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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연구 총정리〓/바울 서신

바울서신 // 제 5 강 // 제6강

by 【고동엽】 2022. 10. 23.

바울서신 // 제 5 강

 

   김세윤  교수

 

고린도전후서 1

 

고린도는, 캐사르에 의해서 BC 44년에 로마의 식민지가 재건되었는데, 이미 27년 부터는 아마야 지역 (그리스 남쪽과 헬로폰네스 합한)의 행정수도가 되었었습니다. 그래서 로마의 총독이 주재하던 곳이었습니다. 고대 고린도와 마찬가지로 이렇게 재건된 1C의 신약시대의 고린도는 무역로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번성했고, 여러 종족들이 모이는 항구도시로서 여러 종족들이 가져온 혼합주의가 성행했었습니다. 특히 아프로디테를 섬기는 신전에서 성창(聖娼)이 번성을 했었습니다. 더불어 성적인 타락이 극심하여서 ‘고린도인들 같이 산다’라는 표현이란 고대사에서 성적으로 아주 문란하다는 격언이 되다시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도시는 부유한 도시로서 철학과 수사학의 학자들이 모여들고 그들을 중심으로한 학교들이 번성을 하고, 동시에 이 도시의 시민들은 지적인 자부심이 있었고 특히 수사학의 큰 가치를 두어서 지혜롭게 말하고 아름답게 말하는 것을 높게 생각을 하여서, 아까 고린도인들과 같이 산다라는 격언과 마찬가지로 고린도인들의 말이라는 격언적 표현이 있어서 매우 설득력있고 달콤하게 수사학적으로 말을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아까 이야기 한대로 로마인들, 헬라인들, 또 동방에서 온 사람들이 서로 섞이면서 종교적 혼합주의가 성행하고 종교적 의식이 아주 몰락하고 타락하는 형태를 보였는데 그런 가운데 상당히 큰 유대 공동체도 있었습니다.

 

1. 고린도 교회의 설립 배경

바울의 고린도에 대한 첫 선교는 사도행전 18장에서 상당히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습니다. 이른바 제 2차 선교여행 중 AD 50-51년의 겨울에 바울은 고린도에 당도하여서 아주 예외적으로 1년 반 정도를 머물면서 복음을 선포하고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바울이 원래 한 곳에 오래 머물지 않는 사람인데, AD 49년에 로마의  Claudius 황제의 칙령에 의해서 곧 유대인들을 로마시에서 추방하는 중요한 칙령이 내려졌었습니다. 이 칙령에 의해 로마로부터 고린도에 와서 정착한 유대인 부부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집에서 취직하여서 일하면서 --그들의 천막 만드는 사업에 동참하면서-- 자기 손으로 밥벌이를 해가면서 유대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했습니다. 후에 고린도후서에서 여러 번 말한 바와 같이 바울은 고린도인들에게 한 푼도 도움을 받지 않고 자기 손으로 벌어서 생계를 유지했다고 말합니다. 이 유대 회당에서 바울은 상당수의 유대인들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들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성공은 유대인들의 반대에 부딪혀서 그리스도인이 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의 하나였던 유스도의 집으로 교회를 세웁니다. 이렇게 해서 고린도 교회는 시작이 되었습니다.

AD 51년 7월에 Lucius Junius Gallio가 고린도의 아가야의 총독으로 부임을 했습니다. 이는 로마 역사에서 정확한 날짜인 AD 51년 7월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때 유대인들은 불법적 종교를 퍼뜨린다고 갈리오에게 송사했습니다. 그러나 갈리오는 그들의 고소를 기각했습니다. 이 갈리오의 기각은 바울이 선포하는 message가 당시 로마법에 의해서 적어도 관용되었던 유대교의 일종이라는 판결을 내린 것과 같았습니다. 당시 유대교가 이른바 religio licita(합법적인 종교)라고 최근 많은 학자들이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유대교는 법의 보호를 받고 있었는데, 유대 회당에 유대인들이 바울이 유대교를 선포하는 것이 아니고, 유대교의 완성인 메시야 예수의 복음을 선포한다고 바울이 주장했습니다. 이를 인정치 않고 이단이라고 생각하는 유대인들이 갈리오에게 송사를 했었으나, 당시 유대교는 합법적인 종교 religio licita로 법의 보호를 받고 있었는데, 만약에 바울이 선포하는 기독교가 유대교인으로 부터 이단으로 낙인 찍힌 것이 로마 행정관에 의해서 받아들여지게 된다면 유대교는 별개의 종교이며, 이 religio licita라는 합법성을 더이상 부여받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는 과연 유대교가 당시에 합법적인 종교로 인정 되었었는가 하는 데에는 약간의 논란이 있습니다. 아마도 정식으로 인정은 받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고대 헬라인들이 유대인과 한 경험으로 그리고 로마인 스스로가 유대인과 함께 하는 경험에서 유대인들의 그들의 종교를 되도록이면 간섭하지 않고 놓아주는 것이 좋다고 하는 지혜를 얻어서 유대 교인들에게 법적인 관용을 많이 베풀었을 따름이지 특별히 합법적인 종교라고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라는 설이 강력하게 대두되고 있습니다. 아마 그것이 맞을 것입니다. 그래서 가령 유대인들이 군대를 가지 않고 황제 숭배 참여에 요구되지 않는 등의 여러 특권을 허락 받았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선포하는 기독교가 통상의 유대교가 아니라면 유대인들에게 허용된 그런 특권을 기독교인들은 누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송사를 하였는데 갈리오도 그 송사를 거절하였다는 것은, 갈리오가 볼 때는 기독교는 유대교의 완성이므로 일종의 유대교로 생각한 것입니다. 이 갈리오의 판결은 후에 로마의 관리들이 그리스도인들을 다루는데 있어서 중요한 선례를 세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선례는 곧 무너집니다.  64년 무렵에 Nero의 핍박과 그 이후의 로마의 집정관들은 점차 기독교는 유대교와는 독립적인 별개의 종교로 보기 시작하고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기 시작합니다.

