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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붙잡는 야곱에서 놓는 이스라엘로 창35:8~29 설교녹취, 출처
▲화두/ 야곱 인생의 절정은, 야곱이 맞이한 세 번의 장례와 함께 주어졌습니다.
창세기 35장을 우리가 오늘 볼텐데요. 야곱의 인생에 있어서 매듭을 짓는 장이기도 합니다.
야곱의 생애는, 어떤 면에서는 여기서 중간정리가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35장을 읽어보면 읽어 볼수록 많은 여운이 남는 장입니다.
야곱이 삼촌 집에서 20년 보내고, 돌아와서 먼저 형 에서를 만나죠.
그 다음에 벧엘로 가지 않고, 세겜이라는 곳에 잠깐 빠졌다가
딸 디나가 강간을 당하고 거기서 다시 급하게 정리 했죠. 영적인 각성이 일어납니다.
우상단지를 다 모아다가 나무 밑에 묻고,
하나님이 가라고 하신 그 벧엘을 향하여 출발을 하고
35장에 드디어 도착을 하는 것입니다.
야곱이 벧엘에 도착했을 때, 하나님이 야곱에게 큰 복을 내리십니다. 35:9~11
9.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오매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복을 주시고
10. 그에게 이르시되 네 이름이 야곱이다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그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
11.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국민과 많은 국민이 네게서 나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너는 이스라엘이다. 너는 진짜 복 된 이름이 될 것이다.
너로 말미암아 왕들이 나오겠다. 이 말씀의 핵심은 메시아가 나오겠다고 하는 축복입니다.
가장 큰 축복을 받았죠. 네가 메시아 가문의 믿음의 조상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큰 축복을 내리십니다. 그래서 이 장면이 야곱 인생의 클라이맥스, 정점이에요.
그런데 어이 없게도, 그런 야곱 인생의 절정은,
야곱이 당한 가장 큰 세 번의 슬픔, 세 번의 장례와 더불어(함께) 주어졌습니다.
그 이유는, 야곱이 꼭 쥔 것을 내려놓아야,
그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당한 세 번의 장례
35장을 읽어보면 유모 드보라가 죽었더라(:8)
아내 라헬이 죽었더라(:18)
아비 이삭이 죽었더라(:29) 라고 하는 죽음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러분 성경에 이러한 의미심장한 내용이 두 번 이상 반복되면
하나님의 싸인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도 뭔가 하나님이 내 인생을 흔드는 사건이
연달아 두 번, 세 번 일어나면 귀를 기울이셔야 합니다.
‘내게 뭔가 말씀하려고 하시는 구나..’
그 때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은혜 받는 사람이고
그 때 귀를 닫고 자기 고집대로 하는 사람은, 정말 그의 인생은 어려워집니다.
▶1. 드보라의 죽음
자 35:8절을 보시면요. 자 첫 번째 죽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읽겠습니다.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가 죽으매 그를 벧엘 아래에 있는 상수리 나무 밑에 장사하고
그 나무 이름을 알론바굿이라 불렀더라’
굉장히 조금 생뚱맞은 말씀입니다.
‘벧엘에 이르렀더라. 그리고 하나님이 축복했더라.’ 하면 흐름이 맞거든요.
그런데 ‘벧엘에 도착했더라’ 그리고 한 절이 이상하게 삽입이 되는데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가 죽었더라’라고 하는 말씀이 들어가요.
그러면 도대체 이 분이 누굴까요? 이게 성경에 보면 굉장히 어색하게 들어가는 내용이에요.
왜냐하면 이 드보라라고 하는 사람의 이름이 전혀 언급되지 않거든요.
그러면 도대체 이 분은 어디에서 나타난 사람인가요?
성경을 찾아보니까 아주 오래 전에, 이 분에 대한 기록이 한 절 나오더라고요.
창세기 24:59절을 봅니다. 이게 언제냐 하면 리브가(야곱의 모친)가 시집갈 때,
어린 나이 10대 때 시집갈 때 있었던 일입니다.
‘그들이 그 누이 리브가와 그의 유모와 아브라함의 종과 그 동행자들을 보내며’ :59
리브가가 이삭에게 시집갈 때, 리브가와 함께 했던 사람 중에 하나가 이 유모입니다.
그러니까 리브가에게는 친엄마는 아니지만, 친 엄마 같은 존재에요.
