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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참율법과 참경건 (야고보서 1 : 25-27)

by 【고동엽】 2022. 11.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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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율법과 참경건 (야고보서 1 : 25-27)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오늘의 본문에는 소위 Christian Jew, 곧 유대-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전형적인 신학체계가 나타납니다. 전형적인 히브리사람으로서 예수를 믿을 때, 그 신학구조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요컨대 그리스도의 '예수를 믿어 구원 얻는다' 고 하는 교리와 유대사람의 전통적인 이해, 곧 율법은 지키고 율법대로 살아야 한다는 그들의 율법에 대한 이해와의 사이에 어떤 해석을 내려야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이슈인 것입니다.

내가 오늘 예수를 믿었습니다. 이 복음적인 신앙 내용과 내가 오래도록 몸담아온 전통적 문화습성내지 문화적인 어떤 구조cultural assump- tion, 즉 내 속에 의식화되어 있는 그런 세계관과는 어떤 관련을 이루어야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경우로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내가 지금 예수를 믿어 구원받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까지 젖어온 전통적 의식구조입니다. 유교적 불교적 생활습성이 있고 샤머니즘적인 것도 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효도'가 있습니다. ''는 당연시돼 온 우리네 전통인데 이 '효도' 라고 하는 개념과 예수 믿어 구원 얻었다는 개념 사이에 어떤 해석을 내려야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해석을 바로 얻지 못하면 신앙생활 자체가 흐트러지고 맙니다. 잘못되고 맙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은 그런 점에서 참으로 소중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여기서 기독교의 교리와 유대사람들의 전통적인 율법 이해와의 사이에 아무런 충돌이 없도록 잘 소화하여 해석을 내리고 있습니다. 건전한 해석을 내리고, 건전하게 새로운 경건의 모습을 찾아가게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율법에 대한 기독교적 재해석(再解釋)이라 하겠습니다. 율법에 대한 기독교적 해석-내가 몸담아온 전통적 문화에 대한 기독교적 해석 내지 그 신학적 방법론이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다.

유대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유대사람의 신앙생활은 한마디로 경건(敬虔)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성전 중심적인, 제사 중심적인, 절기를 엄수하는 행사 중심적인 신앙생활을 해왔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예수만 믿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만 믿고 구원받으면 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 믿고 나서는 그 생활이 어떠해야 되느냐-그들에게는 걱정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율법에 따를 때, 율법은 실제적 생활을 자세하게, 구체적으로 가르쳐줍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에게는 율법으로부터 벗어나는 엄청난 자유가 부여됩니다. 그러면 이 자유한 사람들은 이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그들에게는 엄청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오늘의 본문에서 예배와 실제 생활을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여기에 중요한 명제가 있습니다. 저는 이 야고보서를 사랑하지만 그 중에서도 오늘의 이 말씀이 참 마음에 듭니다.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25)"이라니, 야고보는 전통적인 유대사람인데 그 입에서 어떻게 이런 말씀이 나올 수 있을까, 놀라운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라면 헬라파 유대인이자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한 학자인만큼 바울다운 저러한 율법적 해석을 내릴 수 있는 분이라고 믿어봅니다마는, 야고보서에 이런 말씀이 나타난다는 것은 여간 놀라운 일이 아닌 것입니다.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오묘한 뜻이 내포된 말씀, 감격스러운 말씀입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에 대한 야고보의 해석입니다. 그의 율법관을 한마디로 대변하는 구절입니다. 저는 야고보 선생님께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요, 이토록 중요한 말씀을 이렇게 간단히 말씀하고 넘어가실 것이 아니라, 이 말씀만 가지고 한 서너 장()쯤 쓰셔서 좀더 자세하게 설명해주셨으면 좋았겠다고 말입니다. 이 구절이 얼마나 중요한 말씀인가 하면, 길게 풀이해 가면 로마서가 되고 갈라디아서가 됩니다. 그렇게 긴 이야기를 야고보는 이렇게 한마디로 처리하고 만 것입니다.

'자유하게 한다'-야고보는 누차에 걸쳐서 이 말씀을 합니다. 앞으로 더 나아가 보면 212절에도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라고 말씀합니다. 일반적으로 '' 이라고 하게 되면 '속박' 을 연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무릇 '' 이라는 것은 자유케 하는 것으로 존재합니다. 가까운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오늘도 차를 몰고 교회로 오셨습니다. 네거리를 막 건너려고 하는데 신호등이 빨간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이럴 때에 여러분은 짜증이 났습니까, 아니면 고맙게 여겼습니까? '저놈의 신호등은 왜 하필이면 요때에 바뀌나?' 하고 얼굴을 찌푸렸습니까, 아니면 그와 반대로 신호등이 없으면 우리는 모조리 충돌하고 말 것이다, 내 생명도 보전되기 어려울 것이다, 신호등은 고맙다 생각하고 안도를 하였습니까? 신호등을 볼 때마다 고맙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면 그리스도인입니다. 신호등을 볼 때마다 '에잇, 저놈의 신호등이 말썽이야'하고 거부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면 율법주의자입니다. 모든 '' 은 자유케 하고자 있는 것입니다.

법안에서 무한한 자유를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못된 사람은 법을 속박으로 느끼게 마련입니다. 법이 싫은 것입니다. 귀찮고 괴로운 것입니다. 도적질하는 사람은 달빛도 싫은 법입니다. 보기 좋은 만월이 떠오르면 제 영업을 방해한다고 달보고 눈을 흘깁니다.

