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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희락의 복음(1장 1절~2절)

by 【고동엽】 2022. 1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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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락의 복음(112)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는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 지어다.

 

 

빌립보서는 제가 특별히 좋아하는 성경입니다. 빌립보서가 다른 성경들보다 더 귀하다거나 더 중요하다거나 하는 객관적인 이유라도 있어서 그런 것은 결코 아닙니다. 성경은 어느 성경이든지 똑같이 중요하고 다 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성경에 따라 나름대로 받는 은혜가 다를 수 있습니다. 개인적인 체험에 따라서도 특별히 더 친숙해지는 성경이 따로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빌립보서를 좋아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저 자신과 교회, 그리고 한국 교회 전체를 내다볼 때에 목회적인 필요에서도 이 빌립보서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빌립보서를 특별히 좋아하는 데는 좀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빌립보서에는 아주 순수한 그리스도론을 포함한 교리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는 아주 순수한 복음입니다.

둘째, 고난을 이기는 기쁨을 여기서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난을 초월하고 극복하는 그 벅찬 감격과 기쁨이 이 서신에 있습니다. 저는 한때 이 빌립보서 네 장 전체를 다 외어 두고, 오며가며 한번씩 외어 보곤 했습니다. 여러분도 한번 외어 보시기 바랍니다. 한 백 번쯤 읽으면 외어질 것입니다. 셋째, 빌립보서는 소망적인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항상 긍정적이고 희망적이고 창조적인 세계를 내다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학적인 의미에서 볼 때 이 빌립보서가 말해 주고 있는 복음이나 기쁨이나 소망은 전부가 실제적인 것이기 때문에 좋아합니다. 추상적 논리적 교리적인 것이 아니며 철학적인 것은 더욱 아닙니다. 아주 실제적인 것, 생활 속에 적용될 뿐 아니라 그 신앙 생활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실제적인 간증이 여기에 나타나 있습니다.

 

빌립보서는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세 가지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첫째 별명은 '옥중서신'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 감옥에 갇힌 몸으로 이 편지를 썼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는 귀하고 특별합니다. 더욱이 바울은 언제 죽을는지 모르는 위험한 처지에 있으며, 언제 사형 선고를 받을는지 모르는 막연한 위기의 시간에 있으면서 이 복음을 쓰고 있습니다. 이런 점만 보더라도 빌립보서는 실로 중요한 편지라 할 수 있겠습니다. 감옥에서 온 편지, 생명의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가운데서 마지막으로 써 보낸 편지니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가졌습니까? 둘째 별명은 '사랑의 서신'입니다. 빌립보교회에 보내는 이 편지 속에는 단 한마디의-어느 정도의 암시가 있기는 하지만-어떤 권면이나 특별한 충고가 없습니다. 에베소서와 갈라디아서는 물론 고린도서 같은 것은 교리적인 면이나 혹은 생활면에서 그 교회의 잘못된 바를 일일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사람의 이름까지 지적해 가면서 '이것이 잘못되었다' '이런 것은 끊어라' '이런 것은 바로잡아야 한다' '이렇게 책망하라' 그리고 '이러이러한 사람은 내 쫓으라'는 식의 강한 권면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빌립보서는 사랑스러운 말로 시작해서 사랑스러운 말로 끝납니다. 그러므로 이 편지는 아주 순수한 사랑의 복음입니다. 오직 감사와 사랑의 이야기만 있습니다.

셋째 별명은 '희락의 복음'입니다. 기쁨의 복음입니다. '기뻐한다''기뻐하리라'고 하는 말이 무려 아홉 번이나 나옵니다. 중요한 것은 이 말이 그저 밑도 끝도 없이 "너희는 기뻐하라"고 하는 막연한 것이 아니라 "내가 기뻐하니 너희도 기뻐하라"고 하는 실감나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울지만 너희는 기뻐하라"거나 "내가 너를 위해 고생하고 있으니 너는 좀 즐거워하라"고 하는 식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권면 하는 사람 자신이 먼저 기뻐하면서 "너도 기뻐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자녀들을 훌륭하게 키우고 싶으십니까? 비결이 따로 없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 두 분이 행복하게 살면 됩니다. 사람들이 종종 가정교육을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묻곤 하는데, 이럴 때마다 저는 부부싸움 하지 말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면 되는 것입니다. 음식 문제도 그렇습니다. 아이들에게 "이거 영양가 높고 맛있는 음식이니 먹어라"한다고 아이들이 그 음식을 잘 먹습니까? 내가 먹으면 따라 먹습니다. 나는 안 먹으면서 '너는 먹어라'하고 강요하니 아이들이 안 먹는 것입니다.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1:18)." "나를 관제(灌祭)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2:17,18)"

바로 이 점이 빌립보서의 매력입니다. 이것은 감옥 안에서 하는 말이므로 더욱 귀한 의미를 갖습니다. 즐겁게 잔치를 베풀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옥에 갇혀 있는 그 답답하고 위험한 시간에도 기쁨으로 살아가면서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기뻐하라"고 하니 얼마나 은혜로운 말씀입니까? 여러분은 혹 남보다 좋은 여건 속에서 전도하기를 원치 않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아예 그만두시는 것이 좋습니다.

