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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첫 표적의 의미(요 2:1~11)

by 【고동엽】 2022. 11.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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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표적의 의미(2:111)

 

이 본문은 예수님의 공생활 중에서 처음 행하신 표적으로, 요한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표적이란 말은 요한복음에서만 사용하고 있는 특징으로, 다른 복음서에서는 이적, 능력, 또는 권능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같은 사건을 요한복음에서만 표적이라고 말하고 있는 데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표적이란 말의 뜻은, 사건은 사건대로 역사적인 사건이면서 동시에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사건으로, 표면에 나타나는 의미보다는 그 사건 속에 더 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사건 자체가 뜻을 전달하는 하나의 언어적인 의미가 있다는 말입니다. 나의 생각을 상대방에게 전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언어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보통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로는, 혀와 입술을 움직여 공기를 진동시켜서 상대방에서 소리로 전달되어 약속된 부호로서 서로 이해하는 방법이 있고, 또한 몸짓이나 눈짓으로 의사를 전달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리고, 상징적 언어로써 사건이 언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에 나타난 예수님의 모든 사건은 언어로써 바로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친히 하신 말씀만이 언어가 아니라, 걸어다니시고 병을 고치시고 바다를 잔잔케 하신 이 모든 것이 실제적인 사건이면서 동시에 무엇인가를 소통하고자 하는 깊은 뜻이 그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이적 적인 사건을 특별히 표적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본문의 사건이 말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입니까? 말을 할 때에는 반드시 어떤 목적이 있듯이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나타내시고자 하는 목적, 즉 주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 해답은 본문 11절에서 밝힌 대로,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가 누구신가를 믿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 표적을 행하셨습니다. 표적이란 가장 순수하고 깨끗하고 분명한 언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지만 요한은 선별해서 몇 가지 대표적인 사건만을 기록하여 이 표적을 통하여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고, 나아가서 그 이름을 힘입어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한 목적이 있음을 요한복음 20:30-31에서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본문 내용은 가나에서 있었던 혼인잔치에서 포도주가 모자라, 예수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이 사건을 통하여 우리가 깨달아야 할 몇 가지 언어가 있습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포도주가 부족한 상황에서 어머니인 마리아는, 왜 예수님께 의논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원래 유목민으로서 양고기가 주식인데, 양고기에 반드시 곁들이는 음료수는 포도주로써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음식입니다. 그런데 잔칫집에서 주 음료인 포도주가 도중에 모자랐으니, 주인 측에서는 얼마나 당황했을 것인가는 상상이 갑니다. 그러면, 왜 포도주가 모자랐을까요? 보통 잔칫집에서는 초청한 손님 수에 비해 비교적 음식들을 충분하게 준비합니다. 그래도 모자랐다는 것은 불청객이 많았음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우선 예수님의 제자 다섯 사람, 즉 베드로, 요한, 안드레, 빌립, 나다나엘도 초청되지 않았는데, 예수님을 따라서 그냥 참석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어쨌든 포도주가 부족한 사실을 알았던 마리아는 먼저 예수님께 의논했습니다. 자기 아들 예수가 불청객들을 데리고 왔기에 포도주가 모자란다고 책임 추궁하듯 의논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문맥으로 보나 마리아의 믿음으로 미루어 보아서, 예수님은 모든 문제의 해결자였습니다. 혹 이런 문제는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하는 문제까지도 마리아는 30년간을 그와 함께 생활하면서 경험한 바에 의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음을 믿었고 알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포도주 사건은 지극히 사사로운 개인적인 일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의논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어떤 일이든지 상식적으로 스스로 미리 판단해서 포기하지 말고 개인적인 문제까지도 예수님께 의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구원이나 인생 철학 등 거창한 진리만을 다루는 것이라 생각지 말고 사사로운 개인적인 문제에서부터 시작하여 가정 문제, 국가 문제, 우주 문제 등 모든 문제를 하나님의 말씀에서 해결될 수 있다는 신앙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마리아는 소박하며 절대적인 신앙을 가졌기에 예수님께 의논하면 어떤 문제든지 해결될 수 있다는 믿음으로 나섰습니다.

