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나라는 무엇인가 1
얼마전에 국민의 힘 청년당직자가 하나님이 통치하는 나라를 기다린다고 말했다가 여론의 질타를 받고 당직에서 해임된 일이 있습니다. 내가 문제로 인식하는 건 그리스도인들이 그 말이 어때서 해임당하는가 라고 의아해 하고 있다는 겁니다. 기독교의 과제는 정체성과 사회와의 연대 입니다. 일못하는 목수가 연장 탓하듯이 사회가 모른다고 세상 탓할 일이 아니라 기독교의 정체성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청년과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에게 2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1. 하나님이 통치한다. 신에 대한 인식 입니다.
2. 하나님나라 즉 좋은 국가가 있다고 하는 인식 입니다.
1. 하나님이 통치한다는 인식은 전지전능한 신이 세상을 섭리한다는 섭리신관에서 온 인식인데, 이 신관은 심지어 유대교도 아니고 그리스 신관 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신은 '제일 원인' '부동의 동자'라고 합니다. 그래서 신은 영원에서 움직이지 않고 세상을 빈틈없이 주관 합니다. 네로황제의 스승인 세네카의 '섭리에 대하여'가 이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기독교가 5 세기 신학이 정립될 때 이것을 받아서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신이 지배하고 통치하니 목사 등 지도자들이 신에 상응해서 통치하고 지배하려 듭니다. 인간은 신을 닮아야 하니까요. 그래서 현재 한국교회는 아버지 하나님만을 따르므로 유대교 입니다.
우리는 예수교(기독)이므로 삼위일체 하나님 특히 예수에게 계시된 신을 믿고 따릅니다.
제자들이 서로 높은 자리에서 지배하려고 다투자 예수는 나는 세상을 통치하고 지배하려고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합니다.(마가10:35-45)
바울은 하나님이 전지전능한 것이 아니라 연약한 우리를 도우시기 위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 한다고 합니다(로마8:26) 하나님도 어쩔 수 없는 일이 일어나서 하나님도 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통치하지 않고 사랑으로 섬깁니다.
2. 어떤 좋은 나라가 오는가 하는 문제 입니다.
1 세기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정의롭고 부강한 나라를 만들어 줄거라고 기대하고 그걸 이루어줄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가롯유다도 그런 나라를 이루기 위해 예수를 따랐다가 예수가 자신의 의도와는 다른 길을 가자 배신 합니다.(괴테)
신의 계시자인 예수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하나님나라가 언제 오냐고 물었습니다.
예수는 하나님나라는 너희 바리새인들 사이에 이미 있다고 합니다.(누가 17:21)
개역개정은 '안에' 그리고 다른 모든 성경은 '가운데'로 번역한 entos 는 '사이에' 또는 가운데 입니다.
이 안에라고 한 번역 때문에 많은 신학자와 목사 등 성직자들이 하나님나라가 내 마음 안에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믿음이 삶과는 상관없는 관념적, 심령적, 내면적이 된 대표 사례 입니다.
하나님나라가 바리새인들에게 있다고 했으니, 어떤 경건한 혹은 정의롭거나 사랑의 공동체가 아닙니다. 또 사이에 라고 했으니 어떤 특정한 장소도 아닙니다. 즉 국가가 아닙니다.
그러니 예수가 말하는 하나님나라는 유대인들이 기대한 정의롭고 부강한 나라도 아니고 오늘날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말하는 마음속에 있는 나라도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나라는 무엇일까요
철학자들은 사람과 생명체 사이, 사람과 사물의 '사이'를 주목 합니다.
앙리 베르그송은 생명이 진화 한다고 합니다. 창조적 진화 입니다. 그는 생명의 청조적 진화가 계속되고 있다 하여 그것을 '지속'이라고 합니다. 그는 말하기를 나와 다른 사람, 나와 사물 간이 연결되어 있는데 우리는 떨어져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것을 영상기계적 착각이라고 하는데 영화가 정지된 화면을 촬영해서 돌려봄으로써 우리가 그것이 움직임으로 아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그 사이가 실은 연결되어 있고 그 사이에 '생명'이 있다고 합나다.