자신을 젖먹이면서 키웠습니다.
유모라고 하니까 종이었지만, 자신에게는 엄마와 같은,
그래서 본인이 시집갈 때, 이 유모가 서로 사랑했기 때문에
리브가와 함께 이삭에게 간 거예요.
그러니까 계속 리브가와 함께 지냈는데, 문제는 뭐냐 하면
야곱이 20몇 년 전에 어머니 집에서 삼촌 집으로 간 거잖아요.
그러면 이 유모 드보라가 따라간 것이 아니거든요.
성경을 보면 야곱 혼자 짐 짊어지고 삼촌 집에 갔잖아요.
그리고 난 다음에 다시 돌아오는 그 중간 지점에, 갑자기 이 유모가 등장하더니 죽었다.. 라고 나옵니다.
유모 드보라가 왜 야곱과 함께 있었는가요?
리브가가 이미 이 당시(야곱이 외삼촌 집에 거주)에 이미 죽었다. 라는 거예요.
왜냐하면 리브가 이야기가 안 나옵니다. 쭉, 50장 까지. 리브가는 죽은 거예요.
죽어갈 때 자기 엄마와 같은 드보라를, 그 사랑하는 야곱에게 보낸 것이 아닌가.
왜냐하면 이 드보라의 고향이 밧단아람이니까요.
또 다른 해석은, 야곱이 삼촌 집에서 가나안으로 들어올 때
그 소식을 듣고 리브가가 죽었지만, 이 드보라 유모 할머니가 야곱에게 왔던지.
어쨌든 드보라는
특별히 야곱에게 있어서는 친 할머니와 같은 분이고
어떤 면에서는 돌아가신 어머니 리브가가가 보낸, 엄마의 분신과 같은 분이에요.
그런데 벧엘에 도착 했을 때 그 드보라가 죽고 맙니다. 성경에 이렇게 나와요.
‘그를 벧엘 아래에 있는 상수리나무 밑에 장사하고, 그 나무 이름을 알론바굿이라 불렀더라.’
이 알론바굿이 뜻이 나오죠. ‘통곡의 상수리나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 드보라를 묻고, 야곱이 통곡을 하며 울었다. 라는 거예요.
야곱에게는 어머니의 죽음과 같고, 보고 싶은 어머니는 먼저 가셨는데
그 어머니가 보낸 할머니, 어머니와 같은 할머니 드보라. 만감이 교차하는 거예요.
엄마가 죽은 것 같고, 할머니가 죽은 것 같았습니다.
여러분 이 사건은 야곱에게 지나가는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그 마음을 뒤흔드는 굉장히 충격적이고 가슴 아픈 사건이였다. 라는 거예요.
그리고 난 다음 마음이 가난해져 있을 때, 하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우리가 서두에 읽었던 복을 내리십니다. ‘너의 이름은 이스라엘이다.’
이 문맥을 보셔야 되요. 이 야곱의 심경의 변화,
딸이 간강 당하고, 그리고 두렵고 떨림으로 벧엘에 와서
마음이 조금 놓였다가 갑자기 드보라가 죽고, 그 마음이 깊이 낮아져 있을 때
하나님이 오셔서 ‘네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하리라. 네게서 왕들이 나올 것이다.’
하고 축복을 받습니다.
▶2. 아내 라헬의 죽음
자 그리고 난 다음에 연이어서 또 죽음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번에는 더 충격적인 이야기에요.
35:16 ‘그들이 벧엘에서 길을 떠나 에브랏에 이르기까지 얼마간 거리를 둔 곳에서
라헬이 해산하게 되어 심히 고생하며 그가 난산할 쯤에 산파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지금 내가 또 득남하느니라 하매’
:18 ‘그가 죽게 되어 그의 혼이 떠나려 할 때에,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라 불렀으나
그의 아버지는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
라헬이 죽습니다. 참 어떻게 보면, 인생이 뭔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게 해요.
여러분 라헬이 그렇게 자식 갖고 싶어 했던 것 아시죠.
남편에게 뭐라고까지 하소연 합니까? 나 자식 낳게 하지 않으면 죽겠다. 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그 원하던 자식을 두 번째나 가졌는데
그 원하던 자식을 낳다가 그만 난산을 하고, 고통 가운데에 죽어가면서
그 둘째 아이의 죽음을 짓는데 베노니. 뜻이 뭐냐면 슬픔의 아들이다.
