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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은혜의 복음(1장 1~5절)

by 【고동엽】 2022. 1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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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복음(115)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은 함께 있는 모든 형제로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영광이 저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우리가 잘 아는 종교개혁자 칼뱅(Calvin, Jean) 선생은 아우구스티누스와 함께 예정론(豫定論)의 태두(泰斗)입니다. 그래서 그는 성경 중에서 특히 에베소서를 좋아했습니다. 에베소서에는 예정론에 대한 말씀이 많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145절에도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라고 단적으로 예정론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루터(Luther, Martin)는 갈라디아서를 특히 좋아했습니다. 그가 생애에 걸쳐 갈라디아서 주석을 두 번이나 쓴 것도 그만큼 갈라디아서를 좋아하고 중요시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갈라디아서 주석은 그 분량도 이를테면 역시 그가 쓴 로마서 주석에 비하여 두 배나 됩니다. 로마서는 16장까지 있고 갈라디아서는 그 절반도 못되는 6장밖에 안되는데, 주석의 분량은 그 반대라는 말입니다.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는 신약성경에서 가장 교리적인 책들입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생애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 어디에서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 그 행적과 교훈을 상세하게 알려줍니다. 또한 사도행전은 말 그대로 사도들의 행적을 기록한 말씀입니다. 그밖에 고린도전후서, 빌립보서, 디모데전후서와 같은 말씀들은 일종의 목회서신(牧會書信)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당시의 초대교회에서 발생한 사건이나 문제를 수습하고 해결하기 위하여 써 보낸 편지글입니다. 이에 비하여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는 기독교 교리를 전반적 체계적으로 다룬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도대체 내가 무엇을 믿는 것이며 기독교의 정체가 무엇인가를 알고 싶다면 반드시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읽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한 스무 번 반복하여 읽어보면 기독교가 과연 어떠한 신앙인지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갈라디아서는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 총회(사도행전 15장에서 언급된 그 총회) 직전인 주후 48년 경 수리아 안디옥에서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이 편지를 쓰게 되기까지에는 복잡한 사건들이 참으로 많았습니다. 북갈라디아 남갈라디아가 어떻고, 갈라디아 교회가 어떤 형편에 있었는가 하는 이야기는 일단 생략하기로 하고, 먼저 로마서의 경우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 당시 세계의 중심이요 수도라고 할 수 있는 로마에 가기를 원했습니다. 로마에서 복음을 증거하고 교회를 세워 그곳으로부터 만방으로 복음이 전파되기를 바랐습니다. 한마디로 로마를 복음의 기지로 삼고자 했던 것입니다. 내용 중에 보면 이미 몇몇 사람들을 로마에 보냈던 것 같습니다. 또한 로마에는 이미 가정교회들이 세워지고 있었습니다. 아무튼 사도 바울은 로마에 가서 그들이 알고 있는 잘못된 교리를 바로잡고, 확고한 기독교 교리를 정착시키며, 교회를 세워 선교의 역사를 이루고자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로마를 교회의 중심 선교의 중심으로 삼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정이 여의치 않았습니다. 로마서를 공부할 때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는 예루살렘으로 가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그곳에서는 큰 핍박과 어려운 환난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로마로 가고자 하는 계획을 잠시 보류하고 예루살렘으로 먼저 가기는 가지만 어쩌면 핍박을 당하여 죽게 될는지도 모릅니다. 죽으면 로마에는 영영 가지 못하고 맙니다.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예루살렘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처지라서 로마서를 씁니다. 죽어서 로마에 가지 못하더라도 이 편지로 메시지를 대신하고자 평생 전하던 기독교 교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차례로 쓰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동기가 참으로 아름답지 않습니까? 이렇게 하여 기독교 교리에서 윤리에 이르는 방대한 내용을 마침내 기록으로 남기게 되었습니다. 여기에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제 갈라디아서의 경우를 봅시다. 이방인으로 사도된 바울은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합니다. 이 선교의 과정에서 숱한 박해를 당합니다. 특히 유대주의자들의 공박(攻駁)이 심했습니다. 때문에 사도 바울은 유대주의자들을 상대로 기독교를 변증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한 마디로 갈라디아서는 유대주의자들의 잘못된 신앙관을 논박(論駁)하고 기독교의 바른 진리를 변증하는 것이 그 목적이요 동기입니다. 당연히 그 내용은 기독교 교리의 전반을 다루게 됩니다. 그가 평생토록 전파하던 복음과 교리의 진수를 요약하여 써 놓은 이 갈라디아서는 흔히 "작은 로마서"라고도 불립니다. 이처럼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는 형제와도 같은 밀접한 관계에 있습니다