전도란 아무리 남보다 어렵게 살더라도, 몸이 약하더라도, 사업이 어려운 형편에 있더라도 항상 싱글벙글 웃고만 다녀도 저절로 되는 것입니다. "당신은 왜 히죽히죽 웃고 다닙니까?"하고 남들이 이상하게 여기면 "좋은 일이 많아서 그렇습니다." 이렇게 대답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전도가 됩니다. 하고많은 날을 찡그린 얼굴로 다니면서 답답한 소리나 하고, 그러다가 누구를 만나 "예수 믿으라"고 권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당신이나 잘 믿으시오." 이런 반응을 얻기 십상입니다.

어려운 처지에 있으면서도 그 환경과 관계없는 역설적인(paradoxical) 기쁨을 지니고 사는 사람, 이런 사람이 참 전도인 입니다. 바울은 지금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스스로 기뻐하면서 감옥 밖의 사람들에게 기뻐하라고 말합니다. 여기에는 우리가 좀더 생각하고 찾아봐야 할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빌립보교회가 세워지게 된 과정을 살펴봅시다. 주후 52년경, 2차선교여행 때의 어느 날 밤, 사도 바울은 환상을 봅니다. 한 마게도냐 사람이 나타나 "우리를 도우라(16:9)"고 하는 말을 들었던 것입니다.

이리하여 바울은 소아시아로 가려던 계획을 바꾸어 배를 타고 유럽으로 옮겨갑니다. 이것은 복음이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수출되게 되는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사도 바울이 마게도냐 첫 성 빌립보에 이르러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그런데 빌립보에는 히브리 사람들이 별로 없고 회당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하여튼 그는 낯선 도시에 들어가 복음을 전하다가 귀신들린 여자아이 하나를 고쳐 준 것 때문에 애매하게 감옥에 갇힙니다. 아무 죄도 없이, 다만 그 여자아이를 고쳐 주었다는 한가지 일로 매도 많이 맞습니다. 그럴 때에 바울은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그는 찬송을 부르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매를 맞고 죽을 지경이 되었는데도 무슨 생각으로 찬송을 불렀겠습니까? 바울은 이런 생각을 했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핍박하다가 다메섹 도상에서 벼락을 맞고 지옥에 떨어졌어야 할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고 복음을 전하다가 마침내는 순교하여 하늘나라에 가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큰 축복이랴.' 그는 순교하게 된 것을 감사하고, 약속된 하늘나라에 가게 된 것을 감사하며, 거룩한 성도의 반열에 참여하게 된 것을 감사한 것 같습니다.

행여라도 '이렇게 찬송하고 기도하면 옥문이 열리겠지'하고 기대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때, 곧 죽음 그 자체를 감사하여, 이것이 영광이요 복된 것임을 알고 감사하고 찬송 부를 때에 보십시오.

옥문이 열립니다. 옥사쟁이가 회개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빌립보에서 일어난 이런 일 감옥에서 기뻐하며 찬송을 부름으로 옥문이 열린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빌립보에 교회가 섭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를 향하여 기뻐하라 할 때의 이 기쁨에 특별한 의미와 은혜가 담겨 있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이것은 종말론적 기쁨입니다. 신혼여행의 기쁨, 재물을 얻는 기쁨, 출세하는 기쁨 따위의 세상적인 기쁨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빌립보 감옥에서 있었던 그 사건을 배경으로 얻어진 신력하고 종말론적인 기쁨이요, 능력이요, 죄를 이기고 의심을 이기고 사망을 이기고 악을 이기는 권세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기서 기뻐하라 함은 이를테면, 기쁨으로 살면 건강에 좋다든가 기쁨으로 살아야 집안이 두루 화평하다(家和萬事成)는 따위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기쁨은 죄악을 이기고 사망을 이기는 권능입니다. 이것은옥문을 여는 것이요 복음의 문을 여는 능력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기뻐하라고 말씀합니다. 빌립보서를 '희락의 복음'이라 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이 희락이란 곧 능력을 의미합니다.

이제 바울이 이 편지를 쓰게 된 동기와 목적을 알아봅시다. 첫째, 주후 6364년에 바울은 로마 감옥에 있었습니다. 빌립보 교인들이 위로금을 모아서 바울에게 보냅니다. 빌립보교회에서 이러한 배려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은 그 교회 자체가 여성적인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빌립보교회는 루디아를 비롯하여 여성들이 처음으로 세운 여성 주도적인 교회입니다. 여성 주도적이라고 하는 것은 인정미가 있다는 뜻입니다. 제가 전도대회라든가 사경회를 인도하러 다니다 보면 자주 겪는 일입니다 마는, 남선교회가 주최하는 사경회에서는 저녁을 못 얻어먹고 설교할 때가 많습니다. 한번은 미리 가서 기다리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저녁 식사에 마음을 써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시장기는 밀려오고어쩌겠습니까? 도리 없이 슬그머니 밖으로 빠져나가 갈비탕 한 그릇을 사먹고 들어갔지요.

