 학대를 받고 학살당했던가를 지금도 뼈저리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학대는 38선 이북 또는 모든 철의 장막 배후에 있는 국가에서는 지금도 계속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범브란트 목사가 《걷혔을 때에 돌아보았는가?》라는 제목의 책자를 출판하였습니다. 영어 제목은 《그가 만일 그리스도라면 당신의 담요를 드리겠는가?》입니다.
이 목사는 이미 들으신 대로 일찍이 루마니아에서 14년 동안 공산당 치하에서 옥고를 치르고 나왔습니다. 또 작년에 우리 한국을 방문했고 바로 이 영락교회 강단에서도 그의 체험을 간증한 일이 있습니다. 이 책 가운데서 그가 최근에 수집한 철의 장막 배후에서 갇히고 학대받은 많은 소식들이 실려 있습니다. 그 몇 가지만 여러분께 소개하고 싶습니다.
1969년 8월 19일부 소련에서 발행되는 프라우다라고 하는 신문지에 다음과 같은 지하교회에 대한 기사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두 침실밖에 없는 작은 집에서 비밀히 모여 모두 울면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그러나 원수도 사랑하여야 한다고 설교하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소련의 한 여자는 여름 성경학교를 몰래 열고 어린이 12명을 가르친 죄로 멀리 시베리아 수용소에 추방되어 갔다”또“시베리아 북쪽 깊숙한 곳에서 기독교인들만 모여 사는 한 촌락이 발견되었다”는 사실도 있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자유로이 신앙생활을 하기 위하여 보통은 너무 추워서 사람이 살지 못하는 곳에 따로 모여 살았던 모양인데 이것마저 발각된 모양입니다.
175.‘공상당의 조상은 원숭이’
소련의 게치크라고 하는 분은 비밀 기도회에 참여한 죄로 두 달 봉급의 벌금을 물었다고 합니다. 또 소련에서는 어린이들에게 종교 교육을 하였다고 수백 기독교가정에서 어린이들을 빼앗아다가 멀리 딴 곳에 수용해서 부모와 자식이 격리되어 전혀 소식을 모른 체 산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어린이 수용소에서 새어나온 소식 중에는 이런 것도 있습니다. 선생이 어린이들을 가르치면서 “우주 비행사가 공중에 올라가 여러 곳을 다녀 보았지만 하나님을 못보고 내려왔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없다”고 말했답니다. 그랬더니 한 어린이가“그 비행사들이 마음이 깨끗하지 못했나 보죠? 마음만 깨끗하면 하나님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데요”이렇게 대답을 했다는 것입니다.“모든 사람의 조상이 다 원숭이 인지는 알 수 없지만 확실히 공산당의 조상은 원숭이라는 말이 맞을 거예요. 그렇지 않고서야 우리에게 이렇게도 포악하고 잔인하게 굴 수 있겠어요?
176.소련의 숨은 교회
공산 국가 특히 소련 권(圈)에 속해 있는 국가에는 두 가지 종류의 교회가 있습니다. 하나는 공인된 교회입니다. 말하자면 공공연히 나타난 교회입니다. 소련의 공식으로 나타나 있는 헬라 정교회의 교인 수는 기독교협의회에 보고된 바에 의하면 약 5천만 명이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공인되지 않은 비밀교회, 소위 지하교회들이 있는데 이 지하교회에서 교인 수가 약 4천 5백만 명으로 추산된다고 합니다. 한편 공인된 교회는 물론 공식으로 모일 수는 있지만 역시 여러 면으로 정부의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177.루마니아 교회의 세례
동구(東歐) 위성(衛星) 국가 중 가장 자유화되어 있는 나라가 루마니아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루마니아에 있는 교회가 어떤 간섭을 받는지 아십니까? 여기서는 목사가 안수를 받을 때에도 먼저 정부의 허락이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설교도 일정한 범위 안에서만 할 수 있다고 합니다. 또 세례도 일일이 허가가 있어야 받을 수 있는데 가령 한 20 명 세례를 주겠다고 명단을 제출하면 보통 그 중 4분의 1정도만 허락이 내린다고 합니다. 결국 20명 중 5명만 세례를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목사는 비밀히 세례를 주는 수가 있는데 만약 이 일이 발각되면 목사는 물론 세례 받는 사람도 징역 산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지하교인들 중에는 심지어 자신이 스스로의 머리에 물을 뿌리며 “내가 내게 세례를 주노라”하고 혼자 세례를 베푸는 이들이 있다고 합니다.
178.소련 지하교인의 안수
소련의 지하교회의 어떤 성직자들은 정부의 부당한 요구를 승낙할 수가 없어서 다시 말하면 공인된 교회에서 정식으로 안수를 받을 때에 정부로부터 부과되는 여러 요구를 승낙할 수 없어서 이미 순교한 주교의 무덤에 가서 그 무덤의 비석 위에 손을 얹고 신조에 대한 고백을 한 후에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한 가지 더 한다고 합니다.“나는 매질과 투옥과 고문과 비난과 십자가와 불행과 환난과 세계의 모든 고난을 달게 받겠습니다. 이 모든 것을 우리 구주와 거룩한 사도. 교회가 감수할 것들입니다. 따라서 나도 비록 무가치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나 이 모든 고난을 죽는 날까지 감수할 것을 서약합니다”이런 고백 후에 스스로 순교한 주교의 무덤 앞에서 안수를 받는 것입니다.
179.중공 팡 첸 목사의 일화
현재 중공에는 공인된 교회는 하나도 없는 것 같습니다. 소위 문화혁명 후에는 난타나게 모이는 교회의 형태는 볼 수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 중공 내에의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는 기독교인 수가 약 4만 명으로 추산된다고 합니다. 그중 팡 첸 이라고 하는 목사의 일화가 어떻게 새어 나왔습니다. 이 목사가 오래 수감 중에 있다가 한 번은 심문을 받기 위해 심문(審問)관(官)실에 나갔다고 합니다. 나가보니까 방구석에 누더기가 있는데 자세히 보니 그것은 누더기가 아니고 사람이었습니다. 나이 많은 여인인데 자세히 보니 수년 전 함께 체포당했던 자신의 어머니였습니다. 옥고를 겪다 못해 백발이 되고 모습도 변해서 겨우 알아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모양의 어머니를 옆에 놓고 심문을 하던 자가 나중에“열 가지 계명을 아는 데로 좀 가르쳐 주시요” 라고 청하는 것입니다. 광 첸 목사는 이런 자에게 계명 가르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하고 생각하다가 공산당에게 계명을 가르치는 것도 좋은 일이라고 마음을 고쳐먹고 열 가지 계명을 하나씩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차례로 내려가다가 다섯째 계명에 이르렀습니다.“부모를 공경하라”심문관은 여기서 목사의 말을 멈추게 하더니“당신 이 다섯째 계명을 잘 지켜야 한다고 생각합니까?”“아 물론 잘 지켜야지요”목사가 대답하자 심문관은 옆에 쓰러져 있는 목사의 노모를 내려다보더니 말했습니다.“당신이 지금 내게 당신의 동지들에게 대한 비밀을 일려주기만 하면 당신의 어머니는 즉시 석방될 것이오. 어떻게 하겠소?”목사는 한참 생각하다가 누워있는 어머니에게 “어머니 어떻게 할까요?”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누운 채였지만 정색을 하고 대답했습니다.“내가 네가 어렸을 때부터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리스도의 거룩한 교회를 사랑하라고 가르쳐 온 것을 잘 알지 않느냐? 내가 당하는 고생은 조금도 염려 말고 주님과 그의 자녀, 너희 형제들에게 끝까지 신의를 지켜라. 만약 네가 너의 신앙동지를 배반한다고 하면 너는 내 아들이 아니다”그 후에 이 아들과 어머니는 다시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 어머니는 옥에서 세상을 떠났음이 분명합니다.
180.철의 장막 배후의 지하교회
마지막으로 북한에서 1969년에 있었던 일이 역시 책에 실려 있습니다. 북한에는 공인된 교회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지하교회가 있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또 북한 노동자에게는 휴일이라고 하는 것이 도무지 없다고 합니다. 그저 정월 초하루부터 섣달 그믐날까지 일을 해야 하는데 심지어 그네들의 혁명기념일 따위의 날에도 기념식만 올리고 생산 증가라는 명목 아래 일을 한다고 합니다. 다만 병들게 되면 그 때는 집에서 치료할 수가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약 4만 명이 일하는 어떤 탄광에서 매 일요일이면 약 천 2백 명의 환자가 발생되었다고 합니다. 평일에도 물론 환자가 있지마는 일요일마다 환자 수가 더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산당들은 조사에 나셨습니다. 그 결과 물론 환자들도 있었지만 놀랍게도 몇 사람씩 모여서 어느 집에서 혹은 어느 산골짜기에서 예배하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이들은 찬송을 부를 수가 없어서 조용히 읽기만 하였고 또 성경을 읽고 몇 마디 한 후 기도도 조용히 한 다음 해어질 때에도 일제히 흩어지는 것이 아니라 흔적이 나타나지 않도록 하나씩 가만히 헤어지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공산당들이 이것을 찾아내어 이 때문에 45명이 처형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38선 이북에, 철의 장막 배후에 지하교회가 있습니다. 이들은 그런 가운데서도 신앙을 지킵니다. 지금 이 시간도 북한과 철의 장막 배후에는 갇힌 신도들도 많고 학대를 받는 이들도 많은데 이들은 다 그리스도의 지체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께서 이들과 같이 고난을 받으신다는 사실입니다. <학대받는 자를 생각하라>에서
181.장수의 비결
노래하는 마음은 우선 건강에 유익합니다. 잠언 17장 22절에는“마음의 즐거움은 양약(良藥)이 되고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실 노래하는 마음은 건강에 좋은 약입니다. 노래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면 소화도 잘 되고 혈액 순환도 잘 되고 신경의 긴장을 풀어줍니다. 현대 의학계에서 주장하는 말을 들으면 질병의 6할 내지 7할이 심리적 원인이라고 합니다. 노래하는 마음을 가진 이에게는 우선 병이 그만큼 줄어드는 것입니다.
바로 지난주간 타임 잡지를 보면 미국 존 홉킨즈 대학의 교수 죠지 W. 홉스탁 박사가 그의 대학이 있는 매릴랜드 주 워싱턴 군에 사는 주민들을 중심으로 교회에 매 주일 출석하는 신자들과 그렇지 않는 이들의 건강을 비교해서 연구한 결과 발표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발견한 것은 잘 믿는 이들에게는 심장병, 간 경화증, 결핵. 목의 암. 만성 기관지염, 자동차 사고, 자살 등이 매우 적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잘 믿는 이들이 오래 산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매 주일 교회에 꼭 출석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 중에는 동맥 경화증이나 심장병으로 죽는 이가 매 10만 명에 5백 명 가량인데 그렇지 않은 이들 가운데는 매 10만 명에 9백 명이 넘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잘 믿는 이들 중에는 기관지염이 적은 이유는 늘 예배당에 가서 찬송을 부르는 까닭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하여간 노래하는 기쁜 마음이 건강에 유익한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노래하는 마음은 일이 잘 되게 합니다.<노래하는 마음>에서
182.밀 알이 된 어머니
지난주간에 제가 부산에 있을 때 오후에 집회를 마치고 여관에 돌아왔는데 어떤 중년 부인 한 분이 찾아와서 꼭 만나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래서 들어오라고 하였더니 그 분은 작은 선물을 가지고 와서 제게 주면서 자기의 사정을 말하였습니다.
그분은 6·25때 남편을 잃고 일곱 살과 다섯 살 되는 두 아이를 대리고 갈 곳이 없어 헤 매이던 중에 마침 부산에 다비다 모자원이 생기고 그 곳에 들어와서 10여 년을 있으면서 두 아들을 길렀는데 그 동안 많은 고생을 하였지마는 하나님의 은혜로 지금은 맏아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하였고, 지금 둘째 아들도 대학을 거이 졸업하게 되어 이제는 아무 염려가 없노라고 하면서 이렇게 모자원을 부산에 세워 주셔서 너무 감사해 잠깐 만나 뵈려 왔노라 는 말을 하였습니다.
저는 이 어머니의 말을 들을 때에 족히 과거 20년간 그 분이 당할 수밖에 없었던 고독과 빈궁과 눈물과 희생의 생활을 회심할 수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이 어머니는 두 아들을 위해서 청춘과, 향락과 사치와 허영 등 모든 것을 희생한 땅에 떨어진 한 밀 알이었습니다.
땅에 떨어지는 밀 알 하나의 정신을 가진 어머니가 잇는 가정은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이런 어머니가 있는 가정은 귀한 자녀를 옳게 길러서 교회와 사회를 위하여 크게 공헌을 하는 것입니다.
가정에도 땅에 떨어지는 밀 한 알의 정신을 가진 어머니, 이러한 정신을 가진 아버지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야 그 가정이 많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183.신교 자유의 촛불
일찍이 영국에서 신교 자유에 대한 큰 핍박이 있을 때에 그 때의 영국의 감독으로 있던 래틴머라고 하는 분이 화형 장에 끌려나가면서 같이 순교하려 나가는 교우에게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형제들이여, 두려워하지 마세요. 우리는 오늘의 영국에서 끌 수 없는 촛불에 불을 붙인 것입니다”
자기는 화형 장에서 불로 살아질 것을 생각하면서 이것은 영원히 끌 수 없는 자유의 불길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 촛불은 자유의 촛불입니다. 이러한 희생, 이러한 순교, 곧 땅에 떨어지는 밀 하나를 통하여 신교 자유의 촛불을 지금까지 빛나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없는 곳에 면류관도 없습니다. 희생이 없는 곳에 열매도 없습니다. 오직 땅에 떨어지는 희생 위에만 진리, 자유, 평화, 번영 그리고 앞으로 올 국토 통일의 열매도 맺힐 것입니다. <땅에 떨어지는 밀 한 알 >에서
184.‘애통의 나무’와 기도 바위
성지 예루살렘에 가보면 감람산 남녘에 겟세마네 동산을 볼 수 있습니다. 그 곳에는 지금도 아주 오랜 감람나무 여덟 그루가 있고 그중 한 나무는‘애통의 나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잇습니다. 아마 그 나무 아래에서 주님께서 기도를 드렸다는 전설이 있는 까닭일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옆에 작은 예배당 하나가 있는데 그 안에 들어가면 큰 바위가 있습니다. 이 바위가 곧 그리스도께서 기도하신 바위라는 전설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날 저녁에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같이 저녁을 잡수시고 모든 교훈과 격려와 위로의 말씀을 주시고 성찬 예식을 거행하신 후에 요한 복음 17장에 나타나는 대제사장으로서의 기도를 같이 드리고 찬미를 부르고 나아가 기드론 시내를 건너 감람산으로 가신 갓입니다. 곧 겟세마네 동산에 오신 것입니다. 때는 깊은 밤입니다. 십자가를 지셔야 하는 주님은 하나님과 깊은 대화를 하기 위해서 홀로 이곳에 오신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의 지상 생활 중에서 가장 엄숙하며 비장하고 장엄한 광경을 봅니다. 곧 그의 기도의 모습을 엿볼 수 잇는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의 그리스도>에서
185.대신 죽은 친구
먼저 애통을 통하여 인생과 우주의 깊은 뜻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잘 아는《천로역전》을 기록한 영국 천교도 지도자들 가운데 유명한 존 번연이라고 하는 이가 젊었을 때에 군대 생활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가 하루 저녁은 어떤 중요한 곳을 지킬 책임을 맡아 보초를 서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잠깐 볼일이 있어서 존 번연은 자기 친구에게 잠깐 동안만 그곳을 대신 지켜달라고 부탁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다녀와서 보니 자기 대신 그 자리에 보초를 섰던 자기의 가까운 친구는 원수에게 저격을 당해서 이미 세상을 떠난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문자 그대로 그 친구는 자기의 생명을 대신해서 죽었습니다. 크게 통곡을 하였습니다. 이 번연이라고 하는 청년은 그 큰 애통을 통해서 인생의 깊은 뜻을 더욱 탐구하게 되었고 따라서 깊은 신앙을 소유하게 되었다고 하는 얘기가 있습니다.
우리 중에도 혹은 사랑하는 남편을, 혹은 사랑하는 자녀들을 먼저 보내는 큰 애통 가운데서 인생의 깊은 뜻을 깨닫고 마음으로 하늘의 위로를 받은 이가 많이 있을 줄 압니다.
애통(哀痛)이 무슨 복이 될 수 있느냐고 반문하실 분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이른바 역리적 진리 가운데 하나입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애통 자체를 우리가 복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 애통도 복이 되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눈물에도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살아 있지만 일본의 유명한 가가와 도요히꼬(賀川豊彦) 목사가 지금부터 삼십 년 전 우리가 학생 시절 때 유명한 소설을 하나 썼습니다. 그 소설의 이름은《사선을 넘어서》라는 것입니다. 사실 애통을 통해서 사선을 넘게 될 때에 인간은 인간의 깊은 뜻을 찾게 되고 인간이란 단순히 육체가 아니요 그 속에 불멸의 영혼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낮에는 밝아서 모든 것은 밝히 볼 수 있는 것 같지만 사실 멀리는 보지 못합니다. 오히려 해가 지고 캄캄한 밤이 될 때에 하늘 멀리 우주 끝에 있는 별을 바라 볼 수 잇는 것입니다.
186.윌슨 천문대 렌즈와 눈물의 렌즈
제가 들으니 미국의 윌슨 천문대에는 세계에서 제일 큰 렌즈인 이 백 인치나 되는 망원경이 있다고 합니다. 이 큰 렌즈를 통해서 전에 자세히 보지 못하던 여러 별들을 더 자세히 볼 수가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 사실 가장 신령한 나라, 가장 신비한 나라인 하늘 나라는 세상 사람들이 만든 렌즈를 통해서 볼 수 없고 이상하게도 눈물의 렌즈를 통하여만 이 하늘나라의 신비를 더 자세히 깨닫고 알게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애통을 통해서 인생과 우주의 깊은 진리를 우리가 찾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보통 일반적인 애통도 그러하거니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특별히 자기의 죄를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애통은 죄 사함을 가져옵니다. 마음이 가난하여 자기의 허물과 죄를 깨닫고 그 죄를 애통히 회계하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애통하는 자와 그 복>에서
187.내강한 사람
온유한 심령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하여 불평하지 아니하고 반향하지 아니하고 낙심하지 아니하고 오직 참고 견디며 범사에 순복(順服)합니다.
여러분, 기억하시는 바와 같이 예수 님께서 한번은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에 사마리아의 어떤 동리를 지나 기시게 되었습니다. 그 동리에 들어가니 그들은 유대 사람인 줄 알고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보고 요한 과 야고보 두 형제가 매우 격노해서 이런 사람들을 하늘로부터 불을 내려서 전멸시키자고 하는 진언을 주님께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 님께서는 두 제자를 책망하시고 아무 말도 없이 다른 동리로 가셨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한 성품과 온유하신 생활을 문자 그대로 보여 준 사실입니다.
온유한 자들은 어떠한 이들인가, 먼저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께 겸손합니다. 얼른 생각할 때에 하나님께 대하여 누가 겸손하지 아니하리요 마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겸손하지 못한 사람이 많고, 하나님께 대하여 겸손하지 않게 행동하는 때도 많이 있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하나님의 경륜에 대하여 원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어떤 섭리 가운데서 어떠한 불행이 나에게 미치고, 어떠한 재난이 나에게 미치고, 어떠한 실패가 나에게 오고, 어떠한 슬픔이 내 가슴에 스며온다고 할지라도 온유한 사람은 불평하지 않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러한 일을 허락하시는가, 반항하지 아니합니다. 자포자기하지 아니합니다. 낙심하지 아니합니다. 어떠한 환경을 당하든지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것이면 조용히 참고 견디는 것이 온유한 사람들의 하나님께 대한 태도입니다.
온유한 사람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이면 또한 순종합니다. 전에 요셉이 그렇게 형들에게 팔려서 애굽에 가서 고생하며 말할 수 없는 억울한 환경 가운데 있었지마는 요셉은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원망을 품지 않았습니다. 그저 그곳에서 순종하고 자기의 일을 했을 뿐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언제든지 하나님의 뜻을 순종합니다.
그리고 온유한 사람은 역시 사람에 대해서도 온유합니다. 사람에게 대하여는 이것이 어떻게 나타나느냐, 우선 글자의 뜻대로 부드러운 것으로 나타나는 줄 압니다. 성경 말씀에도 유순한 대답이 분노를 쉬게 한다고 그랬습니다. 우리 동양에 옛날부터 내려오는 속담 가운데에“툭해서 다르고 탁해서 다르다”는 말이 있습니다. 부드러운 것으로 나타납니다. 같은 눈으로 보지만 다정한 눈길로 볼 수도 있고 혹은 눈에서 칼날이 나오게 볼 수도 있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사람에게 대하여 부드러운 것으로 나타납니다.
188.바람과 해의 대결
여기 아이들이 읽기 좋아하는 옛날 우화 가운데서 이런 이야기를 들으신 줄 압니다. 강한 바람과 햇빛이 한 번은 내기를 했다고 합니다. 네가 더 힘이 잇느냐, 내가 더 힘이 잇느냐, 그래서 내기를 했는데 어떤 점잖은 사람이 외투를 입고 모자를 쓰고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람과 햇빛은 누가 저 사람의 모자와 외투를 벗길 수 있는가. 누가 더 힘이 있는가, 내기를 해 보자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바람이“내가 더 힘이 있지. 내가 먼저 벗길 테니 보라”고 하고는 바람을 갑자기 일으켜서 바람을 불게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가다가 “어 웬 바람이 부나”하고는 모자를 꽉 내려씁니다. 그래도 그래도 바람이 자꾸 부니까 하나만 채웠던 외투의 단추 세 개를 다 채웁니다. 그래도 바람이 자꾸 부니까 “바람도 참 심하다”고 하면서 두 손으로 모자를 꽉 부여잡고 걸어갑니다. 아무리 바람이 불어도 외투를 벗지 않습니다. 결국 강한 바람은 사람의 모자와 외투를 못 벗겼습니다.