종교개혁자 루터의 사상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라는 것입니다. 이는 프로테스탄트 교리의 중심이 됩니다. 인간의 공로, 선행, 인간적인 지식-이런 것들을 모두 부정한다는 것이 그 중요한 의미입니다. 루터가 자신의 생명인 양 귀하게 여긴 이 교리--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Justification by faith)고 하는 교리를 갈라디아서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의 주석에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하는 교리를 상실하면 기독교 교리 전부를 상실하는 것과 같다'라고 말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이 교리가 그만큼 기독교 복음의 핵임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이 중요한 교리가 의미상으로는 성경 전체에 걸쳐 깊이 드리워져 있습니다마는 형식상으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라고 문자로 기록되어 있는 성경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뿐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쓴 많은 편지 가운데서도 유독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만 이 교리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좀더 분석해보겠습니다. 'to justify'-의롭다 한다,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이 말은 헬라어로 '디카이오오'입니다. 이 헬라어는 신약성경에 모두 14번이 나옵니다. 또한 '(righteousness)'는 헬라어로 '디카이오스우네'입니다. ''라고 하는 말이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데 이 말이 42,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만 나옵니다. 예외가 있다면 고린도전서 611절과 디도서 37절에 각각 한번씩 나올 뿐입니다. 이러한 점을 감안해보더라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라는 교리는 로마서갈라디아서에서만 특별히 강조된 교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점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이 교리의 중요한 의미를 깨달아 나가야 하겠습니다.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입니다. 애초에 그가 이방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출발한만큼 그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에 부닥칩니다. 오늘날도 비슷합니다. 선교사가 다른 나라에 가서 선교하려면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부딪히는 가장 큰 어려움이 바로 민족주의(nationalism)입니다. 정치적인 문제입니다. 선교가 제대로 이루어지려면 우선 이 정치적인 장벽부터 극복해야 합니다. 한국 교회가 크게 부흥된 연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내셔날리즘의 장벽을 쉽게 넘을 수 있는 은총적 계기를 받았던 것입니다. 서양 선교사들이 들어온 것은 우리 나라가 일본 제국주의에 침략을 당하여 정치적으로 몹시 불안해 있을 즈음입니다. '저 사람들은 미국사람이다' '저 사람은 서양사람이다' '저들은 우리와 상관없다'하고 그들을 거부할만한 여유가 우리에게는 없었습니다. 일본사람이 싫다는 데서 그 반사작용으로 서양 선교사들을 받아들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국 교회의 부흥은 그런 시점, 그런 분위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지금도 선교가 잘 안되는 나라들의 경우를 보면 거의가 민족주의의 장벽이 있습니다. 일본도 예외가 아닙니다. 내셔날리즘 때문에 교회가 잘 부흥되지 않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여러 나라에 복음을 전하면서 예외 없이 정치적인 문제에 부딪혔습니다. 육체적인 고난도 따랐습니다. 특히 문화적 장벽(Culture barrier)이라고 하는 것이 까다롭기 그지없습니다. 문화, 습관, 풍속이 다르다는 것은 참으로 극복하기 어려운 장벽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많은 핍박을 받게 됩니다. 한층 더 어려운 점은 신학적인 문제였습니다. 사상적인 문제, 교리적인 문제로 예루살렘 공의회로 모이게 된 것도 그 때문입니다. 많은 공격을 받게 됩니다. 바울은 심각한 고민에 빠집니다.

사도 바울이 당해야 했던 핍박은 두 가지 원인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첫째는 상대가 이방인이기 때문입니다. 문화적인, 특히 종교문화적인 갈등이 있습니다. 정치적인 오해까지 받습니다. 둘째는 유대사람들이 문제입니다. 사도행전 13장 이하를 보면 사도 바울은 가는 곳마다 유대사람들로부터 핍박을 받습니다. 각 나라에 흩어져 있는 유대주의자들이 바울을 곱게 보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전통적인 유대종교를 말살시키려는 사람, 유대주의를 왜곡하는 사람이라고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완고한 민족주의, 협소한 선민사상, 고정관념, 그들 나름의 주관적인 율법 해석이 사도 바울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전통문화와 신앙을 혼동하게 되고 민족주의라는 이름으로 각색한 신앙을 고집하면서 예수를 믿는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유대주의자들은 바울이 가는 곳마다 심지어는 원정까지 하면서 바울을 괴롭혔습니다. 어찌나 극성스럽게 괴롭혔는지 바울을 죽이지 않고는 먹지도 않겠다는 사람들까지 나타납니다. 그런 사람들이 40여 명이나 되었다고 하는데, 그 후 그들이 정말로 먹지 않아서 죽었는지 궁금합니다.

그런데 그런 극성스러운 바깥의 핍박보다도 더욱 어려운 핍박이 교회 안에 있었습니다. 본디 밖에 있는 적보다도 안에 있는 적이 더 무서운 법입니다.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10:36)." 안에 들어와 있는 적이 더 무섭습니다. 우리 교회도 그렇습니다. 교회 밖에서 핍박하는 것은 그리 큰 문제가 안됩니다. 교회에 들어와 직분도 맡고 교회 일도 열심히 하는 것 같은데 사실은 믿는 자들의 원수가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들이 더 괴로운 핍박이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할 당시에도 교회 안에 원수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도 가룟 유다가 있었습니다. 어떠한 곳에도 이런 내부의 적은 있게 마련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무서운 적은 바로 외식주의자(外飾主義者)입니다. 내심으로는 유대주의를 숭상하면서 겉으로는 예수를 믿는 척합니다. 예수 신앙과 유대주의를 혼합하려고 하는 이른바 혼합주의입니다. 기독교 교리와 그 순수성을 무너뜨리려 합니다. 순수성이 무너지면 생명력이 사라져 혼합주의로 발전하고 맙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분명하게 말해주어야 했습니다. 교회 안에 비집고 들어와 자라고 있는 잘못된 사상을 정확하게 끄집어내어 비판합니다.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것은 바른 신앙이 아니다' '그것은 적()그리스도다'-이렇게 적시(摘示)하고 깨우쳐 주어야만했습니다. 그래서 이 갈라디아서를 쓰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흥미롭게 간파해야 할 것이 있으니 그러한 적, 그러한 원수가 있어서 그 공격을 받았기 때문에 기독교 교리에 대해 선명하게 변증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원수가 없다면 적당히 믿게도 되기 쉽습니다. 복잡하게 따질 것 없이 그저 그렇게 대강대강 믿으면 되겠지 하고, 그래서는 안될 타성에 젖기 쉽습니다. 요즈음 신학교에서 성령론(聖靈論)을 강의하고 있습니다마는 30년 전 제가 신학공부를 할 때만 해도 은혜와 은사를 구별하지 않았습니다. 옛날 책의 내용이 다 그랬지만 은혜가 곧 은사이고 은사가 곧 은혜였습니다. 모두 성령이 하시는 일이므로 굳이 구별할 필요가 없다는 식이었습니다. 하지만 세상이 날로 시끄러워지고 복잡한 문제가 많아짐에 따라 더 깊이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은사이고 저것이 은혜이다-조목조목 따집니다.