다음은 포도주가 떨어졌음을 이야기할 때, 예수님의 대답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 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2:4). "여자여"라는 예수님의 대답은 우리말로써는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상당히 어색한 번역입니다. 헬라 원문에 나타난 "여자여"라는 말의 의미는 왕이 왕후를 부를 때 쓰는 용어로써 여자에 대한 최고의 높임말이라고 합니다. 원문을 그대로 직역해서 생긴 문제점임을 이해했으면 합니다. 또한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하는 구절도 번역에서 오는 어색함입니다. 공동번역에 보면 "어머니, 그것이 저에게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러십니까?" 라고 조금 더 이해하기 쉽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이 사건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말씀하셨지만, 그러나 어머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따지기만 하면 순종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와 상관없었지만 어머님의 요청에 의해 문제를 해결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미리 생각하거나 계산하지 말고 때로는 어리석을 정도로 순진하고도 깨끗한 간구를 주님께 하는 것이 좋은 기도라고 생각됩니다.

5절에 보면, 마리아는 예수님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하인들에게 말하기를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2:5)고 일단 순종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어떤 말씀을 하시든지 먼저 순종해야 한다고 믿는 데서 문제의 해결이 있습니다. 이적이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직선적이고도 특별한 은혜로써 사람들에게 은사로 주시는 것이지만, 이 은사를 받는 그릇은 나에게 있어야 합니다. 그 그릇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믿음과 순종입니다. 믿음과 순종이 있어야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사를 받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아니,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예를 들면, 예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실 때, 직접 하늘을 여시고 오천 명을 먹일 떡이나 만나를 내리게 하실 수 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린 소년을 통하여 보리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를 요구하셨습니다. 이 두 가지가 예수님께 바쳐질 때, 이것 을 통하여 축사하시고 오천 명을 먹이시는 이적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냥 앉아서 고아로 기적을 기다려서는 안 됩니다. 때로는 누구의 희생을 통해서, 때로는 누군가의 귀한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물고기와 보리떡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것을 필요로 하고 요구하고 계십니다. 물론, 그것들이 반드시 있어야만 기적을 행하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한 가지 더 예를 들면,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실 때, "나사로야 나오너라"고 호령하시자마자 즉시 지진이 일어나며, 나사로가 무덤 앞에 막힌 큰돌을 박차고 나왔으면 더 멋있고 놀라운 이적으로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돌을 옮겨 놓으라고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돌을 옮기는 일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기에 요구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돌을 옮기라는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사실, 시체가 사흘이나 지났으므로 사람들은 의심도 가졌었고 또한 좀더 빨리 주님이 오시지 않았음에 대해 불평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일단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돌이 옮겨져야만 기적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기적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순종할 것을 요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도 전에 무슨 말씀을 하시든 그대로 순종하라는 대단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순종을 생각할 때마다 필자가 어릴 때, 할아버지께로부터 들었던 재미있는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옛날에 어떤 부자할아버지가 있었는데, 그는 하인들을 이른 아침부터 저녁까지 몹시 부리는 구두쇠로 소문난 사람이었습니다. 하인들은 늘 불평하며 지내는데, 드디어 할아버지의 회갑날이 되었습니다. 이 날만은 좀 편히 쉬면서 잘 먹을 수 있겠구나 하고 하인들은 좋아하는데, 갑자기 할아버지가 집안에 있는 모든 하인 들을 불러놓고 볏단을 주면서 새끼줄을 꼬라고 명령했습니다. 새끼줄을 꼬되 가능하면 가늘고도 길게, 그리고 단단하게 꼬라고 명령하는 것이 아닙니까? 하인들은 즐거운 잔칫날까지 귀찮은 일을 시키는 주인을 원망하며 그저 되는대로 굵게 성의 없이 꼬았습니다. 전혀 꼬지 않은 사람도 있었는데, 그 중 한 사람만은 시키는 대로 순종해서 가늘고도 단단하게 길게 꼬았습니다. 저녁에 구두쇠 주인이 나타나더니 난데없이 엽전이 가득 쌓인 광문을 활짝 열고서는 "그 동안 나를 위해서 너희들 수고 많이했다. 자기들이 꼬은 새끼줄에 엽전을 가능한 만큼 많이 끼워서 각자 독립하여 자유롭게 살아라"고 깜짝 놀랄 말을 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 어찌 되었겠습니까? 전혀 꼬지 않은 사람은 물론, 굵게 적당히 새끼줄을 꼬은 사람들은 기가 막혔지만, 주인의 말에 순종하여 가늘고 길게 꼬은 사람은 엽전을 한 다발 끼워서 나왔다는 이야기입니다.

