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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받고 수종든 여인(마가복음 1장 29~31절)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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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받고 수종든 여인(마가복음 12931)

 

회당에서 나와 곧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시니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웠는지라. 사람들이 곧 그의 일로 예수께 여짜온대 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저희에게 수종드니라.

 

오늘은 치유받고 수종든 여인에 대해서 상고해보고자 합니다. 본문 말씀을 보면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치료하는 사건이 나타나 있습니다.

성경 중에서도 마가복음은 특별히 이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병고치신 일, 귀신을 내쫓으신 일, 오천 명을 먹이신 일 할 것 없이 어떤 의미에서는 전부가 기적 이야기입니다. 이적이라고 하는, 예수님께서 이루신 행적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계시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사건에 나타나는 말없는 말을 들을 줄 알아야 하며 사건 속에서 세밀하게 보여주시는 그 계시의 뜻을 헤아릴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미 말씀 드렸듯이 예수님의 이적은 하나의 초자연적인 사건이라는 데에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더욱 중요한 것은 이것이 표적이라는 사실입니다. 표적은 계시적인 사건입니다. 이 사건 속에 심오하고 개별적이며 현실적이고 가장 효과적인 주님의 말씀이 계시되어 있습니다. 모름지기 이 말씀을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 말씀을 깨달아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소화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본문 말씀은 간단한 이야기지만 깊이 상고하면 중요한 몇 가지 특징을 여기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이 이적은 안식일에 이루어졌습니다. 그것도 보통 날이 아닙니다. "회당에서 나와 곧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시니(29)"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날 회당에서 예수님이 하신 일을 우리는 압니다. 가버나움 회당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누누이 가르치시는데 한 귀신들린 사람이 소리를 지르며 떠들어대자 예수님께서 잠잠하라고 꾸짖어서 귀신을 내쫓으십니다. 지난 시간에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마는 귀신이 떠드는 것을 하나님께서 허락지 않으십니다. 그 권능 앞에서 이 사람이 조용하게 있을 수도 없었습니다. 부득불 자기 본색을 노출시킬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말씀으로 말씀하시고 또 귀신을 내쫓는 이적을 통해서 말씀하신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다음에 회당에서 나와 베드로의 집으로 가신 것입니다. 또한 여기서도 예수님께서는 행적을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의 뜻을 잘 생각해보십시다.

가끔 우리는 "안식일을 어떻게 하면 거룩하게 지키는 것입니까?" 라고, 우리의 언어로 다시 말하면 "주일을 어떻게 하면 거룩하게 지키는 것입니까?"라고 질문합니다. 참 고민입니다. 이것도 하지 말라 저것도 하지 말라 하니 꽤나 문제가 많습니다. 제가 자랄 적만 해도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흔적을 볼 수 있었습니다. 농번기에는 얼마나 바쁩니까? 그런데도 모내기를 하건 추수를 하건 아무리 바빠도 주일날은 절대로 일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소도 빌려주지 않았습니다. 소도 안식일을 지켜야 되니까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 날 엿새 동안 열심히 일을 해야 합니다. 세탁기도 없던 시절, 그 많은 빨래를 밤늦도록 다림질하는 것을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이처럼 토요일 밤까지 모든 일을 마쳐 놓고 주일날은 하루종일 평안하게 쉽니다. 안식일 하루만은 참 깨끗하고 거룩하게 지켰습니다. 그때의 생각을 해서 지금 그대로 해보자는 마음을 가져봅니다 마는 하다보니 문제가 생깁디다.

'버스도 타지 말자'-이 정도는 괜찮습니다. 그런데 '전기도 켜지 말자'라고 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이미 발전기는 돌아가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거기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현대를 사는 우리로서는 옛날처럼 지키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아무튼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이 좋기는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가만히 있으면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하게 안식일을 지킨다고 하면서 낮잠을 자니 문제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안식일의 뜻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안식일을 지키는 방법은 구체적이요 행동적입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바리새인들과 늘 충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어떻게 지키셨는지 그 좋은 모델이 오늘의 본문 말씀에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의 집을 방문하셨습니다.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주일날에 교회에 나왔다가 곧장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것은 별로 좋지 않습니다. 어떻게 지내왔건 간에 가까운 분 한번 방문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형제를 방문할 수도 있고 친척을 방문할 수도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 이웃을 방문할 수도 있습니다. 하다못해 옆집에라도 들어가 기웃거려 보는 것도 좋습니다. 이웃간에 한번씩 들여다봐야 합니다. 방문하는 것은 큰 미덕입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의 여섯 가지 덕목 가운데에 이 '방문'이라고 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덕목입니다. 사람이 서로 오고가며 살아야 아름다운 것입니다. 요새처럼 강도가 들어온다고 문을 꼭꼭 닫아 놓고 살아서야 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말씀하시고 예배한 뒤에 첫번째로 가신 길이 제자의 집을 방문하셨다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환자를 방문하거나 어떤 필요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방문하여 위로하는 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집에 가서 다시 서로 주고받으며 성도의 교제를 나누는 일은 참 좋은 일입니다. 이런 좋은 일을 성경에 나타난 대로 참고해보면 요한복음 51절 이하에서 볼 수 있습니다.

