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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사랑설교 108편

아버지를 사랑하면, 아버지가 원하시는 일을 행한다 요일4:20

by 【고동엽】 2024. 12. 30.

아버지를 사랑하면, 아버지가 원하시는 일을 행한다       요일4:20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요일4:20

 

누가 ‘나는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인간을 사랑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인간을 사랑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간혹 하나님을 사랑한다면서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올바른 하나님 사랑은

효자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버지를 진정 사랑하고 존경하는 아들은

아버지를 사랑하고 존경하기 때문에

아버지의 뜻과 유지를 받들어

자기 형제자매들도 사랑하고 그들과 다투지 않습니다.

      

▲아버지를 그리워했던 어떤 분의 이야기입니다.

자기가 어릴 때 돌아가셔서, 그는 아버지를 뵌 적이 없지만

아버지가 너무 그리워

유품으로 남겨진 아버지의 야전잠바를

마치 엘리사가 스승으로부터 받은 겉옷처럼 소중하게 입고 다녔다고 합니다.

 

십대 후반부터 삽십대까지

그러니 십수년을 애지중지 아버지의 야전잠바를 입고 다녔다는 것이죠.

그 잠바는 벌써 아버지 때부터 입던 것이니

수 십 년이 지나 낡아서 거의 누더기 같았지만

자기가 어릴 적에 소천하신 아버지를 그리워하고 사랑했기에,

그는 그 옷을 소중하게 입고 다녔던 것입니다.

 

아버지를 진정 사랑하는 사람은 아버지가 남기신 옷마저 소중하게 여기는데

아버지의 옷보다 비교할 수 없이 소중한

아버지가 사랑하는 자녀들을, 즉 자기 형제자매를

어찌 미워할 수 있겠습니까!

 

한국인의 존경을 받는 세종은, 원래 아버지 태종의 셋째 아들이었습니다.

원래 첫째 아들 양녕대군이 태자로 책봉 받았으나

주색이 심하여 폐위되고, 대신 세종(충녕대군)이 태자가 되어 왕위를 계승했지요.

 

그런데 세종이 왕이 된 이후에도

첫째 형 양녕대군이 주색酒色으로 문제를 일으키자

신하들은 양녕을 벌하라는 상소를 올렸다고 합니다.

 

그러나 세종은, 자기 정적이 될 수도 있는

첫째 형 양녕대군과 둘째 형 효령대군을 벌하기는커녕

이천 등지에 넓은 토지를 내리고, 자원을 주어 큰 절을 짓게 하는 등

자기 형들을 극진히 대우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왕자의 난을 통해 왕이 된 선친 태종이

세상을 떠나면서 아들 세종에게 남긴 유언이

‘형제들과 사이좋게 지내라’ 였던 것입니다.

 

아버지 태종을 사랑하고 존경했던 세종은

그래서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자기 두 형을 극진히 보살피고 적극 후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참으로 한국 역사에 남는 선왕이 되었지요.

 

그렇습니다. 하늘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은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고, 알아드리고,

아버지가 원하는 일을 합니다.

 

그것은 자기 형제를 사랑할 뿐만 아니라,

그의 어려움까지도 돌봐주는 것입니다.

 

▲상선약수 (上善若水) 라는 말이 있습니다.

가장 좋은 것(上善)은, 물과 같다 (若水)는 말인데                *같을 若약

물이 항상 낮은 곳으로 흐르듯이

자기 몸을 낮추어 겸손하며 남에게 이로움을 주는 삶을 뜻하는 말입니다

 

아버지를 지극히 사랑하신 예수님은

형제를 사랑하심으로써 그 아버지 사랑을 증명하셨는데

그것 마치 상선약수와 같이 사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상류층에 머물지 않으시고

물처럼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

가난한 이들, 갇힌 자들, 눈 먼 자들, 억압 받는 자들 가운데 머무시며

그들 가운데서 은혜의 복음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 상선(上善 최고선)이라 할 때

우리는 자신을 반성하게 됩니다.

 

우리는 아래로 내려갈 때, 애를 써야 됩니다.

물처럼 자연스럽게 아래로 내려가지 않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고립적으로 삽니다.

