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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사랑설교 108편

나는 사랑받는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말4:1~6

by 【고동엽】 2024. 12. 31.

 

나는 사랑받는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말4:1~6            

지난 주일에는 에베소서를 마치면서 '전신갑주'를 말씀드렸습니다.   
단어 자체가 사뭇 전투적입니다. 
에베소서 전체의 주제가 '은혜와 평화'라고 했는데 '무장하라'니...

우리의 무장은 'Armor For Amor 사랑하기 위한 무장' 이라 했습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했는데, 그러나 그 태도가 '싸우는 태도'여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인내하고, 양보하고, 섬기고, 낮아지기 위해서 
사랑하는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지난 주일에 보았던 <글래디에이터> 영화는 
역사적으로 로마의 '5현제 시대' 끝 부분에 일어난 일입니다. 

5현제 시대는, 탁월한 5명의 황제를 뜻하는데, 
에드워드 기번 이라는 유명한 역사학자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세계역사 중에서 동서고금을 통틀어서, 인류의 상태가 가장 행복하고 번역했던 시기를 
말해 보라는 요청을 받는다면, 우리는 망설임 없이 대답할 수 있다. 
도미티안의 죽음부터 (도미티안은 폭군입니다. 계시록이 이때 기록됐어요)
코모두스의 즉위 전까지의 시기라고'  -에드워드 기번, <로마제국 쇠망사>중에서

도미티안 - [ 네르바 - 트라잔 - 하드리안 - 피우스 - 아우렐리우스 ] - 코모두스

<글래디에이터> 라는 영화는, 아우렐리우스의 죽음에서 코모두스의 통치가 시작되는 
시점부터 다루고 있습니다. 영상을 잠시 보시겠습니다. 



영화에서는 이렇게 아버지를 끌어안은 아들 코모두스가, 아버지를 질식사 시킵니다. 
그리고 황제가 되어서, (아버지께 사랑받지 못한) 그 증오를, 
세상을 향해서 퍼붓습니다. 

영화는 픽션이고요. 역사적인 사실은 약간 다릅니다. 
그러나 이 장면은, 당시 로마 제국의 분위기와, 그 사회의 아픔을 잘 보여줍니다. 

아우렐리우스가 '아들로서 너의 실패는, 아버지로서 나의 실패다. 
가정의 실패이고, 자녀의 교육의 실패이다'

아우렐리우스가 탁월한 스토아 철학자 였기 때문에, 로마 철학의 실패였습니다. 
로마 철학의 아주 중요한 것은, 성품을 기르는 거였어요. 

지혜, 용기, 정의, 절제 등 (목표로 삼았지만)
그 성품을 만드는데 로마가 실패했고요, 
그래서 로마의 쇠락이 예견 되고 있다 할 수 있는.. 영화의 대목입니다. 

▲분문 말씀에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회복'을 말합니다. 
말4:5~6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위 구절은, 구약성경의 맨 마지막 말씀입니다. 
그만큼 무게가 실려있는데,

구약성경은 '기다림'으로 끝납니다. 
또한 위 구절에 보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회복'를 기다린다고 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당시에 깨어진 가족이 너무 많아서, 가족 관계의 회복을 말하는가요? 
-아니면 상징적으로 '이스라엘이 그 아버지이신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된다' 라는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둘 다 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은,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 총체적인 문제를 전부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번영했고, 더 이상 행복할 수 없었다' 라는 그 시기에 *로마 5현제 시대
그 중에서도 최고 부자인 황제의 가정입니다. 

돈만 많은 것이 아니라, 가장 똑똑한 사람이었어요. 
과거에 우리 교과서에 <명상록>의 저자로도 나왔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그런데 이 가정도, 아버지와 아들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사랑받지 못한 한 남자의 문제, 거기서 온 나라, 사실상 온 세계가 
피로 물들고, 고통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역사가 시작되는 거예요. 

