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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자녀(롬8:1~17)
오늘의 본문은 아주 귀한 말씀입니다. 특별히 제가 개인적으로 아주 사랑하는 말씀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자녀됨을 확증해주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의미를 소극적으로만 설명하지 않습니다. '예수 믿는다' 하는 것을 죄로부터 자유함을 받고, 저주로부터 구원받고, 그리고 영원한 멸망으로부터 구원받았다. 하는 소극적 의미에서 설명하지 않습니다. 무릇 그리스도인이란 무엇 무엇으로부터, 죄와 사망과 율법과 진노로부터 구원받았다고 하는, 그로부터 자유 했다고 하는 그런 소극적 의미만 가진 것이 아닙니다. 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데에 그리스도인 된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자녀된 특권을 누리는 데에 있습니다.
그런고로 여러분은 자신의 신앙생활이 지금 어느 수준에 있는지 가만히 생각해보세요. 그저 죄에 빠지지 않으려 하고, 시험에 빠지지 않으려 하고, 저주받을까봐 걱정이고, 벌받을까봐 걱정이고, 또 이것이 잘못됐나 저것이 잘못됐나 걱정이고… 이러한 가운데 있어서는 안됩니다. 이런 소극적 의미에서의 구원, 여기에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적극적으로 구원을 즐겨야 합니다. 구원을 향유해야 됩니다. 바로 하나님의 자녀된 특권을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됨의 행복을 즐기는 것입니다. 마음껏 즐겨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는 그런 적극적 의미에서의 그리스도인 된 의미를 알고, 또 그 속에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별로 그렇게 훌륭한 분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만, 하루나끼라고 하는 신학자는 기독교인의 의미를 간단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너무나도 명료한 설명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자신을 하나님의 자녀로, 이웃을 형제로-이렇게 생각하는 자가 그리스도인이다.' 하나님을 내 아버지로, 진노의 아버지로, 사랑의 아버지로, 공의로우신 아버지로, 자비로우신 아버지로… 어쨌든 하나님을 '아버지 하나님'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나 자신은 구속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이는 넓은 의미에서의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좁은 의미에서의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는 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태어났습니다. 모든 생명은 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아닌 자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먹여주셔서 먹고살아요. 하나님께서 보호해주셔서 사는 거예요. 그런고로 넓은 의미로 생각하면 온 만물, 온 동물, 온 우주, 온 생명이 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라 함은 이런 광의적인 의미에서의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좁은 의미에서, 구원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아서, 그의 약속을 받는 그런 자녀입니다. 이렇듯 특별한 의미에서 구속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녀 개념-이 속에 내 정체감이 있습니다. 내 self identity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름을 밝히면 실례가 될까봐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마는, 일본에 한 유명한 신학자가 있습니다. 이 분은 옛날 고베시장의 아들입니다.
그런데 첩의 아들이에요. 소실의 아들이에요. 그래 본처의 자녀들이 그를 늘 구박했어요. 그가 공부하고자 애를 쓸 때에도 "이 녀석아, 서자가 공부는 해서 뭘해?"하고 쏘아붙였어요. 그것, 말이 되거든요.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보았자 옛날에 서자가 무슨 출세를 할 수 있겠습니까? 이래서 늘상 구박을 하고 자꾸 쥐어박는 거예요. 그래 그는 형제들과도 같이 어울리지 못하고 한쪽구석에 쭈그려 있거나 혼자서 외롭게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귀에 구세군사람들이 나팔을 불면서 노방전도를 하며 외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으세요!" 그는 재빨리 따라가서 물었습니다. "서자도 구원받습니까?" "그럼요. 구원받고 말고요." 여기서 그가 예수를 믿어요. 그리고 유명한 목사가 되고, 신학자가 됐습니다. 그는 늘 이런 말을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아무 시장, 아무 부자의 서자가 아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보세요. 육체로서는 분명히 첩의 아들이에요. 한평생 멸시당하는 첩의 아들이에요. 그러나 아니예요. 나는 영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다-이 정체감을 가지고 그는 감사하며 한평생을 복음을 위해 산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또하나, 나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요, 다른 사람도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나도 하나님의 자녀, 너도 하나님의 자녀, 그러니까 우리는 형제다. 