일단 순종해 놓고 나면 나중에 그 뜻을 알게 되는 날이 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부딪치는 어떤 사건이나 시련에 대해서 미리 알려고 조급해 하거나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언젠가는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될 것이므로 믿고 순종하는 것만이 우리의 할 일입니다.

다음, 포도주가 부족하다는 요구에 예수님의 말씀은 전혀 뜻밖이었습니다. "거기 유대인의 결례를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 즉 아구까지 채우니"(2:6-7). 이스라엘 사람들은 원래 깨끗하기로 소문난 민족입니다. 깨끗한 것이 그들의 가장 중요한 윤리로서, 이 깨끗함에는 단순한 위생적인 것뿐만 아니라 종교적 의식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할례도 그 중의 하나로써, 이것은 위생적이면서도 종교 의식으로 중요한 행사였습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결례의 항아리도 그들이 식사 전이나 외출하고 들어올 때마다 손을 씻는 항아리로써 위생적이면서 종교적인 예식의 하나였습니다. 문 입구에 놓여 있는 항아리에 손을 씻으므로 밖에서 지은 죄나 더러워진 마음을 씻고 안으로 들어가는 귀한 예식입니다. 밖에서 묻은 먼지나 죄악의 균을 씻지 않고 들어가면 집안에 다툼이 있지만, 입구에서 더러운 모든 것을 씻고 들어가면 가정이 참다운 가정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잔칫집에서 먹는 포도주에만 신경을 쓰고 결례의 항아리에는 소홀했음을 지금 예수님은 지적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결례의 항아리를 채우라는 의미는, 먹고 마시는 것만 생각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생각하고 하나님의 윤리를 먼저 생각하라는 귀중한 뜻이 있습니다. 식사 기도문 중에서 모범적인 기도문의 한 구절이 생각납니다. "하나님이여, 육신의 양식을 때마다 주심을 감사합니다. 겸해서 영의 양식도 주옵소서." 정말 좋은 기도문입니다. 우리는 한 걸음 나아가 세수할 때마다 "하나님이여, 나의 속마음도 깨끗이 씻어 주옵소서" 또는 새 옷을 입을 때마다 "하나님이여,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게 해 주옵소서"라는 기도가 있어야겠습니다.

또한 여기서 생각해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결례의 항아리부터 채우시라는 기대 밖의 분부에 사람들이 포도주에만 집착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인들은 아무 말 없이 순종했습니다.

순종까지 가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가득 채우는 순종이 있은 뒤에야 주님께서는 만족하시어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2:8)고 말씀하십니다. "떠다" 주라 할 때의 "떠다" 라는 말의 의미가 헬라원문에서는 물을 긷는다라는 뜻이 있어서 8절을 해석하는 데는 두 가지의 견해가 있습니다. 하나는 본문에서처럼 가득 채운 결례의 항아리에서 물을 떠서 갖다 주었다는 것과 또 하나의 결례 항아리에서가 아니고 다시 새 물을 길어서 갖다 준 것이 포도주가 되었다는 해석입니다. 어디서 떠다 주었든지 간에 중요한 것은 물이 포도주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2:9-10). 손님들은 시간이 갈수록 좋은 포도주가 나오는 것에 아주 만족하였고, 즐거운 잔치 분위기가 고조되었음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또 하나의 진리를 발견하는 것은 오직 수고한 하인들만 물이 포도주로 변한 이적을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무슨 일에든지 그 일을 위하여 수고한 자만이 그 능력과 고마움을 알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생각할 것은 포도주가 모자라 걱정이었던 잔칫집에, 예수님께서 손님으로 계셨기에 걱정이 해결되고 오히려 기쁨으로 충만한 잔칫집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가정에서도 주님을 모심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크신 은혜가 넘치는 가정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첫 표적의 의미(2:111)