오늘날도 많은 자녀들이 그렇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금수저가 못 돼서 불행하다.' 
아니에요. 잘 나간다 하는 가정들 가운데서도, 
얼마나 고통과 불안이 많은지... 여러분 아시잖아요. 

로마시대에도 그랬고, 오늘도 그렇습니다. 
황제 코모두스는, 아버지에게 인정받지 못했던.. 사랑받지 못한 자아.. 
라고 하는 그 생각을 갖고, 얼마나 처절하게 몸부림 쳤는지 모릅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사랑을 먹고 삽니다. 
무엇이 사람을 사람으로 만드는가? 사람됨의 핵심이 뭔가요?

'사랑 받는 것'입니다.

▲여러분, 근대가 시작되면서 데카르트가 이런 유명한 말을 했죠.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I think, therefore I am ... 라틴어로 Cogito Ergo Sum(고기또 에르고 줌)

이 말이 아주 큰 영향력을 미쳤습니다. 
이게 물론 '어떻게 인간이 진리를 알 수 있는가?'라는 인식론의 명제 였지만, 
인간 됨을 말하는 말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생각하는 갈대' 
그렇죠. 여러분, 인간은 너무 약하지만, 
저 광활한 산맥에 비하면 너무 외소한 존재이지만, 
'인간은 생각한다' 거기에 인간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호모 사피엔스'도 마찬가지입니다.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는 인간을 가리키는 말인데요,
"슬기로운 사람"의 라틴어이지만, 결국은 '생각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거기에 인간의 위대함이 있다는 거죠.

근데 여러분 이것도 옛날 말이 되고 있습니다. 지금은 인공지능 시대잖아요. 
호모 사피엔스는, 다른 동물과 비교할 때, 인간이 생각할 줄 아는 것 같아요. 
그래서 인간이 자부심을 가졌는데, 

요즘은 보기에 따라서는, 기계가 인간보다 더 생각을 잘 하는 것 같아요. 
바둑을 두어도 인간을 이기고, 여러분 영어 번역도 사람보다 더 잘합니다. 
인공지능이 소설도 쓰고, 그림도 그려요. 
인간 판사들보다 더 공정하고, 정확하게 판결한다.. 라는 여론이 형성되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큰 병이 있으면 MRI 찍잖아요. 
그 사진을 판독해서, 어떤 약을 써야 될지, 어떻게 수술해야 될지, 
이런 거 처방하는 것도, 인간 의사보다 AI가 훨씬 더 잘할 수 있습니다. 

기업이나 나라의 중요한 정책을 결정할 때도 
빅 데이터를 장착한 AI 가 결정을 내리고, 
인간은 앞 뒤도 모른 채..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모르는 채.. 
그냥 AI(인공지능)를 따라야 하는 날이 올 수도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생각하는 인간'.. 이 자부심은, 여지 없이 흔들리는 겁니다.

 

또 포스트 모더니즘 사회에서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I shop therefore I am" 
'나는 소비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말이죠.
소비가 인간 존재에 핵심이 되었다 라는 겁니다. 

"초월성도, 궁극성도, 목적성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 이 사회의 특징은 
반성의 부재, 자신에 대한 시각의 부재이다. 

현대의 질서에서는, '인간이 자신의 모습과 마주하던 장소였던 거울은 사라지고,
대신 쇼 윈도 만이 존재한다. 

거기에서 개인은 자신을 비춰 보는 것이 아니라 
대량의 기호화된 사물을 응시할 따름이며, 
사회적 지위 등을 의미하는 기호 질서 속으로 흡수되어 버린다." -장 보드리야르

여러분, 스타벅스 라는 카페가 세계적으로 엄청 유명하잖아요. 
어떤 분들이 그렇게 분석합니다. 

이 스타벅스 컵을 들고 다니는 것 자체가, 꼭 맛있어서가 아니라 
뭔가 폼 나 보이기 때문에...  그게 기호 라는 거죠. 

