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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예화모음 117편

by 【고동엽】 2017. 1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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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우리 역시 마찬가지

 

인간들의 사랑 속에는 언제나 사심이 있습니다. 인간들의 마음속에는 순수한 하얀 것, 순수한 까만 것, 순수 악과 순수 선이 사실 거의 없다시피 한 것입니다. 남을 사랑한다 하면서도 나의 행복을 구한다 든지, 그 사람에게서 존경과 사랑을 구합니다. 사랑을 주고받음에 있어서 우리는 무서운 착취를 하게됩니다. 사랑과 애정과 인기와 존경을 수입하고 그 사람과 상하 관계를 만들어 버리거나 주종 관계를 만듭니다. 예를 들면 백원의 사랑을 주고는 자기 장부에는 받을 것을 천원이라 적어 놓습니다. 무의식중에 그렇게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조그만 사랑을 베푼 후에는 그 사람을 자기의 정신적 노예로 만들어 버립니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사람에게 짐지우고 또 그것이 세상에 선전되기를 바라며 그 보답이 어디선가 돌아오기를 바랍니다. 언제나 계산을 하고 타산을 합니다. 순수하고 사심 없이 사랑하기란 인간으로서는 참으로 힘든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아마도 하나님께 무슨 척도가 있어서 인간의 사랑을 시금석으로 분석해 보면 역사에 알려진 위대한 영웅적인 사랑의 행동에도 불순한 것이 30퍼센트, 어떤 것은 40퍼센트,어떤 것은 90퍼센트, 혹 어떤 것은 세상의 선전 효과를 노린 것도 있을 것입니다. 이기심이 사라지고 있었던 것 외에도 여러 가지 것이 있을 줄로 생각됩니다. 위선이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불완전하지만 우리는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을 사심 없이 사랑했습니다. 순수했습니다. 제자들에게 받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영원한 사랑의 부채자가 되었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2.재난을 통한 축복

 

배가 좌초 되었다. 생존자는 단 한 사람 뿐이었다. 그 사람은 파도에 밀려 인적없는 작은 섬에 당도했다. 궁지에 빠져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열심히 외쳤고 다른 배가 보이지 않을까 하고 날마다 지켜보았다. 어설픈 오두막을 하나 지어서 좌초된 배에서 건진 물건을 몇가지 들여다 놓았다.

어느날 먹을 것을 찾아다니다가 오두막이 불에 타서 연기가 나는 것을 보고 슬퍼서 어쩔줄 몰랐다. 오두막이 금새 재로 변했다. 최악의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그러나 기도에 대한 응답이 왔다! 다음날 일찍 배 한척이 다가왔다. 섬에 고립되었던 사람은어떻게 자기를 구하러 왔는가 하고 물었다. 선장은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는 당신이 낸 연기를 보았읍니다."

 

 

3.바꿔 쓴 고린도전서 13장

 

내가 다른 나라 말을 완전히 익히고 그 나라 사람처럼 얘기할 수 있어도,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익히지 못하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졸업증서와 학위증을 받고 모든 현대적 기술을 배웠다 하더라도,

주님의 사려 깊은 사랑을 받지 못하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과 당당히 싸워 이기고 그들을 조롱할 수 있어도,

주님의 호소하는 목소리를 듣지 못하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강한 신념과 위대한 이상, 그리고 거대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땀흘리고 피 흘리고 울며 기도하고 애원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갖지 못했다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요,

 

다른 이웃에게 옷과 돈을 준다고 하더라도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품지 못한다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

 

내가 모든 계획을 포기하고 집과 친구를 떠나 전도 사업에 몸을 바친다 하더라도,

하루하루 번거로움과 전도 사업에 대한 경멸을 참지 못하여 참을성 없고 이기적인 인간이 되어 버려서, 일상생활의 권리와 여가, 사소한 계획을 포기할 만한 사랑을 갖지 못한다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요, 그러면 내게서 미덕이 사라지는 것이라.

 

내가 모든 아픔과 질병을 치료한다고 하더라도,

친절한 주님의 사랑에 굶주려 상처받은 마음과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어떤 기사를 쓰거나 책을 출판해서 갈채를 받는다고 해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뜻을 그의 사랑의 말로 전달할 수 없다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

신앙 다이제스트

 

 

4.성 어거스틴의 말 중에서

 

사탄이 내게 오는 것을 환영한다. 내 믿음을 위해 나는 악마와의 대결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사탄을 마음속에 계시는 그리스도에게 소개한다. 그러면 그리스도는 사탄에게 말씀하신다. "사탄아 어거스틴의 문을 두드리는 것은 좋다. 그러나 너와 싸울 상대는 나 예수이다 " 라고 하시며 못자국이 있는 손을 내밀어 보이신다.

 

 

5.겸손의 일상 생활화

 

우리의 겸손한 마음과 온유한 심정은 사람과의 관계나 서로 대하는 태도에서 나타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겸손을 이웃에게 나타내지 못하면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겸손이란 가치없는 것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위에서 본 모든 말씀에 비추어서 우리의 일상생활을 통해 겸손을 배우자. 겸손한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행동하기를 힘쓴다.

 

즉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여 서로 종이 되며 각각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며 서로 순복하라"고 하신 말씀 그대로의 생활이다. 지혜에 있어서나 재능에 있어서나, 혹은 받은 바 신령한 은혜에 있어서 우리가 어떻게 우리보다 훨씬 뒤떨어지는 사람을 낫게 여길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그 질문은 마음속의 참겸손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하나님의 광명한 빛 가운데 자신은 진실로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깨닫고, 하나님만이 우리의 모든 것이 되게 하기 위하여 자신을 완전히 죽일 때까지 나타나는 것이 겸손이다.

 

이러한 사람은 오직 "오, 주여 당신을 찾으려고 나는 나 자신을 버렸사오니 나로 하여금 나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케 마옵소서"라고 할 것이다. 이렇게 되고서야 비로서 자기 중심의 모든 생각을 끊어 버리고 모든 사람앞에서 자기를 낮추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게 되고 , 또 자기를 위해서 구하지 않고 오직 자기를 하나님의 종으로 또는 모든 사람의 종으로 생각하게 된다.

 

어떤 신실한 종은 주인보다 더 지혜로울런지 모른다. 그러나 신실한 종이라면 역시 종으로서 마땅한 정신과 태도를 가져야 한다. 참으로 겸손한 사람은 가장 연약하고 가장 볼 것 없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오히려 우러러보며 그들을 존경하고 섬긴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던 그리스도의 정신이야말로 우리로 하여금 가장 작은 자 즉 다시 말하면, 피차의 종이 되는 것을 만족케 한다.

 

겸손한 사람에게는 시기와 질투란 없다. 겸손한 사람은 자기앞에서 다른 사람들이 섬김과 존경 받음을 볼 때는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양한다. 다른 사람은 칭찬을 받고 자기는 오히려 천대받고 무시당해도 참을 수 있다. 이는 그가 마치 바울 사도와 같이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한 그 정신을 배웠기 때문이다. 과연 이러한 사람은 마치 예수님께서 자기의 기쁨을 위하지 아니하고 자기의 존귀를 구하지 않으신 그 마음울 받아들인 것이다.

 

동료들의 실수와 죄를 보고 날카로운 말로 책망하고픈 유혹을 받을 때에도 겸손한 사람은 "서로 참으며 서로 용서 하기를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용서해 주신 것같이 하라"고 여러 번 말씀하신 이 교훈을 마음에 새기고 생활에 임할 것이다. 그러한 사람은 주 예수를 옷입어야만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소유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안다.

앤드류 머레이

 

 

6.감사 주일의 유래

청교도들이 메이 플라워 호를 타고 미국에 도착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 중 반 이상이 굶어 죽고 병들어 죽었습니다. 게다가 남아 있는 사람들마저 해마다 겹치는 흉년으로 고통을 당했습니다. 도무지 밝은 전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전국적으로 금식 기도를 선포하고 경건한 이 신앙인들이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하나님, 이 상황을 돌보아 주십시오. 우리를 도와주시옵소서." 이렇게 금식을 선포하고 기도를 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땐가 또 한번 대단히 어려운 형편에 놓이게 되자 그들은 다시 금식 기도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금식 기도를 놓고 의논하는 자리에서 어떤 농부 한 사람이 이렇게 제의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금식하면서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달리 생각하기를 원합니다. 비록 종사가 흉년이 들고 형제자매들이 병으로 쓰러지는 어려움을 겪지만 이 가운데서도 우리가 감사할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식량이 풍족치 않고 여건이 유럽보다 편안하지는 않지만 신앙의 자유가 있고 정치적인 자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앞에는 광대한 대지가 열려 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금식 대신에 감사 기간을 정하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이 어떻습니까?" 농부의 그 말은 참석한 사람들에게 깊은 감화를 주었습니다. 그래서 금식 기도 주간을 선포하는 대신 감사 주간을 선포하고 하나님 앞에 감사한 것이 감사주일의 기본 동기인 것입니다.

고통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손길, 옥한흠

 

 

7.부모 된 자의 기쁨처럼

 

언젠가 선교를 열심히 하는 젊은 청년들의 어떤 모임에서 어떤 사람이 점심식사를 잘 내고 식후에 과일까지 좋은 것으로 내놓았습니다. 그러자 그중에 한 젊은 청년이 이렇게 저에게 반문했습니다. "목사님! 우리는 고기를 먹지 않아도 죽지는 않지 않습니까? 고기 먹지 말고 그 돈을 아끼고, 이 과일 먹지 말고 그 돈도 아껴서 선교해야지, 먹고 마시는 데에 다 쓰면 언제 선교합니까?" 이렇게 한 청년이 눈을 부릅뜨고 도전해 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대답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늘 고기를 주시고 이 과일을 주시는 것은, 이것 없어도 하나님께서 선교를 충분히 하실 수 있으시며 우리가 어떤 기특한 마음을 가진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셔서 우리에게 지금 주신 상급이니까 감사함으로 먹으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자녀에게 갖는 가장 큰 기대는 자녀가 훌륭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녀가 훌륭하게 된 것이 기쁜 것만큼 자녀에게 좋은 옷을 입히고 좋은 것을 먹이면서 기뻐하는 것을 보는 것도 부모 된 자가 누리는 기쁨 중의 큰 기쁨입니다. 먹고 마시는 것이 복의 전부라거나, 복의 첫번째, 두번째의 조건이라고 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으로도 우리를 기쁘게 해주십니다. 오늘 나에게 좋은 것을 주시면 감사하겠지만 좋은 것을 주지 않으신다 해도 그것이 우리가 받을 복의 전부가 아니기 때문에 그래도 우리는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더 깊은 신앙으로 가는 길, 박영선

 

 

8.잃은 것과 가진 것

 

"우리 생애 최고의 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2차대전중 헤롤드 럿셀이라는 공수부대원이 전투에 나갔다가 포탄에 맞아 두 팔을 잃어 불구자가 됩니다. 그는 참혹한 좌절에 빠집니다. "나는 이제 쓸모 없는 하나의 고깃덩어리가 되었구나." 그런 가운데 그에게 차츰 진리의 마음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잃은 것보다 가진 것이 더 많다고 자각하게 된 것입니다. 의사가 그에게 의수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것으로 글을 쓰고 타이프도 치기 시작합니다. 그의 이야기는 영화화되어 직접 불구자의 모습으로 출연하게 됩니다. 그는 정성을 다해 연기를 합니다. 그 해 그는 이 영화로 아카데미 주연상을 탑니다. 그 상금은 상이용사를 위해 기부합니다. 어떤 기자가 찾아와 물었습니다. "당신의 신체적인 조건이 당신을 절망케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자 그는 결연히 대답합니다. "아닙니다. 나의 육체적인 장애는 나에게 도리어 가장 큰 축복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언제나 잃어버린 것을 계산할 것이 아니라 남아 있는 것을 생각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남은 것을 사용할 때 잃은 것의 열 배를 보상받습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에만 눈을 돌릴 때 그곳에는 오직 절망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불가능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잃은 것을 넘어 가진 것을 세어 보면 더 많은 가능성이 언제나 기다리고 있습니다.

 

 

9.사랑의 징계

 

어느날 유명한 부흥사인 무디에게 어떤 여자 교인 한 사람이 찾아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아무리 범죄해도 하나님은 저를 그대로 놔두시데요. 그러므로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 분이신 것이 분명해요." 이 이야기를 듣고 있던 무디는 부인을 지그시 바라보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부인! 부인은 지금 부인이 스스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왜요? 제가 교회를 얼마나 오래 출석했는데요" 라고 부인이 반문하자 무디는 다시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은 당신을 그대로 놔두지 않았을 것이요."

그렇습니다. 징계는 자녀에게만 있는 것입니다.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는 자녀의 잘못을 그대로 방관할 수 없어서 사랑하는 자녀를 향해서 사랑의 채찍과 매를 듭니다. 그처럼 우리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그대로 방관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 속에 하나님의 징계가 올 때, 그것이 해석되고 징계로 확신될 때 하나님을 원망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10.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

 

믿음은 靜이 아닌 動입니다. 퇴보가 아닌 전진입니다. 바라는 실상을 향해 끊임없이 도전하는 산 믿음인 것입니다. 믿음은 철저한 자기 부정입니다. 자신을 철저하게 부정하지 않은 이상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자기를 죽이고 자기 부족을 인정하고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을 때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거룩하심이 시인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신뢰하는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의심없이 믿는 것입니다.

 

 

11.주님이 우리를 택하신 목적

 

주님께서 우리를 택하신 목적은 어디에 있을까요?

성경에 나타난 선택의 의미는 특권의식이 아닌 사명의식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과실을 맺기 위하여 나무가 존재하는 것이며 나무가 존재하는 보람은 열매에 있습니다. 농부가 무엇보다도 원하는 것은 열매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꽃과 열매에 대한 흥미있는 대조적 교훈을 볼 수 있습니다.

꽃이라는 단어는 성경에 모두 37회 등장합니다. 그러나 열매라는 단어는 자그마치 2백회 이상이나 등장합니다. 또 의미상으로 보아도 꽃은 성경에서 순간적이고 허무한 인생의 일시적 가치만을 비유하고 있음에 반하여 열매는 궁극적이며 영원한 생의 가치를 교훈할 때 쓰여지고 있습니다.

 

 

12.하나님은 지금 어디 계십니까?

 

수많은 유대인들이 학살당하고 수많이 죄 없는 자유인들이 독일의 수용소(아우슈비츠)에서 죽어가던 그 현장 속에서 유대인들이 눈물을 뿌리면서 외친 질문은 이것입니다.

"하나님 지금 어디 계십니까? 하나님이 왜 이런 사건을 허용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연합군이 이 수용소를 탈환하고 이 수용소의 벽을 감시하다가 한쪽 벽에 씌여진 찬송가의 가사를 보며 깜짝 놀랐습니다. 어느 그리스도인이 그의 신앙의 고백으로 기록해 놓았던 구절이었습니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 다 형용 못하네.'

하나님의 사랑? 이 저주와 이 지옥 같은 수용소에서 하나님의 사랑이라니 웬 말입니까? 그러나 또 다른 곳에서는 이런 글자가 선명하게 씌여져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기에 계십니다(God is here)."

 

 

13.생수를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생수를 마시려면 바위를 깨뜨려야 합니다. 생수는 파야 나옵니다.

헌데 그리스도인의 약점중의 하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너무 쉽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파헤치는 경험 없이 죄 지은 그 모습 그대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려는 너무나 인간적인 방법을 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파고 또 파헤쳐서 깊은 곳까지 자신을 낮추지 않고서는 은혜의 생수가 나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14.삶의 자세

 

칼 매닝거는 "소유하고 있는 것보다 삶의 자세가 더 중요하다."라고 말했습니다. 현대의 가장 큰 문제는 우리 인간의 존엄성을 비하시켜서 하나님께서 주신 가능성과 창의력 마저도 무시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인간이 가지고 있는 뇌의 능력은 브리태니커 대영백과사전을 다 외우고도 40개 외국어를 유창하게 할 수 있으며 수십 개 대학의 필수 과정을 다 마칠 수 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가능성을 열등의식이나, 죄책감이나, 부정적인 의식구조 때문에 불과 10% 내외밖에 사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15.여행

 

프랑스 작가 라브니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세상 언어 가운데 최후로 두 가지 단어만 남긴다면 사랑과 여행이라는 것이다.

여행에는 우수가 있고, 고독이 있으며, 환희와 감탄이 있습니다. 그 모든 과정들이 우리를 성숙케 합니다. 여행을 하기 위해 우선 있는 그대로를 수용할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은 폭넓은 인간성과 도덕정신이 필요합니다. 여행은 만남입니다. 새로운 자연과 새로운 풍물과 역사와 미래와 현재를 만납니다. 그리고 사람을 만나고 하나님을 만납니다.

여행에는 반드시 주제와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주제가 없는 여행은 방황에 불과합니다.

 

 

16.한 알의 밀알

 

미국의 메사추세스 노드햄토 공동묘지에 가보면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무덤과 그 옆에 데이비드를 사랑했으나 일찍 죽었기 때문에 결혼하지 못한 아름다운 여인 제루사 에드워드의 무덤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를 위한 데이비드의 원대한

소망과 기대는 아무런 결실을 얻지 못한 채 그는 죽어 보잘것없는 무덤 속에 묻히고 말았습니다.

그의 노력과 일의 결과는 지금 거의 남은 것이 없고 그의 헌신적인 선교의 기억과 수십 명의 인디언 신자들이 고작 그가 이루어 놓은 전부가 되고 말았습니다. 진정 그는 한 알의 밀알처럼 썩어져 그의 이름조차도 잊혀가고 그의 사업도 모두 잊혀져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청교도의 성자라고 일컫는 요나단 에드워드가 데이비드를 자기의 아들이라고 부르고 그의 짧은 인생을 조그만 책으로 만들었을때 이 책은 미국 전역에 말할 수 없는 감동을 불러 일으켰고 전도의 불을 붙였습니다.

영국의 캐임브리지 대학의 학생이었던 헨리 마틴도 이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는 모든 학문의 성취와 천재적인 머리와 그에게 손짓하는 모든 기회를 포기하였습니다. 그가 인디언 탄광촌에서 전도하다가 돌아왔을 때 그의 건강은 심히 악화되었고, 그의 몰골은 거지 형상이었습니다. 그는 아직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흑해 북부의 거친곳에 가서 거기에 살고 있는 주민들에게 전도하다가 쓰레기더미 아래서 죽어갔습니다.

 

 

17.죄악의 때

 

어느 시골 양반이 생전 처음으로 세탁 비누를 쓰면 때가 잘 빠진다는 말을 듣고 "내 평생에 찌든 악의 때를 벗겨야겠다."면서 비눗물을 만들어 꿀꺽꿀꺽 마셨다고 합니다. 과연 비눗물이 백발이 되도록 지은 죄악의 때를 씻을 수 있을까요? 절대로 씻을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정결한 예식을 만들어 손을 부지런히 씻는다고 청결한 삶이 될까요? 이것이 비눗물로 죄를 씻으려는 노인과 똑같은 행동인 것입니다.

 

 

18.찬송

 

설교의 대상은 인간입니다. 설교는 사람을 움직입니다. 그러나 기도의 대상은 하나님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찬송은 하나님과 사람을 움직입니다.

찬양대란 이렇게 중요합니다. 오늘 주님이 부르시면 설교도 기도도 끝납니다. 그러나 찬송은 하늘나라에서도 영원히 계속됩니다. 천사들이 모두 찬양할 것입니다. 다윗이 수금을 탈 때 사울 왕의 귀신이 쫓겨 나갔다고 합니다. 다윗은 노래하는 임금으로 법궤를 메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할 때는 너무 기뻐 춤을 추며 노래를 불렀습니다. 잔인한 죽음도 노래를 빼앗지는 못합니다. 신앙의 절정은 노래를 통해서 나타납니다.

기적은 찬송이 있는 곳에서 시작됩니다. 성도여 노래가 있게 하시길 바랍니다.

 

 

19.열두 명만 있다면

 

영국 런던에 위치한 메트로폴리탄 교회는 스펄전 목사님이 목회하던 교회였습니다. 1866년에 소속 성도가 4천3백66명으로 그 당시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하루는 스펄전 목사님이 성도들에게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주님을 향해서 가슴이 뜨거운 사람, 열 두명만 있다면 이 런던의 삭막하고 고독한 환경을 기쁨이 충만한 곳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러나 4천3백66명이 있다고 할지라도 전부가 다 미지근한 성도라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20.경건의 기도

 

16세에 주님을 영접하여 93세까지 80년 가까이 기도한 사람으로, 자기가 낳은 일곱 자녀들뿐만 아니라 손자, 증손자들과 수천명에게 깊은 감명을 주어 주께로 더욱 가까이 나아가게 영감을 불러 일으킨 어머니가 있습니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나이 많은 사람이든 젊은 사람이든 그녀가 남을 비판하거나 불친절한 말을 하는 것을 들어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오직 그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삶을 의탁하고 흔들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녀가 이처럼 놀라운 승리의 삶을 살 수 있었던것은 그녀의 경건 훈련에 있었습니다. 그녀는 매일같이 시간을 정하여 그 시간을 기도와 말씀과 예배의 시간으로 삼았습니다. 삶의 최우선을 경건의 시간에 두었기 때문에 그는 어떠한 중대사가 일어나도 경건의 시간만은 지키려고 하였습니다.

나이가 점점 많아져서 거동하기도 불편해졌을 때 자녀들이 모시겠다고 했으나 아직 기도할 수 있고 말씀을 공부 할 수 있는 동안은 혼자서 살고 싶다고 하면서 이제 93세가 된 연로한 노인이지만 기도하는 일과 말씀 공부하는 일을 쉬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중보기도의 명단을 작성하여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기도하며 하나님께서 자기를 통해서 사랑을 베풀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찾아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 기도의 열매로 수많은 사람들이 고난 중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신앙의 사람으로 바뀌어지고 있습니다.

 

 

21.마르틴 루터의 변화

 

마르틴 루터의 고민은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근본적인 죄의 문제였습니다. 지금까지 범한 죄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정결하게 충성하려는 그에게 끊임없이 찾아와 그의 정결을 깨뜨리며 주님께 충성하기보다는 썩어질 정욕을 만족시키고 싶어하는 끊임없는 죄의 도전이었습니다.

과연 이렇게 본질적으로 썩어버린 인간에게도 소망이 있을까? 이러한 인간도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받을 수 있을까?

마르틴 루터는 죄의 도전을 물리치기 위해서 기도도 많이 했으며 말씀 묵상 연구도 많이 했으며 저 유명한 28계단 성당의 계단을 무릎으로 올라가는 것도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샘솟는 죄의 정욕은 결코 이러한 루터의 노력으로 해결될 수 있는 어떤것이 아니였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로마서를 연구하다가 드디어 이러한 죄인에게 비추는 하나님의 빛을 발견하였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러한 정욕의 사람, 죄악의 사람, 더러운 인간을 있는 그대로 받으시고 그들의 죄를 예수님의 몸에 담당시켰습니다.

불꽃 같은 눈으로 인간을 살피시고 인간의 죄악을 미워하며 불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은 차라리 그 모든 심판을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님께 내리시고 그대신 심판받아 멸망받았어야할 인간도 용서하시고, 받아들여 자녀로 삼으시려는 놀라운 결단을 내리시고 그 일을 행하셨음을 몸으로 깨달아 알았을 때에 루터는 하나님께 무릎을 꿇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인간의 죄는 인간의 공로나 힘, 능력으로 어쩔 수 없습니다.

교황청이 죄의 용서를 빙자해서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면죄부를 판매한다는 것은 도무지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루터는 드디어 1517년 95개조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설교회의 정문 앞에 걸어 놓았으며 종교개혁의 불씨를 당기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그의 삶을 통하여 얻은 몸의 진리요 말씀에서 발견한 것입니다. 어느 누가 이 진리를 취소하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때 루터는 담대히 외쳤습니다.

"나는 지금 여기 왔소. 이외에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소. 하나님께서 나를 도울 것이요."

루터는 힘있게 거절을 하고 종교개혁을 위해서 생명을 다하여 열심히 주님의 일을 하였습

 

 

22.전도의 시기

 

어느 회사를 경영하는 사장이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었습니다.

꼭 자기는 주일날이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는 사람인데 전도는 하지 못했습니다. 다른 사람을 보고 예수를 믿으란 말을 한마디도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회사에 같이 일하는 사람이 많이 있어도 다른 이야기는 늘 하지만 한번도 교회에 가자고 전도를 해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주일날은 설교를 듣고 나서 전도를 못한 자기의 잘못을 깨달아서 꼭 전도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자기 회사 사무실에 나가서 사장 자리에 앉았습니다.

 

조금 후 문을 열고 제일 먼저 들어온 사람은 자기 비서였습니다. 가만히 생각 해보니까 이 비서에게 한번도 예수를 믿으라고 전도해 본 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먼저 비서가 교회에 다니고 있는지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이 비서가 놀란 표정으로 왜 그런 것을 묻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받지 하면서 사장은 다시 전도를 하였습니다.

그러자 비서는 "제가 사장님을 15년 동안 모셨는데 저한테는 한번도 전도를 안 하셔서 제 생각에 저 같은 존재는 예수를 믿을 수도 없나보다 생각 했습니다. 오늘 이렇게 저한테 전도를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저도 다음 주일부터는 교회에 다니겠습니다."라고 말하더랍니다.

 

 

23.열 명의 문둥병자

 

누가복음에 나오는 열 명의 문둥병자들이 예수님을 만나서 모두 고침을 받고 돌아갔는데 그중의 한 사람만이 예수님께 찾아와서 감사를 드렸습니다. 나머지 아홉 사람은 깨끗한 몸으로 회복된 것이 너무나 기뻤던 까닭에 가족과 친구들에게 달려가서 함께 기쁨을 나누었습니다. 얼마 후 그들의 감격이 가라앉게 되자 그제서야 예수님을 찾아가서 감사를 드려야겠다고 생각을 했는데 예수님이 계신곳을 찾아가 보니 이미 주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뒤였다고 합니다. 감사는 감사할 수 있을 때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감사할 시기를 알아야 하며 하나님께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24. 죄에 대해서는 민감하라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이 이야기를 하면서 나란히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리스도인이 그만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너무 아픈 나머지 그리스도인은 불평 섞인 욕을 해댔습니다. 그러나 잠시 후 욕을 했던것을 회개하면서 "주님, 그리스도인으로서 산다는 것은 때로는 너무 힘이 듭니다."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비그리스도인이 입을 열었습니다. "여보게 뭘 그런 걸 다 회개하나? 삶을 좀 자유스럽게 살게."

