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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청년아 일어나라(누가복음 7장 1~16절)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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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아 일어나라(누가복음 7116)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허다한 무리가 동행하더니 성문에 가까이 오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그 어미의 독자요 어미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함께 그와 나오거늘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죽었던 자가 일어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미에게 주신대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셨다 하더라.

 

 

예수님께서는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이적을 비롯하여 수많은 병을 고치시는 이적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열병을 낫게 하시는가 하면, 귀신을 내어쫓으셨습니다. 문둥병을 깨끗케 하시고, 중풍병을 고쳐주셨습니다. 당시로는 물을 포도주로 만드는 일이나 문둥병을 고치는 일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놀라운 이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즘에 와서는 인간의 능력으로도 가능한 일이 되었습니다. 열병이나 문둥병을 약으로 고치지 않습니까? 이제는 인간들이 치료할 수 있는 병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더한 병도 고치는 시대가 아닙니까?

오늘의 본문은 인간의 한계를 넘는 위대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흔히 우리는 병자를 위하여 기도를 하거나 약을 쓰거나 하면서 갖은 애를 쓰다가도 일단 숨이 끊어지고 맥박이 멎으면 돌아앉고 맙니다. 우리네 풍속대로 하면 아예 병풍을 쳐서 이승세계와 저승세계로 갈라놓습니다. 더는 손을 쓸 수 없다, 모두 끝났다, 세상을 떠났다 라는 것입니다.

죽어 뻣뻣해진 시신을 붙들고 치료하겠다는 의사도 이제는 없습니다. 엎드리어 기도하는 어리석은 사람도 없습니다. 인간의 한계의 끝입니다.

그 죽은 자가 생전에 어떤 큰 능력을 가지고 있었더라도 죽음과 함께 끝나고 만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십시다. 무덤에 찾아가서 살려달라고 기도하는 사람을 보았습니까? 시신을 살려보겠다고 수술을 하고 약을 쓰는 의사를 보았습니까? 적어도 숨이 붙어 있을 때, 심장이 따뜻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심장이 식고나면 모든 것이 끝납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인간의 한계에 대한 도전을 오늘의 본문에서 보게 됩니다. 한계를 넘어섭니다. 중풍병자를 일으키신 것이 아닙니다.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있던 사람을 향하여 일어나라 하신 것이 아닙니다. 죽은 자를 마치 병자나 고치시듯이 쉽게 살리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유명한쿠오바디스(Quo Vadis)를 쓴 작가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성경을 보면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한심하다고 생각합니다. 예수의 이적을 믿으면서 예수를 추종하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깨우쳐줄 것이라고 마음을 먹습니다. 그러한 생각에서 성경을 연구하기 시작합니다. 예수를 믿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를 믿지 않기 위해서, 예수를 믿고 있는 사람들로 예수를 떠나게 하기 위해서 연구를 한 것입니다. 열심으로 연구하고 마지막에 내린 결론이 무엇이었겠습니까? '예수는 미친 사람이 아니면 하나님의 아들이다'-재미있는 결론입니다. 정신병자가 아니고서야 시체를 향하여 감히 '일어나라'는 소리를 하겠습니까? 저는 그 예수님의 믿음에 깜짝 놀랐습니다. 저는 의심이 많아서 그런지 걱정이 되어 못할 것 같습니다. '일어나라'고 소리쳤는데 일어나지 않으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된다고 해도 저 같으면 안 할 것입니다. 무덤에 찾아가서 "나사로야, 나오너라"라고 소리치시는 예수님이 도시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문자 그대로 정신나간 사람이 아니면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보통사람으로는 안 되는 일입니다. 이성을 가진 인간으로서는 도전할 수 없는 한계입니다. 누구도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죽은 사람을 그저 감기 정도 앓는 사람 보듯 하셨습니다. 조그만치의 의심도 없이 살려내십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생명의 주인 되신다는 계시입니다. 예수님이 생명의 주인이요, 예수님의 신성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계시임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의 사건은 나인 성에서 있었습니다. '나인'이라는 이름의 이 마을은 지금에 와서 '네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이 나인 성은 가버나움에서 25마일 정도 떨어진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적 중에는 예루살렘에서 된 일도 있습니다마는 대부분이 이 가버나움 근방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가버나움의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에 놀라고 있었습니다. 본문이 속한 71절로 10절까지에 나와 있는 바 백부장의 종을 고쳐주신 일도 가버나움에서 있었습니다.

