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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연구 총정리〓/바울 서신

바울서신 제 9 강

by 【고동엽】 2022. 10. 23.

바울서신  제 9 강

 

로마서 3, 빌립보서 1

 

1. 로마서의 기록 목적

지난번에 어디까지 했어요? 31페이지? 다시 그럼 29페이지 부터 로마書 기록 당시의 바울의 狀況, 이게 로마서를 쓴 목적을 糾明 하는데 있어서 4번째 요인이라구. 이런 4가지 요인들을 고려해서 바울의 로마서를 쓴 목적을 우리가 규정을 해야 돼요.

그런데 그게 4번째로 이제 로마서 기록 당시 상황은 첫째로, 東方에서의 선교 사업을 완수한 후 이제 막 西方에서의 선교에 착수하려는 때였다. 즉 그는 사도로서의 生涯에 있어서 전환점에 서 있었다. 지난번에 설명했지?

둘째로, 그는 갈라디아, 고린도 그리고 기타 지역에서의 유대파 기독교인들의 회당과 여기 기타 지역이라면 빌립보서가 로마서보다 먼저 쓰였다면 빌립보에서도 문제가 있었다구. 거기도 이제 유대파 기독교인들의 회당이 있었는데, 곧 보겠지만 빌립보서가 로마서 전에 쓰였는지 로마서 후에 쓰였는지 분명치 않아요. 그런데 만약에 前에 쓰였다면 빌립보 지역에서도 문제가 있어요. 이런 지역에서 유대파 기독교인들의 훼방과 바울의 福音이 틀렸다고, 그리고 바울의 사도직이 가짜라 이렇게 훼방을 놓았죠. 그리고 그의 회심자들의 오류에 직면하는 매우 어려웠던 8년여의 歲月을 통과하고 있었다. 갈라디아의 문제, 고린도의 문제들을 이제 막 원만하게 해결한 상태란 말이야.

세째로, 數年間 걸쳐 커다란 어려움을 겪으면서 아시아, 마게도냐 그리고 아가야에 이방교회들에서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 연보 募金을 방금 끝내고 나서 그는 이방 교회의 대표단들과 함께 모금된 구제 연보를 가지고 이제 막 예루살렘에로 향해 하려는 시점에 이르렀다.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헌금의 의미를 설명했지.

네째로, 그는 유대에서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유대인들의 박해뿐 아니라 예루살렘 교회에서의 환영에 대한 가능성에 대해서도 크게 염려 하고 있다. 곧 예루살렘의 그리스도인들이 헌금과 자신을 받아 줄 것인가? 그리고 이방 그리스도인 대표자들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들로 받아줄 것인가를 바울은 확신을 갖지 못해요. 이런 상황에서 바울은 이제 헌금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간다구. 지난번에 헌금 의미중의 하나가 뭐라구? 이방 교회와 유대교회의 하나됨에서 이방 그리스도인들과 유대 그리스도인들의 형제됨을 확인하는 증거로 지금 가지고 가는데, 만약에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헌금을 안 받아 버리면 무엇을 의미하는 거예요? 이방 그리스도인들을 형제로 인정 않는다는 소리지.

그럼, 바울이 세운 이방 교회는 뭐가 되어요? 이 母敎會와 연결되 있지 않은 교회가 되어 버린다구. 그래서 바울에게는 자기가 확실히 다르지 않은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원래 선교지 분활하고 교제의 악수를 할 때 갈라디아서 2장에서 보고된 그렇게 정신으로 되돌아가고 그때의 상호 인정을 재 확인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구. 그때 뭘 가져가서 그렇죠. 헌금 가져가서 그렇거든. 그때에 그들이 뭘 부탁했어요? 계속 가난한 자들을 기억해 달라고 부탁하지? 그래서 지금 다시 아주 어려움을 많이 겪으면서 --고린도 교회에서는 사기꾼이라고 몰리면서까지-- 헌금을 걷어가지고 지금 예루살렘에 가는데, 이 예루살렘의 교회가 그 사이에 많이 변했다구. 많이 극우, 극보수가 되었어요. 베드로의 리더쉽 안에 있다가 야고보의 리더쉽 안에 들어가면서 AD 40년 중반에 --한 46년 무렵에-- 아주 극단적인 국수주의, 보수로 회유를 했다구. 그것은 야고보의 신학적 경향이 베드로 보다 더 보수적인 그런 면도 있지만 그 예루살렘 교회의 당시의 여건도 중요한 요인이었어요.

그 당시 팔레스티나에 열혈당 운동이 아주 고조되고 있던 때야. 열혈당 운동은 아주 극단의 국수주의적인 색채를 띄는 모세 율법을 중심으로 하는 극단적인 국수주의적인 경향을 뛰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순결을 더럽힌다.” 해서 이방인과 교류를 일체 허락하지 않는 거란 말이야.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로서 이방 그리스도인을 인정한다는 것이 점점 어려워져요. 이런 상황에 바울은 지금 원래 사도들의 교제의 악수, 복음의 상호 인정, 그리고 선교지의 분활 이런 합의를 재 확인 하기 위해서 다시한번 사도회의를 목적으로 하고 지금 헌금을 가지고 가는데, 그러기 위해서 각 교회의 대표들을 헌금단으로 구성해서 일부러 시위하면서 간다구. 되도록이면 조용히 가는게 좋겠지. 그래서 헌금단을 데리고 간 이유도 그 헌금이 제대로 전달이 되었나, 누가 도중에 착복 안했다는 것, 확인하는 의미도 있었겠죠.