'명품 백을 수백만 원을 주고 그걸 굳이 들고 다녀야 되냐? 
그게 뭔가 어느 정도 사는 사람이라는 기호가 되어 버렸다..' 라는 거죠. 

이게 여러분 '소비가 기호가 된다'는 거예요. 
이 사회를 설명하는 굉장히 중요한 키워드 일 수 있습니다. 

제가 포항에 와서, 수도권 보다 좋은 점은,
카페가 널직 널직 해서 편하게 앉을 수 있는 건데 
한 가지 약간 불편한 거는 '어우 경상도 분들은 카페에서도 말을 굉장히 크게 하시잖아요. 
큰 목소리로 얘기하는 소리가 다 들려요. 멀리서 하는 얘기가 다 들려요. 안 들으려고 그래도. 

어떤 여자분들이 앉아서 이렇게 얘기를 하더라고요. 
'야, 너 그 BMW 아직 만나니? 그 소나타는 어떻게 됐어?' 

그러니까 여자가 남자를 보는데, 그 사람이 가진 가치관이나, 성향이나, 꿈 
뭐 이런 게 아니라 그냥 BMW, 또 다른 사람은 벤츠, 또 어떤 사람은 소나타 인 거예요. 

'거울을 상실한 사회'라고 하는 거는요. 
라스베가스의 카지노 가면 없는 게 있대요. 시계가 없습니다. 
시계 붙여 놓으면 집에 가야 되니까...
창문이 없어요. 바깥 사회를 못 보게 합니다. 

 

세 번째로 거울이 없습니다. 밤새도록 카지노를 하고요. 
눈 시뻘겋게 된 자기 모습을 보는 순간, 집에 갈까 봐, 거울을 안 붙여놓는 데요. 

여러분 사람이 '나는 누구인가?' 
거울이 있어야 되는데, 

옛날 사람들은 Who are you? 그러면 
'I am a farmer, I am a teacher, I am a engineer'
이렇게 생산의 측면에서 말했습니다. 

현대에는 그게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거죠. 
'나는 몇 평짜리 아파트 살고요. 차는 무엇을 타고요. 핸드백은 뭘 들고요. 
옷은 뭘 입고요, 휴가는 어디로 가고, 어느 레스토랑 가서 밥 먹고 사진 찍어 올릴 수 있는  SNS' 

그러니까 옛날에 우리가 사람을 이해하던, 평가하던 '생산적 자아'는 뒤로 물러나고, 
소비가 나를 말해주는 시대가 되었다, 그게 기호가 되었다... 라는 말이죠. 

포스트 모더니즘은 인간의 자유를 갈구하면서 시작되었는데, 
그럼 인간이 자유로워졌는가요?
그게 아니죠. 인간은 오히려 소비의 목적이 상실 되면서 소비의 노예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럼 우리가, 생각하는 능력에 기초를 둔 모더니즘의 인간 이해로 돌아갈 수 있는가? 

여러분, 인간의 독특성은 정말 생각하는 능력이 있는 것 같습니까? 
그렇다면 생각하는 능력이 현저히 부족한 사람, 
저능아나 치매환자는, 인간이라는 범주에서 제외되어야 하잖아요. 
동의가 되십니까? 아니죠. 

여러분 생각할 줄 아는 능력이, 사람의 중요한 특징 중에 하나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가장 근본적인 규정으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받았다' 라고 이야기하고 
십자가는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 하십니다' 하는 그것이, 복음의 핵심이에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 
그럼 나는 누군가? '사랑 받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설교의 주제
믿습니까? 그게 인간입니다

아모르 에르고 줌 Amor Ergo Sum 은 '나는 사랑받는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라는 말인데,
여러분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것은
누군가 나를 사랑하고 돌보아 주었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생각할 능력이 있기 때문에, 여기 있는 게 아니에요. 
나는 생각할 능력을 갖추기 이전에, 아기 때도 존귀한 존재였습니다. 

