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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다 떨어진 청년(사도행전 20:1~12)
소요가 그치매 바울이 제자들을 불러 권한 후에 작별하고 떠나 마게도냐로 가나리 그 지경으로 다녀가며 여러 말로 제자들에게 권하고 헬라에 이르러 거기 석 달을 있다가 배 타고 수리아로 가고자 할 그때에 유대인들이 자기를 해하려고 공모하므로 마게도냐로 다녀 돌아가기를 작정하니 아시아까지 함께 가는 자는 베뢰아사람 부로의 아들 소바더와 데살로니가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와 더베사람 가이오와 및 디모데와 아시아사람 두기고와 드로비모라 그들은 먼저 가서 드로아에서 우리를 기다리더라 우리는 무교절 후에 빌립보에서 배로 떠나 닷새만에 드로아에 있는 그들에게 가서 이레를 머무니라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저희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우리의 모인 윗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는데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앉았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층누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보니 죽었는지라 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저에게 있다 하고 올라가 떡을 떼어먹고 오래 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나니라 사람들이 살아난 아이를 데리고 와서 위로를 적지 않게 받았더라
사도 바울의 전도여행 중 아마도 가장 클라이맥스(climax)라고 생각할 수 있는 곳이 에베소가 아니었는가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서 무려 3년 동안이나 머물면서 복음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에서 있은 사건에 대해서는 몇 가지밖에 기록되지 않고 있으나, 실제로는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었겠습니까? 또 3년 동안 머물러야 할 이유가 충분했기 때문에 그렇게 긴 시간 동안 복음을 전했을 것입니다. 특별히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 있으면서 편지도 여러 편 씁니다. 여기에도 상당히 중요한 의미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제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전에 그가 전도해서 교회를 세웠던 몇 곳에 가서 권면하고, 그리고 나서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한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하려는 특별한 이유가 하나 더 있는데, 그것은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 이것이 마지막 여행이라고 하는 심증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말씀을 했는지 안 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바울의 생애에 있어서는 마지막 여행입니다. 그러고 보면 바울은 어느 곳에 가든지 심각했을 것입니다. 누구를 만나든지 마치 유언할 때와 같이 아주 귀한 시간을 보내고 귀한 말씀을 전하면서 순방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교회를 그저 한번 세워놓고 누구에게 맡기고 그냥 뒤돌아선 게 아닙니다. 그는 자기가 세운 교회에 대하여 두 가지로 배려했습니다.
하나는 그 교회를 다시 순방했습니다. 또 하나는 그 교회를 향하여 편지를 쓰기도 했습니다. follow up입니다. 후속 결과가 아름답게 되도록 계속적으로 마음과 정성과 기도와 권면으로 돌아보았습니다. 이 마음 또한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나 해놓고는 '하나님께 맡깁니다'하고 돌아서면 그만이다―그렇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복음으로 시작했으면 이제는 양육할 책임이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 앞에 갈 때까지 계속해서 기도하고 염려하고 권면하고 협력하고 돌아볼 책임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그러나 그 후의 의무와 해야 할 일을 전혀 하지 않는, 방임적이고 무관심한 사도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이미 세운 교회를 종종 다시 돌아보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간단하게 몇 절로 나타나 있습니다만 자세히 보면 근 일 년 동안에 된 이야기입니다. 또 이것이 사도 바울에게는 마지막 기회였습니다. 그래서 꼭 그들에게 필요한 말씀을 전하고, 권면하고, 위로하고, 또한 저들의 믿음이 굳게 서도록 가르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또 오늘의 본문에 보면 바울이 배를 타고 수리아로 가려고 했는데 바울에게 적대 행위를 하는 사람들의 음모가 있다는 말을 듣고, 배를 타지 않고 다시 육지로 돌아가 얼마간의 시간을 보냈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서 많은 학자들이 얘기를 합니다. 이 때가 유월절이 가까웠기에 사방에 흩어져 있던 많은 유대인들이 배를 타고 지금 예루살렘에 유월절 순례의 길을 가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배를 타게 되면 그 배에는 많은 유대인들이 있었을 것이고 그들 가운데에는 바울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는 사람들이 함께 탔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배를 타지 않고 좀더 기다렸다가 떠나고자 합니다. 그들은 끈질기게 바울을 괴롭혔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에서 바울은 일생을 두고 자기를 괴롭힌 사람이 있다는 얘기를 합니다. 이름까지 대면서 아무개가 나를 괴롭혔느니라, 합니다. 위대한 사도 바울이지만 그도 이렇게 무서워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기를 괴롭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무릅쓰고 모든 고통과 핍박을 겪으면서 일생동안 꾸준히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순탄하게, 무사하게, 평탄하게―모든 일이 그렇게 된 것이 아니예요. 많은 시련과 어려움 속에서 복음을 전하는데, 특별히 외적인 핍박과 정치적인 핍박이 아닌, 특별히 하나님을 섬긴다는 유대사람들의 끈질긴 내적 핍박이 그를 어지간히 괴롭혔다는 것을 여기서 엿볼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바울은 여러 일행들과 함께 늘 동행을 합니다. 설교 여행 처음에 그는 바나바와 함께 다녔고, 그 다음에는 실라와 함께였습니다.
