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로 돌아가기 | 목차로 돌아가기 |
참 예배의 뜻(롬12:1~13)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로마서는 1장으로부터 11장까지 교리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믿으며 어떻게 믿어야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제 12장으로부터 16장까지는 믿는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하는 것을 말씀합니다. 이름하여 전반부는 교리 부분이고 후반부는 윤리 부분입니다. 교리와 윤리, 이렇게 연결되는 것이지요. 오늘의 본문말씀인 12장 1절과 2절, 이 두 절은 기독교인의 윤리에 관한 총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집약해서 총론적으로 말하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오늘의 본문의 내용입니다.
기독교인의 생활을 무엇으로 표현하느냐 하면, 바로 제사와 예배입니다. 제사와 예배, 이 두 말로 기독교인의 생활을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교리적인 말씀입니다. 제사라는 것도, 예배라는 것도 하나님의 관계입니다. 그러니까 기독교인의 생활이라는 것은 철저하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결정되어야 하고, 판단되어야 하고, 실현되어야 한다는 것이에요. 그것이 기독교인된 윤리의 총강령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아주 친절하게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1절)" '그러므로'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지금까지 설명한 교리, '예수는 이렇게 믿는 것이다, 우리가 믿는 바는 이것이다'하고 그 믿는 바를 말씀하고 '이제 믿으니까, 그러므로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얼마나 친절하게 말씀하는지 몰라요.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1절)"---여기서는 마치 모세가 율법을 명령하는 것처럼 그렇게 강하게 말씀하지도 않고, 또 교리 부분에서와 같이 절대성을 주장하지도 않아요. 그것이 바로 다른 점이에요. 사도 바울은 교리 부분에 대해서 말할 때에는 한치의 양보도 없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에서 그는 이런 말씀까지 합니다.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8절)"-이 얼마나 강한 표현입니까? 우리가 믿는 교리, 이것 외의 것은 절대로 없고, 있을 수도 없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강한 주장을 합니다. 그러나 윤리 문제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아요. 어디까지나 부드럽게 말씀합니다. 아주 권면조로 이야기합니다. 사도로서 말하기보다는 오히려 자기를 낮추어 형제로서 말씀합니다. 수평관계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권면한다'합니다.
아주 귀한 말씀이에요.
이 '윤리'라고 하는 것은 권면에서 이루어져야 됩니다. 그리고 권면을 받는 사람은 그 권면 속에서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결단하고, 자율적으로 행해야 됩니다. 그래야 윤리가 바로 되는 것입니다. 강압적으로 이래라 저래라, 가라, 오라, 아니면 죽는다-이렇게 나오면 얼핏 뭐가 되는 것 같아도 그실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요. 여러분도 다 겪어보아서 알지 않아요? 그렇게 해서 되는 일은 소용없는 일이에요. 정말 권면을 해서, 스스로 판단해서 '옳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옳겠습니다'라고 받아들이고, 그 다음에 가서 내가 스스로 행하는 것 같이 이렇게 자발적으로 행할 수 있을 때에야 진정한 의미에서 윤리적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그리스도인의 윤리라고 하는 것은 형제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요, 하나님의 자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요, 하나님의 자비가 기초가 되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자율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다, 그것이 기독교인의 윤리라는 말씀이에요. 그러니까 이것은 두려워서 행하는 것도 아니고, 저주의식 속에서 행하는 것도 아니고, 벌벌 떨면서 공포에 쫓기며 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에요. 그것은 기독교 윤리가 아니에요. 바로 하나님의 자비하심 속에서 행하는 것이에요.
특별히 '공부'가 그렇지 않습니까? 어쨌든 간에 공부하라고 설득을 시키잖아요? "네가 공부해야지 않겠느냐? 너 자신을 위해서 해야지 않겠느냐? 며칠 있다가 시험 보는데 공부 안해서 0점 맞으면 얼마나 부끄럽겠느냐? 공부해야 학교 가서 선생님한테 떳떳하고, 친구들한테 떳떳하고 그렇지 않느냐? 공부 안 해서 모르면 얼마나 답답하냐?" 하고 말이에요. 어떤 부모들은 '내가 너만 했을 때에 공부 안 했다가 지금 얼마나 답답한지 아느냐? 너는 나같이 되지 말아라'하고 얘기하잖아요? 어쨌든 권면을 해서 '알았습니다, 하겠습니다.'하고 스스로 판단해서 해야 공부가 되지요. 아이가 졸기라도 하면 "이 놈아!"하고 한 대 쥐어박고, 아이는 징징 울면서 앉아 있어보았자 이게 무슨 공부가 되겠어요?