그리고 혹시 나중에, 우리의 기억이 희미해지고 
의식조차 가물가물 해지는 날이 온다 하더라도, 
여전히 나는 존귀한 존재일 줄 믿습니다. 

인간 됨이 '생각하는 능력'이 아니라는 거예요. 
우리가 알고 있어요. 가끔씩 누군가를 함부로 대하다가, 정신 차리고 그러잖아요. 
'그러지 마, 남의 집 귀한 아들이야!' 
'그래도 누군가에게는 귀한 자식이야!' 

여러분 직장에서 일을 잘해서 
학교에서 공부를 잘 해서, 그래서 존귀한 것이 아니라 
'사랑 받는 존재다' 라는데.. 인간됨, 인간의 존귀함이 있는 거예요. 

여러분이 앞서 영화에서도 보셨지만, 
사랑 받지 못한다는 그 자의식, 그 고통, 그 몸부림, 
그 처절함에서 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복음, 
그래서 '나는 사랑받는 존재'라는 자의식으로 치유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없이는, 인간이 아무리 많이 가져도, 아무리 높이 올라가도, 
삶은 불안하고 두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우리 존재의 기반이 돼야 되는 겁니다.  

우리는 자격을 따지는 사회를 살고 있습니다. 
어떤 자격을 갖추기 위해서, 너무 많은 대가를 지불하고, 노력하면서 
불안과 압박 가운데 살아가는 거예요. 

어릴 때부터 어떤 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 회사에 취직하기 위해서, 또 승진 하기 위해서 
어떤 집을 사고 거기에 들어가 살 권리를 얻기 위해서.. 그렇지 않습니까? 

인정받기 위해서, 
결혼도, 사랑도... '이 정도 사람하고 결혼하려면, 적어도 이 정도는 갖추어야 돼' 
이 자격의 세상에서, 

그래서 우리가 자칫 '나에게 그런 자격이 없으면, 나는 가치가 없는 존재다' 라는 
나락으로 떨어질 수가 있다는 거죠. 

그렇지 않습니다. Amor Ergo Sum (나는 사랑받는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이 말은, '내가 사랑 받는다'는 게, 우리 인간의 존재의 기반이란 말입니다. 

사랑이 뭔가 하면요. 사랑은, 누군가 먼저 시작해야 됩니다. 
가끔씩 영화에 보면, 두 사람이 눈이 딱 맞아가지고 동시에 불꽃 같이 사랑하는게 나오지만, 
그거는 영화에서만 나오는 이야기고요. 

대부분은 한 쪽이 먼저 사랑하고, 마음앓이 하고, 다가가기 위해서 애쓰고,
거부당할까봐 두려워하고 불안하고... 그러면서 사랑이 이루어지는 거예요. 

하나님과 우리가 사랑하는데, 누가 먼저 사랑했습니까? (하나님)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데, 그 사랑이 아무리 간절해도, 아이들은 시큰둥 해요. 

그 부모의 사랑을 조금 알게 되면요, 이미 늦은 경우가 많죠. (부모님 돌아가심)
그래서 사랑에는, 본래 시차가 있고 불균형이 있습니다. 

여러분, 사랑하는 것이 어렵습니까? 
사랑을 알게 하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사랑하는 것도 쉽지 않지만, 하나님 입장에서는
하나님은 본질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사랑하시면 돼요. 

그런데 사랑을 알게 하는 거는요, 상대방의 수준에 달려 있는 거예요. 
이 사랑이 아무리 고매해도, 상대방의 수준이 낮아서 모르면, 깨닫지 못하면 어떻게 합니까? 
그러니까 답답한 거예요. 
'하나님이 언제 우리를 사랑했습니까? 아버지가 언제 나를 귀하게 여겼습니까?' 그러잖아요. 