순간 우리는 비그리스도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조그만 죄에도 민감하게 반응 한다는 것은 그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는 사람은 죄를 짓고도 자신이 지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합니다.

 

 

25.준비되어 있는 선교사

 

요즘 들어 세계선교에 대한 열의가 무척 높아지고 있음을 느낍니다. 정말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세계선교를 하겠다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에도 기본적인 신앙조차 제대로 갖추고 있지 않은 사람들도 많습니다. 또한 단순한 타문화권에 대한 동경과 호기심을 그 민족에 대한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세계선교를 운운하기 전에 잠깐 우리의 주변을 살펴 보아야 합니다. 선교사가 되겠다고 하면서 가족들이나 교인들과의 관계조차 원활하게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코카콜라가 전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음료가 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코카콜라 회사에서 내건 좋은 표어 때문이었습니다. 그 표어는 "세계적으로 생각하고 지역적으로 행동하라!"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선교사는 가정과 교회에서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썩어졌던 사람들입니다. 바로 그 사람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다른 문화권에 들어가 복음을 전할 때 비로소 그 복음은 다이너마이트와 같은 폭발적인 힘을 발휘하게 될 것입니다.

 

 

26.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삶

 

유명한 복음 전도자였던 죤 길모어 목사는 어느 날 작은 마을을 지나다가 주방용품을 팔고 있는 어느 노인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안녕하세요? 할아버지, 요즘 장사는 잘 되시는지요?" "예, 그럭저럭 잘 됩니다." "할아버지는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물론 믿지요.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는다는 것은 정말 위대한 일인것 같습니다." "그래요, 그렇지만 그보다 더 위대한 일이 있지요" "그래요? 그게 뭔데요?" "그건 나를 구원해 준 그분과 동행하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단지 구원받고 죽어서 천국가는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날마다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그 속에서 천국 생활을 미리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27.으뜸이 되고자 하느냐?

 

성공한 목회자인 사무엘 브랭글 목사는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남달랐습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이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것을 보고, 맡고 있던 교회를 사직하고 런던에 있는 구세군에 들어갔습니다. 처음으로 그가 한 일은 한 무더기의 흙투성이의 장화를 닦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속으로 불평하였습니다. 그러나 곧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일을 생각하면서 자신 또한 예수님처럼 섬기는 자가 될 수 있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브랭글 목사의 섬기는 삶은 시작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일생동안 많은 이들을 섬김으로 많은 열매를 거두었습니다. 사람들은 종종 "저로 머리가 되게 하고 꼬리가 되지 말게 하옵소서."하고 기도를 합니다. 사람들은 이런 기도를 하면서 높은 위치에서 호령하고 있는 자신을 상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머리란 무릎 꿇고 섬기는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28.당신의 신앙의 깊이는?

 

어느 저녁 무렵, 한 노인과 그의 손자가 호숫가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들은 많은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가령, 계절은 왜 바뀌며, 여자들은 왜 지렁이를 싫어하며, 인생이란 무엇인가 등등. 마침내 손자가 할아버지를 쳐다보며 물었습니다. "할아버지, 하나님을 본 사람이 있나요?" 그 노인은 잔잔한 호수 건너편을 바라보며 대답했습니다."얘야, 나는 이제 점점 하나님 이외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단다."

우리의 하루 하루가 바로 이 노인과 같아야 할 것입니다. 점점 하나님을 선명하게 바로보며, 숨을 쉬는 것처럼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하나님과 대화하면서 천국 생활을 준비한다면 그보다 행복한 삶은 없을 것입니다

 

 

29.세상을 등지지 말라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사회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상당수 있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이런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신실한 믿음의 소유자로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적이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일컬어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세상 사람들과 분리되어져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과 어우러져야 하며, 그 속에서 더욱더 빛을 발하며, 맛을 내야 합니다. 열왕기상 18장 3,4절 말씀에 나오는 오바댜를 보십시오. 그는 악독했던 아합 왕이 통치하던 시대에 궁내 대신을 지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여호와를 크게 경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당신은 세상에서 어떻게 살고 계십니까? 세상에 뛰어들어 그들에게 빛이 되고, 소금이 되어 주십니까?

 

 

30.네 부모를 공경하라

 

텍사스의 한 사내가 아내와 네 자녀를 버리고 캘리포니아로 가서 30년 동안 오직 자기만을 위해 살았습니다. 그는 돈 한푼 없이 죽었는데, 자기의 시체를 고향 텍사스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텍사스에 살고 있던 자식들은 모두 그 소식을 듣고 분개했습니다. "그 사람이 우리와 무슨 상관있어? 그가 아버지로서 우리에게 해준 게 뭔데? 그 사람때문에 어머니와 우리 모두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왜 우리가 그 시체에 수고와 돈을 들여야 하지?" 그러나 신앙심이 깊은 큰아들은 아무 말없이 동생들의 불평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캘리포니아로 가서 아버지의 시체를 운구해 오기 위해 자기 트랙터와 농기게들을 저당잡혔습니다. 장례를 치르고 난 후 큰아들은 동생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경에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씌어 있을 뿐, '어떤 부모'라는 말은 없단다"

 

 

31.세상 욕심을 벗어 던지라

 

알렉산더 왕이 이끄는 군대가 페르시아를 쳐부수기 위해 전진하고 있었을 때의 일입니다. 군인들은 패전을 결심이라도 한 듯 힘없이 행군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알렉산더 왕은 그 이유를 재빠르게 알아차렸습니다. 군인들은 여러 전투에서 얻은 노획물들을 몸에 잔뜩 지니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군인들의 행군을 잠깐 멈추게 한 알렉산더는 노획물들을 모두 모와 불태울 것을 명령했습니다. 이 명령에 군인들은 심한 불평을 늘어놓았지만, 결국 그렇게 함으로써 페르시아와의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군사입니다. 그렇지만 군사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하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세상적인 욕심을 잔뜩 짊어진 채 군사 노릇을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32.겸손하게 십자가를 지라

 

낙타는 하루를 시작하고 마칠 때마다 주인 앞에 무릎을 꿇는다고 합니다. 즉, 하루를 보내고 일을 끝마칠 시간이 되면 낙타는 주인 앞에 무릎을 꿇고 등에 있는 짐이 내려지길 기다리며, 또 새날이 시작되면 또다시 주인 앞에 무릎을 꿇고 주인이 얹어 주는 짐을 짊어지는 것입니다. 주인은 낙타의 사정을 잘 압니다. 그렇기 때문에 낙타가 짊어질 수 있을 만큼만 짐을 얹어 줍니다. 낙타는 주인이 얹어 주는 짐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낙타는 당신입니다. 그리고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형편을 누구보다도 잘 아십니다. 그리고 당신이 짊어질 수 있을 만큼 당신에게 짐을 얹어 주십니다. 이 때 당신은 어떤 모습으로 짐을 받으십니까? 낙타와 같은 겸손한 모습입니까?

새에게 날개는 무거우나 그것 때문에 날 수 있고, 배는 그 돛이 무거우나 그것 때문에 항해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에게 십자가는 짐이 되나 그것이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천국으로 향하게 만든다.

 

 

33.못 받아도 괜찮습니다

 

강아지를 보고 "나는 네가 밉다"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면서 쓰다듬어 주면 좋다고 꼬리를 칩니다. 그러나 "난 널 사랑해!"하고 꽥 소리를 지르면 콱 물어 버립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사랑한다고 말했느냐 미워한다고 말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랑의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어떤 교육도, 어떤 비판도, 어떤 훈계도, 사랑으로 말미암은 것만 틀림없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제가 인천에서 못회하던 30여 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그때는 토요일마다 주일을 위해 목욕탕에 가곤 했습니다. 새벽기도를 마치고 공중 목욕탕으로 곧바로 가서 목욕을 하고 돌아오는데, 길에서 문둥병 환자를 만났습니다. 평소 우리집에 자주 오는 분이어서 낯이 익었습니다. 그는 나를 반기면서 말합니다. "저어, 사모님은 늘 뵙고 신세를 집니다마는 목사님은 오래간만에 만났으니 두둑히 좀 도와 주십시오. "그래서 주머니를 뒤져 보니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습니다. "이것 참, 아무것도 없네요. 어쩌지요?" 했더니, "에이, 그러시지 말고 좀 주세요. 목사님"하면서 물러서지를 않습니다. 무슨 말을 해도 믿지를 않아서 저는 난처한 지경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저는 그 사람을 좀더 가까이 오라고 한 다음, 방금 씻은 깨끗한 손으로 문둥병자의 손을 덥석 붙들어 잡았습니다. 그리고 불쑥 소리쳤습니다. "정말 없단 말이야!" 그랬더니 이 사람이 "아아, 목사님 참말 고맙습니다. 돈을 얻은 것보다 더 기분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하고 몇 번이고 인사를 했습니다. 못 받아도 괜찮습니다. 사랑이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종말론적 윤리, 곽선희

 

 

34.엄마 노예의 죽음

 

어떤 선교사가 임지로 가는 도중에 여자의 비명을 듣게 되었다. 무슨 소리인가 하고 가까이 가보니 아들이 노예로 끌려가는데 그 엄마가 주인을 보고 "주인님, 나도 아들과 함께 사 주십시오. 저희 모자가 함께 가서 열심히 일하겠습니다"하며 애원했다. 그러나 그 주인이 "안돼"하며 아들만 끌고 가는데 그 엄마는 생명을 내걸고 함께 사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엄마도 울고, 아들도 울고.... 한번 헤어지면 영원히 만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광경을 보던 그 선교사는 주머니의 모든 돈을 털어 그 두 모자를 사서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세월이 지난 후 어느 날, 선교사가 풀밭에서 비명을 지르고 넘어졌다. 실신이 된 선교사의 뒷발에 독사의 이빨 자국이 나 있자 엄마 노예가 입을 대어 독을 빨아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 거의 죽었던 선교사가 일어나 보니 독기를 입으로 빨던 엄마 노예는 얼굴이 퉁퉁 부어 죽어 있었다. 엄마 노예는 자기를 사 준 그 고마운 선교사, 진정한 사랑을 베풀고 자유를 준 이 선교사를 위하여 사망의 독을 입으로 빨았던 것이다. 오늘 우리는 어떻게 해야 나의 생명을 건져 주신, 아니 우리 가족 전체를 살려 주신 예수님을 위해 살 수 있을까?

겨울 전에 어서 오라, 신예철

 

 

35.포기하지 않는 사랑

 

수년 전 한 아가씨가 스코틀랜드 주일학교에서 장난꾸러기 소년만 모인 반의 담임을 자청하고 나섰다. 그중에서도 보비라는 소년은 다룰 수 없는 골칫거리 아이였다. 주일학교에서는 이 여선생님에게 새 옷 한 벌을 가지고 보비의 집을 방문하여 계속 출석을 잘하도록 했다. 여선생님이 보비의 집을 방문했을 때 보비는 씻지 않아 땟물이 흐르는 얼굴에 머리는 빗질을 하지 않아 헝클어져 있었고, 그가 입고 있는 옷은 진흙에 뒹굴어 거의 걸레가 되어 있었다. 여선생님은 보비에게 새 옷을 갈아입히고 교회에 잘 나오도록 부드럽게 얘기했다. 그러나 보비는 또 더러워졌고 교회도 나오지 않았다. 여선생님은 다시 보비를 방문했다. 이미 새 옷은 다 망쳐지고 걸레가 되어 있었다. 또 한 벌의 새 옷을 선물하고 잘 타일렀다. 그러난 여전히 보비는 달라지지 않았다. 여선생님은 힘이 빠지고 말았다. 주일학교 부장을 찾아가 이제 더이상 어쩔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주일학교 부장은 "용기를 잃지 말고 계속해 보십시오"하고 격려했다. 그 여선생님의 계속적인 노력으로 고삐 풀어진 망아지 같은 이 소년은 나중에 훌륭하게 성장하여 중국에 선교사로 갔다. 그가 바로 로버트 스미슨 목사이다. 그는 성경을 중국어로 번역하여 수백만의 영혼을 주께로 나오게 했다.

G.D. 제임스

 

 

36.눈물로 뿌린 씨

 

미국 매사추세츠 주의 한 작은 동리에서 있었던 일이다. 열네 살 된 윌리암이라는 소년은 동리에서 평판이 대단히 나빴을 뿐 아니라 학교에서도 지도를 할 수 없었던 거칠고 못된 소년이었다. 더구나 그는 많은 학생들에게 점차적으로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있어서 학교 당국에서도 큰 문제였다.

그때에 새로 부임해 온 교사가 한 사람있었다. 이 새 교사는 윌리암 소년에 대한 말을 듣고 그를 한 번 지도해 보겠다고 했다. 동료 교사들은 모두 말렸다. 공연히 봉변이나 당할터이니 손을 대지 말라고 만류하였다. 그러나 그 교사는 윌리암 소년을 차근차근 관찰해 가면서 그의 형편과 성격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그는, 희망이 없다고 낙인이 찍히고 틀임없이 악한 사람이 될 곳이라는 인정을 받고 있는 윌리암 소년을 친절과 이해와 끈기로 지도해 갔다. 교사는 못된 그 소년에게 사랑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었다. 선과 악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었다. 참된 자존심과 포부를 넣어 주었다. 그 교사는 눈물로 씨를 뿌린 것이었다. 놀라운 일이 생기기 시작했으니 그것은 뿌려진 씨앗이 싹을 트고 땅에 뿌리를 내고 자라는 것이었다. 이 소년은 나쁜 버릇을 버리게 되었다. 그리고는 밤잠을 안 자며 공부를 하였다. 그는 대학에 진학을 했다. 대학을 졸업할 때에는 우등이라는 명예로 졸업을 했다. 윌리암은 계속 법률을 공부했다. 그는 결국 미국 대법원의 부판사가 되었다. 윌리암은 뉴욕 주의 주지사가 되었고 드디어는 미국의 국무장관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그는 어려서 몹쓸 인간으로 점찍혀 버림받았으나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본 한 교사의 지도로 이처럼 위대하고 뜻 있는 일생을 보내게 된 것이다.

 

 

37.보여 주세요

 

나는 김성준 선교사님과 같이 지내면서 그분의 이웃을 사랑하는 사랑을 볼 때마다 참 부끄러운 생각을 갖게 됩니다. 내가 목사로서 이분처럼 구체적으로 영혼을 구원하는 열정을 가졌는가 하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당신은 왜 선교사로 갔습니까?"하고 그분께 물었더니 "그 야만인 지역은 전파가 통하지 않습니다. 또 글이 없서서 책을 줘도 읽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몸으로 직접 가는 방법 외에는 다르게 그들을 사랑하는 표시, 그들에게 복음을 증거할 방법이 없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감동했습니다. 그러나 감동을 사랑으로 옮겨 행할 때는 어렵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예수님께서 설교하실 때 사람들의 감정은 부풀어 올랐습니다. 사랑해야겠다는 결단이 있었습니다. 그 설교, 예수님의 실제 설교, 사랑의 그 많은 설교 앞에, 예수님의 사랑의 행동 앞에 제자들과 사람들은 많이 감동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누가 높은가?" 하는 문제 때문에 서로 다투었습니다. 실제적으로 사랑할 때 우리에게 고통이 있고 아픔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가르치시기 위해 마지막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친히 대야에 물을 떠 오시고 허리의 수건을 동이시면서 자신의 몸 전체로 사랑의 수고를 보여 주셨습니다. 사랑은 실제로 어렵습니다. 참 사랑한다는 것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대가를 치르는 사랑만이 진정한 사랑인 것입니다.

십계명 강해, 홍정길

 

 

38.사랑은 사랑을 낳고

 

오래 전에 이름을 밝히지 않은 사람이 고아원에 찾아와 이렇게 물었다. "어느 누구도 원하지 않을 아이가 있습니까?" 그 물음에 원장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네, 있어요. 열 살짜리 여자아이인데 매우 흉한 꼽추예요. 단지 이름만은 좋아서 머시 굿페이스(Merch Goodfaith: 훌륭한 믿음의 은혜라는 뜻)이지요." "바로 그런 아이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이렇게 대답하고서 그 아이와 함께 떠났다. 35년이 지난 후, 아이오와 주 고아원 감사실의 실장은 한 고아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작성했다. "이 가정은 매우 특별한 곳인데 깨끗하고, 음식도 훌륭하며 특히 그곳 원장은 사랑이 넘쳐 흐르는 영혼을 가진 사람이다. 이곳에 수용된 어린이는 모두 잘 보살펴지고 있으며, 원장은 풍부한 사랑의 영향을 보여주고 있다. 그들이 저녁식사 후에 피아노 앞에 모여 섰을 때 나는 다른 곳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분위기를 느꼈다. 나는 결코 그 원장의 눈과 같은 아름다운 눈을 본 적이 없다. 그들은 내가 그 원장의 얼굴이 보기 흉하고 꼽추라는 사실을 잊고 있는 데 놀라워했다. 그 원장의 이름은 머시 굿페이스이다." 어떤, 이름도 알 수 없는 사람이 추하고 보기 흉한 고아를 보살펴 줄 용기를 가지고 있었기에 머시 굿페이스는 사랑의 벙법을 배우고 또 그 사랑을 백 배로 증식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오늘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돌볼 수 있는 용기를 주시기를 기도한다.

인생 최대의 갈망, 로버트 슐러

 

 

39.법보다 위대한 원리

 

세계적으로 유명한 신학자이면서 설교가인 미국의 아이언사이드 박사라는 분이 계십니다. 이분이 교회에서 회의를 진행하고있었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청년 하나가 손을 들더니 큰 소리로 고함을 지르기 시작합니다. "법대로 합시다" 이 말을 듣던 아이언사이드 박사가 아주 놀라운 얘가를 했습니다. "여보게 젊은이, 법대로 자네를 다루었다면 자네는 어떻게 될 것인가? 자네는 벌써 지옥에 가 있어야 마땅할 것일세." 우리는 법보다 위대한 원리에 의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은총의 원리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께서 나를 다루신 것처럼 다른 사람을 대하겠다"는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인간관계를 지배하는 은총의 원리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옳고 그름의 원리 - 율법적인 원리 - 가 아닌 은총의 원리에 의해서 삶을 살아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깨달은 사람들이 순종할 수 있는 명령이 무엇입니까?

"네 원수를 사랑하라.

 

 

40.값진 기쁨

 

진지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믿는 바에 따라 행동의 다른 표준을 갖고 있기 때문에 때때로 화평을 유지하는 것이 힘들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들은 어떤 행위가 용납되거나 용납되지 않는다는 자신의 생각에 따라 다른 사람을 판단한다. 이러한 일은 같은 교회에 다니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도 발생한다. 벨기에와 네덜란드의 여성들은 미국 여성들의 짙은 얼굴 화장을 눈감아 주는 것이 어려웠다. 동시에 미국의 신자들은 큰 맥주잔을 들고 있는 독일인이 참으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지 어떤지를 자문하였다. 각 나라마다 견해들간의 갈등이 있다. 예를 들면 네덜란드의 경우, 그리스도인들은 주일에 자전거를 타는 것에 관하여 서로 다른 의견을 갖고 있다. 흡연과 음주가 어떤 사람들에게는 받아들여지고 있으나 여전히 다른 사람들에게는 금기 사항이다. 그러나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에 기초한다. 은혜에 의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사람은 또한 동료 그리스도인들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자 할 것이다. 그는 다른 사람이 자신의 신념을 가질 권리를 인정해 줄 것이다. 당신은 그 누군가의 양심에 걸림돌이 되는 것을 기꺼이 그만두겠는가? 즉 그 행동이 당신 보기에는 나쁘지 않더라도 어리거나 연약한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서 그것을 하지 않거나 포기할 수 있는가? 자신의 명분을 내세우기보다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려는 이러한 일들을 행할 때 당신은 평화뿐만 아니라 기쁨도 경험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사랑을 위해 당신은 타인의 행복을 위한 행동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험에 의하면 이러한 기쁨은 자신이 포기한 '잃은 것'보다 훨씬 더 값진 것이다.

 

 

41.율법의 정신

 

굉장히 가난한 아주머니 한 분이 슈퍼마켓에 갔습니다. 그녀는 빵과 우유를 샀지만 고기를 몇 근 훔쳤습니다. 카운터에 가서 계산을 할 때 그녀는 빵값과 우유값만 지불했습니다. 그런데 계산하던 아가씨가 "아줌마, 그 가방 좀 열어 보세요"하고 말했습니다. 아주머니는 열지 않겠다고 우겼으나 경찰이 왔을 땐 열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가방에서 고기가 나왔습니다. 그녀는 당연히 경찰서로 끌려갔고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오직 재판관만이 형법을 사용하여 선고를 내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바로 법을 만든 사람들이며 법을 잘 알 뿐만 아니라 그 법의 뒤에 있는 정신까지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재판관은 그 가난한 아주머니를 부드럽게 심문했습니다. 그러다가 그 아주머니가 남편에게 버림을 받았으며, 현재 다섯 명의 아이를 기르고 있다는 것, 집도 절도 없으며, 몇 달 동안 기름진 음식이라곤 한 번도 입에 대보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정을 알게 된 재판관은 그 아주머니를 감옥에 보내는 대신 그 가족이 살기 적절한 집을 제공해 주고 연금을 지급받도록 해주었습니다. 이 재판관에게는 법의 정신이 법조문보다 더 중요했습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간음하다 붙잡혀 온 어떤 연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을 돌로 쳐죽이려 하는 형식에 치우친 사람들의 행위를 저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제정자인 동시에 남자와 여자의 마음을 잘 아시는 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연인의 주위 환경을 아셨으며, 그녀가 지금 회개했다는 사실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부드럽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요 8:11). 율법 그 자체보다 율법의 정신이 예수님께는 더 중요합니다.

인간 심성의 외침, 후안 카를로스 오르티즈

 

 

42.사랑의 의미

 

6.25 직후 나병 환자 수용소에 미국 로터리 클럽에서 회원들이 방문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거기에 미국에서 파견나온 간호사 선교사 한 사람이 나병 환자의 고름이 흐르고 있는 상처를 간호하고 있는 뜨거운 인간애의 장면을 포착하였습니다. 한 사업가가 그 장면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사진을 찍으면서 이러한 말을 했습니다. "이것은 백만불짜리 가치가 있는 사진이다. 그러나 나는 누가 나에게 백만불을 주어도 이 일을 못할 것이다." 간호사 자매는 이 사업가를 바라보면서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저도 그 일을 못합니다." 이 대답을 듣고 사업가가 당황하면서 말하기를 "그렇다면 당신은 어떻게 그 일을 할 수 있소?"라고 물었더니 자매가 대답하기를 "그리스도의 사랑이 저를 강권하기 때문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십자가에서 나를 향해 보여 주신 조건 없는 그 놀라운 사랑! 내가 그를 신뢰했을 때 나에게 놀라운 죄사함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나를 의롭다 하시고,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시고, 나에게 영생을 허락하시고 지금 내 삶의 길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이 사랑을 체험한 사람들만이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사랑의 방식을 따르십시오.

 

 

43.그리스도의 사랑

 

영국의 선교사인 허드슨 테일러가 중국 대륙의 전도 책임자로 있을 때 그는 가끔 전도를 희망하는 후보자를 면접하였다. 한번은 봉사하기로 결심한 한 사람을 만나 "왜 당신은 해외 선교사로 가기를 원합니까?"하고 물었다. 선교사 후보자는 대답하기를 "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전세계에 나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에 가기를 원합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또 다른 한 명은 수백만의 사람들이 그리스도 밖에서 타락하고 있기 때문에 선교사로 나가기를 원한다고 대답하였다. 그 때 허드슨 테이러는 말하기를 "그 모든 동기들은 좋지만 시험과 시련 그리고 고생, 심지어 죽음의 순간을 당할 때, 그것은 당신을 구하지 못합니다. 단지 한 가지 동기가 당신을 어려운 시험과 시련에서 견디게 해줄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아프리카에 있는 선교사가 한번은 이런 질문을 받았다고 한다. 당신은 "당신이 하고 있는 일을 진실로 좋아해서 하십니까?" 그의 대답은 충격적이었다. "아닙니다. 나와 처는 먼지와 이 고생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초라한, 냄새가 나는 이런 오두막집에서 사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좋아하지 않는다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되겠습니까? 우리는 가라는 명령을 받았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만이 진정한 봉사를 하게 할 것이다.

인생을 다시 한번, 배훈

 

 

44.오직 사랑하기 때문에

 

여러 해 전에, 정해진 시각에 어떤 큰 오르간 연주회가 열리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르간에 펌프질을 할 사람이 그만 병이 들고 말았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한 유명한 작곡가가 자신이 그 펌프질을 하겠노라?자원했습니다. 왜 그런 보잘것없고 천한 일을 하려고 하느냐는 질문을 받은 작곡가는 "음악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어떤한 일도 결코 초라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우리가 그를 섬기는 가운데 할 수 있는 어떤 일도 결코 보잘것없어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의 이름 안에서 행하는 봉사의 일이라면 가장 작고 미미한 일일지라도 모두 즐길 수 있을 것입니다.

