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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법(야고보서 2 : 8-13)
너희가 만일 경(經)에 기록한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한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만일 너희가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정하리라.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우리는 지난 시간에 인간관계에 대한 사도 야고보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인간관계를 어떻게 맺어나가야 하느냐, 이것이 주제였습니다. 나는 예수를 믿습니다.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와같은 신앙에 근거해서 생각해볼 때, 우리는 내가 보는대로 이웃을 볼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보신대로 이웃을 보아야 한다는 원칙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내가 저사람과 어떤 관계에 있느냐, 여기에 마음을 쓸 것이 아닙니다. 저도 하나님의 자녀요 나도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저도 나처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을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처럼 저를 위해서도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이 점을 잊지 말고 이웃을 대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저사람도 하나님의 형상임을 알고 대하여야 합니다. 그가 벙어리든 장님이든, 건강하든 병들었든, 상관하지 않아야 합니다. 가난하고 부하고를 문제삼지 말아야 합니다. 남자냐 여자냐도 문제가 안됩니다. 인간적으로야 어떻게 보였건 간에 그 외모도 생각할 것 없습니다. 오로지 그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만을 볼 것입니다. 얼굴이 잘생겼다 못생겼다, 옷을 잘입었다 못입었다, 이런 것은 우리에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가 어떤 직장에 있느냐, 어떤 지위에 있느냐, 우리는 아랑곳할 것이 아닙니다. 특별히 교회에서는 그렇습니다. 지식이 있고 없고, 이런 것도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그리스도의 사람으로서 나를 보고 이웃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다시 한번 스스로를 돌아보고 짚어보아야 할 것입니다. 내가 과연 저러한 원칙에 맞도록 이웃을 대하고 있는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볼 일입니다. 죄송한 말씀입니다마는 나 곽선희 목사에게는 재물 있는 사람 따로 없고 재물 없는 사람 따로 없습니다. 지위 낮은 사람 따로 없고 지위 높은 사람 따로 없습니다. 장로냐 집사냐, 평신도냐 새 교인이냐, 이런 것도 저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굳이 어느 편이냐 하면 오히려 처음 믿는 사람이 제게는 더 중요한 것입니다. 장로님이라 해서 특별하게 대하고 평신도라 해서 보통으로 대하고 하지 못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각기 하나님 앞에 가서 똑같이 영원한 기업을 누릴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인식 위에서 교제를 합니다. 이것이 성도의 교제인 것입니다. 그 이상으로도 이하로도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에서는 절대로 특별대우가 있어서는 안됩니다. 똑같은 성도이기 때문에 일찍 왔으면 앞에 앉고 늦게 왔으면 뒤에 앉는 것입니다.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런 이치는 교회 성장, 교회 부흥의 근본 철학이 되기도 합니다. 사람을 차별대우 하면 그 교회는 부흥하지 못합니다. 평범한 것 같아도 깊이 생각해야 될 문제입니다. "서로 구별하며 악한 생각으로(약 2 : 4)"라고 말씀합니다. 악한 생각으로, 나쁜 동기로--여러 가지경우가 이렇게 좇아나는 것입니다. 봅시다. 부자하고 친해지면 후에 돈 꾸러 가기 좋다, 높은 사람하고 친해지면 직장을 부탁할 수 있다…… 이런 생각이 다 악한 생각입니다. 교회에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못됩니다.
가진 자와 못가진 자「have and have not」를 구별하는 것, 그리스도인의 세계에서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많이도 그렇지 못해서 안타깝습니다.
사람을 판단하되 속사람으로 할 것이지 겉사람으로 판단해서는 안된다는 것, 잊지 말 것입니다.
세상에는 흔히 편견이 있습니다. 차별의식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죄인데도 죄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죄라고 생각하지 못한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슨 큰 죄가 된다고…… 내가 뭐 도둑질을 했나, 살인을 했나'--이런 불감증을 야고보는 크게 생각합니다. 구별해서는 안된다고 말씀합니다. 곧 죄가 된다고 말씀합니다. 본문이 가르치고 있는 요점입니다. 우리가 적어도 야고보서를 공부한 이상에는 오늘부터라도 잘못된 시각은 바꾸어야 합니다. 이를테면 교회의 직분은 봉사직이지 벼슬이 아닙니다. 장로가 됐다고 귀족연(貴族然)할 것이 아닙니다.
