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제 3권 한경직 목사 설교 예화 125편

by 【고동엽】 2022. 2. 6.
처음 돌아가기
제 3권 한경직 목사 설교 예화 125편
 

151떠돌이 교우들

제가 이런 말을 이따금 듣습니다. 여러분, 용서하시고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물론 웃자는 생각으로 이런 말도 하는 줄 압니다.
제가 들은 대로 사람들은 우리 영락교회에 대해서 말하기를“아 영락교회에 가면 어째서 예배보는 사람이 그렇게 많은 줄 아느냐?”고 물으니까“그거야 알기 쉽지, 왜 영락교회에 가면 사람이 많으냐 하면 이 서울 장안에는 이 교회에도 저 교회에도 속하지 않고 그저 빙빙 돌아다니는 떠돌이 교우들이 많은데, 이 교인들은 주일날 아침이 되면 오늘은 어느 예배당에 가볼까 생각하다가 가만 보니까 영락교회로 오는 사람이 많거든, 그러니까 사람 많은 데로 따라 가보자 그래서 영락교회에 예배하려 오는 사람이 많은 거야”어떤 사람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또 한 사람은 좀 다른 대답을 했습니다.“그 이유도 있지만 또 다른 이유가 있지요. 왜냐하면 영락교회에 가면 그저 예수 믿기가 제일 쉽지요. 자그마한 교회에 간다면 가서 몇 달되지 않아서 이런 일을 해주시오, 저런 일을 해주세요, 부탁이 많은데 영락 교회에 가면 몇 해 있어도 이것 해달라, 저것 해달라, 부탁하는 게 하나도 없고, 또 자그마한 교회에 가 보면 연보 할 때에도 특별히 대표자가 와서 연보 좀 더 해주시오, 좀더 해주시오 이러는데, 영락 교회에 가면 그저 연보주머니 돌아갈 떼 십 원 짜리 하나 넣으면 그 다음엔 체면유지는 잘 된단 말이요. 그러니 이거해라 저거해라 하는 말없이 그저 공짜로 예수만 믿으려면 영락교회에 가야지요”
여러분, 이런 이야기가 얼마나 사실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런 우스운 이야기 가운데도 무슨 뜻이 있는 줄 압니다.

 

 
 



152 교회는 십자가의 군대

우리가 분명히 알 것은 신앙생활에는 방관자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영적 세계에는 중립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교회생활에 구경꾼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교회에서 여럿이 같이 모여서 이 예배를 들이는 것은 교회의 중대한 일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나 교회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이와 같이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헤어지는 단체가 아닙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고 승리하실 때에 성령을 이 땅에 보내어서 교회를 세우신 것은, 그리스도의 몸이 되어서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이 땅에서 주님의 일을 계속하라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이 교회는 군대와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천국의 군대입니다. 십자가의 군대입니다. 이 땅에 남아 있어서 악한 세력과 싸와 승리해서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교회가 세워 진 것입니다
교회생활에 있어서 떠돌이 교회 생활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교회에 입교한다는 것은 군대에 입대하는 것과 같습니다. 일해야 됩니다. 교회는 악마와 죄의 쇠사슬에 얽매인 불쌍한 영혼을 구원해서 해방하는 전도의 큰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개인 전도를 힘쓰는 것이고 남녀전도를 조직해서 전도를 힘쓰는 것이고 노방전도대도 조직하는 것이고, 전도 인을 파송하는 것이고, 방송전도 와 문서전도도 하는 것이고, 여러 가지로 이 복음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모으는 자냐, 헤치는 자냐?>에서

 

 
 



153. 인생의 아침

고요히 생각해서 하루의 생활을 세워야 합니다. 그러기에 옛날부터 일일지계는 재어신(一日之計在於晨)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루의 계획은 새벽에 있다는 말입니다. 천년시대는 일생의 설계를 하는 때입니다. 설계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일생의 성공과 실패가 달렸습니다. 그러기에 청년시대에는 요새 말로 비전(幻見)이 있어야 합니다. 이상(理想)이 있어야 합니다. 포부(抱負)가 있어야 합니다. 입지(立志)가 필요합니다.
그러기에 공자의 말씀을 들어보아도 어십오이지유학하고 삼십이립(於十五志有學 三十而立)이라 했습니다. 열 다섯 살 날 때 학에 뜻을 두고 서른에 섰다는 말입니다. 입지란 뜻입니다. 동양에 유명한 철학자 왕양명(王陽明)이 말하기를 입지가 없는 사람은 키가 없는 배와 같고 재갈이 없는 말과 같다고 했습니다. 방향이 없는 사람입니다.

 

 
 



154.청년 때 하나님을 찾아야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이 인생의 봄을 맞아서 일생을 그르치지 않을, 일생의 설계를 꼭 바로 하는 비결이 하나 있는데 무엇인지 압니까?
조물주 하나님을 만나서 하나님의 뜻을 바로 찾는 것입니다. 늘 하는 말이지마는 우리 사람은 스스로 자기를 만들지 못합니다. 내가 나를 지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셨으니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마치 토기장이가 토기를 만들 때에 이런 그릇도 만들고, 저런 그릇도 만들고, 일정한 목적에 의해서 여러 가지 그릇을 만드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 일생을 지으실 때에도 하나님의 일정한 목적에 의해서 우리를 각각 조금씩 다르게 만들었습니다
천년시대는 가장 원기가 왕성한 떼입니다. 가장 힘이 많은 때입니다. 이 때에 모든 정력을 집중해서 일하면 반드시 하나님의 축복을 받습니다. 그러기에 많은 일을 한 사람들의 역사를 보면 인생의 아침에 일찍부터 즉 소년시대, 청년기 때부터 일을 했습니다.

 

 
 



155. 데모스테네스 · 시세로

헬라의 유명한 데모스테네스(Demosthenes)같은 사람은 벌서 17세부터 웅변가로서 국가에 봉사했다고 합니다. 시세로(Cicero) 같은 사람은 스물 여섯 살 때 벌서 유명한 법률가가 되어서 국가에 대한 봉사를 했다고 합니다.

 

 
 



156. 모차르트 · 헨델

음악가 중 모차르트 같은 사람은 여섯 살 때부터 독일 황제 앞에서 연주를 했다고 합니다. 헨델 같은 유명한 사람은 열 살부터 작곡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157.휘트필드 · 스팔존 · 리빙스톤 · 칼빈

부흥 목사 가운데 유명한 죠지 휘트필드(George Whitefield) 같은 사람은 스물 한 살부터 유명한 부흥 전도사가 되었습니다. 유명한 설교가 스펄존 같은 사람은 벌서 스무 살에 유명한 런던의 헤본애플교회의 목사가 된 것입니다.
리빙스톤 같은 사람은 스물 네 살에 이미 아프리카 지방에 가서 흑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요한 칼빈 같은 사람은 스물 여섯 살에 이미《기독교강요》를 썼습니다. <신앙의 아침>에서

 

 
 



158.예수를 바라보자

봄 동산의 풀이 어떻게 자랍니까? 태양을 바라보는 가운데서 자랍니다. 어떻게 꽃이 아름답게 핍니까? 햇빛을 바라보는 가운데서 아름다워집니다. 어떻게 괴실 나무가 많은 열매를 맺습니까? 햇빛을 보는 가운데서 열매가 맺히고 익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심령이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우리 심령이 장성합니다. 우리 심령에 꽃이 핍니다. 우리 심령에 열매가 맺습니다. 예수를 바라봅시다.

 

 
 



159.주님의 얼굴을 본 사람들

성 프랜시스는 젊었을 때에 성 다미안의 조그마한 예배당에서 홀로 십자가 상 앞에서 기도할 때에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때 온전히 변해서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모라비아 교회를 창설한 진젠돌프 백작 같은 사람도 젊었을 때 어떤 미술관에서 예수 님의 십자가에 못 박힌 얼굴을 보다가 신령한 주님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그것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새 사람이 되게 했습니다. 19세기 영국의 제일 유명했던 스펄존 목사도 소년 시대에“땅 끝에 잇는 백성들아 나를 바라보고 구원을 얻으라”고 하는 말을 듣고 다른 것을 하라면 못하겠지마는 예수를 바라보는 거야 못할 것이 있나 하고 언제나 예수를 바라보기로 결심했던 것입니다. 그 후에 새 사람이 되어서 유명한 설교가 가 되었습니다. 예수를 바라봅시다
튼튼할 때에도 예수를 바라보아야 시험에 안 듭니다. 병날 때에도 예수를 바라봅시다. 낙심하지 맙시다. 기쁠 때에도 예수를 바라보고 슬플 때에도 예수를 바라보고 성공할 때에도 예수를 바라보고. 실패할 때에도 예수를 바라보고, 학교에 입학할 때에도 예수를 바라보고, 하교에 입학을 못 할 때에도 예수를 바라봅시다.
언제나 예수를 바라봅시다. 살 때에도 예수를 바라보고 죽을 때에도 예수를 바라봅시다. <예수를 바라보자>에서

 

 
 



160.그리스도의 얼굴

누가 복음19장에 보면 삭게오라고 하는 세리장이 예수의 얼굴이 보고 싶어 뽕나무에 올라가서 예수 님이 지나가실 때를 기다렸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예수의 얼굴을 보고싶어 하는 분이 많이 계신 줄 압니다. 우리 가운데도 많이 계신 줄 압니다. 그러나 사람은 예수의 얼굴이 어떠하였는지 확실히 알 길이 없습니다.

 

 
 



161.‘거룩한 세마포’이야기

이태리에 큐링이라고 하는 곳에 옛날부터 예배당이 있는데 그곳에 가면 보물로서 보존되어 오는 홀리 슈라우드(Holly Shroud)즉 거룩한 세마포라고 하는 홑이불이 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그 세마포는 에수 님을 무덤에 장사할 때에 그 유해를 쌌던 세마포라고 합니다.
그 유해를 싸고 있던 동안에 어떠한 화학작용이 일어났는지는 모르나 그 홑이불 위에 예수 님의 모습이 사진처럼 박혀서 나타난 것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보고 예수 님의 귀가 얼마나 크다느니 하는 이야기들을 합니다. 그러나 그 전설이 얼마나 확실한지는 믿기가 대단히 어려운 줄 압니다.
제1세기에는 사진 만드는 법을 몰랐습니다. 예수 님을 누가 초상화를 그렸다고 한 이야기도 없습니다. 조각으로 만들어 보았다고 하는 이도 없습니다.
더욱이 1세기나 2세기에는 기독교 예술가들이 감히 예수의 얼굴을 그려볼 생각도 못했습니다. 첫째는 너무 황공했기 때문이요, 둘째는 그렇게 하면 혹 둘째 계명에 저촉이 안 될까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교회 역사를 보면 3세기 이후에야 비로소 기독교 예술가들이 예수 님의 얼굴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5, 6세기에 내려오게 되면 예수 님의 얼굴을 그린 사람들이 많아져서 성화를 예배당 안에 가득히 붙여 놓게 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교회 안에 이렇게 성화가 너무 많은 것이 좋으냐 좋지 않으냐 이런 굉장한 논쟁이 벌어진 때도 있습니다.
지금도 특히 동방교회 즉 헬라 정통교회에 가보면 그저 천장으로부터 온 벽에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으로 장식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상상화입니다. 그러나 물론 이 성화 가운데 제일 유명한 성화들은 종교개혁 이후에 그려졌습니다.

 

 
 



162.하나님의 형상

우리가 흔히 보는 하프만의 유명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주님의 얼굴이든지, 혹은 다빈치의 유명한 성 만찬식에 나타나신 주님의 얼굴, 혹은 홀맨 한트 같은 이의 세계의 빛이라고 하는 그 그림에 나타난 예수 님의 얼굴이 아마 대표적인 것이고 제일 유명한 줄 생각합니다. 그러나 전부가 상상화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얼굴을 친히 볼 수 없다고 그다지 섭섭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는 줄 압니다. 예수께서 도마에 말씀하시기를“너는 나를 보고 믿으나 보지 못하고 믿는 자는 더 복이 있느니라”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우리는 기억할 것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예수의 외모를 보는 것보다도 우리의 마음 눈으로 그 얼굴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잇습니다. 가령 요한 복음 1장에 보면 사도 요한 이 주님을 보고 이렇게 기록했습니다.“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혹은 이렇게도 기록했습니다.“보라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돼 아버지의 품속에 있는 독생자가 나타내셨느니라”이것이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고 증언하는 사도 요한의 말씀입니다.
오늘 아침에 읽었지마는 사도 바울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163.주님 얼굴을 계속해서 바라보면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면 우리에게 구원이 있습니다.
주의 얼굴을 바라보는 중에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습니다. 죄인을 위해서 말할 수 없는 그 연민, 그 긍휼(矜恤), 그 자비를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물론“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내고 궁창(穹蒼)이 그 손으로 만드신 것을 나타내어”보입니다. 그러나 이 굉장한 대 우주도 죄인을 위한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보여주지는 못합니다. 오직 우리가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얼굴을 바라볼 때에만 하나님의 참되고 지극한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찬송가 일 절과 같이“머리와 수족 보오니 큰 자비 나타나셨네 가시로 만든 면류관 우리 위해 쓰셨네 가시로 만든 면류관 우리를 위해 쓰셨네.”우리가 이 주님의 얼굴을 바라볼 때 다시 말하여 가시 면류관을 쓰신 그 얼굴을 앙망(仰望)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돌이켜서 나의 죄를 깨닫게 됩니다.
네 죄는 하나님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이요, 네 죄는 그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그리해서 우리는 겸손히 주님께 나와 죄를 회개해야 하며 그 때에 자기 죄 사함과 구원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는 가운데 구원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주님의 얼굴을 계속해서 바라보게 되면 우리의 얼굴도 점점 빛나게 됩니다. 모세가 오랫동안 시내산에 올라가 하나님을 대면하고 내려올 때에 그 얼굴이 빛났다고 하는 기록을 볼 수 있습니다. 스테반이 핍박을 받아 돌로 맞아서 마지막에 순교할 때,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처럼 빛났다고 하였습니다. 스테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우편 서신 예수 님의 얼굴을 바라볼 때 그의 얼굴까지 빛나게 된 것입니다.
달빛이 어떻게 비치는지 아시지요? 태양광선에 반사되는 까닭입니다. 우리가 항상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주님의 영광을 항상 앙망하게 될 때에.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또 우리 얼굴에도 어느 정도까지 반사될 수 있을 것입니다. 얼굴은 우리 사람의 마음의 거울인데 우리의 마음 눈이 항상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아서 우리 마음속에 주님의 사랑과 주님의 기쁨이 충만하면, 아마 어느 정도까지 그 빛이 우리 얼굴에도 나타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164.굶주린 자에게 먹이라

옛날 율법을 읽어보면 곡식을 거둘 때 전부 다 거두지 말라고 했습니다. 모퉁이 이곳 저곳에 좀 남겨 놓고 거두라고 했습니다. 왜?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들과 가난한 사람들이 그 이삭을 주어다가 먹고 살 수 잇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감람나무를 털 때 아주 다 털지 말라고 했습니다. 왜? 좀 남겨두어서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그것을 따서 먹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옛날 나오미와 룻이 멀리 모압 땅에서 돌아와서 베들레헴에 왔는데 자기 땅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어떻게 살았어요? 이삭 주어 먹고살았습니다.

 

 
 



165.사마리아인의 자세

배고픈 이가 빵을 요구하는 것은 인간의 적당한 기본 권리입니다. 그러기에 성 프랜시스는“ 가난한 이가 빵을 달라는 것은 자기 것을 달라는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누구나 하나님께서 먹고살도록 낸 것인데 먹을 것을 요구하는 것은 적당한 권리라는 말입니다. 우리 동양에도 옛날부터 내러오는 말 가운데 천불생무록지인(天不生無錄之人)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녹 없는 사람은 만들지 않으셨다고 하는 뜻입니다. 그 비슷한 사상이 그 가운데 내포된 줄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굶주린 이들을 먹이는 것은 사회정의입니다. 굶주린 사람에게 먹이기를 거부한다고 하면 그것은 사회정의에 거부하는 사람들입니다. 한 거름 더 나아가서 굶주린 이들을 먹이는 것은 인도입니다. 인간으로서 마땅히 할 일입니다.
여러분은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잘 아십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불한당을 만났습니다. 돈을 다 빼앗겼습니다. 많은 매를 맞고 넘어져 인사불성(人事不省)이 되었습니다. 그 때 마침 어떤 fp위 사람이 자나갔습니다. 그러나 보고만 지나갔습니다. 그 다음에 제사장이 또한 지나갔습니다. 그 역시 물끄러미 보고 그냥 지나갔습니다. 그러다가 유대 사람이 아닌 사마리아 사람이 그곳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이 외국 사람이 그 사람을 불쌍히 여겨서 도와준 이야기를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한국에도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거리에 굶주려서 쓰려진 동포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사람 아닌 미국 사람들이 구호(救護)품을 가지고 오며 잉여 농산물을 보내서 이 굶주리는 사람을 먹여 살리기 위하여 애를 씁니다.
바로 이런 때에 한 동포가 우리로서 더욱이 레위 사람과 제사장의 직위에 있는 한국의 교회가 이 광경을 보기만 하고 그저 지나간다고 하면 이것은 인도를 무시하는 길이고, 이웃됨을 무시하는 것이고, 정의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굶주리는 이에게 먹이는 것입니다. 굶주리는 이에게 먹이는 것은 인간으로서 마땅히 할 일입니다.
또 기억하십니다. 굶주린 동포를 우리가 도와주는 것은 사실 주님을 도와드리는 것입니다. <예수와 굶주린 대중>에서

 

 
 



166. 기독교 가정의 기본원칙

에베소 5장 25절에“남편들아 아내 사항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디도서 2장 4절에“저들로 젊은 여자들을 교훈 하되 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 근신하며 순진하며 집안 일을 하며 선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게 하라.”이런 여러 교훈이 있습니다.

 

 
 



167.랍비의 사랑의 원리

가정 안에서의 생활 원칙을 한 마디로 말하면 사랑입니다. 창세기를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여자를 지으실 때에 아담의 갈빗대를 취하여 지으셨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옛날 유대 랍비 가운데 한 사람이 이 구절을 이렇게 해석했다고 합니다.“하나님께서 여자를 만드실 때에 남자의 손뼈로 만들지 않은 것은 남자가 여자를 너무 장난감으로 알까봐 그렇게 안 하셨다. 또 여자를 만드실 때에 발에 있는 뼈로 만들지 않은 것은 남자가 여자를 너무 업신여길까봐 그렇게 안 하셨다. 여자를 만드실 때에 남자 머리의 뼈로 만들지 않은 것은 여자가 남자를 너무 업신여기면 그것도 곤란함으로 여자가 남자를 주장 못하게 하기 위해서 머리뼈로는 안 만들었다. 그럼 왜 갈빗대로 만들었는가 요?
갈빗대는 몸의 중심에 있는데 남자와 여자가 꼭 평등하게 서로 살라고 갈빗대를 취하서 만들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갈빗대로 말하면 심장에 제일 가까우니까 남자가 아내를 극진히 사랑하라고 갈빗대로 만드셨다. 또 갈빗대는 팔 아래에 있어서 살로 덮여 있는데 팔이 그 갈빗대를 잘 보호해 주고 있는 것처럼 남자가 여자를 잘 보호하라고 갈빗대로 만드셨다.”이렇게 해석했다고 합니다. 그것이 얼마나 옳은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평등과 사랑의 원리를 의심할 여지가 없이 꼭 옳습니다. 우리 가정에 있어서의 생활의 원칙은 평등과 사랑으로 뭉쳐서 사는 것입니다.

 

 
 



168.‘꾸쉴러브’ 이야기

그러면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몇 해 전에 제가 어떤 외국 신문을 보니 제목에‘꾸쉴러브’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대로 번역하면‘수풀의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수풀 사이에 사는 야만이의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 내용이 무엇인가 알아보니 어떤 남자가 멀리 외국에 여행을 갔다가 돌아오는데 자기 부인이 비행장까지 마중 나왔어요. 여러 달 동안 떨어져 있다가 자기 부인을 만나니 오죽 반갑겠습니까? 또 서양 사람들은 반가울 때 흔히 행동으로 표현하니까 자기 아내를 포응하고 인사를 하는데 얼마나 힘차게 안았는지 그만 부인의 갈빗대가 다 부려졌다는 이야기입니다. 아직 까지도 어떤 사람들은 그저 남녀간의 사랑은 이런 것인 줄 아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169.나와 결혼한 남편은 어디 갔는가?