 

이 본문은 예수님의 공생활 중에서 처음 행하신 표적으로, 요한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표적이란 말은 요한복음에서만 사용하고 있는 특징으로, 다른 복음서에서는 이적, 능력, 또는 권능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같은 사건을 요한복음에서만 표적이라고 말하고 있는 데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표적이란 말의 뜻은, 사건은 사건대로 역사적인 사건이면서 동시에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사건으로, 표면에 나타나는 의미보다는 그 사건 속에 더 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사건 자체가 뜻을 전달하는 하나의 언어적인 의미가 있다는 말입니다. 나의 생각을 상대방에게 전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언어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보통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로는, 혀와 입술을 움직여 공기를 진동시켜서 상대방에서 소리로 전달되어 약속된 부호로서 서로 이해하는 방법이 있고, 또한 몸짓이나 눈짓으로 의사를 전달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리고, 상징적 언어로써 사건이 언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에 나타난 예수님의 모든 사건은 언어로써 바로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친히 하신 말씀만이 언어가 아니라, 걸어다니시고 병을 고치시고 바다를 잔잔케 하신 이 모든 것이 실제적인 사건이면서 동시에 무엇인가를 소통하고자 하는 깊은 뜻이 그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이적 적인 사건을 특별히 표적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본문의 사건이 말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입니까? 말을 할 때에는 반드시 어떤 목적이 있듯이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나타내시고자 하는 목적, 즉 주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 해답은 본문 11절에서 밝힌 대로,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가 누구신가를 믿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 표적을 행하셨습니다. 표적이란 가장 순수하고 깨끗하고 분명한 언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지만 요한은 선별해서 몇 가지 대표적인 사건만을 기록하여 이 표적을 통하여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고, 나아가서 그 이름을 힘입어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한 목적이 있음을 요한복음 20:30-31에서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본문 내용은 가나에서 있었던 혼인잔치에서 포도주가 모자라, 예수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이 사건을 통하여 우리가 깨달아야 할 몇 가지 언어가 있습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포도주가 부족한 상황에서 어머니인 마리아는, 왜 예수님께 의논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원래 유목민으로서 양고기가 주식인데, 양고기에 반드시 곁들이는 음료수는 포도주로써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음식입니다. 그런데 잔칫집에서 주 음료인 포도주가 도중에 모자랐으니, 주인 측에서는 얼마나 당황했을 것인가는 상상이 갑니다. 그러면, 왜 포도주가 모자랐을까요? 보통 잔칫집에서는 초청한 손님 수에 비해 비교적 음식들을 충분하게 준비합니다. 그래도 모자랐다는 것은 불청객이 많았음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우선 예수님의 제자 다섯 사람, 즉 베드로, 요한, 안드레, 빌립, 나다나엘도 초청되지 않았는데, 예수님을 따라서 그냥 참석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어쨌든 포도주가 부족한 사실을 알았던 마리아는 먼저 예수님께 의논했습니다. 자기 아들 예수가 불청객들을 데리고 왔기에 포도주가 모자란다고 책임 추궁하듯 의논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문맥으로 보나 마리아의 믿음으로 미루어 보아서, 예수님은 모든 문제의 해결자였습니다. 혹 이런 문제는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하는 문제까지도 마리아는 30년간을 그와 함께 생활하면서 경험한 바에 의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음을 믿었고 알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포도주 사건은 지극히 사사로운 개인적인 일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의논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어떤 일이든지 상식적으로 스스로 미리 판단해서 포기하지 말고 개인적인 문제까지도 예수님께 의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구원이나 인생 철학 등 거창한 진리만을 다루는 것이라 생각지 말고 사사로운 개인적인 문제에서부터 시작하여 가정 문제, 국가 문제, 우주 문제 등 모든 문제를 하나님의 말씀에서 해결될 수 있다는 신앙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마리아는 소박하며 절대적인 신앙을 가졌기에 예수님께 의논하면 어떤 문제든지 해결될 수 있다는 믿음으로 나섰습니다.

