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다 큰 복을 추구하십시오// 20011021
2001-12-07 23:50:34 read : 413
주일 낮예배// 사도행전 20장 32-35절
< 하나님께 취직하십시오 >
몇 년 전에 돌아가신 전 국회의원 제정구 선생의 영상이 지금도 생생한 것 같습니다.
그분에게는 한 가지 이상한 꿈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가난하게 살고 싶다는 꿈입니다.
그분은 가난하게 살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이 있었지만 가난하게 사는 능력을 구했습니다.
물질이 아닌 다른 거룩한 가치에 자신의 삶의 기초를 놓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제정구 선생의 꿈에 위기가 닥쳤습니다. 아내가 임신을 한 것입니다.
자기는 굶을 수 있었지만 배가 불러오는 아내의 굶주림은 너무 볼 수가 없었습니다.
아내와 태어날 아기를 생각하자 그분은 가난이 두려워지고 무서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저기 일자리를 찾아 이력서를 냈지만 그분의 빈민 운동 경력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누군가 <빈민 운동>을 포기하면 일자리를 주겠다고 제의했지만 그럴 수 없었습니다.
결국 그분은 일자리 찾는 노력을 포기하고 그때 자신이 가진 전 재산 3천 원으로
성경을 구입하고 그 성경에 '(하나님께) 축 취직 기념, 1976년 9월 1일'이라고 썼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취직한 뒤로 그분은 한번도 의식주 걱정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나님께 취직한 사람을 어떻게 하나님께서 먹이시고 입히시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데모는 하지 않아도 너나 할 것 없이 진정한 빈민 운동에 나서야 합니다.
없는 자의 어려움에 힘써 동참하는 것은 믿는 자가 해야 할 당연한 도리입니다.
가난한 사람에게는 돈을 꿔주어도 이자를 받지 말라고 성경은 말합니다(레 25:35-38).
잠언 14장 31절에서는 말합니다.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존경하는 자니라."
누가 진정한 부자입니까? 남과 나누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없어도 부자입니다.
누가 가난한 자입니까? 남과 나누려는 마음이 없는 사람은 있어도 가난한 자입니다.
퍼내지 않는 샘물은 썩듯이 나누는 마음이 없는 사람은 진짜 가난하게 됩니다.
반면에 퍼내는 샘물은 신선한 물이 자꾸 흘러오듯이 나누면 진짜 부자가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진짜 부자가 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35절).
< 목자의 품을 떠나지 마십시오 >
오늘 본문은 사랑하는 에베소 성도를 향한 바울의 고별설교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본문 31절 말씀을 보면 성도를 사랑하는 목자의 사랑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목자의 눈물의 훈계가 때로는 잔소리로 들리고, 때로는 귀찮게 들릴 것입니다.
그러나 목자의 말씀의 울타리가 하나님의 울타리인 줄 알아야 행복이 보호됩니다.
목자의 카리스마는 좋아하고 목자의 눈물은 우습게 알면 그 신앙은 실패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카리스마는 눈물에서 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잘못된 것을 씻어내는 3대 액체가 있습니다. 피와 땀과 눈물입니다.
피는 죄를 쫓아내고, 땀은 가난을 쫓아내고 눈물은 무의미를 쫓아내는 것입니다.
초목은 이슬로 인해 살찌게 되고, 우리의 영혼은 눈물로 인해 살찌게 됩니다.
마른 눈물로 어찌 축복과 행복을 얻겠습니까? 눈물은 결코 약자의 감정이 아닙니다.
교회에서도 <아멘의 성도>와 <눈물의 성도>가 있어야 부흥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저도 목회를 10년쯤 하다 보니까 이 눈물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목회자는 싸울 수 없습니다. 같이 멱살을 잡고 싸우면 반드시 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신기한 일입니다. 눈물의 기도를 하면 어느새 그 문제를 이긴 상태가 됩니다.
눈물의 기도는 놀라운 것입니다. 그것은 아름다운 것이고, 변화를 일으키는 힘입니다.
미국 시카고에서 활동했던 클라크 목사님은 눈물이 많아서 별명이 '울보 목사'였습니다.