유대사람들의 율법에 대한 개념이 그러했습니다. 물론 법을 잘못 해석했기 때문에도 그렇고 외식주의자들이 율법을 너무 확대해석 했다는 데도 원인이 있겠고, 여타 복잡한 문제가 있기는 합니다. 아무튼 율법을 '속박'으로 느꼈습니다. 율법은 나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요, 가책을 안기는 것이요, 저주요, 힘겨운 것이었습니다. 법에 치이고 눌렸습니다. 견디다 못하여 끝내는 율법을 차버렸습니다. '에잇, 어차피 못 지킬 법인데 아예 처음부터 그만두자'하고 마침내 범법자로 살아버리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말씀합니다. '법이란 그런 것이 아니다, 사람을 자유케 하는 것이다'-놀랍게 엄청나게 각성을 촉구한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율법이 우리는 자유케 하는가? 율법은 그 'original meaning' 이 자유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실 때에는 자유 하라고 주신 것이지 괴로우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어린아이들보고 양심이 뭐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으면 어떻게 대답할 것 같습니까? 내가 거짓말했을 때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 내가 못된 짓 했을 때 낯이 빨개지는 것, 괴로워지는 것-이것이 바로 양심이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양심을 이렇게 소극적으로 파악할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양심이란 내가 선한 일 했을 때 내 마음이 기쁜 것, 선한 일 하는 내 마음을 기쁘게 해주는 것'-아마도 이렇게 해석하는 사람은 드물성싶습니다. 아마도 이런 해석은 우리 소망교회에나 나와야 들을 수 있는 대답일는지도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선한 일 격려하는 것이 양심입니다. 착한 일 하고 나면 기분이 좋아지는 것, 이 마음이 양심입니다. 슬프게도 실상은 그렇지 못한 것이 세태입니다. 사람이 하도 죄를 많이 짓다보니까 이제는 양심을 그렇게 해석하게 되어 있지를 않은 것입니다.

양심 때문에 괴로운 것입니다. 양심의 가책이 나를 괴롭힙니다. 양심이 거추장스럽고 귀찮을 뿐입니다.

사도 바울이 엄청난 결론을 내렸습니다. '율법은 죽이는 법' 이라고 말입니다. 양심은 불성문법(不成文法), 글로 기록되지 아니한 율법, 마음속에 있는 율법인 것입니다. 이 율법이 우리를 자유케 하여야 되는데 속박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안타깝게도 우리의 현실입니다. 모두가 죄인이기 때문에, 모두가 법을 어겼기 때문에 법이 무서운 것입니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복을 위하여 주신 것입니다. 율법을 의역해서 다른 말로 '질서' 라고 해봅시다. 질서는 누구를 괴롭히자는 것이 아닙니다. 질서는 우리의 행복을 위하여 있습니다. 우리의 자유를 위하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질서대로 살면 좋은 것입니다. 혼란은 너도 죽이고 나도 죽입니다. 법은, 모든 법은, 특별히 하나님의 율법은 우리의 행복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말씀에는 이러한 이해가 깔려 있습니다.

그리고 야고보의 가르침에 깔려 있는 또 하나의 이해는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율법을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제가 늘 말씀드립니다마는 여기서 다시 마르틴 루터의 해석을 봅시다. 저는 루터의 글을 읽다가 이 대목에 이르러서는 너무나 감격했기 때문에 잊혀지지 않습니다. 건망증이 유달리 심한 사람인데도 이런 말은 잊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십계명을 사랑으로 주셨다고 그는 말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사랑 안에서 모든 율법을 해석합니다.

이를테면 "살인하지 말라" 라고 하신 율법은 바로 우리의 생명을 보호하시고자 하신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착안이 아닙니까? 이것이 구원받은 사람의 율법관입니다. 누가 지금 나를 억울하게 죽이려고 합니다. 그런데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옵니다. "살인하지 말라"-고마운 이 음성이 나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살인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은 하나밖에 없는 나의 소중한 생명을 보호해주시는 엄청난 사랑인 것입니다. 이래도 율법이 괴로운 것입니까? 살인하지 말라는 것이 속박입니까? 내가 남을 죽이는 입장에서 하나님께 대들 것이 아니라 내가 죽임 당하는 입장에서 그렇게도 살펴볼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생명처럼 귀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더구나 나의 생명입니다. 이것을 보호하시고자 그런 율법을 주셨습니다. 얼마나 귀한 사랑입니까?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을 우리 온 민족이 다 지킨다면 우리가 얼마나 평안하겠습니까? 그런 법을 안 지키는 자들 때문에 우리가 이처럼 불안에 떨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 간음하지 말라 하신 것도 같은 맥락으로 해석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순결을 지키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그렇지 않습니까? 남의 순결을 짓밟는 입장에서는 딴소리가 나올는지 모르나 순결을 지켜야겠다고 생각하는 입장에서는 이 율법이 바로 무례하고 사악한 무리들을 막아주는 울타리가 됩니다. 생명과도 같은 순결을 보호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얼마나 고마운 법입니까? 모든 사람이 이 율법을 다 지킨다면 우리네 딸들이 밤늦게까지 밖에 있어도 괜찮습니다.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들로 해서 우리가 불안에 떠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이 율법 또한 얼마나 고마운 것입니까? 저마다 순결을 하나님께서 지켜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켜주심입니다.

마찬가지로, 도둑질하지 말라고 하신 율법은 우리의 사유재산을 지켜주심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찮은 물건 하나 잃어버려도 기분이 나쁩니다. 내가 내버리려고 마음먹었던 물건도 도둑을 맞고 보면 기분이 나쁘거늘 하물며 내가 소중히 여기는 것을 잃어버리는 아픔이란 대단한 것입니다. 이런 아픔을 겪지 않도록 하시자고 그런 율법을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사랑의 법인 것입니다.

루터의 해석 중에서 가장 제 마음에 들었던 것은 마지막 대목입니다.

