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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의 종말(2장 14~17절)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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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의 종말(21417)

 

 

그러므로 나는 저희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을 좇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나타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이며 예루살렘교회의 기둥이자 으뜸가는 교회 지도자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베드로를 가차없이 책망했습니다. 이 일은 신학적 해석이 빈곤하고 아주 미숙한 때에 있었던 일입니다마는 어떤 의미에서는 베드로가 확실하게 신학화 체계화된 신앙을 가지지 못했고 이방인에 대한 선교신학에 미숙했던 데에 원인이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방 문화와의 관계, 이방인에 대한 복음적 선교전략 체계를 세우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어쩔수없이 현실적으로 두 문화권 속에 있었습니다. 교회는 분명히 한 교회입니다마는 처해 있는 문화권적 입장에서 보면 형식이 둘이었습니다. 하나는 유대사람들이 모이는 교회요 또하나는 비()유대사람, 다시 말해 이방인의 교회였습니다. 지역적으로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예루살렘 밖에 있는 교회라고 이방인의 교회이고 예루살렘 안에 있다고 하여 다 유대교회인 것은 아닙니다. 우선 예루살렘 안에도 두 교회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유대사람들의 교회이고 또하나는 헬라파 유대사람들의 교회입니다. 헬라파 유대사람들의 교회는 엄격히 말해서 이방적 성격을 띠고 있는 교회입니다. 우리가 한국 교회라고 하면 우리나라에 있는 한국 교회와 외국에 있는 한국 교회를 다 포함하는 것과 같습니다. 지역은 다르지만 그곳에 한국사람이 살고 한국사람이 모이면 한국교회입니다. 지정학적으로 구별되는 것이 아닙니다. 서울에 있으면서도 일본사람이 모이면 일본 교회요, 미국사람이 모이면 미국 교회요, 화교들이 모이면 어디까지나 중국 교회입니다. 여기에 있지만 자기네 나랏말로 설교하고 자기네 문화권에서 예배를 드립니다. 저는 얼마전 한국에 있는 교역자 수련회에서 한 시간 동안 설교를 했습니다. 겉보기에는 한국사람과 전혀 다를 바가 없어 보이지만 중국인 통역을 세워야만 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대부분 한국에서 태어난 사람들이라 쉬운 한국말은 그런 대로 구사하는 편입니다. 복음성가도 한국말로 곧잘 부릅니다. 그러나 설교만은 어려운 말을 많이 쓰기 때문에 부득이 통역을 세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루살렘 안에도 순수한 유대사람의 교회가 있고 소위 헬라파 유대사람의 교회가 있었습니다. 물론 예루살렘 밖에는 각 나라에 흩어져 이방인의 교회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에 역시 두 교회가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유대사람의 교회와 이방인의 교회(비 유대사람의 교회)입니다.

유대사람들의 교회에서는 유대말을 씁니다. 설교도 히브리말로 합니다. 그들 나름의 전승과 문화를 통해서, 그 문화권 안에서 예배를 드립니다.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키고 안식일을 지킵니다. 그대로 자기네가 종교 문화적으로 받아오던 것들을 그대로 다 지키면서 예수를 믿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방인의 교회는 어떠했습니까? 사도행전 15장에 자세하게 나타납니다마는 이방인이 예수를 믿기 위해서는 지켜야 할 규범들이 있었습니다.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20)"-우상을 섬기는 일과 거기에 따르는 모든 종교적인 행사에 가담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제외한 모든 것-즉 할례 받지 않은 사람은 굳이 할례 받을 필요 없고 안식일을 지키지 않던 사람은 그대로 주일을 지키면 된다고 허락했습니다. 또 복장도 유대 복장을 따를 필요 없다, 너희는 너희의 문화권 안에서 다만 우상 섬기는 행위와 그와 관련된 것들을 제하고 예수를 믿으면 된다-이렇게 허용한 것입니다. 이렇게 두 스타일의 교회가 엄연히 존재했지만 지역이 다르고 따로 떨어져 나름대로 지내니 처음에는 별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자연히 두 스타일의 교회 사이에 교통이 있게 되니 문제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그 좋은 예가 14절에서 본 사건입니다. 예루살렘에만 있었으면 좋았을 베드로가 안디옥을 방문했고, 이방사람의 집에 들어갔고, 그들과 한자리로 음식을 나누니, 곧 유대교회가 이방교회에 들어온 형국이 되었습니다. 결국 문제가 생기고 갈등이 생기고 충돌이 생겼습니다. 이방사람의 집에 앉아서 먹다가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사람들이 나타나자 당황하여 음식을 그치고 일어나니 참으로 모양이 좋지 않아졌습니다. 베드로의 입장에서는 유대사람 노릇도 제대로 못했고 이방사람 노릇도 제대로 못한 것이 됩니다. 엉거주춤하니 이도 저도 아닌 꼴-위선을 드러내고 맙니다. 14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래서 바울에게 호된 면박을 당합니다.

