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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속으로 〓/영성 교회 성장 10대 지침등(가나다순)

목사 권력 독점

by 【고동엽】 2008. 3. 25.
 

권력독점 그리하여 뭍의 산물, 물에서 나온 고기들, 의약 재료 중에서 어떤 한가지를 슬그머니 독점해 버리면 이는 백성을 못살게 하는 방법이다. 뒷세상의 나라 일을 맡은 이들로서 행여 나의 이 방법을 쓰는 자 있다면 반드시 그 나라를 병들이고 말게요." 허생전에 나오는 얘기다.

 

남산 기슭에서 글만 읽던 가난한 선비가 부인의 바가지 등살에 못 이겨 읽던 책을 내던지고 장사판으로 뛰어들어 돈을 억수로 벌어들인 방법은 의외로 간단했다. 상품의 독점 처음에는 과일을 죄다 사들여 값을 천장부지로 올린 다음 팔아먹고, 그 다음엔 당시의 필수 생활용품이었던 갓 만드는 원료인 말총을 모두 사들여 값을 올린 후 팔아먹었다. 상품을 매점매석하여 기하학적인 액수의 돈을 벌어들인 벼락부자 허생의 입을 빌어 작가가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바로, 상품(공급)의 독점이야말로 온 나라의 경제를 망치는 원흉이라는 것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독점을 통하여 재물을 쌓는 수법은 변함이 없는 모양이다. 오늘날 자본주의의 최대의 적 또한 자본의 독점이 아니던가. 독점은 어떤 분야에서든 절대적 타락을 불러들이게끔 되어 있다. 경제 권력의 독점은 백성을 가난의 수렁으로 몰아넣고, 정치 권력의 독점은 나라를 부패의 늪으로 몰고 간다. 비록 예전에 플라톤이 이상적인 군주, 즉 철인에 의한 권력 독점을 꿈꾸었던 적도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군주가 이상적인 존재(현자)일 경우를 전제로 했을 때에만 의미가 있을 뿐이다.

 

인간 사회에서 군주가 이상적이라는 말은 곧 그의 무오함을 의미하는데, 이는 인간의 타락을 전제로 하고 있는 기독교적 사고에서는 절대로 불가능한 이론이다. 처음에는 현명했던 이도 결국은 자기 욕망의 편집적 경향을 극복하지 못하고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이 타락한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에서의 일반적 이치이다. 그래서 자기 페이스를 올바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항상 비판적 견제 세력이라는 것을 곁에 두어야 한다는 교훈이 권력 주변에 꼬리를 무는 것 아닌가.

 

교회 내의 권력이라 할 만한 것을 보면, 설교권, 축도권, 당회장권. 치리권 정도로 정리할 수 있다. 이 권력 중 다수가 목사에게 편중되어 있는 것이 한국 교회의 현실이다. 그 와중에 장로라 불리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유일한 권력은 치리권이다. 따라서 치리권은 장로라는 명칭의 유의미성을 보장해주는 핵심적 근거라고 말할 수 있다. 최근 ㅇㅇ 교단 총회에서 장로의 권한과 피택에 관련된 헌법 조항의 개정안을 놓고, 장로와 목사들 사이에 갈등이 불거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현행 헌법은 "장로는 담임목사를 협력하여 교회를 치리하고" 라 명시함으로써, 장로에게 치리권이 있음을 분명히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 헌법개정안에는 "장로는 담임목사의 목회에 협력하여 교회를 다스리며"로 표기함으로써, 장로가 직접적으로(독립적으로) 치리권을 행사할 수 있는 근거를 없애버렸다. 게다가 현행 헌법 제46조에 "장로가 당회의 천거로 공동의회에서 3분의 2의 찬성을 얻은 후 지방회 고시위원회 고시에 합격한 통지를 받고 지방회가 안수함으로 장로가 된다"고 되어 있는 것을, 개정안에서는 "담임목사의 요청"이라는 내용을 삽입함으로써, 비록 공동의회에서 지지를 얻은 피택장로라도 담임 목사의 요청이 없으면 '장로고시'를 치를 수 없도록 만들어 버렸다.