 

 

45.목숨을 바친 사랑

 

전쟁중 우리 나라에 있었던 실화라고 한다. 한 만삭이 된 어머니가 아기를 낳기 위해 어떤 집을 찾아가던 중이었다. 그 어머니는 그만 그 집을 다가지 못하고 길에서 진통을 하기 시작했다.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었던 어머니는 어느 다리 밑에 겨우 자리를 잡아 아기를 분만하게 되었다. 추운 겨울 아무도 도와 줄 사람이 없는 가운데 그 어머니는 모든 것을 혼자 처리하고는 아기가 춥지 않도록 자기 옷을 모두 벗어서 아기를 감싸주었다. 해산 직후 추위에 어머니는 그만 얼어죽고 말았다. 얼마 후 어느 미군 장교 한 사람이 차를 타고 그 근처를 지나가다가 휘발유가 떨어졌다. 그는 부대로 연락을 취해 놓고 차에서 내려 그 부근을 거닐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이상한 아기 울음소리 같은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란 그 군인은 그 소리를 따라 다리 밑까지 내려오게 되었다. 거기서 그 군인은 기가 막힌 장면을 목격했다. 어머니는 벌거벗은 채 얼어죽어 있었고 어머니의 옷에 둘러싸인 갓난 아기가 몹시 울고 있었다. "내가 여기서 기름이 떨어진 것이 어쩌면 하나님께서 이 아이를 살리시기 위함인지도 모르겠군." 이렇게 생각한 군인은 그 아기를 데려다가 양자를 삼아 잘 키웠다. 그 아들은 미국에서 훌륭하게 자라 성인이 되었다. 늘 자신의 출생에 대해 알고 싶어하던 그 아들은 어느 날 자기를 키워 준 아버지로부터 자기를 낳아 준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 아들은 무덤을 찾아 한국에까지 나왔다. 그 아들은 어머니의 무덤 앞에서 자기 옷을 벗어서 무덤 위를 덮으면서 울음을 터뜨렸다. "어머니 얼마나 추우셨어요! 나를 살리기 위해 어머니는 그런 희생을 치르셨군요! 저는 어머니의 사랑을 생각하면서 벌거벗고 굶주린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겠어요!"

사랑과 행복에의 초대, 양은순

 

 

46.도자기공

 

한 전도사가 도자기 공장 지대에 사는 한 사람을 방문하였다. 그 사람은 젊었을 때는 신앙을 갖지 않은 사람이었다. 전도사는 그 집에 도착하여 유리 상자 속에 든 두 개의 좋은 꽃병을 보고 감탄하여 말했다. "야! 참 멋있군요. 아주 귀한 것이겠지요?" "그렇습니다." "얼마면 파시겠습니까?" 주인은 고개를 휘저으며 전도사에게 말했다. "이 세상 돈을 다 준다 해도 저 두 개의 꽃병은 절대로 팔 수 없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몇 년 전만 해도 술주정뱅이에다 노름꾼이었지요. 말하자면 마귀에게 영혼을 맡겨 놓고 다녔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친구의 권유로 교회의 집회에 참석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쓰레기 더미에서 흙 한 무더기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누군가가 쓸데가 없어서 버린 것이었지요. 나는 그걸 집에 가져와 반죽을 하고 모형을 만들어 구워 보았습니다. 결국 나는 쓸모 없던 흙으로 두 개의 아름다운 꽃병을 만들었습니다. 그날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이런 일을 할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도 나를 가지고 똑같은 일을 하실 수 있을 거야!'

그때부터 저는 제 자신을 하나님의 손에 내맡기고 하나님께서 저를 새 사람으로 만들어 주실 길 바랐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그 쓰레기장의 흙무덤 같은 나를 아름다운 꽃병으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47.장성한 믿음       합3:16~18

예수님을 처음 믿을 때에는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복을 주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다고들 합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닙니다만 이러한 신앙은 어린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기대하는바 축복이 오지 아니할 경우에는 결국 낙심하여 원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이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성령의 은혜를 점차 깊이 깨닫게 되고 점점 깊어지면 그 때는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응답을 받거나 복을 받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에 포로가 되어서 믿는 믿음이 됩니다. 이러한 믿음을 장성한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장성한 믿음을 지닌 사람이야말로 결코 환경에 영향을 받지 아니하고 주님을 향하게 됩니다.

어떤 그리스도인이 불치의 병에 걸려 고통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유명한 의사나 병원을 찾아서 진찰과 치료를 받아 보았지만 백약이 무효라 결국 사형선고를 받은 바나 다름없게 되었습니다. 그분을 위해 주위의 성도들이 기도를 해주었고 출석하는 교회의 목사님도 안수하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병세는 더욱 악화 일로가 되었고 그는 고통으로 말미암아 몸부림치고 있었습니다. 약을 써도 기도를 해봐도 낫지 않는 그를 향해 그분의 담임 목사님은 무어라 위로의 말을 찾을 수가 없었으나 그분에게서 한가지 사실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비록 육신은 괴로워하고 있었지만 육안으로 볼 수없는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사랑이 그분 속에 역사하고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드디어 죽음이 임박했을 때 심방을 간 담임 목사에게 "목사님, 저 때문에 염려하지 마십시오. 제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반드시 기도 응답을 받거나 축복을 받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저는 단순히 예수님을 나같은 죄인을 위해 보내사 십자가에서 피흘려 돌아가게 하신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에 감격하여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이처럼 분명히 사랑하고 계심을 안 이상 기도의 응답을 받지 못하고 제가 가진 생명과 모든 것을 잃게 된다하여도 저는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결코 낙심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분은 이 같은 말을 한 후 얼마 있지 아니하여 그 얼굴이 밝게 빛나면서 하나님의 품에 잠들었다고 합니다.

이런 그리스도인이야말로 장성한 믿음을 소유한 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신앙은 환경에 지배를 받지 아니하고 마귀의 어떠한 유혹과 공격도 능히 이기고 천국을 향하여 유유히 걸어가는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그리스도인이야말로 "비록 무화과 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 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 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 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라고 고백하는 장성한 믿음의 소유자입니다.

 

 

48.믿음의 말       민14:6~9

믿음이 있는 사람은 믿음의 말을 합니다. 그래서 말하는 모습만 보아도 믿음이 있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무슨 일을 만나면 믿음의 말은 고사하고 두려워하며 부정적이거나 절망적인 말을 하고 불평과 원망이 앞서는 말을 늘 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기도의 응답을 받기가 어렵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 입의 말로 네가 얽혔으며 네 입의 말로 인하여 잡히게 되어었느니라."(잠6:2) 바람의 방향은 일정하더라도 큰 범선은 조그마한 키의 조정에 따라 동쪽으로 가기도 하고 서쪽으로 가기도 합니다. 이처럼 믿음의 말은 응답을 가져오고 기적을 체험하게도 합니다.

모세가 가나안 땅에 12정탐군을 보내어 사십일 동안 정탐하게 한 결과 열명의 정탐군들은"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우리가 탐지한 땅은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민13:31-33)고 보고 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 와 갈렙은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민14:9)고 했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부정적이며 절망적이어서 소망이 없는 말을 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염두에 전연 두지 않고 눈에 보이는 환경에만 집착합니다. 여호수아와 갈렙 같은 믿음의 사람은 믿음의 말을 했습니다. 곧 믿음의 선언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사람에게는 역사에 남겨져서 오랫동안 기억되지만 낙심과 실망 그리고 불평과 원망의 말을 하는 사람은 결국 역사에서도 잊혀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고치시러 가다가 사람이 와서 이미 그 딸이 죽었다고 말 하자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셨음에도 계속해서 사람들이 통곡하자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강하게 믿음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의 말을 하기보다는 포기하고 절망하며 부정적인 말을 너무나 많이 합니다. 밤새 철야기도하고 혹은 금식기도까지 하고 난 후에도 금방 믿음없는 말을 하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일상 생활 속에서 행여 믿음없는 말을 하지 않고 있나를 반드시 점검해보야합니다. "나는 병든 사람이야"로부터 "나는 건강한 사람이야"로 생각과 말을 바꾸어야 합니다. "나는 할 수 없다"에서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일을 할 수 있다"라는 믿음의 말로 바꾸어야 합니다.

 

 

49.하나님의 믿음      막11:20~24

미국의 한 부흥 목사님이 집회를 인도하기 위해 예정된 교회를 향해 갔습니다. 교회 입구에 이르자 그 곳에서 앉은뱅이 여인을 만났습니다. 그는 집회 시간까진 시간이 많이 남았으므로 관심을 가지고 "어떻게 오셨나요?" 묻자 그 여인은 질문하는 분이 그 날의 부흥목사인 줄을 모른 채 "예, 저는 오늘 이곳에서 부흥집회를 하시는 목사님에게 기도 받고 병 고침을 얻으려고 왔습니다. 저는 기도를 하고 마음에 오늘 꼭 낫는다는 확신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 자동차를 집으로 돌려보냈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 자동차를 돌려보내다니 그러면 집에 갈 때는 어떻게 가실려구요?" "제가 나아서 걸을 텐데 자동차가 무슨 필요가 있겠어요? 버스 타고 집으로 돌아가면 되지요."

이 말을 들은 목사님께서 "자매님, 꼭 나을 줄 믿습니까?" 하니 "네, 저는 하나님으로부터 약속을 받았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그 목사님은 "자매님, 저녁 집회 시간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군요. 제가 바로 그 목사입니다." 하고서는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라!"면서 그 여인의 손을 붙들고 일으키니 여인이 일어났습니다. 기적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의 병고침의 소문이 온 교회에 좍 퍼졌습니다.

그 때 역시 다리를 잘 못쓰는 한 여인이 호텔에 투숙하면서 그 집회에 계속 참석하고 있었습니다. 이 자매님도 목사님에게 기도를 받고 일어서려고 했으나 일어 설 수가 없었습니다. 이 자매님은 "목사님, 저도 믿음으로 나으려고 자동차를 돌려보냈는데 왜 낫지를 않습니까?"라면서 실망하고 원망을 했습니다. 목사님은 그녀에게 "자매님께서는 아직 일어나실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고침 받은 그 자매님은 하나님으로부터 자기가 고침 받는다는 약속을 받았지만 자매님은 아직 약속을 받은 바가 없는 것 같군요. 다른 사람이 나았으니 나도 자동차를 보내면 낫겠지 라는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모험을 하고 있군요. 자매님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약속이 임할 때까지 기다리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믿음이 임하여야 낫게 될 것입니다."라고 설명했다고 합니다.

우리들에게 그 믿음이 나타나기 전에 아무리 행동해봤자 결과는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의 필요에 따라 믿음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 믿음을 주시고 그 믿음을 주셔야 기적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 앉은뱅이 여인의 믿음은 곧 하나님의 믿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믿음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주님께 우리의 모든 죄를 회개하고 내 뜻대로가 아니라 주님의 뜻대로 산다는 마음가짐을 굳게 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믿음을 주실 때까지 인내할 줄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만 대어도 낫겠다는 믿음을 가졌던 혈루병 여인처럼 , 그리고 오늘의 이 앉은뱅이 여인처럼 하나님의 믿음이 마음 속에 주어지게 됩니다. 이러한 믿음이 임하면 병은 즉시로 낫고 문제도 해결 받게 되는 것입니다.

 

 

50. 단순한 믿음       눅7:2~10

믿음은 주님의 능력이 들어 올 수 있게 하는 마음의 문과도 같습니다. 만일 그 문이 조금 열려 있으면 그의 능력이 그만큼 밖에는 들어 올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모든 약속들이 그대로 성취될 것을 확신하는 가운데 마음의 문을 활짝 연다면 주님께서는 그가 원하셨던 대로 자유롭게 역사할 수 있게 됩니다. 오늘 본문의 백부장의 믿음은 단순한 믿음입니다. 단순한 믿음이란 바로 예수님을 올바로 아는 데서부터 나오는 자연스런 결과인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그의 뜻을 알고서 시키시는 명령에 단순히 그대로 순종하여 행하는 결과를 말합니다.

한 그리스도인은 수영을 하다가 귀속에 물이 들어갔는데 아주 심한 염증이 생겼습니다. 그 후 아픈 귀의 고통으로 죽을 지경이었고 악취 나는 누런 고름이 흘렀습니다. 마침 특별집회가 있었는데 믿음만 있으면 구할 때 응답해 주신다는 말씀을 듣고 자신도 손을 들고 나가서 기도를 받았습니다. "주님, 제발 서둘러 주세요. 아시다시피 더 기다릴 수 없습니다. 제발 지금 고쳐주셨으면 합니다. 자, 지금 내가 믿음이 생겼으니까 이번에는 당신이 하셔야만 합니다."라고 스스로 말했지만 주위의 다른 사람들은 고침을 받는데 그에게는 아무런 일도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 몇 번이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요? 그 후로도 그는 몇 달 동안 기다리고만 있었고 기도응답으로 치료받기까지는 2년이 걸렸습니다. 주님의 원하심과 뜻을 모를 때 많은 사람들이 동일한 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참으로 가치 있는 교훈을 배웠습니다. 그는 치료를 받기 위해 우선 예수님을 영접하는 법을 배워야 했던 것입니다. 고침 받기 전에 그에게 예수님이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이 필요한 분이라는 진리를 배워야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간절히 하고 있는 기도에 대해 응답하시지 않을 때 우리자신이나 우리의 소원하던 눈을 잠시 돌려 오로지 주님께만 초점을 맞추라는 표시임을 눈치채야 합니다. 그의 음성을 들을 수 있도록 친밀하게 가까이 다가가야 합니다.

단순한 믿음이란 주님을 정확히 아는 것입니다. 주님을 잘 알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매 순간을 그의 임재 속에 살아 주님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심중의 비밀들을 말씀하실 때 언제나 들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고 하나님과 우리 자신의 전화선은 언제나 선명하게 통화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귀는 세밀하게 들려주시는 그의 속삭임에 다이알을 맞추어 놓고 있어야만 합니다. 단순한 믿음의 놀라운 비밀의 전부는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특별한 상황에서 무엇을 원하시는가? 무엇을 행하시리라는 것을 알도록 그분과 충분히 가까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을 단순하게 만들고 기적을 일으키는 믿음이 됩니다.

 

 

51.믿음의 접촉점      행19:11~12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는 사역자들을 보면 수많은 사람들에게 일일이 안수할 수 없기 때문에 이를테면 "문제를 가진 사람은 왼쪽 가슴에 오른 손을 얹어주시고 아픈 사람은 아픈 곳에 믿음으로 손을 얹어 주십시오."라는 식으로 하여 한꺼번에 청중들을 위해 기도하게 됩니다. 이러한 방법은 문제를 가진 사람의 가슴이나 병자들의 아픈 부위에 믿음으로 얹은 각자의 손이 "믿음의 접촉점"이 되어 하나님의 능력이 전류처럼 손, 발, 무릎, 머리뿐만 아니라 오장육부 전체 몸에 넘쳐흘러 역사한다는 뜻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중보기도가 시공간을 초월하여 주님의 응답을 받게 되는 것도 이러한 믿음의 접촉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 일하고 있는 한 사역자의 간증을 소개합니다.
우리는 영국의 훼일워스에 계시는 한 할머니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할머니의 손자는 태어날 때부터 불구였는데 양쪽 엉덩이뼈가 없고 머리에는 커다란 물주머니가 있었습니다. 이런 물주머니를 가진 아이들은 보통 수명이 짧습니다. 그 할머니는 편지에서 "만일 미국에서 영국으로 오실 수 없다면 조그만 '기도 수건'이라도 보내 주세요"라고 썼습니다. 텍사스주 휴스톤에서 영국은 아주 먼 거리입니다. 우리는 "손수건이나 혹 기도 수건을 보내 주시면 제가 낫겠습니다."라는 편지를 받으면 '기도 수건'을 보내주고 있습니다. 이성적으로는 이것을 믿기가 매우 힘들지만 하나님의 기름 부음이 있으면 이 조그만 천 조각도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냅니다. 성경에서 한 번 일어난 일은 오늘날도 그대로 일어나기 때문이다.

사도행전에는 "심지어 바울이 사용하던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대기만 해도 병이 낫고 악한 귀신들이 나갔다"(행19:12)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힘을 믿고 사방 5cm의 천 조각에 함께 손을 얹은 후 하나님의 치료하는 능력이 이 작은 천 조각과 함께 해 주시길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 어린아이가 이 천 조각을 만질 때 예수님의 부활의 생명력이 나타나 그 아이의 병을 완전히 낫게 해 달라고 기도한 후 하나님께서 이적을 이루어 주실 것을 믿고 보냈습니다.

할머니가 우리가 보낸 천 조각을 받았을 때 그 아이는 자고 있었는데 그 천 조각을 말아서 아이의 손에 쥐어 주었다고 합니다. 그것이 믿음의 접촉점이 되었습니다. 그 순간 머리의 물주머니가 줄어들어서 아이의 머리가 정상 크기가 되었으며 수주 후 할머니는 아이를 의사에게 데려가 엑스레이를 찍었는데 놀랍게도 완전한 두 개의 엉덩이뼈가 나타났습니다. 의사는 "이 아이는 우리가 치료하던 아이가 아닙니다. 아이의 챠트에 의하면 그 아이는 엉덩이뼈가 없습니다. 그리고 머리에는 물주머니가 있었습니다. 당신은 왜 이 아이를 데려 왔지요? 이 아이는 정상인데요."라고 말했습니다.(「신유의 방법」 찰스 프란시스 헌터 저)

 

 

52.가족들의 믿음       마15:24~28

기적적인 치료가운데에는 본인보다 가족들의 믿음을 통해서 기적을 체험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도 가나안 여인의 끈질긴 믿음으로 그녀의 딸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았습니다.(마15:28) 이런 경우는 오늘날에도 우리들 주위에 이런 사례가 많습니다. 가족들이 중보 기도자가 된 것입니다. 가족들의 믿음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끊임없이 가족을 위해 믿음의 기도를 해야 할 것입니다.



필자와 함께 10년 이상을 전도사역에 힘을 기울였던 강 집사님에 대한 간증입니다.

그는 1987년 초부터 몸에 이상한 증세가 나타나서 음식물만 보면 구토가 날 것 같았고 머리가 아팠으며 몸이 떨렸습니다. 병원에 가서 약을 복용하고 주사도 맞았지만 병명이 확인되지 않았으며 그러던 어느 날 딸꾹질이 멈춰지지 않고 며칠 동안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생명이 위험할 정도였으나 간절히 기도하자 다행히 멈추었지만 이젠 두통이 더욱 심해져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정밀검사를 받기 위해 방사선 치료전문 기관이던 W 병원으로 갔으나 그 곳에서 그만 의식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으며 병명은 뇌하수체 종양으로 밝혀졌습니다. 의사는 의술이나 약으로는 치료가 거의 불가능하며 방사선 치료도 이미 때를 놓쳤다고 했으며 주사를 놓으려 해도 혈관을 찾을 수 없어 포기하였고 그 때부터 그는 산소호흡기를 의지한 채 그 병원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부인과 가족들은 금식하며 기도했고 부인은 지역의 성도들과 주의 종들에게 기도를 부탁하며 병원에서 소문이 날 정도로 기도를 했습니다. 그의 부인은 교인들과 함께  목사님에게 사경을 헤매고 있는 남편을 위해 안수를 받게 되었으며 그 부인은 목사님의 안수를 받을 때 믿음으로 그녀의 머리 위에 손수건을 얹고 받았습니다.

안수를 받은 후 그녀는 재빨리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돌아가서 의식을 잃고 누워있는 남편의 머리 위에 그 손수건을 얹었습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충만한 가운데 뜨겁게 기도하자 병실은 성령의 열기로 가득 찼습니다. 그 때부터 의식을 잃었던 남편의 입에서 알 수 없는 액이 흘러내리기 시작했으며 병원에서는 특별한 약도 투여 못하고 산소호흡기만 관찰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치료가 임하니 저절로 수술이 되기 시작했으며 그 액은 한 달만에 그쳤고 굳어가던 몸에 생기가 돌았습니다.

드디어 그는 의식을 잃은 지 50일 만인 1987년 5월에 기적적으로 소생했습니다. 병원에서 다시 뇌를 촬영했는데 분명히 1차 촬영 시 있었던 종양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고 합병증으로 나타난 요붕증도 기적적으로 고침 받았으며 언어장애도 몇 개월 뒤 정상으로 회복되었습니다. 그는 기적적인 하나님의 치료를 받았고 너무나 감사하여 전도대원으로 참가하여 자기가 입원했던 주로 W 병원으로 파견되어 죽어 가는 수많은 영혼들을 주께로 인도하였으며 지금도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53.친구들의 믿음      막 2:1~5

몇 사람이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는 바로 위 지붕을 뚫고서 자신들의 친구인 중풍병자를 내렸을 때 주님은 중풍병자 자신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병자를 데리고 온 친구들에게서 큰 믿음을 발견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기를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막2:5)고 하셨습니다. 친구들의 믿음이 중풍병자를 고쳐주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친구들은 바로 중보자들입니다. 이들의 중보 기도가 없었다면 기적을 체험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기도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는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미국의 교계에서 중보자들 즉 친구들의 믿음의 후원을 받으며 성공적인 사역을 감당하는 대표적인 지도자는 존 맥스웰 목사라고 합니다. 그는 중보자들의 기도가 없이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설교나 강의를 하기 전에 반드시 평신도 앞에서 무릎을 꿇고 중보자들의 기도를 받는다고 합니다. 한번은 그가 인디아나 주에서 2500여명의 청중 앞에서 세미나를 인도하고 있는데 갑자기 그의 중보자 중 한 사람이 지금 거대한 토네이도(강력한 회오리 돌풍)가 교회건물을 향하여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맥스웰 목사는 청중들을 지하실로 대피할 것을 말했고 "예수의 피밖에 없네" 라는 찬송가를 연주하고 부르면서 지하실로 내려갔으며 못 내려간 사람들은 손을 잡고 벽에 기대어서 토네이도에 대비했습니다. 모든 청중들이 합심기도를 했고 특별히 맥스웰 목사의 중보자 수십 명은 비상기도를 드렸습니다. 놀랍게도 토네이도는 교회 근방에서 방향을 바꾸더니 세미나 장소를 비껴갔습니다. 모인 청중들에게 대단히 큰 감동이 임했으며 그 결과 참석자 중 100여 명 이상이 주의 종이 되겠다고 서원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중보자들의 기도 즉 친구들의 믿음의 기도가 자연적 재앙까지 막아주고 하나님나라를 세우는 일에 큰 역할을 한 사례였습니다.

병을 고치거나 문제를 만났거나 교회의 부흥을 위해서도 당사자뿐만 아니라 친구들의 믿음 즉 동역자들의 중보가 필요합니다. 장작불을 태울 때에도 장작개비 한 개보다는 여러 개의 장작을 모아 불을 붙이면 화력은 더욱 세어지고 오래가는 것입니다. 믿음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혼자서 신앙 생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서로 합력하여 동역하는 믿음생활이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를 이끌어 내게 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느 곳을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서로가 중보자가 되어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을 나타내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친구들의 믿음이 되어야겠습니다. 중보의 원천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중보사역이 없었다면 우리의 중보도 아무런 효과가 없습니다. 친구들의 믿음과 같은 중보의 삶은 주님을 본 받는 삶입니다.

 

 

54.사역자의 믿음     막11:20~23

질병을 고침 받는 데에는 병이 낫는 사람과 낫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병든 자의 믿음이 있는가 하면 낫게 하는 입장인 사역자의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치료가 임할 때에는 사역자의 믿음이 매우 중요합니다. 만일 병든 자의 믿음의 결여로 치유가 잘 되지 않는 경우라 할지라도 사역하는 사람의 믿음으로 하나님께서는 치료할 수 있다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9;23)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들이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특이하고 흥미 있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병든 자를 고치신 장면을 보면 병자를 붙잡고 기도하셨다는 장면이 없습니다. 주님의 제자들도 병자를 붙들고 기도했다는 사실이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오랄 로버츠 대학의 신학교수이며 성경학자인 제리 호너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오순절 성령세례를 받은 후 병자를 위해 기도했다는 기록은 단 한 곳도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했을까요? 병자를 고칠 때에는 기도보다는 명령을 했다는 사실을 알 게 됩니다. 예수님은 "가라,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소녀야 일어나라.", "에바다, 열리라.", "실로암 못에 가서 씻어라.",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네 손을 내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등과 같이 말했습니다. 제자들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어라.","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다비다야, 일어나라."등을 사용했습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마28:18)와 같이 예수님께서 받으신 권세를 다시 우리에게 주셔서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에게 손을 얹어 낫게 하는 능력을 주셨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에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 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막11;23)고 하셨습니다.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말한다는 것입니다. 산을 보고 바다에 던지 우라 하는 말은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명령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누구인가를 자각하고 내리는 명령입니다. 사역자의 믿음이란 결국 하나님의 능력이 자기 안에 있음을 알고 성경에서 지시하는 대로 이 능력을 행사하는 사람의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명령하고 말하는 것은 악을 쓰고 고래고래 고함소리를 지르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는 사역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이나 질병이나 각종 문제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하신 것처럼 꾸짖거나 명령해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권세와 능력과 이름을 통하여 하나님의 기적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55.병든 자의 믿음     행 14:8~10

성경에 나타난 사실이든지 오늘날에 나타나고 있는 사실이든지 병을 고침받는데에서 믿음의 역할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열두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한 여인의 고침받은 기록을 봅니다.(막5;25-34) 그 여자는 그녀의 병이 더 중해졌던 차에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니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았다고 했습니다.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는 그녀의 믿음 즉 병든 자의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 지어다"라고 말씀했습니다. 만일 그 여인이 "나는 의사란 의사한테는 모조리 가봤는데 아무도 고치지 못했어 그런데 이제 와서 예수란 사람한테 간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 이것이 내 운명인데 그저 이대로 살다가 죽지."라고 했다든지 "무슨 사람들이 이렇게 많지. 내가 어떻게 예수님 근처에 갈수 있겠나? 내가 낫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닌 모양이야"라고 포기해버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오늘날에도 이런 사람이 매우 많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나는 훌륭하다는 목사님이나 주의 종들에게는 모두 안수기도를 받아보았습니다."라고 이름들을 대면서 "저를 위해서 기도 한번 해 주시겠습니까?"라는 식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결코 기적이 일어나리라고는 믿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혹시나 하는 사람에게는 역시나 기적이 다가오지 않는 것입니다.

혈루병 여인은 "내가 모든 고난을 뚫고서라도 예수님 근처로 가야하겠다. 그리고 나 같이 천한 사람이 그에게 안수를 받는 것은 말도 안되겠지만 야단을 맞는 한이 있더라도 그의 옷자락이라도 만지면 능력이 많으신 분이니까 나을 수 있을거야."하면서 오직 한가지 생각 즉 옷자락만 만져도 나으리라는 병든자의 믿음 때문에 결국 고침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소경 거지 바디매오를 고치신 사건도 이와 같은 것입니다. 거지 바디매오가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했을 때 주님께서는 그를 부르시고는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묻고 그가 "보기를 원합니다." 했을 때에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바디매오 즉 병든 자의 믿음을 보았던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에도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되어 걸어 본적이 없는 자가 바울의 말을 듣고 있을 때에 바울이 주목하여 그 병든자를 보니 그에게 구원받을만한 믿음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큰 소리로 "네 발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뛰어 걸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와같이 병든 자의 믿음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우리들의 하나님은 참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오늘도 저와 여러분을 향해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14:1)고 하십니다.