벤(아들) 온(곡하다) 라는 뜻입니다.
라헬은 ‘통곡의 아들. 베노니’하면서 피를 흘리고 죽어버렸어요.
19절. ‘라헬이 죽으매 에브랏 곧 베들레헴 길에 장사되었고’
이렇게 두 번째 죽음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러분 한 번 야곱 입장에서 생각을 해보세요.
야곱에게 있어서 라헬은 어떠한 존재인지 아십니까.
그의 인생에 어쩌면 전부일수도 있어요.
그가 아버지 집을 떠나서 그렇게 고생하며 힘들게 일을 할 때
야곱의 마음에 기쁨은 라헬이었습니다. 야곱의 마음이 기대는 대상은 라헬이었어요.
그 라헬 때문에 수고도 참았고, 어떻게 하다가 언니 레아도 얻었지만
성경을 보면 야곱에게는 일편단심 오매불망 그냥 라헬.
그 라헬이 아기 낳다가 그만 죽어버리고 만 사건이 벌어졌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축복받고. 벧엘에서 축복받고 그 사랑했던 라헬이 죽어버려요.
왜 하나님이 이런 충격적인 사건을 한 번도 아니고
두 번 연달아 야곱에게 허락하실까요.
혹시 이 가운데 여러분 주변에 아는 사람의 죽음을
근래에 충격으로 경험한 분이 계십니까. 친구가 갔던지, 가족 중에 누가 갔던지.
하나님이 그 안에 담긴 뭔가 싸인,
뭔가 나를 향한 어떤 그 말씀이, 그 안에 들어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3. 아버지 이삭의 죽음
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죽음의 사건이 나옵니다. 27~ 29절까지 읽겠습니다.
‘야곱이 기럇아르바의 마므레로 가서 그 아비 이삭에게 이르렀으니
기럇아르바는 곧 아브라함과 이삭의 우거하던 헤브론이더라.
이삭의 나이 일백팔십 세라 이삭이 나이 많고 늙어 기운이 진하매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니 그 아들 에서와 야곱이 그를 장사하였더라’
이번에는 아버지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아버지와 정이 조금 덜 할 수도 있지만
지금 보세요. 다 잃어버린 거예요. 할머니 잃어버렸죠. 어머니도 돌아가셨죠.
그 사랑했던 라헬이 죽었죠. 아버지까지 가버리신 겁니다.
도대체 왜 하나님께서 이러한 일을 행하셨을까요.
여러분,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실은 죽음입니다.
죽음보다 더 충격적인 사건이 어디 있어요? 그렇잖아요.
천년만년 살 것 같은데 딱 죽고 나면
도대체 가진 재물이 무엇이고, 인생의 꿈이 무엇이고,
인생에게 죽음이 닥치면, 그냥 본인이 그렇게 일평생 추구했던 것이 일순간에 제로가 되어버려요.
그래서 죽음을 경험하면 사람은 큰 충격에 빠지면서, 본질을 비로소 찾게 됩니다.
‘지금 내가 제대로 사는 것 맞아? 이렇게 살다가 내가 저렇게 누워있으면
나는 어떠한 인생으로 인생을 마무리 할 것인가?’
린다한이라고 하는 분이 몇 년 전 비행기 추락 사고로 불시착을 했는데 살았어요.
그리고 한 2, 3일 동안 병원에서 치료받고 집에 들어갔을 때
한 밤 중에 불을 딱 키니까 가구가 쭉 보이는데, 그런 생각이 들더라는 거예요.
'만일 내가 3일 전에 죽었으면, 지금 내가 눈에 보는 이 모든 것은 쓰레기가 되었겠지.
아니면 다른 집으로 팔려가던지..' 그 순간에 갑자기 자기가 그 동안 붙잡고 살던
그 많은 것들이 갑자기 허무하게 느껴졌나 봐요.
그 카펫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셨다고 해요.
‘하나님, 내 남은 인생 정말 진짜 하나님을 위해서 살게 해달라고.’
여러분 죽음은 우리의 신앙에 영적 각성을 줍니다.
오늘 간증 하셨던 성도님도, 그 아이의 병이 엄마인 자기 인생에 충격을 주잖아요.
그리고 몸에 어떠한 질병도 충격을 주잖아요.