아무튼 예수님께서는 가버나움에서 많은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그 소문이 크게 났습니다. 본문에서 보듯이 제자와 허다한 무리가 동행하였다고 합니다. 충분히 그럴 것도 같습니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일이 있다면 보통 사람들은 아마도 만나기조차 어려울 것입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운집하여 예수님이 가시는대로 모두들 따라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겠다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행하시는 이적을 보겠다는 것입니다. 만나시는 환자마다 고쳐주시는, 장님이 눈을 뜨고 문둥병자가 낫는 그 장면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겠다는 생각입니다. 간혹 그들 가운데는 이 같은 능력을 행하시는 예수님의 얼굴이라고 한번 보겠다고 모인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움직이시는 대로 그 많은 사람들이 우 몰려다닙니다. 당연히 그럴 것입니다. 기적에 흥미가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주위에 모여 예수님과 동행했던 것입니다.

지금, 나인 성문 가까이에서 두 행렬이 마주칩니다. 여러분, 이 장면을 눈을 감고 한번 그려보십시다. 여기에 나인이라고 하는 마을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행렬과 함께 이 마을을 향하여 들어오십니다. 또 하나의 행렬이 마을로부터 밖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이 두 행렬이 동네 어귀에서 마주친 것입니다. 마을로 들어가는 행렬에는 예수님이 계시고 제자들이 있습니다. 그 뒤로 몇십 명, 아니 몇백 명이 될지 모를 사람들이 따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저마다 '저분이 선지자다, 메시야다'하면서 경건한 마음으로 한편으론 두려운 마음으로 예수님의 뒤를 바짝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마을에서 나오고 있는 또 하나의 행렬은 장례 행렬입니다.

과부의 외아들이 죽었습니다. 그 과부가 얼마나 슬퍼하겠습니까? 자신의 일생을 그 외아들에게 걸었는데 그 아들이 죽은 것입니다. 남편이 죽었고 그 아들이 죽었습니다. 목을 놓아 웁니다. 울면서 상여 뒤를 따릅니다. 그 마을의 많은 사람들도 슬픈 낮으로 상여를 따르고 있습니다. 이 두 행렬이 마주친 것입니다. 하나는 생명의 행렬이요 하나는 죽음의 행렬입니다. 하나는 소망의 행렬이요 하나는 절망의 행렬입니다. 하나는 기쁜 자들의 행렬이요 하나는 슬픈 자들의 행렬입니다. 이 두 행렬이 만납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결과적으로 기쁨이 슬픔을 삼켜버렸습니다. 슬픔은 없어지고 기쁨만 남았습니다. 절망이 사라지고 소망만 남았습니다. 어두움과 빛이 만나면서 어두움이 물러갔습니다. 이 얼마나 희한한 장면입니까?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장례식 행렬이 마을을 빠져나간 다음에 예수님께서 이 마을에 들어 오셨더라면 어떻게 되었을 것 같습니까? 이미 끝난 일이 되었겠습니다. '오늘 불쌍한 사람이 하나 죽었는데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살리실 수 있으십니까?'-아무도 예수님께 이러한 질문을 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죽으면 모두 끝나는 것으로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병자를 고치셨다는 소문은 들었어도 죽은 자를 살려내셨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예수님께 간청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반드시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만남의 기회는 참으로 귀합니다. 큰 은총입니다. 지금 이 자리, 여러분과 제가 만나고 있는 이 순간도 큰 축복입니다. 보통의 복이 아닙니다. 여러분에게만이 아니라 제게도 복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만나 복음을 접할 수 있다는 것,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참으로 귀한 것입니다. 일전에 제가 북경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북경에 내리자 마중 나온 사람이 저녁을 먹자고 합니다. 식당에 가서 저녁을 먹자마자 곧바로 차에 태워서는 어디론가 갑니다. 그래서 제가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습니다. 그사람의 대답이 이랬습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목사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도착해보니 정말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강화수이 교회'라는 중국사람들의 교회로 특별히 허락을 받고 모였다고 합니다. 예배도 아니고 부흥회도 아니었습니다.