그 다음에 디모데, 또 그 다음에는 누가와 같이 다녔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에 보니 바울과 여러 사람이 함께 합니다. 그들과 잠시 헤어졌다 만났다 합니다만 거의 그는 전도 여행을 혼자 다니지 않았습니다. 꼭 수행원이 있었습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우선, 바울은 그렇게 독선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또 선교는 자기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도 생각지 않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의 협력을 구했습니다. 나 혼자서 할 수 있다, 누가 필요하냐, 그런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할 일이 있고 다른 사람이 도와야 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 자신이 할 일이 있고 바나바가 할 일이 있고, 또 바울 자신이 할 일이 있고 디모데가 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협력할 줄도 알고, 협력을 구할 줄도 아는 사람입니다. 남을 도울 줄도 알고, 도움을 받을 줄도 아는 사람이예요.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때때로 어떤 사람을 보면 독불장군이에요. 혼자서만 해요. 자기만 하고 아무도 필요 없어요. 그것은 잘못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전도 여행을 혼자 하지 않고 여러 사람의 협력을 구하면서 합동하여 선을 이루는 데에 그의 인간됨과 전도 전략이 있었다는 것을 함께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 7절로 12절에 드라마틱한 사건이 하나 나옵니다. 한 청년이 창가에서 졸다가 떨어져 죽었습니다. 예나 오늘이나 조는 것은 문제입니다. 이것은 드로아에서 벌어진 사건입니다. 그 정황을 자세히 살펴보면 더욱 의미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 드로아에서 꼭 한 주일 동안을 유하고 이제 내일 아침에 떠나려고 합니다. 그러니 지금이 마지막 시간입니다. 본문은 바로 그 시간에 있는 이야기입니다. 7절에 "안식 후 첫날"이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이 날은 곧 주일날을 말하는 것입니다. 유대사람들은 본래 안식일을 지켰습니다. 안식 후 첫날이면 안식일 다음날입니다. 자, 여기서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안식일을 지키던 사람들의 풍속이 벌써 주일 지키는 날로 바뀌고 있습니다. 왜 주일을 지켰느냐, 왜 안식일 보다 주일을 택했느냐―유대사람들로서는 안식일이 생명같이 중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식일을 떠나서 주일을 지켰어요. 이것은 예수님의 부활 때문입니다. 주일날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고로 이 날이 더 중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안식 후 첫날인 주일날은 꼭 모여야 했습니다. 그밖에도 여러 의미가 있습니다만, 어느 사이에 유대사람들의 풍속이 이렇게 바뀝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부활을 역사적으로 증명하는, 증거의 하나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사건이 아니고는 이 엄청난 사건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본문을 보니, 자연스럽게 안식 후 첫날에 모였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행사가 결국은 안식일을 주일날로 바꾸어 지키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유대사람들은 날짜를 계산할 때에 일몰에서 시작해서 일몰로 끝나는 것으로 합니다. 그런데 로마사람들은 우리네와 같이 자정에서 자정까지를 하루로 계산합니다.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유대사람들의 날짜 계산법을 따르지 않고 로마사람의 것을 따라서 오늘의 본문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7절)"------이것은 애찬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아가페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또 공동 식사를 말씀함이며 동시에 성찬 예식을 말씀함입니다. 이에 관한 전설로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모두가 다 어려운 처지에 있었기 때문에 모일 때마다 이렇게 사랑으로 식사를 나누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정말로 기도하면서 성찬 예식을 하는, 그런 의미의 아가페 모임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 성찬은 눈으로 보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들은 모일 때마다 떡을 떼고 성찬 예식을 행한 것입니다.