롬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대단히 독특한 단어입니다. 

확증하셨느니라.. 영어성경에 demonstrate 
왜 데모해서 보여줍니까?
알아달라는 거 아닙니까. 

'하나님이 데모 하신다' 무슨 말이에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 하셨어요. 
나를 위해서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너희를 위해서 죽으실 만큼 사랑 했으니 그걸로 끝이다. 
내가 이만큼 했으니, 너희들이 내 사랑을 알든 모르든 그건 알아서 해라' 
하나님의 사랑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그 사랑을 알아 달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냥 사랑을 줬으면 줬지... 왜 그러시나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기 때문이죠.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아느냐/모르느냐에 따라서
어떤 사람으로 어떤 인생을 살아갈 것인가가 전적으로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글래디에이터> 이 영화를 보신 분들은 기억하실 거예요.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했던 코모두스가, 또 한 번 엄청난 시련을 겪습니다. 

자기 아내 루실라가, 막시무스를 더 좋아해요. 
자기 어린 아들도 자꾸 막시무스 한테 관심을 가져요. 그럼 미치는 거죠. 

이 사랑받지 못한 영혼의 외로움, 
코모두스는 또 한 번 쓰라린 실패를 맛봅니다. 

이 영화를 다시 보시면 '아, 참 천하의 악인인 이 코모두스도 참 불쌍하구나' 
이게 물론 픽션이지만, 아주 현실적인 그림입니다. 

여러분 대체로, 모두 다 그렇진 않지만, 
대체로 부모의 사랑을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이 
연인과의 관계도 힘든 경우가 많고요. 부부 사이도 어려워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집착하고, 매달리고, 의심합니다. 
왜 그래요? '나는 사랑받는 존재다' 라고 하는 기반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아이들도, 이런 부모와의 애착 관계가 건강하게 형성돼야, 
학교에 가서도 교우관계가 순조로워요. 직장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대체적으로, 지금의 생활을 힘들어하는 경우가 몇 가지 있잖아요. 
남의 눈에 들려고 지나치게 불안해하고, 전전긍긍하고 노력하는 사람들... 
당당하지 못하고, 눈 밖에 나지 않으려고 하고... 

이런 사람은 직장 생활 해도요, 호구 되기 쉽습니다. 
착해요. 착한데 힘들어요. 

사회생황에서의 그 많은 관계들이 '부모와의 관계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구약 성경 맨 끝 (본문)에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말4:6
이 말씀은, 인간 삶의 가장 근본적인 고민을 건드리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가정의 아픔들이, 
하나님 아버지와 자녀된 우리들의 관계 회복으로 치유될 수 있다... 라는 말씀을 주십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과 자녀들의 마음을 이어 주실 뿐 아니라 
'내가 사랑받는 자아'라는 자긍심을 회복하게 하고, 
삶을 다르게 살게 하시는 거예요. 

갈4:6절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으니라' 아멘! 

성령으로 '아빠 아버지'라 부르면서, 우리를 그렇게 괴롭히던 문제, 
'내가 정말 사랑받을 만한 존재가 되는가?' 하는 그 문제를, 해결받게 되는 줄 믿습니다. 
'나는 사랑받는 존재다' 
여기서 인간의 모든 문제가, 치유되기 시작하는 거예요.  

인터넷을 찾아보시면 이런 말은 많습니다. 
Amo ergo sum '나는 사랑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멋있죠. 근데 그게 아니에요. 
Amo 는, Cogito 할 때처럼, 1인칭 능동형 동사어미입니다. 

복음은 아모르 입니다. '내가 사랑 받는다'
Amor ergo sum '내가 사랑 받는다. 그래서 나는 존재한다'

여러분, 기독교 신앙은 '내가 사랑합니다'에서 출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셨다'에서 출발하는 거예요. 

세상에 많은 종교들이, 신을 사랑하는 노력에서, 
신에게 사랑을 바치는 노력으로 출발합니다. 