혼족, 혼밥, 혼취(혼자 취미, 영화, 여행)하는 사람이 늘고 있습니다.

 

사실 요즘 일본 같은 나라에 가보면

혼족, 혼밥, 혼술, 혼취가 대세로 자리잡은 것을 보면서

혼족문화가 우리나라에도 곧 닥칠 것을 생각하니, 살짝 두렵기까지 합니다.

 

‘나는 진정 아버지를 사랑하는 자녀인가?’

그것은 형제를 사랑하는 것으로 증명되는데요

 

복음 안에서 ‘여유’를 가진 거듭난 사람들은,

(그렇습니다. 여유가 중요합니다.

다른 사람을 돌아보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영적, 정신적, 신앙젹 여유가 있습니다.)

 

혼족, 혼밥, 혼술, 혼취가 대세로 자리잡은 이 시대에

그 혼족들을 생각하며 기도해 주고

그들에게 카톡도 보내고 이모티콘(카톡에서 쓰는 인형 캐릭터)도 보내면서

 

상선약수(최고 선은 물과 같이 가만 있지 않고 아래로 흘러간다)의 삶을

하루에 한 가지라도 실천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아버지를 사랑하니까,

아버지가 원하시는 일을 적극 행하는 것입니다!

 

오늘 나는 아버지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아마 그럴 것 같다'며 생각으로만 믿고 있습니까?

  

  .................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성경에 다소 뜻 모를 말씀이 이렇게 나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요일4:10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라는 말씀은 맞고

그래서 이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무런 어려움이 없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는 말씀은

선뜻 이해되지 않습니다.

 

이 말씀을 여러분은 어떻게 이해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에 비하면

우리의 사랑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뜻일까요?

 

-우리가 사랑한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는 뜻일까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였다면

그것은 우리가 한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게 하신 거라는 뜻일까요?

 

제 생각에 이 말씀은

이 모든 뜻을 다 품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종종 내가 사랑을 하려하고,

내 사랑으로 사랑을 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고

이런 사랑의 의지를 가져야지요.

 

그렇긴 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다른 태도가 필요합니다.

 

1) 첫째는 내가 사랑하기 전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사랑하기 전에 사랑을 받아야 한다고 할 때

이런 태도는 이기주이적인 것이 결코 아니라 겸손이고 사랑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어린아이이고, 어린아이이어야 합니다.

이는 자기밖에 모르는 철부지 어린이를 말하는 것도 아니고,

조금 컸다고 부모의 사랑 필요 없다는

교만한 십대 애송이를 말하는 것도 아니죠.

 

대신에 부모의 사랑을 원하고,

그 사랑에 의지하는 겸손한 아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당신의 사랑이 필요 없다고 할 때보다

당신의 사랑이 참으로 필요하니 주십사고 할 때

당연히 더 기뻐하실 겁니다.

 

부모가 되어 가지고 사랑할 자식이 없다면

그것이 부모의 불행이듯

사랑이신 하나님께는 사랑할 수 없을 때

제일 슬프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2) 둘째는 이제 하나님을 사랑하되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코자 하는 의지가 있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사랑의 의지만큼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어린 아이가 용돈을 받아

그 중의 일부로 부모님 생신 때

선물을 사 드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만일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일부 <되돌리는 사랑>입니다.

 

3)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나눠야 합니다.

이 말에는 하나님의 사랑은

이웃과 반드시 나눠야 한다는 뜻도 있고

이웃을 사랑하되 하나님 사랑을 제쳐놓고

인간적인 사랑을 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뜻도 있습니다.

 

우리가 좋게 쓰는 말 중에

휴머니즘, 휴머니스트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랑이 없는 냉혹한 사람보다는

인간애가 있는 사람이 좋긴 하지만

우리 신앙인에게 인본주의(휴머니즘)나 인본주의자(휴머니스트)는

자칫 무신론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는

주님의 말씀대로 우리는 사랑의 의지를 가져야지만,

없는 내 사랑으로 사랑하려 하지 않고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아

<나누는 사랑>이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사도요한도 이렇게 권고합니다.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이란 무릇 위에서부터 오는 내리사랑이고

이 내리사랑을 구해서 받는 것이

바로 우리 기도일 것입니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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