그 다음에 오늘의 본문은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7절)"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그 날의 집회가 송별회와 같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뜻을 잘 모릅니다. 그러나 바울만은 알고 있습니다. 이게 마지막 시간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오늘 이 설교를 하고 나는 떠날 것이고, 그러면 너희는 다시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는 말을 했을 줄로 압니다. 그도 그럴 것이 20장 38절에 보면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을 인하여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니라"라고 나옵니다. 에베소교회 장로들에게 '다시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하는 말을 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드로아에서도 바울이 이 말을 했으리라고 짐작이 됩니다.
아주 심각한 시간입니다. 단순한 송별회가 아니라 바울의 입장에서는 유언을 한 것입니다. 세상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당부의 말씀을 남기는 시간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렇게 심각한 말씀을 하고 있는데도 듣는 사람들은 그렇게 심각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얘기가 예수님의 생애에도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도 잘 아시는 대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지시기 전날 밤에 성만찬 예식을 행하십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3장에서 17장에 이르기까지 무려 5장에 걸쳐서 긴 말씀을 하십니다. 얼마나 중요한 시간입니까? 그런데 제자들이 그렇게 중요하게 듣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내가 십자가를 지리라, 하시는 귀한 말씀도, 그리고 당부의 말씀을 들었음에도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갔을 때, 그 중요한 시간에 쿨쿨 잠을 자지 않았습니까? 영 시원치 않은 사람들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심각한 말씀을 심각하게 받지 못했다는 얘기지요. 마지막 시간에 유언하시듯 하시는 말씀인데도 불구하고, 그 뜨거운 가슴으로 말씀하시는 것을 뜨겁게 받지 못했다는 것이예요. 그러니까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시간에 저들은 자고 있었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늘의 본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은 심각하게 이게 마지막이다, 다시는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하면서 한마디 한마디를 아주 신중하게 유언처럼 말씀하고 있는데 듣는 사람은 그렇게 듣지 못했다는 것이예요. 한번 상상을 해보세요.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모여 예배를 드립니다. 오늘 이 시간에 여기에 나왔지마는 다음 시간에는 못나올 사람이 있다면 이 얼마나 중요한 시간이겠습니까? 오늘이 나의 마지막날이라면 이 한 순간이 얼마나 중요한 시간이겠습니까? 이래도 졸겠습니까?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또한 오늘의 본문은 "강론할새(7절)"라고 말씀합니다. 설교가 조금 길어졌어요. 바울에게도 잘못이 있어요. 설교가 너무 길면 안되는데요.