햇빛은“그게 무슨 힘이냐? 내가 벗길 테니 보라”바람이 잔잔히 고요해 집니다. 햇빛이 따뜻하게 내려 비칩니다. 이 사람은 길을 가다가 “아이고, 날이 대단히 덥군,”그래도 계속 햇빛이 비치니까 “이거야 더워서 견딜 수 있나”하고 모자를 훌떡 벗었습니다. 그래도 햇빛이 비추므로 “오늘은 외투가 쓸 때 없구먼”하고는 외투를 벗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강한 바람에게 따뜻한 햇빛이 이겼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189.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한다
생물계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생물계에는 강한 것만이 사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약육강식(弱肉强食)이니 적자생존(適者生存) 이니 자연도태(自然淘汰)니 생물계에는 강한 것이라야 산다는 말들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깊이 연구해 보면 우리 사람이 지구에 나기 전에 큰 짐승들이 지구 위에서 많이 살았습니다. 파충류에 속하는 맘모스와 공용 같은 큰 짐승들이 지구 위에서 많이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 많던 무섭고 강한 그런 짐승들이 지금은 거이 다 없어졌습니다. 멸종되었습니다. 이곳 저곳에서 혹 뼈만 남은 것을 찾을 수 잇습니다. 그래서 뉴욕박물관에 가보면 옛 날의 큰공용의 뼈를 지금도 볼 수 잇습니다. 그러나 공용은 볼 수 없습니다. 강한 짐승들은 다 없어졌습니다. 오히려 약하게 보이던 짐승들이 이 땅위에 지금도 살고 잇습니다. 생물학적으로 말하면 이리와 개는 같은 종류에 속합니다. 사실 개와 이리를 보면 같이 생겼습니다. 본래 똑 같은 종류였습니다. 그런데 이리 가운데서 어떠한 종류가 성질이 변한 것입니다. 온순해 졌습니다. 그래서 그놈은 개가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에는 포악한 이리는 이 세상에 그렇게 많지 안습니다. 혹 동물원에 가야 더러 볼 수 잇습니다. 그러나 성질이 변해서 온유하게 된 개는 세계 어느 곳에 가든지 다 찾아 볼 수 있고 사람들에게 총애를 받고 있습니다.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한다고 하는 말이 얼른 듣기에는 마음 가운데 들어오지 않지만 깊이 생각하면 그 원리를 우리는 어느 방면에서든지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이리와 같은 히틀러, 이리와 같은 무솔리니, 이리와 같은 스탈린이 온 세계를 끝까지 점령하는 것이 아닙니다. 온유한 자가 결국은 세계를 얻는 것입니다
190.쳥교도의 축복
지금 이 세계에서 재일 아름다운 땅이 어디냐고 물어 본다면 아마 북미 대륙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보통 그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아십니까? 이상한 것은 그 북미 대륙을 누가 차지했습니까? 지금으로부터 근 삼백여 년 전, 저 영국에서 자기네의 신앙 때문에 핍박을 받아 그 나라에서 살 수 없게 되어 화란으로 갔으나, 거기서도 한 일년 동안 살아볼래 야 살 수 없어서 다시 화란을 떠나 작은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 1620년에 플리머드라는 바닷가 바위 위에 내린 청교도 120명, 그들의 자손이 지금 제일 아름다운 대륙을 기업으로 받아 살고 잇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사실 온유한 사람은 물질이 적거나 많거나, 이 세상에서도 참된 축복을 받습니다. 의인의 적은 물질이 악인의 많은 물질보다 복이 됩니다. 의인의 오막살이가 악인의 대궐 보다 더 복이 됩니다. 의인의 나물밥이 악인의 송아지를 잡은 진미보다 더 복이 되는 것입니다. <온유한 자와 그 복>에서
191.원인과 결과
플라톤은 일찍이 말하기를 무신론은“영적 질병”이라고 하였습니다. 무신론자는 사실 영적 질환 자입니다. 병들게 되면 식욕이 없어집니다. 그리고 여러분, 그는 하나님의 존재를 그 만드신 만물에서 깨달아 알 수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도 물론 길게 생각할 수도 있고 깊이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저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게 평범한 것 두 가지만을 지적하려고 합니다.
첫째는 소위 우주론적 논법이란 것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인과의 법칙에 의지한 논증입니다. 누구나 다 인과의 법칙을 믿습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는 것을 부인할 이가 어디 있습니까. 자연과학도 이 법칙 위에서 성립이 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모든 결과는 원인이 있습니다. 우주는 한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제일 원인이 있습니다. 이 제일 원인은 하나님일 수박에 없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일 수박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셨음으로 우주가 있게 되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도“처음 움직이신 이가 반드시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엄숙한 선언으로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이 진리를 부인하려고 하면 우주가 영원하다고 주장할 수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과학적으로도 사실이 아닙니다. 우주적으로 지구나 천체가 영원히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지질학적으로 역사적으로 생물도 영원하지 않았습니다. 이 지구상에는 생물이 없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인간에게도 영원히 있지 않았습니다.
유물론자들은 그저 경제문제만 해결하면 인간에게는 최대의 행복이 있으리라고 선전합니다. 그러나 절대로 그렇지는 않습니다. 왜 풀이 위를 향하여 자랍니까? 태양이 있는 까닭입니다. 역사를 보세요. <제 1계명>에서
192.내세와 영생 추구
옛날 애굽 사람은 사람이 죽으면 배를 타고 저 나라로 간다고 해서 유명한 왕릉 같은 데는 묘실(墓室) 옆에 큰방을 만들어 놓고 배를 만들어 넣은 것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옛날 헬라 사람들은 사람을 묻기 전에 시체의 입에다 돈을 한 입 넣어주는 풍속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역시 사람이 죽은 다음에 강을 건너서 딴 세계에 간다는 사상 아래 뱃사공의 뱃삯을 주라고 하는 의미의 풍습이었습니다.
헬라의 유명한 철학자 플라톤이나 로마의 유명한 철학자 시세로 같은 이는 철학적 견지에서 영혼은 불멸하며 반드시 살아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지금에 있어서도 극단의 유물론자 외에는 대체로 내세와 영생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부활과 생명>에서
193.안 중근 의사
전에 안중근 의사가(安重根義士)가 두만강을 건너와 당시 일본 군경과 악전고투를 하다가 겨우 동지 몇 사람과 같이 다시 두만강을 건너 러시아 땅으로 갔습니다. 당시 해삼위에 있던 우리 동포들이 크게 환영했습니다. 그러나 한 번은 그가 그 곳을 떠나 흑룡강 상류를 여행할 때에 어떤 곳에서 20명의 한국인에게 붙잡혀 도리어 매를 맞고 거이 죽을 뻔했습니다. 그들은 소위 당시 일진회의 잔당으로 친일 분자들이었습니다. 선을 행하려고 할 때는 이런 경우를 만나는 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이는 낙심합니다. 그러나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면 전공(前功)이 가석(可惜)합니다. 무슨 일이 있던지 낙심하지 아니해야 합니다. 꾸준히 계속하여야 합니다.
194.정의 필승’
1919년 3월 26일, 여순 감옥에서 순국한 의사 안중근 선생이 그 사형을 받기 전에‘정의 필승(正義必勝)’곧“정의는 반드시 이긴다”는 글자를 크게 썼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대한민국만세(大韓民國萬歲)’라는 글자를 크게 쓰고 그의 손바닥으로 인을 쳤습니다. 당시 국제정세와 국내정세를 보면 한국은 이미 다 망해 가던 때입니다. 일본이 한국을 점령하였고 국제정세를 보아도 한국의 독립을 도우려는 나라가 없습니다. 그 자신도 일본 군국주의자들에게 붙잡혀 죽으면서 어떻게 대한 독립이 성취될 줄 믿겠습니까? 어떻게‘정의 필승'을 믿겠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그의 위대한 신앙에서 온 것입니다. 곧 하나님의 안목으로 인간의 역사를 본 것입니다. 지금 보면 그는 정말 옳게 보았습니다. 한국의 독립은 오고야 말았습니다. 이런 신앙에서 그는 조금도 낙심하지 아니하고 끝까지 선을 행하다가 장렬한 순국의 죽음을 맞은 것입니다.
195.결실 있는 선행
얼마 전 경상남도 지방 한 교회에서 어떤 분이 장로 장립을 받는다는 편지를 했습니다. 그 내용인즉 지금부터 20년 전 제가 지리산 전도를 갔을 때에 당시 남원 경찰서의 서장이었다고 합니다. 그때부터 믿기 시작하였고 김치복 장로께서 자기에게 성경 한 권을 주었다고 합니다. 피로하여도 쓰러지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고 또 반드시 거두는 것입니다.
전도서 11장 1절에,
“너는 네 식물을 물위에 던지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동양 성현의 말씀에
“음덕이 있으면 양보가 분명히 있느니라”또는 적선지가에 필유여경”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가장 귀한 것은 인내심입니다. 영국에 정치가들이 모여 앉아서 영국 총리대신으로서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토론할 때에 혹은 웅변, 지식, 또는 근면, 용기 등을 말하였습니다 그때에 유명한 정치가 윌리암 핏트(William Pitt) 는 말하기를 그것은‘인내(忍耐)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맙시다.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에서
196.가장 엄숙한 사실에 대한 연극
어떤 유명한 배우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사실이 아닌 것들을 사실처럼 연극을 해서 사람을 울리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는데 너희 그리스도인들은 가장 엄숙한 사실들을 가지고 무력하게 전도를 하니 웬일인가? 내가 만일 당신들의 신앙을 가졌다고 하면 하루라도 그냥 앉아 있을 수는 없겠습니다”어떤 분이 수표를 가지고 돈을 찾기 위하여 은행에 갔다가 가짜 수표로 확인되어 돈을 못 찾을뿐더러 조사만 받게 되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가진 신앙이 중심이 진실한 신앙인가, 혹은 가짜 신앙인가 미리 살펴보아야 이 다음에 천국에 들어갈 때에 낭패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중심의 진실한 신앙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은 중심의 진실을 보십니다. <중심의 진실>에서
197.고쳐야 할 전통
로마서 13장 13절, 14절에“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성경은 권면합니다.
이조시대에 소위 궁중에는 수다한 궁녀들이 있었는데 임금의 첩은 소위 후궁이니 무엇이니 하여 여덟 가지 종류가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한국의 궁중은 음란하고 부패했습니다. 또한 궁중뿐만 아닙니다. 동방 예의지국이라는 한국의 유교사회는 출세했다는 사람은 첩 없는 사람이 없으리만큼 음탕하였습니다. 우리는 부끄러운 전통이 있는 사회에서 또 퇴패(頹敗)한 외래 풍조가 물결처럼 밀러오는 이런 시대에서 자신의 모든 욕망을 바로 다스려 깨끗한 생활로 빛과 소금의 되어야 합니다.
198.친구를 죽인 알렉산더의 분노
성경은 안목의 정욕을 항상 경계했습니다. 사치, 유행, 퇴패적인 사회 속에서 의복, 기타 모든 생활에 있어서 나 자신을 바로 다스릴 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의 감정도 다스릴 줄 알아야합니다. 잠언 14장 17절 “노하기를 속히 하는 자는 어리석은 일을 행하고”시편 37편 8절에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 불평하지 말라 행악(行惡)에 치우칠 뿐이라”헬라 알렉산더 대제가 일시 분노를 참지 못하여 자기 일생의 친구며 가장 유능한 대장인 클리투스( Clitus)를 죽인 후에 얼마나 탄식을 하였는가는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인간의 감정, 곧 희노애락(喜怒哀樂) 모든 방면에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합니다. 특별히 분노와 슬픔도 참을 줄 알아야합니다. <나의 자신을 시험하라>에서
199.번연의 결단
<천로역정》을 쓴 번연에 대하여 이러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가 젊을 때에 길을 가다가 이러한 말을 귀로 들었다고 합니다.“네가 죄를 버리고 천국에 가겠느냐”그는 이 음성을 들은 후에 두 가지 가운데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죄를 버리고 천국으로 가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한번은 이 결심이 필요합니다. 이 결단이 있는 이에게는 심판이 두려울 것 없습니다.
200.평양 여자 고등성경학교
기억하십시오! 우리 신자는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넉넉히 이깁니다. 제가 오래 전 이북에 있을 때에 평양에 있는 여자 고등성경학교에 가서 설교를 한일이 있습니다. 예배를 본 후에 그 학생들의 형편을 물어보니 대부분이 과부가 아니면 생과부들이었습니다. 곧 남편에게 소박 맞은 이들입니다 그들이 주를 믿는 가운데서 고독과 비애의 모든 환난을 이길뿐더러 넉넉히 이기어 그런 역경 중에서 공부를 하고 교회에 헌신하여 복음을 전파하는 전도사들이 되었습니다. 사실 한국교회는 이러한 여전도사들의 공헌이 실로 위대합니다. 이들은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그들을“사랑하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넉넉히 이기었습니다. 이기고도 남음이 있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이기고도 남음이 있는 생활>에서
201.떨어지는 낙엽이 가장 아름답다
날리는 낙엽은 우리 인간들에게 귀한 생의 교훈을 줍니다. 최후에 우리에게 귀한 교훈을 남깁니다. 낙엽은 떨어질 때가 가장 아름답습니다. 황금빛의 단풍으로 변합니다. 가장 빛나는 영광을 조물주 하나님께 돌립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에게 얼마나 보배로운 산 교훈입니까? 그러므로 동양의 지혜를 다 모아 놓았다고 하는《채근담》이란 책에“사람을 볼 때는 그 후반생을 보라”고 하였습니다. 인생이란 그 최후를 바로 마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옛 글에인지장사 기언야선’(人之將死 其言也善) 이라고 했습니다. 죽음에 가까이 이룰수록 그 마음과 말이 착해져야합니다. 사도 바울은 순교하기 얼마 전에 말하길“나는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가졌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다”고 선언했습니다.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생의 마침입니까? 스테반은 순교 직전에 그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로 변하였고 그의 눈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서 계신 그리스도를 보았으며 자기를 돌로 치는 이들의 죄를 사하여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장엄하고 아름다운 죽음입니까? 떨어지는 단풍의 미와 영광 그대로입니다. <날리는 낙엽>에서
202.담대한 용기
제가 일찍이 들으니 고한규(高漢奎)장로님께서는 옛날 일제시대 때에 조선 총독을 면회하려 가서 먼저 기도를 엄숙히 하니 그 총독이 감사하다고 말하였다고 합니다, 작을 일 같으나 이것도 고 장로의 용기를 나타내는 얘기입니다. 개인 전도에도 언제나 용기가 필요합니다. 대중전도에도 역시 용기가 필요합니다.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에게 붙잡혀 매를 맞다가 로마 천부장에게 구원을 받아 영문으로 끌려가는 중 층대(層臺)에 이르렀을 때 천부장에게 허락을 받아 그를 핍박하는 무리를 향하여 손을 흔들어 조용하게 한 후에 그들에게 일장 연설을 하며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장면이 사도행전에 나옵니다. 전도에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마틴 루터가 웜스 국회에서 종교개혁의 교리를 취소하라고 위험을 받을 때에 황제 앞에서 “나는 여기 섭니다. 나는 그 교리를 다르게 할 수 없습니다”라고 외친 것은 너무나 유명한 역사의 일화입니다. 마틴 루터도 매우 용감하였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진리 수호에도 용기가 필요합니다. <새해에 새 용기>에서
203. 회개의 기회를 놓치지 말라
회개에도 기회가 있습니다. 기회 주실 때에 회개합니다.
학개 박사의 어떤 친구인 미국의 큰 출판회사의 사장인 샘 모어라고 하는 이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기는 본래 수리아에서 나고 베이루트라고 하는 곳에서 자라났는데 어렸을 때에 미술학교를 좀 다녀 그 곳에서 기독교 복음에 대하여 들어서, 흔히 많은 학생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믿기 는 믿겠으나 그다지 급할 것이야 있겠는가?
젊어서 마음대로 놀며 세상 재미도 보고 차츰 회개하겠다고 생각하고 그런 친구들과 같이 넓은 길을 걸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가 늘 같이 다니며 노는 한 친구가 있습니다. 그는 어떤 여자와 약혼까지 하였는데 또 다른 여자와 가까이 한다고 그 두 여인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다고 합니다. 한 번은 그가 보는 자리에서 그들이 싸움을 하다가 그 여자가 돌연 품속에서 권총을 꺼내어 그 남자를 쐈다고 합니다. 그 남자는 그만 그 자리에서 쓰러졌습니다
그 후부터 그는 그 일을 항상 잊을 수 없고 여러 가지로 인생문제에 대한 깊은 사색을 하게되었는데 잊을 수 없는 한가지 생각은 그 남자도 종종 회개한다고 말을 했는데 그렇게 갑자기 죽고 보니 회개할 기회를 놓쳤다는 사실입니다. 그 후 그는 회개의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곧 진실한 크리스천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후 그는 미국에 건너와서 적수공권으로 고학하며 대학을 마치고 지금은 큰 회사의 사장으로서, 유력한 평신도 지도자로서 교회에 봉사하고 있습니다.
내일로 미루지 맙시다. 회개할 때는 지금입니다.
여러분 회개의 기회를 놓치지 맙시다. <지혜 있는 자의 생활>에서
204.북한 실정보고
얼마 전 뉴욕타임스 부 편집국장 솔즈베리 기자가 북한을 다녀와서 보고하는 말이“북한은 세계에서 가장 고독한 나라요, 또 가장 자유가 없는 나라이다”고 지적하였습니다. 혹 무엇을 물어도 상관에서 먼저 문의하기 전에는 대답을 하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사실 지금의 북한은 입이 있어도 말을 하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마음대로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자유로 듣지 못하는 실정입니다.
왜 북한 사회가 이렇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그곳에서 지금 권리를 잡고 있는 공산당들의 그릇된 사상입니다. 곧 유물론적 사상입니다. 이 사상에 중독 된 그들은 이 우주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합니다. 이렇게 될 때에 인간과 짐승의 차이는 없어집니다. 유물론적 인간이 있는 곳에 유물론적 윤리가 생깁니다. 결국 인간을 한 짐승으로 대우하게 됩니다. 이것은 유물론적 사회 사상과 사회체제를 만들게 됩니다. 곧 공산주의자들이 만들어 놓은 독재사회는 미안한 말이지만 동물원과 비슷합니다. 동물원에 있는 짐승들도 잘 곳이 있고 먹을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유는 하나도 없습니다.
205.짖을 수 없는 개
몇 해전 서백림에 갔다가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한번은 동백림에서 한 마리 개가 서백림으로 넘어 왔습니다. 이 서백림 개가 만나서 묻기를 너는 왜 넘어왔느냐 먹을 것이 없더냐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대답이 그 곳도 굶어 죽지는 않는다고 하여 그러면 잘 곳이 없더냐 고 물었더니 잘 곳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넘어왔는가 고 물었더니 그 곳에서는 도무지 짖을 수가 없어서 넘어왔다고 대답하였습니다”라는 우스운 얘기들이 한간에 떠돌았습니다.
왜 북한이 저렇게 전혀 자유가 없는 사회가 되었습니까? 그 근본 원인은 진리를 모르는 까닭입니다. 우주와 인간의 진리를 모릅니다. 하나님도 모르고 인간도 모릅니다. 그 결과는 전혀 자유가 없는 암흑의 사회구조를 이룹니다.“진리가 너희를 자유 캐 하리라”고 하였듯이 진리가 있는 곳에 자유가 잇습니다. <진리와 자유>에서
206.성경대로 사는 생활
교회사 초기에 유명한 성경학자요 설교자인 오리겐에게 성경대로 사는 생활에 대해 물어볼 수 있습니다. 그는 본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일생을 성경 연구와 복음전파에 바친 위대한 학자입니다. 그의 생활은 당시 극도로 퇴폐(頹廢)한 로마 사회에서 실로 백노(白鷺)같이 깨끗하고 고귀하였습니다. 우리는 그에게 그 비결을 물어볼 수 잇습니다.“선생의 그 고귀한 생활의 비결이 무엇입니까?”물으면 그의 대답도 매우 간단할 것입니다.“주의 말씀을 따라 삼가는 신앙 생활입니다”성 프랜시스에게 물어 볼 수 있습니다. 그 역시 부유한 가정에서 났으나 모든 자산을 초개같이 버리고 빈민과 고아와 병자에게 봉사하며 복음을 전파하였으므로 가장 아름다운 꽃이라고 별명을 얻은 분입니다. 우리는 그에게 그러한 생활의 비결이 무엇인가 물어볼 수 있습니다. 그의 대답도 역시 아주 간단할 것입니다.“주의 말씀을 따라 삼가는 신앙 생활입니다.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19세기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정치가로 인정을 받은 아브라함 링컨에게 역시 그의 흑노(黑奴)에 대한 깊은 동정심과 그의 일생을 통한 정치가로서의 깨끗하고 경건한 생활의 비결이 무엇인가 물어 볼 수 잇습니다.“나는 어려서부터 교회에 나가 성경을 배웠고 항상 그 말씀을 따라 삼가는 신앙 생활이었습니다”할 것입니다.
207.말씀을 품는 생활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군인이 항상 회중(懷中)선경을 품고 다녔는데 한번은 이 군인이 일선에서 싸우다가 적탄에 맞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적탄이 성경에 맞아 그 생명이 구원되었다고 합니다. 문자 그대로 성경은 그의 육신 생명을 구하였습니다. 사실 우리가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품고 다니면 어떤 유혹의 화살이 들어올지라도 우리의 영적 생명은 안전합니다. 가장 안전한 생활은 하나님의 말씀을 언제나 품고 사는 생활입니다. 그러므로 “복 있는 자는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은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합시다.<청년과 성경>에서
208.절약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자
어떤 신문(조선신문)을 보니 한 사람이 하루에 쌀 한 숟갈씩만 아끼면 한 해에 2백9십2억 원이 남는다고 합니다. 한 집에서 전등 하나씩만 끄면 1백 18억 원이 한 해에 남는다고 합니다. 하루에 TV한 시간만 덜 보면 한해에 12억 원이 절약된다고 합니다. 한 사람이 양말 한 켤레씩만 줄여도(곧 기워 신고) 1년에 3백 60억 원이 남는다고 합니다.
사실 지금이야말로 절약해야 되겠고, 모든 음식물 곧 쌀, 잡곡, 설탕, 채소, 뿐만 아니고 각종 음료수 특별히 외국에서 수입해오는 커피나 음료 등을 아주 끊어버려야 할 때입니다. 일일이 예를 들 수는 없지만 하여간 지금은 모든 것을 절약할 때요, 이 점에 있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솔선 수범해야합니다.
