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δεδομένα 18,185편 ◑/क्वाक पास्टर 1,910편

하늘의 시민권(3장 17절~21절)

by 【고동엽】 2024. 3. 19.

 

목차로 돌아가기

하늘의 시민권(31721)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도 우리로 본을 삼은 것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보이라. 내가 여러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위대한 사도요, 스승이요, 또 목회자로서 귀하고 담대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제가 먼저 한 가지 이야기를 소개하겠습니다.

언젠가 저는 교단에서 40년을 봉직하신 어느 국민학교 교장선생님의 은퇴식에 갔었습니다. 그 교장선생님은 마지막 인사를 하면서 "내가 40년 동안을 선생으로 봉직하였으나 단 한 번도 학생들한테 나를 닮으라고 말해 보지 못한 채 교단을 떠납니다." 하고 눈물로 이야기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듣고 그가 참으로 훌륭한 교육자였다는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누구를 가르칠 때에 '내 말을 들으시오, 이 진리를 배우시오,이 교훈을 따르시오'라고 말할 수는 있으나 나를 본받으라고는 감히 말할 수 없습니다. 자녀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고 이야기할 부모는 많아도 나를 닮으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부모는 드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지금 "나를 본받으라"고 당당하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뿐만 아니라 고린도전서 416, 고린도전서 111절에서도 같은 말을 합니다. "나를 본받으라(Imitate to me.)" -- 헬라어로는 '쉼미메타이 무'라 하는데, 너무나 소중하고 어려운 말씀이라서 이것을 오히려 왜곡하여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거 바울이 좀 교만한 것이 아닌가, 어떻게 감히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성경을 조금 돌려서 해석해 보고 싶어하는 사람까지 있습니다. 유명한 주석가 벵겔(Bengel)은 이것을 나름대로 다음과 같이 옮겨 보기도 합니다. "예수를 본받는 일에 있어서 나와 더불어 본받는 자가 되라." 그럴듯하지 않습니까? 이것은"나를 본받으라"가 아니요, "내가 이제 예수를 본받겠는데 바로 이 일에 너희도 함께 예수를 본받는 자가 되자"라는 해석입니다. 그러나 아무리봐도 헬라어 원문은 그러한 해석을 거부합니다. '' -- '' 앞에아무런 수식어가 없고 설명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역시 "나를 본받으라"로 해석해야 옳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바울이 이처럼 엄청난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몇 가지로 살펴보아야 합니다. 첫째,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라야 참 선생입니다. 본받지 말라 해도 제자는 스승을 본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본받을까봐 걱정입니다. 저는 예나 지금이나, 새벽기도회에서나 주일 예배에서나 늘 작은 목소리로 조용조용히 기도합니다. 또 그렇게 교인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래전, 다른 교회에서 목회할 때 있었던 일입니다. 한 번은 그 교회에서 타 교회 목사님 한 분을 초청하여 일주일 동안 부흥회를 가졌습니다. 그런데 이 분은 큰 소리로 기도하는 것이 특징이었습니다. 게다가 '충만'이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했습니다. 은혜 충만, 불 충만, 능력 충만, 무슨 충만 무슨 충만……그 부흥회가 끝난 뒤로는 몇 달을 두고 온 교회가 시끌시끌했습니다. 모두가 전에 없이 볼륨을 높여 큰 소리로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 보십시오. 별 수 없이 닮게 되어 있습니다. 교인은 목회자를, 자녀는 부모를, 제자는 스승을 닮게 되어 있습니다.

