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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이스라엘(롬2:17~29)
참 이스라엘이 무엇이냐, 어떤 사람이 참 이스라엘이냐-오늘의 본문에서는 이런 문제를 보게 됩니다.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29절)"합니다. 역시 유대인을 비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다'라고 하는 말은 원래 '찬송'이라고 하는 뜻으로, 12지파 중의 유다 지파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오늘에 와서는 이스라엘 전체를 가리키는 대명사로 쓰이고 있습니다. 이야기가 나왔으니 여기서 호칭에 대하여 조금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말에 세 단어가 있습니다. 하나는 히브루(Hebrew)이고, 하나는 이스라엘(Israel)이며, 또 하나는 유다(Judah)라고 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유대사람이라든가 유대나라라고 성경에서 읽는데, 아시는 대로 지금의 이스라엘나라는 유대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라고 부릅니다. 또 이스라엘사람을 가리킬 때에는 유대인(Jew)이라거나 히브리인이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이 쓰는 말도 히브루 곧 히브리말이라고 칭하게 됩니다.
여기서는 혼선이 조금 있을 수 있습니다마는 그러나 정리하면 간단합니다. 히브루라고 하는 말은 언어 중심적으로 부르는 호칭입니다. 히브리말을 하는 사람이라는 뜻에서입니다. 이스라엘이라고 하게 되면 이것은 야곱의 이름으로부터 유래됩니다. 본래의 이름은 야곱입니다만 그가 하나님 앞에서 새롭게 거듭나면서 은혜를 받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 그 이름을 바꿔주시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된 것입니다. '야곱'은 간사하다는 뜻의 말이거든요. 하나님께서 지어주신 이름이므로 '이스라엘'이라 하면 선민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선택된 사람이다, 선택된 백성이다, 라는 개념에서 이스라엘이라는 말을 쓰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본래 한 민족이었으나 남북의 두 나라로 갈리면서 남쪽이 유다, 북쪽이 이스라엘로 됩니다. 그리고 아시는 대로 이스라엘은 민족이 흐트러지면서 흔적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지금도 조금은 흔적이 있으나 민족이 다 흩어져서 10지파가 간 곳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주로 유다 지파만 남았거든요. 유다 지파는 서부 팔레스타인의 남쪽 지방에 살았으므로 그 지역을 원래는 '유다'라 부르다가 나중에는 '유대(Judea)'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 '유대'라는 이름은 성경 에스라, 느헤미야서에 처음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바벨론 포수 이후에 유대인이 세운 국가를 나타냅니다. 그러니까 저들이 정치적으로 혹은 민족적으로 남은 민족의 이스라엘을 가리켜 지칭할 때에 '유대'라고 말합니다. 곧 이스라엘 전체를 지칭하는 대명사로 '유대'라 불리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상당히 협소한 의미에서 정치적 민족적 의미를 지닌 호칭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오늘의 본문에서 보게 되는 바와 같이 유대의 사람들(유대인들)은 '우리는 유대사람이다'하는 것을 대단한 긍지로 내세우고 있어요. 아주 교만합니다. 그러나 이 교만은 어디까지나 헛된 교만이라고 사도 바울은 빗대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는 아주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특별히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느니 민족 혈통이라느니 하고 자꾸 자랑하지마는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그 말씀입니다. 유대 사람들의 교만을 아주 근본적으로 비판하는 말씀이 오늘의 본문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바울의 논리로 보면 이렇습니다. 아브라함의 육체적 혈통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아브라함으로부터 그 핏줄기를 타고 내려와 이스라엘이 되고, 유대사람이 되었다고 해서 대단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정신적 신앙적 혈통이 중요한 것이다--이런 말씀이 됩니다.
또한 저들은 나름의 종교문화를 계통적으로 이어받아서 '우리는 이스라엘이다'하고 자랑을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할례 받았다'하는 것을 굉장히 자랑합니다. 할례 받은 바 종교 의식을 놓고 얘기합니다. 그러나 그것 또한 무슨 의미가 있느냐, 영적인 할례가 중요한 것이다, 할례는 마음에 할 것이니라, 육체에 흔적을 남기는 정도의 할례 가지고는 자랑할 것이 못된다--바울은 이렇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생각할 것은 저들의 '전승(傳承)'입니다. 저들의 풍속, 저들의 사상, 저들의 지식, 특별히 율법, 그리고 유일신을 섬기는 신앙 자세…… 이런 것을 저들은 자랑합니다. 그러나 이 전승이야말로 의미로 지킬 것이지, 형식적으로 지켜 가지고 이스라엘 되는 것은 아니다, 하는 것이 바울의 논리입니다. 이스라엘사람은 네 살 때부터 율법을 가르치고, 여섯 살 때부터는 회당에서 가르칩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자기의 나이와 이름을 잊어버리는 한이 있어도 율법은 잊어버리는 법이 없다'라는 말까지 합니다. 그만큼 철저하게 율법을 마음에 새기고 명상하고 깊이 의식 속에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 이스라엘은 그런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바울의 생각입니다. 참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의 믿음과 그 행위를 따라갈 때에, 즉 아브라함적 믿음--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 그런 믿음과 그에 따르는 행위로 가름되는 것이라는 게 바울의 입장인 것입니다.