 

 

56.믿음의 시험     롬4:17~22

예수님께서도 성령에게 이끌리어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하신 후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이와 같이 시시각각으로 삶을 통해 믿음의 시험을 받을 때가 있게 됩니다. 상당수의 그리스도인들이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 능치 못 할 일이 없느니라."(막9:23)와 같은 성경 말씀을 수많이 되 뇌이기도 하지만 막상 믿음의 결단을 해야 할 중요한 시점에 이르게 되면 슬그머니 꽁무니를 감추는 일들이 비일비재합니다. 그리고는 "주여! 믿음이 없음을 용서하소서."고 한탄을 합니다.

한 우화를 소개합니다. 어떤 그리스도인이 험한 곳으로 등산을 갔다 가 길을 잃고 밤새도록 헤매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발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벼랑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캄캄하여 보이지 않지만 짐작으로 수십 미터의 낭떠러지 같았습니다. 가까스로 작은 나뭇가지를 하나를 붙잡고는 매달려 겁에 질린 채 애타게 고함을 쳤습니다. "사람 살려! 거기 위에 누구 없습니까? 날 좀 구해주세요!"

그러자 어떤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내가 여기 있다. 내가 너의 하나님이다." "주님이 거기 계시다니 정말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그래, 구해주기는 하겠지만 그 전에 한가지만 물어보겠다. 너는 나를 믿느냐?" "주님, 제가 확실히 믿습니다. 저는 매 주일 교회에 나가고 새벽기도회도 가끔 나갑니다. 또 성경도 읽고 기도도 합니다. 물론 헌금도 드립니다." 주님께서 다시 물었습니다. "아니, 네가 정말로 날 믿느냐고 내가 물었노라." "제가 당신을 얼마나 믿는지 모르실 겁니다. 저는 주님을 믿습니다." "좋아, 그렇다면 이제 그 나뭇가지에서 손을 떼거라. 내가 구해주겠다." "그렇지만.... 주님...." "정말 날 믿는다면 그 나뭇가지에서 손을 떼거라."

그러자 그는 한참동안 망설이고 조용히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거기 위에 누구 다른 사람 없습니까?" 라고 다시 애타게 고함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날이 훤히 밝아오는데 밑을 보니 자기 발 밑은 바로 평지였습니다.

사드락, 메삭과 아벳느고는 느브갓네살 왕이 세운 금 신상에 절을 하지 않는다고 끌려 나왔습니다. 왕은 "이제라도 너희가 신상 앞에 절하면 좋거니와 너희가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너희를 극렬히 불타는 풀무 불에 던져 넣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왕이여 우리가 이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만일 그럴 것이면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 건져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 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할 줄 아옵소서."(단3:16-18) 결과적으로 그들은 풀무 불 속에서 살아났습니다. 그들은 믿음의 시험 앞에서 단호하고도 불 퇴진의 믿음의 결단을 내렸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57.믿음의 불      계3:14~16

어떤 사람이 성령님의 능력에 사로잡혀 주의 일을 크게 하고 있는 목사님에게 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크게 사용하는데 도대체 왜 나는 사용하지 않을까요?"그 목사님은 잠시 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여기에 두 개의 난로가 있는데 하나는 불이 활활 붙고 있는 난로이고 다른 하나는 불이 없는 냉랭한 난로입니다. 만일 당신이 지금 커피를 끓이려고 주전자를 올려놓으려고 한다면 어느 난로를 사용하겠습니까?" "물론, 불이 있는 난로이지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사용하실 때는 믿음의 불을 가진 뜨거운 사람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은 믿음의 불을 가진 사람에게 나타납니다. 지나치게 감정적이어서 겉모양만 뜨거운 듯 한 사람이 아니라 속사람이 뜨거운 사람을 말합니다. 속사람이 뜨거운 사람이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믿음의 불을 가진 사람입니다.

성경에서는 불은 주로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이나 뜻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나타내신 하나의 수단이었습니다.(신5:24-26)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고(창15:17), 모세를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백성의 지도자로 부르시며(출3:2), 광야에서 불기둥을 통해 그의 임재와 보호하심을 이스라엘에게 보이시고(출13:21-22 ,민14:14), 계명의 중요성을 맹렬한 불로서 그의 택한 백성들에게 명심하게 하신(출19:80 ,신4;33)것이 바로 불 가운데에서였습니다.

또한 갈멜산 정상에서 엘리야가 하나님이 바알 신보다 강한 증거를 요구하였을 때 엘리야의 번제물을 태우는 불로 응답하셨고, 아론의 대제사장 위임식(레9:24)과 솔로몬 왕의 성전 봉헌 때에(대하7:1) 불로서 인간의 행위를 승인하셨습니다. 특히 신약에서도 불은 주님의 현현과 심판의 상징적 의미로 나타납니다.(계1:14,2:18, 히12:29) 사도행전에서는 오순절 날 성령을 부어 주실 때 불의 혀 같은 것이 각 사람 위에 임함으로서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으로 보았습니다. 공관복음에서도 불의 세례라는 표현을 (마3;11,눅3:16)사용했습니다.

믿음의 불을 가진 사람은 그의 속성대로 자신은 물론이요 이웃과 가족과 교회를 뜨겁게 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킵니다. 뜨거워야 주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미지근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사용치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덥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계3:16)

믿음의 불을 가진 사람은 모든 죄악과 더러운 것들을 태워버립니다. 불은 태워버리는 속성이 있기 때문에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세상의 자랑들을 태우는 것입니다. 또한 믿음의 불을 가진 사람은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역할을 합니다. 불은 빛을 내기 때문에 불이 있는 곳엔 어두움이 사라집니다. 이런 분들이 많아지면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이 흘러나와 기적이 일어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마5:14) 믿음의 불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절대 긍정과 절대 순종이 필요합니다. 말씀에 대한 의심과 부정적인 생각은 믿음의 퓨즈에 저항이 되어 믿음의 불을 일으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정욕과 죄악에 물든 맘을 성령의 불길로 태우사 정결케 합소서. 태우소서. 깨끗게 하여 주옵소서. 주여 성령의 은사들을 오늘도 내리어 줍소서. 성령의 뜨거운 불길로서 오늘도 충만케 합소서."(찬178장)

 

 

58. 믿음의 퓨즈        막16:15~18

우리가 쓰고 있는 전기 불을 본다면 발전소로부터 고압선을 통해 우리 가정에 들어올 때 두꺼비 집의 퓨즈를 통과해야만 가정에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전기를 받아들이는 통로가 퓨즈이듯이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이 우리에게 나타나기 위해서는 그 능력을 받아들이는 퓨즈가 필요합니다. 그것을 믿음의 퓨즈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만일 퓨즈가 저항이 크면 클수록 전기를 받아들일 수 없듯이 믿음의 퓨즈도 저항이 크면 클수록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들일 수도 체험할 수도 없습니다. 그 저항이란 것이 신학적인 지식일 수도 있고 이성적이며 과학적인 생각일 수도 있으며 자기만의 고집과 주장일 수도 있습니다.

*케니스 E.헤긴 목사님은 1917년 미국 텍사스에서 병약한 몸으로 태어나 기형적인 심장과 불치의 혈액병으로 온 몸이 완전히 마비되어 여러 번 죽음을 경험하였습니다. 16살 때 환자로 누워 있는 병원에서 담당하는 다섯 명의 의사들이 모두 비관적으로 그를 보고 "넌 죽을 거야, 그 병은 그럴 수밖에 없으니까. 살 수는 없어. 네가 살 수 있는 확률은 백만 분의 일도 안돼."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이 그의 안에서 성령의 치유에 대해 가르쳐 주셨습니다. "죽을 필요는 없어. 지금은 아니야. 10대인 그 나이에 죽을 필요는 없어 너는 살 수 있을 거야. 치유될 수 있다고." 하며 계속해서 말하기를 "모든 것이 그 책 안에 있단다. 그 책을 받아들여라. 성경이 바로 그 책이다. 모든 것이 그 말씀 속에 있단다."고 했습니다.

그는 성경말씀에 사로잡혔으며 하나님께서 그에게 가르침을 주셨고 그도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으며 주님께서는 그를 말씀 가운데로 인도하시고 믿음 안에 거하게 하셨고 그리고 치유해주셨습니다. 그는 16개월 동안 병상에 누워 지내다가 치유함을 받았는데 성령께서 주신 말씀은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한 것은 받은 줄로 믿어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11:24)였습니다. 그는 큰 소리로 "믿습니다. 이 병든 심장이 치료받은 줄로 믿습니다. 이 마비된 것이 치료받은 줄로 믿습니다. 이 불치의 혈액병이 치료받은 줄로 믿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치료해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성령의 기름부음에서, 케니스 E. 헤긴 저)

그는 믿음의 퓨즈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과 그 능력을 받아 들였습니다. 그는 성령의 능력으로 주님의 사역을 크게 감당하였습니다. 수력, 화력 혹은 원자력 발전소는 엄청난 에너지를 생산하지만 그 에너지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아주 작은 퓨즈가 필요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엄청난 능력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아주 작은 믿음의 퓨즈만 있으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17:20) 고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의 퓨즈를 통하여 흘러나오는 성령의 능력이 죽어 가는 사람을 살리며 질병을 고치고 기적을 체험하게 하는 것입니다

 

 

59.믿음의 기도         막11:22~25

믿음의 기도는 능력 있는 결과를 가져오는 열쇠입니다. 기도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가 바로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기도란 구하는 그것을 이미 받은 줄로 믿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 찌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약5;15) 믿음의 원수는 의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해 의심하게 되면 문제의 해결이나 병 고침을 받을 수 없게 합니다.

*한 증기선이 카나다 동부의 대서양쪽인 뉴펀들랜드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해상에는 안개가 너무 많이 끼어 배가 거의 움직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한 승객이 선장을 찾아와서 "나는 토요일 오후까지 퀘벡에 도착하기로 약속을 했는데 그 때까지 배가 도착할 수 있을 까요?" 하고 물었습니다. 선장이 "그건 불가능합니다."라고 말하자 그 승객은 "나는 평생 약속을 한번도 어긴 적이 없습니다. 정말 불가능합니까?" 하고 또 물었습니다. "저도 도와 드리고 싶지만 자연의 현상 앞엔 별 도리가 없군요."하고 선장이 미안하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그 승객은 기다렸다는 듯이 선장에게 "그러면 우리 해도실에 가서 기도합시다."라고 말했습니다. 선장은 어이가 없는 듯 "여보시오, 지금 안개가 얼마나 짙은지 아십니까?"라고 말하자 그 승객은 "나는 지금 짙은 안개를 보는 것이 아니라 너는 내게 부르짖어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지금 듣고 있습니다." 그 승객에게 믿음의 은사가 내렸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믿음의 은사는 말씀으로 오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런데 웬 일입니까? 그 승객이 해도실에서 한참 믿음의 기도를 마치고 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안개는 깨끗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 승객은 바로 기도의 응답으로 유명한 "조지 물러" 목사였습니다. 그는 교회의 집회를 인도하기 위해 퀘벡으로 가던 중이었습니다.*

믿음의 기도는 하나님의 말씀에 동의하고 하나님께서 일하시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은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렘33:2)라고 말씀하십니다. 일은 우리들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일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이 우주와 인생의 주인이십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의 기도는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에 대해 합의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기도는 성취함을 가져옵니다. 다시 말하면 기적을 일으킵니다. 자연현상이나 문제나 질병에 이르기까지 믿음의 기도를 통하여 기적을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대단히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믿음의 기도를 통하여 우리들이 기적을 체험하시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60.믿음의 명령     막11:23

예수님께서도 믿음의 명령을 많이 사용하셨습니다. 그 예로서 죽은 지 나흘이 지나 썩어 냄새나는 나사로를 향해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요11:43)고 명령하시자 나사로가 무덤에서 나왔습니다. 또한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향해 주님께서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마21:19)고 명령 하시자 그 나무가 말라버린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성령을 속였던 아나니아의 아내 삽비라에게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가리라"고 말하는 순간 그녀는 곧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나갔다고(행5:9-10)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은사를 통한 믿음의 명령입니다. 오늘 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믿음의 은사를 통한 믿음의 명령으로 질병과 장애를 고침 받기도 합니다.

"어느 날 우리가 집회하는 강당에서 점심을 먹고 있는데 어떤 부부가 휠체어에 어린 여아를 태우고 들어오는데 우리 부부에게 믿음의 은사가 내렸습니다. 그 여아는 근육무력증에 걸렸는데 다리를 못쓰고 팔도 움직이기 힘들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이 집회에 가면 낫는다는 친구의 말을 듣고 65킬로를 운전해 왔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어서서 걸으라고 명령하자 그 아이는 첫 발자국을 쓰러지지 않고 내디뎠고 두발자국, 세발자국 쓰러지지 않고 강당을 걸었습니다. 그날 오후 예배에서는 그 여아가 강단에 나와서 예수님을 찬양하며 춤을 추었습니다."(찰스 프란시스 헌터부부 공저 「신유의 방법」에서)

탄자니아의 엘림 선교회 소속의 버드 시컬러 선교사는 믿음의 은사를 통한 믿음의 명령에 대한 극적인 사례를 보고 하였습니다. 현지 원주민들이 부활절 예배를 드리고 있는 중에 성난 암사자 한 마리가 갑자기 밀림에서 뛰어나와 한 여자와 어린이, 그리고 가축들을 차례로 죽이고 모인 교인들을 향해 무서운 기세로 달려들었습니다. 이때 원주민 목사님이 교인들을 향해 "두려워 마십시오. 사자 굴에서 다니엘을 구해 주셨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또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하고 말하고 난 후 그 암사자를 향해 "너 사자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저주를 받을 지어다."하고 명령하였습니다.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갑자기 하늘에서 번갯불이 떨어져 그 암사자를 죽여 버렸던 것입니다.

성령님께서는 필요에 따라 우리들에게 믿음의 은사를 주십니다. 우리는 항상 믿음의 은사가 내리는 것에 대해 예민해야 됩니다. 따라서 믿음의 은사가 내렸을 때 그 아름답고 귀중한 순간을 놓치지 말고 담대하게 일어서서 즉각적으로 완전한 확신을 가지고 믿음의 명령으로 행동해야 됩니다. 믿음의 은사가 왔을 때는 인간적인 세계의 제약을 뛰어넘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차원에서 행동해야 된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17:20).

 

 

61.믿음의 은사       요 14:12~13

오늘은 '믿음의 은사'를 살펴보고 자합니다. '믿음의 은사'는 일정한 상황이나 곤경에 처한 그리스도인의 마음속에 파도처럼 흘러 들어오는 초자연적인 확신 감으로서 보통의 믿음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강렬하고 예리한 믿음이 생겨나 큰 기적을 일어나게 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 믿음은 그 자체가 성령의 직접적이고 순간적인 역사로서 하나님의 믿음이 부어지는 것입니다.

그 내용에는 창조와 파괴, 축복과 저주, 제거와 변형 등이 포함됩니다. 또 이 '믿음의 은사'는 항상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때와 장소에 따라 성령께서 기뻐하시는 대로 어떤 특정한 사람을 통하여 나타내며 집중적으로 나타내실 때 그 사람은 '믿음의 은사'를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믿음의 은사'가 사용되어진 결과는 반드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며 사람들로 하여금 경외감(마21:20)을 느끼게 하고 새로운 믿음(요11:45)을 갖게 합니다. 또한 믿음의 은사를 통하여 교회의 덕이 세워진다는 사실입니다. 성령님께서는 자기가 원하시는 대로 각 사람에게 성령의 은사를 나누어주십니다(고전12:11).

어떤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의 은사 말입니까? 성령께서는 저에게 그런 은사를 주시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원하는 사람에게만 은사를 주신다고 알고 있거든요." 대단히 성경적인 답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누구든지 쓰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결코 그 은사를 주시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곧 우리가 원해야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만일 우리들 스스로가 우리의 신앙상태가 아직 '병아리'를 못 면했다는 구실로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어떤 일도 하려 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은사를 마치 선물꾸러미처럼 갖다 안겨 주시지는 않는다는 뜻입니다.

'믿음의 은사'는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사 중에서 가장 흥분되는 은사입니다. 이 은사는 우리를 상상 외의 용사로 만들기 때문에 어떤 이적이 일어났을 때 자신도 그 일을 했다고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라고 합니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까지도 하나님께서 오늘날에도 여전히 초자연적인 일을 행하신다는 것을 믿지 않고 있습니다.

성경의 예를 살펴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 미문 앞에 구걸하고 있는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자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들은 항상 기도하러 성전에 드나들고 있었는데 어떻게 그날은 그 앉은뱅이를 고치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베드로에게 믿음의 은사가 임했기 때문입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걸으라"고 했을 때 베드로는 그 자신에게 '믿음의 은사'가 역사하는 것을 알았고 앉은뱅이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는 그 순간 초자연적인 사람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이 '믿음의 은사'로 내려졌기 때문입니다. 이는 우리 같은 보통사람에게도 '믿음의 은사'를 통해 초자연적인 능력이 일어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구하는 자에게 '믿음의 은사'를 주십니다. 오늘날에도 성령님께서는 우리들을 통해 믿기지 않는 기적을 행하십니다.

 

 

62.체념적 믿음      마 19:16~22

믿음이 있다고는 하지만 행여 쓸모없고 힘없는 믿음이 아닌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의 상태를 스스로 진단할 줄 알아야 합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준 특권이요 동시에 의무이기도 합니다. 믿음의 능력을 바로 알고 우리는 나약하며 낙심하고 체념하지 않는 믿음을 갖도록 해야겠습니다.

성경은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12;3)고 말씀하십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에는 한 청년이 예수님 앞에 당당히 나와서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하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계명을 지키라고 하시자 그는 자신있게 모든 계명을 지켰는데 아직도 무엇이 부족한가를 주님께 되물었습니다. 주님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갔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주님의 요구에 자신을 잃고 풀이 죽어 떠나가는 어리석은 자의 모습을 봅니다. 이것만은 도저히 할 수 없다는 믿음의 소유자입니다. 우리는 이런 믿음을 체념적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런즉 선줄로 생각하는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2)라고 하시며 또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6:9)고 하십니다.

오늘날에도 우리의 주위에서 이런 체념적 믿음을 가진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것만은 결코 포기할 수 없어서 낙심하는 분들입니다. 그것들이 무엇인지는 여기서 밝히지 않겠습니다만 세상을 이기지 못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의 삶을 포기하려는 분들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5:3-4)

또한 주님께서는 친히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짐은 가벼우니라"(마11:28-30)고 하셨습니다. 두려워 마십시오. 낙심하지 마십시오. 성령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친히 도와주십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

 

 

63.성숙한 믿음     렘33:1~3

왜 우리는 현재의 상태 즉 그것이 불치의 질병이든 고통이든 절망의 상황이든 어떠한 문제의 구렁텅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는 성숙한 믿음을 가져야만 할까요? 물론 질병, 고통, 절망, 그리고 문제를 정당화하는 것은 아닙니다. 당연히 물리쳐야 할 대상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뜻과 계획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인간의 어떠한 상황이라 할지라도 주님의 손길 안에 있으며 인생의 죽고 사는 문제에 이르기까지 다 하나님께서 주관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각종의 환경을 통하여 우리들의 육신의 껍질과 세상의 껍질을 깨트리고 벗기기 위해 또는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그러한 상황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믿음을 성숙한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소년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 가는 상황도 기가 막히지만 나중 총리대신이 되는 것까지 하나님께서 모두 이끌어 내시는 것입니다. 또한 애급왕이 이스라엘 백성의 태어나는 남자아이는 다 죽이라고 했음에도 모세는 태어나 3개월을 숨겼다가 그 모친이 그를 나일강의 갈대사이에 버리는데 그 시간과 그 순간에 바로 왕의 딸인 공주가 목욕하러 내려오게 되는 시간까지 모든 상황을 하나님이 주관하시어 지도자 모세를 살렸던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사오십 년 전 백령도에 있는 교회의 부흥회 강사로 초청 받아 일정에 맞추어 일주일에 한번씩 가는 배를 타기 위해 인천항에 갔는데 그날 따라 일기도 좋지 않았지만 사람도 정원을 훨씬 초과했습니다. 선장이 풍랑이 사나워서 승선인원을 줄여야 한다고 하자 사람들이 서로 안 내리려 하는데 할 수 없어 그곳에 있는 경찰관이 아래 위를 훑어보고 "당신 내리시오." 하면서 사람들을 골라내었답니다. 그런데 마침 목사님을 본 경찰관은 내리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그 목사님은 부흥회 때문에 안 된다고 옥신각신하며 사정을 해보았지만 막무가내였습니다. 부흥회를 기다릴 성도들을 생각하니 하나님이 원망스러웠으며 하필이면 왜 나인가? 왜 내게 이런 일이 생기는가? 하면서 인천의 여관방에서 안타깝게 기도하며 밤을 세웠습니다. 다음날 아침 바로 그 배가 백령도를 가다가 파선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본문 말씀에 예레미야는 하필이면 민족과 국가를 위해 할 일이 너무 많을 때 바벨론 왕의 침범으로 시위대 뜰에 갇히게 되어 아마도 그는 원망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때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였고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가 이르노라고 했습니다. 그가 갇힌 것은 모든 일의 주인은 하나님이시지 인간이 아님을 깨닫게 함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일의 시작도 하나님이시요 그 모든 일의 완성도 하나님이시라는 뜻입니다. 이 우주의 창조도 주님께서 친히 창조하시고 완성하셨습니다. 인간의 구원도 하나님께서 친히 일을 행하시고 성취하셨습니다. 인간이 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인간의 방법과 수단으로 무언가 아무리 하려고 해보았자 결국 아무 것도 할 수 없음만 알게 됩니다.

바로 우리 인간은 단지 주님께 의지하고 순종하며 믿으면 누리게 됩니다. 일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며 인간이 아닙니다. 이것이 성숙한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인간이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시127:1

 

 

64.믿음의 대상      행17:24~31

미국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한 시민으로부터 신고가 들어왔는데 예닐곱 살 되어 보이는 어린아이가 대형 트럭을 몰고 바다 쪽으로 가니 큰 사고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해당지역의 순찰 경찰관에게 연락하니 마침 반대편으로 지나가는 그 트럭을 발견했는데 역시 신고대로 어린아이가 운전대를 잡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차번호를 본부에 연락하여 신속 컴퓨터로 조회해 보니 그 트럭은 어린아이의 아버지가 운전하는 트럭인데 그 날은 그의 아버지와 함께 나갔다는 것입니다. 틀림없이 그의 아버지가 시동을 건 채로 잠시 다른 일을 하는 사이에 어린 아이가 잘못 건드려 트럭이 움직이고 있는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주위의 교통경찰이 동원되고 본부의 헬기가 뜨고 하여 그 트럭 근방의 차량들은 멀리 떨어지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경찰이 마이크로 그 아이에게 "얘야, 천천히 속도를 줄여라!" "길 우측 편으로 붙어라!" "자, 그러면 정지하도록 해라!" 하고 지시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어린아이가 매우 운전을 잘 할뿐더러 경찰의 지시에 잘 따랐습니다.

세우고 보니 그 아이는 아버지의 목을 타고 운전대만 그냥 잡고 있었고 실제는 그 아버지가 운전하고 있었습니다. 사연인즉 아버지가 몰고 있는 대형트럭을 늘 운전해 보고 싶다 하여 그 날은 아이를 무등에 태우고 그렇게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이 우주가 우연에 의하거나 스스로 움직인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배후에서 하나님이 주관하셔서 운행하고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주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시고 친히 섭리하고 계십니다. 자연과 계절 그리고 기상의 변화에 이르기까지도 주관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이 세상의 역사도 다 하나님이 주장하시는 것입니다. 나라와 민족의 역사뿐만 아니라 개개인의 역사도 주관하십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일뿐만 아니라 심판자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이 둥근 우주와 세상이 그분 손 안에 있습니다. 사람도 하나님이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 다스리십니다. 인간의 생각이나 이성과 감성 그리고 의지까지 다스리십니다. 인간의 생사화복이 하나님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여호와는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기도 하시며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가난하게도 하시며 부하게도 하시고 낮추기도 하시며 높이기도 하시는도다."(삼상2:6-7) 인간과 자연과 역사의 모든 상황이 하나님의 손 안에 들어 있고 그것을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절대 주권자이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믿음의 대상은 바로 주님이십니다. 이성이나 과학이나 인간이 아닙니다. 종교도 아닙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14;1)

 

 

65. 대 역전의 믿음     창 50:15~21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아무리 어렵고 힘들며 절망과 고통 속에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를 받아 정 반대의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은 최악의 상태가 최선의 상태로 변화되는 것을 믿는 것으로 대 역전의 믿음인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절망과 낙망 속에서 믿음을 잃어버리고 어떻게 해야만 할까요? 하고 방황하고 있기도 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윤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히10:38)

오늘의 본문 말씀에는 야곱의 열 아들들이 소년 요셉을 시기하여 죽이려다가 그를 애굽으로 팔아 버린 후 많은 세월이 흘러 그 요셉이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었습니다. 애굽으로 양식을 구하러 갔다가 이 사실을 알았고 아버지 야곱과 함께 모든 가족이 요셉의 덕택으로 흉년을 견디며 그 곳에 살게 되었으나 아버지 야곱이 죽게 되자 다시금 형제들은 요셉이 자기들에게 앙갚음을 할까 크게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형제들은 죽은 야곱의 유언을 말하며 과거 자기들이 지은 죄를 용서하라고 다시금 간청하고 있습니다. 이때 요셉이 울면서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 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요셉의 위대한 믿음을 보게 됩니다. 그는 노예로 팔려와서 수십 년 동안 종살이와 옥살이를 거치며 죽음에 이르는 고통과 고난 속에 있었지만 조금도 원망과 불평을 하지 않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면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믿었습니다. 그야말로 대역전의 믿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 대역전의 믿음은 오늘날에도 절망과 고통 속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 우왕좌왕하고 있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해답이라고 봅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고통과 고난을 그저 불평하고 원망하면서 절망하고 낙망하여 뒤로 물러서는 믿음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면 고난과 고통 당할 때 주님께 과거와 현재의 상태를 들어 오히려 감사하고 찬송하는 믿음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되면 대역전이 된다는 믿음을 가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죄를 용서로, 저주를 축복으로, 절망을 소망으로, 질병에서 치료를, 그리고 지옥에서 천국으로 대 역전으로 변화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참 좋으신 아버지이십니다.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66.말씀 위에 세워진 믿음     골 1:19~23

어떤 자매님의 말입니다. "저는 몇 년 전에 예수님께 저의 삶을 바쳤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변화도 없습니다. 어떤 감정도 도무지 느낄 수가 없어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저는 희망을 잃었고 주님을 위해 살겠노라고 약속한 것을 지키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그 때부터 저는 방황하기 시작했습니다. 저의 실망은 너무 컸고 결혼 생활까지도 깨어질까 두려웠습니다.