'예정''선택'도 옛날의 훌륭한 신학자들까지도 구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요새는 깊이 연구하여 세밀하게 구별하고 정의합니다. 이것은 선택이다, 저것은 예정이다, 이것은 경륜이다, 저것은 섭리다 하는 식으로 까다롭게 구분합니다. 하도 시끄럽고 하도 문제가 많아서 그렇습니다. 그럴 필요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 문제가 되는 사상이 없었다면 그렇게까지 심오한 연구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것입니다.

대충대충 믿자, 예수 믿고 천당가면 됐지 복잡하게 살 것이 있나-이런 타성에 젖었을 수도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적에 대하여 변증하기 위하여 이같이 복잡한 연구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유대주의자들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깊은 신앙적 교리를 설명해주게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도리어 좋은 계기가 된 것입니다. 만약에 그런 적이 교회 안에 없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유대주의자들이 기독교를 환영하여 말썽 없이 받아들여주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어쩌면 기독교가 유대주의의 한 분파가 되었다가 몇백 년 후에는 흐지부지 없어지고 말았을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런데 유대주의자들의 핍박이 있었기에 뛰쳐나와 독립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을 깊이 연구해서 바른 신앙이 어떤 것인가 변증하게 되고, 로마서갈라디아서 같은 귀중한 말씀을 남겨주게 되었습니다.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야말로 합동하여 선을 이룬 것입니다. 우리 인생사, 적이 있어서 강해지고, 문제가 있어서 연구하게 되는 경우가 참으로 많지 않습니까? 핍박이 있음으로 더 순수해질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그리고 이상한 현상을 볼 수 있습니다. 유대주의자들이 기독교를 핍박함에 기독교 교리 자체를 건드리는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을 건드린다는 사실입니다. 사방에서 일어서고 있는 기독교가 괴수 바울만 없애면 와르르 무너질 것이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럴리가 없습니다마는 악마는 늘 이처럼 대표자만 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럴 수도 없고 그렇게 되지도 않습니다. 바울이 없으면 디모데가 합니다. 디모데가 없으면 다른 사람이 또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만 제거하면 기독교 교회가 무너질 줄 알고 바울의 사도권(使徒權)을 문제삼습니다. '바울은 사도가 아니다' '바울은 보통사람이다'하고 흔듭니다. '바울이 누구냐? 예수를 핍박하던 자가 아니냐' 하고 이간질합니다. '바울은 간질병이 있어서 가끔 자빠지기도 한다' '별 볼일 없는 사람이다'하고 깎습니다. 이런 식으로 바울의 사도적인 권위를 멋대로 실추시키려듭니다. 그의 카리스마적인 권위가 떨어져나가면 지금껏 쌓아온 선교의 성과가 원점으로 돌아갈 것으로 예측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짓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바울은 하기 싫은 변명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내가 왜 사도가 아니냐-고린도전후서에 보면 이 말이 여러 번 나옵니다. 사도권에 대해서는 사도행전 121, 22절에 그 정의가 나옵니다.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리워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예수님과 평생을 동행한 사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옆에서 지켜본 사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본 사람, 그리고 이적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특별히 선택했다는 증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사도라는 말씀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과 3년 동안 같이 활동하였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은 못 만나 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사도가 아닙니다.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지명하여 사도로 세우셨습니다. 말씀의 능력도 있었고 기적도 행하였습니다. 다만 한 가지,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3년을 동참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유대주의자들은 이 점을 약점으로 삼아 자꾸 거론함으로 바울의 영적 권위를 실추시키려 합니다. 바울은 '내가 왜 사도가 아니냐'고 이에 항변하면서 당당히 사도임을 강조합니다. 이는 이 갈라디아서에 여러 번 나타나는 바와 같습니다.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은"-11절부터 이렇게 나옵니다. 사람들이 세운 것도 아니요, 투표하여 뽑은 것도 아니요, 하나님께서 임명하셔서 내가 사도 되었다고 강조합니다. 말씀을 전하는 자의 사도권을 부정하면 말씀을 받는 자의 신앙이 무너짐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권을 강조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갈라디아서를 자세히 보면 사도 바울이 교리의 독특성과 독립성에 대단한 비중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고 거듭 되풀이합니다. 다음 장에서 공부하게 될 11, 12절 말씀에도 나타납니다.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사람에게 배운 것이 아니요, 전해받은 것도 아니요, 하나님의 계시를 직통으로 전수(傳受)했다고 합니다. 독립적입니다. 간접적으로 받은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받은 것입니다. 학문적으로 말해 second source가 아니라 first source라는 말입니다. 책을 읽어서 얻은 것이 아니요 남에게서 들은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을 직접 만났습니다. 하나님께로서 예수님께로서 직접 받은 복음입니다. 바로 바울이 가르치는 바 교리의 독특성과 독립성입니다.