다음은 포도주가 떨어졌음을 이야기할 때, 예수님의 대답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 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2:4). "여자여"라는 예수님의 대답은 우리말로써는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상당히 어색한 번역입니다. 헬라 원문에 나타난 "여자여"라는 말의 의미는 왕이 왕후를 부를 때 쓰는 용어로써 여자에 대한 최고의 높임말이라고 합니다. 원문을 그대로 직역해서 생긴 문제점임을 이해했으면 합니다. 또한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하는 구절도 번역에서 오는 어색함입니다. 공동번역에 보면 "어머니, 그것이 저에게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러십니까?" 라고 조금 더 이해하기 쉽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이 사건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말씀하셨지만, 그러나 어머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따지기만 하면 순종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와 상관없었지만 어머님의 요청에 의해 문제를 해결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미리 생각하거나 계산하지 말고 때로는 어리석을 정도로 순진하고도 깨끗한 간구를 주님께 하는 것이 좋은 기도라고 생각됩니다.

5절에 보면, 마리아는 예수님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하인들에게 말하기를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2:5)고 일단 순종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어떤 말씀을 하시든지 먼저 순종해야 한다고 믿는 데서 문제의 해결이 있습니다. 이적이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직선적이고도 특별한 은혜로써 사람들에게 은사로 주시는 것이지만, 이 은사를 받는 그릇은 나에게 있어야 합니다. 그 그릇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믿음과 순종입니다. 믿음과 순종이 있어야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사를 받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아니,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예를 들면, 예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실 때, 직접 하늘을 여시고 오천 명을 먹일 떡이나 만나를 내리게 하실 수 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린 소년을 통하여 보리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를 요구하셨습니다. 이 두 가지가 예수님께 바쳐질 때, 이것 을 통하여 축사하시고 오천 명을 먹이시는 이적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냥 앉아서 고아로 기적을 기다려서는 안 됩니다. 때로는 누구의 희생을 통해서, 때로는 누군가의 귀한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물고기와 보리떡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것을 필요로 하고 요구하고 계십니다. 물론, 그것들이 반드시 있어야만 기적을 행하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한 가지 더 예를 들면,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실 때, "나사로야 나오너라"고 호령하시자마자 즉시 지진이 일어나며, 나사로가 무덤 앞에 막힌 큰돌을 박차고 나왔으면 더 멋있고 놀라운 이적으로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돌을 옮겨 놓으라고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돌을 옮기는 일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기에 요구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돌을 옮기라는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사실, 시체가 사흘이나 지났으므로 사람들은 의심도 가졌었고 또한 좀더 빨리 주님이 오시지 않았음에 대해 불평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일단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돌이 옮겨져야만 기적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기적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순종할 것을 요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도 전에 무슨 말씀을 하시든 그대로 순종하라는 대단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순종을 생각할 때마다 필자가 어릴 때, 할아버지께로부터 들었던 재미있는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옛날에 어떤 부자할아버지가 있었는데, 그는 하인들을 이른 아침부터 저녁까지 몹시 부리는 구두쇠로 소문난 사람이었습니다. 하인들은 늘 불평하며 지내는데, 드디어 할아버지의 회갑날이 되었습니다. 이 날만은 좀 편히 쉬면서 잘 먹을 수 있겠구나 하고 하인들은 좋아하는데, 갑자기 할아버지가 집안에 있는 모든 하인 들을 불러놓고 볏단을 주면서 새끼줄을 꼬라고 명령했습니다. 새끼줄을 꼬되 가능하면 가늘고도 길게, 그리고 단단하게 꼬라고 명령하는 것이 아닙니까? 하인들은 즐거운 잔칫날까지 귀찮은 일을 시키는 주인을 원망하며 그저 되는대로 굵게 성의 없이 꼬았습니다. 전혀 꼬지 않은 사람도 있었는데, 그 중 한 사람만은 시키는 대로 순종해서 가늘고도 단단하게 길게 꼬았습니다. 저녁에 구두쇠 주인이 나타나더니 난데없이 엽전이 가득 쌓인 광문을 활짝 열고서는 "그 동안 나를 위해서 너희들 수고 많이했다. 자기들이 꼬은 새끼줄에 엽전을 가능한 만큼 많이 끼워서 각자 독립하여 자유롭게 살아라"고 깜짝 놀랄 말을 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 어찌 되었겠습니까? 전혀 꼬지 않은 사람은 물론, 굵게 적당히 새끼줄을 꼬은 사람들은 기가 막혔지만, 주인의 말에 순종하여 가늘고 길게 꼬은 사람은 엽전을 한 다발 끼워서 나왔다는 이야기입니다.