육체적으로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영적으로 우리는 같은 예수의 피로 말미암아 구원받았고, 같은 하나님의 자녀됨을 고백한 형제다. 당신과 나는 형제다'-이렇게 사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정체를 분명히 해야 됩니다. 육체로서는 내가 아무개의 아들입니다. 혹은 서자일 수도 있고, 고아일 수도 있고, 부모가 누군지 모르는 자일 수도 있어요. 그러나 상관할 것 없어요. 그것은 육체의 문제입니다. 영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이에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된 형상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그 인격이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 인격이 지배하가 육체이기 때문에 육체도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이 말의 뜻을 우리는 지극히 영적인 의미에서 생각해야 됩니다. In the sense of spirit-'영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육체적으로 생각할 문제가 아니예요. 때때로 보면 우리는 혈족문제에 대해서 너무 강한 집념을 가지고 있어요. 누구는 김씨다, 누구는 박씨다, 하며 따져요. 그래서는 자기 씨족, 자기 종자, 그 육체적인 것에 대해서 너무 전념하고 집착합니다. 그실 별것 아니예요. 여러분도 다 지내보아 알겠습니다마는, 예수믿는 우리 교우 한 사람이 예수 안 믿는 내 친아들보다도 나아요. 그것을 잊지 말아야 돼요. 한평생 같이 살아도 예수 안 믿는 남편이 예수 믿는 내 친구만도 못한 거예요. 그렇지 않습니까? 영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아주 끊어버릴 문제는 아닙니다만 우리는 이 육체적 관계를 극소화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영적 관계, 영적 이해, 영적 정체감을 극대화해야 합니다. 이렇게 되면 검은 사람, 흰 사람 가릴 것이 없어요. 아시아사람, 유럽사람 구별할 것도 없어요. 다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가 되는 것이에요.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다-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시오, 사랑의 아버지시오, 생명의 근원이시오, 공의의 하나님이요, 진노의 하나님이시오…' 이런 개념보다 제일 중요한 것은 '구원의 하나님'입니다. 독생자를 보내시사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 독생자를 보내시사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 그 엄청난 하나님-이렇나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하게 될 때에 그가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자, 여기에 또 하나의 문제가 있어요. 우리는 본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었어요. 구원받지 못했을 때에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었어요.
그런데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어요. 이 관계를 오늘의 본문에서는 양자(養子)라고 하는 말로 표현합니다.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12절)"-바로 양자의 문제를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도 '양자'가 있습니다마는, 우리는 '양자'에 대해서 좀 잘못 이해하는 것 같아요. 이 문제에 대해서는 서양사람들한테 배워야 될 것 같습니다. 우리는 꼭 '내 자식'이라야만 해요. 그래서 혹 슬하에 자식이 없다든가 해서 다른 집의 아이를 데려다가 양자를 삼으라고 해도 "안 된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는데 내가 왜?"-이렇게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어요. 그런데 서양사람들은 그렇지 않아요.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우리 땅에서 태어난 고아들이 남의 나라에 팔려가고 있지 않아요? 다른 나라에 가서 양자가 되잖아요? 어찌해서 남의 나라에 보낸다는 말입니까? 우리가 양자 삼아야지요.
참 슬픈 얘기입니다. 어쨌든 서양사람들은 이렇게 외국 아이들을 데려다가 양자 삼는 일을 잘해요. 그렇다고 절대 허술하게 생각하지 않아요. 양자 되는 순간부터 그는 완전한 아들이요 완전한 딸이 되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거지든 누구든 상관 안 했어요. 심지어는 노예의 자식이라도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양자로 삼으면 법적으로 그 날부터 완전한 그 집 자녀가 됩니다. 그 제도에 준해서 사도 바울은 오늘 이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양자라 하게 되면 여러분이 잘 아는 데로 황제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네로 황제는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양자입니다. 원래 노예의 아들입니다. 그러나 왕의 양자가 됐기 때문에 당당하게 그 뒤를 이어서 왕이 됩니다. 왕가에서도 이럴진대 하물며 일반 가정은 말할 것도 없었지요. 또 왕한테 육체적으로 아들이 있어요. 그가 시원치 않으면 다른 사람을 양자 삼아서 아들로 만들고, 그 아들이 대를 이어가게 했습니다. 이것은 육체와 관계없어요. 이것은 신분의 문제요, 이것은 정신의 문제요, 이것은 사회적 계약의 문제입니다. 그렇게 '양자' 삼았던 거예요.