베데스다 연못을 찾아가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이날도 안식일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자기나름대로 경건한 형식을 가지고 안식일을 보내는데 유독 예수님만은 제자들을 수행시키지도 않은 채 '이 예루살렘 성안에서 가장 외로운 자가 누구일까, 가장 사랑을 필요로 하는 자가 누구일까'를 생각하시며 그를 찾아갔던 것입니다. 그가 바로 베데스다 연못가에 있는 38년된 환자입니다. 38년이나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부모 친척 다 없고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내버려진 사람이요, 이 연못의 물이 동할 때에 먼저 들어가서 소원성취를 하려고 해도 데리고 들어가 줄 사람이 하나도 없는 딱한 처지의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외로운 사람을 찾아가 만나십니다. 안식일을 훌륭하게 지키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주일을 어떻게 지켜야 되겠는지, 그 좋은 본을 여기서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이 본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또한 누가복음 1310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안식일에 대해 시비를 벌이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구체적으로 대답하시고 설명해주십니다. 18년 동안 귀신들려 꼬부라진 한 여자를 안식일에 치료하신 것이 시비가 되었습니다. 그때에 그들이 시비하는 것을 들어보면 퍽 구체적입니다.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말 것이니라(13 : 14)"라고 회당장이 말합니다. 하필이면 왜 안식일에 병을 고쳐서 말썽을 일으키느냐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이런 일을 하는 것은 선한 일이요, 합당한 일이요, 가장 당연한 일이라고 대답하십니다.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나 마구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그러면 십팔 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13 : 15, 16)." 이 매임에서 풀어주어야 합니다. 영적으로 노예상태에 있는 자를 풀어주는 것, 감옥에 갇힌 사람처럼 붙들려 있는 사람에게 전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위로하여 풀어주는 것이 안식일에 할 일이요 주일에 마땅히 할 일입니다.

육적으로 병중에 있으면 더욱 외롭고 쓸쓸한 법입니다. 이 주일날에 내가 알고 있는 누구인가가 병원에 입원하여 있거나 요양을 받고 있다면 한번 찾아가 보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입니다. 가난한 사람을 돌보는 것도 아름다운 일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하는 행위에는 어떤 속박으로부터 우리가 다시 한번 자유함을 얻게 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와 동시에 다른 사람을 자유 하게 하는 일에 안식일이라고 하는, 주일이라고 하는 소중한 시간을 써야 할 것입니다. 시간만 나면 무엇을 하며 놀까 무슨 오락을 즐길까만 궁리해서야 되겠습니까? 남을 돕는 것은 나 자신의 정신위생에도 매우 좋습니다. 불쌍한 사람을 방문하고 돕는 것처럼 기분 좋은 일이 없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스스로 자유 하는 길이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예배하신 후 바로 제자의 집으로 직행하신 일은 안식일을 지키는, 주일을 지키는 좋은 모델로 우리가 배워야 할 하나의 사건입니다.

둘째로, 오늘의 이적은 베드로의 집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베드로는 결혼한 사람이었고 장모를 모시고 있었습니다. 베드로의 집에 있는 그 장모님이 지금 병들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먼저 한 가지를 생각해야 됩니다. 누가복음 511절에서 보았듯이 베드로는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았습니다. 오랫동안 해온 어부 직업을 버리고 예수를 따른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자연히 그 가정의 생계가 어려워졌을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아내에게 남편 노릇도 잘 못하고, 자녀들에게 아버지 노릇도 잘 못하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장모에 대해서도 사위 노릇을 바로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차피 두 가지 일을 양다리 걸치고는 못합니다. 가정을 위해서 일하던 사람이 다 버려 두고 지금은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습니다. 부득불 가정 일에 소홀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분명히 생각해야 합니다.