그제야 사회 보는 집사님이 나오십니다. "목사님, 올라가십시다." 본당으로 올라가다 말고 생각난 듯 집사님이 묻습니다. "저년 식사는 하셨는지요?" "." 대답하고 예배에 임했습니다. 예배가 끝나고 그 이야기를 했더니, 그 분이 어쩔 줄을 몰라하며 부탁을 합니다. "목사님, 다른 데 가서는 이런 이야기하지 말아 주십시오."

이와는 대조적으로, 여전도회가 주최하는 부흥회에서는 상황이 사뭇 달라집니다. 대접이 여간 좋은 것이 아닙니다. 시간 시간 무엇을 그렇게 맛있게들 해 오시는지 주시는 대로 다 먹지 못하는 게 서운할 지경입니다. 역시 대접은 여성들의 특기(?)인가 봅니다. 바울이 감옥에 갇히자 다른 교회 교인들은 "또 갇히셨구나"하며 기도만 하고 맙니다. 그런데 빌립보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얼마나 추우실까" "얼마나 배고프고 외로우실까"하고 마음으로부터 걱정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좀 도와드리기로 의논하고 위로금을 모아서 그 교회의 젊은 목사님인 에바브로디도 편에 보내드립니다. 사식(私食)도 넣어 드리면서 한겨울 동안 바울 선생을 잘 돌보아 드리고 봄에 돌아오도록 합니다. 이것이 여성적인 교회의 아름다운 봉사 정신입니다. 바울은 이런 인정을 퍽 고마워한 것같습니다. 그래서 418절에 "너희의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라 했고, 15절에는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받는 내 일에 참예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세운 교회는 많았지만 정작 그의 마음을 기쁘게 할 만한 무엇을 해준 교회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이 빌립보교회의 따뜻한 사랑이 더욱 고마웠을 것이고, 이제 그에 대한 감사로 이 편지를 쓰게 된 것입니다.

바울이 빌립보서를 쓰게 된 두 번째 이유는 이 빌립보교회의 현직(現職) 목사였던 에바브로디도와 관련됩니다. 빌립보 교인들을 대신하여 바울을 보살피기 위해 로마에 온 에바브로디도가 얼마동안 봉사하다가 그만 병을 얻고 말았습니다. 고열과 고통으로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자기를 위로하러 온 사람이 병을 얻었으니 바울의 마음이 오죽이나 아팠겠습니까? 일이 잘못되어 에바브로디도가 죽기라도 한다면 빌립보교회에 얼마나 미안한 일입니까? 그래서 바울과 빌립보 교인들은 그를 위해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에바브로디도 본인도 자신이 죽는 것은 괜찮으나 많은 사람에게 폐를 끼치면 안 된다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 그들 모두를 불쌍히 여기시고 에바브로디도를 낫게 해주십니다. 에바브로디도가 건강을 회복하자 바울은 좀더 곁에 두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그를 빌립보로 돌려보냅니다. 한시바삐 그의 건강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빌립보 교인들을 걱정에서 해방시켜 주고자한 것입니다. 이 때에 써 보낸 서신이 이 빌립보서입니다. 이 서신에서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가리켜 "저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한" 착하고 귀한 종이라고 칭찬하는 동시에, 기쁨으로 빌립보교회에 대한 사랑과 신뢰를 표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를 쓰게 된 동기로서 세 번째로 꼽을 수 있는 것은 그 교회의 화목이었습니다. 당시 빌립보교회에도 약간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대저 여성적인 사랑이란 아름답고 다사로운 것인 반면에 단점도 있습니다. 바로 질투가 그것입니다. 질투란, 좋게 보면 매력이 될 때도 있으나 지나치면 문제가 됩니다. 빌립보교회에 두 여성 지도자 유오디아와 순두게가 있었는데, 두 여인이 서로 팽팽하게 맞섰던 것 같습니다. 바울은 이 두 사람을 화해시키기 위하여 "두 마음을 품지 말고 한 마음을 품으라" "하늘나라에 가서 생명의 기업을 같이 누리게 될 터이니 싸우지 말라"고 간곡히 부탁합니다.

이제 본문으로 돌아가 11절을 봅시다.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바울은 이렇게 자기 소개를 합니다. 자신을 "예수의 종"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은 헬라어로 둘로스인데, 이는 일반적인 종이 아니라 팔고사고 하는 노예를 가리킵니다. 그 당시의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노예와 당나귀는 똑같다. 다른 점이 있다면 당나귀는 말을 하지 못하고 노예는 말을 할 줄 안다는 것이다' -- 이런 기록이 있을 정도로 노예는 숫제 집에서 기르는 짐승쯤으로 취급당했던 것입니다.

심지어는 노예의 수를 늘릴 욕심으로 동물을 서로 만나게 해서 새끼를 낳게 하는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자식을 낳게 했습니다. 대단히 민망스러운 이야기올시다마는 지금도 미국의 수준 낮은 흑인촌에 가면 한 여자에게 열 명 이상의 어린아이가 딸려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기가 막힌 것은 그 아이들의 아버지가 저마다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흑인들에게는 노예를 사고 팔고 하던 시절의 패륜(悖倫)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노예에게 무슨 결혼식이고 윤리, 도덕이 있겠습니까.