그런데 오늘의 본문은 이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14절)."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자는"-이것은 영적 관계를 가리킵니다. 반대로 악마의 인도함을 받으면 그는 악마의 자녀예요. 이것을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또 정욕의 인도함을 받으면 육체의 아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으면 그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특별히 신학적으로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성령의 기능은 특별히 개인의 구원과 관계된 것으로 세 가지 있어요. 하나는 중생 하는 것이에요. 예수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는 거예요. 그것이 첫째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 것, 그것이 바로 성령이 하시는 역사입니다. 그러니까 주께서 나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사실이 믿어지는 거예요. 이게 안 믿어지면 큰일이에요. 믿어짐으로써 '내가 죄사함받았다'하는 큰 감격을 얻게 됩니다. 여기서 중생의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둘째가 하나님의 자녀된 정체감입니다. 즉 양자 됨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다, 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도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16절)"-성령이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증거 합니다. 너는 하나님의 자녀다,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너는 하나님의 딸이다-이것을 증거 해주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실한
면 다른 사람을 양자 삼아서 아들로 만들고, 그 아들이 대를 이어가게 했습니다. 이것은 육체와 관계없어요. 이것은 신분의 문제요, 이것은 정신의 문제요, 이것은 사회적 계약의 문제입니다. 그렇게 '양자' 삼았던 거예요.
그런데 오늘의 본문은 이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14절)."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자는"-이것은 영적 관계를 가리킵니다. 반대로 악마의 인도함을 받으면 그는 악마의 자녀예요. 이것을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또 정욕의 인도함을 받으면 육체의 아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으면 그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특별히 신학적으로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성령의 기능은 특별히 개인의 구원과 관계된 것으로 세 가지 있어요. 하나는 중생 하는 것이에요. 예수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는 거예요. 그것이 첫째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 것, 그것이 바로 성령이 하시는 역사입니다. 그러니까 주께서 나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사실이 믿어지는 거예요. 이게 안 믿어지면 큰일이에요. 믿어짐으로써 '내가 죄 사함 받았다'하는 큰 감격을 얻게 됩니다. 여기서 중생의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둘째가 하나님의 자녀된 정체감입니다. 즉 양자 됨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다, 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도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16절)"-성령이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증거 합니다. 너는 하나님의 자녀다,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너는 하나님의 딸이다-이것을 증거 해주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실한 의식, 정체감을 가지고 살게 하십니다.
셋째가 하나님의 자녀로 자라게 하십니다. 이것을 '성화(聖化)'라고 합니다.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오고, 믿어지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그 사랑에 감격하게 되고, 그러는 동안에 점점 자기도 모르게 죄로부터 멀어집니다. 세상 정욕으로부터 멀어집니다.
욕심으로부터 멀어집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점점 자라게 됩니다. 지식이 자라고, 의식이 자라고, 세계관이 자라고… 이렇게 해서 자기도 모르게 높은 수준에, 하나님의 자녀로 되어 가는 것입니다. becoming, 하나님의 자녀로 되어 가는 것입니다. 성숙해 가는 것입니다. 이 또한 성령이 하시는 것입니다. 내 마음으로 하는 게 아니예요. 내 의지로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어느 사이에 전에 그렇게 미워하던 사람을 사랑하게 돼요. 그렇게도 좋아하던 것을 이제는 버리게 돼요. 차차 하나씩 하나씩 고쳐져요. 달라져요. 이것은 꼭 입맛이 변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여러분, 이상하게도요, 사랑하는 사람의 입맛에 나도 따라갑니다. 예전에는 그 음식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남편이 그 음식을 좋아하니까 남편을 위해 만들어주고 어떻게 하다보니까 어느 사이에 그만 나도 모르게 같이 좋아하게 됐어요. 내가 옛날에 좋아하던 것은 다 잊어버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나도 좋아하게 됐다는 말이에요. 이렇듯 입맛도 바뀌고, 심지어는 성격도 바뀝니다. 세계관도 달라집니다.
