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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제1권-한경직 목사 설교 예화

by 【고동엽】 2022. 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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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권 한경직 목사 설교 예화  227편
 

1.가장 위대한 예술가

오늘 우리가 보는 이 우주나 자연을 신학적 견지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본래 지으신 것과는 죄로 말미암아 달라진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가만히 살펴보면 예술적 작품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신비하고 위대한 우주일 뿐 아니라 얼마나 아름다운 우주입니까?
아침 동천(東天)의 서광(曙光)이 아름다운가 하면 저녁 서산낙조(西山落照)도 못지 않게 아름답습니다. 명량한 가을 달밤이 금강산에 1만 2천 기봉(奇峰)이 잇는가 하면 작으나마 아담하고 신기한 평양의 모란봉과 능라도가 있습니다. 천하를 삼킬 듯한 태평양의 파도소리가 숨어 나오는 맑은 시내의 속삭임도 있고, 문자 그대로 사자의 사자후(獅子 )가 잇는가하면 여름 아침 산 곡을 덮는 매미의 서늘한 노래, 황혼을 노래하는 저녁 벌레들의 음악과 반주가 얼마나 아름다운 것입니까? 나무 잎 하나 하나, 꽃송이 하나 하나, 이 모든 것이 어느 하나가 위대한 작품 아닌 것이 없습니다.
여기 조작이 있고 건축이 있고 시가 있고 노래가 있고 그림이 있습니다. 이런 최고 예술가이신 하나님을 모른 영혼이 어떻게 위대한 작품을 지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인간은 누구나 다 하나님께 예술을 배워야 합니다. 심령을 밝혀 하나님께 배워야 할 것입니다.
<기독교와 예술>에서

 

 
 


2.교회는 예술의 어머니

교회와 예술에는 어떠한 관계가 있습니까? 교회는 예술의 어머니입니다. 기독교는 예술을 육성하였습니다. 교회 역사를 보면 초대 교회의 작품으로서 신약성서를 들 수 있으니 이는 문학적 견지에서 볼 때 참으로 아름다운 예술적 작품이 아니라 할 자가 없습니다. 물론 당시 예술의 우상 숭배와 같은 부도덕한 부패한 예술로 떨어졌기 때문에 초대교회는 예술을 배척하였지만, 그러나 4세기 이후부터는 교회에서 예술을 육성하여 기독교 음악, 건축, 조각, 회화 등의 많은 발전을 보게되어 중고시대에 이르러서는 기독교를 떠나서는 예술을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문예부흥 이후 근대에 이르러 예술이 교회를 떠나 독립한 감이 있으나 실상은 모든 위대한 예술가와 작품은 기독교를 떠나서는 찾을 수 없었습니다.
영국인에게 제일 위대한 영문학 작품이 무엇이냐고 물어보세요. 그네들은 서슴지 않고 흠정역 영어성경(King James Version)과 셰익스피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만일 독일인에게 물어보면 루터의 성경과《파우스트》라 할 것입니다. 그림으로 말하면 레오날도 다빈치, 라파엘, 산리의 성화 외에 더 위대한 것이 어디 있으며, 조각이면 미켈란젤로의 작품보다 더 위대한 것이 어디 있으며, 시라고 하면 밀톤의《실락원》, 탄테의《신곡》보다 더 위대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렇게 교회는 예술을 창조하고 육성하고 보존하여 왔고 또 앞으로도 교회는 모든 고상한 예술의 어머니가 될 것입니다.<기독교와 예술>에서

 

 
 


3.무신론적 민주주의와 기독교적 민주주의

강제 권력 곧 주권의 소재는 어떠한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 생각하여 봅니다. 제왕은 신을 대신하여 모든 권력을 가진다는 중세기의 제왕신성설(帝王神聖說)이 있고, 국가적 자아의식을 주장하는 독일 철학에 의한 범신론적(汎神論的)국가 주권 설이 있으며, 근세에 와서는 주권은 인민에게 있다는 인민 주권 설을 보게되었습니다. 18세기에, 인민주권으로 공화국을 세운 나라는 1776년에 독립한 미국과 1789년에 이루어진 불란서 공화국 두 나라가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인민 주권이지만 불란서는 무신론의 인민 주권이었으므로 테러의 성행, 반(反)혁명운동의 봉기, 나폴레온 제국의 건설, 왕정의 복구, 나폴레온 3세의 제국재건 등으로 19세기 중 불란서는 가장 수난한 민족이었습니다. 그 간에 단두대에 아침 이슬로 살아진 청년의 수가 얼마나 있었습니까? 반면에 미국은 기독교적 민주주의에 의한 국가로서 그 헌법에 "감사하리로다 전능하신 하나님, 그는 우리에게 우리자신의 관헌을 택하는 권)權)을 주셨도다"라고 하였고 그 독립 선언서에는 "아메리카 국민은 자연법과 하나님의 율법에 의하여 그 권리를 주창하고 버릴 수 없는 권리를 창조주인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고로 일어나노라"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미국은 건국이래 오늘날까지 세계에서 제일 축복 받은 평화의 나라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주권의 근본은 다 신에게 있다는 것의 증좌(證左)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습니다,』그러므로 어떤 방법으로 권세를 얻든지 다 하나님께 대하여 책임이 있습니다. <기독교와 정치>에서

 

 
 


4.학생의 헌신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잇는 생명은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이 귀한 생명을 우리가 잃는다면 다시는 찾을 길이 없을 것입니다.‘천지는 무시종이요 인간은 유생사’(天地無始終 人間有生死)라 하여 세월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흘러가지만 우리 인생은 60년이나 혹은 80년이라는 한 생애를 가지게되는 데 불과합니다. 이 하나 밖에 없는 우리의 생명, 짧은 시기밖에 살지 못하는 우리의 한 생애를 어떻게 사용하며 어떻게 지내야 하겠습니까? 더구나 우리가 가지는 청년시대는 아주 잠깐 되는 순간입니다.
한번 지나가면 찾아올래 야 찾을 수 없는 가장 귀한 시기입니다. 누구나 청년 시대는 가질 수 있지만 누구나 다 가져볼 수 없는 학생시기를 여러분은 가지게 되었으니 여러분의 행복은 무엇으로 형용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이 잠깐 되고 귀한 행복스러운 학생 시대를 여러분은 어떻게 지내려고 합니까? 속절없이 가 버리려느냐, 뜻 있게 고상하게 보내려느냐? 나는 여러분은 이 시대를 유익하게 뜻 있게 고상하게 지내려는 줄 믿습니다. 그리하면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여러 가지 할 일리 많겠지만, 제일 필요한 것은 먼저 몸을 주께 드리는 것입니다.
동양에서는‘물유본말 사유종시’(物有本末 事有終始)라는 말이 있고 서양 속담에는‘아무리 바빠도 수레를 말 앞에 못 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고금을 물론하고 동서양 역사를 살펴보면 혹은 국가를 위하여 사회를 위하여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운 역사적인 인물들은 소년시대에 온전한 헌신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일대의 영웅 한니발은 9세인가 11세 때에 국가를 위하여 헌신하였으며 앗시시의 성자 프랜시스와 존 녹스 역시 소년시대에 하나님께 헌신하였고 영국 교회의 대부흥가 웨슬레는 학생시대에 온전히 하나님 앞에 몸을 바쳤습니다.
먼저 우리 몸을 주께 들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잘못하면 우리의 몸을 잘못 드리게 되는 일이 많습니다. 히틀러를 위하여 나치스 제단에 몸을 드린 독일 청년들, 무솔리니를 위하여 파시스트 제단에 몸을 드린 이태리의 청년들, 일본의 천황을 위하여 제국주의 제단에 몸을 드린 일본의 청년들, 그리고 유물론 철학을 토대로 한 공산주의 제단에 몸을 드리고 떠들어대는 가련한 청년들, 이모든 청년들은 한 몸을 헛되게 잘못 드린 것입니다.
나치스 제단에 뿌린 희생의 피, 파시스트 제단에 뿌린 희생의 피, 제국주의 제단에 뿌린 희생의 피, 이렇듯 많은 희생의 피는 한 번 역사의 바퀴가 구른 오늘날에 와서 무엇이 되고 말았습니까? 피를 흘리되 값없이 흘리는 피처럼 참으로 비참한 것은 없습니다. 따라서 공산주의 제단에 드리고있는 저 희생물의 장례가 어떠하리라는 것은 우리가 가히 짐작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몸을 드리되 누구에게 드리려고 합니까? 온전히 거룩한 하나님께, 주님께 드려야 합니다 잠깐 떠들다가 스러지고 마는 물거품과 같은 제단에다 몸을 드리다가는 무참히 쓰러지고 마는 어리석은 청년이 되지 맙시다. <학생의 헌신>에서

 

 
 


5.이것이 우리의 보물

이방 교회가 주후 46년부터 48년까지의 대 기근 때에 예루살렘 교회를 위하여 헌금하였다는 기사는 상부상조의 정신을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주후 2, 3세기의 교회의 현상도 역시 그려하였습니다. 로마교회에는 이 시대에 보통 1만5천 명 이상의 가난한 자, 병든 자, 과부와 고아들을 구호했으며 테시어스(Decius)황제의 핍박 때 로마 군대가 교회의 보물을 탈취하려 왔을 적에 그 교회의 집사 로렌 피어스는“이것이 우리의 보물이라”하면서 소경과 절름발이와 반신불수와 고아들을 구호하는 광경을 보여 주었다고 합니다.

 

 
 


6.흑사병과 핍박 속의 구제

주후 3세기에 알렉산드리아 교회는 약 10만 명 있었는바 그들은 1만5천의 불행한 자의 생활을 담당하였다고 합니다. 또 후에 이곳에 흑사병이 창궐하여 많은 인명이 손상된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에 이것이 기독신자들이 우상에게 절하지 않은 탓이라는 말이 돌아가 이 때문에 신자들은 심한 핍박을 받았습니다. 모든 불신자들이 이 병이 무서워서 앓는 자와 죽은 자의 시체를 그냥 내버리고 도망을 했을 때에도 신자들은 결사적으로 마지막까지 머물러 있어서 병자를 구호하며 시체를 매장하였습니다. 그 후 도망했다가 다시 돌아온 자들이 기독신자들이 한 업적을 보고 놀라지 않은 자가없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흑사병의 유행은 갤러스(Gallus)황제 때에도 있었는데 당시 카태이지 교회는 사이프리안의 지도하에 그들을 간호했으며 매장하였다고 합니다. 유세비어스 당시에는 핍박이 너무 심하여 어떤 교우가 재산 몰수를 당하면 교우들이 서로 생활 책임을 졌고, 다른 데로 피신하여 가면 목사의 소개서 한 장으로 으레 그들의 생활 책임을 졌다고 합니다.
2세기초의 신학자 터툴리안의 변증론의 일 절을 보면“보라 저들이 어떻게 사랑하였는가를! 저들이 서로 죽기도 사양치 않는구나 저들은 아내 외에는 무엇이나 공동으로 가지기를 주저하지 않는다”고 불신자들이 경탄함을 말하였고, 그들은 또한 불신자들을 향하여“당신들은 우리를 핍박하나 우리는 당신들을 위하여 기도하며, 당신들의 신을 위 하여는 아무 것도 아니하나 당시들의 빈궁한 자는 우리가 구제하노라”하였다고 합니다.

 

 
 


7.루시안의 기독교 반대론

기독교 반대자 루시안(Lucian)은 기독교를 반대하는 글을 썼는데 그 가운데에는“그들이 서로 어려운 중에도 상부상조하는 것은 엄청난 일이다. 아무 것도 아끼는 것이 없다. 그들의 첫 입법자(立法者)가 그들 머리에 그들은 서로 형제라 하는 사상을 단단히 넣어주었다”라고 말하였고, 또 로마의 울바너스 감독은“로마 전국에 기독신자로서 걸식하는 자는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성경에 나타난 교훈을 문자 그대로 신종 했던 까닭이었으니 그들의 구제대상은 과부와 고아, 무산자, 병자, 나그네, 죄수, 핍박받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대하여 그들은 사랑으로써 상부상조의 정신을 발휘하였던 것입니다. <상부상조의 정신>에서

 

 
 


8.부활주일의 뜻

『사람이 죽으면 어찌 다시 살겠느냐?』(욥14·14)하는 의문은 욥기이래 인간의 끊임없는 문제입니다. 영국의 시인 데이슨의 시의 일 절에 이러한 구절이 있습니다.
사랑은 그가 아주 죽으려고 지음을 받은 것 같이 생각지를 않는다
(Man thinks he was not made to die)
한(漢)나라의 무제(武帝)가 장생불사를 원하여 승로반(昇露盤)에 찬이슬을 받아먹었다는 말도 있고 일대의 영웅 진시황(秦始皇)이 당시 중원을 평정한 후에 불로초를 구하기 위하여 동방「삼신산」(三神山)에 곧 우리 나라 금강산에 동남 동녀 5백 인을 보냈다는 전설은 우리가 다 잘 아는 바입니다. 어떤 시인이 이렇게 노래하였습니다.

나는 알지 못하노라 어디로 그 섬들이
넓은 종려나뭇 잎들을 공중에 날려보내는지
내가 알기는 오직 그의 사랑과 보호의 범위를 지나서는
내가 표류치 못하리라는 것뿐이다.

I know not where the islands lift
Their frond palms in air
I only Know I can not drift
Beyond his love and care ―Whittier

이 부활 주일이야말로 인간은 다만 피와 살뿐이라는 유물주의적 견해에 대하여 인간은 불멸의 존재라는 사실을 가장 웅변으로 대답하는 것입니다. <부활주일의 의의>에서

 

 
 


9.첫 순례자 성 안토니

기독교 역사는 믿음으로 집을 떠나 거룩한 생활을 한 순례자의 생활로 연결되어있습니다. 성(聖) 안토니는 부유한 가정에서 자라나고 많은 재산을 차지한 청년이었지만 어떤 때 이 청년이 성경 가운데서 한 부자 청년이 예수께 나와“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까?”고 물었을 때 예수 님이“네가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있는 것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라 그리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시자 청년이 재물이 많은 고로 안색이 변하고 근심하여 돌아갔다는 기사를 읽고 이 성경 말씀이 꼭 자기에게 하는 듯이 생각되었습니다.
‘성경의 청년은 얼굴을 붉히고 돌아갔으나, 나는 성경의 말씀대로 주님이 명하신 대로 살겠다'고 결심하고 자기의 재산을 누이에게 좀 나누어 준 다음 나머지는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준 후 자기는 공동묘지인 굴속에 가서 성경 읽기와 기도하기에 힘쓰다가 마침내 아프리카 광야에 유리하며 성자의 생활을 보내었으니 세상에서 믿음으로 성지에 가려는 생각에서 순례자의 생활을 한 첫 순례자입니다.

 

 
 


10.크리소스톰과 아다나시어스

주후 4세기와 5세기 이후 가족과 친척을 떠나 광야에서, 산 곡에서, 산상에서 혹은 높은 기둥 위에서 지내며 온전히 일생을 믿음으로 지낸 수도사(修道士)의 수는 몇만 명이 될 터인데 이런 수도사들은 말할 것도 없고, 유명한 교부들과 믿음의 용사들은 믿음 때문에 친척과 고국을 떠나 나그네의 생활을 하였습니다.
일대의 위인 콘스탄티노플의 대 설교가 크리소스톰은 황태후의 노여움을 사게 되어 콘스탄티노플에서 쫓겨나 만족(蠻族)이 사는 이역(異域)에서 순례의 생활을 하였고 아디나시어스는 기독교역사를 보면 전통 생황을 하기 위하여 다섯 번이나 추방을 당하여 만지(蠻地)로, 광야로 순례의 생활을 하였습니다.

 

 
 


11.요한 칼빈

종교 개혁 시대에 이르러서는 순례자는 더욱 많아졌습니다. 종교 개혁자 요한 칼빈 같은 이도 여러 가지 핍박을 받아 이 동네에서 저 동네,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유리하면서 종교개혁 운동을 하며 순례의 생활을 하였습니다.

 

 
 


12.청교도와 모라비안파 교회

17세기에 있어서 영국 교회가 로마 교회로 기울어지는 경향과 신앙의 자유를 구속하는 영국교회를 상대로 순수한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청교도들도 핍박을 피하여 먼저 화란으로 향하였고 그후에 1620년 103명이「메이 플라워」호(號)로 북미 플리머드(Plymouth)에 도착하여 순례자의 생활을 시작하였던 것이며 진젠돌프 백작이 세운 모라비안파 교회는 순례자의 교회였고 19세기이래 동양, 아프리카, 남양군도에 흩어진 선교 자들도 역시 순례자들이었습니다.

 

 
 


13.우리 성도들

지금 우리 대한에서도 혼란한 과도기로 인하여 이북에서 부득이하여 오랫동안 살던 정든 고향과 집과 친척을 떠나 원치 않는 여행을 하여 이남으로 내려오는 교우들이 나그네의 생활을 할 때 여러 가지 고통과 환난이 많지만, 긴 교회 역사상으로 보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모세와 엘리야의 생활의 계승임을 생각하여 수고와 궁핍이 심하지만 오히려 감사의 눈물을 금할 수 없습니다.

 

 
 


14.존 번연의 천로역정

기독교 역사는 긴 순례자의 역사일 뿐더러 또한 우리 신자는 신령한 의미에서 누구나 다 순례자입니다.
존 번연의《천로역정》(天路曆程)은 영어로 말하면 The Pilgrim's Progress인 바 그대로 번역하면‘순례자의 진로’라는 말입니다. 기독교가 장망성을 떠나 천성을 향하여 나가는 도중에 웅덩이와 높은 산과 기타 여러 가지 괴로운 일과 시험을 많이 당하나 끗까지 싸우며 믿음으로 나갔다는 기록입니다. <순례자의 생활>에서

 

 
 


15.청교도의 신앙

교회사(敎會史)를 보면 중고시대(中古時代)에 교회가 침체하여졌을 때에도 조용한 곳을 찾아 자기의 생활을 깨끗이 하려고 애쓴 수도원 제도가 발전되었고 또 특히「카타리」(Cathari-결백이라는 뜻)란 일종의 교파가 일어난 것이나 루터, 쯔빙글리, 칼빈의 종교개혁도 다 성결하고 경건한 생활을 이루려는 영원한 노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청교도의 역사의 배경- 그러나 위에 말한 모든 것이 청교도 아닌 것은 아니나, 교회 역사상 청교도라 함은 17세기 중엽 영국 제임스 1세로부터 차알스 2세까지의 거의 1세기 동안 영국 안에서 다시 로마교회로 기울어지는 경향과 영국 국교를 상대로 한 순수한 신앙을 위하여 투쟁한 교도들과 또 이들 중에서 핍박을 피하여 미 대륙에 이주하여 뉴잉그랜드주에 교회를 세우고 미국을 건설한 교도들의 총칭입니다.
영국의 종교개혁은 독일이나 스위스의 그것과 그 성질이 달라서 16세기 헨리 8세 때에 로마 교황과 관계를 끊고 영국국교를 설립했으며 왕이 교회의 수장(首長)이 되고 캔터베리 대감독이 교회를 지도하였으나, 로마교회의 잔재 즉 제사의 복장이나 예배의 의식 같은 것은 그냥 답습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독일과 제네바의 개혁을 아는 자 중에는 이에 불만을 품고 이 잔재를 일소하고 순수한 기독교의 확립을 원하는 이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당시의 국교의 의식주의와 복잡한 성례, 감독정치 등을 반대했기 때문에 많은 핍박을 받았으나 북미주에 이주하여 새 나라를 건설한 이들도 이들 청교도들이었고 크롬웰을 중심으로 한 국내 혁명도 이들의 손을 통하여 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이들 청교도들이 가졌던 신앙과 생활은 어떠한 것이었습니까? 오늘 위기에 처하여 있는데 대한 교계를 돌아보며 이를 생각함은 무의미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첫째, 그들의 특색은 신앙의 기초를 성경에서 찾았던 것입니다. 즉 그들의 신앙은 성경중심이었으나 성경을 무엇보다도 존중했고 애독했습니다. 1608년 제임스 1세가 47인의 학자들을 명하여 영어로 번역케 한 신구약성경을 그후 3년만에 완성해서 이를 흠정역(James Version)이라고 하는 바, 이를 애독한 청교도들은 생활과 도덕의 표준을 여기서 찾았고 교회와 국가의 정치적 표준도 여기서 얻었던 것입니다.
유명한 역사가 그린은 말하기를“영국인은 오직 한 책만 읽는 백성이 되었는데 그 책은 곧 성경이다”라고 할만큼 그들은 성경을 애독하였습니다.
둘째로, 그들의 신학 사상은 단순하였으니 사도 바울, 어거스틴, 칼빈을 통하여 전하여진 칼빈주의가 그들의 신학사상이었습니다.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타락하였음으로 인간의 자력으로는 자기를 구원할 수가 없고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하나님 중심의 신학이었습니다.

 

 
 


16.신 신학의 사조

옛날에 이나 지금이나 이 중심을 떠나서 좌우 곁길로 나가는 사조가 있었습니다.
첫째로 신 신학의 사조(Modernism)가 이것입니다. 이 사상은 과학적 분위기에 쌓인 현대인에게 기독교를 이해시킬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기실 사상적으로 세상과 타협한 신학인 바 이 사상은 자연주의와 진화론의 영향을 받아 합리주의, 인본주의가 그 골자로서 근본적으로 불신(不信)의 태도에서 나오는 사상입니다.
이 사상은 고대 교회로부터 나타난 것인데 시대가 감에 따라 조금씩 달라졌을 뿐이니 2세기의 노스틱주의, 4세기의 아리우스주의, 그후에는 펠라기우스주의, 종교개혁 이후에는 예수는 인간 즉 위대한 인간이라는 소시니안주의, 19세기에 이르러 특히 튜빙겐 대학을 중심으로 현대주의사상, 신 신학으로 우리 교회에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이 사상은 우리 믿는 사람의 신앙의 태도를 회의(懷疑)하게 하며 신앙을 무력하게 합니다. 스티라우스(Strauss) 같은 이는 이 성경을 과학적인 견지에서 보면 예수 님의 생활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고 신화(神話)라고 주장하여 교계에 큰 센세이션을 일으켰는데, 결국 그의 말로는 유물론자 무신론자로 전락되어 죽었고 이 사상의 지배를 받은 독일 교회는 아주 무력한 교회가 되어 생기를 잃어 결국 비스마르크, 히틀러에게 좌우되는 교회로 떨어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내가 미국의 프린스톤에 있을 때 신 신학을 가르치는 모 신학교에서 온 어떤 신학생에게 왜 프린스톤으로 왔느냐고 물었더니“거기에 있으니까 목사가 되고 싶은 마음이 점점 없어지게 됨으로 아주 없어지기 전에 왔다”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목사 되려고 신학교에 간 학생에게 목사 되고 싶지 않게 만드는 것이 곧 신 신학의 영향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신앙으로, 경건한 마음으로 읽어야 성령이 임하는 것이지, 불신하는 태도로, 불 경건한 마음으로 성경을 연구한들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얼른 생각하기에 그 시대 그 시대의 사상과 타협하여가면서 전도하면 신자가 많이 생길 것 같지만, 타협하여 얻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오직 죄와 싸우는데서 회개하는 사람을 많이 얻을 것이며 죄를 책망하지 않으면 귀로 듣기는 좋을지 모르나 회개 할 수는 도저히 없는 것입니다.

 

 
 


17.극단적 영파

극우사조(極右思潮)라 할까, 소위 극단적 영파(靈派) 가 있습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이성(理性)의 요소를 전혀 무시하고 극단적인 감정에 흘러 광신(狂信) 내지 미신에 빠지는 사상입니다.
이들은 오직“나만 의롭다”는 자홀(自惚)에 빠져 기성교회(旣成敎會)를 부인하며 또 극단적 문자주의(文字主義)에 빠져 성경의 근본정신을 망각하여 사소한 문제로 교회의 분열을 꾀하며 교회의 분해작용을 촉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고대(古代)의 몬타너스, 도니터스주의가 그러하며, 종교개혁 이후에 재세례파(再洗禮派), 칠일안식파(七日安息派), 소위 평북 철산(鐵山)의 새 주파(主派) 등이 곧 이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상이 있어 교회를 잠식한다는 것도 분명히 알아 경계하지 않으면 아니 됩니다. <청교도의 신앙>에서

 

 
 


18.가난한 자의 복음

여러 해 전에 내가 신의주 제2교회에서 시무 할 때의 일입니다. 한번은 어떤 청년으로부터 편지를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 편지를 보니 이 청년은 가난한 가정에서 자라난 청년으로 불행하게도 제일 어린 동생이 중병에 걸렸으나 돈이 없음으로 약을 쓸 수도 없고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할 수도 없을 때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어떻게 하든지 내 동생을 낫게 하여주소서. 하나님 아버지의 권능 있는 손을 펴 사 돈 없는 사람도 죽지 않고 입원하지 않아도 살수 있다는 음성을 들러주옵소서”그 후 자기 동생은 병이 나았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이 청년은 너무도 기뻐서 노래를 지었다고 합니다.

가난한 사람의 목자는
여호와 시니
가난한 내 동생이
산 것처럼
불쌍한 모든 형제
슬플 것 없도다.

그런데 자기 백부의 옆집에 모 부호의 아들이 병에 들었습니다. 입원도 하고 약도 쓰고 각색 치료를 다하였지만 백 약이 무효로 죽고 말았다고 합니다. 그 후 그 집에서는 죽은 아들의 옷을 불사른다, 경을 읽는다 야단법석이더라고 썼습니다.
가난한 목자는 여호와 시니! 얼마나 아름다운 노래입니까! 이러한 생각은 가난한 중에서 신앙생활을 한자는 누구나 다 체험한 사실입니다. 과연 여호와는 가난한자의 목자이시니, 옛날 애굽에서 말 할 수 없는 학정 밑에 벽돌을 굽고 고역 하던 가난한 이스라엘사람들이 간절히 들이든 기도를 하나님은 들으시고 응답하사 저희를 구원하여 주셨고, 베들레헴 어떤 가난한 가정에서 자라난 목동 다윗을 불러 골리앗을 처 죽이고 불레셋을 물리치게 하시며 저를 들어 이스라엘의 제왕을 삼아 건국하게 하시고, 농촌에서 자라난 가난한 농민 아모스를 불러 정의의 예언자를 삼아서 당시 부패한 상류계급, 귀족사회의 죄악을 통렬히 꾸짖게 하였습니다.

 

 
 


19.예수님 자신이 무신자

신약의 첫머리에서 우리는 우리 주님 예수는 무산자의 대표라는 기이한 사실을 발견하게됩니다. 베들레헴 말구유에서 나셨고 가난한 목수 요셉의 가정에서 자라났습니다.『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인 곳이 있으며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이 말씀 한마디가 주님이 얼마나 가난한 생활을 하셨다는 것을 여실히 증명합니다. 가난한 자의 친구가 되시고 가난한 과부의 연보를 축복하시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시하다가 가난한자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세상을 떠났습니다.
예수님만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려하였으니 세리 마태를 제외한 열 한 제자들 역시 갈릴리의 가난한 무산 대중이었습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도 또한 그러하나 초대 교회 신자들은 부요 한 자들이 아니라 거이 무산 대중이 아니면 노예들이었습니다.

 

 
 


20.역대 교회지도자는 가난한 생활

초대교회만 아니라 교회의 역사를 살펴보면 덕을 세우며 정신적 지도자가 된 이들은 대게 가난한 자들이었습니다. 장막을 지으며 전도하던 사도 바울, 가산과 전토(田土)를 다 팔아 교회에 받치고 일생을 가난한 자들과 함께 살면서 전도하든 바나바, 성(聖)안토니, 성(聖)베네딕트, 성(聖)프랜시스도 청빈한 생활을 하면서 복음을 전하였고 위대한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도 가난한 광부의 아들이었습니다. 참으로 교회는 가난한 사람으로 시작하고 가난한 사람을 중심으로 하여, 세기를 통하여 헌신과 희생으로 자라왔으며 영광을 주께 돌리었습니다.
기타 선현들도 역시 가난한 자들이었으니 공자(孔子)는 상가지구(喪家之狗)라는 말을 들었고, 헬라의 가장 지혜 있고 의롭고 선하던 소크라테스는 독배(毒杯)를 마시고 임종할 때 사랑하는 제자 크리토에게“크리토여, 아스클레피우스에게 닭 한 마리 빚진 것이 있으니 갚아주기를 바란다”하고 운명하였으니 얼마나 가난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로 보건 데 주님이 하신 말씀과 같이“사람이 사는 것이 그 가산이 넉넉한 데 있지 않다”는 말씀이 참으로 옳은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가난한 자에게 풍성한 축복을 하였습니다.
<무산자의 복음>에서

 

 
 


21.신앙생활의 고비

인간 자신이 변함으로써 생기는 위기 중에 제일 심한 위기는 아동신앙에서 성년신앙으로 넘어서는 연령으로서 말하자면 15세로 25세까지의 시기라 하겠습니다. 이 때로 말하자면 키가 크고 성대가 변하게 되고 수염이 나게 되어 신체가 완전한 성인으로 변하며 또 본능적 욕망이 변하여지며 좀 더 나아가 심리가 변하여지면 사상이 변하여져서 그의 인생관과 우주관이 급격히 달라지게 되는 때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도 고린도 전서 13장 11절에 말하기를『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 일을 버렸노라』하였습니다.
과연 이 때로 말하면 독실하던 신앙도 아주 변하게 될 수 있고 혹은 아주 잃기도 쉽습니다. 유년주일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교회에 출석하는 일에 점점 식어지게 되고 중학교 4, 5학년쯤 되면 제법 이론을 캐면서 배교(背敎)하고 마는 이도 있게 됩니다.

 

 
 


22.종교심리학자 프래트의 위기설

종교심리학자 프래트씨는 이 중간의 특색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폭풍우 시대라 하여 모든 것이 경험이 없고 극도의 변화와 비애를 거듭하는 생활 속에 있으며, 장년들은 상상도 못할 큰 이상을 그려보기도 하며, 혹은 실패하여 환멸의 비애를 느끼기도 하며, 넘치는 감격에 어찌할 줄 모르며, 시련에 들어가기도 하는 등 그야말로 천사와 악마를 한 몸에 지니고 씨름하는 시기이며,
둘째로, 반항 시대라 하여 유년기에는 부모와 교사의 교훈과 명령에 맹종하여 왔지만 장성함에 따라 이기적으로 모든 것을 생각하는 동시에 개성을 선언하며 모든 권위 즉 부모에 대하여, 학교에 대하여, 국가에 대하여 교회에 대하여 반항의 기치를 높이 들게되는 시기이며,
셋째로, 의심 시대 혹은 번민(煩悶)시대라 하여 어릴 때에 가졌던 인생관, 우주관이 불완전한 것을 깨달으나 새로운 견해를 가지기까지 모든 것을 의심하며 회의주의로 변하는 경향이 있게 된다고 했습니다.

 

 
 


23.청년아 이 일을 알라

제임스씨가 말한바와 같이, 육신이 자란 후에는 영이 자라느라고 많은 번민이 일어나서 성경도 의심하며 부모의 신앙까지도 의심하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 자체에, 특히 청년기에 위기가 쉽게 닥쳐오는데 이것을 어떻게 돌파할 수 있을 것입니까? 청년 각자는 먼저 위기에 처하여 있음을 인식하여 살얼음을 밟는 것 같은,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것 같은 마음을 가지고 이 위기에 대한 충분한 마음의 준비를 하여야만 하겠습니다.

 

 
 


24.기독교는 과학문명의 선구자

기독교는 문화적으로 20세기 신문명 곧 과학문명의 소개자요 선구자가 되었습니다. 문화의 수준이 제일 높은 영미(英美)에서 온 선교사들은 들어오면서 교회를 세울뿐더러 반드시 학교를 세웠습니다. 재래의 우리 나라 서당에서는 오직 한문만 가르치든 때에 교회 학교에서는 수학이나 이과(理科)니 과학적 지식을 보급 시켰습니다. 벌서 50년 전에 서울에서는 배자학당(培材學堂), 이화학당(梨花學堂)을 설립해서 이승만(李承晩)박사 같은 이를 교육시켰고 평양에서는 숭실(崇實)이니 숭의(崇義)같은 학교를 세워 조만식(曺晩植)선생 같은 이를 양성하였습니다. 기독교를 떠나서 우리는 신문화의 소개자와 선구자를 찾을 수 없습니다.
<대한 민족아 깨어라>에서

 

 
 


25.기도는 인간의 내적 능력

런크 박사는《신앙에의 복귀》(The Return to Religion) 라는 책에서“신자는 인격의 조화가 있어서 위기를 극복하는 능이 있고 일을 더 잘한다”라고 했습니다. 과연 지언(至言)입니다. 현대인에게 기도가 필요치 않은 것이 아니라 현대인일수록 기도는 절대 필요하며 복잡한 사회일수록 인간 생활에 내적 능력이 필요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생각해 볼 때에 대다수의 사람들은 기도의 필요를 인정하면서도 기도를 절실하게 느끼지 않습니다. 이는 생활에 고상한 표준이 없는 까닭입니다. 만약 고상한 이상을 가지고 위대한 사업에 헌신한다면 기도의 필요를 절실하게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보통 사람에게는 별로 고등수학이 필요가 느끼지 않겠지만 한강 철도를 가설하려는 위대한 사업을 계획하는 기사에게는 고등수확의 필요가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생각도 조금하고 일도 조금하고 기도는 안하고 사는 사람이 많은 모양인데 이런 이들에게서 위대한 일을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큰 각성을 가지고 할 일이 너무 많고 클 때에는 기도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느헤미야가 고국을 위하여 기도하였고, 와싱턴이 미국의 독립을 위하여 힘써 기도하였으며, 이순신(李舜臣) 역시 조국의 안녕(安寧)을 위하여 기도했던 것입니다. 오늘 대한의 사태가 위기에 임했음에도 불구하고 대한 사람으로서 기도하지 않는 다면 그는 민족의식과 흥륭(興隆)에 대한 관심이 적은 사람, 애국심이 부족한 사람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참 애국자라면 신, 불신을 불문하고 기도 할 것입니다.
또한 진실히 기도의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함은 위기를 당해 보지 못한 까닭입니다. 속담“죽을 때는 누구나 하나님을 찾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얼마 전에 신문보도에 의하면 2차 대전 때 전법 자로서 사형 선고를 받은 독일 나치스 지도자 열 한 사람 중 한 사람 외에는 전부 그 집행을 앞둔 마지막 날 저녁에 고요히 앉아 성경을 읽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깊이 생각할 이야기라고 느껴집니다. <현대인과 기도>에서

 

 
 


26.성경의 바른 견해

오늘날 성경을 읽는 사람들에게 두 가지 오견(誤見)이 있음을 압니다. 하나는 성경은 보통 종교적 천재의 기록이라 하여 다른 서적과 동일시하는 자연주의자와 무신론자의 견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류를 사랑 하셔서 그 죄악에서 인간을 구속하시려 독생자를 보내신 분이시라 이 소식을 전하는 기록에 관계 안 했을 리 없습니다. 그는 성경 기자들에게 성신으로 감동하신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성경은 문자 적 구수(口授)(Verbal Dictation)로 되어졌다고 하여 성경 저자의 인격과 지식과 연구를 무시하는 견해입니다.
이에 대한 적당한 견해는 성경 말씀대로 하나님의 영감으로 은혜 받은 인물들이 하나님의 계시를 기록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평시에도 감동 중에 산 이들이오, 하나님의 특별한 사명을 수행 할 때는 더욱 큰 감동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을 신앙과 행위의 표준으로 삼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은 거이 2천 년 전에 여러 사람들이 여러 모양으로 쓴 기록입니다. 그러나 진리의 대의(大義)에는 조금도 모순되는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대인이 성경을 읽을 때에 의심하기 쉽습니다. 성경 중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것 같은 부분도 잇다는 것입니다. 성경 중에는 역사와 시와 논문과 잠언 등이 포함되어 있는데 어떻게 이런 것을“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는 각양 방식을 통하여 나타납니다. 역사가 하나님의 진리를 나타내며 사가 또한 하나님의 진리를 나타냅니다.
‘겟세마네의 예수’라는 성화를 보면 한 획이 다 예수 그리스도라고는 할 수 없으나 그 전체가 예수의 얼굴입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라』(딤후4ː13)한 이 말씀도 하나님의 말씀일까 생각할 수 있지만 디모데 후서 전체는 하나님의 계시를 알려주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와 같이 시나 논문이나 그 전체가 다 하나님의 진리를 나타냄으로 그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27.진리는 항상 새롭다

성경은 고대서적(古代書籍)이라는 것입니다. 나날이 진보하는 세상에, 오늘날 같은 원자력시대에 있어서 새로운 서적을 읽을 것이지 어찌 수 천년 전의 옛 책을 읽고 있느냐고 합니다. 그러나 옛 책이라고 해서 버릴 것은 물론 아닙니다. 철학을 연구하는 자는 지금도 플라톤이나 소크라테스를 읽을 것이요, 동양 도덕을 연구하는 자는 지금도 논어(論語)나 맹자(孟子)를 읽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할 것은, 진리는 시간을 초월하여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알키메데스의 원리는 지금도 역시 물리학의 진리요, 피타고라스의 정리(定理)도 역시 기하학상의 진리로서 세상 끝까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이 비록 고대인의 인정과 풍속, 사회제도, 관습 따위의 의복을 입기는 하였으나 하나님 자체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진리가 입은 의복은 변하나 진리 자체는 변치 않습니다. 그리고 진리는 항상 새롭습니다. 20세기의 경이(驚異)라는 B29를 타고 다니는 군인도 회중신약(懷中新約)을 품에 가지고 다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의복과 진리 자체의 관계를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과 현대인>에서

 

 
 


28.성경을 한번은 읽었겠지요?

일찍이 고대 언어학자로 세계적 권위이던 윌슨 박사에게 어떤 대학생 두 사람이 가서 성경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있느냐고 반대이론을 전개하려 하였습니다. 이 때에 윌슨 박사는 조용히“그런데 이 성경을 몇 번이나 읽어보고 그런 결론을 내렸습니까?”하고 반문하였습니다. 두 사람은 다 서로 얼굴을 쳐다볼 뿐 아무런 대답도 없었습니다. 다시 묻기를“그러면 한번은 읽었겠지요?”그래도 대답이 없었습니다. 사실은 한번도 읽지 못하였습니다. 그때에 윌슨 박사는“나는 40년간 매일 밤 열 시부터 새벽 두 시까지 성경을 연구하였소 그리고 나는 이 책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데 조금도 의심이 없소. 우선 두어 번 읽어보고 오시지요”두 학생은 머리를 숙인 체로“고맙습니다”란 한마디를 남기고 나가버렸다고 합니다.

 

 
 


29.성경 한 권으로 절해고도에서 문화의 꽃이 핀 이야기

1790년 영국 정부에서 남양군도의 하나인 피트카린(Pitcarin)섬에 식림(植林)하기 위하여 인부 백여 명을 파송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그 섬에서 선장에 반역하여 작은 배에 선장을 태워죽으라고 대양(大洋)에 띄워 보낸 후 자기들끼리 절해고도(絶海孤島)에서 돌아올 생각도 못하고 토인 여자와 동거하며 생활하였습니다. 죽은 줄 알았던 선장은 다행이 지나가는 배를 만나 영국으로 돌아가 정부에 보고하여 정부는 곧 해군을 파송하여 이들을 체포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 전쟁으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그 후 30년간 전혀 소식이 두절되었습니다. 30년쯤 지나서 어떤 영국배가 그 섬 옆을 지나가다가 들러보니 거기에는 예배당이 있고 존 아담스라는 노인이 있어 그는 그 섬의 목사요 왕이었고 청년들은 모두 흑인이 아니 요 백인도 아닌 반종 들이었습니다. 그에게 과거 30년간의 역사를 들으니 대략 이러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선장을 죽게 만들어 놓고 각각 마음대로 놀았습니다. 자연히 싸움이 일어났습니다. 그 때마다 시비를 가릴 사람이 없어서 대부분이 서로 싸워 죽었다고 합니다. 또 어떤 자가 열대식물의 즙으로 술을 만들어 먹기 시작한 뒤에는 싸움이 더 굉장해 졌습니다. 술을 먹고 놀고 싸우고 죽고 하는 반복이었습니다. 이리하여 백인들은 몇이 남지 않게 되었으나 흑인 여자와이관계로 반종 아이들은 많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어떤 날 이 반역자의 하나인 술 먹고 싸우고 음란하고 살인하던 이 아담스가 수두룩히 모인 반종 아이들을 바라볼 때에‘이 아이들이 크면 역시 우리들처럼 살다가 죽을 테지! 이래서야 될 수 있나!’하는 생각이 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옛날 자기 가정이 연상되었고 떠날 때에 자기 어머니가 주던 성경책이 생각났다고 합니다. 그 책이 지금도 있을까하고 옛 가방을 뒤져보았습니다. 책은 그냥 있었습니다. 아담스는 읽기를 시작하였습니다. 읽고 있던 아담스의 눈에서는 눈물이 마를 줄 몰랐습니다. 이리하여 많은 죄는 회개의 눈물과 함께 사함을 받았습니다. 그 때부터 아담스는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남은 사람들에게도 회개를 권하였습니다. 아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며 글을 가르쳤습니다. 야만의 절해고도에 문화와 종교의 꽃이 핀 것입니다. 오직 성경 한 권의 감화로 말입니다.
이 성경은 현재 987종의 방언으로 번역되어 온 세계인이 읽고 있는데 이로써 죄인은 구주를, 슬픈 자는 위안을, 낙망 자는 소망을, 타락한 자는 재생을, 정치가는 정의를, 철학자는 지혜를, 예술가는 영감을, 도덕가는 윤리를 찾게 했으며, 청년은 어떻게 혈기를 제어할까 를, 노인들은 어떻게 여생을 보낼까를, 죽은 자는 참된 영생을 각각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책이 펴지는 곳에 영적 해방이 있고, 도덕적 해방이 있고, 참된 사회적 해방, 정치적 해방이 있는 것입니다. <성경과 현대인>에서

 

 
 


30.역사의 증거

조선시대(朝鮮時代)의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단종(端宗)과 성삼문(成三門)등의 사육신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수양의 죄악은 영원히 피를 뿌리고 사육신의 충절은 영원히 빛나는 것 이 아닙니까? 이는 무슨 까닭입니까? 살아 계신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31.차알스 베어드의 명답

유명한 역사가 차알스 베어드(Charles A, Beard)에게“당신이 역사를 연구하여 얻은 것이 무엇이오?”라고 물을 때 그는 다음 네 가지를 말하였다고 합니다.
첫째로, 역사를 연구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어떤 것을 멸하려하시면 그것이 개인이건 국가이건 막론하고 권세욕에 날뛰게 함을 알았노라고, 그러므로 권세욕에 날뛰는 개인이나 국가나 민족을 보면 벌서 망할 때가 가까운 줄을 알 수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맷돌이 천천히 돌아가는데 너무 천천히 돌아가 하나님의 맷돌이 있나 없나 의심하게 까지 되지만 하나님의 맷돌은 부드럽게 갈아 결국은 의는 의로 불의는 불의로 골라내고야 마는 것을 알았다고 하였습니다.
셋째로, 벌이 꽃에 가서 꿀을 도적질해 오지만 그렇게 도적질해 옴으로 말미암아 꽃에 열매를 맺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류의 역사를 살펴보면 벌과 같은 강도가 항상 악을 행하지만 이상한 것은 그로 말미암아 기적이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넷째로, 날이 점점 어두워질 때 별을 볼 수 있는데 암흑과 혼란이 깊어 가면 이것이 다지나가기 전에 벌서 소망의 별이 나타날 때가 된 것을 역사는 증명하드라고 말하였다고 합니다.

 

 
 



32.하나님의 맷돌

만약 역사가 맹목적인 물질조건으로만 전개된다면 이렇게 될 수 가없으나 살아 계신 하나님이 그 정의의 맷돌을 가니 비록 돌아가지만 부드럽게 갈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때 하나님의 맷돌이 너무 천천히 돌아가는 까닭에 의심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맷돌은 부단히 부드럽게 갈고 잇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경륜은 이 인류의 역사에 숨김없이 나타나고 잇는 것입니다.