그는 자신이 전하는 복음의 직접성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1 : 8)." 복음과 진리, 특히 신앙에 대해서는 한치의 양보도 없습니다. 역사적으로 보아 수많은 기독교인들과 사도들, 주의 종들이 순교하게 된 것은 절대로 양보와 타협을 용납하지 않았던 까닭입니다. 신앙, 교리, 진리, 계시에 관한 한 결단코 양보하지 않습니다. 바른 진리에 대하여 이렇듯 양보하지 않는 것은 독실한 것입니다. 그러나 계시가 아닌 인간적인 것을 끝까지 고수하려는 것은 고집불통일 뿐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을 하려면 때때로 어느 정도 고집이 있어야 합니다. 마냥 물러 터져서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고 해서는 안됩니다. 이 사람의 말을 듣고도 "자네 말이 옳아"하고 저 사람의 말을 듣고도 "자네 말이 옳아"합니다. 이렇게 줏대 없이 우왕좌왕해서는 안됩니다. 신앙에 대해서는 독선주의자가 될지언정 무골 호인(無骨好人)은 되지 않아야 합니다. 외고집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이나 내 신앙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볼 때에는 당연히 독선주의자로 보일 것입니다. 거기에 생명력이 있습니다. 바울은 계시의 직접성을 근거로 누구와도 타협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양보하지 않는 신앙 체계와 진리 위에 꿋꿋이 서서 복음을 전한다고 자부합니다.

그렇다고 사람을 대함에 외길로 고집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26절로 10절을 보면 타협성도 있습니다. 추호의 타협도 없을 것 같던 바울이 베드로를 만나러 가고, 함께 지냅니다. 야고보와 요한에게도 교제의 악수를 청합니다. 타협을 전혀 몰랐던 것이 아닙니다. 다만 신앙에 관한 한은 타협이 없었을 뿐입니다. 베드로가 실수했을 때에는 책망도 합니다. 윤리적인 것이나 형식적인 것, 혹은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문제에 대해서는 여유 있게 타협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신앙과 진리와 복음에 대해서는 타협이 전혀 없는 그이지만 이를테면 베드로가 유대사람에게 보냄 받은 것처럼 나는 이방사람들에게 보냄 받았다고 기능적으로 이해할 줄 알았습니다. 선교 대상(mission field)이 다르고 받은 은사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할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소중히 여겼습니다. 저분은 목사의 일을, 저분은 장로의 일을, 저분은 권사의 일을, 저분은 성가대의 일을 각각 은사로 받았다---이렇게 은사가 다르고 기능이 다름을 이해한다면 얼마든지 타협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의미에서 여유있게 타협할 줄도 아는 협동적인 사람이었다 하겠습니다.

무엇보다 갈라디아서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될 궁극의 문제는 율법과 은혜의 관계라 하겠습니다. 이것이 전반적으로 다루어집니다. 율법이 무엇이고 은혜가 무엇이냐? 율법과 은혜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앞으로 이 갈라디아서를 공부하면서 그 해답을 얻어야 할 문제입니다. 아울러 기독교 진리를 근본적으로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우선 율법이 무엇인지를 간단하게 알아봅시다. 첫째, 율법은 죄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 둘째, 율법은 은혜로 인도하고 우리를 그리스도께 간접적으로 인도합니다. 우리는 그 엄한 율법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몽학선생(蒙學先生)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율법이 몽학선생이 되어 그리스도께, 또 하나님의 은혜로 간접적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셋째, 율법은 은혜를 앞서지 못합니다.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을 예로 들어 설명합니다. 율법이 있기 전에 아브라함이 있었던 것처럼, 그리고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것처럼,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이 먼저라는 것입니다. 율법의 선을 넘어섭니다. 은혜가 먼저이며, 오직 은혜를 은혜 되게 하기 위해서 율법이 있는 것입니다. 은혜의 최종 승리를 말하는 중요한 변증적 교리가 이 갈라디아서에 전개됩니다.

갈라디아서를 공부하고 나면 우선 바른 신앙을 가지게 됩니다. 또 위선과 외식주의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간혹 예수를 잘못 믿으면 처음에는 믿음으로 시작했다가 곧 외식주의자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으로부터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으로 둔갑하는 것입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됩니다. 이제 선행을 베풀어야 된다, 구제를 해야 된다, 그리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가지 못한다--생각합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은 어디로 갔습니까?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믿음이 어디로 사라진 것입니까? 선을 행하면 교만해지고 행하지 못하면 절망하여 쓰러집니다. 율법주의자입니다.

위선과 외식주의로부터 구원받아야 합니다. 율법으로부터 완전히 자유하여야 됩니다. 구원을 얻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더욱 진지하게, 더욱 성실하게 이 갈라디아서를 공부해야 하겠습니다.  