그 눈물로 수많은 깡패와 노숙자들을 변화시켰지만 목사님은 자신의 별명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목사님은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의 눈물을 가져가주세요."
그 뒤 목사님의 눈에 눈물이 말랐습니다. 동시에 죄인을 변화시키는 능력도 사라졌습니다.
목사님은 다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의 눈물을 다시 돌려주세요."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어주셔서 눈물도 회복시켜주시고, 능력도 회복시켜주셨습니다.
눈물의 기도가 없는 능력! 그것은 허무한 미신적 능력에 불과할 것입니다.
< 은혜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
사도 바울이 효과적으로 선교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그 눈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사랑의 눈물을 가지고 사도 바울은 기도합니다. 본문 32절 말씀을 보십시오.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본문의 표현은 '말씀'이 우리를 인도하는 부모 또는 후견인과 같다는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성공적인 신앙생활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말씀의 문이 활짝 열려야 합니다.
링컨 대통령의 어머니 낸시는 링컨이 어렸을 때 거의 매일 성경을 읽어주었습니다.
링컨이 아홉 살 때, 그의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면서 단 한 가지의 유언을 남겼습니다.
"링컨아! 매일 성경을 읽되, 어려운 때는 더욱 읽어라. 성경이 너를 지켜줄 것이다."
말씀보다 더 위대한 보호자는 없기에 우리는 자녀들에게 말씀을 남겨주어야 합니다.
말씀을 남겨주기 위해서 애쓰는 부모는 반드시 위대한 자녀를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녀 때문에 너무 속상해하지 마시고 은혜의 말씀께 자녀를 부탁하십시오.
자녀에게 말씀을 먹여주는 목자를 이 세상의 어떤 분보다 존중히 여겨보십시오.
말씀이 자녀를 보호해주는 한, 우리 자녀들은 반드시 변화의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남태평양 한가운데 있는 핏캐인이라 불리는 섬은 섬 주민의 친절로 유명한 섬입니다.
이 섬에는 깡패도 없고, 도둑도 없고, 술도 없고, 섬사람들은 한결같이 친절합니다.
원래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프랑스 식민지였을 때에는 죄인들을 유배시키는 섬으로
도덕과 윤리는 전혀 없고 살인과 마약과 미움과 절망만이 가득한 땅이었다고 합니다.
1800년 초, 이 절망의 땅에 프랑스에서 폭동을 일으킨 6사람이 유배되어 왔습니다.
그 6명 중 5명이 죽고 한 사람이 남았는데, 어느 날 그가 자기 짐을 정리하다가
성경을 발견하게 되었고, 그 성경 말씀을 통해서 그는 극적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곧 그는 섬 주민을 모아 성경을 가르쳤고, 그 뒤 10년만에 그 섬은 낙원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말씀을 사모하십시오. 그러면 그 말씀이 우리를 보호하고 지켜줄 것입니다.
<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말씀을 의지하십시오 >
우리는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람도, 재물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33-34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너희 아는 바에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의 쓰는 것을 당하여."
우리는 이 장면에서 부족해도 사명을 위해 달려가는 바울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자기 사명을 깨닫고, 그 사명을 위해 달려가는 모습이 너무 아름답지 않습니까?
없어도 괜찮습니다. 성공하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사명을 따라 살면 행복합니다.
그리고 사명은 사람을 용기 있게 만들어 실패도, 역경도 두려워하지 않게 합니다.
사람은 꿈과 비전과 사명을 가진 만큼 강해지고, 담대해지고, 넉넉해집니다.
그래서 "내가 왜 여기서 존재해야 하는가?"에 대한 사명적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물질이나 사람이나 권력을 따라 가지 말고 그 사명을 따라 가십시오.
사명 따라 살면 하나님이 필요한 만큼 물질과 사람과 권력도 따라오게 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녀들에게 무엇보다 사명을 따라 사는 삶을 가르쳐주어야 합니다.