이 집에 여자 노예가 있으면 저 집의 남자 노예 좀 오라고 해서 하룻밤 자게 하여 아이를 갖게 합니다. 아이를 낳아 좀 클 만하면 똑같은 방법으로 또 아이를 낳게 합니다. 이렇게 해서 노예들의 숫자를 늘려 갔던 것으로, 이것은 백인들이 저지른 무서운 죄악입니다. 노예가 많아야 일꾼이 늘어나고, 그렇게 해서 생긴 노예들은 영원히 주인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라고 부른 데에는 몇 가지 깊은 뜻이 있습니다. 첫째로 자신은 그리스도의 절대 소유라는 뜻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것이니, 내 소유, 건강, 생명, 재능도 다 주님의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620절에 "값으로 산것이 되었으니"라고 했습니다. 노예를 팔고 사고 한 것처럼 예수님께서 피의 값을 치르고 나를 사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예수님께 팔려 온 영원한 노예다, 절대적 노예이다, 나는 예수님의 것이므로 아무런 선택의 자유도 없다 - 이런 뜻으로 한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쉽게'예수님의 종', 또는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말하지만 이것은 그렇게 생각 없이 함부로 할 말이 아닌 것입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라함은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께 절대 순종함을 뜻합니다. 노예에게는 생각도 자유 의지도 없습니다. 주인의 뜻이 노예의 뜻이고, 주인의 생각이 노예의 생각입니다. 판단조차도 하면 안 됩니다. 문자 그대로의 절대 순종을 요구합니다. 주인의 명령에 대하여 거절, 지연, 핑계가 있을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순종했다고 해서 칭찬 받는 법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17:9)?" 칭찬도, 고맙다는 인사도 못 받는 것이 노예입니다. 혹시 주님의 일을 하고 나서 알아주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예수님의 노예가 아닙니다. 셋째, 바울이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라고 말할 때에는 영광도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는 이 종의 개념을 영광된 이름으로 소화했습니다. 선지자의 칭호가 종이었고, 아브라함, 모세, 여호수아, 다윗도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정말로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면 "나는 노예다. 예수님의 노예인 것이다"라고 자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부끄러운 이름으로서가 아니라 영광된 이름으로 항상 '예수님의 노예'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1절에서 바울이 이 편지의 수신인(受信人)"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라고 칭했습니다. '성도'라는 말은 헬라어로 하기오스 이고, 히브리어로는 카도쉬(kadosh)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시고 그분을 모시는 거룩한 무리가 성도입니다. 그런데 이 '거룩'이라는 말은'으로부터 떠난다,' '으로부터 구별된다'는 듯입니다. 생각도 구별되고, 음식도 구별되고, 목적도 구별되고, 의복도 구별되고, 운명도 구별되는 것이 성도입니다.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운명, 구별된 생각, 구별된 사상, 구별된 목적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빌립보에 사는 성도'란 그리스도 편으로, 하나님 편으로 구별된 사람임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또 같은 1절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하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은 사도 바울의 전용어(專用語)입니다. 이 한 단어를 연구해서 박사된 사람도 많습니다. 그만큼 바울 신학을 공부할 때에 가장 핵심 되는 단어가 '그리스도 안에서'인 것입니다. 이것은 철학적이고 추상적인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와의 신비한 연합이요 동시에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연합을 뜻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살고, 그리스도 안에서 생각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장사를 하는 가장 신비로우면서도 가장 실제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표현하는 용어가 '그리스도 안에서'입니다. 그러므로 바울 서신 가운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는 말이 48, "그리스도안에서"34, "주안에서"가 무려 50회나 나오는 것은 결코 우연이거나 습관이 아닙니다. 거기에 깊은 신학적 의미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2절로 넘어갑시다. 여기에는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하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은 아주 요령 있는 이야기입니다. '은혜'라는 말은 헬라어로 카리스, '축복'이란 뜻입니다. 또 이것은 기쁨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 다음, '평강'은 히브리어로 샬롬(Shalom)이요 헬라어로 에이레네 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바울이 헬라식 축복과 히브리식 축복을 동시에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헬라와 히브리의 두 문화권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모두 은혜와 평강이라는 축복이 임하기를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축복의 근원입니다. 그 근원은 바로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이며, 여기에도 또한 바울 신학의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을지어다"하는 말은 흔히 하는 인사이나, "하나님과 그리스도로부터"라고 할 때에는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같은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부활하여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는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영적으로 하나님과 동등한 그리스도를 의미하며 복의 근원으로서의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서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있다는 것, 이것이 바울 신학의 매우 중요한 점입니다. 그리고 바울의 편지 형식은 언제나 쓰는 자가 먼저요, 받는 자가 두 번째요, 세 번째로는 축복하는 말이 나옵니다. 우리 편지의 대부분은 받을 자를 먼저 쓰고, 다음으로 문안하는 글을 쓰며, 마지막에 보낸 자를 밝힙니다. 한편 서양사람들은 바울의 편지 형식처럼 발신인을 먼저 밝히는데, 제 생각에는 이것이 더 잘된 순서인 것 같습니다.

이것으로 빌립보서 서두에 나오는 바울의 문안(問安)에 대한 고찰(考察)을 마치겠습니다.  