유대인은 유대인답게 살고 이방인은 이방인답게 살아야 하는데 두 방향으로 다 잘못되었다는 말씀입니다. 혼미하게 되었고, 위선에 빠지게 되었고, 신앙 자체가 흔들리게 되었고, 마침내는 다른 사람까지 위선에 빠지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큰 문제가 터지고 만 것입니다. 이 일을 어떻게 하나? 반드시 해결하고 넘어가야 할 문제였습니다. 신학적 해석을 요하는 문제입니다. 바울은 이를 계기로 근본적인 해결을 주고자 합니다. 이를 거울삼아 오늘의 우리도 우리 스스로에게 근본적으로 물어보아야 하겠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가 되었습니까? 지금 우리네 교회가 처한 형편도 해결을 요구하는 심각한 문제가 많습니다. 같은 한국사람이 모이는데도 이 교회의 스타일과 저 교회의 스타일이 다릅니다. 손뼉 치는 교회가 있습니다. 복음성가 스타일의 교회가 있습니다. 조용한 교회가 있고 시끄러운 교회가 있습니다. 여러 가지 스타일이 있습니다. 문제는 어떤 스타일이 나의 체질에 맞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스타일은 나쁘고 저 스타일은 좋다고 비판할 것이 없습니다. 내 체질에 맞는 곳으로 가면 됩니다. 음식으로 한번 비유해봅시다. 한식도 있고 양식도 있습니다. 일식도 중국식도 있습니다. 내 입맛대로 골라서 먹으면 될 일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남이 먹는 음식을 나쁘다고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내 것이 좋다고 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가지 꼭 기억해야 될 것은 메뉴가 달라도 재료는 똑같다는 사실입니다. 다 사람이 먹어 살로 가는 것으로 만듭니다.

교회는 같은데 스타일이 다르다는 문제를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우리는 신학적으로 분명한 해답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변할 수 있는 것과 변할 수 없는 것, 양보할 수 있는 것과 양보할 수 없는 것, 다를 수 있는 것과 다르면 안 되는 것을 엄격하게 구분해야 합니다. 영어를 제대로 못하는 사람인데 서양사람하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서양사람도 한국말을 못합니다.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데도 둘이서 퍽 재미있게 살기에 궁금해서 물어보았습니다. "말도 잘 통하지 않는데 어떻게 그토록 재미있게 살 수 있소?" 그랬더니 현답(賢答)을 내놓습니다. "결혼생활을 말로 합니까? 사랑을 말로 합니까?" 옳습니다. 우리는 흔히 대화가 되느니 안 되느니 합니다마는 말만 있다고 대화가 되는 게 아니잖습니까? 우리는 말 가지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말이 통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행복하게 아름답게 살아갈 수 있는 법입니다. 사랑하는 부부 사이는 눈빛만 주고받아도 금실이 좋습니다. 한번은 금혼식(金婚式) 하는 집에 가본 적이 있습니다. 금혼식은 결혼한 지 만 50년 되는 날을 기해 그들 부부를 축하하기 위하여 다시 결혼식의 형식을 빌려 치르는 잔치입니다.

