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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이적 첫 능력(요한복음 2장 1~11절)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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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이적 첫 능력(요한복음 2111)

 

사흘 되던 날에 갈릴리 가나에 혼인이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인에 청함을 받았더니 포도주가 모자란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그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거기 유대인의 결례를 따라 두세 통 드는 돌 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구까지 채우니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앞서 말씀 드린대로, 같은 사건을 두고도 그 사건에 대한 이해(理解)는 다릅니다. 그 사건에 대한 이해가 깊지 못할 때에 그 사건은 이적(異蹟)입니다. 초자연적인 사건입니다. 그 사건의 좀더 깊은 원인을 깨닫게 되면 그 사건을 능력이라고 말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다 그 사건 속에 하나님의 능력이 있다-이렇게 보게 됩니다. 여기서 한 걸음 나아가 좀더 깊이, 좀더 많이, 성숙한 입장에서 이해하게 되면 이제 표적(表蹟)이라고 하게 됩니다. 표적은 거기에 깊은 뜻이 있다는 말이요, 그 사건은 곧 말씀이라는 것이요, 그 사건은 곧 하나님께서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게, 손으로 만질 수 있게 하신 귀한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오늘의 성경 본문은 이것을 표적(11)이라고 말씀합니다.

표적을 통하여 주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우리는 이것을 생각해 보고 한층 깊은 뜻을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처음으로 행하신 표적은 혼인잔치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는 먼저 이 점을 상고(詳考)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만큼 중요한 의미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금욕주의(禁慾主義)가 아닙니다. 그러고 보면 여러분은 예수 믿기를 참 잘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숱한 종교 가운데서 기독교야말로 가장 행복한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한마디로 멋있는 종교입니다. 예수 잘 믿는다는 것이 어떻게 믿는 것이냐고 물을 때, 여러분은 여느 다른 종교들이 내세우는 바 장가가지 마라, 시집가지 마라, 입산수도 하라, 고행이 필요하다, 금욕해야 한다, 다 내버리고 빈털터리로 살아야 한다는 따위의 대답은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의 생활은 한결같이 감사하는 생활입니다. 세상을 멋있게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보란듯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이런 점이 다른 종교와는 구별되는 기독교의 두드러진 특징입니다. 금욕주의도 아니요 염세주의도 아닙니다.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습니다. 질병도 있습니다. 전쟁도 있습니다. 고난도 있습니다마는 그 속에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압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있음을 압니다. 말씀이 있음을 압니다. 긍휼이 있음을 압니다. 심판이 있음을, 구원이 있음을 압니다. 저 앞에 구원의 약속이 있어서 오늘도 알게 모르게 쉼 없이 하나님의 큰 뜻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압니다. 그래서 기독교인입니다. 낙심하지 않습니다. 철저하게 낙천적입니다. 역사를 어둡게 보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입니다. 먹어야 하는데도 안 먹고 버티는 사람보고 장하다 하지 않습니다.

그런 극기를 미덕이라 하지 않습니다. 억지를 부려 독신으로 산다 하여 잘 믿는 사람이라 보아주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여 기독교에서는 극기주의나 금욕주의가 미덕으로 통하지 않습니다. 명심할 것입니다.

기독교에서는 가정이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혼인이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잔치가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예배도 어떤 의미에서 하나의 잔치입니다. '어린 양 잔치'입니다. 울고불고 눈물 흘리고 해야 예배인 것이 아닙니다. 때에 따라서는 회개하여 우는 일도 있겠습니다마는, 적어도 성전 문을 나설 때에는 할렐루야 찬송을 부르며 감사해야 합니다. 얼굴이 환하게 열려야 합니다. 만나는 사람과 웃고 반기며 인사를 할 수 있어야 예배를 제대로 드렸다 하겠습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자의 바른 자세가 그렇습니다. 당연히 가정이니 혼인이니 잔치 같은 것을 귀한 의미로 봅니다. 이를테면 성경 상의 모든 축복이 가정을 통해서 온다는 것은 여러분도 잘 아시는 터입니다. 하나님께서 귀한 자손은 물론, 건강도 재산도 위로도 가정을 통해서 주시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좋은 자손을 주시고 싶어도 당자가 장가를 가야 주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모든 축복을 가정을 통해 주십니다. 명예도 그렇게 주십니다. 믿음도 가정을 통해서 주십니다. 성경이 분명하게 웅변하고 있는 가정의 의미입니다.