감리교 창시자인 요한 웨슬레의 어머니 수산나 여사는 자녀들을 교육할 때
사명의식을 심어주기 위해 다음과 같은 질문과 대답을 반복 교육했다고 합니다.
"너희는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위대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가 너희를 위대하다 말씀했느냐?" "하나님이 위대하다 말씀하셨습니다."
"위대한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이사야 43장 21절에서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가 하나님께 찬송과 영광을 드리는 것'입니다.
살면서 나의 이익과 자리를 계산하지 마십시오. 오직 나의 사명을 따라 사십시오.
우리가 사명 안에 확고히 서있다면 우리의 작은 몸짓이 큰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보이는 열매가 적어서 답답하십니까? 그러나 적은 열매라고 답답해하지 마십시오.
열매가 적다면 내 자식이 살아갈 길을 닦는 것이라 생각하고 사명에 충실하십시오.
그처럼 우리가 사명을 따라 걸어가면 하나님은 우리를 안고 동행하실 것입니다.
< 받는 것도 복이 있습니다 >
사명과 함께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무슨 도전을 합니까? 35절 말씀을 보십시오.
"범사에게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사도 바울은 사명을 따라 살면서 약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수고하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주님 말씀을 기억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잘 보면 잘 받을 줄 아는 것도 복이라는 암시가 있습니다.
주는 데에 인색하면 복이 멀어지지만 받은 데에도 인색하면 복이 오기 힘듭니다.
어제 30년 가까이 보살펴주시던 저의 은사 선생님 자제분 결혼식에 갔습니다.
배도 고프지 않고, 식사도 입에 맞지 않는 양식이고, 주일준비 때문에 바쁘고,
선생님에게 약간의 금전적 보탬을 드리기 위해서라도 식사하지 않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약간의 식사비 절약의 의미보다 선생님의 대접의 의미가 더 중요하다 생각하고,
십자가를 지는 마음으로 식사를 했고, 대신에 그 시간만큼 수면 시간을 줄였습니다.
여러분! 줄 때도 물질보다 마음이 중요하듯이 받을 때도 마음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 받는 훈련도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잘 받는 사람이 잘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녀를 키울 때 감사하면서 잘 받는 너그러운 마음도 훈련시켜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을 받고, 마음을 받을 줄 아는 사람만이 주는 것도 알기 때문입니다.
<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습니다 >
그런데 오늘날 가장 큰 문제가 무엇입니까? 받는 것만 추구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인간이 언제 가장 아름답습니까? 받는 마음보다 주는 마음이 커질 때 아름답습니다.
받으려고만 하면 점차 신경이 쇠약해지지만 주려고 하면 신경이 점차 강해집니다.
그래서 신경쇠약과 스트레스를 극복하는 가장 위대한 처방은 바로 주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남에게 줄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아낌없이 은혜를 베푸십시오.
어떤 지혜롭고 마음이 넉넉한 남편은 아내에게까지 며칠간 포상휴가를 줍니다.
그 동안 가족 뒷바라지하느라고 수고한 아내에게 혼자 쉴 수 있는 기회를 주면,
휴가를 마치고 돌아온 뒤에 그 가정은 더욱 행복한 가정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아내를 어디도 가지 못하게 한다면 남편부터 신경쇠약이 걸릴 것입니다.
정말 행복한 삶을 살려면 연약한 자에게 주고 베풀고 섬길 줄 알아야 합니다.
특별히 약한 사람에게 베푸는 따뜻한 차 한 잔의 친절은 행복의 요소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돕고 섬기며 살려고 하십시오. 특히 약한 사람들을 도우십시오.
그렇게 돕는 사람들이 많을 때 우리 사회가 더욱 아름다운 사회가 되지 않겠습니까?
어느 여집사님의 고백입니다. 그분이 사는 동네에 강욱이라는 저능아가 있었는데,
이 강욱이는 항상 외톨이였고, 강욱이보다 어린 꼬마들까지 그를 놀리고 때렸습니다.
그런 강욱이와 놀아주는 유일한 친구들이 있었는데 바로 집사님의 두 꼬마들이었습니다.