 

 
 



33.콘스탄틴 황제 이야기

고대 로마시대에 가장 악한 경기로 사람과 짐승을 싸우게 하는 경기가 있었습니다. 가장악한 죄수와 영악한 사자나 범과 싸우게 하여 어느 한편이 죽을 때까지 그 참경을 구경하는 것을 낙으로 삼았습니다. 기독교가 로마에 들어가 처음 한 일은 이 처참한 경기를 없애게 하는 것이었으니 콘스탄틴 황제가 믿게 되자 그 때부터 사람과 짐승이 싸우는 경기는 역사에서 말살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신령한 의미의 사람과 짐승의 참혹한 싸움은 오늘 우리의 마음에 계속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각각 손을 가슴에 얹고 내가 이 싸움의 승리자이냐 아니냐, 내가 이 투쟁의 어느 편에서 싸우고 있는 가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사상전의 초점>에서

 

 
 



34.묵도의 위력

참 신앙은 기도 외에도 묵상을 통하여 영향을 얻습니다. 시인 워즈는 말하기를“아름다운 시는 묵상을 통하여 얻으며 성경 읽는 것도 묵상을 통하여서만 은혜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묵상은 나를 이끌어 하나님과 친교 하는 아름다운 가경(佳境)에 들어가게 합니다. 산상복음을 읽는다고 합시다, 그 말씀의 역사적 배경, 그 교훈을 주신 연후, 그 말씀의 뜻, 그 말씀과 우리와의 관계, 심지어 당시 그 말씀을 하시던 예수 님의 표정, 그 말씀을 듣던 군중의 태도와 감정 등까지 묵상하면서 읽으면 나에게 무한한 은혜가 되고 나의 생활에 큰 영양소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로욜라는 말하기를“성경을 읽고 그 모양이 환하게 나타나기까지 묵상하면 우리의 신앙은 점점 가경으로 들어가 생명이 약동하는 참 신앙을 얻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35.흑인 음악가 로렌드 헤이스 이야기

로렌드 헤이스는 유명한 흑인 음악가였습니다. 그의 명성이 전 구라파를 진동할 때 독일 음악계에서는 헤이스를 청하여 독일에 오게 하였습니다. 헤이스의 첫 음악회는 1924년 악성 베에토벤 홀에서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민족의 우월감을 가진 독일인은 흑인 헤이스의 베에토벤 홀 입장을 베토벤 홀에 대한 모독이요 독일인의 수치라고 하였습니다. 신앙의 사람 헤이스였지만 이런 진퇴양란의 어려움을 당할 때 심중에 심한 번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헤이스는 약속한 시간에 베에토벤 홀 스테이지에 기어이 나타났습니다. 터질 듯이 모인 청중은 박수로 환영한 것이 아니라 모욕의 언사로 아우성을 쳤습니다. 이 광경을 본 헤이스는 조용히 손을 맞잡고 피아노 옆에 섰습니다. 5분 10분, 계속하여 헤이스는 묵상에 잠겼습니다. 얼마 안 되어 그칠 줄 모르던 청중의 아우성 소리는 고요해지고 일대 수라장이던 장내는 만뢰구적(萬 俱寂)의 심야(深夜)와 같이 정숙해졌습니다. 숙였던 해이스의 머리는 다시 들려졌고 피아노 소리와 함께 헤이스의 아름다운 음성은 전 홀을 울리기 시작하였습니다. 헤이스의 독창 곡목은〈당신은 평화시요〉였습니다. 헤이스의 묵도의 힘이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피할 수 없는 역경이 있고 난관이 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난국에, 막다른 골목에, 생사의 간두(竿頭)에 처할지라도 우리의 얼굴을 하나님을 향해야 할 것입니다. 참으로 믿고 간구(懇求)하는 기도와 묵상을 주께서는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향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약한 가운데서 강하게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맹 되어 이방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히11:33-34) <신앙의 위력>에서

 

 
 



36.하나님의 경륜

미국 남북전쟁이 거이 끝날 무렵 위대한 지도자 링컨 대통령이 악한에게 암살을 당했을 때 필라델피아의 장로교 제3교회 목사 존 씨가 이 성경 말씀(롬 11:33-36)으로 설교하였습니다. 남북전쟁 당시에는 3개월이면 남방의 반란군을 진압시키고 완전 통일을 할 것으로 알았으나 4년간이라는 오랜 세월을 통하여 비참한 전쟁을 하는 중에 많은 청년이 죽고 국토가 황폐하여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았습니다.
남북 전쟁이 가장 심했던 애트란타 시(市)에 가니 그 곳에 지구형(地球型)으로 지은 큰 건물이 기념관으로 되어있는데 안에 들어가 보면 남북 정쟁 당시의 전화(戰火)로 인한 애트란타 시가(市街)의 처참한 광경이며 큰 화재며 군대(軍隊)의 싸우는 모습, 죽는 모습, 시체 등등의 그림과 조각들 실물(實物)에 근사한 광경을 보고 남북 전쟁의 비참한 옛날을 볼 수 있었으나, 일보밖에 나와 그 시가를 보니 참으로 규모 있고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습니다.
애틀란타 시 에모리 대학 같은 건물은 전부 분홍색 대리석으로 화려하게 웅대하게 지은 것을 볼 때 약 80년간의 변화를 보면서 이 성경 말씀과 같이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 그 오묘한 뜻을 사람이 가히 측량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도 8·15해방 당시에는 우리의 기쁨이 어떠하였으며 우리의 감격, 우리의 희망이 얼마나 양양하였습니까? 그러나 그후 우리의 걸어온 길과 우리가 현재 당하고 있는 이 모든 것을 볼 때에 사람의 생각으로 이해할 수 없으며 또 측량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소원(所願)을 이루어 주시고 하나님이 하락하시면 오늘 이 성전을 건축하는 것 같이 불원한 장래에 우리가 화려한 조국을 건설할 수 있는 것이며 각기 고향에 돌아가 무너진 제단(祭壇)을 다시 수축할 수 있는 기쁜 소망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신의 심연>에서

 

 
 



37.여호와의 증인

이 당파의 이름은 여러 가지인데 우리가 다 여러 가지를 다 알아야 실수가 없겠습니다. 이 당파는 본래 미국에서 된 까닭으로 본래 이름은 다 영어로 되여 있는데 처음에 일어날 때 뭐라고 했느냐 하면‘Watch Tower Tract Society'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우리 한국말로 흔히‘등대사’라고 번역하였고,‘등대사’라고 하는 이름 밑에서 여러 가지 종교잡지와 소책자와 전도 지를 발행했습니다. 그 다음에 당파의 이름은 뭐라고 부르는고 하니 ‘International Bible Study Association’이란 말로 부릅니다.‘국내 성경 연구회’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이름으로도 혹 한국에 소개된 줄 압니다. 그렇지만 특별히 1922년 이후에는 영어로‘Jehovah’s Witnesses’‘여호와의 증인’이라, 이런 이름으로 많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집합소를 왕국회관이라 하기도 합니다. 자 이와 같은 ‘등대사’니‘국제 연구회’니‘여호와의 증인’이니 하는 이런 사람들이 미국의 도처에 돌아다니며 전도지 같은 것도 나누어주고 요새 보면 한국에도 이런 사람들이 특별히 믿는 집집마다 다니면서 이것이 옳다고 선전을 하는 모양입니다. 이 종파의 기원은 1872년에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차알스 럿셀(Charles Russel)이라는 사람이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종파의 이름을 Russelites 라고 부릅니다. 이 럿셀이란 사람은 원래 공부도 별로 하지 못하고 물론 신학은 하지 아니한 사람인데 자기가 특별한 독자적 견지에서 성경을 해석해서 가르친다 하니 많은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나 하고, 좀 새롭게 성경을 해석하는데 들어보자고 하여 여러 사람이 모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사람의 생활에 대해서 길게 말씀들일 필요는 없어도 한동안은 많은 사람들이 따라다니기도 하였지만 그 후에 많은 사람들이 물러갔습니다. 그것은 가정 가운데서 부인과 싸움이 나고 이 부인이 남편의 생활이 아름답지 못하다고 해서 이혼 소송을 하고 이것이 법정의 큰 문제가 되며 이런 문제로 말미암아 이 당파가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이 사람이 죽은 다음에는 루더포오드(Rutherford)라는 사람이 계대(繼代)했습니다. 이 사람은 본래 변호사도 좀하고 판사도 좀 했는데 그래서 흔히‘판사 루더포오드’란 말로 알러졌습니다. 제가 약 20년 전(1920년대)에 미국에서 학생으로 있을 때에 그의 강의를 듣고 그 얼굴을 보았습니다. 이 사람이 소책자를 많이 쓰고 전도를 하였습니다. 1942년에 죽은 다음에는 그 당시 부회장으로 있던 노르(N. H. Knorr)란 사람이 계대를 해서 이 당파를 조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여호와의 증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의 제일 중요한 종지(宗旨)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 사람들이 제일 강조하는 것은 영어로 말하면 데오크라시(Theocracy)곧 신정(神政)이라고 하는 사상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다스린다고 하는 그 사상을 제일 강조한 것입니다. 옛날에는 하나님께서 모두 다스리시고 그리고 다음은 사단이 배반해서 사단이 다스리게 되었고 그런 까닭으로 하나님께서 예수 님을 보내셨는데 그 예수 님께서 첫 번 오셔서는 이를 다 이루지 못하고 이제 다시 오셨다고 가르칩니다. 이렇게 예수 님의 재림이 이미 되었다고 합니다. 예수 님께서 1914년에 이 세상에 오셔서 왕이 되었고 그 다음 1918년에 여호와의 성전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 것이 무슨 말 인지요? 1922년부터는 여호와의 성전에 들어간 이 그리스도께서 모두 충성된 사람을 보내어 여호와의 증인이 되어서 이제는 그리스도가 통치하니 이대로 다 들어와야 산다고 허무한 선전을 합니다.
우리 한국에서 선전하는 사람은 심지어 무슨 말까지 하는고 하니“야! 이제 그리스도께서 다 다스리고 하나님께서 다스리는데 금년내로 38선이 모두 없어지고 독립될 터이니 아무 염려 말고 그저 우리와 함께 성경 연구만 잘하면 복을 받을 터이니 오너라”이렇게 선전하면서 인심을 현혹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의 종지를 자세히 검토하여 보면 먼저 그 심판이 기독교와 다릅니다. 우리 기독교는 성경의 분명한 교훈에 의지해서 삼위 일체의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소위 삼위일체의 하나님의 말씀을 믿습니다. 이 사람들은 성부 성자 성신의 삼위를 부임합니다. 소위 일위일신론을 주장합니다. 일찍이 소너시스라는 사람이 16세기에 Unitarianism을 주장하여 삼위일체론을 부인하였습니다. 이 사람들이 삼위일체를 부인함으로 자연히 그리스도의 신성도 부인합니다. 이 사람들의 기독 관은 실로 가소롭습니다.

 

 
 



38.아리안 주의

주 후 제4세기 니케야 회의 때 큰 문제로 되었던 것이 아리안 사상입니다. 곧 그리스도의 본성이 하나님의 본성과 같으냐, 같지 않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같지 않다고 하는 것이 아리안 사상이요, 같다고 하는 것이 성경의 교훈인데 아리안 이단이 새로운 이름으로 이 세상에 나타나는 것밖에 다른 것이 없습니다. 이 당파는 성신의 인격성을 부인합니다. 성경에 보면 성신은 삼위일체의 한 분으로 성부, 성자와 같이 인격성을 분명히 대명사로 표시하였습니다. 이 사람의 말은, 성신은 한 바람과 같아서 한 신 뿐이고 인격은 없다고 인격성을 부임합니다. 여기 다시 기독교의 근본 진리를 부인합니다. 이미 말씀한 바와 같이 말세론을 왜곡해서 민심을 현혹시킵니다.
그 뿐 아니라, 이들은 현대의 모든 교회를 다 부인합니다. 교회라는 것은 다 사단의 집이라고 다 쓸 때 없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런 의미에서 무 교회주의 자들입니다. 그 사람들은 교회라고는 아니합니다. 그들은 모여서 성경을 연구를 하지 교회는 없다고 합니다. 성경이 분명히 가르치고 예수께서 세우신 교회 자체를 부인합니다. 또 이 사람들은 한 걸음 더 나가서 국가도 부인합니다, 말하자면 무정부주의자들입니다. 투표도 하지 않습니다. 납세도 하지 않습니다. 전쟁에도 안 나간다고 합니다 여러 가지로 어려운 일은 미국 사회에서도 많이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사실을 가르치면서도 그들의 주장은 우리는 곧 성경에 의거해서 가르친다 하면서 그럴듯한 성경만 꼭 뽑아서 여기에 대한 준비를 갖추지 못한 믿는 사람들에게 와서 유혹합니다.
이‘여호와의 증인’에 대해서 연구가 깊은 프리스톤 신학교의 어떤 교수는“이 사람들은 성경을 억지로 종합해 놓더니 요새 와서는 성경을 억지로 번역했다”고 말했습니다. 요새 그 사람들이 새로 성경을 번역하였는데 많은 학자들이 번역한 표준 성경과 완전히 다르게 자기 생각과 비슷하게 성경을 새로 번역했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한 가지 알 것은 성경은 대단히 큰 책입니다. 이 가운데는 역사도 있고 시, 문학도 있고 여러 가지 형태의 문자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가운데 한 자 한 자만 빼면 별의별 말이 다 있습니다. 또 그것을 억지로 모아만 놓으면 무슨 이야기나 성경만 가지고도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다음과 같이 성경구절을 모아놓고 읽으라고 했습니다.
마태 27장 5절『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어라』
누가 10장 37절『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요한 13장 27절『네 할 일을 속히 하라』
성경 구절을 내용에서 뽑아놓고 모아서 무엇을 옳다고 하려 한 것이면 무슨 일이나 다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곡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기에 성경을 바로 해석하려고 하면 성경의 배경을 잘 알아야 합니다. 성경이 씌어진 그 때의 역사, 그 때의 풍속, 그 때의 정치, 그 때의 사상을 모두 충분히 알아 가지고 그 다음에 성경을 전체적으로 공부하여야 합니다. 그런 까닭으로 신학교에서 4년을 공부한다고 할지라도 오히려 부족합니다. 신학의 근본적 수양이 없이는 사람이 성경 구절을 함부로 뽑아서 무엇을 만들려고 하면 심히 위험합니다.
우리 한국 교회에서 성경을 바로 연구하고 바로 깨달아야 하겠는데 오늘날 한국에서는 그와 같은 경향이 점점 적어집니다. 본래 한국교회는 사경(査經)하는 풍속이 있어서‘사경회’라 하면 문자그대로 성경을 서술하고 공부하는 회인데 오늘날 보면 성경을 공부하는 회가 점점 변해서 일시적 감정을 흥분시키는‘부흥회’밖에는 되지 아니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여러 교회에서 하는 것을 보면 성경을 잘 가르칠 목사를 청하지 않고 병을 잘 고친다는 권사, 성경의 조직적인 연구가 없는 장로를 청해서 사경회를 하는 교회가 있음을 많이 봅니다. 그런데 우리가 조심할 것은 물론 잘 가르칠 수도 있지만 그러나 잘못 가르칠 염려도 많다는 사실입니다. 아닌게 아니라 이런 집회에 한 달 계속해서 다니며 한 달이나 잠도 안 자고 하더니 정신 이상이 생겼다는 부인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산에 가서 따로 모여서 기도한다고 하면서 밤새도록 소리치며 춤을 춘다는 말도 들립니다.
시대 영합주의를 경계하여야 합니다. 현대적 바리새주의를 경계해야합니다. 성경 곡해 자를 경계하여 특별히‘여호와의 증인’이라고 하는, 기독교의 중심 진리를 부인하는 이단 사상을 경계해야 되겠습니다. 함부로 영파(靈派)라고 부르며 함부로 떠드는 사람들을 경계해야 합니다.『근신하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벧전 5:8-9) 이와 같이 가르쳤습니다. <근신하라 깨어라>에서

 

 
 



39.아라비아의 속담

아라비아 사람 가운데는 이러한 말이 한 속담처럼 되어 있습니다. 바그다드에 어떤 사람이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을 하나 왕에게 주었습니다. 왕은 이 아들을 대리다가 길렀는데 이 아이가 점점 자라나서 나이 17, 8세쯤 되어서 강에 목욕을 하려 갔다가 그만 물이 크게 나서 강에 떠내려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 이 아이가 죽은 줄 알고 이 왕이 널리 광고하기를 이 아이 죽은 시체를 찾아오는 사람은 누구든지 많은 상금을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여러 사람이 이 시체를 찾으려다가 찾지 못하였는데 7일만에 어떤 사람이 그 바그다드에서도 멀리 강에서 내려가서 어떤 산골짜기를 지나다가 강 가운데 잇는 바위 위에서 이 소년을 만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죽은 시체를 가져오지 않고 산 소년을 데리고 오니까 이 왕이 얼마나 기뻐하겠어요? 그리면서“너 7일 동안이나 물 가운데 있는 바위 위에서 배가 고파서 어떻게 지냈느냐? 물어보니까 이 아이가 하는 말이, 이상하게 바위 위에 가만히 앉았노라니 까 매일 아침저녁으로 떡이 한 덩이씩 떠내려왔더라고 하면서 그 떡을 먹고 살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떡을 한 덩이 가져왔는데 그 떡 뒤에 보니까 떡을 떠내려보낸 사람의 이름이 새겨져 있더랍니다. 모하메트 벤하산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하매트라는 사람을 찾아보라고 하여 어떤 점잖은 사람을 대려왔습니다. 그 사람에게“어찌해서 그렇게 매일 떡을 한 덩어리씩 떠내려보냈는가?”하고 물었습니다. 이 사람 하는 말이,“아, 대왕께서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 나라에 옛날부터 떡을 물위에 던지면 여러 날 후에 다시 찾는다고 하는 속담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것이 사실 맞는지 안 맞는지 알아보려고 하여 금년 정월 1일부터 오늘까지 아침과 저녁에 한 덩이씩 던졌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왕이 너무 기뻐서“너 때문에 우리 귀한 아들이 살았다”고 하여 많은 상금을 주고 다섯 고을을 다스리는 벼슬을 주었다고 하는 사실담이 있다고 합니다.

 

 
 



40.음덕과 보은

이 말씀은 제가 처음에 말씀들인 바와 같이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어떤 기회를 당하든지 좋은 일을 하면 그 당시에는 무슨 기쁨이 없지만 여러 후에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반드시 좋은 결과가 있다는 것, 다시 말하면 보은(報恩)의 원리를 가르치는 말씀인줄 압니다. 이 원리는 옛날부터 우리 동양의 성현들도 가르쳤습니다. 적선지가(積善之家)에 필유여경(必有餘慶)이라고, 선을 쌓는 집안에 반드시 여경(餘慶)이 있고, 음덕(陰德)이 있으면 반드시 양보(陽報)가 있고, 숨어서 덕을 쌓는다고 할지라도 반드시 갚아질 때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41.개미와 비둘기 이야기

개미가 한번은 나무에 올라가. 나뭇잎 위에 뱅뱅 기어다니는데 바람이 불어서 그 잎이 강물에 떨어졌습니다. 그러니까 그 잎이 떠내려가는데 이 개미가 잎 위에 앉은 대로 자꾸 떠내려갑니다. 그냥 바다로 가면 먹을 것도 없이 그 속에서 죽을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상스럽게 비둘기 한 마리가 날아가다가 그 나뭇잎을 물어다가가 뭍에 놓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개미가 살았단 말이지요. 그 후에 한번은 비둘기가 어느 나무에 앉았는데 아마 콩밭을 바라보고 있었겠지요. 마침 포수(砲手)가 비둘기를 잡으려고 조준(照準)을 세워서 방금 방아쇠를 당기는데 무엇이 발꿈치를 따끔 문단 말입니다. 그래서 총알이 빗나갔습니다. 그래 비둘기는 날아갔는데 무엇이 물었나하고 내려다보니 개미 한 마리가 발꿈치를 물었다고 합니다. 그 개미는 아마 비둘기가 구원해 준 개미인 모양입니다.

 

 
 



42.성경 말씀과 하나님의 보은

자연계뿐만 아니고, 우리 인간 사회뿐만 아니고, 미물과 동물뿐만 아니고, 인간의 역사에도 보은의 원리가 움직이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의 말씀에 하나님을 공경하고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복을 수 천대 자손에까지 축복하여 주시지만,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고 하나님 뜻대로 행치 않는 자에게는 벌을 주시고 화(禍)가 삼 사대까지 이른다는 말씀은, 이 원리가 인간의 역사까지 움직인다하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는 말씀이올시다.

 

 
 



43.어느 풍수 이야기

제가 잘 아는 어떤 원로 목사님이 자기의 경험담을 말씀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기 아버지가 옛날에 아주 명당 자리를 잘 잡는 풍수였다 합니다. 그래서 함경도니 경기도니 전라도니 할 것 없이 다니면서 일생동안 풍수 노름을 해서 잘 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에 자기 외아들을 불러 놓고 하는 말이“이 다음에 내가 죽은 후에는 저 선반 위에 있는 풍수에 관한 책들을 불살라 없애라”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 아들은 이상해서“아버지 그 책을 왜 없애야겠습니까?”물으니 아버지 말씀이“내가 이 책을 가지고 아직까지 밥을 벌어먹었다. 그렇지만 내가 너희 한대야 사실을 얘기해야 하지 않겠니? 그 무슨 묏자리를 잘 잡아서 자손이 다음에 복을 받는 것으로 아예 너는 믿지 말아라, 아예 쓸데없는 책이니 저것을 내다가 불살라 버려라”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들이 다시“그럼 아버지 어떻게 하여야 우리 자손들이 복을 받을 수 있습니까?”하고 물으니 “그저 너는 좋은 일을 많이 하여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44.유대인과 폴란드 비행사

지난 1월호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이런 이야기가 실렸습니다. 폴란드의 비행사 로맨 털스키라는 사람이 제2차 대전 전에 불란서 비행학교에 있었는데 나치스 정권이 갑자기 강해지면서 오스트리아를 합병하게 되었습니다. 조국 폴란드도 위험하게 되었으니 불란서에 그대로 있을 것이 아니라 조국에 돌아가서 나라를 위해 일 하겠다는 애국심을 가지고 자기가 소유하는 비행기를 타고 가는 도중에 비행기 기관에 고장이 생겨서 오스트리아의 수도인 비엔나에 잠깐 착륙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비행기 수선을 마치고 유숙하는 호텔에서 비행장으로 나가려고 호텔 문을 나서는데 어떤 사람이 뒤에서 털스키를 밀었습니다. 그는 넘어졌습니다. 그는 성이 나서 보니 민 사람도 돌아다보는데 공포에 가득 찬 얼굴이었습니다 .갑자기 털스키의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저 사람이 필시 유대인인데 나치스의 게스타포(비밀경찰)에게 쫓겨다니는 사람일 것이다’하는 생각이 났습니다. 그래서 왜 미는가 물으니 말은 하지 않고 손으로 뒤를 가리키는데 누가 쫓아온다는 표시였습니다. 자기의 생각이 틀리지 않는 것을 알고 즉시 그 사람을 자기가 있는 방에 대리고 들어가서 물어보니 자기의 추측과 같았습니다. 그 사람은 유대인으로 나치스 게스타포의 유대인 추방에 쫓기어서 다니다 이 털스키가 호텔에서 나갈 때에 마주친 것입니다.
그래서 침대 밑에 모포에 말아서 숨겨 놓았습니다. 얼마 아니 되어 나치스 경찰이 그 방에 들어가서 조사하게 되었으나 무사하게 되었습니다. 털스키는 이 사람에게 자기는 폴란드로 가는데 같이 가겠느냐고 물어보니 제발 그렇게 하여달라고 애원하여 같이 비행장에 나갔습니다. 경찰의 조사와 감시가 심하였고 그 비행기에는 털스키 혼자 탑승하게 되었는 고로 모든 준비를 끝마치고 전송하는 체하다가 출발 직전에 이 유대인을 태우고 떠났습니다. 비행기는 폴란드를 향하여 가고 있었으나 문제가 또 생겼습니다. 가솔린이 떨어져서 부득이하여 국경 가까이 에서 불시착(不時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그 유대인은 그 곳에서 폴란드로 가게하고 가솔린을 보충해서 바르샤바에 도착하니 경찰이 와서 조사를 하면서“그거 이상하다, 반드시 두 시림이 탔겠는데?”하면서 그저 가버렸습니다.
그 유대인은 무사히 국경을 넘었습니다. 그 후 나치스 독일은 마침내 폴란드로 물밀 듯 처 들어가서 폴란드는 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 털스키는 불란서로 망명하여 불란서 비행대에서 독일 군과 싸웠으나 불란서도 함락되어 영국으로 가서 폴란드 비행단장으로 영국공군과 같이 독일 군과 싸우게되어 참 잘 싸웠습니다. 항상 성전(善戰)하여 아주 유명하여져서 매일 신문에도 인기 비행사로 소개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루는 싸우는 중에 잘 싸웠지만 많은 적에게 포위를 당하여 부상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파라슈트로 겨우 생명만은 보존되었으나 뇌(腦)가 상하였습니다. 야전병원에서 치료를 받게 되어 여러 날 치료를 받다가 하루는 누운 체로 눈을 뜨게되어 치료하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으니 그 의사도 이 털스키를 마주 보다가 하는 말이“아, 당신 나를 모르겠소?”하며 물어보았습니다. 조금 생각하다가 “낯이 익은데요, 언젠가 비행기를 같이 타지 않았소?”하고 대답하였습니다.“내가 오스트리아 수도에서 당신에게 구원받은 사람이요”라고 하면서 그후의 경과를 말하는데, 이 사람도 무사히 폴란드에 갔으나 나치스가 폴란드에 침략하여 불란서로 갔다가 또 영국으로 건너갔습니다. 이 사람은 의사로서 특히 뇌수술을 잘하는 유명한 사람인데 스코틀랜드 육군병원에서 근무하는 중 신문에서 이 털스키의 전공(戰功)을 늘 보며 마음으로 축복하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전투 중에 털스키의 머리가 부상을 당하여 생명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그 병원에서 나올 수 없는 신세였으나 이 때야 말로 자기가 은혜를 갚을 때라고 생각하고 특별히 자원해서 털스키가 입원한 병원에 와서 친히 뇌수술을 하여 치료를 했던 것입니다. “양식을 물위에 던지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우리가 어떤 때 낙망할 만하고 어려운 경우를 당합니다. 그런 때라도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씨를 뿌리면 하나님이 적당한 때에 거두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 말씀과 같이 선한 일을 하다가 낙심하지 말 것입니다. 다 거둘 때가 있습니다. 부지런히 선한 일을 하고 남을 도와주되 교회의 믿는 자들에게 먼저 할 것이올시다. <양식을 물위에 던지라>에서

 

 
 



45. 네로의 죽음

로마의 네로 왕은 보통 악한 왕이라고 생각합니다. 베드로와 바울이 그에게 순교 당했습니다. 어머니와 그 부인을 암살한 왕입니다. 네로의 처음이 어떠하였습니까? 로마의 제일 가는 대 선생 시세로에게 배웠고, 어릴 때부터 노래와 시에 능하였고, 예의가 단정해서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받았고, 행정을 어떻게 잘했는지 칭찬이 자자했습니다. 그러나 후에 점점 나빠져서 로마 성을 불질렀습니다. 마지막에 자살로 끝을 마치었습니다.

 

 
 



46.가룟 유다의 죽음

가룟 유다도 보통 나쁜 사람으로 생각하지만, 하여간 12제자 중에서 신임을 받았습니다.
전대(錢帶)를 맡는 회계로 신용이 좋고 시작을 잘 했으나 마지막이 어떠했습니까? 시작하는 것이 귀하나 잘 마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유년 주일 학교를 거처 학습(學習)을 받는 아이가 몇입니까? 학습인 백인 중 세례 받는 이가 몇 분이나 됩니까? 세례 후 끝까지 신앙을 지키고 끝마치는 이가 몇입니까? 믿음으로 잘 마치는 것이 귀합니다. 선한 싸움을 잘 싸우고 믿음으로이기는 것이 귀합니다.

 

 
 



47.폴리캅의 죽음

요한 의 제자 중의 한 사람인 서바나 교회 교부(敎父) 폴리캅이 큰 핍박이 일어나서 지방관리에게 불러나갔을 때에 나이가 어떻게 많은지 불쌍히 여겨서 예수를 안 믿겠노라고 한 마디만 하면 놓아주겠다고 하니, 그의 대답하는 말이“86년 동안 내가 내 주 예수를 믿고 은혜를 받았는데 내가 내 주를 어떻게 배반하겠는가?”하고 순교하였습니다. 잘 마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선한 싸움을 잘 싸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직분도 그렇습니다. 직분을 처음으로 맞는 것도 귀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귀한 것은 직분을 잘 감당해서 마치는 것, 내가 받은 사명과 직분을 잘 마치는 것이 더 귀중합니다.

 

 
 



48.크렌모 감독의 죽음

영국의 종교개혁자 크렌모 감독은 헨리 8세 때에 구교를 반대하고 종교개혁을 하였지만 다음 왕 메리 여왕은 카톨릭교인이어서 신교를 없이하고 구교로 국교를 삼으려고 할 때에 이 크렌모 감독에게 구교로 돌아오면 고직(高職)을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불응하자 투옥되었습니다. 이 감독은 감옥에서 오래 고생하고 있는 중 어떤 문서에 사인만 하면 무사히 석방하겠다고 하자 그 조건이 자기의 주장과 비슷함으로 사인하였습니다. 다음 재판 때 검사 측에서“그 대는 구교로 돌아오겠다고 하였다”고 할 때 이 감독은 일어나서“내가 사인한 그 성명서는 인정할 수 없다. 내 양심으로 그 성명서를 취소한다”고 하여 결국은 사형을 받게 되었습니다. 화형을 받게되어 불에 활활 타 올라올 때에 그는 먼저 자기 손가락을 내밀어 태우면서“손가락이 그 성명서에 사인을 했으니”하며 순교하였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마치는 것이 어떻게 귀한 것을 절실히 느끼고 있습니다. <유종의 은혜>에서

 

 
 



49.새로운 피조물

30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로스엔젤리스에 5일간 있었는데 한인(韓人)이 많아 음식도 한국요리를 먹었습니다. 그 부근의 할리우드는 미국의 영화 중심지로 유명한 곳입니다. 말하자면 죄악의 도시인데 어떤 집회에 초청 받아 가보니 개인의 집에 약 50인이 모여 있었습니다. 전부 배우인데 아주 인사성이 밝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먼저 찬송을 배우고 성경을 배우고 말씀을 듣고 하면서 각각 2주일 동안의 경과보고 즉 신앙 간증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집회는 여간 경건하지 않았습니다.
그 집회를 처음시작한 사람은 텔레비전과 영화계의 유명한 3인조 가수 중의 한 사람인 팀 스펜서라고 합니다. 그는 술 마시는 습관이 있어서 아주 중독 되어 버렸고 명성과 돈이 많으나 그 생활에서 아주 권태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영(靈)의 만족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그만 염세 세상에 휩쓸려 한 번은 피스톨을 가지고 어떤 여관에 가서 자살하려고 할 때에 유년 주일학교에 다니던 때의 생각이 일어나며 하나님 생각이 갑자기 나서 죽는 것은 언제든지 죽을 수 있는 것이니 하나님께 기도를 한 번 할 생각이 났다고 합니다.“나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 이 술을 끊게 하여 주소서, 나의 길을 인도하여 주소서”그리고 그 날 저녁을 평안히 잤다고 합니다.
이튿날 집에 와서는 항상 마시던 술도 마시지 않고 단 음식만 계속하여 먹으며 점잖은 생활을 하므로 부인이 이상히 여겼다고 합니다. 그 다음부터 아주 술 마시기가 싫어졌고 이전 생활을 다 잊어버리고 온전히 변해서 새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기의 동료들에게 전도하기를 시작해서 신자를 얻어 80명이나 되는 그 단체(헐리우드 크리스천 그룹)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과거의 배우 생활을 청산하고 영화만 제작한다고 합니다.“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5)
하나님의 권능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동양, 서양이 다름없이 계속됩니다. 갑자기 실생활(實生活)이 변하지 못하지만 심령이 완전히 변합니다. 우리가 믿는 가정에서 자라나서 오늘까지 신앙생활을 계속한다고 하지만, 언제든지 반드시 한 번은 이 중생(重生)의 은혜를 받아야합니다. < 새로운 피조물>에서

 

 
 



50.스페인의 귀족기사 로욜라의 결심

16세기 구교 발전에 큰 공헌을 한 스페인의 귀족의 아들 로욜라는 일찍이 유명한 기사(騎士)가 되기를 원하였습니다. 불란서와 싸울 때에 다리가 상하여 군인의 소망은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앞으로는 그리스도의 정병으로 살기를 결심하였습니다. 그래서 자기 의 칼을 제단에 바치고 일생을 그리스도의 정병이 되겠다고 맹세하였습니다. 일생을 주를 위해서 열심히 충성을 다해서 일 했습니다.
구세군(救世軍)의 원조 윌리암 부우드도 역시 그렇습니다. 십자가의 정병으로 살겠다고
맹세하고 군복을 입고 일생을 그리스도의 군인으로 살았습니다. 이 죄악이 관영하고 기독교를 반대하는 세력이 사상적으로, 무력적으로 맹렬히 일어나는 이 때에 주께서는 십자가의 정병을 부르십니다. 이 부르심에 대답하고 일어날 정병이 과연 몇 명이나 되십니까? <그리스도의 정병이 되라>에서

 

 
 



51.스미드 목사의 기도

캐나다 토론토에 있는 군중 교회(Peoples Church)의 목사인 스미드 박사는 1927년에 그의 제38회 생일을 당하는 날 하나님께 다음과 같이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1, 주님의 마음과 꼭 같은 마음을 가지는 사람이 되게 하여 주소서.
2, 주님과 동행하게 하여주소서.
3, 저는 오늘까지 하나님의 일을 하고 복음을 전하나 그러나 내 노력은 분산되었으니 이제부터는 백 퍼센트 하나님만 위하여 충성하게 하여 주소서.
보십시오! 그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셨습니다. 그의 목회 하는 “군중 교회”는 지금은 4, 5천명이 모이는 대 교회이며 300명의 외지 선교사를 그 한 교회에서 파송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교회의 목표가 금년 (1954)중으로 4백 명의 외지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이라 합니다.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 <새해에 새 사람>에서

 

 
 



52.사망의 골짜기’의 신기루

미국 서 남방 애리조나 주에서 캘리포니아로 가는 데 ‘사막의 골짜기’가 있습니다. 제가 옛날에 그 위를 비행기로 지나가면서 감개가 깊었습니다. 이 곳이 어떻게 사망의 골짜기란 이름을 얻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다른 것이 아니고 지금부터 근 100수십 년 전에 기차도 없고 자동차도 없고 비행기도 없을 때 캘리포니아 주에 금이 많이 났습니다. 그래서 동방에 사는 사람이 금을 캐려 마차를 타고 그 남방 길을 걸어서 그 골짜기로 들어왔던 사람이 많이 죽었습니다. 그 골짜기는 전연 사막지대입니다. 별로 비가 오지 않음으로 물이 없어서 그만 그 골짜기를 지나가다가 목말라 죽은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 물이 없는 줄 알면서도 왜 그 길로 갑니까? 그곳이 이상한 것은 그 골짜기에는 신기루란 현상이 많이 일어납니다.
여러분, 아마 신기루란 말은 다 들었을 줄 압니다. 아주 건조한 지대에 있는 것인데 저도 보지 못했다가 지나간 여름에 아주 건조한 텍사스 지방에 자동차를 타고 지나가면서 보았는데 자동차 앞으로 먼 길에는 새파란 물 같은 것이 보이고 멀리 집이 있으며 호수나 그 집의 절반쯤 올라온 것처럼 보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골짜기를 지나갈 떼에 저기 가면 좋은 물이 있으니까 물 있는 곳을 따라가자고 하고는 달려가면 물은 없고 그 다음에도 없고, 그리해서 많은 사람들이 목말라 죽었습니다.
그와 같이 시험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을 속입니다. 우리가 속아서 시험에 빠집니다. 그런 까닭으로 우리가 깨어 있어야 되겠습니다. 이제 몇 가지로 시험에 빠지지 않기 위하여 조심할 것을 생각하겠습니다.
첫째로, 우리가 항상 기억할 것은 우리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심히 약하다고 하는 사실이올시다. 스스로 섰다고 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하는 것이 그 말이올시다. 시험에는 강한 사람이 없습니다. 베드로가 담대히 예수 님 앞에서“모든 사람이 주님을 모른다고 할지라도 저는 절대로 주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겠습니다. 주님을 저버리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했지마는 정작 시험장소에 갔을 때에는 베드로는 그만 약해졌습니다. 세 번이나 주를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인생은 죄에 대하여, 시험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약할뿐더러 또한 사람은 그 육신 가운데 약한 부분이 있음과 같이, 가량 예를 들면 어떤 이는 특별히 폐(肺)가 약하고, 어떤 이는 심장이 약하고, 어떤 이는 위가 약한 것 같이, 우리의 성격 가운데도 어떤 사람은 특별히 이 방면에 약하고 어떤 사람은 저 방면에 약해서 누구든지 약점 한 가지가 있는 것입니다. 에서 같은 사람은 특별히 먹는 데 약점이 있는가 봅니다. 노아 같은 사람은 특별히 술 같은 것을 마시는 데 약점이 있었는가 봅니다. 솔로몬 같은 사람은 특히 정욕 방면에 약점이 있었는가 봅니다. 이와 같이 사람 사람마다 특별히 자기 약점이 있습니다.
서양 속담에“사람마다 지옥에 내려가는 사닥다리가 각각 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마다 각각 어떤 점에서는 조금 잘못하면 지옥으로 미끄러져서 내려가는 사다리를 가지고 다니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방면에 특별히 약점이 있는가 스스로 살피어 특별히 조심해서 유혹에 들지 않도록 힘을 써야 되겠습니다.

 

 
 



53.플라톤의 제자

플라톤의 제자 한 사람에 대하여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바다에 배를 띄워서 놀기를 좋아하는 사람인데 한 번은 베를 타고 바다에 가서 놀다가 갑자기 풍랑을 만나서 배가 다 깨어져 죽을 뻔하고 겨우 살아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자기 집이 바로 바닷가에 있었는데 바닷가로 향하는 창을 다 막고 담벽을 만들고 말았습니다. 어떤 친구가 와서 묻는 말이 좋은 바다의 경치를 내다 볼 수 있는 창문들을 왜 이렇게 다 막았느냐고 하였습니다. 그 때 이 사람이 하는 말이“내가 지난번 배를 타고 나갔다가 꼭 죽을 번하고 살아왔는데 내가 다음부터는 배타지 않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 창을 그냥 두었다가 어떤 따뜻한 봄날 바다 가 잔잔한 때에 이 창을 내다보면 내 마음속에 다시 이 바다를 나갈 생각이 나고 배를 탈 생각이 나게되면 다시 나갔다가 그 다음에 내가 어떻게 될지 몰라서 아예 내가 바다 가 보이는 이 창을 막은 것입니다”하였습니다.
사람마다 유혹의 창이 있습니다. 사람마다 시험의 창이 있습니다. 이 창을 내다보면 우리가 언제 어떤 시험에 빠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이 약점, 시험의 창을 미리 알아서 아예 그 방면을 단단히 막아버리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그 다음에는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 갈 때에 언제든지 나를 유혹으로 인도 할 수 잇는 모든 것을 아예 미리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를 유혹으로 인도하는 이가 있습니까? 그 친구를 멀리하세요, 우리를 유혹으로 인도한 책자가 있습니까? 그 책을 멀리하세요, 우리를 유혹으로 인도하는 사업이 있습니까? 그 사업을 멀리하세요, 우리를 유혹으로 인도하는 오락이 있습니까? 그 오락을 멀리하세요, 우리를 유혹으로 인도하는 집이 있습니까? 그 집을 멀리하세요, 무엇이든지 우리를 유혹으로 인도하는 것을 멀리해야 됩니다.

 

 
 



54.어떤 수도사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 어떤 수도사가 산에 가서 조용히 도를 닦다가 세상구경이 너무 간절하여 내려 왔다고 합니다. 내려와서는 맨 먼저 세상 사람들이 오락으로 즐기는 극장에 연극 구경을 가서 앉았다고 합니다. 연극 장에 가만히 들어가 앉아서 세상사람들이 즐기는 재미를 볼 때에 수도사의 마음 가운데“야 ! 거 세상 재미가 괜찮구나”하고 얼른 시험이 마음 가운데 들어온단 말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수도사인지라 스스로 마귀에게 이러한 문답을 했다고 합니다.“오 ! 이놈, 마귀야, 네가 아무리 사람을 잘 시험을 하기로 서니 어떻게 여러 십 년 수도한 나 같은 사람을 시험하느냐?”하고 마귀에게 말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마귀가 대답하는 말이“당신 그렇게 여러 십 년 동안 수도를 했으면서 어찌하여 내 영토 속에 들어왔습니까?”연극 구경은 흔히 마귀의 영토입니다. 어떤 때는 동무가 마귀의 영토가 되는 때도 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마귀의 영토를 가까이 할 필요가 없습니다. 낚시질을 해 본 사람은 다 압니다. 낚시를 던지면 낚시 미끼주위로 뱅뱅 도는 물고기는 아무래도 위험합니다. 뭣 하려고 낚시 가까이, 미끼 가까이 뱅뱅 돌 필요가 있습니까? 마귀의 영토를 멀리하세요.
그러나 어떤 때에 아무리 이런 곳을 멀리하려고 하지만 부득이 한 사정으로 이런 곳에라도 있을 수밖에 없는 때가 있습니다. 그런 때에는 이것이 이렇게 위험한 것을 미리 깨달아서 그야말로 정신을 바싹 차려서 조심해야 합니다. <시험에 들까 조심하라>에서

 

 
 



55.그리스도인의 첫 서명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우리 믿는 이들의 첫째 사명입니다. 목사님 사명도 이 복음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장로의 사명도 이 복음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집사의 사명도 이 복음을 전파하는데 있습니다. 우리가 주일학교에서 유년 부를 맡는 것도 이 복음을 전파해서 아이들의 생명을 구원하기 위한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들에 대한 책임이 중한 것은 그 자식들의 생명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친구로서의 의무가 많으나 첫째 되는 의무는 친구의 생명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누구든지 주를 믿는 자들의 첫째 사명, 세상에 살아 있는 최대의 목적은 온 천하에 가서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는 주님의 지상명령을 순종해서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56.어느 목사

이런 사실이 있습니다. 미국의 북방 어느 장로교회에 어떤 목사가 처음으로 취임해서 시무 하는데 근 1년 동안 이 목사가 아무리 애쓰고 외칠지라도 그 교회가 너무 냉랭하고 1년이 다 지나가는데 단 한 사람도 새로이 나와서 믿는 이가 없었습니다. 이 목사가 혼자 많이 애쓰고 기도하다가 한 번은 당회가 모여서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제가 이 교회에 와서 벌써 1년이 되었고 그 동안 제가 아무리 애쓰고 외칠지라도 조금도 우리 교회는 부흥의 빛이 없고 생명의 빛을 보고 구원을 얻는 심령이 하나도 없으니 어떻게 그냥 이 교회에 목사 노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사면 할 수밖에 없습니다”그러니까 여러 장로들이 깜짝 놀라면서“그거 무슨 말씀입니까? 목사님의 설교는 건덕상(建德上) 유익한 설교를 많이 하시고 우리가 은혜 많이 받았는데 이것이 무슨 말씀입니까?”하고 반문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목사는 이렇게 다시 말 했습니다.“제 설교가 덕을 세운다는 것은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제 생각은 저만 사면할 것이 아니라 여러 장로님도 사면하여야 할 줄 압니다. 사실 여러 장로님도 주일날 아침에는 대부분 나오지만 저녁예배는 잘 안 나오는 줄 압니다. 삼일 기도회 같은 때는 더 적게나옵니다. 이왕 이렇게 목사 건 장로 건 책임을 못 감당할 바에는 공연히 맡아 있을 필요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다 사면하고 새 사람들이 들어와서 맡아 일을 보면 이 교회는 부흥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 가운데 제일 나이가 많은 원로 장로님에게“장로님, 이 교회의 장로가 되신 후 몇 사람이나 인도해서 새로 구원하신 일이 있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 때에 그 장로가 머리를 숙이면서 하는 말이“목사님 잘 기억이 안 납니다.”그 다음 장로도“한 사람도 없습니다.”다 물어도 장로 가운데 한 사람도 개인 전도해서 구원한 사람은 하나도 없단 말입니다. 그 때 그 목사가“자, 이것 보시오, 주님께서 우리에게 분부하신 말씀은 온 천하에 다니면서 복음을 전파하라고 명령하셨는데 우리가 교회의 장로가 되어서 이 명령을 순복(順服)치 않으면은 어떻게 장로님의 책임을 감당할 수 있습니까?”하고 말했습니다. 그 때에 모든 장로들이 함께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고 회개하고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우리가 먼저 이 명령에 순종하자”고 의논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이튿날 아침 큰 상점의 주인이 되는 그 원로 장로가 상점에 나가자마자 이어 자기 아래에 말하자면 총무과장 비슷한 책임을 맡은 사람을 조용히 청해서 조금 할 말이 있으니 잠깐 들어오라고 말하였습니다. 10여 년 동안 자기와 같이 일 하면서 다른 이야기는 다 하면서도 한 번도 전도한 일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 때 이 장로가 이 청년을 보고하는 말이“나 참 대단히 미안한 말씀드릴 수밖에 없소”하고“내가 당신과 10여 년 동안 같이 일 하면서 모든 것은 다 이야기했으나 당신 영혼에 대해서 한마디도 못하고 있었으니 이처럼 장로의 이름을 가지고 부끄러운 사람이 없습니다. 내가 이제 깨달아서 제일 중요한 것은 우리가 온 천하를 얻고도 제 생명을 잃으면 아무 것도 소용이 없다고 하셨는데 우리가 이렇게 장사하면서 돈 벌면 뭘 합니까? 우리 영혼을 구원함이 제일 중요한데 예수를 진실히 믿습니까?”고 말했습니다. 그 사람은“제가 어릴 때 다녔으나 오랜 동안 신앙생활을 못했습니다.”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장로의 간절한 권고에 못 이겨 먼저 회개하였다고 합니다. 그와 같이하여 이 때부터 이 교회가 갑자기 새로운 은혜를 입어 온 교회가 큰 부흥의 축복을 받았다고 합니다.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우리 믿는 이들의 첫째 사명입니다.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에서

 

 
 



57.죽어 가는 사람도 살리고 자기도 살게된 선다싱

인도에서 성자라고 이름을 듣던 선다싱의 전기 가운데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한번은 인도지방 히말라야 산맥 남록(南麓)의 산길을 어떤 추운 겨울 날 걸어갔습니다. 눈보라가 치고 날은 심히 추운데 눈길을 얼마 걸어가다 보니까 어떤 사람이 길 가에 넘어져서 죽은 모양입니다. 가만히 들어다 보니까 손도 발도 얼굴도 다 얼었는데 가슴을 짚어 보니까 아직 온기가 있고 숨도 아직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마침 어떤 사람이 길 가로 지나갈 때에 신다싱이 그 사람을 보고하는 말이“이 사람을 그냥 내버려두면 아주 얼어 죽어버리겠으니 우리가 이 사람을 업고서 같이 가봅시다”하였습니다. 지나가든 사람이“나도 죽게 되었는데 언제 다른 사람 돌아볼 새가 있습니까?” 하면서 그냥 지나갔다고 합니다.
선다싱은 차마 그 사람을 그냥 들 수 없어서 약한 몸이지만 거이 얼어죽어 가는 사람을 업고 그 눈보라 치는 산길을 걸어서 고개를 넘어가되 몇 번 넘어지면서 그 사람과 그야말로 싸우면서 그 고개를 넘어 갔다고 합니다. 그러나 얼어죽지 아니하고 그 사람도 힘쓰고 자기도 힘쓰는 가운데 피차의 온기가 나서 두 사람이 겨우 생명을 보존해서 그 산을 거이 다 넘어갔습니다.
거이 다 넘어가다 보니까 어떤 사람이 또 하나 길가에 넘어져 있었습니다. 자세히 보니까 손도 얼고 발도 얼고 다 얼어서 아주 죽었는데 가만히 의복 입은 것을 보니까 바로 얼마 전에 혼자 살겠다고 먼저 지나가던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힘쓰고 애쓰던 선다싱은 죽어 가는 사람을 구원했을 뿐더러 자기 생명도 구원하였습니다. 남이야 죽거나 말거나 자기 혼자 살겠다고 지나갔던 다른 사람은 자기 생명도 구하지 못하고 죽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이 꼭 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천성을 향하여 나가는 하늘 길가에는 죽어서 넘어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 사람 가운데 몇 사람이라도 구원해서 같이 하늘 길을 가려고 애쓰는 사람은 그 사람들을 구원할뿐더러 자기도 구원받습니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이 죽든지 말든지 나 혼자만 믿고 지나가려다가 얼마 가지 못해서 세상의 무서운 유혹의 바람과 여러 가지 시험에 얼어죽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구하려고 애쓰면 자연히 내가 나를 구원할 수 있습니다.

 

 
 



58.어느 목사의 일기

몇 십 년 전에 스코틀랜드 앤워드라는 도시에서 한 목사가 자기의 일기를 남기고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일기를 읽고 지금 은혜를 받은 사람이 많은데 그 일기 가운데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아 ! 앤워드에 있는 영혼들을 내가 하나님 오른손 곁에서 만나게 되는 날 임마누엘의 땅에서 나의 하늘은 두 하늘이 될 것이다”무슨 말인고 하니 자기가 전도하고 목회하고 기르든 앤워드의 정든 심령 하나 하나를 하나님 오른손 곁에 가서 만나게 될 날을 생각하면 그는 너무 기뻐서 천당에 한번 가지 않고서도 두 번 간 것보다 더 기쁘다고 한 말이었습니다.
여러분 이 말을 오늘 바꾸어서 말한다고 하면 과연 오늘 서울에 있는 우리 영락교회에 출입하든 여러분의 영혼 하나 하나를 제가 이 다음 하나님의 오른손 옆에 가서 만나게 되는 날이면 임마누엘의 땅에서 제 하늘은 두 하늘이 되고도 남을 줄 압니다. 이에서 더 큰 기쁨이 없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3천 명에게 전도를 한 후에 하늘 나라에 가서 3천명의 구원된 영혼을 만날 때에 베드로의 마음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그러나 한 가지 더 기억하세요. 베드로처럼 3천명은 구원하지 못하겠지만, 자기의 형 베드로를 예수 님께로 인도해 온 안드레가 하나님의 오른손 옆에 가서 자기 형 베드로를 만날 때 안드레의 마음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59.무디를 구원한 킴볼

무디 같은 사람은 수십만 명의 영혼을 구원한 줄 압니다. 그이가 많은 영혼을 하나님 앞에 가서 만날 때 그의 마음의 기쁨은 말할 수 없겠지요. 하지만 본래 무디가 믿음이 없이 어떤 양화점에서 양화 직공으로 있을 때에 어떤 잘 믿는 무명 청년 하나가 아무래도 저 청년의 장래가 유망한데 내가 전도해야겠다고 생각해서 그 양화점에 들어갔습니다.“여보시오 양화만 만들 것이 아니라 예배당에 나와서 주의 일 좀하고 잘 믿고 구원의 길을 갑시다.”고 잘 권면해서 그 사람을 구원한 킴볼 ! 이 사람이 하나님 오른손 옆에 가서 자기의 인도로 구원을 받은 무디를 만날 때 이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60.왈츠의 그림

아마 여러분은 왈츠라고 하는 사람의 소망에 대한 유명한 그림을 거이 다 보신 줄 압니다. 둥근 지구 위에 어떤 젊은 여인이 홀로 외롭게 앉았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그 눈은 수건으로 싸맸습니다. 보지 못합니다. 그 가슴에 비파를 안고 있는데 자세히 살펴보면 그 비파의 줄이 거이 다 끊어wu 있습니다. 오직 한 줄만 남아 있습니다. 뒤에는 희미한 별 하나만 반짝이고 있습니다. 이 여인은 우주에 외로이 홀로 앉아 눈을 싸맸으니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오직 남은 줄 하나만 가지고 이 여자가 아름다운 음악을 타는 것입니다. 그 줄은 소망의 줄이올시다. 그 별은 소망의 별이올시다. 이 그림이 많은 사람을 구원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살아갈 때에 여러 가지 줄이 끊어집니다. 사랑하는 이가 세상을 떠나기도 하고 사업이 실패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 믿었던 줄이 끊어집니다. 하지마는 소망의 줄 하나만 우리가 그냥 붙잡을 수 있다고 하면 그 소망의 줄 하나로써 능이 모든 것을 이기고 살아 갈 수 있다고 하는 말입니다.
그런 까닭으로 성경에는 소망을 가리켜서 영혼의 닻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사람의 심령이 풍파 높은 대해를 지나갈 때에 어떤 때에는 큰 풍파를 만납니다. 하지만 우리 생명의 닻줄을 깊은 바다 속에 붙잡아 매었다고 한다면 우리 풍파가 높다고 할지라도 우리 심령의 배는 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깊은 곳에 매인 닻줄은 소망의 닻줄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심령의 생활에 있어서 이 소망의 줄이 끊어진다면 어떠한 유혹의 바람과 시험의 풍파에 휩쓸려가고 우리의 생활이 암초에 부딪쳐서 파선을 당할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으로 우리는 소망으로 살아야 하고 또한 소망이 있어야 삽니다.