그런데 죽음은,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영적인 각성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성경에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 집에 가는 것 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에 그의 마음을 둘지라.’ 말씀합니다.
우리의 모든 일에 결국이 장례인데, 그 시점에 섰을 때,
그 시점에서 바라봐야 우리의 인생이 잘 살 수 있다. 라는 거예요.
제가 알고 있는 한 장로님이 마지막 돌아가실 때, 제가 병원을 심방했더니
두 가지 고백을 하시더라고요. 첫 번째는 이렇게 이야기를 하시더라고요.
‘목사님, 제가 죽을 날이 다가오니까 요즘 마음에 계속 회개가 되는 것이 뭐냐 하면
그렇게 사랑하지 못하고 산 것이 회개스럽다.’ 라는 거예요.
참 훌륭한 장로님이셨습니다.
그런데도 마지막 때가 와 보니까, 정말 가치 있는 것이 뭔지, 이게 사랑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내가 사랑하지 못했고, 내가 가족 제대로 사랑하지 못했고,
내가 성도 제대로 사랑하지 못했고, 그게 그렇게 후회스럽습니다.’ 하시면서
목소리도 안 나오시는데 흐느껴 우시더라고요. 죄송하다고.
정말 훌륭한 장로님이셨어요.
또 하나는요.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그런데 목사님,
이렇게 누워있으면 제 몸이 이렇게 붕붕 뜨는 것 같아요.
왜냐하면 그렇게 하늘에서 평강이 내려온다.’ 라는 거예요.
그 영혼에 몸은 이제 그냥 말라 비틀어져서 오늘 내일 하시는데도
하늘에서 그렇게 말할 수 없는 기쁨이 넘치면서, 자기 마음이 천국과 같다.. 라는 거예요.
제가 그 장로님 보면서 부러웠습니다.
‘이 장로님은 정말 인생을 잘 사신 분이시구나. 이 장로님은 정말 천국 가실 분이구나.
이 장로님은 주님 앞에 서는 그 날 정말 상 받을 장로님이구나.’
여러분 가장 잘 사는 인생은, 주님이 불러 가실 그 때에 세상사람 앞에서가 아니고
하나님 앞에서 잘 설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정말 잘 사는 인생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메시지 / 붙잡으면 야곱, 놓으면 이스라엘 됩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왜 이 35장, 벧엘의 축복을 통과하면서
한, 두 번도 아니고 연달아 세 번이나,
그것도 가장 사랑했던 사람들을 거두어 가시면서
도대체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뭘 말씀하시려고 하시는 거죠?
이 충격적인 죽음 사건 앞에서,도대체 무엇을 말씀하시려고 하시는 것이죠?
야곱이 우리잖아요. 나에게 한 번 적용을 해보세요.
꼭 누구 죽어야만 깨닫는 것은 아니니까.
‘도대체 하나님은 오늘 이 35장을 통하여서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려고 하는 거지?’
▶가장 중요한 것을 말씀 드립니다. 따라하겠습니다.
야곱에게 놓아야 할 것을 놓게 하시려는 것이다.
이것이 35장의 벧엘 사건 전 후에 죽음을 주신 이유입니다.
여러분 야곱의 인생은요. 그 이름 자체가 뭔지 아십니까? ‘붙잡다’입니다.
야곱은 계속 붙잡는 사람이에요.
형을 붙잡고, 라헬을 붙잡고, 요셉을 붙잡고, 계속 붙잡아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붙잡으면 붙잡은 것 때문에 다 문제가 생겨요.
형과도 의가 상하고,
라헬 때문에 가정에 어려움이 있고,
요셉을 붙잡으니까 자녀 가운데 어려움이 있고,
붙잡는 것이 야곱의 인생인데, 붙잡으면 다 문제가 생기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 각자도, 지금 붙잡고 계시죠?
이것 놓으면 큰일 날 것이라고 하는 것, 다 있으시죠?
잘 보세요. 뭐 때문에 문제 생기는지. 붙잡아서 문제가 생긴다니까요.
여러분 신앙은 붙잡는 것이 아니라, 놓아야 할 것을 내려놓는 것이 신앙생활이에요.
그래서 이용규 선교사의 <내려놓음> 이라는 책, 두 번째 제목은 <더 내려놓음>.
무슨 의미입니까. 신앙의 의미는 뭐냐, 내가 의지했던 것.