목사니 장로니 집사니 하는 것은 무슨 계층이 아닙니다. 교회는 언제나 똑같이 형제의 교제를 나누어야 합니다. 남이라고 별다르게 대접할 것도 없고, 내가 특별히 대접받을 것도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평등하게 교제할 것입니다. 가난한 자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레위기 19장 15절에서는 "너희는 재판할 때에 불의를 행치 말며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며 세력 있는 자라고 두호하지 말고 공의로 사람을 재판할지며"라고 말씀합니다. 또, 잠언 14장 31절에서는 실로 엄한 말씀을 합니다.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존경하는 자니라." 가난한 자가 억울함을 당할 때에 하나님은 가난한 자 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구별할 것이 아닙니다. 레위기 19장 6절에서는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말씀합니다. 이 한 절을 더 보십시다. "너는 네 백성 중으로 돌아다니며 사람을 논단하지 말며, 네 이웃을 대적하여 죽을 지경에 이르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 공평하라, 공명정대하라, 공정무사(公正無私)하게 대하라--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우리 마음 가운데서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편견을 제할 것이며, 나 자신을 대함에도, 없다고 비굴하지 말 것이요 있다고 교만하지 말 것입니다. 지위가 높다고 사람을 턱밑으로 볼 것이 아니요 지위가 낮다고 해서 스스로 비천해질 것이 아닙니다. 그래야만 비로소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라 하겠습니다.
오늘의 본문을 다시 보십시다. 사람들은 죄를 생각할 때에 중죄(重罪)와 경죄(輕罪)로 나누어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초대교회에서부터 이런 일이 좀 있었습니다. 가톨릭교회에서는 '중죄다' '경죄다'라는 말 을 합니다. 알고 지은 죄는 중죄요 모르고 지은 죄는 경죄다, 행동으로 지은 죄는 중죄요 말로 지은 죄는 경죄다 하는 식으로 구분합니다. 그러나 우리 개신교에서는 그런 구분을 두지 않습니다. 작은 죄라도 죄 있으면 모두 죄인입니다. 경죄하고 해서 스스로 사함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가 죄인이요, 우리의 죄는 우리의 의로 구원받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십자가의 은혜로만 구원받는 것이지 죄가 가벼우니 용서받는다는 따위의 이야기는 통하지 않습니다. 생각하기로는 육신으로 행동으로 지은 죄가 있고 정신적으로 지은 죄가 있으며, 정신적으로 지은 죄가 좀 가벼운 게 아닐까 싶습니다마는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정신적으로 마음으로 지은 죄도 죄이기는 같습니다. 행동으로 지은 죄와 마음으로 지은 죄가 똑같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마음으로 지은 죄는 죄 아니라고 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는 데는 다음과 같은 까닭이 있습니다.
사람이란 마음으로 죄를 많이 짓다보면 '마음으로 지은 죄나 행동으로 지은 죄나 마찬가지라고 한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행동으로 죄를 짓고 말자'라는 심경에 빠집니다. '여자를 보고 음심을 품으면 마음으로 이미 간음한 것이라고 주님께서도 말씀하셨다. 그런데 나는 저 여자를 보면 자꾸자꾸 음심이 발동한다. 이럴 바에야 차라리 행동으로 범하고 말아버리자.' 이렇게 엄청난 착각에 빠져들기 쉽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행동으로 지은 죄와 마음으로 지은 죄가 똑같지는 않으나, 마음으로 지은 죄도 분명한 죄라고 말입니다. 하나는 행동으로 지은 죄요 하나는 마음으로 지은 죄라고 구별될 뿐이지 이쪽은 죄가 안된다든가 이쪽 죄나 저쪽 죄나 똑같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을 차별하는 것, 특별히 그리스도인되어 교회생활 가운데서 사람을 차별하는 것에 대하여 오늘의 본문은 엄히 정죄하고 있습니다.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법에서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본문말씀은 이 법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레위기 19장 18절에 이웃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했거늘 너희가 사람을 외모로 취하거나 하면 이에 어긋난 것이 아니냐, 그러므로 네가 남을 사랑하지 않으면 죄가 되느니라.' 야고보는 이렇게 연관지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법을 두고 야고보는 '최고한 법'이라 표현하고 있습니다. 헬라 원문은 '노몬 바실리콘'입니다. '바실레이아'라고 하는 말이 '왕국'이요 '바실레우스'라고 하면 '왕'이 됩니다.