 

그리하여 1C 말, 90년대에는 당시 황제에게 Pliny는 보고하기를,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찬송하고 선한 일을 하자고 서로 교제를 하고 같이 모여서 식사를 하고 이런 식의 종교 모임을 하는데 이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되겠습니까? 죄를 졌다고 고소를 해서 잡아서 문초를 해보니 그런 죄를 지은 것 같지는 않으니 이 새로운 종교라고 하고 대충 혼을 내어서 석방을 하였는데 다음부터는 이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합니까?” 라고 하드리안 황제에게 충고를 구하는 편지를 합니다. 이것을 보면 그때까지도 그리스도인들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대한 로마의 원칙이 세워지지는 않은듯 합니다. 네로의 협박은 원칙적인 핍박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지방의 행정관에게 상당히 많은 재량권이 부여되었던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하여튼 갈리오가 기독교의 대표되는 바울을 무죄선언 했다는 것은 적어도 아가야 지방, 또 이웃 지방에 선례를 남겼을 것입니다. 그 후 바울은 로마 관리들의 간섭 없이 계속해서 선교사업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AD 52년 봄 쯤에 바울은 에베소를 향하여 고린도를 떠났습니다.

 

2. 고린도 교회의 일반적인 성격

고린도 교회의 대부분은 아마도 하층 이방인 계급 출신들이었던 같습니다. 고전 1:26-29절에서 바울이 이를 지적합니다. 그러나 간혹 상층 부유층 가정이 더러 있었다는 것도 고전 10:27, 11:17-34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부자들은 성만찬을 할 때에 음식을 가져와서 잔뜩 먹고 깊이 술에 취해 있다고, 반면에 노예들이 이때 무슨 떡 고물이라도 얻어 먹을까하고 찾아왔으나 부자들은 자기들끼리만 술에 취해 곤드레 만드레한 상태만 되는, 고린도 예배가 혼란케 되고 요즘 표현으로 위화감이 조성되었습니다. 이것이 고린도의 여러 문제 중의 하나였습니다. 계층간의 위화감이. 그러므로 대부분이 하층 노예 출신 이방인들 같은데 더러 상층 가정도 있고 또한 유대 그리스도인들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고린도의 이방적 환경과 고린도 그리스도인의 이방인적 과거는 고린도 교회의 많은 문제들을 야기시켰습니다. 성 도덕의 문란, 우상 숭배, 불신자들간의 교류 문제, 지혜와 지식 자랑 그리고 성령 열광주의 등의 여러 문제들을 야기 시켰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이러한 모든 문제들의 뿌리는 아마도 고린도 그리스도인들의 옳지 않은 구원론과 성령 은사에 대한 오해에 기인하지 않았나! 하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안의 구원과 성령 은사가 왜 발생했는가? 그들의 헬라적인 이원론적인 사고방식 때문인듯 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안에서 실현된 구원이 첫 열매로 주어지나, 그것의 완성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있을 것이며,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내주하시는 성령은 이 구원의 첫 열매를 나타내는 하나님의 선물이요, 장차 그리스도의 재림 때 주어질 구원의 완성에 대한 보증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영과 육의 이원론적 구조로 생각하도록 오랫동안 길들여진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의 이와 같은 시간론적인 이원론(지금은 이 세대 구원의 첫 열매를 받고, 그리스도 재림 때에 그 완성을 받는다는 시간적인 이원론)을 본질적인 이원론으로 번역해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을 지금 그들의 영혼이 하늘의 구원을 완전히 얻은 것으로 보고 성령의 은사들을 바로 이와 같은 자신들의 확신을 확인해 주는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즉, 헬라 이원론에 의하면 “몸은 물질에 속하니까 이는 악한 것이고, 불필요한 것이고, 구원 못 받은 것이지만, 영혼은 구원을 받는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영혼의 이데아의 세계, 신적, 영원의, 진리의 세계에 복귀한 것인데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이 일어났다면 그것은 분명히 영혼의 이데아의 세계에 도달했음을 의미한다.” 라고 해석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들이 받은 성령의 은사들에 대해서도 --겉으로 현저하게 드러나는 방언 등의 은사들은-- 이미 자신들의 영혼이 하늘의 영원의 세계에 구원을 받은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자신들이 이미 도달했으므로 바울이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완성할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자신들의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고전 4:8에서 바울은 매우 냉소적으로 지적하면서, “너희가 이미 만족하면서 이미 하나님 나라에 도달해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한다? 얼마나 좋겠는가? 우리도 너희와 같이 왕 노릇 했으면 좋겠다.”라고 말을 합니다. 이들은 벌써 그들의 영혼에 만족한 상태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또한 자신들이 이미 영적인 존재로 변화된 것이라는 것까지 본 것입니다.

 

또 고전 3:20 역시 같은 표현을 씁니다. 신령한 자, 영적인 자들로서(πνυματικοι)로서 자신들이 헬라적 이원론에 의해 육신적인 존재를 벗어나서 자신의 영혼이 이미 이데아의 세계에 도달한 자들이기 때문에 이들은 퓨뉴마티코이라는 영적인 자들로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에 대하여, “너희들은 영적인 자들이기는 커녕 육신적인자들이다.”고 하는데, 이는 고린도인들에게 더 큰 욕이 없을 정도입니다. 바울은 이를 좀 더 완화시켜 ‘어린아이’라고 합니다. “너희들이 영적인 자들이라고? 천만의 말이다.”

이 일 때문에 이들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몸의 부활이라는 사상은 이상할 뿐만 아니라 --헬라적 이원론적인 사상 배경 아래에서는 몸이 부활하는 사상은 있을 수 없는 것이고, 실상 자신들의 영혼이 이미 구원을 받았기에 불필요한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들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영혼이 재림 때에 영적으로 부활해서 이미 영적으로 부활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더이상 바랄 것이 없는 것입니다. 고전 15:3을 보면 그들은 몸의 부활을 부인한 듯 하나, 고린도인들이 특별히 무엇을 부인했는가에 대해서 학자들간의 결론이 나있지는 않는 상태입니다. 부활의 일체인가? 몸의 부활인가? 그리스도의 부활은 믿었으나 그리스도인들의 부활도 믿지 못한 것인가? 도대체 고린도인들의 부활에 대한 견해는 확실히 무엇인가? 바울이 어떤 견해를 지금 반박하고 있는가? 많은 학설이 분분하고, 불분명합니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인했다기보다는 그리스도인의 몸의 부활을 부인했을 것이고, 이는 헬라적 이원론에 의거하여 영혼의 부활만을 믿고 있을 것이며, 이미 세례 때에 그리스도와 영적 부활 했기에 더 이상 부활이 없다고 믿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령의 은사(카리스마타?)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자신들의 구원의 징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현저하게 드러난 은사들, 시끄러운 은사들, 방언하고 환상을 보고 이적을 행하는 것들에 관심을 집중시켰으며 이런 은사들을 서로 과시하는데 열중하였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자연히 경쟁과 질시와 교만과 상호무시의 분위기를 만들었고, 예배 때에는 겉으로 드러나는 은사의 자랑으로 서로 과시하며 구원을 받고 높은 상태에 있다는 것을 자랑하여 일대의 혼돈이 벌어졌음을 고전 12-14장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인들은 고린도의 일반적인 분위기였던 철학과 수사학에 대한 자랑의 영향을 받고, 고린도의 자유 분방한 삶, 특히 성적인 도덕 문란의 영향도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특히 성령의 은사들 중에 말에 관련된 방언, 예언, 지식, 지혜 등을 수사학에 관심이 높은 고린도의 일반적 영향에 관련하여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지식이나 언변 등을 높게 생각하여 서로 과시하는데 열중하였습니다.

