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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하의 아들을 치유하심(요한복음 4장 43~54절)
이틀이 지나매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며 친히 증거하시기를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하시고 갈릴리에 이르시매 갈릴리인들이 그를 영접하니 이는 자기들도 명절에 갔다가 예수께서 명절 중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음이더라.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왕의 신하가 있어 그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에 오심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주소서 하니 저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신하가 가로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하신대 그 사람이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았다 하거늘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제 칠 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아비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았다 말씀하신 그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이 다 믿으니라.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니라.
본문 말씀은 병을 앓는 신하의 아들을 치유하시는 내용입니다. 오늘의 이 본문에서도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이적은 또 하나의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이 병이 나았다고 하는 단순한 사실을 이야기하고 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사건을 통하여 우리에게 중요한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 말씀을 들을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눈 있는 자는 볼지어다"라고 주님은 누누이 강조하십니다. 우리는 그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이루어지는 사건을, 한 장의 그림을 보듯 살피면서 그 사건이 무엇을 말하는지, 그 사건 안에 내가 처하였다면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지, 내 모습은 어떤 모습으로 비추어질는지 이런 것들을 생각해 볼 때에만 참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사건을 한낱 2천 년 전의 이야기로만 돌리고 말 것이 아닙니다. 나 아닌 남의 이야기로 치부할 것도 아닙니다. 오늘의 내가 그 형편에 있다면 나는 어떻게 할까,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 하는 것을 동시에, 함께 생각하여야 됩니다. 나 자신이 그 현장에서 주님을 만나는 은혜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특별히 강조된 바가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명절기간 동안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가 거기서 많은 역사를 이루시고 다시 고향 갈릴리로 돌아오셨습니다. 바로 그런 상황에 있는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십니다.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하시고(44절)"-성경 여러 곳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고향, 선지자의 고향이 문제입니다. '선지자의 고향'이라고 하면 예수님께 대해서 다소간의 지식이 이미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바른 지식이 아닌 것은 없는 것만 못합니다. 알려거든 똑바로 알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차라리 무식한 게 낫습니다. 예수님께 대해서도 그렇고 그 누구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모르고 쓸데없는 것만 알아보십시오. 그것 때문에 도리어 알아야 할 소중한 것을 모르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은 그래서입니다.
이따금 이런 이야기를 듣습니다. "제 아들은 나이만 들었지 뭘 몰라요. 철딱서니가 없어요. 아무 것도 몰라요." 장황하게 늘어놓습니다. 저는 들으면서 속으로 웃습니다. 사실 그 자신도 모르면서 떠들어대는 것입니다. 누가 더 잘 알겠습니까? 아들 본인이 자신을 제일 잘 압니다.
나의 아들이기 때문에 '저게 뭘 아나' 싶은 것입니다. 내가 키워오던 모습만 생각합니다. 젖먹일 적의 아이로만 생각합니다. 너무 잘 알기에 필요 없는 것까지 자세히 아는 것입니다. 결국은 나의 아들에 대해서 모르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선지자의 고향 사람들이 선지자의 쓸데없는 것만 압니다. 아무개의 아들이요, 아무개의 딸이요, 나이가 얼마요, 키가 얼마요, 어느 학교를 다닌다, 건강이 이러하다-이런 것이 다 무엇에 소용되는 지식입니까? 이런 쓰잘데 없는 지식 때문에 예수가 누구인지를 제대로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받기 어려운 것은 예로부터 그래왔습니다. 여러분의 마음도 '선지자의 고향'과 같은 마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잘못된 지식에 의존하다가 정말로 소중한 지식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 것입니다.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며 친히 증거 하시기를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하시고(43~44절)"-고향으로 가시면서 주님은 이것을 걱정하고 계십니다.
