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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드 죤스-믿음의 진정한 척도

by 【고동엽】 2008. 5.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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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진정한 척도 / 로이드 존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4:17,18)

 

이 본문은 성경의 위대한 진리, 특히 바울 사도의 서신 곳곳에서 발견되는 금덩어리 같은 진리 가운데 하나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웅장하고 감동적인 말씀이다. 나는 오늘날의 교회와 세상이 바울 사도와 같이 이처럼 위대한 말씀을 선포할 수 있는 사람을 고대하고 있다고 확신한다. 이 말씀의 빛에 우리 자신을 비춰 보면 매우 유익할 것이다. 이 본문에 나타난 모습이 오늘날 세상을 향한 우리의 태도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현재와 아직 알려지지 않은 미래, 곧 불길한 전망으로 가득한 미래를 직시하려면 그런 태도를 취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나는 이 두 구절이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는 우리의 진정성을 가리는 일종의 질산 테스트와 같다고 생각한다. 질산 태스트는 가장 민감하고도 정교한 테스트이다. 정통성을 지키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단순히 지성적인 동의에 그치는 정통성은 매우 위험하다. 그러므로 정통성은 질산 테스트라고 일컬을 만큼 진정한 척도는 아니다. 또한 도덕성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도덕성은 진정한 척도가 될 수 없다. 또한 경험, 거듭나는 경험은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경험은 질산 테스트라고 불릴 만큼 정교하고도 민감한 척도가 될 수 없다.

 

진정한 척도는 이 구절의 말씀에 나와 있다. 본문은 그 세 가지 척도, 정통성, 도덕성, 경험을 보증한다. 본문에 따르면, 우리의 신앙고백을 판별하는 척도는 삶에 대한 반응이다. 곧 우리의 안팎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한 전인적인 반응이다. 우리의 신앙고백을 판별하는 진정한 척도는 공습을 피해 방공호에 숨어 주변에서 터지는 폭탄 소리를 들으면서, 다음번 폭탄이 내 머리 위에 떨어져 생을 마감하게 될지도 모르는 때에 어떻게 반응하는가?’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진정한 척도란 궁극적인 것, 곧 마지막 순간에 어떤 생각을 하는가?’하는 것이다.

 

전쟁터에 나간 젊은이의 관점에 빗대어 말하면, “삶과 죽음을 비롯한 모든 궁극적인 질문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 그런 상황에 어떻게 반응하는가?”라는 질문으로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좀 더 현실적으로 말하면, ‘허리케인이나 토네이도를 비롯한 자연재해나 심각한 유행성 질환이나 질병이 발생해 시간과 영원, 삶과 죽음을 실감하게 되는 순간에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생각하며, 어떻게 반응하는가?’ 하는 물음이 바로 우리의 신앙고백을 판별하는 기준이다.

 

그런 순간에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는가?’ 하는 것이 바로 궁극적인 척도이다. 바울 사도는 본문에서 바로 그것을 말하고 있다. 바울은 수많은 시련과 문제와 어려움에 맞닥뜨렸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상황 속에서도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게 이루게 함이니라고 말한다. 삶이 가장 암울하고 모질게 보이는 최악의 상황 앞에서 과연 우리도 그렇게 반응할 수 있을까?

 

나는 이것이 진정한 척도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를 통해 믿음의 정통성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오직 자신이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자신의 믿음을 굳게 확신할 수 있는 사람만이 그렇게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척도는 행위와 도덕성을 보증한다. 왜냐하면 지성으로만 믿는 것은 위기 앞에서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이 척도는 경험적인 요소, 곧 삶과 그 능력과 활력을 보증한다. 진리를 실제로 삶에서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바울처럼 반응할 수가 없다.

 

바울은 어떻게 그 모든 일을 능히 견뎌 낼 수 있었을까? 그는 자신이 당한 시련을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 박해를 받아도 ?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고후4:8-11).

 

복음이 영광스러운 것은, 그것이 타고난 기질이나 성격과 상관없이 모든 종류의 사람을 그렇게 고백하도록 이끌기 때문이다. 복음의 영광은 우리의 타고난 성격에 의존하지 않는다. 심리학으로는 이것을 설명할 수가 없다.

 

스토아 학파의 철학자들은 용기와 담력의 철학을 견지했다. 매우 유능하고 지성적인 그들은 인생과 삶의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했다. 또한 끝까지 굴복하지 않고 성공적인 인생을 살며 당당하게 홀로서기를 원한다면, 어깨를 당차게 펴고, 입술을 굳게 다물고, 주먹을 불끈 쥐고, 자제력을 키우고, 엄격히 훈련하여 의지를 철석 같이 다지고, 절대 굴하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런데 스토아주의는 기독교와 정반대이고 아무 상관이 없다. 스토아철학은 체념의 철학으로서, 기독교와는 매우 다르기 때문이다. 스토아주의는 상황을 견디고 담담히 받아들이며 단지 버티고 서서 굴복하기를 거부하는 철학이라는 점에서 매우 소극적이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기독교의 본질은 매우 적극적이다 기독교인들은 단순히 상황을 견디거나 담담히 받아들이지 않는다. 오히려 기독교인들은 크게 기뻐하며 승리하는 삶을 살아간다. 그들은 넉넉히 이기는자들이다(8:37).