 

최근 어느 교회에서 일어났던 사건들을 생각하게 한다. 교회 재정 운영에 이의를 제기했던 장로들을 파문했다가 다시 불러들이면서 과연 담임 목사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혹시나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기를 바란다. '이대로는 안되겠다. 말썽 많은 장로들의 권한을 줄여 목사 시다바리로 확실하게 자리매김시키고, 장로 임명에 대해 목사가 거부권을 갖게 함으로써 입맛에 맞는 사람(목사 생각에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사람)만 장로로 뽑아야겠다.'물론 장로들 중 자격 미달인 사람들이 공동의회에서 뽑힐 수도 있다. 그들 때문에 목사들이 곤욕을 치르고 힘들어하는 경우도 보았다.

 

그러나 목사는 안 그런가. 정말 쓰레기 같은 인간이 목사랍시고 교회를 휘젓는 꼴도 종종 볼 수 있다. 그 덕택에 성도들은 피말리는 고통을 가슴에 삭히며 어찌할 바를 몰라 탄식 속에 시집살이하는 경우도 보았다. 결국 목사나 장로나 서로가 그릇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기는 마찬가지인 상황에서 목사의 권력에 제동을 걸 수 있는 유일한 권한을 가진 장로를 이빨 빠진 호랑이로 만들어 버리고 그것도 모자라, 목사의 입맛대로(물론 자신이야 하나님의 기준에서라고 하겠지만)뽑을 수 있게 만들어 버린다면 도대체 어쩌자는 얘긴가. 결국 목사 일인이 모든 권력을 독점하겠다는 것 아닌가.

 

자신의 권력 행사에 제동 걸 수 있는 가능성을 제거해 버리려는 시도는 권력 독점의 욕망이 극에 달했음을 드러내는 것이며, 이는 곧 자신을 눈 먼 소경으로 전락시키는 어리석음일 뿐이다. 아마도 발끈하며 엄숙한 어조로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다. '걱정 말고 내버려둬라.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이 심판하신다.'제발 이런 식의 허황된 소리가 더 이상 한국 교회에서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장로는 하나님의 종이 아닌가. 집사였던 스데반은 하나님의 종이 아니었던가. 말도 안 되는 논리로 성도들을 미혹하면서 욕심에 사로잡힌 자신의 추태를 하나님의 종이란 우상화로 방어하려는 간교함은 왠지 사탄의 냄새를 풍긴다. 이미 한국 교회는 목사들의 권력이 비대해질 대로 비대해진 상태이다.

 

장로가 목사의 시다바리 정도로 전락한 교회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는 추세이다. 오직 말씀의 연구와 묵상에 전념해야 할 목사들이 재정과 정치와 사업에 눈이 멀어 영성보다는 사업적 수완에 능력을 발휘하려는 행태가 여기저기서 나타나고 있다. 목사의 권력 행사에 대해 제어할 수 있는 장치가 교회 내에 없어졌다는 증거다. 목사나 장로나 집사나 모두가 언제든 넘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연약한 존재임을 스스로 되씹으며 항상 넘어짐의 가능성을 경계해야 함은 신앙인의 기본 자세라고 하겠다.

 

남의 눈의 티는 보아도 제 눈의 들보는 보기 어려운 것이 인간의 현실임은, 이미 예수께서 적나라하게 지적해 주신 바다. 그렇다면 예수의 제자된 자들은 마땅히 이를 가슴에 늘상 되새기며 내 눈의 들보를 드러내줄 상대를 열린 마음으로 바라보고 귀를 열어야 할 것 아닌가. 그러기 위해서는 권력의 독점이라는 인간 세상의 질병에 감염되지 않도록 늘상 조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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