209.담배와 술의 해독과 낭비
요사의 신문을 보면 여러 가지 면에서 절약을 강조하면서도 가장 큰 낭비가 되는 술과 담배에 대해서는 아무 말이 없습니다.
사실 절약을 말하는 이들도 담배는 그냔 피우고 앉아 있습니다. 하루에 담배 한 갑을 피우면 한 달에 약 4천5백 원이 된다고 하는데 그 돈이면 적은 가족이 한달 동안에 먹을 쌀값이 된다고 합니다.
1973년 통계를 보면 1년 동안에 담배는 5백1억 7천4백6십5만 8천 본을 만들었는데 그 판매액이 1천3백 2십4억1천8백만 원이라 합니다. 또한 특권층은 소위 양담배를 핀다고 하는데 작년에 전매청이 압수한 것만 9십8만 8천4백9십6본으로 시가는 7백4십1만3천7백5십 원이라고 합니다. 실지로 피워진 양담배 수량은 이것의 열 배로 추측되는데 그 가격은 7천여 만 원일 것입니다. 꼭 먹고살아야 할 쌀도 조금 먹자고 하면서 먹지 않아도 좋은 담배는 왜 피웁니까? 이뿐만 아닙니다. 담배 심은 밭에 곡식을 심으면 그 만큼 식량이 증산될 것이요, 또 담배는 폐암의 원인이 된다고 하는 것을 현대 의학계에서 인정된 사실인가 본데 그래도 그냥 피워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또한 국세청에 알아본즉 작년에 우리 나라의 술 생산량이 2,228,531킬로리터나 된다고 합니다. 그 가격은 약 1천억이라고 합니다. 제가 물었더니 술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고 합니다. 탁주, 약주, 청주, 과실주, 등이 있습니다. 작년 1년 동안에 우리 국민이 이렇게 여러 종류의 술을 1천억 원어치를 마셨다고 합니다. 그 외에 외국에서 들어오는 양주도 마셨는데 그 수입액이 4백 5십만 달러요, 또 몰래 수입한 수량은 거이 3배로 추산됩니다. 그러나 양주를 또 약 2천만 달러 치를 마셨습니다. 커피와 콜라도 가급적 피하면서 아무 쓸 때 없는, 아니 사실은 육체적으로 사회적으로 큰 해독을 주는데도 그냥 마셔야 합니까? 또 술은 무엇으로 만듭니까? 곡식으로 만듭니다. 식량이 부족하여 외국에서 매년 수억 달러의 식량을 수입 해다 먹으면서 이게 무슨 짓입니까?
다른 방면에는 절약하자고 하면서 이 방면에는 잠잠하면 옳은 지도자라고 할 수 있는가, 저는 사실 우리 사회의 술과 그 술에 미치는 해독을 너무나 많이 보아서 술 마시는 사람들을 볼 때에 분노를 느끼게 됩니다. 술 먹고 음란한 일을 하며, 술 마시면서 뇌물을 주고받습니다. 술 먹고 교통사고, 기계사고를 내게 합니다. 술 먹고 죄 없는 아내를 때립니다. 술로 말미암아 파탄된 인격, 파탄된 가정, 파탄된 사업도 너무나 많습니다<자다가 마땅히 깰 때>에서
210.의심과 신앙
우리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다 깨달아 알 수가 있습니까? 그렇다고 의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링컨의 유명한 말 가운데“이성으로 깨달아 알 수 있는 건 알 수 있으니까 그대로 행하고 깨달아 알 수 없는 것 믿음으로 받아서 그대로 행하면 살 때에도 바로 살고 죽을 때도 바로 죽을 수가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이 옳은 태도입니다. 신비에 대한 바른 태도입니다.
둘째는 여러 가지 의심이 일어날 때에, 그러면 내가 믿을 수 잇는 것은 무엇인가를 먼저 찾아서 그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필요합니다.
211.호레이스 구츠내리 목사
전에 미국에 호레이스 구츠내리란 유명한 목사가 있었습니다. 그 분은 대학생 시절에 무신론자로 자처했습니다.“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믿지도 못하겠어”이런 의심 가운데서 그 이는 무엇을 생각했느냐 하면 “내가 무엇을 믿을 수 있나?”가만 생각해 보니 하나님께서 우주에 계신 것은 분명히 모르겠지마는 이 세상에 의와 불의가 있는 것은 사실이거든요. 그래서“나는 꼭 의를 행하겠다. 어디서나 꼭 의만 행하겠다”고 결심하고 의의 길을 따라 갔다고 합니다.
결국엔 하나님도 믿게 되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여러 가지 의심이 날 때, 밑바닥에 들어가서 내가 믿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서 그것을 진실히 믿고 그대로 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테카르트란 불란서의 유명한 철학자가 있는데 이 분의 인식론을 보면 그는 안다는 모든 것을 의심했습니다. 우리는 오관(五官)을 통해서 모든 것을 아는데 이 오관이란 것을 확실히 믿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니 자기 속에서 생각하는 것만은 의심할 수 없단 말입니다. 그리고 생각하는 자신이 있다는 것도 의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유명한 말이 있지 않아요.“나는 존재한다 내가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것은 마치 캄캄한 밤에 작은 등불을 가지고 길을 걸어가는 사람과 마찬가지입니다. 등불이 적으니 내 주위의 대여섯 자밖에 안 비칩니다. 그러나 그 대여섯 자만되는 그 불빛 안에서라도 길을 바로 가세요. 그러면 그 등불이 다시 다섯 자를 비치어 줍니다. 그러면 우리는 옳은 길을 바로 갈 수 있게 됩니다. 그게 중요합니다. 내가 확실히 믿는 것을 그대로 행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도마의 의심과 신앙>에서
212.진효부에 대한 이야기
우리 동양에 유명한 진효부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 진나라 땅에 어떤 여자가 출가를 했습니다.
얼마 후에 그 남편은 부득이한 사정으로 먼 나라에 가게되었습니다. 남편이 가면서 하는 말이“내가 먼 나라에, 위험한 곳에 가는데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업은즉 내 늙은 어머니를 잘 봉양해 주시오”하고 부탁합니다.
이 젊은 부인은 약속을 했습니다. 그 후 일년이 지나고, 이년이 지나고, 삼 년이 지나도 돌아오지를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 친정 식구들이 와서, 그렇게 기다릴 것이 뭐냐 어서 집으로 돌아와서 다시 시집을 가라고 합니다.
그 때에 이 여자가 하는 말이“남편 대신에 늙은 어머니를 부양하는 것은 의(義)요, 남편과 약속을 지키는 것은 신(信)입니다. 사람이 의리와 신의를 버리면 사람이라고 할 것이 뭡니까? 부모님이 정 그러시다 면 나는 이 자리에서 죽겠습니다.”
그러니까 부모는 더 권면하지 못하고 돌아갔다고 합니다. 이 젊은 여자는 나이 많은 시어머니를 종신(終身)토록 잘 모셨다고 합니다.
그 뒤에 나라에 알리는 바가 되어서 천자가 큰 효부의 표창을 했다고 합니다. <나오미와 룻의 가정>에서
213.양심의 부속이 빠진 로보트
전에 어떤 과학자가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 사방으로 다니며 연구를 해서 사람의 손으로 사람을 만듭니다.
그리고 버튼만 누르면 사람이 움직이게 만들어 놓고는 여러 친구들과 유명한 과학자들, 정치가들,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다 초청했습니다. 그리고는 아마 축사도 했겠지요. 여러 가지로 예식을 한 다음에 버튼을 눌렀어요. 아 그러니까 사람 만들어 놓은 것이 우물우물합니다. 눈을 번쩍 뜹니다. 눈을 굴립니다. 아 그러더니 벌떡 일어나 앉습니다. 일어나 섭니다. 보니까 키가 9척이요 또 얼굴을 잘 만들어서 미남인 아주 진짜 같은 사람이 됐습니다.
그런데 인공 인간이 어정어정 기어 나옵니다. 과학자와 그 부인이 서 있는 곳까지 어정어정 오더니 손을 번쩍 들어 다짜고짜로 과학자 머리를 내려칩니다. 단번에 쓰러wu 죽었습니다. 아 그러더니 과학자를 죽이려고 달려듭니다. 그러나 정치가니 과학자의 친구니 모두가 혼비백산이 돼서 사방으로 도망합니다.
이처럼 그 과학자가 사람을 만들기는 만들었는데 한 가지만은 실패를 했다고 그럽니다. 뭔고 하니 그 속에 양심을 못 넣어 주었습니다.
이것은 우스운 예기지마는 현대 문화의 풍자입니다.
현대문화가 모든 인간의 외부적인 것은 다 만들지마는 인간 속의 양심은 못 넣어 준다는 말입니다. 과학은 새 사람을 만들지 못합니다. 이것은 오직 그리스도께서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과학시대와 정신 혁명>에서
214.직각(直覺)적 지식
어떤 지식은 직각적으로 압니다. 모든 예술에 관한 지식은 직각적으로 알게 됩니다.
우리가 머리로 생각해서 하나님을 알뿐더러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직각적으로 알게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여기, 서바나에 우나무너라고 하는 유명한 철학자가 있는데요 그 분은 철학자이지만 그이가 스스로 간증하기를“나는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머리로 생각하기보다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직각적으로 깨닫게 된다”고 했습니다.
영국의 유명한 테니슨의 시에“내게는 하나님의 숨결이 그 무엇보다도 가장 가깝다. 내 손과 발보다도 더 가깝다.”그저 느껴져서 아는 것입니다. 사실 성령의 체험이란 것이 그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서 머리로 생각해서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아는 분도 계시지마는 참 성령을 충만히 받음으로 직각적으로 하나님께서 내 안에 계신 것을 알게 됩니다.
여기 요한 웨슬레라는 감리교을 세운 유명한 분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저녁에 올렌스벤치란 곳에서 몇 사람이 모여 예배하는 곳에 가서 예배보는 가운데 갑자기 자기 마음이 뜨거워졌다고 합니다.
루터의 갈라디아 주석을 설교하는 사람이 대표로 읽는데 그것을 듣는 가운데 갑자기 그의 마음이 뜨거워진 것입니다. 그 때부터 요한 웨슬레는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215.직감적 요소
직감적 요소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머리로 생각해서 하나님께서 계시리라 이렇게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내가 기도하고 내가 묵상을 하는 가운데 성령을 내가 직접 받게 되면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직접 느끼게 됩니다.
여러분, 바로 이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어떤 사람이 어떤 이론을 가지고 반대를 하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왜? 그는 직접 하나님을 만나 보았기 때문입니다. 영적 눈으로 하나님을 만나 보았기 때문에 신앙의 체험이 없는 사람들의 말이 귀에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계신지 분명히 모르겠다고 하는데 사실 그런 사람은 아직은 하나님을 실제로 믿어 보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믿어보면 압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하기도 전에 기도하면 응답이 될는지 안 될는지 모르겠다고 하는데 이것이 역시 믿음 없는 자세입니다. 의심 않는 믿음은 기도하는 데로 이루어지리라는 분명한 확신을 이미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어리석은 질문은 결코 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다운 기도를 해보세요.
216.한 번은 보았나?
전에 우리가 프리스턴 신학교에 다닐 때 구약성서 과 교수 가운데 딕 윌슨 박사라는 유명한 구약의 권위자가 있었습니다. 이분은 성질이 좀 별납니다.
밤 10시부터 새벽 3시까지 공부하는 습성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평생, 조용할 때 공부하느라고 그랬겠지요. 10시부터 새벽 3시까지 40여 년 동안 공부했습니다. 그래서 이 선생은 새벽 기도회에는 못나옵니다.
사실 일찍이 가르치는 시간이 없어요. 늘 늦게 일어나니까요. 3시까지 공부하고 자니까 일찍은 못 일어나지요.
제가 갔을 때, 나이가 많아서 학교에도 별로 나오지 않고 자기 서재의 알락 의자에 앉아서 늘 흔들흔들하면서 앉아 있으면 우리 공부하는 사람들이 이 선생을 찾아갑니다. “윌슨 박사님 우리는 박사님에게 성경에 대해서 의심 나는 것이 몇 가지 있어서 좀 무르려왔습니다.”“아 그래 무슨 의심이 있는가?”그러면서 넌즈시 이걸 물어봤습니다. “그런데 자네들 성경에 의심이 난다고 하는데 성경을 한 두 번쯤 읽어보았나?”하고 물어봤습니다.“성경을 볼 시간이 있나요 성경을 보지 못했습니다.”“한번은 보았나?”“한 번도 못 봤어요”자 그러니까 윌슨 박사가 눈을 부릅뜨면서“이 사람들아 내가 머리는 남들보다 못할는지 모르지만 나는 40년 동안 밤 10시부터 3시까지 성경을 공부했는데 내가 공부한 결과는 믿을만한데 자네들은 한번도 안 보고 와서는 의심난다고 질문이니 말이 되는 가? 가서 두어 번 읽고 그 다음에 외서 물으라고 그 다음엔 토론이 될 거야”고 했습니다.
여기 가만히 보면 성경이 의심 난다는 사람들 대게 성경을 읽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우선 성경을 읽어보고 그대로 해보세요. 그러면 성경이 옳은 것을 분명히 알게 될 것입니다
217.무신론 증거는 불가능
옛날이나 오늘이나 하나님의 없다고 하는 무신론자들이 많습니다. 성경에 보면 이런 사람들을 어리석다 했습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어리석습니다.
무엇이 있다고는 논증하기에는 증거가 하나만 있어도 되지마는 없다고 하기에는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가령 예를 들어서 우리 한국에 갈매기가 있나 없나 토론한다고 합시다. 어떤 사람은 있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없다고 하거든요.
있다고 하는 사람은 인천에 내려가서 바닷가에 갈매기발자국 하나만 보고도 있다고 하면 증명이 돼요. 하자만 한국에 갈매기가 없다고 하려고 해보세요. 인천에 가서 다 살펴보고 없다고 해도 진남포에 있는지, 용암포에 있는지, 마산에 있는지, 알아보세요? 다시 말하면 한국 전토를 다니기 전에는 한국에 갈매기 없다는 말은 성립되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런 우주에 하나님이 없다고 한단 말이요. 우주에 하나님이 없다고 증명하려면 지구는 말할 것도 없고 저 별도 다 다니고 우주를 다 다녀보기 전에는 없다는 증명을 못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주장하는 걸 보니 한 마디로 말해서 됩니까? 어리석기 때문입니다.
또 이 무신론이라고 하는 관념은 부정적 관념이올시다. 관념 가운데는 두 가지 관념이 있는데 긍정적 관념과 부정적 관념이 있습니다.
가령, 빛은 긍정적 관념이올시다. 어두운 것은 부정적 관념이올시다. 참은 긍정적 관념이올시다. 거짓된 것은 부정적 관념입니다.
여러분, 왜 어둡다는 관념이 생겼는지 압니까? 빛이 있기 때문입니다. 왜 거짓되다는 관념이 생기는 지 압니까? 참이 있으니 생겼습니다.
왜 무신론적 관념이 생긴 것입니까? 하나님이 계시니까 그런 관념이 생긴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무신론적이란 관념이 있는 자체가 하나님께서 게신 것을 분명히 증명해 줍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무신론자들을 환자라고 했습니다. 병자들이란 말입니다. 아무리 태양 빛이 혁혁(赫赫)하지마는 도무지 앞 못보는 소경들에게야 태양 빛이 보입니다.
결국은 이렇게 의지로 생각하든지 직감으로 생각하든지 실험을 해보든지, 권위의 말을 들어보든지 분명한데 왜 하나님을 믿지 않으려고 합니까?
자기 마음에 죄가 있으니까, 하나님이 계시면 두렵단 말입니다. 병이 나서 이런 입장을 결국 갖는 것입니다.
여러분, 죄를 훌훌 털어 버리고 하나님을 한 번 믿어보세요. 그래서 직접 입으로서 맛을 보아 아는 것처럼 내 것을 만드세요. 예수를 내 마음에 영접하고 그 분의 뜻대로 사는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게되면 어제나 오늘이나 또 영원토록 변함없는 분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됩니다. 많은 지식은 신앙을 통해서도 옵니다. 믿을 만한 권위자나, 경험해본 앞선 신앙인 들을 통해서 많은 지식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에도 교과서가 있습니다. 그 교과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 성경책입니다. 이 성경책은 종교의 믿을 만한 사람들이, 다시 말하면 선지자들, 사도들, 예언자들이 자기가 생각하고 안 지식, 자기네가 직감적으로 안 지식, 자기네가 체험으로 안 지식을 여기에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읽고 그들의 말을 믿음으로 하나님에 대한 지식, 모든 종교의 지식을 얻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권위라고 하는 것은 방면이 각각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의학계의 권위요, 어떤 사람은 법학 계의 권위요, 각각 권위가 다릅니다. 그래서 무슨 문제가 일어나면 그 방면의 권위자에게 가서 문의해야 됩니다.
사도들은 종교계의 권위자입니다. 선지자들은 종교계의 권위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 방면에 제일 많이 공부도하고, 생각도하고, 체험도하고 경험이 있는 여러분 교회의 목사님께 가서 물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218.하나님의 발자취
전에 어떤 사람이 사하라 사막을 지나갑니다. 약대를 타고 지나갑니다. 날이 저물어서 오아시스라고 샘이 있는데 천막을 치고 하룻밤은 자게 되었습니다. 약대를 바깥에 매어놓고 여행하는 사람과 약대를 몰고 온 사람과 함께 자게되었습니다.
자려고 천막에 들어갔습니다. 약대를 몰고 온 사람이 자기 전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합니다. 다른 한 사람은 기도를 않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다 한 다음에“
자내 지금 뮈 했나?”
“나 기도했네”
“아 누구한데 했는가?”
“아 하나님한테 했지”
“자네 하나님 보았나?”무엇이라고 대답했겠습니까?
“보지 못 했어”
“하나님 음성을 들어보았나?”
“못 들어보았네”
“하나님 만져 보았나?”
“못 만져 보았네”
“아 그럼 자네 하나님 있는 줄 어떻게 아나? 그거 미련한 일 아닌가?”
아 뭐라고 대답할 말이 없단 말입니다.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냥 그날 밤은 잤어요.
그 다음 날 아침에 두 사람은 천막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런데 나오자마자 그 여행하던 사람이
“아하 간밤에 약대란 놈이 끈이 풀어져 우리 천막을 몇 번 돌았구먼”그런단 말이요.
이 말을 듣고 약대 주인이
“당신이 약대가 밤에 도는 것을 보았소?”
“아니 나는 그걸 보지는 못했소”
“그럼 발자국 소리를 들었소?”
“아 난 그것도 못 들었소”
“그럼 만져 보았소?”
“아니 못 만져보았소”
그러니까 “아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어떻게 몇 바퀴 돌았다는 것을 아오”하니까“하하 이 사람이 모래밭의 발자국을 봐, 이 모래 밭에 발자국이 빙 돈 것을 보니 분명하지 않나”그 때 마침 동쪽하늘에 아침해가 떠올라서 눈이 부시게 아름답게 된 경치를 가리키면서 약대 주인이 말합니다.
“여보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발자취가 아니고 무엇이겠소?” <기독교 우주관>에서
219.‘비유티 이즈 스킨 딮’
미국 속담 가운데‘비유티 이즈 스킨 딮’(Beauty is skin deep.)즉 아름다운 미인이란 피부 두께만큼 깊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얼굴이 아름답다는 것은 그저 그 가죽만큼 아름답다는 말이요. 가죽 베껴 놓으면 마찬가지란 말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얼굴만 반반하고 번듯하다고 얼른 결혼하지 말란 말입니다. 아시겠습니까? 그 사람의 배후와 가정과 성품과 교양과 모든 것을 잘 살펴서 결혼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청년 시대에 있어서 특별히 배우자의 선택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다 중요하지마는 더 중요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영적 견지에서 내가 어떤 길을 택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220.클리블랜드 대통령과 그의 친구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미국에서 있었던 일인데 어떤 두 사람이 가까운 친구입니다. 언제나 함께 다니고 함께 먹기도 하고 함께 자기도하며 아주 가까이 지냅니다. 그런데 그들은 젊은 시절에 좋지 못한 길을 가고 안 갈 때도 가고 죄도 많이 짓고 지냈답니다. 어떤 주일 저녁에 둘이 좋지 못한 노름하는 곳, 댄스 홀 같은 데를 갔던 모양인데 지나가다가 마침 예배당 앞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그날 저녁의 설교 게시판에 “죄의 값은 사망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습니다.
죄의 값은 사망이라. 지금 죄를 지으려 가는 길인데 기분이 언짢아졌습니다. 한 친구는 놀려갈 마음이 없다고 합니다. 가자 거니 말자 거니 하다가 끝내 둘이 갈라졌습니다. 한 청년은 그대로 놀려가고 한 청년은 집으로 돌아오는 체하다가 아무래도 마음이 불안해서 도대체 목사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보자고 혼자서 예배당에 들어갔답니다. 맨 뒤에 앉아서 설교를 들었습니다. 긴 예기할 것 없이 이 청년은 예배당에 들어와서 온전히 회개하고 몸은 예수 님께 온전히 바치고 변화했습니다.
이것은 사실이라고 합니다. 그 후 그는 열심히 공부하고 정치방면으로 나가서 끝내는 미국의 대통령 되었습니다. 대통령 취임을 합니다. 모든 신문이 대통령 취임 기사로 가득합니다. 그런데 그때에 미국의 유명한 교도소에 어떤 늙은 죄수가 하나 있었습니다. 대통령이 취임했다는 신문보도를 보면서 홀로 눈물을 뚝뚝 흘렸다고 합니다.
스스로 하는 말이“이 사람이 30년 전에는 내 친구였는데 그 어느 때 나와 갈라지고는 전혀 만나 보지 못했는데 이제 이 사람은 대통령이 되고 나는 일생을 교도소에서 죄로 말미암아 감옥생활 중에 죽게 되었으니 이런 분한 일이 어디 잇느냐”면서 눈물을 흘리더라고 합니다.
인생의 갈림길이 많다고 하지마는 간단히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좋은 길입니다. 신앙생활은 얼른 보면 좁은 문이요 좁은 길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라가려면 회개의 좁은 문을 통과해야 합니다. 신앙 생활이 얼른 보기에는 좁은 길입니다. 왜냐, 그리스도를 따라가려고 하면 나를 이겨야 합니다.“나를 이기고 따라 오라”고 하였습니다. 신앙생활은 얼른 보기에는 좁은 길입니다. 왜? 신앙생활은 절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먹을 것도, 먹을 줄 알지만 먹지 않아야 되는 것이 있습니다. 마실 것도 해로우면 안 마시는 절제를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 길은 참으로 좁은 길인 듯합니다 그리스도를 따라가려면 때로는 핍박을 밭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길은 생명의 길입니다. 마지막에는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입니다. <청년과 그 선택>에서
221.트로이 성 함락
서양에는 트로이 성의 함락에 대해 옛날부터 내려오는 시가 있습니다.