그것뿐이 아니에요. 우리의 모든 윤리생활이 다 그래요. 기쁜 마음으로, 자원해서 해야지 억지로 되는 일은 아무 것도 없어요. 그런고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권면하고 있는 것이에요. '그리스도의 자비하심으로, 긍휼로 내가 권면한다. 그런고로 이렇게 하라'-그런고로 우리는 언제나 겸손해야 하고, 사랑 안에서, 또 나아가서는 감사한 마음으로, 이 권면 자체도 감사함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의미에서 바른 윤리가 성립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에 보면 먼저 제사 드리라고 말씀합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1절)." 제사를 드리라-이것은 유대사람들의 제사의식에서 생각해보아야 될 중요한 교리입니다. '제사(祭祀)'라고 하는 것의 본뜻은 '드린다'는 뜻이에요.
하나님께 바친다, 혹은 예물을 드린다고 하는 말입니다. 또 원문 그대로 보면 이것은 계속적임을 가리키는 용어예요. 드리고, 또 드리고, 계속적으로 제사를 드리라, 하는 말이에요. 이 속에 깊은 히브리적 의미가 있어요.
'제사'라는 것은 이렇습니다. 우선 제물이 깨끗해야 됩니다. 깨끗한 것이라야 드릴 수 있어요. 그래 제사장은 제물을 잘 살펴봅니다.
흠이 있어도 안돼요. 점이 있어도 안돼요. 더러워도 안돼요. 물론 병들어도 안돼요. 완전한 것이라야 돼요. 어딘가 모르게 병들어 보이는 것도 안돼요. 깨끗한 것, 그것을 하나님께 드리게 되어있어요. 그런고로 우리가 항상 하나님 앞에 제물성을 가져야 합니다. 깨끗하게 제물로 드려지는 그런 존재가 되어야 된다는 말이에요. 깨끗하게 제물, 항상 깨끗하고 거룩해야 한다, 어느 정도, 하나님 앞에 제사의 제물로 드려질 만큼 깨끗하고 정한 것이 되어야 한다---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생활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재물이라는 것은 아벨의 제사에서 보는 대로 믿음으로 드리는 것이에요. 아벨의 제사는 믿음으로 드렸고, 가인은 형식적으로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어요. 그런고로 히브리서에서 말씀한대로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 하심이라(히 11:4)"-믿음으로 아벨은 깨끗한 제사를 드려서 하나님께서 받으셨다는 것이에요.
그리고 제물의 둘째 특징은 '죽는다'는 것입니다. 산 것을 죽여서 드리는 것이지, 죽은 것을 드리는 것이 아니예요. 그것은 절대로 안돼요. 어제 죽었든, 한 시간 전에 죽었든 죽은 것은 안돼요. 산 것을 죽여서 드려야 해요. 이것이 제사예요. 하나님 앞에 그리는 제사는 반드시 산 것이라야 해요. 살아 있는 것이라야 해요. 썩은 것은 안돼요.
살아 있는 것을 죽여서 드리는 것이 제물이에요. 무슨 말이겠습니까? 바로 생명을 드린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물질의 문제가 아니고, 동물성의 문제가 아니에요. 살아 있는 것을 죽였으니까 생명이 여기서 끊어지는 것 아니에요? 지금 생명을 끊어서 드리는 것이니까요. 하나님 앞에 제사 드리기 위해서 생명을 죽이는 것이에요. 그것으로 끝나는 거예요. 드렸다가, 또 내 맘대로 꺼내서 쓰다가, 그런 것이 아니에요.
한번 드리면 끝나는 거예요. 한번 생각해보세요. 이것이 바로 문제입니다. 가끔 보면 이런 경우가 있어요. 하나님 앞에 드렸다가 도로 빼앗았다가, 또 하나님께 드렸다가 그 다음에 자기가 한번 사용했다가…… 그러면 안돼요. 생명을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께 드림으로 끝낸다는 뜻이에요. 다시 돌아오는 일이 없고, 되돌려 받는 일이 없어요. 그것이 제사 에요. 생명을 죽여서 드리는 것예요. 생명을 거기서 끝내는 거예요. 그렇지 않습니까?