여러 해 전에 미국의 유명한 잡지에 어떤 여기자가 글을 썼는데 그 제목이“나와 결혼한 남편은 어디 갔는가?”그런 것입니다. 간단히 보면 이 여자가 자기 남편을 잃어버렸나보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지마는 그 내용을 살펴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가 아무개와 결혼할 때에는 참 성인 군자요 좋은 사람인 줄 알고 결혼했는데 몇 달 살아보니 본래 보던 남편하고는 딴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내가 본래 결혼한 남편은 어디 갔는고 하는 탄식입니다. 이런 탄식은 부인들만 하는 것이 아닌 줄 압니다. 혹 어떤 남자들도 그런 글을 쓸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내가 본래 결혼한 아내는 어디 갔는고?”처음에 결혼할 때에는 그저 자기 남편은 다 영웅적으로 자기 아내는 다 천사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몇 달 동거하고 몇 해 지나게 되면 꼭 그런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옛 아담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옛 하와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점점 성질을 알게 됩니다. 점점 까다로운 사람도 있구나 하는 걸 알게됩니다. 그렇게 되면 환멸을 느끼는 때가 많이 있습니다. 사실 그때가 결혼 생활에 있어서 큰 위기입니다.
가정의 기본원칙 가운데 하나는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피차에 사랑하라고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그러면 사랑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성경 가운데 사랑장인 고린도 전서 13장을 잘 압니다. 4절 이하에 사랑이 무엇인지 설명합니다. 제일 먼저 무슨 말로 시작합니까?“오래 참고…”그 다음에 무슨 말이 나오는지 압니까? “사랑은 온유하며―”친절 하라고 하는 말입니다.

 

 
 



170.건강과 장수의 비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75세 난 노인이 의사에게 가서 건강 진단을 받았습니다. 나이는 75세나 되었지마는 진찰을 해 보니 조금도 병이 없습니다. 아주 건강합니다. 그래서 의사가“참 노인 님 건강하십니다. 그렇게 까지 건강하게 산 비결이라도 있습니까?”하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노인이 잠깐 생각하더니“비결이 있다고 할 수 있지요.“무슨 비결입니까?”그 노인이 천천히 대답했습니다.“제가 지금부터 꼭 50년 전에 결혼을 했습니다. 50년 동안을 나의 아내와 지금까지 화평한 생활을 해오는데 맨 처음 결혼한 후에 내 아내와 무슨 약속을 했는데 우리가 피차에 한 집에서 살 때에는 간혹 성이 날 때도 있겠으나 만일 내가 성이 나면 당신은 아무 대답도 하지 말고 빨리 주방으로 나가시오. 또 만일 당신이 화가 나면 나는 문 열고 문 박으로 나가서 산책을 할 터이오. 그런 약속을 하고 지금 50년을 지나고 생각해 보니 제가 참 산책을 많이 했습니다. 이렇게 밖에 나가서 산책을 많이 했더니 이처럼 건강해졌습니다. 산책하고 집에 돌아오면 집안은 화평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건강해 진 것입니다”

 

 
 



171.부부간의 사랑의 비결

사랑이 무엇이라고요? 사랑은 오래 참는 것입니다. 성나는 일이 있어도 또 어떤 때에 분이 나도 부부간에 오래 참는 것, 참을 줄 아는 그것이 성서적 의미에서 참 사랑입니다. 사랑은 온유하며 친절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성서적 교훈입니다. 보통 잘 모르는 낯선 사람을 대할 대는 아주 친절합니다. 그러나 집안에 들어가서는 친절히 안 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제일 가까운 사람, 남편에 대해서, 아내에 대해서, 친절히 안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밖에 나오면 아주 참 친절한 사람 같이 보이는데 집안에 들어가서 혹 그 부인에게 하는 걸 보면 도무지 친절하지 않습니다.
자 여러분, 내놓고 말이지 그렇지 않습니까? 먼 사람에게 친절하면서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왜 친절히 하지 않는 가 말입니다. 또 보세요, 우리가 보통 잘 모르는 사람에게는 항상 예의를 갖춥니다. 예의 있게 대하고 깍듯이 합니다. 그러나 제일 가까운 사람한테 와서는 무례하게 행할 때가 많다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고린도 전서 13장에 보면 사랑은“무례의 행치 아니하며”라고 하였습니다. 예의를 왜 안 갖춥니까? 사실은 우리가 어디 가서나“고맙습니다”“수고 많이 하셨습니다”이런 말들을 많이 하지마는 그런 말을 많이 할 곳은 가정입니다. 이런 가정이 화평하고 이런 가정이 즐거움이 충만합니다. 가정생활의 기본 원칙은 사랑입니다. 성서적 의미의 사랑입니다.

 

 
 



172.가정제단

어떤 건축가가 저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우리 한국 건축에는 주택을 짓는데 중심이 없습니다.”서양 사람의 주택을 보면 그 주택에 중심이 있습니다.‘화이어 플레이스(fireplace) 라고 하여 불 피우는 데가 있는데 그것이 중심이 됩니다. 일본 사람이 집을 지을 때에는 '도꼬노마' 라고 하는 그림 걸어 놓은 중심이 있는데 그것이 집의 중심입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 주택은 도무지 중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주택에도 중심이 있는 것이 좋겠지요.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우리 가정에 중심이 꼭 있어야 합니다. 가정의 중심은 가정 제단입니다. 우리 가정은 작은 교회라고 할 수 잇는데 교회 안에는 반드시 제단이 있어야 합니다. 제단 없는 교회가 어디 있습니까? 제단에 항상 불이 켜져 있어야 합니다. 불 꺼진 제단은 무엇합니까?
우리 가정이 과연 기독교 가정이 되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려고 하면 남편과 아내가 예배당에 와서 예배보는 것만으로 부족합니다. 자기 가정에 가정 제단을 쌓고 같이 찬송을 부르고 성경을 읽고 같이 기도를 드려서 가정 제단에 불을 켜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옛날부터 모든 경건한 가정에는 그 주인이 이를테면 그 가정의 목사가 되는 것입니다. 제사장이 되는 것입니다. 그 어머니는 이를테면 전도사가 됩니다. 우리 가정의 중심은 제단입니다. 우리 가정에 가족예배를 드리는 튼튼하다고 하면 제가 이미 말한 일부일처의 원칙이니, 부부일신의 원칙이, 성결의 원칙이오니, 사랑의 원칙이니 하는 것들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 가운데 다 잇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아직까지도 이 가정제단을 쌓지 못한 가정이 있으면 오늘부터 쌓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173.가정의 오대 원칙

바로 제가 주간에 크리스천 센츄리(Christian Century)라고 하는 잡지를 보니까 작년(1963년)에 뉴욕시 안에서 살인사건이 549건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91건이 가정관계에서 일어났다고 합니다. 보세요! 5백 여 건의 살인사건 가운데 91건, 거의 5분의 1이 가정관계에서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을 우리에게 보여줍니까? 기억하십시다. 우리의 가정이라고 하는 것은 문자 그대로 낙원과 지옥의 갈림길에 언제나 서 있습니다. 우리 가정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이 땅 위에서 지상낙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가정이 타락하게 되면 인간의 지옥입니다.
우리는 어떤 가정을 만들기 원합니까? 교훈대로 가정을 만들어야 되겠습니다. 성경은 이 다섯 가지 원칙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일부 일처의 원칙, 부부 일신의 원칙, 성결의 원칙, 사랑의 원칙, 제단의 원칙입니다. <기독교 가정의 기본원칙>에서

 

 
 



174. 네 부모를 공경하라

옛날부터 내려오는 우리 속담에 "아들 주머니에 있는 돈도 내 주머니의 돈만 못하다"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꼭 "사실인 줄 압니다. 아들한테 용돈 달라고 하는 말은 참 하기 어려운 줄 압니다. 용돈 달라는 말하기 전에 미리 좀 넉넉히 드리세요. 여러분, 아기 생일잔치는 잘하면서 부모님 생일은 혹 잊어버리는 분이 없습니까? 자기는 어디 가려면 조금만 바빠도 택시 타고 하면서, 부모님이 어디 가신다면 버스 값이나 드리는 분은 없습니까?

 

   



175.불효한 아버지에 불효한 아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서양에서 된 이야기입니다. 어떤 이들이 자기 아버지를 모실 수박에 없습니다. 이런 일은 서양에서 매우 드물어요, 그런데 이 가정은 아버지를 모실 수박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 가정은 아버지를 모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나이 점점 많으니까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해서 음식 잡수시다가도 음식을 자꾸 흘립니다. 그런데 여러분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 한국도 그렇게 되어오지마는 서양에서는 큰상에서 온 가족이 다 앉아서 함께 먹습니다. 이 가정도 그렇게 한 상에서 식사를 하는 데 제일 높은데 앉은 할아버지가 음식을 줄줄 흘리니까 이거 참 창피하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아들과 며느리가 보기가 답답합니다. 그래서 부득이“미안 하지만, 할아버지는 딴 곳에서 잡수세요”하고 딴 상에다 잡수게 했습니다.
우리 한국에서는 대접하느라고 딴 상에다 드리는 수도 있어요, 하지만 서양에서는 대접이 아닙니다. 그저 주방 한 옆에 조그마한 상에다 따로 잡수시게 했는데, 그것도 아마 떠 넣기가 어려우니까 그랬겠지요, 그릇을 들고서 잡수려고 하더니 또 그릇을 떨어뜨려서 자꾸 깨뜨립니다. 자 그러니 그 다음에는 며느리가 성이 났습니다. 그래서 이거 원 안 깨지는 그릇이 없겠나하고 돌아보니까 주방 옆에 고양이 밥 주는 주발이 있는데 그게 나무 그릇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씻어서 거기에다 밥을 담아들입니다. 아마 씻기야 잘 씻었겠지요. 그러니까 이 할아버지가 이제는 주방 옆에 앉아서 그 고양이 밥 주발에 갖다 드리는 것을 조금씩 잡수고 그렇게 지냅니다.
한 번은 그 아들과 며느리가 거리에 나갔다가 돌아와 보니까 너 댓 살 난 아들아이가 나무 목침 같은 것을 하나 갖다 놓고는 주머니칼로 부지런히 가운데를 파냅니다. 그래서“야, 이놈아, 너 무엇 하느냐?”하고 물어보니까“나무 그릇 만들어요, 나무그릇”한단 말입니다. “나무그릇은 만들어서 뭘 하려고 그러느냐?”하고 다시 물어보니까“아버지 늙은 다음에 밥 담아 드려야지요”우리가 웃으시는데 이것은 꼭 우리가 기억하십시다. 우리가 부모를 잘 공경하지 않으면 이 다음에 우리 자녀가 우리를 공경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동양의 옛 글에 효순환생효순자 오역황생 오역자(孝順還生孝順子 惡逆還生惡逆者)라는 말이 있습니다. 효도하고 순한 사람의 그 아들이 효도하고 순한 아들을 낳고 거스리는 아들은 이 다음에 자기를 거스리는 아들을 낳는 다는 말입니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부모에게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도 위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176.어느 목사님 가정의 효

한 달 전에 어떤 감리교 목사님이 제게 와서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하다가 “목사님한테는 특별히 감사할 일이 하나 있습니다”라고 하십니다. 그래서“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그 분 말이“소망의 시간을 늘 그렇게 방송을 해 쥐서, 우리 집에서는 이 소망의 시간을 열심히 듣는데 두 번씩이나 듣습니다. 토요일 저녁에도 듣고 주일 아침에도 듣습니다.”라고 합니다.“그건 왜 두 번씩 듣습니까?”그런게 아니라 제가 장모님을 모시고 있는데 그 분이 벌써 몇 해 전부터 소망의 시간을 열심히 듣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점점 많아지니까 한 1년 전부터는 귀가 먹어서 좀 적은 소리는 듣지를 못합니다. 그러니까 아이구 이거 소망의 시간도 못 듣고 이젠 뭘 해야 하나? 자꾸 이렇게 탄식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다 못한 제 아내가 정 그리시면 제가 소망의 시간을 필기해서 드릴 텐데 그걸 읽어보세요 하고는 매 주일 그것을 베낍니다. 할머니 시력은 다시 밝아져서 잘 보시거든요.
그래서 딸이 소망의 시간을 다 베껴서 쓰는데 말하는 것을 다 따라 베낄 수가 있어야지요? 그래서 대강 베꼈다가 그 이튿날 아침에 또 베낍니다. 이렇게 한 후 다시 정서를 해서 어머니한테 바치고야 주일 날 예배당에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번은 너무 민망해서 제가 아내보고 그걸 매 주일 어떻게 합니까? 이따금 이나 하구려 하였더니 아내의 대답하는 말이 이제 얼마나 더 앉아 게시겠소? 그저 앉아 계시는 동안은 내가 이걸 하려고 합니다. 하는군요, 이래서 저도 소망의 시간을 두 번씩 듣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도 나이 많은 부모님들 모시기에 좀 피곤한 이가 혹 게십니까? 이제 얼마나 더 앉아 계시겠습니까? 나이 많은 부모님들이 건강하다고 우리 부모님은 백 세를 사실 거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언제 돌아 가실지 무릅니다. <제 5계명>에서

 

 
 



177.주님의 손

모든 손들 가운데 특별히 우리가 어머니의 손을 생각할 때 봉사를 생각합니다. 또한 수술하는 의사의 의 손, 간호하는 간호원의 손, 봉사를 우리가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어떠한 손이든지 봉사의 손이 될 수 있습니다. 농부의 손도 그러하고, 의사의 손도 그러하고, 예술가의 손도 그러하고, 음악가의 손도 그러하고, 어떤 사람의 손이든지 사실 나만 위해서 쓰지 말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쓰게 될 때에 우리의 손은 봉사의 손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모든 봉사가 귀하지마는 손수 할 때 그 봉사가 더 귀합니다. 같은 음식이지마는 손수 지어서 대접할 때 그 음식이 더 맛이 있습니다. 같은 선물이지마는 손수 자기가 무엇을 만들어서 어떤 친구에게 줄 때에 더욱 마음에 감격이 있습니다. 같은 쌀이지마는 내 손으로 털어서 내 손으로 예배당에 가져오고, 내 손으로 다 같이 모아서 가난한 형제와 자매를 구할 때에 그것이 더욱 귀합니다. 같은 봉사지마는 손수 할 때에 더욱 귀합니다.

 

 
 



178.어머니의 손

옛날이나 오늘이나 특별히 여성들 가운데는 손을 곱게 하려고 애쓰는 이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중국 여자들은 손톱을 길게 기르기도 하고 미국 여자들은 손톱을 빨갛게 칠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제일 아름다운 손은 어떤 손인지 아십니까? 봉사하는 손입니다. 미국 어떤 가정에서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여 멀리 가 살던 아들딸들이 다 모여서 즐겁게 저녁을 같이 먹으면서 지내게 되었습니다.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하다가 젊은 사람들 사이에 누구 손이 제일 고우냐 이런 토론을 하였다고 합니다. 맨 처음에는 젊은 사람의 손이 곱다 거니, 또는 아기의 손이 곱다 거니 이런 이야기를 많이 하다가 마지막에는 결국 투표해서 정하기로 하고 투표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투표의 결과는 어머니의 손이 제일 아름답다고 나왔습니다. 주름살 많이 잡힌 어머니의 손입니다. 그것은 봉사를 많이 한 손인 까닭입니다. 봉사의 손이 제일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생각할 때에는 주님의 말씀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하면 이 봉사는 더욱 아름답습니다.

 

 
 



179.스코틀랜드의 성 까일스의 손

다음의 주님의 손을 자세히 보면 그 손에 못 자국이 있습니다. 이것이 특별히 다른 손과 다른 점인 줄 압니다.
스코틀랜드의 수호성자로 존경을 받는 성 까일스에 대해서 이런 이야기가 잇습니다. 그는 본래 아덴의 한 왕자로 태어났지마는 주를 믿은 다음에 세상의 부귀영화를 다 버리고 깊은 산에 들어가서 수도사의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오직 하나 즉 어렸을 적부터 자기가 사랑하던 암사슴 하나만은 자기를 떨어지지 않으려고 해서 데리고 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산에 가서 다닐 때도 이 암사슴과 같이 다니고 또 암사슴의 젖을 짜서 먹고 초근목피로써 생활하면서 기도생활을 했습니다. 그때에 마침 불란서의 어떤 왕이 사냥을 하기 위해서 깊은 산 속에 들러갔는데 한 골짜기에 가보니 먼 곳 바위 아래 사슴이 하나 있습니다. 그는 이 사슴을 향하여 활을 겨누어 쏘았습니다. 그 때 성 까일스가 조용히 묵상 기도를 하다가 이상한 소리를 들었습니다. 얼른 눈을 떠보니까 화살이 자기의 사랑하는 암사슴을 향하여 옵니다. 이 성자는 이것을 막기 위해서 얼른 자기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 화살이 성자의 손을 뚫고 나가면서 사슴을 맞혔습니다. 사슴이 맞긴 맞았지마는 손을 뚫고 지나간 살이라 힘이 없어서 사슴은 별로 상하지 않았습니다.
불란서 왕이 이런 것도 모르고 사슴이 죽었거니 하고 사슴을 얻기 위해서 헐레벌떡 뛰어왔습니다. 와 보니 난데없이 어떤 성자가 손을 들고 있는 데 그 손에서는 피가 흘립니다. 이 광경을 본 불란서 왕은 주님의 손이 연상되어서 그 자리에 꿇어앉아서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주님의 손은 다른 사람을 죄악 가운데서 구속하기 위하여 상한 손입니다. 그 손에 못 자국이 생긴 손입니다. 그 손에 상처가 생긴 손입니다. 주님의 이 손을 바라보아야 되겠습니다. 도마가 이 손을 바라보고 이 못 자국을 만져보고 예수 님 앞에 꿇어앉아서 하는 말이 “과연 내 주님이시오. 내 하나님입니다”하고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오늘 아침 우리 가운데 아직도 예수 님이 어떠한 분인지 확실히 알지 못하는 분이 계시면 성령의 감화로서 주님의 이 피 흘리는 손을 바라보고 과연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인 것을 깨닫고 나와서 죄를 회개하고 구원을 얻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손>에서

 

 
 



180.영원한 삶을 위하여

“사람들이 사는 것처럼 살기 위해서 생명을 택하라”고 하는 것은 주님의 말씀대로 풍성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도덕적으로 고귀하고 옳게 살기 위해서, 문화적으로 빛나게 살기 위해서, 사회적으로 번영하고 화평하게 살기 위해서 생명을 택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살기 위해서”라는 말은 아마 좀더 깊은 뜻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영원히 살기 위해서”란 뜻입니다. 사람이란 간단한 육체의 일생이 인생의 전부가 아닙니다. 시편 103편에 보면“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그것은 바람이 지나면 없어지나니”하는 구절이 잇습니다.
그러나 그 구절만은 아닙니다. 그 다음에 계속해서“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라고 읊었습니다.“하나님이 이처럼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아니하고 영생을 얻으리라”이것은 이 세상의 생만을 가르친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을 가르친 것입니다

 

 
 
 

181.월남 이상재 선생의 명언

전에 YMCA의 위대한 지도자로 계시던 월남 이상재 선생이 남기신 말 가운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 연세가 상당히 높으셨을 때 어떤 청년이 가서 묻기를“지금 신문에 보니까 일본의 아무 수상은 100을 능히 살 수 있다고 장담을 하고, 영국의 사람은 120세를 능히 살 수 있다고 호언장담을 하는데 선생님은 얼마나 사시려고 합니까?”이때에 선생님이 곧 대답하는 말이“그건 다 사람이 어떻게 사는 법을 몰라서 그래, 나는 영원히 살 테요”하는 것입니다.