어쨌든 마지막 시간이니까 좀 길어졌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강론'을 '디아레고마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설교를 뜻합니다. 이야기가 아니고 설교예요.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그냥 좌담하듯이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주 심각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듣는 사람은 이 말씀을 정신차려 듣지 못했다는 것이지요. 또 "윗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는데(8절)"―환하게 불을 켜놓고 밤늦게까지 사도 바울이 설교를 계속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유두고하는 청년이 있었다고 합니다. 역사가들의 말에 의하면 '유두고'라는 이름은 그 성격으로 보아 노예의 이름이라고 합니다. 윌리암 바클레이는 유두고는 노예일 것이라고 단정합니다. 그렇다면 하루종일 시중을 들었을 것입니다. 하루종일 피곤하게 일했으니 저녁에 졸리기도 했을 것입니다. 이해가 되요. 뿐만 아니라 유두고가 "창에 걸터앉았다가(9절)"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모여 앉았으니 그 시중을 다 들다가 맨 마지막에 왔습니다. 그러니까 맨 뒤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저 멀리에 앉았다는 얘기가 됩니다. 결론은 피곤해서, 또 사람들이 많아서, 그리고 밀려서 뒤에 앉았다가 졸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더욱 중요한 것은 노예가 함께 예배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 점에 우리가 착안해야 합니다. 어디에 앉았든 간에 노예도 함께 이 자리에 앉았어요. 주인과 노예가 함께 앉아서 같은 하나님 앞에 같은 사도 바울을 통해서 말씀을 듣는 예배 시간이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왜 졸았을까―몇 가지 이유가 있어요. 첫째는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했어요. 바울이 '자, 이것은 마지막 시간입니다, 당신들은 다시 내 얼굴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육신으로는 보지 못하고 하늘나라에서나 만나게 될 것입니다'하는 내용의 말씀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또 하나, 말씀의 뜻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어요. 말씀에 심취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뭔가 지금 딴 생각을 많이 하고 있어요. 말씀 한마디 한마디를 깊이 들어야 하는데 그래서 바로 듣지 못했습니다. 우리도 예배시간에 서론부터 결론까지 제대로 다 들어야 합니다. 빼놓을 말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졸다가 '결론만 들으면 되지'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똑똑한 척하고 서론만 듣고 '알았어, 다 알았어' 합니다. 다 아는 척해요. 또, 안 들어요. 그리고 예화만 듣는 사람들이 참 많아요. 다시 말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따라가면서 계속 다 듣는 것이 아니라 중간에 몇 마디만 듣고 마는 사람이 있어요. 이런 사람은 졸아요. 문맥이 이어지지 않으니까 심취될 수가 없는 거예요. 모름지기 말씀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 들어야 되는 것이예요. 또 한마디도 빠뜨리지 말고 다 듣고 나가야 끝에 가서 결론을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간에 뚝 잘라 가지고 들으니까 못 알아들어요. 안다고 해도 피상적으로 아는 것이지 그 깊은 논리를 이해할 수가 없어요. 대개 보니까 결론만 들으려고 하는 사람이 졸아요.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아무튼 유두고는 말씀에 심취하지 못했습니다.
또 하나는 피곤했기 때문입니다. 역시 피곤은 문제입니다. 졸음이라는 것은 정말 참기 어렵습니다. 조는 것, 하면 생각나는 것이 있습니다.