다 경험하시는 대로 교회 일을 많이 하다보면 자기 일에 소홀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집사님, 권사님, 장로님, 모두들 애를 많이 쓰시고 수고하시는데 그러다 보면 가정 일에 어느 정도 소홀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선 시간을 빼앗기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일 낮 예배에 나오고, 저녁예배에 나오고, 수요일 저녁예배에 나오고, 구역예배에 나오고, 어디어디 봉사 나가고 하는 것을 다 계산해보니 시간이 전부 교회에 매여 있습니다. 뒤돌아볼 시간마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썩 잘됐습니다"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잡다한 생각을 할 틈이 없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그저 그대로 끌려 다닙니다. 직장에서 교회로, 교회에서 가정으로-그것밖에 없습니다. 어디 딴 데로 샐 수가 없습니다. 우리 집사님들, 장로님들을 만나보아도 한눈을 팔지 않으니 충고할 거리가 없습니다. 아주 잘된 일입니다. 이처럼 교회 일을 열심히 하다보면 가정 일에 등한할 수밖에 없으며 반대로 가정 일을 너무 알뜰하게 하려다보면 교회 일을 잘 하지 못합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본문 말씀에 나타난 베드로는 우리처럼 보통의 신앙인이 아닙니다. 열두 제자의 한 사람으로서 가정과 직업을 버리고 전적으로 주님을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말하자면 '풀 타임 미니스터(full-time minister)'입니다. 전적으로 주님을 따르고 있습니다. 미루어보건대 장모님이 병들었다고 해도 잘 돌아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가정에 대한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고 보아야 합니다. 만일에 베드로의 부인이 잔소리를 좀 많이 하는 사람 같았으면 당장에 따졌을 것입니다. "어머니가 편찮아 누워 계신데 어디를 싸돌아다녀요!" 본문에 따르면 이런 경우에 그리스도께서는 이 가정의 문제를 돌보십니다. 이 점이 중요합니다.

주님의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전적으로 일하다가 이 때문에 가정에 소홀해졌을 때-다름 아닌 하나님의 일로 말미암아 그렇게 되었을 때에는 하나님께서 그 가정의 소홀해진 부분을 돌보십니다. 이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전적으로 헌신할 때에 그 가정을 돌보십니다. 반대로 생각하면 이렇습니다. 만일에 여러분이 가정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가정에 충실하기 위하여 내가 당연히 해야 할 교회 일에 태만하였다고 해봅시다. 교회를 위하여 분명히 수고하고 봉사해야 할 일까지도 거절했다고 한다면 그 가정이 무사할 것 같습니까? 그 가정이 유지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하나님의 일 하는 것을 나의 일이 아닌 것처럼 생각하기 쉽지마는 그렇지 않습니다. 한번 되돌아보면 그 일을 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의 일을 대신해주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마가복음 1029절로 30절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버린다고 버려지는 것이 아니요 결국은 그로 인해서 더 큰 것을 얻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나의 일을 하려고 애쓰기보다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하고 하나님께서 나의 일을 해주시는 것이 당연히 더 능률적이고 효과적입니다.

제가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에 경험한 일입니다. 제가 가르친 제자 목사님 한 분에게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아내와 이혼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언제인가 한번 심하게 다투었는데, 그때 아내가 같이 안 살겠다고 했나봅니다. 잦은 싸움 끝에 별거생활을 한 지도 1주일이 지났습니다. 어린아이가 둘인데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제게 와서 하소연을 합니다. 큰일났다고 울상입니다. 하루는 아내를 데리고 왔습니다. "저 미스터 김이 목사님을 통하면 제가 마음을 돌릴 줄 아는 모양인데요, 이혼하기로 이미 결심했기 때문에 소용없어요. 빨리 헤어지라고나 하세요." 아예 각오가 단단히 굳어졌습니다. 이거 야단났습니다. 남자는 답답하니까 자꾸 울기만 합니다. 저는 이 두 사람을 놓고 양쪽으로 왔다 갔다 했습니다. 이쪽 한번 부르고 저쪽 한번 만나기를 네 차례, 우연찮게 그 아내로부터 결정적인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남편이 강원도에서 목회 할 적만 해도 고구마로 배를 채우고 어떤 때에는 끼니를 굶기도 했지만 저는 남편을 잘 섬겼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고 교회를 위해 수고하기 때문에 그를 들어 섬겼지만 지금이야 다르지요. 교회 다 내버리고 미국에 와서 사다리 메고 다니면서 페인트칠이나 하는 남자를 왜 고생하면서 모십니까?" '옳다, 이거다' 생각하고, 저는 남편을 냉큼 불렀습니다. "자네 안사람이 왜 헤어지자고 하는지 알고 있나?" "그 이유를 잘 모르겠어요. 아마 고생스러워 그럴 겁니다." "이 멍청한 사람아, 그게 아니야! 진정으로 가정을 바로 세우고 싶으면 더 늦기 전에 빨리 목회를 시작하게나. 아내보고 돈도 벌어오라고 하면서 고생 좀 하자고 해보게나. '우리 밥 먹을 것, 죽으로 대신할 값이라도 고생 좀 합시다. 나는 주의 일을 해야겠소'라고 말하면 틀림없이 군소리하지 않고 자네를 따를 걸세." "제가 생각해봐도 그럴 것 같습니다. 목사님, 제게 마땅한 교회를 소개해주십시오." 그래서 제가 교회를 소개해주었습니다. 물론 목회를 시작한 후로 한동안 그들의 생활은 전보다 좀 어려워졌습니다마는 그 아내는 기꺼이 따랐습니다. 결국 두 사람은 화해를 하여 새롭게 재결합한 것입니다. 그 기념으로 구두 한 켤레를 사주기에 미국에서 나올 때에 신고 왔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로 가끔씩 만나면 무척 반가워하면서 옛말을 나누곤 합니다.

