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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자의 기쁨(1장 15절~18절)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명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저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오늘은 전도자의 기쁨이 무엇인가를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다시 한번 마음속에 이 말씀을 깊이 생각해 봅시다. 사람은 그가 선택한 목적만큼 성공하고 그 가치만큼 행복하다고 합니다. 우리가 성공, 성공하는데 이 성공은 잘 세워진 목적과 관계가 있습니다. 실패는 잘못이 아니요 목적을 잘못 세운 것이 잘못입니다.
목적만 바로 세웠다면 이 목적을 향해 나아가다가 멈추어도 되는 것이요, 반드시 그 목적에 도달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실패는 후회를 수반합니다. 잘못했구나, 시간도 돈도 낭비했고 세월을 헛되이 보냈구나하는 후회는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바로 목적을 잘못 세운 데서 옵니다. 목적만 바로 세웠다면 그 길을 가다가 넘어져도 상관이 없습니다.
뒤로 넘어지지 않고 목적을 향하여 앞으로 넘어지기만 한다면 말입니다.
이처럼 목적을 바로 세우고 그것을 향해 나아간 것만큼만 성공이요 그 목적에서 반대로 가고 곁길로 간 것들은 다 실패로 간주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고로 사람은 그가 세운 목적만큼 성공합니다. 또 그 목적의 가치, 즉 어떤 목적을 세웠느냐가 중요합니다. 그것이 영원한 가치를 지닌 것일 때에 우리는 그만큼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상한 것시오, 목적이 될 수 없는 것이요, 진실한 가치를 지니지 못한 것일 때에 우리는 그만큼 불행해집니다. 가령 돈은 목적이 될 수 없는데도 이것을 목적으로 생각했다고 하면 그 돈이 가지는 허무한 가치만큼 그는 불행합니다. 세상의 명예도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이런 헛된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면 그 명예가 주는 허무한 가치만큼 그도 불행해집니다.
어떤 사람이 교회 건축 현장에 찾아가서 벽돌을 열심히 쌓고 있는 인부 세 사람에게 똑같은 질문을 해보았습니다.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그러자 세 사람은 저마다 "나는 벽돌을 쌓고 있습니다." "나는 벽을 쌓고 있습니다." "나는 예배당을 짓고 있습니다."하고 다른 대답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똑같은 벽돌쌓기를 하지만 세 사람의 대답이 이렇게 서로 다릅니다. 그러나 목적은 분명히 하나, 예배당을 짓는 것입니다. 벽들을 쌓거나 벽을 쌓는 것은 결코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세 사람은 같은 일을 하는 것 같지만 같은 것이 아닙니다. 부엌에서 일하건 직장에서 일하건 우리가 가진 대답은 이렇게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일하고 있습니까? 심지어 휴식도 큰 일을 위해 준비하는 것이요 게으름이 아닙니다. 시간 낭비가 아니라 다음 기회를 위해 큰 것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다음날 힘이 날 수 있도록 놀아야지 그 다음날 못 일어난다던가 한 사흘 병원에 입원할 정도라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차라리 공휴일이 없는 것이 낫습니다. 이렇게 목적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알고 거기에 연결시켜 모든 행사와 생활을 영위해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철저하게 복음 전파에 목적을 두었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의 말씀처럼 어머니의 태로부터 택정을 받아 복음 전파를 위해서 세상에 태어났다고 말했습니다. 그런고로 그는 거룩한 목적에 따라서 거룩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목적이 주는 엄청난 가치에 따라서 자기 존재의 가치, 또 자기가 사는 하루하루의 이 모든 생활도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의 목적은 오직 복음 전파에 있었기 때문에 그가 감옥에 있건 밖에 있건, 매를 맞든 맞지 않든, 일이 잘되든지 되지 않든지, 건강하든지 병이 들든지 상관이 없었고, 또 그가 평생 고통으로 여겼던 육체의 가시도 상관이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다 복음 전파를 위해 유익하다면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전도자로서의 바울의 기쁨은 어떤 것입니까? 첫째는 앞장에서 공부한 대로 그의 당한 모든 일-감옥에 갇히는 사건까지도-이 복음의 진보가 된 것을 기뻐하고 있습니다.