우선 창세기를 보십시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빛을 만드십니다. 하늘과 땅을 만드십니다. 사람을 만드십니다. 그런데 천지창조는 가정을 만들어놓으시는 데서 마무리됩니다. 천지창조의 피크(peak)는 바로 가정인 것입니다. 한 남자를 만드시고 한 여자를 만들어 남자에게 이끌어와 함께 살도록 하십니다.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2:23)." 아담이 이렇게 기뻐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축복하십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1:28)." 만물을 다스리라고 축복하십니다. 이것이 성경 창세기에 처음으로 나타나는 축복입니다. 곧 가정을 축복하심입니다.

구약성경이 이렇게 열렸는데, 신약성경에서는 어떻습니까? 예수님께서 행하신 그 많은 이적의 첫번째가 바로 혼인잔치 하는 집에서 이루어집니다. 여기에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혼인잔치에 오셔서 축복해주심으로 이적이 시작된 것입니다. 혼인이, 가정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웅변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기독교는 철저하게 가정적인 종교입니다. 우리는 모름지기 가정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제가 이 교회를 시작할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당회장으로서 지닌 목회방침의 하나가 '가정 위주'입니다. 주일날은 모든 교인이 성가대 연습과 같은 특별한 일만 빼놓고는 절대로 이런저런 모임이나 회의를 갖지 말자는 것입니다. 여전도회고 남전도회고, 임원회다 뭐다 하는 것, 다 집어치우자는 것입니다. 그런 일 한답시고 남편과 아내가 따로 따로요 아이들은 고아가 됩니다. 모처럼 주일날인데 아이들은 부모님 손 한번 잡아보지 못하고 지냅니다. 온 가족이 따로따로 지내고 맙니다. 안될 일입니다. 모임이라든가 회의라든가 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면 주일 아닌 다른 날에 가질 것입니다. 문제는 주일날입니다. 가족과 함께-얼마나 좋습니까? 부부 함께 아이들 데리고, 온 가족이 서로서로 손잡고 걸음을 같이하여 교회로 나옵니다. 아이들은 교육관에서 공부하고, 어른들은 본당에서 예배드립니다. 예배가 끝나면 다시 아이들과 합류하여 함께 집으로 돌아갑니다. 이렇게 하여, 주일날은 세 시간 이상 아이들과 함께 지낸다. 주일날은 온 가족이 한자리에 만나는 날이다-아이들에게 이런 인식을 심어주어야 합니다. 바라건대 이날은 점심도 잘해주십시오. 한 주일 가운데서 메뉴가 제일 좋아야 합니다. 아이들이 주일날을 손꼽아 기다리게 만들어야 합니다. '주일날은 잘 얻어먹는 날'-이쯤 되어야 합니다. '꾸중듣지 않는 날' '벌받지 않는 날'이어야 합니다. 책망할 일이 있더라도 "오늘은 주일날이니까 참는다" "예수님 덕에 무사한 줄 알아라"-이렇게 나와야 합니다. 마침내 아이들은 주일을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주일날은 참 좋은 날'이라고 하는 기쁨이 쌓여서 신앙생활이 꿋꿋해질 것입니다. 주일날 교회에 따라 나왔다가 떠들었다고 한대 얻어맞았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주일날은 맞는 날'이 되고 맙니다. '주일날은 입 틀어 막히는 날'이어서는 안되겠습니다. 많이 잘못되었습니다. 가정이란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언제나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알고 보면 교회도 가정교회로부터 시작됩니다.