저는 내가 그리스도를 향한 열망이 몹시 심오함을 알고 죄 사함을 위하여 기도하고 나의 삶을 다시 주님께 의탁했습니다. 그래도 아무 것도 느낄 수가 없습니다. 이 상태로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을 것 같아요. " 우리는 우리 주위에서 상당수의 그리스도인들이 동일한 고백을 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들은 정말 예수님을 만났는지 확신을 못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대부분 이런 의심을 품게 되는 이유는 한결같이 "아무런 느낌도 없고 또 느끼지 못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분들은 대부분 감정의 포로가 되었고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신의 감정을 더 믿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항상 천둥번개가 치듯 그들의 가슴을 울려 주든가 혹은 화끈한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 저는 오늘 주님께서 제 마음을 움직이심을 알았습니다. 느낄 수 있었어요" 하고 말하는 분은 며칠 뒤 다시 "내가 구원받았다 함을 이제 확신할 수가 없어요. 하나님의 임재가 느껴지지 않거든요."라고 말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우리의 감정, 느낌, 감각따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을 감정으로 측정하려는 것만큼 위험한 일도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감정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우리 자신을 예수님께 한 번 내어 바치면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것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10:28)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의심과 감정이 우리의 믿음을 약화 시키려 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의 터 위에 굳게 서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감정, 감각, 지력, 느낌 따위로 아는 것에 관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를 위한 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서의 삶은 믿음 안에서의 삶이며 감정 등 그런 것에 구속되지 않는 자유인의 삶을 의미합니다. 그 믿음의 근거는 하나님 말씀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은 감정따위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완성되는 것이며 또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이 보장하고 증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얻고, 믿음으로 고침을 받으며,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고, 믿음으로 보호를 받으며, 믿음 가운데에 살며 걸어 다니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언약의 상속을 받으며, 믿음 가운데 재물을 얻고, 믿음으로 기도하며, 믿음으로 세상을 극복하고, 믿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67.믿음의 표현     빌 4:11~13

우리들이 하루종일 "할렐루야!"를 외치고 다닌다고 해서 그것이 주님을 찬양하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보다 먼저 주님을 찬양한다는 말이 표면적인 행위를 지칭하는 말이 아님을 명심해야 합니다. 찬양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들의 믿음과 신뢰의 궁극적인 표현입니다. 결국 찬양은 우리들과 하나님의 관계를 유지하는 초점이 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어떤 자매님의 간증입니다. 그녀는 열 살이 갓 지난 남자아이와 단둘이 살고 있습니다. 그녀는 큰 수술을 두 번씩이나 받은 후 끊이지 않는 고통을 안고 침대에 누워있습니다. "두 번째 수술을 받은 후 나는 대단히 낙심을 하고 절망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주님께 찬양을 드리고 주님을 힘써 바라보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현재의 나의 상태를 오히려 주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고통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나의 구세주이신 예수님을 더 깊게 알게 되었으며 성령님이 놀랍게 지켜 보호해주었습니다.

나의 친구들 중 하나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벌주려고 고통을 받게 하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힐책하시지 않으시며 오히려 주님의 놀라운 사랑을 내게 가르쳐 주십니다. 이렇게 주님께 찬양 드리는 동안 주님께서는 말씀을 통하여 나의 마음 가운데서 제거해야 될 그리스도인 답지 않은 감정과 생각들을 지적해주셨습니다. 놀라운 사랑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께서 나를 용서해주시고 나의 생애에 남아있는 옛날의 상처의 흔적들을 하나 하나 치료해 주셨습니다.

이제는 어려운 때에도 또 나의 고통까지도 주님께 감사 드리고 찬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방법들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나는 즐거워하고 궁핍을 기뻐하면서 이러한 방법으로 하나님께 나아 갈 때에 그러한 것들로 인해 진실히 주님께 찬양을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얼마 있으면 세 번째 수술을 받으러 병원으로 다시 가야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위해 쓰실 것을 알고 믿으며 주님께 찬양 드립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나를 고쳐주실 수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으로 나에게 행하시는 모든 것은 나를 위해 가장 좋은 것으로 믿으며 주님께 찬양 드립니다." 이 자매님의 말은 정말 순수한 기쁨과 감사로 넘치고 있습니다. 비록 육신의 고통은 받고 있지만 자신의 감정과 속 사람이 치료받고 예수 안에서 하나님과 놀라운 관계를 맺고 있음을 체험한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태산같은 비참한 환경에 싸여 있거나 혹은 작은 일에 고통받거나 그 전환점은 한 가지입니다. 바로 믿음의 표현으로서 주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을 찬양하겠노라고 하나님께 약속드리십시다.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겠노라고 결정하면 하나님께서는 찬양할 수 있는 힘을 반드시 주십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느8:10)

 

 

68. 믿음생활의 필수적 요소      시33:1~5

그리스도인은 지금 현 상태의 상황을 받아들이고 그것으로 하나님께 감사 드리며 찬양하여야 한다는 것이 믿음 생활의 필수적 요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자신들이 겪는 어려움들 하나 하나를 원망과 불평이 아니라 오히려 감사하고 찬양드릴 때 하나님께서는 그가 원하시는 방향으로 우리를 변화 시켜주시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간에 꾸준히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리는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모든 일은 결국 다 하나님께서 주관하시기 때문입니다.

회사에서 중역으로 일하던 한 그리스도인이 주님께 더욱 자신을 맡기고 주님의 일을 하겠다고 굳은 결심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황당하게도 얼마 뒤 그는 그 중역의 지위를 갑자기 물러나게 되었습니다. 다른 직장을 찾아보았지만 요즈음처럼 감원이 많이 일어나는 때에 자리가 없었습니다. 그와 그의 가족은 재정적으로 궁핍하게 되었고 채무도 점점 늘어나게 되어 그의 기도가 응답 받지 못하는 것 같이 보여 그 사람은 후회와 좌절, 불평과 불만이 나날이 더해 갔습니다. 그는 약 일년 동안 실직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범사에 감사하라"는 설교를 들었는데 그는 갑자기 하나님께서 그에게 직업을 실직케 하신 것도 필시 무슨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지금의 실직 상태와 그것으로 인해 그의 가족들이 겪는 고통을 주님께 감사하고 찬양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다음날도 종일토록 그는 하나님께 믿음의 찬양을 드렸습니다. 그러자 실직한 환경 때문에 나타났던 여러 가지 두려움과 후회가 사라지며 마음이 편해지며 참다운 기쁨이 충만해졌습니다.

며칠 뒤 아침 일찍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다른 회사에 중역으로 있는 분이 그에게 같이 일해보지 않겠느냐 고 제의해왔으며 "내일부터 일할 준비를 하시고 내일 아침에 회사로 오십시오." 했습니다. 그가 얻은 새로운 일은 월급도 상당했고 더욱 중요한 것은 직장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있는 좋은 분위기의 직장이었습니다. 할렐루야!

그는 "내가 두려움과 후회, 좌절과 불평의 씨를 품고 있을 동안은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계획하신 바를 중단하고 있었으나 그 환경 그대로를 주님께 감사하고 찬양드릴 때 하나님께서는 나를 주관하시어 주님이 원하시는 곳으로 나를 보내셨습니다."라고 간증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위해 완전하신 계획과 자리를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그를 지켜왔으며 그가 하나님을 믿고 실직한 자신의 상태를 오히려 감사하고 믿음의 찬양을 드릴 때에 또한 올바른 직장과 자리를 주셨습니다. 후회와 좌절, 불평과 불만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계획을 시행하는 데에 방해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시간까지도 완전하게 계획하십니다. 다만 그 정하신 시간이 우리가 생각하는 시간과는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끝)

 

 

69.믿음의 관점 빌 2:5~11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방법이나 뜻을 우리는 완전히 이해할 수 없지만 우리가 어떤 상태에 있다 하더라도 주님이 우리 인생들을 위해 무엇인가를 하고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주님을 찬양하는 것이 바로 찬양의 믿음입니다.

어느 상담 목사님은 그에게 보낸 수백 통의 편지를 분석해 보았습니다. 그 중 약75%는 어려운 역경 가운데서도 주님을 찬양하는 믿음을 통하여 놀라운 응답과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이었고 나머지 25%는 똑같은 환경과 입장에 처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심을 믿지 못하며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없다는 낙심과 좌절의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왜 같은 그리스도인들인데도 이러한 결과가 나타났을 까요?

다음은 그 목사님이 소개한 두 가지 편지를 살펴봅니다. 그들이 처해 있는 상황이 다른 것이 아니라 단지 그들의 믿음의 관점이 달랐고 그 결과도 달라졌습니다.

먼저 어떤 부인의 편지입니다. "톰은 매우 끔찍한 고통을 당했습니다. 우리는 그를 데리고 전국 각지의 병 고치는 예배나 기도회 모임에 참석했지만 조금 나아지는 것 같아 희망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암이 재발하여 몇 달 동안 앓더니 그는 죽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토록 심하실 수 있습니까? 그렇게 젊은 나이로 죽은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인이었고 주님을 위해 봉사하기 원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남아 있는 우리들에게 교훈을 주시기 위한 것이라면 톰에게 그런 고통을 주실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이러한 일들을 놓고 주님께 찬양하라고 하니 도저히 믿어지지 않습니다."

다음은 다른 편지입니다. "챨스는 그리스도를 영접한지 일년도 안되었습니다. 그는 열렬한 주님의 증거 자였습니다. 6개월 뒤 그는 암에 걸려 두 번이나 수술을 받았지만 폐암이 재발했습니다.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통해 기름부음을 받고 병고침의 기도를 받았습니다. 건강진단을 해보니 암의 뿌리가 없어져서 그는 주님께 기뻐하며 찬양했습니다. 그러나 몇 달 뒤 그는 심한 두통을 앓더니 병원에 건강 진단 받으러 갔다가 이틀 뒤 죽었습니다. 뇌 암이었습니다.

그의 집안의 목사가 장례식 집례를 위해 비행기를 타고 가면서 옆에 있는 청년과 죽은 챨스의 이야기를 했는데 착륙하기도 전에 그 청년은 예수께 그의 삶을 맡기게 되었습니다. 그 목사가 비행기를 갈아탔는데 이번엔 젊은 부인과 대화를 나누다가 챨스의 이야기를 해주었더니 이 부인도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장례식은 죽은 챨스의 생애에서 하신 일들로 주님께 찬양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장례식이 끝나자 교회의 길가에서 장례식을 참여하던 두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사실 챨스와 그의 부인은 지난 일년동안 범사에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믿음 생활을 해왔습니다. 그 부인은 목사에게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었다고 말하며 "나는 울 이유가 없습니다. 주님께 찬양을 드립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믿음의 관점의 차이를 봅니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본 것이고 다른 것은 인간의 관점에서 보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우리가 그리스도의 눈을 가질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어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2:5)

 

 

70.찬양의 믿음       합 3:16~18

그리스도인들이 자주 말하면서도 그 말의 진정한 의미를 알지 못할 때가 많은 것이 "주님을 찬양하라."는 말인 것 같습니다. 주님을 찬양하라는 말은 찬송가나 복음성가를 많이 부르라는 것만도 아닙니다. 웹스터 사전에는 "찬양하다"란 단어의 뜻이 "칭찬하다. 찬미하다. 존경하다. 갈채를 보내다. 인정하다."로 나와 있습니다. 정리해보면 찬양한다는 말은 어떤 것을 인정하여 확고히 믿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주님을 찬양한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나 질병 그리고 재앙을 만났다 하더라도 문자 그대로 그러한 곤란이 야기되었음을 인정하고 솔직히 잘못을 인정하며 회개하고 훈련과 연단 시키시는우리의 삶을 위하여 하나님의 계획의 한 단면이라고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찬양은 감사와 기쁨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습니다. 주님께 찬양을 드릴 때 감사함이 없이는 진정으로 주님을 찬양할 수 없습니다. 또한 주님께 감사를 드릴 때 진정으로 기뻐하지 않고는 감사를 드릴 수 없는 것입니다. 올바로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말은 일어나는 모든 일에 하나님이 관계하신다는 것을 믿고 의심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하나님께 찬양 드린다는 의미를 잘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방법이나 뜻을 우리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다만 주님께서는 주님이 우리 인생들을 위해 무엇인가를 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찬양의 기반이 됩니다. 곧 찬양의 믿음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사랑하신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좋으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계획을 마련하고 계시다." 등을 알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은 축복과 기적 혹은 성공이 분명히 다가옵니다. 이것은 온전히 주님의 말씀에 의거한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처해 있는 이 상태에서 주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찬양이란 현재의 상태가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를 위한 주님의 뜻의 한 부분임을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이는데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있는 곳, 지금 있는 이 상태에서 주님의 계심을 찬양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의 생활에 대해 완전한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주위환경이나 현실을 보면 괴로울 것입니다.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구하면 구할수록 괴로움이 누적되기도 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이 나타납니다. 우리가 주님께 그 모든 재앙을 없애 달라고 기도할 뿐만 아니라 잘못을 회개하고 깨닫게 해주신 지금의 그 상태를 주님께 찬양드릴 때에 비로소 축복으로의 전환점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은 믿음의 차원입니다. 곧 찬양의 믿음인 것입니다.

우리가 정직하게 주님을 찬양할 때에 그 결과로 일어나는 것은 명백히 주님의 능력이 우리의 현실 속으로 흘러 들어와 조만간 축복과 응답 그리고 기적이 일어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주시리로다."(시37:4) 우리는 찬양을 통하여 새로운 방향, 새로운 흐름, 그리고 믿음의 깊은 차원과 새로운 권능을 알게 됩니다.

 

 

71.믿음이란 무엇인가?

그리스도인의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기독교는 믿음을 강조하고 또 강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에게 믿음 없음을 한탄하시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종교에서는 기독교처럼 믿음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불교의 석가모니는 "나를 믿으라"고 말하지 않았고 공자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이 세상에 있는 어떤 성인도 "나를 믿으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필자가 조사를 해보니 신약성경에는 믿음이라는 단어가 244번 발견되었습니다.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그 중 150번이나 성경은 우리들에게 그리스도를 믿어야 함을 반복했다고 합니다. 신약성경에는 회개, 세례, 천국 등 중요한 단어가 많이 나타나지만 믿음보다는 훨씬 덜 나타납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큰 구원을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이루신 역사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그 대답은 매우 간단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길은 단 한 가지 곧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믿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영접함으로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지식을 얻듯이 노력하여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값 없이 주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처럼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그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시고 십자가에서 고난받아 죽게 하심으로 우리가 구원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며 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를 말하는 것입니다.

72. 믿음에 대한 성경적 이해

믿음이란 개념은 성경의 중심 사상를 이루고 있습니다. 성경 어느 곳이나 주재되시는 하나님이 강조되어 있고 당연한 사실로서 나타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자발적으로 인간과 관계를 맺으시고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믿음을 인정하십니다. 구약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믿음은 신약에서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대한 완전한 상태의 믿음을 소유할 수 있는 것에 비해 불완전하고 예비적인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 구약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이며 그것은 하나님에게 자기의 실존을 완전히 맡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역사적 행위와 예언자들의 말씀을 통해서 자신의 의지를 계시하셨는데 다시 말하면 천지 우주만물의 창조와 섭리하심, 아브라함과 이스라엘 백성의 구속하심, 각종의 약속과 징표들, 하나님과 그 백성 사이에 맺어진 언약 등이 그대로 이루어지게 하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굳게 신뢰하는 것을 말합니다.

둘째, 신약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은 하나님을 믿는 것과 예수를 믿는 것이 결합되어 있습니다. 복음서의 중요하면서도 흥미있는 특징 중의 하나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셨다는 사실을 언급합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막14:36)란 표현에 잘 나타나 있으며 특히 "주기도문" (마6:9-13)에서 만큼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대해서 더 잘 표현한 곳은 없습니다.

그리고 신약에서의 믿음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주님, 그리고 그리스도로 신앙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인격화된 말씀이요(요1:14) 행동하는 말씀이십니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믿고 영접하고 의지함으로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구원을 얻게 됨을 말합니다. 그래서 주를 믿는 자 들은 영생을 얻는다고 말씀하셨으며(요3:15,16,36, 5:24, 6:40,47 11:25,26) 심판을 받지아니하고(요3:18) 부끄러움을 당치 않는다(롬9:33,10:11,벧전2:6)고 했습니다. 예수를 믿는 자는 곧 하나님을 믿는 자라고 하였고(요12:44) 예수의 부활을 믿으면 구원을 얻으며(롬10:9) 예수를 믿는 자는 어두움에 거하지 아니하며(요12:46) 주 예수를 믿는 자는 능치못 할 일이 없다(막9:23)고 하셨습니다. 또 주의 이름을 믿는 자 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있으며(요1:12) 복음을 믿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롬1:16, 고전1:21)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주의해야 될 사실이 있습니다.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믿음은 사람이 어떤 사실에 대해 믿음을 가지게 되기 까지 믿을 것인지 아닌지 의지의 결단이 요구됩니다. 믿음이라는 용어가 지닌 그런 의미 때문에 종종 오해가 생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믿음이 인간 의지의 결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가르쳤습니다(엡2;8) 선물이라 함은 그것을 받는 사람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값없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을 통한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꼭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73.믿음에 대한 정의

신약 성경의 믿음에 관한 전형적인 장중하나가 히브리서 11장입니다. 히 11장은 믿음에 대한 정의로부터 시작하는데 성경에 믿음이란 단어가 수 백 번 나오지만 "믿음에 대한 정의"가 설명된 곳은 오직 한 번 뿐입니다. 히 11장에서는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필요한 선행조건이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본장에 나타난 믿음은 예수를 믿고 의지하여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구원을 얻는 개념과는 약간 다른 것으로서 독특한 성격을 띕니다. 히11:1에서는 믿음을 두 가지로 정의합니다.

첫째,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정의합니다. 여기서 "실상"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포스타시스"란 말을 "실체화"로 번역하는 것이 이해가 더 빠릅니다. 실체화란 본질을 깨닫게 하는 능력을 말하며 예를 들어 요즘처럼 황금들판이나 아름다운 과일이나 꽃 등을 시각의 능력이 그것들을 실체화 시키지 못하면 볼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이와같이 아름다운 노래소리, 좋은 향기, 맛, 그리고 느낌은 시각,청각, 후각, 미각, 촉각 등 오관의 능력이 없다면 결코 우리 육체가 깨달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것들은 우리의 오관으로는 결코 확인하거나 실체화 시킬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과연 존재하시는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지고 가셨으며 그가 부활하여 지금은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어떻게 오관의 능력으로 실체화 하겠습니까? 단지 믿음만이 모든 영적인 것들을 우리 안에 실체화 시킬 수 있으며 따라서 믿음은 실체화 시키는 기관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믿음을 가리켜 바라는 것들을 실체화 시키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둘째,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정의합니다. 현재 살아 있는 우리는 하나님 나라와 영생과 같은 것을 아직 보지 못했지만 믿음을 통해서 그러한 것들에 대한 증거를 얻었습니다. 이 증거는 성령을 통하여 주어집니다. 성령께서 우리들 마음에 그 증거를 보여주시기에 우리는 그 증거를 소유할 수 있습니다. 비록 그 증거는 장래에 확실히 발생할 것들이지만 우리는 믿음으로 그 증거를 이미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장차 영생을 얻게 되지만 이미 영생을 받은 자가 되었습니다(요5:24).

예수님께서는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한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11:24) 고 말씀하셨습니다. "받은 줄로 믿으라" 는 이미 과거 사실이다. 이처럼 성경은 이미 받은 줄로 믿는 것이 믿음임을 나타내고 있다. 사도바울도 갈2:20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할렐루야!

74.믿음의 기능    롬 10:9~13

우리들의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우주는 실재합니다. 뿐만 아니라 영적인 세계도 실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세계에 대해서 눈이 멀어 있다면 그것은 영적인 것을 실체화 시키는 무엇이 결여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는 모든 영적인 것이 캄캄할 뿐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이 어디 계시느냐? 그리스도가 왜 필요한가? 죄사함이나 죄인의 구속은 물론이요 영생이란 것도 없으며 모든 영적인 것은 다만 환상적일 뿐이라고 말 할 것입니다. 우리들에게는 영적인 세계를 보고 듣고 맛보며 느낄 수 있도록 실체화 시키는 특별한 능력이 필요한데 이 기능이 바로 믿음인 것입니다. 믿음 외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이제 믿음의 기능을 살펴봅니다.

첫째, 믿음은 받아들이는 활동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모든 것을 우리 자신 안에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지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는데 이것을 믿는다는 것은 그 사실을 우리 안으로 받아들인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 넣어서 우리의 옛사람의 문제를 해결하셨는데 이것을 믿는다는 것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어떻게 나에게 들어오는지 우리는 모르지만( 엡2:8 말씀은 인간의 의지의 결단이 아니라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함) 다만 하나님의 말씀과 역사를 믿을 때 그것은 우리 안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둘째, 믿음은 지적인 동의가 아닙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믿음과 지적인 동의는 다릅니다. 믿음은 행동이요 생활이지만 지적인 동의는 생각의 행사 일뿐입니다. 영적인 것들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지적 동의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입니다. 우리에게는 지적동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믿음을 하나님의 말씀과 화합시켜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의심하거나 논박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살아 있는 믿음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자신과 동일시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셋째, 믿음은 고백해야 합니다. 혹시 그동안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여러가지 이론을 들어왔고 언제나 여러분의 머리 속에 담아두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지적인 동의에 불과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러한 동의는 여러분에게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합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믿는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나는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습니다. 나는 그가 십자가에서 나의 죄를 지고 가셨으며 나의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았으며 나에게 영생을 주셨음을 믿습니다. 또한 그가 지금은 성령 안에 계시고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습니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이러한 믿음을 가져야 우리는 하나님과 대면할 수 있고 우리 안에 구원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아-멘.

75. 기독교인의 믿음   요 20:30~31

불교에서 강조하는 점은 석가모니의 가르침과 교리이지 석가모니라는 사람은 아닙니다. 유교도 마찬가지로 공자의 가르침과 교리가 무엇보다 중요한 반면 공자 자신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른 종교도 같은 원리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리나 가르침 위에 세워진 것이 결코 아닙니다. 기독교는 처음부터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세워졌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읽어 본 사람은 교리나 가르침은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을 더욱 더 중요한 초점으로 맞추고 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자신만이 성경의 중심이며 온 기독교의 초점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따라서 기독교인의 믿음이란 첫째,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요20:30-31) 육신으로 오셨고(요일4:2) 하나님 아버지에 의해 보내신바 되었음을(요16:27,17:21) 믿는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은 하나님 안에 계시며 하나님도 예수님 안에 계시고(요14:10-12) 예수께서 부활하신 분이심(요11:25)을 믿는 것을 말합니다. 셋째 인자이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다(요3:14-16) 것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권세를 주신다(요1:12)는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이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하신 후 그 여자가 구원을 받았음을 봅니다. 그 여자가 한 일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그녀는 나사렛 예수가 누구인가를 깨닫고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오늘날도 죄인인 우리들이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회개하고 행위를 고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누구인지를 깨달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 것을 깨달아 믿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그리스도 자신이 우리의 신앙의 기초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친히.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질문했을 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제자들에게 그분 자신을 믿기를 요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한 사람 위에 세워지는데 그것은 어떤 교리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세워지는 것입니다. 참 기독교인과 거짓 기독교인의 차이는 성경의 내용이나 교리를 아는데 있지 않고 예수를 살아 계신 하나님 아들로 믿느냐 않느냐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자신만이 성경의 중심이며 온 기독교의 초점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76.고백하는 믿음의 기적    마 8:5~13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 가셨을 때 로마의 한 백 부장이 나와서 "주여, 내 하인이 중풍 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라고 고쳐줄 것을 간구했습니다. 백 부장은 유대인도 유대교를 믿는 사람도 아니었고 유대에 주둔하고 있는 로마 군인이었습니다. 그가 예수께 간청한 것을 보면 그동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문과 행적을 살펴보고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누가복음 7:2-10절에 보면 그는 비록 로마 사람이기는 하나 유대민족을 사랑하고 유대인을 위해 회당을 지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내가 가서 고쳐주겠다"고 하시고 백부장의 집으로 향했습니다.

그 때 백부장은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내 집에까지 오시는 수고를 하지 마옵소서.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나도 남의 밑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내가 그들에게 가라 하면 가고 그들에게 오라하면 오고 또 내 종에게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하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무리들에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 하였노라" 라고 말씀하신 후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시로 하인이 나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백부장 만한 믿음을 보지 못했다는 것은 유대인들에게는 그와 같이 "고백하는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백부장의 마음 속에 믿음을 가졌다 해도 그의 입술을 통해 고백하고 시인하는 믿음이야말로 진짜 산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내 속에 믿음을 그냥 간직하면 되는 것이지 그것을 꼭 고백해야 되겠는가? 하고 반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속에 가지고 있는 믿음은 가능성을 가진 믿음이긴 하지만 능력과 기적이 나타나는 믿음은 결코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지적인 동의에 불과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러한 동의는 여러분에게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합니다. 믿음은 고백해야 합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 고백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일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있으면 그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하나님 앞에서, 교회 앞에서, 원수 사탄 앞에서 단호히 고백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단호한 백부장의 고백하는 믿음을 보시고 예수님은 크게 기뻐하셨고 그 믿음을 통해서 기적을 베풀었습니다.