그래서 '바실리콘'은 '왕의'라는 뜻이 되어 영어의 '로얄(Royal)'에 해 당합니다. 따라서 '최고한 법'이란 곧 '왕의 법'이라는 뜻이 됩니다.
모든 법 가운데서 으뜸가는 법, 왕과 같은 위치에 있는 법입니다. 법이 많습니다마는 그 중에서 으뜸가는 법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법인 것입니다. 이보다 더 큰 법이 없습니다. 사랑의 법이 지고(至高)의 법입니다.
우리는 사랑해야 할 사람을 꼭 사랑하고야 자유할 수 있습니다. 사랑의 법을 어기고는 양심부터 편치 못합니다. 사랑해야 할 사람을 미워하고 살았기 때문에 그 마음이 썩어들어가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황폐해지는 것입니다. '사랑'은 왕의 법이요 최고의 법입니다. 사랑은 양심의 법으로도 최고요 도덕법으로도 최고요 세상법으로도 최고입니다. 어떤 법으로도 사랑을 정죄하지 못합니다. 사랑을 정죄하는 법은 없습니다.
사랑은 왕의 법입니다. Royal Law입니다. 동시에 왕으로부터 주어진 법입니다. 왕되신 하나님과 그리스도로부터 주어진 법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사랑이십니다. 그 사랑이 우리에게 명하십니다. "사랑하라." 그리고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십계명의 줄기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사랑'은 Royal Law입니다. 왕되신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명하신 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법을 통하여 축복하시고 생명을 주시고 구원을 주시고 자유를 주시고 질서를 주십니다. 평안을 주십니다. 그래서 왕의 법입니다.
왕의 법은 또한 왕이 지켜야 할 법입니다. 법은 권세잡은 자가 지켜야 법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어떻습니까? 권세 가진 사람은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취급하려듭니다. 여기서 무서운 함정이 있고 시험이 있습니다.
높은 자리에 있을 때에 저 밑에 있는 사람 보고 '당신은 나와 같소' 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못합니다. '너하고 나하고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언젠가 경영학에 관련된 책을 읽어보니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디다. 사장님이다 회장님이다 하는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말단 직원을 불러다놓고 혹 잘못한 것을 들어 충고를 하는 수가 있지 않습니까? 이런 경우 "자네, 이걸 잘못했구만. 앞으로는 그러지 말고 이렇게 하도록 하게"라고만 하고 말면 좋겠는데 그러지를 않고 "자네, 사람이 그러면 못써!" 하고 인격 자체까지 건드리고 나온다면 그 충고는 무효가 되고 만다는 이야기입니다. 앉는 의자가 다르다는 인간이 다른 것이 아닌 것입니다. 사장도 말단 직원도 사람이기는 똑같습니다.
에이브러햄 링컨이 하루는 집무중에 외출을 하려고 나서는데 수위실 앞을 지나다가 서류 하나 잊고 나온 것이 생각났습니다. 그는 수위를 보고 부탁했습니다. "자네, 올라가서 내 책상 위에 있는 서류를 좀 가져오게나." 수위는 명령대로 했습니다. 그런데 서류를 가지고 내려와보니 대통령이 수위인 자신의 의자에 떡 앉아 있습니다. 수위는 너무나 황송해서 몸둘 바를 몰랐습니다. "각하, 각하께서 그 자리에 앉아 계시면 어찌합니까?" 얼떨결에 말했더니 링컨 대통령은 천연스럽게 말합니다. "이 사람아, 무슨 소릴 하는 겐가. 자네가 내 심부름 하는데 내가 자네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뭐가 이상하단 말인가!" 인간은 똑같은 것입니다.