넓은 의미에서 교회는 가정입니다. 좀더 큰 의미의 가정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보면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적의 첫 번째가 혼인 잔치에서 축하하시는 것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신학적인 의미에서 보더라도 가정 신성(神聖), 그리고 가정의 기본이 되는 혼인의 신성이요, 그래서 잔치 신성이 됩니다. 결혼식이라고 일컫는 이 잔치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예수님께서 이 잔치 집에 손님으로 초대받아 오셨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마리아가 신랑의 이모가 된다고 전합니다. 말하자면 신랑의 어머니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자매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리아는 이 집에 손님으로 와 있는 것이라기보다 주인의 입장에 설 수 있는, 말하자면 두 번째 주인쯤 된다고 하겠습니다. 대접을 받는 입장이기보다 잔치의 이모저모를 챙기면서 손님을 대접하는 주인격의 위치에 있었다 하겠습니다. 이 혼인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예정했던 것보다 손님이 많이 온 탓인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아무튼 한창 무르익은 잔치에 술이 떨어졌으니 난감한 일입니다. 같은 값이면 음식이 남는 잔치보다 음식이 모자라는 잔치가 좋은 잔치이겠습니다 마는, 이스라엘사람들의 식생활, 특별히 잔치에서는 포도주가 절대적인 음식입니다. 이것이 떨어졌습니다. 여기서 마리아의 믿음이 나타납니다.

먼저는 마리아가 이 문제의 중요성을 간파합니다. '일이 심각하게 됐구나, 어떡하면 좋단 말인가?' 요새 같으면 사람을 보내 사오든지 전화 한 통화면 금방 배달을 해주겠지만, 그때는 그렇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잔치에서 제일 중요한 음식인 술이 떨어졌습니다. 이와 같은 문제를 간파한 데에 마리아의 지혜가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 지혜로웠던 것은 그녀가 이 문제를 딴 곳에서 해결하러들지 않고 예수님께로 가지고 갔다는 점입니다. 참으로 중요한 이야기올시다. 예수님께 포도주가 있는 것도 아니고 돈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한단 말입니까? 분명하게도 예수님께 의논드리나마나한 일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무슨 진리에 대한 말씀이라든지 성경에 대한 지식이라고 하면 몰라도 그것은 포도주 문제입니다. 예수님 하고는 관계가 없는 것이거든요. 분명히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아는 예수님께 그 문제를 가지고 옵니다. 예수님과 관계 없어 보이는 문제를, 문제이므로 예수님께 가져온 것입니다. 이 점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흔히 보는 일입니다마는 사람들은 너무 똑똑해서 기도를 하지 않더군요. "이런 문제는 하나님도 못 푸셔. 다 끝난 일인데 하나님인들 어떻게 하시겠어?" 여러분, 명심하십시오. 할 수 있고 없고는 하나님이 정하십니다. 우리에게는 문제를 가지고 나아갈 책임만이 있을 뿐입니다. 잘된 문제이든 못된 문제이든, 우리는 문제를 있는 그대로 가지고 나아가 그리스도께 의논드릴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포도주 문제와 예수님과는 별개인 것 같고 아무 관계가 없는 듯이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마리아는 이 문제를 가지고 와서 예수님께 의논을 합니다. 이것이 마리아의 귀한 믿음입니다.

그 다음으로 마리아는 적극적인 간청을 드리고 구체적인 추진을 합니다. 확실한 믿음으로 밀고 나갑니다. 예수님께만 의논하면 무슨 수가 난다, 무슨 방법으로든지 해결될 것이다 라고 믿고 있습니다. 마리아의 마음속에는 하나의 교리가 있습니다. 신조이자 그에 대한 지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해주시는데, 단 거기에 하나의 조건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믿고 순종해야 된다는 조건입니다. 본문 말씀을 보면 예수님의 대답을 아랑곳하지도 않습니다.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하시며 일단은 거절하시는데도 불구하고 마리아는 일방적으로 하인들에게 이릅니다. "무슨 일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5)." 이렇게 명해놓고 예수님의 대답은 기다리지도 않고 자리를 뜹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적어도 삼십 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배운 진리입니다. 예수님께만 가지고 가면 어떠한 문제도 해결이 되더라, 우리는 다만 그가 시키는 대로 순종만 하면 된다 소중한 믿음입니다.