일단 순종해 놓고 나면 나중에 그 뜻을 알게 되는 날이 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부딪치는 어떤 사건이나 시련에 대해서 미리 알려고 조급해 하거나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언젠가는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될 것이므로 믿고 순종하는 것만이 우리의 할 일입니다.

다음, 포도주가 부족하다는 요구에 예수님의 말씀은 전혀 뜻밖이었습니다. "거기 유대인의 결례를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 즉 아구까지 채우니"(2:6-7). 이스라엘 사람들은 원래 깨끗하기로 소문난 민족입니다. 깨끗한 것이 그들의 가장 중요한 윤리로서, 이 깨끗함에는 단순한 위생적인 것뿐만 아니라 종교적 의식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할례도 그 중의 하나로써, 이것은 위생적이면서도 종교 의식으로 중요한 행사였습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결례의 항아리도 그들이 식사 전이나 외출하고 들어올 때마다 손을 씻는 항아리로써 위생적이면서 종교적인 예식의 하나였습니다. 문 입구에 놓여 있는 항아리에 손을 씻으므로 밖에서 지은 죄나 더러워진 마음을 씻고 안으로 들어가는 귀한 예식입니다. 밖에서 묻은 먼지나 죄악의 균을 씻지 않고 들어가면 집안에 다툼이 있지만, 입구에서 더러운 모든 것을 씻고 들어가면 가정이 참다운 가정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잔칫집에서 먹는 포도주에만 신경을 쓰고 결례의 항아리에는 소홀했음을 지금 예수님은 지적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결례의 항아리를 채우라는 의미는, 먹고 마시는 것만 생각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생각하고 하나님의 윤리를 먼저 생각하라는 귀중한 뜻이 있습니다. 식사 기도문 중에서 모범적인 기도문의 한 구절이 생각납니다. "하나님이여, 육신의 양식을 때마다 주심을 감사합니다. 겸해서 영의 양식도 주옵소서." 정말 좋은 기도문입니다. 우리는 한 걸음 나아가 세수할 때마다 "하나님이여, 나의 속마음도 깨끗이 씻어 주옵소서" 또는 새 옷을 입을 때마다 "하나님이여,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게 해 주옵소서"라는 기도가 있어야겠습니다.

또한 여기서 생각해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결례의 항아리부터 채우시라는 기대 밖의 분부에 사람들이 포도주에만 집착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인들은 아무 말 없이 순종했습니다.

순종까지 가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가득 채우는 순종이 있은 뒤에야 주님께서는 만족하시어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2:8)고 말씀하십니다. "떠다" 주라 할 때의 "떠다" 라는 말의 의미가 헬라원문에서는 물을 긷는다라는 뜻이 있어서 8절을 해석하는 데는 두 가지의 견해가 있습니다. 하나는 본문에서처럼 가득 채운 결례의 항아리에서 물을 떠서 갖다 주었다는 것과 또 하나의 결례 항아리에서가 아니고 다시 새 물을 길어서 갖다 준 것이 포도주가 되었다는 해석입니다. 어디서 떠다 주었든지 간에 중요한 것은 물이 포도주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2:9-10). 손님들은 시간이 갈수록 좋은 포도주가 나오는 것에 아주 만족하였고, 즐거운 잔치 분위기가 고조되었음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또 하나의 진리를 발견하는 것은 오직 수고한 하인들만 물이 포도주로 변한 이적을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무슨 일에든지 그 일을 위하여 수고한 자만이 그 능력과 고마움을 알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생각할 것은 포도주가 모자라 걱정이었던 잔칫집에, 예수님께서 손님으로 계셨기에 걱정이 해결되고 오히려 기쁨으로 충만한 잔칫집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가정에서도 주님을 모심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크신 은혜가 넘치는 가정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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