 

 
 



182.콜게이트 회사의 설립자 이야기

지금도 유명하지마마는 미국의 콜게이트(Colgate) 회사가 있습니다. 비누를 만들고 치약을 만들고 하는 큰 회사인데 세계적으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그 회사를 처음 설립한 사람에 대해서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오래 전에 그이가 뉴욕 근처 어떤 촌에서 살았는데 아마 17, 8세쯤 나서 자기 촌을 떠나 뉴욕으로 나왔습니다. 그 앞에는 조그만 강이 하나 있는데 그 강을 건너 나룻배에서 어떤 노인을 만나 대화를 하게 되었습니다.“너 어디 가느냐?”물었습니다.“저 뉴욕에 가요”“뉴욕에 뭘 하려 가느냐?”“나도 뉴욕 가서 뭘 좀 해보려고 갑니다”“그래 너 그것 참 좋은 생각이다 그런데 뉴욕엘 가면 무슨 일을 하려고 하느냐?”“지금은 모르겠어요. 그 전에 우리 삼촌 네 집에서 비누 만드는 걸 좀 배웠는데 가서 비누나 좀 만들어 보면 어떨까 합니다”“대단히 좋은 생각이다. 내 생각은 앞으로 뉴욕이나 온 미국에 비누 잘 만드는 유명한 회사가 생길 줄 꼭 아는데 혹 네가 이 다음에 그런 사람이 될지 아느냐? 그저 내가 부탁하는 건 비누를 만들 때에 진실하게 만들어라. 한 근의 비누를 만들려면 한 근 되리 만큼 재료를 써라. 남 속이지 말고 저울대 속이지 말아라, 그리고 돈을 얼마를 벌었든지 꼭 십일조를 드려라”
이렇게 말한 노인은 강가에 앉아서 그 아이를 위해서 기도를 해 주었습니다.
그 후에 이 아이가 뉴욕에서 어떤 비누 만드는 공장에 가서 일하기 시작했고 일을 하는데 이 노인의 부탁을 잊지 않았다고 합니다. 꼭 그대로 했습니다. 노인의 말이 인연이 되어서 과연 그 방면에 이 청년이 성공을 하였습니다. 제품에 진실이 있어야 합니다. 근면이 있어야 합니다. 살기 위해서 우리는 이 진실과 근면을 택할 수박에 없습니다. <살기 위해서 생명을 택하라>에서

 

 
 



183.은혜를 사모하는 마음 밭

옛날 우리 동양 사람의 글귀에도 악한 사람과 같이 있는 것은 마치 포어지실(鮑漁之室) 에 들어간 것과 같다고 하는 글귀가 있습니다. 생선 많은 방안에 들어가면 생선 비린내가 납니다. 그러나 선한 사람과 같이 있게되는 것은 지란지실(芝蘭之室)에 들어간 것과 같다 하는 말도 있습니다. 지란은 난초를 의미합니다. 좋은 향기가 나는 난초가 있는 방안에 들어가면 향기로 가득해서 자연히 향기에 도취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심령이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를 받을 때에는 우리의 심령이 향기를 피우게 되고, 우리의 생활이 향기를 풍기게 되고, 우리의 신앙을 통해서 무언의 감화를 줄 수 있는 높은 자리에까지 우리의 신앙이 오라가야 될 것입니다.

 

 
 



184.깊은 골짜기에 내리는 이슬

이와 같은 은혜를 받으려면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이슬이 어떤 곳에 많이 내리는지 압니까? 언제 많이 내리는지 압니까? 어떻게 내리는지 압니까? 도시에서 나고 자란 사람은 이슬을 별로 보지 못합니다. 저는 농촌에 자랐기 때문에 이슬을 잘 압니다. 여름에 이슬이 많이 내릴 때라도 길바닥에 이슬이 있습니까? 바위 위에 이슬이 있습니까? 별로 없습니다. 아무리 많이 내리는 저녁이라고 해도 길바닥이나 바위 돌 같은 데는 이슬이 못 내립니다.
하나님은 물론 모든 사람에게 다 은혜를 내려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길바닥 같거나 혹은 우리의 마음이 바윗돌처럼 굳으면 하나님의 은혜가 내릴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예수 님의 비유에 돌작밭에 떨어진 씨는 열매를 못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마음이 부드러워야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내립니다.
그러므로 호세아 14장 1절을 보면 먼저 말씀하시기를“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 오라”고 하였습니다. 먼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마음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죄를 회개하야 은혜가 우리 마음 속에 미치는 것입니다. 아무리 이슬이 많이 내리는 저녁이라고 할지라도 우리의 마음이 돌처럼 굳은 그대로 있으면 하나님의 은혜가 내리지를 못합니다.
강퍅한 마음이나 나만 옳다고 하는 독선적인 마음에는 하나님의 은총이 내릴 수 없습니다. 내 잘못을 깨닫고 돌이켜서 하나님 앞에 돌아오는 그 심령 위에만 하나님의 은혜가 내립니다.
도 여러분, 이슬이 어떤 데 많이 내리는 지 압니까? 산꼭대기입니까? 깊은 골짜기입니까? 깊은 골짜기입니까? 산골짜기에 많이 내립니다. 산꼭대기에는 이슬이 별로 안 내립니다. 깊은 산골짜기에 가보면 거기는 산꼭대기보다는 이슬이 더 많이 내립니다. 아마 신령한 은혜도 이와 비슷할 것입니다 <이슬 같은 은혜>에서

 

 
 



185. 마음속의 천국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의 보좌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성소가 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천국의 영역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믿는 사람의 마음에 오시고 계셔서 보좌를 정하시고 다스릴 때에 우리의 마음에는 천국이 이미 임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51장 15절에 하나님은 친히 말씀하십니다.“지존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에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와 영을 소성(蘇醒)캐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 캐 하려함이라”하나님께서 통해하는 마음과 겸손한 마음에 함께 계시겠다고 말씀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요한복음 15장에서 제자들에게 친히 말씀하셨습니다.“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주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셔서 우리의 생각과 상상과 감정과 그 밖에 모든 것을 다스리실 때에는 천국이 이미 우리 마음 가운데 임해 있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친히 약속했습니다.“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이 약속은 리빙스턴과 같이 문자 그대로 믿는 이에게는 언제나 천국이 그 속에 임재(臨在)하는 것입니다.

 

 
 



186.초대 교회의 순교자 이그나티오스

역사적으로 성령께서 오순절에 임하실 때에 120명 신도들에게 천국이 임하신 것입니다. 전에 초대 교회 시대에 안디옥 교회에서 순교를 한 아그나티오스는 디오호르스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습니다. 로마 황제 트라얀(Trajian)이 어찌해서 그런 별명을 가지게 되었느냐고 물어 볼 때에 그는 곧 대답하기를“내 마음에는 언제든지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기 때문이랍니다”라고 하였습니다.‘디오호르스’라고 하는 말은 그리스도를 모시는 문이라는 뜻입니다. 먼저 신령한 가운데 천국이 우리 마음속에 임재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가 일찍이 어떤 열심 있는 청년 사회개혁자에게 이와 같은 권면을 하였습니다.“세상을 위하여 너무 피땀을 흘리지 말고 네 자신을 위하여 땀을 흘려라 세상을 보다 더 낫게 만들려고 하면 네 자신부터 낫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천국을 네 마음속에 먼저 모시기 전에는 세상을 천국 화하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가 과연 이 세상을 천국 화하려고 한다면 내 마음속에 먼저 천국이 임재 하여야 될 것입니다. 천국은 우리 마음속에 임재 하는 것임을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느낄 수는 있습니다. 남은 모릅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은 알 수 있습니다.
“천국은 너희 안에 있느나라”하는 이 말씀을“너희 가운데 있느니라”이렇게 번역한 성경도 혹 있습니다. 그 원어의 뜻은 그렇게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엔토스(entos) 라고 하는 말은 안이라고도 번역할 수 있고, 가운데라고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즉“천국은 너희 중에 있느니라”는 말은 믿는 사람들 가운데 천국이 있다고 하는 뜻이 됩니다. 이것도 역시 사실입니다 <천국이 너희 안에>에서

 

 
 



187.《천로역정》

번연의 이야기를 하였지만, 그는 감옥에서 어려운 생활을 잘 이겨 나가는 은혜만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 가운데서 오히려 주님의 은혜를 더 받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신앙생활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는 가운데 《천로역정》이라는 유명한 책을 써서 자기가 말로 전도하는 것보다도 더 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원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너무나 깊고 오묘하십니다. .

 

 
 



188.《실락원》

역시 청교도였던 존 밀턴 같은 분은 아주 유명한 분입니다. 그는 선천적으로 문필에 재주가 있는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불행이 중년에 실명이 되어 눈을 못 보게 되었습니다. 본래 신앙이 독실한 분이었으므로 실명이 될 때에도 이것을 고쳐달라고 간절히 기도했고, 실명이 된 다음에도 혹 볼 수 있는 길이 없을까 해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기도대로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도 밀턴은 실명한 가운데서도 평안한 마음으로 감사하고, 기쁜 마음으로 지낼 수 있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는 은혜 가운데서 계속해서 성경 말씀을 묵상하는 중에 더 큰 은혜를 받아서 여러분 아사는 바와 같이 만고 불후의 대작인《실락원》이라는 유명한 책을 남기게 된 것입니다.
가시가 좋은 것은 아닙니다. 가시 자체가 선한 것도 아닙니다. 가시는 사도의 사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할 것은 이것을 통해서 주님의 능력이 온전히 나타날 수 있고, 또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고 큰 축복이 나타나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검은 구름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검은 구름이 없으면 빛나는 무지개를 볼 수 없습니다. 어떤 때에는 무지개와 같은 주님의 빛을 반사시키기 위해서 우리 생활의 어떤 면에 검은 구름이 허락할 때가 없지 않아 있는 것 같습니다.

 

 
 



189.조개와 진주

요한 계시록에 보면 새 예루살렘은 모든 것을 아주 아름답게 꾸몄는데 그 문들은 전부 진주로 만들었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그 진주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기억하십니까? 진주는 본래 바다 속에 사는 진주 패라고 하는 전복, 조개 가운데서 생깁니다. 그 가운데서 어떻게 되는 지 압니까? 조개가 바다 밑으로 기어가다가 어떻게 잘못되어서 깔깔한 모래알이 그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 연한 살에 모래알이 들어가면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그러나 진주 패는 이 고통 가운데서 말하자면 생명의 즙을 짜서 그 모래알을 둘러싸고 싸고 또 쌉니다. 한 달, 두 달, 1년, 2년, 여러 해를 지나게 되면, 큰 진주가 되어서 제왕이 면류관을 장식하고 천국의 문을 장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혹 하나님께서 우리 하나 하나로 하여금 많은 사람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진주 문을 삼기 위해서 어떤 가사를 허락하는 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190.곰보 전도사의 이야기

제가 오래 전 학생시절에 어떤 책에서 읽은 이야기를 지금도 어렴풋이 기억합니다. 전에 어떤 유력한 가정에 귀한 따님이 하나 있었습니다. 공부도 잘 마치고 성년이 되어서 역시 유력한 어떤 집의 좋은 남자와 약혼을 하고 결혼 날까지 다 작정을 했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결혼하기 약 1주일 전에 갑자기 이 여자가 병에 걸렸습니다. 아주 중한 열병입니다. 정신 모르고 앓습니다. 앓는 동안에 결혼 날짜가 다 지나가고 말았습니다. 한 달 이상 중하게 앓고 겨우 생명을 보존해서 살아났습니다. 살아나고 보니 참으로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처음으로 일어나 앉아서 머리를 빗으려고 거울 앞에 가서 지기 얼굴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거울에 비친 얼굴이 전혀 다른 얼굴이었습니다. 이 여자가 앓았던 병은 마마라고 하는 천연두였던 것입니다. 그 어여쁘던 얼굴이 북한에서 흔히 쓰는 말대로 졸박 졸박 얽었는데 도무지 지기자신 조차도 알아볼 수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기가 막힙니다. 머리를 채 빗지도 못하고 그냥 자리에 쓰러져 눕고 말았습니다.
며칠 후입니다. 병이 좀 낫다는 말을 듣고 그녀와 약혼한 남자가 찾아온다고 합니다. 이전 같으면 얼마나 반가웠겠습니까? 참 기가 막힙니다. 하지만 어떻게 할 수 없어서 찾아온 남자를 맞아들여서 마주 앉았습니다. 그런데 남자가 한번 곁눈으로 힐끗 보더니 금방 얼굴 빛이 달라집니다. 그리고 나서는 도무지 일불거래(一不去來)입니다. 얼마 후 본래 중매했던 노파가 다시 오더니 머뭇거리며,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마지막에 하는 말이 “저 집에서 파혼하겠답니다” 이 한 마디를 남기고 훌쩍 가버렸습니다. 그 여자가 얼마나 기가 막혔겠습니까? 그런데 설상가상(雪上加霜) 얼마 후에 바로 그 남자가 자기와 친하게 지내는 친구와 다시 약혼을 한다는 소문이 들려옵니다. 이윽고 아무 날로 결혼 날짜를 받았다는 이야기까지 들립니다.
이 소식을 들을 때 이 여자는 너무나 원통해서 이불을 쓰고 집안에 들어 누었습니다. 밥도 못 먹고 고생을 하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 날 저녁에도 이불을 쓰고 가만히 누워서 바로 내일이 그 결혼식 날이라고 생각을 하니 앞이 캄캄하고 분하기만 하고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그러다가 그만“아무도 원치 않는 이까짓 몸이 살아서 무엇 하나”하고 생각한 끝에 결국 자살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부모들이 안보는 사이에 지기 집을 빠져 나왔습니다. 어스름 저녁인데 천천히 걸어서 멀지 않은 강가로 나갔습니다. 높은 벼랑 위에 앉아서 달빛이래 흐르는 푸른 강물을 내려다보며 자기 신세를 생각하니 기가 막힙니다. 그만 서러움에 복받쳐 대성통곡을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기진맥진해서 앉았는데 이상스럽게도 그 날 저녁 따라 멀리서 이상한 노래 소리가 드려왔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귀를 기울여서 듣기를 시작했습니다. 전에도 듣지 못하던 노래 소리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어떤 노래 소리인가 하고서, 노래 소리 나는 곳으로 점점 찾아가 보았습니다. 좁은 오손 길을 지나서 송림 사이를 한참 지나가 보니까 조그마한 집이 한 체 있는데 그 집에 사람이 가득히 모여서 찬송을 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게 아니고 조그마한 농촌 예배당이었습니다. 때마침 부흥회를 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밖에서 서성거리니까 웬 사람이 나오더니 친절한 태도로 들어오라고 합니다. 자기는 그다지 들어갈 마음도 없는데 억지로 들어오라고 합니다. 무슨 설교를 하고 무슨 설교를 들었는지 모르지마는 이 여자가 그날 저녁에 처음으로 교회에 발을 들여놓았고, 자기는 아무 소망이 없었는데 하나님을 믿고 예수를 믿으면 새로운 소망이 있다고 하는 말을 듣고, 결국 예수를 믿기로 작정하였다는 것입니다.
그 후부터 이 여자의 부모에게 공부를 더 하겠다고 청을 했습니다. 넉넉한 집안인지라 부모들은 딸의 소원대로 공부를 더 시켰습니다.
마침내 이 여자는 지금으로 말하면 여자신학교를 마치고 어떤 교회에 여전도사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주를 위해서 자기의 전심 전력을 다 했습니다. 이 분은 자기를 원하는 남자는 이 세상에 하나도 없는데 주님만이 자기를 자기의 신랑이 되어 주셨다고 생각하여 주님의 신부로서 정성껏 주님의 몸 된 교회를 받들겠다는 결심 아래, 힘껏 전도하고 기도하고 가난한 사람을 구제했던 것입니다.
받은 월급을 다 쓰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자기 아버지에게서 받은 유산도 전부 다 써가면서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고 특별히 불구자를 불쌍히 여기고 불쌍한 사람을 위하여 일했습니다. 이렇게 몇 해 동안 교회 일을 보았더니 그 교회에서“우리 전도사의 얼굴은 예수 님의 얼굴과 같다”하는 말이 돌게 되었습니다.“우리 전도사의 얼굴은 어떻게나 은혜가 충만한지 모르겠어! 그 오목오목한 자리마다 주님의 사랑이 가득 담겨 있고 그 올통 불통한 데는 주님의 영광이 반사되는 것 같단 말이야”이런 말이 퍼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밉고 고운 것은 보기 탓입니다.
여러분 중에 혹시 금강산에 있는 만물상을 가보신 분이 게십니까? 만물산은 미끈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모든 것이 그러합니다.
우리 중에는 가시를 가지고 있는 이가 많습니다. 이 가시를 혼자 가슴에 두지 말고 주님께 내 놓으세요. 기도하세요. 은혜 받으세요. 그러면 오히려 이 가시로 말미암아 더 축복을 받습니다. <내 몸의 가시>에서

 

 
 



191.서반아 왕 페르디난도 이야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전에 서반아(스페인)왕 가운데 페르디난도 5세라고 하는 왕이 있었는데 이 왕이 어떤 점쟁이에게 왕께서는‘마드리갈’이라고 하는 곳에 아예 가지 마세요. 그 ‘마드리갈’에서 왕은 장차 죽을 것입니다.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 왕의 별궁이 있습니다. 그래서 왕은 무서워서 자기의 좋은 궁전을 지어 놓고도 21년 동안 거기를 못 갔습니다. 그러다가 한 번은 서반아 지방을 여행하다가 어떤 조그마한 촌락에서 하룻밤 자면서 그만 병이 났습니다. 왕은 이 지방이 어떤 지방이냐고 물어보았습니다. 옆에 있던 사람이"이곳은 '마드갈레' 입니다" 하고 대답을 했습니다‘마드리갈'과 비슷했습니다. 사실은‘마드리갈’은 아니고 비슷한 이름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왕은“아이고 나는 죽었구나!”하드니 며칠 안되어서 죽었다고 합니다. 병이 죽인 것이 아닙니다. 공포심이 죽였다는 말입니다.
공포심이 사람의 마음을 엄습하게 되면 신경이 쇠약해지고, 혈압은 높아지고, 위액 분비가 잘 안되어서 소화도 안 되고, 심장이 뛰고, 당뇨병이 생기기 쉽습니다. 이렇게 되어서 사실은 세균에 의한 병보다도 이 공포심이 원인이 되어서 병 나는 이가 더 많고, 죽는 사람도 더 많다고 합니다. 이렇게 공포심이 우리 인생생활에 미치는 영향이 큽니다.

 

 
 



192.카네기의 공포심 없애는 비결

그러면 공포심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마음을 들어다 보면 공포심을 안 가진 이가 별로 없습니다. 이 공포심을 어떻게 해야 극복합니까? 미국의 카네기라는 사람의 저서를 보면 이런 글이 있습니다. 공포심이나, 근심을 없애는 방법이 있다고 하면서“첫째는 무서워하는 것, 또는 근심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하나 하나씩 책에 기록을 해 보라. 그러면 실상 그 가운데 대부분은 근거가 없는 공포라고 하는 걸 알게될 것입니다. 둘째로 나머지 공포심에 대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할 수 있는 것들을 기록해 보라. 셋째로 그 중에 무엇을 먼저 할까 하는 것을 작정하라. 넷째로는 그 공포심을 이기기 위해서 작정한 대로 행하라. 그러면 그 어떤 공포심이든지 대체로 이길 수 있다.”이런 말을 했어요. 물론 이런 것도 다소 도움이 될 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근본적으로 극복하는 비결은 우리의 심령이 분명하게 가르쳐 줍니다.“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의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하나님을 의지하면 두려움이 없어집니다.

 

 
 



193.요한 웨슬레와 모라비안 선교사

우리 인간 생활에 큰 방해가 되는 것이 두 가지 잇습니다. 하나는 죄, 하나는 공포심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죄악 가운데서 구속하실 뿐 아니라 공포심 가운데서 해방을 주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우리가 주를 믿고 주를 의지하고, 성령을 충만히 받을 때에는 공포심까지 없어집니다.
요한 웨슬레의 전기를 보면 그가 젊었을 때, 큰 은혜를 받기 전에 미국에 전도하려 갔었습니다. 그러나 실패했습니다. 실패하고 돌아가는 뱃길에 대서양에서 큰 풍란을 만났습니다. 아주 위험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큰 공포에 싸였습니다.
그런데 살펴보니까, 그 가운데 모라비아교회에서 이 곳에 전도하려 왔다가 돌아가는 선교사가 몇 사람 있는데 이 사람만은 아주 태연합니다. 그래서 요한 웨슬레가 그 사람들에게 직접 물어보았습니다.“당신 네 들은 이런 가운데서도 두렵지 않습니까?”그 때에 그 중 하나가 조용히 대답했습니다,“우리는 그리스도를 압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와 같이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환경을 당하든지 두려운 마음이 없습니다.”그리면서 그 청년이 웨슬레에게 물었습니다.“당신은 그리스도를 압니까?”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압니까? 그리스도를 여러분 마음 가운데 영접합니까?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마음 가운데 계셔서 성령과 힘과 능력을 주십니까? 그리스도께서는 공포심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 20세기에 사는 현대인의 양상을 보면 과학문명이 발달되었고, 예술이 발전되었고, 모든 방면에 큰 진보가 발전이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인처럼 불안과 공포에 쌓인 이런 시대에 사는 사람들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루즈벨트 대통령이 인간의 4대 자유를 주장할 때에, 한가지는 공포에서의 자유를 부르짖었습니다. 물론 공포 없는 세계를 만들면 그것은 더 좋습니다. 그러나 그건 하루아침에 될 일 아닙니다. 성경 말씀대로 우리 믿는 사람들은 어떠한 시대, 어떤 환경에 살든지 공포심 없는 생활을 할 수 있는 분명한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공포심을 극복하는 비결>에서

 

 
 



194.주의 선하심을 발견하는 길

오늘 이 시간 다윗의 신앙간증을 잠깐 생각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시 34:8) 먼저 이 말씀을 생각합시다. 맛을 보아서 알아보라고 하였습니다.
주의 선하심을 알아보는 길은 몇 가지 있습니다.
이성의 길이 있습니다. 추리의 길이 있습니다. 이치를 미루어서 무엇을 아는 길이 있습니다.