은혜의 복음(115)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은 함께 있는 모든 형제로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영광이 저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우리가 잘 아는 종교개혁자 칼뱅(Calvin, Jean) 선생은 아우구스티누스와 함께 예정론(豫定論)의 태두(泰斗)입니다. 그래서 그는 성경 중에서 특히 에베소서를 좋아했습니다. 에베소서에는 예정론에 대한 말씀이 많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145절에도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라고 단적으로 예정론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루터(Luther, Martin)는 갈라디아서를 특히 좋아했습니다. 그가 생애에 걸쳐 갈라디아서 주석을 두 번이나 쓴 것도 그만큼 갈라디아서를 좋아하고 중요시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갈라디아서 주석은 그 분량도 이를테면 역시 그가 쓴 로마서 주석에 비하여 두 배나 됩니다. 로마서는 16장까지 있고 갈라디아서는 그 절반도 못되는 6장밖에 안되는데, 주석의 분량은 그 반대라는 말입니다.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는 신약성경에서 가장 교리적인 책들입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생애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 어디에서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 그 행적과 교훈을 상세하게 알려줍니다. 또한 사도행전은 말 그대로 사도들의 행적을 기록한 말씀입니다. 그밖에 고린도전후서, 빌립보서, 디모데전후서와 같은 말씀들은 일종의 목회서신(牧會書信)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당시의 초대교회에서 발생한 사건이나 문제를 수습하고 해결하기 위하여 써 보낸 편지글입니다. 이에 비하여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는 기독교 교리를 전반적 체계적으로 다룬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도대체 내가 무엇을 믿는 것이며 기독교의 정체가 무엇인가를 알고 싶다면 반드시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읽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한 스무 번 반복하여 읽어보면 기독교가 과연 어떠한 신앙인지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갈라디아서는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 총회(사도행전 15장에서 언급된 그 총회) 직전인 주후 48년 경 수리아 안디옥에서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이 편지를 쓰게 되기까지에는 복잡한 사건들이 참으로 많았습니다. 북갈라디아 남갈라디아가 어떻고, 갈라디아 교회가 어떤 형편에 있었는가 하는 이야기는 일단 생략하기로 하고, 먼저 로마서의 경우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 당시 세계의 중심이요 수도라고 할 수 있는 로마에 가기를 원했습니다. 로마에서 복음을 증거하고 교회를 세워 그곳으로부터 만방으로 복음이 전파되기를 바랐습니다. 한마디로 로마를 복음의 기지로 삼고자 했던 것입니다. 내용 중에 보면 이미 몇몇 사람들을 로마에 보냈던 것 같습니다. 또한 로마에는 이미 가정교회들이 세워지고 있었습니다. 아무튼 사도 바울은 로마에 가서 그들이 알고 있는 잘못된 교리를 바로잡고, 확고한 기독교 교리를 정착시키며, 교회를 세워 선교의 역사를 이루고자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로마를 교회의 중심 선교의 중심으로 삼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정이 여의치 않았습니다. 로마서를 공부할 때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는 예루살렘으로 가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그곳에서는 큰 핍박과 어려운 환난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로마로 가고자 하는 계획을 잠시 보류하고 예루살렘으로 먼저 가기는 가지만 어쩌면 핍박을 당하여 죽게 될는지도 모릅니다. 죽으면 로마에는 영영 가지 못하고 맙니다.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예루살렘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처지라서 로마서를 씁니다. 죽어서 로마에 가지 못하더라도 이 편지로 메시지를 대신하고자 평생 전하던 기독교 교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차례로 쓰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동기가 참으로 아름답지 않습니까? 이렇게 하여 기독교 교리에서 윤리에 이르는 방대한 내용을 마침내 기록으로 남기게 되었습니다. 여기에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제 갈라디아서의 경우를 봅시다. 이방인으로 사도된 바울은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합니다. 이 선교의 과정에서 숱한 박해를 당합니다. 특히 유대주의자들의 공박(攻駁)이 심했습니다. 때문에 사도 바울은 유대주의자들을 상대로 기독교를 변증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한 마디로 갈라디아서는 유대주의자들의 잘못된 신앙관을 논박(論駁)하고 기독교의 바른 진리를 변증하는 것이 그 목적이요 동기입니다. 당연히 그 내용은 기독교 교리의 전반을 다루게 됩니다. 그가 평생토록 전파하던 복음과 교리의 진수를 요약하여 써 놓은 이 갈라디아서는 흔히 "작은 로마서"라고도 불립니다. 이처럼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는 형제와도 같은 밀접한 관계에 있습니다