또한 키에르케고어, 칼 바르트는 우리 사이에 사랑이 있다고 하고 특히 마르틴 부버는 나와 너 사이에 사랑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서로의 관계가 깨지면 우리는 신과 생명을 밀어내는 것 입니다.
또 하나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견하시고 우셨습니다.
저들이 구원하러 오신 때(공동번역)를 몰라서 평화의 길을 모른다고 합니다. 구원하러 오신 때는 에피스코패로 visit 를 의미합니다.
즉 영원에서 시간으로 온 하나님나라를 말합니다.(누가 19:41-44)
하나님나라는 당시 유대의 개념인 하나님의 의가 이땅에서 어떻게 실현되어 가고 있는가룰 설명하는 가운데 1 가지 입니다. 즉 은유(metaphor) 입니다.
하나님나라를 은유가 아닌 국가나 어떤 체재로 이해하면 다음 성서 구절을 해석할 수 없습니다.
세례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태11:12)
천국을 누가 폭력으로 빼앗아 간다는 말씀인데,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어떤 체재나 나라를 마귀가 빼앗아 간다는 건 말이 안됩니다.
천국을 우리 삶에서 이루는 은유라고 할 때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우리의 삶이 항상 유혹에 노출되어있기 때문 입니다.
하나님의 의란
1. 마태는 천국(허늘나라)이라고 합니다. 당시는 지구가 평평하고 그 평평한 땅이 3 층으로 되어 있어서 하늘위의 또 하늘에 하나님과 아담 등이 살고 있다고 생각해서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 가르쳤습니다.
2. 마가와 누가는 하나님나라 입니다.
3. 요한은 영생 입니다. 죽지않고 영원히 산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인 영원에 산다는 의미 입니다. 어거스틴은 그의 고백록에서 말하기를 실제로는 현재란 없고 개념으로만 존재하는데, 미래가 현재로와서 순간적으로 과거로 가기 때문 입니다. 그 현재를 신의 은혜로 넓게 사는 게 하나님 나라 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영생 입니다.
4. 바울은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으니 법(법률 문화 사상 이념 도덕 가치체계 등)으로 살지 말고 믿음으로 살라고 합니다.(로마1:16-17, 3:21)
대부분의 종교학자, 신학자, 목사들이 기독교가 다른 모든 종교와 사상과는 다른 게 무엇인지 모르고 있습니다.
다른 종교와 사상은 인간성 계발을 목표 합니다. 불교의 모체인 힌두사상인 범아일여 사상은 참자아인 아트만과 영원의 본질인 브라만이 같다는 사상 입니다. 그래서 이들의 목표는 참자아를 찾는 것, 완전한 인간, 인간성 계발이 목표 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수련회 한다고 눈밭에서 청년이 죽고, 자기 인분 먹이고 난리 부르스를 치는 건 기독교를 모르는 겁니다. 인간성계발은 불교가 기독교보다 훨씬 깊은 프로그램을 깆고 있습니다. 이것이 나쁘다는 게 아닙니다. 기독교는 그 길이 아니라는 겁니다. 기독교는 신의 인도로 인간성의 한계를 깨닫고 하나님의 의가 내 삶을 통해 이루어져가는 삶을 살아내는 것 입니다.
하나님의 의인 체다카는 구약에서 심판, 판단, 구원, 자비 등 매우 여러개념으로 사용됩니다.
특히 제 2 이사야는 구원으로 사용 합니다.
바울은 하나님나라란 의와 기쁨과 평화의 삶이라고 합니다.(로마14:17)
당시 그리스 신전에서 제사지낸 고기를 먹는 자유파와 안 먹는 경건파가 싸우기 때문에 한 말 입니다. 그러니 여기서 의는 체다카로서 상대를 판단하지 말고 좋은 관계로 평화하고 기쁘게 사는 게 하나님나라 입니다.
여러분 모두 평화하기를 !
(나는 기독교와 교회를 깊이 사랑 합니다. 여기에서 기독교와 목사를 인격적으로 모욕하는 사람은 차단 합니다. 처음에는 그래도 감당하고 함께 하려 했으나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음지에서 묵묵히 일하시는 목사들이 모욕받아서는 안 되기 때문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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