"거짓증거 하지 말라"-이 율법에 대한 루터의 해석이 돋보였습니다. 이 율법은 우리의 인격을 보호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그는 해석합니다. 옳습니다. 내가 남을 속일 때는 혹 기분 좋을는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나쁜 성정이지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내가 남에게 속았을 때입니다. 얼마나 기분 나쁩니까? 인격이 침해되는 것이요 인권이 유린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아픔을 당하지 않도록 보호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거짓증거 하지 말라" 라는 계명을 주셨습니다. 참으로 고마운 율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율법은 사랑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해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을 광야에서 주셨습니다. 애굽에서 주신 것이 아닙니다. 가나안땅으로 가는 노상에서 주셨습니다. 무엇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십계명은 구원의 조건으로 주신 것이 아니라 이미 구원받은 자에게 주어진 법입니다.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주실 때, 무슨 말씀으로 입을 여십니까?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20 : 2)"-이렇게 말문을 여십니다. 너희는 이미 구원받았다는 말씀이요, 그런 너희에게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너희는 구원을 받았다, 그러니 살인하지 말라, 그러니 간음하지 말라 하시는 것입니다. 율법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요 구원받았기 때문에 이제 자유하는 가운데서 율법을 지키라 하심입니다. 이미 얻은 자유일 뿐더러 그 소중한 자유를 보전하는 길로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곧 자유케 하는 율법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요 사랑이다-이렇게 믿고 고마운 마음으로 율법을 대하고 보면 마침내 율법을 지키면서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실생활에서 우리는 그런 이치를 늘 경험하고 삽니다. 교통법규를 잘 지키면 교통이 자유합니다. 중부고속도로에서 낼 수 있는 최고 시속이 110킬로미터입니다. 내가 이 시속의 한계를 분명하게 지키고 달리면 어떻게 됩니까? 자유롭습니다. 요새는 크루스 시스템(cruise system)이라는 것이 있어서 이를테면 110킬로미터에다 스위치를 딱 눌러놓고 가면 엑셀러레이터를 밟지 않아도 그 속력으로 나아갑니다. 오르막이든 내리막이든 똑같습니다. 그런데 가령 시속 130킬로미터로 밟았다고 하면 어디에 교통순경이 서 있지 않나 두리번거리랴, 앞차 뒷차 눈치 살피랴, 머리가 복잡해집니다. 이것이 속박인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이치입니다.

법을 잘 지켜나갈 때에는 자유롭습니다. 법이 나를 보호해줍니다. 내가 법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법이 나를 보호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법에 대한 이해가 이러해야 합니다. 차원이 놓은 이해입니다.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 인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는 야고보만의 독특한 용어가 있습니다. '온전한 율법' 이라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이것은 율법 자체의 온전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먼저, 율법은 완전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서 왔기에 율법은 완전합니다. 하나님의 공의, 하나님께서 주신 질서,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율법 자체를 이렇게 완전한 것으로 고백하고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때로 나의 마음에 안 드는 것이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마는, 그것은 나의 잘못이지 율법이 잘못되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율법을 비판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언제나 선하시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좀더 놓은 차원의 온전, '실현 가능한 율법' 이라는 것입니다. 불가능한 율법이 아닙니다. '온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도 율법을 비난할 수 없습니다. 흔히 죄를 범하고 나서는 인간이므로 어쩔 수 없었다, 법이 나빴다 합니다마는 법이 나빴던 것이 아니요, 생각해보면 얼마든지 가능했었습니다.

율법은 실효성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실효성 자체를 부정하려드는 것은 나의 사악한 마음 때문입니다. 율법은 온전하다, 내가 온전치 못하다, 이것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율법은 지킬 수 없는 것이다, 잘못되었다고 변명하는 것은 하나님 말씀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이렇게 변명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온전하십니다. 여기에 축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법을 반드시 이루실 것이요, 그 법에 복을 함께 내리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은 자유케 하는 법이요 온전한 법입니다. 이렇게 고백하고 행함으로써 마침내 효력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실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실행할 때에 그 실행한 만큼 효력을 얻게 되고 또 혜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교통법규를 지키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리 좋은 교통법규를 만들어놓았다 하더라도 지키지 않으면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것처럼 모든 법은 지키는 자에게만 그 법으로 말미암은 혜택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먼저, 율법을 배울 때에 기쁨이 있다고 합니다. 그 오묘한 진리를 깨달으면서 기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율법의 의미를 믿고 받아들일 때에 지혜가 발동합니다. 셋째, 율법을 실천할 때에 힘과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배우는 것도 좋고 깨닫는 것도 좋습니다. 암송하는 것도 좋고 가르치는 것도 다 좋은데, 마지막에 실천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힘도, 용기도, 자유함도 없습니다. 오히려 문제가 커집니다. 알면서 실천하지 아니한, 곧 깨닫기만 한 그 율법이 나를 심판합니다. 그것으로 나는 심판을 받게 됩니다. 율법을 많이 알면 알수록, 그리고 실천하지 않았을 때에 죄는 더 커지는 법입니다. 똑같은 죄를 지었더라도 율법을 많이 아는 자와 모르는 자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알고 지은 죄, 모르고 지은 죄의 차이입니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3 : 1)." 많이 알고 많이 배우는 것도 좋지만 실천함이 없을 때에 오히려 내가 알고 있는 그 율법이 내게 심판자가 되어서 나는 더 큰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을 많이 배워서 많이 알고 있으나 실천하지 않을 때에는 고통만 많아집니다. 번민만 무성해집니다.

의사가 병들면 고치기가 더 어렵다는 말은 그래서 있는 모양입니다.

보통사람들은 자기가 이미 죽을병에 걸렸는데도 설마 이 병으로 죽을까하고 반신반의하면서 사는 데까지 그럭저럭 다 살다가 죽는데 의사의 경우는 다르다는 것이지요. 이런 증상이면 어떻게 된다는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미리 알기에 고통이 가중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통사람의 병보다 더 치료하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식자우환(識字憂患)이 이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율법을 행하는 자에게 그 행하는 것만큼의 복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율법을 행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기서 우리는 사도 야고보의 높은 차원을 이해하여야 합니다. 야고보는 율법을 행함에 율법주의자들의 율법 수행 양식을 말씀하지 않습니다.

어디까지나 그리스도인다운 율법 수행 양식을 말씀합니다. 이를테면 살인하지 않고 도둑질하지 않고 간음하지 않았으면 되는 것이다 라는 것이 아닙니다. 차원을 높여서, 율법은 어떻게 지켜야 하는가, 한마디로 경건해야 한다고 합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여 살아 있는 경건, 실제적인 경건, 그리스도인된 경건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경건'이라는 의미의 헬라어로 '트레스케이아'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마는, 일반적으로는 '유세베이아'라는 말이 많이 쓰입니다. '트레스케이아'라는 말은 성경을 통틀어 네 번밖에 나오지 않는데, 그 중 두 번을 오늘의 본문에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유세베이아'에 비하여 종교성이 좀더 강한 말입니다. 영어 성경에는 'religious'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한마디로 본문의 경건은 '종교성이 있는 경건'입니다.