종교개혁자 루터의 사상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라는 것입니다. 이는 프로테스탄트 교리의 중심이 됩니다. 인간의 공로, 선행, 인간적인 지식-이런 것들을 모두 부정한다는 것이 그 중요한 의미입니다. 루터가 자신의 생명인 양 귀하게 여긴 이 교리--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Justification by faith)고 하는 교리를 갈라디아서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의 주석에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하는 교리를 상실하면 기독교 교리 전부를 상실하는 것과 같다'라고 말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이 교리가 그만큼 기독교 복음의 핵임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이 중요한 교리가 의미상으로는 성경 전체에 걸쳐 깊이 드리워져 있습니다마는 형식상으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라고 문자로 기록되어 있는 성경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뿐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쓴 많은 편지 가운데서도 유독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만 이 교리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좀더 분석해보겠습니다. 'to justify'-의롭다 한다,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이 말은 헬라어로 '디카이오오'입니다. 이 헬라어는 신약성경에 모두 14번이 나옵니다. 또한 '(righteousness)'는 헬라어로 '디카이오스우네'입니다. ''라고 하는 말이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데 이 말이 42,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만 나옵니다. 예외가 있다면 고린도전서 611절과 디도서 37절에 각각 한번씩 나올 뿐입니다. 이러한 점을 감안해보더라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라는 교리는 로마서갈라디아서에서만 특별히 강조된 교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점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이 교리의 중요한 의미를 깨달아 나가야 하겠습니다.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입니다. 애초에 그가 이방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출발한만큼 그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에 부닥칩니다. 오늘날도 비슷합니다. 선교사가 다른 나라에 가서 선교하려면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부딪히는 가장 큰 어려움이 바로 민족주의(nationalism)입니다. 정치적인 문제입니다. 선교가 제대로 이루어지려면 우선 이 정치적인 장벽부터 극복해야 합니다. 한국 교회가 크게 부흥된 연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내셔날리즘의 장벽을 쉽게 넘을 수 있는 은총적 계기를 받았던 것입니다. 서양 선교사들이 들어온 것은 우리 나라가 일본 제국주의에 침략을 당하여 정치적으로 몹시 불안해 있을 즈음입니다. '저 사람들은 미국사람이다' '저 사람은 서양사람이다' '저들은 우리와 상관없다'하고 그들을 거부할만한 여유가 우리에게는 없었습니다. 일본사람이 싫다는 데서 그 반사작용으로 서양 선교사들을 받아들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국 교회의 부흥은 그런 시점, 그런 분위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지금도 선교가 잘 안되는 나라들의 경우를 보면 거의가 민족주의의 장벽이 있습니다. 일본도 예외가 아닙니다. 내셔날리즘 때문에 교회가 잘 부흥되지 않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여러 나라에 복음을 전하면서 예외 없이 정치적인 문제에 부딪혔습니다. 육체적인 고난도 따랐습니다. 특히 문화적 장벽(Culture barrier)이라고 하는 것이 까다롭기 그지없습니다. 문화, 습관, 풍속이 다르다는 것은 참으로 극복하기 어려운 장벽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많은 핍박을 받게 됩니다. 한층 더 어려운 점은 신학적인 문제였습니다. 사상적인 문제, 교리적인 문제로 예루살렘 공의회로 모이게 된 것도 그 때문입니다. 많은 공격을 받게 됩니다. 바울은 심각한 고민에 빠집니다.

사도 바울이 당해야 했던 핍박은 두 가지 원인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첫째는 상대가 이방인이기 때문입니다. 문화적인, 특히 종교문화적인 갈등이 있습니다. 정치적인 오해까지 받습니다. 둘째는 유대사람들이 문제입니다. 사도행전 13장 이하를 보면 사도 바울은 가는 곳마다 유대사람들로부터 핍박을 받습니다. 각 나라에 흩어져 있는 유대주의자들이 바울을 곱게 보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전통적인 유대종교를 말살시키려는 사람, 유대주의를 왜곡하는 사람이라고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완고한 민족주의, 협소한 선민사상, 고정관념, 그들 나름의 주관적인 율법 해석이 사도 바울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전통문화와 신앙을 혼동하게 되고 민족주의라는 이름으로 각색한 신앙을 고집하면서 예수를 믿는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유대주의자들은 바울이 가는 곳마다 심지어는 원정까지 하면서 바울을 괴롭혔습니다. 어찌나 극성스럽게 괴롭혔는지 바울을 죽이지 않고는 먹지도 않겠다는 사람들까지 나타납니다. 그런 사람들이 40여 명이나 되었다고 하는데, 그 후 그들이 정말로 먹지 않아서 죽었는지 궁금합니다.

그런데 그런 극성스러운 바깥의 핍박보다도 더욱 어려운 핍박이 교회 안에 있었습니다. 본디 밖에 있는 적보다도 안에 있는 적이 더 무서운 법입니다.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10:36)." 안에 들어와 있는 적이 더 무섭습니다. 우리 교회도 그렇습니다. 교회 밖에서 핍박하는 것은 그리 큰 문제가 안됩니다. 교회에 들어와 직분도 맡고 교회 일도 열심히 하는 것 같은데 사실은 믿는 자들의 원수가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들이 더 괴로운 핍박이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할 당시에도 교회 안에 원수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도 가룟 유다가 있었습니다. 어떠한 곳에도 이런 내부의 적은 있게 마련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무서운 적은 바로 외식주의자(外飾主義者)입니다. 내심으로는 유대주의를 숭상하면서 겉으로는 예수를 믿는 척합니다. 예수 신앙과 유대주의를 혼합하려고 하는 이른바 혼합주의입니다. 기독교 교리와 그 순수성을 무너뜨리려 합니다. 순수성이 무너지면 생명력이 사라져 혼합주의로 발전하고 맙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분명하게 말해주어야 했습니다. 교회 안에 비집고 들어와 자라고 있는 잘못된 사상을 정확하게 끄집어내어 비판합니다.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것은 바른 신앙이 아니다' '그것은 적()그리스도다'-이렇게 적시(摘示)하고 깨우쳐 주어야만했습니다. 그래서 이 갈라디아서를 쓰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흥미롭게 간파해야 할 것이 있으니 그러한 적, 그러한 원수가 있어서 그 공격을 받았기 때문에 기독교 교리에 대해 선명하게 변증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원수가 없다면 적당히 믿게도 되기 쉽습니다. 복잡하게 따질 것 없이 그저 그렇게 대강대강 믿으면 되겠지 하고, 그래서는 안될 타성에 젖기 쉽습니다. 요즈음 신학교에서 성령론(聖靈論)을 강의하고 있습니다마는 30년 전 제가 신학공부를 할 때만 해도 은혜와 은사를 구별하지 않았습니다. 옛날 책의 내용이 다 그랬지만 은혜가 곧 은사이고 은사가 곧 은혜였습니다. 모두 성령이 하시는 일이므로 굳이 구별할 필요가 없다는 식이었습니다. 하지만 세상이 날로 시끄러워지고 복잡한 문제가 많아짐에 따라 더 깊이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은사이고 저것이 은혜이다-조목조목 따집니다.