195.아르키메데스의 원리 발견

옛날 헬라 사람 아르키메데스가 목욕탕에서 목욕을 하다가 갑자기 뛰어나오면서“나는 깨달았다, 나는 깨달았다.”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러했습니다. 목욕탕에 들어가서 몸을 물에 잠가보면 몸이 가벼워집니다. 그런데 그 때까지는 왜 가벼워지며 또 얼마나 가벼워지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아르키메데스가 목욕을 하면서 그것을 꼼꼼히 생각했습니다.
이성적으로 추리를 해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그 이치를 깨달았던 것입니다. 즉 물 속에 들어가면 몸의 용적만 한 물의 중량만큼 몸이 가벼워지는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추리를 통해서 새로운 사실을 알아내는 것입니다.

 

 
 



196.아이작 뉴톤의 만유인력 발견

영국의 유명한 아이작 뉴톤 같은 이도 과수원 안에 앉아서 사과나무에서 떨어지는 것을 자세히 살피다가 지구에서는 모든 것을 잡아당기는 인력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것은 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성을 통해서 무엇을 아는 예입니다. 그러나 그 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197.직감으로 깨닫는 주의 선하심

다음으로, 직감 혹은 지각 곧 느낌으로 깨닫는 길이 있습니다.
무지개가 아름다운 줄 아는 것은 무슨 이치를 생각해 보고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아침해와 저녁 노을이 아름다운 줄 아는 것은 누가 설명해서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꽃을 보거나 음악을 듣거나, 위대한 문학이나 시를 읽어나, 혹은 위대한 조각품을 볼 때 아름답다고 느끼고 놀라움을 나타내게 되는 것은 이성으로 생각해서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직감입니다. 예술적 방면의 모든 지식은 흔히 이런 직감 경로를 통해서 우리가 알게 됩니다.

 

 
 



198.권위를 통해서 믿음으로

또 다른 길은 우리가 많이 쓰는 길인데 권위입니다. 이 권위를 통해서 믿음으로 가는 길입니다.
각 방면에 전문가가 있습니다. 나는 깨닫지 못하지만 그 전문가의 말을 듣고 신용함으로 우리가 압니다. 지금은 어린아이들이라도 태양이 지구를 도는 게 아니고 지구가 태양을 도는 줄을 다 압니다. 그러나 옛날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코페리니투스가 이 세상에 나타나서 주장하기 전에는 다 태양이 지구를 도는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여러분은 지구가 태양을 도는 줄 다 압니다.. 어떻게 압니까? 여러분이 생각해서 알아냈습니까? 직감적으로 압니까? 아닙니다. 무엇으로 압니까? 권위의 말을 믿음으로 즉 천문학자의 말을 믿음으로 압니다. 그들의 말을 신용합니다. 우리가 학교에서 모든 교과서를 앍고 지식을 배울 때에는 다 이런 여러 가지 경로를 이용해서 배웁니다.

 

 
 



199. 실험을 통해서 아는 길

다른 또 하나의 길은 매우 중요한 방법인데 실험을 통해서 아는 길입니다.
프랜시스 베이컨 같은 분은 이 방법의 시조라 할 수 있습니다. 과거 3백년 동안의 위대한 과학자의 발견은 모두 이 길을 통해서 이루어 졌습니다. 어떤 학설이나 진리가 과연 옳은지 알려면 그대로 실험을 해보고 그 결과를 보아서 귀납적으로 그 이론이 옳은지 그른지를 판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실지로 해보는 것이 새 지식을 아는 방법입니다
여기 맛보아 안다는 말은 이치를 미루어서 안다고 하는 말도 아니고, 직감적으로 안다고 하는 말도 아니고, 본인의 말을 듣고 안다고 하는 말도 아니고, 실지로 해 보라는 말입니다. 실지로 해보아서 이것이 사실인지 아니지 알아보라는 말입니다.

 

 
 



200.나폴레옹과 부하 군인들의 대화

나포레옹 같은 사람은 군인이지마는 이런 직감이 있었던 사람 같았습니다. 그가 한 번은 자기 군대를 거느리고 애굽을 정복하려 가기 위해서 지중해를 건너갑니다. 마침 바다는 잔잔하고 달은 밝은 밤인데 많은 군인들이 갑판 위에 올라와 눕기도 하고, 앉기도 하고, 이런 이야기 저란 이야기를 합니다. 나폴레옹이 조용히 뒤로 다니면서 이 군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나? 살펴봅니다. 한편 구석에 가보니까 어떤 군인들이 앉아서 열심히 변론을 합니다. 가만히 들어보니까 한 사람은 하나님이 있다고 하고, 한 사람은 하나님이 없다고 서로 다투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는 무신론자요 하나는 유신론자입니다. 나폴레옹이 가만히 뒤에서 듣다가 성미가 급해서 불쑥 한마디를 했습니다.“여보 ! 변론만 하지 말고, 눈을 들어 하늘을 좀 바라보시요”두 사람이 깜짝 놀라서 하늘을 쳐다보니 명랑한 달빛이 이름답게 비치고 무수한 별들이 반짝이면서 그들을 내려다봅니다. 그 때에 나폴레옹이 두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저걸 보고도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모르겠소”직감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를 아는 길이 있습니다.

 

 
 



201.열등감을 극복하는 비결

누구나 나는 부족하다 하는 느낌이 다 있는 줄로 생각합니다. 이것은 건전한 자기 성찰인줄 압니다. 그러나 이런 느낌이 도가 지나쳐서 항상“나는 부족하다, 나는 모자란다, 나는 할 수 없다”하는 느낌에 사로잡히게 되면 이것은 일종의 병적 심리상태입니다. 이것을 심리학적으로 열등감이라고 합니다. 영어로 말하면 인페리오리티 컴플레스(Inferiority Complex) 라고 합니다.

 

 
 



202 열등감에 사로잡히게 되면

사람이 이 감정에 사로잡히게 되면 자기에 대한 자신력을 전혀 잃고 무능하고 무력하게 되어서 인격상 또는 생활상 불행한 결과를 초래합니다. 이런 이들은 흔히 자기의 할 일을 하지 못합니다. 씨름을 하기도 전에 누울 자리부터 봅니다. 마땅히 해야 될 경우에 할 말을 하지 못합니다. 겁이 나고 도에 넘치는 역병에 걸려서 정당한 사교생활도 하지 못합니다. 이런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으면 교회에 출석은 하지마는 교회에 봉사하거나 전도는 하지 못합니다. 사회에 나가서 일한다고 하지마는 부정과 불의에 항거할 용기가 없습니다. 그대로 나가면 결국은 그 일생은 실패로 돌아가고 맙니다.

 

 
 



203.열등감을 보충하려는 행동

반면에 이런 이들이 자기의 열등감을 보충하기 위해서 다른 방면으로 도에 지나치는 일을 하는 수도 있습니다. 가령 어떤 여자가 이런 열등감에 사로잡히게 되면 도에 지나치는 화장을 한다던가 의복을 별스럽게 입고 사치하게만 차리려고 애를 씁니다. 미국 같은 데를 가보면 흑인들이 많이 있는 데 흔히 흑인 여자들이 너무 화장을 도에 지나치게 합니다.
아프리카에 가나 같은 나라에 가보니까 거기 흑인 야자들이 옷을 입었는데 별스럽게 울긋불긋한 옷들을 전부 입고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일종의 열등감에 사로잡혔는데 이것을 다른 면으로 보충을 하려니까 이런 화장이나 이런 의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어떤 남편이 자기 부인보다 좀 못하다는 열등감이 있다고 하면 흔히 자기 아내에 대해서 더 괴롭게 굽니다. 그저 자기 아내를 꼼짝 못하게 지배하려고 달라붙습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열등감을 어떻게 해서든지 보충하려고 그러는 것입니다. 이런 이들은 흔히 도에 지나치는 대접을 다른 사람에게 요구합니다.
보통 사람은 섭섭해하지 않을 것도 이런 이들은 나무라기를 잘합니다. 혹 어떤 사람이 그저 무심중에 인사를 좀 잘못해도“아 저 사람이 나를 업신여겨서 인사를 안 하느냐?”하고 대단히 섭섭해합니다. 또 어떤 때에는 어린아이들이 도에 지나치는 자기 자랑도 해봅니다.
하여간 이것은 병적인 심리상태입니다. 따라서 이런 아이들이 가정에 있으면 가정이 불화하기 쉽고, 이런 아이들이 교회에 많이 있으면 교회가 불화와 불평에 빠지기 쉬운 것입니다.

 

 
 



204.겸손과 열등의식

자기를 낮추는 것은 미덕이지마는 이 열등감이라고 하는 것은 병적 심리상태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꼭 극복해야 신앙생활도 바로 하고, 모든 다른 사업도 바로 합니다. 그런데 누구나 이 열등감에 사로잡히기 매우 쉽습니다. 이런 열등감을 극복하는 길이 어디 있는가 몇 가지로 생각해 보고자합니다.
첫째는 자신을 잘 살펴서 이런 병적 열등감에 사로잡혔는가 알아야 합니다 .또 그 원인이 어디 있는가 알아볼 것입니다. 원인을 알면 그것을 우리가 고칠 수 있습니다. 먼저 아성을 통해서 이 열등감을 시정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205.부모와 교사의 책임

열등감을 가진 이들 가운데 어떤 사람은 어렸을 적에 부모에게 좋은 가정교육을 받지 못하고 부모가 못한다고만 윽박질러서 이런 열등감이 깃들인 경우가 더러 잇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가정에서 아이들을 기를 때에 잘못한다고만 자꾸 윽박지르면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 아이 마음 가운데“난 그저 못난 놈이야”하는 생각이 늘 들게됩니다.
또는 학교에서 선생이 버릇이 좋지 못하다거나, 공부를 잘못 한다 거니 하고 자꾸 못한다고만 놀려주고 욕해 주면 그만 그 아이가 마음에 깊은 상처가 나서 일생토록 열등감 가운데 사는 수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학교 선생들은 이런 점을 조심해야 합니다.

 

 
 



206.오해로 인한 열등감

그러나 이 밖에는 열등감을 가질 이유가 없는 데도 오해 때문에 혹은 그릇된 가치판단 때문에 열등감을 가지는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한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처럼 상당한 학교 교육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 사람이“난 젊어서 교육받을 기회를 잃어서 남처럼 대학을 졸업 못했어, 그러니까 난 남보다 못해”이런 생각을 자꾸 하면 결국 열등감에 사로잡히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사실 오해입니다. 학교 교육을 받지 못했다고 반드시 열등한 것은 아닙니다. 또 학교교육을 받지 못했다고 반드시 사업에 성공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자습해서 자수성가한 사람들이 얼마든지 많습니다.

 

 
 



207.아브라함 링컨의 이야기

미국의 유명한 아브라함 링컨 같은 이는 학교에 몇 달밖에 못 다녔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미국의 제일 유명한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인도의 라빈그라나드 타고르 같은 이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문인이요 시인입니다. 그러나 이 분은 대학에 들어가 보지 못했습니다.

 

 
 



208.학별과 돈과 열등감

요사이 듣는 말로는 젊은 사람 가운데, 어떤 사람은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돈이 없어서 대학을 그만 못 가게된 것이 남부끄러워서 교회에 못 나온다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 것으로 열등감에 사로잡혀서 되겠습니까?
또 어떤 학생은 부모가 학교를 보내 줘서 시험도 치르고 합격도 했는데 소위 일류학교에 입학 못하고 이류나 삼류학교에 들어갔다고 부끄러워서 마크를 못 달고 큰 거리로도 못 다니고 친구를 만나면 피해 다닌 일도 있다고 합니다. 이런 것 때문에 열등감에 사로잡힐 필요가 조금도 없다는 말입니다. 오해와 그릇된 판단에 의해서 열등감에 사로잡힐 필요가 없습니다.
또 특별히 생활이 빈궁한 이들이 가난하니까 옷도 다른 사람처럼 입지 못하고 해서 스스로 마음이 열등감에 사로잡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것도 사실 이유가 되지 못합니다. 세례 요한은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요단강에서 외칠 때에 많은 사람들이 그 앞에 나와서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약대 털옷이라고 무슨 모직 옷이 아닙니다. 변변치 못한 옷입니다.
예수 님도 친히 말씀하시기를“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일 곳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예수 님은 가장 가난하였습니다. 주후 4세기 사람인 성 안토니오 같은 이는 본래 부자의 아들입니다. 그러나 예수 님께서 부자 청년에게 하신 그 말씀 그대로 살기 위해서 자기의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자기는 가죽으로 옷 한 벌을 해 입고 광야지대에 나가서 일생을 굴속에서 살았습니다.

 

 
 



209.안토니오 이야기

한 번은 어떤 사람이 지나가다가 얼마나 안토니오의 모양이 험했던지 그를 짐승으로 오인했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한 번은 알렉산드리아에 나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칠 때에 온 알렉산드리아 성 사람이 그 앞에 나와서 무릎을 끓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것입니다. 가난하다고 해서 열등한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201.열등감에 사로잡힌 사람들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떻게 사느냐, 얼마나 진실히 살고 얼마나 옳게 살고 얼마나 봉사를 하느냐? 여기에 우등과 열등이 있지, 돈 많고 없는데 열등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그 말씀입니다. 지위가 높고, 지위가 낮고, 벼슬을 하고, 벼슬을 못하고, 여기에 우등과 열등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해해서 열등감에 사로잡히지 맙시다.
몸에 병이 있거나 특별히 불구자가 된 이들 가운데“나는 일생 병이 있고 나는 불구자가 되었으니 아무 것도 할 수 없다”하고 열등감에 사로잡히는 이들이 혹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이유는 안 됩니다.

 

 
 

211.토리 박사 이야기

바로 지난 금요일에 세브란스 의수족(義手足)부에서 아침 기도회를 인도해 달라고 해서 갔다 왔는데 거기가 보니까 토리 박사 기념 채플이 있었습니다. 이 토리 박사는 본래 그 유명한 미국의 부흥사인 토리 박사의 아들인데 이 분이 중국의 선교사로 갔다가 제2차 대전 때에 그만 부상해서 팔을 하나 잃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6·25사변이 일어나 다리 없는 사람, 팔 없는 사람이 많다는 소식을 듣고 한국에 나와서 세브란스병원을 중심해서 의수족 부를 설치하고 많은 청년들에게 다리를 해주고 팔을 해주었습니다. 지금 그이는 귀국했지만 현재 그 책임자로 있는 선교사도 두 손이 다 없는 분입니다. 두 손이 다 없는 분인데 한국에 나와서 많은 손 없고 발 없는 사람에게 좋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212.헬렌 켈러 이야기

헬렌 켈러 같은 여자는 소경이니 눈도 보지 못하고, 귀머거리니 귀도 듣지 못하고, 벙어리니 말도 하지 못합니다. 이런 여자지마는 세계의 가장 유명한 여자 가운데 하나입니다. 몸이 약하다고 불구자가 되었다고 열등감에 사로잡혀서 자포자기하면 안 됩니다.
또 어떤 이들은 사업하다가 실패한 다음에 열등감에 사로잡히는 이가 혹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사실 이유가 안 됩니다. 지금은 세상을 떠났지마는 우리 교회 고한규 장로님은 참 위대한 장로님이십니다. 그가 한 번은 자기의 회고담을 하는 것을 들은 일이 있습니다. 그가 사업에 실패해서 많은 사람에게 빚을 졌던 경험이 있었다고 합니다.

 

 
 



213.김기범 장로님 이야기

내가 신의주에 제2교회에서 봉사할 떼에 그 곳에 참 위대한 장로님으로 김기범 장로님이라고 계셨습니다. 언젠가 김기범 장로님과 하루 저녁 같이 앉아서 이야기를 하는데 하시는 말씀이, 자기는 일생 사업을 한 사람인데 일생에 세 번 크게 실패를 해서 한 푼도 없는 신세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 후에, 다시 일어나서 회복하여 이 만큼 살아간다고 하였습니다. 사업하다가 누구나 실패할 수 있습니다. 실패했다고 절대로 열등감에 사로잡힐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214.큰 사업을 한 여자들

부인들 중에는 미안한 말이지마는 얼굴에 허물이 있든지 또 얼굴이 잘못 생겼으면 아주 열등감에 쉽게 사로잡히는 모양입니다. 얼마 전에 어떤 책을 보니까 어떤 분이 세계에서 가장 큰 일을 많이 한 여자들을 전부 조사를 하고 그들의 얼굴이 잘 생겼나, 못 생겼나를 알아보았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오히려 큰 사업을 한 야자들 가운데는 못 생긴 여자들이 더 많다고 하는 사실을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얼굴에 허물이 좀 있다든지 해서 열등감에 사로잡힐 필요는 없습니다. <열등감을 극복하는 비결>에서

 

 
 



215.성 안토니오의 결단

주후 4세기 애굽의 한 청년이 성경 말씀을 듣고 돌이켜 생각을 해보니 주님의 이 말씀은 꼭 자기에게 하는 것으로 생각이 되었습니다. 그 청년은 부모에게서 상당한 재산을 유산으로 받았습니다. 가족이라고는 자기의 손아래 여동생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는 예수 님 당시에 재물이 많은 까닭으로 근심하며 돌아간 사람의 전철(前轍)을 다시 밟지 않기로 생각하고 주님이 명령하신 대로 꼭 실행하기로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재산의 대부분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적은 재산만 남겨서 자기의 여동생의 생활비로 준 다음, 자기는 성경에“일하기 싫은 자는 먹지도 말라”고 한 교훈과“항상 기도하라고”한 교훈대로 자기 손으로 일해서 먹으며 기도생활을 하기로 결심하고 애굽 광야에 나가서 손수 곡식을 심어서 거두어 먹고, 남는 시간을 오직 기도와 묵상으로 지내게 되었습니다.
이 청년이 교회의 역사상 유명한 성 안토니오 입니다. 수도사들이 아버지로 존경을 받은 분입니다. 현대 청년들도 꼭 안토니오를 모방하라고 하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의 결단을 배워야 되겠습니다. 청년들이 아무리 성품도 좋고, 학식도 있고, 재주도 있다고 하지마는, 결단력이 없으면 무슨 일을 이룰 수 없습니다. 이 역사적 시점에서 사는 우리 한국 청년들은 반드시 결단할 몇 가지가 있는 줄 생각합니다. <한국 청년의 결단>에서

 

 
 



216. 진젠둘프의 헌신

우리가 교회 역사를 읽어보면 물론 위대한 전도자가 거의 하늘의 별처럼 무수히 일어났습니다. 그 여러 사람 가운데도 특별히 우리 신교 역사상에 세계 선교운동을 일으켜서 자기 스스로 실천한 모라비아교회의 창립자요, 또 그 교회의 목사였던 진젠돌프라고하는 이를 기억하게 됩니다.
이 분은 본래 귀족의 아들입니다. 백작의 벼슬을 가진 분입니다. 자연히 재산도 많은 분입니다. 그러나 이분은 자기의 지위도 버리고 재산도 다 바쳐서 오직 온 세계에 복음을 전파한 분입니다.
그 때에는 불행이 구교도와 신교도 사이에 큰 충돌이 있어서 구교도의 압력을 받은 불쌍한 신교도 피난민들이 갈 때가 없어서 그에게로 찾아 올 때, 이 분은 그들을 영접해서 자기가 소유한 토지를 주고, 그들을 위해서 집을 지어주고, 그들로 하여금 같이 모여서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들을 위해서 또 예배당을 지어주었습니다. 그렇게 되어서 한 5, 6백 명쯤 피난민들로 조직된 교회가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수는 많지 않지마는 진젠돌프를 중심해서 이들은 하나님을 공경하며 같이 모여서 기도하고 성경 말씀을 배우며 성례를 거행하는 가운데 온 교우가 성령이 충만한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리해서 이들은 자기자신들만 믿을 것이 아니라, 이 귀한 복음을 온 세계에 전파해야 되겠다고 하는 새로운 사명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놀라지 마십시오. 5, 6백 명되는 교회에서, 멀리 아프리카를 비롯해서 웨스트 인디아와 저 북방의 그린란드까지 백 여명의 선교사를 파송하게 되었습니다. 보통으로 평균 네 세대, 다섯 세대에서 성교사 한 사람을 담당했다고 합니다.
어떻게 이와 같은 운동을 일으키게 되었는가? 진젠돌프 자신이, 이 경험을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물론 그는 어렸을 때부터 자기 할머니에게 독일 경건주의의 감화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특별히 그가 젊었을 때에 어떤 박물관에 들어가서 여러 미술품을 구경할 때, 한 그림에 가보니까 그 때의 유명한 화가 스턴벅(Sternburg) 이라고 하는 분이 그린 명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시면류관을 쓰시고 십자가에 못 박이신 모습을 그린 그림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그림을 유심히 볼 때에 은혜를 받아서 주님께서 죄인들을 구속하기 위해서 그처럼 고생을 받았다고 하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자기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보혈을 흘리셨다고 하는 사실을 절실히 느끼게 되어서, 그 그림 앞에 조용히 섯는 동안 주님께서 은연(隱然)한 가운데“나는 너를 위해서 내 몸을 주었건마는 너는 나를 위하여 무엇을 하느냐?”하는 음성이 그 심령 속에 들렸다고 합니다.
그 자리에서 자기의 몸을 바치고 자기의 가진 것 전부를 주님께 바쳤습니다. 그 감격과 그 감사한 마음 가운데서 온 천하에 복음을 전파하게 된 것입니다.

