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추천인 명설교편◑/김동호목사 명설교 (155편)

불의한 이익을 탐하는 어리석음 잠12:12~13

by 【고동엽】 2006. 6. 2.

불의한 이익을 탐하는 어리석음            잠12:12~13    

(잠12:12~13) 악인은 불의의 이익을 탐하나

의인은 그 뿌리로 말미암아 결실하느니라

악인은 입술의 허물로 말미암아 그물에 걸려도

의인은 환난에서 벗어나느니라 아멘

 

잠언은 우리에게 지혜와 어리석음을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지혜 있기 위해서

어리석음에 대한 말씀을 주로 하시지요.

 

어리석음을 벗어나는 일이

지혜로움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바

어리석음을 피하라고 가르쳐주시는 그 어리석음은

'불의의 이익을 탐하는' 것입니다.

 

불의함, 옳지 않음에 이익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익이 보통 큰 이익이 아니라

탐스러운,

욕심이 날 만큼 큰 이익입니다.

 

저는 오늘 이 말씀을 읽을 때 선악과 생각이 났어요.

여러분 하나님이 따먹지 말라 한

선악과나무가 보암직하지 않았다면

탐스럽지 않았다면

먹음직하지 않았다면

그냥 지나치고 안 따먹었을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임에도 불구하고

그 유혹을 뿌리치기가 힘들 만큼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러웠습니다.

 

모든 불의의 이익은 탐스럽습니다.

그래서 욕심을 버리기가 참 어렵습니다.

 

불의함에 이익이 있는 것도 문제지만

의로움에 이익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건 더 큰 문제입니다.

 

이익이 안 보이는 것만도 견딜 수가 있는데

여러분 정의로움, 의로운 길에는

손해 보는 게 참 많아요.

 

남들이 횡재해서 큰 이익을 얻을 때

우린 허탕치는 수가 참 많거든요.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이렇게 얘기해요.

'의가 밥 먹여 주냐?' 그렇게 얘기해요.

 

'너, 의가 밥 먹여 주냐? 너 의롭게 사는 건 좋은데

그게 그래서 너, 이익을 얻지 못하잖냐?

밤낮 바보같이 살지 않냐? 손해 보지 않냐?' 하는 게

세상의 이야기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요즘 이 잠언을 통해서

굉장히 중요한 것을 배웠어요.

 

불의의 이익이 있는데

그 불의의 이익은

덫에 꿰어있는 미끼라는 거예요.

 

미끼는 원래 탐스러워야 되잖아요.

먹음직스러워야 미끼가 되잖아요.

먹기 싫어하는 것을 꿰어 놓으면 미끼가 되겠습니까?

 

불의의 이익은 탐스럽지만

그것은 덫에 꿰인 미끼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게 잠언의 교훈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잊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욕심날 만한 일, 한번 눈 딱 감고

'하나님 죄송합니다!' 하고 저지르고 싶은 유혹들이 있을 때마다

이 말씀이 생각나시면 좋겠어요.

 

'이건 덫에 꿰인 미끼다.

저거 먹으면 죽는다!'

 

많은 사탄이 우리에게 이렇게 유혹할 수 있어요.

'안 걸리면 되잖아!

미끼만 빼먹고 도망 나오면 되잖아!'

 

그런데 여러분,

사탄의 덫은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닙니다.

 

절대로 도망 나올 수 없는

강력한 덫입니다.

절대로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꼭 기억하세요.

'사탄의 미끼는 덫이다!

이 덫은 우리가 절대로 빠져나올 수 없다'

 

'다른 사람은 다 걸려도 나는 안 걸려!'

이런 망상에 빠지지 말고

 

불의의 이익을 덫에 있는 미끼를,

미끼로 이해하고 두려워하고 무서워하고 피하여서

여러분의 생명을 보존하는

우리 날기새 가족들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불의의 이익'이라는 말이 참 중요해요.

그 이익을 탐해서

탐하다 보면, 어디에까지 이르게 되나?

 

불의에 이르게 되잖아요. 불의한 이익이니까!

불의한 이익을 따 먹으면 불의를 함께 먹는 거예요.