 

바울은 어떻게 그렇게 고백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그가 위대한 사도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이다. 기독교 역사 가운데 가장 놀라운 사실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고백하면서 살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을 알지 못하지만, 그들은 모두 바울과 같은 기독교인이었다. 이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기독교인이 인생을 전혀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이 주 예수를 믿기 때문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바울도 이전에는 믿음으로 대처하지 못한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상황이 변한 것이 아니라 바울이 변했다. 그는 전혀 새로운 관점으로 상황을 바라보았다. 모든 것을 그리스도의 빛 안에서 바라보았다. 그리스도의 관점으로 모든 사람과 모든 상황을 바라보았다.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그는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게 되었으며, 자신의 모든 죄가 용서받았고, 그 무엇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자신을 끊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으며, 그분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사실에 관한 복음을 믿었다. 오직 이것만이 모든 것을 설명해준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완전히 새로운 관점으로 삶 전체를 바라보게 된 이유이다.

 

우리는 인생의 사소한 문제들에 집착하느라 삶을 전체적으로 바라보지 못한다. 그런데 기독교 신앙은 삶을 깊이 바라보고, 또한 전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을 열어 준다. 나는 때때로 기독교 신앙을 마치 사람들을 비행기에 태우거나 높은 산 위로 데려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광경을 한눈에 볼 수 있게 해주는 모습으로 상상하기를 좋아한다. 기독교인은 삶 전체를 완전하고 온전하게 볼 수 있는 눈을 지니고 있다.

 

세상은 우리와 지나치게 가까이 있다이것이 우리의 문제이다. 세상은 우리를 짓누르고 버겁게 하여 그 안에 파묻혀 길을 잃게 만든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우리를 그런 세상에서 끌어올려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게 한다. 바울은 이 점을 두 가지 측면에서 설명한다.

 

먼저, 그는 우리가 잠시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기독교인 됨으로써 시간을 올바른 관점으로 바라보게 된다. 우리가 받는 가장 위대한 선물 가운데 하나이다. 바울은 잠시라고 말하고 나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라고 덧붙인다. 바울은 시간을 영원이라는 방대한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무한한 시간, 백만 년이 거듭되는 장구한 세월을 떠올려 보라. 그것이 영원이다. 시간을 그런 영원의 관점에서 바라보라. 그렇게 하면 시간이 어떻게 보일까? 찰나처럼 보일 것이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사용하는 달력이나 삶의 관점에서 시간을 바라보면, 마치 그것이 제멋대로 구는 독재자처럼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원하심에 비추어 보면,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니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4:14). 지금, 오늘이라는 이 순간은 내일이 되면 사라지고 말 것이다. 기독교는 시간의 문제를 해결한다. 기독교인은 이미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아있다(2:6). 기독교인은 시간의 독재에서 벗어나 영원에 속해 있다.

 

다음으로, 기독교인은 환난이라는 현실을 다른 관점으로 바라본다. 바울은 환난의 경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가 겪은 혹독한 시련을 언급하고 나서 그는 그것을 환난의 경한 것이라고 일컫는다. 그의 고난은 그를 완전히 짓뭉게기에 충분했다. 그것은 몹시 무겁고 감당하기 힘든 시련이었다. 그는 시련 자체가 가볍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런 의도로 한 말이 절대로 아니다. 그는 그것을 다른 것과 비교하여 그것이 가볍다고 말한다. ‘지극히 크고 영원한 중한 것에 비할 때 그것은 지극히 가볍고 잠시의 것이었다.

 

기독교인이란 어떤 사람인가? 기독교인이란,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사람이다. 기독교인이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기뻐하는 사람이다. 기독교인이란, 영원을 목격한 사람이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여기에 그의 비밀이 있다. 그는 믿음으로 영광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다른 모든 것이 지극히 사소하고 가볍게 여겨졌다. 세상이 주는 모든 것들이 그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어졌다. 그는 이 모든 것이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허리케인이 불어 닥치면 모든 것이 사라진다. 또한 죽으면 모든 것이 단번에 끝난다. 따라서 바울은 그런 것을 위해 살지 않았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다.’ 우리의 가정, 자동차, 재산 등 모든 것들은 순식간에 사라져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다. 그런데 그런 것과는 다른 것이 있다. 성경은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고전2:9) 라고 말한다. 또한 베드로는 이를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1:4)라고 표현한다. 인생의 허리케인이 연이어 몰아닥친다 하더라도, 하늘에 간직된 것에는 조금도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세상의 모든 폭탄을 한데 모아 동시에 터뜨린다 하더라도, 우리의 유업은 영원히 견고하게 지속될 것이다.

 

여기에 비밀이 있다. 일단 이 영광을 보고 나면, 그 무엇으로도 낙심하거나 놀라거나 실망하지 않게 된다. 바울은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이 우리로 하여금 보이지 않는 것에 주목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그런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한다. 세상의 환난은 우리로 하여금 이 영광을 바라보고, 그것을 새롭게 생각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바울이 말한 대로, 세상의 환난은 우리를 실망시키기는 커녕 오히려 우리가 본 영광,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더욱 확고히 바라보게 만든다. 이것이 바로 지금까지 세상에 살았던 성도들의 비밀이요, 오늘을 사는 우리의 비밀이다.

 

 

하나님께서 이 악한 시대에 그 영광을 바라볼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영광을 다른 모든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을 세우시기를, 그리하여 모든 것이 절망으로 치닫는 것처럼 보일 때도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이루게 함이니”(고후4:17)라고 말할 수 있게 해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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