저는 신랑 되는 할아버지께 슬그머니 물어보았습니다. "할머니께 사랑한다는 말 해보셨습니까?" 할아버지는 그런 소리 한번도 해보지 않았다고 대답합디다. 그런데도 50년이 지나도록 해로(偕老)하고 있습니다. 요즘의 젊은 부부들을 보면 사랑한다는 말을 하루에도 몇 번씩 나누다가도 데꺽데꺽 잘도 헤어집니다. 말은 꼭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말이 필요하다 싶으면 이미 병들기 시작했다는 조짐입니다. 대화가 있느니 없느니, 우리네가 언제 말을 하고 살았습니까? 눈치로 살아왔습니다. 말이란 벌써 한 걸음 멀어진 다음에 사용하는 제스처입니다. 우리가 어린아이를 사랑합니다. 말로 사랑합니까? 어린아이는 말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말이 필요 없습니다.

언어의 문제를 비롯하여 스타일의 문제가 있고, 풍속의 문제도 문화의 문제도 있습니다. 복잡한 문제가 참 많습니다마는 원점으로 돌아가 우리가 반드시 생각해야 할 근본적인 문제는 구원에 대한 문제입니다. 구원은 어디에서 오는가? 이것부터 생각해야 합니다. 구원은 바로 의()의 문제입니다. 이 의의 문제를 놓고 한번 생각해봅시다. 의를 이루어야 되기 때문입니다. 의는 믿음에서 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를 의로 여김 받았습니다. 율법을 통해서는 의를 이룰 수 없습니다.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얻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의로 여기신다-칭의(稱義)의 문제가 있습니다. 칭의는 율법을 행함으로 얻어지는 게 아닙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얻어지는 것입니다. 이 과제는 헬라사람이든 로마사람이든 유대사람이든 상관이 없습니다. 동서고금을 통해 똑같습니다. 누구이건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습니다. 나의 의를 내세우는 것은 십자가에 대한 모독입니다. 십자가도 필요 없고 예수도 필요 없이 스스로 선을 행하여 의롭게 되겠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욕이 됩니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고 그 의롭다 함을 얻은 상태에서 겸손과 온유와 순종으로 새생활을 살아가야 합니다. 내 의가 아니요 오직 은혜로 새로운 생을 사는 것입니다. 늘 온유와 겸손과 감사로, 그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 감격으로만 살아갑시다. 그것이 예수 믿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네 가지로 요약해서 말할 수 있습니다. 첫째, 칭의로 의를 얻어야 되는 것이지 내 의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둘째,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은 율법으로써가 아니요 오직 믿음으로입니다. 셋째, 내 의가 없습니다. 내 의를 내세우려고 하는 동안에 그리스도로부터 멀어집니다. 그리고 넷째, 예수를 믿는 그 믿음과, 그 긍휼과 그 사랑에 대한 감사로만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네 가지는 문화를 초월하고 남녀를 초월하며 양()의 동서 시()의 고금에 같습니다.

아무도 자기의 의로써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내가 스스로 의롭게 되려고 하다보면 있어서는 안될 두 가지의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하나는, 의를 이루었다고 교만하거나 의를 이루지 못했다고 절망하는 것입니다. 이 어느 경우도 죄입니다. 그 둘은, 실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스스로 의롭겠다고 애를 쓰다보면 되지 못하게도 남을 멸시하게 됩니다. 내가 너보다 낫다, 내가 더 의로웠다고 교만하면서 눈을 깔고 상대를 대합니다. '나는 술 담배를 하지 않는다. 너는 술 담배를 하는구나.' 회심의 표정을 짓고 경멸합니다. 극성스러운 사람은 스스로 하나님이 되어 심판합니다. "술 담배를 못 끊다니, 그래가지고 어떻게 교회를 나오나?" 그러나 모를 일입니다. 나중에 어느 쪽이 천당갈는지, 그것은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하나님은 술 담배 가지고 사람 판단하시지 않습니다.

