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와 평신도 "그래서 아나니아가 떠나서, 그 집에 들어가, 사울에게 손을 얹고 '형제 사울이여, 그대가 오는 도중에 그대에게 나타나신 주 예수께서 나를 보내셨소. 그것은 그대가 시력을 회복하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도록 하시려는 것이오' 하고 말하였다. 곧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져 나가고, 그는 시력을 회복하였다. 그리고 그는 일어나서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고 힘을 얻었다. 그런 다음에 그는 곧 여러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선포하였다."(행 9:17~19) 모 교단 총회에서 장로와 목사들 사이에 논쟁 사안이 있었습니다.
장로들이 집단적으로 이의를 제기하는 것을 보고 어떤 목사가 말했습니다. "감히 장로 주제에…. 아예 장로를 없애버리든지 해야지." 옆에 있던 기자가 "어떻게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있는가"라고 질문하자 그 목사는 이렇게 응답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장로교가 아니야. 그런 얘기는 장로교에나 가서 하라고." 물론 교단마다 교회 정치의 형태가 서로 다른 것은 사실입니다. 장로교가 아니기에 장로라는 지위를 인정할 수 없다는 말도 한편 일리가 있는 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집사나 권사나 평신도에 대해서도 그런 식으로 말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 목사의 말은 특권 의식으로 꽉 차 있는 자신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목사는 특별하다는 자부심 말입니다. 자부심은 좋은 것입니다. 하지만 장로(혹은 집사나 권사나 평신도)를 멸시해도 좋을 만큼 자부심을 가져서는 곤란합니다. 남을 무시하고 비하함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것은 결코 기독교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 개인에게 있어 자부심은 여러모로 좋은 점이 많습니다. 개인에게 긍정적인 자아의식을 심어줌으로써 삶에 대한 의욕을 갖게 하고 또 그럼으로써 자신이 맡은 바 소명에 대해 그 만큼 더 충실할 수 있게끔 이끌어 줍니다. 문제는 그 자부심이 신분적 우월감으로 변해버릴 때 생겨납니다. 자부심이 도를 넘어 신분적 우월감으로 변질된 사람들은 독단과 아집에 빠져들어 끝내는 스스로를 망가뜨릴 뿐만 아니라, 주위의 다른 사람들에게도 마음에 큰 상처를 주게 됩니다. 십 수 년간 해외에서 선교 활동을 해온 베테랑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한국과 영국 등 여러 곳에서 선교 관련 과정들을 마쳤습니다.
선교 이론과 현장 경험이 두루 갖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십 수 년간 해오던 선교사 생활을 잠시 접고, 모 교회의 지원 하에 목사 과정을 밟기로 했다고 합니다. 선교사 일을 하는데 목사가 아니라서 여러 가지 어려운 점이 있다는 얘기가 들립니다. 목사가 아닌 (평신도) 선교사라는 이유 때문에 있는 어려움이랄 게 뭐가 있을까요. 복음을 전하는데 신학적 지식이 부족해서 어려움이 있다는 얘기는 아닐 것입니다.
아마도 교회 행정이나 교회 조직과 관련된 문제들일 것입니다. 하긴 세례를 주고 싶어도 본국에서 목사를 초빙하거나 아니면 이웃 지역의 목사 선교사에게 부탁을 해야 할 것이니 번거롭기는 합니다. 그 선교사를 돕는 교회의 입장에서도 자기 교회가 지원하는 선교사가 전도한 성도를 다른 교단의 목사에게 세례를 받게 하는 게 맘 편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개종을 확인시키는 세례를 준 사람은 아나니아였습니다.
그는 열두 사도에 속하지도 않았고, 일곱 집사의 무리에 들지도 않았습니다. 요즘 교회식으로 말하자면 완전한 평신도였습니다. 그런 그가 핍박자 사울을 찾아가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가 무슨 권세로 그리 한 것일까요.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권세로 그리 하였습니다. 일개 평신도인 아나니아가 주는 세례를 받은 사울은 후에 여러 권의 신약성경을 기록하고 기독교 성립의 큰 기둥 역할을 한 사도 바울이 되었습니다.
목사는 세례 줄 절대적 권리 없다.오늘날 목사들이 우러러 마지않는 사도 바울에게 세례를 베푼 사람은 평신도 아니니아였습니다. 그런데 그 사도의 뒤를 잇는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목사들은 (바울에게 세례를 주었던) 평신도들을 세례를 줄 수 없는 사람들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런 우스꽝스런 경우가 어디 있습니까.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으나 교회에서는 예전에 없던 것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초대 교회라 불리던 시대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제도와 규범들이 만들어졌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무리들 사이에서 누구에게나 가능했던 복음 증거(설교)하는 일이나, 세례를 주는 일이나, 성찬을 나누는 일 등에 '권리'라는 명칭을 붙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서서히 설교권, 성례권 등의 이름이 붙여지면서 이런 일들은 특정 소수의 무리인 성직자들의 권력을 상징하는 전유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위엄과 권위와 신성함으로 가득 찬 선언입니다. 오늘날 이 선언은 오직 목사만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 교회는 규정해 놓고 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종교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그렇게 정한 것입니다. 성직자라면 뭔가 특별한 권한이 있어야 한다는 지극히 인간적인 욕망에서 비롯된 제도입니다.
마치 이것이 하나님께서 특별한 사람들(성직자)에게만 허락하신 배타적 권리인양 성도들을 속이고 있습니다. 세례를 행하는 행사를 통해 목사라는 직분이 특별한 권력임을 교회 앞에 선포하는 모양새가 갖추어진 것입니다. 십 수 년간 오지에서 복음을 증거하며 하나님의 사역을 행한 선교사지만, 목사라는 자격증을 갖고 있지 못하기에 세례를 줄 수가 없습니다. 본국에서 목사가 한번 방문해 주어야만 세례식을 거행할 수가 있습니다. 상당히 불편한 일입니다.
이러한 현실에 대해 교회 공동체도 의문을 갖지 않습니다. 결국 해결책이라고 제시된 방안이 그 선교사를 본국으로 불러들여 신학교 과정을 밟아 목사 자격증을 따게 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고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의 증인이 되어 십 수 년을 사역한 사람이 세례도 주지 못하게 하는 교회의 모습, 이상해 보이지 않습니까. 목사라는 자격을 취득하기 전까지는 결코 세례를 줄 수 없다는 오늘날 교회의 규정은 결코 예수께로부터 유래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 자신도 평신도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분만 그런 게 아니라 그의 제자인 열두 사도들도 역시 모두 평신도들이었습니다. 유대 사회의 성직자들이 보기에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행하는 세례는 하나님과 무관한 행사였습니다. 만일 그 행사가 종교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유대 교회의 법과 하나님의 질서에 대한 반역일 수밖에 없습니다. 제사장이 아닌 일개 평신도가 무엄하게도 종교적 행위를 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지 않은 인간의 제도와 규범의 우상화가 유대교를 망쳐 놓았듯이, 기독교도 망쳐놓았습니다. 인간이 만든 권력과 특권이 교회 공동체의 구성원들을 성직자와 평신도라는 신분으로 양분해버렸습니다. 세례를 행하는 자와 행하지 못 하는 자라는 구분 말입니다. 세례를 행하는 자의 마음에 생겨난 어리석은 신분적 우월감이 교회의 부패와 타락을 조장하는 밑거름이 되었다고 말한다면 지나친 얘기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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