제가 1958년에 신학대학을 졸업했습니다. 졸업식을 마치고 나오니까 여러 사람들이 축하한다고 인사를 해요. 그런데 그 중에 아주 재미있는 친구가 하나 있습니다. 다짜고짜 제 손을 딱 잡더니 "청춘 매장했군"하는 거예요.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목사가 될 테니 이제 인간적인 세상 재미는 다 봤다, 끝났다, 이 말이에요. 그래서 자기는 '졸업식은 청춘 매장식이다'-이렇게 생각했다고 해요. 듣고 보니 정말 그래요. 또 정말 그래야지요. 하나님 앞에 제물로 바쳐진다 할 때에는 죽은 거예요. 나를 위한 일은 없고, 다시는 이에 대해서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아요. 생명을 드리는 것이니까요. 죽이는 것이에요. 죽여서 드리고 거기서 끝내는 거예요. 하나님께 생명을 바치는 것이에요. 깨끗이 바쳐버리는 것이에요. 다시는 돌아오는 것이 없어요. 바로 이것이 제사입니다. 생명을 바치는 것이다, 산 생명을 죽여서 바치는 것이다---이것이 제사라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는 또하나 중요한 말씀이 있어요. "산 제사로 드리라"--제사는 제사인데, 죽여서 드리는 것인데 '산 제사'를 드리라는 거예요. 영적으로 죽었지만 육체적으로는 아직 살아 있어요. 그러나 목적도, 의식도, 방법도, 결과도, 가치도 다 죽였어요. 하나님께 드려버렸어요. 그렇게 사는 거예요. 이제는 내가 살지만 내가 아니에요.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내가 사는 것은 오직 그를 사랑하는 가운데서 사는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 "I am crucified with Christ(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참 유명한 말씀입니다. 십자가상에서 나는 죽었어요. 옛 사람은 죽었어요. 그리고 오늘을 사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산 제사라는 말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그가 젊었을 때에 몹시 방탕하다고 하지 않습니까? 제가 기억하기로는 한 13년 동안 방탕했습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예수를 믿고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되었지요. 그런데 어느 날 공교롭게도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옛날에 자기가 활개를 치고 돌아다니던 술집 거리를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옛날에 알던 사람들이, 또 술집 아가씨들이 그를 알아보고 반색을 합니다. "아휴, 어디를 갔다가 이제야 이렇게 왔어요? 너무너무 반가워요"하며 모두들 인사를 하며 따라오는 거예요.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인사하지도 않고 인사 받지도 않고 묵묵히 자기가 가던 길을 갔어요. 그러면서 속으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사람 잘못 봤소! 옛날의 그 아우구스티누스는 죽었소’ 자 옛 사람은 죽었어요. 그리고 지금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이에요.
그리고 산 제사를 드리라-살아 있는 제사, 영적으로 완전히 죽고, 육체적으로는 살아 있는 그런 제물이 되어야 한다 함입니다. 신학적으로 깊이 생각하면, 본디 제사라는 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뇌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선물도 아닙니다. 그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무슨 고기 타는 냄새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에요. 생명 죽이는 것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요. 이런 제사의 법을 만드신 것은 바로 하나님의 자기 희생적인 사랑의 게시를 증거로 보여 주시려 함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제사 사건이며 동시에 말씀 사건이에요.
이 속에서 말씀하시고 계시는 거예요. 계속적으로 내가 주님과 함께 죽고 새롭게 드려 지기를 원하시는 거예요. 그렇게 드려지게 하기 위해서 이 제사 사건이 있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제사드릴 때마다 그 제사 사건을 통해서 말씀하세요. 너는 죄인이다. 그런고로 너는 여기서 죽는다. 네 생명은 내게 있다. 옛 사람은 여기서 죽은 것을 잊지 말아라.
대신- 이것이 제사의 의미예요. 하나님의 자기희생에 대한 계시적 증거입니다. 이것이 제사예요. 그러면 이 가운데서 우리는 새롭게 자기 자신이 드려진 것은 확인해야 되고, 다시 드려져야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은 ‘몸으로 제사를 드리라’하고 말씀합니다.
몸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몸'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구체적인 생활이에요. 몸이라는 것은 바로 현실을 말하는 것이에요. 마음만이 아니고 몸을, 정신만이 아니고 생활 전체를 제물로 드리라, 하는 그런 말씀입니다.
