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세대는 성경이 핵심 교과다! 딤후3:14~17 출처
우리는 어제부터, 다음 세대를 준비해야 되는데
왜 준비해야 되며,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 ... 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어제는 잠깐 서구 유럽교회를 중심으로, 그 몰락의 현장
그리고 몰락하게 된 원인을 두 가지로 생각을 해봤죠.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에 대한 정경성, 이러한 원칙들을 원리들을 내려놓는 순간부터
교회는 쇠락하기 시작했고, 그 여파로 각 교단마다 뭐가 줄어들었다고요?
교회학교에 대한 투자가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맥락을 끊는 아주 중요한 근거가 됐죠.
자 그러면 오늘 우리는 이러한 현상을 반면교사 삼아서...
답은 정확히 나와 있어요. 뭘 복원해야 될까요?
성경에 대한 권위와, 또 교회학교 뿐만 아니라
우리가 지금도 겨울성경학교, 여름성경학교 들을 대개의 교회에서 진행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이 교회 학교에서만 진행되어져야 될 문제는 아니에요.
어른도 '어른성경학교'가 당연히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진행이 돼야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대에 가장 시급한, 다음 세대를 향은 징검다리는
실추된 성경의 권위를 회복하고, 그리고 모든 교회가
'성경의 허기'를 다시 한번 회복하게 되기 바랍니다.
우리가 한 두끼만 굶어도 허기가 져서 금방 '당 떨어졌다' 그러고 하고 증상이 오잖아요.
근데 며칠씩, 심지어는 몇 달씩.. 주일날 예배시간에 성경 찾는 일 외에는
스스로 성경을 읽어본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렇지도 않는 그 현상은
영적으로 지금 심각한 질병이 시작된 된 건데
그걸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게, 더 심각한 문제겠죠.
지금 보편적인 한국 교회의 현상이, 이 중증에 걸려있습니다.
말씀을 읽지 않는데도 반응이 없어요.
▲롬10:8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여기 보면 '말씀'이라는 단어 앞에 '믿음의' 라는 수식어가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말씀'이에요.
결국 말씀이 우리에게 계속 주입되고, 가르쳐지고, 깨달아지고,
우리가 말씀을 지속 반복적으로 먹어야 되는 궁극적인 목적이 뭘 위해서 입니까?
믿음을 위해서 라는 거죠.
구원은 어떻게 얻어지는 겁니까? 믿음으로 얻어지는 거에요.
그런데 이 믿음은 어떻게 생기는 거죠? '들음에서 난다' 그랬어요.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롬10:17
그러니 말씀을 들어야 될 거 아니에요. (당시에 개인에게 성경 없었음)
여러분, 구약의 유명한 사건을 기억하십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 홍해를 건너서, 2년 걸려서 가데스 바네아, 가나안 입구에 들어섰어요.
이제 가나안을 앞에 목전에 두고, 12 정탐꾼이 들어가서 그 땅을 쭉 탐색했어요.
그리고 나서 돌아와 그들에게 얻어진 보고는, 양쪽으로 나뉘어졌습니다.
똑같은 현장,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것을 보았는데
10 명은, 절대 들어가서는 안 되는 땅이라고 보고를 했고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시면 능히 그 땅을 얻을 수 있나이다!'
근데 누가 이겼죠? 다수의 소리가 이겼어요.
그래서 그들은 또 쓸데없고, 불필요한 시간을 낭비하게 됩니다.
그리고 거의 40년 만에 다시, 여리고 성 맞은 모압 광야에서 두 정탐꾼을 들여 보내게 됩니다.
그 두 정탐꾼의 이름은 정확히 명시되어 있지 않아요.
그런데 그 두 정탐꾼이 들어가자마자, 정탐을 하기도 전에
바로 위기가 발생해서, 어느 집에 숨어 들어가게 됩니다.
그 집이 유명한 기생 라합의 집이에요.
아마도 이 기생은 생계형 기생이었던 것 같아요.
두 정탐꾼은 땅을 정탐하러 들어갔는데 바로 발각이 돼서 정탐도 못하고,
어느 창기의 집에 은신을 하게 된 겁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는 듯, 팩트는 그렇게 보였지만
이 실패같아 보이는 흐름에도, 하나님의 아주 절묘한 그림 하나가
마치 숨은 그림처럼 숨겨져 있었어요.
▲정탐꾼들이 라합의 고백을 <듣고> 믿음이 생겼어요.
이 두 정탐꾼이 그 집에 숨어 들어가서, 그 집 안주인인 라합과 얘기를 하다가
깜짝 놀랄만한 사실 하나를 알게 됩니다.