물고기 잡는 일과 예수님과는 별개 문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예수님이 시키는 대로 따릅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5:4)." 잡힐 까닭이 없는데 이렇게 말씀하시니 그대로 순종하여 그물을 던졌다가 그물이 찢어지도록 물고기를 잡지 않습니까? 이치에 맞든 안 맞든 예수님의 말씀만 따르면 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쟁터에 나갈 때에 적군이 얼마나 많은지, 얼마나 강한지, 그 세력을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장군이 어떤 사람인지, 아군의 규모는 어떠한지, 그런 것을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정황(情況)을 보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본 것, 그들이 마음을 쓴 것은 오직 하나,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졌느냐 였습니다. "블레셋 사람을 네 손에 붙이리라(삼하 5:19)." 저 성을 네 손에 붙였다 이런 말씀만 떨어졌다면 전쟁은 이긴 것입니다. 주저 없이 쳐들어가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별도로 그들의 지혜를 짜내어 전략을 세우지 않았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었고, 그래가지고는 될 일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네 손에 붙이리라"고 하신 말씀 하나만 믿고 나아가면 어김없이 승리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보는 마리아의 주저 없는 믿음도 그녀가 삼십 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 사귀고 갈이 지내고 그를 키우면서, 다시 말하면 그와 함께 하면서 터득한 신앙이자 교리입니다. 예수님께만 가지고 가면 어떤 문제이든지 다 해결할 수 있다, 다만 말씀하시는 대로만 하라-이것이 마리아의 믿음이요, 이 믿음대로 하인들에게 명합니다. 하인들로서는 일단 순종은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어안이 벙벙합니다. 그러나 이치에 맞고 안 맞고를 따지지 말고, 내 경험에 있고 없고를 헤아리지 말고, 뜻을 알면 아는 대로 모르면 모르는 대로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합니까?" "포도주가 필요한데 물은 왜 갖다 붓습니까?" 내 상식 가지고 이러쿵저러쿵할 것이 아닙니다.

제가 어렸을 적에는 아버님의 말씀에 말대답을 했다가 불호령 맞거나 매맞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아버님은 그때마다 말씀하셨습니다. "어른이 말할 때는 소금 섬을 물로 끓이라 해도 끓여야만 하는 것이야." 요즘 같은 세상에 이런 말을 했다가는 노망났다고 야단일 것입니다.

소금 섬을 물로 끓이면 그 소금이 남아납니까? 그러나 끓여야 합니다.

이것이 순종입니다. "말도 안됩니다. 소금 섬을 물로 끓이는 법이 어딨습니까?"하고 이의를 달 것이 아닙니다. 시어머니가 이래라 저래라 했더니 며느리가 되받아 말대꾸를 합니다. 이건 이렇고 저건 저런 거라고 똘똘한 소리를 늘어놓습니다. ", 그렇게 꼬박꼬박 말대꾸나 할 것이냐?" 시어머니는 답답해서 언성을 높입니다. 며느리도 질세라 눈을 똑바로 뜨고 되받습니다. "어머님도 참, 말대꾸가 아니라 이치가 그렇지 않습니까, 이치가……" 여러분, 이치 다 따지다가 언제 순종하겠습니까? 순종은 이치 따져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군소리는 필요 없습니다.