제가 군대에서 복무할 때에 적지를 밤새껏 돌아다닌 적이 있었습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깜깜한 밤이지만 불도 안 밝히고 다니니까 행렬을 놓치기 쉽지 않습니까? 그래서 줄을 늘어뜨려서 다들 그것을 붙잡고 다녔습니다. 그 줄을 잡은 채 밤새껏 졸았어요. 어디 갔다왔는지 전혀 몰라요. 눈감고 한바퀴 빙 돌아다닌 것입니다. 졸음이라는 것이 참 무섭구나 싶었습니다. 정말 피곤하고 졸음이 심하게 올 때에는 누구 할 것 없이 참기 어렵습니다. 본문의 유두고도 노예로서 하루종일 일했으니 무척 피곤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오늘의 성경을 보십시오. "깊이 졸더니(9절)" 그리고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9절)"라고 합니다. 말씀에 이런 흔적이 있어요. 유두고가 졸음을 이기려고 무척 애를 썼어요. 꼬집어도 보고, 때려도 보고, 머리를 흔들어도 보고, 별짓을 다 해본 것 같아요. 그런데 졸음을 이기는 방법을 잘못 택했어요. 졸리거든 좀더 앞으로 나가서 앉으면 해결이 될 것을, 그만 뒤로 물러섰어요. 그리고 밖에서 들어오는 바람을 쐬면서 좀 시원하게 있겠다고 걸터앉았습니다. 그러다가 떨어진 것이지요. 처음부터 바깥바람을 쐬면서 졸음을 이겨보려고 한 모양인데, 결국은 이것 때문에 떨어지게 되었어요. 다시 말하면 좀더 적극적 방법을 취하지 않고 소극적 방법을 취했다는 것이예요. 또 몸이 걸터앉았다지만 사실은 마음도 걸터앉은 거예요. 유두고가 어땠을 것 같습니까? 걸터앉아서 이쪽도 보고 저쪽도 보고, 별빛도 보고 바울도 보고, 이랬다는 말이예요. 곁눈을 판 것이 잘못이에요. 집중해야 졸지 않을 수 있는데, 먼 산도 한번 바라보고 바울의 말씀을 듣다가 바깥의 소가 '음메'하는 소리도 듣고…… 이러면서 걸터앉아 있었다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이 자리에 앉기는 했지만 우리의 몸이 여기에 있듯이 우리의 마음도 있고, 생각도 있고, 눈도 있어서 집중적으로 보고 집중적으로 향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앉아 가지고 집 생각 했다가 직장생각 했다가, 오늘 있었던 무슨 일 생각했다가…… 이렇게 생각이 흩어지면 졸게 되어 있습니다. 틀림없습니다. 사실은 집중(concentration)하는 것도 훈련입니다. 지금은 저도 나이가 들고 보니까 책을 읽다 말고 졸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젊었을 때에는 책을 보면서 조는 사람을 제가 멸시했습니다. 도대체 어떤 정신으로 보기에 책을 보면서 조는가 했습니다. 저는 그렇게 해본 적이 없거든요. 책을 보면 거기에 심취되면서 점점 정신이 또랑또랑해지는 것인데, 도대체 어떻게 책을 보기에 졸고 앉았나, 그런 정신을 가지고 오늘 같은 세상에 살아남을 수 있겠느냐, 했습니다. 그것은 나쁘다고 저는 아주 정죄 했어요. 그런데 저도 나이 들면서 자꾸 졸립디다. 그래서 옛날과는 달리 지금은 남을 비판하지 않습니다. 아무튼 유두고는 집중하지 못했어요. 산만했어요. 생각이 어지러웠어요. 그렇게 되면 졸게 되어 있는 거예요.
우스운 얘기입니다만 일본의 전도사 미요시라는 분이 어느 날 미국 선교사를 만났습니다. 원이라고 하는 이 미국 선교사가 미요시 전도사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원 선교사가 미요시에게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사도행전 20장 7절로 12절을 읽어보십시오."바로 오늘의 본문입니다. 미요시 전도사가 읽어본즉 유두고가 졸다 떨어진 얘기가 나옵니다. 그래서 "하필이면 왜 여기를 보라고 합니까?"하고 물었더니 원 선교사가 이런 대답을 합니다. "당신이 나아가서 전도할 때에 조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설교하십시오. 위대한 사도 바울이 설교할 때에도 조는 사람이 있었는데 하물며 우리가 설교할 때이겠습니까? 그러나 조는 사람이 있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미요시 전도사에게는 이 충고가 큰 귀감이 되었다고 합니다.
옛날에 평양 산정현교회에서 목회 하시던 송창근 목사님이라고 있습니다. 한국교회사에 나오는 유명한 분입니다. 여담이지만 이 평양 산정현교회에서 많은 명사가 나왔습니다. 또 장로님 가운데에도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고, 상당히 저명한 인물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어쨌든 송 목사님이 어느 날 설교를 하면서 보니까 사회적으로 아주 저명한 아무개 장로님이 꾸벅꾸벅 졸고 있었습니다. 송 목사님은 당장에 말했습니다. "장로님,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 예배당 세 바퀴만 돌고 들어오십시오." 그러자 그 장로님, 벌떡 정신차려 일어나 가지고 군소리 없이 나가서 정말 예배당 세 바퀴를 돌고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깊이 회개하는 것이었습니다. 참, 목사님도 대단하고 장로님도 훌륭한 분입니다. 존다고 하는 것, 참 맹랑한 노릇입니다.