해리 E 포스딜이라고 하는 윤리학자는 그리스도인을 둘로 나누어서 설명합니다. '두 종류의 그리스도인이 있다. 하나는 aesthetic Christian, 심미적 그리스도인이다. 또 하나는 ethical Christian, 윤리적 그리스도인이다'-아주 재미있는 표현이에요. 심미적 교인이라는 것은 그저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려요. 좋은 음악 듣고, 찬송 한번 부르고, 좋은 설교 듣고, 수양하고, 마음을 평안하게 하는 거예요.
단적으로 말해서 '감정순화'하는 거예요. 감정순화에 좋다; 교양적으로 좋다-이것이 심미적인 것이에요. 그래서 교회에 나와서 조용하게 위로를 받으려고 해요. 심지어 어떤 교인은 설교는 생각 안하고 오로지 좋은 성가대가 있는 교회를 다녀요. 성가대가 하는 것 참 듣기 좋더라, 앉아서 조용히 들으면 마음이 편안해지더라-이런 식의 교인이에요. 그리고 문밖에 나가면 그만이에요. 이렇게 감정순화의 수단으로 교회에 다니는 그리스도인이 있어요. 바로 심미적 교인이에요.
그런가하면 윤리적 교인은 이렇습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드립니다. 그 예배 가운데 얻은 감격이 있고, 깨달음이 있고, 결단이 있어요. 거기서 얻은 힘대로, 거기서 공급받은 능력대로 나가서 사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랑하라'할 때에 사랑해요. '원수를 사랑하라'할 때에 감격하고, 깨닫고, 그래야겠다고 생각합니다. 말씀의 공급하시는 힘에 따라서 원수도 사랑해요. 행함으로 옮기는 것이에요. 믿는 바 그대로 행해요. 믿는 바 그대로 살아가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윤리적 교인입니다.
기독교 윤리학자 가운데 Richard H. Niber라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아주 유명한 사람입니다. 그의 저서 가운데 「Responsible Self」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제가 한때 아주 재미있게 읽은 책입니다.
'Responsible Self'--'책임적인 자아'라는 뜻이지요. 책임적인 자아--뜻이 대단히 깊습니다. 스스로 책임을 진다는 거예요. 여러분, 회개가 무엇입니까? '이 잘못은 내 책임입니다'-이러는 것이 회개예요. 그런데 회개한다고 해놓고는 '나도 잘못했습니다마는 내 남편이 더 잘못했어요. 내가 잘못한 것은 그 사람 때문이에요.'-이것이 '책임자아'가 아니에요. '모든 일은 내 책임입니다. 저 사람이 잘못한 것도 내 책임입니다'-이것이 '책임자아'입니다.
'책임자아'라는 것은 남을 원망하지 않아요. 내 책임이니까, 내가 선택하고 내가 결정한 것이니까 누구를 원망합니까? 이것이 바로 인간다운 인간이 아니겠어요? 못된 인간은 그 원인을 전부 남에게 돌려요.
사회가 못됐고, 세상이 못됐고, 부모가 못됐고, 다 못됐고…… 하고 그렇게 탓하는 사람이 있어서 제가 물어보았지요. "그러면 대체 몇 사람이 좋고 몇 사람이 나쁘단 말이오?" 그러니까 다 나쁘다고 그래요.
그래서 또 "당신은 어떻소?"라고 물었더니 "나도 나쁘지요, 뭐"라고 대답합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에요. 책임을 질 줄 알아야 돼요. 특별히 이렇게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은 남을 원망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스스로 선택해서 행합니다. 자기 책임 하에, 그런고로 강압적으로 하는 일이 없어요. 설령 누가 가라 해도, 가고 안 가고는 내가 결정하는 거예요. 가라고 해서 간 것이 아니에요. 그것이 달라요. 물론 가라 하니까 갔지요. 그러나 내가 간 거예요. 먹으란 다고 먹어요? 내가 먹고 싶으니까 먹지요. 모든 것은 내 책임이에요. 그런고로 강압에 의해서 하지 않고, 전부 내가 책임지고 내가 스스로 결단해서 행한다는 것이에요.