수2:8~11 '또 그들이 눕기 전에 라합이 지붕에 올라가서 그들에게 이르러
9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주민들이 다 너희 앞에서 간담이 녹나니
10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니라
11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
놀랍게도 이 가난땅 안에 살던 라합이라는 여인의 입에서 '여호와' 라는 고백이 나왔어요. 2:9
게다가 '하나님의 약속'도 정확히 알고 있어요.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9
여기서 더더욱 놀라운 것은,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너고 광야를 지나 오는 동안에
그렇게 가나안 땅에 대해서 두려움을 갖고 있었어요.
'가서 우리가 전멸당하는 건 아닐까?' 대성통곡을 하고 난리쳤어요.
그런데 정작 이미 하나님께서 이 가나안 원주민들의 마음을 어떻게 만드셨습니까?
다 무너뜨려놨어요. 간담이 녹아지도록 만들어놨어요.
그러니까 정말 '무혈 입성'이 준비돼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연약함과 불신앙으로
그것을 일찍이 경험하지도, 누리지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이 두 정탐꾼은, 이거 확인하러 하나님이 들여보내신 거예요.
땅은 차치하고라도.
그 다음절에서 우리가 더 신기한 점을 발견하게 되는데, 라합의 말이 계속 이어집니다.
'10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니라'
결국 이 라합은 믿음이 어디서 나온 거예요? 들어서 생긴 겁니다.
그럼 여기서 질문이 자연히 생길 수밖에 없는 게
라합만 그 소문을 들었을까요? 아니죠.
여러 사람들, 말귀를 알아들을 만한 사람들은
그 엄청난 경이로운 어떤 신의 역사에 대해서.. 다 들었을 거예요.
그 가운데 믿기는, 누가 믿었습니까? 라합만 믿었어요.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여기서 우리는, 그래서 이 '믿음'이라는 것은
내 안에서 열려지거나, 깨달아지는 작업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물' 이라는 엡2:8~9절이 그래서 설명될 수밖에 없는 거예요.
'믿음은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하나님의 선물이라' 2:8
그러니까 믿음은 아브라함 으로부터 어떻게 우리에게 내려오고 있습니까?
네, 하나님이 말씀을 들려주신 결과인 것이 믿음이에요.
그러면 하나님이 그 믿음을 집어넣기 위해서, 우리에게 계속 뭘 들려주세요?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세요.
'우리가 들었음이라' 수2:10
여리고 사람들이 들었는데.. 믿는 자가 생기고, 안 믿는 자가 생겼어요.
11 (라합의 고백)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
이것보다 더 훌륭한 신앙고백을 어떻게 하겠어요.
가나안 땅에서 가련한 슬픈 인생을 살던 여인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설득과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스토리로
이미 믿음이 들어가 있었어요.
그런데 이 믿음의 여인의 입술을 통해서 증언된 말씀은
이스라엘 온 공동체를 참 부끄럽게 만들었어요.
'아이고 우리가 그때 괜히 난리를 피웠구나..
그때 (38년 전에)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그냥 가나안으로 들어갔으면
그 엉뚱한 시간, 엉뚱한 에너지 낭비, 그런 세월들이 다 필요 없었을 텐데...'
이미 하나님은 그 땅을 다 무너뜨려놨어요.
심정적으로도 그랬고, 정서적으로도 그랬고.. 다 허물어뜨려놨어요.
그 믿음이 어디서 생겼다고요?
들으면서 생긴 것입니다. 롬10:17
▲엠마오 길의 제자들도 <말씀을 듣고서> 믿음이 다시 생겼어요.
자 그러면 여기에서 우리가 또 하나 주목할 것은 뭐냐하면
또 하나의 사례를 봅시다.
십자가사건을 겪고 나서 제자들은 다 흩어졌어요.
베드로는 마지막 현장까지 따라갔지만, 결국 스승의 등에 비수를 꽂는
배반의 역사를 그려내고 말았죠.
그 다음에 더 중요한 것은, 제자들이 부활의 소식도 들었고, 부활을 목격했습니다.
그러면 '진짜 살아나셨네! 이럴줄은 몰랐는데...' 하고 다시 모여서
뭐 재조직을 하던지, 다시 회합을 해야 될 거 아니에요.
근데 그 주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위대한 부활의 소식을 듣고도, 뿔뿔이 다 흩어져 버렸어요.
그리고 두 제자는 고향 엠마오로 향해서 내려가고 있었어요.
그때 그들 곁에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났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두 제자 사이에 대화가 이루어져요.
제자들은 아직 이 분이 예수님인줄 못 깨닫고 있어요.
