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宗敎改革)이란?
1. 종교개혁의 원인.
21세기를 살아가는 지금 수백년전 그것도 서양의 몇몇 국가에서 몇 사람들을 통해서 일어난 일대의 사건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할것인가?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이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 중요하지 그깟 케케묵은 과거의 이야기가 뭐 그리 중요하냐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과거는 미래의 거울이라 했다. 우리는 과거의 사건들 속에서 우리를 들여다 봐야 할 것이다. 어쩌면 우리와 전혀 상관없을지도 모르는 그 사건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앞으로 다가올 우리의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 그 미래는 하나님께서 모두 예정하신 미래이며 우리가 살아가야할 의무를 지닌 미래이다. 앞으로 다가올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알수는 없지만 과거속에 드러난 일련의 사건들은 그 미래를 짐작할 수 있도록 해준다. 조금더 다른 시각을 가지고 과거속에 나타난 일들에 대하여 겸허한 자세로 연구 한다면 분명 미래의 불확실성(不確實性)에서 우리는 조금이나마 명확한 해답들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15,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의 외치는 소리는 그저 허공에 울려 퍼지는 메아리가 아닌 것이다. 그들의 소리는 그저 어느 한시대에 나타났다가 사라진 소리가 아닌 수천년전 여러 사도들과 교부들을 통하여 내려오다가 종교개혁자들로 이어져 들려오는 소리인 것이다. 우리는 그들의 소리에 주목할 필요성이 분명하게 있다.
그렇다면 종교개혁은 왜 일어났는가? 일반 학문에서는 단순히 교회의 타락으로부터 일어난 반사적인 사건으로 보고 있다. 이는 매우 단초적(單礎的)인 지식에서 온 것이다. 때문에 오늘날의 개혁 교회(改革敎會)는 15, 16세기 나타난 신흥 종교단체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개혁 교회는 이처럼 어느날 갑자기 나타난 신흥 종교 단체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 세워진 교회를 계승하는 분명한 기독교회인 것이다. 초대교회(初代敎會)에서 중세교회(中世敎會)로 그리고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개혁교회와 로만 카톨릭(Roman Catholic)으로... 이렇게 개혁교회는 그 맥을 이어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은 교회의 타락으로 야기된 일련의 한 사건으로 단정 짓기는 매우 힘들다.
그렇다면 종교 개혁의 원인은 무엇인가?
그 이유는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직접적인 요인이라면 교회의 타락일것이다. 교회의 타락은 먼저 도덕적, 윤리적 부패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교회는 자신들의 배불릴 생각만에 빠져 전쟁, 음모, 뇌물, 탐욕을 서슴없이 드러냈다. 그러다 보니 힘없는 서민들은 이들의 횡포에 늘 시달려야만 했다. 민생을 구재하고, 등불이 되어 밝혀 주어야할 교회가 오히려 서민들을 자신들의 유익을 추구하기 위한 재물로 이용하고 있었다.
이러한 교회의 모습을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 1469.10.27 ~ 1536.7.12)의 「우신예찬(愚神禮讚, Encomium Moriae)」에 그려넣은 독일 화가 한스 홀바인(Hans Holbein, 1465? ~ 1524)의 삽화와 독일의 역사가 부츠바흐(Butzbach)의 글 속에 잘 묘사되어 있다.1) 이곳에는 당시 성직자들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는데 이속에서 당시 교회의 사치스러운 모습이 극에 달했음을 알수 있고 또한 성직자들의 문란한 성생활, 성직매매, 성상숭배 사상, 성자숭배 사상 등 교리적으로까지 그 부패와 타락이 만연해 있었다. 특별히 주목할 것은 교리적 탈선에 있어서 이미 성경에서 크게 벗어나 있었던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오늘날 도덕적, 윤리적 탈선은 일부교회에 의해 비롯되고 있기는 하지만 교리(敎理)적으로 이 시대와 너무나 많은 부분에서 닮아가고 있는 것은 실로 안타까운일이 아닐수가 없다. 중세시대 교회의 교리적 탈선은 이미 예증되고 있었다. 교회 안에 각종 조형물을 만들어 이를 성물(聖物)이라하여 숭배하는 행위나 이교(異敎)적2) 풍습들이 교회 안에서 편만해 있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각종 신조(信條)들에 대한 연구와 이해가 부족했었기에 이런 행위들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교회안에 들어올 수 있었다. 이와 함께 당시 문화를 수놓았던 르네상스 인문주의(Renaissance Humanism)사상도 주요했다.