그러면 이제 우리가 생각해야 됩니다. 하나님 앞에 제물이 된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스스로 몸을 바친다는 거예요. 자기 스스로를 하나님 앞에 바치는 생활로 사는 것이에요. 그래서 이제 이 제사가, 이 의미가 점점 확대됩니다. 온 세상이 성전이 되고, 나는 항상 제물로 하나님 앞에 바쳐지는 그런 존재로, 그런 의미로 생을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이것이 '예배'입니다. 구약적인 표현에서 주로 많이 쓰는 것이 '제사'고, 신약적인 표현으로는 '예배'입니다. 오늘의 본문을 자세히 보면 아주 대단히, 중요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1절)" 영적 예배--이 말은 헬라어로 '로기켄 라트레이안'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로기켄'이라는 말은 '로기', '로고스'를 말합니다. 합리적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옛날 번역서에서는 '합리적 예배니라'라고 말씀합니다. 보세요. 이는 영적 예배요, 합당한 예배요, 또 다른 말로는 마땅한 예배입니다. 마땅한 예배-제사의 의미가 내 안에 살아 있을 때에 그 예배는 마땅한 거예요. 당연한 예배가 따라오는 것이에요. 이것이 기독교 윤리입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예배가 없다는 데에 문제가 있어요. 예배를 바로 드려야 바른 사람이 되는 것이에요. 죄송하지만 제가 한 30여 년 목회 하면서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예배하는 자세를 보면 그 사람의 생활도 다 알 수 있어요. 가정에서는 어떻겠다. 신앙생활은 어떻겠다, 사회생활은 어떻겠다…… 거의 다 알 수 있어요. 가만히 보면 예배하는 자세가 부산한 사람이 있어요. 한 30분 동안에 뭐 그리 가려운 데가 많은지 자꾸 긁고, 비틀고, 그냥 한순간도 가만히 못 있어요.
우리가 그런 사람을 옆에서 보지 않습니까? 그 다음에 그 사람의 가정을 보세요. 가정도 마찬가지예요. 매양 그 모양이에요. 직장도 한 곳에서 1년도 못 있어요. 예배가 없어요. 하나님 앞에 예배가 바로 되어야 합니다. 이것만 바로 되면 가정생활, 사회생활, 혹은 자기를 다스리는 생활, 윤리생활도 다 바로 됩니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는 거예요.
그래, 제가 결혼 주례할 때마다 이런 얘기를 해요. '신랑신부가 잘살려면 주일마다 교회에 나와서 예배드려라. 예배만 바로 되면 잘살 것이다'라고요. 다른 얘기 할 것 없어요. 주일마다 딱 나와서, 부부싸움을 한 날일지라도 일단 나와서 예배드리면 거기서 무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에요. 예배의 자세-아주 중요한 것이에요. 그래서 합리적 예배, 마땅한 예배, 가장 경건한 예배를 드리라, 그 말입니다.
특별히 예배라는 것은 영적인 것입니다. 하나님과 만나는 것이에요. 하나님과 만나는 행위가 예배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찾아 만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자신을 보이는 것이에요. 자신을 보이는 것이 예배입니다. 이것이 경배거든요. 하나님 앞에 예배하고 경배함으로 자신을 보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계적이거나 형식적 예배가 아닌 영적 예배입니다. 그 마음에서부터 깊은 영적 상태가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그런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께 제사로 드리라. 이것이 영적 예배니라'-이것은 무슨 말입니까? 몸을 드릴 때에 이것이 하나님 앞에 합당한 예배가 된다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예배의 영역이, 예배의 의미가 깊고 또 넓어야 합니다. 동시에 예배는 하나님과 나와의 종말론적 관계에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과 나와 오늘 이 생전 처음인 것처럼,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예배드려야 합니다. 저는 늘 이런 생각을 합니다. 오늘 우리가 교회에 나왔지만 다음 시간에도 꼭 나올 수 있다는 것을 누가 보장합니까? 다음 시간에 다시 못나올 것처럼 예배하는 것이 진정한 예배입니다. 그렇게 예배해야 됩니다. 이것이 종말론적 예배예요. 하나님과 나와 마지막으로 만난다는 마음으로, 영적으로 예배할 때에 예배의 범위가 점점 넓어집니다.
그래서 보세요. 이제 자기 자신의 생각도 항상 하나님 중심적으로 생각해요. 예배하는 마음으로 생각해요. 내가 말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의식으로 생각하게 돼요. 내가 행동하는 것, 가는 것 오는 것…… 항상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가정은 하나의 예배입니다. 가정이 교회가 됩니다. 직장생활도 예배가 됩니다. 사회생활도 예배가 됩니다. 온 우주를 하나님의 성전으로 이해해야 됩니다. 그것이 바른 그리스도인이에요.