옛날에 트로이 성은 아주 튼튼하고, 난공불락의 성이었습니다. 그래 어떤 원수든지 그 성을 훼파(毁破)해서 점령한 원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있었는고 하니 이 성이 바닷가에 건축돼 잇는데 한 번은 아침에 나가보니 바닷가 모래 위에 이상한 말이 척 서 있단 말입니다. 가서보니 아주 아름답게 보이는 말입니다. 그때 사람들은 말이 바다 속에서 나왔다고 생각하였는지 경사라고 그 말을 여럿이 메어다가 트로이 성 어디에 둔 모양입니다.
그 날 밤에 어떻게 됐는지 압니까? 그 말은 사람이 만들어 칠한 말인데, 그 말의 배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압니까? 요새 말로 소위 간첩들이 몇 놈 엎디어 있었습니다.
그 간첩들이 밤에, 남들이 다 잘 때 뱃속에서 나왔습니다. 그들은 나와서 성의 문을 활짝 여러 놓고 그 기회에 원수가 밀물처럼 들어가서 트로이 성을 점령했다는 얘기입니다.
시험에 빠지는 것이 이렇습니다 속아서 입니다.
혹 신문에 보면 어떤 도둑놈은 잘 때 들어와서 마취제를 뿌려 놓고 다 가져갔다고 합니다. 자다가 우리의 영혼이 다 도적 맞을 수가 있어요. 그러므로 조심하라고 했습니다<넘어질까 조심하라>에서
222.겸손한 손
바리새교인이 성전에 들어가서 드리는 기도는 하나님께서 물리쳤습니다. 그러나 세리의 기도“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한 겸손한 기도는 하나님께서 응답하셨다고 주님이 말씀 하셨습니다.
223.겸손은 모든 덕의 뿌리
겸손한 과학자가 새로운 진리와 새로운 사실을 발견합니다. 아이작 뉴톤의 유명한 얘기를 여러분이 다 기억하실 것입니다.
“내가 이 우주에 대한 진리, 우주의 진리에 대한 나의 지식이란 저 바닷가에서 자갈돌을 가지고 노는 아이들이 바다의 신비에 대한 지식을 가진 것 보다 더 적거나, 혹 비슷할 것이다.”고 했습니다. 위대한 과학자는 겸손합니다.
그러므로 유명한 교부 크리소스톰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겸손은 모든 덕의 뿌리요, 어머니요, 기초입니다”
유명한 교부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앙 생활에는 첫째도 겸손이요, 둘째도 겸손이요, 셋째도 겸손이다”
어떤 늙은 신학자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지식이 너무 적어서 성경을 그저 그대로 읽었다 그러다가 대학교와 신학교에 가서 철학을 배우고 비 종교학을 배우고 성경 비판서적을 배우게 될 때 지식이 너무 많아져서 성경을 그대로 못 믿었다. 그러다가 지금 와서 내 지식이 너무 부족하다는 것을 다시 깨달아서 이제는 그저 성경 그대로 믿는다”
224.고개가 숙여질 만큼
전에 아프리카의 유명한 선교사 알버트 슈바이처 박사가 아프리카에서 병원을 처음으로 지을 때 손수 일을 하면서 병원을 지었습니다. 그 옆에 흑인 청년이 하나 그저 서 있습니다.
그저 서 있을 것이 아니라 나하고 같이 일하자고 했습니다. 그 때 이 흑인이“나는 그런 일 안 합니다. 나는 공부한 사람인데 그런 일은 안 합니다. 일은 공부 안한 사람이나 하는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슈바이처 박사가 하는 말이“나도 학생시절에는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었소. 그러나 공부를 많이 한 다음에는 아무 일이나 다 합니다”고 했습니다.
어떤 여자는 대학 출신이기 때문에 소제하기도 싫어하고 그릇 씻기도 싫어한다는 얘기가 혹 들립니다.
사실 어떤 분은 대학 출신인 까닭에 취직 못하는 이가 더러 있습니다. 대학 출신으로 막일이야 할 수 있나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무슨 일이나 할 수 있을 만큼 공부를 더하시오. 많이 할수록 겸손해집니다.
열매 하나도 없는 가라지는 고개를 빳빳이 들고 서 있습니다. 열매 많은 벼이삭은 고개를 숙입니다.
고개가 숙어질 만큼 공부를 더해야 합니다.
225.단테의 연옥 구경
단테《신곡》가운데 단테가 한 번 은 연옥에 가서 구경을 합니다. 한 구석에 가보니 여러 사람들이 등에다 무거운 돌을 가득 지고 서 있습니다. 그래서 물어 보았습니다.“아니 저 사람들은 왜 저렇게 무거운 돌을 지고 서 잇습니까?”그 대답하는 말은“저 사람들은 세상에 살 때에 너무 교만해서 허리를 굽혀 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낙원에 올라가는 문은 낮아서 허리를 굽혀야겠기에 그 연습을 하느라고 저 모양입니다”
거미리 허리 좀 굽히는 것을 배웠다면 얼마나 좋을 법했습니까. 사실 어떤 분은 너무 교만해서 예수를 못 믿는 분도 있습니다.
“아 예배당에 가보니까 여자들도 오고 무식한 것도 오고 아이들도 모이는데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그런 델 가서 앉아 있는 단 말이요. 박사들과 장관들이 혹 모였다면 또 모르지만”합니다.
교만해서“남의 공로를 믿어서 구원을 얻는다니, 내 공로로 구원을 얻어야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겸손한 이의 특색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자기 자랑을 하지 않습니다.
둘째는 무슨 일을 하고도 자랑하지 않습니다.
셋째는 너무 자기 고집대로 하지 않습니다.
넷째는 불평이나 불만이 없습니다. <겸손>에서
226.자족의 성취
지족가락 무탐즉우’우리가 자족(自足)의 비결을 배워야 영원한 안식에 들어갈 수 잇는 것입니다. 자족의 비결은 어디에서 배울 수 있습니까?
우리 동양의 성현도 이 자족에 대한 교훈을 많이 했습니다. 가령 《경행록》이란 책에 ‘지족가락 무탐즉우’(知足可樂 務貪卽憂)라는 말이 있습니다. 족한 것을 알면 가히 즐거워할 수 있고 탐하기를 힘쓰면 근심만 더 한다는 뜻입니다.
혹은 이런 말도 했습니다.‘지족자는 빈천하여도 영락이요 부지족자는 부귀라도 역운이라’족한 줄을 아는 사람은 빈천하여도 또한 즐겁게 살고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부귀한 자리에서도 늘 근심만 한다는 뜻입니다.
또 이러 말도 했어요.‘지족상족(知足常足)이면 종신불욕(終身不辱)하고’족할 줄을 알아서 항상 족하게 여기면 종신토록 몸에 욕됨이 없고,‘지지상지(知止常止)면 종신 불치(終身不恥)라’지체할 때를 알아서 항상 자제하여 행하면 그는 종신토록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는다.
우리 동양의 성현들도 자족을 배우라고 권면합니다.
227.디오게네스의 명언
전에 스토익파에 디오게네스라고 하는 위대한 성자가 있었습니다. 그분은 일생토록 몸에는 짧은 바지 하나만 걸치고 살았고 집도 없이 밤에는 산기슭에 가서 나무통 속에서 잤다고 합니다. 한 번은 헬라의 왕이 이 성자를 찾아보려고 왔습니다. 성자의 형편을 본 왕은“당신은 무엇을 원하십니까? 원하는 대로 내가 다 들어줄 터이니 원하는 것이 있으면 말씀 해 보시요”하고 말하니 이 분이 하는 말이“나는 원하는 것이 하나도 없소 그저 왕께서 지금 내 앞에 서 게시니까 햇빛이 가리워 지니 다만 좀 비켜서 주시오”라고 대답했답니다.
“욕망을 죽이라”이렇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또 그들은 좀더 아주 극단으로 나가면서 모든 감정을 제거해 버리라고 할 뿐 아니라 애정의 감정까지도 제거해 버리고 자기자신이나 다른 이에게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무관심하게 되기까지 모든 감정을 없애 버리라고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228.소극적 방법의 자족
스토익 학파의 유명한 사람 가운데 하나인 에픽테투스란 사람은 이렇게 예를 들어 가르쳤습니다.
“가령 우리가 밥을 먹을 때 쓰는 그릇이나 컵이 하나 깨어진다고 하자, 그러면‘그까짓 것 깨지면 어떤가 나는 거기에 관심이 없노라’고 얘기하라. 그러다가 가령 자기 집에서 기르는 개나 고양이가 죽거든‘그까짓 것 죽어도 난 관심 없어.’그러다가 자기 다리가 부러지든지 팔이 상해도‘아, 그까짓 것 어때, 나 상관 안 해.’마지막에는 심지어 자기가 가장 가까운 이가 불행하게 되어도 혹은 세상을 떠나도‘난 상관없어, 난 무관심이야’이렇게 대답할 때까지 무관심 상태에 들어가라. 그러면 자족의 경지에 들어간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인간을 목석으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사실 그런 까닭으로 실패했습니다. 이들은 인간의 의지력으로 또 모든 욕망을 억제하고 또 감정을 제거하는 소극적 방법으로 자족의 마음을 성취하려고 애썼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가족의 비결>에서
229.약한 인간
대학생들 가운데 하기 농촌 계몽대로 나갔다 와서 보고하는 이들의 글을 읽어보니 농촌에는 한국의 삼대 악이 있는데 그 첫째는 과음, 즉 술을 많이 먹는 것이고 둘째는 도박, 즉 노름하는 것이며 셋째는 미신이라고 했습니다. 아마 이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230.술은 일만 죄의 어머니’
옛날부터 내려오는 아랍 사람의 이야기 가운데 이런 것이 잇습니다. 한 번은 악한 마귀가 어떤 아랍 사람에게 와서“당신에게 앞으로 큰 화가 미칠 것입니다. 그 액을 피하려면 내가 말하는 세 가지 가운데 한 가지를 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그 세 가지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마귀가 대답합니다.“하나는 당신의 종 가운데 하나를 죽이든지 또 하나는 당신의 아내를 때리든지 나머지 하나는 큰 술병을 가지고 와서 한 병 다 먹든지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생각해보니 죄 없는 종을 죽일 수도 없고 살림 잘하는 부인을 때릴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결론으로 “그 술이나 먹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술병을 받아 잔뜩 먹고 취하자 공연히 트집을 잡아 가지고 아내를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종이 보다 못해 기가 막혀서“죄 없는 부인을 왜 때립니까?”하며 나서다가 그는 “네놈이 뭐기에 나에게 대들어”하며 때리니까 매를 맞고 그만 죽었습니다. 그러니 술 한 병 받아먹고서는 아내도 때리고 종까지 죽인 셈 이였습니다.
이 이야기는 술이 영향이 어떻다고 하는 것을 가르쳐 주는 이야기입니다.‘술은 일만 죄의 어머니’가 된다고 하는 말이 바로 그 말입니다. 술 먹고 협잡합니다. 술 먹고 음란한 일 합니다. 술 먹고 부정부패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231.자기를 정복 못한 알렉산더
전에 알렉산더 대제가 서른 살 때에 온 세계를 정복하였으나 그 다음엔 더 정복할 나라가 없어서 통곡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 사람이 하루 저녁은 친구를 모아 놓고 요새 말로 대포 술을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밤새도록 마셨습니다. 마지막에는 주독으로 말미암아 쓰려져 죽었습니다. 알렉산더 대제는 천하는 정복했으나 자기 자신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절제와 극기의 덕이 필요합니다. 특별히 우리 한국 사람의 약점 가운데 하나는 절제할 줄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중국 사람들은 술을 더러 먹어도 술 주정하는 것을 못 봅니다. 제가 세계 여러 도시를 많이 다녀 보았지만 다 술 먹는 사람들일 텐데 우리 한국처럼 술 먹고 거리를 비틀거리며 다니는 것은 한 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서울 거리를 다녀 보세요. 특별히 저녁거리가 어떠한가 다녀보세요. 문화인이라고 할 수 없는 광경을 많이 보게 됩니다.
우리들의 이 약점을 잘 알았기에 선교사들과 선배 목사님들은 우리 교회 안에서는 특별히 금주 단연(斷煙)을 엄격히 실행하도록 가르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한국 선교의 아름다운 전통을 이은 것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금주 단연의 깨끗한 생활을 하는 것은 우리 사회에 맑은 새 물결이 되는 것입니다. 복음 전도에도 큰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아름다운 전통을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바울의 선교와 벨릭스>에서
232.변화된 자들
여기 천주교를 부흥케 한 로욜라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분은 기사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 방면으로 공부했습니다. 전쟁터에 나갔습니다. 그만 전쟁터에서 큰 부상을 당했습니다. 왼쪽 다리를 전혀 못쓰게 되었습니다. 오랜 동안 치료하면서 자기 죄를 회개하고 주님을 사모하게 되면서 온전히 깨끗한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께 몸을 바치고 문자 그대로 그리스도의 기사가 된 것입니다.
사도 요한 을 생각해 봅시다. 만년에 로마 관헌에게 핍박을 받아서 자기 교회에서 쫓겨나고, 멀리 불모의 섬인 밧모섬에 유배를 당하여 굴속에 홀로 있게 된 것은 그의 생애에 있어서 좋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화(禍)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선으로 바꿔 주셨습니다. 요한 은 육신의 눈은 점점 어두워졌지만 오히려 심령의 눈은 더 밝아졌습니다. 육의 귀는 점점 어두워졌지만 그의 신령한 귀는 더 밝아져서 하늘의 음성을 듣게 되어서 결국은 오늘까지 남은 요한 계시록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인간들에게 미치는 화를 오히려 복이 되게 하십니다. 전화위복(轉禍爲福의 하나님입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세요. 바리새인들, 제사장, 서기관들의 시기 증오, 모략, 가룟 유다의 배신, 빌라도의 무책임한 공판, 이런 인간의 죄로 말미 아아 주님은 십자가에 달리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모든 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부활이 있게 했습니다. 오히려 십자가를 통해서 만민의 죄를 대속(代贖)하시는 큰 구원역사를 이루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상필 목사님을 기억하시지요. 그의 간증을 들으신 분이 많을 거예요. 우리 교회 홍순열 권사 님의 주인이올시다.
우상필 목사는 원래 일제 시대에 일본서 상과대학을 졸업하고 은행에 오래 있던 분입니다. 그 분 말대로 은행에 있으면서 오래 방탕한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중병에 걸렸습니다. 폐결핵에 걸려 여러 해 동안 고생을 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선으로 갚았습니다. 회개했습니다. 그 후에 목사가 되어 여러 해 복음을 전파한 사실을 여러분은 기억할 것입니다.
전화위복의 하나님이올시다.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당하는 슬픔이나 고통이나 질병이나 실패나 재난이라도 선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전화위복이 되게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성도의 생활이 다 그래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 전화위복의 역사에는 인간적 조건이 있어요. 그것은 믿음으로 모든 것을 당해야 이런 결과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변치 아니하는 사람에게는 어떤 재난이나 화가 와도 하나님께서 선으로 바꾸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분명히 들으세요. 여기 경고의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큰 슬픔, 어떤 큰 실패, 어떤 큰 화를 당할 때에 승리하는 길이 우리에게 있어요. 그런 가운데서 하나님은 꾸준히 믿고 의지하고 요셉과 같이 꾸준히 나가면 하나님은 반드시 이런 모든 것을 선으로 바꾸어서 전화위복을 가져옵니다. 그렇지 않고 이런 일을 당했다고 실망하고 불평하고 자포자기하면 그 재난으로 말미암아 아주 파멸을 당하고 맙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무슨 일을 당하든지 하나님을 의지하고 나아갈 때에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십니다. 다만 시간문제입니다. 어떤 때는 시간이 좀 오래 걸리기는 하나 마지막에는 전화위복으로 바꾸어 줍니다. <전화위복의 하나님>에서
233.헌신하는 신자들
우리 교회의 역사를 볼 것 같으면 주님의 헌신 정신을 계승하여 언제든지 우리 주를 믿는 사람들은 특별히 나병자를 불쌍히 여겼고 이들을 도와주기 위하여 여러 가지 수고를 많이 하였습니다.
제가 청년시대에 성 프랜시스 전기를 보고 놀란 것은 이 프랜시스가 온전히 하나님께 몸을 바치고 은혜를 받은 다음에 길을 걸어가더니 문둥병자가 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자기 옷을 벗어 그 문둥이에게 주고 그 문둥병자가 입었던 옷을 자기가 바꿔 입었습니다. 그 다음부터 성 프랜시스는 전도만 한 것이 아닙니다. 언제든지 문둥병 자를 치료해주는 데 많은 시간을 바쳤습니다.
근대에 와서도 성 미디안은 하와이 몰로카이란 섬에 가서 문둥병 자를 위하여 봉사하고 전도하다가 자기 끼지도 문둥병자가 되어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들을 위하여 병원을 먼저 설립한 사람들이 그리스도인 들입니다.
우리 한국에서도 정부가 이런 일을 착안하기 전에 먼저 나병자를 위하여 병원을 설립한 것이 선교사들입니다. 대구에도, 전주에도, 여수에도 나병자를 위하여 병원을 설립한 것은 선교사들입니다. 유명한 순교자 손양원 목사 같은 이도 일생토록 여수 나병원에서 봉사도하고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우리 장로교회에서 세 사람의 선교사를 태국에 보냈는데 두 사람은 목사고 한 사람은 의사입니다. 의사 송애근 박사는 지금 태국 쳄마이라는 곳에 있는 태국에서 제일 큰 나병원에서 천여 명이나 되는 나병자들을 고쳐주고 있습니다. <제 4계명>에서
234.혀의 진단
터어키안의 속담에는“혀는 검보다 실상은 더 많은 사람을 죽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파사인의 속담에는“혀가 길어지면 생명이 짧아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라비아인의 속담에는“네 혀가 네 목을 베지 못하게 하라”고 합니다.“칼은 쓸수록 더 무디어지나 혀는 쓸수록 더 날카로워 진다”는 속담도 있습니다.
여러분, 병원에 진찰 받으려 가면 의사들이 혀를 보자고 하는 말을 들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혀를 보고 여러 가지 병을 알아내는 모양입니다. 이따금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혀를 내 밀고 혀의 진단을 받을 필요가 있는 줄 압니다. 우리의 혀는 어떠합니까.
몇 주일 전 영국의 호픈 목사께서 설교하실 때에 자기의 나라 예복을 입고 목에 줄을 드리우고 선 모습을 여러분께서 보신 줄 압니다. 같은 교파의 어느 목사가 그런 예복 차림으로 설교를 하고 예배를 마친 다음 강단을 내려올 때 어떤 부인이 가위를 들고 와서“목사님 목에 드리운 줄이 너무 길어서 보기 흉하니 좀 잘라봅시다”하는 것이었습니다.“꼭 잘라야겠습니까?”“그렇고 말고요”“그렇다면 자르지요”드디어 그 여인은 잘랐습니다. 그 때에 목사가 넌지시 하는 말이“내가 자매 님의 조언을 이루어 주었는데 자매 님도 저의 소원을 하나 이루어주시지요?”하고는 호픈 목사는“자매 님의 혀를 좀 내미시오. 그 혀가 너무 길어 보이니 좀 잘라봅시다”하고 말했습니다 혀가 너무 길어서 여기 저기 왔다갔다하면 너무 곤란합니다 성경은 말하기를“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실 때에도 귀는 둘을 만들고 입은 하나를 만들었습니다. 그것을 보니 말을 적게 하라고 하신 모양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사석(私席)에서도 말을 많이 하려고 애를 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공석(公席) 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할 수 있는 데로 말은 적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해야 실수가 적습니다. 특별히 풍설을 전하지 말 것입니다.“너는 허망한 풍설을 전파하지 말며 악인과 연합하여 모함하는 증인이 되지 말라”(출 23: 1) 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 속담에‘무족언이 천리행’(無足言 千里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풍설은 눈공과 같아서 굴러갈수록 커집니다. <제 9계명>에서
235.입이 찢어져 죽은 뱀
일제 시대에 들은 이야기인데 어떤 분이 들에 나가보니 조그만 뱀이 큰 두꺼비를 물고는 삼키지를 못해서 입이 찢어져 죽는 것을 보았다고 하는 말을 했다고 해서 형사에게 잡혀가서 죽도록 고생을 하고 나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바로 일본이 하던 것입니다. 조그마한 일본이 한국을 삼키고 만주와 중국을 삼키기는 했으나 두꺼비가 너무 커서 결국은 일본 제국이 죽었습니다. 탐심으로 인해서 결국은 일본이 망했습니다. 무솔리니의 이탈리아가 이렇게 망했고 히틀러의 독일이 이렇게 망했고 오늘의 월맹이 이 전철을 그대로 밟고 있습니다. 그 결과 명약 관화(明若觀火)합니다. 개인이나 나라나 이 탐심에 끌려가다가 망하는 길 밖에는 없습니다.
236.욕심이 땅보다 두껍다
톨스토이 이야기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가난한 농부에게 하루는 큰 부자가 와서“당신 지금부터 힘껏 뛰어서 내 농장을 돌고 오면 그 전부를 당신에게 주겠소”하고 말했습니다. 농부는 되도록 넓게 돌아서 해질 무렵에야 출발점에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불행 이도 지쳐 죽고 말았습니다. 장사하면서 무덤 파는 이들이 둘러서서 하는 말이“이 사람에게는 땅 반 평이면 넉넉하구먼”하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탐심을 경계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나라에 내려오는 말 가운데“욕심이 땅보다 두껍다”는 말이 있습니다.“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넣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고 했습니다 나이 많은 분들 들으십시오. 나이가 많아질수록 욕심도 커 간다고 합니다. 동양의 성현들도 나이 많은 다음에 계지재득(戒之財得)하라고 하였는데 이 말은“특별히 얻는 일에 대하여 경계하라”는 뜻입니다.