둘째, 그는 다른 사람을 통해서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보고 기뻐합니다. 우리는 이런 기쁨을 즐길 줄 알아야 합니다. 무슨 일이든지 내가 해야만 기쁘고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은 기쁘지 않다면 그는 참 불행한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을 통해 전해지는 그리스도, 다른 사람이 열심히 복음전하는 것을 보고 기뻐할 줄 아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의 기쁨을 나의 기쁨으로 누릴 수 있습니다. 다른 집 아이들이 공부를 잘한다면 함께 기뻐합시다. 남의 아이는 저렇게 머리가 좋은데 우리 아이는 왜 이 모양일까 하고 원망하지 맙시다. 아무리 공부 못하고 재주가 없더라도 그게 내 아이인데 어떡하겠습니까? 다른 사람이 잘되는 것을 내가 잘되는 것처럼 생각해야만 합니다. 혹 지나가다가 좋은 정원 가진 집을 보게되거든 "나도 저런 집에서 한번 살아 보았으면 좋겠다"하지 말고 "참 좋은 집이구나"하고 실컷 구경하십시다. 꽃 예쁘게 핀 정원을 구경했으면 그것으로 만족할 일입니다. 남의 집에 있으나 우리 집에 있으나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운 것이요, 어디에든 그 아름다움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분 좋은 일 아닙니까? 그런 기쁨을 함께 누리면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바울은 감옥에 있음으로 얻은 득(得)과 실(失)을 생각할 때 얻은 것이 더 많음을 알고 기뻐합니다. 모든 일에는 얻는 것과 잃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얻기만 할 수는 없습니다. 돈은 벌었으나 건강을 잃어버렸습니다. 출세는 했으나 친구를 잃어버렸습니다. 제가 미국서 공부할 때에 한 교포 학생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이 학생은 어려서 이민을 왔기 때문에 영어를 썩 잘했습니다. 그런데 영어 좀 한다고 영어가 서툰 교포 학생들을 여간 업신여기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마침 그 학생의 아버지가 부탁도 하고 해서 제가 그를 만나 싫은 소리를 해주었습니다. "자네는 한국 사람인데 한국말을 잃어버리지 않았는가? 영어는 좀 하는지 모르나 한국 사람으로 생겨서 한국말을 못하니 자네야말로 '국제 바보'로구먼." 제 나라 말을 잊고도 영어 좀 한다고 이것이 과연 얻은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잃은 것도 많은 것입니다.
우리가 얻은 것을 생각할 때에는 잃은 것도 있음을 알아야 하고, 잃은 것을 생각할 때에도 돌이켜 생각해 보면 얻은 것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바울은 감옥에 있으면서 잃은 것은 생각하지 않고 얻은 것만 생각했습니다. 언제나 이처럼 긍정적으로 얻은 것만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은 기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생활철학을 가질 때에 신앙적인 낙천가가 됩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이 일로 해서 큰 득이 올 것이다, 하나님은 결코 손해 보시지 않을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모든 사건, 모든 환경을 복음 전파라는 영적 차원에서 보면 언제나 얻는 것이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갑시다. 사도 바울은 다른 사람을 통해 이루어진 일을 기뻐하고 있는데, 이것이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입니다. 모든 일이 자기를 통해서만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는 사람은 절대로 기뻐할 수 없습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 한 분이 목회를 열심히 합니다. 그 목사님 부부한테는 자녀가 없기 때문에 교회에 대한 충성이 더욱 대단합니다. 한번은 제가 그 교회 부흥회를 인도하러 갔습니다. 저녁 집회를 마치고 먼저 목사 사택에 돌아와 있었는데 새벽 2시가 되어서야 그 부부가 함께 들어옵니다. 다음날 쓸 주보를 만드느라고 늦었다는 것입니다. 왜 다른 사람한테 맡기지 않느냐고 물으니 다른 사람 하는 것이 마음에 맞지 않는다고 대답합니다. 보십시오. 바로 이러한 사람은 만사를 자기가해야만 안심할 수 있으니 참으로 피곤합니다. 더구나 이런 사람은 남의 잘못에 대해서 용서가 없고 남을 이해할 줄도 모르기 십상입니다. 그 교회에서 예배를 마치고 나가다 보니 통로에 휴지가 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여집사님이 얼른 주워 핸드백에 집어넣는 것을 보고 제 마음이 흐뭇하여 어찌 그리 좋은 일을 하시느냐고 물었습니다. 대답인즉슨 이것을 줍지 않으면 목사님이 나중에 집사들을 불러 마구 꾸지람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도 가끔 교회 현관에서 교인들과 인사하다 보면 어떤 이들이 주보를 흘리면서 나갈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많은 사람이 그 주보를 밟고 지나갑니다. 그때 마음이 아픕니다. 교회 사진이 있고 교인들의 이름이 있는데 이것을 밟고 가서야 되겠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제가 냉큼 주우면 옆에 계신 장로님들이 또 얼마나 미안해하겠습니까? 결국은 제 선행이 장로님들을 정죄하는 가시가 됩니다. 그래서 일부러 안 줍고 있다가 뒤에 지나가는 집사님께 부탁해서 줍게 합니다. 때로 내가 잘한다고 하는 일이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모든 일을 꼭 내가 해야 한다는 사람, 모든 선한 일은 꼭 내가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 목적에 문제가 있습니다. 무엇이 선행입니까? 꼭 내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 마음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잘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다른 사람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도 기뻐해야 합니다. 가능하면 다른 사람에게도 기회를 주어 그 사람을 칭찬 받게 해줍시다. 다른 사람이 선한 일을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것은 한 차원 더 높은 교인이요 성자입니다.