오늘도 요새같이 大明天地에도 선교한다고 헌금가져 가지고 중간에 착복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그래. 아주 공공연히 그짓을 한다고 그래요. 여러분들이 그 뭐 헌금내면 좋은 선교단체는 국내에서 경비로 한10%쯤 쓰고 한90%쯤이 전달된다구. 선교사에게 전달이 돼요. 그러나 대개의 경우 한 30% 떼는 모양이야. 국내에서 내가 본 이른바 아시아 선교한다는 선교단체는 50% 떼는 것을 봤다구. 그거 이 국내에서 돈벌이 하는거라. 선교를... 그런데 내가 또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들은바에 의하면 100%떼는 곳도 있다 그래. 거짓말로 선교한다고 잔뜩 모금, 선교대회 엄청나게 하고 해 가지고 모금해 가지고는 신사 유람단을 구성해 가지고 선교 단체의 이른바 지도자들끼리 아시아로 유럽으로 빙 돌아다니고 일급 호텔에 지내면서 저 마닐라에 일급 호텔에 머무르면서 “저기 섬에서 일하는 선교사들은 다 오라.” 저한테 오라 해가지고, 아 열심히 선교하는 사람들 선교하도록 내 버려두지 뭐하려고 마닐라에 오라해 가지고 며칠씩 교통도 아주 불편해요. 아주 자기 잘 지내는것 구경하고 지가 또 목에 힘주고 연설 한번 하고 밥한끼 사주고 그러고는 다시 가라고 그러지. 그러고는 선교했다고 국내에 와서는 보고를, 또 사진찍어야지, 물론 증명사진, 그다음에 뭐 선교대회 거창하게 했다고 난리를 피우고, 이런 식으로 다 탕진해 버리는 단체가 많아요.

그래서 이 선교단체 雨後竹筍으로 하는게 많이 일어나는데 그 중에서 상당히 그 “장”들이 그걸로 치부하는 사람들이 꽤 많다구. 옛날에 저기 6.25직후 고아원 해 가지고 구호물자 다 빼먹어서 치부한 이른바 사회사건이 많듯이, 오늘날 이른바 선교사업하는 사람들이 많아. 선교로 자기 개인적 사업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래서 혹시 여러분 선교에 관심이 있으면 그런 단체를 통해선 절대 선교를 나가지 말 것. 그런 비 양심적인 지도자가 있는 선교 단체를 통해서 나가면 선교사가 고생을 해요. 국내에 있는 지지자들이 착취당하고 이용당하는, 그건 뭐 그래 좀 괜찮은데, 그런 단체를 통해서 나간 선교사는 아주 고생이 많다구. 지원금이 잘 전달이 안되고 몇달씩 안오기도 하고... 그런 단체의 “장”일 수록 또 요게 아주 이 객관성이 없고 합리성이 없고 선교에 대한 열의가 없어가지고 자기 위주로 자기 편의대로 선교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자기는 선교지 하나도 알지도 못하는데 여기 앉아 가지고 자기 선전하기 좋게 자꾸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지시만 한다구. 그래서 이 complant가 일어나곤 해. 東南아시아에 있으면서 그런거 많이 보았어요. 그런 사람은 상종을 말아요. 여러분들 제대로 된 선교단체를 통해서 가야된다 말이야. 물론 여기 그 정명현교수 선교 전공하니까 그 양반이 이런거 뭐 더 잘 가르치겠지만 선교라는 것을 통해서 하두 비행이 많이 저질러진 것을 봤기 때문에 그런 것에 대해서 조심하지 않으면 이용당하고, 속고, 굉장히 낭패를 당하고 가족까지, 애들까지 다 데리고 갔는데, 선교지에서 이것 뭐 진짜 이거 고립되고 그런것도 내가 봤다구. 자 하여간 그런 엉터리 선교들.

바울은 그러지 않아 다행이야. 그래서 이제 각 교회의 대표자들을 뽑아가지고 대표단의 구성원이 가는데, 그래서 이 선교비가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헌금이 제대로 전달되었다는 것도 확인하고, 그러나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대표자들이 그 각 교회를 대표하기 때문에 이방 교회 전체, 바울이 세운 이방 교회 전체를 대표하는 거예요. 예루살렘 교회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으로 대표되는, 선교지 분할 때, 그들은 유대인들에게 선교하기로 하고 바울과 바나바는 異邦人들에게 가서 선교하기로 했는데, 이게 바울이 자기가 선교한 지역에서 그 열매의 대표단을 이제 데리고 가서 예루살렘 교회 유대교회의 대표자들과 상호교제 악수를 함으로 헌금을 주고 받음으로 이 교회의 하나됨을 확인하려고, 그래서 일부러 위험하지만 큰 대표단을 거느리고 간다구. 자 그럼 31페이지 한번 읽고.

Q. 바울이 선교 헌금을 모아가지고 예루살렘에 갔는데 聖經을 읽다가 보면 교회에 헌금이 전달되어 가지고 이 헌금을 모금한 目標가 이제 발송되어 가는 그런 모습을 찾아 볼 수가 없는데?

A. 바울의 더 이상 편지가 없고, 편지를 안썼고, 사도행전도 그걸로 끝나니까 그렇지. 그러니까 사도행전을 보면 바울이 헌금 전달을 했는데 예루살렘 교회는 어떻게 된거예요? 야고보를 위시한 리더쉽을 받아들인거라. 바울이 그런데 어떻게 된거야? 예루살렘 교회내의 보수파들, 바리새파들이 바울과 그 이방 그리스도인에게 항거한, 그래서 저기 사도행전의 기록을 보면 야고보가 무슨 저기 compromise를 제안해요. 네가(바울) 성전에 가서 뭐하냐구. 서약에 대한 제사를 하라고 그러지. 결례를 하라고 그런다구.  그걸로 “지금 교회내에서 당신에 대해서 비판하는 세력에 증명하라. 모세 율법을 무시하지 않고 이방인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성전을 더럽히는 자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라.” 그러지. 그러며는 “교회내에서 당신을 비판하는 당신의 설교를 批判하고 당신이 모세 율법을 무시하고 할례를 무시하고 그런다는 비판세력을 조용하게 할 수 있다. 그러면 자연히 유대인들도 감히 대들지 못할거다.” 이렇게 해서 야고보는 바울에게 타협안을 제시해요.

그러니까 무슨 소리냐면, 이 야고보와 ??들은 바울과 헌금단을 받아줄 용의가 있었어요. 근데 그 교회 내의 극우파 바리새인들, 열혈당 정신에 상당히 찌든 극우파 바리새인들의 항거가 있은거라. 그래서 바울이 그 타협안을 받아들여서 성전에 가서 결례를 하다가 어떻게 돼? 유대인들 한테 린치를 당하지. 유대인들이 둘러싸 가지고 바울을... 그 사건을 가할때에 누구가 개입을 해요? 로마 군대가 항상 이 성전뜰을 지키고 있어. 그 소요 사태를 감시하는 로마군대가 백부장의 지위아래 와서 금방 바울을 체포한다구. 그래 가지고 어떻게 돼? 그때부터 이제 바울이 감옥살이를 하고 어디로 가게돼? 결국 가이사랴에서 2-3년 감옥살이 하다 결국 로마로 간다구. 거기까지가 우리에게 알려진 기록이라구.