이들은 성령론을 통하여 얻은 지식으로 우상들, 즉 고린도의 이방인들이 섬기는 신들은 실체가 없는 존재에 불과하므로, 그 불신자들이 그들의 신전에서 또한 그들이 우상을 섬기는 여러 잔치에 참여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고 우상잔치에 있는 고기를 먹는 것을 전혀 거리끼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영혼이 하늘의 구원을 얻었다고 믿었으므로 그들의 몸으로는 아무 것이나 해도 괜찮다고 생각을 해서 고린도의 일반적인 문란한 성도덕에 같이 휩쓸릴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이방인들이 하지 않는 짓까지도 하면서도 자신들의 영혼의 구원을 더 과시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것들을 학자들은 무엇이라고 생각을 하느냐 하면, 성령의 은사들은 구원받은 영혼이 이미 구원을 받았다는 증거라는 그들의 생각에 따라 성령의 은사들을 과시하며 부도덕에 이끄는 자들을 열광주의라고 부릅니다. 그런 영적 상태를 En-thusiats(Enthusiasm)라고 합니다. 이런 현상은 항상 일어납니다. 교회가 너무나 지적인 정통 교리만 집중하면 항상 성령파들, 은사파들의 카리스마 movement가 항상 Enthusiasm로 흘러서, 도덕성이 항상 약하게 일어납니다. 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의 은사가 그것으로 자신들의 구원이 확인되는 것으로 생각하여 도덕적으로는 상당히 문란한 상태에 빠져 들어가는 것을 우리 한국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미국에 가서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가장 꼴불견한 일은 소위 테레비젼 목사들입니다. 이 친구들이 TV를 엄청난 돈으로 사서 말도 안 되는 설교를 해서 자신들의 하나님 나라의 운동을 한다고 전국에 방송을 하여 헌금을 호소해서 돈벌이를 엄청나게 합니다. TV장사를 하여 자신들의 엄청난 왕국을 건설하고 삽니다. 로날, 로버트, 인메이커등 여하튼 여러 명이 있는데 최근에 한결 같이 엄청난 성도덕의 문제로 하나같이 쓰러졌습니다. 짐 베이커는 자신의 기소를 자신의 친구들까지 못살게 굴도록 만들어서 사기를 무지하게 해서 감옥형을 100년이나 언도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짐 베이커 문제를 터트린 자가 한동안 의기양양하면서 부도덕한 자라고 이렇게 간음하고 사기친 자는 우리 교계에서 없애야 한다고 굉장했었습니다. 그런데 2년 후에 자신도 똑같은 것으로 감옥에 갔었는데 또 얼마 후에 TV 라이벌인 또 다른 자를 그런 식으로 물고 늘어져서 이제 모두 그런 식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한결 같이 은사파들입니다. 열광주의로서 성령의 열광주의자들로서 지적인 기능을 완전히 마비시킵니다.

바울은 영을 분변하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성령이 아닌 악령에 의해서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항상 교회에서 일어나서 한국 교회에서도 성령파의 대표가 이 문제로 걸렸는데, 큰 신문보다는 지하 신문에 날 것입니다. 여러분 못 보셨어요? 5공 때에 큰 기업의 사보 등에서 비밀리에 많이...  한국의 큰 교회 이야기도 많이 나왔었습니다. 불란서에 가서 무슨 짓을 해서 무슨 병이 걸리고 하는 난리가 났습니다.

 

하여튼 고린도인들이 그러한 것의 전형이었습니다. 신학자들이 성령의 열광주의라고 말합니다. 특히 이를 고린티안인슈세슈(고린도 열광주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고린도의 열광주의자들이 2C 이후에 발달하는 영지주의로 점점 발전되는 경향을 보여서 고린도의 열광주의를 또 다른 말로 이제 배태되기 시작한 영지주의(incipient gnosticism)라고 부르기도 했고 얼마전 까지만 해도 이를 그저 영지주의라고 불렀으나, 요즘은 구분해서 진정한 영지주의는 6C에나 가서 발달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고린도의 열광주의 2C의 영지주의로 발달하는데 태아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으므로 배태된 영지주의라고 부릅니다. 이들이 아마도 고린도 교회의 사수였든지 아니면 적어도 고린도 교회의 목소리 큰 자들이었는데, 반면에 헬라적 이원론의 근거에서 정 반대의 윤리적 결론을 내린 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유대 그리스도인듯 하고 다른 자들은 이방 그리스도인들 같은데, 이들도 영과 육의 이원론에 근거해서 영의 구원만이 중요한 것이고 몸은 전혀 무익한 것이므로 영의 구원의 순수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몸의 소욕을 되도록이면 피해야 한다고 생각을 해서 극단적인 금욕주의로 흘렀습니다. 이들은 그래서 결혼을 부인하고 시장에 파는 고기를 사먹는 것을 피했습니다. 당시 시중에 매매되는 고기는 전부 우상에 제사되는 절차에 의해 도살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고전 7-8장에서 바울이 다루는 이야기입니다.