왜 남의 기회까지 빼앗아 내가 하려 합니까? 다른 사람에게 기회를 주어 더 많이 일하게 하고, 나는 뒤에서 작은 일만 하고 기뻐할 수 있다면 이것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모든 교인을 향해 "집사님, 좋은 일 하십니다." "권사님, 좋은 일 하십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 덕 있는 교인입니다. 그저 남이 한 것은 다 못마땅해서 "저걸 손으로 했나, 발로했나"하고 트집잡는 것은 참으로 곤란합니다. 일이란 상대적인 것이요, 완전한 일이란 세상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조금 부족해도 다른 이에게 믿고 맡기며 그 사람이 하는 것을 보고 기뻐해야 합니다. 또 당장에 이루기를 바라지 말고 기다려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감옥에 있습니다. 그곳에 한 3년 있는 동안, 그 긴 시간과 함께 지금 이렇게 모든 일이 열매가 맺힌 것입니다. 내 고난의 열매가, 희생의 열매가 당장에 거두어지기를 바라는 조급한 마음으로 서두를 때에는 우리가 결코 기뻐할 수 없습니다. 또 너무 자기 방법만 고집하면 안 됩니다. 나만 옳다는 고집을 꺾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방법, 그리고 하나님의 길이 따로 있습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오묘한 역사를 보며 기뻐합니다. 또한 원수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일에까지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자녀를 통해 이루어지고, 제자를 통해 이루어지고, 친구를 통해, 이웃을 통해, 심지어 원수를 통해서도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악한 사람을 통해 선한 일이 이루어졌다고 해서 악한 사람이 상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불순한 동기에 따르는 징계를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자기가 전매특허 받아 가지고 있는 줄 아는 사람, 꼭 내가 하는 것만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는 답답한 사람은 그 동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평생 불행하고 기뻐할 수 없습니다.
교회 문제도 그렇습니다. 어떤 교회가 성장하고 어떤 교회가 그렇지 못합니까? 교회 성장학에서는 개인적 관심이 적은 사람들이 모인 교회가 부흥된다고 합니다. 전부 내가 다 해야겠다고 하는 사람들만 모이면3백 명도 모이기 어렵습니다. 헤게모니(hegemony)쟁탈전으로 교회가 크지 못하고 앉은뱅이가 되어 버립니다. 터줏대감 몇 사람의 손에 교회가 마음대로 움직여지고 다른 사람은 발도 못 붙입니다. 자기도 안할 뿐더러 다른 사람도 못하게 합니다.
어느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교회가 하도 더워서 에어컨을 설치하려고 하니 장로님 몇 분이 안 된다고 반대를 합니다. 어느 집사님이 답답해서, 그러면 자기 개인 돈으로 에어컨을 설치를 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장로님들, 이번에는 집사가 건방지다고 나무랍니다. 그렇게 말하는 장로님들 자신은 집안에 뿐만 아니라 자동차에도 에어컨을 달아 놓았으면서 말입니다. 얼마전 또 어느 교회에 갔더니 그곳 목사님이 여름철에는 더워서 교인 수가 줄어든다고 걱정하면서 소망교회 사정을 묻습니다. " 우리 교회는 냉방이 잘 되어서 집보다 교회가 더 시원합니다. 그러니 여름엔 더 많이, 더 일찍 나옵니다."하고 설명해 드렸습니다. 자기가 가진 방법만 고집하면 어떻게 교회가 부흥하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커야 할 교회가 크지 못합니다. 늘 똑같은 수준에 머물러 있게 됩니다.
내가 하는 일이 참으로 교회를 위한 것인가 나 자신을 위한 것인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이것을 극복하지 못하면 절대로 교회 담장이 넓어지지 못합니다. '나만, 내 방법만…'하는 편협한 생각을 툭툭 털어 버리고 나면 이 사람이 한 것도 마음에 들고, 저 사람이 한 것도 좋아 보이는 법입니다. 내가 잘한 일뿐만 아니라 남이 봉사한 것도 다 은혜가 될 때에 비로소 교회는 성장합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말씀을 보면, 복음을 전하는 사람에 두 부류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좋은 뜻으로 복음을 전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바울이 옥에 갇히자 바울 선생님이 저렇게 옥에 갇혔으니 우리라도 열심히 전도하고 기도하자고 나선 사람들입니다. '수백 명, 수천 명 앞에서 복음을 전해야 할 사람이 저렇게 갇혀 있으니 얼마나 답답할까? 우리가 그의 마음을 기쁘게 하기 위해 대신 전도하자'고 열심을 내었습니다. 바울은 이같은 소식을 듣고 기뻐합니다. '나 혼자라면 전도해 보았자 몇 명에게나 했겠는가. 온 교인이 이렇게 합심하니 더 많이 전해지는구나.'감옥에서 자신이 고생하는 것은 돌보지 않고,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보고 기뻐합니다. 제가 이북에서 경험한 일입니다만, 그때 목사님들이 신사참배나 공산당 문제로 감옥에 갇히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감옥에 갇혔다 하면 주일날 교회가 터질 정도로 많은 성도들이 모였습니다. 목사님 대신 장로님이나 집사님들이 설교하는데도 앉을 자리가 없었습니다. 새벽 기도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불도 켜지 않고 설교도 없지만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목사님도 안 계신데 우리가 편히 쉴 수 없다고 열심히 기도하고 전도하기 때문에 목사님 계실 때보다 더 교회가 부흥되었던 것입니다.