 

 
 
 

61.어느 미군의 이야기

작년(1954) 어느 날 어떤 미군과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정말 세계 정치가들이 하는 일을 우리 같은 범인은 알 수 없다”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습니다.“우리가 2차 대전 때는 다 선전하기를 추축(樞軸)국인 독일, 이태리, 그리고 일본 세나라만 때려부수면 온 세계에 평화가 오겠다고 해서 전 세계가 다 들어 붙어서 특별히 쏘련 과도 연합하고 중국과도 연합해서 이 추축국을 때려부수었습니다. 그러면 으레 평화가 올 줄 알았는데 평화는 오지 아니하고 10년도 못 가서 그 보다도 더 큰 원수가 나타났습니다.
특별히 이상한 것은 전에 손잡고 함께 싸우던 그 사람들을 향해서 다시 싸울 수 박게 없다는 것입니다. 한가지 더 이상한 것은 우리가 손잡고 때려부수었던 독일이 이제는 재무장해야 되겠다, 일본도 재무장해야 되겠다, 이태리도 재무장해야 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싸워서 때려 없애려던 이 사람들과 함께 손잡고 전에 우리와 같이 싸우던 중국 사람이나 소련 사람과 싸우게 되었습니다. 자, 이렇게 계속되다 보면, 우리가 이렇게 해서 중국과 소련을 때려 없애버렸지만 그 다음에는 전쟁이 없다고 누가 보장하겠습니까?”
여러분 이 미군의 마음을 통해 20세기에 사는 청년들의 깊은 환멸의 비애를 엿볼 수 있지 않습니까? 그것이 그 청년 한 사람만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청년들이 오늘날 그와 같은 환멸의 비애에 쌓인 줄 압니다. 사람의 지혜를 믿을 수 없습니다. 정치가의 정책도 믿을 수 없습니다. 환멸의 비애뿐입니다.

 

 
 



62.광복 전의 우리 한국 청년들의 생각

우리 한국 청년들은 모두 어떻게 생각했는고 하니 일본만 망하면 우리 한국이 잘되리라고 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8·15에 일본이 망하고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릅니다. 어떤 장로님은 너무나 기쁜 나머지 뇌일혈이 생겨서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그렇게 다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해방은 되었지만 난데없는 38선이 생겼습니다. 또 6·25사변이 생겼습니다. 그렇게 해서 온 세계 유엔군이 다 와서 한국을 도와 싸워주었습니다. 사람들은 6·25사변이 나서 많은 파괴를 당하고 사람도 죽었지만 이 기회에 38선이 없어질 터이니 괜찮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38선은 없어지지 않고 겨우 휴전이 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오늘날 전 세계 인류들은 불안과 공포와 환멸과 절망의 깊은 못에서 헤매고 있습니다. 아무리 세상을 둘러보고 아무리 땅을 내려다보아야 인류의 소망이 보이지 아니합니다. 인류의 소망이 어디에서 오겠습니까? 이제라도 우리는 땅만 보지 말고 사람이 하는 일만 보지 말고 눈을 들어 산을 보시오. 우리가 눈을 들어 하늘을 볼 때에 별을 볼 수 있고 소망의 새벽 별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소망의 나라>에서

 

 
 



63.민족과 국가도 귀하지만

민족은 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보다 먼저 민족지상주의를 부르짖은 자와 부르짖은 민족의 마지막은 다 같은 운명에 빠집니다. 이태리의 뭇솔리니는 일찍이 일어나서 이태리 청년들에게 하는 말이 이태리 사람들이 제일 먼저 구할 것은 옛날 한 번 없어진 로마 제국을 다시 건설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국가가 지상이라고 하며 이태리 청년들은 먼저 국가를 구하자고 외쳤습니다. 많은 이태리 청년들이 그 부름을 따라서 갔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운명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국가가 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보다 먼저 국가를 찾으면 이와 같이 동일한 운명에 빠집니다.

칼 마르크스, 스탈린, 레닌, 이런 사람들이 일어나서 여러 대중들을 향해서 부르짖은 말이, 이 세상에서 제일 먼저 찾아야 할 것은 먹는 것 곧 빵이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이것은 예수 님께서 광야에서 시험받으실 때 이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고 하며 떡이 제일 귀하다고 한 마귀의 말과 꼭 같은 말입니다. 떡만 먼저 구하는 사람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지도 우리는 머지 않아 볼 것입니다. 과학이 귀합니다. 과학을 배워야 합니다. 그러나 과학을 먼저 구한다면, 우리에게 혜택을 못 가져옵니다. 지식과 예술도 그러합니다.
이런 모든 것을 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제일 먼저 구할 것이 있습니다. 여기 예수 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은 우리가 제일 먼저 구할 것이 하나 잇는데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마 6:33)고 하였습니다.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다 우리에게 더하여 주시리라고 하십니다.
이 말은 너무 유명해서 제가 반복할 필요가 없는 줄 생각하지만 너무 적절하니까 말합니다. 전에 있던 일이라고 하는데 아르헨티나의 대통령이 한번은 미국대사를 만나서 한 말이라고 합니다. 그의 말이 당신의 조상들은 하나님을 찾기 위하여 이 북미에 왔다가 하나님도 찾았을 뿐더러 금도 찾고 물질의 축복을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계속해서 하는 말이 그러나 우리 아르헨티나의 경우, 우리 조상의 대부분이이 금을 찾아 돈을 모으기 위해서 아르헨티나에 이주해 왔는데 지금 보니 돈도 찾지 못하고 하나님도 찾지 못했다는 말을 하였다고 합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합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반드시 모든 다른 축복도 더하여 주실 것입니다. <먼저 그 나라와 그의 의를>에서

 

 
 



64.리빙스톤이 만난 말씀

아프리카에 새로 개척 전도를 한 리빙스톤이 읽은 유명한 성경 구절이 있지 않습니까? 그것은 다른 성경 구절이 아니고 마태복음 28장 마지막 절이 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말씀하시기를『온 하늘과 땅의 권세를 내게 주셨는데 너희들은 온 천하에 가서 복음을 전파하고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모든 사람을 가르치라』고 하면서 하시는 말씀이『또 내가 항상 너희와 같이 있으리라』하였습니다.
리빙스톤이 이 성경을 읽을 떼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예수 님께서는 세상의 어떤 사람보다도 제일 진실한 사람이다. 예수 님은 거짓말할 수 없어, 예수 님은 글자 그대로 신사야, 세상의 다른 사람은 다 거짓말하되 예수 님께서는 거짓말할 수 없어, 그런 까닭에 나는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믿겠다, 내가 아프리카에 가면 주님께서 나와 같이 계실 것이 분명하다’ 이 확신 가운데서 담대히 고국을 등지고 암흑의 대륙에 가서 일생을 거의 외로운 가운데서 고독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혼자 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같이 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동행했습니다. 격려했습니다. 힘 주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이 기뿐 부활 주일 아침에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부활하신 주를 만나라>에서

 

 
 



65.공포심을 없애는 비결

공포심은 신경계통의 병을 유발-공포심이 우리 육체적 생활 곧 건강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해로운지 우리가 지금은 알게될 것이다. 병이 일어나는 것은 반드시 세균으로만 오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부상당해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소위 기능적 질병(機能的疾病)이라 하여 여러 가지 심리적 관계로 우리에게 병이 오는데 특별히 신경계통의 병 소화기 계통의 병, 심장병 같은 것은 공포심에 싸여서 근심과 염려로 세월을 보낼 떼에 이러한 병이 자연히 우리에게 온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두려운 가운데서 근심과 염려로 얼마동안 시일을 보내게 되면 그 사람이 신경이 쇠약해지고, 마지막에 점점 예민해지다가 심하면 히스테리 같은 상태로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 공포심과 염려가 특별히 소화기병에 관계가 있다고 허는 것은 아마 여러분의 체험으로 아시고 여러분의 관찰로도 많이 아실 줄 압니다. 여러 과학자들의 조사한 결과를 보건대 소화기 병 가운데 특히 위궤양(胃潰瘍)이라는 병은 두려운 마음에 싸여서 오래 있게 되면 자연히 이런 병이 생긴다고 합니다. 우리 한국에서 흔히 가슴앓이라고 하는 병도 어떤 이에게 오는고 하니 근심하고 염려하고 장래를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불안한 가운데서, 오래 계속이 되면 흔히 병 없던 사람에게 그런 병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여러 해전에 미국에서 갑자기 큰 불경기(不景氣)가 되어서 경제적 타격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공포 가운데 싸이게 되었을 때 모든 유명한 병원들을 조사해보면 특별히 소화기 계통의 병과 신경계통이 병과 심장병의 환자가 격증했다고 합니다. 결국 사람이 공포에 싸이게되면 바로 생각 할 수도 없고 바로 활동할 수도 없게 됩니다. 그런 공포 속에 얼마동안 싸여 있게되면 그 심리상태와 육체까지도 마비가 되어서 온전한 생활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극단의 실례를 들면, 노름하는 사람들 혹 줄타는 사람들이 높은 곳에 올라가서 줄을 타다가도 갑자기 아래를 내려다보고 무서운 마음이 생기게되면 잘못하여 떨어지게 됩니다. 흔히 떨어지는 사람들은 무서운 생각이 나서 떨어진다고 합니다. 흔히 전쟁에 나가서 싸우다가도 갑자기 적이 무서운 생각이 나게되면 그 전쟁에 이길 수 없습니다. 마지막에는 그 전쟁에 패하고 맙니다. 병들어서 병을 치료하는 사람이라도 그 병에 대하여 무서운 생각이 나게 되면 그 환자는 그 병 가운데서 다시 일어나기가 매우 어렵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병을 알아서도 죽지만 무서워서도 죽습니다.

 

 
 



66.동로마 제국의 전설

옛날 동로마 제국에 내려오는 전설 가운데 이런 전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마차를 타고 동로마 제국의 서울이 되는 콘스탄디노플을 향해서 들어가는데 거이 성에 가까이 왔을 때에 어떤 나이 많은 할머니가 서서“내가 이 성에 꼭 들어가야겠는데 당신의 마차 옆에 나를 좀 태워서 들어가게 해주세요”하였습니다. 친절한 이 분이“그럼 할머니 타세요”하고 태웠습니다. 태워서 좀 마차를 몰고 가다가 가까이 보니까 그 눈 생긴 것과 코 생긴 것이 어떻게 추하게 생겼는지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묻기를“할머니, 당신이 대체 누구요?”물어 보았습니다. 그 할머니 말이“나는 호열자 귀신이올시다”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깜짝 놀라“아, 당신이 호열자 귀신이요? 그러면 우리 성에 무엇 하러 옵니까? 네? 사람 죽이려고 옵니까? 아, 당신 당장 내리시오”“아니 나는 내릴 수 없어요. 당신 아마 가만히 있는 거이 좋겠지요”이것 큰 일 났습니다. 그리더니 그 할머니는“내가 콘스탄티노플에 들어가서는 그저 다섯 사람 이상은 안 죽일 태니까 분명히 믿으시오”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자기 가슴속에서 비수를 꺼내 그 사람에게 주면서 하는 말이 “이 비수를 가지고 나를 찌르면 내가 이제라도 금방 죽습니다. 내가 들어가서 다섯 사람만 죽이면 당신이 이 비수로 나를 죽이시오. 다섯 사람이상은 안 죽일 테이니”그러는 동안에 어느새 마차는 성안으로 들어갔습니다. 할머니는 내리자마자 어느 집에 들어갑니다.
벌써 그날 저녁부터 소문이 나는데 이 집에서 호열자가 났다, 저 집에서 호열자가 생겼다는 등 사방에서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이틀이 못되어서 약 5천 명이 죽었습니다. 이 사람이 대단히 노해서 이 할머니 어디에 있는가 집집이 찾아다닙니다. 한 집에 가서 이 할머니를 만나자 곧 죽이려고 칼을 내밀었습니다. 그때에 이 할머니가 하는 말이“당신이 왜 나를 죽이려고 합니까? 다섯 사람밖에 안 죽였어요”“다섯 사람밖에 안 죽였다고요? 5천 명 이상을 죽이고는 다섯 사람밖에는 안 죽였어요?” 이 할머니 말이“난 실상 다섯 사람밖에 안 죽였는데 그 밖의 사람들은 무서워서 죽었습니다”하였답니다. 그저 호열자 들자마자 무서워서 죽곤 했습니다.
여러분 무서워서 죽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무서워서 심령도 죽고 육신도 죽고 사업도 실패하고 시험에 낙제를 하고 경기하다가 지기도하고 무서워서 죽는 사람이 많습니다. 공포 때문에 사람들이 미신을 숭배합니다. 특별히 전쟁이 일어 날 때에 서양이나 동양을 물론하고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점쟁이를 찾아가고 당책(唐冊)을 보고 손금을 보고 관상쟁이를 찾아갑니다. 미신을 쫓아가는 것은 전쟁 때는 더 무섭기 때문입니다. 행여 이 액을 피할까? 장래가 무서우니까 미신을 쫓아갑니다. 이 공포심이 우리 인생에 주는 해독이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67.디 엘 무디의 비유

유명한 부흥사 디 엘 무디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은 말하자면 천당 가는 기차 혹은 마차 같은 것을 탔다고 볼 수 잇는데 기차를 보면 이등 차도 있고 삼등(三等) 차도 있고 또 일등 차도 잇습니다. 그런데 일등을 타든지 이등 혹은 삼등을 타도 기차를 타면 부산서 서울까지 옵니다. 그러나 삼등 차를 타는 것은 얼마나 괴롭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다 구원을 얻기는 얻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삼등 차 타고 천당에 갑니다. 그것은 어떤 사람인가 하면 예수를 믿어서 내 구주로 알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았으니까 그냥 꾸준히 믿어 가면 천당에는 가겠지만 아직까지도 분명히 예수께 의지해서 하나님을 분명히 의지할 줄 몰라서 두려운 마음, 근심과 걱정 그대로 가지고 예수를 믿는단 말입니다. 늘 믿기 는 믿지만 늘 근심하고 걱정하고 염려하여 예수를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근심과 걱정, 염려를 온전히 다 주님께 맡기고 십자가에 다 맡겨서 가벼운 마음으로 천당에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68.요한 웨슬레와 모라비아 선교사

감리교 설립자인 유명한 요한 웨슬레 선생이 큰 은혜를 받기 전 이야기입니다. 미 대륙에 가서 전도하다가 실패하고 본국으로 돌아갑니다. 그 때는 조그마한 범선(帆船)을 타고 다닐 때인데 큰 풍란을 만났습니다. 바람에 불려 밀려갑니다. 이렇게 되니까 배에 탔던 사람들은 다 죽는 줄 알고 두려워서 어떻게 할 바를 모릅니다. 요한 웨슬레도 겁이 나서 죽을 지경입니다. 그런 가운데 두 사람이 있는데 그들은 모라비아 교회에 속하는 선교사들로 역시 미국에 선교하려 갔다가 같이 배를 타고 오는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두 사람은 그렇게 위험해도 조금도 두려운 기색이 없습니다. 그 얼굴에는 도무지 두려운 기색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과 뛰어나게 달랐습니다. 그래서 풍란이 끝난 후 잔잔해진 다음에 요한 웨슬레가 물었다고 합니다.“가만히 보니까 다른 사람들은 다 무서워하는데 두 분은 도무지 두려운 기색이 없으니 웬일입니까?”그러니까 이 선교사 가운데 한 사람이 대답하는 말이“왜 우리 믿는 사람이 두려워하겠습니까?”하면서 다시 웨슬레에게 반문하는 말이“당신 아직도 예수 님을 모릅니까?”하였다고 합니다. 참 믿음에는 모든 공포심이 떠납니다. <두려워 말라>에서

 

 
 



69.어느 성주와 감독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유럽에서 된 일인데 중고 시대의 어떤 귀족의 이야기입니다. 그 때의 귀족은 봉건시대인 까닭으로 각각 성을 맡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떤 성주가 다른 성주와 혐의가 있어서 늘 미워하고 언제든지 기회만 있으면 원수를 갚을 마음이 있었는데 한 번 들으니까 자기와 원수가 되는 그 성주가 어느 곳에 여행을 갈 수밖에 없는데 그곳을 가려고 하면 자기가 다스리는 영토를 지나갈 수밖에 없었었습니다. 그러니까 자연히 그 성주는 이 쪽 편의 성주가 모르게 몰래 그 영토를 지나려고 계획했지만 불행히 이 편 귀족이 그 비밀을 알게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이것이 참 천재일우의 기회다”하고 꼭 이번에 이 사람이 원수를 갚기 위해서 미리 사람을 다 준비해 놓았습니다. 그 길에 매복해 놓았다가 그 사람이 지나갈 떼에 아주 없애버리겠다고 이런 계획을 세웠습니다. 마침 그 성의 감독이 그 계획을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그 성주를 찾아가서 신자는 마땅히 서로 용서할 의무가 있는 것을 역설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귀족이 다른 사람의 죄는 용서해 줄 수 있지만 그의 죄는 용서해줄 수 없다고 처음에는 완강히 거절했습니다. 그래 할 수 없어서 그 감독이 전하는 것을 그만 두고 집에 돌아갈 수밖에 없는데 집에 가기 전에 같이 우리 하나님께 예배들이자 하여 그 모든 가족들과 그 부하들을 다 모아놓고 그 감독의 인도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예배를 거이 마치고 주기도로 마치자고 하여 주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감독이 하는 말이“내가 이 주기도를 할 텐데 한 마디씩 한 마디씩 따라하시오”하였습니다. 그래서 주기도를 내려가다가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옵시고”거기까지 한 다음에, 그 감독이 얼굴을 들면서 그 귀족에게 말했습니다.
“이제 내 말 좀 들어보세요, 다음에는‘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이런 말이 있는데 우리가 하나님을 희롱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거짓말할 수는 없습니다. 만일 당신이 주기도를 나와 같이 따라 하려고 하면 이 사람의 죄를 용서해 주지 않고는 이 주기도를 따라 할 수 없습니다. 또 이렇게 되면 자연히 과거에 당신이 지은 것까지 하나님께서 다 취소할 것입니다. 이제 이 사람의 죄를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이 주기도를 그만 두겠습니까?” 이 귀족의 말을 들을 때에 머리를 숙이고 가만히 생각해 보더니“과연 감독의 말씀이 옳습니다. 제가 그의 죄를 용서해 주고 제가 주기도를 따라 하겠습니다.”그 앞에서 그 사람의 죄를 용서해 주고 그 계획도 다 취소해 버리고 이 감독과 같이 주기도를 계속해서 외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의 주위에서 분명히 가르쳐 주신 것은 내가 내 형제의 죄를 용서해 주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도 우리 죄를 용서해 주지 아니하는 까닭으로 내 형제의 죄를 용서해 주는 것이 내가 죄 사함을 받는 필수조건임을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70.스텐리 존스와 놀만 필의 책에서

다른 사람이 나에게 혐의 있는 것, 나의 잘못된 것을 용서해 주지 아니하면 자연히 우리 마음 가운데 그 사람을 미워하는 생각이 생깁니다. 증오심, 그 사람에 대한 불안한 마음, 원한, 독한 마음을 늘 마음 가운데에 품기 쉽습니다. 자연히 품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 앞에 죄 사하는 것은 고사하고라도 현재 내 정신 생활과 육체생활에 많은 해독을 가져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대해서 혐의를 가지고 증오심과 독한 마음, 원한을 품지 아니하고 내 마음 가운데에 암탉이 달걀을 품고 있으면 그 독한 마음이 내 육신과 정신생활에 많은 해독을 가져옵니다. 스텐리 존스 혹은 놀만 필의 책을 읽으면 이런 원한과 독한 마음이 우리 정신과 우리 육체에 얼마나 많은 해독을 가져오는지 많은 실례를 들어서 말해 줍니다.
①음식을 토하는 여인의 사연
어떤 여자가 있었습니다. 음식도 잘 소화가 되고 건강한 분인데 갑자기 음식을 먹으면 곧 토해버리고 맙니다. 음식을 먹기만 하면 10분도 못되어 토해버립니다. 의사에게 가서 아무리 의학적으로 진단을 해보아야 무슨 원인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습니다. 요사이 흔히 미국에서 하는 법대로 이는 의학과 생리학적으로 우리가 원인을 찾을 수 없을 것임으로 이제 필연 심리적으로, 정신적으로 어떤 원인이 있을 것이라 하여 그의 심리를 조사하였습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를 물어 보면서 발견한 결과는 그 여자는 젊은 부인인데 어떤 남자와 결혼해서 그 남편과 잘 살았습니다. 이 여자가 꼭 싫어하는 것 한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시어머니 옅습니다. 그런데 이 시어머니가 그 동안은 따로 살다가 며칠 전에‘내가 아무 날 너이에게 간다’하는 전보가 왔습니다. 이 전보가 온 후부터는 토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② 오른 팔을 못쓰는 부인 이야기
어떤 젊은 부인이 갑자기 오른 팔을 들지 못합니다. 아무리 의학적으로 조사해보아야 원인을 알 수 없는데 심리적으로 잘 조사해 보니까 어떤 원인인고 하니 그는 자기 본가의 어머니와 같이 오래 살던 여자였는데 그 어머니와 늘 불화 하였습니다. 그래서 마음에는 손을 들어서 자기 어머니를 때리고 싶은 충돌이 자꾸 들었습니다. 그러나 차마 때릴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 심리 가운데서 그만 팔을 못쓰게 되었었습니다. 마음을 고쳐 회개한 후에야 이 여자가 오른 팔을 썼다고 합니다.
③ 성날 때 짠 우유는 해롭다
대개 우유를 서양에서는 많이 먹는데 소가 성날 때 짠 우유는 사람에게 해롭다 합니다. 우유뿐 아니고 어머니가 성났을 때에 먹이는 젖은 아기에게 대단히 위험하다고 합니다. 여기 어머니들은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싸움하면서 젖먹이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고 합니다. 성나고 독한 마음이 생기면 그 독소가 분비된다고 합니다.
성난 다음에는 왜 소화가 안 되는고 하니 위 가운데 위액이 잘 분비되지 않고 위액 가운데 독소가 분비된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유신을 낼 때는 선의를 가지고 좋은 마음을 가지고 사랑을 가지고 살아야 육체에 고장이 안 나게 만드셨습니다. 악의를 가지고 독한 마음을 가지면 우리 육신에 고장이 생깁니다.

 

 
 



71.유명한 링컨의 일화

어떤 이가 링컨의 성격을 평해서 말하기를“아브라함 링컨은 그 마음이 천하라도 용납할 만큼 넓지만 그 마음속에는 악이라는 것은 조금이라도 둘 방이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기에 유명한 게티스버그 연설 가운데도“누구에 대해서나 악의를 가지지 말라. 모든 사람에게 선의를 가지라”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남북전쟁 때에 어떤 군인이 군대를 이탈하다가 잡혔습니다. 우리 한국에서는 어떤지 모르겠으나 그 때에 이탈하다가 잡히면 군법회의에 송부 되어서 사형 판결을 받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이 청년이 사형판결을 받았습니다. 마치 이 청년은 과부의 외아들이었습니다 이 과부가 이 소식을 듣고서 너무 기가 막혔습니다. 자기 아들을 살리려면 대통령의 특사를 받는 길밖에는 다른 길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많은 애를 써서 대통령을 면회하여 한 번만 용사 해주면 자기 아들을 바로 인도할 테니 한번만 용서해 달라고 간절히 구했습니다. 그러니까 대통령이 용서한다는 특사를 내렸습니다.
그 어머니가 너무 기뻐서 백악관을 나오면서 혼자 하는 말이“나는 그것이 꼭 참말인 줄 알았어”라고 했답니다. 그래서 같이 오든 사람이“무슨 말이 참말인 줄 알았단 말이요?”하고 물으니 이 부인이 하는 말이“아,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이 링컨은 아주 못 생긴 사람이라고 그랍디다. 얼굴이 아주 험악하게 생긴 사람이라고 들었는데 이번에 실상 링컨 대통령을 면대해 보니까 그 사람처럼 아름답게 생긴 남자는 없습디다”고 하였습니다.
혹 여러분 중에 링컨의 사진을 보신 분이 많이 계실 줄 알지만 사실 링컨은 미 남자는 아닙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죽을 자리에 들어간 것을 용서해 주는 사인을 하는 아브라함 링컨의 얼굴은 아마 아름다웠을 것입니다.

 

 
 



72.스테반의 마지막 기도

스테반이 자기를 돌로 치는 사람에 대해서 그 사람들이 몰라서 그리는 것이니 이 사람들의 죄를 이 사람들에게 돌리지 말라고 기도했습니다. 돌로 맞아 죽지만은 그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과 같이 빛난 줄 압니다.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해 줄 수 있는 일은 하나님의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서양 속담에“선을 악으로 갚는 것은 악마의 일이요,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은 사람의 일이요, 그러나 악을 선으로 갚는 것은 하나님과 같은 행동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73.터키에서 있었던 일

지금으로부터 약 40년 전 터키에서 알메니아 사람 특히 믿는 사람을 핍박하고 학살한 때가 있었습니다. 그 때 어떤 터키 군인이 알메니아 믿는 사람집에 들어가서 학살하는데 마침 이 집에는 오빠와 누이가 있었습니다. 먼저 남자를 만나서 칼로 찔러 죽였습니다. 그 때 옆에 있던 누이는 용서하기를 빌었으나 자기마저 죽이려하니 피하여 요행 살아났습니다. 이 여자의 직업은 간호원이었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 수개월 후에 어떤 환자가 들어오는데 부상을 당해서 아주 얼굴이 형편없이 되었습니다. 많이 부상을 당한 아주 중환자가 입원을 해서 그녀가 치료를 하게되었습니다. 가만히 그 사람의 얼굴을 보니까 그 사람은 바로 몇 달 전에 자기 오빠를 죽인 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여자 마음가운데“내 원수이며 내 오빠의 원수인데 어떻게 할까?”하고 마음가운데 번민(煩悶)이 일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이 여자는 곧 생각하기를“나는 예수를 믿는 사람으로서 우리 주님께서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내가 이 사람을 죽여서야 될 수 있나?”하고 이 사람도 잘 치료해주어야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치료하지 않고 그냥 두기만 해도 죽을 형편인데 어떻든지 정성을 다해서 잘 치료해 주었습니다.
한달 후에 이 사람이 점점 나아서 눈을 뜨더니 두루 살폈습니다. 자기를 간호해 주던 간호원의 얼굴을 자세히 보았습니다. 보니까 자기가 몇 달 전에 죽이려고 하던 그 여자와 같은 얼굴이었습니다. 그래서 한편 놀라기도 하고 한편 두려워도 하면서“당신 오빠가 몇 달 전에 죽은 일이 있습니까?”물어 보았습니다.“예 죽었습니다”“그를 누가 죽였는지 압니까?”“그럼 알지요”“누굽니까?”“당신 아닙니까?”그 때에 이 터키 군인이 놀라면서 “당신이 처음부터 이것을 안 모양인데 그러면 내가 당신의 오빠를 죽인 원수임을 알면서 어떻게 당신이 이렇게 친절하게 나를 정성껏 간호해 주었소?”반문했습니다.
그 때에 이 간호원이 하는 말이“나는 처음 당신을 만날 때에 그런 독한 마음도 품어 보았지요, 그렇지만 나는 예수를 믿는 사람인데 우리 주님께서 원수 끼지도 사랑하라는 그 교훈을 기억하고 내가 당신의 원수인 줄 아는 까닭으로 더욱 친절하게 간호하려고 지금까지 간호해 왔습니다. 지금 당신이 이렇게 낫게 되었으니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어요”하였습니다. 그 말을 들을 때 터키 군인은 두 눈에서 눈물을 흘리면서“만일 당신이 믿는 기독교가 이와 같은 것이라면 나도 이제부터 예수를 믿겠소”하고 예수를 믿기로 작정했다합니다.

 

 
 



74.빌리 그래함 목사 부흥회 일화

바로 제가 지난주간(1954. 7)에 어떤 잡지에서 이런 기사를 읽었습니다. 우리 교회에 오셔서 잠깐 부흥회를 인도했지만 지금 아마 세계에서 제일 유명하다고 이름을 듣는 빌리 그래함 목사가 지난달에 영국 런던에 가서 부흥회를 인도했습니다. 미국에서도 볼 수 없는 그런 은혜를 영국이 크게 받았다고 하는데 매일 저녁에 모이는 수가 3, 4만 여에 이르렀고 맨 마지막 저녁에는 큰 스타디움에서 한 모양인데 12만 명이 모였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회개하는데 어는 날 저녁에 어떤 목사부인이 그 부흥회 구경을 가서 어떤 뒷자리에 앉았는데 자기 옆에 어떤 한 남자가 와서 앉았습니다. 가만히 보니까 도무지 믿는 냄새가 나지 않더라고 합니다. 조금 있더니 그 옆에 또 한 사람이 와서 앉았습니다. 그 두 사람이 서로 이야기를 하는데 그 목사부인이 가만히 들으니까 더러운 이야기로, 부흥회 하는 목사 흉만 보면서 자기는 구경하려 왔다고 하더랍니다. 도무지 믿으려 온 사람
이 아니고 비방하려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대단히 섭섭한 일이라 생각하고 그 목사 부인은 그냥 앉아서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 설교가 두어 시간 계속되는데 따라서 그 사람들의 이야기가 점점 적어져 갑니다. 점점 이야기가 드물어졌습니다. 마지막에는 설교를 잘 듣더랍니다.
설교를 다하고 찬송을 부르면서 그래함 목사가 누구든지 이제부터 예수를 믿을 사람은 그 자리에서 일어나서 이 앞으로 나오라고 말하였습니다. 여러 사람이 많이 일어나서 나가는데 그 목사 부인이 보니까 뜻밖에 자기 옆에 앉았던 사람이 벌떡 일어나선단 말입니다. 일어서 먼저 자기 옆에 앉은 사람보고“나는 지금 나가려고 하는데 당신 나갈 마음 없소?”하고 물어 보드랍니다. 그 옆의 사람도 우물 주물 하더니“예 저도 나가지요”하면서 일어나서는 자기 양복 주머니에서 돈지갑을 꺼냈습니다.“이 돈지갑부터 먼저 받으시오.”“웬 돈지갑이요?”“나는 소매치기요 절도입니다. 이것이 돈지갑이지요. 이 자리에서 내가 당신 돈지갑을 도적질했는데요, 내가 이제 나가면서 당신 돈지갑을 도로 드립니다.”훔친 돈지갑을 돌려주며 앞으로 나가더랍니다. 이런 회개가 바로 바른 회개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이 이야기를 읽을 때에 두어가지 위로 받았는데, 하나는 영국에도 절도는 있구나 하는 것이고, 하나는 그런 절도라도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을 생각할 때에 하나님의 은혜 얼마나 감사한지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얼굴이 아무리 추하게 되었을지라도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나오면 주님께서는 그 죄를 용서하고 그 파상(破傷)된 심령, 그 더러운 심령을 다시 씻어서 깨끗한 심령으로 회복시켜줍니다. <상한 그릇>에서

 

 
 



75.플라톤의《오라터글드》에서

예수께서 세상에 오시기 훨씬 전에 살던 헬라 의 철학자 플라톤이 기록한《오라터글드》라는 책 가운데, 헬라의 어떤 군인이 전쟁에 나가서 중상을 당하여 다 죽은 줄 알고 그 시체를 불사르기 위하여 나무를 모아놓고 그 시체를 그 위에 놓고 막 불사르려고 할 때 죽은 줄 알았던 군인이 다시 소생하여 깨어나서 자기가 완전히 의식을 잃고 있었던 그때의 모든 경험을 한 것이 거기에 기록되었습니다.
그이가 죽어서 어떤 곳에 가니까 두 길이 갈라지더랍니다. 그 길 가운데는 심판하는 이가 있어 일생에 모든 일을 행한 일을 따라서 심판을 해서 옳은 생활을 한 사람은 오른편의 길인 하늘 나라로 가는 길로 보내고, 악한 일을 한 사람은 왼편 길로 보내게 되었는데 왼편으로 가는 사람마다 높이 플랜카드에다가 그가 지은 죄를 크게 쓴 것을 들어서 다른 사람이 다 볼 수 있게 했답니다.‘나는 이런 죄를 지어서 지옥으로 갑니다’하는 이런 것을 들고서
가는 모양을 보았노라 는 이야기를 했다고 하는 기록이 있습니다. 사후에 대한 심판 사상은 동서를 물론하고, 어떤 민족을 물론하고 찾아 볼 수 있는데 그 까닭은 인간의 양심이 그것을 우리에게 지적하여 주는 까닭입니다.

 

 
 



76.미틴 루터 일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마틴 루터가「어거스틴 수도원」에 있을 때 한 번은 꿈을 꾸니까 시험하는 자가 나타나서 투터에게 책을 펴 보입니다. 그 책에 기록된 것을 보니까 전부 자기의 지은 죄 즉 아이 적부터 젊었을 때까지 지은 죄가 전부 기록되었습니다. 그때에 그 책을 가진 사단이 루터에게 하는 말이 이것이 사실이냐 물었습니다. 그러니 할 수 없어서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다음에 하는 말이“네가 이런 더러운 죄를 짖고 구원을 얻겠단 말이냐?”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을 때 기가 막히고 낙심되었습니다.
그 때에 위로부터 음성이 들리는데“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의 죄를 깨끗이 씻었느니라”는 말이 들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사단에게 하는 말이 그리스도의 보혈이 그 죄를 지우고 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한다고 기록하라고 말 할 때에 사단이 물러갔다고 합니다. 구원을 얻는 길은 오직 십자가의 보혈을 믿고 그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는 길밖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77.다니엘 웹스터 일화

다니엘 웹스터라는 미국의 유명한 정치가요 학자가 있었습니다. 이분이 한번은 국무장관으로 있을 때 된 일인데, 뉴욕의 어떤 호텔에서 저명한 사람 약 20명과 같이 저녁을 먹을 때 저녁을 다 먹고 다른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웹스터는 머리를 숙이고 가만히 있더랍니다. 그리자 옆에 있던 친구가“웹스터 씨, 당신의 일생을 통해서 당신의 마음속에 들어온 생각 가운데 제일 중요한 생각은 무엇이라 말 할 수 있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러니까 그이가 조금 있다가 얼굴을 들고 대답하는 말이“나에게 제일 엄숙하고 중요한 생각은 내가 지금 하는 모든 일을 이 다음에 내가 하늘 나라에 가서 내가 책임 질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이 생각을 할 때에 내 마음이 제일 엄숙해 집니다”하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분명히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생각, 내가 말하는 말, 내가 행하는 행동, 학생이면 학생으로서 행한 모든 것, 선생이면 선생으로서 행한 모든 것, 장관이면 장관으로 행한 모든 것, 국회의원이면 국회의원으로 행한 모든 것, 대통령이면 대통령으로 서 행한 모든 것, 목사면 목사로서 행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최후의 심판>에서

 

 
 



78.수양대군과 문종앙후

인생의 일생이 지위나 권세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육신 면으로 생각하여 볼 때에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모든 풀은 마르고 꽃은 진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이와 같은 어리석은 행동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멀리 갈 것 없이, 이조의 역사를 더듬어 볼 때에도 우리가 수양대군에 대해서 잘 알 것입니다. 자기 형님 문종 대왕의 충신인 사육신을 무죄한데도 참혹히 학살하고 마지막에는 죄 없는 단종까지도 학살하고 그리고 자기가 찬탈을 해서 왕위에 올라앉기는 했습니다. 정작 왕위에는 올라 않고 보니 꿈자리가 사납고 언제나 마음의 불안한 상태가 떠나지 않았습니다. 마음의 번민(煩悶)은 심한데 이것을 이길 방법이 없으니까 그 때 불교로 돌아간다고 파고다 공원 자리에 절을 지었습니다. 절을 지었다고 해서 평화가 올 리가 없습니다. 전해 내려오는 말에 의하면 꿈에 문종의 왕후가 입에 피를 물고 나타나서 “네가 내 아들을 죽였으니 내가 네 아들을 죽일 것이다”하였답니다. 그 후 며칠 후에 자기 아들이 피를 토하고 죽었다고 합니다. 마음에 평화가 없었습니다. 겨우 10여 년 왕위에 있다가 51세에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79.월데시안 교파의 원조 피이터 와일더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게니라』하나님을 떠난 모든 향락은 잠깐 있다가 없어집니다. 뿐만 아닙니다. 우리가 이 면을 분명히 깨달으면 적극적인 면으로 생각할 때 축복을 받는 자리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중세시대에 온 교회가 문자그대로 의식주의에 흘러가게 될 때 홀로 순 복음의 진리를 굳게 잡고 등불을 굳게 잡고 많은 핍박을 받으면서 내려온 교파가 있는데 이 교파를「월데시안 교파」라 말합니다.
그 교파의 원조는 피이터 와일더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의 전기에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그의 젊었을 때 어떤 다른 청년들과 같이 술도 마시고 질탕하게 한창 놉니다. 그런데 놀던 가운데 어떤 한 청년이 갑자기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가슴에 손을 얹고 넘어졌어요, 넘어지더니 죽고 말았습니다. 아마 무슨 병인지 모르지만 말하면 심장마비 같은 병인가 봅니다. 갑자기 죽었어요, 아마 뇌일혈인지도 몰라요, 와일더가 그 청년이 갑자기 급사하는 것을 보고 머리에 이상한 느낌이 들어왔습니다. 과연 인생이 무엇이냐, 이렇게 인생이 무상하냐고 생각했습니다. 깊이 인생을 생각하게 되고 성경을 읽게되고 성경을 읽는 가운데 참된 신앙에 돌아왔습니다.
그것은 옛날 이야기려니와 루터의 전기를 보아도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루터가 어떤 흐린 날 비가 오고 번개가 치는 날 친구와 같이 길을 갈 때에 갑자기 벼락이 첫단 말입니다. 옆에 가던 친구가 벼락에 맞아 죽었습니다. 그 광경을 보고 투터가 수도사가 되기를 결심하였습니다.

 

 
 



80.파스칼의 일화

프랑스의 유명한 과학자 파스칼은 많은 아름다운 책을 저술한 저술가요 종교가였습니다. 파스칼의 생활 가운데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넉넉한 가정에 태어나 호화로운 생활을 하는 사람으로 한 번은 말을 타고 길을 가는데 그만 높은 다리 위를 지나가다가 말이 실수해서 강에 떨어져서 말도 빠지고 자기도 빠졌습니다. 그는 다리가 부러지면서 죽을 뻔했습니다. 파스칼이 오래 다리를 치료하면서 그 때 경건 파에 속하는 좋은 신자를 만나서 참된 신앙에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인생이라는 것이 잠깐이라는 것, 인생이 무상하다는 것을 깨닫는다고 하면, 우리가 참된 신앙에 자연히 들어오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81.요한 번연의 일화

《천로역정》을 쓴 요한 번연에 대해서도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젊어서 군대에 들어갔을 때 보초병을 섰었는데 무슨 일이 있어 잠깐 자기 친구를 세우고 갔다 왔는데 그 사이에 적병이 와서 보초병 선 사람을 총으로 쏘아서 그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 사람은 꼭 자기 때문에 죽었습니다. 이 일을 깊이 생각하던 중 번연은 깊은 신앙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82.최반석 권사 님과 어떤 가난한 노인

전에 제가 신의주에서 전도사로 일할 때의 일이었습니다. 이번에 장로가 되신 강학주 장로님의 할머니이신 최반석 권사 님이 계셨는데 그 때 아마 60대가 지났어요, 환갑 때가 지났어요, 그렇지만 건강해서 명예 권사인데 교회 일을 어떻게 열심히 보는지 이 권사 님의 심방 하는 법은 한 집에 가서 심방하고는 그저 안녕히 계십시오 하고는 다시 돌아보지 않고 다른 집으로 갑니다. 왜 그런가하니 돌아보면 편안히 가세요, 편안히 가세요 하여 이야기가 길어지니까 빨리 하려고 한 번 인사하고 다른 집으로 가고 맙니다.
신의주에서 제2 예배당을 지을 때 어떤 가난한 노인이 예배당을 처음 지을 때부터 끝마칠 때까지 늘 나오셔서 펌프의 물을 길어 여러 가지 일을 하는데 그저 펌프 물긷는 것을 매일 나와서 끝까지 자기가 담당했습니다.“할아버지가 힘드시는데 어떻게 매일 하십니까?” 이렇게 말하면“나야 나이 많아서 다른 일 할 수 없고 돈도 없어 연보도 많이 못하고 내가 정성을 다하기는 하여야겠는데 이 일은 내가 할 수 있으니 죽는 날까지 이 예배당 다 지을 때까지 물을 그냥 푸겠습니다”하였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이 잠깐이란 것을 알면 일초 일분을 아껴서 주의 일을 할 것입니다. <나의 생명이 무엇이뇨?>에서

 

 
 



83.어거스틴의 푯대

어거스틴 같은 사람도 젊었을 때에는 푯대를 잘못 찾았습니다. 세상의 지식 철학에서 찾으려고 애썼습니다. 세상의 향락에서 찾으려고 애썼습니다. 다 실망하였습니다. 나이 30이 지나서야 푯대를 바로 잡았습니다. 그 후로 오직 푯대를 향하여 달음질쳤습니다. 이렇게 푯대를 잘못 찾다가 바로 찾는 것도 좋지만은 어떤 사람은 아예 어렸을 때부터 학생 때부터 인생을 꾸준히 나아간 사람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있지만 유명한 정치가 글래스톤 같은 이는 아예 어렸을 적부터 예수그리스도를 자기 목표로 삼았습니다. 그가 정치가가 된 것도 나라 일을 한 것도 그가 그리스도의 뜻을 행하기 위하여, 자기 나라에 그리스도의 뜻을 행하기 위하여 인생의 푯대를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것으로 삼고 나아갔습니다. <푯대와 전진>에서

 

 
 



84.아골 골짜기는 은혜의 문

여러분, 온전히 죄를 통회하는 아골 골짜기 없이는 우리에게 소망이 없습니다.
지금 일본에 나와서 많이 설교하는 선교사 가운데서 J. D. 세어서라는 청년 선교사가 있는데 이 선교사는 본래 미일(美,日) 전쟁시에 첫 번으로 동경과 일광(日光)등 몇 곳을 폭격한 A·L·듄니틀 부대의 폭격수로서 처음으로 폭탄을 던졌던 사람입니다. 던지고는 항공모함에 돌아가지 못하고 이 비행기가 모두 중경(重慶)으로 가든 도중에 불행히도 이 사람이 탔던 비행기는 가솔린이 부족하여 그만 중간에서 일본인이 주둔한 지역에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포로가 되어 상해로, 북경으로, 혹은 일본으로 3년간 많은 고초를 당하면서 포로 생활을 했던 것입니다.
이 사람은 어렸을 때에 주일학교에 다닌 사람입니다. 그러나 성장해서 오래 교회를 떠났던 사람입니다. 자기 말대로 많은 죄를 지었습니다. 심지어 도적질까지 했습니다.
오랫동안 감옥에서 고생하는 가운데 전에 듣던 복음이 다시 생각나고 자기의 죄를 깨달아서 그 감옥에서 회개하였고 합니다. 회개를 한 후에는 자기가 다시 일본에 와서, 비록 자기가 처음에는 폭탄을 가지고 일본에 왔었지만 이번에는 복음을 가지고 전도하겠다는 결심을 가지고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미국으로 돌아가 기독교 대학 패시픽 대학(大學) 공부를 마치자마자 곧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이 사람의 전도를 듣고 회개한 사람이 많은 가운데도 특히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진주만을 처음 폭격한 일본 비행대의 사령관이었던 후지다(藤田)라는 대위가 이 분의 말을 듣고 회개했습니다. 3년 동안 많은 괴로움을 받고 그 가운데서 눈물을 흘리며 자기의 죄를 회개한 그 동안의 감옥생활이 괴롭기는 괴로웠지만, 그에게 있어서는 아골 골짜기였고 아골 골짜기가 있는 까닭으로 그에게는 소망의 문이 있었습니다. 우리 애국 청년 가운데도 포로생활 하는 가운데 아골 골짜기를 통하여 새로운 은혜를 받고 지금 신학교에서 공부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소망의 문>에서

 

 
 



85.나치 범죄자들이 마지막 읽은 책은 성경

여러분 혹 기억하시는지 모르지만, 몇 해 전에 독일의 나치 범죄자들이 마지막에 사형 받기 며칠 전에 무슨 책을 읽겠느냐 할 때 두 사람 외에는 모두 성경을 읽게 해달라고 해서 마지막에 성경을 읽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또한 이런 관계로 이 성경은 어떤 책보다도 제일 영향을 많이 주는 책입니다. 종교와 도덕과 철학방면에는 말할 것도 없지마는 경제와 과학과 음악과 문화와 모든 방면에서 성경은 어떤 책보다도 제일 많은 영향과 감화를 준 책입니다.
우리가 영국 문학을 공부하려면 흔히 두 권의 책을 공부하여야 한다고 합니다. 하나는 흠정역 성경이요, 하나는 섹스피어라고 합니다. 독일 문학을 공부하는 데도 두 권의 책을 공부해야 된다고 합니다. 하나는 독일 말 성경이요, 하나는 괴테의《파우스튼》라고 합니다. 이태리 문학도 역시 이태리 성경과 단테의 저서라고 합니다.
여러분, 가만히 생각하여 보세요, 건축이나 음악이나 어떤 문화 방면일지라도 가장 위대한 이름을 남기고 간 사람 치고 어느 누구 성경의 감화를 받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사실 지금은 성경을 모르면 신, 불신을 막론하고 무식한 사람입니다. 문화인이 아닙니다.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입니다. 현대 문화를 이해하려고 할 것이면 성경을 배워야 합니다.

 

 
 



86성경의 보배로움

우리가 역사를 잠깐이라도 생각하여 본다면, 인쇄술이 발달되기 전 까지는 물론 성경이 보급되지 못하여 대체로 15세기까지는 큰 교회라고 해야 성경이 한두 권 있을까 할 정도입니다. 개인으로 보면 왕가이든지, 귀족이든지, 특별히 부자가 아니면 성경 소유는 꿈도 꾸지 못하였습니다. 콘스탄틴 같은 그렇게 세력 많은 황제라도 성경은 겨우 50권 양피(羊皮)로 매고 거기 베껴서 만들어 유명한 교회에 기부했다고 합니다. 그때에는 사람이 성경을 읽는 것을 직접 듣기 위하여 10리 20리를 걸어서, 심지어는 외딴 산골에 있는 사람은 수백 리를 걸어가서야 성경 읽는 말씀을 친히 들었다고 합니다.