자, 성령이 이와 같이 이루십니다. 이것은 '성화'의 문제입니다.
그러할 때에 우리가 생각해야 됩니다. 오늘의 본문말씀대로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아요. 여러분 스스로 생각해보세요. '내가 지금 성령의 인도함을 받느냐, 아니면 악마의 인도함을 받느냐'-쉽게 말하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선한 방향으로 기울어지느냐 아니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자꾸 나쁜 곳으로만 기울어지느냐, 이것을 생각해 보세요. 꼭 하지 말라는 것을 하는 것만 좋다면 문제가 있는 것이에요. 그것을 우리가 알아야 해요. 성령의 인도함을 받을 때에는 성령이 내 주인이 되시고, 내 마음과 뜻을 다 주장하시고 인도하시고 있어요. 이렇게 성령에 이끌리는 자, 이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성령의 은사를 따라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게 됩니다. "저희는…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15절)"-'아바'라고 하는 말은 아람어입니다. '아버지'는 헬라어입니다. '아바'-이 말의 뜻이 참 재미있어요. 이 말은 아주 어린아이가 말 배울 때에 '아빠 아빠'하는 것을 말합니다. '아빠'는 만국 공통어예요. 어느 나라 말도 다 아빠예요. 참 이상하지요? 아빠는 어린아이가 부르는 소리예요.
이런 재미있는 일이 있어요. 언젠가 제가 어느 교회 부흥회를 인도하러 갔어요. 그 때에 제가 한 30년 전에 시무한 교회에 다니던 여자아이의 아버지 되는 장로님댁에서 저녁을 먹게 되었지요. 어느덧 그 아이가 시집도 가고 나이도 벌써 마흔이 넘었습니다. 마침 그 딸이 친정에 왔어요. 그런데 제 부모님한테 "아빠 엄마" 그러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도대체 네 나이가 몇 살인데 아빠라고 하느냐?" 했지요. 그랬더니 이렇게 대답합니다. "목사님 이해해주세요. 왜 그런지 저는 '아버님'하면 자꾸 멀게만 느껴져요. 어렸을 때처럼 '아빠 아빠'하는 것이 그렇게 좋아요. 우리 아빠도 그걸 좋아하시고요. 그래서 제 나이 마흔이 넘었지만 여전히 '아빠'라고 부르는 것예요." 사실 그래요. 가만히 보면 '아빠'는 때에는 하루에 몇백 번도 부르는 말이었어요. '아버지'는 학교에 가기 시작하면서부터 부르는 거예요. '아버님'은 시집갔다가 일 년에 한 번쯤 친정에 와서 부르는 거예요. '아버님'-그 소리는 몇 번 못들어요. 역시 '아빠'라 좋은 거예요. 그렇지요? 버릇은 좀 없지만 말이에요. 그렇다고 해서 오늘부터 기도할 때에 '아빠'라고 말하지 마세요. 그것도 또 문제예요. 그렇다고 도 '하나님 아버님'이라고 말하지도 말고요. 딱 중간으로 '하나님 아버지'라고 하세요. 자, 본문은 이제 '아바 아버지'-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릅니다. 성령이 나를 하여금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하시는 거예요. 감히 누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어요? 성령이 도우십니다. 여러분, 명심할 것입니다. '아버지'라고 부르는 순간 나는 큰사랑을 느끼게 됩니다.