전에 물을 포도주로 만드셨던 마을 가나에 들어서시면서 두 번째 이적을 행하십니다. 첫 번째 이적을 행한 마을에 주님이 이르시고, 거기서 우리는 한 사건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이적을 보게 됩니다. 이 이적의 목적이 무엇이겠습니까? 비유도 그러하거니와 이적을 해석할 때에는 맨 마지막에서부터 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해석하는 방법입니다. 성서 해석학적 방법으로도 맨 마지막에 있는 말씀이 기록한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맨 마지막 말씀인 53절을 보십시다. "아비가 예수께서 내 아들이 살았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이 다 믿으니라"-믿음인 것입니다. 이적의 목적은 본문에서 보면 두 가지 사건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믿음 없는 자에게 믿음을 주려는 것입니다. 믿음이 생기도록 하는 것입니다. 안 믿는 사람으로 믿게 만드는 것입니다. 전혀 안 믿던 사람이 표적을 보고, 이적을 보고 믿게 되는 경우를 우리 주변에서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이란 이해한다는 말과는 전혀 다릅니다. 초자연적인 것입니다. 이치에 맞든 맞지 않든 합리적이든 비합리적이든, 과학적이든 비과학적이든, 내 경험에 있든 없든 문제가 안됩니다. 오늘 당한 이 사건, 이 경험 때문에 믿음을 가지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체험이 믿음을 줍니다. 이적이 믿음을 줍니다. 도저히 믿음이 생기지 않는 사람에게는 표적을 줄 수밖에 없습니다. 혹 여러분 가운데에 이런 생각을 해보신 분은 없습니까? '죽을병에 걸렸다가 낫는다면야 내가 안 믿고 어떻게 배겨.' 이런 사람은 한번 죽을 지경이 되어봐야 되겠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믿지 않으니까 말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병낫는 것만이 은혜가 아닙니다. 병 걸리는 것까지 은혜입니다. 성공만이 은사가 아니라 실패도 은사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 모두가 믿음을 가지게 하고자 주시는 은혜인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믿음을 완전케 하려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기는 있는데D똕TXTF$미숙합니다. 불완전한 믿음이요, 병적인 믿음이요, 동기가 불순한 믿음이요, 유치한 믿음입니다. 이러한 믿음을 완전케 하려고 할 때, 거기에 또한번 기적이 나타납니다. 여러분, 이적이라는 것을 너무 복잡하게 생각지 마십시오. 병낫는 것을 이적이라고 한다면 병걸리는 데서부터 시작되어야 옳지 않겠습니까? 병걸리는 데서부터 병낫는 것까지가 이적입니다. 우리가 어떤 때에 큰 이적을 보았다고 말합니다. 거의 죽을 뻔했다가 살아났다고 말합니다. 그 죽을 뻔했다는 것이 보통 사건입니까? 우리는 이런 사건을 보고나서야 비로소 믿고자 합니다. 이렇게 불완전한 믿음, 유치한 믿음을 완전한 믿음, 성숙한 믿음으로 인도하자고 주님께서 이적을 베푸십니다.
본문 말씀에 나타난 이적의 대상은 왕의 신하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정치적으로 지도자급에 있는 인물입니다. 교육적으로 사회적으로 높은 층에 있는 사람이었다고 봅니다. 왕의 지위는 정치적 권력으로 가능하지만 신하의 지위는 자기 능력이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당한 지성인이라고 미루어보아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온 이야기가 몇 군데 있습니다. 백부장이 예수님께로 나아왔고(마 8 : 5~13), 회당장 야이로가 역시 예수님 앞에 나아왔으며(마 9 : 18~26), 유대인의 관원 니고데모도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요 3 : 1~21). 그러한 고관들이 예수님 앞에 나아왔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왕의 신하를 비롯하여 백부장이나 야이로 같은 높은 층에 있는 사람들이 주님 앞에 나오게 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어쩌다 나온 것이 아니라 나올 수밖에 없어서 나왔습니다. 어쩔 수 없어서, 불가피해서 나온 것입니다. 죽을병이 들었으니 별도리 없지 않습니까? 참으로 중요한 사실입니다.