여러분 복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면 내 사랑은, 인간의 사랑은 믿을 게 못 되는 거예요. 

어제 주말에 전국에서, 전 세계에서 수많은 남자와 여자들이 결혼식을 하면서 
'평생 사랑하겠습니다' 다짐하고 맹세하고 서약했을 거예요. 

오늘도 이제 크리스마스 잖아요. 
카페에서 공원에서 거리에서 촉촉한 눈빛을 교환 하면서 
사랑한다고 확인하고 다짐을 많이들 할 거예요. 

그 사랑이 계속 잘 가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는 걸 우리가 알잖아요. 
'나는 사랑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멋지게 들리지만 
이거는 그 기반이 너무도 허약해요. 

어떤 여자가 멋진 남자를 만나서 사랑에 빠졌습니다. 
오랫동안 마음 졸이다가, 다가가고, 선물하고, 
연락하고, 편지 쓰고, 기다리고 인내한 끝에 결혼에 골인 했어요. 

결혼 날짜를 잡아 놓으니까, 주위에서 막 부럽다고 난리입니다. 
결혼하니까 좋아요. 그 멋진 남자를 위해서 요리하는 시간도 즐겁고, 
기다리는 순간도 행복하고, 함께 하는 모든 날들이 꿈만 같아요. 

그러던 어느 날 아침에, 침대에서 자고 일어나서 
자고 있는 남편을 이렇게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자기 남편이 너무 못 생긴 거에요. 너무 못 생겨 보여요. 
이상하게 그 날 따라서... 

그 날 이후로, 남편이 하는 말도 참 하찮게 보이고, 찌질해 보이고.. 자꾸 그러는 거예요. 
'내가 이 사람이 뭐가 좋다고 이렇게 따라 다녔지?' 
여러분, 사랑이 소중하지만, 인간의 사랑은, 우리 삶의 기초가 될 수 없습니다. 

◑시카고 대학교에서 법철학을 가르쳤던 세계적인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은
<타인에 대한 연민> 이란 책을 썼습니다. 

미국 정치가 계속해서 증오와 혐오의 정치로 갈 때
'왜 그럴까?' 
'그 증오와 분노와 시기가 어떻게 이 세상에서 이렇게 강해지는가?' 라는 질문을 갖고 
책을 썼는데, 그 증오와 혐오 뒤에는 두려움이 있다..고 분석을 했습니다.  

그럼 '왜 두려운가?' 
특별히 인간이 태어나서, 따뜻한 엄마 뱃속에 편안하게 있다가 방출 되잖아요. 
차가운 세상에 내쳐 지잖아요. 

그때 누워서 '누군가 나를 안아 주지 않으면, 죽을 것이 너무도 분명한 
이 무서운 세상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우는 것 밖에 없어' 

그래서 여러분,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전적으로 무능하기 때문에 
생애 가장 첫 순간을, 엄청난 두려움으로 맞이할 수 밖에 없고, 

자라면서 어떻게 그걸 (두려움을) 잘 극복해 내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는 거죠. 

그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두려움과 불안 속에 살아간다... 하는 이 이론을 
주로 어디에서 끌어 내는가 하면,
저자는 그리스 로마, 키케로 같은 철학에서 끌어 냅니다. 

책이 아주 재밌습니다. 그런데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저자에 의하면, 
'희망을 갖자. 두려움은 일어날지도 모르는 나쁜 결과에 집중하고, 
희망은 좋은 결과에 집중한다. 희망을 갖자!' 라고 했어요. 맞는 말이죠. 

근데 여러분, 이 분이 분석은 아주 멋지게 했는데, 
결론은 너무 뻔하지 않습니까? 
'희망을 갖자!' 라는 말은 누구나 하는 말이잖아요. 
그래서 꽤 많은 독자들이 '이게 너무 싱겁다' 평하기도 합니다. 