이제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차라리 나를 본받으라. 이럴 수 있어야 이상적인 교육자요 이상적인 목회자입니다. 사도행전 2629절에 보면, 바울은 재판장인 아그립바 왕 앞에서 일장 연설을 합니다.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이 쇠사슬에 묶인 것만 빼놓고는 다 나와 같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얼마나 훌륭한 이야기입니까? 이것은 곧 나를 본받으라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이웃더러 당당히 나를 본받으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적어도 내가 열심히 예수님을 믿어 새벽기도 나오고, 성경 읽고, 교회 봉사하면서 하고 싶은 말은 무엇입니까? 모든 사람이 다 나와 같이 되기를 바란다는 말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마음이 있어야 신앙의 현주소가 바로 되었다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믿는 것이 분명하므로 자녀에게도 나와 같이 되기를 바라고, 일가 친척, 아니 대한민국 전 국민이 다 나와 같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 -- 이래야만 전도가바로 되지 않겠습니까? 가끔 예배 후 현관에서 처음 믿는 분을 만나게됩니다. 인도해 온 집사님이 인사를 시키면 "평생 처음 교회에 왔습니다." 합니다. 그럴 때에 저는 전도한 집사님을 가리키며 "이 집사님 만큼 만 잘 믿으세요"라고 권면합니다. 초신자는 자기를 인도한 사람만큼 믿게 됩니다. 인도자가 낮 예배만 나오고 밤 예배에 나오지 않으면 그도 똑같이 따라 합니다. 담배하는 인도자를 만나면 그 사람도 술담배하면서 예수님을 믿습니다. 선배 구실이 어려운 것은 그 때문입니다. 먼저 믿은 자의 책임이란 이토록 막중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글쎄요, 그렇게 간단히 이야기할 수있는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기에 우리가 감히 그 신령한 문제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비판할 수는 없으나 때때로 '이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 건가 안 믿는 건가' 의아할 때가 많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복잡한 문제를 놓고 생각할 때에 적어도 자기가 믿는 신앙에 대하여, 복음에 대하여, 교리에 대해서는 절대적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19절에서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합니다. 이처럼 복음을 절대화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절대화할 때 핍박이 있고 고난이 있지만 거기에 생명력이 있습니다.

요즘 보니까 정신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뭐 카톨릭 수녀, 불교 중,원불교, 수도사 합쳐서 합창단을 만든다고 합니다. 서로 친하게 지내보자는 것입니다. 그렇게 믿으면 핍박이 없습니다. 적당히 믿는데 무슨 핍박이 있겠습니까? 우리 기독교가 많은 핍박을 받은 것은 바로 복음을 절대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치의 양보도 없기 때문에 매도 맞고 핍박도 받고 순교하는 것이지 불교인과도 적당히, 무당과도 적당히, 적당히 적당히 사는데 무슨 핍박이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왜 감옥에 갇혔습니까? 복음에 관한 한, 진리에 관한 한, 한 치의 양보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나를 본받으라!"고 이야기할 수있는 것입니다. 본받는다는 것은 전인적인 교육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머리로 생각하고 가슴으로 받고 의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머리, 가슴, 의지가 하나되어 전적으로 본받고 믿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가장 좋은 교육 방법은 교육자가 본을 보이는 데에 있습니다. 또 교육받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가장 쉬운 것이 본을 보고 믿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흉내내는 것입니다. 저 사람 하는 것 틀림없으니까 믿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자가 따로 있습니까?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로운 것입니다. 지혜로운 자와 길을 함께 가면 지혜로운 자의 본을 받게 되지 않습니까? 그런고로 다 알아야 되고 다 깨달아야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믿고 따라가면 저절로 배우게 됩니다. 이것이 전인적인 교육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싫다 좋다 소리하지 말고, 이럴까 저럴까 망설이지 말고 오직 '믿고 나를 따르라'고 합니다.

이제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전적으로 신뢰할 것을 부탁합니다. 교육이라는 것은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모든 것을 한꺼번에 깨달을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이 교회에 나올 때에는 이미 모든 것을 다 알고 나왔습니까? 지금이라도 시험을 쳐 본다면 몇 점이나 받을 것 같습니까? 그러나 믿는 것입니다.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1960, 제가 인천 제일교회에 부교역자로 부임했을 때의 일입니다.