그래서 바울이 헌금단을 의도했던 목적이 완전히 결실되는건 아니지. 바울이 목적한 바를 --아까 이야기 한대로-- 지난번에 이야기 하는대로 우선 예루살렘의 가난한 자들에 대한 구제에 목적이 있었고 둘째로, 이 신학적으로 두 교회의 하나됨, 이방 그리스도인들과 유대 그리스도인들의 하나됨을 확인하는 것도, 근데 그것도 지금 안된거란 말이야. 그보다 더 마지막으로 열방이 시온에 보화를 가지고 와서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이 종말론적인 선지자의 비젼을 성취하므로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이 종말의 메시아적 죽음이 시온에 일어났음을 확인했어. 유대인들을 시기케 해서라도 유대인들의 회개를 불러 일으키려고 한 거야. 그게 바울의 헌금의 마지막 목적이었다구. 근데 그 마지막 목적은 거의 뭐 발상이 안되었다고 봐야지. 그렇게 된거지. 31page-.

G. Bornkamm은 “왜 바울은 고린도로부터 로마로 곧장 직행하지 않고 그의 개인적인 참여 없이도 아주 간단하게 이방 그리스도인들을 시켜서 모금된 연보를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보낼 수 있었을 텐데 하필이면 자신이 직접 취합된 연보를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대단히 위험스런 여행을 감행했느냐?”고 묻는다. 그의 그 바울책에 보면 이런게 토론이 되어 있어요. G. Bornkamm의 바울책 한국말로도 번역이 되었다구. 허혁 교수가 번역을 했는데, 그 책이 1960년대까지 바울 신학 토론에 대한 것을 좀 쉬운 언어로 평신도들이 읽을 수 있는 쉬운 언어로 아주 잘 썼어요. 그래서 독일에서 그게 출판이 되서 수십만권이 팔렸다구. 영어로 번역된 상태로도 굉장히 많이 팔렸어. 그래서 학자들도 보고 평신도들도 보는 참 좋은 책인데 한국말로도 번역이 되어 있어요. 물론 거기에서도 배울 수 없는 비판적인 것도 한번 읽어 보라구. 여러분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로마서의 목적과 직접관련 되어 있다.

선교지역의 구분에 대한 합의가 있은 후로 이방 및 유대파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교제의 표현으로 연보 계획을 수행한 뒤 바울은 이방의 그리스도인들이 그 연보를 기부하고 예루살렘 교회가 이를 수락함으로써 이러한 연합과 친교가 더욱 공고해 질 것을 기대했다.

그가 사도적 전환점에 서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서방에로의 새로운 이방 선교를 시작하려는 이 시점에 서 있었기 때문에, 그런 위치에 있어서는 이 연합이 이방및 유대파 그리스도인들 모두에게 받아들여 지고 그의 이방 기독교인들이 그리스도 교회의 합법적 구성원으로 용인되어지는 것이야 말로 자신의 사활이 걸린 중대한 문제였다. 그러나 갈라디아, 고린도 등지에서의 예루살렘의 권위자들에게 호소하는 유대파 그리스도인들과의 투쟁은 바울로 하여금 그의 율법과 할례에서의 자유함, 믿음을 통한 은혜에 의해 의롭다 여김을 받는 그의 복음이 사도들의 공의회서와 마찬가지로 인정될 것인지? 그리고 복음으로 얻은 이방 회심자들이 야고보의 지도 아래 있는 엄격한 예루살렘 교회에 의해 용납되어질 것인지에 대해 불안해 하게 했다. 그는 자기의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다시금 의문에 붙여질지도 모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지금 갈라디아와 고린도에 침투한, 침투해서 바울의 사도직과 바울의 복음의 문제를 제기한 사람들이 누구에게 호소했어요? 예루살렘 지도자들에게 호소했다구. 자기들이 예루살렘 지도자들로 부터 파송되었다고 주장하고 그들의 추천장 가지고 왔다고 주장하면서 바울의 가르침이 예루살렘 원래 사도들의 가르침과 다르다. 그러니까 바울의 사도직과 복음이 틀렸다. 이런식으로 고소를 한 거야.

또 바울은 더 이상 옛날의 사도회의 때에 서로 복음을 인정하기로 하고 선교지를 분할하고 교제의 악수를 한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해야 할 필요가 있어요. 이제 서방으로 선교사업을 확대해감에 있어서 근데 옛날에 상호 인정했던 것이 재 확인 되리라는 지금 보장이 없는거야. 바울에게는 최근의 체험에 비추어 봤을때 그래서 지금 로마로 가는 길이예요. 아 예루살렘으로 직접가는 거예요. 자기가.

그리하여 로마서에서 바울은 예루살렘에서의 다가오는 도전을 예견하며 복음에 관한 자신의 입장을 요약정리하고 있는 것일 가능성이 높다. 바울이 갈라디아와 고린도등지에서의 유대파 그리스도인들과의 투쟁은 그로 하여금 유대인들의 율법의 행위에 의한 구원 교리가 아직도 여전히 예루살렘 뿐만 아니라 여타 여러지역 유대파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매우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음을 알게 해 주었다. 그래서 로마서에서 그는 유대인들의 구원 교리에 대항하여 논쟁을 벌이는 가운데 믿음을 통한 은혜에 의한 칭의라는 자신의 복음을 체계적으로 명확하고 상세히 설명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로마서의 성격이 일부 분명해질 수 있다 이말이예요. 로마서의 성격이 뭐야? 아주 체계적으로 그의 은혜로만 믿음으로만 복음을 전개하는 거지. 체계적으로 전개한 거야. 그런데 체계적으로 전개함에 있어 상당히 많은 부분이 갈라디아와 고린도 전후서와 내용이 일치한다 말이야. 갈라디아서, 고린도 전후서에서 다루었던 것을 로마서에서도 더 어떻게 해? 더 체계적으로 전개하는데 있지. 그래서 그것을 생각할 때 바울이 지금 로마서를 쓰는 상황에 의해서 일부 설명이 된다구.