사람의 생각가지고 도토리 키재기를 할 것이 아닙니다. 내가 뭘 좀 더했고 다 잘했다 하여 교만하게 굴고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가끔 이런 경우가 있습니다. 너무 노골적이어서 죄송합니다마는 이해하고 들으시기 바랍니다. 교회에서 집사 임명을 한다든가 할 때에 보면 제게 쓸데없는 질문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무개 집사님이 이혼했다면서요?" 몇 번이나 되풀이합니다. 제가 되돌려 묻습니다. "당신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혼해볼 마음을 한번도 먹어본 적이 없습니까?" 몇 번 있었다고 대답합디다. 갈라서고 싶었을 때 용기가 없어서 갈라서지 못해서 다행히 이혼하지 않고 살아왔을 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다 같습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다. 남은 이혼하기도 하고 이혼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혼하지 않고 살아오는 내가 그들보다 더 더 의롭다고 할 수 있습니까? 10년이 가도록 내외간에 말 한마디 주고받지 않은 채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디다. 남보기에는 아무런 갈등도 없이 무사해보였습니다마는 상처가 안으로 곪고 있었던 것입니다. 당사자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어느 노처녀 대학교수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그녀에게는 결혼을 하지 않은 이유가 있습니다. 고등학교 대학교에 다닐 때에 저에게 가끔 이런 이야기를 하곤 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무사하게 사셨죠. 그러나 쳐다보고 있으려면 저렇게 살 바에야 뭣하러 함께 사나 싶어요." 그래서 "이놈!"하고 저는 꾸짖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못써. 시집 못간다." 그런 일도 있었는데 정말로 시집 안 가고 삽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사는 것을 보니 무사하기는 무사했습니다. 그러나 그토록 재미없게 살 바에야 무엇하러 사나 싶은 인상을 강하게 받았던 모양입니다. 아무렇든 우리는 남을 두고 잘했느니 잘못했느니, 내가 더 낫다느니 너는 틀렸다느니 하고 비판할 자격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다 소용없는 일입니다.

 

본문 말씀이 우리를 일깨우고 있습니다. 셋으로 나누어 엄격하게 말씀합니다. 먼저 16절 전반부를 봅시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전혀 그럴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전체적으로 개관적으로 말씀합니다. 이어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사람은 율법으로 말미암아서는 절대로 의롭게 될 수가 없다, 그런데 나는 개인적으로 예수를 믿음으로 예수의 의를 힘입어서 내가 의롭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후반부를 봅시다.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이세상의 모든 사람을 다 포괄하는 말씀입니다. 그 누구도 율법으로는 칭의를 얻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16절은 갈라디아서의 대강령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핵심이 여기에 있습니다. 구원의 방법은 그러므로 동일합니다. 사회적 지위나 종교적 훈련의 여하나 교육적 배경이나 종족적 기원이나 개인적인 인간 수양이나 이른바 자신의 의라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율법 앞에서는 그런 것이 다 무효입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이 십자가의 거룩한 은혜 앞에 우리는 완전히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나 자신으로도 자랑할 것이 없고 예수를 바로 믿는 사람은 남을 비판할 용기가 없습니다. 무릇 우리는 너나할것없이 거기가 거기이기 때문입니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탓하는 어리석음을 범할 수 없습니다.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 외식하는 자여" 하고 예수님께서 엄히 말씀하십니다.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6 : 42)." 여러분, 남의 눈에서 티가 보이거든 내 눈에는 훨씬 더 큰 들보가 들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No comment. 비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진리 안에서 구원 얻기를 바라며 구원 얻는 줄로 알고 사는 사람은 스스로 하나님 앞에 겸손할 뿐더러 그 누구도 비판하지 않습니다. 비판할 용기가 없는 법입니다.