내면적 이스라엘이 진짜 이스라엘이지, 민족적이라든가 혹은 정치적이라던 지 전승적이라든가 해서 풍속이나 문화적으로 이어지는, 그런 이스라엘이라면 중요한 이스라엘이 될 수 없다고 바울은 대담하게 용기 있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참 이스라엘은 속에 있는 것이고 내적인 것이지 외적인 것이 아니다, 합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그것, 율법이 아니고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것, 그리고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사람, 이런 사람이 참 이스라엘이라고 바울은 누누이 말씀합니다. 결론지어 말하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 예수를 잘 믿는 사람, 그 사람이 진짜 이스라엘이요, 이것이 본래적인 이스라엘이요, 아브라함 계통적인 이스라엘이라 함입니다. 예수 안 믿는 이스라엘사람들이 교만하게 스스로 유대사람이라고 유대주의를 내세우고 있지마는 너희는 이스라엘이 아니다. 라고 본문에서 그는 비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보세요. 본문에서 바울은 이스라엘을 이렇게 비판합니다. 이스라엘은 먼저 스스로 자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17절 말씀을 보니 "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라고 말씀합니다. 단적으로 말하면 하나님 섬긴다는 것을 말로 자랑하고 또 유일 신 종교임을 자랑한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사람들, 이것 자랑할만합니다. 엄격히 따져 말하면, 종교학적으로 엄격히 비판하면 그실 유일신 종교는 뿌리가 유대사람에게 있거든요. 유대사람, 유대종교에 뿌리를 두지 아니한 종교에는 유일신 종교가 없습니다. 그래서 넓게 말할 때에는 이 유대교적 종교를 윤리적 유일신 종교라고 말합니다. 생각해보세요. 우리 주변에 있는 종교라는 게 다 동물 숭배라든가 해서 멋대로 만든 잡신 숭배입니다. 유일한 참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되어 있지 않아요. 유일신 종교에 딱 세 가지가 있어요. 유대교, 회교, 기독교입니다. 넓은 의미에서 이 세 종교가 다 뿌리를 아브라함에 두고 있어요. 그러니까 그 근본이 이스라엘에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유대사람들이 자랑하는 게 이것입니다. 우리는 유일신 종교다, 저 더러운 사람들은 이것 섬기고 저것 섬긴다. 동물 섬기고 우상 섬긴다,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이냐, 얼마나 비인간적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해서 유대사람 자신들은 한 하나님, 살아 계신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 유일신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높이 자랑합니다. 자랑할만합니다. 이게 저들의 첫째 자랑인 것입니다.
둘째는 18절에 "하나님의 뜻을 알고"라 말씀합니다. 저들은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압니다. 하나님의 뜻을 가장 확실하게 요약해놓은 것이 율법입니다. 하나님만 섬기라, 부모를 공경하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전부가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우리 향하신 뜻입니다. 이렇게 하기를 하나님께서 바라셔요. 율법을 알기 때문에 저들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어요.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지를 원하시는지, 저들은 잘 알고 있어요. 일반사람들에 비해서는 아주 훌륭하게 알고 있어요.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안다고 하는 지식적 교만이 있어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 율법을 모르는 사람들은 사람으로 보지 않아요. 이방사람들, 더구나 가나안사람들은 개와 같은 사람들이라고 보아요.
세 번째는 그렇게 알뿐만 아니라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며(18절)"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즐거워하고 있어요. 지극히 선한 것----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보통 선이 아니라 지고의 선을 말함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선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어요. 그것을 또 마음에서 기뻐하고 있어요. 그래서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 이런 걸 가르쳐주시니 감사합니다, 율법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합니다, 성전을 사모합니다--이렇게 찬송하고 이렇게 기도하고 있으니, 이것도 자랑할만해요.