이 집사님의 두 꼬마들은 강욱이에게도 깍듯이 형 대접, 친구 대접을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가끔 강욱이는 자기가 속상하면 이 아이들에게 손찌검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 집사님은 왜 자기 아이들이 강욱이와 놀까 속상해했다고 합니다.
어느 날 밖에 나가 놀던 큰아이가 강욱이에게 맞아 코피를 흘리며 들어왔습니다.
이 집사님은 화가 나서 "너 왜 강욱이하고 노니? 다시는 놀지 마!"라고 야단쳤습니다.
그러자 큰 아이가 주일학교 선생님이 들려준 '검은 마음 하얀 마음' 얘기를 해주었습니다.
검은 마음은 예수님이 싫어하시는 마음으로, 미워하고 때리고 따돌리는 마음이지만,
하얀 마음은 예수님이 좋아하시는 마음으로, 사랑하고 돕는 마음이라고 했다고 하면서
자기는 하얀 마음을 가지고 싶어서 끝까지 불쌍한 강욱이 형과 놀겠다고 말하더랍니다.
그 아이의 모습이 얼마나 기특하게 보였는지 아이를 키운 보람을 느꼈다고 합니다.
우리도 그처럼 하얀 마음을 가지고 항상 약자와 소외된 자를 살펴주어야 합니다.
< 능력보다 더 소중한 것은 영혼 사랑입니다.>
남의 입장을 생각하며 사는 삶! 이것이 바로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삶입니다.
더 나아가 남의 영혼을 생각하며 사는 삶! 이것이 성도를 성도답게 만드는 삶입니다.
친구나 이웃을 전도하는데 전혀 반응을 하지 않아서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가진 것!
하나님은 그처럼 남의 영혼을 생각하는 마음을 정말로 귀하게 보실 것입니다.
우리는 나를 통해서 다른 사람에게 복이 흘러 들어가는 존재가 되길 힘써야 합니다.
나의 존재가 다른 사람에게 복이 되는 삶을 산다면 얼마나 보람있는 일입니까?
사람은 능력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혼 사랑하는 마음을 더 좋아하십니다.
"하나님! 제가 저분을 도와줄 능력을 없지만 저분의 영혼을 살펴주세요."
이처럼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 마음이 무엇보다도 귀한 마음이 아닐까요?
1940년, 독일 군이 폴란드를 점령하자 유대인들은 인근 리투아니아로 피신했습니다
그리고 그곳도 안전하지 못해서 다시 다른 나라로 탈출해야 하는데 비자를 발급하는
모든 영사관들이 전쟁 때문에 철수했고, 오직 일본 영사관 하나만 남아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마지막 희망을 가지고 일본 영사관으로 달려가 비자 발급을 요청했습니다.
그때 일본 영사관의 스기하라 부영사가 이들의 처리에 대해 본국 정부에 문의하자,
독일과 우호관계에 있던 일본 정부는 비자를 발급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스기하라 부영사는 고민했습니다. 두려움에 떨며 기다리는 수많은 유태인들을 보며
그는 두 차례 더 본국 정부에 허락을 요청하는 전보를 쳤으나 회답은 마찬가지였습니다.
고민 끝에 그는 본국 정부의 명령을 거부하기로 결정하고 영사관 문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철수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잠과 식사를 거른 채 비자를 발급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가 구한 유대인 숫자는 무려 6천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의 생명과 영혼을 구하는 것! 이것보다 보람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 일을 위해서라면 나의 안전을 내걸 수 있어야 후회 없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돌아보는 것을 나와 전혀 상관없는 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자기의 욕심을 자제하면서 남들의 행복을 위해 마음 쓰며 사는 삶이 믿음의 삶이며,
그처럼 영혼을 돌보려고 애쓴 만큼 우리 안의 영생의 나무는 더욱 높이 자랄 것입니다.
< 큰 복을 예비하는 진국 신앙 >
우리는 남의 생명과 영혼을 생각하면서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최대한 주어야 합니다.
어떤 분은 줄 것이 없다고 합니다. 아닙니다. 줄 것은 많습니다. 격려라도 해주십시오.