30여년 전 제가 인천에서 목회를 시작할 즈음의 이야기입니다. 보기 좋은 일이 아닙니다마는, 당시 그곳에는 미군들이 많았는데 우리 나라 여자들과 1년 혹은 몇 달씩 계약결혼을 하고 살았습니다. 그들이 사는 집에는 문간에 빨간 글자로 된 큰 번호가 붙어 있었습니다. 1 2 3 번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그 빨간 번호를 보면 그 집에 어떤 사람이 사는지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때 그곳을 지나다니면서 그들이 참 의롭다는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나는 이런 사람이오'하고 발표를 하고 사니까 말입니다. 아울러 호손(Nathaniel Hawthorne)주홍글씨도 떠올랐습니다. 여러분, 'adultery'의 머릿글자 A를 주홍빛으로 써서 가슴에 달고 사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어느 쪽이 더 편하겠습니까? 주홍글씨에서 말하는 고뇌는 그 누가 가지고 삽니까? 이 소설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다 아실 것입니다. 사람 사이에 누가 누구를 손가락질할 수 있습니까? 무릇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은 아무 말이 없습니다. 있다면 오직 감사가 있을 뿐입니다. 구원받은 데 대한 감사만이 있습니다. 나아가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는 '행함으로' '믿음으로' 라는 말을 많이 듣고 많이 하는데, 무엇을 의미하는 말들입니까? '행함으로'는 형식적인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외식적인 것, 겉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좀 더 했다, 더 선한 일을 했다, 더 의롭다 - 하지만 모두 겉으로 드러나는 것일 뿐입니다. 이에 반하여 '믿음으로'는 내적인 것입니다. 내실을 기합니다. 하나님 앞에 제사 드리는 것은 '행함으로'요 형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는 것은 '믿음으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비유하여 말씀하십니다. 바리새인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합니다.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18 : 12)"-여기까지는 그래도 괜찮았습니다. 그러나 함께 성전에 올라간 세리를 가리켜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라고 기도합니다. 하기야 잘했습니다. 십일조를 바치고 금식을 하고, 딴에는 선한 일도 한다고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소용이 없습니다. 세리는 죄인입니다. 죄인으로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고개를 들지 못합니다.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통회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말씀에 따르면 의롭다 함을 얻을 자는 세리 쪽입니다. 겉으로 나타나는 거창한 의식이나 굉장한 행위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실이 있어야 합니다.

옷을 찢을 것이 아니라 마음을 찢을 것이며, 물질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드려야 합니다. 정성을 드리고 중심을 바쳐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으로'입니다. '행함으로''믿음으로'의 차이가 이렇게 큽니다.

'행함으로'는 다분히 자기중심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기뻐하실 것이다, 이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좋아하실 것이다-저 마음대로 판단하여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합니다. 그렇게 하다가 어느 시점에 가면 하나님을 잊고 맙니다. 그때부터는 사람에게 잘 보이고자 구제하고 금식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6:17)." '안 하는 것처럼 구제하려거든 나팔을 불지 마라'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면 그것이 바로 '믿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나만이 알고 있는 비밀입니다. 보아하면 기도를 해도 '내가 40 일 금식 기도했다', 집을 나가다가도 '기도하러 간다'고 나팔을 불고 다니는 사람이 있습니다. 얼마 전에도 교회에 나온 사람 중에서 얼굴이 말이 아니게 초췌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몸이 갑자기 약해졌습니다.