단지 제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모인 것입니다. 11시간 동안 기차를 타고 온 사람도 있습니다. 그럴진대 제가 그들에게 어떻게 해주어야 하겠습니까? 신상이 위험하건 말건 목사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당연하였습니다. 혼신을 다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다 마쳐도 돌아가는 사람이 없습니다. 밤이 늦었는데도 집으로 돌아가지를 않는 것입니다. 저는 날씨도 덥고 고단한 터라 빨리 호텔로 가서 쉬었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한데 계속 이야기를 해달라는 것입니다. 아무 이야기든 하기만 하라는 것입니다. 제목도 주제도 없이 말씀만 달라고 합니다. 여러분. 만남의 기회가 이토록 중요합니다. 임종이 가까운 분을 찾아가서 만났습니다. 참으로 좋아합디다. 목사님을 만나 뵙고 죽게 되어 더는 소원이 없다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함께 기도를 드리고 돌아왔는데 그 다음날 돌아가셨습니다.

여러분, 만난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우리가 예수님 믿는 것은 언젠가 내가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이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주는 자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행렬과 장례식 행렬이 만나게 된 것 자체가 큰 은혜라는 말입니다. 축복입니다. 우리는 때로 이 만남의 은혜를 소홀히 여깁니다. 우연한 일인 양 당연한 일인 양 생각하기 쉽습니다마는 그렇지 않습니다. 얼마나 소중한 만남의 관계인가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두 행렬이 공교롭게 마주친 것도 큰 은혜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만나게 된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죽은 자가 살아납니다. 우선 '부활'의 의미를 확실히 알고 넘어가십시다. 참부활이란 엄격한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그 사건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여러분, 부활을 어떻게 정의하여야 할 것 같습니까? 톨스토이의 작품 가운데부활이 있습니다마는 거기에서의 부활은 'immortality'-영혼불멸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리 구석구석 읽어보아도 부활이 없습니다. 마음은 부활했는데 현실로는 돌아갈 수 없습니다. 옛날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속사람, 곧 정신의 부활은 있었는데 육체의 부활이 없었습니다. 참부활은 보통의 일이 아닙니다.

나인 성 과부의 외아들이 죽었다 살아났습니다. 이것이 부활입니까? 잠깐 죽었다 다시 살아난 것일 뿐 부활이 아닙니다. 나사로가 죽었다가 살아난 것도 성경에서 말씀하는 진정한 의미의 부활이 아닙니다. 죽었다 다시 살아나는, 그런 부활이라면 저는 안하고 말겠습니다. 한 번 죽는 것도 얼마나 힘이 듭니까? 그런데 한 번 더 죽으려고 살아납니까? 저 같으면 한 번 죽고 말 것입니다. 살아나는 것이 능사가 아닙니다. 나사로처럼 살 바에야 그 때 그냥 죽었어야 합니다. 저에게 예수님이 어떤 예수님입니까? 죽음 가운데서 살려내신 예수님입니다. 그런 예수님이 재판을 받으시고 십자가를 지시는데 아무런 말도 행동도 없습니다.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십자가를 져야 했습니까? 최소한 나사로가 질 수 있어야 했습니다. 보통으로 신세를 진 나사로가 아닙니다. 그 은혜를 갚을 줄 모르는 인간이 살아서 무엇하겠습니까? 제 생각으로는 그렇습니다. 애꿎은 장례비용만 두 번이나 나간 셈입니다. 장례비용도 엄청난 것이 사실입니다.

죽는 것도 그러합니다. 죽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듭니까? 그런데 두 번씩 죽어야 할 것이 있습니까? 살아난다는 것만 능사가 아닙니다. 간혹 죽을 뻔하다가 살았다고 고마워합니다마는 그냥 죽었어야 좋았을 사람이 많습니다. 아예 죽었으면 좋았을 걸 살아서 골치아파졌습니다. 냉정하게 따져보십시다. 왜 살리십니까? 하늘나라 갔으면 잘 끝난 것입니다. 다시 살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진정한 의미의 부활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그것만이 부활입니다. 그 외에는 부활이랄 수 없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신 부활의 깊은 의의를 우리가 말로 다 설명하지는 못하겠습니다마는 사건은 분명합니다. 예수님이 죽으셨다가 사흘만에 살아나신 그 부활, 그 부활하신 몸, 영원히 죽지 않을 몸입니다. 육신도 영도 가진 완전한 몸으로 변화된 바로 그것이 부활입니다.