 

 
 



217.흑인 전도자들

바로 몇 칠 전에 신문지상을 통해서 미국에 있는 흑인 지도자 마틴 루터 킹 목사라고 하는 분이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는 뉴스를 다 들으신 줄 압니다. 아프리카 흑인 가운데서도 위대한 기독교인이 여러 사람이 나왔습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물론 마틴 루터 킹 같은 사람이다. 한편 지난 세기인 저 19세기 아프리카 흑인 중에 제일 유명하다고 생각되는 분은 나이제리아의 사도라고 이름을 얻게 된 사무엘 애드자이 크라우드( 그 실제 이름은 애드자이) 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나이제리아는 그 때까지 영국의 식민지였지마는 지금은 독립국가입니다. 아프리카 신생국 중에 제일 문화 수준이 높은 가운데 하나입니다. 여기에는 이 애드자이의 큰 공로가 있다고 합니다. 18세기 초엽인 그 때에는 해적들이 아프리카에 가서 흑인들을 강제로 납치해 다가 저 웨스트 인디아라고 하는 섬에 데려가서는 여러 나라의 종으로 팔던 그런 악한 일이 있었습니다.
한 번 애드자이가 사는 동네에도 이와 같은 해적의 무리가 와서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모조리 강제로 납치해 다가 배에 싣고서는 종으로 팔려고 대서양을 건너 웨스트 인디아 섬으로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 마치 영국 군함이 그 해적을 발견하고 추격해서 해적을 다 붙잡고 노예로 팔아 버리려든 흑인들을 다시 서 아프리카로 싣고 가서 다 놓아 주었습니다.
그 가운데 열 네 살 된 어린아이도 시에라 레욘이라고 하는 서 아프리카에 내렸는데 마침 거기서 어떤 선교사를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의 자초지종이야기를 다 들은 선교사는 그를 불쌍히 여겨서 도와주고 미침 그 곳에 세워져 있는 기독교학교에서 공부를 시키기 시작했습니다.
이 아이가 거기서 공부를 하고 예수를 믿게 되었고 또 공부를 아주 잘했기 때문에 학교를 졸업한 다음에는 선교사가 그를 영국까지 보내서 공부를 계속해서 시켰습니다. 이 학생이 영국서 공부를 다한 다음에는, 자기의 생활을 돌아보니 참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합니다. 바다 가운데 노예로 잡혀가서 팔려갈 신세에 있던 것을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시고 또한 대학까지 졸업하게 된 것을 생각하니 참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합니다. 그래서 자기 고향에 돌아가서 자기 동족들에게 이 복음을 전파할 수박에 없겠다고 결심을 가지고, 1843년에 청년으로서 다시 자기 고향인 흑암(黑暗) 대륙으로 돌아갔습니다.
돌아가서는 일생토록 교회를 세우고, 학교를 세우고, 전도, 교육, 문화, 사회 각 방면에 많은 공헌을 해서 나이제이아의 사도라고 하는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와 같은 생활의 배후에는 무엇이 있었겠습니까? 역시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해 주셨으니 얼마나 감사한가? 그러니 이 귀한 복음을 내 민족에게 전파해야 되지 않겠는가 하는 감사한 마음이 그로 하여금 위대한 전도자를 만든 것입니다.

 

 
 



218. 오직 전도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 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모든 구원의 역사를 마치시고 승천을 하였습니다. 거기서 천사장 가브리엘을 만났다고 합니다. 가브리엘이 예수 님을 만나자, 크게 치하를 하면서 마지막으로 한 가지 물었다고 합니다.“그렇게 큰 구원의 사업을 다 이루었는데, 이 복음을 모든 사람에게 전파하여야 하겠는데, 무슨 방법을 가르치고 올라왔습니까?”그러니까 예수 님께서 대답하는 말씀이“내가 열두 제자를 택해서 가르치고 그 열 두 제자에게 가까운 사람부터 시작해서 모든 사람에게 이 복음을 전하라고 내가 부탁을 하고 왔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던 가브리엘이“참 잘 되었는데 그러나 그 사람들이 만일 주님의 부탁을 잘 받지 않고 부탁대로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 것입니까? 무슨 다른 방법이 있습니까?”하고 또 물었다고 합니다. <감사와 전도>에서

 

 
 



219.하늘의 악대

오늘 우리 한국교회도 문자 그대로 모압 자손 같고, 암몬 자손 같고, 세일 자손 같은 많은 원수들이 침투해 들어왔습니다. 공산당들이 침투해 들어왔습니다. 세속주의가 침투해 들어왔습니다. 소매치기 부대가 많아졌습니다. 인간 송충이라는 도벌부대가 많아진 모양입니다. 탐관오리 부대가 많이 침투했습니다.
여러 원수들이 이 땅으로 지금 침투해 들어오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정부가 정신을 차려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군대가 정신을 차려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경관들이 정신을 차려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하십시다.
이와 같은 때에 하늘의 악대인 우리 교회가 앞장서서 전국을 복음화 시키며 자유수호운동의 기치를 높이 들면 이 모든 원수들은 자멸될 기회가 머지 않아 올 것입니다. 이 위대한 하늘의 악대가 먼저 전진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는 이 모든 일에 먼저 나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220.타이태닉 호

벌서 반세기가 지났습니다. 1912년에‘타이태닉(Taitanic)호’라는 유명한 여객선이 대서양을 건너던 중입니다. 그 때에는 제일 크게 건조한 배요, 아주 호화롭게 만든 여객선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유명한 배가 처음으로 대서양을 횡단하게되니 유럽과 아메리카의 저명한 인사들이 이 배에 많이 탔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 배가 대서양을 건너오다가 빙산에 부딪쳤습니다. 깨어졌습니다. 침몰하기를 시작합니다. 구명정 몇 개를 싣고 가던 것을 내려서 먼저 어린아이들과 부녀자들을 할 수 있는 대로 구호를 했습니다. 그러나 여객의 다수는 구할 길이 없었습니다. 배는 점점 가라않습니다. 그렇게 되니 그 여객선에 탔던 여러 승객들은 정신을 잃고 불안과 공포가운데서 갑판에 나와서 아우성을 칩니다.
그 때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압니까? 그 배에 타고 있던 악대가 정복을 입고 각자 악기를 들고 갑판 가운데 나섰습니다. 그 아우성치는 가운데서 꼼짝하지 않고 지도자의 지휘를 따라서 모든 악기가 울리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분주하던 갑판이 조용해 졌다고 합니다. 한 곡 두 곡 위대한 곡을 계속하여 연주합니다.
그러나 배는 점점 가라않습니다. 마지막에 연주한 곡이 무슨 곡인지 압니까? 우리가 잘 아는 364장 찬송합니다.“내 주를 가까이 하려 한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내 일생 소원은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그리고 마지막 순간이 가까웠습니다. 마지막 절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야곱이 잠깨어 일어난 후 돌 단을 쌓은 것 본받아서 숨질 때 되도록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이 마지막 절을 부를 때에는 점점 침몰해 들어가든 모든 사람들이 일시에 일어나면서 공포도 잊어버리고, 불안도 잊어버리고 하늘을 향해서 승리의 기쁜 얼굴로서“숨질 때 되도록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라고 합창을 하면서 마지막을 승리로 마쳤다하는 기록이 지금까지도 남아 있습니다. <하늘의 악대>에서

 

 
 



221.성경의 어제와 오늘

성경은 모든 책 가운데 가장 많은 공격을 받은 책입니다. 사상적으로 또는 역사적으로 많은 공격을 받았습니다. 옛날 셀레우스(Celeus) 라고 하는 사람으로부터 시작해서 18세기의 볼테르(Boltair) 같은 사람과 현대 파괴적 비판자에게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공격을 하였습니다.
또 성경은 가장 박해를 많이 받은 책입니다. 로마 제국에서 큰 핍박을 받을 때에, 항상 성경을 빼앗아서는 불살랐습니다. 중세기에 천주교에서 성경을 박해했습니다. 즉 일반이 읽지 못하게 금했습니다. 현대에는 공산당들이 성경을 박해하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압니다.
그러나 지금도 성경은 세계의 어떤 책보다도 제일 많은 방언으로 번역된 책입니다. 제가 알아보니 현재 1천 2백 23방언으로 번역이 되었다고 합니다. 세계에서 이렇게 많은 방언으로 번역된 책은 다시없습니다. 또 성경은 지금도 세계의 어떤 책보다 제일 많이 팔리는 책입니다. 요새 말로 베스트 셀러(Best seller)입니다.
작년에 여러 성서공회를 통해서 판매된 부수가 아마 쪽 복음까지 포함해서 4천 9백 88만7천4백28권이라고 합니다. 우리 한국에서만 반포된 수가 933만 5천 6백61권이라고 합니다. 거이 1천만 권에 가깝습니다. 세계에 이렇게 많이 반포되는 책은 없습니다. 지금도 성경은 어떤 책보다 제일 많이 읽는 책입니다. 학생도 읽고, 청년들도 읽고, 노인들도 읽고, 남자 여자, 학자, 정치가, 과학자 할 것 없이 많은 사람들이 읽는 책입니다. 이런 의미에서도 성경은 무적의 책입니다. 대적이 없는 책입니다.

 

 
 



222.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책

18세기 불란서 자유사상가 볼테르 같은 사람은 그 때부터 약 40년 후에는 이런 책을 읽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혹평을 하고 예언을 했습니다. 그러나 실상 50년 후에는 그이가 앉아서 그 이야기를 했던 그 집이 바로 성서공회가 되어서 마루에서 천장까지 성경으로 가득 쌓이게 되었다고 하는 유명한 이야기는 우리가 다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디모데 후서 2장 9절에 사도 바울이 기록한 바와 같이“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할”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않습니다. 이런 책은 온 세계의 하늘 아래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유일무이한 책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이유가 몇 가지 잇습니다.
첫째는 이 성경은 여러분이 방금 들으신 대로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책입니다.“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라고 디모데 후서 3장6절에 기록되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 후서 1장 21절에“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기록했습니다. 성경은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서 말한 것을 기록한 책입니다. 요한복음 14장 26절에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고 하였습니다. 성령이 가르치시고 성령이 생각나게 하신 대로 기록한 책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책이 많지마는 이런 책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이런 책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근원이 하나님께로서 났습니다.

 

 
 



223.성경을 읽는 자

매일 매일 성경을 읽는 사람은 매일 매일 좋은 음식을 먹는 사람과 습니다. 강건하고 튼튼히 살 수 잇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 신앙에 유일한 표준입니다. 전통이 신앙의 표준이 아닙니다. 이성이 신앙의 표준이 아닙니다. 물론 감정이 신앙의 표준이 아닙니다. 오직 성경만이 우리 신앙의 정확무오(正確無誤)한 표준입니다. 이단과 사설이 횡행하는 이러한 때에 우리가 어떻게 하면 신앙의 정로(正路)를 밟아갈 수 잇는가? 성경을 읽고 그대로 믿으면 신앙의 정로를 밟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행위의 정확무오한 표준입니다. 성경 가운데에는 지고의 윤리가 있습니다. 성경은 최고의 도덕적 법칙을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여러 가지 계명을 비롯해서 산상보훈에 이르기까지 우리 인간이 인간으로서 또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 세상에서 어떻게 행해야 될 모든 규례(規例)를 분명하고 똑똑하게 가르쳐 줍니다. 행위의 정확무오한 표준입니다.
그러므로 읽어야 합니다. 이렇게 성경은 우리에게 새 사람이 되게 합니다. 우리 신앙의 표준이 됩니다. 전에 라볼드 잉그솔이라고 하는 무신론자가 역시 그 때에는 믿지 않던 친구 류 월리스(Lew Wallace) 라는 장군에게 기독교를 반대하는 책을 쓰라고 권면을 했습니다. 그 권면을 듣고 그런 책을 쓰기 위해서 붓을 잡게 되었는데, 반대하는 책을 쓰려니까 부득이 기독교가 무엇인가 알아야 하겠단 말입니다. 알려고 하니까 부득이 성경을 읽을 수박에 없습니다. 성경을 읽는 가운데 생각이 점점 변했습니다. 마지막에는 회개하고 오히려 성경의 감화를 받았습니다. 그리해서 그분이 결국 무슨 책을 썼는지 압니까? 한국에서도 영화로 상영되어 우리가 다 본‘벤허’라고 하는 유명한 소설을 썼습니다. 오히려 예수의 생활을 묘사하는 그런 책을 썼습니다. 성경의 감화력이 이렇습니다. 성경을 반대하고 성경을 믿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의 내용을 알아보면 열이면 열 모두가 성경을 읽어보지 못한 삶들입니다.

 

 
 



224.성경독서와 토론

전에 프리스턴에 잭 윌슨 박사라고 하는 유명한 구약학자가 있었습니다. 그 때에 프린스턴 대학 학생 몇 명이 와서 그 윌슨 박사에게 “우리는 구약의 이것도 믿을 수 없고 저것도 믿을 수 없는데 토론 좀 하려고 왔습니다”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늙은 박사가 그 말을 듣더니 웃으면서 토론하는 것도 좋은데 성경을 토론하겠다니 성경을 몇 번이나 읽어보았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학생들은 성경을 한 번도 못 읽어보았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박사는 나는 적어도 40년을 밤잠 안 자면서 몇백 번을 읽고 연구해도 믿지 못할 것이 없는데 우선 몇 번 읽고 오라고 말했습니다. 보통 성경을 읽지 않고 반대합니다. 우선 몇 번 읽어보세요. 그러면 문제는 성경 자체가 여러분에게 대답해 드릴 것입니다. <성경을 아는가?>에서

 

 
 



225.참된 지혜의 생활

전도서 12장 1절에 “너는 청년의 때…너희 창조자를 기억하라”고 권면하였습니다. 청년시대에 은혜를 받아서 옳은 길을 가게 하여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젊은 시대에 옳은 길을 걷기 시작하면 평생에 즐겁고 기쁜 생활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인생이 잠간이요, 수고와 슬픔이 많지마는 젊을 때부터 참된 인생생활을 하게 되면 일생을 통해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인생의 아침에 바른 길을 택해야 됩니다. 이것이 지혜입니다.

 

 
 



226.생애의 인수분해

어떤 책을 보니 스위스의 어떤 노인이 약 80년을 살았다고 합니다. 건강한 모양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80년을 가는 동안에 자기의 시간을 어떻게 썼나 한 번 조사해 봤다고 합니다. 그랬더니(확실한 조사인지 모르지만) 26년간은 침상에서 누워만 있었습니다. 아마 잠을 넉넉히 잔 모양입니다
또 21년간은 일만 했습니다. 6년 동안은 음식 먹는 데 시간을 허비했습니다. 음식도 굉장히 많이 먹은 모양입니다. 또 다른 6년 동안 은 불쾌하고 노한 중에 지냈다고 했습니다. 어려운 일을 많이 당한 모양입니다. 5년 동안은 다른 사람이 시간 안 지키기 때문에 남을 기다리느라고 허비했다고 합니다. 사실 시간을 안 지키는 것은 큰 골치입니다. 남 때문에 허비한 시간이 5년 동안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228일 동안은 수염 깎는데 허비했다고 하였습니다. 또 26일은 아이들을 욕하는데 허비했다고 하였습니다. 손자가 많았던 모양입니다. 또18일 동안은 넥타이 매는 데 허비했다고 하였습니다. 그것도 모으면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모양입니다.
또 80일 동안은 코 푸는데 허비했다고 하였습니다. 거기에 시간이 가는 모양입니다. 열 이틀 동안은 담배 불 붙이는데 허비됐다고 하였습니다. 물론 담배 피운 시간은 그보다 더 길 것입니다. 담배에 불붙이는 데만 열 이틀이 걸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저 기쁨과 웃음으로 지낸 시간을 잘 계산해보니 마흔 여섯 시간밖에 없더란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날을 어떻게 계수 하십니까? 여러분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십니까?

 

 
 



227 참새와 같은 인생

주후 17세기초에 복음이 처음으로 영국에 전파될 때의 이야기에 이런 것이 잇습니다. 그 때에 영국은 작은 나라 여섯으로 나뉘어 있던 때입니다. 그 나라 가운데 노듬브리아(Northumbria) 라는 나라가 있는데 그곳에 에드워드라는 왕이 있었습니다. 어떤 전도자가 그 왕에게 가서 전도를 했습니다. 왕이 자기 혼자는 암만 생각해야 확실히 알 수가 없어서 하루 저녁은 연회를 베풀고 모든 신하를 다 초청해서 저녁을 잘 대접한 후에 이 문제를 꺼냈습니다.“어떤 이가 와서 예수를 믿으라고 하는데 우리 나라에서 믿을 것인가, 안 믿을 것인가 하는 것을 토론해 보자”고 그러니까 여러 가지 다른 의견이 많이 나왔습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어떤 늙은 재상이 일어나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이렇게 가끔 저녁에 불을 켜고 연회를 하게 될 때 밖은 어둡고 마침 비가 오고 바람마저 불게 되면, 참새란 놈이 창으로 날아 들어와서는 이 밝은 방안을 한 번 휘돌고 저편 창문으로 도로 나가는 그런 경우를 보지 않았습니까? 제가 보기에는 우리 인생이 그 참새와 비슷합니다. 이 밝은 세상에 잠깐 와서 사는데 어디서 왔는지도 알 수 없고 마지막에 어디로 가는지도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만일 이 새로 들어온 종교가 우리 인생의 이 깊은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다고 하면 우리는 이 종교를 믿어야 될 줄 압니다”이렇게 말을 할 때에 모든 신하들이 다 옳게 여겨서 예수를 믿기로 작정했다고 합니다.
기독교는 인생의 이 깊은 뜻을 해결해 주는 종교입니다. 순간적인 욕심을 가진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의 길을 보여주는 종교입니다. 인생이 비록 잠깐이나 이 동안에 영원한 거처를 준비할 수 있습니다. 인생은 허무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생활의 최고 목표는 하나님을 찾는 것이요. 인간 지혜의 최고의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을 계수 하는 지혜의 마음을 얻어야 합니다. 우리의 하루하루 아니 한 시간 한 시간을 천금같이 아끼면서, 바로 사용하고 위로는 하나님께 봉사하고, 아래로는 모든 사람 즉 민족과 국가에 봉사하면서 사는 것이 참된 지혜 있는 생활인 것입니다. 할 수만 있으면 인생의 아침에, 일찍 젊었을 때, 이 진리를 깨닫고 이대로 나아가면, 비록 수고가 많고 슬픔이 많은 이 세상이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만족히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빠른 세월 가는 인생>에서

 

 
 



228.헨델의‘메시아’작곡

미국 포스턴 시에는 헨델과 하이든회라는 것이 있어서 150년간을 계속해서 보스턴에서 연극을 한다고 합니다. 이런 얘기를 실었던 타임지가 계속해서 헨델이 메시아를 쓸 때의 얘기도 좀 썼는데, 이 때 헨델이 런던의 어떤 집에 들어가서 23일간을 조용히 방에 앉아서 두문불출하고 하나님을 묵상하며 영원한 나라를 묵상하는 가운데서 이 메시아를 썼다고 합니다. 그 메시아를 쓰는 동안에 어떤 날 한번은 그 집의 일꾼이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묻자, 헨델이 대답하는 말이“하늘이 내 앞에 열렸다”고, 아니“전능하신 하나님 자신을 내가 뵈었다”고 하였습니다.
헨델은 그 위대한 작곡을 하기 전에 하늘을 보았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대면한 것입니다. 이 새해에 전능하신 하나님을 대면해서 그 하나님 앞에서 내 자신을 보세요. 고칠 것을 다 고치세요, 그러면 하나님의 음성을 우리가 듣게 되고, 하나님이 하시고자하는 일을 내가 깨닫고 그 일을 할 수 있습니다. 한 마음 한 뜻으로써 복음을 전파하면 우리 온 한국이 새 한국이 될 것입니다. 이 새해에 새 비전을 보고 이 비전이 현실로 나타날 때까지 우리는 일해야 합니다. <새해의 새 비전>에서

 

 
 



229.비전과 순종

조금 넓은 의미에서 보면 모든 위대한 생활, 모든 위대한 사업, 모든 위대한 예술, 모든 위대한 음악. 모든 위대한 건축, 모든 위대한 과학적 발명이나 발견에 이르기까지 그 배후에는 먼저 비전이 있었고, 다음에는 거기 대한 순종이 있습니다.