그래서 제가 걱정이 되어 어쩌다 그렇게 되었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당사자는 대답 없이 빙그레 웃기만 합니다. 옆에 있던 사람이 대신 말해줍니다. "40일 금식기도를 했답니다." 성경 말씀대로 화장이라도 좀 하고 나왔으면 좋을 뻔했습니다. '믿음으로''행함으로'의 차이가 이것입니다. '믿음으로'는 자기중심적으로 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는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내가 꼭 의롭게 되겠다는 것이 아니요, 꼭 선하게 되겠다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말씀만 하십시오, 그 말씀대로 순종하겠습니다'라는 것입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습니다. 온유한 마음으로 순종할 뿐입니다. 겸손과 순종으로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여서 내가 justification-칭의를, '의롭다 함'을 얻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구약과 신약을 막론하고 어디서나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강조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4:3)." 하박국에서도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2:4)"라고 말씀합니다. 앞서도 말한 바 있지마는 이 두 요절이 사도 바울에게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는 창세기에서 하박국까지 이의 맥락을 찾아나가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행해야 할 율법에 대해서 생각해봅시다. 율법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겠습니까? 이 문제는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좀더 깊이 연구하여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결론은 한마디로 '근본정신으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법으로 말한다면 '법 정신으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법이 누구를 위해 존재하느냐의 이야기가 됩니다. 요즈음 자동차를 운전하고 다니다보면 '비보호' 좌회전을 해야 하는 곳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 설 때마다 늘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보호해줄 수 없으니까 가다가 사고 나도 책임은 네가 지라는 소리니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관련 있는 사람들에게 '비보호'라는 말을 '자율'이라는 말로 바꾸는 게 더 적절하지 않겠느냐고 말해본 적도 있습니다마는 글쎄올시다. 법조문도 그렇습니다. 법이라는 것이 무엇 때문에 만들어졌습니까? 애초의 법 정신으로 돌아가서 해석해야 합니다. 여기에 판사님도 계실 줄 압니다마는 법은 그 조목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잖습니까? 무엇이 몇 조에 있고 없고 하는 것은 그것을 적당히 피해가며 책임을 면하자는 문제일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법의 정신'입니다. 누구를 위하여, 무엇 때문에 만들어졌느냐-이렇게 묻고 해석이 나와야 법이 됩니다. 율법이 그렇습니다. 애초에 율법이 왜 있게 되었습니까?

첫째로 율법은 civil rule(민법)입니다. 출애굽기나 민수기를 보면 계속해서 민법에 속하는 조항들이 나옵니다. 빚은 이렇게 갚아라, 때린 사람은 이렇게 처벌하라-이런 경우는 이렇게 하고 저런 경우는 저렇게 하라고 규범화하고 있습니다. 둘째로, 제사법입니다. 하나님 앞에 제사할 때는 이렇게 해야 한다-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자세를 규범화하고 있습니다. 이 제사법을 통해서 우리는 십자가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리고 셋째로는 도덕법입니다. 도덕법에는 먼저 양심이 전제됩니다. 법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마음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잘 지켜지지 않기 때문에 법이라고 따로 만들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의미는 항상 살아 있는 것입니다. 도덕의 규범은 바뀌는 듯하지만 그 내용과 근본정신은 꼭 같습니다. 하므로 우리는 율법을 구원의 사다리로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율법을 지켜서 의를 만들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의롭다 함을 얻겠다고 한다면 망상입니다. 율법은 질서를 위하여 건강을 위하여 행복을 위하여 있는 것이라 생각하고 받아들일 것입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습니까,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을 위해 율법을 주셨습니까, 율법을 위해 사람이 난 것입니까? 어디까지나 사람을 위해 안식일이 있습니다. 사람을 위해 율법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살고, 우리가 행복하고, 우리가 복 받고, 우리가 질서 속에 평안히 살도록 해주시자는 것입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법으로 생명을 보호하시고, 도둑질하지 말라는 법으로 사유재산을 보호하시고, 간음하지 말라는 법으로 순결을 보호하시고, 거짓증거 하지 말라는 법으로 우리의 인격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것이 율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우리를 위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율법을 받아들이고 감사한 마음으로 지킬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법 해석입니다. 건방지게도 이것을 꼭 지켜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 의롭다 함을 얻겠다 하다가는 그만 교만 방자해져서 당치도 않게 남을 멸시하고-이렇게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율법이 있는 유대에서나 율법이 없는 이방에서나 근본적인 법 정신은 같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끝난 것입니다. 유대사람에게나 이방사람에게나 율법은 무효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율법도 삽니다. 바로 지킬 수 있습니다. 근본 의, 법 정신으로 돌아가서 지키는 것이므로 그렇습니다.

그리하여 결론은 이렇습니다. 유대사람들이 주장하는 율법이란 이제 그네들의 특수한 문화형태일 뿐입니다. 유대사람들에게 전승되어온 문화이며 형식입니다. 그 깊은 정신은 유대사람에게나 이방사람에게나 같습니다. 오직 믿음으로써만 구원을 얻습니다. 이것이 대종합이요 대결론입니다. 이 진리 안에, 이 복음 안에 살아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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