그 다음에 또 하나, 19절에 보면 "네가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로서"라 말씀합니다. 귀한 말씀입니다.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졌다--무엇입니까? 율법에 있는 지식을 가졌고, 또 진리의 규모를 가졌다, 곧 훈련받았다는 뜻입니다. 요샛말로 하면 '오리엔테이션'되었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지식을 익히고 진리의 규모를 알고,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인지, 또 어떻게 배워나가야 하는지를 그들은 몸에 익혔어요. 어릴 때부터 안식일 지키는 법을 배웠고, 아침에는 어떻게 하고 저녁에는 어떻게 하고, 식사할 때에는 어떻게 하고, 잘 때에는 어떻게 하고…… 율법을 따라 사는 법을 저들은 규모 있게 익혔다는 말씀입니다. 철저하게 discipline--제자 훈련받았어요. 아주 중요한 일이지요. 여러분,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인 된 삶의 규모가 있지 않습니까? 잘 때에 기도해야 되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먼저 기도해야 되고, 또 성경을 읽어야 되고, 식사할 때에 기도하고 식사하고…… 이런 것이 다 규범 아닙니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나름대로 기독교인 된 규범이 정해져 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경건하게 사는 사람은 나름의 규범에 익숙해져 있는 것입니다. 가령 어렸을 때부터 믿은 사람은 규범이 잘 훈련되어 있어서 비교적 익숙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중년쯤 되어서 믿기 시작한 사람은 가끔씩 기도 않고 식사하게 돼요. 어쩌다 배고파서 허겁지겁 먹다보니, '아이쿠, 기도 안 했구나'하고 뒤늦게 정신이 들 때가 있거든요. 아직 훈련이 덜 되어 있어 그렇지요. 오랜 시간 엄격하게 훈련을 받아서 아주 몸에, 생활에, 생각에, 철학에 익숙하게 훈련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쯤 되어야 규모를 가진 자라 하겠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유대사람들은 스스로 규모를 가지고 있다고 자랑할만하지요.
그리고 또 한 가지 있습니다. 20절에 보니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라 말씀합니다. 스스로 믿고 있어요. '나는 이만큼 안다'하고요. '그런고로 나는 가르쳐야 한다, 가르칠 자격이 있다, 자신감이 있다' 그 말씀입니다. 그런데 "소경이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요 어리석은 자의 훈도요 어린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19, 20절)"--그럴듯해요. 사실이지 남을 가르쳐야 되겠고, 어린아이들을 인도해야 되겠고, 어두운 길에서 헤매는 사람들을 밝은 길로 인도해야 되지요. 그런 수준에 있는 사람들이지요, 유대사람들은. 자랑스럽지요. 다시 한번 정리해서 말씀드리면 저들은 하나님을 자랑하고, 율법을 알고, 선한 것을 기뻐하고, 규모를 가졌고, 스스로 자신감을 가졌고, 남을 가르쳐야 한다는 의식까지 가졌어요. 그만한 수준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어요. 이렇게 다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행함이 없는 것입니다. 이게 문제인 것입니다. 행함이 없어요. 남은 가르치면서 스스로는 행하지 않아요. 재미있는 얘기가 있습니다. 이솝이 어렸을 때에 아버지의 심부름을 하게 됩니다. 공중 목욕탕에 사람이 얼마나 있는지 알아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좀 뜸할 때에 목욕 가려고 아버지가 심부름을 시킨 것입니다. 그런데 이솝이 달려갔다가 돌아오더니 아버지에게 보고합니다. "사람이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래 아버지는 됐구나 하고 준비를 해서 목욕탕에 갔습니다. 가보니 웬걸, 사람이 와글와글해요. 기가 막혔습니다. "이 녀석아, 사람이 그렇게 많은데 너는 왜 하나밖에 없다고 거짓말했냐!"하고 아버지가 뒤에 물어보았더니 이솝은 싱글벙글 웃으면서 하는 말인즉 "제가 목욕탕 문 앞에 돌이 놓여 있는 걸 보았거든요. 그런데 들어가는 사람마다 거기 걸려서 넘어질 뻔하면서도 정작 그 돌을 치우는 사람은 없었어요. 가만히 지켜보았더니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딱 한 사람만이 그 돌을 치우고 지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그 하나만 사람이지요. 나머지는 사람이 아니지요. 그래서 사람은 하나밖에 없다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렇지요. 사람 같아야 사람이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율법을 알고, 익히고, 외우고, 가르치고, 다 해도 행하지 않는대야 무슨 소용이 있어요? 우리 속담에 그런 말 있지요? '부뚜막의 소금도 집어넣어야 짜다'--아무리 좋은 약이면 뭘 해요? 먹지 않는다면 약이 아니지요. 아무리 가르쳐주면 뭘 해요? 행하지 않는대야 소용없지요.