희락의 복음(112)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는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 지어다.

 

 

빌립보서는 제가 특별히 좋아하는 성경입니다. 빌립보서가 다른 성경들보다 더 귀하다거나 더 중요하다거나 하는 객관적인 이유라도 있어서 그런 것은 결코 아닙니다. 성경은 어느 성경이든지 똑같이 중요하고 다 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성경에 따라 나름대로 받는 은혜가 다를 수 있습니다. 개인적인 체험에 따라서도 특별히 더 친숙해지는 성경이 따로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빌립보서를 좋아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저 자신과 교회, 그리고 한국 교회 전체를 내다볼 때에 목회적인 필요에서도 이 빌립보서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빌립보서를 특별히 좋아하는 데는 좀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빌립보서에는 아주 순수한 그리스도론을 포함한 교리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는 아주 순수한 복음입니다.

둘째, 고난을 이기는 기쁨을 여기서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난을 초월하고 극복하는 그 벅찬 감격과 기쁨이 이 서신에 있습니다. 저는 한때 이 빌립보서 네 장 전체를 다 외어 두고, 오며가며 한번씩 외어 보곤 했습니다. 여러분도 한번 외어 보시기 바랍니다. 한 백 번쯤 읽으면 외어질 것입니다. 셋째, 빌립보서는 소망적인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항상 긍정적이고 희망적이고 창조적인 세계를 내다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학적인 의미에서 볼 때 이 빌립보서가 말해 주고 있는 복음이나 기쁨이나 소망은 전부가 실제적인 것이기 때문에 좋아합니다. 추상적 논리적 교리적인 것이 아니며 철학적인 것은 더욱 아닙니다. 아주 실제적인 것, 생활 속에 적용될 뿐 아니라 그 신앙 생활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실제적인 간증이 여기에 나타나 있습니다.

 

빌립보서는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세 가지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첫째 별명은 '옥중서신'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 감옥에 갇힌 몸으로 이 편지를 썼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는 귀하고 특별합니다. 더욱이 바울은 언제 죽을는지 모르는 위험한 처지에 있으며, 언제 사형 선고를 받을는지 모르는 막연한 위기의 시간에 있으면서 이 복음을 쓰고 있습니다. 이런 점만 보더라도 빌립보서는 실로 중요한 편지라 할 수 있겠습니다. 감옥에서 온 편지, 생명의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가운데서 마지막으로 써 보낸 편지니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가졌습니까? 둘째 별명은 '사랑의 서신'입니다. 빌립보교회에 보내는 이 편지 속에는 단 한마디의-어느 정도의 암시가 있기는 하지만-어떤 권면이나 특별한 충고가 없습니다. 에베소서와 갈라디아서는 물론 고린도서 같은 것은 교리적인 면이나 혹은 생활면에서 그 교회의 잘못된 바를 일일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사람의 이름까지 지적해 가면서 '이것이 잘못되었다' '이런 것은 끊어라' '이런 것은 바로잡아야 한다' '이렇게 책망하라' 그리고 '이러이러한 사람은 내 쫓으라'는 식의 강한 권면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빌립보서는 사랑스러운 말로 시작해서 사랑스러운 말로 끝납니다. 그러므로 이 편지는 아주 순수한 사랑의 복음입니다. 오직 감사와 사랑의 이야기만 있습니다.

셋째 별명은 '희락의 복음'입니다. 기쁨의 복음입니다. '기뻐한다''기뻐하리라'고 하는 말이 무려 아홉 번이나 나옵니다. 중요한 것은 이 말이 그저 밑도 끝도 없이 "너희는 기뻐하라"고 하는 막연한 것이 아니라 "내가 기뻐하니 너희도 기뻐하라"고 하는 실감나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울지만 너희는 기뻐하라"거나 "내가 너를 위해 고생하고 있으니 너는 좀 즐거워하라"고 하는 식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권면 하는 사람 자신이 먼저 기뻐하면서 "너도 기뻐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자녀들을 훌륭하게 키우고 싶으십니까? 비결이 따로 없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 두 분이 행복하게 살면 됩니다. 사람들이 종종 가정교육을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묻곤 하는데, 이럴 때마다 저는 부부싸움 하지 말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면 되는 것입니다. 음식 문제도 그렇습니다. 아이들에게 "이거 영양가 높고 맛있는 음식이니 먹어라"한다고 아이들이 그 음식을 잘 먹습니까? 내가 먹으면 따라 먹습니다. 나는 안 먹으면서 '너는 먹어라'하고 강요하니 아이들이 안 먹는 것입니다.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1:18)." "나를 관제(灌祭)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2:17,18)"

바로 이 점이 빌립보서의 매력입니다. 이것은 감옥 안에서 하는 말이므로 더욱 귀한 의미를 갖습니다. 즐겁게 잔치를 베풀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옥에 갇혀 있는 그 답답하고 위험한 시간에도 기쁨으로 살아가면서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기뻐하라"고 하니 얼마나 은혜로운 말씀입니까? 여러분은 혹 남보다 좋은 여건 속에서 전도하기를 원치 않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아예 그만두시는 것이 좋습니다.