 

 
 



230.예술가 라파엘의 비전

문예부흥 시대에 유명한 예술가로서 성화 마돈나를 비롯해서 많은 위대한 성화를 그린 라파엘(Raphael) 에게 어떤 친구가 한 번은 그 비결을 물어보았습니다.“당신은 어떻게 그런 위대한 작품을 내십니까?”그는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별다른 비결은 없습니다 다만 어떤 그림을 그리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서 그 그릴 그림을 내게 보여 주십니다. 나는 내 마음으로 보는 그 그림을 캔버스에 옮겨 놓는 것뿐입니다”먼저 위대한 비전을 보고 거기에 순종할 때에 위대한 작품이 나타난 것입니다.

 

 
 



231.비전의 뼈대 역할

위대한 가정을 건설하려고 하더라도 거기 대해서 먼저 하늘로부터의 비전이 있어야 합니다. 그 비전대로 가정을 건설해야 되는 것입니다. 위대한 국가를 건설하려고 하면 거기 대해서 먼저 보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 비전대로 나라를 건설해야 되는 것입니다.
무엇이 칼럼버스는 먼저 지구는 둥글다고 하는 비전을 확실히 보았습니다. 만일 지구가 사실 둥글다고 하면 서편으로 계속 가도 반드시 떠난 곳으로 돌아올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동양에 가기 위해서 서편으로 배를 지어갔습니다. 그 결과 새 대륙을 발견했습니다. 비전에 순종할 때에 새 대륙을 발견했습니다.
1919년 봄에 무엇이 우리 민족대표 33인으로 하여금 나라가 다 망한 그 때에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3.1운동을 일으키게 하였습니까? 그들은 한국이 비록 망하였지마는 장차는 반드시 독립하리라고는 생각에서 독립된 한국의 비전을 미리 보고 독립만세를 부른 것입니다.
여러분, 비전은 꼭 순종의 의무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비전과 순종>에서

 

 
 



232.죄의 영향

어째서 우리는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려야만 합니까?
첫째는 우선 내가 살기 위해서 벗어 버려야 합니다. 우리 육체로 보면 이 육체의 모든 기관이 다 튼튼하다고 하지마는 어떤 한 기관이 약하고 기관에 병이 들어서 그 병을 고치지 못하면 그 한 기관의 병 때문에 전체가 죽을 수 잇습니다. 이건 의사가 아니라도 다 압니다.
다른 기관은 다 튼튼해도 심장 하나가 약해서, 심장병이 든 것을 치료하지 못하면 죽을 수 있습니다. 다른 기관 다 튼튼해도 폐가 약해서 폐병이 든 것을 잘 치료를 못하면 죽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적은 죄 하나야 어떤가 하지마는 이것을 그냥 두었다가 이것이 정 심하게 되면 마지막에는 이것 때문에 내가 구원을 못 얻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의 집에 수돗물이 안 나와서 이유를 안만 찾아봐야 모르겠더랍니다. 깊이 파 들어가면서 수도관을 빼 보니 어떻게 들어갔는지는 모르지만 죽은 쥐 한 놈이 수도관 속에 들어 있었습니다. 죽은 쥐가 수도관을 막으니 수도가 나올 리가 있어요?
우리 생명의 수도관에 죽은 쥐와 같은 죄가 있으면 내 전체 생명이 말라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적은 모래알 하나가 큰 기계가 돌아가는 것을 정지시킬 수 있습니다. 적은 죄 하나가 우리의 큰 신앙의 운동을 아주 막아버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걸 꼭 벗어 버려야 합니다.
금년은 특별히 전국 복음화 운동의 해입니다. 우리가 전국 복음화 운동에 가담하려고 하면 우리 하나 하나가 전도자가 되어야 하겠는데 내가 전도자가 되려고 하면 내가 먼저 이 죄를 온전히 벗어버려야 합니다. 사람들은 우리말만 듣지 않습니다. 우리의 생활을 봅니다. 그뿐 아닙니다.
우리가 여러 가지 죄를 다 회개하고도 한 가지의 죄를 회개하지 아니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회개한 죄는 보지 못합니다. 회개하지 않은 죄 하나만 있으면 그걸 보고 교회를 비방하고 예수를 비방하고 하나님을 비방하는 것입니다. 아무개 보라고, 믿는 사람이 저런 죄를 짓는다고, 우리의 최고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있고, 우리 교회의 최고 목적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있는데, 이것을 회개 못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못 돌립니다.

 

 
 



233.천국계단과 쇠사슬

어떤 사람이 이런 꿈을 꾸었다고 합니다. 꿈에 보니 높은 계단이 보입니다. 대리석으로 쌓은 높은 계단이 보이는데 그 계단 맨 위가 천국이라고 합니다. 자기가 천국에 올라가기 위해서 그 계단을 올라가고 다른 사람도 천국에 올라가기 위해서 계단을 다 올라갑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사람마다 거이 발꿈치에다 쇠사슬을 하나씩 매고 올라갑니다. 쇠사슬이 좀 잡아당기기는 하지만 처음에 올라갈 때에는 과히 길지 않으니까 그냥 그런 대로 올라갑니다.
그러나 얼마쯤 올라가서 쇠사슬이 길어지니까 그 다음엔 힘이 들어서 겨우 끌고 그저 조금씩 올라갑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얼마쯤 올라가다가 어떤 사람은 그 쇠사슬을 끊어버립니다 그 다음에 그저 나는 듯이 올라갑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끊을 줄을 모르고 계단만 올라가려고 합니다. 자기도 그냥 계단을 올라가려고 하다가 미끄러져 떨어져서 깨어보니까 꿈이더라고 합니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하고 생각을 하다가 우연히 성경을 펴 보니까 이 구절이 나타났다고 합니다.“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이걸 벗어버려야 결국은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아침 내 스스로를 생각하면서 내게 달라붙어 있는 이런 무게와 죄가 무엇인가 이것을 꼭 찾아서 이 시간에 벗어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벗어버릴 때는 이 시간입니다. 지금입니다. 용단이 필요합니다.

 

 
 



234.김 유신 장군의 용단

여러분, 김 유신 장군의 유명한 이야기를 기억하시지요? 그이가 젊었을 때에 어떤 창기에 미쳐서 날마다 그 창기네 집에 놀려갑니다. 자기 어머니가 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젊은 김 유신을 자기 앞에 끓어 앉히고 단단히 책망을 합니다.“네가 그런데 다녀서 될 수가 잇느냐, 내가 얼마나 큼 소망을 가지고 너를 길렀는데 네가 이게 무슨 짓이냐? 주색에 빠지다니!”효심이 많은 이 김유신은 어머니 앞에 끓어 앉아서“제가 다시는 가지 않겠습니다.”맹세를 했습니다.
그리고 여러 달 안 갔습니다. 봄이 돌아왔습니다. 날이 좋습니다. 그래서 좀 놀기 위해서 말을 타고 사방을 바라보면서 교외로 혼자 노래를 부르면서 갑니다. 거리를 건너갑니다. 한참 지나가다가 말이 갑자기 섭니다. 이거 왜 서나 가만히 보니까 전에 늘 다니던 창기네 집 앞에서 말이 섰습니다. 습관이 되어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걸 보고 김유신 장군은 내려서 칼을 뽑아 말의 목을 베었다고 합니다. 그런 용단이 있기에 유명한 김유신 장군이 된 것입니다. 용단이 필요합니다.
베드로도 법정 멀리 서서 비겁하게 예수를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죄를 짓다가, 닭의 울음소리를 듣고 예수 님의 시선에 마주친 다음에야 예수 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곧 그 자리에서 떠나 밖으로 나가서 슬피 울고 통곡하면서 회개했습니다. <얽매이기 쉬운 죄>에서

 

 
 



235.이 큰 사랑을



우리가 복음을 전하지 않고 침묵의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저버리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주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구속하기 위하여 십자가의 고난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그 크신 사랑과 은혜에 의지해서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이 큰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전파하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저버리는 사람입니다.

 

 
 



236.기쁜 소식

제가 얼마 전에 어떤 교우에게서 편지를 받았는데 그 내용을 보니,“우리 아기가 작년에는 입학 시험에 떨어졌는데 금년에는 좋은 학교에 입학이 되었으니 감사합니다. 입학은 되었으나 등록금이 없어 크게 염려하였으나 본 교회 어느 잡사 님께서 이 사정을 알고 내주었으니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서 이 기쁨을 목사님에게 알려야 하겠기에 편지를 합니다.”라는 내용입니다.
그와 같은 은혜도 감사히 생각하여 기쁨으로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밖에 없었거든 하물며 우리가 하나님의 이 큰사랑, 이 큰 은혜를 받고, 이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전파할 줄 모르면 우리에게 화가 있을 것입니다.

 

 
 



237.큰 바위 종의 성귀

세기의 위인이라 이름을 듣는 처칠 경이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나서 그 장례식을 런던 성 바울 성당에서 거행했습니다. 성 바울 성당은 영국에서 제일 큰 예배당입니다. 성 바울을 기념하여 지은 예배당이라 이름을 성 바울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예배당이 여러 가지로 유명하지마는 그 중에도 유명한 것은 그 종각 꼭대기에 큰 종을 달은 것입니다. 그 종의 이름을 큰 바위(great stone)라 합니다. 왜 그 종을 큰 바위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그 종에는 빙 돌아가면서 성경 구절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 구절이 바로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이 성경 말씀입니다.“만일 복음을 전파하자 아니하면 내게 화가 미치리로다”아마 이 종 둘레에 성경 구절을 새긴 것은 바울을 기념하여 예배당을 짓고 바울을 기념해서 이 종을 만들면서, 이 구절이 성경의 어떤 구절보다도 바울의 신앙과 정신을 표시한다고 여긴 까닭인 모양입니다.
그래서 이 종이 한 번 땡 하고 울릴 때마다 모든 영국사람이 이 성경 구절을 듣기 위해서, 그리고 잊지 않기 위해서 이 구절을 새긴 것입니다.
오늘 이 종소리를 우리 영락교회 교인 들, 아니 온 한국교회 교인들이 들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이 때에 보음을 전파하면 열 두 가지 축복을 받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열 두 가지 화를 받는 것입니다. <침묵의 화>에서

 

 
 



238. 놀라운 평화

마음의 평화가 얼마나 귀한가는 밀로 다 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세력이 많고, 돈이 많고, 지식이 많고, 지위가 있고 무엇이나 다 있다고 할지라도 마음에 평안(平安)이 없으면 그는 불행한 사람입니다. 가령 이런 것들이 없다고 할지라도 그 마음속에 진정한 평안이 있으면 그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239.심령의 평안에 대한 증거

어떤 심리학자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마음만 평안하면 만난(萬難)을 돌파할 수 있지마는 마음이 불편하면 적은 일도 할 수 없다”심지어 편지 한 장을 바로 쓰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마음이 평안하면 병도 속히 고칩니다. 혈액도 순환이 잘 됩니다. 소화도 잘 됩니다.
요새 의학계의 말을 들어보면 병 가운데 거이 6, 7할이 마음이 불편한 가운데서 심리적 원인으로 생긴다고 합니다. 마음이 평안하면 머리가 맑아져서 생각을 바로 합니다. 손과 발이 바로 움직여져서 모든 일을 바로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평안하야 장사도 잘 할 수 있고 마음이 평안하야 공부도 잘할 수 있고 학생들도 마음이 평안하야 시험을 바로 칠 수 있습니다. 심지어 부인들은 마음이 평안해야 밥도 바로 짓습니다. 마음 불편한 부인들이 지은 밥을 잘 못 먹다가는 이빨 상하기가 쉽습니다.
마음이 평안해야 바느질도 바로 합니다. 마음이 불편한 가운데 바느질 하다가는 손톱을 상하기 쉽습니다. 평안한 마음이 얼마나 귀한 축복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 가운데 하나는 모든 사람에게 마음의 평화를 주시려는데 잇습니다. 우리가 다 이 축복을 받습니까? 이 축복을 받으려면 몇 가지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심령간에 평화를 수립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옳은 관계를 맺고 살아야 합니다.

 

 
 



240.두 마음의 다툼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말을 들어보면 지킬 박사와 하이드가 서로 싸움을 합니다. 왕 양명의 말을 빌리자고 하면 우리 속에 도둑놈이 있어서 이 도둑놈과 항상 싸움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란이 있습니다. 성경의 말씀대로 하면 성신의 소욕(所欲)과 육신의 소욕이 서로 거슬려서 마음속에서 싸움을 합니다. 우리 마음속 자체에 이런 분열이 있고 내란이 있는 동안에는, 우리의 마음이 평안할 수가 없습니다. 언제나 불안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이런 경험을 체험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7장에 보면 “오호라 나는 곤고(困苦)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탄식한 글귀를 우리가 읽어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성경 가운데서는 이런 글귀만 읽는 것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그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우리 마음에 이렇게 분열이 있고, 우리 마음에 이렇게 내란이 있지마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내 주로 영접하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속에 오셔서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게 되면, 마음속의 모든 원수를 소멸해 주시고 우리의 마음을 통합하고 하나로 만들어서 우리 마음속에 평화를 주시는 것입니다.“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하는 말씀은 그 말입니다. 삶의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평강(平康)이라고 하는 말은 그것을 의미합니다.
이사야 42장 10절을 여러분 기억하시지요?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우리가 사실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믿고, 예수 님을 영접해서 내 마음에 모시고, 사실 예수 님의 마음을 품고 주님과 같이 동행하면 이 축복이 우리와 같이 하시는 것입니다

 

 
 

 

 

241.평화의 그림

이런 이야기가 있지요, 어떤 미술학교에서 졸업생들에게 그림을 그려오라고 하면서 평화라고 하는 제목을 내 주었습니다. 졸업생마다 자기가 구상하는 대로 평화의 그림을 한 장씩 그려 왔습니다.
그 여러 가지 그림 가운데 특별히 대조되는 두 그림이 들어 왔다고 합니다. 한 가지 종류의 그림은 산골짝의 호수를 그린 것입니다. 그 옆에는 풀밭이 있습니다. 그 풀 위에는 소 ,나귀, 말, 산양 이런 짐승들이 한가하게 풀을 먹고 혹은 누워 있습니다. 잔잔한 호수 위에는 몇 사람이 한가하게 작은 배를 타고 낚시질을 합니다. 산이 조용하고 물이 잔잔하고 바람이 없고 모든 것이 참 평화롭습니다.
그 다음에는 다른 그림이 들어왔습니다. 아주 다른 성격의 그림입니다. 바닷가에 절벽이 있는데 때 마침 바람이 붑니다. 파도가 밀러와서 그 벼랑에 부딪치고는 다시 바다로 거품을 뿜으면서 흘러갑니다. 바람이 심하니까 나무가 꺾여져 내려옵니다. 나뭇잎이 춤을 추며 달아납니다. 얼핏보면 평화가 아니고 전쟁 그림 같습니다. 그런데 살펴보니까 그 절벽 사이에 구멍이 하나 있습니다. 그 구멍을 들어다 보니까 그 속에 갈매기가 한 놈이 둥지를 틀었습니다. 그 갈매기 둥지 옆에는 어미 갈매기가 가만히 앉았는데 둥지 속에는 깐 지 며칠 안 된 갈매기 새끼들이 고요히 눈을 감고 바람은 불거나 말거나 물결은 세거나 말거나 낮잠만 잘 자고 있습니다.
선생은 둘째 그림에다 일등상을 주었다고 합니다. 첫째 그림은 평화는 평화인데 그건 인간의 이상뿐입니다. 이 세상엔 그런 평화는 없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 우리가 평화를 얻을 수 있다고 하면 그것은 이런 폭풍우 가운데서 얻을 수 잇는 평화입니다. 사실 그런 줄 압니다. 이 세상은 요란합니다. 언제나 혁명이 일어납니다. 전쟁이 일어납니다. 냉전이 계속 됩니다.

 

 
 



242. 나환자 수용소‘소생원’

제가 두 주일 전에 전주에 집회에 가갔었는데 그 주일날 오후에 전주에서 과히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나환자 수용소‘소생원’이라고 하는 데를 갔었습니다. 거기 있는 수 천명의 나환자가 꼭 한번 와서 예배를 바 달라고 해서 방문했는데 가보니까 여기 저기 솔밭 사이에 아주 잘 지은 건물이 있고 예배당도 벽돌로 잘 지어져 있었습니다.
아마 오후 서너 시 반쯤 우리가 거기 도착하였는데 벌서 세시부터 그 분들이 다 예배당에 모여서 찬송을 불러서 예배당 가까이 가니까 찬송소리가 먼저 들려왔습니다. 그래서 그 예배당에 들어가 보니까 사람이 가득 모였는데 어떻게 찬송을 부르는지 모를 정도였습니다. 자세히 보면 어떤 분의 얼굴은 나병으로 말미암아서 좀 이상하게 됐습니다. 심지어 손가락이 없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이들이 그때 493장 찬송을 부르는데 어떻게 잘 부르는지 제가 그 사람들을 위로할까 하고 가긴 갔지마는 오히려 제가 그 사람들로 말미암아 큰 은혜를 받고 왔습니다.
그 광경을 볼 때에 제 마음속에는 이런 생각이 들어왔습니다.“참 귀한 것은 복음이요, 하나님의 은혜다. 이들이 주 예수 님을 알지 못했던들 이런 가운데서 어떻게 희색이 만면에서 찬송을 부를 수가 있겠나? 몸은 비록 불치의 병에 걸렀어도 마음속에는 질병이라도 빼앗을 수 없는 영원한 평화가 있구나!”
예수 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놀라운 평화>에서

 

 
 



243.성도와 환난
스토익 철학자 에픽테투스
우리가 성경을 읽어보면 사도 바울이 아덴에 가서 전도할 때에 거기 에비구레오 스도이고 철학자들이 와서 토론하는 글귀를 볼 수 있습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헬라 철학자 가운데 소위 스토익파에 속하는 철학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큰 환난과 어려운 일을 당할 때면“모든 것은 운명인데 우리 인간이 별 수가 잇느냐? 그저 인간의 의지로써 견디어야 한다 아무리 아파도 견디고 슬퍼도 견디어야 된다”이렇게 주장하고 행한 것입니다.
그때 종으로서 유명한 스토익 철학자가 하나 있었는데 이름은 에픽테투스 라고 했습니다. 이 사람이 이런 철학으로 일생을 사는데 한 번은 악한 사람들이“이 사람이 얼마나 아픈 것을 견디나 보자”하고 이 사람의 다리를 비틀기 시작했습니다. 대단히 아프도록 비틀었지마는 아프다는 소리를 안 했습니다. 계속 힘껏 비트니까 “당신들이 그렇게 비틀면 내 다리가 부러질 것 같소” 이 한 마디밖에 안 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이 사람이 꽤 견디다 하고는 바짝 더 비트니까 그만 다리가 부러졌습니다. 그래도 아프다는 말은 안하고“내가 그렇게 되겠다고 말하지 않았소”하는 말 한마디를 했다는 것입니다. 장한 일은 장한 일인데 그렇게 견딘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되겠습니까?

 

 
 



244.윌리암 E. 헨리와 김 소월

19세기 말엽에 영국에 윌리암 E. 헨리라고 하는 시인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어렸을 적부터 폐병에 걸려서 많은 고생을 했고 뿐만 이니라 다리 하나는 절단 수술을 했습니다. 그는 그후에도 일생토록 몸이 약해서 수술을 많이 받았지만 아주 천재적 시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생활 철학이 바로 스토익 철학이었습니다. 인간의 의지로써 온갖 역경을 극복할 수 있다고 장담하고 그런 시도 썼습니다. “나는 내 운명의 주인이요 나는 내 영혼의 선장”이라고 하는 유명한 시도 저었습니다. 자기가 그렇게 시를 쓰고 시를 통해서 다른 사람을 격려했지만 결국 마지막에 어떻게 되었는지 압니까? 자살로 일생을 마쳤습니다.
우리 한국에 유명한 김 소월이 이와 비슷합니다. 이 김 소월군은 참으로 천재적 시인입니다. 저와 오산학교 동창인데 학생 때부터 아주 시를 잘 썼습니다. 많은 아름다운 시를 썼습니다.
그러나 불행한 것은 이 분이 하나님을 찾지 못했습니다. 신앙을 얻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아시는 바와 같이 결국은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우리 인간의 의지라고 하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245,엎어놓아야 바로 가는 시계

하나님께서 우리가 다 알지 못하는 어떤 선한 목적 때문에 이 환난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전에 어떤 친구는 탁상시계를 하나 갖다가 그것을 엎어놓았습니다. 누가 몇 시 나고 물어보면 제쳐보고 다시 엎어놓곤 했습니다. 그래서 누가“왜 그 시계를 엎어놓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 친구의 대답이“그거 이상합니다. 이놈의 시계는 엎어놓아야 바로 갑니다”하는 것입니다.
혹 우리가 바로 가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엎어놓을 때가 더러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목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우리로 하여금 하늘을 쳐다보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어떤 때는 우리를 반드시 눕게 한다”
우리는 사업도하고 이것저것 하느라고 분주해서 실상 위를 처다 볼 사이가 없습니다. 병원에 입원해서 반드시 눕게 되면 자연히 위를 처다 봅니다. 질병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할 때가 있습니다.