요새는 디서플린(discipline)이 없어서 걱정스럽습니다. 우리말로 번역하기는 마땅치 않지만 굳이 번역한다면 '제자도(第子道)'라고나 할까요? 이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훈련'이 없는 것입니다. 제자와 스승 사이를 생각해봅시다. 스승은 생각이 있어서 끓이라 하고 제자는 믿고 끓이면 되는 것입니다. 왜 끓이라고 하는지 그 이유는 뒤에 가서 알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배우는 자세가 제자도입니다. 이치를 일일이 설명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왜 그렇게 하느냐고 물을 것도 아닙니다.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에서도 그런 순종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하인들이 순종을 하게 됩니다. 여기서 잠깐 6절을 보면 "결례를 따라 두세 통 드는 돌 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은 상당히 정결한 백성입니다. 깨끗한 것을 좋아합니다. 조금 실례되는 이야기입니다 마는 이스라엘 여자들은 자궁암이 거의 없다고 합니다. 'Almost not'이라고 합니다. 세계에서 자궁암이 가장 적은 민족이 유대인들이라고 합니다. 정결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병은 태반이 불결해서 생기는데, 그 민족은 예로부터 정결하기로 유명합니다. 반드시 손을 씻고 식사를 합니다. 어느 집이나 들어가는 문에 항아리가 놓여 있습니다. 결례(潔禮)라고 하면 간단히 말해서 손을 씻는 것입니다. 위생적으로 손을 씻는 것이고 신학적으로는 '결례'입니다. 밖에 나갔다가 돌아올 때마다, 집에 들어갈 때마다 손을 씻어야만 합니다. 잠깐 나왔다가 들어갈 때에도 그렇습니다. 손끝만이라도 반드시 물에 담그었다가 툭툭 털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손을 씻는 시늉이라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저녁에 씻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반드시 씻는다는 의미에서 잠시만 밖에 나왔다가 들어갈 때에라도 손끝에 물을 묻혀야 됩니다. 이것이 결례입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의 의식이랄 수 있습니다. 밖에서 더러워진 마음과 생각을 모두 씻어버린다는 뜻입니다.

, 이러한 결례 항아리가 여섯 개 놓여 있는데, 사람들이 포도주 떨어진 것만 알았지 결례 항아리에 물이 떨어진 것은 모르고 있습니다.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이 물이 떨어지면 결국 결례를 하지 못합니다.

출입할 때에 손을 못 씻지 않습니까? 이것이 포도주보다 중요한 것인데 모두들 깜빡 잊어버렸습니다. 여기에 상당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계명으로 명령하신 저들의 소중한 규례, 결례입니다. 그런데 그 항아리에 물이 떨어져서 결례할 수가 없게 되었는데 그 사실은 까맣게 잊은 채 지금 술 떨어진 것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말씀하십니다. 포도주가 먼저가 아니라, 결례 항아리를 채우는 것이 먼저다, 결례 항아리를 채우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될 문제입니다. 이따금씩 우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만 따져보고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법이 지금 어떻게 시행되고 있는지는 헤아릴 줄 모릅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5:17)"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선적으로 비어 있는 항아리부터 채워야 했습니다.

그리고 포도주 문제-이 또한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잔치집에서의 포도주 문제는 배고픔의 문제가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절대 빈곤의 문제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축복과 이적은 절대 필요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장님이 눈을 뜨듯이, 앉은뱅이가 일어나 걷듯이, 문둥병자가 깨끗해지듯이, 굶주린 오천 명을 먹이듯이 절대 필요, 절대 빈곤의 상황에서 나타나는 이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잔치집에 포도주가 바닥난 것은 절대 빈곤의 문제가 아닙니다. 없으면 그만두어도 됩니다. 먹다가 중단해도 아무 일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시기에 이것마저 채워주십니다. 우리는 이 점을 기억해야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구할 때에 반드시 절대 필요한 것만을 구해야 하고, 또 그런 것만을 주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굶어죽지 않고, 얼어죽지 않고, 병신이 안될 정도만 건강하면 된다- 이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복을 돌보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취미생활, 정서생활에까지 축복을 주시는 분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은 잔치 집에 술 모자라는 것까지 염려해주십니다. 얼마나 고마우신 분입니까? 하나님은 참으로 좋으신 하나님입니다. 포도주 걱정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사치입니다. 절대적인 것이 아니니까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것마저 해결해주시고 채워주셔서 저들의 흥겨운 잔치에 기쁨이 중단되지 않도록 배려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머니 마리아를 보고 "여자여"하고 부르십니다. 어머니보고 왜 그렇게 부르실까요? '여자여'-'귀나이'라고 하는 헬라어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속된 뉘앙스를 가진 말이 아니라고 합니다.