이것 놓으면 큰일 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세상적인 그것들,
그 라헬, 요셉, 형의 발꿈치, 이것을 놓는 것이 신앙생활이라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이 라헬을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몰아가실 때
이 야곱에게는 큰 상실감이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전부였거든요.
그런데 라헬이 순간 사라져버리고
그것도 그 원하던 자식 낳다가 살아져버렸을 때,
이 야곱은 말할 수 없는 구멍이 뻥 뚫렸을 거예요.
야곱이 결국 그것 때문에 어떻게 되었을까요?
‘붙잡을게 없구나. 이 세상에서 이것이 나의 기쁨이고
이것이 나의 전부라고 생각했던 것이.. 아무 것도 붙잡을 것이 없구나.’
연달아 세 번 뻥뻥 터지면서, 이 야곱은 붙잡는 것을 놓았을 거예요.
▶저 뒤에 가면 요셉 붙잡으니까, 요셉도 하나님께서 없애버리신 것 아시죠.
야곱에게 요셉은 죽은 것입니다. (네 번째 죽음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는 죽지 않았지만 야곱에게는 죽은 거예요. 형제들이 죽었다고 그랬잖아요.
그러다가 나중에는 누구를 붙잡는지 아십니까?
라헬이 낳은 그 베냐민을 붙잡고 살고 있어요. 참 끈질깁니다.
결국은 베냐민을 내려놓고 애굽으로 보내죠.
창43:14 결국은 야곱이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시므온)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라’
신기한 것은 뭐냐 하면요. 놓으면 또 살아요. 붙잡으면 어려운데, 놓으면 살아요. 항상!
그리고 이름도 가만히 보면요.
붙잡으면 야곱이고 놓으면 이스라엘이 되어요.
자 42:36절을 한 번 보세요.
못 놓겠다고 할 때 이름 한 번 보세요. 놓지 못할 때 이름이 뭡니까? 야곱이죠.
:36 ‘그 아비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로 나의 자식들을 잃게 하도다.
요셉도 없어졌고 시므온도 없어졌거늘, 베냐민을 또 빼앗아 가고자 하니
이는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
:38 ‘야곱이 가로되 내 아들은 너희와 함께 내려가지 못하리니
그의 형은 죽고 그만 남았음이라. 만일 너희 행하는 길에서 재난이 그 몸에 미치면
너희가 나의 흰 머리로 슬피 음부로 내려가게 함이 되리라’
이 아이 까지 잃어버리면 나는 죽는거야. 하면서 정말 애절한 말을 합니다.
느낌이 어떻습니까. 야곱이 못 놓고 있죠? 그 때 이름도 역시 야곱이죠? ↖
그런데 43:11절을 한 번 보세요.
그의 이름이 뭐라고 바뀌었는지 11절 읽습니다.
‘그들의 아비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이르되 그러할진대 이렇게 하라
너희는 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그릇에 담아가지고 내려가서 그 사람에게 예물을 삼을지니
곧 유향 조금과 꿀 조금과 향품과 몰약과 비자와 파단행이니라’
마음 정리하고 베냐민을 보낼 때 이름이 바뀌어 버립니다. 이스라엘로.
그리고 43장 계속 ;이스라엘'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 보세요. 35장으로.
20절과 21절을 한 번 읽어보세요.
‘야곱이 라헬의 묘에 비를 세웠더니 지금까지 라헬의 묘비라 일컫더라.
이스라엘이 다시 길을 떠나 에델 망대를 지나’ 그렇죠, 이름이 또 바뀌죠?
야곱에서 라헬을 묻어버리고, 이스라엘 되는 거예요.
붙잡으면 야곱이고, 놓으면 이스라엘이 되요.
붙잡으면 괴롭고, 놓으면 살아요.
▶여러분 신앙이 뭔지 아십니까?
진짜 내가 하나님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만나는지 아세요?
신앙 성장하고 싶죠. 누구는 성령도 받고, 하나님 음성도 듣고
뭔가 영적 변화가 일어나는데,
왜 나는 교회 오래 다니는데, 하나님 음성도 들리지도 않고
성경도 깨달아지지도 않고.. 왜 나는 그렇게 변화가 없지? 알려드릴까요?
여러분 야곱이라고 그래요. 붙잡지 말고, 놓아야 되요.