이 열광주의 자들과 금욕주의 간의 갈등이 일어난 것은 필연적인 사실입니다. 지혜와 지식과 자유를 자랑하는 열광주의 자들은 금욕주의자들을 약한 자들이라고 무시했고, 금욕주의자들은 육신적인 방탕 자들이라고 열광주의자들을 비판하면서 자신들이 그들보다 영적으로 우월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강한 자들과 약한 자들의 대립이 고린도 교회의 큰 문제였던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이와 같은 분파는 아볼로와 베드로가 고린도를 방문하면서 더욱 심각하게 되었습니다. 철학과 수사학을 숭상하는 고린도의 전통에 찌들었던 고린도 그리스도인들은 엄청난 성경 해석의 능력과 수사적 기술을 가진 아볼로에 대해서 굉장한 신뢰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18장에서 알렉산드리아에서 온 아볼로에 대한 평이 나옵니다. 알렉산드리아는 알레고리적 해석(?)의 본고장이지요? 그러니까 자연히 고린도의 열광주의자들은, 방언 등을 높이 평가하던 이들이 아볼로를 자신들의 사도로 삼았습니다. 반면에 금욕주의적인 유대 그리스도인들과 이방 그리스도인들은 베드로의 가르침을 더 선호하게 되었습니다. 아마 베드로는 사도들의 명령의 4가지, 우상숭배, 술을 마시지 말고 등의 계율과 명령을 가르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를 선호하게 되고 베드로를 자신들의 사도로 선호하게 되었습니다. 이 두 group에 대항해서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원래 사도들에게 충실하자고 생각해서 우리는 ‘바울파’ 라고 주장을 합니다. 세 개의 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또 한 group은 아마도 가장 열광주의적인 자들로서 부활한 그리스도와 직접 교류를 한다고 하면서 바울이나 아볼로, 베드로 같은 인간적인 선생에 붙어있는 자들을 무시한, 이른바 그리스도파가 있게 된 듯 합니다. 이것 역시 학자들간에 진짜 그리스도파가 있었겠는가에 대한 논란이 있었습니다. 아니면 원래 고린도에 세파가 있는데 이 아볼로, 베드로, 바울 파 중에 어느 것에도 속하지 않은 자들이 냉소적으로 “인간적인 누구에게 속한다고 주장을 하느냐? 그렇다면 우리는 그리스도파다.” 특별히 신학적 색채나 주장이 있지는 않으나 서로 누구의 파다라고 주장하는 것이 꼴보기 싫으니 우리는 그리스도파다 할 것이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그리스도파가 있었다고 보고 아마도 베드로파 보다 더 극단적인 부활한 그리스도와 직접 교류한다고 주장하며 다른 파를 무시한 자들일 것이다 라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이 문제를 처음 고전 4장까지에서 지혜 자랑에 근거한 분파 행위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아볼로가 주는 지혜가 더욱 나은가? 베드로가 더 지혜로운가 등으로 복음을 완전히 사도들의 가르침을 다양한 헬라의 학파들의 다양한 지혜 정도로 생각하는 서로 반대하고 무시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또한 고린도 교회는 가나한 자와 부자로 갈라졌었습니다. 그리하여 성만찬을 할 때에 부자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가져온 음식을 잔뜩 먹으면서 자신들이 부자임을 교회 전체에 과시해서 아무 것도 먹을 것이 없는 가나한 자들에게 부끄럼을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성도의 교제의 식탁인 성만찬의 식탁을 교회의 하나 됨을 상징하는 식탁을 실제로는 분열을 일으키는 짓을 했습니다. 바울은 고전 11:17-33까지에 부자들에게 하나님을 무시했다고 욕을 합니다. 오늘날의 교회에서도 빈번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교회를 무시합니다. 다음시간에 합시다.

 

 

 바울서신  제 6 강

 

고린도전후서 2

1. 고린도에 보낸 바울의 편지들

지난 시간에 고린도 교회의 일반적인 성격을 알아 봤습니다. 오늘은 고린도 교회와 바울 간의 서신 왕래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서신 왕래의 서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고린도인과 바울간의 왕래 관계를 알다 보면 고린도 교회의 문제도 알게 되고 바울은 그 문제를 어떻게 취급했는지도 알게 됩니다.

첫째, 고린도 서신들이 어떻게 구성되었는가에 대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두 편인데 그것이 전부인지 아니면 우리가 갖고 있는 다른 편지에 같이 편집되어 있는지 이 문제가 매우 중요합니다. 고린도 교회에 바울이 쓴 편지들이 특히 고린도후서가 한 편지인가 아니면 두 편지인가 또 속편으로 삽입되겠는가? 소위 이 편지들의 단일성(unity)이 어떻게 되는가 하는 문제들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곧 고린도 교회와의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5:9에 첫째로 고린도 교회에 바울이 전에 썼던 편지에 대하여 언급합니다. “내가 너희들에게 쓴 것에....” 에서 바울이 썼던 편지가 분명히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편지를 전에 쓴 편지라고, 이전 편지(the previous letter)라고 부릅니다. 그 편지에서 바울은 고린도 그리스도인들에게 교회 안의 부도덕한 자들이나 악한 자들, 우상 숭배하는 자들과 어울리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러나 이 경고는 그들의 이웃들과 일체 교류하지 말라는 오해인듯 합니다. 고전 5:9-11을 보면 이 편지는 완전히 상실된 것 같은데 일부 학자들은 고후 6:14에서 7:1이 이 편지의 한 조각이라고 봅니다.

두 번째 바울은 글로에의 집 사람들로부터 고린도 그리스도인들이 그의 편지를 오해하고 있다는 소식과 함께 고린도 교회가 바울파, 아볼로파, 베드로파, 그리스도파등으로 분열하고 있다는 소식을 받았습니다. 고전 1:1-17까지 지난번에 이 파문에 대하여 조금 설명을 했었습니다.

세 번째로 이 무렵에 바울은 다음과 같은 문제들에 대한 가르침을 청하는 편지를 가지고 온 고린도 교회의 대표단을 맞았습니다. 이 고린도 교회의 대표단은 스데바나, 보드나도, 아가이고 등 세 사람으로 구성되었고(고전 16:17), 그 문제들은 첫째 결혼에 대해서(고전 7:1-40), 다음에 우상 제사의 고기에 대하여(고전 8:1-9), 예배 때의 혼란(고전 11:2-34), 성령의 은사(고전 12:6-14:4)에 대하여, 부활에 관하여(고전 15:5-58), 마지막으로 예루살렘 교회에 대한 헌금에 대해서 입니다. 고전 7:1을 보면 “너희에게 쓴 것에 대해서 내가 답을 하겠다.”고 바울은 말하는데, 고린도인들이 세 사람의 대표단에게 편지를 써서 보내면서 이와 같은 사항에 대하여 가르침을 주십시오 라고 청하면서, 그 다음에 나오는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하는 것이 좋다’는 구절은 당시 고린도인들의 구호였습니다. 즉 결혼을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는 자들과 결혼을 했어도 성 관계를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있으니,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는 것이 좋다는 것은 금욕주의자들의 구호이므로, 거기에 대하여 바울이 7:2부터 답을 합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유의할 점은 너희들에 쓴 것에 대하여 내가 답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고전 7:25을 보면 거기에는 처녀들에 대한 언급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바울에게 묻는 것입니다. 그리고 8:1을 보면 그곳에서는 지금부터 내가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에 대해서 답을 하겠다고 말하면서, ‘우상의 제물에 대해서는 ....’ 하고 시작을 합니다. 여기에서 ‘우리 모두가 지식이 있다는 것을 안다’ 라는 표현에서 인용의 어귀입니다. 고린도의 열광주의자들의 구호였습니다. ‘우리가 다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그들은 이미 모든 지식이 있으므로 우상 제물에 괘념치 않고 또한 이방 제사의 festival에 참여해도 된다는,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다. 우리가 다 지식을 가졌는데.” 이러한 것들이 열광주의자들의 구호였습니다. 바울이 이에 8:9에서 말하기를 “지식은 우리를 교만하게 하고 사랑은 교회를 세워 올리고 덕을 쌓는다.” 라고 답을 합니다.