또한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이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모름지기 이 두 사건만이 부활입니다. 그리스도만이 부활이요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다음으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이 다시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부활 그리스도처럼 부활할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부활입니다.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사건은 그 부활에 대한 상징이요, 그 참된 부활에 대한 예표적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 사람의 죽은 자를 살리십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은 죽자마자 예수님께서 찾아가시어 바로 일으키셨습니다. 죽은 지 얼마 되었을 때에 일으키셨는지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마는 몇 시간 후에 바로 일으키셨습니다. 죽자마자 병상에서 바로 일으키신 이것도 또 하나의 부활인 것입니다. 죽었다가 살아난 역사입니다. 다음으로 오늘의 본문인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은 장례식 하는 도중에 관속에서 일어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제일 큰 사건, 죽어 이미 장사된 나사로를 무덤으로부터 불러내십니다. "나사로야, 나오라"하시니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가 제 발로 무덤을 걸어나옵니다. 이 세 사건을 비교하면 아주 재미있는 점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은 병상에서, 한 사람은 관 속에서, 한 사람은 무덤에서 각각 살려내셨습니다. 시간적으로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기적은 일방적이며 창조적인 사건입니다. 아무도 이러한 일이 있을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 더구나 예수님의 제자들까지도 살려주시라고 부탁하지 않았습니다. 죽은 자의 어머니도 예수님께 아들을 살려달라고 간청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죽었기 때문입니다. 숨이 막 넘어가려 할 때에 만났더라면 분명히 간청했을 법도 합니다마는 이미 죽어 장례를 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일행이 지나가고 있습니다마는, 예수님이 능력을 가지신 분임을 알고 있습니다마는 부탁드릴 엄두를 못 내는 것입니다. 죽었다는 사실은 차한에 부제입니다. 예외라고 생각했기에 예수님께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거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요청한 바도 구한 바도 없는데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예수님 앞에는 귀신들린 자도, 병든 자도, 죽은 자조차도 가까이할 수가 없었습니다. 죽은 자는 살리시고, 병자는 낫게 하시고, 장님은 눈뜨게 하시고, 문둥병자는 깨끗케 하셨습니다. 예수님 앞에는 어두운 권세가 용납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빛이요, 그 빛이 세상에 와 계시는 동안에는 그가 가시는 길마다 어두움이 모두 물러가야 합니다. 어두움에 속한 것들은 다 물러가야 합니다. 귀신들린 자는 정신을 찾아야 하고 장님은 눈을 떠야 합니다. 귀머거리는 귀가 열려야만 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능력이요 말씀의 역사인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는 마치 환자를 고치시는 듯이 죽은 자를 살리시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여기에 예수님의 자기 계시가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첫째로, 동정하시는 분입니다. 불쌍히 여기시는 분입니다.

헬라 원문에서는 '스프랑크니조마이'라고 표현됩니다. '스프랑크논'이 심장 혹은 심정입니다. '스프랑크니조마이''심장이 움직인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가슴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가득 차 가슴이 뛰는 것입니다. 바로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말합니다. 신학적으로 말하면 수직적인 사랑이 그것입니다.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기는 것처럼 아무런 조건이 없는 것입니다. 수평적인 사랑은 조건도 많고 가리는 것도 많습니다. 한마디로 문제가 많습니다. 반면에 수직적인 사랑, 곧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사랑은 그러하지 않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데에 무슨 조건이 있습니까? 잘해도 사랑하고 잘못해도 사랑하고, 건강해도 사랑하고, 병들어도 사랑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동안 긍휼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마음속에 참으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일어나는 순간 그것이 곧 능력으로 나타납니다. 우리가 불쌍히 여기는 것에는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도와주고는 싶지만 힘이 없습니다. 답답하기 그지없습니다. 어머니의 사랑이 얼마나 고귀합니까? 이 세상의 사랑을 통틀어 가장 고귀한 사랑입니다 마는 별 도리가 없습니다.