77.들리게 하는 큰 믿음   막 7:24~30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고백하는 신앙이 너무나 부족한 것 같습니다. 입술로 고백하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입으로 시인하지 않는 믿음은 마음 속에만 있는 것이지 밖으로 나타난 믿음이 아니기 때문에 그 믿음은 잠자는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고백하는 믿음은 곧 주님께 들리게 하는 믿음입니다. 아무리 성경공부를 많이 하고 오랫동안 교회에 나갔다고 할지라도 입으로 시인하며 고백하지 않으면 구원의 후보생에 불과하며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체험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인 마가복음 7:24-30(참조 마15:21-28)에는 주님께 들리게 하는 믿음으로 응답을 받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곧 수로보니게 여인(가나안 여인)의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시니 이때 더러운 귀신들린 딸을 가진 헬라사람인 수로보니게 여인이 소문을 듣고 그 발아래 엎드려 자기 딸을 고쳐주실 것을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나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않았다"고 하시자 여인이 계속 간청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자녀에게 줄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않다"고 정색하며 말씀하시자 그 여인은 "옳소이다마는 상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고 하였습니다. 그 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믿음이 크도다.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하시매 그대로 귀신이 나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목 "이 말을 하였으니"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그 가슴 속에 있는 믿음을 입으로 고백하여 주님께 들리게 하였기 때문에 응답을 받게 된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칭찬하신 큰 믿음이었습니다.

성경은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16:19) 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땅에서 매고 푸는 것은 바로 우리들의 입술로 고백하여 주님께 들리게 하는 믿음인 것입니다. 이 고백하는 믿음, 주님께 들리게 하는 믿음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응답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하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말은 오히려 하나님의 역사를 묶어 놓고 마귀의 역사를 풀어놓게 하지만 고백하는 믿음, 주님께 들리게 하는 믿음의 말은 곧 하나님의 권능을 풀어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입술로 고백하여 주님께 들리게 하는 믿음이 되도록 속에 있는 믿음을 밖으로 나타내 보이시는 여러분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78.보여주는 믿음    막 2:3~12

성경에는 주님께서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약2:18)고 했습니다. 믿음이 어떤 형상이나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 눈에 보이질 않습니다. 그래서 믿음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주님께로부터 은혜와 축복을 받은 사람마다 한결같이 그들의 믿음을 주님께 보여주었다는 사실을 봅니다. 주님께서는 보여주는 믿음을 보시고 크게 역사하신 것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저와 여러분이 어떠한 문제와 어려움을 가지고 있다 해도 우리들의 믿음을 보여드릴 때 큰 기적이 일어납니다. 어떻게 우리들의 믿음을 보여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의 한 집에 들렸을 때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왔습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문 앞이라도 몸을 움직일 수 없을 만큼 꽉 들어 찼습니다. 들고 온 네사람과 병자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도저히 예수님 앞에 갈 수 없음을 알고 여러 가지 방법을 찾다가 묘안을 짜내어 주님이 계신 곳의 지붕으로 올라가 지붕을 뜯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줄로 달아 내렸습니다. 아마 모두들 놀랐을 것입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파헤친 곳의 보상책임을 각오하고 주님 앞에 가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셨고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전신 마비되어 들것에 들려온 그 중풍병자가 일어나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니 주위의 사람들이 다 놀라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고 했습니다.

그 중풍병자와 네사람들의 믿음은 정말 대단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들은 예수님 앞에 가기만 가면 확실히 고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지만 인산 인해를 이룬 그 장소에 도저히 갈 수 없음을 알고는 정말 포기하고 낙심하고 싶었을 것이며 다음 기회로 미루려고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마음 속에 있는 믿음을 실제 행동함으로써 주님께 보여 드렸습니다. 주님께 보여주는 믿음은 치료의 기적을 체험하였고, 하며, 또한 할 것입니다. 요즈음 많은 사람들이 유명한 목사님이나 주의 종들에게 가서 특별히 안수 받거나 기도만 받으려고 합니다. 물론 그것도 믿음이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분들을 통해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계신 주님께 예배드리고 기도하며 말씀으로 오신 그분께 행동으로 순종함으로써 우리들의 믿음을 뜨겁게 보여줄 때 성령님의 강한 역사로 우리 앞에 있는 어떤 문제라도 응답 받게 됩니다.

79.나아가는 믿음    막5:25~34

오늘은 특별한 믿음을 가졌던 한 여인을 봅니다. 믿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지만 성경에서는 그 믿음을 증명하기 위해 어떻게 믿음을 표현했는 지를 볼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성경적인 방법이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들도 그들을 닮아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체험해야 할 것입니다. 또 믿음을 가졌노라 하면서 믿음의 사람으로 자처도 하지만 과연 우리들이 가진 믿음이 어떠한 믿음인지 한 번 점검하고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집으로 가는 도중에 수많은 사람들이 서로 주님께 가까이 가려고 주님을 에워싸고 밀고 밀리며 난리가 났습니다. 그 때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한 여인도 그 곳에 있었습니다. 그녀는 많은 의원을 찾아갔지만 괴로움만 당하고 재산을 다 허비하였고 아무 효험도 없이 도리어 중한 병으로 깊어만 갔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섞여서 "내가 만일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하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기어코 예수님의 뒤편으로 나아가 그의 옷에 손을 대었습니다. 예수님의 옷을 만지는 순간 즉시로 혈루의 근원이 말라서 그녀는 병이 나은 것을 느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자기에게서 능력이 나간 줄 아시고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무리에게 물었습니다. 제자들은 오히려 주님께 이렇게 사람들이 서로 밀치고 있는데 누가 손을 대었느냐고 물으시나이까 하고 의아해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누가 그랬는 가를 이미 알고 계셨고 이 일을 행한 여인을 둘러보자 그녀가 두려워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강건할지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혈루병 들린 한 여인이 예수님의 신적 권능을 확신한 신령한 믿음의 눈과 주님께 나아가서 그 믿음을 표현한 방법을 주목하게 됩니다. 혈루병은 의식법상 부정하게 여겨진 까닭에(레15장) 그녀는 감히 예수 앞에 나서지 못하고 비록 직접 대면하지 않더라도 주님의 뒤편으로라도 나아가 옷자락만 만져도 낫겠다는 큰 믿음과 그 표현 방법이 주님을 감동시켰습니다. 또 우리는 주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그 다음의 행동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원래 그녀의 간절한 소망은 육신상의 건강만을 회복하는 것이었지만 예수님은 그녀를 기어코 찾으심으로써 인격적 만남을 통하여 육체적 치료는 물론 영혼까지 치료해주는 "구원의 축복"도 나누어주는 장면입니다. 이후에 예수님은 마가복음 6장에서 고향인 나사렛으로 가셨으나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할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인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겼더라"(막6:5-6)고 성경은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통하여 역사하십니다. 우리 모두 주님께 나아가는 믿음을 가집시다.

80.간절한 믿음     막 10:46~52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한 성경상의 인물들을 살펴보면 그들의 신앙적 태도가 족히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믿음의 눈을 열어주고 새로운 도전과 함께 깨달음을 주게 됩니다. 믿음은 간절하고 끈기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이것을 강조하기 위해 한 비유를 사용하셨는데 바로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의 비유"(눅18:1-8) 입니다. 오늘은 유대교의 지도자들처럼 율법지식이 해박한 사람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제자들처럼 예수님과 함께 오랫동안 생활하면서 주님의 메시아적 권능을 직접 본 적도 없는 한 소경 거지 바디매오를 통해 우리의 믿음을 점검하고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많은 무리가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 때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길가에 앉았다가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간다는 말을 듣고 큰소리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고 부르짖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디매오가 외쳐 부른 칭호는 메시아적 칭호임에 분명합니다.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랍비나 선지자 정도로 이해했던 사실을 감안하면 이 소경의 고백은 가히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비견될 만한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의 앞단에 주님의 거듭된 수난 예고를 듣고서도 세속적인 야심으로 지위 다툼에만 열을 올렸던 제자들의 영적 무지에 비하거나 막11장 이후, 어떻게 하던 예수를 죽이려고 온갖 궤계를 다 동원하는 유대교 지도자들의 눈먼 상태에 비한다면 비록 소경이었지만 예수를 메시아로 바로 알아보는 영적 안목은 단지 놀라울 뿐입니다. 더군다나 많은 사람들이 꾸짖어 잠잠하라고 했으나 더욱 소리를 질러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했습니다. 바디매오는 여러 가지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방해와 위협 앞에서도 포기하지 아니하고 더욱 간절한 음성으로 부르짖었고 그 결과 주님께서 오라 하셨을 때 자신의 겉옷 즉 모든 위선, 거짓, 자랑, 겉치레 등을 다 내어버리고 주님께 달려갔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마땅한 자세를 모범적으로 보여주기도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네게 무엇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그는 "보기를 원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좇았다고 기록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에게 무엇 때문에 신앙 생활하느냐고 물었을 경우 대개는 우물쭈물 하는 모습에 비하면 그는 뚜렷하고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간청과 고백을 주님께 했습니다. 그가 보기를 원한 것은 육체적인 눈도 고침을 받는 것이지만 사물을 바로 볼 수 있는 능력이라고 보여집니다. 우리는 주께 많은 것을 구하기보다는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것을 구해야 합니다. 자신의 당면한 문제 중 가장 무엇이 시급한 것인지 알고 기도하는 것이야말로 효과적인 기도요 믿음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이 기사를 통해 소경 바디매오의 "간절한 믿음"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음을 봅니다. 예수님께서 고침과 구원을 주신 것은 바로 바디매오의 "간절한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81.참된 믿음     약 2:17~20

야고보서 제2장을 보면 말에 있어서는 믿는 자의 요소를 갖추었지만 행위에 있어서는 믿는 자의 모습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에게 참된 믿음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그의 삶과 구별된 어떤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삶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것임을 보여줍니다. 참된 믿음이란 역동적으로 그의 삶에 나타나야 합니다. 믿음은 당연히 행함을 통해 그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만일 믿음이 있노라 하면서도 행함이 없다면 그 사람은 믿음이 없거나 아니면 믿음이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입니다. 야고보서는 몇 가지 예화를 듭니다.

첫째, 말뿐인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헐벗은 형제 자매에 대하여 말만 하고 돕지 않는 예화입니다. 이런 믿음은 죽은 나무와 같아서 외부적으로는 살아 있는 것 같아도 실제로는 꽃이나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행함 없는 믿음은 올바른 믿음이 아니며 헛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행함은 믿음이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둘째, 귀신들도 하나님이 한 분이신 줄 믿고 떤다고 했습니다. 귀신들의 예수에 대한 지식은 놀랄만한 것입니다. 그러나 귀신은 결코 구원받지 못합니다. 제자들도 예수가 누구신 줄 확실히 모를 때에 거라사 지방의 군대 귀신들린 자는 예수가 누구신 줄 알고 그가 장차 자신을 심판하실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눅8:26-28) 많은 그리스도인들 조차도 믿음에 대한 지식이나 지적인 동의가 믿음인줄 착각하고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서는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지 알지 못하느냐?"고 말합니다.

셋째, 아브라함의 믿음을 산 믿음으로 보았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참된 믿음이었다는 증거는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린 행함에 있었다고 말합니다. 만일 이삭을 제물로 드리지 않았다면 그의 믿음은 온전한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약2:22) 넷째, 기생 라합의 믿음도 참된 믿음으로 보았습니다. 기생 라합이 여리고 성에 온 두 명의 정탐꾼을 숨겨서 도와 주었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그 성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셨다고 믿었고 그 믿음이 정탐꾼을 도와준 것으로 표현되었기 때문에 여리고 성이 멸망당할 때 구원을 얻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야고보서는 행함 없는 믿음을 영혼이 없는 몸에 비유합니다. 믿음이 있는데 행함이 없다면 더 이상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란 말처럼 아무리 훌륭한 믿음이라도 행함의 열매가 없으면 소용이 없다는 말입니다. 단지 여기서 우리들이 주의해야 할 점은 야고보서가 말하는 행위는 율법의 행위나 도덕적인 선한 행위가 아니라 믿음의 결과로서 당연히 그의 삶 가운데 들어 나야 할 행함을 이야기한다는 사실입니다.

82.겨자씨 믿음     마 17:17~20

겨자씨는 보통 씨앗 중에서 가장 작은 씨앗의 하나라고 합니다. 주님께서는 본문 말씀을 통해서 믿음의 분량이 아무리 적다고 할지라도 마치 겨자씨 한 알만큼의 믿음만 있다면 산을 옮길만한 기적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겨자씨는 심지 않고 그대로 두면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왜 하필이면 수많은 씨앗 중에서 아주 작은 겨자씨를 들어 말씀하셨을까요? 주님은 이 비유를 통해서 믿음의 힘이 얼마나 강한 것인가를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아무리 작은 믿음이라 할지라도 겨자씨처럼 심기만 하면 그 속의 생명으로 인해 새들이 깃드는 큰 나무가 되듯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들이 산 믿음을 소유했다면 비록 겨자씨 만한 것이라 할지라도 물질로 심든지, 몸으로 심든지,노력과 시간으로 심든지, 무엇이든지 하나님 앞에 먼저 심는 "겨자씨 믿음"을 가져야만 합니다.

구약 열왕기 상17:8-16에 보면 사르밧 과부는 믿음의 씨앗을 심고 기적을 체험한 사람입니다. 그녀는 시돈 땅에 사는 과부로서 오직 아들 하나만 믿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3년6개월 동안이나 비가 오지 않고 가뭄이 극심하게 들었고 물과 식량이 없어서 이제는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녀에게는 가루 한 움큼과 기름이 조금 남아 있을 뿐이며 이제 이것을 마지막으로 먹고 아들과 함께 죽으려고 했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지시로 엘리야 선지자는 사르밧 과부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엘리야는 마지막 떡을 굽기 위해 나뭇가지를 줍고 있는 과부에게 "청컨대 그릇에 물을 조금 가져다가 나로 마시게 하라"(왕상17:10)고 하자 그녀는 순종하려고 물을 가지러 갔습니다. 그러자 엘리야는 다시 과부를 불러 세우고 "청컨대 네 손에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 오라"고 말했습니다. 그 때 그녀는 "하나님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밀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뿐이라 이제 내가 나무를 주워 음식을 만들어 먹고 후에는 죽으리라"고 말했습니다. 엘리야가 그녀에게 말하기를 "두려워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을 하나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해 만들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말씀이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는 다 하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녀는 두말하지 않고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사르밧 과부의 믿음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보내셔서 이 과부와 아들을 축복해 주려고 하실 때 먼저 요구한 것은 바로 물 한 그릇과 떡 한 조각이었습니다. 비록 겨자씨와 같이 적은 것이지만 그것은 과부의 마지막 재산이요 생명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의 요구는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 얼마나 무자비한 요구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르밧 과부에게 믿음의 씨앗을 심으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르밧 과부의 겨자씨 믿음이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많은 예를 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친 것이나 벳세다 들녘에서 오병이어를 주님께 드림으로서 5000명을 먹이고도 열두 광주리에 부스러기가 남은 것도 바로 이러한 믿음의 씨앗인 겨자씨 믿음을 통한 기적의 체험인 것입니다.

83.자연적인 믿음     히 11:6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누구나 이세상에 태어 날때 부터 본능적인 믿음을 가집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어린아기가 태어났을 때 젖을 빠는 것은 한 번도 엄마의 젖을 빠는 것을 배운적이나 경험도 없었지만 본능적으로 젖을 빨면 나온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같이 부모와 자식간에도 형제간에도 믿음이 형성됩니다. 또 살아가는 동안 자연현상에 대한 경험과 지식을 통하여 그 믿음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 갑니다. 이러한 믿음을 이성적인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해가 떠오르면 지게 되며 내일 아침에는 새롭게 해가 떠오를 것을 믿고 봄이 지나면 여름이 오고 가을이 오며 겨울이 온다는 것을 믿게됩니다. 또한 씨를 뿌리면 싹이 나고 때가 되면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힌다는 것을 믿게 됩니다. 비행기나 기차 그리고 배나 자동차를 탈 수 있는것도 편지를 부치며 예금을 하고 음식을 먹는 것도 바로 이러한 믿음 때문입니다.

이러한 본능적인 믿음과 이성적인 믿음을 합쳐 자연적인 믿음 혹은 일반적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환경에 대한 믿음과 이성적으로 과학과 문명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믿음이란 우리들이 매일 생활해 나가는데 한 순간도 없어서는 살 수 없는 것입니다. 만일에 우리들이 잠시 동안이라도 믿음을 잃어버린다면 인간의 삶은 엄청난 혼란과 함께 마비되고 말 것입니다. 집에서나 바깥에서 음식을 먹는 것과 마시는 것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의사나 약을 믿지 못한다면, 은행이나 상점 등 경제 문화생활을 하는데 믿음이 없다면, 비행기나 지하철 자동차 등 교통기관을 의심한다면, 또 사람과 사람 사이에 믿음이 없다면 친구도 사제지간도 결혼도 아름다운 관계도 있을 수가 없을 것이며 우리 인간은 도저히 살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이목구비를 갖추고 난 것처럼 이러한 자연적인 믿음은 모든 사람이 갖고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래도 많은 사람들은 나는 믿음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실제를 알고보면 그것은 사실이 아닌 것입니다. 다만 이 일반적인 믿음 즉 자연적인 믿음을 어떤 이들은 잘 사용하여 좋은 삶으로 발전시키고 그렇지 않은 경우는 어두운 삶을 살게 될 뿐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은 큰 딜렘마속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본능적인 믿음을 가지고는 하나님을 믿을 수없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이성적인 믿음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믿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본능적인 믿음이나 이성적인 믿음 즉 자연적인 믿음을 가지고는 하나님의 세계 즉 영적인 세계를 볼 수도 알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새로운 믿음을 가지지 않고는 하나님을 믿을 수도 그의 말씀을 깨달을 수도 없습니다. 여기서부터가 신앙생활의 출발점입니다.

84.영적인 믿음    고전 2:12~14

본능적인 믿음이나 이성적인 믿음으로는 하나님의 세계를 볼 수도 믿을 수도 없습니다. 하늘나라는 우리가 배워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나라는 영에 속했으므로 자연적인 믿음이 아닌 새로운 믿음을 사용치 않고는 도저히 하나님의 세계를 이해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찬양할지로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믿음은 본능적이거나 이성적인 믿음이 결코 아닌 영적인 믿음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영적인 믿음을 가지지 않고는 그를 믿을 수도 없고 깨달을 수도 없습니다. 이 영적인 믿음을 통해서만이 하나님의 세계와 교통할 수 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히11:6).

영적인 믿음은 단순히 부모가 믿었기 때문이나 어릴 적부터 교회에 나갔기 때문에 얻어지는 믿음이 아닙니다. 이 믿음은 육적으로 혈통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얻어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영적인 믿음의 출발은 이렇습니다. 이 믿음을 얻기 위해 우리는 개인적으로 하나님 앞에 나와서 중생의 체험을 해야 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면 우리 속에 성령이 들어와서 영생의 확신을 주시는데 바로 그 순간부터 우리 마음속에 영적인 믿음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믿음은 인간의 지식이나 경험으로 출발하는 것이 아닙니다. "너희가 그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2:8-9) 결국 영적인 믿음은 은혜를 통하여 선물로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 은혜의 믿음은 하나님의 독생자인 예수님을 믿지 않고는 결코 선물로 받을 수없다는 말씀입니다(요3:16).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자연적 믿음인 본능적 믿음과 이성적 믿음만 가지고 살다가 본능과 이성의 세계가 무너져 죽게 되면 영원히 버림받고 맙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본능적인 믿음과 이성적인 믿음은 물론이요 여기다 더 보태어 영적인 믿음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본능과 이성의 세계가 파괴되어도 영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천국으로 갈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를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의 중대한 차이점입니다. 그리스도인 중에도 어떤 사람은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좌로나 우로나 요동하지 않고 믿음을 가지고 나아가는데 다른 사람들은 자꾸 마음속에 의심도하고 요동도하면서 나아가기도 합니다. 말씀에는 믿음이 강한 사람도 있고 약한 사람도 있다고 하셨는데 이것은 그 믿음의 분량에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롬12:3) 그렇다고 믿음의 분량이 운명적으로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의 분량을 더욱 크게 하기 위하여 그 그릇을 큰 것으로 바꿀 수가 있는데 곧 하나님으로부터 시련과 연단을 통하여 믿음은 더욱 성장할 수 있습니다.

85.거듭나게 하는 믿음    요 3:13~18

오늘은 기독교에서 가장 기본적인 진리인 거듭나는(重生) 것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상당히 많은 그리스도인들 조차도 "당신은 거듭났습니까? 또는 중생 했습니까?"라는 질문을 받으면 우물쭈물 하거나 "글쎄, 아직 믿음이 없어서 혹은 믿음이 약해서..." 하는 것을 봅니다. 요한 복음 3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이며 유대관원인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는 예수님과 어떤 문제를 상의하기 위해 밤중에 찾아왔는데 학식도 있었고 나이와 경험도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고 말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그에게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며 거듭남(중생)의 문제를 내 놓으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니고데모는 어리둥절해졌습니다. 그는 "늙은 사람이 어떻게 다시 날 수 있습니까? 늙은 사람이 어떻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겠습니까?"하고 의아해 했습니다. 예수님이 대답하시기를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다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만일 사람이 무슨 재주를 부려 모태에 들어갔다 해도 육은 여전히 육을 낳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중생(거듭남)이란 영으로 나는 것이지 육으로 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거듭남이란 교리가 아닙니다. 성경은 오늘의 본문 말씀(요3:13-18)을 통하여 말씀하시기를 중생이란 다만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믿는 것임을 말합니다.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단지 그를 믿는 것입니다. 독생자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거듭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에게 오늘 가장 중요한 말씀을 드립니다. 거듭남(중생)에 대한 우리들의 관념을 바꾸어야 하겠습니다. 어제 강도였던 사람이 오늘 자수하고 물건을 돌려준다고 해서 그것이 거듭남이 아닙니다. 과거에 나쁜 짓을 했던 사람이 오늘 착한 행실을 한다고 해서 그것이 중생이라고 생각한다면 큰 착각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생각일 뿐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길은 여러분이 단지 주님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습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우리에게 주심은 누구든지 그를 믿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기 위한 것입니다. 거듭나는 것은 다만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합니다. 이것이 중생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할렐루야!

86.질적인 믿음     눅17:5~6

믿음이라는 단어를 가만히 생각해보면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인간편에서의 반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 대해서 언제나 은혜를 베푸시고 계시는데 이 은혜를 받아들이는 수단이나 통로가 없으면 마치 길가에 떨어진 씨와 같은 모양이 되어 발에 밟히거나 새가 주워먹어 버립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통로나 터전이 바로 믿음인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에서도 제자들은 순종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 "믿음을 더하소서" 하면서 믿음의 양을 문제삼고 있음을 봅니다. 그러나 주님은 "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 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고 하면서 많은 양의 믿음 이전에 최소한의 믿음 곧 질적인 측면의 믿음을 강조하셨던 것입니다.

결국 믿음의 본질은 하나님의 은혜와 그 뜻을 받아들이는 겸손과 순종에 있는 것이지 믿음의 크고 작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옛날 제자들처럼 최소한의 믿음을 도외시 한 채 오직 믿음의 양이 부족해서 주의 뜻을 행하지 못하고 기도의 응답을 받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철야기도나 금식기도를 통해서 떼를 써보기도 하며 울어도 보며 애써도 보고 힘써도 보지만 "하나님이 내 기도는 듣지 않는 것이 아닐까? 왜 내 기도는 응답을 안 하실까? 아, 나는 응답을 못 받는구나. 역시 내 믿음이 부족한가보다 "등 이렇게 중얼거리다가 낙심하고 포기하고 맙니다. 그러나 찬송가 343장의 가사 내용대로 "믿으면 하겠네. 주 예수만 믿어서 그 은혜를 힘입고 오직 주께 나가면..."처럼 이미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잘 활용한다면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겨자씨 한 알만한 것과 믿음을 비유한 것은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그만큼 무한히 크고 강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경상이나 현실적으로도 믿음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 거의 다 인간의 능력 밖의 것임을 알게 됩니다. 적은 사건에서부터 아무리 놀랄만한 기적이라 하더라도 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것인데 그것은 단지 겨자씨 만한 질적인 믿음이 동인으로 작용한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우리들이 문제와 환경을 보면 불가능할 것 같지만 하나님에게는 능치 못하심이 없다는 것을 믿는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 위에서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울고불고 기도해놓고 아이구 안 되는구나가 아니라 아무리 어려워도 주님은 하신다는 믿음 위에서 은혜를 구하면 어느 사이에 문제는 해결되어지는 것입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12:2) 이것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뀌어놓습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겐 능치 못 할 일이 없느니라."(막9:23) 우리들의 좁고 유한한 생각으로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제한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이것이 질적인 믿음입니다.

87.함께 있는 믿음      요14:16~18

어느 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시고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고 하셨습니다. 매우 화창한 날씨에 호수는 잔잔하고 조용했으며 가는 도중에 예수님은 선미에서 잠이 드셨습니다. 그때 갑자기 큰 폭풍이 휘몰아치기 시작하여 작은 배는 막 뒤집혀질 지경이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되자 드디어 주님을 깨우며 "주님, 주님, 우리가 죽게 되었습니다!" 하고 부르짖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일어나 바람과 성난 파도를 꾸짖자 폭풍이 그치고 물결이 잔잔해졌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들은 할말을 잊어버렸습니다. 과연 그들의 믿음을 배를 타기 전에 해변에 두고 왔을까요? 아니면 배를 타고 오다가 깊은 호수에 떨어뜨렸을까요? 혹은 사나운 폭풍에 날려 버렸을까요?

