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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예배하는 곳(요 4:15~26)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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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예배하는 곳(4:1526)

 

앞장에서 물을 길러 나온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과의 대화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이 여인은 일부러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나온 것이 아니라 우연히 나왔다가(하나님 앞에는 섭리적이지만) 뜻밖에 주님을 만납니다. 만나는 동안에도 민족적인 배경, 문화적인 배경의 차이로 두 사람 사이에 장벽이 있었습니다. 이 장벽을 헐기 위해 예수님은 먼저 물을 달라고 구하셨습니다. 그녀는 우물가에서 물을 구하시는 예수님께 쉽게 물 한 그릇을 주지 못하는 짜증스럽고 콤플렉스가 많은 여자였습니다. 이 때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 게 물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4:10)고 이상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단지 그는 물을 길러 다니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으므로, 한 번 마시면 다시는 목마르지 않는 그런 물이 있으면 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말의 뜻을 알아듣지 못하는 이 여인을 꾸짖지 않으십니다. 니고데모를 향해서는 이스라엘의 선생이 그것도 모르냐고 책망을 하셨지만 불쌍한 사마리아 여자는 그냥 받아 주십니다.

예수님은 그 여자를 영접하시고 "그래, 네 남편을 데려 오라"(4:16)고 말씀하십니다. 이 대화 속에 큰 은혜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잘못을 그대로 지나가며 남편을 데려 오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남의 잘못을 콕콕 찌르면서 말하는 일은 없습니까? 그저 알고도 모르는 척하고 지나가는 것이 덕입니다. 다음은 사마리아 여인의 태도가 놀랍습니다. 왜 나에게 물을 달라 하느냐고 반항적으로 나올 때의 처음 자세 그대로였다면 틀림없이 다음과 같은 대답이 나왔을 것입니다. "물을 달라고 했는데 남편 이야기는 왜 끄집어냅니까", 즉 남편이 왜 관계가 되는 것이냐고 한번 더 따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여인은 벌써 여기서 절반은 마음 문이 열렸습니다. 그래서, 긍정적으로 진실하게 대답을 합니다. ",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아주 겸손한 자세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자의 진실을 듣고서야 생수를 주실 생각이었습니다. 발이 땅에 닿듯이 가장 낮고 진실하고 겸손한 바로 그 순간이 되고서야 은혜를 받을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교회를 열심히 다녔어도 아직도 마지막 진실을 내어놓지 않았다면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마지막 겸손이 필요합니다. 겸손한 자는 설교의 말씀마다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지지만 교만한 자는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지 않고 이 말씀은 내 남편이 들어야겠고 내 아내가 들어야 하겠다고 말씀을 돌리고 있습니다. 겸손과 진실이 부족한 탓입니다. 언젠가 한 번만은 진실해야 합니다. 평생을 위선과 거짓으로 살았다 해도 마지막 순간 한 번만은 진실해야 함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남편이 없다고 여인이 대답하자 예수님은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4:17-19)고 그녀의 진실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지금 분명히 함께 살고 있는 남자가 있지만 그는 자기의 남편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아마도 소실의 위치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생각해보면, 이 여인은 다섯 번씩이나 결혼하고 이혼했으므로 남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진실하게 자기를 내놓는 것이 아주 힘들었을 것입니다. 더욱이 지금은 남의 남편과 살기 때문에 반항적으로 나갈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진실했습니다.