남이 나를 위해 일해주는데 나도 남을 위해 일해야 한다고 하는 링컨의 마음이 드러나 있는 일화입니다.
높은 자리에 앉는 것은 자리가 높아진 것이지 사람이 높아진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렇게 착각을 하는 사람이 너무나 많아서 탈입니다. 큰집에 산다고 큰 사람이요 작은 집에 산다고 작은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지위 높은 사람, 왕된 자가 지켜야 할 법이 이것입니다. '너는 낮추어서 저 백성으로 더불어 말하기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너와 나는 이웃이다, 네가 아프면 나도 아프다'-이런 마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형제'라고 합니다. 저 사람의 생각이 나와 같아야만 사랑입니다. 저사람이 아플 때에 나도 아파야만 사랑입니다. 내가 아플 때에 저도 아파야 사랑입니다. 지위가 높다고 양반노릇 하려들 것이 아닙니다. 평민의식, 평등의식, 일반의식이 먼저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왕의 법이라고 합니다. 왕이 지켜야 될 법, Royal Law입니다.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죄를 두 가지로 구분해서 생각합니다. 하나는 구원받기 전에 지은 죄요, 하나는 구원받은 다음에 짓는 죄입니다. 가톨릭에서는 세례받기 전에 지은 죄와 세례 받은 다음에 지은 죄에 차이가 있다고들 말합니다. 여러분, 이렇게 생각해볼 때, 어느 쪽이 사함받기 어려울 것 같습니까? 구원받기 전에 짓는 죄는 모르고 짓는 죄입니다. 구원 받은 다음에 짓는 죄는 불순종의 죄입니다. 알고 짓는 죄입니다. 이때문에 웃지못할 일도 없지 않았습니다. 옛날사람들은 되도록 세계를 늦게 받으려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세례받기 전에 지은 죄는 사함 받기 쉽다는데, 빤히 알고 짓는 죄, 예수 믿고 짓는 죄는 아무리 생각해도 무겁고, 그래서 사함 받기 어려울 것 같거든요. 그래서 옛적 콘스탄티누스 대제같은 사람은 죽을 때까지 세례를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물 속에 들어가 세계를 받을 때, 어떤 장군은 손을 위로 쳐들어 물 밖으로 내놓고 어깨까지만 물 속에 들어갔습니다. 전쟁에 나가면 손 가지고 사람을 죽여야 하기 때문에 손 부분은 세례를 받지 않겠다는 것이었지요. 그밖에도 별의별 우스운 이야기가 많이 생각났습니다마는 아무튼 이것은 이치가 정해진 것입니다. 분명한 것입니다.