예루살렘에서 직면할 논쟁을 예견하면 그는 또한 로마서 9-11장에서 이스라엘의 문제(그들의 선택, 불신, 그러나 그들의 궁극적 구원)를 취급하며 최 우선적으로 이스라엘을 위하여 계획했던 복음이 어떻게, “왜 먼저 이방인에게로 갔다가 그 다음에 이스라엘에게로 돌아와야 하는가?”를 보여주고자 한다. 예루살렘 교회에 가면 “이 예루살렘 교회에는 유대교의 구원사에 대한 이해를 계속 이어 받았기 때문에 이방인들은 종말에나 하나님의 천사들이 다 불러 들여서 구원 받을 것이지 유대인들이 먼저 복음들고 구원받아야지 무슨 이방인 선교냐?” 이럴 수 있단 말이예요. 바울이 그걸 예견하면서 --그와 같은 논쟁을 예견하면서-- 로마서 9-11장에 바로 이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에 대해서 자세히 토론했다고요.

사도들의 공회의와의 경우에서와 같이, 이번 기회에 다시금 바울은 그리스도의 교회 연합과 복음의 진리 및 자유를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이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의 새로운 협의를 위해 그는 교회의 연합이 기초할 공고한 토대로서 복음의 진리와 자유를 매우 자세히 설명하는 것이다. 점점 대다수의 학자들이 이와같이 바울이 로마 교회의 상황과는 상관없이 다가오는 예루살렘회의를 대비하려고 그의 복음을 요약하려는 목적에서 로마서를 기록하게 되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지금 이렇게 보면 로마서를 기록한 목적이 뭐라고? 로마 교회의 무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거예요? 그게 아니고 뭐라? 다가오는 예루살렘에서의 사도회의에서 다시 한번 복음의 진리를 확인하고 유대교회와 이방 교회의 하나의 복음에 해당(기초)하는 Unity를 확인하고 그래서 이방 교회의 합법성을 얻으려는 그런 목적이란 말이야 알겠어요? 예루살렘에서의 사도적, 또 하나의 사도회의에서의 논쟁을 준비하는 것이 로마서의 목적이라. 그래서 그때까지 자기의 갈라디아나 고린도에서 겪었던 문제들에 대해서 답을 정리한 것이 로마서라 그렇게 볼 수 있단 말이예요.

그래서 G. Bornkamm은 로마서를 “바울의 마지막 유지및 유언”이라고도 하며, U. Wilckens는 (Bornkamm의 제자 )또 뭐라고 하느냐면 “예루살렘에서의 자기 변호 연설을 위한 예습”으로 간주하며, E. Fuchs는 “예루살렘이 로마서의 감추어진 수신인”이라고 생각한다 이말이예요. 그러니까 로마서가 진짜로는 누구에게 하는 연설이어요? 예루살렘 사도들에게, 예루살렘교회에게 하는 연설이란 말이야. 자 “예루살렘 교회가 로마서의 감추어진 수신인”이다. 또 노르웨의 J. Jervell은 로마서를 아예 그냥 “예루살렘으로 보내는 편지”라고 까지 부른다.

그렇지만 이제 나의 비판이야. 이 사람들은 너무 지나치다. 서방에로의 새로운 선교 모험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차 있으면서 바울은 그의 “마지막 유지및 유언”으로서 로마서를 기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게 Bornkamm의 견해에 대항하는 것이지. 지금 바울은 로마서 1:11-15보면 로마를 거쳐 스페인에 가서 새로운 선교하겠다는 희망으로 가득차 있죠? 그런 사람이 뭐 어쩌면 예루살렘에 가서 잡아 죽임을 당할찌도 모른다고 자기가 터득한 복음을 자기가 죽은 뒤에라도 길이 보전되도록 교회의 신앙의 자유와 진리가 보전되도록 “마지막 유지및 유언”으로 썼다? 유언으로 로마서를 썼다?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그렇죠? 여러분들 또 제아무리 예루살렘에서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위험을 현실적으로 예상했다고 할지라도, 뭐 바울이 유언으로 자기가 죽은 뒤에라도 자기 복음의 진리가 확고히 보장되도록 하기 위해서, 마지막까지 이렇게 복음을 정리했다. 그러니까 이게 하나의 유언이다. 이렇게 말하기는 어렵다 이말이예요.

또 이 Wilkens나 Fuchs나 Jervell은 자신들의 일방적인 견해에 빠져 있으므로, 그렇다면 왜 바울이 그 편지를 로마로 그것도 특히 로마로 보내었는가를 거의 설명해 내지 못하는 것이다. 예루살렘 사도회의를 지금 겨냥하고 편지를 썼고,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하기 위해서 연설 연습을 한 것이고, 아예 Jervell말대로 예루살렘에 보내는 편지라면 예루살렘으로 보낼 것이지, 아니면 가지고 주머니 속에 가지고 있다가 예루살렘에 가지고 가서 일장 연설을 할 것이지 왜 로마로 이 편지를 보내? 정 반대 방향으로... 그러니 그건 이 사람들이 설명을 못한다 말이야. 그래서 이 사람들의 이 이야기가 너무 지나치다 말이야.