여기서 잠깐 2000년 전의 유대 사람들의 이혼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그들은 이혼할 때 남자가 휴서라는 것을 써서 여자에게 주면 그것으로 끝났습니다. 성경에도 휴서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러면, 휴서는 어떤 경우에 썼을까 하고 문헌을 찾아보니 그 당시 여자들의 사회적인 대우를 한눈에 보는 듯했습니다. 휴서란 "지금부터 이 여자는 내 아내가 아니다"라는 종이 한 장인데 주를 달았습니다. 왜냐하면, 이 여자는 이혼을 했지만 이혼 사유가 간음을 했거나 죄를 지은 것이 아님을 밝혀 두는 것입니다. 휴서 내용의 심한 경우를 예를 들면, 음식솜씨가 좋지 않아 이혼하기도 했고, 심지어는 음식하는 뒷모습이 보기 싫어 휴서를 쓴 경우도 있었습니다. 믿어지지 않지만 이 당시의 휴서가 발굴되어 지금 문서로 남아 있다고 합니다. 어쨌든 이혼 수속이 간단했고, 휴서 한 장만 있으면 여자는 자유로이 다른 남자에게 결혼할 수 있었습니다.

본문의 사마리아 여인은 무슨 이유인지는 잘 모르지만 다섯 번씩이나 쫓겨난 것을 보면 어딘가 결정적인 결점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지금도 아내가 있는 남자와 살고 있으니 온 동네의 눈총은 말할 것도 없었을 것입니다. 물론, 그녀도 자기 나름대로 할 말은 있을 것입니다. 지금 나는 그 남자와 함께 살고 있고, 사랑을 받고 있으므로 그는 내 남편이다, 나는 억울하게 다섯 번이나 쫓겨다녔다고 자기 정당화 내지는 변명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낯선 유대인 남자가 묻는 말에 그녀는 진실되게 지금 살고 있는 남자는 나의 남편이 아니요, 나는 남편이 없습니다라고 겸손히 대답합니다. 예수님도 이 대답에 만족하셨습니다. 그 여자의 진실을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는 동안, 예수님의 인격에서 영적인 분위기를 느꼈고, 그리고 자기 자신의 참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을 알게 되자 자신도 알게 된 것입니다. 칼빈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이는 자기에 대한 지식이 없고, 자기에 대한 지식이 없이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다"(Without knowledge of God there is no knowledge of self, without knowledge of self there is no knowledge of God).

이 말은 칼빈의 저서 기독교 강해첫 페이지에 나옵니다. 다시 풀이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뵈올 때 비로소 자기 자신을 보게 되고, 또한 자기의 진실을 찾을 때에 비로소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과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은 동시에 이루어집니다. 바꾸어 표현하면, 하나님 안에서 나를 알 수 있다는 뜻입니다. 부모님과 자식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는 순간 내가 어떤 존재인가를 알게 됩니다. , 부모님의 사랑을 알면 그 안에서 동시에 자식된 나를 바로 아는 것입니다. 남녀간의 사랑에서도 내가 그를 사랑하면 사랑하는 동안에 나의 가치를 압니다. 왜냐하면, 나는 사랑 받는 존재이므로 소중한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그와 나를 동시에 아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남을 사랑한다는 것은 나를 사랑하는 것이며, 나를 사랑해야 남도 사랑할 수가 있습니다. 원래 자기 사랑이 없는 사람은 남도 사랑하지 못합니다. 자기애의 신비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과 많은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지만 자기의 진실한 모습을 되찾았습니다. 지금까지 다른 사람에게는 "내 남편이 있다. 그가 나의 남편이다"라고 자기 정당화를 늘어 놓았을지라도 예수님 앞에서는 변명 없는 자기 모습을 보였습니다.

자기 모습을 찾고 보니 먼저 주님을 알게 됩니다.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4:19). 예수를 선지자로 볼 수 있는 진실한 눈이 열렸습니다. 진실한 순간에 하나님을 알아봅니다. 자기 앞에 선 유대인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임을 알았고 고백한 것입니다. 이 고백은 진실을 찾고서야 할 수 있는 귀한 고백입니다.

다음, 사마리아 여인이 알고 싶은 것은 예배하는 장소 문제였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4:20).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종교적 고민입니다. 자기 조상들은 사마리아 사람이며 이 산(그리심 산)에서 예배를 보았는데, 유대 사람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한다고 하니, 당신은 선지자이시므로 대답해 달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어디서 예배를 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입니다.