'예정''선택'도 옛날의 훌륭한 신학자들까지도 구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요새는 깊이 연구하여 세밀하게 구별하고 정의합니다. 이것은 선택이다, 저것은 예정이다, 이것은 경륜이다, 저것은 섭리다 하는 식으로 까다롭게 구분합니다. 하도 시끄럽고 하도 문제가 많아서 그렇습니다. 그럴 필요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 문제가 되는 사상이 없었다면 그렇게까지 심오한 연구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것입니다.

대충대충 믿자, 예수 믿고 천당가면 됐지 복잡하게 살 것이 있나-이런 타성에 젖었을 수도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적에 대하여 변증하기 위하여 이같이 복잡한 연구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유대주의자들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깊은 신앙적 교리를 설명해주게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도리어 좋은 계기가 된 것입니다. 만약에 그런 적이 교회 안에 없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유대주의자들이 기독교를 환영하여 말썽 없이 받아들여주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어쩌면 기독교가 유대주의의 한 분파가 되었다가 몇백 년 후에는 흐지부지 없어지고 말았을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런데 유대주의자들의 핍박이 있었기에 뛰쳐나와 독립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을 깊이 연구해서 바른 신앙이 어떤 것인가 변증하게 되고, 로마서갈라디아서 같은 귀중한 말씀을 남겨주게 되었습니다.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야말로 합동하여 선을 이룬 것입니다. 우리 인생사, 적이 있어서 강해지고, 문제가 있어서 연구하게 되는 경우가 참으로 많지 않습니까? 핍박이 있음으로 더 순수해질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그리고 이상한 현상을 볼 수 있습니다. 유대주의자들이 기독교를 핍박함에 기독교 교리 자체를 건드리는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을 건드린다는 사실입니다. 사방에서 일어서고 있는 기독교가 괴수 바울만 없애면 와르르 무너질 것이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럴리가 없습니다마는 악마는 늘 이처럼 대표자만 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럴 수도 없고 그렇게 되지도 않습니다. 바울이 없으면 디모데가 합니다. 디모데가 없으면 다른 사람이 또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만 제거하면 기독교 교회가 무너질 줄 알고 바울의 사도권(使徒權)을 문제삼습니다. '바울은 사도가 아니다' '바울은 보통사람이다'하고 흔듭니다. '바울이 누구냐? 예수를 핍박하던 자가 아니냐' 하고 이간질합니다. '바울은 간질병이 있어서 가끔 자빠지기도 한다' '별 볼일 없는 사람이다'하고 깎습니다. 이런 식으로 바울의 사도적인 권위를 멋대로 실추시키려듭니다. 그의 카리스마적인 권위가 떨어져나가면 지금껏 쌓아온 선교의 성과가 원점으로 돌아갈 것으로 예측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짓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바울은 하기 싫은 변명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내가 왜 사도가 아니냐-고린도전후서에 보면 이 말이 여러 번 나옵니다. 사도권에 대해서는 사도행전 121, 22절에 그 정의가 나옵니다.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리워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예수님과 평생을 동행한 사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옆에서 지켜본 사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본 사람, 그리고 이적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특별히 선택했다는 증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사도라는 말씀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과 3년 동안 같이 활동하였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은 못 만나 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사도가 아닙니다.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지명하여 사도로 세우셨습니다. 말씀의 능력도 있었고 기적도 행하였습니다. 다만 한 가지,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3년을 동참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유대주의자들은 이 점을 약점으로 삼아 자꾸 거론함으로 바울의 영적 권위를 실추시키려 합니다. 바울은 '내가 왜 사도가 아니냐'고 이에 항변하면서 당당히 사도임을 강조합니다. 이는 이 갈라디아서에 여러 번 나타나는 바와 같습니다.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은"-11절부터 이렇게 나옵니다. 사람들이 세운 것도 아니요, 투표하여 뽑은 것도 아니요, 하나님께서 임명하셔서 내가 사도 되었다고 강조합니다. 말씀을 전하는 자의 사도권을 부정하면 말씀을 받는 자의 신앙이 무너짐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권을 강조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갈라디아서를 자세히 보면 사도 바울이 교리의 독특성과 독립성에 대단한 비중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고 거듭 되풀이합니다. 다음 장에서 공부하게 될 11, 12절 말씀에도 나타납니다.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사람에게 배운 것이 아니요, 전해받은 것도 아니요, 하나님의 계시를 직통으로 전수(傳受)했다고 합니다. 독립적입니다. 간접적으로 받은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받은 것입니다. 학문적으로 말해 second source가 아니라 first source라는 말입니다. 책을 읽어서 얻은 것이 아니요 남에게서 들은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을 직접 만났습니다. 하나님께로서 예수님께로서 직접 받은 복음입니다. 바로 바울이 가르치는 바 교리의 독특성과 독립성입니다.