세상 철학 책들이 대부분 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문제를 분석해 들어간 데는 대단히 심오한데, 
실제로 제시하는 해답은 별 게 없어요

'희망을 갖자' 근데 이 누스바움은 아주 천재적인 학자입니다. 
이분이 약간 철학자니까, 강하게 이야기는 안 하지만 
약간 비치는 해결책에 실마리가 있어요. 

그게 뭔가 하면, '희망이 중요한데, 그 희망이 어디서 나오는가?' 
믿음과 사랑에서 나오는것 같다...' 라는 이야기를 해요. 

그렇게 보면, 믿음 소망 사랑이.. 성경의 이야기잖아요. 정말 참 놀랍습니다. 
여러분 이 현대의 철학자들이 열심히 연구해서
인간의 문제를 끝까지 파고 들어가서 보니까 
결국에 해답은, 이미 성경에 있는 거라는 거예요. 놀랍지 않습니까

믿음이 뭐예요? 
성경의 믿음은 어떤 감정적 확신이나, 교리에 대한 지적인 동의가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받아들이는 것,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그게.. 바로 예수님을 영접하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믿음과 사랑과 소망은 하나로 연결돼 있습니다. 

 

요14: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여러분, 누가 고아와 같습니까? 
돈이 없어서 고아가 아니잖아요. 
잘 자리가 없어서, 학교 등록금 주는 사람이 없어서 고아가 아니잖아요. 
그거 있어도 고아가 많아요. 

코모두스는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아들이었지만 
'아버지가 한 번만이라도 나를 따뜻하게 포옹해주고 인정해 줬으면 
내가 이렇게 안 됐을 텐데...' 그런 마음 아니겠습니까. 

성령께서 그걸 치유해 주신다는 거죠. 
요일3:1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

여러분, 세상이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합니다. 
왜냐면 예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한 여성이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안정되어 있고, 집안 좋고, 예쁘고, 
아이들도 공부 잘 하고, 가족들한테 다 인정받고 살아요. 
남부러울 것이 하나 없겠다 싶어요. 

그런데 얼굴에 늘 수심이 가득하고, 자주 짜증을 내요. 
'살기 싫다' 소리 할 때도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남편에게 사랑받지 못하기 때문에!              

반면에 별로 가진 것 없고 내세울 것 없는데.. 늘 밝아요. 
자주 웃고 쾌활해요. 왜 그럴까요? 가정에서 사랑받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

 

여러분 인간의 삶은 결국에는 사랑에 달려 있습니다. 
인간의 가장 궁극적인 질문은 '사랑 받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그것 없이는, 아무리 성공해도, 아무리 연봉이 높아도, 
아무리 직급이 높고, 큰 권력을 가져도... 
여러분 로마황제라도, 비참하고 비루한 인생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이 글래디에이터 영화에서 코모두스가 아버지에게 
'아버지는 지혜, 용기, 정의, 절제를 가르쳤지만, 나는 그 중에 하나도 익히지 못했습니다' 라고 말했어요. 

이 덕목은 아우렐리우스 개인의 권면이 아니라 
사실은 그리스와 로마.. 플라톤 부터 시작되는 그리스 로마 전체의 이상입니다. 
교육, 철학 이 모든 것이.. 이 4가지 덕을 함양하는 것이었어요.

그 중에서 최고의 스토아 철학자, 최고의 가문, 최고의 황제도 
자기 자녀 교육에 실패한 거예요. 무슨 말입니까? 

그리스 로마의 철학과 교육이 
결국은 인간의 성품 형성에 실패했다는 겁니다. 

이 영화를 보시면, 콜로세움에서 막시무스 대장으로 해서 
멋지게 싸우는 전사들이 있지만, 영화에서 살짝 나와요. 

사자들의 밥으로 던져지는 그리스도인들... 너무나도 나약합니다. 
'저 사람들은 뭘 할 수 있을까?' 