여러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내가 당당하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일할 때에는 오히려 가정 문제까지도 해결이 됩니다. 밤낮 "아이 러브 유, 아이 러브 유" 한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만 가지고는 가정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남편은 남편대로 자기 할 일을 당당히 하면 아내가 따르는 것이고, 아내는 아내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바른 길을 갈 때에 남편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남편의 얼굴이나 열심히 쳐다보고 있다고 아내가 예쁘게 보이지 않습니다. 이것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베드로도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전적으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이런 베드로의 집에 문제가 생겼을 때, 예수님께서 모른 체하시지 않습니다.

돌아보십니다. 예수님께서 몸소 찾아가셔서 해결해주십니다.

세 번째로, 베드로 자신은 장모의 병을 고쳐달라고 초조하게 간청하고 있지 않습니다. 상당히 성격이 급한 사람인데 점잖습니다. 예수님을 집으로 모시면서 "예수님, 우리 집에 장모님이 병들었단 말입니다. 어서 좀 가주세요"하고 나오지를 않았습니다. 세 복음서에 다 나와 있는 내용입니다 마는 그 문맥을 자세히 읽어보면 베드로는 보통의 상식대로 '선생님'을 자기 집에 모신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단순히 점심을 대접하려는 것 뿐이요 장모의 병을 반드시 고쳐야겠다는 의도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본문 말씀에 보면 "사람들이 곧 그의 일로 예수께 여짜온대"라고 합니다. 그 집에 손님으로 온 사람들이 "예수님, 지금 이 집에 문제가 있습니다. 겉으로는 편안하게 보이지만 저 뒷방에서는 사람이 앓고 있습니다"라고 아뢰었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직접 이야기한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모릅니다. 그 과정이 그렇게 좋습니다.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예수님께서는 이 사실을 미리 알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비록 방문하지는 않으셨어도 짐작은 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의 입에서는 나오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다만 사람들이 아뢰었습니다. 베드로가 이야기를 하지 않았지만 예수님은 이 집의 문제를 해결해주시려고 오셨습니다.

네 번째로, 예수님께서는 손을 잡아 일으키셨다고 합니다. 손을 잡아 일으킨다는 말은 '크라테사스'입니다. 움켜쥔다는 뜻입니다. 잡는다고 하면 가만히 붙드는 것이 아니라 힘있게 꽉 움켜쥐는 것입니다. 원문의 뜻대로 보면 확 잡아채는 것입니다. 벌떡 일으키신 것입니다.

왜 말씀으로 하시지 않고 이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달리다굼-소녀야 일어나라'하셨던 것처럼 말씀으로 하실 수도 있는데 왜 이 시점에서는 이렇게 행동하실까요?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장모의 손을 움켜쥐고는 낚아챔으로써 벌떡 일어나게 하십니다. 깊이 생각해야 할 문제입니다.

누가복음 1438절을 보면 "시몬의 장모가 중한 열병에 붙들린지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누가는 의사입니다. 의사의 입장에서 좀더 확실한 병명을 쓰고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단지 열병이라고 하였습니다마는 여기서는 중한 열병이라고 합니다. 요새말로 해서 장티푸스같은 병입니다.