눅24:24 '또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이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
25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여기서 예수님이 뭘 지적했는가 하면 '선지자들의 말한 것을 더디 믿는 자들이여'
'선지자들이 말한 것'은 구약성경을 뜻합니다.
구약성경의 모든 초점은, 오실 메시아에 대한 기록이었죠.
'그 구약성경을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러니 예수님의 근본적인 질책은, '왜 성경을 안 믿느냐?' 그 말이에요.
이때는 신약성경까지는 완성이 안 됐지만, 구약성경은 존재해 있던 때입니다.
근데 부활의 주님이 제자들에게 질책한 것은
'믿음' 보다도 더 근본적인...
'왜 선지자들의 글(성경)을 믿지 않았느냐?, (성경을) 더디 믿는 자들아!'
그리고 이런 내용이 이어집니다.
26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의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27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의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예수님이 결국 이들을 뭘로 그 현장에서 가르치셨습니까?
성경이에요. 성경을 가르치셨어요!
△자 그러면 아까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서 생각을 해 보십시다.
'왜 십자가사건 이후에, 제자들은 부활을 분명히 목격하고도 그들은 다 흩어졌습니까?'
이유는 하나예요. 십자가의 의미가 뭔지 몰랐어요.
구약성경을 열심히 읽지 않았던 거죠. (그래서 예수님이 구약을 풀어주신 거죠)
이렇게 된 거죠. '아무리 부활을 한들
십자가에서 그렇게 무기력하게 죽어가시는 메시아라면,
우리가 또 따라나선들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그러니까 이 제자들은, 끝까지 십자가에 그 죽음의 의미가 뭔지를 몰랐어요.
그래서 자포자기 한 거죠.
여기 엠마오길 도상에서도, 예수님이
자기가 십자가 죽음에 들어가서 그 영광을 받아야 되는 줄을 풀어서 설명을 하신 거에요.
뭘 기초로? 모세와 선지자들의 글을 기초로! 눅24:27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은 구약성경을 얘기하는 거에요.
그들은 빈무덤을 보고 어떻게 했습니까?
어떤 여자는 울고, 어떤 사람들은 두려워했고...
여러분, 이게 참 역설인데요.
무덤이 비어야 맞는 겁니까, 거기 예수님의 시신이 누워있어야 맞는 겁니까?
무덤이 비어있으면 '부활하셨구나!' 이래야 되는데
시신이 없는걸 보고 울었어요. 두려워했고...
빈 무덤이라야 맞잖아요. 그래야 부활의 기독교가 성립이 되잖아요.
그러니까 이들은 그런 엄청난 경험들이
성경의 약속인 줄을 아직 몰랐던 거예요.
성경과 현실이 아직 매치가 안 되는 거예요.
그러니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은, 그냥 무기력한 예수님인거죠.
'그런 예수님이 또 부활한들,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그래서 다 흩어졌어요.
그렇게 실망하여 고향으로 내려가던 제자들을 붙들고
예수님이 따뜻한 만찬을 준비하셔서 떡을 떼시며 말씀을 풀어 주실 때
그들의 마음에 성령의 감동으로 뜨거움이 일어났어요.
예수님이 사라지시고 나서, 두 제자가 서로 주고받는 대화가 뭐예요?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눅24:32
결국 사도행전을 연 것은, 물론 성령의 역사도 있지만
더 근본적인 역사는, "성경에 약속이 깨달아지자"
'이거였구나... 그래서 그 분은 죽으셔야 했구나...
그분이 죽어야만 우리의 죄가 온전히 용서될 수밖에 없었기에
그래서 그분은 죽으셔야 했구나...'
이게 말씀이 열리면서 이해가 된 거예요.
▲정리하면, 결국 이 시대의 문제는, 교회에 무슨 전략이 잘못돼서도 아니고
교회의 도덕성이 무기력해진 것이, 그 근본적인 이유가 아니에요.
더 근본적인 원인을 찾으라면,
첫째는, 말씀의 권위에 대한 그 정경성을 놓쳐버렸고
두 번째는, 우리 한국교회의 선교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한국 기독교는 성경의 토대 위에 세워진 교회입니다.
세계 기독교 선교역사에 한국교회는 아주 독특한 국가입니다.
선교사가 먼저 들어온 나라가 아니라, 선교사보다 복음이 먼저 들어왔어요.
'쪽복음'이라는 책을 통해서, 단권 성경으로 나누어진 '쪽복음'이 번역이 돼서 먼저 들어왔어요.
(1882년 중국 선양에서 스코틀랜드 선교사인 존 로스 목사와 한국인 성도들이
처음으로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을 한글로 번역해 조선으로 보급함)
그리고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그만큼 성경을 사랑했어요.