본디 이스라엘사람들의 경건이란 하나님 앞에서의 내면적 인식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생활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고 계시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고 하는 강한 자기 의식을 가지고 사는 모습인 것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는 이것을 잘못 이해하여 내면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외적인 것으로 생각하려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종교의식, 곧 예배와 제사, 혹은 율법에 대한 지식, 나아가 신비체험 같은 것을 경건으로 대체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그렇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 가운데도 진실한 경건을 생각하지 못하고 형식적인 경건에만 관심을 두는 사람이 많습니다. 나는 몇 시간 기도했다, 나는 일주일에 몇 번 예배를 본다, 나는 하루에 성경을 몇 장 읽는다-이것이 전적으로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실속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면적인 경건이 없으면 외적인 경건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사도 야고보가 말씀하고자 하는 경건, 곧 경건이 실제적으로 어떻게 타나나는가 하는 구체적인 것은 다름 시간에 다시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오늘은 개념적으로 말씀하는바, 형식적이고 종교 의식적인 외식적 경건은 중요하지 않으며 내실적이며 실제적인 경건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본문에서 야고보는 세 가지로 경건의 척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주 실제적인 말씀입니다.

첫째, 혀를 조심하라 합니다. 말조심하는 것이 경건이라는 것입니다.

내적으로는 종교적 감정과 깊은 체험이 있어야 하겠지만 우선은 말부터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다 듣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민수기 1428절에서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조심하여야 합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함부로 말하지 말 것입니다. 그 말대로 될 터입니다. 제 경험입니다. 어떤 분이 자녀가 가출을 했다고 저를 찾아왔습니다. 공부를 못해서 좀 나무랐더니 집을 나가버렸다는 것입니다. 제게 기도를 부탁하려고 온 모양인데 너무나 흥분한 나머지 울며불며 야단이고 마침내 하나님까지 원망합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이럴 수 있을까요?" 그 정도가 좀 지나치다싶어 안되겠기 에 제가 한마디 물어보았습니다. "아이가 공부 안하고 말썽부릴 때에 집을 나가라고 짜증내신 적 없습니까?" "많이 있습니다." "그러면 소원 성취하셨는데 왜 그리 우십니까?" 어떤 경우에도 집을 나가라는 말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입버릇처럼 말해놓았으면 이제 와서 집 나갔다고 울지를 말아야지요.

말대로 됩니다. 말이 씨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하나님을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하신 말씀입니다. 모름지기 경건한 사람은 말조심을 해야 합니다. 때로 말이 기도가 되고 때로 저주도 됩니다. 말대로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함부로 말하는 사람은 경건이 없는 사람입니다. 사도 야고보가 자신의 깊은 경험에서 한 말씀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 저마다 입으로는 '경건, 경건'하며 떠듭니다마는 입조심을 하지 못합니다. 참경건은 말조심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입니다.

'나는 본디 사악하다' 라는 것을 인정하는 데서 입조심은 이루어집니다. 나는 실수하기 쉬운 존재임을 압니다. 조금이라도 조심하지 않으면 이상한 말이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고, 화만 나면 못된 소리가 불쑥 튀어나오는 것을 압니다. 그런 자신의 존재를 인정해야 됩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7 : 19, 24)." 나는 마음이 좋지 않아서 조금만 삐끗하면 이상한 소리가 나오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입에 재갈을 물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의 나약성과 악성을 인정하면서 혀를 조심할 것입니다. '첫째 경건'이 말조심입니다.

둘째,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는 것이라고 합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고아와 과부는 구제의 대상이요 긍휼히 여김을 받아야 할 대상의 대명사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꼭 고아와 과부만을 지칭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들과 같은 불쌍한 사람을 돌아보라는 말씀인 줄 압니다. 그들이 무방비 상태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정치의 힘이 시원치 않던 그 옛날의 산간벽지 시골 마을에 무슨 법이 있었겠습니까? 강도니 산적이니 하는 못된 사람들이 쳐들어오면 남편 없는 과부는 업혀가기 일쑤입니다. 고아들도 그렇습니다. 보호해주는 부모가 없으니 아무나 끌어다가 노예를 삼으면 그만입니다. 고아와 과부는 이렇듯 무방비로 노출된 약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보호해주십니다. 고아와 과부를 돌아 보라, 그들을 긍휼히 여겨라-그들도 하나님의 형상이요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백성이듯이 그들도 하나님의 백성인 것입니다. 돈보고 사람 보는 것 아닙니다. 지위보고 사람 보는 것 아닙니다. 건강보고 사람 보는 것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창조를 보고 사람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쌍히 여기고 나와 똑같이, 내 몸과 같이 대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경건입니다. 돈이 없다고 무시하고 능력이 없다고 무시하고 머리가 나쁘다고 무시하고-경건이 아닙니다.

참경건이란 하나님의 형상된 인권을 보장하는 것이요 그런 인간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스스로 교만하지 말고 남을 무시하지 말고 다같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으로 대하여야 하겠습니다.

셋째,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이 경건이라 합니다.

self-control, 나 자신을 잘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바울이 선배입니다. 그는 고린도전서 927절에서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이 라는 말은 헬라어로 '둘라고고'입니다. 노예를 길들인다는 의미입니다.

노예를 처음 데려다놓으면 얼마나 바락바락 반항을 하겠습니까? 쇠사슬로 묶어놓고 때리고 하면서 양처럼 순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둘라고고', 나를 길들이는 것입니다. 나의 몸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가만히 내버려두면 별의별 짓을 다합니다. 게을러지고 마구 먹으려들고 못된 짓을 제멋대로 하려듭니다. 그러므로 제어해야 합니다. 내 몸을 잘 다스려야 합니다. 쳐서 복종케 하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몸이 하자는 대로 내버려두면 24시간 잠자도 잠이 모자랍니다. 의지로써 몸을 다스려야 합니다. 몸이 하자는 대로 다 하면 동물만도 못하여 영 못쓰게 된다는 사도 바울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야고보도 말씀합니다. 경건이란 바로 자기를 지키는 것이라고, 세속에 물들지 않게, 세속에 빠지지 않게 자기의 인격과 마음의 생활을 잘 지키는 것, 이것이 경건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율법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자유를 위한 율법임을 알고, 감사하고 감격하는 마음으로 참경건을 찾아야 합니다. 이 경건은 지식이 아니요 감상이 아니요 의식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는 그 신앙 안의 경건이요, 하나님을 믿는 중에 행하는 경건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이 이에 있습니다.  

