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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따름
로이드 존스
(마 16:24)"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25)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여러분은 자아(自我)가 여러분의 삶을 어느 정도 지배하는지 그 "범위"를 알고자 시도해 본적이 있습니까? 여러분 자신과 여러분의 삶과 여러분의 일상의 일, 여러분이 행하는 것과 필히 접하게 되는 다른 사람들과의 교제들을 살펴보십시오. 잠시 동안 이러한 모든 것 안에 침투해 들어온 자아의 범위를 숙고해 보십시오. 심지어 복음 선포에 까지 자기 이익과 이기적 관심이 영향을 끼친 것을 볼 때 놀랍고 두렵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끔찍한 발견입니다. 우리는 일이 잘되어 가는지에 관심을 갖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입니까, 아니면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입니까? 우리가 행하고 말하는 모든 것과 우연히 사람들을 만날 때 주는 인상 등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관심을 갖는 것은 무엇입니까? 만일 여러분이 자신의 행동과 행위 뿐 아니라 복장, 외모, 모든 것에서 여러분의 삶 전체를 분석해 본다면, 자아에 대한 이 불건전한 태도가 차지한 범위를 발견하고 몹시 놀랄 것입니다.
한 단계 더 나아갑시다. 과연 우리는 삶 가운데서 단 한 가지, 자아로 말미암는 비참과 불행과 실패와 괴로움의 범위를 깨달은 적이 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지난 주(週)로 돌이켜서, 불행과 긴장과 성급함과 언짢음, 말하고 행동한 것들 가운데 지금 진정으로 부끄러워하는 것들, 여러분을 혼란케 하고 균형을 잃게 한 순간들을 마음으로 상고하며 회상해 보십시오. 하나씩 하나씩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그 모든 것이 거의 이 자아의 문제, 이 자아의 민감성, 이 자아에 대한 집착으로 귀착되는 것을 발견하고 놀랄 것입니다. 이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자아는 삶 가운데 있는 모든 불행의 주된 원인입니다. 여러분은 "아, 그것은 나의 허물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저지른 일입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좋습니다. 여러분 자신과 다른 사람을 분석해 보십시오. 그러면 그 사람도 자아 때문에 그렇게 행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며, 여러분도 동일한 이유로 그 사실을 진정으로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다음 구절에서 가르치시는 바와 같이, 만일 여러분만이 다른 사람에 대해 올바른 태도를 갖고 있다면, 그를 불쌍히 여기고, 그를 위해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궁극적으로 비난을 받아야만 할 사람은 여러분 자신인 것입니다. 자아를 정직하게 정면으로 바라보는 것이 실제적인 수준에서 매우 바람직합니다. 대부분의 불행과 슬픔, 삶과 체험에서의 대부분의 고통들은 그들의 궁극적인 근원이자 출처인 이 자아에서 비롯됩니다.
이제 보다 높은 수준으로 올라가서 자아를 교리적으로 바라봅시다. 자아를 교리적인 방법과 신학적 방법으로 바라보는 것이 매우 바람직합니다. 성경의 가르침에 따르면 타락의 원인은 자아였습니다. 자아가 없었더라면 죄가 세상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귀는 매우 교활해서 죄의 권능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자아의 관점에서 죄의 권능을 발휘했습니다. 마귀는 "하나님은 너에게 공평하지 않아. 너는 당연한 원한과 불평을 갖고 있는 거야"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사람은 이 말에 동의했습니다. 이것이 타락의 전(全) 원인이었습니다. 타락이 없었더라면 오늘날 세계 각국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국제 회의가 열릴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모든 문제의 본질은 바로 자아이며, 자기 과시입니다. 이것이 교리적으로 본 자아입니다. 자아는 항상 하나님에 대한 도전을 의미합니다. 자아는 내가 항상 하나님 대신에 자신을 왕좌에 앉히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자아는 항상 나를 하나님과 분리시키는 것입니다.