여러분이 건강을 위하여 애쓰시는 줄 압니다마는 83세된 노인이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해야 건강하다는 내용의 책을 썼어요. 주제가 되는 지론인즉 '현미(玄米)를 먹으라' 이것입니다. 현미가 건강에 제일이라고 해요. 이것만 먹으면 암도 낫고, 예방도 되고, 건강해진다고 강의로 글로 말로 부지런히 일깨워주고자 하는 분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애쓰는데도 도무지 먹혀들지 않는다고 탄식해요. 마지막에 이 분은 이렇게 쓰고 있어요. '83세 노인인 내가 경험하고 이렇듯 먹으라고 하는데 왜 안 먹어주느냐'--이거예요. 답답하잖아요? 83세된 내가 30대의 건강을 유지하면서 이렇게 애타도록 먹으라고 가르쳐주는데 왜 현미 안 먹느냐, 이거예요. 이거 먹으면 온 국민이 건강한 국민이 되겠는데, 돈 안 드는 일인데 이걸 못하느냐, 이거지요. 참 가르치기 힘듭니다.
가르치기 힘들어요. 알기야 멀쩡하게 알지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고, 또 뭘 어떻게 하고…… 말을 하라면 다 도사들이지요. 그런데 행하지를 않아요.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뭐니뭐니해도 자신을 가르치기가 제일 어렵습니다. 사도 바울도 본문 21절에서 말씀하지요.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적질 말라 반포하는 네가 도적질하느냐"---남을 가르치면서 자신은 행하지 않아요.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사 물건을 도적질하느냐(22절)"---남은 가르치면서 자신은 행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이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사도바울은 그래서 고린도전서 9장 27절에서 말씀합니다.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바울은 역시 위대한 분입니다. 남을 가르쳐요. 남을 가르치면서 나는 실격자가 될까 두렵다--원문대로는 그런 뜻입니다. 버림이 될까봐, 실격자가 될까봐, 두렵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남을 가르치면서 자기 가르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어요. 남에게 하라고 할 때에 자기가 먼저 했어요. 이 점에서 위대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사람들은 남을 가르치면서 자기 지식을 자랑하고, 율법을 자랑하면서도 스스로는 행하지 않고 있었더라 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번 생각해야 됩니다. 남을 가르치는 사람, 선생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 있습니다. 누구든 그래요. 남을 가르치면서 잘못하면 직업화하기 쉽습니다. 가르치는 게 직업이에요. 그래서 어느 사이에 그저 아주 쉽게 자기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이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고 하며 가르치는 것이 직업화하는 함정에 빠지기가 쉬워요. 두 번째는 일방화하기 쉽습니다. 가르치려고만 하고 배울 생각은 안 해요. 고등학교 선생님들이 그런 얘기하는 것을 들어보았습니다. "우리 고등학교선생님들, 조금만 게을리 하면 어느 사이에 가장 무식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늘상 똑같은 교과서를 가지고 다니지 않습니까? 어느 수학 선생님 얘기인즉 하도 수학문제를 많이 풀다보니, 그리고 똑같은 문제를 이 교실 저 교실 다니면서 풀다보니, 몇 년 동안 그렇게 하다보니, 이제는 흑판에다 분필을 딱 대고 다른 생각 하고, 다른 생각하면서도 다 써놓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놓고 "이놈들아, 이것도 몰라?"하고 나가면 그만 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됐다는 것이었습니다. 수학문제 풀면서도 딴 생각한다는 거예요. 그래도 줄줄줄 나온대요. 교과서 하나로 그거 수십 년 했으니까요. 이렇고 보니 가르칠 때에 일방적이 됩니다. 나는 가르치는 입장에만 있는 줄 알아요. 잘못된 일이지요. 가르치는 입장에 있는 동시에 또한 배우는 입장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돼요. 우리 부모네들도 보면 스스로는 행하지 않으면서 가르치면서 한마다 하는 말이 있어요. '다 너를 위해서 그러는 거다.' 쓸데없는 소리하지 마세요. 이러니까 교훈이 부도가 나는 거예요. 먹혀들지를 않는 거예요.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것만 생각하고 나도 배워야 한다는 입장이 없어요. 일방적으로 말을 하지 듣는 자세가 없어요. 듣는 마음이 없어요. 어느 사이에 가르치면서 자기 자신을 상실해버려요.