그러나 이 시점에서 T.W. Manson의 이론이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Manson에 의하면 바울은 복음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하나의 선언문으로 요약하며, 본 서신의 본문을 구성하였다는 것이다(1:1-15:13). 복음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하나의 선언문으로 요약하며 구성했다는 거야. 그리고 나서는 편지의 복사본 하나는 앞으로 계획에 대한 포부와 함께 로마로 보냈고 그러니까 15:14절 이하를 덧 붙여서 로마로 보냈지. 그러니까 로마서 본문은 어디까지 15:13까지, 거기 15:13절 한번 봐요.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거기서 벌써 글을 마치는 인사를 한다고. 바울이 13절에서. 그리고 이 Manson은 원래 바울이 13절까지를(15:13) 바울이 복음을 요약하는 기본 편지를 써가지고 복사본을 여러개 만들었다 이거예요. 그중에 한 사본을 14절 이후에 나오는 14절에서 15장 끝까지에 나오는 로마 교회를 거쳐서 스페인으로 가고자 하는 자기 여행 계획을 발표하고 --그 계획에 좀 협조해달라는 부탁을 은근히 해서-- 이것을 덧 붙여서 로마로 보냈다 이거야. 또 다른 복사본 하나는 16장을 덧붙여서 --16장은 뭐야? 친구들에게 안부 전하라는 인사 목록이지? 이것은 로마교회에 있는 성도들이 아니고 에베소의 성도들이라는 거야. Manson에 의하면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로마서 16장을 덧붙여서 하나의 복사본은 에베소로 보냈고, 그리고 고린도에서 그 편지를 작성하면서 그는 그곳에서 구두로 편지의 핵심 내용을 상세히 설명했고, 고린도는 어느 지방의 대표교회야? 아가야 지방의 대표 교회지.

그러니까 아가야 지방에는 지금 거기서 바울이 편지를 썼기 때문에 그곳에서는 구두로 이 편지 내용을 잘 설명했고, 로마로 또 한 사본을 보내서 아시아 지역에 자기 복음을 설명하고 앞으로 그곳으로 여행을 준비하고 이제 아가야를 떠나서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갈텐데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에 바울은 항상 어디를 들려? 자기 모교회 안디옥을 들리지. 안디옥에 가서 안디옥은 어느교회 대표야? 시리아 교회 대표라구. 거기에 가서 또 이 복음을 한번 설명하고, 팔레스티나 교회에 가서 설명하고, 드디어 예루살렘의 교회에 가서 이 복음으로 이제 사도들과 회의를 한거란 말이야. 이렇게 하려고 했다.

그래서 로마서의 목적은 모든 교회에 대한 자신의 복음을 설명하는 것이 그의 로마서를 쓴 목적이다. 그러니까 로마서는 하나의 회람인거예요. 회람용으로 쓰였다 이말이예요. 그렇다면은 로마 교회와는 관계없이 쓴거야. 무엇과 관계있는거야? 바울의 지금 상황과 이 복음의 내용을 설명하고자 하는 그런 목적으로 하나의 회람용으로 써서 한 복사판은 로마, 한 복사분은 아시아 에베소로, 어쩌면 또 하나의 복사판은 갈라디아로 보냈었을지도. 그래서 바울의 모든 교회에 이 복음을 전하고 이제 안디옥, 시리아 그리고 팔레스티나에 가서는 직접 자기가 설명을 하고 이렇게 할려고 한거다. 그래서 로마서가 하나의 회람이다. 바울의 복음을 선언적으로 천명하는 하나의 회람이다. 이렇게 Manson이 주장을 해요.

이러한 Manson의 이론은 바울이 앞으로 있을 예루살렘에서의 신학적 대결을 예상하며 로마서를 기록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는 도움을 줄 것이다. 앞의 Bornkamm, Wilkens, Fuchs, Jervell의 의견의 약점이 뭐라 그랬죠? 바울이 로마 교회와는 관계없이 예루살렘에서의 신학적 대결을 염두에 두고 자신의 복음을 정리했다면 그래서 로마서를 썼다면 왜 그걸 로마로 보내었냐가 문제였지. 그런데 Manson의 이론이 맞다면 바울이 이것을 자기 전 교회에 다 보냈단 말이야. 그런데 지금 다행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본은 로마로 보낸 사본이기 때문에 이게 로마서가 된 거라 말이야. 알겠어요? 거기다가 Manson에 의하면 로마서 16장 --요건 에베소로 보낸 사본인데-- 에베소로 보낸 조각이 지금 로마로 보낸 사본에게 합본되어 가지고 우리에게 있는거라. 그래서 Manson의 이론이 그들에게 도움이 된다 말이예요.

즉 그는 바울이 로마서를 선언문으로 기록했으며 그 편지가 로마를 포함한 모든 기독교 세계의 요충지를 위한 회람용 편지가 되게 했는데, 이는 예루살렘에서의 자신과 유대 기독교 지도자들과의 대결에서 그들의(기독교 교회) 지지를 그들에게(로마에, 고린도에, 에베소에, 안디옥중에)지지를 획득할 목적이었다 이말이예요. 그러나 본래는 로마서가 단지 1:1-15:13 + 16:25-27로 구성되어 있고 --15:13에서 곧 16장 25-27절 인사말로 원래 되어 있고-- 현재의 16장 1-23절까지는 원래가 에베소에 보내졌던 사본에 부착되어 있었다는 Manson의 주장은 많은 비판을 받았기 때문에 “로마서가 하나의 선언문이요, 회람용 편지였다.”는 그 이론에 관하여는 커다란 불확실성이 남아 있다. 이 Manson의 이론이 상당히 attact한 것은 사실이야.

16장의 문제중에 하나가 바울의 로마 교회에 전혀 모르는데 왠 로마에 친구가 있어? 왜 로마의 친구가 이렇게 많아. 이게 그래서 “로마서의 16장의 친구들은 아마 다 에베소 교회의 친구들일 거다.” 이런 이론이야. 이런 가정이예요. 그래서 이건 에베소 교회에서는 사본에 부착되었던 것이다. 또 하나의 Manson이 주장을 하는 것은 사본학적으로 16:25-27까지가 여기저기 붙어 있다구. 그것은 어떤 사본은 14:23절 끝에 붙어있기도 하고... 거기에 봐요. Nestle-Alard text. 어떤 text에 의하면 15:33끝에 붙어 있기도 하고, 15:33끝에 붙어있었단 말은 무슨 말이야? 이 어떤 로마서 사본은 16장 없이도 존재했단 말이지. 15:33절을 끝으로. 그러니까 로마에 보낸 사본은 16:33, 로마에 보낸 사본은 Manson이 주장하는 대로 원래 로마서의 본문은 15:33까지로 끝나고 --거기다가 로마로 보내는 인사말과 자기 계획 발표를 14절에서 33절까지 붙이고 거기다가 뭘 붙인거야? 지금 16:25-27에 나오는 인사말을 붙여서 보낸거란 말이야. 한 사본을 알겠어요?