 

이런 식으로 지혜 문제에 대하여 또한 고전 12:1을 보면 신령한 것을 언급하는데 이는 “성령의 은사에 대하여, 영적인 것에 대하여 내가 답을 한다.” 라고 고린도 교회가 문제를 제기해서 바울의 가르침을 더 청했기 때문에 바울은 조목 조목 답을 줍니다. 넷째로 바울은 우리가 현재 고린도전서라 부르는 것에 있어서 이 문제들에 대하여 응답을 합니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는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게 보내는 두 번째 편지입니다. 에베소서 AD 59년에 보낸 이 편지에서 바울은 성령주의자들에게 그들이 아직도  지상에서 육신과 죄에 노출되어 실존하고 있는 현실을 상기시키고 교회의 교제를 북돋아 주는 삶의 정신과 우리 말로 덕을 세운다는 의미입니다. 교회의 교제를 북돋아 주는 삶의 정신과 절제 있는 생활을 강조하면서 그들의 열광주의를 교정하려고  했습니다. 물론 이들의 지혜나 분파 문제들을 다루어서 이웃들에게 올바른 삶을 유도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게 주는 구체적인 충고는 F.F. 부르스의 바울 책이나, 도날드 거쓰리의 서론 책에 아주 잘 요약되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을 몇 가지 들어 본다면 인간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고전 1:17-2:16), 결혼과 성 문제(고전 5:6-33), 우상에 관계된 고기를 먹을 것인가(고전 8:1-11:6)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분명한 자유의 성격을 다룹니다. 바울이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성격을 다루면서 교회에 항상 있는 문제, 이른바 강한 자와 약한 자의 대립의 문제를 다룹니다. 복음의 자유를 누리되 방종주의로 흐를 위험을 늘 갖고 있는 강한 자들과, 복음이 근본적으로 자유를 의미하는지 모르고 금욕주의적 율법주의적인 반대 집단으로 흐를 위험을 늘 갖고 있는 악한 자들, 이런 문제는 어느 시대나 어느 곳이나 항상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위스의 정신과 의사인 폴 티니(?)의 책 중에는 「강한 자와 약한 자」라는 책이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가르침을 현대 교회 생활과 현대인들의 심리, 정신을 연결 시킨 좋은 책입니다. 강한 자와 약한 자를 다루면서 그리스도인의 사랑과 의무를 잘 다루고 있습니다.

다음에는 성령의 은사(고전 11:20-14:40), 이 문제를 좀 더 자세히 공부를 하고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어떤 충고를 주는가를 자세히 공부하고, 오늘날 우리들의 교회 상황에 적용을 하면 많은 도움을 받을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오늘날의 교회의 거울이라고 보아도 과언이 아닙니다. 어느 시대에나 대개 교회의 문제들이 고린도 전후서에 다루어진 대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교회가 특별히 그러합니다. 고린도후서를 보면 진정한 권위의 문제,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의 가치관, 세상적으로 힘이 있어 보이고 권위 있는 것이 진정한 사도직의 표증이냐, 아니면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사도직의 표증이냐? 인간적인 자격들, 학벌, 연줄 등이 진정한 지도자의 자격인가, 아니면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자들이 자격을 지닌 자들인가, 아니면 영성이 무엇인가?  아니면 성경의 사랑의 실천이 진정한 영성인가?

고린도전후서를 보면 바울의 모든 서신들은 신약의 모든 책들과 일관 되게 진정한 영성은 도덕성으로 반영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도덕성을 표현 않는 영성은 없는 것이고 이는 기독교적인 영성이 아닙니다. 원시 종교의 영성이라는 것은 도덕성이 없고 영이란 하나의 물리적 힘 같아서 도덕이 전혀 쓰이지 않은 그런 가치로 나타납니다. 우리 한국의 샤머니즘이 그런 종교의 하나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의 이른바 영성이라는 것이 도덕성과는 아무런 관계없이 나타나는 것이 되었고 여러분들이 고린도 전후서를 잘 공부하고 적용을 하면 오늘날 교회의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중에서도 인간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를 간단히 생각해 본다면 고린도 교회의 근본 문제들, 적어도 근본 문제들의 일부가 성경주의자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과 성령의 은사를 자신들의 영혼이 이미 지혜를 얻어서 육신, 물질의 세계로 해방된 것으로 이해를 하여서 이미 구원을 확보한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이해와 지식, 자유를 자랑하면서 교만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지난번에 이런 이야기를 조금 했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종말론적인 이원론을 헬라적인 본질적 이원론으로 오해를 해서 그리스도 안의 종말론적인 구원을 현재적 영혼의 구원으로 헬라적 재 해석을 하게 되는 오해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지난 번에 이야기한대로 자기 자랑, 자기 과시에 빠져서 서로 과시, 자랑하는 분파와 도덕적인 타락의 분파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미 바울은 이들의 근본 문제인 지혜 문제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타난 진정한 하나님의 지혜와 대조하면서 이 문제를 다룹니다.