여러분들 지금 제가 여러분들에게 '자 저기 갑시다.' 하는데
지금 그냥 의자 꽉 붙잡고 이것을 안 놓고 있는데 이게 가집니까?
우리 신앙생활은 놓을 것은 (내려)놓아야, 그 다음에 출발하는 거예요.
왜 신앙이 성장하지 못 하냐, 놓을 것 못 놓으니까.
언제 성장 하냐, 놓을 것을 놓고 ,끊을 것을 끊고, 정리할 것을 정리할 때,
그 때 비로소 자유해지면서 영적으로 올라가는 거예요.
▶제가 주님 처음 만나고, 막 은혜 받았을 때 영적으로는 너무 기쁜데
하나님이 가위를 들고 제 삶을 싹둑 싹둑 잘라내시는 거예요.
제가 20대 까지 그냥 그럭저럭 인간적으로 살면서, 제가 맺고 있었던 인간관계가
신앙적이지 않은 친구들도 많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주님 만난 다음에 정리하라는 거예요. 아니, 하나님이 막 정리시켜 주시더라고요.
그런데 마음이 아팠습니다. 사랑하는 친구들과도 끊어지게 되고,
그리고 제가 좋아했던 것. 영적이지 않았던 부분들도 하나님이 정리하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초기에 은혜는 받지만, 인간적으로 힘들더라고요.
그래서 ‘하나님, 이것도 끊어야 합니까? 이것도 끊어야 합니까? 너무 힘듭니다.’
그러면서 막 기도하는데 한 장면이 보이는데요. 이러한 장면이 보였습니다.
제가 하나님 말고 다른 것을 막 붙잡고 있었던 것에서
하나님이 놓아라, 놓아라. 제가 놓았거든요?
그런데 이 빈 손이 놓고 난 다음에 어디로 가나 보니까, 하나님을 붙잡더라고요.
또 이 손을 놓으라고 해서 놓았더니 이 손이 어디로 가냐면
하나님께로 가더라고요. 이 발을 내가 기대고 있던 곳에서 떼었어요.
그랬더니 이 발이 어디로 가냐면 하나님 반석 위로 가더라고요.
제가 그러면서 느끼는 것이 '아, 이래서 놓으라고 하시는군요.'
내가 그것 없으면 진짜 힘들 것 같아서 붙잡았는데
이것을 놓고 나니까 그 빈손이 하나님께로 가니까,
하나님을 붙잡게 되고 하나님 의지하게 되니까
하나님하고 나하고의 관계가 더 튼튼해지는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비로소 영적인 공급이 더 많이 부어지는 거예요.
▶여러분 포도농사 할 때, 다른 과일 농사도 마찬가지죠.
이렇게 봐서 될 성 싶은 가지 하나만 놔두고 나머지는 자르는 것 아시죠?
'전지'라고 합니다. 왜냐, 괜히 쓸데없이 퍼져버리면 열매가 다 제대로 맺히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자를 것 자르고 몇 개의 가지에 에너지가 집중 되어야
탐스러운 과실이 맺히는 것처럼,
우리가 야곱처럼, 이것도 붙잡고 저것도 붙잡고 끊지 못하고,
그러면 하나님께 가고 싶은데 가지 못하는 거예요.
비로소 이런 것들이 끊어지고 내려놓을 때
하나님을 향하여 자유롭게 날아갈 수 있는, 진정한 역사가 우리에게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에게 다시 한 번 말씀 드립니다. 놓는 것이 축복입니다.
그냥 놓는 것이 아니라 놓은 다음에, 그 빈손으로 가난하게
‘주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전부입니다.’ 이게 신앙이에요.
여러분 시편 보면 다윗의 절절한 고백은 무슨 고백이냐면
하나님이 나의 반석이고, 하나님만이 나의 의지시고
하나님만이 나의 구원이고, 하나님만이 나의 산성이시고,
다윗의 절절한 고백은 모든 것들을 다 끊고 하나님만 붙잡은 거예요.
그 인생의 사울이 막 죽음에 어려움으로 몰아넣을 때
다윗은 더욱 하나님만 붙잡은 것입니다.
▶여러분, 놓는 것이 신앙의 복이라는 것은 알지만, 이게 실은 잘 놓아지지 않습니다.
생각처럼 쉽지 않아요. 여러분들 뭐 우리가 좋아하는 어떤 내가 사랑하는 것.