실패했을 때 따뜻한 말 한마디의 격려는 성공했을 때 열 마디의 칭찬보다 소중한 것입니다.
"김집사님!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반드시 합력해 선을 이루실 것입니다."
그처럼 어려운 사람을 보듬고 격려하며 사는 삶이 믿는 사람의 삶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다 자기 살기에 바빠서 그런 여유가 없다고 말합니다. 말 한 마디도 못합니까?
그런 여유를 가지지 못할 정도로 일이 많다면 일 때문에 인간이 소외되는 것입니다.
그런 일이 있도록 해서는 안됩니다. 사람이 어려움과 실패로 시름에 빠져있다가도
격려의 말 한 마디로 시름을 털어 내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데 그 좋은 일을 안합니까?
오늘 들은 격려의 말 한 마디가 오늘을 어제와 전혀 다른 날로 만드는 것을 아십니까?
"정말 근사한데!" 그 말 한 마디가 시름과 피로, 무의미와 소외를 말끔히 씻어갑니다.
말은 독약이 되어 사람을 해치기도 하고, 해독제가 되어 사람을 살리기도 합니다.
그래서 시편 19편 14절에서 시편 기록자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우리가 일상적인 말들이 주께 열납되도록 노력하는 것은 영성생활의 기본입니다.
자기는 다 잘하는데 남은 잘못하고 있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기본의 문제입니다.
세상이 각박하다고 하는데 자기의 언어가 세상을 각박하게 하는지는 살피지 않습니다.
이제는 부드럽고 반짝이는 눈을 가지고 상대방을 찬찬히 보십시오.
좋은 점 많습니다. 잘 하는 점 많습니다. 그것을 캐어내어서 마음껏 표현해주십시오.
감사할 것이 있는데 그 표현을 묻어둔다면 받은 달란트를 땅에 묻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다른 인터넷 사이트에서 무엇인가 도움을 얻으면 최대한 감사표현을 하는 편입니다.
그 감사표현이 인터넷 사이트를 힘써 운영하는 분에게 얼마나 큰 격려가 되겠습니까?
결국 우리의 칭찬과 격려는 하나님의 일을 돕는 초석이 됩니다. 그것을 왜 안합니까?
우리는 한 영혼이 천하보다도 귀하다고 배웠고 그렇게 여기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배운 대로 어려운 영혼을 돌보고 격려하기 위해 그의 곁에 머물고 있습니까?
한 영혼의 수고에는 감사표현을 하고 있습니까? 만약 못한다면 바쁘기 때문일까요?
정말 그런가요? 아닐 것입니다. 문제는 주기 위해 노력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가끔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다가 학교 문을 박차고 나온 아이들을 보게 됩니다.
어른들이 만든 틀 안에 들어오지 않고 거부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문제아로 여깁니다.
물론 어른과 아이를 대립적인 개념으로 놓고 틀을 어른의 틀로 여기는 것은 잘못입니다.
왜냐하면 틀은 어른들이 만든 것이 아니고, 아이들만의 공동체에도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사회에 틀은 필요합니다. 그 틀을 깨뜨리는 입장에만 선다면 그것은 문제입니다.
그러나 그 문제를 인식하면서도 틀을 거부하는 학생을 끌어안으려는 선생님들이 있습니다.
끊임없이 참고, 그들과 함께 뒹굴고, 그들의 입장을 이해하면서도 때로 따끔하게 훈계합니다.
이런 분들이 바로 주님의 친구들이요, 메마른 사회에 버팀목이 되는 천사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분들에게 박수만 치고 끝날 것입니까? 우리도 그런 일에 적극 동참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 교회에는 물질적 헌신을 요구하는 세 가지 큰 기도제목이 주어져 있습니다.
지난 10개월 동안 이은경 집사가 백혈병 투병을 하면서 병원비 때문에 얼마나 허덕입니까?
그런 모습을 보고도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교우(敎友)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또한 김재호 선교사님이 몽고에서 차가 없어 그토록 고생한다는 가슴 아픈 소식을 듣고도
교인 중에 10분의 9이상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으니 언제 제대로 선교하시렵니까?