237.도금을 한 피리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옛날 다윗 때부터 내려오던 훌륭한 피리가 하나 있었다고 합니다. 아름다운 이 피리의 소리를 듣는 많은 예배 자들은 큰 은혜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 번은 그 피리를 건사하는 이가 그것을 보다 잘 보존키 위해 전부 금으로 도금을 했던 것입니다. 그 후부터는 그 아름답던 소리가 간 곳이 없어졌습니다. <제 10계명>에서
238.주기도문의 거룩 해설
초대 교회 당시 예루살렘에 유명한 시릴이란 목사가 있었습니다. 그 목사가 주기도문에 관한 설교를 할 때,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그 자체가 본래 거룩하시다. 기도의 뜻은 본래 거룩치 못해서 거룩하게 해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이 기도를 할 때에 우리 자신이 거룩해지고 우리가 거룩한 일을 할 때에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해지는 까닭이다”
옛날 알랙산드리아에 있던 사이프리안 목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이 기도의 뜻은 그의 이름이 우리 안에서 거룩하여지게 하여 달라는 뜻이다”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해저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해저야 합니다. 우리의 말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해저야 합니다. 우리의 행위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해저야 합니다. 우리의 가정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해저야 합니다.
우리의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해저야 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항상 여러 가지로 기도합니다. 그러나 제일 먼저 할 기도는“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하여 달라”고 하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를 제일 자랑해야 합니다. 내 안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하여달라고 늘 기도해야 합니다. <이름을 거룩하게 하옵시고>에서
239.순수한 기도
로마서 8장 28절을 우리가 다 기억합니다.“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에게는 모든 일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모든 일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루는 것을 굳게 믿고 내 뜻보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달라고 기도 드리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크신 축복이 함께 하는 것입니다.
240.시인 힛키어의 ‘영원한 선’
미국의 시인 가운데 힛키어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의 유명한 시 가운데‘영원한 선’(Eternal Goodness) 이라고 하는 시가 잇습니다. 거기에 이러한 구절이 있습니다.“나는 모르노라 어디 그의 섬들이 솟았는지 그 넓은 종려나무 가지가 공중에 퍼졌는지. 다만 내가 알기로는 그의 사랑과 보호 밖으로 내가 표류할 수 없음이라”인간은 작은 배를 타고 망망한 대해에 떠다닙니다. 어디에 섬이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어디에 넓은 종려나무 가지가 나타날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저 표류해 갑니다. 그러나 신앙 있는 사람은 분명히 아는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내가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하심의 범위를 떠나서 표류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알고 믿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신앙 가운데서 우리는 어떠한 환경에 있던지“내 뜻보다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 지이다”하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241.토마스 아 켐피스의 기도
중세 시대의 유명한 성자 가운데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의 이러한 기도문이 역사에 남아 있습니다. 제가 한 번 읽을 때 들어보십시오, “오 주여, 주께서 더 나은 길을 아십니다. 주께서 원하시는 데로 이것이나 저것이나 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무엇이나 주께서 원하시는 것은 원하시는 것만큼 또 주께서 원하실 때에 주시옵소서 꼭 주님은 존 귀를 위하여 나에게 행하시옵소서. 주께서 보내시고 만사에 주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나는 주의 손에 있사오니 바퀴처럼 마음대로 돌리옵소서. 나는 주의 종이올시다. 무엇이나 명령대로 하겠나이다. 나는 나를 위하여 살기를 원치 않습니다. 주님만을 위하여 살기를 원합니다. 주님이시여, 오직 온전히 가치 있는 주의 종만 되게 하여 주옵소서” <뜻이 이루어 지이다>에서
242.꺼지지 않는 불
존 번연이 지은《천로역정》이란 유명한 책이 있습니다. 거기 이러한 얘기가 있습니다. 한 기독도가 어떤 방에 들어가 보니 방 옆에서 불이 활활 타고 있습니다. 여러 사람이 불을 끄려고 물을 퍼붓고 있으나 불은 꺼지지 않고 그냥 타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 저 불이 꺼지지 않고 타고 있는가
이상해 가보니 어떤 점잖은 분이 병에다 기름을 가득 담아 가지고 그 뒤에서 계속해서 그것을 부어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불이 안 꺼집니다. 이 악하고 음란하고 죄악이 가득한 세상에서 믿는 사람들의 강한 신앙의 불길과 우리 교회의 성령의 불길이 꺼지지 않는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우리 속에 그리고 우리 교회에 성령께서 계셔서 은혜를 충만히 부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성신을 믿사오니>에서
243.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요리 문답 14문을 보면“죄가 무엇이뇨”라고 물어보는 질문이 있습니다. 거기 대해서 “죄는 하나님의 법에 순종함에 부족한 것이나 또는 어기는 것이라”고 분명히 대답해 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에 우리 인간들은 다 죄인들입니다. 성경 말씀대로 의인은 없나니 곧 하나도 없습니다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꿈 가운데 하늘 나라에 가보았습니다. 하늘 나라에 가보니 천사가 큰 책을 그의 앞에 갔다 놓습니다.“이것이 무슨 책이냐?”고 물어보니까 “그 책 가운데는 당신이 세상에 있을 때 행한 모든 것이 기록되어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첫 장을 들추니까간 글자로 가득 씌어져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이것은 무슨 기록입니까?”하고 물으니까 천사가 대답하기를“당신이 세상에 살 때 행동으로 지은 죄입니다”라고 합니다. 그 다음 둘째 장을 들쳐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속에는 첫 장 보다 더 잔글씨로 가득 씌어져있습니다.“이것은 무슨 기록입니까?”하고 물어보니까 천사가 대답하기를 “이것은 당신이 세상에 살 때 말로 지은 죄들입니다.”라고 합니다. 말로 지은 죄는 행동으로 지은 죄보다 더 많은 모양입니다. 그 다음에 셋째 장을 들어다 보니까 둘째 장 보다 더 잔글씨로 더 많이 기록해 놓았습니다.“이것은 무슨 기록입니까?”하고 물으니까 천사의 대답이“이것은 당신의 마음가운데서 생각으로 지은 죄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생각으로 지은 죄는 더 많습니다. 그리고 한 장을 또 들추어보니 이것은 글자가 전혀 보이지 않고 새까맣습니다“이것은 무엇입니까?”하고 물으니까“이것은 당신의 마음입니다.”하는 것이 천사의 대답입니다. 예레미아 17장 9절에 무엇이라고 하셨는지 기억하십니까? “만물보다 더 거짓되고 부패한 것은 사람의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님께서도 마태복음 15장 19절에“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증거와 비방이라”고 하셨습니다. 왜? 마음이 부패하였기 때문입니다. 인간성이 부패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1장에서 지적한바와 같이 인간성이 부패함으로 인간의 지성이 어두워졌습니다. 인간의 정서와 감정, 생활도 더러워졌습니다. 인간의 의지도 부패하고 약하여졌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죄인이올시다. 존 칼빈 같은 이를 그 당시 사람들은 성자로 인정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남긴 유서의 첫 머리에 보면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이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는 다 세리와 같이“나를 불쌍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하는 신조입니다. <회개와 사죄>에서
244.예수 님을 못박는 나
여러분, 우리는 어떠합니까? 우리는 어떤 눈으로 십자가를 바라봅니까? 우리는 무엇을 자랑합니까? 전에 화란의 유명한 예술가 렙브란트라고 하는 분이 사람들이 예수를 못박는 십자가의 광경을 그렸는데 그 그림을 자세히 보면 예수를 십자가 못박는 사람들 가운데 자기 자신의 얼굴도 있습니다. 곧 렙브란트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된 것은 자기의 죄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자기 죄도 속량 하신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다 이것을 깨닫습니까? 그는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몸을 버리신 것입니다. 곧 여기 앉은 우리 하나하나 곧 자신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우리 주님은 피 흘리셨습니다. <나의 자랑은 오직 십자가>에서
245.꿀벌의 교훈
제가 일찍이 10여 년 전에 대서양에 있는 서인도 여러 섬 중 바르바도스(Barbados)라는 섬에 교역자 수양회 인도 차 갔던 일이 있습니다. 그 곳에서 들은 이야기 가운데 하나는 양봉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어떤 분이 처음으로 그 섬에 와 보니 사방에 들꽃이 많은 것을 보고 이 곳에서 양봉을 하면 잘 되리라 생각하여 꿀벌을 갔다 놓았더니 처음에는 조금 꿀을 모아들이더니 나중에는 그 섬에서는 꿀을 저축할 필요가 없음을 알고 이 벌들이 꿀을 안 만들고 그 곳 주민들을 쏘기만 하였다고 합니다.
사람이 일하지 않게 되면 이렇게 되기 쉽습니다. 사실 인간은 일하는 가운데 만족이 있고 기쁨이 있고 향상과 발전이 있고, 사실 일을 통하여 현대의 모든 문화가 창조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본래 누구나 일하고 살게 만들었고 일하고 먹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말합니다. 데살로니가 후서 3장 10절 “누구든지 일하기 잃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246.신성한 일
모든 일은 신성합니다. 이것이 곧 성경의 교훈입니다. 일을 대체로 두 가지 종류로 곧 정신적 노동과 육체적 노동으로 분류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온전히 나누기는 어렵습니다. 왜? 아무리 정신적 노동이라도 육체의 노력이 필요하고 아무리 육체적 노동이라도 정신의 노력이 또한 필요합니다. 머리를 바로 쓰면서 노동을 하여야 능률이 생깁니다. 그런데 대체로 어떤 시대 어떤 사회에서 정신적 노동은 존경하나 육체의 노동을 천이 여기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희랍의 유명한 철학자 풀라톤이나 로마의 유명한 학자 시세로 같은 이도 육체노동은 종들이나 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재래 한국 사회에도 이와 같은 관념이 많았습니다. 이 육체 노동도 꼭 같이 신성하다는 사상은 어디서 왔습니까? 그것은 성경에서 왔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아들 되시는 예수님께서 목수 일을 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대부분은 갈릴리 바다의 어부와 농민들이었습니다. <기독교와 근로자>에서
247.믿음의 유언
히브리 저자는 이것이야말로 믿음으로 하였다고 기록하였습니다. 곧 모세는 애굽을 떠나는 그 저녁에 앞으로 그 민족의 해방을 받을 뿐더러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서 평안히 살 것을 믿었습니다. 곧 그는 자기 백성이 장차 온전한 해방을 받는데 대하여 추호도 의심 없이 믿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모세의 믿음입니다. 역사는 모세의 믿음대로 되었습니다. 과연 유대인들은 해방되었고 오늘날까지도 유월절을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의 통일에 대한 믿음은 어떠합니까? 우리가 과연 역사의 주가 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으면 조국통일에 대하여는 추호도 의심할 바가 없습니다. 우리에게도 모세의 신앙이 필요합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광야를 향하여 나아갈 때 뒤에서 애굽군대가 따르고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혔습니다. 그러나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했을 때 바다 가 갈라지는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모세의 신앙>에서
248.역경 중에 얻는 미덕‘인내’
인내는 평안한 곳에서는 얻지 못하는 덕입니다. 역경 중에서만 얻을 수 있는 미덕입니다.
전에 제가 들으니, 알래스카에 사는 에스키모 종족들은 내한성, 곧 찬 것을 견디는 성격이 풍부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내열서, 곧 더운 것을 견디는 힘은 약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은 항상 추운 곳에서 사는 까닭이라 합니다. 이와 반대로 남양군도나 아프리카에 사는 토인들은 내열성은 강하나 내한성은 약합니다. 그 이유는 항상 역시 그들은 늘 열대지방에 사는 까닭입니다. 대장장이의 손은 뜨거운 것을 잘 견딥니다. 그 이유는 항상 뜨거운 것을 만지는 까닭입니다. 추운 겨울에도 우리는 얼굴을 항상 내어놓고 다닙니다. 얼굴의 피부는 내한성이 강합니다. 왜냐하면 추운 공기와 접촉하는 까닭입니다. 바람이 불어야 나무 뿌리가 깊이 들어가 나무가 튼튼하다고 합니다. 고통, 질병, 슬픔, 위기, 역경, 곧 여러 가지 환난을 통해서만 이 귀한 그리스도의 성품을, 곧 인내를 이루는 것입니다
249.인내는 영혼의 연단
인내는 연단을 낳는다고 하였습니다. 새 번역에는 품격을 낳는다고 하였습니다. 곧 인내는 세련된 품격을 이룹니다. 거칠 은 바다의 노한 물결이 숙년 된 수부를 만듭니다. 거칠 은 세상의 온갖 풍파는 세련된 품격을 조성합니다. 예방 주사의 원리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예방주사란 약화된 병균을 혈액 속에 집어넣어 백혈구로 하여금 싸워 훈련을 받게 하여, 훈련된 백혈구는 진성(眞性)병균이 들어와도 능히 싸워 이겨냅니다. 많은 훈련을 받는 이가 승리하는 운동 선수가 됩니다. 많은 전쟁을 격은 군인을 백전 노장이라고 합니다. 위험한 전쟁의 많은 경험은 그들로 하여금 상승의 군인이 되게 합니다.
들은즉 바이올린 같은 악기를 제작할 때에 가장 좋은 나무를 택할뿐더러 같은 나무에서도 특별히 북편에 있던 부분으로, 곧 가장 찬바람을 맞은 부분으로 만든다고 합니다. 환난을 많이 받은 영혼이 그 인내와 세련된 품격을 통하여 제일 아름다운 생의 음악을 연구합니다. <환난에서 소망으로)에서
250. 용감한 여자 개척자
지금부터 8년 전 독일 서백림에서 세계 복음화 대회가 모였을 때 본 한 광경을 나는 잊을 수 없습니다. 그때 남미에 있는 오카(Auka) 족 대표가 단 위에 나타났습니다. 이 오카족은 남미 밀림지대에 자기네들끼리만 살던 원시인입니다. 문명과 전혀 접촉이 없는 야만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약 10년여 년 전에 청년 5명이 비행기를 타고 그들에게 전도하려고 들어갔다가 모두 학살당하였습니다. 그후에 학살당한 한 부인이 홀로 그들 종족들에게 다시 들어가 그들을 도우며 점점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녀 지금은 그곳에도 교회가 서고 그 대표가 복음화 대회에 온 것입니다. 청년 여자의 모험적 신앙이 최후 승리를 거둔 것입니다. 개척 전도자에게는 이 모험적 신앙이 필요합니다. 복음 전파를 위하여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아니 생명까지 바치려는 결심을 가진 개척자들이 요구됩니다.
우리가 사는 이 20세기는 소위 과학이 발전된 시대라고 하나 가장 악한 사람들이 많은 기독교인을 미워하는 무신론자, 유물론자들이 가장 많은 위험한 시대입니다. 이러한 시대에 철(鐵)의 장막, 죽(竹)의 장막이라도 여러 가지 모양으로 뚫고 들어가 복음을 침투시키려는 이 모험적 신앙을 가진 젊은 개척자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시대에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모험 신앙을 가진 용감한 기독 청년을 부르십니다.“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까”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부름에 응답할 이사야와 같은 청년들이 많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251.협동적 신앙
원 두우, 아펜셀라, 두 선교사들의 신앙은 또한 협동적 신앙이었습니다. 한 분은 장로교요, 다른 분은 감리교였으나 서로 협동하여 일을 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들이 타고 오던 배가 점점 제물포 부두에 가까이 오니 처음에는 두 선교사가 서로 먼저 내리려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그들이 말하기를“우리 미국의 예의로는 레이디 퍼스트(lady fist)인데 아펜셀러 부인을 먼저 내리게 합시다”그 후에 두 분이 같이 내렸다고 합니다. 이 협동적 정신은 내내 그들의 모든 선교사업에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교파는 비록 다르나 모든 일에 피차에 협력하였습니다.
우선 선교사업에 피차 경쟁을 피하기 위하여 선교구역을 정하였습니다. 원래 인천 지방은 감리교 구역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실 해방 전 까지는 이 곳에는 감리교회만 있었습니다. 서울, 평양, 같은 대도시외에는 꼭 구역대로만 선교를 하였습니다. 또한 공통된 일에는 모두 장로교와 감리교가 연합하여 일하였습니다. 곧 성경을 번역하는 일 찬송가를 출판하는 일, 주일 공과를 만드는 일을 연합하여 도왔습니다. 처음에는 병원, 학교까지도 다 연합하여 일을 하였습니다. 또한 연합공의회를 조직하여 모든 것을 협력하였으며 동경 유학생들에게 전도하기 위하여 이 공의회에서 한번은 장로교 목사, 그 다음은 감리교 목사를 파송하여 공동으로 전도사업까지 하였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그 때에 장로교회는 남·북 장로교, 호주 장로교, 캐나다 장로교, 네 교파의 선교사들이 왔으나 교회는 한 장로교회를 세웠습니다. 또 남·북 감리교회도 두 교파에서 선교사들이 왔으나 합하여 한 감리교회를 세웠습니다. 문자 그대로 이 개척 선교사들은 다 에튜메니칼 정신을 가졌던 것입니다. 개척 선교사들이 이렇게 지도하였지만 해방 이후 혼란기에 장로교회나 또는 감리교회가 몇 갈래로 분열된 것은 실로 서글픈 일입니다. 개척 선교사들의 협동적 신앙이 아쉽습니다.
예수 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을 모아놓고 기도하실 때에 하나되게 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그 뜻은 다 똑같이 되라는 말은 아닙니다. 비록 각각 다른 점이 있으나 주안에서 공통한 목적을 위하여 하나가 되라는 뜻입니다. 몸에는 여러 가지 지체가 있습니다. 이, 목, 구, 비가 다 다릅니다. 그러나 한 몸 안에서 하나가 됩니다. 포도나무 가지가 각각 다릅니다. 그러나 포도나무 곧 예수 안에서 다 하나가 됩니다. 우리가 신학적으로 꼭 같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다 그리스도에게 속하여 공통한 일에 곧 전도나 사회봉사나 민족이나 국가를 위한 큰 일에 협력할 줄 알아야 합니다. <개척자의 신앙>에서
252.사랑 장
사도 베드로는 “무엇보다도 열심히 서로 사랑할 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 4:8)라고 가르쳤습니다. 사도 요한 은“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니라”( 요일 4:7-8)고 말하였습니다.
고린도 전서 13장은 사랑 장으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고린도 전서 12장 마지막 절부터 읽어야 그 뜻이 더욱 분명합니다.“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12장에 사도 바울은 우리 믿는 이들이 받는 여러 가지 은사에 대하여 말 하다가 모든 은사 가운데도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며, 또한 제일 좋은 것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하면서 사랑이 곧 더욱 큰 은사요 제일 좋은 길임을 가르칩니다. 과연 그러합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에 있어서 더욱 큰 은사인 사랑을 사모할 것이요, 우리는 신앙생활에 있어서 제일 좋은 길을 꼭 걸어야 합니다. 왜? 그 이유를 13장에 설명했습니다.
고린도 전서 13장은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잇습니다. 1절로 3절은 사랑의 우월성, 필수 성 곧 사랑은 반드시 있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4절로 7절까지는 사랑의 본질 혹은 내용을 분석하여 자세히 가르칩니다. 그리고 8절로 13절까지는 사랑의 영원성 곧 사랑은 길이 폐하지 아니하고 영원함을 지적합니다. 13장 1절에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라고 하였습니다. 그 뜻은 아무리 무슨 방언을 하고, 혹은 사람이 할 수 있는 모든 방언을 알고, 또 비록 하늘에서 쓰는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으로 그 은사를 쓰지 못하면 쓸데없는 소리뿐이라고 지적합니다. 도“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사실 아무리 예언의 능력과 모든 신비를 깨닫는 지식을 가졌다 하여도 그리고 산을 옮길 만한 큰 믿음을 가졌다고 하여도 사랑이 없으면 사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다시 말하면 아무리 많은 구제사업을 하고 심지어 순교까지 한다고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253.사랑의 은사
사실 그렇습니다. 사랑은 햇빛과 같습니다. 아무리 붉고 푸른 아름다운 꽃들이 많다고 하여도 빛이 없으면 그 꽃들은 볼 수 없습니다. 사랑은 소금과 같습니다. 아무리 좋은 만반 진찬(珍饌)이 있을지라도 거기 소금이 들어가지 아니하면 맛이 아니 납니다. 사랑은 모든 귀한 은사를 빛나게 하고 사랑은 모든 좋은 일을 더욱 만나게 하는 귀한 은사입니다. 아무리 다른 은사와 재능을 많이 받았다고 할지라도 사랑의 은사를 받지 못하면 그것들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은사는 누구나 반드시 받아야 합니다. 사랑 없는 신앙, 사랑 없는 전도, 사랑 없는 열심, 사랑 없는 선물, 사랑 없는 봉사(자선사업)는 아무 쓸데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은사는 꼭 받아야합니다. <제일은 사랑>에서
254.어부의 기쁨
해방 후 처음으로 남산에 모여 연합 부활절 예배를 드릴 때에 한 선교사가 그 옆에서 있는 원일한 박사에게 “만일 당신이 한국에 오지 않았던들 오늘 이 광경을 볼 수 있었을까요?”라고 하였답니다. 전도하는 이들에게는 어부의 기쁨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면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한국에도 낚시질하려 다니는 이들이 상당히 많아진 듯합니다. 얼른 보면 낚시질하는 것처럼 답답한 일이 없을 듯합니다. 그러나 낚시질에 미치는 이들도 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조금은 답답하다가도 큰 물고기 하나가 물려나오면 종일 답답하던 생각이 일시에 다 사라지고 기쁨이 충만하여지는 모양입니다. 전도하는 이들에게도 이런 기쁨이 있습니다.