예수님께서 열두 살에 성전에 올라가셨을 때에 '어째서 이렇게 아버지, 어머니가 너를 찾도록 하였느냐? 왜 같이 따라오지 않았느냐?'하고 그 어머니가 나무랍니다. 그 때에 어린 예수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눅 2:49)"-예수님께서는 그 아버지 집에 있는 것이 좋으셨던 거예요.
예배하고 지내는 것이 너무 좋으셨던 거예요. 그런고로 부모가 어디로 갔는지 왔는지 몰랐어요. 거기서 예배하는 즐거움에 취해 있었어요.
이래야 그리스도인입니다. 여기서 새로운 윤리가 생기는 거예요. 그런고로 모든 것을 하나님 안에서 생각하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각하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과 만나는 마음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혹 여러분이 무슨 말을 들었어요.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 저 분을 통해 말씀하신다'라고 생각할 줄 알아야 돼요. 좋은 말만이 아니라 나쁜 말도 그렇게 생각해야지요.
다윗의 경건을 보세요. 압살롬의 반란 때에 그는 피난의 길을 나섭니다. 이 때에 시므이가 다윗을 저주하지 않습니까? 아주 못된 말로 왕을 저주하니까 옆에 있던 장군이 칼을 빼 가지고 시므이의 목을 치려고 했습니다. 아무리 피난의 길을 가지마는 왕은 왕인데, 네가 기름부음 받은 왕을 어떻게 저주하느냐, 라는 것이지요. 그럴 때에 다윗이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저주하라 하셨기 때문에 저가 저주하는 것 아니겠느냐, 어떻게 저 사람이 자기 스스로 하는 것이겠느냐'-악한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그 비난을 통해서도 그는 하나님을 보았어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어요. 그런고로 대항하지 않았어요. 이것이 다윗의 경건이요, 다윗의 윤리생활이었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고로 사람과의 관계가 아니예요. 사람을 속이는 것이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요, 사람을 미워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잘못하고 있는 것이에요.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예수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지 않습니까?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째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35, 36절)." 그 때에 의인들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언제 우리가 그렇게 했습니까? 예수님 만난 일도 없는데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뭐라고 대답하십니까?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40절)"-이웃에게 행한 것이 곧 나에게 행한 것이니라 하심입니다. 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에요?
요새 저 북녘 땅에 있는 우리 동포들이 너무 어려워서 굶어죽고, 병들고, 어렵다는 얘기를 우리가 듣습니다. 그런 얘기를 들을 때에 참 괴로워요. 다만 얼마라도 도와줘야겠는데, 하고요. 그래 다들 많이 도와주느라 애를 쓰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도 지난번에 헌금을 해서 한 3억 정도 도와주었고, 또 이렇게 저렇게 여러 모로 돕고 있어요. 그런데 가끔 어떤 분들이 "그것 공산당한테 주면 안됩니다. 목사님, 다 좋지만 그것은 안됩니다"하고 저한테 항의를 합니다. 그 중 우리 교회에 나오는 분한테 물어보았지요. "우리가 지난번에 헌금할 때에 하셨습니까?" 그러니까 자기는 안 했답니다. 그래서 제가 참 힘들어요.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어요. 도움 받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 바가 아니예요. 배고프니까 먹어야지요. 죽어가니까 먹여야지요. 공산당원이면 어때요? 굶어가는데야 먹여야지요. 무슨 상관이 있어요? '네 이웃에게 행치 아니한 것이 곧 나에게 행치 아니한 것이니라. 네 이웃에게 행한 것이 곧 나에게 행한 것이니라'-이것이 예배자의 마음이에요. 하나님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에요.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에요. 그것뿐이에요.