아버지의 그 귀한 사랑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종의 영을 받은 사람, 하나님의 자녀가 못된 사람은 지금도 두려워합니다. 두려운 영을 받았어요. 오늘의 본문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15절)"-여러분, 교회 나올 때마다 무서워요? 하나님이 무서워요? 아직도 무서워요? 그저 무섭기만 합니까? 그렇다면 아직도 구원받지 못한 거예요. 아버지의 영을 받은 사람은 내 죄가 아무리 많아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아요. 그런고로 기뻐요. 사랑해요. 아버지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사랑을 느껴요. 그런데 종의 영을 받은 사람은 아직도 하나님을 진노의 하나님으로만 생각해요. 하나님을 생각할 때마다 두려워요. 무서워요. 벌벌 떨어요. 견딜 수가 없어요. 여기서 '나는 아직도 하나님의 자녀의 참영을 못했다'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16절)"-여기서 '증거'라는 말을 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사람들에게 이런 전설이 하나 있습니다. 어떤 아버지가 꽤 큰 어린아이, 그러니까 한 대여섯살 먹은 그런 어린애를 등에 업은 채 광야를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저쪽 맞은 편에서 오던 친구를 만났습니다. 서로 인사를 나눈 다음에 친구는 좀 의아스러웠던지 이렇게 물었습니다. "자네, 지금 등에 업은 아이가 누구 아이인가?" "응, 내 아들이야." 그러자 이 친구, 짓궂게도 등에 업힌 아이에게 또 물었습니다. "너를 업고 가는 이 사람이 네 아버지냐?"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아이는 주저 없이 "아니오"하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기가 막힌 아버지는 아이를 내려놓았어요. 그리고 "아니, 얘야. 내가 네 아버지 아니라니 무슨 소리냐?"하고 물었지요. 아이는 끝까지 우깁니다.
"어떻게 당신이 내 아버지예요?" "내가 널 먹여주지 않느냐?", "나를 업었다고 내 아버지예요?" "내가 널 먹여주지 않느냐, 가르쳐주지 않느냐, 옷을 입혀주지 않느냐? 그러니 내가 네 아버지가 아니냐." "그거야 뭐 종도 할 수 있는 일이고 다른 사람도 할 수 있는 거예요. 당신이 어째서 내 아버지란 말이예요?" 참으로 기막힐 노릇이지요. 아무리 내가 네 아버지라고 말해도 믿어주지 않아요. 이것이 무슨 얘기입고 하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해내시어 광야에 데려다놓으시고 '내가 너희의 아버지다'하실 때에 저들이 아버지됨을 인정하지 않은 것을 말합니다. 이래서 아버지는 기가 막히는 거예요.
그러나 한 번 더 깊이 생각해봅시다. 아버지와 아들과의 이 답답한 변론에 있어서 이제 '이 사람이 네 아버지다'라는 것을 누가 증명해줄 수 있습니까? 바로 어머니인 것입니다. 어머니만이 여기서 "하늘이 두 쪽 나는 한이 있어도 이 분은 네 아버지다"하고 말해줄 수 있는 거예요. 여러분 가운데에는 아마도 자기 아버지를 쳐다보면서 "당신이 정 내 아버지요?"하고 그렇게 의심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다 효자들이라서. 그러나 18세기 영국에서는 정말로 그랬답니다. 상당수의 자녀들이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았어요. 그 이유는 세상이 너무도 성적으로 문란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버지를 의심했어요. 아버지가 내 아버지라고 누구도 믿어주고 않았답니다. 그래 "정말 당신이 내 아버지요?"라고 물었다고 것입니다. 이럴 때에 이 아버지됨을 정말로 믿게 할 수 있는 바로 어머니인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에서는 성령을 '어머니의 영'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자비와 사랑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성령이 증거 해주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생각해야 됩니다.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특권, 내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증해주시는 그 분은 바로 성령이시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된 특권을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감히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은 특권입니다.