어느 목사님의 딸이 안 믿는 남자와 연애하였습니다. 아버지 되는 목사님이 눈물로 극구 말리는데도 듣지 않고 기어이 제 뜻대로 결혼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후 10여 년 동안을 제 마음대로 시집을 살았습니다. 물론 교회는 다니지 않았습니다. 외아들이 병들었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하나님 앞에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끝끝내 불 신앙의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결국 이 아들이 죽었습니다. 그제서야 교회를 찾아갔습니다. 너무나 괴롭고 답답한 마음을 목사님께 하소연합니다. "하나님께서 어찌 이러실 수 있습니까? 하나뿐인 내 아들이 왜 죽어야 합니까?" 회개는 하지 않고 도리어 원망을 합니다. 자기가 목회자의 자녀라는 사실도 고백하면서 갖은 넋두리로 원망을 늘어놓습니다. 듣다못해 목사님이 한 마디 했다고 합니다. "당신과 같은 사람은 그 정도 얻어터져야 10년 만에라도 교회에 나오는 걸 어떡합니까?" 웬만하면 좋은 말로 위로하고 싶었는데 줄곧 못된 말로 원망하는 것을 보고 신중하게 꾸짖었다고 합니다. '그 정도가 아니고는 당신이 제발로 교회를 찾아오지 않으므로 하나님께서 그런 방법을 취하신 것이다, 당신을 부르시려고 이 사건이 있게 하신 것이다'라고 깨쳐주려 한 것입니다. 그 여인, 마침내는 무릎을 꿇고 회개하였다고 합니다.
백부장이나 왕의 신하나 회당장 야이로와 같은 사람들이 예수님 앞에 나올 사람들이 아니지요. 예수님 앞에 무릎꿇을 사람들이 절대로 아닙니다. 다 죽을병 때문에 나온 것입니다. 사람이 고칠 수 있으면 사람에게 갑니다. 의사가 고칠 수 있으면 의사에게 갑니다. 자기 나름으로 이 손 저 손 다 써보고 나서 이제는 하나님 앞에 나올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니 비로소 하나님께 나아온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이 이렇게 야속하고 간사합니다. 절대 필요, 절박한 사정입니다. 지금 신하의 아들이 죽게 되었습니다.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라고 성경에 씌어 있습니다. 인간 능력의 한계에서, 인간 의지의 궁극에서 결국은 주님 앞에 나왔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죽을병이 이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릇 고난을 마다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난에는 적어도 이만큼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발견되는 사실이 있습니다. 자신이 병든 게 아니라 아들이 병들었습니다. 성경에서 비슷한 예를 많이 봅니다. 회당장 야이로도 사랑하는 딸이 병들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변화산에서 내려왔을 때 만난 이름 모를 사람도 아들이 귀신들렸습니다. 귀신들려 거품을 물고 쓰러지고, 불에도 넘어지고 물에도 넘어지는 불쌍한 아들을 고쳐달라고 합니다. 또한 수로보니게 여인 역시 딸이 귀신들려서 예수님께 나아와 간청합니다. 백부장은 그의 종이 죽게 되어서 예수님께 나옵니다.
이 모든 일들이 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병들었기 때문에 생겼습니다.
죽어 가는 아들을 지켜보는 아버지의 마음은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럽습니다. 차라리 자기가 죽는 것만 못합니다. 여러분도 잘 아실 것입니다. 내가 아픈 것보다 나의 사랑하는 사람이 아픈 것이 더 괴롭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 지금 죽어가고 있습니다. 호흡이 점점 약해져 가는 모습을 본다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일입니다. 그 순간에 그는 예수님께로 달려오는 것입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은 아주 원색적인 것입니다. 강한 부성애, 아버지의 자식을 향한 사랑이 오늘 이 사람을 예수님께로 인도했다는 것입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주님 앞에 나올 때에는 첫 동기(first motivation)가 있습니다. 알고 보면 이 첫 동기라고 하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처음 교회에 나오면서 '나는 주 예수를 믿고 중생하여 구원받겠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이런저런 이유를 가지고 나옵니다. 어떤 사람은 답답해서 나오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교양 삼아 나오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친구 만나러 나오기도 합니다. 자꾸 나가자고 조르니까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주는데 산 사람 소원을 못 들어주랴'하며 한번쯤 나와보았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예쁜 여자 꽁무니를 쫓아서 나왔다든가, 빚쟁이한테 빚 받으러 나왔다고 하는 우스운 동기도 다 있습니다. 다른 데서는 못 만나도 교회에 오면 꼭 만날 수 있어서라고 합니다. 이렇게 이유가 가지가지입니다.