우리, 다시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예수 믿고 많이 알면서 짓는 죄는 분명히 불순종의 죄입니다. 그런데 본문 10절에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야고보는 지금 대단히 중요한 이치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공로설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죄를 두고 저울질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죄지은 것 네 가지와 의(義) 다섯 가지를 천칭의 양쪽에 올려놓고 어느 쪽이 더 무거운지 달아봅니다. 이 경우, 5-4=1이니 죄지은 것보다 의로운 일 한 것이 많다, 그러니 죄지은 것은 탕감해주지 않겠느냐, 이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막연하게 말입니다. 그래서 내가 과거에 죄를 지었다면 이제부터는 의를 많이 행하고, 젊었을 때에 죄를 많이 지었다 해도 나이 많아서 선한 일 많이 하면 벌충이 되지 않겠는가-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공로설(功勞設)입니다. 이건 망상(妄想)이라고, 결코 그렇지 않다고 야고보 사도는 말씀합니다. 온 율법을 다 지키다가 하나만 죄를 지어도 그는 죄인이지 의인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의는 죽을 때까지 의를 행하여도 의인되기는 어렵고, 죄는 한 가지만 지어도 죄인인 것입니다. 이것이 참입니다. 세상도 보면 그렇지 않습니까? 나라를 위하여 평생을 바쳐 수고해온 사람이 죄 한 번 지으니 감옥에 가는 것을 봅니다. 지난날에 나라 위해 수고 많이 한 것 을 보아서 이번에 사람 몇 죽인 것쯤은 봐준다-이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공로설이란 당초부터 통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죄 하나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죄인입니다. 살인하지 않았습니다. 간음한 일 없습니다. 도적질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외모로 취했습니다. 사람을 차별대우한 이 한 가지 때문에 그는 죄인인 것입니다. 본문 12절을 보십시다.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문자 그대로 직역되어 있는 표현입니다 마는 뜻으로 보면 얼마나 중요한 말씀이지 모릅니다. 율법은 근본적으로 사람을 자유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율법 안에서 자유를 누리라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 본래의 목적입니다. 이를테면 교통법규도 그렇습니다. 신호에 따라서 차들이 질서를 지킵니다. 그럼으로써 부딪히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가령 신호등이 잠시만 작동되지 않아도 얼마나 불편한지 모릅니다. 즉, 교통규칙은 자유 하라고 있는 것이지 얽어매려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법을 잘 지키는 사람은 자유 할 수 있지만 안 지키는 사람은 불편합니다.
한 단계 더 높은 진리가 있습니다. 구원을 위하여, 혹은 형벌이 무서워서 지키는 율법주의자적인 율법은 진정한 의미의 율법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지키는 율법은 자유의 법입니다. 다시 말해서 율법을 지키고 안 지키고에 따라서 지옥 가고 천국 가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죄를 지었다고 지옥 가고 의를 행하고 선을 행했다고 천국 가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가만히 보면 정결과 의를 너무나 중시한 나머지 '깨끗하게 살아야 한다' '선하게 살아야 된다' 하다보니 어느 사이에 율법주의자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생각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죄를 짓고 안 짓고, 선하고 악하고-둘로 나누어놓고 이렇게 저렇게 판단해봅니다. 물론 진리대로 살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하겠습니다마는, 우리가 지키는 율법은 결코 형벌적인 율법이 아닙니다. 천국은 이미 가기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분명히 갈 것입니다. 그러니 과연 천국을 갈 수 있을까 하고 걱정하지 마십시오. 중요한 것은 오늘을 어떻게 사느냐 입니다. '거짓말을 했으니 지옥 가게 될 거야' '회개했으니 천국 가겠지' '남의 미워했으니 지옥 갈 거야' '좋은 일을 했으니 천국 갈 수 있겠지'-하루에도 몇 번씩 지옥과 천국을 넘나듭니다. 지옥 문턱과 천국 문턱을 왔다갔다합니다. 이렇게 시시하게 살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가정에서도 이러한 경우가 흔합니다. '오늘은 집에 늦게 들어가서 쫓겨날는지 모른다' '저녁상을 잘 차려서 칭찬 받을 것이다' '예쁘게 하고 있으니 나를 사랑해줄 것이다' '몸이 피곤하니 아마 나를 미워할 것이다'-혹 부부간에 이렇게 살지는 않습니까? 사랑 받았다가 미움받았다가-부부간의 사랑이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검은머리가 파뿌리 되도록 사랑하기로 다짐하지 않았습니까? 예뻐도 사랑하고, 늙어 꼬부라져도 사랑하고 주름살이 쭈글쭈글해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미 그렇게 되어 있으므로 사랑에 대하여 더는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잘하면 좋은 마음으로 사랑하고 잘못하면 아픈 마음으로 사랑한다는 것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잘못했다고 나무라는 것도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아이들을 키우면서도 공부를 잘하면 기쁜 마음으로 사랑하고 말 안 듣고 못되게 굴면 아픈 마음으로 사랑하지 않습니까?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율법은 자유의 율법입니다. 나는 구원받았습니다. 앞으로도 틀림없이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자유롭게 율법을 지킵니다. 자유 안에서 조금도 두려움이 없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율법을 지킵니다. 지옥 갈까봐 벌벌 떨면서 지키는 율법이 아닙니다. 적어도 우리 소망교회 교인이라면 그래서는 안되겠습니다. 이것은 복음주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철저하게 율법주의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이제는 남을 비판하지 마십시다. 동시에 나에 대해서도 비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실수를 했느니 잘못을 했느니 하면서 시비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속은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아무도 판단할 자가 없습니다. 자유의 율법을 지키는 자로서 말하고 행동하라, 기쁜 마음으로 감사한 마음으로 율법을 지켜라, 선한 일을 하라-사도 야고보가 말씀하고자 하는 교훈이 이것입니다.