전도란 아무리 남보다 어렵게 살더라도, 몸이 약하더라도, 사업이 어려운 형편에 있더라도 항상 싱글벙글 웃고만 다녀도 저절로 되는 것입니다. "당신은 왜 히죽히죽 웃고 다닙니까?"하고 남들이 이상하게 여기면 "좋은 일이 많아서 그렇습니다." 이렇게 대답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전도가 됩니다. 하고많은 날을 찡그린 얼굴로 다니면서 답답한 소리나 하고, 그러다가 누구를 만나 "예수 믿으라"고 권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당신이나 잘 믿으시오." 이런 반응을 얻기 십상입니다.

어려운 처지에 있으면서도 그 환경과 관계없는 역설적인(paradoxical) 기쁨을 지니고 사는 사람, 이런 사람이 참 전도인 입니다. 바울은 지금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스스로 기뻐하면서 감옥 밖의 사람들에게 기뻐하라고 말합니다. 여기에는 우리가 좀더 생각하고 찾아봐야 할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빌립보교회가 세워지게 된 과정을 살펴봅시다. 주후 52년경, 2차선교여행 때의 어느 날 밤, 사도 바울은 환상을 봅니다. 한 마게도냐 사람이 나타나 "우리를 도우라(16:9)"고 하는 말을 들었던 것입니다.

이리하여 바울은 소아시아로 가려던 계획을 바꾸어 배를 타고 유럽으로 옮겨갑니다. 이것은 복음이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수출되게 되는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사도 바울이 마게도냐 첫 성 빌립보에 이르러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그런데 빌립보에는 히브리 사람들이 별로 없고 회당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하여튼 그는 낯선 도시에 들어가 복음을 전하다가 귀신들린 여자아이 하나를 고쳐 준 것 때문에 애매하게 감옥에 갇힙니다. 아무 죄도 없이, 다만 그 여자아이를 고쳐 주었다는 한가지 일로 매도 많이 맞습니다. 그럴 때에 바울은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그는 찬송을 부르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매를 맞고 죽을 지경이 되었는데도 무슨 생각으로 찬송을 불렀겠습니까? 바울은 이런 생각을 했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핍박하다가 다메섹 도상에서 벼락을 맞고 지옥에 떨어졌어야 할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고 복음을 전하다가 마침내는 순교하여 하늘나라에 가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큰 축복이랴.' 그는 순교하게 된 것을 감사하고, 약속된 하늘나라에 가게 된 것을 감사하며, 거룩한 성도의 반열에 참여하게 된 것을 감사한 것 같습니다.

행여라도 '이렇게 찬송하고 기도하면 옥문이 열리겠지'하고 기대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때, 곧 죽음 그 자체를 감사하여, 이것이 영광이요 복된 것임을 알고 감사하고 찬송 부를 때에 보십시오.

옥문이 열립니다. 옥사쟁이가 회개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빌립보에서 일어난 이런 일 감옥에서 기뻐하며 찬송을 부름으로 옥문이 열린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빌립보에 교회가 섭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를 향하여 기뻐하라 할 때의 이 기쁨에 특별한 의미와 은혜가 담겨 있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이것은 종말론적 기쁨입니다. 신혼여행의 기쁨, 재물을 얻는 기쁨, 출세하는 기쁨 따위의 세상적인 기쁨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빌립보 감옥에서 있었던 그 사건을 배경으로 얻어진 신력하고 종말론적인 기쁨이요, 능력이요, 죄를 이기고 의심을 이기고 사망을 이기고 악을 이기는 권세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기서 기뻐하라 함은 이를테면, 기쁨으로 살면 건강에 좋다든가 기쁨으로 살아야 집안이 두루 화평하다(家和萬事成)는 따위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기쁨은 죄악을 이기고 사망을 이기는 권능입니다. 이것은옥문을 여는 것이요 복음의 문을 여는 능력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기뻐하라고 말씀합니다. 빌립보서를 '희락의 복음'이라 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이 희락이란 곧 능력을 의미합니다.

이제 바울이 이 편지를 쓰게 된 동기와 목적을 알아봅시다. 첫째, 주후 6364년에 바울은 로마 감옥에 있었습니다. 빌립보 교인들이 위로금을 모아서 바울에게 보냅니다. 빌립보교회에서 이러한 배려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은 그 교회 자체가 여성적인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빌립보교회는 루디아를 비롯하여 여성들이 처음으로 세운 여성 주도적인 교회입니다. 여성 주도적이라고 하는 것은 인정미가 있다는 뜻입니다. 제가 전도대회라든가 사경회를 인도하러 다니다 보면 자주 겪는 일입니다 마는, 남선교회가 주최하는 사경회에서는 저녁을 못 얻어먹고 설교할 때가 많습니다. 한번은 미리 가서 기다리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저녁 식사에 마음을 써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시장기는 밀려오고어쩌겠습니까? 도리 없이 슬그머니 밖으로 빠져나가 갈비탕 한 그릇을 사먹고 들어갔지요.