 

그들이 성령을 통해서 받은 지혜와 지식을 자랑한다 해도 세상적인 지혜가 아닌 성령을 통해서 얻은 지혜와 지식입니다. 특별히 이 지혜와 지식으로 스스로를 교만케 하고 분파적인 경쟁에 빠지고 성도덕의 타락상을 보이며 우상 숭배자들과 휩쓸리는 것을 봤을 때 그들은 진정한 영적인 신령한 자들이 아니고 육신적인 자들임을 스스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주장하는 것은 진정한 신적 지혜나 지식이 아니고 육신적인 또는 세상적인 왜곡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를 받았음에 틀림이 없다 해도 그 성령의 은사를 육신적으로 세상적으로 왜곡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영적인 자가 못되고 육신적인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진정한 지혜는 이 헬라 철학자들의 지혜와 유대 신학자들의 경건을 둘 다 끝장낸 십자가에 의해서 표현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의 지혜는 세상 지혜의 반대 개념이며 세상의 가치들을 과격하게 뒤집어 엎는 이 모든 가치들을 뒤집어 엎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1:17절 이하에 웅변적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와 세상적인 지혜를 대조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세상적인 지혜의 관점에서 보면 연약하며 미련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절망적인 것으로 그것을 통하여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나, 믿는 자에게는 --진정으로 하나님의 지혜를 깨닫게 된 자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요, 하나님의 승리요, 인간들의 구원의 유일한 수단이라는 것을 알게된다고 말합니다. 특히 바울은 그의 신학이 이른바 십자가의 신학이 --십자가의 신학은 신약 전체의 주제가 되고 있습니다만, 특히 마태가 강조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고린도 전후서에서 이 십자가의 신학을 고린도인의 영광의 신학에 과격히 대조시킵니다. 벌써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구원에 당도한 것으로 보고 이 세상의 승리를 구가하며 십자가의 표징들을 --연약함, 고난 등을-- 부끄럽게 여긴다거나 배격하던 그런 그리스도인의 태도에 과격히 대조시킵니다. 특히 바울은 고린도 서신에서 자신의 사도적 권한을 고린도인의 지혜 자랑, 능력 자랑, 은사 자랑, 권위에 대한 존중, 외부적인 힘의 표징들에 대한 존경 등에 대조시키면서 자신의 고난을 통해서 자기가 선포하는 십자가의 신학을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그리하여 자신의 사도적인 권한을 십자가의 복음에 구체적인 표현으로 말합니다.

고린도 전후서에 나타난 고린도의 성령주의자들의 영감의 신학, 지혜 자랑, 지식 자랑, 외적인 힘의 표증들, 권위에 대한 숭상들과 바울의 십자가의 신학, 그것의 구체적인 표현으로서의 사도적 권한을 오늘 우리 한국의 교회에 적용해 보십시요.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에서 교회의 지도자들, 일반 평신도들이 높이 평가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 잠깐 토론을 해 봅시다. 여러분들은 여기에서 한 2년 더 공부를 하고 복음을 선포할 터인데 무슨 복음을 선포할 것입니까? 십자가의 복음을 선포한다고 말로써만 선포를 하고 삶으로는 세상의 지혜와 능력의 복음, 세상의 힘의 철학과 윤리학의 복음을 선포하는 자가 될 수도 있고, 아니면 지금 유행하는 영광의 신학, 고린도인들처럼 왜곡해서 복음 자체를 세상적 힘의 복음에 물들이면 이른바 축복을 받아서 헌금을 많이 하면, 축복을 받아서 금력을 얻고, 출세를 하고, 권력을 얻고, 교회에서는 높은 장로가 되어서 교회에서도 권력을 얻고, 또 그런 장로들을 거느린 목사들은 엉터리 박사 학위들을 들여와서 무슨 예배를 보고 하나님을 욕되게 합니다. 울긋불긋한 옷으로 치장하고 돈을 많이 들여 무슨 기념인지 축하예배, 감사예배를 하면 하나님이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뭐합니까? 총회장 해야죠. 돈을 몇 억씩 부어서 교회에서 능력 있다고 말해야 합니까? 능력 있는 교회 지도자는 누구입니까?

 

우리가 고린도후서까지 한꺼번에 봐서 특히 고린도후서에서 바울이 초특급 사도들에게 냉소적으로 말합니다. 모든 것에 우선해서 바울은 금방 이들을 거짓 사도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스스로 초특급 사도라 주장했었고 또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당시에 모셨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을 형편없는 자들로 예루살렘 교회의 헌금을 사기나 치고 다니는 자들이라고 욕을 합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추천장 하나 없는 그들과 빗대어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나의 추천장이라고 말합니다. 고린도후서 3장에 나와 있습니다. 자신들의 족보를 자랑하며, 예루살렘 출신이라는, 사도들과 관계 있다라는 연줄을 자랑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 사정으로 이야기하면 연줄, 지방색(T.K. 출신등의)이 있습니다. 또한 그들은 증명증, 추천장등의 증을 자랑했습니다. 또한 기막힌 환상을 보고 엄청나게 과시할 수 있는 성령의 능력을, 영적인 이적 등을 자랑을 했습니다. 바울은 이에 자신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히브리인이요, 사도직은 직접 위로부터 받았고, 영적인 환상, 이적도 다 행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내세우는 사도직의 조건들에 아무런 모자람이 없고, 그 추천장 문제는 여러분의 심장에 새겨진 그리스도인들이므로 이는 새 언약에 속하는 추천장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것들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며 내가 진정으로 내세우는 사도직의 표증은 고난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위해서 받은 고난이 진정한 사도직이다. 왜냐하면 고린도후서 12장을 보면, 진정한 사도직의 표증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 구원이 일어나므로 사도는 그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므로 그의 삶으로 그 십자가의 고난과 그 고난을 통해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능력을 선포하는 자가 사도이므로 자신의 연약함에 하나님의 구원이 완성되는 것이라’고 그것이  유일한 사도직의 표증이라고 내세웁니다.

이렇게 볼 때에 오늘 우리들이 이른바 능력 있는 교회 지도자들은 누구이어야 하며 누구를 모델로 삼아야 하는지? 그리고 오늘날 우리의 가치판단, 가치관 등이 다분히 고린도 교인들과 같은 것입니다.

다음은 다섯 번째로 바울이 어떻게 문제를 다루는가를 살펴보기로 합시다. 바울은 고린도전서를 보내고 곧이어 고린도를 스스로  AD 55년 유월절 지나고 방문을 하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우선 디모데를 먼저 보냅니다(고전 16장). 아마 고린도전서를 디모데가 가지고 간듯 합니다.

여섯 번째로  그러나 이 바울의 편지는(고린도전서) 고린도 교회 안의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효과를 보지 못하고 디모데는 바울의 지시를 집행하지 못했습니다.

일곱 번째로 바울은 그 문제들을 스스로 척결하려고 고린도에 갔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인들에게 모욕을 당하고 큰 슬픔 가운데 에베소로 귀환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 방문을 쓰라린 방문, 가슴 아픈 방문이라고 부릅니다(고후 2:1-5).