그것은 결코 그러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언제나 그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잠시도 떠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곧 그들의 믿음인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조차도 그들의 믿음이 예수님이신 것을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범한 실수는 문제의 풍랑에만 정신이 팔려 그들의 믿음이신 예수님이 선미에 계신 사실을 잊어버렸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오늘 인생의 각종 문제와 질병을 갖고서 노심초사하고 있는 저와 여러분에게 "너희 믿음이 어디에 있느냐?" 고 물으신다면 어떻게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여기서 위대한 진리를 배우게 됩니다. 우리의 시선을 환경과 자신의 문제와 우리들의 약함과 육신의 질병이나 문제에만 묶어 놓을 때 우리들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각종의 풍파가 우리들 인생의 작은 배를 뒤집어 엎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승리를 위한 우리들의 믿음은 손이나 발보다 더 가까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저와 여러분의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며 언제나 함께 하는 믿음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십니다(히 13:8).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아직도 더 큰 믿음을 얻어보려고 몸부림치고 있으나 이 믿음은 사람이 제조할 수 있거나 자기 자신 속에서 스스로 노력하여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선과 도덕적 완전성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열심히 봉사한 대가로 혹은 자선을 베풀었으므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 믿음은 저울로 달아 볼 수도 없고 그것을 그릇에 넣을 수도 없으며 어떤 물건처럼 분석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눈을 들어 예수님을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이 찾아야 할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함께 하시는 믿음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모든 좋은 것과 온전한 선물을 주시는 분은 우리의 믿음의 창시자요 우리의 믿음을 완성시키는 분 곧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은 다른 보혜사 곧 성령으로 오시어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아-멘.

88.성령의 은사로 주시는 믿음      행 3:1~10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영적인 믿음이 있습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성령의 은사로 주시는 믿음이 있습니다.(고전12:9) 이것을 믿음의 은사라고 말합니다. 이 믿음은 일정한 상황이나 곤경에 처한 그리스도인의 마음속에 파도처럼 흘러 들어오는 초자연적인 확신감으로서 보통 믿음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강렬하고 예리한 믿음이 생겨나 큰 기적을 발생하게 합니다. 이 믿음은 그 자체가 성령의 직접적이고 순간적인 역사로서 갑자기 주어지는 하나님의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하나님의 사업을 이루기 위해서 필요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필요한 믿음을 일시적으로 부어주십니다. 이 믿음이 임하면 불가능한 것도 철석같이 믿어지고 이것을 통하여 기적도 체험하고 기적을 행하기도 합니다. 또 이 '믿음의 은사'는 항상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일을 성취시킨 후에는 다시 거두십니다.

그러나 때와 장소에 따라 성령께서 기뻐하시는 대로 어떤 특정한 사람을 통하여 집중적으로 나타내실 때 그 사람은 '믿음의 은사'를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믿음의 은사'가 사용되어진 결과는 반드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며 사람들로 하여금 경외감(마21:20)을 느끼게 하고 새로운 믿음(요11:45)을 갖게 합니다. 또한 이 은사를 통하여 교회의 덕이 세워집니다. 믿음의 은사'가 어떻게 역사하는 가에 대해 성경에서 나타난 예를 살펴봅니다.(행3;1-10) '아름다운 문'이라고 불리는 성전 문 앞에는 날 때부터 앉은뱅이가 된 사람이 구걸하고 있었습니다. 어느날 베드로와 요한이 오후 3시 기도시간에 성전으로 들어가려는 것을 본 앉은뱅이는 그들에게 구걸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함께 그를 주목하며 "우리를 보아라!" 하였습니다. 기도하러 갈 때마다 그를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날은 왜 자기들을 보라고 한 것일까? 아마도 예수님이 계셨을 때도 거기서 구걸을 했을 터이고 주님께서도 고쳐주시지 않으셨는데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고 그냥 지나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날은 두 제자에게 '믿음의 은사'가 내린 것입니다. 그 앉은뱅이가 무엇을 얻을 줄 알고 그들을 바라보는 순간, 베드로는 추호의 의심도 없이 그에게 "은과 금은 내게 없지만 내가 가진 것을 너에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어라!" 하고는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습니다. 그는 곧 발과 발목에 힘을 얻어 벌떡 일어서 걷기 시작하였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믿음의 은사'가 부어지자, 베드로는 믿고 입으로 선포하며 손을 잡아 일으키는 믿음의 행동을 하였으며 초자연적인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는 '믿음의 은사'가 왔을 때 그 아름답고 귀중한 순간을 놓치지 않고 날쌘 호랑이처럼 하나님께서 명하는 일에 달려들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이와 똑같은 일들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일어나고 있으며 그리스도인들을 상상 외의 용사로 만들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먼저 이 '믿음의 은사'가 부어지거나 우리 안에서 샘솟아 날 수 있도록 성령님께 간구해야 하며 그리고 주님께서 명하시는 일을 할 수 있도록 그 귀중한 순간에 대해 항상 예민해야만 하겠습니다

89.긍정적 믿음     요 6:5~13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각종 병을 치료받기 위해 벳세다 언덕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빌립에게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게 할 수 있겠는가?" 하고 물었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함이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러나 빌립은 즉각적으로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하고 대답했습니다. 왜 하필이면 여러 제자 중 빌립에게 질문했을까?

성경 연구가들에 의하면 빌립이 음식을 담당했거나 그가 가까운 동네인 벳세다 출신이기 때문이거나 혹은 빌립의 믿음이 연약함을 아시고 그의 신앙 연단을 위해서라고 합니다. 빌립의 답변이 부정적인 것을 보면 그는 대단히 계산적이고 합리적인 사람이어서 비록 예수님의 기적을 여러 번 보았지만 주도면밀한 그로서는 아직도 신적인 능력을 지닌 메시야로서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부족했다고 보여집니다. 이때 안드레는 재빨리 주님에게 "여기 한 아이가 가진 보리떡 5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긴 있습니다만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는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안드레가 빌립에 비해 매우 적극적이며 긍정적인 믿음을 가진 것을 보게 됩니다. 수많은 사람을 먹여야 하는 거의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는 매우 재빠르게 보잘 것 없는 도시락이라도 발견해내어 예수님 앞으로 가져와 주님의 어떤 행동을 기대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앉게 하고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 나누어 주시고 고기도 그러하니 저들이 배불리 먹고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으며 사람의 숫자가 오천명이라고 했습니다. 이른바 이것이 오병이어의 기적입니다.

여기서 안드레가 비록 빌립보다는 비합리적이며 덜 계산적이었지만 결코 절망적이지 않은 그의 믿음과 행동은 결국 예수님으로 하여금 "오병이어의 기적" 이라는 큰 표적을 낳게하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빌립은 최소한의 식사에 해당하는 금액을 계산함으로서 불가능성의 근거를 주님께 제시했습니다. 사실 안드레도 한 아이의 도시락을 제시했지만 그 역시 불가능한 사실을 전제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비록 형편없고 빈약한 것이었지만 주님 앞에 믿음의 씨앗으로 내어 놓자 불가능의 정황가운데서 예수님은 가능성의 근거로 삼으신 것입니다. 오늘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와 같은 긍정적인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불가능 하지만 하나님은 가능하시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가진 문제가 아무리 어렵고 절망적이며 불가능하다 해도 하나님에게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성경은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9:23)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90.적극적인 믿음     눅 18:1~8

사람이 호흡을 해야 살수 있듯이 영적인 호흡은 기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영적인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은 기도에 힘써야 하고 기도하지 않는 것은 죄라고 까지 단정합니다.(삼상12:23) 다시 말하면 기도의 적극성과 능동성은 곧 적극적 믿음이 있느냐 혹은 없느냐를 판별하는 중요한 기준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약1:6-7) 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의 적극성과 간절성 그리고 인내성을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물론이요 실천적 믿음으로 보시고 쌍둥이 비유를 제시하였는데 그것은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눅18:1-8)와 강청하는 친구의 비유(눅11:5-8)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대로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재판관이 있는데 억울한 일을 당한 한 과부가 자주 그에게 가서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주소서" 하고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얼마동안 과부의 청을 계속 무시하다가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어야겠다 생각하며 만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면서 원한을 풀어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어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시지 않겠느냐"고 하면서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고 사람들에게 반문하셨습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믿음이란 절대로 절망하지 않고 끝까지 인내하며 기도하는 실천적인 믿음을 가르칩니다. 또한 말세가 다가옴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낙망하며 허탄한 곳에 빠지고 세상 풍조에 휩쓸려 신령한 믿음의 길을 포기하리라는 예고도 담겨져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해도 응답 받지 못하는 이유는 믿음으로 구하지 아니하고 정욕으로 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참 좋으신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들에게 좋은 것, 유익한 것, 선한 것을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영안이 어두워 오히려 해로운 것을 구하거나 혹은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해서 의심하며 불평하고 원망하며 절망하거나 포기해 버립니다.

기도할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친히 담당해주시는 하나님께 대한 끈질기며 적극적인 믿음입니다. 성경에서 기적을 체험한 많은 사람들은 모두 다 결코 낙망치 않고 끈질긴 믿음의 소유자였으며 의심하지 않고 부르짖고 부르짖는 적극적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적극성이 없는 믿음은 믿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91.4가지 단계의 믿음       욜 2:28-32 마 17:19-20

오늘은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의 활동에 대해 살펴보기로 합니다. 우리들이 믿음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살펴가고 있는 동안 믿음의 크고 작음과 강약 등으로 믿음의 종류를 말할 수 있겠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믿음의 단계에서 활동하고 있는가를 정리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들이 활동하는 믿음의 단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세계적인 교회성장학자인 피터 와그너 교수(풀러 신학교)의 "성령의 능력과 교회성장"에서 구분한 것을 간략히 발췌하여 여러분의 이해를 돕고자 합니다.

첫 번째 단계는 구원의 믿음(saving faith)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간수에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했습니다. 이 믿음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는 문인 것입니다. 그것은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든지 경험했을 믿음의 수준입니다. 구원의 믿음에는 구원을 받거나 받지 못했거나 한 것 뿐이지 정도의 차이가 없습니다.

두 번째 단계는 성화의 믿음(sanctifying-faith)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신앙경험이 쌓여감에 따라 우리들의 생활은 더욱 더 많은 성령의 열매를 들어냅니다. 성령의 열매의 특징은 갈5:22-23에서 볼 수 있는데 그중의 하나는 믿음 (충성)입니다. 구원의 믿음에는 정도의 차이가 없으나 성화의 믿음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성화의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단계의 믿음을 통해 얻어지는 능력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경건한 삶을 사는 능력과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상당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아직 이 단계에서의 믿음만 알고 있습니다.

세 번째 단계는 적극적 사고의 믿음(possibility-thingking faith)입니다. 이것은 담대한 목표설정을 위한 믿음입니다. 그것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인 히 11장1절의 믿음입니다.그것은 노아가 마른 땅에다 방주를 지었을 때 가졌던 것과 같은 믿음인데 유감스럽게도 모든 그리스도인이 이런 종류의 믿음을 시행한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행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어느 정도의 능력을 허락하셔서 믿음이 없이는 할 수 없는 일들을 하고 있음을 봅니다.

네 번째 단계는 사차원의 믿음(fourth-dimension faith)입니다. 사차원의 믿음은 예수님께서 마 17:19-20 언급하신 믿음입니다. 물론 이것은 구원의 믿음이나 성화의 믿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산을 옮길만한 믿음의 단계 곧 초자연적인 기적을 위한 믿음을 언급하고 계셨습니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기만 했어도 능히 그 일을 해낼 수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실제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그들을 통하여 역사할 것을 기대하고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단계의 믿음에 대해서는 오늘날에도 상당한 그리스도인들까지도 무시하거나 반대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92.믿음의 시련       벧전 1:5~9

우리들이 그리스도인이 된 후 시간과 세월만 흘러가면 저절로 믿음이 성장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어떻게 하면 믿음이 성장할 수 있을까요? 우리의 믿음이 성장되는 방법 중의 하나가 쉴새 없이 시련과 연단을 받아야 합니다. 믿음의 시련이란 믿음 때문에 받아야 할 시련들을 말합니다. 신구약을 통틀어 믿음의 시련이라는 단어는 3 번 사용되었습니다. 구약의 욥기서에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23:10) 고 했으며 야고보서에 "내 형제들아 너희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약1:2-3)고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 말씀인 베드로전서에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함이라"(벧전1:7)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벧전1:9) 확실하게 보장받고 있기 때문에 여러가지 시험으로 인해 고통을 당하기도 하지만 결코 낙망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이러한 시련을 통해 성숙한 믿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장차 영광과 존귀를 얻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오늘 본문 말씀에서 믿음의 시련과 금을 비교한 것은 의미가 큽니다. 참된 믿음이란 변하거나 소멸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며 금이 나오기 위해서는 불로 연단 받듯이 믿음도 여러가지 시련을 통해 연단받는다는 사실입니다. 금이 불에 세련되어 순수해지듯이 그리스도인 역시 시련을 통해 참되고 순수한 믿음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참된 신앙이 온전히 밝혀지는 날 곧 그리스도 예수의 재림의 날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시련에 대한 올바른 인식은 하나님은 나에게 최선의 것 이외에는 주시지 않는다는 인식하에 내가 당하는 믿음의 시련들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강한가 혹은 약한가 얼마나 깊은 믿음인가 혹은 얕은 믿음인가를 판단하는 기준은 바로 인내입니다. 이 인내는 믿음의 시련을 통하여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축복을 주실 때에는 언제나 믿음의 토대 위에 세워 주십니다. 이 말은 믿음을 보시고 상급을 주신다는 말입니다. 이 믿음을 보시는 척도가 바로 인내인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에 시험이 다가와도 환경의 풍파가 다가와도 끄덕도 하지 않는 믿음이 있을 때에는 하나님께서 그 믿음 만큼 저와 여러분에게 축복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주의 백성들에게 은혜를 주실 때에는 반드시 시련을 먼저 보내시고 그 믿음의 척도 위에 축복을 하십니다. 이와같이 믿음의 시련은 우리의 믿음이 크게 성장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며 방법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93.믿음의 성장     롬 10:12~17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같은 믿음을 주시지만 그 믿음을 우리들의 분량에 따라서 받아들이기 때문에 그 분량이 각각 다른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분량은 차이가 있지만 믿음을 성장시키는 것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도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우리들이 사용만 한다면 인간이 상상할 수도 없는 일들을 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을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영적으로 영양분이 충분한 음식을 섭취해야 합니다. 이 믿음의 음식이 바로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롬10;17)

그리스도인이 되면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사모하며 각종 예배를 통해 말씀을 듣고 성경말씀을 규칙적으로 읽어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위대한 믿음을 가졌다할지라도 이 믿음이 하나님의 뜻 위에 얹어져야만 됩니다. 하나님의 뜻 위에 얹어지지 않는 믿음은 아무리 우리가 "믿습니다!" 하고 펄떡 펄떡 뛴다 할지라도 믿음의 합당한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시시때때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깨닫고 그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좋으신 아버지라면 그 자녀들의 모든 생활에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지 않을 리 만무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우리들에게 나타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특수한 계시는 하나님의 말씀 바로 성경입니다. 성경은 인류의 근원적인 문제로부터 시작하여 우리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사는 동안 겪는 각종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우리 생활에서의 작은 문제에 이르기까지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말씀은 우리 개개인의 개별적인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말씀이며 또한 하나님의 계시이기 때문입니다. 성경 외에는 이와 같은 문제에 대한 해답을 줄 책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활성화시키고 성장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에는 수많은 말씀들이 있지만 말씀을 계속 읽어 나가는 동안 이러한 말씀들이 갑자기 변하여 오늘 이 시간 현재 나의 마음속에 불꽃 튀기는 말씀으로 변화될 때 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나에게 직접적으로 개인적으로 주어질 때 그 순간 나의 마음속에 불빛이 비춰오고 영적인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님께서 마음속에 "이것은 하나님께서 너에게 지금 말씀하시는 것이다"라고 감동시키십니다. 그리고 이 말씀대로 믿고 나아가면 반드시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결국 성경을 끊임없이 읽는 사람들만이 이러한 은혜를 받을 수 있으며 그들의 믿음은 더욱 더 성장해 나가는 것입니다.

94. 진정한 믿음의 요구     막 11:22~24

성경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고 말씀했습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나는 자신에 대한 어떠한 소망도 철저히 다 버렸다. 나는 십자가에 못 박혔다. 나의 모든 선과 악은 다 끝났다. 이제는 그리스도가 모든 것일 뿐이다."라는 뜻으로 고백한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그리스도인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이것은 믿음의 문제입니다. 믿음은 언제나 이루어진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을 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어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11:24) 이 구절에서 첫 번째 문장을 주목해보십시오. "받은 줄로 믿어라"는 단순 과거형입니다. 성경은 오직 이러한 믿음을 제시합니다. 중요한 단어는 헬라어 "에라베터"인데 "이미 받은"이란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받은 줄로 믿는 것이 진정한 믿음이지 받을 것을 바라는 것은 믿음이 아니란 뜻입니다. 기도는 현재에 구하고 있지만 이미 받은 줄로 믿게 되면 두 번째 문장(미래형) 대로 그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은 바라는 것은 실상이요 보지 못 하는 것들의 증거"(히11;1)라는 말씀과 일맥상통합니다. 믿음이 주님을 신뢰하는 것이라면 기도는 이 믿음을 이미 이루어진 것으로 구체적인 표현을 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실제적으로 주님의 은혜를 받아 병을 고쳤다든지 문제해결을 받은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이와 같은 믿음을 가진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병을 고쳐주셨거나 기도에 응답하셨습니까?" 하고 질문을 해보면 "예, 하나님은 나의 병을 이미 고쳐주셨습니다. 병은 사라졌습니다."라고 이미 받은 것으로 대답을 하는 믿음의 사람들은 여전히 몸의 상태가 좋지 않고 열도 있으며 치료받은 것같이 보이지 않지만 곧 회복하게 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예, 곧 고치실 것입니다. 혹은 나는 치료될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새롭게 기도해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한갓 희망일 뿐입니다. 다시 말하면 고쳐지리라는 희망과 이미 고쳐졌다는 믿음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받았다고 믿는 사람은 받을 것입니다. "나중에 치료될 것이다"가 아니라 "이미 치
료한 것을 믿었다"고 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믿음이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구원과 승리의 생활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원리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실 것을 바라는 것이나 우리로 하여금 승리케 할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주여, 이미 구원하신 것과 이미 승리케 하셨음"을 감사 드리며 이미 이루어진 사실로 믿을 때 우리들이 구원을 받을 것이며 승리를 체험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의 기도는 이미 이루어진 과거형으로 기도하는 믿음을 가져야할 것입니다.

95. 받은 줄로 믿는 믿음      벧전 2:21~25

월츠 버튼 목사는 콩고 선교를 한 유명한 선교사입니다. 너무나 일을 많이 한 탓인지 그는 간암에 걸려 고향으로 돌아와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비록 목사였지만 사형선고를 받은 그는 병으로 인해 절망의 나날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아내를 시켜 침대를 창가 양지쪽으로 옮겨 놓도록 하고 따뜻한 햇빛을 받으면서 성경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는 베드로전서 2장을 읽게 되었고 24절 말씀에 도달했습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을 묵상하는 동안 이 말씀이 너무나 감사하여 목사님의 눈에서는 눈물이 한없이 흘러내렸습니다.

잠시 멈추었다가 계속되는 말씀을 읽어 나갔습니다.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이 말씀을 보는 순간 성령님의 음성이 그의 마음속에 들려왔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내가 질병의 고통을 대신 짊어지고 그 무서운 형벌을 대신 감당하기 위해 무자비한 로마 병정들에게 등이 찢어지도록 채찍을 맞았다. 내가 너를 대신해서 질병의 형벌을 다 청산하였다. 너는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하는 말을 믿느냐?" 그 순간 그는 즉시로 이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감사 드리며 입으로 시인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렇다.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월츠 버튼은 나았다!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나는 나았다!"하고 수천 번 반복하여 시인하였습니다.

그는 그의 영혼 깊숙한 곳에서부터 자신의 병이 고침을 받았다는 확신으로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그 말씀은 살아서 역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즉시 아내를 불러 "이 말씀을 보시오.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나음을 입었다고 기록되어 있지 않소. 이 말씀을 통하여 성령께서는 내게 말씀하였소. 나는 이제 간암 환자가 아니오. 하나님께서 고쳐주신 정상인이오. 정상인이 누워서 있을 수만 없지 않소. 이제 나는 새로운 힘을 입어 일어나 활동해야겠소" 하고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주님의 일을 다시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의심 없이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전보다 더 열심히 활동하며 건강을 찾았습니다. 이 간증은 이미 잘 알려진 세계적으로 유명한 간증입니다

오늘 다시 한번 여러분의 마음속에 새겨 두십시오. "믿음은 언제나 이루어진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이미 받은 줄로 믿는 믿음이 관건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계속 읽어 나가는 동안 이러한 말씀들이 갑자기 변하여 나의 마음속에 불꽃 튀기는 말씀으로 변화될 때 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말씀이 나에게 직접적으로 개인적으로 주어질 때 그 순간 나의 마음속에 불빛이 비춰오고 기적적인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마음속에 "이것은 하나님께서 너에게 지금 말씀하시는 것이다"라고 감동시키십니다. 그리고 이 말씀대로 믿고 나아가면
반드시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96.믿음의 행동      요 9:6~11

언제 우리들에게 기도의 응답이 주어질까요? 어느 때에 문제가 해결되며 치료의 능력이 나타날까요? 오늘의 본문 말씀을 살펴봅니다. 한 소경이 예수님께 와서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눈을 씻으라 하시니 소경이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이 소경은 언제 기적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까? 예수님이 침을 뱉으실 때일까요? 혹은 진흙을 이기실 때였을까요? 아니면 눈을 씻으라고 할 때였을까요?

소경이 기적을 체험한 것은 그 사람이 바로 믿음으로 행동할 때였습니다. 그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명령을 따랐을 때 그의 눈이 밝아졌습니다. 문제의 해결은 곧 믿음의 행동을 통해서였습니다. 아마도 그는 심한 불평을 늘어놓을 수도 있었습니다. 소경이기 때문에 실로암 못까지는 너무 멀다든지 그 못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든지 혹은 그 못은 썩고 냄새나는 물입니다 라고 반문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떤 핑계도 대지 않고 믿음으로 순종했습니다.

구약 열왕기하 5:1-15 절의 말씀을 보면 문둥병 걸린 나아만 장군도 엘리사가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씻으라고 했을 때 처음에는 화를 내고 돌아가려 했습니다. 강물에 목욕하는 일이라면 요단강의 흙탕물보다 훨씬 깨끗한 강물이 자기 나라에도 많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큰 나라의 군대 장관인 자기를 얕보고 권위를 떨어뜨리는 것으로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지혜로운 부하들은 그에게 만일 엘리사가 이보다 더 어려운 일을 하라고 했더라도 당연히 하였을 것이 아니냐면서 엘리사의 말을 따르도록 충고하였습니다. 그는 중대한 결심을 해야 했습니다. 결국 그는 부하의 말을 듣고서 자신의 신분을 생각지 않고 옷을 입은 채로 요단 강물에 한 번이 아니라 일곱 번을 들어갔습니다. 그는 뒤늦게나마 믿음의 행동을 통해서 결국 문둥병을 고침 받게 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수시로 이와 같은 문제와 상황에 부딪히게 됩니다. 믿음은 행동으로 옮길 때 문제가 해결됩니다. 믿음은 마음속으로만 생각하거나 두고 보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에는 중립이 없습니다. 믿음은 항상 위로나 아래로 혹은 옆으로 움직이는 것이지 그 자리에 서있는 법이 없습니다. 만일 누구든지 믿음을 행동에 옮기지 않고 이 가르침을 실천하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아직 아무 것도 이룬 것이 없습니다. 만일 믿음의 행동을 하였다면 그 사람은 이미 모든 것을 이룬 것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매일 읽는 이유도 그 읽는 자체가 행동 중의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97.믿음이 없으면      마 14:25~33

성경에 보면 믿음이 약한 제자들의 모습을 종종 보게 됩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을 위시하여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믿음이 없는 자여 혹은 믿음이 적은 자여 라고 책망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행동이 믿음이 없거나 적은 행동인지를 살펴보아 우리들도 스스로가 믿음이 없거나 약한 그리스도인이 아닌지 반성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믿음이 없으면 의심이 생깁니다. 예수님께서는 의심하는 것을 가장 섭섭해 하셨습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 중에서 물위로 걸어가던 베드로가 갑자기 물에 빠지자 손을 내밀어 붙잡으시며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고 하셨습니다. 부활하신 후 제자들 앞에 나타나시자 그들이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눅24:38)고 했습니다. 결국 의심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축복과 응답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약1:6-8)

둘째, 믿음이 없으면 두려워하고 무서워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풍랑을 만났을 때 예수님이 함께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무서워하고 두려워했습니다.(마8:26) 주님은 바람과 파도를 잠잠케 하시는 능력의 주님이심을 신뢰하지 못한 증거입니다. 죄와 사탄이 주는 것은 두려움이지만 믿음이 주는 것은 평안과 사랑입니다. 우리들이 문제를 만났을 때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는 것은 바로 믿음이 없거나 약하다는 증거입니다.

셋째, 믿음이 없으면 염려하고 근심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14:1) 믿음이 없으면 일을 앞에 놓고 염려하게 됩니다. 구원과 상급에 대한 확신은 모든 염려와 근심을 이겨내는 것입니다. 또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 이니리라."(벧전5:7)고 말씀하십니다.