옛날부터 내려오는 재미있는 얘기가 있어요. 어느 시골교회에서 일주일 동안 부흥회를 했습니다. 제가 서른세 살 때인가 영락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했는데 월요일 저녁에 시작해서 그 다음 월요일 새벽까지 했어요. 그 때에는 부흥회를 참 길게 했습니다. 하루에 세 번 설교하는데도 말이에요. 어쨌든, 어느 시골교회에서 부흥회를 했는데, 이제 막 부흥회가 끝났습니다. 그래, 모두가 은혜를 받고 충만해서 얼굴이 환하게 되고 서로들 기뻐하며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갑자기 어떤 여자가 이불보따리를 이고 예배당 안으로 들어오더랍니다. 대체 어떤 여자인지 자세히 보았더니 다름 아닌 그 교회 장로님 부인이더랍니다. 왜 이불보따리를 가지고 들어오느냐고 물어보니까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어요. "우리 장로님은 교회에서는 천사인데 집에만 들어오면 악마입니다. 그래서 아예 여기서 살렵니다." 보세요. 이것은 잘못된 것이에요. 예배하는 마음이 확실해지면 그대로 가정으로, 직장으로, 사회로 이어져야 되는 것이에요. 이것이 합리적 예배예요.
특별히 오늘의 본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렇게 예배를 드리고나면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2절)" 하십니다. 항상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을 생각하고 살아야 합니다.
내게 이로우냐, 해로우냐가 아니예요. 많이 버느냐, 적게 버느냐가 아니예요. 하나님께서 기뻐하실까를 생각해야 합니다. 요한 웨슬리는 무슨 일을 할 때마다 '성경 몇 장 몇 절에 의해서 이것을 이렇게 해야 되나? 어느 성경에 의해서 이것을 실현할 것이냐'-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했다고 합니다. 이렇듯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께서 선하게 여기시는 것이 무엇인지, 거기에 기준을 두고 오늘을 사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에요. 내 마음에 따라서 사는 것이 아니예요.
그렇게 하기 위해서 오늘의 본문은 먼저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라고 말씀합니다. 이'본받는다'라는 말은 헬라어로 '수스케마티제스테'라고 합니다. 여기에 '스케마'라고 하는 동사가 나옵니다. 이것은 '유행'이라는 말이에요. 외모에 끌려가는 유행을 말하는 것이에요. 겉모양만 보고 따라가는 거예요. 그게 '스케마'예요. 그런고로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하는 것은 외모만 보고, 형식만 보고 끌리지 말라 함입니다.
오늘 아침 성경공부 시간에 어떤 분이 참 재미있는 질문을 해요.
"목사님,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고 하는데 말입니다." "그렇지요." "그런데 한국의 5대 재벌이 다 예수를 안 믿어요. 그런데 돈만 많이 벌고 아주 잘살아요. 목사님, 그것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그래서 제가 물어보았습니다. "돈이 많다 적다를 생각하지 말고, 행복하냐 불행하냐를 생각하십시오. 그들이 행복해 보입니까?" 그랬더니 "그런 것 같지는 않아요"라고 대답합니다. 그래서 "그러면 됐지요" 하고 말았어요.
겉만 보니까 부럽고 좋아 보이지만, 여기에 끌리지 말라는 말이에요.
유행을 따라가지 말라는 거예요. 세상의 형식적인 유행, 거기에 끌리지 말라, 세상을 본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본문은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라고 말씀합니다. "변화를 받아"-이 말은 헬라어로 '메타몰ㅍ스데'라고 합니다. 여기에 '몰ㅍ'라고 하는 주동사가 나오는데 이 말은 좀더 깊은 'essential form'을 말합니다. 본질적 형식입니다. 그런고로 본질적 형식의 변화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질적으로 변화를 받아야 돼요. 그래서 예배하고 제사하고, 이렇게 하나님 뜻대로 살면 본질적으로 변화가 와요. 변화를 받아요. 새롭게 돼요. 특별히 마음으로 새롭게 돼요. 마음이 먼저예요. 형식이 먼저가 아니예요. 흉내 내는 게 먼저가 아니예요. 마음으로 새롭게 됩니다. 점점 새로워져요. 그래서 하나님의 깊은 뜻을 알게 됩니다. 전에는 몰랐어요. 하지만 이제 오묘한 것을 알게 돼요. 여기에 하나님의 뜻이 있었구나, 거기에 하나님의 깊은 사랑이 있었구나, 하고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이에요.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총론'이에요. 제사와 예배, 그리고 마음으로부터 새로워져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합니다. 계속적으로 분별해내고, 깨달아나가고…… 그럴 때마다 감사하게 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입니다.
다시 한번 우리들의 제사하는 자세와 예배하는 자세를 바로 하십시다. 그럴 때에 근본적인 변화가 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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