잘 안 놓아지죠? 그게 별 것 아닌데도 놓아지지 않더라고요.
이것을 놓으려면 중요한 것이, 아까 서두에 드린 말씀처럼
죽음이라는 그 결론 앞에 한 번 서보시면 되요. 죽음!
지금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세 차례 충격적인 죽음 앞에 딱 세우시면서
그 마음을 정리시키셨거든요.
동일하게 우리도 뭐 꼭 죽음이 우리 주변에 안 일어나도
이 말씀을 가지고 대입하면 되요. 죽음 앞에 서보세요.
그리고 그 죽음 앞에서 지금 내 삶에 붙잡고 있는 이것이
진짜 가치가 있는지 한 번 달아보세요.
▶가끔 우리 아이, 특히 막내 그 어린 아이 보면
죽고 못 사는 장난감이 있습니다. 요즘에는 막 이 또봇 같은 것이
아이들이 너무 좋아하는데
어느 때는 막 새벽 4시에도 일어나서 장난감 만지고, 그것 없으면 난리가 나요.
그런데 그 모습을 보면서, 꼭 나 같은 거예요.
이 아이는 그 몇 만원 장난감이 전부지만 부모가 보기에는 참 우습잖아요.
그게 뭐 그리 좋다고. 똑같은 것 또 막 사자고 해요.
그런데 입장을 바꾸어 놓고 하나님이 나를 보실 때 똑같지 않겠나..
내가 그렇게 좋다고 붙잡는 하나님 외의 그 육신적인 것들이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얼마나 유치하고 장난감 갔겠나.. 이게 참 놓기 쉽지 않아요.
그런데 언제 놓아지냐 하면 주님 앞에서 죽음이라는 곳을 통과시키면서 보면
비로소 우리 안에 끊을 것들이 무엇이고 놓을 것들이 무엇인지 정리가 됩니다.
인천방주교회 박보영 목사님이, 그런 이야기를 하시더라고요.
마음에 목사님도 사람인지라 여러 욕심들이,
또는 인간적인 아쉬움들이 왜 없겠습니까.
그럴 때면 그 인천에 있는 어떤 공동묘지에 한 밤 중에 올라가신데요.
그런데 너무 무섭데요. 귀신이 막 역사하는지 너무 무서운데
그래도 공동묘지에 올라가면 막 괜찮아 진다고 해요.
그리고 그 위에서 즐비하게 있는 그 무덤들을 보면 느낌 한 번 생각해 보세요.
그렇게 아옹다옹하고 붙잡았던, 그 인간의 영육이
저렇게 그 육신은 저 한 평도 안 되는 그 차가운 땅에 누워있는 것인데
내가 놓지 못하는 그 욕심들, 내가 놓지 못하는 그 세상적인 마음들,
이게 무슨 의미가 있나,
그렇게 몇 시간 무덤을 보고 묵상하시다가 내려오시면, 마음이 정리가 된다고 하시더라고요.
▶여러분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중요합니다.
전도서에 고백처럼 ‘산 자는 여기에 마음을 둬라.’
백주년 기념교회 이재철 목사님, 전립선암 수술을 하시고
조금 쉽지 않은 상황 가운데에 있으시다고 들었는데
얼마 전에 일간지에 이런 인터뷰를 실었더라고요.
'심장 마비나 교통사고로 가지 않게 하시고
이성적 정신으로 인생을 정리하고 매듭지을 수 있는 죽음을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합니다.'
언제 갈지는 모르지만, 갑자기 가면 준비 못하잖아요.
그런데 맑은 정신을 가지고, 내 삶을 매듭지을 수 있는
이 시간을 허락하신 것 감사합니다...
여러분 우리 삶을 끝으로 한 번 가게 해보세요.
그리고 그 안에서 지금 내가 이렇게 살면 나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나,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의 마음에 이 죽음을 날마다 깊이 묵상하는 것은 신앙에 도움이 됩니다.
제가 2주 전에 정기검진을 받았습니다. 이번에는 초음파 검사,
이 주변에 뭐가 재발 된 것이 없나. 2주 전에 초음파 검진을 받는데
의사 선생님이 사진을 찍다가 한 숨을 자꾸 쉬시는 거예요.
그래서 제 가슴이 콩닥콩닥 뛰는데 또 한 마디 하더라고요. 혹시 뭐 감기 걸리셨나요?