여덟 번째,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서에 읽은 대로 큰 환난 속에서 애통하는 마음으로 많은 눈물을 흘리며(고후 2:1-5) 강경한 어조의 편지를 써서 고린도에 편지를 보냈습니다. 이 편지를 보통 이 귀절을 눈물의 편지 또는 혹독한 편지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이 편지는 바울이 몇 번째 보낸 편지이냐 하면 세 번째 편지였는데 완전히 상실되었다고 보는 학자도 있고 저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어떤 학자들은 고후 10-13장까지가 이 편지의 일부라고 봅니다. 그러므로 고린도후서는 첫 편지의 조각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까 이야기한대로 고린도 서신들에 대한 재론에 있어서 중요한 점은 고린도 교회의 문제를 바울이 어떻게 다루는가입니다.

아홉 번째로 에베소에서 바울은 심한 우울증에 빠지고 극단의 외적 위해를 받았던 것 같습니다. 고후 1:8이하에서 아시아에서 극심한 핍박을 받아서 자신의 목숨을 포기하고 살 소망을 잃었다고 이야기하는데 도대체 어떤 내용의 고난을 받았을 것인가의 추측들을 많이 합니다. 맹수와 싸웠다는 등, 여러 추측이 있었으나 하여간 바울은 고린도인들로 인해 굉장한 우울증과 고난까지 받게 됩니다. 고린도 교회의 상황에 대하여 마음을 놓을 수가 없어서 고린도로부터 뱃길로 돌아오는 디도를 하루라도 빨리 만나러 드로아에 갔습니다. 바울의 아주 인간다운 면모를 봅니다. 이 고린도 교회에 디모데를 파견했는데 아무런 성과 없이 돌아와서 바울 자신이 가서 욕만 먹고 다시 왔습니다. 그래서 눈물의 편지를 디도의 편에 보내서 고린도 문제를 해결하고 평정하라고 보냈는데 바울이 걱정스러웠고, 아시아의 전도 복음의 문이 활짝 열렸음에도 불구하고 드로아까지 자신이 마중을 나갔습니다. 바울을 신격화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바울은 이렇듯 아주 인간다운 사람입니다. 바울이 얼마나 고린도 교회에 대해서 고심하고 있었는가를 알게 됩니다. 바울은 자신의 생명을 포기할망정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고린도 교회에 대해서는 포기를 하지 않는 면모를 보입니다.

 

드로아에 디도를 마중하러 바울이 갔으나 디도가 거기에 나타나지 않자, 바울은 그 실망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래서 육로로 오는 줄 알고 마게도니아로 갑니다. 그곳에서 디도를 만났습니다(고후 2:12이하). 그런데 이제 장로 한분이 오셔서 말하기를 먼저 고전 1:4-9절을 읽어보죠.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너무나 큰 문제로 급하여져 갈라디아인으로 하나님께 감사함을 갖는다는 것을 쓰지 못할 정도였는데, 지금 고린도전서에서 항상 바울이 그랬듯이 고린도인으로 인해 감사를 합니다. 그런데 그 감사의 내용이 그들에게 하나님께 큰 은혜가 은사로 주시게 되어서 방언, 예언 모든 지식에 부요케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고린도인들이 그 은사에 부족함이 없게 되었다고(7절), 그것은 고린도인들이 자랑으로 삼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이에 그 충만한 은사로 인해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부요케 되었다고 말하면서 그 부요함이라는 표현을 역설적으로 냉소적으로 썼습니다. 그러면서 신랄하게 이를 비판합니다.

 

우선 그들을 인정해 주고 칭찬을 해줍니다(1:10이하). 그런데 하나님이 신실하신 분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소망을 갖는 것이지... 고린도인들을 하나님이 미쁘시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심판날까지 흠없이 지키시리라고 말을 합니다(1:8-9). 바울은 고린도인을 생각해 볼 때는 도저히 구원의 완성에 도달할 수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우리의 구원이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를 믿음으로 소명하시는 그 순간부터 그리스도 예수의 날이 완성 될 때까지 하나님이신데, 이 하나님은 신실하신 미쁘신 하나님이시므로 고린도 교인의 구원의 문제에 안도하며 확신을 하면서 고린도인들을 위로하고자 그런 표현을 씁니다.

그런데 우선 여기에서 바울은 고린도인들로 인해 마음이 엄청나게 상하고 호되게 꾸짖을터인데, 먼저는 그들의 주장을 인정하고 칭찬을 단단히 합니다. 이를 카파티오(?)-서두에 선의를 나타내서 수신인으로 하여금 바울의 충고를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것- 어제 장로님 한분이 심각한 얼굴로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이렇듯 인간적인 전략으로 쓸 수 있느냐고 물어오셨습니다. 그것은 바울을 신격화 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바울의 이런 아주 인간적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한국 교회에는 인간적인 모습은 하나도 없는 것이 하나님 말씀이라고 여기는 관습이 너무 심해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성경을 공부 못합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인간의 말로서 하나님의 message가 전달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말, 인간성을 완전히 배제하게 되면 이와 같은 고린도의 문제들, 정황, 바울이 어떻게 다루는가 하는 그런 문제는 연구할 아무런 필요도 없는 것이고 고린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고 하나님의 말씀이 또한 우리의 상황과도 아무런 관련 없이 된다는 것, 이러한 잘못된 성경관, 바울관이 상당히 팽배해 있습니다.

지금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문제들에 대해서 심히 상심해서 안절부절 못하고 디도를 만나러 드로아에 간 것을 바울은 스스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제 그 장로님이나 많은 제기를 하던 학자들이 “아니, 어떻게 바울이 그럴 수가 있는가? 또 철저한 믿음을 지닌 바울이 안절부절 못하고 아시아의 전도의 문이 활짝 열렸음에도 그를 포기하고 드로아로 마중을 나가는가?” 많은 사람들이 이렇듯 성경해석 방법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연역적인 해석 방법만을 택하여 성경에 강요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인본주의적인 것입니다. 인간의 지혜로 만들어 놓은 성경론을 이 성경에 강요를 해서 성경에 쓰여진 것 까지도 강요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니 한국교회에 성경 연구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 전후서에서 넘치는 것이 바울의 인간성, 신자들에게 아주 모범적인 --아무리 외적으로 믿음이 어찌했다하는 자들도 불안이 있게 되고, 회의가 있게 되는데, 진정한 믿음은 마음속에서 끓어오는 회의와의 싸움 속에서 이겨서 이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믿겠다고 외칠 때에 비로소-- 진정한 믿음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평화가 언제 실행됩니까? 이런 바울과 같은 안절부절한 상황 속에서 그런 외적인 것들에도 불구하고 내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겠다는 그 평화가 진정한 하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 롬 4:18이하에서 바울은 바랄 수도 없는 가운데 바라는 믿음, 완전한 절망의 상태, 모든 것이 소망에 거슬리는 상황 속에서 소망을 품는 것입니다. 자신의 몸이 죽었고 사라의 태가 다 말라붙었지만, 인간의 이성으로 파악할 수 있는 인간의 모든 조건들이 도대체 더 이상 하나님을 믿고 살수 없게끔 하는 절망의 상황에서 그럼에도 소망가운데, 이럴 때에 진정한 소망과 믿음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바울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이렇게 정리합니다.