에베소에 보낸 사본은 15:13까지 본문, 거기다가 16:1-23, 거기다가 지금 16:25-27 마지막 인사말 이렇게 해서 보냈겠지. 그래서 지금 16:25-27의 인사말이 사본에 따라 15장 끝에 붙기도 하고, 어떤 사본은 16장 끝에 붙어 있기도 하고 이렇다 이거야. 그래서 Manson이 사본학적으로 자기 이론을 상당히 뒷받침하는데, 그러니까 Manson의 이론의 핵심이 16장이 그러면은 진짜 에베소의 성도들에 대한 인사냐, 에베소의 성도들에게의 인사라면 Manson의 이론이 상당히 설득력 있는 거야. 아니냐? 그게 이제 상당히 관심의 촛점이라. 그래서 로마서 큰 주석들에 보면 다 16장의 문제를 토론해요. 이게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보내는 인사냐? 아니면 에베소에 보낸 인사냐. 근데 지금 다수 의견을 로마서 교회에 보낸 성도들에게 인사라는 거야. 그렇다면 Manson의 이론이 성립이 안되는 거라구. 그래서 불확실성이 좀 남아있어요.

자, 이런 상황에서 아마도 우리는 두가지 사실을 공히 신중하게 취급해야만 할 것같다.

첫째, 바울은 한편으로는 복음의 진리와 자유, 이방 그리스도인들의 합법성, 교회의 하나됨 등에 대해 예루살렘에서의 다가오는 대결을 의식하여 로마서를 기록하였으며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란 말이야. 요게 하나의 사실이야.

또 하나의 사실은 이 편지를 다른 사람들이 아닌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냈다는 사실, 그러니까 Mansom의 이론이 맞지 않다면 로마로 보냈다는 것도 하나의 사실이란 말이야. 이 두 가지 사실을 우리가 어떻게 설명을 해야 되느냐, 또는 이 두가지 사실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느냐? 로마서에 대해서 무엇을 말해주느냐? 후자의 사실은 바울이 로마교회에 자신과 자신의 복음을 소개할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예루살렘에서의 대결을 염두해 두고 그의 복음을 요약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 못지 않게 강조해야 함을 명백히 시사해 준다. 이 편지를 로마에 띄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한다고? 바울이 적어도 두가지 의도가 있었어요. 하나는 예루살렘에서의 복음을 변호할 의도와 못지않게 로마 교회에 자신의 복음을 옳게 소개할 의도, 이 두가지 의도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말이예요. 명백히 시사해 준다고.

그렇다면 바울이 로마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유대 그리스도인들과 이방 그리스도인들간에 갈등을 완전히 배제할 필요가 없다. 예루살렘교회에서도 무슨 문제가 주문제라고? 이방 그리스도인들과 유대 그리스도인이 하나됨이 주 문제라 그랬지. 그런데 지금 바울은, 그러니까 고린도에서 한 눈은 예루살렘에서 다가오는 신학적 대결에 집중하고, 한 눈은 또 로마에 집중하고, 그렇다면 지금 마침 로마서 내에서도 유대 그리스도인들과 이방 그리스도인들간에 관계가 문제가 된 듯하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으니 우리가 언제 봤어요? 지난번에 봤지. 로마교회의 상황문제들 여러분들 기억나? 그것도 로마서의 목적을 규정하는데 하나의 요인이라고 그랬지. 그걸 생각할 때에 이 로마 교회 내에서의 이방 그리스도인들과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됨을 도모하려는 것도 바울이 로마서를 쓴 목적의 부차적 목적 --주된 목적은 아니지만 부차적인 목적-- 일 수는 있겠다고 우리가 짐작할 수 있다는 말이예요. 알겠어요?

바울이 그 문제에 대해서 막연하게 나마 들어서 알았거나 --로마 교회 유대 그리스도인들과 이방그리스도인간의 갈등이 좀 있다는 소식을 자세히는 모르지만 막연하게나마 들어 알았거나-- 그렇지 않았다 해도 그 문제는 헬라 세계의 거의 모든 교회들에 있었던 문제이었으므로 로마 교회도 있을 것으로 바울은 짐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바울이 자기가 로마 교회도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런 문제가 있다고 가정하고 그걸 도우려고 했느냐?고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그러지. 근데 바울의 지금까지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헬라세계에서의 교회에 항상 이 문제가 있다구. 고린도 교회에서 갈라디아 교회에 이르기까지... 로마 교회에도 이 문제가 있을 것으로 짐작하고 지금 예루살렘에서 다가오는 사도회의에서 문제가 이방 그리스도인과 유대 그리스도인간에 하나됨을 지금 자기 복음으로 도모하려고 그러는 것인데, 그것을 위해서 지금 자기의 복음의 이해와 이방 그리스도인들과 유대 그리스도인의 복음에서의 하나됨을 신학적으로 정리하는 마당에 그것을 로마로 보낼 때에 그것이 로마교회의 현지상황에 도움이 되기를 바울이 바랐을 것이다는 말이예요. 그런 의도도 있을 것이다. 알겠어요?

이 편지를 가지고 바울은 자기 자신과 자신의 복음을 로마 교회에 소개하여 예루살렘 등지에 있는 유대주의, 즉 유대파 그리스도인들과의 대결에서 로마 교회를 자기편으로 이끌려 하고, 또한 자신의 서방선교를 위해 그들의 지원을 확보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이 편지를 로마로 보낸 것은 일단 예루살렘에서 사도회의를 준비하면서 자기 복음을 요약한거야. 그래서 로마서가 아주 체계적인 복음 해설의 성격을 띄고 있는거야. 그러나 왜 이걸 로마로 보냈느냐 하면 한편은 자기를 소개하고 자기 복음을 소개해서 스페인에로의 선교여행을 준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로마 교회가 앞으로 다가오는 예루살렘에서의 대결에서 바울편을 들어 주는게 아주 중요하다구. 로마 교회가 나중에 바울 이후의 고대 교회에서 제국의 수도의 교회였기 때문에 항상 신학 논쟁에서 로마 교회가 어느 편을 따르는가가 아주 중요해 지지 벌써. 바울시대에도 로마 교회의 위치가 중요하게 된다구. 그래서 그런 그들의 지원을 확보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니까 서방 선교를 위한 지원뿐만 아니고 예루살렘 교회 내에 유대주의자들과의 논쟁에서도 이 신학적으로도 바울이 함께 서주는 것이 중요하단 말이야. 그래서 그들의 지원을 확보하고자 한 것이다.