또 한 가지의 특권은 기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와서 기도하는 것, 이것은 의무가 아닙니다. 특권입니다. 누가 누구에게 이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와서 감히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특권입니다. 요한복음 5장 1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친아버지라고 부르신다 해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치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이것은 넓은 의미에서의 아버지 개념이 아닙니다. 좁은 의미에서 '하나님은 내 아버지다'-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저들의 걸림돌 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생각한다는 것-이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이 바로 '아버지 하나님'입니다. 이는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구약에도 아버지라는 개념이 있기는 합니다마는 이것은 희미합니다. 예수께서 보여주신 신관(神觀), 하나님에 대한 이해는 한마디로 '아버지 하나님'입니다. 왜 예수가 십자가에 죽으셨느냐-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다음에 '내 아버지 곧 너의 아버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관계를 연결하시기 위해서 주께서 죽으신 것입니다. 특별히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탕자 비유가 있지 않습니까? 이 비유는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바로 '아버지 하나님'을 말씀함입니다. 그 아버지는 탕자를 기다리는 아버지요, 돌아올 때에 무조건 용서하는 아버지예요. 그 아버지, 그 자비로운 아버지, 그 귀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하나님을 우리에게 소개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설명해주신 하나님은 곧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다시 한번 오늘의 본문으로 돌아가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설명하고 있는 이 양자의 비유를 생각해야 됩니다. 양자라는 게 무엇이냐-우리는 예수 믿기 전과, 예수 믿어 구원받은 다음을 분명히 구별하여 생각해야 됩니다. 우리는 세례 받으면서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납니다. 그런고로 어떤 사람들은 자기의 생일을 채워버리고 자기가 세례 받은 날을 생일로 지킵니다. 왜요? 육체가 태어난 것은, 산부인과에서 태어난 것은 별로 중요한 게 아니예요. 문제는 영적으로 태어나는, 이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날을 생일로 지켜야 옳지 않느냐, 그 고집하는 것입니다. 생각해봅시다. 일단 양자가 될 때에는 옛날에 나를 낳아준, 나와 관계 있던 본래의 가정과는 아무 관계도 없어집니다. 관계가 끊어집니다. 옛가정과는 그 관계가 완전히 끊어집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양자로 다른 데로 갔으면 이제는 친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도 상복을 입지 않습니다. 어머니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어도 집에 가지 않습니다. 이것이 양자입니다. 또 이쪽 양자 삼은 집에서는 못가게 합니다. 당연히 안가야 한다는 것이에요. 이것이 양자예요. 그러니까 어떤 집의 자녀가 되었든간에 일단 다른 집으로 양자로 옮겨가면 옛날 관계는 완전히 끊어지는 거예요. 오늘의 본문은 그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12, 13절)"-우리는 옛사람, 옛날에 속했던 그 관계를 완전히 끊어버려야 합니다. 이제 그것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자로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양자됨'입니다.
두 번째, 이제 새 집에 가서 양자가 됐습니다. 그러면 양자된 그 집의 신분에 속하는 것입니다. 내가 노예라 하더라도 귀족집에 양자가 됐으면 이제부터 당당한 귀족입니다. 그리고 상속도 받게 됩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됩니다. 신분이 바뀌는 거예요. 근본적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이것이 양자입니다.
또 세 번째로, 이렇게 됐기 때문에 옛가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와 나는 무관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빚진 자로되 (12절)"-이 '빚졌다'라는 것이 또한 심각한 문제입니다. 옛날에는 이런 일이 있었어요. 어떤 사람이 빚을 많이 졌어요. 그런데 갚을 길이 없어요. 그래도 어떻게든 갚으려고 애를 쓰다가 죽어버렸어요.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빛을 준 채주(債主)가 와서 그 집의 물건을 다 가져갑니다. 뿐만아니라 그의 자녀들이 있으면 그 자녀를 빚값으로 가져갑니다. 가져다가 노예를 만듭니다. 자, 아버지가 빚진 것을 못갚았을 때는 아들이 대신 노예가 되어서 갚아야 했습니다. 이렇게까지 의무가 강하게 주어져요. 그런데 누군가 그 아들 중의 하나를 데려다가 자기가 양자로 삼았어요. 그러면 그 아들은 이 집의 빚 갚는 일과는 관계가 없어져요. 이게 얼마나 중요한 것입니까? 아무리 아버지가 많은 빚을 지고 죽었고, 내가 대신 갚아야 할 의무가 있다 하더라도, 내가 그 집에서 다른 집으로 양자로 옮겨가게 되면 그 옛집의 빚은 나와 아무 상관이 없어요. 굉장한 얘기지요? 이래서 우리는 옛생활과 관계가 없다는 거예요. 정말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 때에는 옛날에 속했던 그 옛생활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이제는 새 가정의 신분을 가져야 하고, 양자된 그 신분에 속한 의무를 자져야 됩니다. 이렇게 거꾸로 생각할 수도 있어요.