여러분은 맨 처음 교회에 나올 때에 무슨 목적으로 나왔습니까? 가만히 생각해보십시오. 그때의 동기가 썩 좋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처음 교회에 나오는 사람에게 그 동기를 묻지 마십시오. 그런 마음으로 나와서는 안 된다느니 하는 소리일랑 그만두십시오. 자기도 그래놓고 괜히 남 탓하는 것입니다. 다 그렇게 시작했습니다. 처음 동기는 미숙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나왔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탕자가 집으로 돌아올 때 무슨 목적으로 온 것 같습니까? 사람이 되어서 돌아온 것이 아닙니다. 배고파서 죽게 되었으니 일단 먹고살아야겠다, 내 아버지 집에는 먹을 것이 많으니 우선 살고 봐야겠다 하는 생각으로 슬슬 기어 들어온 것입니다. 이제는 회개하고 사람 노릇을 해야겠다, 이제는 효자가 되어야겠다-이런 생각을 할 자격도 없거니와 이런 마음도 아니었습니다. 여전히 변변치 않은 마음으로 돌아왔습니다. 다만 아버지가 영접하는 모습을 보고 그 순간에 마음이 변한 것입니다. 돌아오게 된 동기가 좋았던 것은 아닙니다.
본문에 나온 이야기에서도 같습니다. 왕의 신하가 예수님 앞에 와서 무릎을 꿇게 된 첫 동기가 그렇게 아름다웠던 것은 아닙니다. 어디 한번 이 사람의 믿음을 분석해보십시다. 비록 미숙한 믿음이지마는 이만하면 훌륭한 믿음입니다. 처음 교회에 나오는 사람치고는 참으로 훌륭한 사람입니다. 처음 그리스도께로 나오는 사람의 믿음치고는 전형적으로 훌륭한 믿음이었다고 보겠습니다.
첫째는 "듣고 가서 청하되"라고 합니다. 소문을 듣고 왔습니다. 누군가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갈릴리인들이 그를 영접하니 이는 자기들도 명절에 갔다가 예수께서 명절 중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음이더라(45절)." 소문이 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서 어떤 병자를 고치시고 어떤 말씀을 하시고 어떤 행동을 하셨다고 하는 굉장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소문을 들었습니다. 전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전도가 별것 아닙니다. 소문을 내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받은 바 은혜가 있거든 소문을 내십시오. 아름다운 일을 보았거든 자꾸 돌아다니며 떠드십시오. 소문을 내야 합니다. 소문을 내는 것이 바로 전도입니다. 왕의 신하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이 소문을 들었기에 예수님께 나올 수 있었지, 소문을 전혀 못들었다면 예수님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래서 소문은 중요합니다. 소문낼 필요도 있고 소문을 들어둘 필요도 있습니다. 때때로 겪는 일입니다. 무슨 신통한 약방문(藥方文)이나 어려운 병을 고쳐낸 병원이 있으면 소문을 내야 합니다. 그 소문을 들어야 언젠가 나도 아플 때에 고침 받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지식이 달리 이루어지는 게 아닙니다. 이와 같이 소문을 듣는 자세에서 이루어집니다. 이 사람은 소문을 믿었습니다. 이 태도가 매우 중요합니다. 내가 왕의 신하쯤 되고 지성인쯤 되는 사람인데 예수님이 어디서 병을 고쳤다느니 물을 포도주로 만들었다느니, 그런 말 같지도 않은 소리는 하지 말라, 그런 무식하고 비과학적인 소리는 하지 말라, 정신이 오락가락 하는 사람들이나 하는 소리지 똑똑한 사람은 그런 소리하지 않는다-이러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은 적어도 그런 생각을 극복할 수 있을 만큼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더군다나 그럴 수밖에 없는 처지이기도 했습니다.