참율법과 참경건 (야고보서 1 : 25-27)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오늘의 본문에는 소위 Christian Jew, 곧 유대-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전형적인 신학체계가 나타납니다. 전형적인 히브리사람으로서 예수를 믿을 때, 그 신학구조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요컨대 그리스도의 '예수를 믿어 구원 얻는다' 고 하는 교리와 유대사람의 전통적인 이해, 곧 율법은 지키고 율법대로 살아야 한다는 그들의 율법에 대한 이해와의 사이에 어떤 해석을 내려야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이슈인 것입니다.

내가 오늘 예수를 믿었습니다. 이 복음적인 신앙 내용과 내가 오래도록 몸담아온 전통적 문화습성내지 문화적인 어떤 구조cultural assump- tion, 즉 내 속에 의식화되어 있는 그런 세계관과는 어떤 관련을 이루어야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경우로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내가 지금 예수를 믿어 구원받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까지 젖어온 전통적 의식구조입니다. 유교적 불교적 생활습성이 있고 샤머니즘적인 것도 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효도'가 있습니다. ''는 당연시돼 온 우리네 전통인데 이 '효도' 라고 하는 개념과 예수 믿어 구원 얻었다는 개념 사이에 어떤 해석을 내려야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해석을 바로 얻지 못하면 신앙생활 자체가 흐트러지고 맙니다. 잘못되고 맙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은 그런 점에서 참으로 소중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여기서 기독교의 교리와 유대사람들의 전통적인 율법 이해와의 사이에 아무런 충돌이 없도록 잘 소화하여 해석을 내리고 있습니다. 건전한 해석을 내리고, 건전하게 새로운 경건의 모습을 찾아가게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율법에 대한 기독교적 재해석(再解釋)이라 하겠습니다. 율법에 대한 기독교적 해석-내가 몸담아온 전통적 문화에 대한 기독교적 해석 내지 그 신학적 방법론이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다.

유대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유대사람의 신앙생활은 한마디로 경건(敬虔)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성전 중심적인, 제사 중심적인, 절기를 엄수하는 행사 중심적인 신앙생활을 해왔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예수만 믿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만 믿고 구원받으면 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 믿고 나서는 그 생활이 어떠해야 되느냐-그들에게는 걱정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율법에 따를 때, 율법은 실제적 생활을 자세하게, 구체적으로 가르쳐줍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에게는 율법으로부터 벗어나는 엄청난 자유가 부여됩니다. 그러면 이 자유한 사람들은 이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그들에게는 엄청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오늘의 본문에서 예배와 실제 생활을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여기에 중요한 명제가 있습니다. 저는 이 야고보서를 사랑하지만 그 중에서도 오늘의 이 말씀이 참 마음에 듭니다.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25)"이라니, 야고보는 전통적인 유대사람인데 그 입에서 어떻게 이런 말씀이 나올 수 있을까, 놀라운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라면 헬라파 유대인이자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한 학자인만큼 바울다운 저러한 율법적 해석을 내릴 수 있는 분이라고 믿어봅니다마는, 야고보서에 이런 말씀이 나타난다는 것은 여간 놀라운 일이 아닌 것입니다.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오묘한 뜻이 내포된 말씀, 감격스러운 말씀입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에 대한 야고보의 해석입니다. 그의 율법관을 한마디로 대변하는 구절입니다. 저는 야고보 선생님께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요, 이토록 중요한 말씀을 이렇게 간단히 말씀하고 넘어가실 것이 아니라, 이 말씀만 가지고 한 서너 장()쯤 쓰셔서 좀더 자세하게 설명해주셨으면 좋았겠다고 말입니다. 이 구절이 얼마나 중요한 말씀인가 하면, 길게 풀이해 가면 로마서가 되고 갈라디아서가 됩니다. 그렇게 긴 이야기를 야고보는 이렇게 한마디로 처리하고 만 것입니다.

'자유하게 한다'-야고보는 누차에 걸쳐서 이 말씀을 합니다. 앞으로 더 나아가 보면 212절에도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라고 말씀합니다. 일반적으로 '' 이라고 하게 되면 '속박' 을 연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무릇 '' 이라는 것은 자유케 하는 것으로 존재합니다. 가까운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오늘도 차를 몰고 교회로 오셨습니다. 네거리를 막 건너려고 하는데 신호등이 빨간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이럴 때에 여러분은 짜증이 났습니까, 아니면 고맙게 여겼습니까? '저놈의 신호등은 왜 하필이면 요때에 바뀌나?' 하고 얼굴을 찌푸렸습니까, 아니면 그와 반대로 신호등이 없으면 우리는 모조리 충돌하고 말 것이다, 내 생명도 보전되기 어려울 것이다, 신호등은 고맙다 생각하고 안도를 하였습니까? 신호등을 볼 때마다 고맙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면 그리스도인입니다. 신호등을 볼 때마다 '에잇, 저놈의 신호등이 말썽이야'하고 거부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면 율법주의자입니다. 모든 '' 은 자유케 하고자 있는 것입니다.

법안에서 무한한 자유를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못된 사람은 법을 속박으로 느끼게 마련입니다. 법이 싫은 것입니다. 귀찮고 괴로운 것입니다. 도적질하는 사람은 달빛도 싫은 법입니다. 보기 좋은 만월이 떠오르면 제 영업을 방해한다고 달보고 눈을 흘깁니다.