 

그런데 불의의 삯은 사망이잖아요.

불의의 삯은, 죄의 삯은 사망이니까

그러니까 그 덫에 걸려서 죽어가는 것이죠.

 

여러분, 악인이 되면 반드시 심판이 있고

덫의 결국은 사망입니다.

 

그런데 불의의 이익,

우리가 자꾸 탐하게 되는 불의의 이익은

이 세상에 어떤 것들일까요?

 

도둑질하는 것!

남의 물건 도둑질하는 것, 불의의 이익이겠죠?

 

더 나아가서 강도질하는 것,

사람의 생명을 빼앗고

그러는 건 더 악한 일이겠죠? 불의의 이익이죠.

 

사기 치는 것,

거짓말로 속여서 남의 물건을 취하는 거,

불의의 이익이겠죠?

 

저는 탈세도 불의의 이익이라고 생각하는데

정당히 내야 할 것을 내지 않고

이렇게 하는 것도 불의의 이익이라고 얘기하겠죠?

 

또 뇌물을 주는 것, 뇌물을 받는 것

뇌물을 주는 것도 불의의 이익이에요.

 

그것을 통하여 온당치 못한 이익을 얻으려고 하니까

주는 것도 나쁘고요. 받는 것도 나쁘죠.

 

그래서 뇌물은 받는 것만 나쁜 게 아니라

주는 것도 나쁜 겁니다.

 

이게 불의의 이익입니다.

거기에 탐해서 넘어가게 되면

우리는 불의에 속하게 되고, 악인이 되고

사망의 길로 접어들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여러분,

뇌물, 탈세, 뭐 이 정도 우리가 늘 범할 수 있는

보편적인 오류인데

 

특별한 사람 아니면, 특히 우리 날기새 가족들 정도 되면

사기를 친다던가, 도둑질을 한다던가

강도질을 한다던가

그런 유혹에 쉽게 빠져들지는 않을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

사탄은 큰 것으로 우리를 넘어트리지 않아요.

정말 무서운 죄는 큰 죄가 아니에요.

 

큰 죄가 무섭지만

큰 죄는 우리가 경계해요.

죄가 너무 크니깐 무서워해요.

 

그런데 '이게 죄인가 / 아닌가?'

긴가민가 하는 작은 죄가 사실은 무서운 죄예요.

 

'이 정도쯤이야, 이건 괜찮겠지'

하는 것에 사탄의 미끼가 있어요.

 

제 사촌 동생 하나가 미국에서 사업을 하는데

그 회사 사무실에 한 번 간 적이 있어요.

 

거기에 한국 직원도 있고

미국 직원도 있고 그러더라고요.

 

꽤 오래전이네요. 몇십 년 전 얘기인데

그때 우리 동생 아이가

미국 직원 한 사람을 이렇게 가리키면서

 

'저 친구 참 대단한 친구야!'

왜 그러냐 그랬더니

 

'존경스러워! 교회도 안 다니는데 참 존경스러워!'

왜 그러냐 그랬더니

공 과 사 개념이 분명하다는 거예요.

 

사무실에서 쓰는 볼펜, 종이 한 장도

사적으로 쓰지 않는다는 거예요.

집에 가져가지 않는데요.

 

사무실에 있는 볼펜 가져가지 않고

뭐 그 정도가 아니라

회사에 있는 전화로 개인적인 전화를 걸지 않는데요.

 

그래서 우리 사촌동생이 그 직원에게

'한국에서는 그런 것은 문제 삼지 않는다

그 정도는 괜찮다..' 그래도

 

'예, 알겠습니다. 

그런데 저는 불편해서 그게 좀 힘듭니다.'

그런 얘기를 들었어요.

 

여러분 이게 정직함이에요.

여러분 이 정직함이 선진국의 척도를 나타내더라고요.

 

교회 안 다니는 사람, 예수 안 믿는 사람도 그게 기본이에요.

 

그런데 우리에게 좀 뒤떨어지 면은, 교회를 다니는 데도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구별이 떨어져요.

 

'회사 것도 내 것이고, 내 것도 회사 거고..'