그제야 사회 보는 집사님이 나오십니다. "목사님, 올라가십시다." 본당으로 올라가다 말고 생각난 듯 집사님이 묻습니다. "저년 식사는 하셨는지요?" "." 대답하고 예배에 임했습니다. 예배가 끝나고 그 이야기를 했더니, 그 분이 어쩔 줄을 몰라하며 부탁을 합니다. "목사님, 다른 데 가서는 이런 이야기하지 말아 주십시오."

이와는 대조적으로, 여전도회가 주최하는 부흥회에서는 상황이 사뭇 달라집니다. 대접이 여간 좋은 것이 아닙니다. 시간 시간 무엇을 그렇게 맛있게들 해 오시는지 주시는 대로 다 먹지 못하는 게 서운할 지경입니다. 역시 대접은 여성들의 특기(?)인가 봅니다. 바울이 감옥에 갇히자 다른 교회 교인들은 "또 갇히셨구나"하며 기도만 하고 맙니다. 그런데 빌립보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얼마나 추우실까" "얼마나 배고프고 외로우실까"하고 마음으로부터 걱정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좀 도와드리기로 의논하고 위로금을 모아서 그 교회의 젊은 목사님인 에바브로디도 편에 보내드립니다. 사식(私食)도 넣어 드리면서 한겨울 동안 바울 선생을 잘 돌보아 드리고 봄에 돌아오도록 합니다. 이것이 여성적인 교회의 아름다운 봉사 정신입니다. 바울은 이런 인정을 퍽 고마워한 것같습니다. 그래서 418절에 "너희의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라 했고, 15절에는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받는 내 일에 참예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세운 교회는 많았지만 정작 그의 마음을 기쁘게 할 만한 무엇을 해준 교회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이 빌립보교회의 따뜻한 사랑이 더욱 고마웠을 것이고, 이제 그에 대한 감사로 이 편지를 쓰게 된 것입니다.

바울이 빌립보서를 쓰게 된 두 번째 이유는 이 빌립보교회의 현직(現職) 목사였던 에바브로디도와 관련됩니다. 빌립보 교인들을 대신하여 바울을 보살피기 위해 로마에 온 에바브로디도가 얼마동안 봉사하다가 그만 병을 얻고 말았습니다. 고열과 고통으로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자기를 위로하러 온 사람이 병을 얻었으니 바울의 마음이 오죽이나 아팠겠습니까? 일이 잘못되어 에바브로디도가 죽기라도 한다면 빌립보교회에 얼마나 미안한 일입니까? 그래서 바울과 빌립보 교인들은 그를 위해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에바브로디도 본인도 자신이 죽는 것은 괜찮으나 많은 사람에게 폐를 끼치면 안 된다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 그들 모두를 불쌍히 여기시고 에바브로디도를 낫게 해주십니다. 에바브로디도가 건강을 회복하자 바울은 좀더 곁에 두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그를 빌립보로 돌려보냅니다. 한시바삐 그의 건강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빌립보 교인들을 걱정에서 해방시켜 주고자한 것입니다. 이 때에 써 보낸 서신이 이 빌립보서입니다. 이 서신에서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가리켜 "저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한" 착하고 귀한 종이라고 칭찬하는 동시에, 기쁨으로 빌립보교회에 대한 사랑과 신뢰를 표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를 쓰게 된 동기로서 세 번째로 꼽을 수 있는 것은 그 교회의 화목이었습니다. 당시 빌립보교회에도 약간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대저 여성적인 사랑이란 아름답고 다사로운 것인 반면에 단점도 있습니다. 바로 질투가 그것입니다. 질투란, 좋게 보면 매력이 될 때도 있으나 지나치면 문제가 됩니다. 빌립보교회에 두 여성 지도자 유오디아와 순두게가 있었는데, 두 여인이 서로 팽팽하게 맞섰던 것 같습니다. 바울은 이 두 사람을 화해시키기 위하여 "두 마음을 품지 말고 한 마음을 품으라" "하늘나라에 가서 생명의 기업을 같이 누리게 될 터이니 싸우지 말라"고 간곡히 부탁합니다.

이제 본문으로 돌아가 11절을 봅시다.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바울은 이렇게 자기 소개를 합니다. 자신을 "예수의 종"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은 헬라어로 둘로스인데, 이는 일반적인 종이 아니라 팔고사고 하는 노예를 가리킵니다. 그 당시의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노예와 당나귀는 똑같다. 다른 점이 있다면 당나귀는 말을 하지 못하고 노예는 말을 할 줄 안다는 것이다' -- 이런 기록이 있을 정도로 노예는 숫제 집에서 기르는 짐승쯤으로 취급당했던 것입니다.

심지어는 노예의 수를 늘릴 욕심으로 동물을 서로 만나게 해서 새끼를 낳게 하는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자식을 낳게 했습니다. 대단히 민망스러운 이야기올시다마는 지금도 미국의 수준 낮은 흑인촌에 가면 한 여자에게 열 명 이상의 어린아이가 딸려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기가 막힌 것은 그 아이들의 아버지가 저마다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흑인들에게는 노예를 사고 팔고 하던 시절의 패륜(悖倫)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노예에게 무슨 결혼식이고 윤리, 도덕이 있겠습니까.