저는 어릴 때에 어떤 전도사가 큰 고기를 하나 잡았다고 기뻐하던 것을 보았습니다. 그 분이 처음으로 당시 안주에 큰 실업가이시던 고한규 씨를 인도하였습니다. 만념에 우리 교회에서 장로로 시무 하시다가 세상을 떠나신 고한규 장로님을 여러분은 다 아실 것입니다. 참 큰 고기였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전도자 무디 선생을 킴볼이라는 무명 전도사가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였습니다. 그 분은 당시 무명 청년 한 분을 인도하였지만 그 후에 무디는 수십 만 의 영혼을 구원한 위대한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사실 여러분이 전도하여 믿는 그들이 장차 무슨 큰 일을 할지 모릅니다. 여러분! 전도를 하는 이들만 이 영적 어부의 큰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255.천국의 보병
마지막으로 전도는 현대 전쟁과 비슷합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먼저 공군이 가서 적국의 중요한 군사시설을 폭격합니다. 그리고 해군이 또한 동원되어 적국에 가까이 가서 집중 함포(艦砲)사격으로 적의 요새를 파괴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공군 해군만으로 완전한 승리는 얻지 못합니다. 마지막에는 육군이 상륙하여 적진을 그리고 적의 영토를 점령해야 완전한 승리를 거둡니다. 전도에는 공군과 비슷한 것이 잇습니다. 곧 방송전도나 문서전도는 어디에서나 복음의 폭탄을 던져 악마의 아성을 깨뜨립니다. 그리고 빌리 그레함 전도대회와 같은 대중 전도집회는 마치 해군의 함포 사격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방법만으로는 온전한 승리를 거두지 못합니다. 하늘 나라에도 육군 곧 보병이 필요합니다. 새로 믿으려고 하는 이들을 하나씩 하나씩 인도하여 내는 이가 필요합니다. 기억합시다. 우리가 다 방송전도는 할 수 없습니다. 빌리 그레함 처럼 대중전도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개인 전도는 할 수 있습니다. 곧 천국의 보병은 될 수 있습니다. 찬송가에 있는 말과 같이 “천사 같이 말못하고 바울 같이 못하나”그러나 누구나 내 집 근처에 다니면서 개인 전도는 할 수 있습니다.
이 전도의 달에 우리 교우들은 누구나 다 보병이 되기를 바랍니다. 다니엘 12장 3절에 “많은 사람을 옮은 길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라” <전도자의 축복>에서
256.몸과 그 지체
하나님께서 본래 인간을 서로 다르게 만드셨습니다. 재능도 다르게 주셔서 다른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 다양성 가운데서 일치성을 찾아야합니다. 각각 지기 받은 은사대로 공헌하면서 교회와 사회의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직업에 귀천이 없습니다. 일에 귀천이 없습니다. 피차에 존경하며 협력하는 가운데 교회와 민주사회는 발전합니다.
교육에 있어서 획일주의 교육은 민주사회의 장례를 위하여 크게 우려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교회 안에서도 나와 좀 다르다고 협력을 거부하는 태도, 또는 에큐메니칼 운동은 단일 교회를 지향하는 줄 오해하는 이들도 없지 않은 듯합니다. 획일주의는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257.상부상조하는 지혜
여러분은 어린이들이 읽는 동화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한 번은 손과 발과 입이 모여 앉아서 이야기를 하다가 위에 대한 불평이 나왔습니다. 우리는 열심히 일하여 결국 모두 위 곧 밥집에 음식물을 넣어주는 것밖에 무엇이 잇느냐? 위는 받아먹기만 하고 무엇을 하느냐? 그리하여 손과 발, 입 세 가지가 요새말로 스트라익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손과 발은 먹을 음식을 가져도 안 오고 입은 삼키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며칠을 지내니 손과 발도 맥이 없어졌고 혀까지도 놀릴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길게 이야기 할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지혜는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남을 돕는 것이 나를 돕는 것입니다. 지체끼리 분쟁이란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그리스도 몸 안에 있는 모든 지체는 화평해야 합니다. 상부상조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몸과 그 지체>에서
258.아브라함의 길
금년이 바로 미국의 독립 200주년 기념의 해입니다. 내가 일찍이 들으니 어떤 남미의 한 정치가가 미국의 한 대사를 만나 이런 내용의 이야기를 하였다고 합니다.“당신나라의 조상들은 일찍이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하여 이 미주 대륙에 왔습니다. 그런데 당신나라 국민들은 신앙의 자유뿐만 아니고, 물질까지 풍부의 얻었습니다. 그런데 부끄러운 말이나 우리 나라의 조상들은 물질을 얻기 위하여 이 대륙에 왔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들은 물질도 얻지 못하고 또 자유도 얻지 못합니다.”의미심장한 말입니다.
우리는 조국의 발전과 민족의 중흥을 위하여 온갖 힘을 다 쓰고 있습니다. 경제개발이 필요합니다. 근대화가 요구됩니다.
그러나 더 귀한 것을 잊지 아니해야 합니다. 그것은 정신면입니다. 정신 개발이 필요합니다. 신앙 운동이 필요합니다. 믿음은 더 귀합니다. 소망도 더 귀합니다. 공의도 더 귀합니다. 최후 승리는 언제나 진리와 정의 편에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삶의 태도, 롯의 삶의 태도, 즉 그리스도인의 삶의 태도와 세상 사람들의 태도와― 여기에 앉아 있는 우리는 어떤 삶의 태도로 인생 길을 갑니까? 아브라함의 길을 걷습니까? 롯의 길을 걷습니까?
바른 가치관과 바른 선택이 필요합니다. 두 갈래 길이 우리 각 사람 앞에 놓여 있습니다. 또 우리 민족 앞에도 놓여 있습니다. 신앙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길을 걸읍시다. <아브라함과 롯>에서
259. 로마서 1장 17절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거룩 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1:17)
오늘은 바로 종교개혁 459주년 기념일입니다. 1517년 10월 31일 마틴 루터가 독일 뷔텐베륵크 교회에 95개 조항의 개혁안을 계시한 날입니다. 지금 읽은 로마서 1장 17절은 전 로마서의 주제요, 또 종교개혁의 구호입니다.
260.루터와‘빌라도의 사다리’
루터는 본래 가난한 광부의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독실한 신앙의 가정으로 당시 천주교의 교훈대로 하나님은 진노의 신이요 그리스도는 엄한 재판장이며 구원은 성자 예수뿐만 아니고 성모 마리아 그리고 또 신부, 주교, 교황을 통하여 얻는다고 배웠습니다. 루터는 대학 재학시절에 중상을 당한 적도 있고, 중병으로 고생한 때도 있고, 한 친구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경험 등을 통하여 인생문제에 대한 고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하루는 길을 가다가 갑자기 폭풍우와 뇌성병력이 일어날 때에 길가에 꿇어앉아 “성 안나 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하고 부르짖으면서 그 때부터 수도사가 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는 수도원에 가서도 정신적 고민이 또한 있었습니다. 그것은 성경의 교훈과 당시 천주교에서 가르치며 또 하는 일들이 다른 점들이었습니다. 그는 당시 교회의 교훈대로 아무리 선행을 힘써 보았으나 심령의 평안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그 후 그가 성경을 가르치게 되어 특별히 시편, 갈라디아서, 로마서 등을 연구하는 중 지금 읽은 로마서 1장 17절의 말씀 곧“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하는 말씀을 통하여 구원의 진리를 깨닫고 비로소 확신과 기쁨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 후 그가 처음으로 로마를 방문하였을 때 다른 순례자들과 같이 선행을 쌓으려고 빌라도의 사다리라는 층계를 무릎을 꿇고 올라가다가 이 말씀이 홀연히 그 심령에 들려 곧 일어나 내려왔다는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합니다.
261.종교개혁 3대 원리
당시에 교황이었던 레오10세가 속죄표 판매를 시작하는 것을 보고 루터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95개조를 제시하면서 공개 변론을 하자고 도전하게 되어 당시 유럽을 뒤엎은 종교개혁의 봉화는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종교개혁의 3대 원리는 신자로서 언제나 기억할 만한 불멸의 진리입니다.
(1)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고 죄 사함을 받습니다.
(2) 오직 성경만이 신앙과 행실의 표준입니다. 교회의 전통은 성경으로 판단하여 취사 선택해야 합니다.
(3)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는 오직 그리스도 한 분뿐입니다. 신부, 교황, 마리아가 아닙니다. 누구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고 제사장의 자격이 있습니다. 여기 신앙생활에 있어서 개인의 자유와 평등의 원칙을 선언합니다. <믿음으로 살리라>에서
262.기회의 문
어떤 농부가 중병에 걸려 며칠 동안 의식을 잃었다가 다시 정신을 차렸다고 합니다. 눈을 뜨자말자 지금이 어느 때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둘러앉았던 이들이 지금은 봄이라고 하니 큰 소리로“아 그러면 곧 일어나 씨를 뿌려야지”하였다고 합니다. 기회의 제한성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겨울은 때로는 갑자기 오기도 합니다. 특별히 금년 겨울은 갑자기 오는 듯싶습니다. 큰 눈이 이미 11월중에 내리기도 하였습니다. 천재는 갑자기 옵니다. 교통사고도 갑자기 일어납니다. 화재도 역시 그러합니다. 질병도 갑자기 올 때가 많습니다. 어떤 분은 갑자기 쓰러집니다. 죽음도 갑자기 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기회의 문이 닫히기 전에 꼭 할 일을 해야합니다. <삶과 그 기회>에서
263.협동으로 얻는 승리
협동은 우주의 대원리입니다.
천문학을 깊이 연구하지 않고도 천체가 어떻게 운행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달은 지구를 돌고 지구는 태양을 돕니다. 이 우주는 모든 천체들의 협동 가운데서 그 질서가 유지됩니다.
이스라엘과 아말렉의 전투에서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그 손이 내리면 아말렉이 이긴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팔이 피곤해져서 돌을 가져다가 모세를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훌이 좌우 편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주니 이스라엘이 큰 승리를 거뒀다고 하였습니다.
여기 협동을 통하여 큰 승리를 얻은 역사적 사실이 있습니다. 여호수아를 비롯한 사람들은 직접 싸우고 모세는 그들을 위하여 쉬지 않고 기도하였으며, 아론과 훌은 기도하는 모세를 도왔습니다. 여기에 인간과 인간의 협동이 있고, 또 하나님과 인간의 협동이 있습니다. 그 결과는 위대한 승리입니다.
264.협동은 생의 법칙
협동은 생의 법칙입니다. 성경은, 몸은 하나이나 지체는 여럿이 있음을 지적하여 가르칩니다. 이 지체는 각각 다릅니다. 귀와 눈이 다릅니다. 손과 발이 다릅니다. 입과 위가 다릅니다. 그러나 이 모든 다른 지체들이 서로 협동하는 가운데서 몸이 살아갑니다. 만일, 한 지체라도 협동하지 않고 그 기능을 포기하면 몸은 생명을 유지하지 못하고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협동은 생의 법칙이요, 생명은 절대 불가결의 요소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생명 있는 유기체입니다. 교회 안의 여러 지체도 각각 다릅니다. 그러나 서로 협동하는 가운데 교회의 생명은 유지되고 발전됩니다. 주님은“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하는 의미심장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265.협동의 위력
협동이 있는 곳에 큰 힘이 생깁니다. 물방울이 합하여 태평양과 같은 바다 가 됩니다. 큰 기선이나 군함도 뜰 수가 있습니다. 작은 티 끝이 합하여 태산이 됩니다. 모이는 곳에 힘이 생기고 서로 합하여 협동하고 하나님께서 협동하실 때에 이루지 못할 일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권합니다.“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갓을 굳게 지키라’또한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 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전도는 하나님과 인간의 협동, 또 인간과 인간과의 협동으로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합심하여 기도할 때에 이 협동은 문자 그대로 이루어지며 그 결과는 큰 승리로 나타날 것입니다. <신앙생활과 협동>에서
266.솔제니친의 서한
최근 소련에서 추방된 유명한 작가 솔제니친이 그 정부에 보낸 서한 가운데 1917년 볼세 비기 혁명이후 소련 국내에서 숙청을 당한 국민이 6천6백만에 이르렀다고 지적하였습니다. 이 숫자는 아마 제일 신비성 잇는 숫자입니다. 또한 무신론의 체제 곧 공산주의의 체제가 얼마나 포악하고 무섭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사실 소련뿐만 아닙니다. 중공이나 북한이나 무신론자들의 독재 아래 사는 국민들은 다 이러한 비참한 운명 아래 놓여 있습니다. 성경은 이런 무신론자들을 어리석다고 지적하였습니다.
사실, 무신론은 이론적으로 어리석은 이론입니다. 무신론이란 이론은 하나님이 안 계시다는 이론입니다. 현대인간이 어떻게 감이 이런 이론을 가질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계시다는 논증은 그 증거가 하나만 있어도 능히 성립될 수 있지만 하나님이 안 계시다는 논증은 사실 전 우주와 우주의 역사를 탐색하여 논증하기 전에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어리석은 무신론자>에서
267.빌립과 나다나엘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예수 님에 대하여 자세히 말했습니다. 그러나 나다나앨은“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잇느냐”고 반박하였습니다. 아마 그 뜻은 메시야가 나사렛에서 날 리가 없다고 생각함과 동시에, 갈리리 사람인 나다나엘은 나사렛 사람인 빌립을 처음에는 좋게 여기지 않았음으로 그런 질문을 한 것 같습니다. 그 당시 갈라리 사람은 나사렛에 대하여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다나엘의 편견에 치우친 반박에 대하여 빌립은 변론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가 말하기를 “와 보라”고 하였습니다. 결국 나다나엘은 빌빕을 따라 예수 님께 나아가 그분을 만났습니다. 그 결과는, 예수는 과연 만민의 구주이신 메시야인 줄을 나다니엘도 깨달아 알게 되어 믿게 되었습니다.
빌립은 말을 믿지 않는 나다니앨에게“와 보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실제로 와서 체험하여 보라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중에 혹 니다나엘처럼 기독교에 대하여 편견을 가진 이가 있습니까? 그러면 이런 분에게 저 역시“ 와 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곧 예수를 믿어 보세요. 실제로 성경을 읽어보세요. 그러면 기독교가 참 진리의 종교인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와 보라>에서
268.성경공부와 신앙 증진
성경 말씀을 항상 읽고 공부하면 우리의 신앙은 자연히 장성하게 됩니다. 전에 유명한 부흥사 디 엘 무디 목사는 이러한 말을 하였습니다.“나는 처음에 믿음을 더 얻기 위하여 기도만을 힘썼는데 그것만으로는 부족하였다. 그 후 나는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가운데서 온다는 성경구절을 읽고 공부하기를 시작하였다 그랬더니 믿음은 자연히 성장하게 되었다”
또 교회 역사를 보면 성경을 연구하는 가운데서 모든 위대한 신앙운동이 일어났습니다. 16세기에 종교개혁 운동은 그 당시의 수도사로 있던 마틴 루터가 성경을 연구하는 가운데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의롭다하는 진리를 깨닫게 됨으로 이 종교 개혁이 위대한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19세기 이후에 선교 운동도 윌리암 캐리, 리빙스턴 같은 이들이 성경을 읽는 가운데“너희는 온 천하에 가서 복음을 전파하라”는 주님의 음성을 다시 들음으로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20세기에 접어들어 에큐메니칼 운동이 일어난 것도 성경을 연구하는 가운데 오직 그리스도의 몸, 곧 교회는 하나라고 깨닫는데서 일어났습니다. 또한 교회의 사회 참여, 사회정의 운동도 역시 성경을 공부하는데서 곧 공의를 물같이 흐르게 하라는 성경의 말씀을 새롭게 듣는데서 일어났습니다.
에스라는 자기자신이 먼저 성경을 연구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또한 성경을 연구할 뿐만 아니라 그대로 준행(遵行)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이처럼 성경의 진리를 아는 것은 매우 필요하나 아는 지식에만 그치면 안 됩니다. 그대로 준행 하여야 합니다. 사실 성경을 공부하는 목적은 그대로 행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신명기 26장 16절에“오늘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규례(規例)와 법도를 행하라고 네게 명하니 그런즉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지켜 행하라”하였습니다. 또한 여호수아 1장 8절에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이 율법 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그러므로 우리 주님도 산상보훈에서“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다”고 했습니다.
269.현대 우리 교우들은 어떠합니까?
아마 우리 교우 가정에는 누구나 성경 한두 권은 가지고 있는 줄 생각합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성경을 읽는가 입니다. 연구하는가 입니다. 성경 위에 먼지는 없습니까? 어떤 분은 말하기를 오늘날 교인들이 성경 위에 앉은 먼지를 일시에 털면 해가 보이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여러분은 성경을 읽고 공부하기로 이 성서 주일에 결심하기를 바랍니다. <한 애국자의 결심>에서
270.참된 향기
장미는 그 모습이 아름다울뿐더러 향기가 또한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장미를 더 사랑합니다. 백합도 역시 그러합니다. 모습이 아름다울 뿐더러 향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백합을 더 사랑하게 됩니다. 풀 가운데도 특별히 향기가 있는 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옛날부터 초향(草香)이란 말이 있습니다. 열대 지방에 가면 흔히 이런 향기 있는 풀을 동산에도 심고 방안에도 심습니다. 나무 가운데도 특별히 향기 잇는 나무가 있습니다. 이런 나무를 흔히 향나무라 합니다. 이런 나무로 향품을 만듭니다.
옛날 사람이나, 지금 사람이나, 우리는 다 이렇게 향기를 좋아합니다.
옛날 솔로몬이 그 아름다운 성전을 지을 때에 외부는 물론 돌로 쌓았으나 그 내부는 향기가 나는 백향목(柏香木)으로 전부 입혔습니다. 그리해서 성전 안에 들어가면 언제나 향기가 있었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성전 안에는 향단이 있어서 그 위에 향기가 또한 성전 안에 가득하게 하였습니다.
271.예배의 향기
교회사를 읽어보면 동 로마 제국의 데오도시우스 황제가 콘스탄티노불에 그 유명한 성 소피아 예배당을 지으면서 돌을 쌓을 때에 회(灰)산물에 향을 섞었으므로 언제나 그 안에 들어가면 향기가 가득하였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렇게 옛날부터 인간은 향기를 사랑해서 몸에 화장을 할 떼에도 향유를 썼으며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에도 향품을 사용하였습니다.
예수 님이 탄생하실 때에 동방박사가 멀리서 와서 아기에게 경배할 때에도 황금과 유황과 물약 이 세 가지를 예물로 드렸습니다. 여기 유황이라는 것은 지극히 귀한 동방의 향품을 의미합니다. 향기는 눈에는 보이지 아니하나 온 방안을 향기롭게 합니다. 그러므로 옛날부터 향기는 거룩함과 순결함과 아름다음의 상징이 된 것입니다. 인격의 향기가 있습니다. 영혼의 향기가 있습니다. 사실 모든 그리스도인이 향기가 있어야합니다.
이미 말씀들인 대로 옛날부터 하나님께 예배 드릴 때에 향품을 사용하였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 향기를 제물로 드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옛날 구약시대에는 성전 안에 향단이 있어서 언제나 향을 피웠고, 자금까지도 오랜 역사적인 교파 가운데는 예배할 때에 향을 피우는 풍속이 잇습니다.
제가 몇 해 전에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 갔을 때에 어떤 주일에 친구의 인도를 받아 인도사람으로 조직된 교회에 가니 그 교회에서는 향을 많이 피우면서 예배를 드리는 것을 본 일이 있습니다. 실지로 예배 시에 향을 피워야 하느냐 하는 문제는 교회의 전통과 예배의식을 따라 그 견해가 각각 다른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믿는 사람들은 누구나 하나님께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려야합니다.
272.솔로몬의 지혜
옛날 시바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사모하여 그를 방문할 때에 그의 지혜를 시험하여 보기 위해야 아름다운 꽃 화분 둘을 가져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꽃들은 꼭 같은데 실상은 하나는 산 꽃이요 다른 화분은 사람이 만든 꽃이라고 합니다. 이 시바 여왕이 화분 둘을 멀리 갔다 놓고 솔로몬 왕에게 어느 화분이 참 꽃이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이 말을 듣고 솔로몬 왕은 조금 생각하더니 그 옆에 있는 신하에게 말하기를“애, 동산에 나가서 벌과 나비를 몇 마리 잡아오너라”하였습니다. 조금 후에 그 신하가 벌과 나비를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그 때에 솔로몬은 다시 말하기를“얘, 그 벌과 나비를 방안에 놓아 주라”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이 벌과 나비들은 그 방안에서 조금 날더니 금방 화분 있는 데로 날아갑니다. 그러더니 그 놈들이 한편화분에만 앉고, 다른 화분에는 한 놈도 안 앉았다고 합니다. 그때에 솔로몬 왕은 웃으면서 말하기를“저 벌과 나비들이 앉은 화분이 산 꽃이다”하였다고 합니다. 왜 벌과 나비들이 산 꽃에만 앉았습니까?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곧 산 꽃에만 향기가 있습니다. 여러분 산 믿음이 있습니까? 참으로 예수를 믿고 그를 나의 중심에 영접하였습니까? 만일 이점에 분명치 못한 이가 있으면 오늘 저녁 중심에 주님을 영접하시기를 바랍니다. 산 장미가 됩시다. 죽은 장미가 되지 맙시다. 죽은 장미는 쉬 썩어서 더러운 냄새가 납니다. 산 그리스도인이 됩시다.
성경에 보면 베다니 마리아의 믿음과 사랑의 향기는 지금까지도 온 세계에 널리 펴져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향기>에서
273.부활 주일의 선포
부활절은 온갖 불의에 대한 의의 온전한 승리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의와 불의, 진리와 허위, 선과 악, 자유시상과 노예화사상, 광명과 암흑 세력의 투쟁의 마당입니다. 때로는 허위가 진리를, 악이 선을 이기는 듯합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이 오래 갈 수는 없습니다.
우리 북한 동포들은 아직도 유물론, 무신론 등 거짓 사상과 그 제도 아래서 신음하고 있습니다. 불의와 암흑의 온갖 쇠사슬에 얽매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언제까지 계속되지 않습니다. 한 조각 검은 구름이 때로는 밝은 해를 가리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잠깐 뿐입니다. 오래 계속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의 불의가 의를 일시 이길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잠깐 뿐입니다. 의는 반드시 영구한 승리를 얻을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절이 가져오는 첫 메시지입니다. 이것이 부활절을 선포하는 첫째의 영원한 우주와 인간의 진리입니다.
274.죽음과 부활
이 부활절은 인간의 죽음이 최후가 아니고, 무덤이 종착역이 아니고. 영원한 불멸의 존재이며 또한 이 영생은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온다는 사실을 확증하여 주십니다.
나는 일찍이 북한에 있었을 때에 어떤 부인의 장례식을 주례한 적이 있습니다. 그 부인의 아들이 만주에 가서 살았는데 그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다 못하여 결국 장례식을 거행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기다리든 아들이 장례식을 마치자마자 그의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리고는 그의 어머니 관 위에 엎디어 그 관을 부둥켜안고 대성통곡을 하며“어머니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가셔요”크게 부르짖었습니다. 그 애절한 음성이 내 귀에 지금도 쟁쟁합니다. 인생이 죽으면 어디로 갑니까? 무덤 저편에 무엇이 있습니까?“사람이 죽으면 그가 다시 살겠느냐”하는 의문은 욥 이래 인간의 끊임없는 문제입니다.