더 우스운 얘기가 하나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부흥회를 인도하는데, 예수님께서 계신 곳에 대한 설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장로님이 꾸벅꾸벅 좁니다. 그래, 목사님이 "장로님, 예수님께서 어디에 계십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러니까 장로님이 대답하기를 "우편국에 계십니다"합니다. 옛날에 우체국을 우편국이라고 했습니다. 사도행전에 '하나님 우편에 계시고……'하는 부분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엉겁결에 "우편국에 계십니다"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여러분, 졸다보면 무슨 소리를 못하겠습니까?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우리는 정신을 집중해야 합니다. 유두고 같은 사람이 돼서는 안됩니다. 피곤한 것도 사실이요, 노예인 것도 사실입니다. 다 인정할 수 있어요. 그러나 사도 바울이 말씀하는 지금 이 시간이 얼마나 중요한 시간인지를 생각해보세요. 졸릴 수 있는 상황입니까?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면 그렇게 졸렸겠습니까? 도대체 걸터앉아서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까? 가끔 이런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모임에 참석했는데 더욱이 식사를 겸할 때에 보면 대개는 사람들이 테이블마다 둥그렇게 둘러앉습니다. 그래 절반은 이쪽을 향하고, 절반은 저쪽을 향하게 됩니다. 저는 그런 것을 보고 못 참습니다. "의자를 돌려놓으세요. 저는 사람들의 뒤통수를 보고 설교할 생각은 없습니다"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마음과 정신을 꼭꼭 모으세요. 그리고 가만히 보면 설교들을 때에 꼭 남의 뒤에서 자기를 가리고 앉는 사람이 있어요. 무슨 심사로 그렇게 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제가 보기에는 조금만 움직이면 잘 보일 것 같은데 그렇게 딱 숨어 앉았어요. 아마도 편리할 것 같아서 그러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보세요. 그런 마음이 걸터앉는 마음입니다. 이쪽 보는 것뿐만 아니라 이쪽에 잘 보이도록 앉을 것입니다. 우리가 깨끗하게 face to face, 얼굴과 얼굴을 마주해야 됩니다. 그리고 집중해야 됩니다. 눈도 집중하고, 귀도 집중하고, 생각도 집중하고, 그래서 졸음이 물러가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한층 더 적극적인 방법을 취하지 않고 어디에 물러나 걸터앉으면 떨어집니다. 떨어질 수밖에 없어요.
오늘의 본문은 유두고가 죽었다고 합니다. 의사인 누가가 들여다보고 죽었다 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인즉 사도 바울은 딱 가서 보고 기도하더니 유두고는 안 죽었다, 살아날 것이다, 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대로 설교를 계속합니다. 그 침착성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 사람 죽고 살고…… 그것이 중요하지 않아요. 죽었으면 죽은 것이고, 살았으면 산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을 가만히 보니 사도 바울은 그런 사실에 대해서 별로 놀라지 않고 있어요. 중요한 것은 말씀 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태연하게 말씀을 다 전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유두고가 살아났습니다. 그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크게 위로를 얻었다고 본문은 말씀합니다. 사실이 그렇지 않습니까? 아무리 실수로 떨어졌기로니 예배드리다가 사람이 떨어져 죽었다, 하면 아무래도 은혜가 안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다시 살아남으로 인해서 오히려 많은 사람이 위로를 얻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시간에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조는 교인도 많고 조는 믿음도 있습니다. 조는 신앙도 있어요. 이것은 언젠가 떨어질 위험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신앙생활 함에 있어서 좀더 간절하게 주님 말씀대로 깨어 기도하는 성도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자랄 때에 출석하던 시골 교회에는 강대상 위에 십자가가 없었습니다. 옛날에는 십자가를 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위에 커다란 글씨가 씌어 있었습니다. "깨어 기도하라." 그것만 몇십 년 동안 그대로 있었습니다. 누가 써놓았는지는 모릅니다만 예배당 전면에 씌어 있던 "깨어 기도하라"라는 말씀보다 더 중요한 말씀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졸지 말고 깨어 기도하라."
베드로가 왜 예수를 모른다고 하게 됩니까? 졸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깨어 기도하라"하셨을 때에 깨어 기도했으면 그가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을 수 있었어요.
오늘도 문제가 있다면 조는 것입니다. 생각부터 졸고 있어요. 그 태도가 조는 태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험을 이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좀더 확실한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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