대단히 심한 열병에 있었다. 열이 굉장히 높았다, 아주 중한 열병에 붙들려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미루어보건대 지금 베드로의 장모는 정신이 매우 혼미합니다. 정신이 오락가락해서 누가 예수이고 누가 베드로인지 알아보지를 못합니다. 고열 때문에 그 정도로 정신이 혼미한 가운데에 있었다는 것을 전제하여야 합니다. 그런고로 이제 예수님께서 일어나라고 호령하셔도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도무지 알아듣지를 못하니 말입니다. 여기에는 또 다른 방법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터칭(touching)입니다. 말로 하는 방법이 있는가 하면 손으로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는 접촉을 통해서 믿음을 줘야 했더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손을 잡아 일으키셨습니다. 손을 대는 것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정신이 혼미한 사람에게 손을 댐으로써 이 사람으로 하여금 누군가가 내 손을 잡았구나 하는 것을 확실하게 알도록 하신 것입니다. 손을 댐으로써 이 사람의 믿음을 도와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역을 이제 막 시작하셨습니다. 사역을 시작 하신지 한 3년이라도 지나간 다음이라면 이야기가 다릅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일, 죽은 사람을 살리신 일, 이런 소문을 들은 다음이라면 이 사람이 쉽게 믿음을 얻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 하신지 얼마 안되었습니다.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것이나 왕의 신하의 아들을 치료하신 것. 그리고 좀전에 회당에서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을 깨끗케 하신 이야기를 모르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님께 대한 확실한 믿음이 세워지지 않은 때입니다. 이런 형편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돕기 위하여 아예 강권적으로 역사 하십니다. 그를 붙들고 잡아 일으키십니다. 강하게 역사 하십니다. 의심하고 사양하고 주저하고 부끄러워하고 생각하고 할 겨를이 없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탁 잡아채면서 일어나라고 명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때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해를 요구하시기도 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생각하게도 하시고 느끼게도 하십니다. 또한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 판단하게 할 기회를 주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강한 능력으로 낚아채십니다. 우리가 믿음이 약할 때에는, 흔들릴 때에는 우리의 의지를 묻지 않으십니다. 강권적인 역사로 믿음을 갖게 하십니다. 약한 부분을 충분하게 채워주십니다. 오늘도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으로 역사 하실 때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감동을 주실 때가 있는가 하면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스스로 선택하게 하시는 때가 있으나 어떤 경우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강권으로 붙잡아서 옮겨놓으시는 역사가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다섯 번째로 생각해야 될 것은 "열병이 떠나고"라는 말씀입니다. 누가복음 438절에서는 "중한 열병에 붙들린지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붙들린다, 떠난다-이 두 단어를 한번 연결해봅시다. 병을 의인화(擬人化)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병든 것이 아니라 병에 사람이 붙들렸습니다. 병이라고 하는 것에, 말하자면 노예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본래 사람은 자유하고 싶고 마음대로 활동하고 싶은데 원치 않는 병에 붙들려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자유케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자유케 하시는 이 능력이 주님께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보면 "수종드니라"라고 합니다. 열병으로 누웠던 사람이 벌떡 일어나 깨끗이 나은 몸을 가지고 정상적으로 수종 들더라는 말입니다. 가정에 환자가 있으면 어떤 의미에서는 모든 일이 그 환자 한 사람을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환자에게 마음을 쓰게 되고 환자 때문에 근심에 매이게 됩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가정에 오셔서 이 가정의 가장 큰 걱정거리인 장모의 열병을 물리쳐 주십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주인이 되셨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제야말로 병든 자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문제의 해결자가 되셨습니다. 모든 문제가 예수님 안에서 해결됩니다. 얼마나 중요한 말씀인지 모릅니다. 베드로를 향해서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시면서, 한편으로는 집을 떠남으로 너희 가정에 문제가 되는 일이 있어서야 되겠느냐, 만일에 조금이라도 어려워지는 일이 있다면 그 문제는 내가 책임지고 돌보아주겠다 라고 하시는 귀중한 계시가 여기에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정상화되는 순간에 베드로의 장모는 수종들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감격스럽겠습니까? 즉시 일어나서 감사한 마음으로 예수님과 그 일행의 시중을 들었습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은 그리스도 안에 참 화평이 있고 가정의 은혜가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리스도는 문제의 해결자이십니다. 특별히 베드로의 가정처럼 주께 헌신한 가정, 주께 전 생애를 바친 사람의 가정에 대한 문제를 주님께서 친히 돌보아주시고 책임져주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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