뭐가 문제가 있나 봐요. 그러더니 제가 오버하면서 네, 감기 한 2주 전에 걸렸고
저는 목에 성대 결절이 있습니다. 목이 항상 쉬어 있습니다.
그랬더니 의사가 계속 한 숨을 쉬면서 찍고
그러다가 일주일 후에 결과를 듣는 거예요.
일주일 동안 이런 저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월요일 날 의사 선생님 만나서 이야기를 듣는데
의사 선생님이 별 것 아닙니다. 하시더라고요.
이 임파선 붓는 것은 감기만 걸려도 붓고 모양도 보니까 암이랑 상관없는 거예요.
이런 이야기를 듣고 속으로 아멘, 이렇게 이제 나오면서 생각을 해보면서
하나님, 일 년에 두 번 검사 받을 때마다 마음에 이런 저런 불안함도 있고 걱정도 있고,
그런데 생각을 해봤어요. '이게 나한테 나쁜 것이 아니구나.'
왜냐하면 일 년에 한 두 차례씩 깊이 인생의 끝 앞에 설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어요.
그래 내가 어떻게 살아야 되나, 염려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두 가지 생각이 들더라고요.
하나는 하나님께 다 맡기며 살자.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정말 믿음으로 맡기며 살자.
또 하나는 5년을 살게 하실지 10년을 더 살게 하실지 20년을 더 살게 하실지 모르지만
그 남은 인생, 진짜 하나님 뜻대로 믿음 가지고 살아보자.
이 생각이 다시 한 번 마음속에 드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의 삶에서, 왜 신앙적으로 못 사는지 아십니까?
사람의 마음을 제가 가만히 들여다보니까요. 이게 딱 두 가지로 나눠집니다.
육신의 세상 마음, 영의 하나님 마음.
내 마음이 육신의 세상 마음에 덕지덕지 많이 껴있으면
하나님 뜻대로 살려고 하면, 그게 막 반란을 일으켜요.
여러분 왜 주님 앞에 뜻대로 살려고 하면, 짜증나고 부담스럽고 힘든 사람 계시죠.
왜 그런지 아세요?
이런 설교 들으면 막 마음에 반감도 들고 무겁고 그런 사람 계시죠. 왜 그런지 아세요?
내 마음에, 이 육신과 세상이 가득 차 있으면
육신의 마음은 이런 설교를 들으면 속에서 싫어해요.
왜, 육신은 그냥 땅에서 잘 먹고 잘 살고 그냥 이게 전부에요.
그 마음이 가득하니까 신앙적으로 살지 못하는 거예요.
기도도 잘 안되고, 말씀도 잘 읽히지 않고, 이 말씀이 다 영적인 이야긴데
육신에 사로잡힌 이 마인드를 가지고 영적인 말씀이 들어옵니까? 졸렵습니다.
제가 알려드릴까요. 이게 끊어지기 시작하잖아요? 제가 주님 만나고 다 쳐냈거든요.
쳐내니까 갑자기 가뿐해지는 거예요.
우리가 달리기 할 때 무거운 짐 지지 않잖아요.
그것처럼 끊어내니까, 이 주님의 십자가의 길, 좁은 길을 걸어가는 것이 가볍더라고요.
성경에 뭐라고 말씀하시는지 아십니까?
'이러므로 우리를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우리에게 당한 경주를 인내로써 경주해라.'
여러분 이게 끊어버리면 신앙적으로 사는 것이 자유롭고 기쁩니다.
김하중 대사가, 어머님이 돌아가셨을 때 그 때
비행기 타고 중국 가시면서 결정했다고 하잖아요.
‘하나님, 이제 내가 남은 삶을 진짜 하나님 뜻대로 살아보겠습니다.’
그리고는 그 때 이제 대사가 되기 전에, 제일 로비를 많이 해야 할 시점인데
술 다 끊고, 골프 다 끊고, 이제 내가 진짜 말씀대로 살아보겠다고 결정하고
몇 년 지나지 않아서 대사가 되고, 엄청난 영적 진보를 이룹니다.
이 한중수교, 이 중국에 어떠한 그 당시 탈북자들이 일어나는 그 많은 상황 속에서
김하중 대사가 엄청난 역할을 하셨어요...
출처 : https://rfcdrfcd.tistory.com/15974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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