이 '자유의 율법' 이라는 말씀이 야고보서에 두 번 나옵니다.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1장 25절의 '자유 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 그리고 오늘본문의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이 그것입니다. '자유'와 '율법'을 연관시켰다는 것은 참으로 기발한 착상이라 하겠습니다. 아무튼 귀한 말씀입니다. 자유는 곧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율법을 지켜나갈 때, 왕의 법을 왕의 법답게 지켜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13절에서 오늘의 본문에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 참으로 중요한 말씀입니다. 사랑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먼저, 높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존경이니 공경이니 하는 것입니다. 'honor'나 'respect', 나보다 높여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나와 동등한 위치에서 하는 사랑이 있습니다. 'friendship'이 그것입니다. 연인 사이나 친구 사이의 수평적인 사랑입니다. 마지막으로 나보다 못한 사람을 사랑하는 사랑이 있습니다. 어머니가 자식을 사랑하고,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는 사랑, 바로 긍휼입니다. 'mercy'나 헬라말 '엘레오스'로 표현되는 사랑입니다. 이 긍휼은 수직적인 사랑입니다. 하향적인 사랑입니다. 실인즉 사랑 가운데서 가장 온전한 사랑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48절)."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선한 자의 밭에도 악한 자의 말에도 비를 고루 내려주십니다. 그러므로 그 하늘 아버지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것이 도대체 무슨 말씀입니까? 이를테면 동생이 아주 못되게 굽니다.
그러나 그도 아버지에게는 소중한 아들입니다. 그 아버지의 마음으로 내가 동생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랑하면 사랑하지 못할 사람이 없습니다. 이것이 긍휼입니다.
그러므로 긍휼은 모든 것을 이깁니다. 굉장한 의가 있는 것입니다. 나로서는 사랑할 마음이 추호도 없는데 하나님을 보아서 사랑합니다. 예수님을 보아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굉장히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주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이제는 내가 좀 잘못을 해도 하나님께서 봐주실 것입니다. '네가 나를 봐서 사랑했으니 나도 너를 좀 봐주마.' 이렇게 나오실 것입니다. 성경에서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7장 1절에서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또한 마태복음 5장 7절에서 "긍휼이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합니다. 긍휼이란 이렇게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말씀합니다.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나로서는 미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봐서 사랑합니다.
이러한 긍휼을 베풀었을 때, 하나님의 일을 도왔기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긍휼을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에 예수님은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이여, 저들을 용서해주소서." 또한 스데반도 자기를 돌로 쳐죽이는 사람들을 향하여 죽어가면서 기도합니다. "하나님, 저들을 불쌍히 여겨주소서." 이 기도가 긍휼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보고 그리스도를 보고, 더욱이 그가 베푸시는 사랑이기에, 긍휼을 베푼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크게 인정하십니다. 이제 긍휼을 베푸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다시 큰 긍휼을 베푸십니다. 너희가 불쌍한 사람을 보느냐? 긍휼을 베풀라. 네 마음에 너만 못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있느냐? 긍휼을 베풀라. 긍휼은 모든 심판을 이기느니라. 특히 사랑할 값어치가 없는 자를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랑하라, 그리하면 그 절대사랑에 의한 긍휼이 네 자신에게 임할 것이다-오늘도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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