그런데요, 그 사람들이 결국에는 훨씬 더 강한 사람입니다. 
결국에는 로마 사회가 그들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어떤 힘입니까? 
여러분 글래디에이터의 주인공 막시무스는, 아마 이상적으로 볼 때 
로마적인 가치의 최대치에요. 맥시멈(최대치 라는 뜻). 

영어 맥시멈이 라틴어로 막심, 막시무스의 이름이 거기서 나온 거죠.

막시무스(최대치) 그걸로도 안 되는 거죠. 
가장 약한 약했던 것 같은 사람들이, 이 세상을 결국엔 정복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자기가 참 사랑을 받았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결국에는 사랑이 이기는 줄 믿습니다. 

톰 라이트 라는 학자가 탁월한 성경학자, 역사학자 인데 
이 분이 <After You Believe 그리스도인의 미덕> 이라는 아주 좋은 책을 썼습니다.

이 책의 주안점이 그거예요. 
그레코-로망 문화가 목표로 했던 4대 덕, 
즉 지혜, 용기, 정의, 절제는 좋은 목표인데 
이거를 그레코-로망 문화와 철학이 이루지 못했다는 거죠. 

그런데 역사를 살펴보면,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 인들의 삶을 
가만히 보니까... 결국에는 지혜, 용기, 정의, 절제 
그리스-로마가 그렇게 간절히 원하고 노력했지만 이루지 못했던 그 열매를 맺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 '그리스도 교가 이 세계를 정복할 수 있었다'는 거죠. 
이게 톰 라이트의 역사적인 분석입니다. 


그림으로 그리면, 지혜, 용기, 정의, 절제는 외적 열매 입니다. 
그 열매가 어디서 나옵니까?
'믿음, 소망, 사랑'의 뿌리에서 나오는 겁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줄 믿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 그 사랑 안에서 소망이 나오죠. 
이 세상을 뛰어넘는 그 소망이 있었기 때문에 

믿음 소망 사랑으로 살다 보니까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원했지만 맺지 못하던 지혜, 용기, 정의, 절제의 덕을 
열매로 맺었다 라는 것입니다. 

내가 사랑한다... 좋지만요. 그것은 여러분 열매 입니다. 
윤리는 열매 입니다. 여러분 거룩한 삶은 열매 입니다. 

그 이전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 하신다'라는 복음이 먼저 (뿌리에) 있어야 됩니다. 
'나는 사랑 받는다. 고로 존재한다.' 
하나님의 사랑에 깊게 뿌리 내린 사람은 
반드시 성품의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교가 이 세상에 빛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Amor 라는 말을 거꾸로 쓰면 재밌습니다. ROMA 로마가 돼요. 

이게 우연인지 모르지만, 아모르-로마 

로마 라는 세계는, 내가 나를 증명하고, 내가 스스로 자격을 갖추고, 
싸워서 누군가를 짓밟고 올라가서라도 쟁취해야 하는 세상, 
여러분 콜로세움의 그 피 튀기는 경쟁은, 전 세계의 축소판입니다. 
세상이 그렇다는 거죠. 그런 전쟁터 같은 세상이 있고, *Roma 

그 세상 안에,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님은, 사랑의 세계를 만드신 거예요. *Amor(나는 사랑받는다)
투쟁하고, 싸워서 뺏고, 남을 중상하고 모략하고 올라서는 세계가 아니라 
서로 사랑하는.. 이 세계를 사랑으로 살아가는 세계,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맺고 싶어 했으나 실패했던 그 성품의 열매까지 맺게 하는... 

바로 그 사랑의 세계를, 우리 가운데 열기 위해서 
예수님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크리스마스가 우리에게 기쁜 날인 것입니다. 
이 날이, 모든 사람에게, 만백성에게 기쁜 이유는, '우리는 사랑 받은 존재입니다!' 
그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풍성한 열매 맺는 우리 모두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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