귀족의 집에 양자가 되어서 노예에서 귀족이 될 수도 있지만, 반대로 귀족에서 노예의 집에 양자가 될 수도 있어요. 어떻게 됐든 새로 양자된 그 집의 모든 의무에 예속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본문은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16절, 17절)"-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하나님의 가정의 일원이 되었다, 그렇다면 그 새 가정의 모든 영광을 누릴 뿐더러 동시에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한다 함입니다. 자, 어느 귀족집에 양자로 왔는데 이 귀족이 홀랑 망했어요. 그래도 '모르겠다. 옛날집으로 가자'-이것은 안 되는 거예요. 이제 새로 온 이 집에서 잘살든 못살든 이대로 영광도 누리고, 고난도 함께 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요? 이제는 이 집이 내 아버지 집이니까, 이 집이 내 집이니까요. 그래서 이 집이 당하는 고난을 내가 함께 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런고로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영광만 얻고자 하고 고난을 받지 않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인답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 것입니다.
테레사 수녀가 길을 가다가 먹지도 못하고 병들어 있는 아이를 발견했어요. 그래 참 안됐다는 생각이 들어서 고아원으로 데리고 갔어요. 그런데 이 아이가 밤이 되면 자꾸 도망을 가는 거예요. 붙잡아다놓으면 도망을 가고, 다시 붙잡아다놓으면 또 도망을 가고… 이상하게 생각한 테레사 수녀는 어느 날, 도망가는 아이의 뒤를 몰래 밟았습니다. 아이는 쪼르르 어느 낡은 움막집으로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곳에는 그 아이의 어머니가 병들어 누워 있었습니다. 아이는 제 어머니 곁에서 잠을 자려고 밤마다 자꾸만 도망을 갔던 거예요. 테레사 수녀는 아이한테 말했습니다. "얘야, 우리, 어린이집으로 가자." 그러니까 아이는 대답합니다. "아니예요. 어머니가 계신 여기가 내 집입니다. 내가 어린이집에서 밥을 얻어먹을 수는 있어도 어머니와는 함께 있어야 합니다." 참 중요한 얘기가 아니예요? 가난하건 부하건 내 어머니가 있는 곳이 내 집이지요. 돈많다고, 먹을 것 많다고 다른 집에 가서 살겠습니까?
여러분, 자녀된 세계관을 분명히 해야 됩니다. 요한복음 18장 1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사랑하는 아버지께서 사랑하는 아들에게 주시는 십자가입니다. 그렇다면 그 십자가를 져야지, 마다할 수 없다 하심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12살 때에 성전에서 '어째서 너는 우리를 이토록 근심시키느냐?'하고 그 부모님이 꾸중할 때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눅 2:29)." 저는 이 말씀을 깊이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렸을 때부터 이 성전을 아버지 집으로 생각하셨어요. 이 성전에 있는 기쁨이 가장 크셨어요. 내 아버지 집-이 얼마나 귀한 얘기입니까? 여러분, 성전을 내 아버지 집으로 생각하고, 여기에 들어설 때마다 평안하고, 만족한 위로와 행복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사무엘하 15장 이하를 보면 압살롬이 자기 아버지인 다윗 왕을 죽이겠다고 쫓아다닙니다. 그러다가 그 압살롬이 죽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기를 죽이겠다고 쫓아다니던 아들이 죽었는데도 기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울면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삼하 18:33)"-이것이 아버지입니다. 아무리 못된 아들이라도 아버지는 이렇듯 아들을 사랑하는 거예요.
우리는 그 사랑의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고 있어요. 그는 능력이 많으십니다. 그는 지혜도 많으십니다. 그는 사랑을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그 아버지의 사랑에 충만하고, 그 말씀을 받아들임에 있어 항상 기쁨으로 받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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