소문을 들었고 또한 그 소문을 믿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훌륭한 믿음입니다.
두 번째로, 이 사람은 자기 신분을 극복했습니다. 니고데모는 스스로 고관이라는 신분 때문에 예수님을 만나는 동안에 자기의 체면이 손상될까 두려워 밤중에 몰래 찾아왔습니다. 자기 위신, 명예를 챙기느라 그랬던 것입니다. 이에 비하여 오늘 이 사람은 전혀 다릅니다. 왕의 신하이고 뭐고 다 상관없습니다. 내 아들만 고친다면야 무엇인들 못하랴 하는 생각입니다. 자기 부정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 매우 훌륭한 점입니다. 높이 평가해야 합니다. 참 답답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예수 믿으라고 했습니다. "제 아내가 집사님입니다." 예수 믿으라는 권유에 대뜸 하는 소리입니다. "그런데 왜 당신은 안 나가오?" "아무러면 제가 마누라한테 끌려나가서야 되겠습니까?" 무슨 소리를 하건 상관 않고 재차 권유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하는 말 좀 보십시오. "얼마 동안 나가면 장로 자리 하나 주겠습니까?" 이것이 무슨 소립니까? 자기 부인이 집사이므로 그보다 한 계급 높아야겠다는 이야깁니다. 농담처럼 들리지만 진담으로 하는 말입니다. 그 잘난 체면을 퍽이나 챙기고 있습니다. 부인한테 끌려나오기 싫다는 오기로 안나오는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남편을 교회로 인도하고자 하는 분이 계시다면 그 체면 좀 세워주십시오. 남편의 체면을 잘 세워줘야 합니다. 때때로 이것이 문제가 됩니다. 자기 부인한테 체면이 꺾여서 끌려온 것처럼 생각하게 되면 참으로 곤란합니다. 사람이 별것도 아닌 명예나 체면을 꽤나 챙기기 때문입니다. 체면 때문에 못 나오다가, 나와서 믿음을 얻고 중생한 후에야 아무 것도 아닌 줄을 알게 되겠지만 우선은 나오기가 힘듭니다. 나오는 첫걸음이 힘든 법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온 왕의 신하는 죽을 지경이 되니까 위신 따위는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사실 이것을 극복하기가 어렵습니다. 자기 위신, 명예, 체면, 지위를 다 극복하고 갈릴리 청년 예수에게 와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대단한 자기 희생이요 자기 부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세 번째로는 이사람의 믿음에서 조금 좋지 않은 면을 발견합니다.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49절)"라고 합니다. '죽기 전에'라는 말을 강조합니다. 예수님께서 벌써 잠깐사이에 설교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48절)"---이 한 말씀이 귀에 들리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죽기 전에 어서, 빨리'하는 것입니다. 초조하고 불안합니다. 우리도 어떤 때에 이처럼 초조한 요청을 할 때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지금 믿음의 한계를 노출시켰습니다. 죽기 전에 와야지 숨넘어가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죽은 다음에는 소용없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의사라고 해도 죽은 다음에야 도리가 없지 않습니까?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의사로 생각하고 내뱉은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요 11 : 25~26)." 살았느냐 죽었느냐가 문제가 아니다, 숨이 넘어갔느냐 안 넘어갔느냐는 중요하지 않다---내 앞에 이 말씀이 있건만 이것을 알 리가 없습니다. 무조건 '죽기 전에'입니다.