직접 선교를 나가지 못한다면 선교사의 눈물 섞인 기도제목에는 반응해야 하지 않습니까?
어떤 분은 구제와 선교에 힘쓰는 것을 보고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우리 교회가 선교보다는 성전 확장이 더 시급하지 않은가?
먼저 교회를 확장하고 더 부흥된 뒤에 나중에 더 선교하면 더욱 크게 할텐데..."
옳은 생각일까요? 아닙니다. 선교는 성전 확장보다 중요합니다. 선교는 미룰 수 없습니다.
얼마 전에 안디옥 선교회에서 모슬렘권 신학생들을 위한 생필품과 장학금 요청을 받고
생필품 1차 분을 전달하고, 다음 주일에는 생필품 2차 분을 그곳에 전달할 예정입니다.
그런데 생필품 후원은 많이 들어왔지만 등록금을 후원하겠다는 분은 한 분도 없었습니다.
그들 중에 몇 사람이 등록금 문제로 신학공부를 포기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비록 그들 숫자는 15명의 소수에 불과하지만 모슬렘권에 뿌려질 희망의 씨앗들입니다.
그들의 필요와 어려움에 우리 교회가 적극 동참할 때 교회의 존재 의의는 이뤄질 것이고,
또한 그런 과정에서 우리의 신앙은 큰 복을 예비하는 진국 신앙이 되어가지 않겠습니까?
< 후원안내 >
신한은행 642-12-079560(이은경 집사를 돕기 원하는 분)
국민은행 284-21-0264-873(김재호 선교사님 및 모슬렘권 신학생들을 돕기 원하는 분)
< 하나님 관계에서도 드리기를 힘써 보십시오 >
그런데 이 시간 저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다는 선언을 확대적용하고 싶습니다.
즉 이 선언을 하나님 관계로 확대시켜 보자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선언이 나옵니까?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보다 더 복이 있다"는 선언이 나옵니다.
얼마나 역설적인 선언입니까? 그런데 이 선언에서 더욱 엄청난 선언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기도'보다 '우리의 봉헌'이 더욱 복되다는 매우 충격적인 선언입니다.
이 선언을 '기도의 가치를 떨어뜨리기보다 봉헌의 중요성을 높이는 선언'으로 받으십시오.
이제 '복 받기 원하는 작은 복'에 머물지 마시고, '드릴 수 있는 큰 복'을 추구해보십시오.
하나님께 우리의 가장 좋은 것을 드릴 수 있는 봉헌의 마음이 진정 복된 마음입니다.
봉헌은 주님만을 사랑하기에 이제 주님만을 위하여 살겠다는 사랑의 작은 약속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예배의 4대 핵심요소로 말씀, 기도, 찬양과 함께 봉헌을 드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님 사랑하는 마음이 정성스런 물질을 통해서 적극적으로 표현될 때
그때부터 그 신앙은 책임적인 신앙, 진정한 복의 의미를 아는 신앙이 될 것입니다.
물론 봉헌이 없어도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마리아가 향유를 깨뜨리지 않고 그냥 예수님 앞에 섰다면 어떠했을까요?
전혀 다른 분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향유가 갖는 의미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봉헌의 중요성을 가볍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매우 소중한 신앙의 표현입니다.
3년 전, 이곳에 교회를 개척한 후,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풍성하게 채워주셨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봉헌과 헌신 때문이고, 옥합을 깨뜨린 결과에서 나온 것입니다.
또한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여러분의 신앙이 성장한 결과라고 생각할 때
여러분들에게는 복이요, 저의 마음은 얼마나 흡족한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이제까지의 우리 삶을 돌아보십시오. 남을 도우면서 보람있게 사셨습니까?
아니면 남의 소중한 것을 헐고 깎고, 비판하고 무너뜨리면서 허무하게 사셨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남을 기쁘게 하며 주는 삶이 진정 복된 삶이라고 도전합니다.
바로 그때 우리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우리에게 더욱 많은 기쁨의 제목을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하나님께서 마음속에 창조해주신 이웃사랑이 끊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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