 

바울 역시, 절망의 상황에 에베소에서 처하게 됩니다. 외적인 상황에서 자신의 생명을 포기할 정도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디모데의 체험과 자신 스스로의 체험 때문에 인간적으로 도저히 소망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한가닥, 하나님이 신실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신실하신 소망, 그 소망의 확인을 위해서 디도를 만나러 나가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면에서 진정한 소망이라는 것이 무엇이며, 내게는 회의라는 것이 이만큼도 없고, 그리스도 안에 있으니까 불안이라는 것이 이만큼도 없다라고 말하면서 마치 신앙이나 믿음이 좋은 것을 과시 하기 위하여 속에서 일어나는 회의와 불안을 억누르고 겉으로만 늘 믿음으로, 기쁨으로 가득차고, 소망으로 가득찬 위선적인 것으로 사는 사람들이 있는데 여러분들이 가르쳐야 합니다. 무엇이 진정한 믿음인가? 바울이 하나님의 평화를 얼마나 많이 말하는 사람입니까? 빌립보서에서도 하나님의 평안을 얼마나 말을 해요. 그러나 그 평안이라는 것이 항상 내 스스로를 세뇌시켜서 아무렇지 않고 모든 것이 잘된다면서 자꾸 스스로를 세뇌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절망의 상황과 진지한 대결을 통해서 아브라함의 처지에 빠지고 바울의 처지에 빠지는 상황 속에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고 체험하는 믿음과 소망이 진정한 것입니다. 바울을 너무나 신종할 것이 아니라, 바울을 우리들의 진정한 모델로 보는 것이 좋다는 이야기입니다. 바울이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에 대하여 하나의 문제를 토론해 보았습니다. 바울은 하여튼 디도를 만났습니다.

 

열 번째로, 디도는 바울의 혹독한 편지가 효과가 있어서 고린도인들의 반란이 끝나고 고린도 교회가 바울의 권위에 반란하도록 한 주모자를 정죄하였다는 소식을 전하였습니다(고린도후서 2:6이하).

열한 번째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고린도후서, 또는 그중에 처음 아홉 장을 써서 AD 55년에 빌립보에서 쓴 듯합니다. 디도를 만난 그 자리에서 빌립보가 마게도냐에 있는 도시인데 실제로는 이 편지가 바울이 고린도인에게 쓴 네 번째 편지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편지를 써서 고린도 교회의 문제들이 해결된 것에 대한 그의 안도함과 그의 고린도들에 대한 사랑을 나타냅니다. 그에게 적대했던 자를 용서해 주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아까 읽은 고린도후서 2:1-11까지입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의 전반부는 바울이 매우 기분이 좋아져서 고린도인들에게 자신의 사랑을 나타내는 편지입니다. 마치 고린도 교회의 문제 해결이 자신의 고난을 일시에 마친 듯한 자신의 사랑을 내 쏟는 심정으로 편지를 씁니다. 자신의 심장을 소매 끝에 둔다는 영어 숙어가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이나 심정을 깊숙히 숨겨놓고 잘 드러내지 않는 심장의 본심을 --몸에 깊숙하였던 심장을-- 소매끝에 달아놓아 모두 다 볼 수 있도록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모든 감정, 생각을 모두 드러내는 자를 경솔하고 경망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고린도후서의 처음에 자신의 심장을 다 드러내 놓은 이 부분을 바울의 편지와 더불어 바울의 매우 인간적인 모습과 면모를 불안과 걱정과 그의 이 사랑과 그의 신앙이 그의 십자가의 신학과 결탁이 세상적인 유혹을 뿌리친 진정한 영적인 사랑의 생생한 면모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신격화 된 것은 우리와 차원이 달라서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에서 생생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다음은, 바울은 기쁨으로 들뜬 마음으로 고린도인들에게 자신의 사도직의 권한과 영광을 생생히 그려 표현하고(고후 3-6장), 예루살렘 교회에 대한 헌금의 문제를 다시 제기합니다(고후 8-9장까지), 예전에 고린도 교회에서 헌금을 모아서 그것에 관한 가르침을 달라고 고전 16장에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문제가 커져서 더 이상 진행을 못하고 디모데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제 고린도 교회가 평정을 찾았으므로 다시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헌금을 하라고 자세하게 고린도후서 8-9장까지에서 어떻게 헌금을 하며, 자신이 어떻게 걷으러 갈 것인가를 자세히 말을 합니다. 그리하여 고후 8-9장에 헌금에 관한 가르침을 둡니다.

 

바울은 마게도니아의 교회들이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걷은 헌금을 가지고 마게도니아 교회의 대표단과 함께 고린도를 거쳐 가면서 아가야 교회들의 헌금을 전달할 아가야의 교회 대표들을 대동하고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고후 8-9장). 그래서 바울은 즉각 디도를 다시 고린도에 보내서 그들의 헌금 사업을 완수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에서 밖에서 질투한 거짓 사도들의 충동에 의하여 바울의 사도직을 의심하고 교회의 헌금 걷는 것을 사기 행각이라고 공격을 하는 문제가 다시 터집니다.

이 다음 시간에 계속해야겠습니다. 이 다음 시간에는 로마서를 할테니까 로마서 서론은 가장 중요한 issue가 바울이 로마서를 쓴 목적입니다. 왜 바울은 로마서를 썼는가가 서론에 중요합니다. 갈라디아서는 언제 쓰였는가가 가장 중요하며 고린도 전후서는 고린도 교회의 문제의 성격들과 바울의 처방들, 그리고 바울과 고린도 교회와의 관계들이 중요합니다. 로마서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왜 바울이 로마서를 썼는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이 다음 시간에는 고린도서신들을 빨리 마치고 로마서 서론을 하겠는데 마침, 바울이 로마서를 쓰게 된 목적에 대해서 내가 글을 하나 써놓는 것이 있으니 복사해서 나누어 가지면 강의가 빠를테니, 그 목적이 대단히 복잡하여서 Text가 있으면 도움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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