이와 비슷한 문제에 봉착했던 사람이 또 하나 있습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야이로입니다. 야이로의 외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발 아래 엎드려 자기 집에 오시기를 간곡히 청합니다. 그래서 이제 출발을 하시는데 가는 동안 혈루증 환자가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짐으로 치유 받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이럭저럭하는 동안에 시간이 조금 지체되었습니다. 그때 야이로의 하인이 와서 "딸은 이미 죽었습니다. 더는 예수님을 괴롭히지 마세요. 일은 다 끝났습니다"라고 합니다.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답답한 처지에 놓였습니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일단은 믿어야 합니다. 죽을 뻔했으면 살 것이요 죽었으면 살리실 것입니다. 이 믿음이 어렵습니다. 우리 인간의 믿음에는 이런 한계가 있습니다. 사람의 생각에 가능하면 하나님께도 가능하지만 사람의 생각에 불가능한 일이면 하나님도 못하신다-이렇게 판단해버립니다. 여기까지만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이것이 바로 상식적인 믿음입니다. 상식선, 자기 지식의 한계에다가 믿음을 묶어놓고는 신앙을 운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으로는 절대 불가능한 것도 가능케 하십니다. 사람의 생각에는 도저히 안되는 일일지라도 그에게는 방법이 있습니다. 지금 이 사람은 말할 수 없이 급합니다. 빨리 와주세요, 죽기 전에 어서요 하며 조르고 있습니다. 죽은 다음에는 소용없다는 것입니다. 아직 불완전한 믿음입니다.
미숙한 믿음이요 유치한 믿음입니다.
그런가 하면 네 번째로 '내려오소서'라는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빨리 오셔서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해달라는 것입니다. 주문(呪文)이라도 외어달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현장에 꼭 계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병자가 있는 현장까지 꼭 모시고 가겠다는 생각입니다. 현장에 제한된 신앙입니다. 자기 세계관, 자기 소원으로써는 예수님이 반드시 왕림하셔서 환자의 머리에 친히 손을 얹으시고 기도해주셔야만 된다는 것입니다. 죄송스러운 비교가 되겠습니다마는 저도 비슷한 경우를 당합니다. 어디서 설교하는 일로 막 사무실을 나서는데 어떤 분이 달려옵니다. "목사님! 같이 좀 가 주셔야 겠습니다. 지금 아무개가 병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기도하겠습니다. 지금 설교 맡은 곳이 있어 가는 길이라 안되겠군요. 죄송합니다. 오늘밤에 특별히 기도하겠습니다." 정중히 설명을 했습니다. 그런데도 막무가내입니다. "꼭 같이 가주셔야 합니다." 기도하겠다는 것만으로는 웬지 못 미더워합니다. 제가 직접 가서 기도한다고 반드시 낫게 되는 것도 아닌데 무조건 와달라는 것입니다. 기도하겠다는 제 말이 무척 섭섭한 모양이었습니다.
본문 말씀에서도 죽기 전에 빨리 오셔서 고쳐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퍽 초조합니다. 자기가 생각하는 방법-현장에 오셔서 친히 환자를 만져야 한다는 생각에 따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거절하십니다.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갈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절반은 거절이나 다름없습니다. 고쳐달라는 청을 들어주시는데 그 방법이 거절입니다. '오십시오'하는데 안 가시겠다고 합니다. 가버나움까지 동행하여 달라고 하는데 거절하십니다. 여기서 이 사람은 시험에 빠지게 됩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주님의 말씀을 믿고 그냥 돌아가야겠습니까 말아야겠습니까? 매우 어려운 처지에 봉착했습니다. 그러나 이 왕의 신하는 꽤 큰 사람이었습니다. 여기서는 위대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훌륭한 사람입니다. 한 사람은 왕의 신하요 또 한 사람은 갈릴리 목수입니다. 정확히는 몰라도 아마 왕의 신하의 나이가 더 많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겨우 서른 살입니다. 인간의 눈으로 볼 때에는, 인간의 신분으로 볼 때에는 상대가 안 됩니다. 어쩌면 왕의 신하가 와달라는 부탁에 고맙습니다하며 따라 갈만한 현실인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예수님은 네 아들이 살았다라는 한마디로 가시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이 순간에 믿고 간다는 것이 말로는 쉬워도 쉽지 않습니다. 왜 가시지 않습니까, 제 눈으로 확인해야 알 일입니다 하며 따지지 않습니다. 그저 믿고 순종합니다. 예, 알았습니다 하고 가버나움으로 돌아갑니다. 훌륭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내가 원하는 방법대로 되지 않고, 내가 원하는 시간에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할 때 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인간의 마음은 당장 이 손안에 쥐어주어야 만족해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네가 생각하는 방법이 아니라 나의 방법대로 한다,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에 왕의 신하는 믿고 갔습니다. 