유대사람들의 율법에 대한 개념이 그러했습니다. 물론 법을 잘못 해석했기 때문에도 그렇고 외식주의자들이 율법을 너무 확대해석 했다는 데도 원인이 있겠고, 여타 복잡한 문제가 있기는 합니다. 아무튼 율법을 '속박'으로 느꼈습니다. 율법은 나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요, 가책을 안기는 것이요, 저주요, 힘겨운 것이었습니다. 법에 치이고 눌렸습니다. 견디다 못하여 끝내는 율법을 차버렸습니다. '에잇, 어차피 못 지킬 법인데 아예 처음부터 그만두자'하고 마침내 범법자로 살아버리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말씀합니다. '법이란 그런 것이 아니다, 사람을 자유케 하는 것이다'-놀랍게 엄청나게 각성을 촉구한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율법이 우리는 자유케 하는가? 율법은 그 'original meaning' 이 자유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실 때에는 자유 하라고 주신 것이지 괴로우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어린아이들보고 양심이 뭐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으면 어떻게 대답할 것 같습니까? 내가 거짓말했을 때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 내가 못된 짓 했을 때 낯이 빨개지는 것, 괴로워지는 것-이것이 바로 양심이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양심을 이렇게 소극적으로 파악할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양심이란 내가 선한 일 했을 때 내 마음이 기쁜 것, 선한 일 하는 내 마음을 기쁘게 해주는 것'-아마도 이렇게 해석하는 사람은 드물성싶습니다. 아마도 이런 해석은 우리 소망교회에나 나와야 들을 수 있는 대답일는지도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선한 일 격려하는 것이 양심입니다. 착한 일 하고 나면 기분이 좋아지는 것, 이 마음이 양심입니다. 슬프게도 실상은 그렇지 못한 것이 세태입니다. 사람이 하도 죄를 많이 짓다보니까 이제는 양심을 그렇게 해석하게 되어 있지를 않은 것입니다.

양심 때문에 괴로운 것입니다. 양심의 가책이 나를 괴롭힙니다. 양심이 거추장스럽고 귀찮을 뿐입니다.

사도 바울이 엄청난 결론을 내렸습니다. '율법은 죽이는 법' 이라고 말입니다. 양심은 불성문법(不成文法), 글로 기록되지 아니한 율법, 마음속에 있는 율법인 것입니다. 이 율법이 우리를 자유케 하여야 되는데 속박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안타깝게도 우리의 현실입니다. 모두가 죄인이기 때문에, 모두가 법을 어겼기 때문에 법이 무서운 것입니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복을 위하여 주신 것입니다. 율법을 의역해서 다른 말로 '질서' 라고 해봅시다. 질서는 누구를 괴롭히자는 것이 아닙니다. 질서는 우리의 행복을 위하여 있습니다. 우리의 자유를 위하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질서대로 살면 좋은 것입니다. 혼란은 너도 죽이고 나도 죽입니다. 법은, 모든 법은, 특별히 하나님의 율법은 우리의 행복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말씀에는 이러한 이해가 깔려 있습니다.

그리고 야고보의 가르침에 깔려 있는 또 하나의 이해는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율법을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제가 늘 말씀드립니다마는 여기서 다시 마르틴 루터의 해석을 봅시다. 저는 루터의 글을 읽다가 이 대목에 이르러서는 너무나 감격했기 때문에 잊혀지지 않습니다. 건망증이 유달리 심한 사람인데도 이런 말은 잊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십계명을 사랑으로 주셨다고 그는 말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사랑 안에서 모든 율법을 해석합니다.

이를테면 "살인하지 말라" 라고 하신 율법은 바로 우리의 생명을 보호하시고자 하신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착안이 아닙니까? 이것이 구원받은 사람의 율법관입니다. 누가 지금 나를 억울하게 죽이려고 합니다. 그런데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옵니다. "살인하지 말라"-고마운 이 음성이 나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살인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은 하나밖에 없는 나의 소중한 생명을 보호해주시는 엄청난 사랑인 것입니다. 이래도 율법이 괴로운 것입니까? 살인하지 말라는 것이 속박입니까? 내가 남을 죽이는 입장에서 하나님께 대들 것이 아니라 내가 죽임 당하는 입장에서 그렇게도 살펴볼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생명처럼 귀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더구나 나의 생명입니다. 이것을 보호하시고자 그런 율법을 주셨습니다. 얼마나 귀한 사랑입니까?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을 우리 온 민족이 다 지킨다면 우리가 얼마나 평안하겠습니까? 그런 법을 안 지키는 자들 때문에 우리가 이처럼 불안에 떨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 간음하지 말라 하신 것도 같은 맥락으로 해석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순결을 지키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그렇지 않습니까? 남의 순결을 짓밟는 입장에서는 딴소리가 나올는지 모르나 순결을 지켜야겠다고 생각하는 입장에서는 이 율법이 바로 무례하고 사악한 무리들을 막아주는 울타리가 됩니다. 생명과도 같은 순결을 보호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얼마나 고마운 법입니까? 모든 사람이 이 율법을 다 지킨다면 우리네 딸들이 밤늦게까지 밖에 있어도 괜찮습니다.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들로 해서 우리가 불안에 떠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이 율법 또한 얼마나 고마운 것입니까? 저마다 순결을 하나님께서 지켜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켜주심입니다.

마찬가지로, 도둑질하지 말라고 하신 율법은 우리의 사유재산을 지켜주심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찮은 물건 하나 잃어버려도 기분이 나쁩니다. 내가 내버리려고 마음먹었던 물건도 도둑을 맞고 보면 기분이 나쁘거늘 하물며 내가 소중히 여기는 것을 잃어버리는 아픔이란 대단한 것입니다. 이런 아픔을 겪지 않도록 하시자고 그런 율법을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사랑의 법인 것입니다.

루터의 해석 중에서 가장 제 마음에 들었던 것은 마지막 대목입니다.