지금 여기서 말하는 예배의 개념과 우리가 생각하는 예배의 개념은 다릅니다. 여인이 의미하는 예배란 제사로서, 제사 중에서도 속죄 제사를 뜻하고 있습니다. 그 여인은 회개도 해보았고, 울어도 보았으며 아무리 몸부림쳐도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리심 산에서 제사를 드렸기 때문인가 하고 의심하여,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려야 하는가를 묻게 된 것입니다. "정말 네 죄를 사했느니라"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똑똑하게 듣고 싶었으며,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께 깨끗한 속죄제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사실 인간적인 면으로 생각하면 이제 선지자를 만났으니 나의 소원이 먼저 나오는 것이 순서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형편으로는 좀 안정된 생활을 위해, 좋은 남편이나 한 사람 구해 주세요라고 자기 소원을 아뢸 수도 있었습니다. 또는, 돈이나 다른 어떤 것을 주님께 구할 수 있었지만 그녀는 차원 높은 욕망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배할 곳을 묻는 것은, 어떻게 하면 죄사함을 받을 수 있을까 하는 깊은 뜻이 있는 질문입니다.

여러분은 교회에 나오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물론 건강도 있어야 하고, 사업도 해야 하고, 출세도 해야 하며, 남편도 아내도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여인처럼 구해야 할 가장 중요한 우리의 욕망은 어찌하면 죄사함을 받을 수 있을까, 어찌하면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로 설 수 있을까, 어찌해야 하나님 앞에 정당한 자녀가 될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기도제목이여, 가장 절실한 소원이어야 합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묻는 예배장소는 시온산과 그리심산의 문제입니다.

앞장에서 이미 공부한 대로 주전 720년에 사마리아는 앗수르에 침략을 당해 잡혼정책으로 피가 다 섞여버렸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인지, 이방 사람인지 알 수 없게 되자 남쪽 유대나라로부터 멸시를 당합니다. 북쪽 사마리아와 남쪽 유대는 형제나라로서 왕은 따로 있었지만 종교는 하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늘 예루살렘에서 드리게 되는데, 사마리아 사람들에게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결국 정치가 다르니 종교에도 문제가 있다고 인정하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종교 성향을 막기 위해 그리심산에다가 큰 성전을 지었습니다. 성전을 지어놓고 이제는 예루살렘에 갈 필요가 없고 여기서 예배드리자고 몇 가지 예배할 수 있는 정당성을 만들었습니다.

첫째는 그리심산은 옛날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 앞에 바친 곳입니다. 둘째는 롯이 소돔 사람에 의해 포로 되어 갔을 때 아브라함이 나가 싸워서 이기고 돌아옵니다. 돌아올 때에 영적인 선지자 멜기세덱이 나타났고 아브라함은 십일조를 드리며 제사를 드린 곳이 바로 그리심산입니다. 세째는 모세가 광야를 지나 돌아왔을 때 제일 먼저 예배드린 곳이 그리심산으로써, 이상 세 가지 이유로 정당성을 주장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루살렘으로 예배하러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그리심산에서 예배를 드립니다. 그런데, 어딘가 모르게 마음이 편안치를 못해 고민해오던 중 이 갈등을 오늘 예수님께 내어놓는 것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여기서 예배하라 하고, 당신들은 예루살렘이라 하는데, 어디가 옳습니까? 하고 묻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조금 비약하면, 이것은 미신입니다. 장소의 특수성을 주장하는 것으로 우리말로써는 풍수설입니다. 장소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으니 필자가 평소에 생각했던 우리들의 비합리적인 의식에 대해 잠깐 지적하고 싶습니다. 저는 심방을 잘하지 않는 데 나름대로 이유가 있습니다. 심방은 우리 한국 교회의 미덕 가운데 하나입니다만 심방을 하지 않는 이유중의 하나가 바로 풍수설 때문입니다. 목사님을 모셔다가 예배드리는 것까지는 좋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모두들 바쁜 시대라 심방 약속을 해서 가 보면 주인인 자기는 볼 일 보러 나가고 파출부에게 꼭 자기 집에서 예배드리게 하라고 부탁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는 예배 중에 밖에서 누가 찾으면 나가면서 "목사님 예배드리고 가세요"하고 자기는 먼저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풍수설입니다. 또한 요즘 흔히 볼 수 있는 일로서, 응접실에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다가 예배드리자고 하면 주인은 얼른 안방으로 사람들을 안내합니다. 왜입니까? 극단적으로 이야기하면, 그래야 아들을 낳는다는 풍수설에 속한 것입니다. 장소를 까다롭게 가리려는 것은 미신입니다. 예루살렘이면 어떠하고 그리심산이면 어떻습니까? 안방이면 어떻고 응접실에서 기도하면 어떻습니까? 심지어는, 여기서 기도하면 은혜가 있고 저기서 기도하면 은혜가 없다 하여 산 속으로, 굴속으로 많이들 가고 있습니다. 풍수설 때문입니다. , 한 가지는 특정인에 대한 문제입니다. 특수한 사람이 기도해야 더 잘 들어주실 것 같은 착각들을 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됩니다. 반드시 누가 기도해야 한다는 특정인의 의식은 무당의 생각이요 미신입니다. 그리고, 특정 시간도 문제입니다.