 

 
 



87.성경의 수난사

우리가 중고시대 교회사를 보면 암흑시대를 지나올 때 천주교회에서 모든 평신도들에게는 성경 읽는 것을 금했습니다. 그리해서 평신도로서 성경을 읽고 성경 그대로 믿고자하던 월더라고 하는 사람을 따르는 월데시안 교파들과 교인들은 성경 읽기를 애쓰고 몰래 베껴 가지고 다니다가 붙잡혀서 많은 고생을 당하고 핍박을 당한 사실을 교회사에서 볼 수 있습니다.
16세기까지도 영국 같은 나라에서 월리암 킨델리 같은 사람이 이 성경을 영어로 번역했다고 그것이 죄가 되어 그때에 영국 왕 헨리 8세에게 붙들려서 화형을 당하는 순교를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1536년입니다. 이런 시대가 있지 아니한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가 역사를 생각할 때 그렇지마는 역사를 소급할 필요도 없지요.
오늘 날 문명했다는 20세기를 생각해 보세요, 38이북에 있는 북한의 형편을 생각해보세요. 소련과 여러 위성 국가를 생각해 보세요, 거기에 믿는 사람이 아직도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자유로 사 볼 수도 없고, 자유로 출판할 수도 없고 이렇게 모여서 성경의 말씀을 들을 수도 없고 공부할 수도 없습니다. 아무리 성경을 배울 마음이 있고 성경을 연구할 마음이 있어도 성경을 구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이며, 어떻게 해서 성경 한 권을 구하게되면 남 모르게 골방에 들어가 불을 켜고 성경을 읽어야만 되는 형편을 우리가 짐작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모든 것을 생각할 때에 우리 남한에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큰 축복을 주어서 성경을 자유로 판매할 수 있고 돈 몇 푼 안 주고 살 수 있고 마음대로 공부하기 위해서 모일 수 있는데 어찌하여 남한에 있는 믿는 사람들이 성경공부를 게을리 합니까?
<신령한 것을 사모하라>에서

 

 
 



88.향기에 얽힌 이야기

옛날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때 멀리 레바논에 가서 백향목(柏香木)을 찍어다가 성전을 지었습니다. 그것은 백향목이란 나무가 나무만 좋을 뿐 아니라 향기가 나기 때문입니다. 전에 모세가 성막(聖幕)을 지은 다음에도 그러했고 솔로몬이 성전을 지은 다음에도 그러했고, 지은 다음에는 향단이 있었습니다. 그 향단은 아름답게 금으로 싼 그런 단인데 언제든지 제사장들이 그 위에 분향을 해서 향기로운 향연(香煙)으로 성전을 가득 차게 한 것입니다.
전설에 의하건대 옛날 콘스탄틴 황제가 콘스탄틴노플에 성 소피아라는 유명한 예배당을 지을 때 밖에는 물론 돌로 지었지만 안에 회를 바를 때 회산물에 향품을 섞어서 언제든지 그 교회 안에 들어가면 향기로써 그 예배당이 가득 차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동방의 박사들이 멀리 와서 아기 예수 님을 경배하고자 할 때 귀한 예물 세 가지를 드렸는데 하나는 황금, 둘째는 유황, 셋째는 몰약(沒藥)이었습니다. 이 세 가지 가운데 유황, 몰약은 향기를 내게 하는 향품입니다.
베다니에서 마리아와 나사로가 예수 님에게 잔치를 베풀고 대접할 때에 마리아가 좋은 옥함을 깨뜨려서 그 향기로운 기름을 예수 님의 발에 붓고 머리털로 그 발을 씻으니 향기가 온 방에 가득 찼다고 기록했습니다.
옛날이나 오늘이나 향기는 거룩한 것, 깨끗한 것, 사랑, 의로움, 충성과 정성과 믿음의 상징으로서 생각되어 온 것입니다.

 

 
 



89.그리스도의 복음은 성결케 하는 힘이 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향기로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 줄 생각합니다. 향기는 인간의 정신을 새롭게 하고 상쾌하게 합니다. 마찬가지로 기독교의 복음은 우리의 마음을 거룩하게 하고 깨끗하게 하고 선명하게 하고 화평하게 하고 즐겁게 합니다. 그리스도 복음이 들어간 심령은 성결한 심령이 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들어간 그 심령의 입술은 성결하여집니다. 입술뿐 아니고 그의 전 생활이 정화되고 미화되고 사랑으로 화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들어갈 때에 그 가정이 깨끗해집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어떤 사회에 들어갈 때에 그 사회가 깨끗해집니다. 그 국가가 깨끗해집니다.
향기는 이끄는 힘이 있습니다. 인력이 있습니다. 봄 동산에 아름다운 꽃이 필 때에 벌과 나비들이 사방에서 모여옵니다. 단순히 아름다운 꽃을 보기 위하여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아름다운 꽃 속에 향기가 있어서 그 아름다운 꽃에서 향기를 방사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옛날이나 오늘이나 그리스도의 복음에는 인력(引力)이 있습니다. 사람을 끄는 힘이 있습니다. 베드로도 인력에 끌려들어 왔던 것입니다. 야고보 도 그러했고, 요한 도 그러했고, 모든 제자들이 다 그러했고, 오순절에 회개한 5천 명도 그러했습니다.
<그리스도의 향기>에서

 

 
 



90.회개한 자의 복

얼마 전에 제가 어떤 집회에 가서 집회를 마치고 났을 때에 어떤 젊은 여자가 와서 조용히 만나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래서 무슨 사정인지 물어 보았더니 이 여자가 하는 말이, 자기 남편은 오래 전에 군대에 나가서 지금까지 소식이 없는데 그만 어떤 좋지 못한 남자에게 유혹을 받아서 죄를 지었으니 이것을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하였습니다.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죄를 자복(自服)했습니다.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그러나 죄를 애통히 회개하는 자에게는 복이 있습니다. 예수 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죄를 애통하는 자에게 죄 사함을 주시고 구원하여 주시기 위하여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91. 1·4 후퇴 때 부산에서 있었던 일

우리교회 어떤 장로님 부인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1·4 후퇴 때에 수다한 가족을 데리고 부산에 내려갔습니다. 여러분이 다 경험하신 것 같이 부산으로 내려가서 있을 때가 없어서 어떤 예배당의 지하실에 있게 되었는데 마루도 깔지 않은 시멘트 바닥이올시다.
시멘트 바닥인데 아무래도 가마니를 몇 장 사다가 깔고야 자겠는데 피난 생활 중이다 보니 가족은 많은데 수중에는 3천 원 밖에 없습니다. 자 이것을 가지고 가마니를 사다 깔면 내일 아침 조반 사 먹을 돈이 없겠고 조반을 사먹자면 찬 시멘트 바닥 위에서 잘 수밖에 없고 이걸 어떻게 하면 좋은가하고 장로님과 두 분이 걱정을 하다가“어차피 찬 시멘트 바닥에서 자다가는 얼어죽겠고, 오늘 저녁만이라도 살아야 되겠으니 아무래도 가마니를 삽시다”이렇게 의논이 된 모양입니다.
그래서 장로님이 어두운데서 가마니를 파는 데가 있는지 허둥지둥하면서 그 복잡한 부산 거리를 다니다가 마침 우연히 어떤 구석에서 노인이 가마니 석 장을 가지고 가는 것을 만났습니다. 그래서“가마니 팔지 않겠습니까? 그 가마니가 꼭 필요한데 파십시오”그래 그 노인이 하는 말이“아니오 우리도 살려고 사갑니다”“우리는 서울에서 온 피난민인데 오늘 저녁 가마니가 있어야만 시멘트 바닥에서 자겠는데 정 급하지 않으면 그 가마니를 우리에게 파십시오”그러니까 그 노인이 이 사정을 듣더니“그래요? 정 그러면 팔지요”그래서 그 가마니를 사왔다고 합니다.
가마니 사다가“자 이젠 그 가마니를 뜯어서 깝시다”하고 뜯는데 천만 뜻밖에 그 가마니 속에서 돈이 8만 3천 원이 나왔다고 합니다. 이 양심적인 장로님은 돈이 가마니 속에서 나오자 남의 돈이므로 이걸 꼭 갖다 주긴 해야겠는데 이걸 어느 상점에서 산 것도 아니고 어느 노인에게 샀는데 이것을 갖다 줄래야 갖다 줄 때가 어디 있습니까? 마지막에는, 하나님이 엘리야가 시장할 때 까마귀를 시켜서 떡을 물어다가 먹였다고 하는데 이건 아마 우리 가족을 굶어 죽게 하지 않기 위해서 이렇게 가마니 속에 돈까지 보냈나 보다 하고 그 돈으로 수다한 가족이 굶어죽지 않고 살았다 합니다.
여러분의 경험이 꼭 다 이와 같지는 않으리라 봅니다. 그렇지만 찬송가에 있는 대로“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 위로 받겠네. 무슨 일을 하든지 만사 형통하리라”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무슨 일을 만나든지 아무리 빈곤한 일, 아무리 고독한 일, 어떠한 애통을 만날 때에도 그 가운데 하늘의 은혜가 있고 주님의 능력이 같이하십니다. <애통하는 자의 복>에서

 

 
 



92.성숙한 믿음

우리가 흔히 연설할 때나 설교할 때‘기독 청년’이란 말을 많이 듣습니다. 기독 청년은 어떠하여야 된다, 기독천년의 사명이 어떠하다, 기독 청년의 특색이 어떠하다……기독 청년이란 말을 많이 듣습니다. 그러나 '기독장년’이란 말은 듣지 못합니다. 여러분, 기독 노인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기독청년이 있으면 기독장년이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청년이 좀 나이가 많아지면 장년이 되니까, 또 기독장년이 있으면 기독노인이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장년이 좀 나이 많으면 노인이 되니까.
오늘 저녁에 이렇게 존경하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많이 모셨는데 제가 이제 마지막으로 기독노인의 특성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노인은 어떤 분인지, 아마 기독청년의 특성은 많이 들었겠지만, 노년의 특성은 못 들으신 줄 압니다. 기독노인은 어떤 분인가를 몇 가지로 말씀들이겠습니다.
기독노인 시대는 이미 말씀 드린바와 같이 모든 것이 완숙하는 시대입니다. 곡식이 무르익는 것과 같이 모든 실과가 붉고 혹은 누렇게 잘 익는 시대와 같이 우리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노년시대는 모든 것이 완숙하는 시대입니다. 믿음도 완숙하고 기도하는 것도 모든 습관도 모든 인격도 완숙해서 모든 것이 완숙하는 그런 시대입니다.
청년시대는 잘 믿는다고 하지만 때때로 시험을 받고 흔들립니다. 노년시대에 나이 많기까지 예수를 끝까지 믿은 분, 그 노인시대의 신앙이야말로 완숙해서 어떤 환난이나 어떤 어려운 일이 있다 할지라도 조금도 흔들리지 아니합니다. 완숙한 시대입니다.

 

 
 



93.폴리캅 일화

전에 서머나의 감독으로 있던 폴리캅이 86세 때에 핍박을 받아 로마 감독 앞에 나갔습니다. 지금이라도 우상에게 경배만 하면 생명을 살려 드리겠는데, 이렇게 노인을 내가 차마 처형하기 어려우니 한 번만 잠깐만이라도 이 우상에게 경배하라고 합니다. 이 때에 폴리캅이 백발을 휘날리며 관원 앞에 조용히 대답하였습니다.“내가 86년 동안 예수 그리스도를 섬겼고 그 동안 나를 이와 같이 축복해 준 그리스도였는데 내가 어찌 그를 배반할 수 있겠느냐? 완숙한 믿음이올시다 <인생의 낙조>에서

 

 
 



94.제 칠 계명을 지키기 위하여

우리가 온전한 자리에 올라가려고 하면 먼저 여섯째 계명을 지키되 마음으로 살인하지 않도록 지켜야 됩니다. 마태복음 5장 27­32절까지의 말씀은『간음하지 말라, 옛 사람들이 이와 같이 하는 말은 너희가 들렀지마는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는 이미 죄를 범하였느니라』하셨습니다. 우리가 온전한 자리에 나아가려고 할 것이면 단순히 육신으로 간음만 피하는 것으로 만족치 못한 것입니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는 이미 간음을 행한 것이니 우리 마음으로 간음을 행하지 않도록 마음을 거룩이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가장 귀한 교훈을 주셨습니다.『네 오른 눈이 가장 귀하다 그러나 네 오른 눈이 너로 말미암아 범죄 하게 하면 네 오른 눈을 뽑아 벌이라 한눈 가지고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다 가지고 지옥 불에 들어가는 것 보다 나으리라』하셨습니다. 손 가운데도 오른 손은 매우 귀합니다. 그렇지마는 우리 오른 손이 나로 말미암아 범죄 하게 하면 그 오른 손을 찍어버리라고 하셨습니다. 한 손가지고 천당 가는 것이 두 손가지고 지옥 가는 것보다 나은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의 친구 가운데에 심히 친하고 가까운 친구요 많이 도와주는 친구가 있으나, 그러나 그 친구를 통하여 나로 하여금 제 7계명을 마음으로 범하는 그런 유혹이 있다면 그 친구와 절교하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어떤 책을 읽음으로 말미암아 그 책이 우리로 하여금 음욕을 품는 자리로 인도하면 그 책을 불살라 버리라는 뜻입니다.

 

 
 



95.어느 성자들의 고행

왜 청년들로 하여금 영화관과 극장에 가지 말라고 권하는가 하면, 흔히 요즘 영화나 연극이라 하는 것이 대체의 경우 이런 방면에 마음으로 죄를 짓게 해서 청년을 타락하게 합니다.
전에 성 베네짓트라고 하는 사람은 마음을 깨끗이 하기 위하여 묵상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아무리 힘써도 마음이 깨끗해지지 않아서 너무 안타까워 온몸을 벗고 가시덤불 위에 뒹굴어서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마음의 청결(淸潔)을 회복했다고 합니다.
전에 어떤 성자는 마음 가운데에 불같은 정욕을 이길 수가 없어서 추운 겨울에 박에 나가 어름을 깨뜨리고 얼음 속에 벗은 몸을 던져서 온 몸을 얼러서 마음에 깨끗함을 회복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온전한 자리에 이르려고 할 것이면 마음으로 7계명을 범하지 않아야 되겠습니다. 마음이 깨끗해야 되겠습니다.『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 하라』 <너희도 온전 하라>에서

 

 
 



96. 어느 육군 대령의 전도 헌금

지난주간에 감사한 것은 비오는 날인데도 불구하고 어떤 국군대령이 찾아와서 하는 말이 “제가 일선에 있으면서 우리 가정의 사정을 볼 때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았는데 제가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한국을 구할 길은 다른 길이 없고 오직 복음을 전파할 것밖에 없는 줄 압니다. 저는 군인의 몸으로서 친히 전도도 많이 못 하지만 제가 한 사람 전도 인을 내 보내기 위해서 매달 얼마를 정하여 보내겠으니 저 대신 전도인을 보내주십시오”하고는 첫 달 월급을 교회 사무실에 위탁하고 갔습니다.
내가 친히 가지 못하면 내 대신 할 사람을 얼마나 보내고 있습니까? 우리가 전도 회에 다 가입하셨습니까? 전도 회라는 것은 내가 친히 할 수 없는 것을 내 대신 사람을 보내기 위하여 우리가 전도 회에 가입하는 것입니다. 나 혼자는 할 수 없어서 우리가 협력해서 하는 것입니다. 목자 없는 양을 구원할 길은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이 양들을 거두어서 영혼의 참 목자가 되시는 주님 앞에 인도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우리 대중 심령 속 깊은 자리에 든 병을 고치는 길은 목자 장 되시는 주님 깨로 인도하는 길밖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97.주님의 얼술이 박힌 수건

이런 유명한 전설이 있습니다. 예수 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가실 때 땀을 흘리시며 겨우 무거운 십자가를 지시고 가십니다. 그 옆에 어떤 여자가 있었는데, 그 여자의 이름이 데보라 라고 전해 내려오는데, 그 여자가 가만히 보고 너무 불상이 여겨서 자기 머리에 썼던 수건을 벗어서 그 땀이나 좀 씻고 가시라고 생각하며 수건을 드렸습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감사히 받더니 얼굴의 땀을 씻었어요. 다 씻고는 고맙다고 하고 그 수건을 다시 데보라에게 주었어요.
데보라가 집에 돌아와서 그 수건을 펴서 보았더니 그 수건 속에 예수의 얼굴이 사진처럼 박혀서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데보라는 이 수건을 항상 보면서 그 때 내가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땀을 흘릴 때 이 수건을 드린 것이 얼마나 감사한가, 그 수건을 볼 적마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 수건 때문에 더욱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고 합니다.
예수 님께서는 오늘날도 우리 한국 거리에 지치고 쓰러지는 백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종로거리를 걸어가고 계십니다. 이와 같은 주님을 위하여 우리가 무슨 일을 얼마나 도울 수가 있겠습니까?
여러분, 수건 하나라도 십자가를 지시고 땀을 흘리며 수고하시면서 서울을 지나가시는 주님에게 바칠 정성이 있습니까? 우리가 수건 하나라도 드리면 그 수건에는 주님의 얼굴이 비칠 것입니다. 주님의 얼굴을 우리가 소유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도우면 이런 모든 것을 통해서 주님의 형상이 우리 마음속에 점점 이루어 질 것입니다. <목자 없는 양>에서

 

 
 



98.악마의 음성

우리가 기도할 때에 무슨 음성이 들린다고 다 하나님의 음성이 아닙니다. 그 음성 가운데 성경에 합치되는 말씀만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악마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경계해야 합니다.
교회 역사를 보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고 하는 사람이 거이 열이면 열 교회에 덕을 세우지 못 했습니다. 교회에 많은 해독을 끼치고 마지막에는 자기자신도 멸망한 사람이 많습니다.

 

 
 



99.레드심짠의 교훈

종교 개혁 당시에 재 세례 파 가운데 째매티스스라는 사람과 레드심짠 이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특별한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했습니다. 문스터라는 곳에 예수 님께서 오래지 않아 재림하신다고 하면서 그곳에 새 예루살렘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성에 웅거하여 왕 노릇까지 한 사람이 레드심짠입니다. 많은 계시를 받는 가운데 마지막에는 계시에 의해서 아내를 열 여섯이나 얻었습니다. 그리고 망했습니다.

 

 
 



101.조셉 스미스의 교훈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에 조셉 스미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소년 때부터 계시를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몰몬 이라는 천사에게 몰몬 이라는 책을 받았다고 하면서 그 책을 영어로 번역해서 다른 사람에게 주면서 새로운 계시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이상한 말도 많이 하고 이상한 이적도 많이 하니까 많은 사람이 따랐습니다. 마지막에는 계시 가운데서 소위 하늘의 결혼이라고 하면서 오, 육십 명의 여자를 얻는 다처주의가 되고 말았습니다.
새로운 계시, 성경에 없는 계시를 받았다고 하는 말에 속지 않아야 합니다.
한국에 한 국주 라고 하는 사람이 그랬다고 합니다. 요새 새로운 계시를 받았다고 사람들이 앞으로 어떤 계시를 받게 될는지 우리가 주의해야 합니다. <신앙의 정로(正路)>에서

 

 
 



102.파스칼의 명상록

유명한 프랑스의 철학가이며 종교가인 파스칼의 전기를 보면 그 사람의 머리는 비상히 좋았습니다. 물리학의 여러 법칙을 젊어서 자기 혼자서 다 발견했습니다. 그 사람이 그 후에 참 위대한 종교가가 되었습니다. 파스칼의《명상록》은 지금도 종교인으로서 읽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 사람이 이와 같은 신령한 은혜를 받은 것은 병을 통해서였습니다.
한 번은 그가 말을 타고 높은 다리를 건너가다가 말이 무엇에 놀라 뛰어 다리 밑에 떨어 졌습니다. 온 몸이 상하고 죽을 뻔했습니다. 수개월 동안 병원에서 치료를 받게 되었습니다. 병석에서 치료하는 동안에 경건한 하나님을 믿는 친구를 만났습니다. 그 사람을 통해서 성경을 읽고 명상을 통해서 하나님의 존재를 분명히 깨닫게 되고 그 가운데서 신령한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파스칼로 하여금 그 몸을 상하게 한 것은 그 병든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하신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103.성 프랜시스

여러분, 프랜시스 이야기를 많이 들으셨을 줄 압니다. 프랜시스도 그렇게 큰 은혜를 받게 된 배후에는 건강해서 뛰어 다니고 말을 타고 다니고 전쟁에도 나가고 할 때 받은 것이 아닙니다. 중한 병을 만나 오래 병석에 누워 있을 그 때에 점점 인생의 깊은 뜻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때에 우리에게 질병을 주시는 것은 질병을 통하여 우리 자신에 대하여 하실 일이 있는 까닭에 질병을 주시는 줄 압니다. 우리 가운데도 질병을 통하여 많은 축복을 받는 줄 압니다.

 

 
 



104.아쳐 토리 박사

여러분 만나 보신 줄 알지만 토리 박사라고(그의 아버지는 유명한 부흥 목사) 지금 우리 한국에 나와서 상의군인을 위해 의 수족을 해주는 분이 있습니다.(지금은 강원도 예수 원 원장) 북 장로교 선교사로 본래 중국에 선교사로 나왔습니다. 제2차 대전 때 피난민을 구해 주느라고 분주히 다니시다가 자동차 사고로 그만 팔이 하나 부러졌는데 아주 상해서 잘라냈습니다. 팔 하나 없는 외팔이 되었습니다. 그 후 미국에 가 있다가 한국에 6·25 사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전쟁이 일어나면 많은 청년이 손발을 읽게되는 것을 생각하고 선교 부에 청해서 그가 한국에 가서 의 수족을 해 줄 마음이 있으니 보내달라고 해서 그것을 선교 부에서 좋게 여겨 그를 내보내서 벌서 삼사 년 전(1951년경)부터 그 일을 여기 세브란스와 대전과 광주 등지를 중심으로 하여 많은 사람에게 의 수족을 해 주며 전도를 합니다.
우리 교회 청년 가운데도 특히 그를 도와주며 그와 함께 일하는 집사 님이 계십니다. 그 분은 삼사 년 전에 아침 예배를 보고 집으로 가다가 갑자기 지뢰가 폭발해서 다리 하나를 잃고 만 것입니다. 물론 처음에 많은 고통을 당하고 많은 애로를 당한 줄 압니다. 그러나 이 청년은 고통 가운데 더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은혜 받고 특히 사업을 구하는 가운데 이런 사업을 택하게 되었습니다.
이 청년은 토리 박사와 킹스베리와 함께 오늘날까지 의 수족 사업을 하고 특별히 많은 전도를 합니다. 우리가 어떤 때에는 불구자가 되고 불치의 병을 가진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 가운데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내가 만일 그런 가운데 있다면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무엇인가 이것을 생각해서 그 일을 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요 책임입니다.

 

 
 



105.반신불수로 명화를 남긴 여인

내가 얼마 전에 어떤 책을 보니까 미국에 알펜스라고 하는 곳에 어떤 여자가 반신불수가 되어 오랫동안 그저 침대 위에만 누어 있는데 이 여자가 반신불수로 살면서, 내가 누어서 한 일이 무엇인가 생각하던 끝에 그림 그리기를 시작했습니다. 누어서 그림 그리기를 배워서 유명한 화가가 되었는데 특별히 알펜스주에 있는 들꽃, 즉 야생화를 전부 다 모아오라고 해서 야생화를 전부 그려 500여 종류를 그렸습니다. 그것을 다른 사람이 다 보고 어떻게 잘 그렸는지 그것을 하버드 대학에서 사겠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주 당국은 이런 보배를 다른 곳에 보낼 수 없다고, 그것을 우리 알펜스 주에서 사겠다고 하여 주의 보배로서 그 예술품을 잘 진열해서 보관한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불치의 병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또한 내 자신이 이렇게 사명 적 견지에서 볼뿐더러 다른 사람이 이런 불치의 병을 앓고 불구자가 된 경우에도 제삼자의 입장에서 사명 적 견지에서 그 병과 불구자를 보아야 합니다.

 

 
 



106.순천의 어떤 청년

이 사회에, 내가 사는 땅에, 이와 같은 병이 많고 이와 같은 불구자가 많으니 어떻게 하면 그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보낼 수 있을까? 생각해야 합니다. 몇 달 전에 순천에 있는 어떤 청년, 그 사람은 나병자가 아닌데 그 근방에 있는 나병환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기관을 설립해 가지고 그 나병 환자를 구호하기 위해서 사방으로 다니며 애쓰는 것을 보고 제 마음 가운데 많은 감격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인간고를 보고 그저 지나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한 사람입니다.

 

 
 



107.부산의 성화원

부산에 성화원 이라고 하는 불구자가 된, 믿는 청년들이 함께 모여서 일하는 모임이 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살길을 개척할 뿐더러 불구 때문에 낙심하고 죄를 범하는 사람이 많으니 그런 사람을 도와주기 위해서 많은 애를 쓰는 사람들입니다. 그 청년들은 자기가 그렇게
불구자가 되어 있지만 사명을 발견한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의 죄도 아니고 부모의 죄도 아닙니다.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고자 함인데, 우리가 그 뜻을 알아서 그 책임을 다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인생 고와 사명감>에서

 

 
 



108. 슬픔을 통해서 받은 은혜

질병은 육체적 고통이지만 그보다 더한 심리적 고통이 있습니다. 때때로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갑자기 어려운 일을 당합니다. 갑자기 부모가 세상을 떠나기도 합니다. 어떤 때에는 남편이, 아들과 딸들이 세상을 떠나기도 합니다. 하물며 6·25를 지난 우리 한국의 동포로 말하면 어떤 고통을 당하지 않는 사람은 없는 줄 압니다.
많은 귀한 청년들이 나가서 돌아오지 아니하고 사랑하는 남편이 돌아오지 아니하고 납치된 후에 소식을 모르고 누구든지 6·25를 통해서 눈물을 흘리지 아니한 사람 없는 줄 압니다.
우리 인생 길을 살아갈 때에 누구든지 눈물을 흘리게 되는데 이 눈물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뜻이 있고 사명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하시는 일이 없다고 할 것이면 우리에게 눈물을 주지 아니하였으리라 믿습니다. 눈물을 통해서도 사명이 있다고 하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109 유명한 신학자 포리

19세기에 있어서 미국의 여러 신학자 가운데 손꼽히는 유명한 신학자 포리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머리를 통해서 많은 신학을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저서도 남겼습니다. 그러나 한번은 자기가 심히 사랑하는 딸이 하나 있었는데 그 딸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처음으로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다음 그는 이번 경험을 통해서 전에 머리를 통해서 깨닫지 못했던 신학을 깨닫고 많은 배움을 얻었다고 하는 말을 했습니다. 이 슬픔을 통해서 슬픔 당하는 사람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일이 있습니다.
슬픔을 한번도 당하지 못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슬픔을 깨닫지 못합니다. 슬픔을 당해 본 사람이 참으로 다른 사람을 동정할 줄 압니다. 슬픔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이 너그러워지고 유화해지고 온유해지고 다른 사람의 사정을 알게됩니다. 슬픔을 통해서 우리의 심령이 완숙해지고 인격이 자라납니다. 슬픔을 통해서 하나님을 찾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슬픔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슬픔을 통해서 남을 위한 일의 사명을 주시는 적이 많이 있습니다.

 

 
 



110.아메리칸 캐론

여러 해 전에 미국에 어떤 돈 많은 부인이 딸 삼 형제가 있는데 이들을 데리고 여름에 구라파와 성지를 구경하기 위하여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가게 되었습니다. 불행이 그 배가 가다가 파선을 당해서 많은 사람이 대서양에 빠져 생명을 희생당하게 되었습니다. 작은 배로 얼마를 구원하느라고 했지만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결국 이 부인은 구원을 받았는데 딸들은 다 죽고 말았습니다. 이 여인이 처음에는 어떻게 할 줄 모르고 많은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고통과 슬픔을 통해서 이 세상에는 자기 부모가 없어서 바로 자라지 못하는 아이들이 많은데 내 딸을 잃었다고 그저 슬퍼만 하고 있는 대신 다른 사람의 아들 딸 들을 기르겠다고 생각을 가지고 성지에 가서, 바로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예루살렘에 가서, 자기 사재 전부를 다 드려「아메리칸 캐론」이란 유명한 고아원과 탁아소를 세웠습니다. 많은 불행한 사람을 위로해주고 봉사한 것입니다. 슬픔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발견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 길을 갈 때에 이와 같이 슬픔을 당하는 사람이 어떻게 볼 것이며, 우리가 무엇 하려고 고아원, 양로원, 모자원을 하느냐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와 같은 슬픈 일을 볼 때에 그 가운데서 하나님 일을 발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려고 하는 사명 적 견지에서 이런 일을 해야합니다.
<인생 고와 사명감 >에서

 

 
 



111.알렉산더 대왕의 실수

알렉산더 대왕 같은 유명한 영웅도 일시에 분노를 이기지 못해서 평생의 동지요, 가장 사랑하는 명장을 죽인 일이 잇습니다, 감정의 절제, 알렉산더 대제가 천하는 정복했지만 자기 자신의 감정은 절제하지 못했습니다. 슬픔의 감정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슬픈 일을 당할 때, 우리가 슬픔도 억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부모를 먼저 이 세상에서 보내지마는 부모상을 당한 때에도 너무 슬퍼하면 오히려 그 당사자에게 손해를 가져옵니다. 그런 까닭으로 옛날부터 이효상효(以孝傷孝)라고 합니다. 효도로서 효도를 상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부모를 조상하고 슬퍼하지마는 효도로서 효도를 상하는 데까지 슬퍼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말에도 절제가 있어야 합니다. 야고보 3장 1절에 야고보 장로가 말씀하시기를“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몸도 굴레 씌우리라”했습니다. 그리고 혀라고 하는 것은 지극히 적은 것이지마는 큰 영향을 가지고 있는데 불과 같아서 온 동래를 사를 수 있는 화근의 발단이 된다고 경계했습니다.

 

 
 



112.술과 담배의 해독

서양 속담에“처음에는 사람이 술을 먹고, 다음에는 술이 술을 먹는다”했습니다. 술이 사람도 먹고, 술이 집안도 먹고, 술이 나라도 먹습니다. 술로 망한 나라가 많습니다. 술 먹고 협잡하고 술 먹고 사바사바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술 마실 시험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이 시간부터 철저히 결심하십시오. 볼 필요도 없습니다. 철저히 금하는 것이 절제입니다.
또 담배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금년에 과학자들이 이 담배에 대해서 연구하는 사람이 많이 생겼는데 바로 지난 6월에 미국 애트란타주에서 미국 의사대회가 열렸습니다. 그 때 미국 암 종 연구회원 가운데 한 사람인 함몬 박사라고 하는 분이 자기가 담배와 암 종 관계를 연구 한 것을 발표했습니다. 이분이 1952년부터 3년간 188,078명의 암 환자를 연구했던 바 그 가운데서 죽은 사람이 8,105명이었으며, 그 중에는 여러 가지 암으로 죽은 사람이 있었으나 폐암으로 죽은 사람이 많습니다. 이분이 특별히 폐암으로 죽은 사람과 담배 피는 사람과의 관계를 자세히 연구했습니다. 거기 담배 안 피는 사람도 폐암이 생겼지만 병든 사람 십만 명 가운데 담배로 죽은 사람은 816명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루에 담배 한 갑 이내 피는 사람은 폐암에 걸린 사람 십만 명 가운데 128명이 죽었습니다. 또 하루에 한 갑 이상 두 갑까지 피는 사람은 227명 죽었습니다. 하루에 두 갑 이상을 피는 사람은 460여명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이 분의 연구결과로 보건대 암과 담배의 관계에서 담배는 암에 직접 금물이라는 것을 여러 사람이 보고했습니다.
만하탄에 암 연구소가 있고 그 연구 소장으로 어네스트 윈더 박사가 있는데 이분이 지금부터 17개월 전에 흰쥐를 가지고 실험을 했는데 흰쥐에다가 담배 진을 자주 발랐더니 그 담배 진으로 인해서 암 종이 생기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직접 니코틴과 암과의 관계가 있다는 것을 실험해서 발견했습니다.
또 윈더 박사가 연구한 책이 작년(1958)에 나왔는데《담배의 생물학적 영향》이란 책이며 그 책 가운데는 담배와 암이 어떠하다는 것, 담배와 심장병이 어떠하다는 것, 소화 계통과 신경계통에 악 영향을 준다는 것 등을 과학적으로 증명했습니다. <신앙 생활과 절제>에서

 

 
 



113.삼등차 타고 가는 천국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생을 얻었으며 이 영생을 얻은 줄 아는 것이 필요한 줄 압니다. 이것을 우리가 알아야 하나님 앞에 언제든지 감사하는 생활을 할 줄 압니다. 또 만일 내가 영생을 얻지 못했으면 그것을 알아야겠습니다. 그리해야 우리가 영생을 얻도록 힘쓰겠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영생을 얻고도 스스로 얻은 줄 알지 못하면 신앙생활을 하기는 하지마는 그 사람에게 만족과 기쁨이 별로 없습니다.
무디 선생이 웃는 말로 하는 말씀가운데 그런 사람도 천당에 가기는 가지만 비유로 말하면 삼 등차 타고 천당에 가는 사람과 마찬가지라 했습니다. 일등 차 타면 편안하게 기쁘게 갈 수 있는데 삼 등차도 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 가지로 괴로운 일이 많습니다.
내가 영생을 얻고도 얻은 줄 분명히 모르고 믿는 사람도 천당에 가기는 가지만 그 사람에게는 만족과 기쁨이 없습니다. 그 뿐만 아니고 내가 영생을 얻고도 이것을 분명히 알지 못하면 알지 못하는 까닭에 잘못된 길로 나가기 쉽습니다. 혹 어떤 사람이 이상한 이론을 주장하면 아 그 이론이 옳은 가하고 따라가기 쉽습니다. 그리해서 오늘날 볼 것이면 오래 믿던 이도 어떤 이는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데 따라가는 이도 있고 소위 심령통일교회로 따라가는 이도 있고 여러 가지 이상하게 예배보는 데 따라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상태에서 이런 일이 생기느냐하면 내가 아직도 분명히 영생 얻은 것을 알지 못하는 까닭에 행여나 어디에 좀더 나은 것이 있는가 생각해서 여러 가지 사이비한 교를 따라갑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생을 얻는 것이 첫째로 필요하고 둘째로 영생 얻은 후에는 우리가 영생 얻은 것을 확실히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134.사람에 따라 다른 중생의 경험

중생의 경험은 사람에 따라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이 경험이 갑자기 옵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의 경험을 잘 압니다. 아무 때 회개하고, 그때부터 영생 얻었다고 잘 압니다. 가령 사도 바울 같은 이, 다메섹에 가다가 갑자기 그런 경험을 하였습니다. 또 빌립보에서 간수 같은 이, 사도 바울을 만나서“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으리까?”고 묻고 이에 대해“예수를 믿으라”는 권면에 의하여 구원을 얻은 경험은 갑자기 된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분들은 이 경함이 천천히 옵니다.
여기 열두 사도가 믿은 경험은 갑자기 온 것 같지 않습니다. 예수 님과 접촉함에 따라서 천천히 온 것 같습니다. 여기 오늘날도 특별히 믿는 가정에서 자라서 어릴 때부터 성경을 배우고 점점 종교 교육에 의해서 자라난 사람은 이 경험이 갑자기 오지 않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언제 내가 이런 경험 얻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비유에 말하면 가령 고치 속에 있는 번데기가 변해서 나비가 됩니다. 점점 날개도 자라고 수염도 나고 해서 번데기가 변해서 나비가 됩니다. 그러나 나비가 된 후에는 한 번은 아무래도 그 고치 구멍을 뚫고 나옵니다. 아무리 천천히 되지만 나비가 되면 그 고치 구멍을 뚫고 나와서 맑은 공기를 먹으며 공중에 날아다닙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믿는 가정에서 자란 청년들도 번데기가 천천히 변해서 나비가 되어서 고치 구멍을 뚫고 나오듯이 새 사람으로 변하는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죄악 가운데 있다가 갑자기 되지는 않지만 한 번은 온전히 생활이 변하는 그 단계가 있는 것입니다.
제 경험을 말해서 미안하지만 제가 9세부터 믿었습니다 믿는 소학교, 믿는 중학교, 믿는 대학교를 다니고 제 경험을 볼지라도 종교교육이 점점 장성한 것을 압니다.
한 번은 제가 22세 때에 구미포에 가서 어떤 달밤에 홀로 산보하다가 그날 저녁에 특별한 은혜를 받아서 그날 저녁 모래 위에 꿇어앉아서 온전히 하나님 앞에 기도하든 사건을 내 일생을 통해서 잊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온전히 여러분의 일생을 통해서 그리스도에게 의탁한 그런 경험이 있는 분은 누구든지 영생을 얻었습니다.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영생의 확신>에서

 

 
 



135.어느 목사의 죽음 앞에서의 화해

제가 어느 곳 누구라고 말하기 어렵지만 제가 잘 아는 곳에 잘 아는 목사님 가운데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도 큰 교회문제로 노회에 두 파가 갈려서 그 두 파가 오랫동안 분규하고 어지러운 일이 있었습니다. 그려다가 그 한 파의 수령 격되는 분이 병이 들어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이 목사가 하나님을 대면할 준비를 할 때 가만히 생각하니까 자기가 동역 하는 어떤 분에 대해서 마음 가운데에 담을 쌓고 미워하는 마음이 양심에 찔렸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보내어 그 목사를 청해서 자기 잘못을 다 말하자 그 목사도 자기 잘못을 서로 말하고 서로 화목하고 그 후 며칠 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만일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인 줄 알고 매일 매일 생활한다면 성경의 말씀과 같이 분을 내어도 그날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않고 그 이튿날까지 오래 그런 마음을 품고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인 줄 안다고 할 것이면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 다른 일 하지 않고 먼저 기도하고 성경 읽었을 줄 압니다. 또 온 가족이 모여 앉아 가족 기도회를 가졌을 줄 압니다. 전에 내가 들으니까, 개천에 계시던 황 목사님은 내일이면 자기가 세상을 떠날 것을 알고 오늘 자기 가족은 말할 것도 없고 온 제직도 다 함께 모이게 한 다음 나는 내일 이 세상을 떠날 하나님의 지시가 있다고 하며 우리가 다 같이 예배 드리자고 하면서 다 같이 모여 예배드리고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이런 분은 예외로 자기가 세상 떠날 것을 알고 가족 기도회와 제직 기도회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보통 우리는 모릅니다. 우리가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로 안다면 아무리 분주해도 마지막 날 기도회를 가질 것입니다.

 

 
 



136.요한 웨슬레 목사

내가 마지막 날인 줄 알고 그날이 주일이라고 하면 아무리 세상에 어려운 일이 있어도 다 제쳐놓고 예배당에 나아와 예배들일 줄 압니다. 또 주님 앞에 예배할 때에 헌금하는 것이 있다면 또 특별히 일 년 동안을 감사하는 감사절이라고 하면 마지막 헌금이니까 정성을 다해서 할 줄 압니다. 어떤 여인이 요한 웨슬레 목사에게 와서 묻기를“만일 목사님이, 이 세상에서 오늘이 마지막 날 이라고 할 것이면 무엇을 하겠습니까?”하였습니다. 이 목사가 가만히 생각하다가 대답하기를“자매 님 내가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고 해도 지금 오늘 내가 하여야겠다고 생각한 것을 할 것 박에 없습니다”하니까 이 여인이 놀랐다고 합니다. 마지막 날이라고 할 것이면 다른 것을 다 치우고 조용히 집에서 기도하든지 하리라고 대답할 줄 알았는데 가만히 생각하다가 내가 오늘 맡은 이 일박에 할 수 없다고 대답하였기 때문입니다.

 

 
 



137.어떤 권사 님

제가 바로 이 문제를 생각하면서 토요일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고 하면 무엇을 하여야 할까? 하고 스스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바로 이제 토요일인데 여덟 시에 우리 권사 님 중에 한 분이 환갑이라고 청하니 마지막 날이라도 환갑에 갈 수박에 없습니다. 그 다음 열두 시에는 우리 경로원 창립 기념일로 꼭 오라는 부탁을 받았는데 가만히 생각하니 마지막 날이면 창립 기념에 더 가야겠어요. 그러니까 이것도 해야 할 일이고 오후 두 시에는 우리 교회 장로님의 아들 결혼식이 있는데 아버지도 없으니 꼭 가서 결혼식을 해 주어야겠어요. 이런 저런 일들을 생각하며 스스로 돌아 볼 때 내가 마지막날을 당해도 내가 할 의무를 다 해야겠다는 생각이 제 마음 가운데 들어 왔습니다.
우리가 매일 매일을 마지막 날처럼 사는 지혜로운 방법은 우리가 무슨 일을 맡았든지 충실히 행하면 우리의 생활이 바르게 된다고 하는 말씀인 줄 압니다. 그리해서 우리가 어떤 처지에 있든지 매일 매일의 임무를 충실히 감당한다고 할 것이면 언제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른다고 하여도 우리는 준비되어 있을 것입니다.

 

 
 



138.영국 청교도의 국회 의원

이런 이야기를 오래 전에 책에서 읽었습니다. 청교도 시대 영국에서 의회가 모였습니다. 여러 가지 나라 일을 의논하는데 그 때는 신앙이 좋은 영국 사회인지라 많은 사람이 예수께서 재림하지 않을까 하는 말세 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국회에 모여 의논하는 가운데 갑자기 천지가 변하고 하늘에 이상한 징조 같은 것이 나타났습니다. 이렇게 되자 여기에 모였던 여러 의원들의 징조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주님께서 재림하실 지 모르겠는데 주님이 재림하신다면 우리가 이렇게 국회에 앉아 있기만 하면 될 수 있는가 어서 폐회하고 주님 맞이할 준비를 하자고 어떤 국회 의원이 말했습니다. 그리자 어떤 청교도 국회 의원 한 사람이 일어서면서“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만일 이 시간에 주님이 재림한다고 할 것이면, 곧 주님께서 우리 국회에 임한다고 할 것이면, 우리 국회 의원이 여기 그대로 앉아서 여러 수 천 수 만 사람을 대신해서 하는 이 의무를 충성스럽게 담당해야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볼 때에 주님께서 더 기뻐하실 줄 압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실 것이 더 가까우므로 우리의 의무를 더 잘 하여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매일 매일을 더 충실히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오늘이 너의 마지막 날이라면>에서

 

 
 



139.성 프랜시스의 감사

사도행전을 보면 바울이 로마로 가는 도중에 40일 동안이나 풍란을 만나서 말할 수 없이 피로하고 약한 가운데서도 먼저 하나님께 감사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외적 세계 혹은 환경은 우리가 쓰는 안경 빛에 따라서 다르게 보입니다.
검은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면 온 세상은 검게 보입니다. 그렇지만 분홍빛 명랑한 빛깔의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면 온 세상은 아름다워 보입니다. 믿음의 안경을 쓰고 보면 보통 사람에게는 검게 보이는 것도 아름답게 보입니다. 검은 구름에도 햇빛이 비치면 무지개로 보입니다. 근심의 안개, 슬픔의 구름에도 그리스도의 빛을 비추면 빛나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변하여집니다. 성 프랜시스의 「태양의 노래」를 읽어보면 이 프랜시스가 세상의 모든 일을 다 바라보며 하나님께 감사한 노래가 있습니다. 해를 위해 감사하고 달을 위해 감사하고 뭇 별들을 위해 감사하고 산천 초목을 위해 감사하고 형제자매들 위해 감사하고 모든 것을 다 감사하다가 마지막에는 죽음까지 자기 자매 라고 부르며‘내 자매의 죽음’을 위해 감사하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죽음도 주안에서의 죽음은 감사로 변했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라>에서

 

 
 



140.하나님의 사랑의 호수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 3장 16­17)
오늘 읽은 말씀은 우리가 다 어렸을 적부터 기억하는 말씀이올시다. 간단한 말씀 가운데서 우리는 기독교의 중심 되는 진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구절 가운데 하나님이란 말, 사랑이라는 말, 독생자를 보내셨단 말, 믿음, 또 영생이란 말이 있습니다.
어떤 학자는 이 구절을 4부분으로 다음과 같이 구별하고 이름지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는 부분을「하나님의 사랑의 호수」라 이름지었습니다. 여러분, 백두산 꼭대기에 올라가면 천지라는 큰 호수가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의 호수 다음에 나오는「독생자를 주셨으니」하는 이 구절은 이 호수에서 흘려 내려오는「하나님의 사랑의 강」이요,「누구든지 저를 믿으면」하는 이 부분은「사랑의 물을 떠서 마실 수 있는 그릇」입니다.
아무리 좋은 물이 흐른다고 하여도 그릇이 있어서 그 물을 마셔야 우리의 기갈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 그릇은「믿음」입니다.「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는 넷째 부분은「사랑의 결과」입니다.
「큰사랑의 호수」에서 흘러내리는「사랑의 강물」을 사랑의 그릇인 믿음으로서 마시는 자는 누구든지「멸망하지 아니하고 영생을 얻으리라」이렇게 해석을 한 학자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서

 

 
 



141.회개와 보상

상고사 가운데 민족들이 유럽을 점령해서 사방으로 흩어질 때 오스트로 고드라고 하는 족속이 이태리 평원을 점령하고 오스트로 왕국을 건설한 때가 있었습니다. 그 왕 가운데에 데오도링이라는 유명한 왕이 있었습니다.
삼십여 년 동안 이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또 여러 가지로 보아 좋은 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말년에 혈기를 못 이겨서 무죄한 두 사람을 억울하게 죽였습니다. 한 사람은 보에디오스 또 한 사람은 디메키스라고 하는 사람인데 비참하게 목 달아 죽였습니다. 그 다음 왕 자기가 실수 한 것을 알고 항상 후회하였습니다. 양심의 가책을 받아서 늘 후회했습니다.
어떤 날 저녁에 특별히 좋은 요리를 만들어 왔는데 그날 저녁 특히 요리 인이 생선으로 좋은 요리를 만들어 왔습니다. 왕이 생선을 볼 때 생선의 빨간 눈알을 들여다보니, 거기에서 자기가 죽인 사람의 눈알이 보였습니다. 생선의 아가리에 날카로운 이빨을 볼 때 마치 자기가 죽인 두 사람이 자기에게 원수를 갚으려고 이를 악물고 뛰어나오는 것 같아서 무서웠습니다. 이 데오도링 왕이 너무 무서워서 나는 불편해서 저녁을 먹지 못하겠다고 하고 자기 침상에 돌아가서 누웠습니다. 얼마나 무섭든지 그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삼일 후에 죽었습
니다.
죄라는 것은 무섭습니다. 우리 인생이 다 죄를 무서워합니다. 그러나 죄를 단순히 무서워한다고 이것이 참 회개는 아닙니다.

 

 
 



142.열매 있는 회개

참 회개는 무엇입니까? 이사야 55장 7절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 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 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했습니다. 회개하는 것은 죄를 깨달아 알고 후회하고 무서워할뿐더러 죄가 이렇게 무서우므로 그 자리에서 일어나서 마음을 돌이켜서 도로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 회개입니다. 죄가 무서운 줄 깨달아서 그 자리에 그냥 앉아 있지 않고 일어나서 마음을 돌이켜서 주께로 나오는 것입니다.
가령 여기 어떤 청년이 오는 주일날 공일인데 청량리 요리점에 가서 놀기나 하겠다고 나간다고 합시다 나가는데 사방에서 종소리가 울립니다. 아 이것 주일날인데 이렇게 다 예수께 나와 예배하라고 종소리가 나는데 내가 이렇게 딴 방향으로 가서 되나 하여 그 마음이 돌아섰습니다.
그 때에 그 청년 마음이 돌아섰다면 그 청년의 몸까지 돌아설 것입니다. 몸까지 온전히 돌이켜서 자기가 가던 방향에서 돌아서서 반대방향으로 오게 될 때에 그것이 온전히 회개입니다.
요새 말로 말하면 180도 전환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이렇게 180도로 돌아선다고 하면 몸도 돌아서야 하는 것입니다. 반드시 회개에는 행동 곧 실행이 따르는 것입니다.

 

 
 



143 무디 선생 일화

미국의 유명한 무디 목사의 전기 가운데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그 목사가 어떤 곳에 가서 부흥회 할 때 어느 저녁 어떤 청년이 와서 말하기를“제가 시내 어떤 상점에서 점원으로 있는데 불행히도 한달 전에 돈 1500불 훔쳐다가 다 쓰고 지금 950불밖에 없는데 이번 이 부흥회에 참석하면서 생각해보니 내가 큰 죄를 지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제가 꼭 이 돈을 갚아 주어야 되겠는데 남은 것이 950불 박게 없고 채울 돈이 없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제가 그래서 생각하기를 남은 것 950불을 꼭 쓰지 않고 이것을 가지고 장사를 잘해서 1500불이 된 다음에 꼭 갖다 갚으면 어떻겠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무디 선생이 가만히 생각하다가 하는 말이 내 생각 같아서는 그 도적질한 돈을 가지고 장사한대야 장사가 잘될 것 같지 아느니 그 남은 것을 가지고 가서 갚아주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청년 하는 말이 이것을 가지고 가야 어떻게 부끄러워서 갈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나하고 같이 가서 사정을 다 말하고 갚아 주자는 것입니다. 그 청년을 대리고 가서 그 사정을 다 말하고 청년의 수중에 남은 돈 950불을 갚아주었습니다. 그 주인은 놀라서 눈이 둥글 해 지면서 입을 다물지를 못 합니다. 그 주인은 두 번 놀랐다고 합니다.
첫째는 그 청년은 그런 청년인 줄 몰랐는데 훔쳤다고 하는 사실에 놀라고,
둘째는 이 청년이 회개하고 가져온 것에 놀랐습니다. 그리면서 이 주인 하는 말이 이 청년 이렇게 회개하고 돌아왔으니 이전보다 이제는 더 신용할 수 있고 또 모든 죄 다 용서하고 이것도 감사히 받겠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일은 미국에만 잇는 것은 아닙니다.