이런 게 분명치 않으면

여러분 그 작은 것 하나,

종이 한 장이라도 회사 꺼 집으로 가져오면

불의의 이익을 탐하게 되는 것 아닐까요?

 

제가 오늘 이렇게 얘기하면

'그건 좀 너무 심한데.. 에이, 그게 뭐 불의의 이익입니까?'

라고 얘기할 수 있는데

 

우리 옛말에 이런 말이 있잖아요. 여러분

바늘 도둑이 소 도둑 된다고..

 

바늘 하나 가져온 것 가지고 누가 뭐라 그러겠습니까?

특히 우리나라 같은 데는 그게 문제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꾸 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무뎌져서, 둔해져서

나중에는 소도둑까지 되는 거거든요.

 

사탄이 그렇게 우리를 유혹해요.

 

▲요즘 동물에 대한 방송이 참 많잖아요.

유기견, 산에서 있는 동물들 위험에 처하면

생포해가지고 살려주려고 할 때

 

그물을 치고 그 미끼에 먹이를 놓고

유기견을 살살 그물 속으로 끌어들이더라고요.

 

그런데 깊이 숨은 유기견을

안전하게 포획하기 위해서는,

먹이(미끼)를 하나, 둘, 셋 .. 이렇게 조금씩 간격을 두고

떨어트려 놓더라고요.

 

그러면 하나 먹고, 그 다음 꺼 또 하나 먹고,

그 다음 꺼 하나 또 먹고 하다가

포획하는 틀 안으로 들어와서

문이 닫히고 잡히고...

 

그건 잡히더라도 결국 살고 풀려나는 거니깐 좋은 일인데

그런 식으로 작게 점점 하나씩 유혹하듯이

사탄도 우리를 그렇게 유혹한다고요.

 

'바늘 하나 가져온 것 가지고 뭐 그러냐?

김 목사 너무 지나치다.

그게 무슨 도둑이냐? 그게 무슨 불의 한 일이냐?'

 

그러나 거기서부터 시작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윤동주 시인을 참 좋아해서

윤동주 시인의 시를

여러 번 얘기했을 거예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잎새에 부는 바람도 아니고요.

잎새에 떠는 바람도 아니고요.

잎새에 이는 바람, 아주 살랑살랑 부는 약한 바람!

 

그건 바람 아니에요. 남도 몰라요.

떠는 바람 정도는 가까운 사람이 알 수 있어요.

이는 바람은 아주 예민한 사람이 아는 거예요.

 

'이는 바람에도 괴로웠다.'

 

여러분 그것이 의인의 길로 가는 길이고

하나님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일에

우리가 갖추어야 할 믿음의 덕목인 줄을 믿습니다.

 

옛날에 어느 교회 장로님,

큰 다국적 기업의 수석 전무님이셨는데요.

그분에게 충격적인 얘기를 들었어요.

 

회사에서 주는 회사 차가 있는데

전무님 중에서도 수석이니까 굉장히 고위직이었죠.

 

그런데 그 회사에서는

그 회사 공무를 위해서 쓰는 거기 때문에

그 차를 가지고 출퇴근을 할 때

출퇴근도 하는데

그게 사적인 용무냐 공적인 업무냐를 따진대요.

 

그런데 그게 참 애매하대요.

그 출퇴근에는 공적인 개념도 있고

사적인 유익의 개념도 있는데

'야, 뭐 그거까지 그러냐?' 그랬는데요.

 

그래서 제가 여쭸어요.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고 그 회사에서는?

 

그것도 몇 십 년 전 얘기인데

그래서 자기는 한 달에 십만 원씩을

그냥 회사에다가 낸다고..

 

그래서 십만 원으로 내가 사적인 것에 쓰는 일을

그냥 이렇게 계산한다고..

그 정도까지 예민해요.

 

여러분 그러지 않으면 우리가 불의의 이익을

탐하는 일에서 자유롭기가 참 어려워요.

 

남에 대해선 좀 너그럽고

남에 대해선 좀 관대하더라도

자신에 대해선 지나치다 하리만큼 좀 철저해서

예민해서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서

여러분 불의의 이익을 탐하는 어리석음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는 우리 사랑하는 '날마다 기막힌 새벽'

가족들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