르네상스는 1350년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어 16세기까지 일어난 문화운동으로 14세기 이탈리에서부터 유럽 각 지역으로 퍼져나가 각각의 독특한 문화를 형성하였으며 근대 유럽문화 태동의 기반이 된 운동이다. 특징적인 것은 이전의 인간관과는 다르게 인간성을 더욱 중시하는 새로운 인간관을 가졌다고 해서 인본주의(人本主義)라고도 불린다. 다시말해 중세를 인간의 창조성이 철저히 무시된 ‘암흑시대’라고 볼때에 문명의 재흥(再興)과 사회의 개선은 고전학문의 부흥을 통하여 가능한것이다.3)
인간성의 해방과 인간의 재발견, 그리고 합리적인 사유(思惟)와 생활태도의 길을 열어 준 근대문화의 선구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문학적으로 고전, 희랍, 로마 문학의 깊은 관심을 가지게 했고, 이결과 고전어 연구에 큰 촉진제가 되어졌다. 그로 인해 성경원전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어지게 됐다. 이것은 교회 개혁에 큰 밑거름이 되어졌다. 대표적으로 문헌비평학(文獻批評學)의 도입으로 오랜 세월 교황권을 정당화 해주던 ‘콘스탄티누스기증장(Donatio Constantini)’이 콘스탄티누스 대제(Constantinus I, 274.2.27 ~ 337.5.22) 당시 작성된 것이 아닌 8세기에 위조된 것임이 로렌조 발라(Lorenzo Valla, 1407 ~ 1457.8.1)에 의해 밝혀짐으로 교회는 큰 타격을 입게 된다. 또한 사도신조(The Apostle's Creed)가 사도들이 한절씩 고백한 것이라는 라피누스(Rufinus)의 주장도 허구임이 드러났다. 한편 어거스틴(Augustinus, Aurelius, 354.11.13 ~ 430.8.28)의 작품의 40%가 후대에와서 변조되어 있는 사실도 발견해 커다란 충격이 되어 지기도 했다.
1). 김재성, 「칼빈의 삶과 종교개혁」(서울:도서출판 이레서원, 2001) 28~29 참조.
2). 당시 교회에는 무속신앙적인 요소들이 너무도 많았다. 예컨대 죽은 성직자들을 신성시하여 그들이 지니고 다니던 옷이나 물건들에서 신비한 힘이 나오는 것처럼 여기기도 하였다.
3). Francesco Petrarca(1304.7.20 ~ 1374.7.19)의 주장;이탈리아의 시인이자 인문주의자로 저서로는『나의 비밀』, 『승리』,『칸초니에레(Canzoniere)』등이 있다.-두산대백과 참조.
교회가 극도로 타락의 길을 걷고 있는 때에 르네상스 인문주의 운동은 교회의 잘못된 부분들을 하나 하나 고찰시킴으로 개혁의 확고한 촉진제가 되었으며, 교황권과 스콜라 신학(Scholasticism)의 붕괴를 가속화 했다. 더 나아가 이 운동은 루터나 츠빙글리와 같은 당대 개혁자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어 교회 개혁의 기틀을 예비한 것이되었다. 곧 인문주의 운동으로 교회의 부도덕과 사치를 통렬히 비판하고 풍자하여 대중적 지지를 가능하게 함으로 개혁자들에 앞서 개혁의 길을 열어 두었던 것이다.