부임하여 가자마자 그 교회에 큰 시험이 있었습니다. 서울은 물론 전국이 박태선교회의 세력이 뒤흔들리고 있었을 당시입니다. 남산에서 부흥회를 한다, 영등포 백사장에서 부흥회를 한다 하고, 특히 서울경기 일대에 온통 박태선 바람이 불고 있었습니다. 꽤 많은 교인들이 그리로 몰려가고 일부 목사들까지 박태선한테 휩쓸려 다닐 정도로 교계 질서가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이를 지켜보던 목사들이 마침내 정신을 차리고"저것은 이단이다"하고 경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교회마다 지지하는 사람과 반대하는 사람으로 갈라져서 두 쪽이 났습니다. 인천 제일교회에서도 일부가 보따리를 싸 가지고 박태선이 이끄는 신앙촌으로 들어갔습니다. 한술 더 떠서 그들은 더 많은 교인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심방을 합니다. "신앙촌에 가야 구원받습니다" "세상은 곧 망합니다."하고 성경 구절을 들먹여 가면서 이단 교리를 선전합니다. 그러나 제일교회교인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습니다. "나는 우리 교회 목사님을 믿어요"합니다. 그러자 신앙촌에서 온 사람들이 "목사님 지옥 가면 당신도 지옥갈 거요?" 하고 궤변을 늘어놓는데, 이 때 교인들은 대답했습니다. "우리 목사님 지옥 가신다면 나도 지옥 가지요." 마침내 저들은 말없이 물러갔습니다. "나는 지금 다 해석할 수 없고, 지금 싸워서 변론해서 이길 수도 없고, 다 가 볼 수도 없고, 다 체험할 수도 없지만, 우리 목사님께서 많이 생각하고 경험하고 기도해서 내리신 결론이니 나도 그 분을 따를 것이다!" 이래서 교회가 평안해졌습니다. 여러 교회가 혼란을 면치 못했으나 제일교회만은 문제거리가 없는 것을 보고 저는 당회장 이기영 목사님은 참으로 훌륭한 분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래서 크게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4년 동안 기쁘게 그 분을 도와 부목사로 일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이와 같은 믿음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교리를 알면 얼마나 알고, 연구를 하면 얼마나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바울이 아는 성경, 바울이 해석하는 성경, 바울이 경험한 신비로운 체험, 바울이 받은 계시에 신뢰를 가져야 합니다. 그의 본을 따라야 합니다. 일단 본을 받다 보면 하나씩 둘씩 깨닫게 되고, 배우게 되고, 이해하게 됩니다. 처음부터 따지고 분석해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가끔 교인들 중 한두 분이 찾아와서 "어떤 교단의 아무개 목사님은 이단인가요?" 하고 묻습니다. 그렇다고 하면 "왜 그런가요? 그것을 연구하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리나요?" 하고 깊은 관심을 보입니다. 저는 말 합니다. "나를 믿고 따르겠으면 따르고 말겠으면 마시오. 우리 기독교에 대해서도 잘 모르면서, 기독교를 허물기 위해 갖가지 방법으로 도전하고 날조하는 이단에 대하여 알아보겠다고 나서서 어쩌겠다는 것이요?" -- 믿어야 합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어리석은 것 같으나 이것이 지혜로운 것입니다. 내가 다 알아서 비판해야 하고, 내가 다 경험해 보겠다는 것은 교만입니다. 이런 사람은 마귀가 물어갑니다. 마귀에게 물려가기 딱 좋은 체질입니다. 이단들이 그런 사람을 제일 좋아합니다. 그래서 요한이서에서는 이단자를 문간에도 들이지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들에게 인사하거나 문을 열어 주는 것은 나 좀 잡아가라고 틈을 보이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할 것이 많지만 이단을 사랑하라는 말씀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말합니다.

"내가 경험했고, 내가 계시를 받았다. 내가 이 복음을 실천하기 위해 감옥에 갇혔다. 그런데 무엇이 그리 복잡하냐? 나를 본받으라! 신앙에서나 교리적 지식에 있어서나 충성에 있어서, 경건에 있어서, 계시성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에 있어서, 나를 본받으라!" 얼마나 요긴하고 권위있는 말씀입니까? 믿고 신뢰하고 따라 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 설립자로서의 바울이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18절에서 사도 바울은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십자가의 원수된 사람들을 볼 때에 느끼는 애석함, 그들의 타락을 보는 아픈 마음을 나타낸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다가 타락한다는 것은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잘 믿어야 될 사람이 지금 시험에 빠졌습니다. 그럴 때에 사도 바울은 눈물을 흘리며 말합니다. 원수로 행하는 사람이란 이단을 가리키는 동시에 교회 안에 있으면서 십자가를 부인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마태복음 16장을 보면 베드로는 신앙고백을 한 후 예수님께로서 천국 열쇠를 받는다는 칭찬을 듣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부인하다가 예수님께서 다시 사단이라고 책망을 듣습니다. 무서운 일입니다. 방금 칭찬을 받은 베드로와 사단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 것입니까? 십자가를 부인할 때 사단이 됩니다.

게다가 십자가를 부인하면서 교회에 나온다면 문제가 더욱 심각해집니다. 자신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을 타락시키고, 많은 사람의 신앙을 혼미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 일만 생각하며 십자가를 부인하는 사람, 자기 행위만 내세우며 자기 나름으로 예수님 믿는다고 봉사하는 사람들은 결과적으로 십자가의 원수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에 대한 원수요, 교회의 원수요, 교회에 대해 악마적이라는 말입니다. 이런 사람이 지금 교회에 나와 교인 노릇을 하고 있다 해도 내용적으로는 십자가의 원수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을 부정하고 십자가 없는 예수를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본문 19절에서 이들을 아주 예리하게 분석, 비판하고있습니다. 그들을 뿌리에서부터 비판하고 있는 바 "저희의 신은 배"라고표현합니다. 여기서 신은 헬라어로 '호 데오스' 하나님이라는 뜻이요, 배는 '코일리아' 창자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저들의 목적은 배 곧 먹고 마시는 물질적이고 더러운 것을 섬긴다는 뜻입니다. 저들의 하나님은 자기의 배요 향락을 섬긴다는 말입니다.