그래서 사경회를 하면, 2주간씩, 자기 먹을 것 다 짊어지고 와서
교회에서 자고 먹고 그러면서, 2주 동안 성경만 설명해서 풀어주시는 강사님을 모셔서 배우는,
한국 교회사에 아주 귀한 전통 중에 '사경회' 라는 전통이 생겨났어요. *査經會 : 성경을 조사(공부)하는 모임
그것은 정말 말씀만 풀어주는 집회였고, 어떤 의도된 다른 목적이 없었어요.
'그냥 성경이 말하시는 대로!'
그러다가 평양대부흥운동이 일어나고, 엄청난 복음이 이끄는 역사를
한국 교회가 갖게 된 거죠.
이 제자들이, 그 마음 한복판에 하나님의 생생한 말씀이 심어지기 시작하면서
거기에 성령의 기름부음이 나타나면서, 결국 사도행전 시대를 열게 된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 교회가 앞으로 다음 세대를 위해서 준비해야 된다"는 명제는 알겠는데
그 속 내용에 있어서,
과연 다음 세대 그들에게 뭘 집어넣고, 뭘 가르치고, 뭘 준비해야 될 것인가요?
정말 우리 교회가 꾸어야 될 꿈이 하나 있다면, 성경학교입니다.
온 교회가 바이벌 스쿨, 성경학교가 되어야 돼요,
그래서 그 말씀이 우리 삶을 이끌어 내고
우리의 모든 부패된 마음을 고쳐내고
그래서 본문 16절만 한번 같이 읽어보십시다.
딤후3:15 '또 어려서부터 (네 디모데가)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구원은 단선적이지 않아요. 태어나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구원이 완성되도록 까지 잘라야 돼요.
아기가 태어나면, 그 아기도 사람이지만
그 아기가 사람다운 구실을 하려면
길고 먼 기다림과 양육과 돌봄이 필요합니다.
딤후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제 성경을 그렇게 교육 해야되고, 가르쳐야 되고, 외워야 되고.. 하는 목적이 뭐냐?
17절은 그 성경을 배워야 되고 가르쳐야 되는 목적이에요.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여러분, 유념해서 들여다 봐야 될 단어 하나가 16절에 있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감동으로 되었다'는 말은, 원문그대로 재해석을 하면 이런 뜻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의 숨결로' 라는 뜻이죠.
<성경의 권위>라는 존 맥아더 목사님이 쓰신 책이 있어요.
거기 보면 '하나님의 숨결'이라는 표현을 썼어요.
우리가 원래 창조될 때 어떻게 빚어졌죠? 흙으로 빚어졌어요. 흙덩어리였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담의 코에다가 하나님의 숨결을 집어넣으니까
그제야 흙덩어리가 산 영이 되고, 하나님의 형상이 되고, 생명이 됐습니다.
이 죽음으로 가득한 땅에, 죽음이 지배하는 영혼에, 뭐가 들어가야 되겠어요?
세상의 철학과 이론과 사변적인 것이 들어가야 그 사람이 살겠어요? 아니에요.
하나님의 숨결이 들어가야 삽니다.
이건 일반 소설가들이 '영감'을 받는 거 하고는 본질적으로 다른 영감입니다.
즉 전능하신 하나님의 전능하신 숨결(영감)이 담아진 이 성경 말씀이 그 영혼에 들어갈 때
회복과 소성함과 일어켜짐의 역사가 나타나는 겁니다.
한번 해보세요!
왜 우리가 신앙생활을 그렇게 끈질기게 오래 하는데도
왜 변화가 안 나타나고, 다시 사는 부활과 부흥의 역사가 안 나타날까요?
결국은 성경을 옳게 깨닫지 못할 때, 그런 현상이 나타나는 거예요.
다시 한번 이 말씀에 대한 허기가 여러분 속에 일어나고
여러분의 자손들에게 그것이 계승되고, 전해지고, 가르쳐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숨결이 들어가고, 그 숨결(영감)을 사모하는
회복의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하고 축복합니다.
오늘 이 새벽에 두 가지 기도 제목을 드리겠습니다.
첫째는 '우리 교회가 뭐 한국교회에 모범이 되어달라' 그런 기도하지 마시고
우리부터 바른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게 하시고
그 말씀에 허기를 회복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교회학교가, 성경을 가리키는 성경학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 이어질 기도는, 복음이 없는 땅에, 선교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고
여러분이 홀로 기도할 수 없을 때, 앞에 나와서 우리 목사님들의 도움을 함께 나누시길 바랍니다.
우리 이 시간에 다같이 한번 '주여!' 한 번 부른 다음에
통성으로 소리 내어 기도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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