인문주의 확산으로 교회와 국가에 대한 대중의 지지는 크게 떨어지게 되었고, 한편으로 14세기 무렵부터 팽찬하기 시작한 민족주의 국가(Nation State)는 교황청과 제국을 중심으로 하나가된 유럽사회의 큰 위협이 되어있었다. 이들 국가는 교회 중심 체제에 커다란 균열을 가져왔고, 중세 말에 이르러서는 국가의 개념이 근대적 국가 개념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 국가들은 영국, 프랑스, 에스파니아 등의 서유럽 국가들로 인종, 언어, 역사의 배경을 중심으로 민족적 유대감을 기초로 자신들만의 왕권을 확립하였고, 이로인해 왕권과 교황권의 대립과 갈등을 초래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강력했던 교황권은 쇄퇴하여 교회체제가 붕괴되는 결과를 초래했고, 유럽사회는 말할 수 없는 혼란과 분열의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더불어 경제적인 상황까지 가세해 교회개혁의 큰 원인으로 자리잡게 된다. 12, 13세기부터 발달하기 시작한 상업과 도시의 발전은 자본주의(資本主義, Capitalism) 발전되어 가면서 15세기 말엽에는 부르조아(Bourgeoisie) 집단이 신흥 지배계급으로 급부상하였다. 자본주의가 발달 한 것은 빈부의 격차가 점차로 커져갔다는 것을 의미 할수 있겠는데 15세기 말엽 부르조아의 급부상은 피지배 계층의 극심한 빈곤가운데 살아가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이들은 모두 억눌려 있었다. 그들을 구제해 주어야 할 교회 조차도 그들을 억압하고 더 어려운 지경으로 내 몰고 있었다. 타락한 교회는 더 이상 그들에게 소망을 줄 수 없었다. 더군다나 교회역시 물질적 탐욕속에 깊이 빠져들어 면죄부(免罪符, Indulgence)와 같은 폐단적인 교리도 만들어 냈다. 부츠바흐가 묘사한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 값비싸 옷, 좋은 말 또, 한스 홀바인의 삽화에서 살진 수도사를 묘사한 대로 교회는 탐욕속에 깊이 젖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속에 농민과 노동자 계층은 어떠한 변화를 염원하고 있었다. 이 염원은 개혁운동 확산의 거대한 초석이 되었고 빈곤의 정도가 심한 곳일 수록 개혁의 호응은 더욱 클 수 ?R에 없었다.
오랜 동안 제국과 교회의 횡포속에 억눌려 왔고 사회적 경제적 빈곤은 민중을 더욱 어렵게했다. 민중을 구제하여야할 교회는 이미 그 영향력을 상실한 지 오래였으며 교회 내적으로는 교권의 세속화와 스콜라주의, 의식적 종교에 물들어 영적으로 가물어 있었다. 각종 미신적인 행위들이 가득하여 뜨거운 종교적 열정에 대하여 해결책을 내어주지 못해고 있었다. 14세기에 일어난 신비주의(神秘主義, Mysticism) 운동은 대표적인 영적 갈망의 표현으로 이는 교회개혁의 의미를 지니기도 했다. 당시 교회는 교회로써의 거의 모든 기능을 상실한 상태이고 그러다보니 사람들의 영적인 요구에 대하여 들어 줄수 없었다. 때문에 교회의 개혁이 절실히 요구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로 보았을 때 종교개혁은 우연이 아닌 필연적으로 일어난 것임을 분명하게 알수 있다. 무엇보다도 루터이전 위클리프(John Wycliffe, 1320 ~ 1384)나 후스(John Huss, 1369 ? ~ 1415.7.6)의 훨신 이전부터 끊임없이 계속이어져 오던 개혁의 의지가 하나님의 때가 이름으로 봇물처럼 터지게 된것이다.
2. 종교개혁의 의의(意義).