로마 교회는 바울에 의해서 설립되지도 않았으며 그 교인들 대다수는 바울을 개인적으로 알고 있지 못했다. 그러나 바울은 로마 교회가 제국의 수도에 위치함으로써 차지하는 신학적 전략적 중요성을 매우 뚜렷하게 인식하고 있었으며(행 19:21ff) 그게 우리 사도행전에서 행간에서 본다구. 사도행전 19장21절 “내가 로마를 봐야 된다” 그래서 사도행전의 후반부는 바울이 오로지 로마를 향해서 가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어요. 로마를 목표로 달리는 것도 또 자신의 서방 선교를 위한 그곳 교회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형편이었다. 그렇다면 그의 계속되는 이방 선교사역 뿐만아니라 유대파 그리스도인들과 자신의 대결을 위해서도 조만간 예루살렘에 가게될 것처럼 그곳 교회를 위해서 전적으로 믿음을 통한 은혜에 의한 구원의 복음을 상세히 설명해주고 그 교회를 자기편으로 만드는 것이 바울에게 있어서는 아주 필수적인 일이었다.

이제 로마서를 쓴 목적을 설명했어. 이 로마서를 쓴 목적이 무엇을 다 설명해야 된다고? 로마서의 특별 성격을 띄고 있었나를 충분히 설명하는 것이어야 된다구. 지금 이 로마서를 쓴 목적을 다 설명했어요.

Q.바울의 로마 교회에 와서 그후의 상황은?

A.바울이 로마 교회에 당도해서 감옥살이를 하다가 Nero(64년)의 핍박 때에 순교를 당한 것이 거의 확실한데, 바울과 베드로가 AD 64년 Nero의 핍박때 순교했다는 고대 교회의 전설이 거의 확실한 사실로 학자들에 의해서 받아들여져요. 그러나 이제 지금한 문제 무엇과 더불어 발생하는 질문이냐 하면, 목회서신들과 더불어 발생하는 질문이야. 디모데 전후서나 디도서를 바울이 직접 쓴 편지로 본다면 바울이 로마감옥에서 일단 석방이 되어 가지고 이 스페인으로 선교를 가지않고 무슨 연유인지 다시 자기의 옛 선교지역 동방으로 돌아와서 선교활동을 하면서 디모데와 디도에게 그런 편지를 쓴 것으로 이해를 하는 것이 가장 쉽다구. 그래서 목회서신들을 바울이 직접 쓴 편지로 주장하는 보수주의적인 학자들은 대개 그렇게 바울의 연대를 재 구성해 보려고 노력을해요. 그외의 증거는 하나도 없어.

목회서신들이 바울이 감옥에서 일단 석방이 되어 가지고 동방에서 다시 와서 좀 활동을 하다가 또 체포되어서 --아마 64년에 순교를 당했든지 아니면 64년에 순교를 당하지 않았던지-- 스페인으로 갔다는 증거는 전혀 없어요. 그러나 바울이 64년에 순교당했다는 것을 거의 확실히 받아들이는 대부분의 학자들은 바울이 그 사이에 일단 석방이 되었으면 로마서에서 이렇게 강력하게 자기가 열망하는대로 스페인으로 갔을 것이지 뭐 동방으로 다시 왔겠나 이렇게 생각하는 학자들은 --그러면서도 이제 목회서신을 바울의 진짜 편지도 자기가 직접 쓴 편지로 볼려고 하는 학자들은-- 목회서신을 바울이 로마에 잡혀가기 전에 쓴 편지로 바울의 연대기를 다시 설명하려고 해. 그런 설도 있어요. 목회서신들도 그렇게 늦은 편지가 아니고 바울이 사도행전에서 보고되는 frame-work속에 어떻게 좀 집어넣을 수 있는 그런 편지로 보려고 하는 그런 학자들도 있어.  V. Leke같은 사람이 그렇게 생각한다구. 그러나 지금 제기한 문제는 전적으로 목회서신들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들이어요. 그러나 바울이 목회서신 빼놓고는 목회서신에서 우리가 재 구성하는 것 외에는 바울이 로마교회에 붙잡혀 갔다가 다시 석방되었다든지 일체의 증거가 없어요. 그러니까 모르지. 우리 목회서신하게 되면 그때 가서 좀.

 

 

2. 빌립보서

그러면 로마서의 서론은 그 정도로 하고 이제 빌립보서 서론을 하겠어요.(빌립보서 문단 나누어서 제목들 써와요)

빌립보서 서론을 위해서는 사도행전 16장을 한번 읽어요. 사도행전 16장에 빌립보교회의 개척이 상당히 자세히 기록이 되어 있는데 이게 상당히 재미 있다구. 많은 우리에게 교훈을 주고 한번 읽어봐요. 빌립보서 아니 사도행전 16장 6절부터 한번 읽어봐요.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가로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바울이 이 환상을 본 후에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를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그 유명한 이야기 다 알지? 바울이 아시아에서 선교를 열심히 하고 있는데 밤에 환상가운데 마게도냐 사람이 우리를 와서 도우라는 환상을 보고 이제 마게도냐로 건너가는 유명한 장면이라. 아마 설교 많이 들었을 거야.

“드로아에서 배로 떠나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압볼리로 가고 거기서 빌립보에 이르니 이는 마게도냐 지경 첫 성이요 또 로마의 식민지라 이 성에서 수일을 유하다가...”