그는 자신이 전하는 복음의 직접성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1 : 8)." 복음과 진리, 특히 신앙에 대해서는 한치의 양보도 없습니다. 역사적으로 보아 수많은 기독교인들과 사도들, 주의 종들이 순교하게 된 것은 절대로 양보와 타협을 용납하지 않았던 까닭입니다. 신앙, 교리, 진리, 계시에 관한 한 결단코 양보하지 않습니다. 바른 진리에 대하여 이렇듯 양보하지 않는 것은 독실한 것입니다. 그러나 계시가 아닌 인간적인 것을 끝까지 고수하려는 것은 고집불통일 뿐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을 하려면 때때로 어느 정도 고집이 있어야 합니다. 마냥 물러 터져서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고 해서는 안됩니다. 이 사람의 말을 듣고도 "자네 말이 옳아"하고 저 사람의 말을 듣고도 "자네 말이 옳아"합니다. 이렇게 줏대 없이 우왕좌왕해서는 안됩니다. 신앙에 대해서는 독선주의자가 될지언정 무골 호인(無骨好人)은 되지 않아야 합니다. 외고집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이나 내 신앙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볼 때에는 당연히 독선주의자로 보일 것입니다. 거기에 생명력이 있습니다. 바울은 계시의 직접성을 근거로 누구와도 타협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양보하지 않는 신앙 체계와 진리 위에 꿋꿋이 서서 복음을 전한다고 자부합니다.

그렇다고 사람을 대함에 외길로 고집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26절로 10절을 보면 타협성도 있습니다. 추호의 타협도 없을 것 같던 바울이 베드로를 만나러 가고, 함께 지냅니다. 야고보와 요한에게도 교제의 악수를 청합니다. 타협을 전혀 몰랐던 것이 아닙니다. 다만 신앙에 관한 한은 타협이 없었을 뿐입니다. 베드로가 실수했을 때에는 책망도 합니다. 윤리적인 것이나 형식적인 것, 혹은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문제에 대해서는 여유 있게 타협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신앙과 진리와 복음에 대해서는 타협이 전혀 없는 그이지만 이를테면 베드로가 유대사람에게 보냄 받은 것처럼 나는 이방사람들에게 보냄 받았다고 기능적으로 이해할 줄 알았습니다. 선교 대상(mission field)이 다르고 받은 은사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할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소중히 여겼습니다. 저분은 목사의 일을, 저분은 장로의 일을, 저분은 권사의 일을, 저분은 성가대의 일을 각각 은사로 받았다---이렇게 은사가 다르고 기능이 다름을 이해한다면 얼마든지 타협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의미에서 여유있게 타협할 줄도 아는 협동적인 사람이었다 하겠습니다.

무엇보다 갈라디아서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될 궁극의 문제는 율법과 은혜의 관계라 하겠습니다. 이것이 전반적으로 다루어집니다. 율법이 무엇이고 은혜가 무엇이냐? 율법과 은혜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앞으로 이 갈라디아서를 공부하면서 그 해답을 얻어야 할 문제입니다. 아울러 기독교 진리를 근본적으로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우선 율법이 무엇인지를 간단하게 알아봅시다. 첫째, 율법은 죄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 둘째, 율법은 은혜로 인도하고 우리를 그리스도께 간접적으로 인도합니다. 우리는 그 엄한 율법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몽학선생(蒙學先生)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율법이 몽학선생이 되어 그리스도께, 또 하나님의 은혜로 간접적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셋째, 율법은 은혜를 앞서지 못합니다.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을 예로 들어 설명합니다. 율법이 있기 전에 아브라함이 있었던 것처럼, 그리고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것처럼,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이 먼저라는 것입니다. 율법의 선을 넘어섭니다. 은혜가 먼저이며, 오직 은혜를 은혜 되게 하기 위해서 율법이 있는 것입니다. 은혜의 최종 승리를 말하는 중요한 변증적 교리가 이 갈라디아서에 전개됩니다.

갈라디아서를 공부하고 나면 우선 바른 신앙을 가지게 됩니다. 또 위선과 외식주의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간혹 예수를 잘못 믿으면 처음에는 믿음으로 시작했다가 곧 외식주의자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으로부터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으로 둔갑하는 것입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됩니다. 이제 선행을 베풀어야 된다, 구제를 해야 된다, 그리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가지 못한다--생각합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은 어디로 갔습니까?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믿음이 어디로 사라진 것입니까? 선을 행하면 교만해지고 행하지 못하면 절망하여 쓰러집니다. 율법주의자입니다.

위선과 외식주의로부터 구원받아야 합니다. 율법으로부터 완전히 자유하여야 됩니다. 구원을 얻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더욱 진지하게, 더욱 성실하게 이 갈라디아서를 공부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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