그래서 훌륭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한가지, 긍휼의 말씀을 하십니다. 표적과 기사에 의존하는 인간의 나약성을 비판하십니다.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인즉 표적과 기사로부터 자유 하는 믿음을 성숙한 믿음이라고 평가하시는 것 같습니다. 요한복음 20장 29절에서 예수님은 도마에게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 되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적을 꼭 보아야만, 표적을 꼭 보아야만, 내 몸으로 체험하여야만 믿는 믿음은 옅은 믿음입니다. 미숙하고 유치한 믿음입니다. 그러나 꾸짖지 않으십니다. 어째서 너는 꼭 이적을 보아야만 믿느냐!-이렇게 책망하지 않으십니다. 유치한 믿음을 비판 하시면서도 이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십니다. 단,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진실한 순종을 요구합니다. '네 아들이 살았다'라는 말씀에 곧바로 '예'하고 순종하며 간다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아마도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가야 되나 말아야 되나, 도대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 것인가 사뭇 염려되는 시간인데 이 사람은 믿고 갔습니다. 내 체험이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의 체험을 증거로 받아들이고 수용하는 믿음이었습니다. 내가 체험한 것처럼 믿을 수 있는 그런 믿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이제 내려가는 길에 그의 종들을 만납니다. "당신 아들이 살았습니다"라는 말을 듣고 그 시각을 묻습니다. 제 칠 시라고 답합니다. 곰곰이 미루어보니 예수님께서 네 아들이 살았다고 말씀하셨던 순간의 시각입니다. 놀랍게도 예수님은 공간을 초월하여 역사 하셨습니다. 원격에서의 이적입니다. 현장에 꼭 있어야만 이적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멀리 계셔도 이적을 베푸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꼭 현장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기도하고 저기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원격에서 나타난 이적이라는 특징 밖에도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적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하게 했다고 말씀하신 적도 있지마는 오늘 이 자리에서는 아버지의 믿음 덕분에 아들이 나았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반드시 나의 믿음이어야 한다고 고집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누구인가 다른 사람의 믿음으로 효력이 나타나는 것도 볼 수가 있습니다. 이 사람의 아들은 아무 것도 모릅니다. 다만 아버지의 믿음 때문에 그가 나았을 뿐입니다. 매우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성경을 공부해나가면서 종종 만나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순종하였습니다. 아들의 병 낫는 현장을 아직 목격하지 못했으나 "네 아들이 살았다"라는 말씀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눈으로 본 것은 없으나 그 말씀만 믿고 일어서서 가는 것입니다. 현장을 목격한 바가 없어도 살았다면 산 줄 알고, 일어났다면 일어난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순종할 때에 마침내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합니다. 만일에 네 아들이 살았다는 말씀을 믿지 않았다면, 살았는지 죽었는지 내가 어떻게 압니까 하고 대들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내 아들 안 살아나도 좋으니 좌우간 갑시다 하고 부득부득 우겼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아무래도 일이 좀 달라졌을 것입니다. 네 아들이 살았다-나의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믿었습니다. 아들이 살아난 줄로 믿었습니다. 그 말씀을 사건의 실현으로 그대로 믿고서 가버나움으로 가는 중에 말씀대로 되어진 것을 확증 받게 됩니다. 순종이 먼저요 깨달음은 뒤따라왔습니다. 이것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먼저 순종하고 먼저 감사하고, 그 다음에 되어진 사실을 깨닫습니다.
이렇게 할 때에 믿음 없는 사람이 믿음을 가지게 됩니다. 미숙하고 유치한 믿음을 가졌던 이 왕의 신하가 이제는 원숙하고 온전한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부족한 믿음을 치유해주시는 하나님---이것이 본문말씀의 주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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