 

 
 



144.나의 간증

제 일생에서도 이런 일을 가지고 와서 의논하고 갚아 준 일이 여러 번 있습니다.
정신적인 면, 도덕적인 면에 있어서 내 죄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끼친 것 있으면 명예 적으로나 어떤 면으로든지 갚아 주려고 힘쓰는 면이 없으면 참된 회개는 아닙니다.
바로 20년 전인가 봅니다. 신문을 보니까 방탕하게 살던 청년이 예수를 믿고 회개한 후에 그가 방탕한 생활을 해서 많은 죄악을 쌓았는데 어떻게 하면 이 사회에 갚을 수 있을까 해서 생각한 나머지 특별히 걸인을 구제하는 사업을 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이 일종의 사회적 보상입니다.
사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그 죄에 인한 결과는 나만 형벌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 나와 아무 관계없는 사람도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우리가 죄 지은 것 다 갚을래 야 갚을 길 없습니다.

 

 
 



145.톨스토이의《부활》의 주인공 이야기

여러분 톨스토이의《부활》이란 책을 읽은 일이 있을 줄 압니다. 거기 어떤 귀족 청년이 자기 숙모네 집에 있는 카추사라는 순진한 여자를 유인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가련한 여자는 그 귀족 청년에게 정조를 유린당하고 그 집에서 쫓겨나고 마지막에는 점점 떨어져서 창녀가 되고 나중에는 살인과 강도 혐의를 받고 어떤 법정에 서게 되었습니다.
이 청년이 무심하게 재판정에 배심원이 되어서 들어가 보니까 어떤 여자가 재판을 받는데 가만히 보니까 몇 10년 전에 자기가 정조를 유린했던 카추사라는 여자입니다. 이 청년 가만히 생각하니 자기의 일시적 죄악으로 말미암아 그 여자의 일생을 그르쳤습니다.
이 청년은 무엇을 해서든지 갚으려고 애써보고 그 가운데서 좋은 사람 만들어 보려고 애쓰면서 시베리아까지 따라갔었으나 헛되게 돌아옵니다. 그런고로 죄는 무섭습니다.

 

 
 



146.슈바이처가 아프리카로 가게 된 동기

특별히 청년 시대에 죄를 삼가야 할 것은 청년 시대에 죄를 잘못 지으면 나만 망치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의 일생을 망치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 청년이 그 후에 회개해서 그 영혼이 구원을 얻었다 하더라도 그 죄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에게 끼친 죄의 결과는 다 갚을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할 수 있는데 까지는 갚아 주어야 합니다.
알버트 슈바이처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독일의 선교사시요, 철학 박사, 신학 박사, 음악 박사, 의학 박사십니다.그는 아프리카 밀림지대에 가서 그 부인과 같이 흑인들의 상처를 싸매 주고 수술을 해주고 흑인과 같이 살면서 그 일생을 그 흑인에게 선교하고 도와주었습니다.
슈바이처가 독일 안에서 유명한 대학 교수 자리를 다 내놓고 아프리카로 간 동기 가운데 중요한 동기가 무엇인가 아십니까?
한번은 공원을 지나갈 때에 거기 흑인의 동상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흑인의 동상을 볼 때 과거 100년간 백인들이 아프리카에서 흑인들에게 지은 죄악이 생각났습니다. 그 사람들을 무지하다고 잡아다가 종으로 팔았습니다. 그뿐 아니라 현지에 가서는 그들을 학대했습니다. 짐승처럼 대우했습니다. 착취해서 모은 돈으로 자기네 나라에서 잘 살았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과거 백년동안 백인들이 아프리카에 가서 흑인에게 지은 죄를 만 분지 일이라도 보상할 수 있을까?’백인들이 저지른 죄악을 갚기 위해서 슈파이처는 아프리카로 갔습니다. 이것도 사회적 보상입니다.
참 회개에는 열매가 있고 실행이 따릅니다. 어떤 목사님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어떤 작은 교회에 가서 부흥회를 하는데 도무지 은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날 아침 장로 한 분이 일어나서 하는 말씀이“이번 부흥회에 은혜가 없는 것은 모두 다 제 죄인 줄 압니다. 제가 이 교회의 장로라고 하면서도 지금까지 어떤 직분을 받은 분하고 한 교회에 있으면서 담을 쌓고 서로 외면하고 지냈습니다. 제가 이제 이 죄를 자복(自服)합니다”하면서 그 사람에게 가서 자기 잘못을 자복하고 회개했습니다. 그 후부터 그 교회에 큰 은혜가 있었다고 합니다. 참 회개는 열매가 있습니다. <회개의 보상>에서

 

 
 



146.인생의 연대성

오늘날과 같이 과학의 발전으로 말미암아 통신망 교통망이 극히 발전된 이러한 세계에는 이 인간 생활의 연대성이란 일 국부에만 한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서로 연계가 되는 것입니다.
가장 비근한 예를 들면 1956년 1월 13일 저녁 방산 시장에서 일어난 화재를 생각하여 봅시다. 신문지상을 본대로 말하면 어떤 노인이 술에 취하서 촛불을 켜놓고 자다가 부주의한 탓으로 그만 촛불에서 불이 났다고 합니다. 가련하게도 나이 많은 노인은 그 불에 자기도 타죽고 말았으니 그 얼마나 비참한 죽음입니까. 그러나 그 비참(悲慘)은 그 노인 한 분에게만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 노인 한 분의 실수로 말미암아 시장 안에 있던 물건과 건물은 말할 것도 없고 그 노인과 아무 상관이 없는 2백 세대 이상이 그 화재로 말미암아 많은 손해를 보고 한지에 나와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인간 생활이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뗄래 야 뗄 수 없습니다.
저 태신호(太信號) 사건을 보십시오. 신문지상에 보도된 대로 갑자기 3등 객실에서 불이 났다고 합니다. 그 배에는 65명의 3등 선객이 있었다고 합니다. 불이 일어나게 됨으로 선장은 명령해서 하나 박게 없는 3등 실 문을 밀폐하였다 고 합니다. 물론 그의 생각에는 그렇게 해서 다른 객실의 연소하는 것을 방지하려고 그렇게 한 것으로 압니다. 하여간 그 때에 그의 머리가 잘못 돌아감으로서 65명의 선객이 질식해서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한 사람의 일시적 잘못 판단이 그 배를 타고 사랑하는 고향에 사랑하는 양친을 뵈려고 가던 사람, 친척집에 가던 사람, 장사하려고 집을 떠난 65명의 생명이 일순간에 희생되고 말았습니다. 인간 생활이란 이렇게 연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은 다 한 배에 타고 항해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 배 가운데에 탄 어떤 사람이 그릇된 행동을 함으로써 잘못 된다면 그 배에 탔던 선객 전원에게 그 영향이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인간 생활의 연대성을 생각할 때 내 생활을 얼마나 조심하여야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게만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일상 생활에도 관계되는 까닭입니다. 병도 그렇지 않습니까?
내가 어떤 전염병으로 앓게되면 나 혼자만 앓게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좋지 못한 병이면 내 가족에게 미치고 우리 이웃에게 마지막에는 온 동네에 전염될 우려가 있는 것입니다.
세계 제1차 대전 후에 소위 서반아(西班牙) 감기라고 하는 것이 어떤 한 사람에 의하여 감연 유행되었는데 이상히도 이 독 감기가 온 세상에 다 퍼져 우리 한국에까지 와서 그 때 우리 학교에 다닐 때에 휴강하고 공장이 폐업한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독감으로 죽은 사람이 제1차 대전 때 죽은 사람보다 더 많았다고 합니다. 인간 생활이란 이렇게 연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죄악도 역시 연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앞서 화재의 이야기를 했지만 1930년 대 바로 음력 세밑 때, 신의주 채소거리에서 큰불이 일어나서 80여 세대가 전소를 당한 일이 있습니다. 그 때에 화재의 원인이 무엇인가 아십니까?
그 때 신문 보도로 지금까지 기억되는 대로는 어떤 가난한 부부가 촌에서 신의주로 이사를 했습니다. 이 가난한 부부는 이사와서 그저 안 먹고 안 입고 아끼고 어떻든지 힘을 다해서 부지런히 사업하고 아침 일찍이 일어나 노력하기를 5, 6년 동안 하니까 그때 돈으로 여러 만원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니 자연히 이상한 마음이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전에 없던 유혹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옷도 깨끗이 입을 마음이 생기고 집도 좀 크게 짓고 살게되고 부인은 값비싼 치마 저고리와 화장품을 사들이게 되었고 남편은 전에 가지 않았던 술집을 점점 드나들게 되고 마지막에는 어떤 첩까지도 얻게되었다 합니다. 그리고는 그 다음에는 저녁마다 남자는 항상 자기 집에 있지 아니하고 더욱이 음력 명절 때가 되어도 자기 집에 오지 않았습니다.
촌에서 가난하게 살다가 도회지에 들어와서 같이 입지 않고 먹지 않고 노력을 해서 돈 좀 벌게되니까 남자는 그 돈을 가지고 그러한 재미만 보게되니 그 여자의 마음이야 어떠하겠습니까? 그날 저녁에 신문지상에 보도된 대로 보면 부인이 밤새도록 이제나 돌아올까 조금 있다 돌아올까 고대하여 한시가 되어도 들어오지 않음으로‘옜다 돈이 있기에 그런 방탕한 일을 하지 돈이 없으면 그런 짓을 하겠는가? 이 집을 불사르고 나도 불에 타 죽겠다’이렇게 결심하고 그만 집에 불을 질렀다고 합니다.
그 결과는 그 집만 탄 것 아닙니다. 그 집과 아무 상관없는 80여 세대가 손해를 보게 되었습니다. 보세요, 남자의 허랑 방탕한 죄와 음란한 죄가 여자의 질투와 분노의 죄로 변했습니다. 이것을 소위‘에네르기(에너지) 변화’라고 합니다. 그 질투의 불이 실지 화재로 변했습니다. 그 실지 화재는 80여 세대의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까지 못 살게 하였습니다. 이것을 죄의 연대성이라고 합니다.

 

 
 



147.두 푼 들어 한푼 짜리 돈을 땜질한 노인

사회를 위하는 것은 결국 나를 위한 것이요, 민족과 국가를 위하는 것도 결국 나를 위하는 것인데 이것을 전혀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오늘날 우리 사회에 너무 많습니다.
우리 옛말에 이런 이야기가 있지 않습니까? 그 때 엽전(葉錢)이 있을 때인데 엽전에는 구멍이 있어서 잘 못하면 두 동강이 나기 쉽습니다. 어떤 노인이 한푼 짜리 엽전을 잘 못 다르다가 부러졌습니다.
그래서 결국 땔 수밖에 없어서 땜하는 사람더러 때어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땜하는 사람이 하는 말이“좀 비용이 들것인데요, 두 품만 주십시오”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노인은 가만 생각하다가“그래도 때어 주십시오”하고 말하면서 엽전 두 푼을 주고 엽전 한 푼을 때 가지고 집에 왔습니다.
그러니까 아들과 딸들이 그 말을 듣고“아버지 그 무슨 일을 그렇게 하셨습니까? 한 푼 아끼려고 두 푼을 주시다니 요?”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아버지 되는 노인이 하는 말이“애들아 그런 것이 아니다. 부러진 이 엽전을 그냥 내버려두면 한푼은 아주 없어지고 마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이 부러진 한푼 짜리 엽전을 두 푼 주고라도 때면 비록 나는 한 푼을 손해 볼지라도 우리 나라로 볼 때에는 한 푼의 이익을 보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간단한 우스운 이야기이지만 우리가 배울 진리가 많은 줄 압니다. 즉 우리의 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적은 것만 보지 말고 또 눈앞만 보지 말고 큰 민족 전체, 국가 전체를 보고 올바로 살아야 합니다. <인간 생활과 연대성>에서

 

 
 



148.독일 화가 스턴벅이 그린 성화

아마 여러분 독일의 유명한 화가 스턴벅에 대한 이야기를 다 들었을 줄 믿습니다. 그 때 보통 유명한 화가면 성화를 한 장 그려야 화가로서의 명망(名望)을 얻는데 스턴벅도 그런 생각 가운데서 한번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에 못 박히는 모습을 그릴 결심을 했습니다. 그 결심을 하고 자기가 아는 데로 자기가 듣는 데로 또 성경에 있는 데로 모든 배경을 연구하고 그 때 있던 사람들을 성경에서 자세히 읽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모습을 그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절반쯤을 그린 후에 한 번은 거리에 나가 다니다가 어떤 얌전한 여자를 만났습니다. 그는 여자를 보는 순간 그 여자를 그릴 생각이 났습니다. 그 여자를 따라가서 내가 당신을 꼭 그리고 싶은데 당신이 내 모델이 되어줄 수 있겠느냐? 고 했습니다. 그 여자가 쾌히 승낙해서 그는 그 여자를 자기 방에 대리다 앉혀 놓고 얼굴을 그리기 시작하였습니다.
한편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그리다가 채 그리지 못하고 그대로 있고 한 편에서는 그 여자의 얼굴을 그리는 중입니다. 이 여자는 전혀 그리스도의 종교에 대해서는 모르는 집시 여자인데 가만히 이 십자가 그림을 보더니 이 여자가“저 사람은 저렇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을 보니까 필경 죄를 많이 지은 모양이군요”하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이 사람이 깜짝 놀라서“그런 것이 아니고 이 분은 죄가 없는 사람이올시다. 사실 이 분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많은 사람의 죄를 대신해서 못 박힌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 여자가 듣더니“정말 그렇다면 그 분이 당신의 죄를 위해서도 죽으셨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지금까지는 만민의 죄를 위해서 죽으셨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믿었지만 사실 예수 님께서 내 죄를 위해 죽으셨다고 생각해 보지 못했었습니다. 그래서 그 말에 대답을 못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그 질문이 자꾸 그의 마음 가운데 들어왔습니다.‘그가 과연 내 죄를 위해서도 십자가에 못 박히셨나?’를 생각하는 가운데 성신의 크신 은혜를 받아서 예수 님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만민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힐뿐더러 자기의 죄를 위해서 자기를 죄악 가운데서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음을 깨닫고 그 다음부터는 그 여자를 그리던 것을 그만두고 채 마치지 못한 그림 앞에서 그 그림을 그릴 때마다 먼저 그림 앞에서 간절히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어떻든지 내 죄를 대속(代贖)한 우리 주님의 얼굴을 바르게 그리게 하여주소서”라고 간구(懇求)하며 눈물로써 그 그림을 마쳤습니다.

 

 
 



149.성화에 감동 받아 헌신한 진젠돌프 백작

그 이후 이 그림이 어떤 박물관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그림 저런 그림을 구경하려 옵니다. 그 때 독일의 젊은 백작 중의 한 사람이 이런 그림 저런 그림을 보다가 어떤 구석에서 예수 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그 그림을 보았습니다. 전에는 무심히 성화를 많이 보았지만 그 날은 이상하게 무심히 볼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 님의 얼굴이 말하자면 그 젊은 사람의 마음을 붙잡아서 물러 갈래야 물러갈 수가 없어서 오래 그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아래에『나는 너를 위하여 이 일을 하였건만 너는 나를 위하여 무엇을 하느냐』하는 글자를 썼는데 그 글자가 예수 님께서 친히 자기에게 말하는 것과 같이 생각되어 그 자리에 앉아서“오 주님이시여 주님께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서 고생을 당하시고 죽으셨는데 나는 주님을 위하여 무엇을 하겠습니까?”하고 온전히 그 몸을 주님께 바쳤습니다.
이 분이 우리가 잘 기억하는 모라비안 교회의 진젠돌프라는 사람이올시다. 18세기에 많은 피난민을 모아 가지고 그 사람들과 같이 기도하며 그 사람들과 같이 교회를 조직하여 몇 사람 안되지만 온 천하에 선교운동과 경건 운동을 일으킨 유명한 백작 진젠돌프라는 사람입니다.
진젠돌프만이 아니올시다. 어떤 순교자의 생활이나 순교자까지의 영광을 받지 못했지마는 참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생활을 가만히 더듬어 보세요. 그 가슴속에 그 사람의 생활의 깊은 동기가 어디서 우러나옵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이올시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그 몸을 바치셨습니다. 그런데 나는 주님을 위해서 무엇을 합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이 모든 사람을 권면(勸勉)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강권>에서

 

 
 



150.성 안토니의 의로운 분노

역사를 통해서 보면 의분에 이기지 못하여 주의 일을 한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수도원 제도의 원조가 된다는 성 안토니의 전기를 보면 아주 재미있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본래 돈 많은 부잣집에 태어났습니다. 또 지위도 상당한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소년 때 한 번은 성경을 펴서 읽어 내려가다가 마태복음 19장을 읽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그는 어떤 돈 많은 부자가 예수 님께 와서 영생을 얻는 비결을 묻는 기록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 때 예수 님께서『네가 이 모든 십 계명을 알지 아니하냐?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이런 모든 계명을 말하시면서『 네가 이 모든 계명을 지키면 영생을 얻을 것이 아니냐?』고 말하셨습니다. 그는『그 계명은 내가 어릴 때부터 다 지켰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 님께서 하시는 말씀이『그러면 좋다 네가 이제 한가지 할 것이 있는데 가서 네 있는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구제하라 그리고 나를 따라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이 청년이 예수 님의 이 말씀을 듣고 돈이 많은 까닭에 성경에 기록한 대로 『근심하고 돌아갔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안토니는 이 성경을 읽다가 예수 님께서 이 청년에게 하시는 말씀이 곧 자기에게 하시는 말씀임을 깨달았습니다. 이것을 읽다가 예수 님의 말씀을 들은 그 부자처럼 돈이 많은 까닭에 그대로 하지 못하고 나도 근심하며 물러가야 되느냐?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그 때 그의 마음속에 격분이 일어났습니다.‘그 때에 그 부자는 예수 님 말씀대로 순종을 하지 못하였지마는 오늘 나는 이대로 순종하겠다’그래서 성경을 덮어놓고 자기 집에 갔습니다. 자기에게 있는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을 다 구제하고 자기 누이동생에게 먹을 것을 좀 주고 자기는 아무 것도 없이 혈혈단신이 되어서 온전히 주님 앞에 몸바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안토니의 그 생활도 말하자면 의로운 분노 가운데서 그런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151.루터의 의분

바로 지난 10월 31일 삼일 기도회 저녁에 제가 말하기를 10월 31일은 우리 종교개혁의 기념일인 것을 말했습니다. 마틴 루터의 생활을 우리가 잘 압니다. 그는 공부도 많이 하고 그 다음에 수도원에 들어갔고 신부로 안수를 받은 후에 학교에서 일년 가르치면서 성경을 연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성경을 연구하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그 때 천주교에서 하는 일이 성경의 교훈과 성경의 모든 원리와 틀리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을 루터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때 천주교에서 하는 일이 성경의 교훈과 틀리는 것이 많이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 틀린 것을 깨달은 것만이 루터로 하여금 종교개혁자가 되게 한 것은 아닙니다. 언제부터 종교개혁의 봉화를 듣게 되었나하면 우리가 다 아는 바와 같이 그 때 교황이 특히 돈을 쓸 일이 있어 그 때 전 기독교 세계에 속죄 표를 팔면서 속죄 표를 사면 누구든지 죄를 용서함을 받는다고 하며 많은 죄를 지은 사람은 비싼 속죄 표를 사야되고 적은 죄를 지은 사람은 싼 소죄 표를 사도 좋다고 속죄 표를 파는데 산 사람의 죄만 용서받기 위해 속죄 표를 파는 것이 아니고 죽은 사람의 죄까지 위해 속죄 표를 팔았습니다.
그 때 사람들은 연옥이라는 것을 믿어서 믿음이 좀 약한 사람은 죽으면 낙원에 가지 못하고 연옥에 가 있는데 연옥에 가 있는 사람을 빨리 낙원으로 올려 보내는 방법은 이 속죄 표를 사면 낙원으로 갈 수 있다고 선전하면서 속죄 표를 팔았습니다.
사실인지는 모르지만 선전하는 사람은 어떻게 선전했는가 하면“그저 당신 네 들 믿음이 별로 없는 부모나 세상 떠난 사람이 있으면 이 속죄 표만 한 장 사면 그 돈이 연보 궤에 떨어지는 소리가 나자마자 연옥에 있던 부모의 혼이 빨리 낙원으로 올라갑니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속죄 표를 사기만 하면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 광경을 본 루터는 전부터 깨달아 알던 진리가 분노로 변했습니다. 그는 격분했습니다. 이럴 수가 있겠느냐? 하나님의 진리가 이렇게도 변할 수가 있겠느냐?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그 예배당에다 95개 조항의 문제를 내 걸고 항쟁을 했습니다. 의분이 있어야 합니다. <바울의 의분>에서

 

 
 



152.에딘바라의 충견 비

사도 바울이 노년에 쓴 편지 가운데 여러 가지 우리에게 인상 깊은 말이 많지마는 디모데에게「너는 속히 내게 오라」고 하면서 데마는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다고 기록했습니다. 데마 같은 사람은 처음에는 열심히 도와주고 따라다닌 줄 압니다. 그래서 충성된 제자인 것 같았습니다. 그렇지마는 얼마 후에 노 선생을 버리고 다른 데로 달아났습니다.
충성에는 시간의 시금석이 있습니다. 요컨대 얼마나 오래 충성하느냐 그것입니다. 제가 들으니 스코틀랜드에 있는 에딘바라 라고 하는 어떤 교회 묘지에는 개의 무덤이 있고 그 개의 무덤 앞에는 충견 비, 즉 충성된 개의 비가 섰다고 합니다. 거기에 어떠한 사실이 기록되었나 하면 어떤 사람이 좋은 개를 길렀는데 그 주인이 죽었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상여로 시체를 메다가 묘지에 장사하고 다른 사람들은 다 돌아왔지만 이 개만은 절대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다른 사람들이 끌고 오려고 해도 이 개는 그 주인의 무덤에서 절대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하루 이틀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하는 수 없이 그 다음에는 먹을 것을 날라다 주었다고 합니다. 이 개는 그 때부터 십 사 년 동안을 즉, 죽을 때까지 주인의 무덤을 지키다가 죽었습니다. 이런 개는 우리 사람보다 났습니다.

 

 
 



153.시간의 시금석

충성은 시간의 요소가 있어야 됩니다. 얼마 동안 지나 보아야 충성된 사람을 알 수 잇습니다.
교회의 일을 보는 것도 몇 달 몇 해 동안은 열심히 하기 쉽습니다. 그래나 20년, 30년, 40년 꾸준히 주님을 위해서 충성하는 데는 시간의 요소가 있는 것입니다.
2년 전쯤 제가 어떤 잡지를 보니까 어떤 고등학교의 건물 짓는데 그 건물의 이름을 그 학교 이사장이나 교장의 이름으로 짓지 않고 그 학교 사찰의 이름을 붙여서 짓는 다고 합니다. 그 내용을 읽어보니까 그 사람은 30년간 그 학교에서 하루 같이 충성되게 일을 해서 그 사람의 이름으로 집을 짓는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충성입니다. 충성하려고 하면 우리가 처음에 먹은 그 마음을 꾸준히 끝까지 지켜 오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 신문(1056,12,2)에 이 창훈이라는 학생이 마라돈 경주에서 제4위를 얻었다는 소식이 있었습니다. 다 기뻐하신 줄 압니다. 지난번에 1등을 한 인간 기관차라 하는 이름까지 들은 자도백을 이기고 네 번째가 되었습니다. 그보다도 더 통쾌한 것은 이 창훈군이 마지막 100미터 전에서 자기에 앞섰던 일본 선수 가와시마 선수를 이기고 4위가 되었다는 것을 기록했습니다. 전쟁에는 최후의 오 분간이 제일 필요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충성에는 오 분간이 필요합니다. 설사 아무 실수 없이 잘해 올지라도 마지막에 가서 실패하면 안 됩니다. 여기에서 참된 충성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충성은 환경의 시금석을 이겨야 합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녹음방초(綠陰芳草) 승화(昇華)시에는 우리가 송죽의 절개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찬바람이 불고 눈이 내리게 될 때에는 송죽의 참 절개를 압니다. 옛 글에도 나라가 어지러워 질 때에 충성스런 재상(宰相)을 안다고 하였습니다. 집안이 가난할 때에 어진 아내를 안다고 하였습니다. 충성이 언제 나타나느냐고 하면 어려운 환난이 있을 때 핍박이 올 때 나타납니다. 이와 같이 어떤 환경을 당하던지 꾸준히 자기의 책임을 지켜나가는 것이 충성인 것입니다.

 

 
 



154.폼페이 최후의 그림

영국 런던 워커 미술관에 콘트러라는 사람의 충성이라는 유명한 그림이 걸려 있습니다. 그 그림을 자세히 보면 옛날 폼페이라는 로마의 도시가 베스비어스 화산이 폭발되어서 화산재로써 전부 묻혀 전멸을 당하는 그런 비참한 사실이 있었는데, 그 때의 광경을 상상해서 그린 그림이올시다. 화산재와 불이 그냥 눈과 같이 서리 와 같이 폼페이 성안에 내립니다. 많은 사람들이 살길을 얻으려고 성문으로 그냥 조수와 같이 밀려 나갑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문을 지키는 수문(守門)의 책임을 맡은 군인이 한 사람 서 있습니다. 이 사람은 본래 로마 사람이올시다. 그 성문을 지키라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 내려오는 재를 피해 성문을 자꾸만 나가지마는 이 군인만은 자기의 창을 잡고 아무리 눈과 같이 재가 내리고 불이 내려도 꼼짝하지 않고 그냥 서서 죽음을 기다립니다. 이것이 충성입니다.
이 서마나 교회에 이 목사를 보낸 때는 자세히 알 길은 없지마는 그 교회 목사는 폴리갑이라는 목사인 것 같습니다. 폴리갑이 어떻게 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교회를 봉사하면서 86세까지 살았는데 그때 로마 정부로부터 기독교를 탄압하라는 명령이 내려 탄압을 받을 때 86세의 노인을 관리가 끌어다 놓고서 이제라도 네가 그리스도를 부인하면 살려주겠지마는 그냥 그리스도를 믿겠다고 하면 죽일 수박에 없다고 위협했습니다. 그 때에 조용히 폴리갑 노 목사는 말하기를“86년이라는 긴 세월을 내가 우리 주님을 섬겼는데 주님께서는 한번도 나에게 잘못한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어찌 내 왕을 훼방할 수가 있겠소?”그 말 한마디를 남기고 조용히 순교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충성은 작은 일로 시작됩니다. 충성은 끝까지 자기의 의무를 다하는 것입니다. 충성은 부득이한 경우에는 자기의 생명까지 바치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 민족은 충성이 결코 결여된 민족은 아닙니다.
이것은 한국 역사가 증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삼국 사를 읽어 볼 떼에는 자연히 고구려의 을지문덕과 백제의 계백 장군을 우리는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고려 역사를 읽을 때는 포은 정몽주의 절개를 배우게 됩니다. 우리가 이조에 들어와 볼지라도 단종 시절의 성삼문 이하 사육신의 그 굳은 절개, 임진란을 통해서 이순신 장군의 충의, 혹은 한 말에 와서 민충 정공, 혹은 이준 열사 혹은 안중근 선생 같은 충성의 역사가 우리 한말의 역사를 빛나게 단장해 줍니다. 우리 한국교회 역사가 비록 역사는 오래지 않지만 일본 제정 시대의 핍박을 비롯해서 38선 6·25로 말미암아 서 그야말로 유명, 무명의 말할 수 없이 수많은 순교자들이 자기의 생명을 기쁘게 바쳐서 우리 한국교회의 역사를 세계적으로 찬란하게 빛내는 것을 봅니다. <죽도록 충성하라>에서

 

 
 



155.파사의 농부와 금강석 이야기

옛날 파사 나라에 알리마켈이라는 큰 부자이며 큰 농사를 하는 농부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 농부는 큰 농장도 있고 가축도 많고 과수원도 있고 아주 부족한 것이 없이 만족하게 잘 사는 큰 부자 농부였습니다. 그런데 이 부자에게 한번은 중한 사람이 찾아와서 여러 이야기를 하는 중에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여보, 이 우주가 어떻게 생겼는지 아십니까? 본래는 이 우주는 뽀얀 안개뿐이었는데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손가락으로 이 안개를 휘젓기 시작했습니다. 안개를 휘젓는 가운데 불덩어리가 되었고 큰 불덩어리에서 작은 불덩어리가 생겼는데 이 불덩어리들이 제가끔 돌기 시작했고 그 다음에는 그 주위에 안개가 바로 변해서 불덩어리에 떨어지기 시작하니까 이 불덩어리가 식기 시작했습니다. 그 식은 덩어리 가운데 하나가 우리가 사는 지구입니다. 그런데 이 지구 표면은 거이 다 식었지만 속에는 그때처럼 뜨거운 것이 있어서 이따금 뜨거운 불이 밖으로 나오는데 이런 불이 나와서 빨리 식으면 화강암(花崗巖)과 같이 돌이 되고 천천히 식으면 쇠 같은 것이 되고 좀 더 천천히 식으면 은이 되고 좀더 천천히 식으면 금강석이 됩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금강석이 제일 귀합니다. 밤 한 알 만한 금강석이 있으면 당신이 사는 온 군(郡)을 살 수 있는 가치가 있다고 합니다마는 주먹 같은 것이 몇 개 얻었다고 하면 파사 나라 전국을 살 수 있고 온 세계를 살수 있습니다”했습니다.
그 때까지는 농부가 자기 밭이 제일이요 자기가 제일 부자인 줄 알고 있었는데 그런 금강석과 같은 보배가 있다는 말을 들으니까 지금은 농장에 잇는 것이 시원찮게 여겼습니다. 금강석만 발견하면 지금보다 더 큰 부자가 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는 밤새도록 생각을 하다가 그 다음날 일찍이 중이 사는 그곳을 찾아가서 당신이 어제 말한 그 금강석 밭을 어디가야 찾을 수 있습니까? 고 물었습니다. 그 중은“나도 금강석 밭이 어디 있는지 모르지만 전에 듣건대 큰 두 산의 골짜기를 흘러 내려가는 시냇가에 흰 모래밭이 있다고 하는 데 그 모래밭에 가서 찾아보면 금강석이 있다고 합니다.”“그러면 그 큰 두 산과 그 강과 흰 모래밭이 어디 있습니까?”“나는 그것도 모릅니다. 그것은 당신이 찾아보아야 합니다.”라고 했습니다. 그 농부는‘그것은 내가 찾겠다’고 결심하고 자기 집에 돌아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돈을 만들어서 자기 가족들에게 이삼년간 먹을 것을 남기고는 금강석 밭이 있다는 곳을 찾으려고 먼길을 떠났습니다.
파사를 떠나서 그 서편 토이기 지방을 거쳐서 좀더 내려와 팔레스틴에 이르고 또 서편으로 가서 첵코, 불란서지방을 지나 몇 해를 찾아다녔습니다. 그러나 금강석 밭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마지막에는 서반아까지 갔습니다. 서반아 맨 끝 대서양 해안까지 갔습니다. 옛날에는 서반아 끝에 가면 지구의 마지막이요 그 다음에는 땅이 없는 줄 알았습니다. 지구 마지막까지 와서도 금강석을 찾지 못하고 그 동안 돈은 다 없어지고 옷도 다 헤어지고 이제는 돌아갈래 야 돌아갈 노비(路費)도 없고 큰 걱정이 났습니다. 마지막에는 서반아 해안에 앉아서 푸른 물결을 바라보면서 가만히 자기 신세를 생각해보니 기가 막혔습니다. 그만큼 애를 썼으나 금강석은 도무지 찾지 못하였습니다. 그만 낙심되어서 그 물결에 몸을 던져 자살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농부에게서 농장을 산 다른 농부가 있습니다. 이 농부는 그 농장에 대해 만족하고 다른 생각은 아예 하지 않고 자기가 사들인 농장을 간수했습니다. 양을 치고 과수원을 잘 가꾸고 이렇게 농사를 하는데 한번은 양을 데리고 자기 농장 가운데 흐르는 개천으로 갔습니다. 그 개천가에 조그마한 모래밭이 잇는데 양들에게 물을 멱이다가 보니까 모래 가운데 이상하게 번쩍 하는 돌이 하나 있습니다. 그래서 무슨 돌인가 하고 보니 새까만 돌인데 아주 유난히 번쩍번쩍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집 선반 위에 얹어 놓고 잊어버렸습니다. 얼마 후에 그 중이 그 집에 찾아왔습니다. 찾아와서 그 문을 여니까 번쩍번쩍하는 이상한 빛이 납니다. 그것은 다른 게 아닌 검은 금강석이었습니다.
그 중은 깜짝 노라면서“아 이 집을 팔고 금강석을 찾으려 갔던 사람이 언제 돌아왔소?”고 하니까 주인 대답하는 말이“그 이는 안 돌아왔어요 이것이 금강석입니까? 그것 다른데서 얻은 것 아니고 우리 농장 개천 모래밭에서 얻었습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그 중은“내가 본 금강석은 이런 것이 아니지만 이것은 틀림없이 금강석입니다. 이것 어디서 얻었는지 한번 가 봅시다”하고 그 개천까지 가서 살펴보았습니다. 그 보래 밭에 큰 돌 작은 돌이 널려 있는데 반 가량이 금강석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농부가 아주 개천에서 많은 금강석을 얻어서 세계 제일의 부자가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은 금강석과 같은 보석을 찾기 위하여 이 곳에 가고 저곳에 가고 이 나라 저 나라로 가고 사방으로 돌아다닙니다. 금강석을 찾기 위해 이것저것 해보고 직업도 자주 바꿉니다. 여러분, 금강석은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고 여러분이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그 자리에서 충성을 다 할 때에 금강석 같은 보배를 찾는 것입니다. <삼천리 가나안 복지>에서

 

 
 



156.어떤 한학자의 고심

전에 어떤 한문학자가 예수를 믿기로 작정하고, 예수를 잘 믿으려면 성경을 일거야 되다고 하니 나도 성경을 읽어야 한다고 결심하고 먼저 신약 성서를 샀습니다. 마태복음 1장을 찾아서 내러 읽는데『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그리스도의 세계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육 절까지 읽고 나니까 이 한학자는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몰랐습니다. 누가 누구를 낳고 누가 누구를 낳다 고 했는데 무슨 뜻입니까? 이 한학자는 성경이 아무리 해도 우리 한학 논어와 맹자만 못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논어 첫 장을 들치면 “學而時習之 不亦悅乎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人不知而不  不亦君子乎”“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기쁜 일이 아니냐, 친구가 있어 먼 곳에서 오니 얼마나 즐거운가, 사람이 몰라주어도 속에 성냄이 없으면 그 어찌 군자가 아닌가”이렇게 논어를 펼치면 글이 환하고 좋은 말이 나오는데 이 성경은 무슨 말입니까? 여러분 맹자를 읽어 보셨지요“孟子見梁惠王 王曰  不遠千里以來 亦將有以利吾國乎 子曰王何必曰利 亦將有仁義以矣”“맹자가 양혜왕을 알현 한대 왕이 맹자보고 하는 말이‘영감님이 천리 길을 멀다 않고 우리 나라에 오시니 우리 나라에 무슨 이로운 일이 있습니까?’맹자 곧 대답하는 말이 ‘어찌해서 왕은 이익만 생각하십니까? 나라에는 인의(仁義)가 먼저 있어야합니다’”그것 얼마나 좋은 말입니까? 과연 정치가요 도덕가의 말입니다.
그런데 이 성경은 무슨 말입니까? 한학자는 처음에 아주 낙담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신약을 읽을 때 마태복음 1장을 읽는 것은 꼭 수박 겉 핥는 것과 같습니다. 이 성경은 밤송이와 비슷해서 처음에는 깔깔한 가시만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다음에 가시를 헤치면 딱딱한 껍질이 있고 그 다음에 한 꺼풀 제치면 쭈굴쭈굴한 속껍데기가 있습니다. 이것마저 베껴야 단 알맹이가 있습니다. 이 성경 말씀이 달다는 사실을 수박 겉만 핥는 사람이 단 것을 모르는 것처럼 알지 못합니다.
마태복음 1장에서 시작해서 계속해서 읽어서 5장쯤 내려가서 산상보훈을 읽을 때에 다른 경서를 읽은 사람으로서는“야 ! 이러한 위대한 교훈이 있다”라고 감탄합니다. 그러다가 로마서 와 고린도 전서를 읽고 모든 서신을 통해서 기독교의 모든 위대한 철학과 신학을 맛보게 되고 마지막에 묵시록을 읽어서 이 온 세계의 마지막이 어떻게 되겠는가 하는 것을 읽게될 때에야 성경이 과연 어떠한 것을 가슴속에 알게됩니다.
또 우리가 음식을 먹을 때 어떤 음식의 맛을 잘 알려면 잘 씹어 먹어야합니다. 아이들이 혹간 맛있는 좋은 음식을 씹지 않고 그냥 먹습니다. 음식은 잘 씹어 먹어야 맛도 나고 몸에도 유익합니다. 마찬가지로 이 하나님의 말씀도 과연 맛을 알려면 계속해서 읽을뿐더러 묵상하여야 합니다. 그러기에 시편 1편을 여러분 다 아시지요.『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죄를 좇지 아니하고 죄인의 길에 서지도 아니하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도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했습니다. 시편 119편『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묵상하나이다』했습니다. 묵상할 때에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더 알게 됩니다.
어거스틴의 전기를 읽으면 그가 젊었을 적에 공부를 많이 했습니다. 헬라의 모든 철학자의 서적을 읽었고 도 로마의 위대한 문학서적을 많이 정독한 사람입니다. 그러다가 신앙에 들어와서 성경을 읽으려고 할 때 처음에는 그 참된 맛이 어떤 것인지 몰랐습니다. 그러다가 성경을 계속해서 읽고 묵상하는 가운데서 그야말로 그 말씀이 꿀보다 더 달게 되어서 마지막에는 그 성경을 위해서 일생을 바치면서 많은 기독교 서적을 남긴 것을 우리가 읽을 수 있습니다.
불란서의 파스칼 같은 사람도 본래 자연과학자였습니다. 자연에 대한 취미가 많고 과학에 대한 새로운 발견을 한 사람입니다. 그렇지마는 그도 처음에 성경을 읽을 때는 아무 재미도 없었지마는 읽기를 계속하고 연구하는 가운데 그 말씀의 맛이 있어서 과학 연구하는 것을 그만두고 나중에는 성경만 연구했습니다, 묵상할수록 이 말씀이 답니다.
아프리카에 가서 일생을 전도 사업에 바친 리빙스톤 같은 사람은 마태복음 28장 20절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힘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라는 말씀을 언제든지 묵상했습니다. 어떤 위험한 곳을 가든지 이 말씀을 묵상하고 이 말씀을 통해서 오는 은혜 가운데서 모든 어려움을 다 이겼습니다.
젊을 때 중국 내지(內地)에 혼자 가서 어떤 선교 부의 도움도 없이 자비로써 전도를 개척한 허드슨 테일러라는 유명한 선교사는 언제든지 두 가지 말씀이 그 마음 가운데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는『여호와 이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준비해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어떤 경우를 당하든지『여호와 이레』라는 말씀을 생각할 때는 하나님께서 준비하여 주신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하나는『에벤에셀』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때까지 여기까지 도와주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도와주셨는데 이제 앞으로 도와주시지 않겠는가?『여호와 이레』신데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준비해 주시지 않겠는가? 이 두 가지 말을 묵상하고 생각하고 이 말씀을 언제든지 새기면서 일생을 살았다고 합니다. 여러분, 성경 말씀을 마음 가운데 기억하고 묵상하세요

 

 
 



157.벤허에 얽힌 일화.

19세기에 미국에 산 사람 가운데 인거솔이라고 하는 무신론자가 있습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고 무신론을 주장하면서 책도 쓴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자기 친구 가운데 월레스라는 사람이 잇는데 이 사람은 육군 대장입니다. 이 사람 역시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 무신론자가 그 사람보고 하는 말이 기독교란 다 거짓말이고 쓸데없는 것이고 믿을 수 없는 것이라고 하는 책을 하나 쓰라고 권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월레스 대장이 그런 책을 저술할 맘이 있어서 아무래도 이런 책을 저술하려면 사실을 알아야 하는데 사실을 알기 위해서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점점 읽어가면서 오히려 반대할 마음은 없어지고 성경 말씀에 감화를 받았습니다. 그 다음에는 이 사람이 믿게되고 믿을 분더러 그 유명한 벤허(Ben Hur) 라는 종교 소설, 그리스도의 일생을 보여 주는 유명한 책을 월레스 대장이 저술했습니다.
성경을 읽지 아니하는 까닭에 그 뜻을 모릅니다. 그 맛을 모릅니다. 보통 성경을 반대하는 사람에게 실제로 물어보면 성경을 별로 보지도 못한 사람들입니다. 읽지 못한 사람들이 성경을 반대합니다. 읽은 사람이면 성경 말씀의 맛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됩니다.
<꿀보다 더 단 주의 말씀>에서

 

 
 



158. 크리스마스의 의미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격은 우리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반사됩니다. 어떤 나라에 가서 있는 선교사일지라도 고국과 친척을 떠나서 일생을 외국에 가 있다는 것은 큰 희생입니다. 보통 사람으로 못할 일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도 최찬영 선교사를 외국에 보냈지마는 일생을 친척과 고국을 떠나서 딴 나라에 가서 몸을 주님께 바쳐서 그 나라의 사람을 사랑하고 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도한다고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특별히 제가 아프리카에 가서 그 기후가 나쁘고 전부가 정글인 문자 그대로 원시적 사회, 야만적 사회, 가운데 가서 일생을 몸 받치는 선교사의 모습을 가만히 옆에서 볼 때 머리가 숙여 졌습니다. 특히 개머룬 어떤 지방에 가니까 미국에서 온 여자의 의사인데 나이가 한 오십 가랑 된 여자 혼자서 흑인 가운데 가서 병원을 설립해 놓고 흑인과 아침부터 저녁까지 접촉하면서 병을 치료해주고 상처를 씻어 주고 여러 가지 병을 고쳐줍니다. 그 환자 가운데 추장이 한 사람 있는데 그 사람은 아내가 127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더욱이 놀란 것은 그 여의사의 아버지가 그 곳에 있다가 열병으로 죽었고 그의 어머니가 또 죽었습니다. 그리고 형제가 둘 있었는데 둘 다 죽고 여자 혼자만 남았습니다. 그런데 그는“나는 혼자라도 내 아버지의 일을 계속하겠다”고 결심하고 의학을 연구하고 나와서 일생을 받친다고 합니다.
여러분, 그런 사람이 어디서 나왔습니까? 그 흑인들을 보면 사랑할 마음이 하나도 없습니다. 혹 여자들 새까만 얼굴에 분까지 발랐습니다. 그러나 곱게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선교사들은 일생을 거기 가서 그 사람들을 사랑하며 삽니다. 그 사랑이 어디서 왔습니까? 하나님으로부터 그 사랑이 왔습니다.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였음으로 우리가 또한 흑인이라도 사랑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반사올시다. 크리스마스는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난 것을 기념하는 날이올시다 우리는 크리스마스를 통해서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사랑을, 이 냉정하고 이 각박하고 쓸쓸하기가 사하라 사막 같은 세상, 냉정하기가 북극 같은 이런 사회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전파해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냅시다. <사랑과 그 반응>에서

 

 
 



159.기독교와 생명의 가치

내 생명은 하나님께 속합니다. 자살이라는 행동은 하나님도 부인하고 심판과 도덕도 부인하고 모든 것을 부인하는 행동입니다. 마땅히 스스로 죽지마는 하나님 앞에 가서 심판대 앞에 설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생명을 존중하는 사상은 어떤 사회의 문화의 척도가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가기 전 아프리카에 사는 식인종(食人種)은 사람을 잡아먹기도 했습니다. 그리고서는 그 두개골을 많이 모아서는 장식품으로 허리에 차고 다녔습니다. 집에다 많이 쌓아 놓고 자랑했습니다. “내가 이만큼 많이 잡아먹었다”고 하였습니다.
기독교의 감화를 받기 전에 로마와 헬라의 문명을 보면 옛날 철학과 과학이 제일 문명했다고 하는 헬라사람 가운데 스파르타 같은 나라에서는 어머니가 얘기를 낳은 다음에 정부에서 조사 관을 파송하여 조사해서 이 다음에 커서 좋은 군인이 될 것 같으면 그냥 두고 아예 약골로 생겼으면 죽여 버렸습니다.
로마 사람들은 굉장히 큰 원형 극장을 지어 놓았습니다. 그리고는 여러 만 명이 모여서 여러 가지 연극을 구경하는데 살인하는 광경을 많이 구경했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기까지 싸웁니다. 사람이 짐승과 싸우다가 짐승에게 잡혀 먹힙니다. 믿는 사람을 잡아다가 사자에게 잡아먹히게 하는 것이 굉장한 구경거리라고 많은 사람이 모여서 이 사람 죽이는 것을 한 오락으로 구경했습니다.
옛날 인도에서는 남편이 죽으면 그 부인은 흔히 남편과 같이 생매장했다고 합니다. 아닌게 아니라 바로 몇 달 잔에 어떤 잡지를 보니까 상류계급 가운데 어떤 여자가 자기 남편이 죽으니까 그 남편을 화장하는데 그 화장은 우리 나라처럼 집 짓고 하는 것이 아니고 밖에다 장작을 쌓고 그 위에다 관을 놓고 화장을 하는데 그 부인이 인도의 아주 고귀한 전통을 잇기 위해서 화장하는 불에 뛰어들어서 같이 타서 죽었다고 했습니다.
기독교가 이 세상에 오기 전에 이렇게 생명이 천했습니다. 생명을 천히 여기는 사회일수록 야만적인 사회입니다.
오늘날 공산주의 사회는 이런 의미에서 가장 야만적인 사회입니다.<생명의 존귀성>에서

 

 
 



160.위대한 인물은 경건한 부모로부터

내가 내 개인을 위해서 일생을 통한 목적을 두는 것이 필요한 것과 같이 우리가 부모노릇을 바로 하려면 귀한 아기를 위해서 위대한 목적을 세울 필요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아기가 커서 무엇이 되게 해달라는 목적을 세우고 이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께 바치고 이 목적을 이루기 위래서 부모로서 아기를 위하여 어떤 책임을 지겠다고 하나님께 서약하고 온전히 그 뜻대로 기를 의무가 우리 부모에게 잇는 것입니다.
어린 아기가 난 후에 물론 어머니의 감화를 제일 많이 받습니다. 그 까닭은 어머니의 살에서 떨어져 났고 처음에는 어머니의 젖을 먹고 자라났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으로 교회 역사를 상고해 보면 아버지의 신앙에도 많은 영향이 있겠지마는 어머니의 영향에 큰 감화를 받은 그런 역사를 많이 봅니다.
위대한 인물의 배후에는 경건한 어머니들이 있었습니다. 한나와 같이 하나님께 서약을 하고 맹세하는 어머니들,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기른 어머니들이 많은 것을 우리가 보는 것입니다.
요한 웨슬레의 어머니 수잔나라는 여자는 그렇게 많은 아이들을 기르지마는 벌서 아이들이 네 살이나 다섯 살 나게되면 그 아이들을 위해서 기도는 물론이거니와 성경 말씀을 많이 가르쳐 주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주후 2 ,3세기에 유명한 학자요 교부 가운데 한 사람인 오르겐이라는 사람이 알렉산드리아에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어렸을 적부터 총명도 하였지만 4, 5세부터 시편의 대부분을 외고 10세쯤 되어서는 성경가운데 좋은 장들은 거의 다 외었다고 합니다. 모두 어머니가 배워 준 것입니다.
전 번에 우리 교회 성경 암송 대회에서 특히 감사한 것은 어린아이가 26절을 암송하였습니다. 어머니가 아이들을 어렸을 적부터 성경 말씀으로 인도하는 것은 매우 필요합니다.
또 보통으로 아이들 13세 이상 20세 전후해서 온전히 하나님께 몸을 바치고 회개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러나 가만히 보면 이런 사람들은 매우 어릴 때 회개하고 몸을 바친 기록이 역사상에 있습니다. 가령 주석 가 가운데 매튜 헨리 같은 분은 매우 유명한 사람인데 그는 11세 때에 온전히 회개했다고 합니다. 또 찬송가를 많이 기록한 영국의 왓트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9세 때 온전히 회개했다고 합니다. 미국의 유명한 목사로서 프린스톤 신학교 학장으로 있다가 세상을 떠난 요나단 에드워드라는 사람은 7세 때에 온전히 회개했다고 하는 기록이 있습니다.
우리가 아이들을 신앙으로 인도하는 것은 얼마쯤 자란 후에 하려고 기다릴 것이 아니고 어릴 적부터 참으로 하나님 말씀으로 길러 준다면 은혜 받는 대로 어릴 때도 온전히 회개하고 일생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을 우리가 얼마든지 보는 것입니다.
어린이들의 마음은 말하자면 흰 종이와 같습니다. 다른 글자 쓰기 전에 흰 종이에 먼저 하나님의 말씀으로 써 줄 수 있도록 우리가 힘써야 되겠습니다.
아이들의 마음은 봄과 같습니다. 봄에 아직 아무 것도 심지 아니했을 때에 먼저 하나님의 말씀의 씨로써 심을 수 잇습니다. 이 특권은 먼저 누구에게 부여되었나하면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있는 것입니다.
어린이들의 성품은 연한 나무 가지와 같습니다. 이른봄에 돋아나는 연한 나무 가자와 같습니다. 연한 나무 가지를 바로 잡아서 바로 돌려놓을 수가 있는데 이 특권은 역시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어린이를 하나님의 뜻대로 가르쳐서 종교적 책임을 다 하려고 한다면 가정 교육이 필요하고 또 교회에서 종교교육이 필요합니다. <부모의 종교적 책임>에서

 

 
 

161.죄와의 대면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기를 죄를 지은 다음에 그 죄를 덮어두면 그 만인 줄 압니다. 다른 사람의 눈만 가리우면 괜찮은 줄 생각합니다. 일시적으로 가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선 분명히 알 것은 죄를 다른 이들에게는 가릴 수 있지만 자기 양심에게는 가릴 수 없습니다. 양심은 조용히 죄지은 사람을 찾아내서 그 사람이 죄와 항상 대면하게 만듭니다.
잠언에 보면 죄지은 사람은 쫓아오는 사람이 없어도 도망간다고 하였습니다. 왜 쫓아오는 사람이 없는데 도망갑니까? 그 사람의 양심 속의 죄가 그 사람을 쫓아옵니다. 그 사람의 마음을 괴롭게 하고 그 사람의 마음속에 공포를 일으키게 합니다.