넷째, 믿음이 없으면 감사와 기쁨이 없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를 찾는 자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 결국 감사와 기쁨은 믿음의 표현인 것입니다. 이외에도 믿음이 없으면 교만하고 거룩치 않으며 쾌락을 사랑하고 선을 행치 않는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98.만남의 신비와 당위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열납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니라."(사무엘 상18 : 1)
시골의 호숫가에 홀로 뛰놀던 소년 하나가 호수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었다. 그는 런던에서 온 귀공자였으며, 수영을 할 줄 몰랐다. 마침 근처를 지나던 시골 소년이 그를 구해 주었다.
> 십년 후 그는 시골 소년을 찾아갔다. 생명의 은인인 시골 소년의 근황을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때, 시골 소년이 의사가 되고 싶어한다는 것과 가정 형편상 의과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그는 시골 친구의 사정을 아버지에게 전했고, 그의 부친은 아들의 친구가 의학에 전념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를 맡아주었다. 귀공자의 이름은 윈스턴 처칠이었다. 그리고, 그 시골 소년은 후에 페니실린을 발명한 불세출의 의학자 알렉산더 플레밍 박사가 된다.
1940년 5월 영국이 독일군의 침공을 받았을 때, 전쟁터를 순시하던 처칠 수상은 폐렴으로 눕게 된다. 당시만 해도 폐렴이라면 목숨을 건지기 어려운 불치의 병이었다. 이때 또 한 번 처칠의 생명을 살려낸 것이 바로 플레밍 박사의 페니실린이었다. 두 사람의 우연한 만남이 서로의 생을 크게 변화시켰다.
사람은 사회 생활을 하면서 타인과 만남 속에서 이해의 충돌로 갈등을 빚기도 하고 서로 처진 어깨를 두드리며 도울 줄도 안다. 크리스찬은 서로가 처한 상황 속에서 서로 도와야 하고 귀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한다. 만남이란 혼자 살 수 없는 인간에게 준 하나님의 섭리다. 만남의 신비성과 당위성을 생각해본다면 만남에 임할 때 우리들의 태도는 더 신중해져야 한다. 만남이란 어찌 보면 우리의 신앙을 시험하는 객관식 문제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겨례신문,

 

 

99.쥬피트 신전은 기독교 박해의 상징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계 31 : 4)
지금부터 꼭 100년 전인 1898년, 독일 황제 빌헬름 2세(Wihelm Ⅱ)는 역사적인 중동순방에 올랐다. 제일 먼저 예루살렘을 방문한 황제는 다음 목적지 시리아의 다마스쿠스로 가던 황제는 의외의 곳에서 길을 멈추었다. 레바논의 벡카 평야에 있는 바알벡이었다.
바알벡은 서기전 2000년대부터 벡카 평야에 살던 원주민들이 그들의 주신인 바알신을 섬기던 종교적 중심지였으나, 오늘날 이곳에 남아있는 유적들은 A.D. 1∼3세기 기독교가 심하게 박해받던 로마제국시대에 건축된 것들로서 로마제국 건축 문화의 정수를 보여준다. 특히 쥬피터 신전은 로마제국에서 가장 큰 신전이었다. 이들 신전이 상징하는 로마제국의 종교와 비교하면 그 당시 기독교는 무력하고 보 잘 것 없는 존재였다. 그러나 로마제국의 영광 과 웅장하던 신전들은 거대한 자취만을 남긴 채 폐허가 되었지만 핍박받고 무력해 보이던 기독교는 전 세계에 전파되었고, 생명력 있는 종교로서 세계를 변혁시키고 사람들을 새롭게 변화시키고 있다.
기독교는 원시교회 때부터 박해를 통해 성장해왔다. 기독교는 그 안의 생명력에 의해서 오히려 다른 종족, 국가에 의해 정치적, 종교적인 이유로 탄압을 받아왔다. 바알벡 신전들은 그러한 박해의 상징이다. 그러나 그 안에는 생명력이 없기 때문에 지금은 상징으로서만 존재한다. 그러나 생명력 있는 기독교는 오히려 지금 사회를 변화시키고 있다. /조선일보

 

 

100.인간의 생명은 하나님께

자신의 신변안전에 남달리 신경을 쓴 인물이 있다. 과태말라 대통령 알폰소라는 사람이다. 그는 대통령 관저를 중심으로 반경 2KM안에 있는 건물은 무조건 관저 쪽으로 난 창문을 폐쇄시켜 버린 사람이다. 이런 인물이니 자신의 신변 안전을 위한 극성이 오죽했겠는가? 그가 취한 몇 가지 조처를 살펴보자. 친위대를 제외하곤 어느 누구도 무기를 휴대한 채 자기 관저에 출입하는 것을 급했다. 주치의는 하루 세 번씩 그를 검진했고 어떤 물건이라도 친위대의 엄격한 사전 검사 없이는 절대로 관저 안으로 가지고 들어갈 수 없었다. 음식물은 검사관이 시식한 다음이라야 그의 식탁에 오를 수 있었다. 대단한 극성이 아니겠는가? 이상과 같은 조처만 가지고는 자신의 신변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여 당시 150만불이라는 거금을 지불하고 대통령 전용의 방탄차를 구입했다. 이 차는 기관포로 습격을 당해도 끄떡없도록 설계된 것인데 경호용으로는 완벽한 것으로 알려진 차이다. 그런데 이 방탄차를 인수하고 한껏 기분이 좋았던 그 다음날 평소에 절대적으로 신임하던 친위대원의 총탄을 맞고 그렇게 가기 싫었던 지옥으로 급행하고 말았다.
사람이 아무리 자기의 생명을 지키려해도 하나님의 섭리를 벗어날 수 없다. 참새도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셨다.
인간은 유한한 자신의 존재를 깨닫고 무한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길이 생명의 길이다.

 

 

101.이민소년서 발명가까지-하나님

1874년 헝가리 태생의 한 소년이 5센트만 지닌 채 미국으로이민갔다. 그러나 이「떠돌이소년은 25년 후「미국 전신전화의 경비를 최소한 1천만달러나 줄인 업적」을 남긴 위대한 전기물리학자가 되었다.
이 소년이 바로「2차X선」을 발견하고「유선통신의 장하방식을 발견한 푸핀이다. 신앙으로 현실의 난관을 극복한 푸핀은 퓰리처상을 받은 자서전「이민에서 발명가로」에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존재하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생기를 불어넣어 주셨기 때문이다』

 

 

102.기적의 손 선물 받은 손-하나님

33살에 미국에서 최고의 전문의 자리라고 할 수 있는 존스 홉킨스 의과대학 신경외과 주임의사가 된 흑인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벤 카슨. 그는 1987년 뒤통수가 맞붙은 쌍둥이를 장장 22시간에 걸친 「사투」끝에 분리하는데 성공,「기적의 손」이란 찬사를 듣게 되었다. 후에 그는「선물받은 손」이란 자전적인 책을 썼는데 거기에서 이렇게 고백했다.『오늘의 내가 된 것은 내 안에 계신 하나님께서 역사하셨기 때문이다. 나의 손은 하나님의 선물이니 그분 것이다』

 

 

103.살아 계신 하나님

파스칼은 위대한 수학자 과학자 철학가였다. 그는 16세때 투영기하학에 관한 책을 펴냈으며 청년 때에는 계산기 수압기등을 발명했다. 그는 이성과 과학의 차원 너머에 인생의 깊은 진리가 있다는 것,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것을 1654년 11월23일 밤 성경 요한복음 16장을 읽다가 깨닫고 진리를 탐구, 저 유명한 「팡세」를 썼다. 이날 그는 이런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요, 지금도 살아 있는 하나님이니라 』

 

 

104.하나님께 영광을

그는 샌프란시스코의 한인교회에서 태극기를 걸고 「올드랭 사인」을 부르는 교포들을 보면서 애국가를 만들 결심을 했다. 안익태는 부다페스트음악학교에 재학 중이던 1935년 드디어 애국가를 완성했다.
훗날 애국가가 불리는 모습을 볼 때마다 그는 이런 고백을 했다. 『애국가는 내 작곡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영감을 조국의 백성들에게 전했을 뿐입니다』

 

 

105.무신론자의 교만

지나간 세기의 유명한 무신론자 중에 로버트 잉거솔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어느 날 무신론 강의 도중 탁상에 시계를 꺼내 놓고
“내가 하나님께 5분간만 시간을 주겠다. 내가 5분 동안 하나님을 저주할 터인데 그 동안에 나를 죽이기를 바란다. 내가 만약 죽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없거나. 있어도 실패자에 불과하다”고 큰 소리를 쳤습니다. 5분이 지난 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자 인간이 승리자요. 신은 실패자라고 외쳤습니다.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신앙인 데오도르파커는 빙그레 웃으면서 이런 흥미 있는 말을 했습니다.
“과연 하나님이 실패한 것일까.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인내를 5분간으로 단축시켜 보려고 한 잉거솔의 시도가 패배한 것이 아닐까."
옳습니다. 주께서는 참고 기다리십니다. 그리고 그를 믿는 그의 백성들이 또한 이 오래 참음의 옷을 입게 되기를 기대하십니다. 그러나 어떤 분이 "언제까지 참아야 합니까."라고 물으실지 모릅니다.
재미있는 것은 "사랑은 영원까지 참고"라고 말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오래 참고"입니다. 언젠가는 오래 참음의 마지막 순간이 옵니다.

 

 

106.누가 갚아 주리요

1825년부터 1855년까지 러시아를 통치하던 니콜라이 황제는 많은 업적을 남긴 왕이다. 그는 친히 군대를 관리하였는데, 종종 평복으로 갈아입고 진영을 살펴 직분을 태만히 하고 자리를 비운 자는 엄히 벌하고 직분을 충실히 수행한 자에게는 포상하였다.
하루는 어떤 장교가 처소에 앉아 자기의 빚진 것을 종이에 적어 계산해보고 있었다. 그 빚이 너무 많아 자기 힘으로는 도저히 갚을 수없음을 안 그는 탄식하며 종이 끝에 "이 산 같은 빚을 갚아 줄 이가 누가 있겠는가." 라는 말을 적어 그대로 책상에 놔두고는 잠자리에 들었다. 그가 자는 사이에 황제가 장교의 처소를 순찰하다가 들어와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종이를 보았다. 황제는 종이에 적힌 내용을 읽어보고는 "이 산 같은 빚을 갚아줄 이가 누가 있겠는가."하는 말 밑에 "니콜라이" 라고 적어 놓고 나갔다.
장교가 아침에 일어나 종이 위에 쓰여 있는 황제의 필적을 보고서는 놀라 이상히 여겼다.
그날 밤 황제는 또 평복을 입고 가서 돈을 두고 나왔다.
우리의 죄의 빛은 우리가 갚을 수 없는 빛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우리의 빛을 대신 갚아주셨다.

 

 

107.이제 연구는 끝났다

어떤 철학 교수가 다음 날 있을 강의를 준비하기 위해 책상으로 가 앉았다. 그는 지저분한 책상에서는 연구를 할 수 없는 성격이라서 책상 위에 흩어져 있는 서류류뭉치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우편함에 들어있던 팜플렛, 잡지, 광고전단 등과 기타 우편물들로서, `우편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 지 모를 때는 아버지의 책상 위에 모두 갖다 놓을 것'이라고 정한 규칙에 따라 딸아이가 그의 책상 위에다 가져다 놓은 것이었다.
그 날도 역시 교수는 책상 위에 잇는 서류뭉치들을 치우다가 파리선교사협회에서 발행한 잡지를 집어 들었다. 그가 그 잡지를 쓰레기통에 넣으려는 순간 발행 저절로 펼쳐졌는데 `콩고 선교의 필요성'이라는 논설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그 교수는 그 논설을 단숨에 읽어 내려갔으며 그 날 밤 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이제 나의 연구는 끝났다!"
이 철학 교수가 바로 알베르트 슈바이처 였다. 어떤 선교사의 보고서를 우연찮게 읽게 된 그 `기회'는 유럽에서 가장 뛰어난 천부적인학자인 슈바이철로 하여금 그가 교수로 재직하고 있던 대학에서 의학공부를 하게 만들었다. 의학공부를 마친 후 그는 남은 여생을 아프리카의 적도지방에서 보냈다. 그는 철학, 신학, 의학 그리고 음악 분야에서 박사학위를 갖고 있었지만 그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적도아프리카에서 선교사로 일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눈에 우연처럼 보일 때도 있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살아 계셔서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것이다.

 

 

108.약속도 하시고 실천도 하시는 분

1988년도 미국대통령 선거를 위한 선거전에 앞서 각 정당의 전당대회를 통해서 대통령 후보를 지명하는 큰 정치행사가 있었다.
이미 잘 알려진 것처럼 민주당 전당대회는 아트란타 죠지아에서 열려서메사츄세스 주지자사인 듀카키스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했으며, 공화당은휴우스톤 텍사스에서 전당대회를 소집하여 죠지 부시 그 당시 부통력을 대통령 후보로 지명했었다. 미국에서의 대통령 후보 지명을위한 전당대회는 전당 대회의 의미를 넘어서서 하루의 아름다운 정치의 잔치로 그 이름이 높다.
이 지명대회에서 공화당을 대표하는 대통령 후보로 지명을 받은 죠지부시 현 대통령은 지명을 수락하는 연설에서 민주당, 저들은 약속만 하지만, 공화당, 우리는 약속을 실천한다고 말하여 만장의 박수를 얻어냈다. 박수뿐만 아니라 텔레비젼을 시청하던 많은 사람들로부터 공명을 받는 공감대를 만드는데 성공했었다.
기독교 신앙의 입장에서 볼 때 하나님은 언제나 약속하시고 또 실천하는 분으로 알려져 있다. 약속만 하는 하나님이던지, 혹은 실천만 하시는 하나님이던지, 양자가운데 하나이신 하나님이 아니라 언제나 약속과 실천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신명기적 기록이 우리들에게 강조하는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과 맺은 약속을 파기하지 않고 언제나 성실히 수행하시고 실천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약속을 파기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오히려 이스라엘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조명해 준다.

 

 

109.나의 동업자

어떤 사람이 브라질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인 벨로 호리전테에 출판소가 있어서, 그는 적어도 매년 한 번씩 브라질을 여행하며 거기서 선교 사역을 하고 있는 여러 단체를 방문합니다.
한번은 서부 브라질을 떠나 벨로 호리전테로 가기 위해 비행기 출발 시간 수 분 전에 공항 매표 창구에 도착한 적이 있었습니다. 매표 직원에게 그의 목적지를 말해 주자 매표원은 비행기가 출발하기 전에 표를 끊을 충분한 시간이 없다고 완강하게 주장했습니다.
비록 그가 탈 비행기에 좌석이 남아 있었고 하나님이 인도하는 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그것을 타야 했지만 그는 매표 창구에서 돌아나와 거기서 좀 떨어진 곳에 앉았습니다. 그 일에 대하여 그가 기도할 시간을 갖기도 전에 포르투칼어로 방송이 나왔습니다.
“공항이 안개에 싸여 비행기가 이륙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즉시 그는 하나님께서 이사야 65장 24절에서 약속하신 말씀을 기억해 냈습니다.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
가방을 집어들고 그는 서둘러 매표 창구로 돌아가서. 비행기를 탈 충분한 시간이 있으니 표를 끊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 직원은 마지못해 이 일을 했고 그가 표를 받자 마자 안개가 걷히고 비행기는 이륙 허가를 받았습니다.
이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그가 어떤 일을 할 기회도 갖기 전에 개입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성공하기를 원하시는데 자신의 성공의 기준에 따라 그렇게 되기를 원하시며, 그는 우리가 자신과 협력하여서만 성공하기를 원하십니다.

 

 

110.하나님의 창조

런던대학의 우주 물리학자인 보이드 박사는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별의 수는 약 10만개이며 최신 전자 망원경을 가지고 한 은하 안에서 볼 수 있는 별의 수는 2,000억개가 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최신 망원경을 가지고 볼 수 있는 그 전체 우주 속의 별들의 수는 2,000억 x 1,000억 개라는 천문학적 숫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보지 못한 별의 수는 얼마나 더 많겠습니까?
또한 지금 반짝거리는 별빛은 10만 광년 전에 반짝였던 빛이 오늘 밤 우리 눈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저녁 별빛이 유난히 반짝이지?" 하는 말은 얼마나 큰 거짓말인지 모릅니다. 이런 것을 공부하는 우주 물리학자인 보이드 박사는 전공을 통하여 하나님을 더 깊이 깨닫고 찬송가 40장을 자기 신앙의 간증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양수에 감싸여 있는데 그것은 바깥에서 충격이 와도 물이 출렁출렁하기 때문에 태아를 보호하고 또 아이가 계속 성장을 하면서 운동을 해야 하는데 물속에 있어야 운동하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그 후달이 되면 양수가 터져서 아이가 나와야 할 길을 깨끗하게 청소해 줍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어머니 뱃속에서 배꼽을 통해서 먹고 배꼽을 통해서 배설하고 배꼽을 통해서 숨을 쉬던 수중 동물이 어머니 배에서 나오는 순간에 수술도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해서 입으로 먹고 코로 숨쉬고 밑으로 배설하는 동물로 순간적으로 바뀌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것은 아무도 설명할 수 없는 불가사의입니다. 저는 이 의문점을 제가 인도하는 성경공부 모임에 나오는 어느 유명한 산부인과 의사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그 때 그 분이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성경공부 모임에 나오죠." 시편기자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주께서 내 장부를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조직하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함은 나를 지으심이신묘막측이라 주의 행사가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시138:13). (김인수 교수)

 

 

111.후회 없는 삶

윌리암 보덴 씨는 1904년, 시카고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 큰 낙농장의 법적 상속인으로 이미 백만 장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의 부모는 그에게 세계 일주를 시켰습니다. 그는 아시아, 중동 그리고 유럽을 여행하는 동안 고통받는 사람들을 직접 눈으로 보고는 마음에 큰 짐을 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집으로 보내는 편지에다
“나는 일생을 전도사업과 그 일에 대한 준비에 바치겠습니다”라고 썼습니다.
그가 이러한 결심을 했을 때 그의 성경 뒷표지에“지체할 수 없음(No Reserve)"이라고 썼습니다.
예일대학을 졸업하면서 좋은 보수가 보장된 일자리를 거절하고 성경 뒷장에 이번에는“후퇴 없음(No Reter at)"이라고 썼습니다.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공부를 마치고 중국에 있는 회교도들을 전도하기 위해서 항해하던중 선교준비를 하려고 우선 이집트에 들렀습니다. 이곳에서 그만 뇌막염이 발병하여 한 달도 못되어 사망했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겠지요.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던 게야. 헛된 일을 했었군!”
그의 성경 뒷장에는 위에 썼던 두 가지의 결심 밑에 “후회 없다(No Regret)"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우리 생애의 어떤 때든지 적용이 됩니다. 지금 나는 이 순간에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를 자신에게 물어 보십시오. 내 가슴에서 타오르는 열정은 무엇입니까. 남은 여생을 하나님을 모르고 사는 잊혀진 땅에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 것인가? 1989년에는 우리 자신을“지체함이 없이”,“후회함이 없이”그리스도께 순종하도록 결심합시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성공하든지 고난을 만나든지 간에 언제라도 하나님의 본향으로 부르실 때“후회는 없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112.완전한 굴복

어떤 젊은 아가씨가 전도자에게 완전한 헌신의 주제에 관하여 이야기했다.
“나는 도저히 자신을 주님께 온전히 드리지를 못해요”
그녀는 말했다.
“그가 나를 비참하게 될 선교지에다 보낼까 두렵거든요.”
그 전도자가 대답했다.
“어느 춥고 눈 오는 날 아침에 한 마리 작은 새가 반쯤 얼어 붙은 채 당신의 창을 쪼고있다고 생각해 보시오. 이 무력한 어린 새가 당신에게 붙들려 자기를 먹여 주도록 또 자신을 완전히 당신의 통제하에 맡겨버린다고 상상해 보시오. 이럴 때 당신은 어떻게 하렵니까? 말해 보시오. 당신 손 안에 움켜 쥐어 눌러버리겠읍니까? 아니면 피난처와 따뜻함과 먹이와 보호를 베풀겠읍니까?”
즉시 그 아가씨의 두 눈은 그 말의 뜻을 깨닫고 빛이 났다. 여러 해 후 그녀는 다시 그 전도자를 만났으며 그로 인해서 둘 사이에 있었던 대화를 기억나게 했다. 그녀의 표정은 다음과 같은 설명의 말을 할 때 후끈 달아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부르사 선교지에서 일하게 했어요. 내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합니다.”
그녀의 체험은 모리스의 이와 같은 말로 요약할 수도 있을 것이다.
“승리하신 구주여. 당신의 귀중한 뜻이 이제 나를 품고 에우나이다. 모든 불화는 잠들고 내 평화는 강물이오니 내 영혼, 갇힌 새가 자유케 되도다.”
완전한 굴복은 꽃이 뿌려진 길과 구름 없는 날들을 보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구주의 임재 하심과 그의 인도하시는 손길의 안정성을 확신한다. 두려움은 변하여 믿음이 되며 우리는 이처럼 노래할 수가 있다.
“감비로운 하나님의 뜻이여 여전히 나를 보다 더 가까이 두르고 있도다 내가 당신 안에 완전히 죽어질 때까지.”

 

 

113.하나님의 방법

윗치만 니라는 유명한 성도는 자기가 좋아하는 여인에게 결혼을 요청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하고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거절을 당했습니다. 그때 그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더 이상 그 여인에게 요청하지 않고 그 문제를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그런데도 그 여인의 생각이 계속 그의 마음 속을 지배했습니다. 그는 그 여인과의 결혼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하나님께서 문을 열어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문제를 하나님께 모두 맡겼습니다.
그로부터 10년 후 그는 우연히 다른 장소에서 그 여인을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하나님께서 마음을 주셔서 두 번째 요청을 했습니다. 이때에 이 여인이 허락을 해서 10년 전에 사랑했던 여인과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만일 그가 하나님께 헌신되지 않은 사람일 경우에 인간적인 욕정을 이기지 못하고 10년간이나 계속해서 그 여인을 따라 다녔다고 합시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러나 그는 자신의 결혼 문제를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그는 주의 뜻을 구하는 훈련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하나님의 때가 찼을 때 하나님의 방법으로 결혼을 하게 되어 아름다운 결혼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고 그는 후에 간증을 남겼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환경을 잘 살펴야 합니다.

 

 

114.우리 역시 마찬가지

인간들의 사랑 속에는 언제나 사심이 있습니다. 인간들의 마음속에는 순수한 하얀 것, 순수한 까만 것, 순수 악과 순수 선이 사실 거의 없다시피 한 것입니다. 남을 사랑한다 하면서도 나의 행복을 구한다 든지, 그 사람에게서 존경과 사랑을 구합니다. 사랑을 주고받음에 있어서 우리는 무서운 착취를 하게됩니다. 사랑과 애정과 인기와 존경을 수입하고 그 사람과 상하 관계를 만들어 버리거나 주종 관계를 만듭니다. 예를 들면 백원의 사랑을 주고는 자기 장부에는 받을 것을 천원이라 적어 놓습니다. 무의식중에 그렇게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조그만 사랑을 베푼 후에는 그 사람을 자기의 정신적 노예로 만들어 버립니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사람에게 짐지우고 또 그것이 세상에 선전되기를 바라며 그 보답이 어디선가 돌아오기를 바랍니다. 언제나 계산을 하고 타산을 합니다. 순수하고 사심 없이 사랑하기란 인간으로서는 참으로 힘든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아마도 하나님께 무슨 척도가 있어서 인간의 사랑을 시금석으로 분석해 보면 역사에 알려진 위대한 영웅적인 사랑의 행동에도 불순한 것이 30퍼센트, 어떤 것은 40퍼센트,어떤 것은 90퍼센트, 혹 어떤 것은 세상의 선전 효과를 노린 것도 있을 것입니다. 이기심이 사라지고 있었던 것 외에도 여러 가지 것이 있을 줄로 생각됩니다. 위선이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불완전하지만 우리는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을 사심 없이 사랑했습니다. 순수했습니다. 제자들에게 받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영원한 사랑의 부채자가 되었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115.성령 충만

우리가 매일 수염을 깎아야 하듯 그마음도 매일 다듬지 않으면 안된다. 한번 소제했다고 언제까지나 방안이 깨끗한 것은 아니다.
우리의 마음도 한번 반성하고 좋은 뜻을 가졌다고 해서 그것이 늘 우리 맘에 있는 것은 아니다. 어제 먹은 뜻을 오늘 새롭게 하지 않으면 그것은 곧 우리를 떠나고 만다. /마르틴 루터

 

 

116.재난을 통한 축복

배가 좌초 되었다. 생존자는 단 한 사람 뿐이었다. 그 사람은 파도에 밀려 인적없는 작은 섬에 당도했다. 궁지에 빠져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열심히 외쳤고 다른 배가 보이지 않을까 하고 날마다 지켜보았다. 어설픈 오두막을 하나 지어서 좌초된 배에서 건진 물건을 몇가지 들여다 놓았다.
어느날 먹을 것을 찾아다니다가 오두막이 불에 타서 연기가 나는 것을 보고 슬퍼서 어쩔줄 몰랐다. 오두막이 금새 재로 변했다. 최악의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그러나 기도에 대한 응답이 왔다! 다음날 일찍 배 한척이 다가왔다. 섬에 고립되었던 사람은어떻게 자기를 구하러 왔는가 하고 물었다. 선장은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는 당신이 낸 연기를 보았읍니다."

 

 

117.갚을 수 없는 빚

오래 전 미국의 보스턴 시에 스트로사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큰 꿈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꿈을 이루는 데 필요한 돈이 없어서, 거부인 바턴 씨를 찾아가서 2천불을 꾸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자기에게 담보는 없지만 일에 대한 꿈과 용기가 있으니 믿고 대여해 주시면 그 은혜는 잊지 않겠노라고 자신 있게 말했습니다. 바턴 씨의 주위 사람들은 경력도 없는 그에게 담보나 후원자도 없이 돈을 꾸어 주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고 만류했습니다. 그러나 바턴 씨는 웬지 그 청년의 용기가 마음에 들어 모험을 걸고 2천불을 주었습니다. 과연 스트로사는 얼마 되지 않아 그 돈을 갚았습니다. 이 일이 있은 지 10년이 지났습니다. 당시 미국에는 대 경제공황이 일어나 바턴 씨는 완전히 파산이 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소문으로 이 사실을 알게 된 스트로사는 바턴 씨를 찾아가 당신이 빚진 돈 7만 5천불을 내가 대신 갚아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바턴 씨는 깜짝 놀라 "자네가 가져 갔던 돈은 이미 갚았는데 무슨 소리요?" 하고 의아해 했습니다. 이에 대한 스트로사의 대답은 멋진 것이었습니다. "분명히 빚진 돈 2천불은 옛날에 갚았지만 당신이 베풀어 준 은덕은 평생 갚지를 못합니다. 그때에 2천불로 장사를 해서 오늘 이렇게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돈으로 갚아진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정신나간 사람입니다. 은덕과 사랑은 영원히 갚을 수 없는 빚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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