굳이 우리 식으로 풀이한다면 이 말은 '부인이여'라는 호칭과 같다 할까, 헬라어로는 존경어로 쓰이는 말입니다. 아무튼지, '어머니'라는 말이 아닌 것은 틀림없습니다. '여자여'-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표현에서 한 여인의 사적인 아들로서의 예수님이 아니라, 마침내 공생애의 길에 들어선 예수님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게 됩니다. 그제까지는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였으나 앞으로는 그런 관계를 초월하여 만민에 대한 메시야로서 당신을 드러내시게 된 것입니다. 주님 스스로에 대한 육적인 관계의 지배를 더는 허락하지 않으시는 의도가 포착됩니다.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에서 떠나 만민에 대한 메시야로서의 관계를 새로이 드러내심으로 '여자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 신학자들의 지배적인 해석입니다.

본문에 나타나 있는 이적은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이적입니다. 이것은 양적 변화가 아닌 질적 변화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이적에서는 5천 명이 먹을 만큼 같은 질의 양이 불어난 것이지 떡이 질이 달라져서 과일로 변했다든가 하지는 않았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이적은 질적인 변화입니다. 물이 포도주가 되는 변화입니다. 그래서 이 이적은 신령한 의미를 가집니다. 우리에게 양적인 변화만을 주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영적으로도 질적인 변화를 주십니다. 근본적으로 질적 변화를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여기에 나타나고 있음을 말합니다.

거듭남重生은 그 사람의 행위가 좀 나아졌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윤리적인 생활이 변화했다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질적으로 사람이 변화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바로 마귀의 자녀, 진노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됨의 의미는 질적 변화이지 양적 변화가 아닙니다. 이렇게 중요한 기적이 여기에 계시되어 있습니다. 출애굽기 714절로 25절까지를 보면 모세가 나일강의 물을 피로 변하게 하는 이적이 나옵니다. 1523절로 25절에서는 '마라'라고 하는 지역의 쓴 물을 단물로 만들게 하는 모세의 기적이 있습니다. 열왕기하 219절로 22절에서는 엘리사가 이적을 행하는데, 좋지 못한 물의 근원에 소금을 던져 좋은 물로 만드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렇게 물을 변화시키는 이적은 성경의 여러 군데에서 그 사례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이적에서 보아야만 하는 것은 그 목적입니다. 이 이적의 궁극 목적이 무엇이냐-그 대답이 맨 마지막 절에 있습니다. 11절을 보면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합니다. 믿음을 주시려 함입니다. 이 사건을 통하여 예수 믿게 만드시려 함입니다.