이렇게 일어나게된 종교개혁에 대하여 우리는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가? 얼마나 깊이 잘 알고 있는 것일까? 종교개혁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대하여 교회의 안에 있는 사람이건 밖에 있는 사람이건 대부분의 대답은 서두에 이야기 했던 것과 같이 단지 교회의 타락으로 인해 일어난 반사적 사건으로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앞서 살펴본바와 같이 종교개혁의 원인은 단순히 교회의 타락으로 인한 새로움을 추구하려는 운동 혹은 반사적 반응이라 보기는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종교개혁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는가? 그것을 한마디로 표현 한다면 '회복(回復)'이라 표현이 가장 적합할 것이다. 더나아가 단순히 명예의 회복(Retrieval!!!!)이나 재건(Rehabilitation)으로써가 아닌 사도적 교회로써의 회복 즉 ‘Reform’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의 미가 잘 반영된 것이 종교개혁이 활발하게 진행되던 때인 15, 16세기 보편화된 구호인 라틴어 ‘Ad fontes’있는데 이를 영어로 번역한다면 ‘Back to the sources’로 즉 기독교 신앙과 학문 전반에서 고전(古典, 혹은 근본)으로 돌아가자는 뜻이다. 이말을 종교개혁자들이 사용하게 되면서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의미가 되었다.4)
이러한 정신은 루터보다도 훨씬이전인 14세기 위클리프때에도 분명히 드러나는 정신이었다. 뒤를 이어 교회 개혁을 추진했던 체코의 죤 후스 역시도 교황의 지상권(至上權)을 부인하고 오직 성경만이 유일한 권위임을 주장했다가 1415년 화형대에 오르기도 하였다. 그후 꼭 102년 만에 마틴 루터(Luther, Martin, 1483.11.10 ~ 1546.2.18)라는 인물의 등장으로 교회는 물론이요 세계역사 일대의 큰 변혁을 이루게 된다. 루터의 등장과 ‘95개조 반박문’(Anschlag der 95 Thesen)은 작은 불씨에 불과했지만 그것에 의한 파장효과는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또한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은 종교개혁 시발의 일부에 불과했다. 왜냐하면 츠빙글리(Ulrich Zwingli, 1484.1.1 ~ 1531.10.11)라는 인물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루터와 같은시기 신부로써 자신이 시무하는 교회에서 과감하게 개혁활동을 단행한 인물이다.
4). 김재성,「칼빈의 삶과 종교개혁」(서울:도서출판 이레서원, 2001) 24.
수도권목회자 동지회 홈페이지 (http://www.s-mok.com/)
루터와 츠빙글리 아니 위클리프와 후스의 작은 시작이 작은 불씨로 남아 이후 루터와 츠빙글리로 이어져 역사를 바꾸는 대 변혁 사건이 되어진것이다.
20세기 독일의 역사가 프레드리치 마이네케(Friedrich Meinecke, 1862.10.30 ~ 1954.2.6)는 서양 역사의 영향을 끼친 가장 큰 두가지의 사건을 역사주의(歷史主義, Historismus)와 교회개혁이라 하였다.5) 다시말해 교회개혁은 종교적인 사건을 떠나 서양 역사의 전반적인 개혁이었음을 입증해주는 것이다. 그것은 교회개혁이 지닌 세계사적 의를 지향하는 말이기도 하다.
(1). 교회개혁에 대한 오해들.