 

 
 



162. 이비커스 이야기

이비키스는 주전 약 5세기에 산 사람으로 유명한 시인 가운데 한 분입니다. 이 사람이 고린도에 가까운 촌에 여행을 갔다가 어떤 산골짜기에서 강도를 만나 있는 것을 다 빼앗기고 매를 맞아 죽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이 너무 억울해서 죽기 전에 크게 외치기를 마침 그 주위를 빙빙 떠돌고 있던 학을 보고 하는 말이 “너 학은 내가 이런 억울한 죽음을 당하는 것을 보니 내가 죽은 다음에도 원수를 갚아 달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 말을 강도가 다 들었습니다.
그 후 여러 달이 지나도 그 도적을 잡을 길이 없고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고린도의 노천 극장에서 연극을 하게 되어 많은 사람이 모여 구경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에 학 몇 마리가 공중에 날아와서 빙빙 돌았습니다. 그런데 어떤 학은 어떤 사람에게 거이 머리에 닿게 날아다닙니다. 그러니까 거기 앉았던 사람 가운데에 어떤 사람이 외치는 말이 “아 이비스키의 학이 여기 원수 갚으려고 오누나”하고 말을 했습니다.
옆에 있던 사람이 그 말을 듣고 알아보니 그 사람이 도적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왜 그런 소리를 했을까? 남이 다 가만있는데 학이 머리 위로 날아가면 어떻습니까? 죄가 그 사람의 양심 속에서 그 사람의 죄를 찾아내서 그 사람의 양심 속에서 그 사람이 범한 무서운 죄를 대면하게 했습니다

 

 
 



163.가룟 유다를 보라

죄는 사람의 생각을 처음에는 무척 괴롭히지만 자꾸 죄를 지으면 양심이 마비되어서 그 다음에는 죄를 양심 속에서 찾아 만날 길이 없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혹 그럴 수도 있습니다. 죄로 인해서 양심이 마비되어 그를 찾아내지 못 한다고 하지만 꼭 피하지 못 할 때가 있습니다. 그곳은 어디인지 아십니까? 사람의 성품 속에서 죄가 그를 찾아내고 맙니다.
사람이 한번 죄를 지으면 흰 손수건을 더러운 물에 한번 담그는 것과 같습니다. 이 손수건은 꺼낼지라도 더러운 물이 이 손수건에 듭니다. 한번 더 담그면 그만큼 더러운 물이 듭니다. 그래서 더 더러워지고 검어집니다.

사람이 한번 죄를 지으면 그만큼 더 부패하여 집니다. 두 번 죄를 지으면 그만큼 더 그 성품이 부패하여지고 세 번 지으면 그 만큼 더 그 성품이 더러워집니다. 그래서 한번 주사 맞고, 두 번 세 번 주사 맞아서 마지막에는 아편쟁이가 되고, 한잔 마시고 두 잔, 석잔 마시고 그 다음날 마시고 나중에는 고주망태가 되고, 거짓말 한번 두 번 세 번하여 나중에 거짓말쟁이가 되고 맙니다.
여러분 가룟 유다가 하루아침에 은 30냥 받고 선생을 판 줄 아십니까? 아닙니다. 요한의 기록대로 보면‘저는 도적이라 맡긴 돈을 몰래 쓰더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 님과 12제자를 위해서 회개의 직분을 맡아 가지고 그 가운데서 한번 도적질해 쓰고, 조금 도적질해 쓰고 나중에는 돈을 원하고, 돈을 사랑하고, 돈 때문에 부패한 성품이 결국은 자기의 선생님까지 팔아먹은 가룟 유다를 만들었습니다. 피할 수 없습니다.
죄는 부패한 그 사람의 성품 가운데 반드시 찾아 만나서 대면시키고 마는 것입니다.

 

 
 



164.피 맛을 본 호랑이

이런 글을 읽어보았습니다. 인도에 어떤 사람이 산에 가서 어떤 작은 호랑이 새끼를 잡아다 길렀는데 고양이처럼 집에서 먹이고 길렀습니다. 말 잘 듣고, 길이 잘 들어서 좋다고 하면서 길렀습니다. 어느 듯 점점 자라서 중 호랑이가 되었습니다.
한번은 이 주인이 낮에 고단하여서 졸았습니다. 전에는 졸 때에도 작은 호랑이가 옆에 앉아서 손발을 핥았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도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졸다가 갑자기 놀라 깨니까 그 호랑이가 그 사람의 손을 깨물고 있었습니다. 그 호랑이의 눈을 보니까 불처럼 되었는데 야수성이 나타나서 그의 손목뿐 아니라 자기를 잡아먹으려고 야단하였습니다. 요행히 옆에 총이 있어서 곧 총을 가지고 쏘았습니다. 어떻게되었나 하면 그 사람의 손을 상해서 붕대로 감았는데 이 호랑이가 핥는 바람에 그 붕대가 풀려서 피가 나왔습니다. 이 호랑이가 그 피 맛을 보고는 물고 늘어졌다고 합니다.
죄라고 하는 것이 작은 호랑이 같아서 처음에는 별로 겁낼 것이 없습니다. 크게 상하는 것도 없고 잘 지킵니다. 그러나 점점 자라면 그 악한 성품이 죄를 통해서 결국은 그 사람을 망하게 만듭니다. <죄와의 대면>에서

 

 
 



165.신앙의 어머니

어머니의 믿음은 어떻게 하면 꼭 아들을 하나님의 뜻대로 바로 기르고 바로 가르칠 수 있을까? 하는 데 나타납니다. 자연히 양육과 교육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런 어머니의 믿음과 교육을 생각할 때 우리교회 역사에 있어서 주후 2, 3세기에 산 유명한 교부(敎父) 오리겐의 어머니를 연상하게 됩니다.
오리겐은 날 때부터 천재로서 매우 총명하였습니다. 말을 배우자마자 세 살 네 살 적부터 시편과 산상보훈을 다 외고, 7, 8세 되었을 때는 성경의 대부분을 그저 머리 속에 외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별명을 들었다고 합니다. 아무리 재주가 있지만 혼자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머니의 덕이올시다.
이렇게 어렸을 적부터 믿음이 있었던지 17세 때 큰 핍박이 일어나서 자기 아버지가 로마 관원에게 잡혀가게 되었습니다. 수감(收監)중에 있는 자기 아버지에게 그때 17세의 아들이 편지하기를“조금도 두려워하지 말고 믿음을 굳게 지키세요, 그리고 믿음을 위해 생명을 바치시기 바랍니다. 저는 이렇게 기도합니다”했다고 합니다. 오히려 수감 중에 있는 자기 아버지에게‘믿음을 지키라’고 격려했습니다. 순교했다는 말을 듣고 자기도 순교하겠다고 자기 아버지가 순교한 곳으로 떠나갔습니다.
그때 어머니의 말씀이 내가 네 믿음은 알지마는 순교하는 것은 다 하나님의 때가 있는데 하나님의 때가 되어서 순교하게되면 하려니와 순교를 자청(自請)할 필요는 없다. 그래서 어머니의 제재로 그만 두었다고 합니다. 18세 때에 알렉산드리아에 있던 유명한 신학교의 대리 교장이 되었습니다. 어렸을 적부터 자기 어머니에게 이와 같은 철저한 교육을 받은 오리겐이올시다. 그 후에 온 교회를 위해서 얼마나 큰 일을 한 것은 교회 역사를 읽는 사람은 다 기억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어머니의 믿음을 생각하게 되면 자연히 어머니의 기도를 생각하게 됩니다. 아기를 하나님 앞에 바칠 분더러 믿음의 어머니의 입술에는 가정을 위해서 끊임없는 기도가 있는 것입니다.
어머니의 기도를 생각하게 될 때에는 주후 4, 5세기에 걸쳐서 산 어거스틴 어머니 모나카를 연상하게 됩니다. 이 어거스틴은 그 때 로마 판도인 북 아프리카 힛포 라는 데서 멀지 않은 다가스데 라는 작은 촌에서 났습니다. 자기 아버지는 신앙이 없고 방탕한 사람이었으나 자기 어머니 모니카는 믿음이 독실하고 총명하고 애정이 깊은 아주 경건한 부인이었습니다.
어거스틴은 머리가 좋고 총명하고 재주가 많아서 어렸을 적부터 매우 공부를 잘 했습니다. 이 학교 저 학교에서 매우 공부 잘한 수재올시다. 얼마 되지 않아서 그 당시에 젊은 사람들이 공부하던 수사학, 철학, 문학 모든 학문을 잘 배워서 사람들의 존경을 받게 되고 사실 수사학 선생으로 여러 곳에서 불리 움을 받게 된 그런 학문적 기반을 닦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적으로 말하면 어거스틴은 방탕한 성질을 아버지에게서 받았습니다. 이렇게 재주가 있어서 공부는 잘하고 다른 사람을 잘 가르치지마는 그 행실은 부족했습니다. 자기 어머니가 그렇게 기도하고 그렇게 권면하지마는 예수는 믿지 아니했습니다.
오히려 그 때 이단이 마니교를 따라다니며 어머니의 마음을 더 상하게만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서른 살이 될 때까지 방탕한 생활을 했습니다. 어머니는 계속해서 이 아들이 회개하게 해달라고 아무리 기도했지만 응답이 되지 않았습니다.
아들이 30 남짓해서는 북 아프리카 지방을 떠나서 이제는 이렇게 북 아프리카에만 있을 것이 아니라고 로마로 가서 내 이름을 날리고 활약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로마 제국의 수부(首府) 로마로 향해서 가려고 합니다.
그 때 청년들이 흔히 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어머니 모니카에게는 달갑지 않은 일입니다. 이곳 자기 어머니 앞에서도 항상 실수하는 청년이 호화롭고 죄악이 많은 로마 도시에 가서 어떤 깊은 죄에 빠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로마에 가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로마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 어머니 모니카는 마음이 너무 상해서 자기 목사를 찾아가서 말했습니다.“내 아들을 위하여 지금까지 기도하고 특히 로마에 가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했는데 종래 이 아들이 로마에 가니 이것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하고 많은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이 말을 듣고 그 목사가 하는 말이“그렇게 많은 기도를 받는 사람이 그냥 죄 가운데 있을 수는 없으니까 과히 낙심하지 말고 계속해서 기도하라”고 격려의 말을 해주었습니다.
그후에 혼자 보내는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어머니가 로마로 따라갔습니다. 로마에서 얼마 있었고 그 당시 좀 북편의 밀란 이라는 큰 도시가 있었는데 밀란 에 가게되니까 거기 또 따라가는 등 같이 다닙니다. 그런데 이상스럽게 밀란 이란 곳에 그 당시 유명한 암브로스라는 목사요 설교자가 있었습니다.
어거스틴은 거기서 암브르스의 명성을 듣고 그의 설교를 들어보자는 생각으로 그 예배당에 한 두 번 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려다가 33세 때에 밀란 교외에서 고요히 동산 속에 앉아 있으려니까 어떤 아이의 소리인지는 모르지만“어서 책을 펴서 읽어라”는 소리가 들려서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하고 성경을 찾아 펴서 읽으니까 그 말씀은 다른 것이 아니고 로마서 13장 23―14절이었습니다.“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 성경 구절을 받은 다음부터 온전히 변해서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온전히 회개한 후에 그 다음 부활절에 세례를 받고 너무 기뻐서 내가 이제는 여기에 있을 필요가 없고 본 고향에 돌아가서 좀더 공부해서 내가 이 앞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는 마음을 먹고 멀리 북 아프리카를 향해서 모자(母子)가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로마를 좀 지나서 작은 어떤 촌에서 자기 어머니가 병들어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떠나기 전에 어머니가“내가 여기서 세상을 떠난다고 조금도 섭섭해 말라, 나는 내 기도를 이루었으니 나는 한 이 없다”“내 시체를 어디 장례 할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고 “내가 네게 한가지 부탁하는 것은 네가 제단에 나가서 기도할 때마다 나를 기억해 달라”는 이 말 한마디를 남기고 떠났습니다.

 

 
 



166.어머니의 기도하는 모습

제가 작년(1957년)에 로마에 갔다가 밀란 이란 곳에 잠깐 내렸는데 밀란 교외에서 삼보를 하면서 암브로스를 생각하고 또 어거스틴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태리에 여러 아름다운 도시가 많지만 밀란 처럼 아름다운 도시가 없는 곳 같습니다. 북편으로는 아름다운 알프스 산이 흰 눈으로 덮인 채로 병풍처럼 둘려 있고 그 아래는 기름진 넓은 광야가 있고 그 가운데는 맑은 강이 흐르고 그 속에 밀란 이라는 도시가 있습니다.
어머니의 기도는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생전에 이루어지지 않으면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에라도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제가 나이는 많지만 이런 예(例)는 종종 보았습니다.
이와 같은 기도의 어머니는 그의 전 생활이 자녀에게 산 모범이 됩니다. 어머니의 기도의 모습, 어머니의 교회에 나가는 모습, 어머니가 가정에서 가정기도회 보는 그 모습, 어머니의 하나님께 드리는 연보 하는 모습, 다른 사람을 구제하는 모습, 다른 사람에게 친절히 하는 그 모든 모습은 자녀에게 영원히 산 모습으로 남아 있게 됩니다.

 

 
 



167.헨리 위드와 링컨의 어머니

미국 남북전쟁 때 유명한 설교가 헨리 위드 비쳐 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이가 이 비슷한말을 헸습니다.“나는 한편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 모든 철학자, 과학자가 전부 모여서 기독교를 반대하고 한편에 경건한 어머니의 모습이 있다고 하면 내 어머니 한 분이 이 모든 사람을 다 대적하고 도 남는다”고 하였습니다. 산 교훈을 줍니다.
미국의 유명한 대통령 링컨이“나의 현재 생활 전부와 또한 내가 장차 바라는 장래 생활의 전부도 오직 천사 같은 나의 어머니에게 빛 진 것이다”라는 말을 하였다고 합니다.
천사와 같은 어머니, 믿음의 어머니는 자녀들에게 천사와 같은 인상(印象)을 주게 됩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로이스와 유니게와 같이 거짓이 없는 믿음을 가지고 여기 앉은 어머니들은 천사와 같은 어머니가 되고 여기 앉은 아들은 디모데와 같은 아들이 되기 바랍니다. <어머니 마음>에서

 

 
 



168.기독교와 어린이

마가 10장 13­16절에 있는 말씀은 어머니들이 자기 아이들을 예수 님께서 한번 만져주시기를 원하여서 아이들을 데리고 예수 님께 나오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꾸짖었습니다. 그 이유는 별로 적혀 있지 않지만‘예수 님께서 여러 가지 큰 일에 바쁘신 데 곧 어른들만 가르치기도 바쁘신 데 어떻게 어린이들까지 이렇게 분주하게 하는가?’라고 생각하여 꾸짖은 것 같습니다.
예수 님께서 그 말씀을 듣고 분이 여기셔서『어린아이가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하면서『천국에 있는 사람들이 다 이와 같은 자 들이라』고 말씀하시며 아이들을 다 자기에게 오게 하고 어린이들을 자기가 친히 안고 손을 머리 위에 얹고 안수해 주시면서 다 복을 빌어주시고 계속해서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너희들이 하나님 나라 받들기를 이 어린이들과 같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느니라』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 님의 생활 가운데 한 간단한 일화이고 간단한 교훈입니다. 하지만 예수 님의 어린이에 대한 이런 태도, 또한 이와 같은 교훈이 세계 역사를 통해 준 영향은 심히 큰 것입니다. 예수 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어린이들에게 이런 태도를 취하셨고 또 어린이를 중심으로 하는 귀한 교훈을 주셨음으로 어린이들이 이 세상에 있어서 사회적 지위와 법률적 권리 등 이런 모든 방면에 큰 영향을 준 것입니다.
사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 여러 나라, 여러 사회, 여러 문명 가운데서 어린이들에 대한 태도를 찾아보면 매우 유감스러운 것이 많습니다.
우리가 가장 오랜 문명을 찾아볼 때 옛날 5천년 전 애굽의 문명을 기억하게 됩니다. 애굽이 5천년 전에 각방면에 문명이 발전했던 것을 우리가 찬탄(讚歎)해 마지않는 점이 많습니다. 그렇지마는 그 사회에서 어린이를 어떻게 했는가는 출애굽기를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물론 애굽 어린이들은 잘 대했겠지만 그들의 종노릇하는 이스라엘의 어린이들은 여자를 낳으면 그냥 살려두었지만 남자를 낳으면 곧 나일강에 던지라는 법령을 내린 일도 있습니다.
애굽을 문명한 사회라고 하였지만 어린이의 지위가 이런 지위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 다음에 서양 문화 가운데 문명한 사회를 생각하면 헬라문화를 기억하게 됩니다. 지금부터 4천년 전에 어떻게 철학과 예술이 발전되었고 과학이 발전되었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다 칭찬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마는 그 나라 사회에 들어가 볼지라도 여기 헬라의 여러 나라 중에 스파르타라고 하는 작은 나라는 아예 아이들을 낳으면 국가에서 검사관을 보내서 커서 좋은 운동가나 군인이 될 수 있으면 그에게 그냥 기르라고 하고 그렇지 않고 뼈가 약하고 약질로 생겨서 그 애가 커서 국가의 부담이 될 것 같으면 그 애는 기르지 않고 버리라고 했습니다.
만일 영국의 유명한 아이작 뉴턴 같은 사람이 스파르타 같은 나라에서 태어났다고 하면 낳자마자 내다버렸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팔싹 동이올시다. 맨 처음 낳은 다음에는 뼈가 채 굳지도 못하고 약한 것을“이것이 다음에 사람이 될 수 있을까?”하면서 의심하여 길렀습니다. 길렀더니 제일 머리가 좋은 위대한 과학자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동양 5천년 문화를 가끔 이야기 하지만 기독교 문화가 이 땅에 들어오기 전에 동양에 있어서 어린이의 생명이란 것도 이보다 더 귀한 대우를 받지 못했습니다.
우리 동양에 있어서 어린이의 생명은 부모에게 절대의 권리가 있어서 사실 부모는 자녀의 생사에 대한 권리가 있었던 것입니다. 옛날은 부모가 자기 아이를 죽이면 그것이 법률상 죄가 되지 않고 더욱이 노예의 아들이나 노예의 어린이들은 짐승의 새끼와 같이 어릴 때부터 팔고 사고했습니다. 이와 같이 어린이의 생명이 천한 대우를 받은 것이 사실인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사회를 볼 것이면 기독교 문화가 들어왔고 현대문화의 영향을 받았고 법률적으로 어린이의 생명이 보호를 받는 다고 하지만 아직까지 우리가 사는 사회를 보면 서울 안에서 거의 매일 어린이를 내다 버리는 영아 유기사건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것을 보면 어떻게 어린아이가 났던지 그것은 말할 것 없고 우리 사회의 일반 사상이 어린이의 생명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가졌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기억할 것은 이 세상에 예수께서 오심으로 말미암아, 주님께서 오셔서 아이들을 귀히 여기시고 아이를 존중히 여기시고 사랑하시고 축복하시면서 오히려 어린이에게 배우려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 어린이도 그 생명에 존귀성을 갖게 되었고 점차 기독교 문화가 보급됨으로써 어린이의 생명이 사회적으로 인정 받게되고 법률적으로도 인정 받게 된 것을 생각 할 때에 이 간단한 일화와 교훈을 우리가 소홀히 할 수가 없습니다.
<한국과 어린이>에서

 

 
 



169.진리의 매매

마태복음 24장 5절에『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했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의 특색은 나는 누구라고 해서 영광을 진리이신 예수 님께 돌리지 아니하고 자기에게 돌립니다. 영광을 그리스도께 돌리느냐 자기에게 돌리느냐 그것을 보고서 참된 선지자와 거짓된 선지자들을 구별할 수 있습니다.
또 유다 서 1장 8절에『그러한 때 꿈꾸는 사람들도 그와 같이 육체를 더럽히며 권위를 업신여기며 영광을 훼방(毁謗)하는 도다』 이 사람들도 꿈 많이 꾸겠다고 하였습니다. 보통 꿈만 꾸지 않고 계시를 받는 다고 합니다. 이 사람들은 권위를 업신여기겠다고 했습니다. 교회의 권위를 없이 하겠다고 했습니다. 현실 교회를 비방합니다. 영광을 훼방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이요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하나님의 교회를 훼방하겠다고 했습니다.
거짓 선지자의 증거를 분명히 알고 판단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유다 서 4절에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색욕(色慾)거리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제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이니라』베드로 후서 2장 2절에는『여럿이 저의 호색하는 것을 좇으리니 이로 인하여 진리의 도가 훼방 받을 것이요 하나님은 은혜를 색욕 거리로 삼는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무슨 말인지 알기 어렵습니다.
이 사람들은 호색하는 사람이 되어서 결국은 음란한 일로써 하나님의 교회가 훼방 받게 만들었다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교회사를 보면 사실 이런 일이 종종 있습니다.
몰몬 이라는 사교가 있습니다. 이 몰몬 사교를 설립한 요셉 스미스라는 사람은 계시를 받고 계시 가운데 몰몬 성경까지 받아서 썼다고 하는 사람입니다. 마지막에는 여자를 많이 얻으라는 계시를 받았습니다. 육 칠십 명 얻었습니다.
종교 개혁 때에 독일 문스터 시를 중심으로 하고 잔 오브레이드 이라는 사람을 중심으로 계시를 받았다고 하면서 몬스터에 새 예루살렘 교회에 가야 구원을 얻는다고 많은 사람이 구름같이 모였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마지막에 여자를 열 여섯 명 얻었습니다. 은혜를 색욕 거리로 삼았습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에 떠돌아다니는 이상한 말은 없습니까? 정신 차려야 합니다. 진리를 살지언정 팔지는 말라 진리를 사야 합니다.
우리 인생 일생에 할 일은 진리를 발견하고 진리를 사서 진리를 내 소유로 만들고 팔지 말고 끝까지 진리 안에 사는 것이 우리 인생 일생에 본분이 되는 것입니다.
천로역정(天路歷程)의 기독 도라는 이가 호화 시를 지나갑니다. 그 호화 시에 세상의 모든 허영의 상품이 많이 있습니다. 모든 장사하는 사람이 기독도 보고“이것 사세요, 저것 사세요”합니다. 그러나 아무 것도 사지 않고 그냥 지나갑니다. 그러니까? 마지막에“당신은 무엇을 구합니까?”묻습니다. 기독 도는“진리를 구합니다. 꼭 진리를 구해야 되겠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스펄죤 목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온전히 진리만 사라, 진리의 전체를 사라, 진리는 어떤 값을 주고라도 사라, 진리를 산 다음에는 절대로 놓지 말고 진리는 사고 팔지 말라” <진리의 매매>에서

 

 
 



170.웨슬레의 어렸을 적 일화

요한 웨슬레의 사적을 볼 것 같으면 그가 내 살 되었을 때 하루는 그가 이층에서 자고 있는데 갑자기 아래층에서 불이 났습니다. 방이 전부 불에 둘려 싸였습니다. 어른도 다 뛰어 나오고 물건도 다 들고 나와서 이제 다 살아난 줄 알았는데 나와 보니까 이층에 어린애가 자는 것을 그냥 버려 두고 내려왔습니다 불길이 사방에 퍼졌는데 올려다보니 문 창으로 아이가 깨어나서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런 얘기를 보고 어른들이 얼른 사람 위해 사람이 올라가서고 그 위에 또 사람이 서서 그 얘기를 겨우 구했더니 그 아이가 그 다음에 커서 위대한 위슬레가 되었습니다.

 

 
 



171.핀잔 받는 전도사

정월 초하룻날, 어떤 집에 전도하려 들어가 보니 여러 젊은 사람들이 모여 앉아서 화투도 하고 술도 마시고 하는 집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전도 지를 주며 예수 믿으라고 하니 대단히 시끄럽게 여겼습니다.“잘 노는데 기분 나쁘게 회개하라고?”이런 핀잔을 들었습니다. 아주 시끄러워 합니다. 아주 싫어합니다. 아마 여러분도 그런 친구나 그런 친척을 가지고 계신 분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오늘 아침 예배당 갑시다”하면 속으로는 대단히 시끄럽게 생각합니다.“남은 좀 집에서 편안히 잇으려고 하는데 예배당에 가자고?”하면서 대단히 시끄럽게 생각합니다.

 

 
 



172.고스란히 도적 맞은 이야기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전에 어떤 사람이 오늘 저녁엔 좀 잠을 편안히 자겠다고 해서 밤에 개가 짖으면 시끄러울 터니 개를 죽였습니다. 닭도 새벽에 울면 시끄러울 터니 닭도 죽였습니다. 그리고서는 아예 문을 꼭 eke고 불도 다 끄고 편안히 잘 잤습니다. 이튿날 아침에 실컷 자고 일어났습니다. 닭소리도 없어서 잘 잤습니다.“이거 몇 시쯤 되었나?”하고 시계를 보니까 시계가 없어 졌습니다. 그 다음에 옷을 입으려고 하니 의복도 없어졌습니다. 재봉틀, 라디오 그밖에 중요한 물건은 거이 다 없어졌습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자는 가운데서 깨라고 하면 싫어합니다. 시끄러워 합니다. 설교도 보통 다른 설교하지 이렇게 깨라고 하는 설교는 시끄러워 합니다.
그러나 어찌하여 깨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여러분은 자지마는 여러분의 마귀 원수가 자지 아니합니다. 우리 원수 마귀는 자지 아니하고 우는 사자와 같이 밤중에도 삼킬 것을 찾으려고 다니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자는 것만 보면 여러분의 집에 여러분의 속에 들어와서 여러분이 가장 귀한 것, 여러분의 영혼을 도적질 해 갑니다.<자는 자여 어찜이뇨?>에서

 

 
 



173.눈물의 아들은 회개할 때가 있다

교회 역사를 통해서 우리 교회 가운데 진주같이 귀한 경건한 어머니가 수없이 일어납니다. 아마 그 가운데 제일 유명한 어머니, 일반적으로 알려진 어머니는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 인줄 생각합니다.
모니카의 아들 어거스틴은 매우 재주가 많은 사람이올시다. 공부도 잘 했습니다. 글 잘하고 말도 잘합니다. 그러나 예수는 안 믿었습니다. 죄악 가운데 빠졌습니다.
경건한 이 어머니 모니카는 어거스틴을 회개하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십 년이 넘었습니다. 그러나 응답은 없었습니다. 죄악 길로 그냥 나갑니다. 더욱이 한번은 아프리카 북방의 고향을 떠나서 로마로 가려고 합니다. 제일 화려한 곳 죄악이 많은 로마로 가려고 합니다. 이 말을 듣고 모니카는 가지 말라고 간절히 부탁하고 하나님께 매달리고 어떻든지 못 가게 하려고 갖은 애를 다 쌌습니다.
그러나 모니카 몰래 배를 타고 도망쳐서 로마로 가기 전 모니카가 얼마나 마음이 상했던지 많은 눈물을 흘리면서 자기 목사에게 와서 사실을 호소하였습니다.
목사가 이 말을 가만히 듣거니“과히 염려하지 마세요, 이와 같은 눈물의 아들이 언제든지 회개할 때가 있습니다”그랬으나 모니카의 기대와는 반대로 오히려 어거스틴이 로마에 가고 그 다음에 밀란 에 가게되고, 밀란 에서 유명한 암브로스 목사를 만나고 그의 설교를 듣고 그의 감화로 회개해서 모니카의 기도가 응답되었습니다.
여기 간절한 기도로써 승리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우리가 봅니다. 이와 같은 어머니는 옛날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에도 여러분 게십니다.

 

 
 



174.진주보다 더 귀한 어머니의 모습

제가 지난 이른봄 어떤 날 늦게 저녁을 먹고 앉았노라니 까 우리 교회에 다니는 어떤 자매 님이 아이를 다섯을 데리고 제 집에 찾아 들어옵니다. 들어와서 하시는 말씀이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제가 어미 사정은 대강 압니다. 이 어머님은 6·25때 자기 남편이 행방 불명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일 어린것은 두 살인가 그렇게 되고 좀 큰대야 아마 열 너덧 살 이렇게 났던 모양인데 이 어머니는 아이 다섯을 대리고 살려고 하니까 아침부터 저녁까지 집에 있지 못하고 직장에 가서 일합니다. 또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다 학교에 보냅니다. 그런데 큰 문제가 이 세살 난 아이입니다. 이 아이를 어디 맡길 때도 없고 볼 사람도 없고 그래서 부득이 갈 때는 어디 가서 잃어지면 안 되겠다고 그래서 밖으로 문을 걸고 마치 가두다시피 하고 늘 직장에 나가서 일을 했다고 합니다.
“그랬었는데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금년에 우리 맏아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가두어 기르던 저 애가 이제는 국민학교에 다닙니다.”
그 어머니의 얼굴과 그 아이들을 쭉 둘러볼 떼 참 눈시울이 뜨거워서 눈물을 금할 수가 없는 것을 억지로 참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들었습니다.
이와 같은 어머니가 우리 교회와 우리 한국에 얼마든지 많이 계십니다. 이와 같은 어머니로 말미암아서 가정이 유지되고 교회가 유지되고 국가가 유지되고 아니 전세계가 유지되는 것입니다.
진주 보다 더 귀한 어머니의 모습이올시다. 여러분, 얼마 전 신문에서 영등포에 기차가 지나갈 때에 마치 어린것이 차 앞에서 놉니다. 어머니가 그것을 보고 뛰어 들어가서 어떻게 아이를 구해서 내 던지고 어머니는 달리는 기차에 치어서 죽은 사실을 여러분 다 기억하실 줄 압니다.
이와 같은 비극 가운데서 거룩한 모성애(母性愛), 어머니의 경건한 모습을 우리는 봅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무조건 사랑입니다. 아이들이 잘났던지 못났던지 어쨌든 자녀를 사랑합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깨끗합니다. 불순한 동기에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죽음보다 강합니다. 희생적 사랑입니다. 그런고로 어머니의 기도는 간절합니다. 그러므로 어머니의 기도는 응답이 됩니다.
내 어떤 책을 보니까 어떤 잘 믿는 어머니 셋이 있는데 자기 아들들은 다 안 믿는단 말이에요, 그래서 예수 님 말씀이『두 세 사람이 함께 모여서 기도하면 응답해 주시겠다』고 했는데 우리 함께 모여서 기도합시다. 그래서 한 주일에 한번씩은 늘 모여서 자기 아들을 회개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기도 동맹을 조직했단 말이에요, 그리고 계속해서 기도를 합니다.
그 동안에 얼마 있다가 두 어머니의 아들은 회개를 했습니다. 그러나 한 어머니의 아들은 종래 회개를 안 합니다. 그만 회개하는 것을 못 본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떠난 다음에 이 아들이 회개하고 그 후에 목사가 되었다는 책을 읽어보았습니다. 어머니의 기도는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건강한 어머니의 모습>에서

 

 
 



175.의인을 대망 함

제가 몇 달 전에 이탈리아 나폴리에 갔다가 가까운 폼페이성의 폐허를 가서 구경했습니다. 이 폼페이성은 일찍 주전 3, 2, 1세기, 주후 1세기까지 번영했던 도시가운데 하나였습니다. 1세기 말엽에 갑자기 그 옆에 있던 비스비어스 화산이 폭발되면서 말할 수 없이 많은 화산용암과 제가 하루아침에 20자 이상 덮임으로 몇 사람 도망해 나온 이외에는 사람이나 가축이나 할 것 없이 전부 제로 변해 버린 비참한 도시입니다. 너무 깊이 묻혀 있었기 때문에 발굴할 생각을 못했지마는 몇 십 년 전에 비로소 그곳을 발굴했습니다. 지금은 근 2천 년 동안이나 땅 속에 있던 그 폐허가 다시 나타나서 누구나 옛날 폼페이의 시가를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시가는 비록 좁지마는 돌로 깔았고 물론 위에 있던 것도 다 없어 졌지마는 돌로 쌓았던 담들은 아직 남아 있습니다. 그 때에 산 사람들의 모습을 그대로 볼 수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당시 얼마나 술을 많이 먹었다고 하는 것도 술집이 즐비하게 있는 것을 보아 알 수가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얼마나 음란하고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고 하는 것도 아직 남아 있는 벽화의 그림들을 보고 그 사람들이 남겨준 조각을 보아서 능히 짐작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때 사람들이 얼마나 우상을 섬겼다고 하는 것은 아직까지도 주피터의 부러진 목이 그대로 남아 있고, 주피터의 신당에 올라가는 돌로 쌓은 계단이 반반하게 닳은 것을 보아서 능히 짐작하고도 남았습니다. 당대에는 호화스러웠지만 지금은 황폐된 그 거리를 왔다갔다하면서 마음 가운데 일어나는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 가운데 하나는, 이 성에도 결국은 의인 열 사람이 없었던가, 그런 생각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흔히 어떤 국가나 민족이나 혹은 어떤 문화의 강약 혹은 우열 혹은 흥망성쇠를 물리적 조건에 의해서 수나 양의 세계에서 판단하기 쉽습니다. 어떤 나라가 강한 나라이냐? 면적이 얼마나 넓으냐? 인구가 얼마나 많으냐? 그 나라에 공장이 얼마나 많으냐? 그 나라에 비행기가 얼마나 많으냐? 군함이 얼마나 많으냐? 오늘날로 말하면 원자탄이나 유도탄이 얼마나 많으냐? 흔히 이런 것으로써 민족과 국가의 흥망성쇠를 말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아니해야 될 것은 이보다 더 중요한 민족이나 국가나 문화의 흥망성쇠 요소가 되는 것은 정신적 요소란 것입니다. 그 나라, 그 민족의 민족적 정기가 어떠하냐? 민족적 사기가 어떠하냐? 그 민족의 도덕적 분위기와 수준이 어떠하냐? 그 민족이 얼마나 깨끗이 살며, 얼마나 옳게 살며, 그 나라와 그 민족에게 얼마나 공의가 행하여지느냐?
다시 말해서 성경의 말씀대로 말하면, 어떤 민족이나 국가의 힘은 그 민족과 그 국가 안에 의인이 얼마나 잇느냐? 요컨대 그것입니다. 결국 이것이 어떤 민족이나 국가의 문화의 흥망성쇠를 마지막으로 결론지어 버린다는 사실을 우리가 잊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오늘날도 프랑스 나라에서는 과격한 정치 파동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우리가 신문을 통해서 압니다. 18세기에는 프랑스 대 혁명이라는 큰 혁명이 일어나서, 왕을 잡아다가 단두대의 이슬로 만들고, 귀족들은 잡아죽이고, 서로 민족끼리 싸워서 많은 사람이 희생을 당하고 그 후에야 프랑스 민족이 자유의 정부를 획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같은 18세기 영국에서는 피 흘림이 없이, 비극이 없이, 재산의 희생이 없이 옛 체제에서 변해서 좀더 새로운 자유와 평화가 있는 나라로 변천한 것입니다. 그 이유가 어디 있는가? 역사가들이 하는 말은, 다른 여러 가지 이유를 열거할 수 있지마는, 무엇보다도 큰 힘은 영국에는 요한 웨슬레 라는 한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영국에도 당시에 부폐한 것이 많았습니다. 옛날부터 내려오는 것 중 숙청할 것이 많았습니다. 평민 가운데 불평이 많았습니다. 여러 가지로 어려운 일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요한 웨스레라고 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사방으로 다니면서 복음을 증거 했습니다. 평민이 회개하고, 귀족도 회개하고, 국회 의원도 회개하고, 공장의 직공도 회개하고, 각계 각층 사람이 변해서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피 흘리는 혁명의 필요는 없어졌습니다. 자연히 국회가 아름다워 졌습니다. 정부가 좀 더 깨끗해졌습니다. 공장도 더 일할만하게 되었습니다. 사회정의가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각 방면으로 사회의 모든 형편이 아름다워지고, 자연히 그리스도의 이상과 사랑에 의지해서 변천된 새로운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는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19세기에 와서 전 세계의 최강의 나라로 발전되었습니다.
국가의 흥망과 성쇠도 알아듣기 쉽게 말하면, 우리 인간이 죽는 것과 비슷합니다. 사람이 죽는 것은 병이 나서 죽습니다. 병은 왜 납니까? 흔히 하는 대로 말하면 우리 육체 속에 악한 균이 들어옵니다 균이 들어와서 우리의 육체를 썩힙니다. 그러면 우리 육체 속에 있는 백혈구가 총 동원이 됩니다. 그래서 열이 오릅니다. 우리 원수인 썩히는 세력이 들어와서 우리의 피와 살을 썩힙니다. 이 균들을 잡아죽이려는 백혈구와 여러 균 사이에 전쟁이 몸 속에 일어납니다.
한편에서는 육신을 자꾸 썩히려고 합니다. 다른 한 편에 있는 백혈구는 자꾸 새롭게 하려고 합니다. 이 둘이 싸우다가 마지막에 어느 편이 이기느냐? 균이 이기면 마지막에는 사람이 죽습니다. 그러기에 거이 세상을 떠나가는 사람 옆에 가 앉으면 썩은 냄새가 납니다. 그 편이 이기면 죽습니다. 새롭게 하는 백혈구가 이기면 죽지 않고 삽니다.
우리 사회와 민족도 그와 비슷합니다. 우리 사회에도, 우리 민족 사이에도 두 가지 세력이 싸웁니다. 하나는 썩히려고 하는 세력입니다. 그러나 하나는 새롭게 하려고 하는 세력입니다. 예수께서 모든 믿는 사람들을 향하여 하시는 말씀이『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입니다. 소금은 무엇 하는데 씁니까? 썩는 것을 방지하고 새롭게 하는데 씁니다.
여기 생선이 있는데 생선을 그냥 두면 썩히는 미균(黴菌) 때문에 못 견디어 썩어집니다. 그러나 소금을 많이 쳐서 소금의 세력이 강하면 균을 죽여서 썩지 않게 방지합니다.
<의인을 대망 함>에서

 

 
 



176.종교개혁에 얽힌 이야기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 말씀은 개혁의 표어가 되는 구절이올시다. 오는 10월 마지막 주일은 흔히 종교개혁 기념주일로 지킵니다. 그것은 주후 1517년 10월 31일에 비로소 유명한 16세기 종교 개혁이 시작하게 된 까닭입니다. 물론 마틴 루터 이전에도 교회의 개혁을 부르짖다가 희생을 당한 사람이 많지마는 종교 개혁은 실상 마틴 루터로부터 시작해서 본격적으로 일어나게 된 까닭으로 흔히 종교 개혁을 생각할 때는 우리가 먼저 그를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본래 마틴 루터는 독일의 자그마한 어떤 지방, 가난한 광부, 혹 어떤 때는 농사를 짓는 그런 가정에서 난 사람이올시다. 부모가 빈한했지마는 신앙은 독실해서 어렸을 적부터 마틴 루터에게 그 당시에 행하던 신앙생활을 하는 법대로, 마리아도 열심히 숭배하고, 여러 성자도 열심히 숭배하는 법을 어렸을 적부터 배우게 된 것입니다.
그후에 대학에 가서 다닐 때에 점점 나이도 많아짐에 따라서 인생 문제에 대한 깊은 사색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특별히 자기가 한번 중상을 당해서 거이 죽을 뻔한 경험도 있었고 중병을 알아서 심히 고통을 받은 경험도 있었고, 또한 자기 가까운 친구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그와 같은 고통을 통해서 더욱 인생문제에 대한 번민(煩悶)을 대학 시절에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다가 큰 폭풍우가 있는 어느 날, 어떤 곳을 지나가다가. 바로 자기 옆에서 낙뇌(落雷)가 되는 그러한 위험한 일을 당하게 될 때에, 이 청년은 큰 공포에 싸여서 그 자리에 꿇어앉아서“성 안나 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제가 수도사가 되겠습니다.”이런 부르짖음을 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당시 광업을 하던 사람들은 성모 마리아의 어머니가 된다고 하는 성 안나를 수호 성자로 섬기던 때이어서 루터도 성 안나를 부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루터는 청년으로서 수도원에 들어가서 수도사가 되었습니다.
그곳에 들어가서도 자그마한 독방 생활을 하면서 적은 문 하나밖에 없는데 그 문을 열어 놓으면 공동 묘지 밖에는 보이는 것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곳에서 기도를 하며, 묵상을 하며, 공부를 하며, 연구를 하며, 어떻든지 자기의 구원을 완성하길 애썼습니다.
그렇지마는 지기의 고통은 점점 더해 졌습니다. 그 까닭은 성경을 연구해보매 성경의 교훈과 그 당시 교회에서 가르치던 교훈과, 행하는 일에 많은 차이를 발견하게 되어서, 거기에 대한 고통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둘째로는, 자기가 그때에 가르치는 대로 어떻든지 착한 일을 하고 어떻든지 공덕을 많이 쌓아서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얻고 죄 사함을 받으려고 아무리 힘을 쓰고 정성껏 모든 것을 다 한다고 하지마는 도저히 양심의 평안을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번은 세수 물을 떠다 놓고 손을 씻으면서“아무리 씻고 또 씻어도 내 몸은 그냥 더러우니 이것을 어떻게 하면 좋은가?”스스로 탄식하는 말까지 나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성경을 더 연구하며 또 성경을 그 때 비덴베르그 대학에서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시편을 가르치고, 갈라디아서를 가르치고, 로마서를 가르치게 되어서 이런 책들을 연구하는 가운데서 그 때 교회에서 가르치던 교훈이 근본적으로 성경에 가르치는 교훈에서 떠났다고 하는 것을 분명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 사람이 율법을 행해서, 선을 행해서, 누가 덕을 쌓아서 하나님 앞에 죄 사함을 받고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는 것을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그 진리를 분명히 깨달은 동시에 지금 읽은 이 말씀,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는 것인데, 이런 까닭으로 오직 복음 가운데 나타난 십자가의 의를 믿음으로써 하나님께 용서함을 받고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다고 하는 진리를 분명히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자기가 어떤 행실을 통해서 죄 사함을 받으려고 힘쓰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고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고 하였는데 오직 이 믿음으로써 십자가의 공로에 위에 온전히 자기 몸을 바치게 된 것입니다. 이 진리를 깨닫고 온전히 믿고 십자가를 의지하는 가운데서 비로소 자기의 죄가 십자가의 공로로 다 용서된 것을 깨닫게 되고, 그 다음부터 자기가 구원받은 것을 확실히 알게 되고, 따라서 그 다음부터 구원에 참된 기쁨을 맛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서도 이 성경을 대학에서도 가르치고 자기가 주일마다 설교하는 교회에서도 이 진리를 가르치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로마에서는 그 때에 레오 10세라고 하는 교황이 있었는데 그 전 교황 때에 굉장한 성 베드로 예배당을 새로 짓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굉장한 예배당을 짓게 되니까 재정이 대단히 궁핍해서 그때에 흔히 하는 법대로 속죄 표를 팔기 시작했습니다. 독일에도 테텔(Tetel)이라는 교황 사절을 보내서 속죄 표를 사방에서 팔았습니다. 죄 사함을 받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돈을 내고 이 속죄 표를 샀습니다.
루터는 자기가 깨달은 그 진리대로 설교도 하고 가르치던 그 때인지라 이런 광경을 볼 때에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1517년 10월 31일, 자기가 설교하는 캣슬 교회 문밖에 속죄 표를 파는 것이 그릇된 것이며, 참으로 죄 사함을 얻는 길은 오직 믿음으로 얻는 다고 하는 그런 조항에 대한 95개조를 내걸고, 누구든지 내가 주장하는 여기에 대하여 반대하는 의견을 가졌으면 내가 공중으로 변론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고 선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95개조가 바람에 날리듯 전 유럽에 펴지게 되었습니다. 사방에서 이 루터의 95개조를 논의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종교개혁이 시작되었고 종교 개혁의 3대원리를 주장하게 되었습니다.
첫째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죄 사함을 받는 것이 율법을 행함으로나, 선행(善行)함으로나, 공덕(功德)애 의지해서, 받는 것이 아니고, 오직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義)를 믿음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하는 이 원리입니다.
둘째로는, 당시 교회의 모든 형편을 성경을 권위로 삼기보다는 옛날부터 내려오는 여러 가지 교회의 전통에 더 치중해서, 성경의 진리가 가리어지니까 앞으로는 성경만을 신앙과 행위의 표준으로 삼고 교회에 내려오는 전통은 성경에 의지해서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려야 한다는 원리를 주장했습니다.
셋째로는, 그 당시에 보니까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성경에 보면 중보는 오직 예수 님 한 분밖에 없는데) 반드시 신부를 통해서야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이런 것을 가르쳤습니다. 이것은 성경에 없는 진리이니까, 누구든지 제사장의 자격이 있어서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중보로 삼아 가지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가서 기도하고 하나님께 직접 복을 받을 수 있다고 하는 다시 말하면, 신앙 생활에 있어서 개인의 자유를 주장하게 된 것입니다.
이 3대 원리가 요원의 불과 같이 전 유럽에 퍼지게 되어서 사방에서 종교개혁도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가령 스위스 같은 데서 쥬리히 라고 하는 곳에서 찌빙글리 같은 사람이 종교 개혁의 봉화를 들게 되었고, 프랑스에서는 존 칼빈(John Calvin), 그 후에 제네바로 갔지마는, 칼빈 같은 사람이 역시 종교 개혁의 불을 들게 되었고, 스코틀랜드 같은 데서는 죤 녹스 같은 사람이 역시 이에 호응하게 되어 종교 개혁의 불길이 온 유럽 천지에 차게 되었습니다. 교황은 물론 루터를 파면하고 여러 가지로 탄압을 하다가 마지막에는 무력으로 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구교를 치중해 믿고 교황을 후원하려는 이런 나라를 동원해서 신교 믿는 사람들을 무력으로 탄압하기 시작하니까 결국은 신교들도 역시 무력으로 항쟁하기 시작해서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16세기 중엽부터 17세기까지 근 한 세기 동안 종교 전쟁이 계속되었습니다. 그 가운데는 극히 비참했던 30년 전쟁도 그 때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1648년 웨스트 팔리아(Westphalia) 협약에 의지해서야 비로소 구교나라에서 신교 믿는 사람에게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신교의 자유가 많은 희생을 통해서 얻어지게 된 것을 우리가 잊지 아니해야 될 것입니다.
그러면 이 신교와 구교의 차이가 대체 무엇이냐? 구교 혹은 천주교 혹은 카톨릭교와 우리 신교 곧 장로교니 감리교니 하는, 이 신교의 차이가 대체 무엇이냐? 대체로 구교는 중세시대 기독교와 별로 차이가 없습니다. 가령 이렇게 몇 가지로 대조해 생각할 수 있습니다.
① 신앙의 차이
첫째로, 그 신앙에 대해서 지금도 말했지마는 우리 신교에서는 성경만을 신앙과 행위의 표준으로 삼습니다. 구교에서는 성경뿐 아니고 교회의 전통을 지금까지도 중요시해서 전통대로 하려고 합니다. 우리 신교에서는 성경만이 신앙과 행위의 유일무이한, 참으로 무오(無誤)한 법칙인 줄 믿고 그렇게 행하려고 합니다.
구교에서는 성경 이외에 교회 전통뿐 아니라 특별히 교황이 있어서 교황 무오설(敎皇無誤說)을 믿습니다. 교황이 신앙문제나 행위 문제에 대해서 확정하는 것은 그릇될 수 없다고 하는, 그가 그리스도의 대리임을 믿습니다. 우리 신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만 믿습니다. 그들은 성모 마리아를 믿고 여러 성자도 많이 믿는 모양입니다.
우리 신교에서는 죽은 후 천당에 가지 아니하면 지옥에 가는 것이라는 성경에 있는 그대로 믿습니다. 구교에서는 성경에 없는 연옥이라고 하는 딴 곳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밖에도 많지만 이런 몇 가지가 특별히 다른 것입니다.
② 예배의 차이
예배는 어떠냐? 우리 신교에서는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단순히 성경의 교훈과 같이 신령과 진리로써 예배합니다. 구교 예배는 의식을 존중히 해서 그 신부나 감독의 의복이 화려하고 찬란한 건 말할 것도 없고, 예배당에 들어가 보면 성모 마리아와 여러 성자들의 성상들과 그리스도의 성상들과 이런 우상과 비슷한 것이 많이 나열되었고 많은 성도들이 그 성상 앞에 가서 기도하는 것을 지금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신교에서는 예배 순서가 간단합니다. 찬송과 기도와 설교, 그저 이 몇 가지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밖에 미사 제를 드립니다. 미사 제라는 것이 성경에는 없습니다. 어디서 왔는고 하니 예수께서 성찬 예식을 행하실 때에 말씀하시기를『이것은 내 몸이니 이것은 내 피니…』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천주교회서는 이 떡과 포도즙을 위해서 특별히 신부가 기도할 때에는 이 떡이 사실상 예수 님 몸으로 변하고 이 포도즙이 사실상 예수 님 피로 변해서, 그러니까 예수 님 몸과 피를 다시 제사로 하나님께 드린다는 이런 전통이 생겼습니다.
이 교훈은 성경의 교훈과 정 반대 됩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 님께서 만민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갈보리 산상 십자가 위에서 단번에 제사를 지냈다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천주교에서는 이것과 반대로 합니다. 신부가 그 십자가의 제사를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반복해서 미사 제를 지냅니다. 우리 신약에는 전혀 없는 풍습입니다. 성례(聖禮)하면 신교에서는 단지 두 가지 밖에 없습니다. 즉 세례와 성찬, 신약에 있는 대로 두 가지 밖에 없습니다.
구교에 보면 거기에 다섯 가지가 더 있습니다. 가령 견신예(堅信禮)라 하여서 세례 받은 다음에는 감독이 안수하는 풍습이 있고, 종유례(終油禮)라 하여서 사람이 죽기 전에 기름 바르는 풍속이 있고, 참회라 해서 죄지은 다음에 신부에게 가서 자복하고 용서받는 그런 예가 있고, 결혼식도 성례로 간주하고 또 무슨 임직 식도 성례로 간주해서 성례를 일곱 가지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③ 정치의 차이
정치는 어떠하냐? 우리가 신약을 보면 초대교회에서 집사를 택할 때에 여러 사람이 모이여서 일곱 집사를 투표했다고 그랬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천주교에서는 그 풍속이 다 없어진지 오래되었습니다. 구교는 교황이 있어서 교황이 그 아래 기관을 임명하고, 대감독과 감독을 임명하고, 감독이 각 교회 신부를 임명하는 교황 전체 정치입니다.
지금까지도 천주교에 모호한 점이 있습니다. 로마에 가보면 교황과 성 베드로 예배당에 있는 그 자그마한 구역을 바티칸(Vatican)이라고 해요, 교황은 전 세계에 있는 주권자인 동시에 바티칸 나라의 왕입니다.
그러면 이 로마 교회에 입교한 사람들이 어떠한 의미에서 로마 교황에게 충성을 하느냐? 이것을 나라로 간주하는 나라에서는 교황청에서 사자를 보냅니다. 우리 나라에도 사실 교황청의 사자가 와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영국이나 미국에서는 그곳을 나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황청의 사자를 받지 않습니다. 이것이 정말 나라이냐, 이것이 교회이냐 에는 모호한 점이 지금까지도 있는 것입니다.
④ 문화의 차이
종교 개혁이 된 지 벌서 4백여 년이 지났습니다. 우리는 그 결과가 어떻게 된 것을 지금은 대강 엿볼 수 있습니다. 유럽에서는 영국, 독일 그리고 북부 유럽은 대체로 다 신교입니다. 납부 유럽인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 지방은 대체로 구교입니다. 또 남북 아메리카를 보면 북 아메리카인 미국과 캐나다는 대체로 신교입니다. 남아메리카는 대체로 구교입니다.
이 두 지방을 가만히 살펴보십시오, 문화적인 면에서, 구교를 주로 믿는 나라가 더 앞섰느냐, 신교를 믿는 나라가 앞섰느냐? 더구나 민주주의적 견지에서 보아, 민주 정치가 주로 구교를 믿는 나라에서 더 발전되었느냐, 신교를 믿는 나라에서 더 발달되었느냐? 그것은 여러분의 판단에 맡깁니다.
우리가 지금 까지도 한 가지 기억할 수밖에 없는 것은 신교가 많고 구교가 적은 나라에서는 신교 자유 문제가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다 자유를 줍니다. 그러나 오늘날도 구교가 많고 신교가 적은 나라 가운데는 구교도가 신교를 많이 핍박합니다. 콜롬비아 같은 나라에서는 지금도 많은 핍박을 받고 있습니다. 스페인에서도 작년에 신교 신학교 하나 있던 것마저 강제로 폐문 시키고 말았습니다. 지금도 핍박을 받고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이북에서 오신 분이 많은데 압록강이 본래 백두산 꼭대기 맑고 맑은 천지에서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물이 직접 흘러 내려와 여러 곳을 지나서 신의주쯤 와서 보면 물이 대단히 흐립니다. 왜 흐립니까? 오래 흘려 내려오는 동안에 거기에 섞이지 않아야 할 것이 많이 섞었습니다. 기독교회가 맨 처음에 갈보리 산상과 예루살렘에서 시작해서 맑은 물이 흘려 내려오는 동안, 여러 역사적 과정을 지나오는 가운데, 헬라, 로마 시대를 지내오고 암흑 중세시대를 지내오는 중, 여러 가지 섞이지 않아야 좋을 것이 섞인 것입니다. 우리 신교는 본래 근원지인 성경에 돌아가서 맑은 물을 마시는 이러한 신앙입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종교 개혁의 근본 원리>중에서