삶 가운데 모든 불행한 순간들은 궁극적으로 이 분리로 말미암습니다. 하나님과 및 주 예수 그리스도와 참된 교제를 가지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가 지하 감옥에 있든지, 발이 차꼬에 매여 있든지, 또는 화형을 당하고 있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과 교제 가운데 있다면,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합니다. 이것이 수세기에 걸친 성도들의 체험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어떤 비참이나 불행의 궁극적인 원인은 하나님과의 분리이며, 하나님과의 분리의 유일한 원인은 자아입니다. 우리가 불행할 때는 언제나 우리가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대신 자신을 보고 자신에 관해 생각하고 있는 때를 의미합니다. 성경에 의하면 사람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도록 의도되었습니다. 사람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의도되었습니다. 사람의 온 존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도록 의도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자아를 영화롭게 하거나 자아의 이익을 보호하려는 어떠한 욕망도 필연코 죄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분의 영예와 영광을 구하는 대신에 나 자신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께서 정죄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 아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바로는, 거룩은 궁극적으로 이러한 자아 중심의 생활로부터의 구원을 의미합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는 거룩을 반드시 행동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자아에 대한 태도의 관점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거룩은 본질적으로 내가 어떤 일들은 행하고 어떤 일들은 시도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죄로 여겨지는 것들은 일절 행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아의 교만으로 충만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자아의 관점에서 그리고 자신과의 관계라는 관점에서 보아야 하며, 거룩의 본질은 우리의 삶과 체험에서 수많은 파멸을 일으켜 온 이 자아에 대하여 죠지 뮬러와 같이 우리가 죽었으되 완전히 죽었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임을 반드시 깨달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높은 수준으로 자아의 문제를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보기로 합시다.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세상에 오셨습니까? 그분은 궁극적으로 인류를 자아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우리는 자아를 돌아보지 않는 이러한 삶을 그분 안에서 완전하게 봅니다. 주님께서 하늘의 영광을 버리시고 베들레헴의 말구유로 오셨음을 보시기 바랍니다. 왜 오셨습니까? 이 질문에 대해서는 오직 한 가지 답이 있을 뿐입니다. 주님은 자신을 중히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빌립보 2장에서 말하고 있는 것의 본질입니다. 주님은 영원히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영원부터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하나님과 동등하심을 중히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과 동등하신 신분과 그분의 영광을 나타내실 권리를 버리셨습니다. 주님은 자기를 낮추시고 자기를 부인하셨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아들께서 자아를 부인하지 않으셨다면, 결코 성육신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사신 그분의 자아를 부인한 삶을 바라보십시오. 그분께서는 자주 자기가 한 말은 자기 스스로 한 말이 아니며, 자기가 행한 일은 "내 것이 아니요, 내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제가 이해하는 십자가의 자기 비하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입니다. 이는 주님께서 사람의 모양으로 오셔서, 스스로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시고, 자신을 전혀 중히 여기지 않으셨음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오 하나님, 보시옵소서, 내가 주의 뜻을 행하러 오나이다." 주님은 모든 일에서, 곧 그분이 하신 모든 말씀과 그분이 행하신 모든 것에서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존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이같이 친히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주님은 조금도 자기를 위하여, 자기 스스로 사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는 우리에게 그 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도 있던 마음이니".
우리는 당연히 이러한 삶의 극치를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에서 보게 됩니다 그분은 순결하고 결백하며, 결코 죄를 범하시거나 누구에게 해를 입히신 적이 없었지만, 오히려 "욕을 받으시되 되받아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의롭게 심판하시는 분께 자신을 맡기셨습니다"(벧전2:23). 바로 이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최고의 예입니다. 신약성경이 주장하는 바는, 만일 우리가 주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그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돌아가셨음을 믿는다고 고백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최대의 갈망이 자아에 대하여 죽어야 하는 것이 되어야 함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죽으심의 최종 목적은 단지 우리가 용서를 받거나 지옥으로부터 구원받기 위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새 백성, 새 인류, 새 창조를 이루고, 그분을 닮은 백성들로 구성된 새 왕국을 세우기 위함이었습니다. 주님은 "많은 형제 중에서 처음 나신 분"이십니다. 주님은 본(本)이십니다. 바울은 에베소인들에게 보낸 서신서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셨으며,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피조된 그분의 작품"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의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에 여러분과 제가 구원을 받고 자아의 삶에서 분리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도는 고린도후서 5장에서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셨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며, 그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심"을 믿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울은 그 이유에 대하여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이제 후로는 자신들을 위하여 살지 않고 자신들을 위하여 죽었다가 다시 일어나신 분을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부르심을 받은 삶입니다. 이 삶은 자아 방어나 자아 민감성의 삶이 아니라, 모욕을 당하더라도 복수하지 아니하고, "누구든지 네 오른뺨을 치거든 그에게 다른 쪽도 돌려대며, 또 누가 너를 법에 고소하여 네 덧옷을 뺏으려 하면 겉옷까지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하여금 억지로 일 마일을 가게 하거든 그와 이 마일을 동행하고,"어떤 사람이 와서 나의 것을 요구하더라도 "이것은 내 것이요"라고 말하지 않고, 오히려 "이 사람이 어렵다면, 내가 도울 수 있으며, 기꺼이 돕겠노라"라고 말하는 삶입니다. 나는 이미 자아를 처리했고, 자아에 대하여 죽었으며, 이제 나의 유일한 관심사는 하나님의 영광이요, 영예입니다.
이것이 주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부르신 삶이며, 그분께서 죽으심으로 여러분과 저로 하여금 살도록 하신 삶입니다. 감사하옵게도 복음서는 계속해서 그분께서 다시 사셨으며 성령님의 새롭게 하며 강건케 하는 권능과 함께 성령님을 교회에게 그리고 그분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보내셨다고 증거합니다.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힘으로 이러한 삶을 살려고 애쓴다면 반드시 실패할 것입니다. 우리는 시작도 하기 전에 반드시 실패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을 보내주실 것이며, 하나님의 영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며 우리 안에서 역사하실 것이라는 복된 약속과 선물이 있기에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삶이 가능하게 하셨습니다. 죠지 뮬러가 죠지 뮬러에 대하여 죽을 수 있었다면, 어째서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심히 악하고, 엄청난 비참과 불행에 이르게 하며, 최종적으로는 갈보리 언덕 십자가에서 이루신 하나님의 아들의 복된 사역을 부인하게 하는 자아에 대해 죽을 수 없단 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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