반드시 밤에 기도해야 은혜가 있다고 밤새도록 기도하고 낮에는 자는데, 이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다 미신 적 개념에서 온 것인데, 그것 자체도 잘 모르면서 그냥 행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느냐고 물으면 아무 이론 없이 그저 나쁘다니까 나쁜 것이고 좋은 것이 좋으니까 한다라는 비합리적인 대답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4:22). 여기서 "안다"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유대로 말미암았다, 즉 우리가 믿는 유일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유대 사람으로부터 물려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믿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참 예배란 무엇입니까? 이것은 관례에 의한 것이거나 비합리적이고 비과학적인 것이 아니므로 시간, 장소에 구애될 것이 없습니다. 왜 여기에 모여서 예배하느냐고 어느 특정한 장소가 뜻이 있어 교회를 세운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예배드리면 그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함께 모여서 기도하면 특정한 장소가 문제되지 않습니다. 그리심산이나 예루살렘이 무슨 상관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씀하시기를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4:21)고 때와 장소가 문제가 아님을 말씀하시고 중요한 것은 참 예배할 때가 온다고 하셨습니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4:23-24). 아마 이 말씀은 사마리아 여인이 잘 알아듣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묻지를 않고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아버지께 신령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바로 이 때라고 하신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 즉 예수님과 함께 하는 그 곳이 교회요, 예수님을 통해서 기도하는 그것이 제사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어디든지 그 곳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그것이 진실한 예배라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이 뜻을 이해하든 못하든 우선 받아들였다는 것이 훌륭합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신령하다는 말은 비물질로서, 시간이나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다만 신령한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이 중요하고 진실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신령한 만남과 진실이 있을 때에 비로소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이 말씀을 듣는 순간 완전히 변하여 메시야관이 되살아납니다. "여자가 가로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나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4:25). 본래 들었던 말이 되살아나서 하는 말이긴 하지만 이 말이 나온 것은 놀라운 지혜입니다. 예수를 만나는 가운데 이와 같은 대단한 영적 지식이 생겼다는 말입니다.

이 말을 들으시고 예수님은 "바로 그가 나다"(4:26)라고 감격적으로 자신을 나타내고 계십니다. 이 말을 바꾸면, "지금 이대로가 예배요, 바로 이 때다. 이렇게 예배하는 자를 하나님이 찾으시느니라"고 풀이할 수 있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을 만났고 하나님께 진정한 예배를 드렸습니다. 로마서 12:1 하반절에 보면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즉 합리적 예배를 드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틴 루터는 "하나님으로 하나님 되게 하 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의 생각으로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참 예배입니다. 문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자세가 신령과 진정의 자세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기보다는, 때로는 감정적으로 미신적으로 예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경건하게 정말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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