"거짓증거 하지 말라"-이 율법에 대한 루터의 해석이 돋보였습니다. 이 율법은 우리의 인격을 보호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그는 해석합니다. 옳습니다. 내가 남을 속일 때는 혹 기분 좋을는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나쁜 성정이지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내가 남에게 속았을 때입니다. 얼마나 기분 나쁩니까? 인격이 침해되는 것이요 인권이 유린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아픔을 당하지 않도록 보호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거짓증거 하지 말라" 라는 계명을 주셨습니다. 참으로 고마운 율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율법은 사랑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해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을 광야에서 주셨습니다. 애굽에서 주신 것이 아닙니다. 가나안땅으로 가는 노상에서 주셨습니다. 무엇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십계명은 구원의 조건으로 주신 것이 아니라 이미 구원받은 자에게 주어진 법입니다.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주실 때, 무슨 말씀으로 입을 여십니까?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20 : 2)"-이렇게 말문을 여십니다. 너희는 이미 구원받았다는 말씀이요, 그런 너희에게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너희는 구원을 받았다, 그러니 살인하지 말라, 그러니 간음하지 말라 하시는 것입니다. 율법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요 구원받았기 때문에 이제 자유하는 가운데서 율법을 지키라 하심입니다. 이미 얻은 자유일 뿐더러 그 소중한 자유를 보전하는 길로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곧 자유케 하는 율법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요 사랑이다-이렇게 믿고 고마운 마음으로 율법을 대하고 보면 마침내 율법을 지키면서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실생활에서 우리는 그런 이치를 늘 경험하고 삽니다. 교통법규를 잘 지키면 교통이 자유합니다. 중부고속도로에서 낼 수 있는 최고 시속이 110킬로미터입니다. 내가 이 시속의 한계를 분명하게 지키고 달리면 어떻게 됩니까? 자유롭습니다. 요새는 크루스 시스템(cruise system)이라는 것이 있어서 이를테면 110킬로미터에다 스위치를 딱 눌러놓고 가면 엑셀러레이터를 밟지 않아도 그 속력으로 나아갑니다. 오르막이든 내리막이든 똑같습니다. 그런데 가령 시속 130킬로미터로 밟았다고 하면 어디에 교통순경이 서 있지 않나 두리번거리랴, 앞차 뒷차 눈치 살피랴, 머리가 복잡해집니다. 이것이 속박인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이치입니다.

법을 잘 지켜나갈 때에는 자유롭습니다. 법이 나를 보호해줍니다. 내가 법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법이 나를 보호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법에 대한 이해가 이러해야 합니다. 차원이 놓은 이해입니다.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 인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는 야고보만의 독특한 용어가 있습니다. '온전한 율법' 이라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이것은 율법 자체의 온전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먼저, 율법은 완전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서 왔기에 율법은 완전합니다. 하나님의 공의, 하나님께서 주신 질서,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율법 자체를 이렇게 완전한 것으로 고백하고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때로 나의 마음에 안 드는 것이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마는, 그것은 나의 잘못이지 율법이 잘못되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율법을 비판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언제나 선하시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좀더 놓은 차원의 온전, '실현 가능한 율법' 이라는 것입니다. 불가능한 율법이 아닙니다. '온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도 율법을 비난할 수 없습니다. 흔히 죄를 범하고 나서는 인간이므로 어쩔 수 없었다, 법이 나빴다 합니다마는 법이 나빴던 것이 아니요, 생각해보면 얼마든지 가능했었습니다.

율법은 실효성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실효성 자체를 부정하려드는 것은 나의 사악한 마음 때문입니다. 율법은 온전하다, 내가 온전치 못하다, 이것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율법은 지킬 수 없는 것이다, 잘못되었다고 변명하는 것은 하나님 말씀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이렇게 변명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온전하십니다. 여기에 축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법을 반드시 이루실 것이요, 그 법에 복을 함께 내리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은 자유케 하는 법이요 온전한 법입니다. 이렇게 고백하고 행함으로써 마침내 효력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실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실행할 때에 그 실행한 만큼 효력을 얻게 되고 또 혜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교통법규를 지키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리 좋은 교통법규를 만들어놓았다 하더라도 지키지 않으면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것처럼 모든 법은 지키는 자에게만 그 법으로 말미암은 혜택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먼저, 율법을 배울 때에 기쁨이 있다고 합니다. 그 오묘한 진리를 깨달으면서 기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율법의 의미를 믿고 받아들일 때에 지혜가 발동합니다. 셋째, 율법을 실천할 때에 힘과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배우는 것도 좋고 깨닫는 것도 좋습니다. 암송하는 것도 좋고 가르치는 것도 다 좋은데, 마지막에 실천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힘도, 용기도, 자유함도 없습니다. 오히려 문제가 커집니다. 알면서 실천하지 아니한, 곧 깨닫기만 한 그 율법이 나를 심판합니다. 그것으로 나는 심판을 받게 됩니다. 율법을 많이 알면 알수록, 그리고 실천하지 않았을 때에 죄는 더 커지는 법입니다. 똑같은 죄를 지었더라도 율법을 많이 아는 자와 모르는 자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알고 지은 죄, 모르고 지은 죄의 차이입니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3 : 1)." 많이 알고 많이 배우는 것도 좋지만 실천함이 없을 때에 오히려 내가 알고 있는 그 율법이 내게 심판자가 되어서 나는 더 큰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을 많이 배워서 많이 알고 있으나 실천하지 않을 때에는 고통만 많아집니다. 번민만 무성해집니다.

의사가 병들면 고치기가 더 어렵다는 말은 그래서 있는 모양입니다.

보통사람들은 자기가 이미 죽을병에 걸렸는데도 설마 이 병으로 죽을까하고 반신반의하면서 사는 데까지 그럭저럭 다 살다가 죽는데 의사의 경우는 다르다는 것이지요. 이런 증상이면 어떻게 된다는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미리 알기에 고통이 가중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통사람의 병보다 더 치료하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식자우환(識字憂患)이 이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율법을 행하는 자에게 그 행하는 것만큼의 복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율법을 행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기서 우리는 사도 야고보의 높은 차원을 이해하여야 합니다. 야고보는 율법을 행함에 율법주의자들의 율법 수행 양식을 말씀하지 않습니다.

어디까지나 그리스도인다운 율법 수행 양식을 말씀합니다. 이를테면 살인하지 않고 도둑질하지 않고 간음하지 않았으면 되는 것이다 라는 것이 아닙니다. 차원을 높여서, 율법은 어떻게 지켜야 하는가, 한마디로 경건해야 한다고 합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여 살아 있는 경건, 실제적인 경건, 그리스도인된 경건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경건'이라는 의미의 헬라어로 '트레스케이아'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마는, 일반적으로는 '유세베이아'라는 말이 많이 쓰입니다. '트레스케이아'라는 말은 성경을 통틀어 네 번밖에 나오지 않는데, 그 중 두 번을 오늘의 본문에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유세베이아'에 비하여 종교성이 좀더 강한 말입니다. 영어 성경에는 'religious'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한마디로 본문의 경건은 '종교성이 있는 경건'입니다.