 

 
 



246.축복을 위한 환난

이태리에 가보면 중세시대부터 내려오는 월렌시안 처치라고 하는 유명한 교회가 있습니다. 이 교회를 처음에 설립한 분은 피타 월터라고 하는 분인데 이 사람도 젊었을 때는 보통 이태리 청년들과 같이 허랑 방탕 하는 젊은이였습니다.
어떤 날 저녁, 한 친구 집에 모여서 밤새도록 먹고 마시고 자고 있는데 갑자기 그의 친구 하나가 쓰러져 생명이 떠나고 말았습니다. 함께 즐기든 이 청년은 그 친구의 비참한 최후를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이 세상에 있는 것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다 세상으로 쫓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가고 정욕도 가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만 세상에 있으리라”고 하는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환난을 통해서 오는 축복입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이미 말한 대로 이 환난이 아무리 아프고 어려운 것이더라도 거기에는 하나님의 목적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목적이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 요셉의 생활을 생각해 보세요. 요셉이 형들의 시기로 종으로 팔려가서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가 큰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환난에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 뒤에 축복이 따랐습니다. 요셉에게 만일 그 환난이 없었던들 그 후의 축복은 물론 없었을 것입니다. 축복이 따른 환난이었습니다. 종노릇 10년과 감옥살이 3년 후에 그는 애굽의 총리대신이 된 것입니다.
그 환난 후에는 하나님의 목적이 있었습니다.

 

 
 



247.정금 같이 나오리라

이런 이야기가 잇습니다. 큰 부자로서 큰 공장을 가지고 잘 사는 분이 있는데, 한 번은 홍수가 나서 재산이 전부 물에 쓸려 떠내려갔습니다. 집과 공장이 모두 휩쓸려 내려갔습니다. 며칠 후에 비가 그치고 바람이 잔잔해지고 다시 해가 나서 물이 준 다음에, 이 사람이 자기 집 자리에 가보았더니 아무 것도 없고 돌작 밭과 모래밭뿐이었습니다.
너무 기가 막혀서 이 사람은 그 자리에 앉아서 통곡을 하고 울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눈물을 씻고 않았는데 사방을 가만히 돌아보니까, 이상스럽게 모래와 돌작 밭 사이에 광채가 나는 모래알이 있었었습니다.
자세히 보니까 조그마한 금싸라기들입니다. 그 곳은 사금 밭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금을 많이 캐어서 오히려 전보다 더 큰 부자가 되었다하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지어낸 이야기일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욥기 23장 10절에 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나의 기도는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나의 가는 길을 나는 모릅니다. 이런 일이 왜 생기는지 나는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십니다. 아시는 하나님이 이런 경험을 통해서 나를 연단 시킨 후에 내가 정금 같이 되어서 나올 것입니다 욥은 그것을 믿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5장 에 이와 같이 기록하였습니다.“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난의 날과 신앙>에서

 

 
 



248.그리스도인의 생활원리

하나님은 우리 사회 가운데서 모든 부패와 부정을 일소하고 깨끗한 질서가 있는 사회를 만드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을 이런 사회를 만들기 위하여 바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자유를 구속하는 모든 사상을 제거하고 이 땅위에 자유와 평화와 번영과 통일이 있는 민주국가를 건설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을 바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이 내일 우리가 맞이하는 3.1절의 정신도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시간, 우리가 받은 재능, 우리에게 있는 지식, 우리에게 있는 물질을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 사용할 책임이 우리 청지기에는 반드시 있는 것입니다.

 

 
 



249.옳은 삶

제가 옛날 북한에서 고아원을 할 때에 믿는 사람 가운데서 돈 좀 있는 사람들을 찾아본 경험이 있습니다. 찾아보니 두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떤 이는, 우리 신의주에 고아원이나 양로원이 없어서 안 됐는데 이런 기관을 세워서 어려운 이들을 돌보자고 하는 말을 듣고 아주 기뻐해서 참 좋은 일이니 나도 얼마든지 돕겠다고 하여 환영했습니다.
그러나 그이보다도 돈도 더 많은데 이러한 사회사업 예기를 하자, 이 핑계 저 핑계하면서 결국은 못하겠다고 하는 이도 더러 만나 보았습니다. 그때 한 오 백원씩 좀 내자고 권했는데 그때 오 백원은 지금은 오십만 원쯤 되겠습니다.
그후 몇 해 후에 해방이 되었습니다. 북한에는 공산당이 들어왔습니다. 돈이나 좀 있던 사람들은 전부 숙청을 당했습니다. 자기 집에서 다 쫓겨났습니다. 많은 사람이 남한으로 넘어왔습니다. 그 가운데는 고아원을 위해서 돈 낸 사람도 넘어오고, 권면은 받았으나 내지 않은 사람도 넘어 왔습니다. 이런 분들을 다 내가 만났습니다.
어떤 자리에서 이런 예기를 한 때가 있습니다. 어떤 분이“내가 신의주에서 살던 경험을 생각해 보니 10여 년 동안 돈 벌어서 옳게 쓴 것은 고아원 위해서 오 백원 쓴 것밖에 없어요. 그 때 권면해준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이런 저런 예기 하다가 혹 그런 말이 나오면 미안해서,“지금은 크게 후회합니다. 그 때 그 돈을 꼭 냈으면 좋았을 텐데, 그만 아까워서 안 내다가 공산당에게 다 빼았겼어요. 참 미안하게 생각합니다”이렇게 말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말할 때 저는 흔히 대답하기를“그거야 알겠습니까? 남한에 와서 또 하나님의 축복을 많이 받으면, 이 다음에는 하나님의 뜻대로 꼭 씁시다”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원리>에서

 

 
 



250.미국 건설의 밑거름

제가 지남 여름에 미국에 잠깐 들렸을 때 바쁜 일정 중에도 박람회 하는 데 가서 토요일 오후 한 나절을 보냈습니다. 미국관에 들어가 보니 미국이 어떻게 오늘의 거대함과 번영을 가져왔는가 하는 경로를 보여 주는 그림, 사진, 도표들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유럽에서 황무지 대륙으로 밀려오는 이민의 얼굴들이 나타납니다. 남녀노소가 여러 나라에서 적수 공권으로 이 대륙을 찾아옵니다. 황막한 들판, 우거진 수풀, 뛰노는 짐승들, 출몰하는 토인이 있는 이 대륙에, 이들이 적수공권으로 와서 무엇으로, 어떻게 하여 오늘의 미국을 이루었겠는가? 그 열쇠가 어디에 있겠는가를 생각하여 그 전시를 다 보고 나면 말을 안 해 주지마는 누구니 한 가지는 깨닫고 나옵니다.
그것은 일입니다. 그들은 일, 일, 일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도끼로 일했습니다. 호미로 일 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불도저로 일했습니다. 트랙터로 일했습니다 산림을 베고 토지를 개간하고 길을 닦고 땅에서는 금, 은, 동, 철을 캐내고 석탄을 파내고 가솔린과 석유를 뽑아내고 집을 짓고 도시를 건설하고 공장을 건설하고 마천루를 짓고…일했습니다. 결국은 일입니다. 손으로 일하고 머리로 일하고 밤낮 일하고 부지런히 일하고 결국은 이 일이 오늘의 미국을 이루어 놓은 것입니다.
첫 째는 건전한 마음의 자세로 일하려는 결심, 그 다음엔 일, 그 두 가지가 말하자면 오늘의 미국을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251.미국의 정신적 기초 뾰죽 집

지금은 작고하셨지마는 장덕수 선생께서 처음에 미국 가서 그 때 자기 눈으로 본 미국의 현상을 우리 어떤 신문에 연재 보도한 일이 잇습니다. 그 가운데 제가 지금까지 잊지 않은 것은“여기 미국에 와 보니 우리 한국과 다른 게 한 가지가 잇는데 아디 가든지 뾰죽 집이 많다(이 뾰죽 집은 물론 예배당을 가리켰습니다) 이 미국의 정신적 기초는 이 뾰죽 집에 있다. 기독교에 있다”하는 글이었습니다. 이렇게 미국의 교회가 발전된 것도 우연이 아닙니다.

 

 
 



252.애스베리 신학교의 벽화

미국 켄터키주에 잇는 애스베리 신학교에 가보면 제일 넓은 담에 큰 벽화를 그린 것이 있습니다. 한 손에는 성경을 들고, 한 손에는 말 고비를 잡고 말을 타고 달려가는 목사의 그림입니다.‘말 타고 순회하는 목사 써클 라이드(Circle Ride)’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미국 초창기에 유럽에서 많은 이민들이 건너와 이 곳에도 정착하고 저곳에도 정착하고 사방에 정착했습니다.
그 때에는 길도 없고 자동차도 없고 기차도 없는 때인데 이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목사들이 말을 타고 정착지를 따라다니며 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예배당을 지었습니다.
그래서 주일날이면 말을 타고 이 동네 외서 예배 보아주고, 다시 저 동네 가서 예배를 보아주고 했습니다. 사방에 돌아다니면서 이렇게 전도를 하고 교회를 세운 것입니다.
오늘 날 미국 교회의 발전도 결국은 일의 결과입니다. 건전한 마음의자세로 스스로 굳세게 하면서 주를 위해서 일했습니다. 일하는 것 없이 교회는 발전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일하라고 권면합니다. 일은 인간에 천직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시고 만물을 다스리라고 일을 맡겼습니다. 일함으로 건강해 집니다. 일함으로 지혜가 발전됩니다. 일함으로 문화가 발전됩니다. 일하는데 모든 건설이 있습니다. 일하는 이에게 참된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일하기 싫거든 먹지 말라고 우리에게 경고합니다. <굳세게 하여 일하라>에서

 

 
 



253.참 회개

참 회개에는 열매가 따릅니다. 자기의 죄로 말미암아서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입히면 우선 그 손해를 갚아 주는 보상이 따릅니다. 삭게오는 자기의 죄로 인하여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입힌 것을 우선 보상했습니다. 첫째 열매가 이것입니다.

 

 
 



254.예수 믿은 식모의 고백

제가 신의주에 있을 때 어떤 젊은 여자가 일본 사람 집에서 식모 살 이를 했습니다. 처녀입니다. 주인 집 아주머니가 매일 찬거리를 사오라고 돈을 주면 이 식모는 매일 조금씩 거 기서 떼어내고 찬을 사오곤 하였습니다.
물론 그 주인은 모릅니다. 그 후에 이 여자가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조용히 자기 과거를 생각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려고 하면, 언제든지 그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내가 도적질을 하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완전히 회개하고 어떻게 했던지 아십니까? 그 떼었던 돈을 다 계산해서 그것을 가지고 주인에게 가서 고백하고 다 갚았습니다. 적지마는 이것이 참회개의 열매입니다.

 

 
 



255.보상할 수 없는 죄

톨스토이의 유명한‘부활’이라고 하는 소설의 카추샤의 비화가 바로 그 예기입니다. 한때 청춘의 정욕으로써 다른 여자의 일생을 망쳐버렸습니다. 그 일로 인하여 그 여자는 아주 타락해 버렸습니다. 그후에 이 죄를 보상하기 위하여 안타까운 노력을 합니다.
그러나 갚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남녀교제를 삼가야 합니다. 어떠한 경우가 있든지 선을 넘지 않아야 합니다. 조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256.고해와 회개 증거

중세사회에는 죄를 지은 사람이 신부에게 가서 좌를 고백하면 죄를 사해주기 전에 죄인에게 일을 시킵니다. 어디 순례를 다녀와라, 구제사업을 하라, 연보를 하라는 등의 일을 시키고 그것으로 회개한 증거가 있은 후에 야 죄를 사해주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한 번은 어떤 여자가 와서 죄를 고해하면서 하는 말이“내가 실수해서 어떤 사람에 대하여 없는 예기를 퍼뜨려서 많은 명예를 손상시켰는데 그 큰 죄를 용서하여 주십시오”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하여야 용서를 받겠습니까? 그 신부가 하는 말이 내일 아침에 큰 주머니를 하나 가지고 오는데 그 주머니 속에 닭털을 가득히 넣어 기지고 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이튿날 그 여인은 닭털 주머니를 가져왔습니다.
그 신부 하는 말이“전에 당신이 몇 집이나 가서 예기를 했는지 집집마다 찾아가서 그 대문에 이 털을 하나씩 놓고 오라”고 했습니다. 이어 이 여인은 뛰어다니면서 털을 하나씩 놓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이제 되었습니까?”“아니요 한 가지가 더 남았소”민 주머니를 또 주면서 그녀가 놓고 온 털을 다시 모아 가지고 오라고 했습니다. 그 여인이 말하기를“바람이 이렇게 부는 날에 그 털을 어떻게 다시 모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신부는 꼭 다시 모아와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 여인은 모아 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에 신부가 하는 말씀이“말이라고 하는 것은 하기는 쉽지마는 한 번하면 다시 모을 수 없는 것이요. 우리가 얼마나 말을 조심해야 하는지 아시오? 당신 죄가 얼마나 큰지 당신은 아시오? 단단히 책망하고 다시는 그러지 말라고 타일렀습니다
어떤 죄는 우리가 아무리 갚으려고 해도 갚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를 경계하여야 합니다.

 

 
 



257.코페르의 비문

예수 님께서도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해서 마르게 하셨습니다. 나무가 불쌍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객관적으로 분명하게 경고하시기 위해서 그런 일을 하신 줄 압니다.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코페르는 크스다 천문학에 일대 변혁을 가져오게 한 과학자였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날 때의 유언에 의해서 그의 묘비에 이런 비문을 새겼다고 합니다.
“주여! 나는 사도 베드로에게 주신 은혜를 구하지 않습니다. 바울에게 주신 은혜도 구하지 않습니다. 다만 강도에 주신 은혜를 구할 뿐입니다,”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는 지식과 과학이 문제가 아닙니다. 명망(名望)이 쓸데없습니다. 오직 죄 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이 죄 사함은 주님의 부름을 듣고, 응답하고, 주님을 영접하고 온전히 과거의 생활을 청산할 때 받습니다. 우리가 이 은혜를 받고 부활절을 맞이해야 되겠습니다. <회개와 그 열매>에서

 

 
 



258.그리스도인의 각오

우리 믿는 사람도 고통의 십자가는 질 수밖에 없습니다. 3·8선, 6·25, 천재지변, 사업의 실패 등 여러 가지 복잡한 시대에 사는 우리에게 인생 고는 반드시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받으나…”우리 믿는 사람도 이 환난은 꼭 같이 받습니다. 이것을 피할 수 없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하는 말은 우리가 각각 다 이 몫에 태인 십자가가 있는데 이 십자가를 잘 지라고 하는 말입니다. 이 십자가를 불평하지 말고, 이 십자가에 반향하지 말고, 이 십자가 때문에 낙심하지 말고, 잘 지고 가라고 하는 말입니다.
찬송가에 있는 말씀과 같이“내 주에 지신 십자가 세인은 안 질까 십자가 각기 있으니 내게도 있도다”이 내게도 있는 십자가를 잘 지고 따라오라는 말입니다.

 

 
 



259. 나의 십자가

이런 이야기가 있지요. 어떤 사람이 신앙생활을 하기는 하지만 항상 마음 가운데“내가 진 십자가는 너무 무거워서”하는 불평이 있었다고 합니다. 한 번은 꿈을 꾸는데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언덕길로 올라갑니다 올라가다 보니까 산 중턱쯤인데 십자가를 여러 개 만들어 세워 놓았습니다.
위로부터 소리가 들리는데 “네가지고 올라오는 십자가 때문에 매우 고생스러울 텐데 여기 십자가 많이 있으니 네 마음대로 하나 택해 보아라”하는 말입니다. 그래서“옳다 되었다 다른 것 하나 얻어보자”하고서 살펴보니 참 자그마한 십자가가 하나 있습니다. 빛이 뻔적 뻔적 나고 보석이 박힌 아름다운 십자가입니다.
그는 얼른 이 십자가를 한 번 져보겠다고 했습니다. 허락을 받아 이 십자가를 어깨에 메니 조그맣기는 조그마한데 전부 황금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무겁겠습니까? 무거워서 일어나기조차 어렵습니다.
겨우 일어나서 몇 거름 걷다가“이거 너무 무거워 못 지겠습니다”하고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랬더니 다른 것 하나 골라보라고 합니다. 이번에는 조그마한 중 십자가인데 아름다운 장미꽃이 가득히 피어 있습니다. 향기가 나고 아름답고 해서 이 십자가를 지었습니다.
저 보니 처음엔 괜찮더니 장미꽃에는 가시가 있지 않습니까? 이 가시가 어떻게 잔 등을 찌르는지 지고 갈래니 걸을 수가 없습니다.“이건 너무 가시가 많아 못 지겠습니다”“그럼 벗어 놓아라 어떤 십자가를 택하려느냐?”잘 살펴보다가 골라잡은 것은 처음에 벗어 놓은 지기의 십자가였습니다.“그건 네가 벗어놓은 십자가가 아니냐?”“그래도 이 십자가를 지려고 합니다”“그럼 네 마음대로 하라”자기가 벗어 놓았던 십자가를 다시 지고 가니까 한결 가볍더라는 것입니다.
남 보기에 다른 사람은 별로 십자가가 없고 내가 진 십자가가 제일 무거워 보입니다. 그러나 정작 내가 그 사람 자리에 앉아서 그 사람이 진 십자가를 져보려고 하면 그렇게 가벼운 것은 아닙니다. 내 몫에 태인 십자가는 지혜 있는 하나님의 경륜가운데서 각기 주어진 십자가인데 지금은 깨달을 수 없어도 그저 내 몫에 태인 십자가를 잘 지고 가는 것이 제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각오>에서

 

 
 



260.십자가에 대한 묵상

성 프랜시스가 큰 은혜를 받게 된 계기도 그가 성 다미안 성당의 십자가 앞에서 십자가를 묵상하며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에 큰 은혜를 받고 온전히 그 자신을 헌신하게 된 것입니다. 혹은 모라비안 교회를 창립한 진젠돌프 같은 이는 어떤 미술관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님의 성화를 바라보면서 그 앞에 무릎을 끓고 기도할 때에 큰 은혜를 받아서 온 몸과 마음을 하나님께 바치게 되었고 그로부터 유명한 모라비안 교회가 창립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그 사람들뿐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십자가를 바라보고 그 앞에 나와서 모든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헌신하는 일을 통해서 큰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남녀 노소의 구별이 없습니다. 빈부귀천의 차이가 없습니다. 유식한 것과 무식한 것의 구별도 없는 것입니다. 제왕과 종이 다 같이 십자가를 통해서 주님 앞에 나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듣는 대로 전 세계의 3분에 1되는 인구, 즉 10억의 인구가 기독교도라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 십자가의 인력으로써 주님 앞으로 나와서 큰 교회를 이룩하게 된 것입니다.

 

 
 



261.콘스탄틴의 십자가 깃발

십자가는 이 승리의 줄을 모든 사람에게 던져 줍니다. 죄의 세력이 아무리 강하지마는 십자가를 통해서 승리할 수 있다는 확신을 얻게 됩니다
로마의 첫 기독교 황제가 된 콘스탄틴은 자기의 대적되는 막센티우스와 싸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로마교회에 있는 멜비우스 다리 근처에서 일전이 있게 되었는데 전설에 의하면 그 싸움이 있기 전 날 밤에 그는 환상 가운데서 큰 십자가가 하늘에 나타나는 것을 보았답니다. 그리고 그 위에는 이 깃발 아래서 승리를 거두라고 하는 글씨가 보였습니다.
그 환상을 본 후에 콘스탄틴은 곧 십자가 기를 만들어서 그 기를 들고 나가 싸워 크게 승리를 하여 로마의 온전한 황제가 되었고, 황제가 되자 기독교를 핍박하던 것을 금하고 신교 자유령을 내린 역사적 사화는 우리가 다 상식으로 아는 사실입니다. 십자가의 깃발아래서 죄의 권세를 이길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승리의 깃발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전 인류에게 소망의 줄을 던져 주셨습니다. 십자가 위에는 반드시 부활의 아침이 오는 것입니다. 밀 한 알이 땅에 떨어져서 썩으면 반드시 많은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인력>에서

 

 
 



262.영생은 확실합니다.