이 집에 여자 노예가 있으면 저 집의 남자 노예 좀 오라고 해서 하룻밤 자게 하여 아이를 갖게 합니다. 아이를 낳아 좀 클 만하면 똑같은 방법으로 또 아이를 낳게 합니다. 이렇게 해서 노예들의 숫자를 늘려 갔던 것으로, 이것은 백인들이 저지른 무서운 죄악입니다. 노예가 많아야 일꾼이 늘어나고, 그렇게 해서 생긴 노예들은 영원히 주인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라고 부른 데에는 몇 가지 깊은 뜻이 있습니다. 첫째로 자신은 그리스도의 절대 소유라는 뜻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것이니, 내 소유, 건강, 생명, 재능도 다 주님의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620절에 "값으로 산것이 되었으니"라고 했습니다. 노예를 팔고 사고 한 것처럼 예수님께서 피의 값을 치르고 나를 사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예수님께 팔려 온 영원한 노예다, 절대적 노예이다, 나는 예수님의 것이므로 아무런 선택의 자유도 없다 - 이런 뜻으로 한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쉽게'예수님의 종', 또는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말하지만 이것은 그렇게 생각 없이 함부로 할 말이 아닌 것입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라함은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께 절대 순종함을 뜻합니다. 노예에게는 생각도 자유 의지도 없습니다. 주인의 뜻이 노예의 뜻이고, 주인의 생각이 노예의 생각입니다. 판단조차도 하면 안 됩니다. 문자 그대로의 절대 순종을 요구합니다. 주인의 명령에 대하여 거절, 지연, 핑계가 있을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순종했다고 해서 칭찬 받는 법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17:9)?" 칭찬도, 고맙다는 인사도 못 받는 것이 노예입니다. 혹시 주님의 일을 하고 나서 알아주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예수님의 노예가 아닙니다. 셋째, 바울이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라고 말할 때에는 영광도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는 이 종의 개념을 영광된 이름으로 소화했습니다. 선지자의 칭호가 종이었고, 아브라함, 모세, 여호수아, 다윗도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정말로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면 "나는 노예다. 예수님의 노예인 것이다"라고 자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부끄러운 이름으로서가 아니라 영광된 이름으로 항상 '예수님의 노예'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1절에서 바울이 이 편지의 수신인(受信人)"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라고 칭했습니다. '성도'라는 말은 헬라어로 하기오스 이고, 히브리어로는 카도쉬(kadosh)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시고 그분을 모시는 거룩한 무리가 성도입니다. 그런데 이 '거룩'이라는 말은'으로부터 떠난다,' '으로부터 구별된다'는 듯입니다. 생각도 구별되고, 음식도 구별되고, 목적도 구별되고, 의복도 구별되고, 운명도 구별되는 것이 성도입니다.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운명, 구별된 생각, 구별된 사상, 구별된 목적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빌립보에 사는 성도'란 그리스도 편으로, 하나님 편으로 구별된 사람임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또 같은 1절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하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은 사도 바울의 전용어(專用語)입니다. 이 한 단어를 연구해서 박사된 사람도 많습니다. 그만큼 바울 신학을 공부할 때에 가장 핵심 되는 단어가 '그리스도 안에서'인 것입니다. 이것은 철학적이고 추상적인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와의 신비한 연합이요 동시에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연합을 뜻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살고, 그리스도 안에서 생각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장사를 하는 가장 신비로우면서도 가장 실제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표현하는 용어가 '그리스도 안에서'입니다. 그러므로 바울 서신 가운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는 말이 48, "그리스도안에서"34, "주안에서"가 무려 50회나 나오는 것은 결코 우연이거나 습관이 아닙니다. 거기에 깊은 신학적 의미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2절로 넘어갑시다. 여기에는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하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은 아주 요령 있는 이야기입니다. '은혜'라는 말은 헬라어로 카리스, '축복'이란 뜻입니다. 또 이것은 기쁨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 다음, '평강'은 히브리어로 샬롬(Shalom)이요 헬라어로 에이레네 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바울이 헬라식 축복과 히브리식 축복을 동시에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헬라와 히브리의 두 문화권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모두 은혜와 평강이라는 축복이 임하기를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축복의 근원입니다. 그 근원은 바로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이며, 여기에도 또한 바울 신학의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을지어다"하는 말은 흔히 하는 인사이나, "하나님과 그리스도로부터"라고 할 때에는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같은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부활하여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는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영적으로 하나님과 동등한 그리스도를 의미하며 복의 근원으로서의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서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있다는 것, 이것이 바울 신학의 매우 중요한 점입니다. 그리고 바울의 편지 형식은 언제나 쓰는 자가 먼저요, 받는 자가 두 번째요, 세 번째로는 축복하는 말이 나옵니다. 우리 편지의 대부분은 받을 자를 먼저 쓰고, 다음으로 문안하는 글을 쓰며, 마지막에 보낸 자를 밝힙니다. 한편 서양사람들은 바울의 편지 형식처럼 발신인을 먼저 밝히는데, 제 생각에는 이것이 더 잘된 순서인 것 같습니다.

이것으로 빌립보서 서두에 나오는 바울의 문안(問安)에 대한 고찰(考察)을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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