둘째, 사도 바울을 괴롭게 하기 위해서 질투로 전도하는 부류입니다.
"저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17절)." '다툼'이란 헬라어로 에리데이아스 라이벌 의식, 시샘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어떤 대가를 위해 일한다는 뜻입니다. 결국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했다'는 것은 복음 전파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달리 바라는 것이 있어 복음을 전했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당시 명성 높은 이방인의 사도였습니다. 복음 해석의 권위자였습니다. 그처럼 모든 사람으로부터 존경받는 바울이 로마로 온다고 합니다. 로마에 교회를 세우고 큰 역사를 이룬다는 소문이 들립니다. 오기는 왔는데 죄수의 몸으로 왔다는 것입니다. 이제 바울을 시샘하던 자들은 좋은 기회가 왔다고 생각합니다. 바울의 이름을 이 로마에서 형편없이 만들어 주고 이방인의 사도라는 그 위대한 명성을 땅바닥에 떨어뜨리기 위해, 우리 이름을 내기 위해 복음을 전하고자 합니다. 그러니 저들의 전도는 질투에서 나온 불순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오히려 복음 전파에 플러스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니 바울을 시샘한 자들은 상심하게 되고 언젠가는 회개해야 할일만 남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무슨 방도로든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것을 기뻐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무슨 방도'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요, 그의 인격이 격하되든 추락되든 그것과는 상관없이 복음이 전파되기만 하면 기쁘다는 뜻입니다.
질투라는 것은 참 무서운 것입니다. 특히 믿는 자에게는 마귀 시험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질투로 복음 전하는 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극복하고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노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바울이 이처럼 기뻐할 수 있었던 근본치유 방법은 무엇입니까?
첫째, 겸손입니다. 질투를 극복한 사람은 자기를 이긴 사람입니다. 자기를 완전히 이긴 사람은 질투가 없습니다. 조금 언짢은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어떤 부인의 남편이 딴 여자와 동거를 합니다. 사람들이 위로를 하는데 부인은 별로 마음 상해하지 않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남편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가 어디 가서든 행복하기만 하면 나도 기쁘다는 것입니다. 대단히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요 여성을 무시하는 이야기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그 부인의 순수한 사랑이 돋보이지 않습니까?
우리의 마음에 왜 고통이 있습니까? 그 고통의 상당 부분은 질투 때문입니다. 사랑한다고 하나 질투하면 사랑이 아닙니다. 시기와 질투로 꽉차서 부글부글 끓고 있으니 총명도 인내도 겸손도 없고 자기를 극복하는 능력도 없습니다. 또 하나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유명한 이스라엘의 국방상 모세 다얀이 이혼하고 딴 사람과 재혼했습니다. 기자들이 이혼 당한 부인에게 얼마나 괴로우냐고 묻자 그녀는 대답했습니다. "아니요, 나는 내 남편을 위로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나라를 위해 크게 일하는 분인데 나 말고 딴 사람이 잘 위로해서 큰 일을 할 수 있다면 좋은 일이 아닙니까?" 이것이 타임지에 크게 실린 적이 있습니다. 인권 문제라든가 도덕적으로 옳고 그르고를 떠나서 질투가 없는 깨끗한 사랑에는 고통이 따르지 않습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슬퍼지는 것, 유행가 가사처럼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고 하는 것은 모두 질투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기 문제를 깨끗이 잊은 질투 없는 사람이기에 오해를 받든 무시를 당하든 오직 그 결과만 보면서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둘째, 다른 사람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사도 바울은 다른 사람을 통해 이루어지는 복음의 역사를 넓은 마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셋째, 오직 그리스도만 위하는 마음입니다. 바울에게는 복음 전파가 최우선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에 유익이 되고 부흥될 수만 있다면 내가 멸시받는 것은 문제되지 않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사업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그 영광을 큰 것으로 생각할 때에 작은 일들은 다 소멸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기뻐했습니다. 이것이 전도자의 기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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