또 하나 있습니다. 나를 예외시합니다.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하고 나는 예외입니다. 꼭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게 가르치는 자가 빠지기 쉬운 함정입니다. 본문에서 보는바 이스라엘사람들이 그래요. 율법을 알고, 율법을 가르치고…… 그러면서도 스스로들은 행하지 않았어요. 가르치기만 했지, 자기 본체를 잃어버렸어요. 행하지 아니했어요. 그래서 오늘의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 도다." 잘 알면서 스스로는 행치 아니함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받는다고 함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말은 잘하고 스스로는 행하지 않을 때에는 결국 예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것이 됩니다. 안 믿는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어요? 차라리 모르는 게 낫지, 말은 잘하네, 공산당 뺨치게 말 잘하는 게 예수 믿는 사람이라며?--이런 소리나 들어서야 되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욕을 돌리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말씀합니다. 할례를 비롯해서 종교 예식이다 필요하고 또 중요하지마는 내실이 없고 내면적인 의가 없다고 한다면 차라리 형식도 없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뜻 없는 할례가, 중생 없는 할례가 무슨 의미 있느냐 함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25절을 다시 눈여겨보면 "네가 율법을 행한즉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한즉 네 할례가 무 할례가 되었느니라"합니다. 형식은 남았고, 내용은 없어요. 그러므로 없는 것이지요. 좋은 예로 우리가 주고받는 선물을 들 수 있습니다. 우리가 누구에게 선물을 준다던가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선물을 받았다던가 특별히 남편으로부터 아내로부터 선물을 받았다던가 할 때, 가령 물건은 오갔는데 마음이 거기 담기지 않는 경우가 있어요. 조금 미안할 때면 오히려 선물 가져오는 일이 있다면서요? 그러니까 평생 선물 안 사오던 사람이 웬일로 선물 사오거든 수상한 줄 아세요. 보상심리가 거기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미안하니까 사들고 들어오는데 그것도 모르고 반가워하는 사람이라면 더 한심한 사람이지요. 안 하던 짓을 하거든 수상히 여기세요. 보세요. 선물은 있는데 마음은 멀어졌어요. 마음 담기지 않는 선물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몇 캐럿 짜리 다이아반지가 어떻다는 겁니까? 마음이 담기지 않은 것이면 구리반지만도 못하지요. 꼭 마음이 가득 담겨 있을 때에 라야 선물의 선물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하고, 하나님의 법을 따라나감에 있어서 할례를 비롯한 모든 종교 의식이 뜻이 없고, 의미가 없고, 내실이 없고, 그 속에 생명력이 없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그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본문은 아주 강하게 말씀합니다. 28절에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합니다. 아주 단호하게 말씀합니다. 다시 29절에 보니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합니다. 표면과 이면이 다 있으면 좋지요. 그러나 이면이 없을 바에는 표면도 없는 게 좋습니다. 사람으로 봐도 그렇잖아요? 사랑이 없을 바에는 선물도 없는 게 좋아요. 사랑 안 할 바에는 안 한다고 말이라도 하는 게 차라리 좋아요. 사랑한다고 말은 하면서 사랑은 없어요. 이건 더 나쁜 것입니다. 미워하면 차라리 미워한다고 진실하게 나올 것입니다. 사랑이 식었으면 식었다고 할 것입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내면으로는 그렇지 않은, 이런 것은 더더욱 하나님 앞에 합당치 못한 것입니다. 이면이 없을 바에는 표면도 없는 게 좋다 함입니다. 만일에 둘 중에서 하나라면 표면은 없더라도 이면이 있는 게 좋아요. 이것이 사도 바울의 논법입니다. 민족적, 혈통적 유대인이기보다는 정신적 유대인, 신앙적 유대인, 이면적 유대인이 진짜 유대인이다, 하는 말씀이 되겠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결론 부분에서 보면 신령한 것과 의문에 속한 것을 구분해 말씀합니다. 신령하다는 것은 믿음으로 구원 얻는 것을 말씀함입니다. 그리스도로, 성령으로, 말씀으로, 내면적이고 이면적인, 영적인 세계의 믿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의문이란 율법을 말씀함입니다.
지식만 가진 것이요, 전통만 내세우는 것이요, 외식만 있지 내면적으로는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의문에 속한 것이다, 하는 말씀입니다. 그런고로 본문이 가르쳐주는 가장 중요한 교훈인즉 참 유대인은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참 유대인은 아브라함처럼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행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내면적이고, 영적이고, 그리스도 중심적인 신앙에 있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외식주의자가 되던가, 혹은 전통을 내세우던가, 혹이라도 형식주의에 빠져서는 안됩니다. 특별히 남을 가르치는 지식만을 자랑하는,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내실이 있고, 진실이 있고, 그리고 참 믿음에 사는 참 이스라엘, 참된 의미의 유대인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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