본디 이스라엘사람들의 경건이란 하나님 앞에서의 내면적 인식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생활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고 계시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고 하는 강한 자기 의식을 가지고 사는 모습인 것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는 이것을 잘못 이해하여 내면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외적인 것으로 생각하려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종교의식, 곧 예배와 제사, 혹은 율법에 대한 지식, 나아가 신비체험 같은 것을 경건으로 대체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그렇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 가운데도 진실한 경건을 생각하지 못하고 형식적인 경건에만 관심을 두는 사람이 많습니다. 나는 몇 시간 기도했다, 나는 일주일에 몇 번 예배를 본다, 나는 하루에 성경을 몇 장 읽는다-이것이 전적으로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실속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면적인 경건이 없으면 외적인 경건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사도 야고보가 말씀하고자 하는 경건, 곧 경건이 실제적으로 어떻게 타나나는가 하는 구체적인 것은 다름 시간에 다시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오늘은 개념적으로 말씀하는바, 형식적이고 종교 의식적인 외식적 경건은 중요하지 않으며 내실적이며 실제적인 경건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본문에서 야고보는 세 가지로 경건의 척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주 실제적인 말씀입니다.

첫째, 혀를 조심하라 합니다. 말조심하는 것이 경건이라는 것입니다.

내적으로는 종교적 감정과 깊은 체험이 있어야 하겠지만 우선은 말부터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다 듣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민수기 1428절에서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조심하여야 합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함부로 말하지 말 것입니다. 그 말대로 될 터입니다. 제 경험입니다. 어떤 분이 자녀가 가출을 했다고 저를 찾아왔습니다. 공부를 못해서 좀 나무랐더니 집을 나가버렸다는 것입니다. 제게 기도를 부탁하려고 온 모양인데 너무나 흥분한 나머지 울며불며 야단이고 마침내 하나님까지 원망합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이럴 수 있을까요?" 그 정도가 좀 지나치다싶어 안되겠기 에 제가 한마디 물어보았습니다. "아이가 공부 안하고 말썽부릴 때에 집을 나가라고 짜증내신 적 없습니까?" "많이 있습니다." "그러면 소원 성취하셨는데 왜 그리 우십니까?" 어떤 경우에도 집을 나가라는 말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입버릇처럼 말해놓았으면 이제 와서 집 나갔다고 울지를 말아야지요.

말대로 됩니다. 말이 씨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하나님을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하신 말씀입니다. 모름지기 경건한 사람은 말조심을 해야 합니다. 때로 말이 기도가 되고 때로 저주도 됩니다. 말대로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함부로 말하는 사람은 경건이 없는 사람입니다. 사도 야고보가 자신의 깊은 경험에서 한 말씀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 저마다 입으로는 '경건, 경건'하며 떠듭니다마는 입조심을 하지 못합니다. 참경건은 말조심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입니다.

'나는 본디 사악하다' 라는 것을 인정하는 데서 입조심은 이루어집니다. 나는 실수하기 쉬운 존재임을 압니다. 조금이라도 조심하지 않으면 이상한 말이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고, 화만 나면 못된 소리가 불쑥 튀어나오는 것을 압니다. 그런 자신의 존재를 인정해야 됩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7 : 19, 24)." 나는 마음이 좋지 않아서 조금만 삐끗하면 이상한 소리가 나오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입에 재갈을 물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의 나약성과 악성을 인정하면서 혀를 조심할 것입니다. '첫째 경건'이 말조심입니다.

둘째,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는 것이라고 합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고아와 과부는 구제의 대상이요 긍휼히 여김을 받아야 할 대상의 대명사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꼭 고아와 과부만을 지칭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들과 같은 불쌍한 사람을 돌아보라는 말씀인 줄 압니다. 그들이 무방비 상태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정치의 힘이 시원치 않던 그 옛날의 산간벽지 시골 마을에 무슨 법이 있었겠습니까? 강도니 산적이니 하는 못된 사람들이 쳐들어오면 남편 없는 과부는 업혀가기 일쑤입니다. 고아들도 그렇습니다. 보호해주는 부모가 없으니 아무나 끌어다가 노예를 삼으면 그만입니다. 고아와 과부는 이렇듯 무방비로 노출된 약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보호해주십니다. 고아와 과부를 돌아 보라, 그들을 긍휼히 여겨라-그들도 하나님의 형상이요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백성이듯이 그들도 하나님의 백성인 것입니다. 돈보고 사람 보는 것 아닙니다. 지위보고 사람 보는 것 아닙니다. 건강보고 사람 보는 것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창조를 보고 사람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쌍히 여기고 나와 똑같이, 내 몸과 같이 대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경건입니다. 돈이 없다고 무시하고 능력이 없다고 무시하고 머리가 나쁘다고 무시하고-경건이 아닙니다.

참경건이란 하나님의 형상된 인권을 보장하는 것이요 그런 인간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스스로 교만하지 말고 남을 무시하지 말고 다같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으로 대하여야 하겠습니다.

셋째,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이 경건이라 합니다.

self-control, 나 자신을 잘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바울이 선배입니다. 그는 고린도전서 927절에서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이 라는 말은 헬라어로 '둘라고고'입니다. 노예를 길들인다는 의미입니다.

노예를 처음 데려다놓으면 얼마나 바락바락 반항을 하겠습니까? 쇠사슬로 묶어놓고 때리고 하면서 양처럼 순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둘라고고', 나를 길들이는 것입니다. 나의 몸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가만히 내버려두면 별의별 짓을 다합니다. 게을러지고 마구 먹으려들고 못된 짓을 제멋대로 하려듭니다. 그러므로 제어해야 합니다. 내 몸을 잘 다스려야 합니다. 쳐서 복종케 하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몸이 하자는 대로 내버려두면 24시간 잠자도 잠이 모자랍니다. 의지로써 몸을 다스려야 합니다. 몸이 하자는 대로 다 하면 동물만도 못하여 영 못쓰게 된다는 사도 바울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야고보도 말씀합니다. 경건이란 바로 자기를 지키는 것이라고, 세속에 물들지 않게, 세속에 빠지지 않게 자기의 인격과 마음의 생활을 잘 지키는 것, 이것이 경건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율법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자유를 위한 율법임을 알고, 감사하고 감격하는 마음으로 참경건을 찾아야 합니다. 이 경건은 지식이 아니요 감상이 아니요 의식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는 그 신앙 안의 경건이요, 하나님을 믿는 중에 행하는 경건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이 이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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