모든 이적의 궁극적인 목적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께 대한 바른 믿음입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갖도록 해주십니다. 여러분, 몹쓸 병에 걸렸다가 이적으로 나았다고 해도 그렇습니다. 가까운 예로, 여전도회에서 은혜로운 말씀을 전하신 나목사님 같은 분이 있습니다. 간암으로 거의 죽게 된 사람이 침대에 엎드리어 하나님 앞에 기도함으로써 밤새 하혈을 한 후 멀쩡한 사람으로 돌아왔습니다. 지금에 이르기까지 강단에 서서 역사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생명을 걸고 목회 합니다. 기적입니다. 불과 며칠밖에 못산다고 진단 받았던 사람입니다. 완전히 죽었던 사람인데 다시 살아나서 역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기적입니다. 왜 이런 일이 있습니까? 결국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믿게 하기 위함이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입니다. 예나 오늘이나 기적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 그리고 특별히 우리에게 바른 믿음을 가지게 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에는 몇 가지의 중요한 교훈이 더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찾아봅시다. 먼저 믿음을 가지고 순종할 때에 기적이 나타날 수 있었습니다. 기적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것이지만 그 기적을 나타내는 사건 속에 봉사자를 필요로 합니다. 다시 말해서 거드는 사람이 있어야 했습니다. 바로 순종하는 사람들입니다. 좀 재미있는 말씀이 나옵니다.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9)." 오묘한 말씀입니다. 기적이 나타났지만 그 일에 가담하고, 참예하고, 동참하고, 거들고, 봉사한 사람들만이 이게 어떻게 된 영문인지를 알더라는 말입니다. 그 사람들만이 행복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 사건에 수고한 사람만이 아는 것입니다. 아 무일도 하지 않은 사람은 이 오묘한 역사의 뜻을 알 수가 없습니다. 소문이나 듣고서 '거 참 이상하다'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리기는 하겠지만 그 기적의 의미, 그 놀라운 역사의 은혜는 오직 순종한 사람만이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성전 안에서 늘 예배드립니다마는 보십시오. 예배는 같이 드리되 이 성전의 건축을 위하여 기도하고 헌금하고 애쓴 분들에게는 그들만이 가지고 있는 위로가 따로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모르는 기쁨이 있습니다. 별 뜻 모르고 출입하는 사람들과는 다른 감동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오르간 소리를 들을 때에도 '아 좋다'하며 같이 듣지마는 여기에서도 특별한 기쁨을 맛보는 몇 사람이 있습니다. 이 오르간을 위해서 헌금한 사람들입니다. 어떤 일이든지 하나님의 큰 역사가 나타나는 일에 만의 하나라도 거들고 봉사한 사람은 그 사람만이 가지는 비밀한 행복이 있게 마련입니다. 믿음으로 순종한 사람, 그 은혜의 사역에 동참한 사람만이 가지는 행복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매우 특별하고 개인적인 행복입니다.

세상에서는 흔히 처음에는 좋다가 마지막에는 나쁘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이 가나의 잔치에서는 마지막이 좋습니다.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10)"라고 합니다. 이 잔치에서는 처음의 포도주는 별로 이고 오히려 나중 포도주가 더 좋았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역사는 시작보다도 마지막이 더 좋습니다. 갈수록 좋고 갈수록 은혜스러워 집니다. 반면 사단의 역사는 언제나 좋은 것을 나쁜 것으로 만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물을 포도주로 만들어서 잔치의 온 분위기를 돋우고 기쁨이 충만케 하는 역사를 나타내십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돌아가서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역사하실 때에 거기에는 몇 사람의 하인과 마리아라고 하는 여성의 믿음이 필요하였습니다. 이 두 부류의 사람이 도구로 쓰임 받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도 주님께서 능력을 나타내시고자 할 때에는 도구를 쓰십니다.

누군가를 통해서 역사 하시고 누군가의 수고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누군가의 희생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기적이다'하면 거기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적을 나타내신 것이지마는 또한 거기에는 몇 사람의 눈물과 기도와 희생이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오늘 주님께서 능력을 나타내고자 하신다면 우리 자신을 믿음과 순종과 희생의 도구로 하나님 앞에 내어놓아야 하겠습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예수님 앞에 바쳤던 것과도 같이 말입니다. 내가 먹을 양으로 싸온 음식을 내놓았습니다. 비록 적은 것이지마는 그것을 내놓음으로 이를 통하여 5천 명이 먹게 됩니다.

내놓은 떡이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이것이 예수님의 손에 들리움으로 엄청난 역사가 이루어졌습니다. 이 큰 일을 위하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내놓은 한 어린아이가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도 주님은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왜냐고 묻지 않고 그대로 희생하고 그대로 순종하는 믿음의 사람을 필요로 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이 거룩한 역사에 선한 도구로 쓰임 받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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