 

 
 



177.감사의 싸움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꿈에 천당 구경을 한 번 갔습니다. 아마 여러분도 천당간 꿈을 더러 꾼 이들이 계실 줄 알아요. 어떤 분이 그런 꿈을 꾸었습니다. 아 그래서 가보니까 어떻게 아름답고 화려한지 알 수 없습니다. 한 곳에 가보니까 넓은 뜰인데, 여러 사람이 모여서 크게 이야기를 하면서 떠드는데 얼른 보니까 싸움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이 천당 구경간 사람이 이거 천당에도 싸움이 있나 하며 무슨 일인가 고 생각했어요, 그래서는 가까이 가서 구경을 했다고 합니다.
구경을 하니까 그 많은 사람 가운데 어떤 험상스럽게 생긴 사람, 우락부락하게 생긴 사람이 주먹을 들면서“여러분 내 말씀을 좀 들어보세요, 제가 먼저 할 말이 꼭 있어요, 들어 바요”이렇게 떠들어 땝니다. 저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그려나 하고 가만히 보니까, 이 사람 하는 말이“난 본래 여러분이 보는 것처럼 이렇게 험상스럽게 생긴 사람이요, 난 본래 어렸을 적부터 나쁜 장난 많이 하고 학생 시대엔 깡패에 들어서 깡패 노릇하고, 그 다음에는 젊어서 허랑 방탕하고 일생 동안 세상사람이 짓는 죄란 안 지어본 죄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저 살인이요, 별의별 죄 다 짓다가 아, 그러다가 서 죽을병이 들었습니다. 아, 그래서 죽게 되었습니다.”
“아, 그 때 저의 집에는 예수를 믿고 회개한 그런 좋은 아내가 있습니다. 우리 아내가 교회에 가서 교역자를 청했는데 목사와 권사 한 분이 와서 자기에게 권면하는 말이 무슨 말인고 하니, 이제라도 회개하고 천당에 가라는 이런 전도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나처럼 일생 동안 이런 죄 많이 진 사람이 어떻게 회개할 수 있느냐고 물었죠, 그러니까 하는 말이 예수와 함께 못 박혔던 살인 강도도 십자가 위에 달려서 회개하고도 천당에 갔는데 나라고 이제 와서 회개할 기회가 없겠느냐고 합니다.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라더군요, 그래서 죽을 지경에 이르러서 회개를 하고 예수를 믿었는데 죽은 다음에 와 보니까 이렇게 화려한 천당에 왔으니 나보다 더 감사할 사람이 어디 있겠소”이렇게 이야기를 한단 말이요.
그리더니 그 많은 사람 가운데서“그저 하나님 은혜 감사하외다. 마는 내 이야기 좀 들어보세요, 나는 이래서 감사를 드리려고 합니다. 난 본래 우리 부모가 잘 믿는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나자마자 곧 세례를 받았어요, 난 물론 몰랐지마는 그 다음에 점점 커서는 주일 학교를 늘 다녔습니다. 그리고 또 18세 나서는 입교 문답을 하고 이어 교회에 입교했습니다. 그리고 믿는 중 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 믿는 대학엘 다녔어요, 그리고서는 곧 대학을 졸업하고 좋은 사업체에 취직해서 거기서 일 잘했습니다.
그러니까 교회에서는 주일학교도 가르치게 되고, 성가대 노래도 부르게 되고, 얼마 있다가는 집사 직분을 맡으라고 해서 집사 일도 하고, 또 얼마 있으니 장로 직분 맡으라고 해서 장로의 직분을 맡고 물론 여러 가지 죄야 많이 지었지요, 그 자그마한 죄, 그런 죄를 많이 지었지마는 무슨 큰 죄는 별로 지어보지 못하고 그저 온 집안이 항상 평안 한 가운데서, 그저 평화스러운 가운데서 일생을 살다가 내가 지금 천당에 왔으니 나처럼 더 은혜 받은 사람이 아디 있소. 내 생각은 제가 제일 감사를 드려야 할 줄 압니다.” 한 사람은 그런 단 말입니다.
이 말이 끝나자 어떤 무리의 사람 말이 갑자기 우레 소리처럼 들리면서“우리들의 말을 들어보시오, 우리가 얼마나 감사한지 우리의 말을 들어보시오”말하는 것입니다. 다름이 아닙니다. 무리 가운데 보니까 한 사람은 나이 많아도 보이고, 어떤 사람은 젊어도 보이는데 무리 가운데는 일찍이 예수를 믿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오래 믿은 사람도 잇고, 오래 못 믿은 사람도 있고, 나이가 많아서 믿은 사람도 있는데, 그 들이 다 세상에서 살 때에 다만 보통으로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 큰 핍박이 왔습니다. 큰 핍박이 와서 그들 믿는 사람을 학살하는 그런 경위를 당했는데 그들이 그때 이상스럽게 한 곳에 모이게 되었고, 한 가지로 꼭 죽을 때를 당했습니다. 그들 중 한 사람도 믿음을 배반한 사람 없이 믿음을 지키고, 그들의 생명을 바쳤으니 그들의 믿음이 부족하지마는 여기 와서 이렇게 순교자의 면류관을 받게 되었으니 이것처럼 감사한 일리 어디 있느냐고 합니다. 순교자의 면류관을 보이는 데 참 황금빛 보다 더 아름다운 면류관을 보입니다. 꿈에 천당 구경을 갔던 사람이 그것을 보고서야“아 이거 천당에도 싸움이 있긴 있는데 그것은 다른 싸움이 아니고‘감사 싸움’이구먼”하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우리 영락교회에서는 싸움을 할 바에는 감사의 싸움을 합시다. 오늘 누가 하나님 앞에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를 참으로 깨달아서. 우리가 다 깨달아서 하나님 앞에 제일 큰 감사를 드리는가 우리 보십시다. <감사의 싸움>에서

 

 
 



178.한 소년의 헌신과 그 결과

사회라고 하는 것은 아무리 사람이 많다고 하지만 한 사람, 두 사람, 세 사람, 이렇게 개인들이 모여서 백 명도 되고, 천 명도 되고, 천만도 되고, 삼 천만도 되는 것입니다. 태산이 아무리 높다고 하지만 티 끝이 모여서 태산을 이룹니다. 아무리 태평양 바다에 물이 많다고 하지만 한 방울이 모일 때 태평양의 물결을 이룹니다.
따라서 대륙을 움직이고 이 사회를 개혁하고 이 사회를 옳게 만드는 모든 운동도 결국은 한 사람이 깨닫고 먼저 시작하고, 또 한 사람이 그 사람을 따르고, 개인 개인이 움직이는 가운데 마지막에는 큰 운동을 일으켜서 위대한 일이 이 세계 역사에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특별히 이 본문(요 6:1∼15)을 보고 여러분에게 이 말씀을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날 한간에서 보통 서로 말하는 것을 들으면, 이거 큰 일 났다고 하며, 정치니, 경제니, 문화니, 관청이니, 군(軍)이니, 학교니 할 것 없이 각계 각층이 속속들이 썩어 들어가는 데 이것을 어떻게 할 수 있나? 이것을 나 혼자 어떻게 할 수 있나? 이것을 몇 사람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있나?
썩어 들어가는 것을 보면서, 이것을 막아야 되고 이것을 고쳐서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야 될 줄 알면서도 어떻게 할 수 없다고 그날그날 유유 도일해서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5천 명을 먹이는 이 위대한 기적이 한 어린아이가 먼저 자기에 있는 것을 바침으로 시작되었다 하는 이 사실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아무리 우리 사회에 사람이 많지만 한 사람, 두 사람, 세 사람, 이렇게 모여서 우리 사회를 이루는 것입니다.
생활을 하고 각기 그 직장에서 싸워 나간다 하면 위대한 이적이 오늘날 20세기에 대한민국에서도 나타날 수 있는 줄 생각합니다.
둘째로는,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한 어린아이가 자기에 있는 것을 참 순진한 마음으로 전적으로 그리스도에게 갖다 바칠 때, 이것을 축복해서 위대한 일을 이루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십시다. 하나님께서도 한 개인의 헌신을 축복해서 위대한 일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가 비록 작지만 온전히 헌신해서 그리스도 의 손안에 들어갈 때에 그것은 불고 불어서 5천 명을 먹일 수 있는 이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되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아무리 한 개인일지라도 그이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의를 위해서 싸울 때에는 온 우주가 그의 배후에서 그를 후원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동양의 성인도“덕불고(德不孤)요 필유인(必有隣)이라”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덕이라는 것은 외롭지 않다고, 맨 처음에는 외로운 소리로 홀로 부르짖기 쉽습니다. 그러나 덕이라고 하는 것은 절대로 외롭지 않아 반드시 이웃이 있다고, 의를 위해서 싸울 때에, 전 민족 전체의 복리를 위해서 싸울 때에, 진리를 위해서 싸울 때에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축복해 주신다고 하는 이 사실입니다,

 

 
 



179.안중근 의사의 헌신

안중근 의사가 할빈 역두(驛頭)에서 일본의 정치가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저격할 때에 선언서를 미리 인쇄했다가 뿌렸다고 합니다. 그 선언서 한 절 가운데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나를 절대로 일본의 정치가 한 사람을 암살하는 한 자객으로 알지 말라, 나는 대한민국 독립군의 한 사람으로서 전 일본 제국을 향하여 싸우노라”모든 사람들이 다 어찌할꼬 하고 손들고 있을 때에 독립군의 한 사람으로서 전 일본 제국을 대항해서 싸웠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일을 하나님께서 축복해서 마지막에 우리 민족에게 다시 독립과 자유의 축복을 허락하여 주신 것입니다. <한 소년의 헌신과 그 결과>에서

 

 
 



180.신령한 날개

전에 제가 미국에서 학교에 다닐 때에 어느 여름 방학에 어떤 미국 부잣집 별장에 가서 일 한 경험이 한 번 있습니다. 높은 산 위에 아름다운 호숫가에 좋은 별장을 지었는데 여름만 와서 삽니다. 거기 가서 한 해 여름 일을 했는데 저뿐이 아니고 일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 사람들은 흔히 저녁이 되면 젊은 사람들이 모여서 놀기도 하고 춤도 추는 그런 곳이었어요.
어떤 날 저녁에 저 보고도 자꾸 춤추는 곳, 댄스 홀에 가자고 그런 단 말이오, 그래서 나는 춤도 출 줄 모르고 그런 곳에 도무지 갈 마음이 없노라고, 이렇게 거절하니까, 그 젊은 사람들이 다 간 다음에 그 집주인이 제게 웃으면서 하는 말이“네게는 벌써 네 옆구리에 천사의 날개가 나기 시작했구나”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제 이야기를 해서 대단히 미안합니다.
신령한 의미에서 우리 믿는 사람들 가운데 과연 거듭나면 신령한 날개가 나기 시작합니다. 높은 곳을 향해서 올라가려고 하는 마음! 높은 곳을 사모하는 미음! 보다 더 깨끗한 것을 간절히 원하는 성품! 이것이 생깁니다. 벌래가 벌래 대로 있을 때에는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 본성입니다. 이 놈이 변해서 나비가 되던지 벌이된다고 하면 위로 올라가는 것이 본성입니다. 그리고 성충이 된 다음에는 밝은 곳으로 나가려고 하는 것이 그 본성입니다. <새해의 새 출발>에서

 

 
 



181.그리스도 중심의 신앙

우리의 신앙이 어떠합니까? 우리 신앙의 중심은 그리스도입니다. 살아 계신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입니다.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하지 아니하십니다. 이 그리스도를 믿고, 이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이 그리스도를 따르고, 이 그리스도를 순종하고, 이 그리스도와 같이 살며, 이 그리스도와 같이 죽는 것이 그리스도 교 신앙 생활입니다.
이렇게 우리 신앙이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면 자연히 겉 길에 나갈 염려가 없습니다. 무슨 이상한 것이 있다고 따라갈 필요도 없습니다. 무슨 주의나 사상이 나타난다고 따라갈 필요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의 무슨 이상한 이야기를 따라갈 필요도 없습니다. 이상한 의복을 입고 다닌다고 따라갈 필요도 없습니다. 꼭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해서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이에게는 겉 길로 갈 염려가 없는 것입니다.

 

 
 



182.거짓 예수 이야기

내가 얼마 전에 어떤 잡지를 보니 문명하다는 미국 같은 나라에도 어떤 사람이 예수 님 입던 그 의복 비슷이 만들어 입고 다녔습니다. 수염을 깎더라도 그렇게 나타난 예수 님 수염모양으로 깎고 머리도 그 비슷한 모양으로 깎고 돌아다니며 자기가 메시아라고 선전을 하며 다니니까 참 메시아가 왔다고 여자와 남자 가운데서도 따라다니는 사람이 상당히 많았다고 합니다. 그 사람들 가운데 제자들이라 하는 몇 사람을 정해서 제자들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자기는 지혜와 지식과 진리와 생명의 근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말은 대단히 좋습니다. 얼마쯤 따라다니다 보니까 이 사람이 공수표도 더러 썼습니다. 더욱이 남녀관계가 깨끗하지 못한 것이 사실로 나중에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제자 가운데 두 사람이 분해서 이렇게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놈을 처벌해 달라고 검사국에 고소를 했지마는 검사국에서 미쳐 처리를 하지 아니하니까 이 사람들이 참지 못해서 마지막에 다이너마이트를 48개나 가지고 가서 그 사람이 있는 데를 폭발시켜서 메시아라 하는 사람과 따라다닌 사람 할 것 없이 모조리 폭사해 죽였다는 잡지의 기사였습니다.
<그리스도 중심의 신앙생활>에서

 

 
 



183.리빙스톤의 유해

일생을 아프리카 대륙을 위하여 바친 리빙스톤이 아프리카 밀림 지대에서 홀로 기도하다가 마지막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하는 소식이 세계에게 퍼지게 되었습니다. 영국 조야(朝野)의 여론이 이와 같은 인물을 아프리카에 그냥 묻어 둘 수가 없으니 아무래도 유해를 영국 본국으로 운반하여 다가 영국의 모든 귀한 사람들이 묻히는 웨스트민스터 예배당 안에 묻는 것이 합당하다고 주장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영국 정부에서는 특별히 사람을 파송해서 리빙스톤의 유해를 운반하려고 할 때에 그냥 다 가져온 것이 아니고 그 유해의 가슴을 가르고 심장을 꺼내서 그 심장만은 그이가 일생 동안 제일 사랑한 아프리카 대륙에 묻은 것입니다.
사람에게 제일 귀한 것은 그 마음이올시다 그리스도 마음이 어떠하였는가? 사람의 생각으로 다 헤아려 알 수 없습니다. 단순히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그대로 오늘 아침에 잠깐 동안 생각하기를 원하는 것 입이다.
먼저 말씀하시기를『나는 마음이 온유하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마음은 온유하셨습니다. 온유(溫柔)라고 하는 말은 우리가 그 뜻을 잘 압니다. 아마 따스하고 부드럽다고 하는 뜻인 것 같습니다. 예수 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위에 올라오실 때에 성신께서 비둘기 모양으로 그 머리 위에 임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비둘기 모양으로 임한 것은 순결한 뜻도 있는 줄 압니다. 그러나 역시 온유한 성품의 표시도 그 가운데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속에는 온유한 성신이 충만히 계신 것입니다.

 

 
 



184.점점 작아진 사람

톨스토이의 여러 가지 작품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어떤 추운 날 예배당 근처에서 떨고 있는 사람을 만나서 자기의 집으로 데려왔습니다. 이 사람은 친절한 마음을 가지고 이 분을 도와주기 위해서 데려왔지마는 그 부인은 성가시니까 이 분을 친절하게 대하지 아니하고 냉정하게 보고 불친절하게 말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 데려온 사람은 어른이었는데 이상스럽게 점점 줄어지고 쪼그라져서 그 사람이 작아졌다고 합니다. 그것을 보고 주인이 민망해서 부인에게 잘 말해서 다시 친절히 그이를 대하고, 좋은 말을 하고, 좋은 음식을 대접하니까 작아졌던 사람이 점점 다시 커지고 아름다워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고 천사였다고 합니다. 천사는 항상 온유한 기분과 사랑이 충만한 하늘에 있던 분이 되어서 그렇게 냉정하고 조폭한 분위기 가운데서는 줄어들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온유한 사랑의 분위기 가운데 있게 될 때에 다시 크고 아름다워졌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람의 심령이 그렇습니다. 온유하고 사랑의 분위기 가운데서 심령이 바로 자랍니다. 아이들도 사랑의 분위기 가운데서만 그 심령이 원만히 자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온유한 마음을 배웁시다. <그리스도의 마음>에서

 

 
 



185.삶의 황금률

단순히 이론적으로 내가 남에게 대접을 받기 위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겠다고 말하기는 쉽지마는, 실상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 그런고 하면, 그것은 내가 그 사람의 자리에 있으면 그 자리에서 내가 무엇이 필요한지를 능히 상상력으로 생각할 수 있고 따라서 그들의 처지를 이해할 수 있는 힘이 필요한 것입니다.

 

 
 




186.노예시장을 목격한 링컨

아브라함 링컨이 젊었을 때에 뉴 올리안즈에 있는 노예시장에 가서 구경하는 일이 한번 있었습니다. 그때에 미국에서 흑인을 그냥 노에로 사용할 때이었으므로 노예시장에 있어서 흑인들을 다른 상품처럼 흥정해서 팔고 사고하는데 이 광경을 링컨이 직접 목격하였습니다. 한 가족인데 아버지는 딴 집으로 팔려가고, 어머니는 또 딴 집으로 팔려가고, 또 큰딸은 다른 집으로 종으로 팔려 가는 비참한 광경을 그가 보았던 것입니다.
비록 얼굴은 까맣고 공부는 하지 못했지마는 인정이야 다르겠습니까? 서로 갈라져 따로 갈 때에 목을 껴안고 울며 떨어지지 아니하려고 하나, 애통 가운데 할 수 없이 온 가족이 분산되는 광경을 링컨은 친히 목도했습니다. 누구나 그런 광경을 볼 때에 동정하지 아니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동정을 더 할 수 잇느냐 하면, 만일 내가 그 자리에 있다고 하면 내가 어떤 느낌을 가지며, 내가 그 자리에 있다고 하면 어떤 대접받기를 원하겠는지를 생각해 보는 사람일 것입니다.
링컨은 젊은 시절에 이러한 광경을 보고 언제든지 그 광경이 자기 머리에서 떠나지 아니했습니다. 내가 저 자리에 있으면 어떤 대접을 받기 원하겠는가? 그 대접은 이 흑인들에게 하지 않으면 안 되겠는데 그와 같이 하려고 하면 부득이 저 사람들도 나와 같이 자유스러운 사람이 되게 하지 아니하면 아니 되겠다고 하는 굳은 결심을 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 사람의 처지에서 어떤 대접을 받기를 원 했는지 그 대접을 생각해서 내가 다른 사람에게 대접할 수 잇는 그러한 동정심이 필요한 것입니다.

 

 
 



187.슈바이쳐 박사가 아프리카에로 가게된 동기

80노령에서도 저 아프리카의 캐머룬 지방에서 일을 하다 가신 슈바이쳐 박사가 본래 독일에서 대학교 교수의 자리를 내어놓고, 자기가 다시 의학을 공부하고 자기 아내로 하여금 간호원 공부를 하게 해서 직접 자기들이 아프리카로 일하려간 그 깊은 동기 가운데도 이와 같은 생각이 그 머리에 있었던 것입니다. 슈바이쳐는 어떤 날, 우연히 거리에서 조그마하게 만들어 놓은 흑인 동상을 보았다고 합니다. 그 흑인 동상을 통해서 그의 눈에는 아프리카에 수 없이 많은 흑인들은 연상할 수가 있었습니다. 벌써 수 백년동안 아프리카가 발견된 이후에 우리 백인들이 저 흑인에게 어떤 대접을 하였는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얼마나 많은 학대를 했고, 얼마나 많은 압박을 하였고, 얼마나 많이 상품처럼 이용을 하였고, 착취를 했는지, 백인의 한 사람으로서 얼마나 가슴이 무거웠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자기 혼자라도 저 흑인들이 받기 원하는 대접을 하여 보겠다는 결심 가운데서, 좋은 자리를 다 내어놓고 직접 그 사람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파하고 그 사람들의 상처를 만져 주고, 병을 고쳐주는 그 사업을 지금까지도 하고 있는 것입니다.『남에게 대접을 받기 원하는 대로 너도 남을 대접하여라』하는 주님의 명령을 순복(順服)하기 위해서 평생에 걸쳐 그런 고생스러운 생활을 하였던 것을 우리가 잘 아는 것입니다<생의 황금률>에서

 

 
 



188.물 대인 동산

우리 믿는 사람의 심령은 물 대인 동산 같습니다. 성경에 있는 말씀그대로 물 대인 동산 같습니다. 우리의 심령 속에 생명수가 있습니다. 시편에 보면 믿는 사람의 심령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다고 말했습니다. 광야를 흘러내리지마는 요단강 근처에는 아름다운 나무가 무성한 것을 볼 수 잇습니다. 그 까닭은 그 속에 요단강이 있는 때문입니다. 믿는 사람의 속에는 말하자면 이 요단강이 있습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의 생명이 있고, 장성이 있고, 아름다운 꽃이 피고, 복스러운 열매를 맺히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의 심령에는 기쁨과 만족과 영원한 노래가 있습니다.

 

 
 



189.시들지 않는 장미

지금 세상을 떠났지마는 전에 볼티모아에 있는 존 홉킨즈 대학의 외과 의사요 교수로서, 또 특별히 독실한 신앙을 가지고 전도에 열중하던 켈리 박사라고 하는 유명한 분이 계셨습니다. 저도 친히 그의 말씀을 한번 들어보았습니다. 켈리 박사의 일화 가운데에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그이가 언제든지 그의 양복 옷에다 좋은 장미꽃을 늘 꽂고 다니는 습관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웬 일인지 그 교수가 꽂고 다니는 장미는 도무지 시들지를 아니하고 그저 방금 꺾어서 꽂은 장미와 같은 꽃을 늘 꽂고 다녔습니다. 그래서 선생님 꽃은 어떻게 그렇게 도무지 시들지 않는데 무슨 비결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니까 웃으면서 그 방법은 별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양복 앞섶을 뒤집어 보였습니다. 그 속에 보니까 조그맣게 옆집을 달고는 그 속에 물병을 넣었단 말입니다. 그래서 실상 그 꽃이 물 속에 꽂히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자연히 시들지 아니하고 언제나 청청(靑靑)하게 보였던 것입니다.
이 때에 이 켈리 박사가 하는 말이 우리가 이 세상에 다니면서 언제나 신성하고 아름답게 항상 향기를 나타내는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가 되려고 하면 우리 생활 속에 믿음의 뿌리가 이와 같이 물 속에 있어야 되다고 했습니다. 생명수 속에 있어야 된다고 그 진리를 가르쳐 주셨다고 합니다.
누구든지 목마른 자는 나에게 와서 마시라』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수 주시는 반석이올시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앞에 나와서 이 생수를 마실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속에 생명의 강이 흘러서 언제든지 풍부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심령이 기갈한 자에게>에서

 

 
 



190.인도인의 속담

악한 마귀는 언제든지 어느 때든지 갑자기 우리를 시험합니다. 갑자기 우리를 미혹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됩니까?
여기 전쟁의 술어를 쓴다고 하면, 첫째는 전격(電擊)전을 써야 됩니다. 곧 물리쳐야 됩니다. 예수께서도 악한 마귀가 와서 예수를 높은 산 위에서 천하 만국의 영광을 바라보게 하고, 넌지시 하는 말이 자기에게 절만 하면 이 모든 영광을 예수에게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이 때에 예수께서 하는 말씀이『사탄아 물러가라 오직 주 너의 하나님만 공경하고 그에게 절할 것이니라』이와 같은 말로 대답한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그것이 나를 죄로 인도하는 것이 분명하면 곧 그 때에 물리쳐야 되는 것입니다. 인도 사람의 속담 가운데에“코끼리는 코부터 들어온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코끼리가 방안에 들어오려고 할 때에 우선 코부터 못 들어오게 해야지. 그놈이 어떻게 코만 조그만 구멍이라도 있어서 들어오게 된다면, 그 다음에는 못 견딘다고 합니다. 다 들어오고야 말지요.
시험이 꼭 그렇습니다. 처음에 우리의 마음 문을 두드릴 때에, 악한 유혹이 우리 마음에 엄습할 때에 마음에서부터 아예 물리쳐 버려야 됩니다. 그러기에 예수께서 자기의 제일 사랑하는 제자 곧 근방 반석이라고 불렀던 베드로를 향해서도『사탄아 물러가라』하였습니다. 베드로가 주님께 십자가의 고난을 피하라는 권면을 할 때, 사람의 뜻만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을 생각지 아니하니 네가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라고, 이와 같이 강경히 물리친 것입니다. 죄와 협상하지 맙시다. 타협해서는 아니 됩니다.
물론 이 시험을 다 이기는데 제일 중요한 것은 미리 준비태세를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전쟁을 막는 최선의 방법은 준비를 잘 확충해서 육, 해, 공, 각 방면에 군비를 해 두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올시다. 병을 예방하는 방법은 그저 평소에 우리의 생활과 우리의 위생을 조심해서 우리의 건강을 튼튼히 지키는 것입니다. 건강이 약해지면 백 병이 침입합니다.
모든 시험을 이기는 최선의 방법은 우리가 우리의 신앙생활을 철저히 해서 우리의 심령이 튼튼하고 우리의 믿음이 건전한 생활을 하는 데 있습니다. 그렇게 하려고 하면 우리가 언제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을 묵상하여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언제든지 성령이 충만한 생활을 하여야 되겠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유혹이 들어 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악하고 죄악이 많은 세상 가운데 나아가서 하루 동안 사는 것은, 마치 군인이 전쟁에 나가서 하루 동안 격전을 하는 것과 거이 비슷한 형편이올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루의 일을 준비하는 아침시간에 반드시 간절한 기도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심령을 튼튼히 무장하고 그 후에 세상에 나아가서 살아야 될 것입니다. 튼튼한 준비 태세를 가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에는, 이것이 제일 좋은 방법인 줄 압니다. 성경 말씀 그대로 제가 인용하겠습니다.『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어 주를 섬기라』열심을 품어 주를 섬기는 것입니다. 분주하게 주를 위해서 일하는 것

 

 
 

 

 

191.에디슨과 시험

전에 어떤 사람이 미국의 유명한 발명가 에디슨에게 가서 조용히 묻기를“선생님도 혹시 시험에 들어 본적이 있습니까?”고 물어 보았다고 합니다. 그 때는 노인일 적인데 눈을 크게 뜨면서“시험? 시험에 못 들어 봤다 왜 그런고 하니 시험에 들 사이가 있어야지”너무 연구하기에 바빠서 시험에 들 시간이 없었단 말입니다. 분주하면 시험에 들 기회가 사실 없습니다.
한가한 사람이 시험에 잘 듭니다. 한가지하니까 놀이터에 가게 됩니다 분주히 공부하지 않고 한가히 학교에 다니는 학생이 시험에 빠집니다. 여자들 가운데도 분주한 여자들보다도 소위 유한 마담이라고 한가한 여자들이 시험에 빠집니다.
분주하게 일하는 사람은 시험에 들 사이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분주히 일하는 사람, 내 책임을 충성되게 분주하게 잘 감당하는 사람, 열심을 품어 주를 섬기는 사람들에게 시험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놀며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시험이 많습니다.

 

 
 


192.지혜로운 왕의 교훈

전에 어떤 나라에 젊은 재상이 나이 많은 왕에게 말하기를 자기는 아직도 젊은 몸인데 유혹에 들지 않는 좋은 무슨 교훈이 있으면 말씀해 주시면 고맙겠다고 부탁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왕이 가만히 잠깐 생각하더니 그 옆에 잇는 신하를 불러서 얼른 안에 들어가서 금 잔에 기름을 가득 부은 것을 가져오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을 젊은 재상에 주면서“자 이 금 잔에 기름을 가득하지 아니하냐? 이 가득한 기름을 가지고 이 궁전에 나가서 아무 거리, 아무 모퉁이, 다 돌아오되 한 시간 이내로 다 돌아 오라. 돌아올 때 한 방울이라도 흘리면 안 된다. 한 방울이라도 한 방울이라도 그 기름이 흘러내리게 될 것이면 곧 자네 목을 베겠노라. 그런 줄 알고 한 방울도 흘리지 말고 곧 다녀 오라”그러면서 그 뒤에는 군인 한 명에게 칼을 뽑아 가지고 뒤를 좇아가게 했습니다.
한 방울을 흘리면 목을 자르라고 하니까 이 젊은 재상이 금 잔에다 기름을 가득 담아 가지고서는 조심스럽게, 그렇지만 한 시간 안에 돌아오라고 하니까 빨리 서둘러 땀을 뻘 뻘 흘려 가면서 그 모퉁이를 돌아서 어느 거리를 돌아서 겨우 한 시간만에 다시 가지고 왔습니다.
한 방울도 흘리지 아니하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숨이 차서 가지고 돌아 왔단 말입니다.“한 방울도 안 흘렸는가?”네 안 흘렸습니다. 그 때에 왕이 묻기를“그 아무 거리에서 아무 상점들을 보았나? 거리를 가다가 아무개를 보았나? 어디쯤 가면 누구가 있는데 보았나?”물어 보았습니다.“그만 못 보았습니다”“아니 못 보았다니, 지나오면서 못 봐”“이 기름 잔만 보려고 다른 것을 볼 사이가 있어야지요”그때 노 왕이 웃으며 하시는 말이“그러면 자내 유혹에 들지 않는 비결을 뵈웠나? 우리가 다 뵈웠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는 비결 가운데 제일 좋은 비결은 우리가 열심을 품어 하나님이 내게 맡긴 사명을 부지런히 하고 하나님의 집에 나와서나, 내 가정에 있어서나, 내 직장에 있어서나 내가 맡은 책임을 충성되게 부지런히 전 정력을 다해서 하는 가운데 자연 유혹이나 시험에 들 사이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공격이 언제든지 최선의 방어라는 전법이 있는 것입니다. <유혹을 삼가라>에서

 

 
 



193자신을 내어 맡기는 신앙

먼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내 약점이 무엇인고 내가 항상 연약한 방면이 어디 있는지 미리 알아서 이것을 조심하지 아니하면 안 되겠습니다. 내 속의 죄의 법을, 옛사람을 온전히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같이 못 박아서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몸과 마음을 온전히 하나님께 바쳐서 우리의 생명을 주장하도록 하여야 되겠습니다.

 

 
 


194.링컨의 온전한 신앙

1861년 11월 11일 아침이올시다 에이브라함 링컨이 미국의 대통령으로 선택을 받아서 취임하기 위하여서 자기가 20년 동안 살던 그린필드를 떠나는 아침이었습니다. 그때에 미국은 큰 시련기를 당하였습니다. 노예문제로 말미암아 또한 그 밖에 여러 복잡한 문제로 말미암아 남북전쟁이 일어날 큰 위기, 즉 미국이 분열되느냐, 파괴가 되느냐 하는 어떻게 될는지 알 수 없는 큰 국가적 위기에 이 링컨이 대통령으로 취임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링컨을 전송하기 위해서 역에 나왔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링컨이 고맙다는 말을 하고 맨 마지막으로 이 말을 했습니다.“일찍이 워싱턴의 어깨에 놓였던 짐 보다 더 큰 책임을 진 나는 언제 이곳에 돌아올는지, 사실 돌아 올 수가 있는지 알지 못하면서 이 곳을 떠납니다. 그(워싱턴)를 도와주신 하나님이 또 나를 이 때까지 인도하시고 내 전 운명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으면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그의 도우심이 있을 때에는 나는 실패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신앙을 가지고 그는 대통령으로 취임한 것입니다.
이 신앙을 가지고 7, 8년이라고 하는 오랜 남북전쟁을 통해서 미국 유사 이래에 가장 위대한 대통령으로서의 자기의 책임을 완수했습니다. 내 자신을 압시다. 이 세상의 물결은 높습니다. 악한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으려 다닙니다. 내 자신을 믿지 맙시다. 우리의 운명을 총괄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합시다 내 자신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지마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을 때에는 실패할 수가 없습니다. 반드시 성공합니다. <신앙생활과 내 자신>에서

 

 
 



195.크리스천의 기쁨

여러분 가운데 지난 금요일 저녁, 로드 부장의 말씀을 들은 이가 계실 줄 압니다. 그는 한국 구세군에 오래 있다가 불행히 6·25 때에 이북에 납치를 당해서 오랜 포로생활을 하였습니다. 다시 영국에 돌아가 계시다가, 이번에 잠깐 한국에 와서 이북에서 자기가 지내던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날 저녁에 거기에 참여한 사람은 다 많은 은혜를 받은 줄 생각합니다.
그의 경험 가운데 한 가지는, 자기가 한 번은 너무 피곤하고 마음도 약해지고 믿음도 약해졌습니다. 어떻게 피곤한지 촌보(寸步)를 걸을 수 없을 만큼 사방이 캄캄해지는 듯 하는 경험을 한번 당할 때, 돌연히 시편 23편에 있는『내가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 받음을 두려워하지 아니함은 주께서 나와 함께 계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 앞에 상을 베풀어주시니…』 이 말씀이 자기의 머리 가운데 번개 같이 나타났답니다. 그는 새로 힘을 얻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기를 도와주신다고 하는 것을 체험했다고 하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과연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에 모시고 그와 동행하는 사람에게는 이런 축복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일이 합동해서 선(善)을 이루는 확신이 우리에게는 있는 것입니다.

 

 
 


196.기쁜 마음은 새로운 힘

우리 믿는 사람이 가지는 여호와의 기쁨은 아침에 돋는 해와 같습니다. 점점 커갑니다. 점점 밝아집니다. 영원히 하늘 나라까지 우리의 기쁨이 더 온전히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옛날 우리 동양사람 가운데도 군자의 락(樂)과 소인의 락이 다르다고 기록하였습니다. 과연 우리 믿는 사람들의 즐거움과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의 즐거움의 차이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기쁨이 너희 힘이라』우리 믿는 자의 마음 손에 있는 이 기쁨이 우리의 능력이올시다. 슬픈 마음은 무리하게 만듭니다. 곧 피곤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기쁜 마음은 우리에게 새로운 힘을 줍니다. 기쁨이야말로 능력 있는 생활의 비결입니다. 기쁨으로 하는 일은 힘드는 줄 모릅니다.

 

 
 



197.음악과 소젖

제가 몇 해 전에 미국에 가서 이곳 저곳 구경하는 가운데 어떤 큰 목장을 구경했습니다. 큰 젖소가 백여 두 되는 큰 목장입니다. 젖을 짜는 방이 아주 넓은 방인데 그들은 전부 소젖을 짜되 기계로 짭니다. 어떻게 여러 소에서 젖이 많이 내려 흐르는지 수돗물 내려오듯 합니다.
그렇게 많은 젖을 짜는데 제가 한가지 이상하게 여긴 것은 그 젖 짜는 방에다 라디오를 놓았습니다. 소만 있는 그 젖 짜는 방에 라디오를 놓고 늘 좋은 음악을 보내주지 않겠어요? 저는 웃으면서 소만 있는데 라디오는 무엇 하려 놓았는가 고 물으니까 웃으면서 소도 라디오 음악 소리를 좋아한다고 대답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미국의 소들은 우리 농촌의 동포들 보다 퍽 낮다는 생각이 납니다. 사실 소도 마음이 기뻐야 젖이 잘 나온다고 합니다. 아마 아기 어머니들도 그럴 것 같습니다 마음이 기뻐야 젖도 잘 나올 줄 압니다.