마음뿐이지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앓고 있는 자식을 보면 대신 앓고 싶고, 죽어 가는 자식을 보면 대신 죽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그렇다고 내가 죽어 저가 살 수 있는 문제입니까? 우리에게는 지혜도 없고 능력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 곧 하나님의 마음속에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기는 순간 사랑의 능력이 나타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도 의인의 마음속에 긍휼이 있으면 그 긍휼이 능력으로 나타납니다. 기도할 때에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가슴이 뜨거워지도록 간절히 기도하면 능력이 나타납니다. 분명히 그러합니다마는 그런 마음이 생기지 않으면 그 기도는 겉돌고 맙니다. 기도의 응답이 없는 것을 우리는 많이 경험하고 있습니다. 환자들을 방문해보아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어떤 때에는 병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가슴이 뜨거워지면서 정말 심장이 움직이는 것을 느낍니다. 그러면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간절한 기도를 드리게 됩니다. 마음에 자신이 있습니다. 꼭 낫는다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런데 불쌍히 여기기는커녕 앉아서 남 원망이나 하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면 불쌍히 여기지 않습니다. 좀더 아파야 정신을 차리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무엇인가 걸린 것이 있습니다. 그런 때에는 기도를 해도 능력이 없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실제가 그러합니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가 위로 자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울지 말라"하고 과부를 위로하십니다. 성경 여러 곳을 보아도 과부나 고아에게는 절대적인 긍휼을 베푸십니다. 이유가 없습니다. 그가 의인이냐 죄인이냐 묻지 않으십니다. 과부와 고아는 불쌍히 여기라, 과부와 고아는 제사장과 같이 십일조를 먹을 특권이 있다, 과부와 고아는 절대적으로 보호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직결되는 대상입니다. 과부와 고아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 그들을 건드리면 하나님께서 용서하시지 않으십니다. 오늘 여기에서 그들을 만나십니다. 외아들을 잃고 슬픔으로 가득 차 있는 과부를 울지 말라 위로하십니다. 그리고는 상여에 손을 대십니다. 멀찍이서 말씀으로 하셔도 될 일을 직접 오셔서 관에 손을 대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인생무상이니 어쩌겠느냐' '자식 없는 셈치고 혼자 살아가도록 힘쓰라'-적당한 말로 위로하실 수도 있었습니다마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진정한 해결자가 되어주셨습니다. 말로 하시는 위로가 아니라 행동으로 하시는 위로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셔서 그 어머니에게 되돌려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해결입니다. 살리지도 못하면서 말로나 위로한답시고 해보아야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것이 무슨 위로가 되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진정한 해결자가 되어주셨습니다. 근본적으로 해결해 주셨습니다.

셋째로, 권세자로 나타나십니다. 동정만이 아닙니다. 장례 행렬을 멈추게 하십니다. 반발이 있을 법도 했습니다마는 예수님의 그 권세에 복종합니다. '당신이 누군데 멈추게 하는 거요?' 낯선 사람이 왜 남의 장례를 방해하느냐고 대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권세 앞에 감히 묻지를 못합니다. 이유는 모릅니다마는 멈추라시니 무조건 멈춥니다. 가까이 오셔서 관에 손을 대시자 상여가 멈춥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권세를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대화 없이 단독으로 명령을 하십니다. '죽은 아들이 몇 살이냐?' '얼마나 슬프냐?' '네 소원이 무엇이냐?'-물어보나마나입니다. 창조적인 사건이기에 대화 없이 명령하십니다. 여기에 말씀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는 것처럼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하니 그 순간에 일어납니다. 말씀은 능력입니다. 이것이 오늘의 본문의 주제입니다. 예수님은 산 자에게만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죽은 자를 향해서도 말씀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때로는 죽은 자와 같은 사람에게도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으로서는 전혀 어쩔 수 없는 사람에게도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능력으로 나타납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굉장한 말씀입니다. 말씀 자체가 능력입니다. 기적이 나타납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예수, 생명의 주인 됨을 계시하시는 것이요, 죽음을 하나의 단순한 병, 곧 생명의 과정으로 보시는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의식을 잘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시면서도 많은 고난을 당하십니다. 그 많은 고난을 당하십니다. 그 많은 비난과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능력을 가지신 분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여기에 참사랑의 계시가 있고 생명의 신비가 있습니다. 그 자원적인 죽음, 선택적인 죽음에 깊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사건이 있은 후, 모두가 두려워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 권세 앞에 절대적으로 두려워하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바가 무엇입니까? 이적을 통하여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경건과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원하십니다. 이것이 최종 목적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운 마음으로 섬기도록, 그러한 자세로 경건하게 살아가기를 하나님은 원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보십시다. 병드는 것도 그 때문이요 죽는 것도 그 때문이요 사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살아도 죽어도, 실패해도 성공해도-이 많은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은 무엇을 원하십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경건하게 살아가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오늘의 본문에는 특별히 귀한 말씀이 하나 더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셨다(16)." 자기 백성을 돌아보셨다고 저들이 기뻐하고 있습니다. 돌아보셨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빵이 생긴 것입니까? 나라가 독립하게 된 것입니까? 아닙니다. 오직 하나, 우리 가운데 선지자가 오셨다,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귀한 종이 살아 역사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바로 이 백성을 사랑하시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내게 빵이 없어도, 내가 큰 성공을 못해도 좋은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말씀이 계시고 주님이 살아 역사 하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이 백성을 돌아보신다는 증거입니다. 신앙의 바른 자세가 그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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