이렇게 세계사적으로 커다란 의를 지니고 있는 종교개혁에 관해서 사실상 우리모두는 무지함에 있다. 그렇기에 교회개혁에 관한 잘못된 인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오해를 버리고 종교개혁에 관한 새로운 인식을 가져야 함이 바람직 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종교개혁에 관하여 잘못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첫째로 개혁운동의 성격에 관한 것이다. 종교 개혁운동은 단순한 교리적 개혁운동으로 그치지 않는다. 이 운동은 교리적 개혁운동(Reform)과 함께 영적 부흥 운동(Revival)의 성격도 함께 동반한다. 당시의 교회가 교리적으로 많이 탈선해 있었기 때문에 이런 오해를 가지기 쉬우나 교리적으로 탈선해 있다는 것을 다시 생각해본다면 그것은 영적적으로도 쇄신이 필요했다는 것을 알수가 있을 것이다. 교회가 잘 못된 교리로 사람들을 인도했다면 사람들마다 뒤틀린 신앙을 가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훌륭한 성직자 한 사람이 죽었을 때 당시 교회에서는 그를 성자(聖者)라하여 신앙의대상으로 여기게끔하였다. 루터가 수도원으로 들어갈 것을 결심했던 순간 그가 했던 말을 생각해 본다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당시 사람들 마음속에 만연해 있던 이런 성자 숭배사상이나 무속적인 신앙심들은 곧 당시 사람들의 신앙이 얼마나 영적으로 잘못 되어 있었는지 대변해주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종교개혁은 교리적 개혁과 함께 영적 부흥운동의 성격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둘째로 개혁교회는 15, 16세기 종교개혁이라는 일련의 사건으로 로만 카톨릭 교회로부터 떨어져 나온 새로운 형태의 교회가 아니라는 것이다. 곧 개혁교회는 종교개혁으로 인해 생겨난 새로운 종교단체도 종교개혁의 산물도 아니기 때문이다.
때문에 ‘큰집, 작은집’이라든가 카톨릭 교회를 모교회라는 등의 개념은 너무나도 형편없이 잘못된 생각이다. 이런 개념은 카톨릭 진영에서 개혁 교회를 바라볼 때의 입장으로 생각한 무지함의 결정판이며 개혁교회에 대한 이해의 부족에서 오는 결과인 것이다. 개혁교회 곧 프로테스탄트 교회(Protestant Church)는 어느날 갑자기 생겨난 새로운 형태의 종교가 아니라 신앙의 전통을 이어가는 전통적 교회인 것이다.
5). 이상규, 「교회개혁사」(서울:성광문화사, 1997) 17.
카톨릭의 입장으로 본다면 루터나 츠빙글리, 칼빈등은 새로운 종교를 새운 창시자이며 교주(敎主)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그들이 가르친 것은 고대 교부들의 가르침이며, 교부들의 가르침은 사도들의 가르침이며, 사도들의 가르침은 성경(Bible)이기 때문이다. 곧 종교개혁자들이 가르친 것은 성경이며 그 가르침은 성경외의 것은 없다. 때문에 개혁교회는 그레고리 1세(Gregorius I)의 교황 등극 이후 강력한 교황권에 가리워져 있던 교회의 복음적 전통이 다시 회복된 것이지 새롭게 생겨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교회라는 뜻의 개신교(改新敎, New Church)라는 단어도 극히 잘못된 표현인것이다.
마지막으로 교회의 개혁을 16세기에 일어났던 사건으로만 생각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 시대에 시작해서 그 시대에 끝난 것도 아니며 그 전에도 지금도 계속되어 왔으며 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은 우리가 단순히 생각하고 단순히 평가해서 않되는 아주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며, 하나님의 섭리(攝理)의 결과인 것이다. 세계사적으로나 교회사적으로 종교개혁이 지니는 의미는 실로 엄청나다. 오늘날 교회도 언제든지 타락할 수 있다. 그것은 육적으로든, 영적으로든, 양쪽 모두이든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다분히 가지고 있다. 때문에 우리는 종교개혁이 지니는 역사적 의미를 절대로 간과 해서는 않된다. 칼빈의 후계자 베자(Theodore Beza, 1519.6.24 ~ 1605.10.13)는 “교회는 개혁되었으므로 항상 개혁되야 한다.”고 말했다.6) 종교개혁이후 480년이 지난 오늘 날 480년전의 사건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소리를 우리는 겸허히 받아 드려 오늘날 교회 스스로가 교회의 현실을 스스로 자각하며 개혁정신을 가지고 부단한 자기개혁을 해나가지 않으면 않될 것이다.
6). 이상규, 「교회개혁사」(서울:성광문화사, 1997) 20.
■ 참고문헌
- 김재성, 「칼빈의 삶과 종교개혁」, 서울:도서출판 이레서원, 2001.
- 이상규, 「교회개혁사」, 서울:성광문화사,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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