 

 
 



198.지혜로운 체이슨과 올시어드의 거문고

여러분 가운데에 옛날 호머라는 헬라 시인이 말한 옛날 이야기를 들으신 분이 많이 계실 줄 압니다. 헬라 나라는 우리 한국의 남방과 같이 조그마한 섬이 많은 나라입니다. 옛날에는 섬 가운데에 문화가 크게 발전했습니다.
옛날 그 여러 섬 가운데 사이렌이라는 아주 요망한 여자들만 사는 섬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들은 특별히 노래를 잘 부릅니다. 아주 미혹 적인, 사람의 마음을 유혹시키는 이런 노래를 잘 불러서 섬 안으로 지나가는 선부(船夫)들과 그 여자들이 좋은 노래를 좀더 듣기 위해서 섬 옆으로 가까이 가다가는 그 여자들에게 꾀어 간답니다.
그 섬에 들어가서는 돈 있는 것은 다 빼앗기고 아주 망하고 돌아오곤 합니다. 그래서 이 헬라 사람들은 누구든지 배를 타고 갈 때에 조심하느라고 결심하고 가지만 막상 옆으로 지나가는 동안 그 노래 소리가 들리면 조금 더 듣자고 가까이 가다가는 쑥 들어가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 때에 체이슨이라고 하는 아주 지혜가 있는 사람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 분이 그 섬 옆으로 부득이 그의 많은 제자들을 데리고 지나갈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제자들을 한 사람도 유혹에 끌리지 아니하고 내가 섬을 지나갈 수가 있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 때에 헬라에 유명한 음악가가 한 사람 있었습니다. 거문고를 아주 잘 타는 올시어드라는 사람으로 그때 헬라에서 가장 유명한 제금(提琴)가였습니다.
이 올시어드를 청해 같이 배를 타고 갔습니다. 배가 그 섬 가까이 갈 떼에 올시드를 보고“여보 당신이 잘 타는 음악 소리를 들러 주시오”그러니까 유혹의 섬 가까이 가서 이 올시어드가 거문고를 내서 좋은 음악을 탑니다. 그러니까 이 배 가운데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이 좋은 음악에 도취해서 그 섬 가까이 다다라서 여자들이 나와서 노래도 하고 떠들었지만 그 노래는 아주 듣지도 않았습니다. 이 올시어드의 거문고 소리를 듣다가 이 노래 소리를 들으니 그것은 돼지 소리만도 못하다고 늦겠습니다. 그래서 그저 올시어드의 좋은 음악을 들으면서 평안히 그 섬을 지나갔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것은 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 가운데 우리가 배울 진리가 있는 줄 압니다. 내 심령 속에, 내 마음속에 기쁜 노래가 있어야 합니다. 내 마음속에 참된 영적 만족이 있고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세상의 더러운 죄악이 침노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참으로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나의 아버지인 줄 압니까? 과연 우리는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 아들 되시는 예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는 것을 분명히 내가 체험했습니까? 과연 주님께서 나와 같이 동행합니까? 주님께서 과연 내 생활의 목자입니까? 내가 과연 주님과 교통하는 생활을 합니까? 우리에게 영원한 소망의 기쁨이 있습니까? 이 참된 여호와의 기쁨, 이 기쁨은 우리의 힘이 됩니다. 이 기쁨을 다 받기를 바랍니다. <여호와의 기쁨>에서

 

 
 



199.전도의 은혜

그리스도의 중심이 되어 전도할 수 잇는 은혜까지 우리가 받아야 과연 복된 하나님의 제자가 되고 예수 님의 제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200.사장님 감사합니다

여러분, 아마 전에 이런 말을 들으신 줄 압니다. 어떤 회사의 사장이 예수를 잘 믿는 분이올시다. 꼭 자기는 주일날이면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예배당에 가서 예배보고 신앙 생활을 잘 하는 사람인데 도무지 전도는 하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을 보고 예수 믿으란 말을 한 마디도 못합니다. 자기의 회사에 같이 일하는 사람이 많이 있어서 다른 이야기는 늘 잘 하지마는 한 번도 예배당에 가자는 전도는 못합니다.
그러다가 어떤 주일날은 예배당에 가서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기의 잘못을 깨달아서 내가 이제는 꼭 전도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가지고 자기 회사 사무실에 나가서 사장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때 결심이 그저 누구든지 나한테 제일 먼저 이야기하는 사람에게 전도하겠다는 결심을 가지고 앉았습니다.
조금 앉아 있자니 문을 열고 제일 먼저 들어온 사람은 자기 비서였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이 비서가 예수를 믿는지를 알 수도 없고 또 한번도 이 비서에게 예수를 믿으라는 전도해본 일이 없었답니다. 그래서 첫마디로 그가 예배당에 다니는지 물어보았습니다. 이 비서가 눈이 둥글 해지면서 그것을 왜 갑자기 물으시냐고 반문했습니다.“그래 예배당에 가는가?”“저는 예배당에 가지 않습니다.”“그럼 예배당에 가야지, 예수를 믿어야 해”이렇게 이 비서한데 전도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비서가 하는 말이“사장님 감사합니다. 사장님을 제가 15년을 모셨는데 저한테 예배당에 가자고 하는 말씀은 한마디도 안 해서 저는 제 생각에 나 같은 놈은 아주 못되어서 예수를 못 믿는 놈인가 보다 이렇게 생각을 했어요, 오늘 저한테 이렇게 전도를 해주시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오는 주일부터 꼭 가겠습니다.”그런 대답을 하였단 말입니다.<4대 은혜>에서

 

 
 



201.주일학교에서 잘못 없이 매맞은 마음의 상처

제가 얼마 전에 어떤 가정에 심방 가서 우리 교회에 새로 나오는 어떤 청년을 만났는데 그 청년의 신앙 경험을 들어보니 일찍이 이북에 있을 때에 주일 학교에 다녔다고 합니다. 주일 하교에 다니다가 그만두고 오랫동안 예배당에 안 나오다가 다시 나오는데 어떻게 되어서 그때 그가 그만둔 사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 천년 이야기를 들어보니 다음과 같았습니다. 옛날 일제 말기 우리 교회가 일제 탄압아래에 있을 때에 열두 시가 되어서 사이렌만 나면 묵도하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때에는 이렇게 설교하다가도 열두 시가 되면 설교하다 말고 다 묵도할 수밖에 없는 그런 때를 우리가 지나오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아이들이 그 때 예배보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주일학교에서 아마 무슨 집회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열두 시가 되니까 다 묵도하라고 해서 묵도하는데 이 학생이 묵도를 안 했다고 합니다. 또 하기야 정성(精誠)하게 묵도한 사람 몇 사람이나 되겠습니까? 그 아이가 묵도를 안 했다고 주일 학교 선생이 와서 그 아이를 때렸다고 합니다.
주일학교 선생님들 자세히 들으시오, 주일 학교에서 아이들을 때리면 안 됩니다. 무심하게 아마 질서를 유지하느라고 선생이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맞는 아이에게 있어서는 대단히 섭섭했습니다. 그 청년은 오래 동안 교회에 안 나가다가 그 후에 장성해서 아무래도 자기가 예수를 믿어야겠다고 생각을 했답니다. 이런 각오를 가지고 다시 교회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사실 주일학교에 나오다가 어떻게 우리교회의 직분 맡은 분이나 목사가 실수함으로 말미암아 교회에 안 나오는 학생은 이 사람만 아닌 줄 생각합니다. 방해하지 아니하도록 우리가 조심해야 될 줄 압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걸음 더 깊이 생각할 것은 일반적으로 믿는 사람들이 불건전한 신앙생활, 곧 모든 경건하지 못한 언행들은 근본적으로 아이들이 주님께 나오는 것을 방해한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언제든지 잊어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가 사는 것도 혼자 살지 못합니다. 우리의 생활은 다른 이들에게 영향을 줍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태도는 특별히 우리 가정에 있는 아이들에게 큰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믿는 다고 하면서 우리가 생활한다는 것이 아이들에게 좋은 모범을 보여주지 못한다고 하면 이것이야말로 어린이들이 주님께 나오는데 큰 장해물이 되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말을 듣는 것보다도 그 생활을 봅니다. 그래서 어른들의 생활을 통해서 말하자면 요사의 말로 그들에게 시청각 교육을 줍니다. 여러분은 다 아이들이 구경하는 활동사진의 배우인 것 잊지 말아야 합니다.『백문이 불여일견(百聞, 不如一見) 이라고, 백 마디의 말보다도 한 가지 행동으로서 반대의 행동을 보여 주면 아이들은 그 것을 본답니다.
여러분의 가정 가운데 여러분 부모들은 신앙생활을 잘하는 가운데 있다고 하지마는 자녀들 가운데 아직 신앙생활에 돌아오지 못한 가정이 있다고 하면 깊이 반성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과연 우리 가정에서 하는 일 내 사회에서 하는 일이 명실공히 신행(信行)이 일치해서 나의 제일 가까운 자녀에게 참된 신앙의 모범을 보여주었는가? 그렇지 아니하고 단순히 외형으로 예배당에만 출석했는가? 우리의 생활이 어린아이들이 주님께 나오는데 장해가 되지 아니해야 되겠습니다. <꽃 주일>에서

 

 
 



202.마가 요한 이야기

묵은 땅이라도 다시 갈아서 곡식을 심게 되면 많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약의 여러 인물을 공부하는 가운데 마가 요한을 생각합니다. 이 청년은 본래 좋은 가정에서 태여 나고 좋은 환경 가운데서 장성한 모양입니다. 바나바의 생질로서 많은 총애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여러 젊은 사람들 가운데도 특별히 택함을 받아서 제일 먼저 바나바와 바울이 첫 번 전도 여행을 떠나갈 때에 사도들을 도와주는 특권을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옥토입니다. 그러나 마가의 마음 가운데 점점 잡초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자기의 생각만 주장하게 되고 사도들을 도와 줄 마음이 적게 되었습니다. 아무 재미가 도무지 없는 것 같이만 생각되었습니다. 마음이 점점 굳어져서 마지막에는 위대한 사도를 배반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아무 열매를 맺을 수 없는 슬 때 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둘째 여행을 떠날 때에 바나바는 다시 용서하고 다시 데리고 가자고 했지마는 바울은 아예 저버렸습니다. 그런 쓸 때 없는 청년을 바울은 데려갈 필요가 없다고 거절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한 것은 그와 같은 거절을 받은 후에 마가 요한이 자기 마음 가운데 크게 깨달음이 있은 줄 압니다. 자기의 묵은 밭을 다시 갈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잎에 회개하고 자복(自服)했습니다.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후에 보면 이 묵은 밭을 다시 갈아서 알랙산드리아에 가서 복음을 전파하고 큰 교회를 세운 위대한 전도자가 되었을 뿐더러 마가복음을 기록해서 공을 세웠고 그 다음에 바울의 편지 가운데도 마가는 그에게 심히 필요하니 꼭 데리고 오라고 하는 열매를 맺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묵은 밭이라도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래 열매를 맺지 못했다고 낙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제라도 하나님 앞에 나와서 성신으로 하여금 내 마음 밭을 갈게 하면 다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203.임어당 박사 이야기

얼마 전 타임 잡지에도 세 사람의 회개한 사람의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한 달 전쯤 미국 장로교회에서 발행하는「프레스비터리안(Presbyterian)이라고 하는 잡지에 그의 신앙 고백 문이 길게 난 것을 읽어보았습니다. 다름이 아니고 본래 중국에서 난 사람으로서, 오래 미국과 유럽에 여행하고, 영어로 책을 많이 쓴고, 중국말로도 책을 많이 쓴 임어당(林語堂)박사입니다.
그 사람은 본래 목사의 아들입니다. 상해에서 기독교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그리고 북경에 가서 교수로 있을 때에 점점 딴 생각이 들게 되었습니다. 여러 가지 세상의 철학을 기독교 철학보다 더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고백하는 대로 점점 거기로 기울어졌습니다. 사람이 이성대로 살면 그뿐 아니냐? 자기자신(自己自身)을 자신(自信)하게 하는 인본주의사상(人本主義思想)이 점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온전한 유물주의자(唯物主義者)가 되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를 다 부인하고 이 세상에 실재는 물질밖에 없다는 이런 사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려다가 자기 부인을 따라서 한 번은 뉴욕에 있는 메드슨 장로교회에 예배보려 같이 갔다가 그 목사의 감화를 받게 되어 한 번 가고 또 가고 여러 번 가서 온전히 그 마음의 변함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약 일년 전에 그 교회에서 온전히 과거를 청산하고 그 교회에 입교해서 교인으로 일년동안 조용히 있다가, 일년 후에 자기의 신앙을 고백하고 온 세계에 자기는 다시 기독교로 돌아 왔다고 하는 것을 증언하게 된 것입니다
오래 그 밭이 묵어 있었고 잡초가 났습니다. 좋지 못한 풀도 많이 났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다시 묵은 밭을 갈았습니다. 하나님의 씨가 다시 그 땅 속에 들어갔습니다. 앞으로 임 박사는 온 기독교회는 물론 온 인류에서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잇는 줄 확실히 압니다.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묵은 땅을 기경 해야 되겠습니다. 묵은 땅을 그냥 두는 것은 죄입니다. 하나님께서 땅을 주신 것은 좋은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서 주신 것인데 그저 주시는 햇빛을 받고, 그저 주시는 이슬을 받고, 때때로 내리는 단비를 받으면서, 아무 열매도 맺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큰 죄악입니다. 열매 없이 이 세상에 산다고 하는 것은 큰 죄악입니다. 은혜를 헛되이 받는 것입니다. 묵은 땅이라도 다시 갈면 큰 수확을 얻을 수 있습니다.
농사해 본 사람은 다 잘 알 것입니다. 묵은 땅을 갈고 곡식을 심으면 그 후에 특별히 잘 됩니다. 묵은 땅이 다시 은혜를 받게되면 특별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을 우리는 봅니다. 아닌게 아니라 오늘 읽은 성경 말씀(호10:12 렘 4:3)도 우리가 묵은 땅을 기경 하기만 하면 여호와께서 임 하사 의를 비처럼 충만히 내리어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묵은 땅을 기경하라>에서

 

 
 



204.그리스도의 약속

여러분 가운데 이따금 내가 지금까지 예수를 믿기 는 믿었지마는 과연 내가 구원을 얻었나하고 의심할 때가 있습니까? 그렇게 의심 날 때가 있으면, 이 요한 복음6장 37절을 꼭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
여러분 가운데 제가 처음에도 말씀드렸지만 예정 문제를 고민하면서 나의 구원이 예정되었는지 안 되었는지 모르겠다고 의심하는 분이 계실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의심이 나는 분일지라도 이 요한 복음 6장 37절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주께 오는 자를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시겠다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약속합니다. 그의 약속은 참이요 그의 약속은 진실합니다.

 

 
 



205.버틀러 감독의 이야기

전에 영국 국교에 버틀러 라고 하는 유명한 감독이 있었습니다. 그 감독이 임종시에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병이 중해서 꼭 세상을 떠나게 되는데, 그 때에 자기에 가까운 친구가 되던 목사가 가까이 그 옆에 와서 앉아 있습니다. 이 감독이 자기가 세상을 떠나게 된 것을 스스로 알면서 그 옆에 있는 친구에게“내가 일생토록 죄를 멀리하고 어떻든지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지금까지 가진 애를 써 왔지만 나는 원래 약한 인간이니까 지금 내가 세상을 떠나면서 생각하니 내 마음 가운데 두려운 마음이 들어온다”고 그런 말을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을 때 그 옆에 앉아 있던 목사가 하는 말이“아, 감독님, 왜 그런 생각을 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다 속량 해 주신 구주가 아닙니까?”그 감독이“그렇지, 예수 님께서 참 구주가 되시지, 그러나 꼭 내 구주가 되는지, 내가 어떻게 알겠나?”의심스러워 반문했습니다. 그 때, 옆에 앉았던 그 목사가 다시 하는 말이“감독님, 예수 님의 이 말씀을 잊어버리셨습니까?「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그 말을 들을 때에 이 감독의 얼굴에 기쁨이 충만해지면서“과연 그렇다, 내가 성경을 수천 번 보았지마는 그 구절의 뜻을 이제야 분명히 알았구나, 나는 평안한 마음으로 가는 구나”그 말씀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 하리라』내 과거의 생활로 말미암아서 염려할 것 없습니다 내가 과연 주님 앞에 온전히 왔습니까? 온전히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내 구주로 믿습니까? 내 주 앞에 왔으면 조금도 염려할 것 없습니다. 주님께서 결코 우리를 물리치지 아니하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약속>에서

 

 
 



206.중생의 체험

요사의 예수를 믿는 사람 가운데도 흔히 어떻게 생각하는고 하니 예수 믿는 것은 예배당에 가고, 찬송도 배우고, 성경 말씀도 듣고, 그리고 열 가지 계명도 배우고 그리고 산상보훈도 좀 배우고, 어떻든지 좋은 도덕적 교훈을 많이 배워서 좋은 교훈대로 힘써서 하나씩 둘씩 좀 고쳐나가고 이렇게 수양을 잘 하는 것이 기독교인의 신앙생활이라고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기독교의 신앙이라 하면 기독교는 유고 도덕 사상에서 더 나은 것이 없습니다. 유교 사상이 그것입니다. 좋은 도덕적 교훈을 얻어서 그대로 생활하면 되지 않느냐? 우리 기독교는 사람을 그보다 더 깊이 봅니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그 성품이 죄악으로 부패해서 죽은 영혼입니다. 기독교의 요구는 근본적으로 다시 나지 아니하면, 새 사람이 되지 않으면, 다시 나는 것과 같이 변혁이 있지 않으면,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이 기독교의 근본 정신입니다.
먼저 나무가 좋아져야 좋은 열매를 맸습니다. 나무를 그냥 두고 열매만 아무리 개량하려고 애써도 쓸 때가 없습니다. 근본적으로 나무의 성품이 변해야 됩니다. 근본적으로 부패한 인간 성품이 변하는 것을 중생(重生)이라고 합니다. 다시 나야 합니다.

 

 
 



207.거듭난 사업가의 이야기

오늘 이 시간에도 여러분께서 이 사람(니고데모)의 간증하는 말씀을 들었지마는 동남아 여러 지방으로 다니기는 세 분이 같이 다녔습니다. 한 분은 의사요, 한 분은 사업가였는데 그분이 이런 간증을 하였습니다. 이 분은 본래 어렸을 적에, 믿는 가정에서 나서 주일학교도 다녔고, 또 교회에도 그렇게 열심히는 못 나왔지만 교회에 나왔고, 이렇게 신앙생활을 하던 사람입니다.
한 번은 어떤 친구의 초청을 받아서 저녁을 같이 먹고 이야기했습니다. 마침 그때에 영국에서 온 잘 믿는 사람이 있어서 같이 이야기를 하게되었습니다. 그 사람이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하는데 무슨 말을 묻는고 하니“당신 거듭났습니까?”“중생입니까?”이것을 솔직히 물어보았습니다. 지금까지 믿어 오기는 왔지마는 그렇게 갑자기 대 놓고서 이런 질문을 받아보기는 처음이란 말입니다.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배당에 잘 다녔습니다 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더랍니다.“그 동안 다니는 것은 좋지만 성경 말씀에 보면 거듭나야 천국에 들어간다고 했는데 거듭 났습니까?”또 물어 봅니다. 그래서 할 말이 없어 어물어물하면서 대답하는 말이“난 연보도 상당히 하는 사람인데…”“아 연보도 늘 하는 것은 대단히 좋습니다. 하지만 성경 말씀에 보면 거듭나야 천국에 들어간다고 했는데 거듭났습니까? 또 물어 본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는 솔직히“난 거듭났는지 안 났는지 모릅니다. 어떻게 해야 거듭납니까?”되물어 보았습니다.
그이는 어떻게 하야 거듭난다는 말을 그 때 그 분에게 해 주었습니다. 그 말대로 했습니다. 그래서 사실 거듭 나는 체험을 얻었습니다. 그후에는 사업만 하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 신앙을 간증하면서 다른 여러 사람을 많이 주께로 인도하고, 자비로 동남아까지 같이 와서 주의 일을 하려고 많이 애쓰는 것을 보았습니다.
자 여러분! 여러분에게 하나 묻습니다. 여러분 하나 하나가 다 거듭났습니까? 스스로 물어 보십시오. 여러분에게 와서“당신 거듭났습니까?”이렇게 분명히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하겠습니까?“글세 자세히 모르겠는데요”이렇게 대답할 사람은 없습니까? 사실 이 중생의 체험이 어떤 분에rps 갑자기 되고, 어떤 분에게는 시일을 요구해서 천천히 거듭나서 자기 자신도 혹 모르는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실 중생 한 생활을 하면서도 자기 스스로가 몽롱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먼저 중생으로>에서

 

 
 



208.덕불고 필유린

이런 생각이 들어 올 수 있습니다.“나는 아무리 교회 봉사를 잘하고 신방도 열심히 잘하고 하지만, 교역자나 장로가 누구 하나 칭찬하는 때가 어디 있나? 그저 빽이 있어서 윗자리로 올라가지”이와 같은 고독을 느낄 때에 맥이 풀리기 매우 쉬운 것입니다. 여러 해 동안 힘써 나오던 사람 가운데도 오히려 이와 같은 시험에 빠져서 낙심하는 사람도 없지 않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와 같은 시험이 마음 가운데에 들어올 때에 고요히 생각해야 됩니다. 사실 우리가 남의 얼굴이나 보고 선을 해서야 그것이 무슨 선입니까? 남의 칭찬하는 말이나 듣고 그 말에 격려를 받아서 우리의 선한 씨를 뿌리는 생활을 계속해서야 그것이 무슨 참된 선의 파종자(播種者)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옛날 내려오는 성현의 말씀 가운데도“덕불고 필유린(德不孤必有隣) 이란 말이 있습니다.『덕은 외롭지 않은 지라 반드시 이웃이 있다』장차 때가 되면 세상 사람도 알아 줄 때가 있겠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알든지 모르든지 언제든지 하나님께서 아시는 것입니다.

 

 
 



209. 컬럼버스의 끈기

컬럼버스를 생각해 보십시오. 컬럼버스가 제일 먼저 그냥 서편으로만 항해해 가면 직선으로 인도 곧 동양에 갈 수 있겠다고 하는, 지구가 둥글다고 하는 확신을 가지고 그것을 경영할 때에 도와주는 사람이 별로 없었습니다. 마지막 서바나 왕족의 후원을 받아서 배를 지어 가지고 출항하여 서편을 향해 갔지마는 아무리 가도 육지가 보이지 아니할 때에 심지어 같이 가던 선원들도 반항하기를 시작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컬럼버스의 뜻을 알아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컬럼버스는 계속해서 낙심하지 아니하고 그냥 노를 저어라고 하여 끝까지 나아갈 때에 인도까지 오지는 못 했지만 인도 보다 더 큰 축복을 받아서 새로운 대륙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낙심하지 아니하고 끝까지 노를 짓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예기 이상의 큰 축복으로 우리에게 마지막 날 주는 것입니다.

 

 
 



210 하나님의 때는 사람의 때와 다르다

그리스도의 생활을 생각해 봅시다. 얼마나 많은 비난과 오해와 핍박을 받았습니까? 예수 님께서 친히 또한 말씀하시기를 『너희도 내 이름으로 핍박을 받고 욕을 먹고 악하다고 하는 거짓말을 들으면 오히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그랬습니다. 옛날 선지자들도 그와 같은 일을 당하였을 뿐 아니라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고 예수 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 그리고 아무리 애써도 무슨 성과가 되어지지 않을 때에 조금 잘못하면 낙심하기 쉽습니다. 아무리 선한 씨를 뿌려도 무슨 특별한 효과가 없습니다. 무슨 특별한 열매 맺는 것이 눈에 보이지 아니합니다. 이럴 때에 그만 낙심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낙심하지 말라고 권면하면서 이 말을 첨가했습니다."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때가 이르겠다고 그랬습니다. 때가 이르면 반드시 거두겠다고 말씀했습니다. 때가 있는 것입니다. 거둔다고 해서 봄에 뿌려서 그 이튿날 곧 거둡니까? 기다려야 되지 않겠습니까?

 

 
 



211.곡식 모가지를 뽑은 이야기

옛날 맹자의 말 가운데 잇는 제 나라 어느 사람처럼 곡식을 심어놓고 빨리 크지 않으니 까 너무 급해서 얼른 커서 열매를 맺으라고 하루아침에는 나가서 전부 모가지를 뽑아 놓았다고 합니다. 너무 그렇게 급하게 생각하지 맙시다.
하나님의 때는 사람의 때와 다릅니다. 하나님의 때가 있습니다. 때가 올 때에는 반드시 거둘 것입니다. 어떤 것은 내가 심고 거둡니다. 어떤 경우에는 내가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둡니다. 어떤 경우는 이 세대에 심은 것을 다음세대에 가서야 거둡니다. 어떤 것은 이 세상에서 거둡니다. 그러나 어떤 때에는 이 세상에서 심은 것을 하늘 나라에서 거둘 때가 있는 것입니다. 반드시 거둘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곧 무슨 성과가 나지 아니한다고 조급한 마음으로 낙심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212.자이언트 킬러스

성경에 잇는 말씀과 같이 떡을 물위에 던지면 오랜 후에 그 떡이 다시 우리에게 돌아올 때가 있겠다고 말씀했습니다. 제가 지난주간 잠깐 시간이 있어서 그 주 타임 잡지를 펼쳐 보니까 이런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일본 북해도 어느 해변에서 된 일인데 그 해변가에 아이들 네 형제가 함께 사는 집이 있습니다. 제일 큰 아이가 열 네 살, 그 다음이 열 두 살, 그 다음이 열살, 아홉 살 된 남자 네 형제가 그 해변가에서 살았습니다.
어부의 아들이니까 물론 헤엄도 잘 칠 것입니다. 그런데 하루는 날이 맑아 헤엄치려 가자고 하면서 제일 큰애가 먼저 헤엄을 쳐서 한 50야드 박에 있는 바위를 향해 헤엄쳐 갑니다. 그러니 또 둘 째 놈이 따라가고, 셋째 놈이 따라가, 넷째 놈까지 연달아 헤엄쳐 갔습니다. 얼마쯤 가다가 제일 큰애가 보니까, 저편에서 큰 상어 한 마리가 마주 옵니다. 상어는 사람까지 잡아먹는 놈입니다. 그러니까 이 아이가 얼른 돌아서면서“야 상어 오는데 빨리 도망하자』소리 질렀습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이 일제히 돌아서서 언덕으로 헤엄쳐 돌아갑니다. 조그마한 아이들은 언덕에서 조금 갔었으니 까 곧 언덕으로 올라왔습니다. 그러나 큰애는 올라오지 못했습니다. 그 상어가 거이 가까워 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상어가 사람을 물때에는 와서 뒷다리를 무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 와서는 오히려 물 속으로 들어갔다가 올라오면서 배를 문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보니까 이 놈이 따라오다가 물 속으로 들어 가드랍니다. 경험 있는 아이였기 때문에 얼른 향해서 가다가 뒤로 돌아섰습니다. 돌아서 보니까 상어란 놈이 자기 앞에 와서 공중으로 입을 벌리고 헛 물고서는 옆으로 나가 자빠졌습니다.
그 때 이 아이는 얼른 가서 상어 옆을 붙잡았습니다. 상어를 잡아 탄 것입니다. 타고서는 이것을 놓으면 죽겠는데 놓겠습니까? 꼭 붙어 안고는 상어하고 싸웁니다. 이 것을 세 아이가 보다가 그냥 있을 수가 없어서 전부 물 속으로 따라 들어가서 넷이 모두 상어를 붙잡았습니다. 지금 바다 가운데서 싸웁니다. 그런데 계속 그대로 싸웠으면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그러나 마침 큰 물결이 바다에서 밀려오면서 상어나 상어를 붙잡은 아이들이나 전부 물 얕은 곳으로 내 빌어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전부 다 물이 한 길 밖에 안 되는 곳에 밀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상어란 놈이 물이 얕은 곳에서는 옴짝달싹 못합니다.
네 아이가 그 옆에 있는 돌멩이를 들고 돌멩이로 때려잡았습니다. 그 이야기 제목은“자이언트 킬러스(Giant killers) 즉 거물을 죽이는 사람들이라고 붙였는데 그 이야기를 가만히 읽어보니 이 아이들이 자기의 힘에 넘치는 악한 상어와 지금 싸우는 중입니다. 단단히 붙잡았기에 자기들이 죽지 않았지 놓았으면 죽을 뻔했습니다. 단단히 붙잡고 싸웠습니다. 그러나 단단히 붙잡고 싸운다고 해서 그 아이들이 아마 이기지는 못했겠지요. 결국은 큰 물결이 와서 전부 얕은 곳으로 밀어내었습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이 작은아이들이 일곱 자나 되고 백 팔십 파운드나 되는 큰 상어를 잡았단 말입니다.

 

 
 



213.권능의 물결

우리가 이 세상에 살 때에 어떤 때에는 악의 세력이 너무 커서 어린아이들이 상어를 붙잡고 싸우는 것과 같은 느낌이 우리 마음 가운데로 들어올 때가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악의 세력을 붙잡고 싸울 때에 낙심하지 아니하고 끝까지 붙잡고 싸우면 하나님의 큰 권능의 물결이 우리를 도와줍니다. 그래서 악의 세력을 온전히 이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끔 말합니다. 남한에 악의 세력이 얼마나 많은가? 북한에 공산당이라고 하는 악의 세력이 얼마나 많은가? 네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가? 낙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악의 세력이 커 보이지마는 단단히 붙잡고 놓지 아니하고 계속 싸우면 하나님의 큰 권능의 물결인 역사의 파도가 반드시 우리를 도와 줄 때가 있는 것입니다.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고 그랬습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편지를 할 때에 이런 말을 기록했습니다.『전에와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를 존귀(尊貴)되게 하려 하오니…』「전에와 같이 이제도…」전에 젊었을 때와 같이 우리 바울이 비록 나이 많았어도 시종 여일합니다. 살든지 죽든지 바울의 몸에서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고자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아니했습니다. 낙심하지 아니하면서 때가 이르매 반드시 거둘 것입니다. 기도하십시다.

 

 
 



214.주님의 약속

데살로니가 전서 5장 23∼24절에는 이런 말씀으로 가르쳤습니다.『평강(平康)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존되기를 원하노라』『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여러분을 불러서 구원하여 주신 하나님은 미쁘신 하나님인 까닭으로 여러분의 몸을 온전히 지켜서 우리 주님의 날까지 보호하여 주시겠다고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미쁘신 하나님을 의지합시다. 이 미쁘신 하나님께 우리의 전 생명을 바칩시다. 내 지혜를 의지하지 마십시오. 오직 미쁘신, 전능하신, 사랑이신, 하나님을 의지하세요. 또 이와 같이 미쁘신 하나님께 대하여 우리도 미쁘게 살아야 합니다. 또 미쁘신 하나님을 믿고 사는 우리가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미쁘게 살아야 합니다.

 

 
 



215.리빙스턴이 은혜 받은 말씀

아프리카에 제일 먼저 가서 일생토록 그 암흑 대륙을 탐험하며 처음으로 흑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한 리빙스턴
216.헌금의 바른 자세

전에 제가 이북에 있을 때에 어떤 분규 난 교회의 어떤 직분 맡은이가 저에게 와서 말하기를 자기 교회의 목사는 아무리 교인들이 환영하지 않아도 나가지 않고 그냥 있어서 이젠 부득이 경제전(經濟戰)으로 들어가야겠다고 합니다. 즉 연보 안 하겠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이북에 있을 때에 들은 말이지만 이북의 어떤 사람은 예배당에 갈 때에 한 편 주머니에는 돈 일원 자리를 넣고-그때 일 원 자리면 지금 천환 가치는 있습니다. 한 편 주머니에는 돈 십 전 자리를 넣고 갔다가 설교를 들어보고 설교를 잘 하면 일 원 자리를 넣고 설교를 잘 못하면 이건 십 전 자리밖에 못되니 십 전 자리를 넣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헌금은 근본적으로 사람에게 주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헌금은 물질 자체를 드리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헌금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을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하는 시간에 헌금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몸을 드리는 그 정신으로서 그 상징으로서 우리 일상 생활에 필요한 물질의 일부를 하나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헌금에 정성이 따르지 아니하면 헌금의 의의를 잊어버립니다.
어떠한 헌금이 하나님께 가합(加合)이 되고 어떠한 헌금이 하나님께 가합이 되지 아니하느냐? 같은 헌금이지마는 그 배후에 정성이 따를 때에 그 헌금이 하나님께 가합이 됩니다. 그러기에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무엇을 받칠 때에, 곡식을 바치면 첫 이삭을 바쳤습니다. 처음 거둔 것을 바쳤습니다. 나무의 열매이면 첫 열매를 바쳤습니다. 자녀이면 맏아들을 바쳤습니다. 짐승의 새끼면 첫 새끼를 바쳤습니다. 양을 제물로 바칠 때에도 함부로 아무거나 바치지 않았습니다. 흠 없는 순결한 양을 택해서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정성으로 드립니다.

 

 
 



217.욕심 많은 농부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옛날 어떤 임금이 자기 이웃나라의 한 임금이 경사스러운 일이 있어서 자기 사위를 축하 사절로 보냅니다. 그래서 사위에게 금과 은도 달아 좋은 말도 택해 주고 좋은 수레도 택해 주면서 이것을 가지고 이웃 나라에 가서 어떻든지 축하 잘 하고 돌아오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이 예물을 다 받은 사위가 껄껄 웃었습니다. 그러니까 왕의 눈이 둥그래지면서“너 어찌하여 웃느냐? 이 예물이 변변치 않단 말이냐?”그러니까 그 사위가 하는 말이“페하! 황송하옵니다. 제가 예물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제가 오늘 아침에 부름을 받아서 여기 오는 길에 길가에서 본 것이 생각나서 웃습니다”“길가에서 무엇을 보았느냐?”길가에 오다가 어느 농사하는 집을 지나 왔는데 그 집안에 조그마한 신당이 하나 있었어요. 그 신당 앞에서 농부가 제사를 드리는데 그 우상 앞에다 되지 족발 하나를 갖다 놓고 그 다음에 술 한 잔을 부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이 농부가 복을 달라고 비는데「오! 신이여 그저 금년에 나에게 복을 주어서 금년에는 우리 소는 새끼를 꼭 쌍둥이를 낳게 해주시고 또 우리 되지는 새끼를 낳되 한 배에 열 놈씩 여러 배를 낳게 해 주시고, 그 다음에는 또 곡식이 잘 되어서 우리의 뒤 곡간도 가득히 차게 해 주시고 우리 앞 곡간에도 곡식이 가득하게 채워주시기를 바랍니다」이렇게 축원을 합니다. 되지 족발 하나놓고 그렇게 복을 많이 받겠다고 하는 욕심이 그렇게 많은 사람을 천하에 처음 보았기에 그럽니다”

 

 
 



218.성경은 구원의 우물

제가 오래 전에 읽은 책이지마는 지금도 기억하는 작은 책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22년 동아이나 여러 가지 죄를 지음으로 감옥 생활을 하던 어떤 청년이 감옥에서 성경책을 만나게 되어 그 성경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 성경책을 읽는 가운데『성한 사람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난 사람에게 쓸데 있는데 인자도 세상에 온 것은 의인을 부르러 옷 것이 아니오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하는 이 구절을 읽게 되었습니다. 여러 가지 갖은 죄악을 지은 이 청년이 이 말씀을 읽을 때는 세상에 자기 같은 죄인이 어디 있으랴, 예수 님께서 오신 것은 자기 같은 죄인도 구하러 오신 것이 아니냐? 그 자리에서 이 말씀을 읽고 또 읽는 가운데서 은혜를 받아서 새로운 사람이 된 것을 감사해서 작은 자서전을 쓴 것을 읽어본 기억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물론 율법도 있고, 예언도 있고, 여러 문학도 있고, 서신도 있지마는 근본적으로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보여 주십니다. 우리가 이 성경을 읽을 때에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은 우리 교회에 계신 이광혁 장로님께서 신약 성경을 한 장에 다 써서 그린 그림을 보셨을 것입니다. 그 그림을 보면 신약전서를 전부 썼지마는 실상 나타나는 그림은 두 팔을 벌리고 모든 죄인을 부르시는 예수그리스도의 형상이 나타납니다. 마찬가지로 이 성경 가운데서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이 성경이야말로 구원의 우물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성경을 통해서 생수를 얻을 수 있습니다.

 

 
 



219.교회는 구원의 우물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는 그 유신의 몸이 신령한 몸으로 변했습니다. 그 신령한 몸이 40일 동안 제자들과 같이 있다가 마지막에는 하늘로 승천하였습니다. 이 신령한 몸이 하늘로 승천한 후에는 이 땅위에 보이는 몸을 대신 세웠습니다. 그 몸이 곧 그리스도의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교회를 통해서 생명수를 그리스도께서 주십니다. 그러므로 문자 그대로 교회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생명수를 주는 구원의 우물이이 되는 것입니다.
일세기에도 많은 목마른 사람들이 교회에 나와서 생명수를 마시고 구원을 얻었습니다. 2세기에도 그러했고, 3세기도 그러했고, 오늘 날 20세기에 와서 도 또한 그러합니다. 어거스틴은 성경만 읽은 것이 아닙니다. 주일마다 성실 되게 근실하게 밀라노 교회에 나가서 여러 성도들과 같이 하나님께 예배하며 그 때 로마 제국 일원에서 제일 유명하다고 하는 성 암부로스목사의 설교를 통해서 더욱 깊은 자리에 들어갔고 풍성한 생명수를 마신 것입니다. 이 교회야말로 이 광야 같이 매 마른, 아니 사하라 사막 같이 쓸쓸한 세상에서 영적 오하시스의 역할을 하고 있는 그대로 구원의 우물이 되는 것입니다.

 

 
 



220.이란에 온 선교사

제가 일찍이 어떤 잡지를 보니 옛 날에 바사라고 불렀던 저 이란 나라 유브라데강 근방에는 물론 물이 있어서 풍성하지마는 대체로 비가 적게 오는 지방이어서 어떤 지방에는 일년에 몇 번밖에는 비가 안 오고 전혀 우물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지방 사람들은 비가 올 때와 소나기가 올 때에 그 물이 고인 엉덩이를 파서 거기에 받아 두었다가 여러 달 비가 안 올 때에 그 물을 마시고, 그 물로 밥짓고, 그 물로 메마른 곡식에 주고, 이렇게 전부 그 웅덩이 물로 살아간다고 합니다.
그런 곳에 어떤 선교사가 선교하려 가서 보니 그 웅덩이 물이 오래되니까 더러워지고, 여러 가지 벌레도 생기고, 위생적으로도 도무지 먹을 수 없는 물이 되고 마는데도 하도 물이 없으니까 그냥 그 물을 먹고삽니다. 그래서 이 선교사가 어떻게 하면 여기서도 생수를 먹고살게 할 수 없을까 하고 연구했습니다. 그러다 미국에서 보니 몇 백 척 몇 천 척되는 깊은 곳을 뚫어서 그 땅 속에 있는 원유를 뽑아 휘발유를 공급하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겉으로는 메마르고 몇 십 자 파서 물이 안 나지마는, 깊은 속에는 물이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해서 특별히 미국에 기계를 주문해서 여러 백 척을 뚫어 보았습니다. 뚫고 보니까 약 2백 척 이하에는 물이 풍성해서 그 다음에는 그 지대에서 물이 솟아 나왔습니다. 그래서 첫 번으로 깊은 곳에서 생수를 얻어 그 다음부터 그 근방에서는 맑은 물을 마시게 되었고, 다른 곳에 가서 그런 우물을 파주고, 또 다른 곳에 가서 그런 우물을 파주고해서, 그 일대의 쓸쓸한 광야가 변해서 문자 그대로 풍성한 꽃동산으로 변했다하는 이야기를 기록한 것을 읽어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합니다. 돌아보건대 14년 전에 이곳에 큰 구원의 우물을 하나님께서 열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우물을 통하여 고향을 떠나고 재산을 잃고 허둥지둥 38선을 넘어 온 모든 피난민에게 생명수를 마시게 하였습니다. 해방 이후 복잡한 시대에 시달려서 피곤하고 말 할 수 없이 곤비(困憊)한 심령들에게 새로운 구원의 생수를 주셨습니다. 죄악에 물들어서 사망의 길을 걷는 많은 영혼들을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구원의 우물>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물론 그 지으신 만물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은 어느 정도 나타났습니다.
모리슨 이라고 하는 사람이 쓴 책 가운데《인간은 홀로 서 있지 않는다》는 작은 책자가 있습니다. 이 책을 읽어보면 과학자의 견지에서 이 우주를 살펴보고 우리 지구를 조사하여 보고 해와 지구와의 거리, 지구의경도, 기울어진 도수, 지구를 싸고 잇는 대기와 공기, 지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잇는 물, 또한 지구를 구성한 여러 가지 화학적 요소, 이런 모든 것을 살펴보고 맺어보는 결론은, 과연 하나님께서 이 우주와 이 세계를 지으실 때에 인간을 위해서 지으셨고, 인간이 살 수 있으리 만큼 모든 조건을 준비된 사실을 지적한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의 사랑은 그 만드신 우주를 통해서도 어느 정도 나타나는 줄 생각합니다. 사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주에 질서가 유지되고 이 세계의 모든 인류와 금수와 만물이 그 생명을 얻었고 또한 유지하여 가는 것이 사실인 줄 압니다. <크리스마스와 하나님의 사랑>에서

 

 
 



221.내일 일을 모르고 사는 인생

옛날 글에 있는 말과 같이 문자 그대로 인생은 창해일속(滄海一粟) 이라고, 푸른 바다의 조 알 하나처럼 이렇게 보이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뿐 아니고 우리 인생은 얼마나 연약한지 역대기 상 29장 15절에 보면 인생을 그림자와 같다고 했습니다. 그림자라는 것은 실체가 없는 존재입니다. 여기에는 안개와 같다고 했는데 안개도 거이 실체가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약한 인간이 사는 이 세상에는 여러 가지 천재지변이 있습니다. 태풍이 불고, 해일이 일고, 지진이 있고, 홍수가 넘치고, 열병도 충만한 세상입니다. 그라나 그뿐입니까? 인생은 사실 내일 일을 모르고 삽니다.『너희가 내일 일을 모르는 도다』내일이 아니고 다음 시간의 일을 모르고 삽니다.

 

 
 



222. 45세에 결혼한지 8일만에 과부 된 여인

전에 제가 미국에서 잘 알던 어떤 미국 부인이 한 분이 게신데 대단히 어진 부인입니다. 이 부인이 45세에 비로소 결혼하였습니다. 결혼한지 9일만에 그 남편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인생이란 내일 일을 모릅니다. 아마 미리 알았다면 결혼을 안 했을 줄로 압니다. 여기 독신으로 나오신 동포들 가운데 38선이 이렇게 오래 막힐 줄 알았다면, 어떻게 하든지 아마 가족을 동반하고 나왔을 것입니다. 우리가 내일 일을 모릅니다. 어리석은 부자처럼 그 해 곡식이 잘 되니 곡간에 가득히 채워 넣고 이제는 여러 해 먹을 양식이 넉넉하니『내 영혼아 먹고 마시고 즐기자』라고 그럽디다. 그러나 그날 저녁에 그 영혼을 불러갈 줄을 인생은 모릅니다
인생이란 이렇게 생각할 때에 사실 잠간이요, 또한 무상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와 같은 인생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되겠느냐? 여기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과 견해가 다르지마는 대체로 생각해 보면, 세 가지 지혜와 태도가 있다고 볼 수 잇습니다. 하나는 세속주의 적, 향락주의적 견해의 태도입니다. 둘째는 염세주의 적, 도피주의 적 태도입니다. 셋째는 기독교의 견해와 그 태도입니다.

 

 
 



223.서도와 수심가

먼저 세속주의 적, 향락주의 적. 그런 태도를 보면 대체로 이렇습니다. 옛날 헬라 문화가 전성할 시대에 그 시대를 지배하던 사상의 학파가 몇 있는데 그 학파 가운데 에피큐리안 학파가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인간의 최상의 목표는 쾌락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의 표어 가운데 하나가 성경에도 그 말 그대로 나타나지마는『먹고 마시자 내일 죽으리라』내일 죽을 터이니 살아 있을 때에 먹고 마시자는 것입니다. 이런 사상은 옛날 에피큐리안 학파에서만 가진 것이 아니고 어떤 시대나 어떤 사회에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사회에도 이런 사상이 많이 있습니다. 특히 서도에서 오신 분도 많은데 서도에서 많이 부르는 수심가를 아마 기억하실 줄 압니다. 그 수심가를 잘 알지는 못하지마는 아이 때에 늘 부르는 소리를 좀 들었는데 무슨 내용인가 하면“노세 노세 젊어 노세 늙어지면 못 노나니”그러니 젊어서 잘 먹고 잘 쓰며 거드럭거리고 놀자 입니다. 그것이 수심가에 나타나는 인생 철학입니다. 인생이 이렇게 무상하고 이렇게 잠깐 되니 그저 젊었을 때에 늙어지기 전에 잘 먹고 잘 쓰고 잘 놀자 인 것입니다 세속주의 적, 향락주의적 견해와 태도입니다.

 

 
 



224.중국인 양주의 주장

옛날 중국에 양주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양주의 말 가운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인간이 오래 산대야 백년에 불과해 그런데 사실 백년을 사는 사람은 천명에 하나도 드물다”그런데 설사 어떤 사람이 있어서 백년을 산다고 하자. 그렇지마는 가만히 보면, 아무 것도 모르고 알지 못하고 사는 유년기와 노년기가 그 절반을 차지한다. 또 밤에 잠자는 시간과 깨어 서도 헛되이 지나는 시간을 합해보면 그것이 또 나머지의 절반을 차지한다. 또 그 다음에 환난을 당하고, 질고(疾苦)를 당하고, 고통을 당하는 시간, 이것 다 모아 놓으면, 또 그 나머지와 절반을 더 차지해, 그러니 참으로 생을 즐길 수 잇는 햇수는 백년을 살아도 10년에 불과하다.
그러나 나중의 결론은 그러므로 살았을 때에 마음껏 향락을 누리고 사망이라는 것을 과히 생각지도 말고 잊어 버리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람 주장은 그저 귀로 듣고 싶은 말을 다 듣고, 눈으로 보고 싶은 것을 다 보고, 코로 냄새 맡고 싶은 것을 다 냄새 맡고, 입으로 먹고 싶은 것은 다 먹고, 또 입으로 하고 싶은 말은 다 하고, 육신으로 하고 싶은 것은 다하고, 마음으로 하고 싶은 것을 다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옛날 양주라고 하는 사람이 한 말입니다. 세속주의 적, 형세주의 적, 향락주의적 견해와 태도요 생활의 철학입니다.
옛날이나 오늘이나 유물주의 사상을 가진 사람들은 이런 생각밖에 다른 생각이 날 수가 없습니다.“향락을 누릴 수 있을 때에 누려 보자 인생은 허무하다”그런데 이런 태도에 대해서 한 가지 생각할 것은 향락이라고 하는 것은 향락 자체를 인간의 최고 목표로 탐구하게 되면 탐구한 그 즉시로 그 향락이 환멸과 고통으로 변합니다. 결국은 멸망을 초래하고 맙니다. <무상한 인생>에서

 

 
 



225.십자가의 사랑

어떤 순교자가 어떠한 진리를 위하여 생명을 바치는 순교도 얼마나 고귀한 죽음인지 알 수 없습니다. 어떤 애국자가 자기의 민족과 자기의 나라를 위해서 자기의 생명을 초개 같이 버릴 때, 이와 같이 순국자의 죽음도 얼마나 거룩한 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어떤 진리만을 위한 순교만이 아닙니다. 어떠한 민족, 어떠한 나라만 위해 죽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모든 인류를 위해서, 인류 전체를 위해서, 그들의 생명을 건지기 위해서, 그들을 굽어살피기 위해서, 죽은 그들을 살리기 위해서 자기의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226.친구를 위하여 대신 죽은 병사

미국 남북 전쟁이 있을 때에 이런 사실이 있었다고 합니다. 북군에서 전쟁에 나갈 군인을 징발 할 때에 전쟁에 나갈만한 사람들을 다 모아놓고 그 사람들 가운데서 제비를 뽑아서 다 나갈 필요는 없으니까 나갈 사람을 먼저 뽑아서 내 보낸 일이 있다고 합니다. 어떠한 동리에서 몇 사람이 모여서 제비를 뽑았는데 설상가상으로 어떤 사람이 제비에 뽑혔는고 하니, 가족도 많고 부모도 계시고 전쟁에 나가면 그 가족도 전혀 부양할 사람이 없는, 그런 사람이 그만 제비에 뽑혀서 나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 광경을 보고 그 한 친구 가운데에 부모도 안 계시고 아직도 결혼도 하지 아니한 젊은이가 있다가 대신 지원해서 전쟁터에 나가겠다고 간절한 마음으로 그 징발하는 책임자에게 말 하니까 그도 감격해서 대신 그 젊은이로 하여금 전쟁터에 나가도록 허락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전쟁터에 나가서 자기의 나라를 위해서 싸우고 있습니다. 자기 동래에서 자기 가족을 부양하고 있는 이 사람은 자기 대신 나간 사람에 대한 감격이 얼마나 깊었던 것은 말로 다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신문을 보면 얼른 전쟁의 뉴스부터 먼저 보고 특별히 어떤 곳에 격전이 있다고 하면 그것부터 살펴보고 또 이따금 죽은 사람의 명단이 나게되어도 행여 자기 친구가 전사하지 않았나 제일 먼저 그것만 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불행히 한 번은 큰 격전이 있게 되었는데 그만 자기 친구가 그 격전 가운데서 싸울 수밖에 없었고 그 다음에 신문에 나는 것을 보니까 죽은 사람의 명단 가운데, 그 사람 이름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런 신문을 보고 이 사람이 앞이 아득했습니다. 곧 그 싸움터에 나가서 자기 대신 죽은 그 시체를 친히 모셔다가 자기 가족 공동묘지에 그 시체를 묻고 그의 이름을 쓰고 그 아래에는 간단히“그는 나를 위하여 죽으시다”라고 묘비를 세웠다고 합니다.“그는 나를 위하여 죽으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의 독생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어떠한 형편에 있을 때에 그가 죽으셨습니까? 로마서 5잔에 보면, 우리 인류의 형편을 몇 가지로 설명했습니다. 5장 6절에 보면,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연약해서 내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자리에 있을 떼에,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말씀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경건하지 않을 때에,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죄를 짓고, 거룩하지 못하고, 선을 행하지 못하지만,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해서 예수께서 대신 죽으셨습니다.

 

 
 



227.어떤 마차부의 충성

제가 어떤 책을 보니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아마 옛날 같습니다―깊은 산림 지대를 마차에 타고 가족과 동반해서 지나가던 중이였습니다. 마차부는 오래 동안 그 주인을 위해서 봉사한 충성된 분입니다. 또 이런 산림 지대는 여러 번 다녀 보아서 경험도 많은 그런 좋은 마부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얼마쯤 깊은 산림지대를 지나갈 때에, 말 네 필이 그 마차를 끌었는데 말 두 필이 갑자기 놀라면서 앞으로 달음질하기 시작하니 다른 말들도 같이 네 굽을 안고 달리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 마차부가 뒤를 돌아보니 저 멀리 뒤에 짐승들이 여러 마리 따라 옵니다. 그 마차부는 거기에 이따금 나오는 이리떼인 것을 곧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 마차부도 달리는 말에 채찍을 가해서 동리가 과히 멀지 않으니까 동리로 달립니다. 그렇지만 이리처럼 빨리 달릴 수는 없습니다. 얼마쯤 있다가 보니까 그 이리의 무리가 몇 마리가 아니고 여러 수 십 마리가 따라오는데 가만 보니까 그 이리한테 잡히면 말과 사람이 다 희생될 것 같이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마부가 생각다 못해 말 가운데 두 필을 말 고비를 찍어서 채찍으로 때려서 다른 방향으로 다름 질 시켰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이 이리들이 그 말을 쫓아서 그 방향으로 전부 달아났습니다. 그래서 두 말로 마차를 몰면서 그 마부는 이제는 생명을 구했다고 생각하면서 달려갈 길을 빨리 갑니다. 얼마쯤 있다보니까, 이 이리들이 벌서 그 말을 따라가서 다 잡아먹은 모양입니다. 그리고서 오히려 힘을 더 얻어서 더 빨리 따라옵니다. 그러니까 빨리 가면 어떤 동리에 들어가게 되는데 아무리 두 말을 몰아서 빨리 가지마는 또 다시 이리가 가까이 오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에 다른 길이 없게 되었습니다.
주인보고 하는 말이“주인께서 이 말을 몰아서 빨리 동리에 들어가세요, 나는 필경 저 놈들과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그리고 나서는 하나 밖에 없는 총을 메고 마차를 내렸습니다 내려서 마차는 빨리 보내고 이리를 향해서 그저 총알 잇는 대로 이 이리와 싸웁니다. 이 주인은 얼른 동리에 들어가서 여러 사람에게 청병(請兵)해서 총을 많이 가지고 많은 사람이 빨리 구원하려 왔습니다.
왔지만 그만 불행히 그 마차부는 총탄이 다 없어지고 이리에게 희생된 뒤였습니다. 이렇게 이 마부는 자기의 주인을 위해서 자기의 생명을 바쳤습니다. 그래서 그 주인은 그 마차부를 위해서 특별히 기념비를 세워 주어서 영원히 그 마차부의 충성을 표상 했다고 하는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러분, 이 마차부가 자기 주인과 자기 주인의 가족을 위해서 자기의 생명까지 희생한 것, 얼마나 고귀한 충성이요, 얼마나 고귀한 희생입니까? 그러나 여러분, 예수 님의 십자가의 희생은 이보다도 더 귀합니다. 왜 그런고 하니 이 마차부는 그래도 자기의 주인을 위해서 자기의 친구를 위해서 자기의 생명을 바쳤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원수들을 위해서 바쳤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이올시다. 이것이 십자가상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이올시다. <하나님의 사랑과 십자가>에서 (한경직목사 설교 예화 제1권 끝)

 

 
 



출간에 붙여 -복음 전도에 도움이 된다면

이 작은 책자를 저의 여서(女 ) 이영헌 목사로 하여금 엮어내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 목사의 말에 의하면 이 나라의 교역자들과 젊은이들의 원에 의해서 이 책을 펴내는 것이라 하니, 그렇게 하는 것이 오직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라면 그 위에 더 바랄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부족하기만 한 이 사람이 지난날 나름대로 기도하며 준비했던 설교 가운데 보잘것없는 예화(例話)들이지만 성령께서 함께 하심으로 감동 주셔서 복음전도에 도움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할 뿐입니다. 1984. 7. 남한산성에서 한경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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