첫째 이성에게 물어 보세요.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입니다. 인간에게는 생각하는 이성이 있습니다. 내게 의식이 잇습니다. 내 의식을 가만히 살펴보면 나의 의식을 조정하고 내 생각을 지도하는 그 무엇이 있습니다. 이것을 자아(自我) 라고 합니다. 이것은 영혼이라고 합니다.
데카르트의 유명한 말과 같이“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반드시 나라고 하는 것, 영혼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영혼의 존재는 분명합니다. 그러면 이 영혼은 우리 인간의 육신이 죽을 때에 어떻게 되겠는가? 없어지겠는가? 그냥 있겠는가?
둘째로 과학에 물어보세요. 과학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하여 줍니다. 물질이라고 하는 것이 여러 모양으로 변하기는 하지마는, 아주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물질 분별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육신도 죽으면 썩어집니다. 그것은 화학적으로 변화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육신이 되었던 물질이 우주에서 아주 없어지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냥 남아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인간에게서 가장 귀한 영혼이, 육신이 무너질 때에 없어질 수가 있겠는가? 미국의 미사일과 로케트의 유명한 권위자 브라운(Dr. Wernher Von Brown) 박사는 최근 어떤 잡지에 이런 글을 발표하였습니다. 즉,“과학은 무엇이든 아주 없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과학은 오직 변화를 알뿐이다”
하나님께서 작은 물질에도 작용하시거늘 하물며 그의 최대 걸작인 인간의 영혼에 적용치 않겠습니까? 인간의 영혼은 죽은 후에도 반드시 있는 것입니다. 영혼은 불멸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여러분의 심령에게 깊이 물어보세요. 인간 심령 깊은 속에는 영혼에 대한 관념이 있습니다. 영혼에 대해 동경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263.부활과 영생의 추구

왜 옛날 애굽 사람들은 죽으면 약을 발라 썩지 않게 하고 금자탑을 쌓아 놓고 영원히 보존하도록 힘을 썼습니까? 부활을 믿는 까닭입니다. 왜 진시황이 삼신산의 불로초를 구하기 위하며 동남 동녀 500 명을 보냈습니까? 왜 한 무제가 승로반(承露盤)의 찬이슬을 받아먹기를 하였습니까? 다 영원히 살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런 일을 한 것입니다.
이런 마음이 어디서 왔나 요? 우리 인간 자체를 살펴볼 때 인간의 본성이 있으면 그 본성을 만족하게 하는 대상이 반드시 있습니다.
배고픈 본성이 있으면 먹을 것이 있습니다. 무엇을 듣고 싶은 본성이 있으면 소리가 있습니다 보고픈 본성이 있으면 볼 것이 있습니다. 영원한 본성에 대한 상대는 없을까요?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영생입니다. 달이 있기에 바닷물이 올라오는 것입니다. 바닷물이 올라오는 것은 달이 있는 증거입니다.
테니슨의‘인메모리아’에 있는 유명한 글귀와 같이“사람은 그가 아주 죽으려고 지음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하지 아니합니다” 이 생각이 어디서 왔습니까? 영생이 있는 까닭으로 인해 죽음의 세계에서 이런 생각이 일어난 것입니다. <영생은 확실하다>에서

 

 
 



264.가정 전도

내가 내 가정에서 전도하려고 하면 사실 참 믿음이 내 중심에 있어야 합니다. 말로만 믿노라해서 가정에서 전도할 수 없습니다. 안 믿는 온 가족들이,“과연 우리 어머니는 과연 우리 아버지는, 우리 딸은. 우리 아들들은 참 진실하게 믿어”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가정에서는 믿음을 속이지 못합니다. 다 압니다.
얼마 전에 그의 아버지를 제가 잘 아는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그 아버지는 장로였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은 교회를 잘 안나와요. 그래서 왜 교회를 잘 안나오느냐고, 잘 나오라고 하면서 장로 아들이 그래서 되겠느냐, 잘 나와서 예수를 믿어야 한다고 예기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청년 하는 말이“목사님 아직 나만큼은 모릅니다. 우리 아버지는 장로이긴 하지만 실상 예수를 잘 못 믿습니다.”그 아들에게 그렇게 보이면 전도할 수 있겠습니까? 전도할 수 없습니다.

 

 
 



265.신앙 투표

사실인지 모르나 이미 세상 떠나신 대구의 이문주 목사님 가정에서는, 우리 가정에서 누가 예수를 잘 믿나 투표했다고 합니다. 온 가족이 다 모여서 했습니다. 투표를 했더니 이 문주 목사님이 표를 제일 많이 얻었다고 합니다. 그 목사님 참 목사입니다. 가정에서 표를 얻을 만큼 예수를 믿는 아버지가 되고, 어머니가 되고, 아들이 되고, 딸이 되면, 그 다음에는 전도할 것입니다.
전도할 수 있을 만큼 믿어야 합니다. 가정에서 하는 모든 일이 꼭 성경대로 하는 모범이 되어야 가정에서 감화를 받습니다. 물론 예수를 믿는 것은 사람의 뜻으로 할 수 없는 것이긴 하지만 우리 정성껏 기도하고 정성껏 권면하며 우리의 정성을 다하면, 제 경험으로 보면 그런 가정은 다 감화를 받습니다.

 

 
 



266.참 믿음으로 구하고 힘쓰면

우리 교우 가운데 어떤 자매는 상당한 가정의 자맨데, 그녀는 잘 믿으나 사회적으로 상당한 지위도 있고 큰 사업을 하는 그 남편은 다른 면으로 실수는 없으나 교회에 대해서, 기독교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늘 위해서 기도하고 권해서 교화 나가자고 권면 하지마는 다른 것 다 하면서 이 말은 절대로 안 듣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온 가족이 감화 받게 되었냐고 하면, 한 번은 그 자매가 갑자기 몸이 약해져서 큰 수술을 받았습니다. 수술을 받고 병이 중해서 사람 보기에는 다시 살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이 남편이 겁이 났습니다. 그래서 세상을 떠난 후에도 한이 없게 하기 위해 자기 부인의 침상에 서서 “당신 나 보기에는 상당히 중한데 무슨 소원이 업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때 이 여자가 얼른 대답하는 말이“내 소원은 꼭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당신이 회개하고 예수를 믿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당신이 회개하고 예수 믿는 것을 보기만 하면 이제 죽어도 한없겠어요”라고 말했습니다. 그 남편이 그 자리에서 회개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어떤 어머니, 아버지들이 그의 아들들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고 간절히 권면도 하지마는 종내 회개하지 않는 아들도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그 부모님이 세상을 떠난 다음에 관머리에 앉아서 회개하는 아들도 더러 보았습니다. 참 믿음으로써 구하고 힘쓰면 결국은 온 가정이 감화 받게 됩니다. <너와 네 집의 구원>에서

 

 
 



267.언더우드 선교사에 대한 내적 음성

내적 음성( 하나님의 음성)을 통하여 인도하십니다.
성령을 통하여 고요한 음성이 우리 성령 속에 들릴 수 있습니다.
금년이 선교 80주년 기념의 해입니다. 몇 달 전에 이 기념예배를 새문안 교회에서 볼 때에 제가 이런 예기를 했습니다. 언더우드 박사는 본래 한국에 오려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인도에 가려고 생각한 분입니다.
그러나 한국에서 전도의 문이 열렸다는 말을 듣고, 자기 친구 가운데 한국에 갈 수 있는 이가 누군가 찾아보았습니다. 그러나 별로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중에 그의 심령 가운데 이상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그것은“왜 네가 가지 않느냐?”하는 음성이었습니다. 이 음성을 듣고 그는 한국에 오기를 원한다는 지원의 편지를 냈다고 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회답은 지금 선교비가 없어서 선교사를 보낼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뉴욕에 있는 어떤 교회에서 그를 목사로 청빙(請聘)하는 청빙서가 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한국에 가는 길도 막히고 인도에 가는 일도 잘 안되어, 이제 나는 교회로 가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서 수락하는 편지를 써 가지고 우체통에 가서 넣으려고 할 때에 음성이 들리기를“한국은 어떻게 하려고 하느냐?”하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래서 그 편지를 부치지 않고 내가 직접 선교부에 가서 이 일을 의논할 수밖에 없다 생각하고 선교부에 가서 의논하니 총무가 하는 말이“당신 참 잘 오셨소, 당신께 편지할 때는 선교비가 없었지마는 바로 며칠 전에, 어떤 사업을 하시는 분이 한국 선교비를 6천불을 가져왔으니 우선 이것으로 전도를 시작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니 당신이 좀 가주시오.”해서 그가 처음으로 한국에 나왔다고 합니다.
이런 경험은 언더우드 박사에게만 있는 것이 아닌 줄 압니다. 참으로 하나님께 몸을 바쳐서 참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종종 이와 같은 세미 한 음성이 그의 갈 길을 인도하여 주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인도>에서

 

 
 



268.인과 의

아마 40대 이상은 다 아실 줄 압니다. 옛날 서당에 다닌 사람은 맹자 읽어보지 못한 이가 없을 것입니다. 맹자 첫 페이지는 다른 것 다 잊어버려도 잊지 않을 것입니다. 기억하시지요?“맹자견(孟子見) 양혜왕(梁惠王)하신데 왕왈(王曰) 수불원천리이래(瘦不遠千里而來)하시니, 역장유(亦將有) 이리(以利) 오국호(吾國乎)이까”영감께서 이렇게 천리를 멀다 하지 않으시고 우리 나라에 오시니 장차 우리 나라에 이로운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맹자가 그 말을 듣자마자 이어 대답하는 말, "왕은 어찌하여 먼저 이익을 찾습니까? 나라에는 반드시 인과 의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하는 말이 "왕이 이익을 찾으면 사대부가 이익을 찾을 것이요. 사대부가 이익을 먼저 모으면 모든 관리들이 이익을 도모할 것이며, 국민이 모두 이익만 찾을 것이요, 그렇게 되면 사화가 부정해져서 나라가 망하고 맙니다"
요새 말로 하면 위에 있는 대통령이 이익을 도모하면 아래 있는 장관이 이익만 찾을 것이요. 장관이 이익만 도모하면 아래 국장들이 이익만 찾을 것이요, 과장이 이익만 찾게 되면 계장, 직원들, 마지막에 백성들이 이익만 찾게되고 나라는 망한다는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어느 때보다도 부정과 부패가 많다고 하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우리 동양사람으로서 다 기독교를 모른다고 할지라도 적어도 첫 페이지는 배워야 될 것이 아닙니까.? 안 믿는 사람도 말입니다.

 

 
 



269.안 중근 의사의 ‘견이사의’

남산에 가면 안 중근 의사의 동상을 여러분이 보실 것입니다. 안중근 의사가 여순 감옥에서 나라를 위해 처형되기 전에 귀한 글귀를 여러 개 썼습니다. 그의 글씨가 또 명필이었습니다.
여러 귀한 글귀 가운데 제가 항상 잊지 못하는 글귀는‘견이사의(見利思義)’라는 글귀입니다. 즉“이익을 볼 때에 의를 생각하라”고 이익 나는 일이 있을 때에, 내가 금전적으로 유익한 일이 있을 때에 의를 생각하라. 그것이 옳은 도리냐 아니냐를 생각하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작정할 때에 이것이 이로우냐 해로우냐, 하는 것보다도 이것이 쉬우냐 어려우냐, 하는 것보다도 이것이 옳으냐 옳지 않으냐, 이것이 의이냐 아니냐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을 작정하고 무엇을 해야 합니다. 이것은 모든 생활에 있어서 꼭 같은 원리인 갓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산상보훈에서 말씀했습니다.
“의를 사모하기를 주리고 목마른 자”같이 하면 복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이런 나라가 복을 받을 것입니다. 너희가 의를 위해서 핍박을 받으면 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옳게 살기 위해서 핍박을 받으면 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에서

 

 
 




270.눈을 들어 주께 향하라

인생 길을 걸어가다가 어떤 때에 막다른 골목에 부딪칠 때가 잇습니다. 아무리 돌파구를 찾을 내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이 때에 어떻게 해야 합니까? 눈을 들어 위를 바라봐야 합니다.

 

 
 



271.진강산에서의 기도

오래 전에 제가 신의주에 있을 때에 지금은 세상을 떠났지만 제가 존경하는 장로님이 한 분이 계셨는데 그 장로에게서 그의 경험을 들은 기억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이 장로님은 본래 촌에서 농사지으면서 살던 장로님인데 촌에서 그런 대로 생활은 할 수 있었지마는 그러나 자녀들 교육이 힘들어서 돈 될 만한 것을 다 팔아서 신의주로 이사를 했습니다. 와서 이런 사업, 저런 사업을 해보았지만 경험이 없고 해서 거듭 실패를 하였습니다.
몇 해 후에는 촌에서 가져온 돈은 다 없어졌습니다. 자녀들을 더 많이 낳았습니다. 학비는 많이 듭니다. 마지막에는 끼니조차 어려운 형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밤새도록 무슨 궁리를 하지마는 생각이 잘 나지 않고 잠은 한잠도 못 잡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에는 무슨 생각이 낳는지 압록강 철교를 건너서 안동이라는 곳으로 갔습니다. 신의주에는 산이 없으나 안동에는 진강산이라는 산이 있는데 그 꼭대기를 올라갔다고 합니다. 올라가서는 어떤 소나무 아래 앉아서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했다고 합니다. 물론 전에 교회를 다닌다고는 했지만 이런 간절한 기도를 드렸던 적이 없으리 만큼 간절히 기도했다고 합니다.
생의 막다른 곳에서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께 매어 달려 기도했습니다 종일 기도했다고 합니다. 날이 어두운 다음에 다시 압록강 철교를 건너오는데 다른 생각이 나는 것은 없으나 철교를 건너갈 때에는 빠져 죽고 싶은 마음이 있었으나, 철교를 건너올 때는 그런 마음은 없고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겠지 하는 든든한 마음이 생겼다고 합니다.
그후에 여러 가지 사업을 하는 중에 모든 것이 형통해서 가정은 안정을 이룰뿐더러 다른 사람들까지 많이 도와주다가 이 장로님은 세상을 떠났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을 때에 위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272.‘에벤에셀’과 ‘여호와 이레’신앙

근대 선교 역사를 공부하는 가운데 위대한 선교사의 전기를 우리가 많이 읽어 볼 수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 중국에 가서 선교하시던 분 중에서 제일 유명한 분은 허드슨 테일러(Hudson Taylor) 라고 하는 분일 것입니다.
다른 분도 많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 허드슨 테일러는 영국 사람으로서 좋은 가정에서 태어났고 어려서부터 몸을 온전히 하나님께 바쳐서 복음을 알지 못하는 곳에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자원하여 중국의 선교사로 간 것입니다. 영국의 어떤 선교회의 파송을 받아서 중국에 가게된 것입니다.
그는 거기서 몇 해를 전도하는 가운데 하루는 영국으로부터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 편지는 선교회 총무가 보냈는데 그 내용을 보니 “선교비가 제대로 들어오지 않아서 당신의 월급을 매달 보낼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힘써도 안 됩니다. 섭섭한 일이지마는 본국으로 돌아오시기를 바랍니다”하는 소환장이었습니다.
이렇게 되니 테일러는 민망해졌습니다. 멀고 먼 곳에 전도하려 왔는데 선교 비용이 없어서 돌아오라고 하지만 돌아가자니 민망하고, 계속하자니 앞일이 캄캄했습니다. 어떻게 할까? 생각하다가 이 테일러는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기도하는데 구약성서 중의 히브리말 두 말이 떠올랐습니다.
하나는 사무엘서에서 나오는‘에벤에셀’이라는 말인데“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인도하셨다”하는 뜻이요. 또 하나는 창세기 22정에 나오는 말로‘여호와 이레’라고 하는 말입니다. 즉“하나님께서 준비하시느니라”하는 뜻입니다. 그것은 무슨 말이냐 하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산에 이삭을 제사 드리려 올라갈 때에 이삭이 자기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물어보기를“아버지여! 제사들일 나무도 있고 불도 있는데 제사들일 양이 없으니 어떻게 하시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 때 아브라함은 무엇이라고 대답했습니까? 얼른 대답하는 말이“여호와이레, 여호와께서 그것을 준비하시느니라”대답했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준비하시리라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 아시는 데로 과연 하나님께서는 미리 양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테일러는 이 말이 기억났습니다. 그는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나를 인도하셨다. 앞으로도 하나님께서 준비하시리라 하는 말씀을 믿고 이 땅에 계속 남아 복음을 전파하리라 생각했습니다.
중국 사람 입는 대로 옷을 입고, 중국 사람 먹는 데로 먹고, 중국 사람 자는데서 자고, 중국 시림과 꼭 같이 살면서 전도를 계속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굶기지 않으셨습니다. 쓸 것 그냥 주셨습니다. 외롭게 혼자 전도하지 않게 하셨습니다. 많은 일꾼들을 보내 중국 내 지선교회라고 하는 유명한 선교 운동이 시작된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헤이드 미tus이라는 테일러의 신앙에 의지한 전도운동이었습니다.

 

 
 



273. 천로역적의 저작과정

여러분, 앞이 보이지 않을 떼에 위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읽어보신 분도 많이 계실 줄 알지마는 못 읽어본 이는 이제라도 사다 읽어보십시오.《천로역정》이라고 하는 유명한 책이 있지요. 이것을 누가 어떻게 해서 썼는지 여러분은 기억하시지요. 청교도 운동을 영국 성공회에서 핍박하였습니다. 한 청교도가 성공회 허락 없이 전도한다고 붙잡혀 가서 감옥에서 12년 동안이나 갇혀 있었습니다.
젊은 사람이 복음을 전파하다가 전도 못하고 감옥에 가서 젊음을 허송하게 되니 얼마나 슬펐겠습니까! 그러나 이 존 번연(John Bunyun)은 그 가운데서 은혜를 받아《천로역정》이라는 책을 써서 12년 동안 다니며 전도하는 것 보다 책을 통해서 몇 배의 많은 생명을 구원했다는 것입니다. 오산 학교를 창설한 남강 이승훈 선생께서 105인 사건으로 감옥에 들어가실 떼에 신약성서를 백독(百讀) 하였다고 합니다. <눈을 들어 주께 향하라>에서

 

 
 



274.여호와의 등불

한 번은 어떤 유물론자가 한 목사에게 와서 이런 질문을 하였다고 합니다. “목사님께서는 우리 인간 육체 속에 영혼이 있다고 믿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 목사는 대답하기를 “나는 사실인줄 믿노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청년이 하는 말이“내가 아무 대학 부속 박물관에 가보니 사람을 분석한 것이 있었는데, 사람의 육체 속에는 수분이 몇 퍼센트, 광물질이 몇 퍼센트, 탄수화물이 몇 몇 퍼센트, 등으로 열 여섯 기지 종류로 나누어 실험 병에다 넣었는데 그게 인간의 전부이고 영혼이란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말하니 그 목사 말하기를“그러면 당신에게는 그런 물질밖에는 없다고 생각합니까?”했더니 그이 대답이“나는 그런 줄로 압니다”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목사는 말하기를 나는 그 문제에 대하여“당신과 더 이상 말할 수 없습니다” 왜? 토론할 대상이 없기 때문이지요. "당신과 같이 물 얼마, 광물질 얼마, 탄수화물 얼마로 된 사람과 나는 얘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라고 말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유물론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모순입니다. 인간이 물질뿐이면 유물론을 생각하는 그 자신이 부정됩니다. 없어지고 맙니다. 과연 사람의 속에는 불멸의 영혼이 있습니다. 그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입니다. 이 영혼에는 빛이 있습니다. 이 빛은 하나님께서 보내주시는 것입니다.

 

 
 



275.생각하는 갈대

파스칼의 말 가운데“인간은 한 갈대라”고 했습니다. 심히 약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고 했습니다. 이런 의미신장한 말을 남겼습니다. 사실입니다. 생각도 보통 생각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을 연구하고 분석하며, 창작을 하는 생각입니다.
즉 이성이 인간에게 있는 것입니다. 까치나 까마귀는 천년 전에 지은 집이나 오늘날 지은 집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호랑이는 당군 할아버지 때에도 굴속에 살았고 오늘날도 여전히 굴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인간은 원시시대에 굴속에서 살던 혈거시대가 있었습니다. 제주도에 가보면 지금도 삼성혈(三姓穴)이라고 하는 곳이 잇는데 거기에는 조그마한 구멍들이 있습니다.
아마 옛날 제주도의 삼성 조상들이 살던 굴인가 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제주도는 사람은 굴속에서는 살지 않습니다. 또한 몇 해 전에 지은 집과 요사이 짓는 집이 다릅니다. 여러분, 서울 주변을 다녀보세요. 얼마나 새로운 형태의 주택이 세워지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람의 속에는 이성이 있어서 간단없이 새로운 것을 창작합니다. 이성의 빛이 과학을 발전케 하였습니다. 작은 현미경도 만들었습니다.
이 작은 현미경을 통해서 우리는 눈으로 보지 못하던 많은 세균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의학계에 새로운 기원이 되어서 많은 병을 알게되어 고치게 되었고 예방의학이 발달하게 된 것입니다. <여호와의 등불>에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