지금은 바로 꽃이 피고 새싹이 굳은 땅을 깨치고 솟아나는 계절입니다. 인간의 최후는 영원한 암흑입니까? 인생은 이렇게 허무합니까? 실로 죽음은 인생의 가장 큰 의문이요 최대의 원수입니다. 그러나 한편 인간 심령의 깊은 속에는 영원에 대한 동경이 잇습니다.
영국의 시인 테니슨의 유명한 시구와 같이“인간은 그가 죽으려고 지음을 받은 줄로 생각지를 않는다”(Man thinks he was not made to die.)고 했습니다. <부활주일이 선포하는 3대 진리>에서
275.씨스틴 채풀’ 예배당
로마에 구경가는 사람은 로마시, 바디칸시티 속에 씨스틴 채플이라고 하는 작은 예배당을 찾아갑니다. 이 예배당은 작지만은 세계적으로 유명합니다. 그것은 16세기에 가장 유명하였던 미켄란잴로의 그림이 모든 벽에 걸러 있기 때문입니다.
또 그 그림은 보통 그림이 아니라, 창세기 1장부터 요한 계시록 마지막까지의 성경에 있는 중요한 장면을 여러 해 동안 그려서 성전 벽에 붙인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나 그 예배당을 구경하려 갑니다. 천장 중앙에 보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는 장면과 아담을 창조하는 그림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가락에 닿을 때에 아담에게 생명이 있게 됩니다. 아담이 산 사람이 됩니다.
생명의 근본은 하나님이십니다. 산 것이 산 것을 낳습니다. 죽은 것이 산 것을 낳지 못합니다. 이 우주의 생명은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무기물이 유기물을 만들지 못합니다.
276.생명 되신 그리스도
신약에 와서 4복음서를 읽어보면 예수 님의 일대기(一代記)가 기록되었는데, 예수 님의 여러 행적이 자세히 기록되었으나 한가지 찾을 수 없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여러분은 주의해 보셨습니까. 예수 님께서 여러 가지 일들을 많이 하셨지마는 장례식 했다는 기사는 없습니다. 4복음을 다 읽어보아도 장례식 했다는 말은 없습니다.
예수 님께서는 죽은 사람은 만날 때마다 꼭 살려주셨습니다. 죽은 야이로의 딸을 살려주셨습니다. 베다니 나사로가 죽은지 나흘 된 것을 무덤에서 살려 내셨습니다. 예수 님 자신도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3일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그리스도는 생명입니다.
그리스도와 접촉하면 그냥 죽어 있을 수는 없습니다. 살아나는 것입니다. 요한 복음 11장 25절에“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사라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하신 그 말씀이 바로 그 뜻입니다.
277.영원히 사는 삶
작년에 영국의 처칠 수상이 90평생을 살다가 서거했습니다. 몇 해 전에 세계적으로 존경받던 유명한 신학자요 의사인 알버트 슈바이처 박사가 역시 90평생을 살다가 아프리카 람바레네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오래도록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을 볼 때,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한말(韓末) 한국사회와 교회의 유명한 지도자 가운데 한 분이었고, 일찍이 YMCA의 총무이셨던 월남 이상재 선생의 일화 하나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상재 선생이 나이 퍽 많았을 때에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때는 영국의 로드 죠지 같은 오래 사는 이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또 이 사람들은 말하기를 내가 건강하니 100세를 살겠다, 120세를 살겠다고 하는 말이 신문에 났다고 합니다.
그런 신문을 본 어떤 청년이 연로하신 이상재 선생에게 가서 묻기를“누구는 얼마를 살겠고 누구는 얼마를 살겠다고 말하는데 선생은 얼마나 사시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이 선생이 얼른 대답하는 말씀이“그게 다 사는 법을 몰라 그렇지, 나는 영원히 살 테야”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삽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산다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는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그를 믿는 자에게는 죽음이 없습니다.
278.무디의 부탁
19세기에 미국에서 유명한 부흥사로 교회를 크게 부흥시킨 무디라고 하는 전도자가 있었습니다. 지금 빌리 그래함처럼 유명한 이였습니다. 이 분이 점점 나이가 많아 갈 때에 어느 곳에서 설교를 하며 이런 얘기를 했다고 합니다.
“아마 오래지 않아서 여러분은 나에 대한 소문을 쉽게 들을 것입니다. 이 무디가 죽었다 하는 소문을 들을 것입니다. 혹 신문에도 나서 여러분이 볼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내가 미리 부탁하는 것은 그런 소문은 곧이 듣지 마세요. 나는 영원히 살 것입니다. 내가 이 육신을 벗어 놓을 떼는 지금 보다 더 분명히, 더 똑똑히 , 더 깨끗이, 더 풍부하게, 더 행복하게 영원히 살 것입니다”이것은 사실입니다.
참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며 생명의 근본 되시는 예수 님을 믿고 그와 하나가 될 때에는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사람이 세상에서 이런 것도 구하고 저런 것도 구하지만, 요컨대 인간에게서 최고로 요구되는 것은 생명입니다. 왜 돈을 모으려고 합니까? 돈이 있어야 생명이 윤택하게 살 수 있어요. 왜 지식을 많이 얻으려고 합니까? 지식이 있어야 우리의 생명이 지적으로 풍부하지요.
예수 님께서는 세상에 오신 목적을 요한 복음 10장 10절에 설명하셨습니다.“너희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부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믿을 때 우리의 도덕적 생명, 우리의 문화적 생명, 모든 방면의 생명이 풍부해집니다. 영원해집니다. 예수 님께서는 이와 같은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길, 진리, 생명>에서
279.파종과 수확의 원리
옛 날이나 지금이나 애굽은 나일강이 범람할 때에 식물인 곡식을 물위에 던져서, 관개(灌漑)를 해서 농사를 지으므로 물위에 던져야만 가을에 많은 수확을 얻게됩니다.
우리 한국과 같이 벼농사를 많이 하는 나라에서는 이 원리를 누구나 잘 아는 것입니다. 문자 그대로 봄에 나가서 물위에 떡의 자료가 되는 종자를 뿌립니다. 그래야 가을에 많은 수확을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여기 이 말씀은 파종과 수확의 원리를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영적 세계에 있어서 선행과 봉사의 희생이 있으면 오랜 후에라도 응보가 있을 것이라 하는 원리인 것입니다. 이런 원리에 대한 확신은 우리 동양 사람들도 옛날부터 공통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해서 옛날부터 내러오는 속담 가운데, 적선지가 필유여경( 積善之家必有餘慶)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선을 쌓는 길에 반드시 경사스런 일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물론 보편적인 인과 응보의 원리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많은 주석(註釋)가의 말에 의하면 이 교훈은 이 원리를 가르쳐 줄 뿐 아니라 한 거름 더 나아가, 떡을 물위에 던진다고 하는 말은 물과 같이 무심하여 반응이 없는 곳에서라도 선행하고 봉사를 잘하면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을 때가 있으리라는 뜻입니다.
280.아름다운 미담
일제시대에 제가 신의주에 있을 때에 신의주 거리에서 작은 상점을 경영하던 한 믿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이 청년은 자본도 별로 없는 조그만 상점을 차리고 경영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에 일본정부가 주동이 되어 만주(滿洲)국과 합작을 하여서 압록강 댐을 만들기 시작하였습니다.
오늘날 북한의 많은 전기가 다 거기에서 나오지 않습니까? 그 삭주라고 하는 곳에 동양에서 제일 큰 댐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신의주에서 작은 상점을 경영하던 이 청년이 그 땜 공사의 여러 물자를 용달(用達) 하는 책임을 맞게 되었습니다.
많은 물자를 사서 용달 하는 가운데 이 상점은 3, 4년 동안에 힘 안들이고 크게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신의주 사람들은 다 놀랐지요. 그런데 그 배후에는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미담이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제가 이 청년의 부친으로부터 들은 것입니다. 이 분의 아버지가 일찍이 촌에서 농사하면서 살았는데 한 번은 밭에서 나가 일을 하다가 날이 저물어 어두워진 후에 자기 강냉이 밭을 지나오는데, 그 밭에서 인기(人氣)적이 났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어두운 때에 누가 남의 밭에 들어왔을까 이상하게 생각되어 그 밭을 헤치고 들어갔습니다.
들어가 보니 한 젊은 여자와 10여 세 난 아이가 분주히 강냉이를 따서 광주리에 담고 있었습니다. 바로 도둑놈이 눈앞에 있었지요. 그래 가까이 가보니까 자기가 잘 아는, 그 동래에 사는 가장 가난한 과부인데, 이 과부가 자기 어린아이를 데리고 와서 강냉이를 따고 있었습니다.
물론 처음 그의 생각에는 저들이 도적질을 하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 분하게 생각되었으나 곧 이 분의 마음 속에는, 그가 잘 믿는 분이고 후에 장로가 된 분인지라, 저 과부는 아무 것도 없는 과분데 얼마나 배가 고프면 강냉이를 따갈까 하는 불상한 마음이 생겨서 아무말하지 않고 어서 딴 것을 다 광주리에 담아 가지고 돌아가라는 말 한 마디밖에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도 아무에도 얘기를 안 했고 동래 사람들에게도 얘기를 안 했습니다. 그 후에 그 부인이 그 곳에서 살다가 아이들 공부도 시켜야 하겠고 또 농사를 지어서는 교육비를 당할 수도 없고 해서 신의주에 들어와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과부도 얼마 후에 그 동래를 떠났다고 합니다. 물론 어디로 갔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해서 근 20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세상일은 모릅니다. 그렇게 불쌍하게 자라난 과부의 아들이 그 후에 압록강 댐을 막는 일본 사람의 큰 회사의 사원이었더랍니다.
이 사원은 여러 가지 물건을 구매하는 책임을 맡았던 것입니다. 여러 상인 중에서 그 청부를 맡기는데, 이 청년은 얼굴도 모르고 이름도 잘 모르나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내가 아무개 아들이라고 하는 얘기를 했더니 그 사원은 두말하지 않고 내가 당신에게 다 맡긴다고 하면서 그 청부를 맡겼다고 합니다.
세상일은 모르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거칠고 각박하고 어지러울수록 우리는 남의 죄를 용서하는 용서의 떡을 이 거칠은 물위에 던질 줄 알아야겠습니다. 사실 예수 님께서는 70번씩 7번이라도 용서해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만 한 것이 아니고 자신도 친히 용서해 주셨습니다.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는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예수를 따르던 스테반도 자기를 돌로 치는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 주었습니다.
281.압록강에 빠진 쪽 복음
언더우드 박사와 아펜셀러 박사가 1885년에 정식 선교사로 들어 온기 전에 신교 북음은 저 북편 만주를 통해서 압록강을 건너 한국에 들어왔던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일찍이 스코툴랜드 장로교회에서 만주에 선교사 몇 분을 파송 했습니다. 봉천에는 로스라는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이 분이 중국에서 선교할 때에 한국 청년들이 봉천에 여행을 갔다가 그 선교사를 만나서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기 시작한 유명한 얘기를 우리가 다 잘 압니다.
그런데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꼭 사실인지는 모르나 사실이기에 이런 얘기가 생겼겠지요. 그 로스 선교사가 한국의 믿는 청년들과 같이 마가복음의 쪽 복음을 만주에서 우리말로 제일 먼저 번역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전도를 위해서 전도 인을 시켜 이 책을 궤짝에 넣어 가지고 압록강까지 왔다고 합니다.
그러나 압록강에 와보니 우리 정부에서는 철저한 쇄국정책을 쓰던 때인지라 강변에는 사람이나 물건이나 일체 왕래할 수 없을 때였습니다. 아무리 이 책을 들여오려야 들어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하다가 들어오지는 못하고 그만 그 책은 전부 압록강 물에 빠졌다고 합니다. 그 소식이 로스 선교사에게 들어갔습니다. 그는 마음이 좋을 리 없었지만 입맛을 몇 번 다시더니 하는 말이 “과히 상심하지 맙시다. 내 생각에는 앞으로 압록강 물을 먹는 사람들은 다 예수를 믿게 될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 가운데도 압록강물을 마시고 예수 믿으신 분 몇 분 계실 것입니다. 사실 해방 전까지 한국의 기독교가 제일 많은 곳이 평안북도였고 평안북도 가운데 제일 많은 곳이 압록강 좌우 언덕이었습니다. 그의 말대로 된 모양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저 생명의 말씀을 전하면 어떻게 전파가 될는지 아무도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수학을 거두게 해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도를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합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도를 해야합니다. 아침에도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거두지 말라고 했습니다. 밝을 때도 씨를 뿌리고 어두울 때도 씨를 뿌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노방전도도 계속합시다. 문서전도도 계속 합시다. 파송전도도 계속합시다. 우리 개인 전도에도 특별히 힘을 씁시다. <응보의 세계>에서
282.‘웨스트민스터 아벨’ 예배당
몇 해전에 제가 영국 런던에 잠시 머물렀을 때에 영국에서 유명한 예배당인 웨스트민스터 아벨이라고 하는 오래되고 유명한 예배당을 찾아간 일이 있습니다. 이 예배당은 중세시대에 아주 훌륭하게 지은 예배당입니다. 또한 영국 역대의 유명한 왕들, 정치가, 목사, 문학가 등 여러 위대한 분들의 무덤이 전부 이 예배당 안에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상하게 생각되실 지 모르지만 그것은 사실입니다. 이 예배당에 들어가면 돌담에다 전부 이름을 새겼는데 그 속에는 이미 세상 떠난 유해가 다 있습니다. 거기의 마루에도 거의 사람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그 이름 안에는 영국에서 가장 유명하던 이들의 유해가 마루 아래에 있습니다.
안내하시는 분 하시는 말씀이“우리 영국 풍습은 이상합니다 유명해지면 죽은 다음에 여러 사람이 밝고 다닙니다.”사실 그렇습니다. 그래서 거기 보면 영국의 유명한 이들의 무덤을 다 볼 수 잇는데 이 무덤 저 무덤을 구경하다가 제 마음 가운데 무슨 생각이 났느냐 하면 아프리카에 가서 개척 선교를 했던 리빙스턴이라는 선교사의 유해가 어디 묻혔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안내하는 이에게 물으니 오른쪽 복도를 가리려 주었습니다. 가보니 흰 대리석을 마루에 놓았는데 거기“데이비드 리빙스턴”이라 쓰고 그 아래 생년월일, 별세 연월일을 쓰고 성경구절을 하나 새겨 놓았습니다.
“또 이 우리 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리빙스턴은 이 성경 말씀을 읽을 때에 이 말씀을 통하여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직도 이 우리 에 들지 않은, 영락교회라고 하는 교회 울타리 안에 들지 않은 다른 양들이 많이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다른 양들이 많이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양들을 인도하시기 원하십니다.
필경 아프리카 대륙에도 이 주님의 다른 양들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하고“나는 그들을 인도하기 위해서 아프리카에 가겠다” 이 성경 구절이 그 일생의 운명을, 사명을 확정한 성경 구절이라고 해서 그의 무덤 위에다 새긴 것입니다. <주님의 다른 양들>에서
283.하나님의 신임
충성된 사람은 역경에서 더 충성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쉬울 때에는 우리가 충성 된지 충성되지 않은지 알 수 없습니다. 역경을 당할 때에 우리의 참된 충성이 나타나게 되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제가 몇 해 전에 학생들 앞에서도 얘기했지마는 다시 소개합니다.
284. 5 달러 짜리 충성
자기의 일생에 대한 경험의 이야기를 다룬 미국사람의 책을 보는 가운데, 다음과 같은 글을 쓴 것을 보았습니다. 자기가 소년 때 자기 이웃에 큰 부자가 사는데 그 부잣집에는 넓은 잔디밭이 있어서 그것을 잘 가꾸는 그런 집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그 부잣집의 여주인이 와서 하는 말이“얘 ! 너 우리 잔디 좀 깎아보지 않겠니? 내가 생각해서 보수를 주마”
그래서 그 소년은 기계를 가지고 기쁜 마음으로 잔디를 깎았습니다. 그 때 그 여주인이 와서, “오 ! 너 잔디를 잘 깎았는데 1달러밖에는 안 되겠구나”
하며 1달러를 주었습니다. 그 후 한 일주일이 지난 다음 그 여주인은 다시 그 소년을 불러서,
“얘 ! 오늘 너 다시 우리 잔디를 좀 깍지 않으련? 지난번보다 좀 더 잘 깎아보아라”
소년은 다시 기쁜 마음으로 전주일 보다 좀더 잘 깎았습니다. 그랬더니 그 부잣집 여주인은,
“오 ! 수고했어, 지난주보다는 좀 좋아졌어, 그러나 2달러밖에는 줄 수 없어”
하면서 2달러를 주었습니다. 그 후 일주일이 지났을 떼에 그 여주인은 다시 그 소년을 부르더니,“얘 ! 오늘 너 우리 잔디 좀 또 깎아 보시 않으련? 아주 너희 성의를 다해서 열심히 깎아보렴, 얼마나 잘 깎는지 한 번 보고 싶어”
이번에 그 소년은 자기 마음을 다하여 성실히 충성되게 잘 깎았습니다. 긴 풀이 하나도 없이 다 깎고 큰 가지가 나온 것은 찾아서 낫으로 깎고 잘 다듬었습니다. 훌륭하게 잘 깎습니다. 그 집의 여주인 와서 보고는 기쁜 얼굴을 하며 5달러를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너 이 다음에는 무슨 일을 하든지 1달러 짜리, 2달러 짜리 일하지 말고 5달러 받을 수 있도록 일하여라”
여주인이 그 소년에게 한 이 말이 항상 마음에 기억이 되어, 그 소년은 언제든지 자기가 맡은 일은 내가 1달러, 2달러, 5달러 짜리로 일할 수 있는데 언제든지 나는 5달러 짜리로 일해야겠다 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두말 할 것 없이 후에 크게 성공하였습니다.하나님께서 우리 교회 안에는 성직을, 국가에는 국가의 모든 책임을, 사회에서는 사회의 모든 책임을 다 우리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맡기신 것은 우리를 신임하기 때문입니다. 감당할 수 있기에 맡깁니다. 충성 되이 하겠기에 맡깁니다
요컨대 우리가 이것을 맡아서 1달러 짜리만큼 감당할 수도 있고, 2달러 짜리만큼 감당할 수도 있고 5달러 짜리만큼 감당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신임을 배신하는 우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신임>에서
285.그리스도인의 품격(절제)
우리 몸 안에는 여러 가지 욕망과 본능이 잇습니다. 이 욕망과 본능을 잘 다스릴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절제라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육을 근거로 하는 여러 가지 시험이 내 속에서 솟아날 때 이것들을 이겨야 합니다. 이것을 잊으려고 하면 절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기억하실 줄 압니다만 사도 베드로가 베드로 후서 1장 5절에 그리스도인의 품격의 요소를 열거할 때에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더하고 지식에 절제를 공급하라고 했습니다.
286.검은 말과 흰 말
옛날 헬라 사람들이 인간에게 마땅히 있어야 할 덕을 말할 때에, 절제를 말한 사실은 제가 이미 말씀 드렸을 것입니다. 옛날 헬라 사람들이 아덴에 있는 청년들에게 특별히 항상 권한 말씀은 간단히 말하면 두 가지 말씀입니다.
하나는“네 자신을 알라”하는 권면(勸勉)입니다. 이것은 절제입니다. 전에 플라톤이라고 하는 철학자는 인간생활이란“검은 말과 흰 말, 두 말이 끄는 한 수레와 같다”고 얘기했습니다. 흰말은 이성을 의미했고 검은 말은 욕망이나 본능을 의미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수레가 넘어지지 않고 바로 가려고 하면 흰말이 수레를 어거(馭車)해서 나가게 해야지 검은 말에게 맡기면 수레가 아주 외딴 데로 떨어져서 부서지고 말 것이라고 경고한 것입니다. 절제를 의미합니다.
287.군자 유 삼 계’
우리 동양의 위대한 성현 공자께서도‘군자 유삼계’(君子有三戒)군자는 세 가지 경계할 것이 있다고 우리에게 교훈 하여 주었습니다.‘소지시에는 혈기미정이라 계지재색( 少之時 血氣未定 戒之在色)하라. 젊었을 때에는 혈기가 미정한 때인데 색에 특별히 경계하라고 하였습니다.‘급기장야 혈기방강 계지재투’( 及其壯也 血氣方剛 戒之在鬪)라 즉 커서 장년이 된 후에는 혈기가 아주 강한 때인데 싸움하는데 경계하라고‘급기노야 혈기기쇠 계지재득’( 及其老也 血氣旣衰 戒之在得)하라고 나이가 들면 혈기가 쇠한 때인데 그 떼는 욕심이 많아지니 얻는 것에 주의하라고 우리에게 경계했습니다.
그 말씀도 한 마디로 말하면 절제를 배우라는 말입니다. 여기 보면 모든 일에 절제를 하라고 권면했습니다. 먹는 데, 입는 일에, 쓰는 일에, 거처에, 모든 욕망, 모든 본능을 잘 다스려서 절제의 생활을 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이것이 적절합니다.
288.술에 대한 속담
제가 여러 나라의 술에 대한 속담을 모아 놓은 것을 잠깐 보았는데 이런 속담이 있었습니다.
제가 한번 읽을 때에 들어보세요.“물에 빠져 죽는 사람보다 술에 빠져 죽는 사람이 더 많더라”독일의 속담입니다.“인간의 두뇌에 알코올을 붓는 것은 기계에 모래를 뿌리는 것과 같으니라”미국의 유명한 발명가 에디슨의 격언입니다.“처음에는 사람이 술을 마시고 나중에는 술이 사람을 마시느니라”이것은 중국 사람의 격언입니다.
“술은 악마의 피니라”서반아 사람의 격언입니다.“술상이 길면 목숨이 짧아지느니라”불란서 사람의 속담입니다.“앞문으로 술이 들어가면 뒷문으로 지혜는 달아나느니라”이태리 사람의 속담입니다. “술 먹는 개”이것은 한국사람의 속담입니다. 속담이라고 하는 것은 그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결과를 보고 자연히 그런 속담이 생기는 것입니다.