더 나아가서 저들은 땅의 일만 생각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자기 명예와 이득만을 생각하며 십자가의 원수로 행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이렇게 섭섭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바울은 다시 저들의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다고 말씀합니다. 사실은 부끄러운 일인데 그것을 모르고 그 부끄러움을 '독사' 영광인 줄 알고 있습니다. 자기가 하나님이 될 대에 이렇게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가 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독일의 신학자 본회퍼(Bonhoeffer)는 말했습니다. "요새 교인들은 싸구려 예수를 믿으려 한다. 십자가 없는 예수, 편한 예수, 고통 없는 예수를 믿으려 한다." 바울은 19절에서 십자가 없는 자들을 경고한 뒤에 20절에서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 말씀합니다. 빌립보 교인들은 시민권에 대한 위력을 경험한 바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 감옥에 갇혔다 나오면서 로마 시민권을 내어놓음으로 감옥이 벌컥 뒤집힌 적이 있지 않습니까? 로마 시민권은 그만큼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로마 제국은 줄잡아 인구의 거의 절반 이상이 노예이고 나머지 가운데에서 또 절반만이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나머지는 자유인이었습니다. 4분의 1밖에 되지 않는 로마 시민이 그들보다 배나 많은 노예들을 다스릴 수 있었던 것은 자유인들이 스파이 노릇하며 노예를 감시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한테는 노예가 한두 명씩 배당되었으므로 이 노예가 일을 하고 주인은 가만히 앉아서 먹고살았다고 합니다. 당시 호민관 선거에 출마한 사람들이 유권자들에게 뇌물로 노예를 잡아다 주었다고도 합니다. 그러니까 놀고먹는 로마 시민들은 할 일없이 원형극장에 앉아 동물과 사람이 싸우는 것을 보며 박수나 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로마입니다. 로마의 문화는 노예 문화입니다. 그러므로 노예를 소유할 수 있는 로마 시민권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이 로마 시민권은 로마 군인으로 21년 이상 근무한 사람에게 주어졌고, 또 세금을 많이 내고 여러 해 동안 충성한 사람이 돈으로 이 시민권을 살수도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는 그의 아버지가 돈을 주고 산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로마 시민권이기 때문에 그 식민지에 나가면 큰 권리를 행사할 수도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베드로처럼 십자가에 못박히지 않고 목베임 당한 이유도 로마 시민은 어떤 죄를 지어도 십자가에 못박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만큼 로마 시민은 죄인도 우대를 받았습니다.

로마 시민권만 해도 그처럼 대단한데, 사도 바울은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이야기합니다.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다. 우리는 하늘나라 백성이다. 그런고로 영광이 있고 특권이 있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가지고 이 땅에서 삽니다. 그래서 이 곳은 우리가 임시로 머무는 곳입니다. 본문 말씀대로 우리는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고있습니다. 우리는 하늘나라의 백성으로서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승리를 만끽하면서 그 권세를 행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 머물러 있을 사람이 아닙니다. 여기는 우리의 고향이 아닙니다. 우리는 되돌아가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끝으로 21절에서 귀중한 말씀을 합니다.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이것은 부활을 말합니다. 부활이라는 말도 쓰고 변화라는 말도 쓸 수 있지만 바울은 여기에서 변화라는 말을 씁니다. 그러면 어떻게 부활합니까? 낮은 몸을 높은 몸으로, 천한 몸을 귀한 몸으로 -- 그리스도의 몸과 같이 변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누가, 어떻게 그리하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시키신 창조주의 엄청난 능력으로 우리 천하고 더러운 몸을 그리스도의 몸과 같이 변화시킵니다. 우리는 그 변화의 날을 바라보며 오늘 이 땅에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분은 하늘나라 백성입니다. 어디까지나 하늘나라 시민권을 가지고 이 땅에 머무는 것입니다. 우리는 머지않아 우리 시민권의 본거지로, 본고향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 날을 생각할 때에 우리는 오늘 여기에서 결코 비굴하지 말고, 하늘나라 시민으로서의 권세를 지키며 그 본분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