289.《탈무드》의 포도주 이야기
유대 사람들은 구약 이후에《탈무드》라는 책을 읽습니다. 구약 이후의 위대한 랍비들의 교훈 집입니다. 거기에 무슨 얘기가 잇느냐 하면 옛날 노아가 처음으로 포도 원을 만들지 않았습니까? 포도 원을 만들고 포도를 심을 때에, 악한 마귀가 밤에 와서 양의 피와 사자의 피와 돼지의 피와 원숭이의 피를 비료로 주고 갔다고 합니다. 그러니 포도나무는 잘 되었을 것입니다. 포도가 많이 열리었습니다.
그 다음부터 그 포도에서 나는 포도주를 마시는 사람마다 처음에는 양과 같이 순해지고 좀더 마시면 사자와 같이 포악해지고 좀더 마시면 돼지처럼 미련해지고 그리고 더 마시면 원숭이처럼 별별 것은 다한다고 합니다. 술 얘기가 나오면 술 먹는 게 죄인가? 라고 다 얘기하지요.
물론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술 먹는다고 그것은 죄가 아니지요. 그러나 분명한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술이 백 죄의 어머니가 되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290.‘나의 사인(死因)은 담배’
술 먹는 얘기하면 담배도 생각나요.
여기에 대해서 한 가지 얘기만 하고 지나갑니다. 여러분도 아마 다 읽어보았을 거 에요. 며칠 전 신문에 보니까 미국의 어떤 신문기자 마크 월러스라고 하는 분이 자기가 죽기 전에 자기 죽음에 대한 기사를 다 써놓고 죽었습니다. 그 기자는 매우 똑똑한 기자입니다. 그 제목은 무엇이냐 하면‘나의 사인(死因)은 담배다’였습니다, 자기 얘기를 썼는데“나는 열 네 살부터 담배를 피우기 시작해서 하루에 두 갑씩 42년을 피웠는데 결국은 폐암이 생겨서 나는 죽노라”이런 기사를 죽기 전에 써놓고 죽었습니다.
291.퀘이커 교회 창립자
퀘이커 교회를 창립한 죠지 폭스는 본래는 어떤 구둣방의 직공으로 있던 사람입니다. 어느 날 저녁에 친구와 함께 술집에 가서 맥주를 마셨습니다. 한두 잔 마시니 취했습니다. 서로 많이 마시기 내기를 합니다. 그리고서 나중에는 어떻게 되었느냐 하면, 누구든지 돌아가면서 자꾸 마시다가 못 마시는 사람이 그날 저녁 술값을 다 낸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얼마쯤 돌아가다가 갑자기 가슴이 뭉클합니다. 있던 돈을 다 내놓으면서,“나에게 가진 것이 이것뿐이니 이거나 받아라, 미안하지만은 나는 먼저 가겠다”하고는 돌아왔습니다. 어두운 거리를 혼자서 올라갔다 내려왔다 하면서 마음으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오! 하나님, 이런 세상에서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그 때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너 죠지 폭스야 보지 않느냐? 요사이 젊은 사람들은 다 방탕으로 내려가고 늙은 사람은 다 흙으로 내려간다. 성결한 생활을 하라”그날 저녁에 완전히 회개하였습니다.
성 어거스틴을 회계시킨 유명한 성경 구절인 로마서 13장 12절 이하에“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절제>에서
292.정신적 자세
경관들의 아주 필요한 책임 가운데 하나는 우리사회를 어지럽게 하는 각종 범죄자를 잡아내어 양민으로 하여금 안도하며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일입니다. 이 일이야 말로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 수 없으며 또한 위험하기도 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런 범죄자에 대하여서도 우리가 한 가지 기억할 사실은 있다고 봅니다. 그것은 죄는 미워하나 사람은 불쌍히 여겨야 할 것입니다. 많은 범죄자들은 사실상 정신적 환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범죄자들에 대하여도 공의와 자비가 같이 수반될 때 옳게 처리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죄인까지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얼마나 귀한 일이겠습니까? 죄인을 그 죄대로 처치하여 벌을 줄뿐더러 그 벌을 통하여 죄인이 변하여 새 사람이 되게 하는 때는 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 곧 하나님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민주경찰의 정신적 자세>에서
293. 민주주의 교육
다수민족이 혼합하여 한 국가를 형성한 미국 같은 나라에서는 민족주의 교육이란 말은 들을 수도 없습니다. 그런 나라에서는 레이지즘(Racism) 이라고 하여 민족 관념은 가급적 기피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한국의 상황은 다릅니다. 한국은 단일 민족으로 형성된 국가입니다. 우리는 또한 단일 민족으로서의 언어와 풍속과 문화가 있습니다. 우리는 전래의 미풍양속과 고유문화의 가장 아름다운 점을 보전하며 또한 계속하여 발전시킬 의무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은 강대국들의 사이에 끼어서 종종 민족적 수난을 당하였고 때로는 외국 민족의 압박 아래서 신음한 쓰라린 경험도 당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겨레는 민족이 곧 국가요, 국가가 곧 우리 단일민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민족 하나 하나가 이 민족의 얼을 철저히 가지는 것은 무엇보다도 필요합니다. 우리는 우리 민족으로써 세계에 공헌할 사명을 수행할 수 있는 까닭입니다.
그런데 이 고귀한 민족주의가 잘못하면 불건전한 방향으로 전락될 수 있습니다. 가령 민족 차별주의, 타민족 배타주의, 민족우상화, 지상주의 등, 독일의 히틀러 나찌스주의는 독일 민족 지상주의였습니다. 그리하여 히틀러는 독일 민족 이외에 다른 모든 민족을 천시하여 바로 이런 그릇된 민족주의 아래에서 유대인 6백만 명을 개스 챔버에서 독살하는 잔인한 일도 감행하였습니다. 어디서 소위 민족 지상주의 혹은 국가 지상주의가 옵니까? 왜 민족을 우상화하며 국가를 우상화합니까? 이것은 근본적으로 이들에게 옳은 종교적 신앙이 없었던 까닭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제1조에는 천지를 창조하시고 보존하시고 인류의 역사를 지배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절대 이시요 지상이십니다.
개인도 민족도 국가도 모두 하나님 아래서 하나님의 지배와 권고와 축복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어떤 개인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고 어떤 민족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민족을 같이 사랑합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신앙을 가진 이는 내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 같이 이웃을 사랑하기를 힘쓰며, 민족의 권익과 발전을 위하여 노력하는 동시에 또 다른 민족의 권익과 발전을 위하여 노력하고 존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은 언제나 민족주의를 건전히 지켜 나아가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건전한 민족주의의 정신적 배경이 됩니다.
294. 청교도의 기념탑
1620년에 청교도 120명이 메이풀라워호라는 배를 타고 거 칠은 대서양을 건너 북미 대륙 플리머스라는 해안에 도착하였습니다. 이들 청교도 120명 이야말로 오늘의 미국의 기초를 닦은 국보들입니다. 지금 플리머스 해안에 가 보면 그들이 처음으로 발을 디딘 바위에 유명한 기념탑(Monument)이 세워져 잇습니다. 그 탑을 자세히 보면 높은 대 위에 네 사람이 서 있습니다. 한 사람은 자유의 상징이요, 한 사람은 법의 상징이요, 한 사람은 도덕의 상징이요, 또 한 사람은 교육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그 네 사람 위에 다른 대가 하나 더 있어 그 위에는 한 여자가 한 손에는 성경을 펴서 들었고 한 손은 높이 들어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킵니다.
여러분은 이 기념탑의 뜻을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유민주국가를 이룩하기 위 하여는 자유, 도덕, 법, 교육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위에는 성경을 기초로 하는 거룩한 종교가 필요합니다. 이 종교가 곧 기독교입니다. <민족교육과 기독교>에서
295.캐리의 유명한 말
영적 저수지에는 생명수가 한없이 있어서 믿음의 그릇은 자유로이 그 생명수를 떠 마실 수 잇습니다. 우리는 위대한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인도의 첫 선교사로 나왔던 캐리의 유명한 말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하라. 하나님을 위하여 위대한 일을 계획하라”
믿음이 없으면 하늘 나라의 일을 못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주를 창조하신 위대한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일찍이 말씀하시기를“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하였습니다. 위대한 신앙만이 위대한 하나님을 옳게 섬기는 것입니다. <위대한 비전, 믿음, 사랑>에서
296.바람직한 복음운동
복음운동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먼저 우리 마음속에 이 생명수가 충만한 생활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또한 말씀하시기를“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으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충만한 성령 곧 성령의 열매인 사랑과 기쁨과 화평(和平)이 충만한 신앙생활은 복음전파의 전제 조건이 됩니다. 꽃이 아름답고 향기가 충만하면 벌과 나비는 자연히 날아듭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는 역시 인간을 끄는 힘이 있습니다. 진액(津液)이 풍족한 좋은 나무는 많은 열매를 맸습니다.
297.성 프랜시스의 산 설교
일찍이 성 프랜시스가 하루아침에 제자들과 같이 앗시스 거리를 한 번 돌고 돌아왔습니다. 돌아온 후 한 제자가 묻기를“선생님 왜 오늘 아침은 아무에게도 전도를 하지 않고 그저 돌아오셨습니까? ”하였습니다. 그 때에 성 프랜시스는“우리의 걸음걸이와 일생생활이 산 설교가 되어야 한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의미신장한 말입니다. 우리의 성품, 생활자체가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여 무언중에 복음전파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오직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생명수 곧 성령을 충만히 받는데서 오는 것입니다.
298.복음의 빛
옛날부터 복음 전파는 먼저 내 가족 그리고 내 친척, 그리고 내 이웃 또는 내 친구들에게 전하여진 것입니다. 무언중에 반드시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크리스천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침묵의 크리스천을 의미합니다. 마음에 사무친 것은 입으로 발표하게 됩니다. 우리는 입으로 그리스도를 증거 해야 하고 내게 가까이 있는 이들을 먼저 그리스도께 인도해야 합니다.
일찍이 들으니 어떤 사장이 자기는 교회의 장로요 또 물론 매주일 교회에 나갔으나 자기비서에게 여러 가지 일을 의논하면서 한 번도 그에게 교회 출석 여부를 묻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한 주일은 설교를 통하여 전도의 사명을 깨닫고 결심하기를 앞으로 우선 가까이 있는 이들에게 전도하기로 결심을 하고 다음 날 아침 회사에 제일 먼저 만나는 이에게 전도를 하려고 기다리던 때에 자기 비서가 들어오니 제일 먼저 하는 말이“자네, 교회에 나가는가?”물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그 비서가 눈이 둥글 하여지며 “사장님, 이거 웬일입니까! 사실 저도 교회에 다닐 마음은 늘 가지고 있었으나 사장님이 말씀이 없는데 감히 먼저 말하기가 두려워서 지금까지 못하였습니다.”고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우리 가운데 이런 사장은 없습니까? 가까운 이들에게 사업에 관한 일은 또는 세상의 모든 일은 이야기하면서도 그리스도에 대해서만은 아무 말이 없는 이는 없습니까? 우리가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빚진 자이지만 나와 가깝고 잘 접촉하는 이들에게 이 복음의 빚이 가장 크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기독실업인의 바람직한 복음 운동>에서
299.전도 설교
몇 해 전에 제가 우리 교회 첫 예배를 마치고 정문에서 나가는 교우들에게 인사를 하는데 어떤 분이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나는 시내 어느 교회의 장로인데 내 친구를 교회로 인도하기 위하여 늘 같이 첫 예배를 옵니다”하면서 옆에 섯는 자기 친구를 소개하였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이제 이 친구가 영락교회에서 학습도 서고 세례를 받은 후에는 저의 교회로 데리고 가겠습니다.”하였습니다. 그래서 좋다고 그렇게 하라고 하면서 한마디 물었습니다.“그러면 왜 처음부터 장로님 교회로 모시지 않습니까?”하였습니다. 그 때 그 장로님 말씀은“아닙니다. 우리 교회 목사님은 새로운 교인을 위 하여는 설교를 하지 않습니다.”하였습니다.
목사님들 자세히 들으십시오. 전도를 목사들의 최고사명으로 여긴다면 왜 전도 설교를 하지 않습니까! 또 심방도 그렇습니다. 사실 심방도 언제나 전도를 중심으로 하여야 합니다. 더욱이 여러분 교회의 예산을 자세히 검토하여 보십시오. 교회의 최고 사명은 전도인데 전도에 대한 예산이 전 예산액의 몇 할이나 되는 가? 자세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전도를 중심 한 교회라고 하면 특별히 교회학교와 학생 및 청년 부에 특별한 관심을 가질 것입니다. 선교하는 교회의 목사와 장로들은 이렇게 첫째는 전도의 강한 부채감, 둘째는 전도의 넓은 비전, 셋째는 교회의 모든 일에 있어서 전도 우선 주의를 잊지 아니해야 합니다. 선교하는 교회가 되자>에서
300.고당 선생의 신앙결단
고당 선생은 1882년 평양 성안의 한 선비였던 조경학 씨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본래 고당 선대는 평안남도 감서군에서 살았습니다. 그 부친은 한학자로서 당시에 이름이 있었으며 생활은 유족한 편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15세까지 한학을 전공하였고 또 16세부터는 상업의 경험을 얻기 위하여 포목상과 지물포를 경영하는 한 청년 실업가였습니다.
그 동안 평양에서 날파람동이로 유명하였으며 또한 술 잘 먹기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 모친은 종종 술을 끊기를 권면하였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23세 되던 해에 어떤 분의 전도를 받고 예수를 믿기로 작정한 후에는 곧 금주와 단연(斷煙)을 단행하였습니다
듣는 말에 의하건대 그는 어느 저녁에 그의 술친구를 다 모아 놓고 밤새도록 술을 마시며 즐긴 후에 가장 엄숙한 어조로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고 합니다.“나는 지금까지 당신들의 친구로 지내왔지마는 이제 예수를 믿기로 작정하였소. 그러므로 나는 오늘 저녁까지 이 생활을 마치고 다음 날부터는 온전히 예수를 믿는 사람이 되겠소”이렇게 선언한 후에 그는 단연히 실행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당시의 기독교학교인 숭실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그 때 숭실학교에서는 학생의 연령 제한이 없던 때입니다. 그래서 5년간 공부를 한 후에 숭실 중학교를 마치고 곧 일본 가서 명치대학 법과를 졸업하였습니다.
그는 그 동안 철저한 신앙생활로서 모든 학생과 청년들에게 모법이 되었습니다. 일본 재학 시절에는 재일 한국 기독교회를 설립하는 데 한 중심 인물이 되었으며 사실 영수(領袖)가 되었습니다. 당시는 구 한국의 국운이 날로 기우러지는 때로서 그는 청년 애국자로 또한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서 어떻게 하면 민족부흥을 이를 수가 있을까 하는 문제로 그 머리에는 항상 깊은 사려가 있었습니다.
301.고당 선생의 민족 사상
동경에서 학업을 마친 후에 본국에 돌아오자 당시 애국자요 또한 기독교 신자인 남강 이 승훈 선생의 교훈을 받아 정주 오산 학교의 교사로 부임케 되었습니다. 들은즉 고당 선생은 일본에서 귀국하자마자 흔히 입던 양복을 벗어놓고 한복으로 갈아입었으며 서양식 모자도 벗어놓고 갓을 썼으며 구두도 벗고 갓 신을 신고 다녔습니다. 이런 결단의 배후에는 두 가지 뜻이 있는 줄 생각합니다.
하나는 나라는 힘을 잃었으나 자기는 철두철미 한국사람으로 서겠다는 애국애족의 정신이요, 또 하나는 무엇이든지 근검절약 할 뿐더러 자작 자급한다는 정신이었습니다.
고당 선생은 학교에 온지 2년 후에 곧 교장으로 취임되었는데 저는 1916년 고당 선생이 취임한 다음 해부터 그 학교 학생이 되었습니다. 그때 교장 선생님의 모습은 지금도 잘 기억이 됩니다. 언제나 무명두루마기를 입었으며 아침에는 소금으로 반드시 이를 덖고 심지어 비누도 쓰지 않고 옛날부터 팥가루로 비누를 대신하였습니다.
그는 교장인 동시에 사감이요, 또 지금으로 말하면 교목도 겸한 샘입니다. 그때 그 분은 가족은 평양에 두고 기숙사에서 유숙하였으며 기거일체를 학생과 같이 하였습니다. 듣는 바에 의하면 그때 선생께서는 봉급은 한푼도 받지 아니하시고 전혀 무보수로 학교에 봉사하였습니다.
302. 고당 선생의 실천 교육
당시 오산의 교육은 지금의 사관 학교와 비슷한 철저한 기독교적 민족교육이었습니다. 근처에 사는 학생 외에는 전부 기숙사에 유하였으며 아침 6시에 기상 종과 같이 선생과 학생은 일제히 일어나 운동장에 나가서 체조를 하였고 또 뒷산을 구보로 뛰어 한 바퀴 돌아오곤 하였는데 고당 선생도 꼭 같이 행동하였습니다. 그리고 기숙사에 돌아와서는 방 청소와 정돈을 하였고 조반 후에는 곧 학교에서 공부를 하였는데 매일 먼저 기도회가 있었습니다. 이 기도회는 언제나 교장 자신이 주재하였으며 또 설교도 하였습니다. 이따금 남강 선생께서 오셔서 설교하신 적도 물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녁 식사 후에는 기숙사 각방에서 복습을 하였습니다. 그 때도 교장선생께서는 문 밖으로 조용히 다니면서 공부하는 형편을 살폈습니다. 그리고 저녁 10시에는 반드시 소등을 하고 취침하였습니다.
당시 학교에서는 청소부가 따로 없었습니다. 모든 학생들을 조직하여 청소와 수리와 모든 것을 담당케 하였습니다. 가을이 되면 제석산에 가서 오리나무를 찍어 학생들과 직원들이 메어다가 패서 난로에 불을 넣었는데 고당 선생도 언제나 학생들과 꼭 같이 일을 하였습니다.
고당 선생이 담임한 과목은 내 기억으로는 지리었습니다. 나는 선생께서 사도행전을 공부하였는데 그때 배운 사도행전의 내용을 지금도 많이 기억합니다. 지리도 역시 철저하게 잘 가르치셨습니다. 그리하여 선생이 교육방침은 철저한 기독교 신앙으로서 새로운 사람이 되게 하며 학문과 지식을 배워서 민족중흥에 헌신할 수 있는 애국자를 양성하는데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교육은 교실에서 말만의 교육이 아니고 그의 실지 생활로서 모법을 보여 주는 실천교육이었으며 또 학생과 전 생활을 하여 다시 말하면 하루 24시간의 교육이었습니다.
303.고당 선생의 민족부흥의 환상
나는 일생동안에 여러 교수들에게 배웠으나 학생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며 실지로 모범을 보여 주며 그 전 생애를 희생한 교육가는 오직 고당 한 분이라고 기억합니다.
그 후 그는 3·1운동으로 부득이 오산을 떠나게 되었으나, 그 후 다시 오산학교 교장으로 부임하였지만 악랄한 일본 당국의 압력으로 아깝게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후 그분은 평양에 오셔서 기독교 청년회 총무(모두 무보수)로도 수고하였으며, 숭실대학 강사가 되었으나 이것도 일본 당국의 압력으로 사퇴할 수밖에 없었고 평양 숭인상업학교를 설립하고 그 교장으로 취임하기를 모두 원하였으나 이것 역시 일제 압력 아래에서 실현되지 못하였고 다만 이사장으로서 학교를 경영하여 나갔습니다.
고당 선생은 민족부흥의 환상을 보면서 항상 세 가지를 힘썼습니다.
첫째는, 이미 말한 교육방법이요,
둘째는, 근검절약하고 자작 자급하여 경제를 부흥케 하는 물산(物産) 장려 운동이요.
셋째는, 민족의 장래를 생각하여 체육에 깊은 관심을 두고 관서 체육회의 회장으로서 언제나 이 방면에 노력하였습니다.
그리고, 평양에 계실 때에는 고아원, 도서관, 백 선생기념관등 여러 공공의 사회시설을 통하여 사회복지와 문화증진에 헌신하였습니다. 그리고 또한 이 동안에 조선일보사 사장으로 언론계에 헌신한 적도 있었습니다.
평양 산정현 교회의 장로로서 전(全) 평양교회를 지도하였으며 당시 산정현 교회의 목사는 일찍이 오산에서 자기에게 배운 그리고 신사참배 강요시대에 순교자 중의 하나인 주기철 목사님이었습니다.
실로 고당 선생은 애국 애족의 지사이며 민족중흥의 선구자이며 체육, 언론, 사회, 문화, 각 방면의 지도자였으며, 해방 후에는 반공투사로서 그 최후를 마친 것은 말할 여지가 없습니다. 민족의 암흑기에 있어서 혜성과 같이 이러한 지도자를 보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고당 조 만식 선생은 실로 신앙심과 애국심의 화신이었습니다. <고당 선생의 신앙과 민족교육>에서
韓景職牧師 年譜
1902.12.29 평안남도 평원군 공동면 간리에서 태어나다.
1917~22 오산(五山)학교에서 남강 이승훈 선생과 고당 조만식 선생으로부터 민족교육과 신앙훈련을 받다.
1922~25 숭실전문(崇實專門) 이과(理科)에서 자연과학을 공부하다.
1924 여름 구미포 해변에서 거닐다가 성령의 감동으로 기도하는 가운데 주의 종이 되어 민족을 구하라는 사명을 받다.
1925~26 엠포리아 대학에서 인문과학을 공부하다.
1926~29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신학과정을 마치다.
1929~31 뉴멕시코주 알바컬키에서 요양하다. 미국 콜로라도주 덴버에서 요양하다.
1932 귀국하여 숭인상업학교와 숭실대학에서 가르치다.
1933~42 신의주 제2교회를 시무하다.
1942~45 보린원 원장으로 일하다.
1945 월남하여 다시 고아들을 위한「보린원」을 운영하며 조선 신학교에서 가르치며 벧아니 교회(영락교회 전신)를 세우다.
1945~73 영락교회를 27년간 시무하다.
1948 미국 엠포리아대학에서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받다.
1954~57 숭실대학장직을 맡다.
1955 대한예수교장로회 제40회 총회장직을 맡다.
1956 한국 기독교연합회장직을 맡다.
1970 대한민국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다.
1973 서울 영락교회 원로목사(元老牧師)로 추대되다.
1973 아세아 교회진흥원장직을 맡다.
1982 한국기독교 100주년 기념사업협의회 총재직을 맡다.
2000.4.19 돌아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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