빌립보를 뭐라고 설명해? 여러분들 성경의 지도 한번 봐요. 그래서 이 드로아에서 마게도냐로 건너가는 길목을 한번 보라구. 이 아시아 지역에서 빌립보가 마게도냐의 첫 성이라. 또 빌립보가 마게도냐의 가장 수도라 말이예요. 그런데 거기를 특별히 뭐라고 설명해요. 로마의 식민지라. 그 지역 마게도냐 전체가 로마의 식민지이지. 그러나 빌립보를 특별히 로마의 식민지라 한 이유가 있다구.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처가 있는가 하여 문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더니 두아디라 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저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가로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있게 하니라 우리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하는 귀신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니 점으로 그 주인들을 크게 이하게 하는 자라”

안식일날 바울이 어느곳에 나가면 어디를 먼저 찾아갔지? 회당. 그런데 지금 빌립보에는 회당이 없어요. 없었다는 소리야. 로마의 식민지로서, 로마의 군대 특히 로마의 제대군인들, 예비역 군인들, 제대군인들이 정주하던 곳이라. 그래서 빌립보에는 유대인들이 별로 없었다구. 거의 없었어요. 하나도 없었는지 모르지. 하여간 회당이 설립되기 위해서는 유대성인 남자 10명이 있어야 돼. 그게 정족수라. 유대 성인 남자 9명이 여자가 999명이 있어도 회당이 안된다구. 그래서 회당이 없어. 그래도 혹 유대인이 있고 유대교와 접해서 준비된 사람들이 있나 둘러 봤더니 빨래터에 누가 있어? 여자들 몇이 모여 있는데, 그중 하나가 루디아인데, 뭐라고 소개되어 있어요, 거기에?  하나님을 공경한 자. 그게 무슨 뜻이라고 그랬지? 이방인으로서 유대교에 매력을 느껴서 유대교의 예배에 참여하고 할례를 받아서 유대인으로 개종하기 까지는 않았지만... 그 할례를 받고 유대인으로 개종한 자를 뭐라고 부른다고?  개종자. 내가 다 설명했는데, 여러분들 멀뚱 멀뚱하고 있어.

이방인중에 유대회당과 연합되어 있는 사람중에 두 종류가 있어요. 하나는 개종자(προσηλυτοσ). 그 사람들은 어떤자들? 할례를 받고 개종한 사람들이야. 언약의 표징, 언약의 백성의 표징인 할례를 받고 유대인으로 개종한 자. 이건 소수였고, 대다수는 어떤 자?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고 불리웠단 말이야. 자기들은 개종까지는 않했지만 회당의 예배에 참여하면서 율법을 배우고 율법을 지키기로 애쓴 사람들이라구. 루디아가 구약과 유대교를 꽤 많이 알아서 복음 받기에 많이 준비된 사람이라 그런 말이지. 바울이 이런 사람들을 먼저 찾은거야. 왜? 이런 사람들에게 복음 설명하기가 쉬우니까 계속 읽어봐요.

“우리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전하는 귀신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니 점으로 그 주인들을 크게 이하는 자라 바울과 우리를 좇아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하며 이같이 여러 날을 하는지라 바울이 심히 괴로와 하며 돌이켜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 종의 주인들은 자기 이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잡아 가지고 저자로 관원들에게 끌어갔다가 상관들 앞에 데리고 가서 말하되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성을 심히 요란케 하여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치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 하거늘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송사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분부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그가 이러한 영을 받아 저희를 깊은 옷에 가두고 그 발을 착고에 든든히 채웠더니”

거기 몇절이냐. 19절에 저자가 뭐야. 저자가 무슨뜻인지 아나 여러분들? ‘시장’의 옛말이야 “아고라” 그 다음에 지금 여기서는 빌립보, 완전히 헬라도시의 당시의 영적상태, 당시의 분위기를 아주 잘 보여준다구. 당시 헬라세계의 불안과 숙명론과 점성술, 우상숭배, 성적 타락 이런게 헬라도시의 아주 집중적인 분위기였는데, 여기보면 점쟁이가 상당히 돈을 많이 버는 그런 분위기라. 숙명에 대해서 불안해 하고 그것을 좀 헤아려 보려고 어둠에서 헤매는 헬라의 영적 상태를 잘 보여줘요. 그런데 이 복음이 바로 이와같은 헬라문화와 갈등을 일으킨거지. 종교와 문화가 갈등을 일으켜요. 이런 그 숙명주의와 불안 속에 빠진자들에게 해방과 새로운 숙명, 소망을 준다고... 그래서 귀신을 내어쫓고 이 점쟁이를 온전케 하고 이렇게 되었다 말이야.

그러니까 이 점쟁이 소녀를 통해서 돈벌던 주인들이 바울과 그 동료들을, 실라를 잡아 고소를 하는데 --막상 죄목은 이 점쟁이를 점을 못치게 해 가지고 자기들에게 손해를 끼쳤다는 게 아니고 죄목은 뭐야?-- 로마법에 어긋나는 로마법과 로마풍습에 어긋나는 가르침을 하고 소란, 소요를 일으켰다는 거지. 이게 이제 로마 사회에서 복음이 또 취조당하는 issue라. 로마법에 어긋나고 로마의 종교, 관습, 시민정신과 어긋난다. 아까 빌립보는 뭐라고? 로마의 식민지라 그랬지. 그래서 이 빌립보인들이 이 로마의 시민으로서의 긍지가 대단했어요. 그래서 이 로마법을 로마의 정신을 로마의 풍습과 어긋난다는 걸로 지금 고소를 하고 감옥에 가둔 거라. 이것도 당시의 바울의 헬라 세계에서의 선교 상황에 대해서 우리로 하여금 상당히 많은 것을 짐작할 수 있도록 완전히 시사하는 부분이예요. 계속 읽어요.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이에 홀연히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간수가 자다가 깨어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 줄 생각하고 검을 빼어 자결하려 하거늘 바울이 크게 소리질러 가로되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하니 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부복을 하고 저희를 데리고 나가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내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밤 2시에 간수가 저희를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기고 자기와 그 권속이 다 세례를 받은 후 저희를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주고 저와 온 집이 하나님을 믿었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 날이 새어 상관들이 아전을 보내어 이 사람들을 놓으라 하니 간수가 이 말대로 바울에게 고하되 상관들이 사람을 보내어 너희를 놓으라 하였으니 이제는 나가서 평안히 가가 하거늘 바울이 이르되 로마 사람인 우리를 죄도 정치 아니하고 공중앞에 때리고 옥에 가두었다가 이제는 가만히 우리를 내어 보내고자 하느냐 아니라 저희가 친히와서 우리를 데리고 나가야 하리라 한대 아전들이 이말로 상관들에게 고하니 저희가 로마 사람이라 하는 말을 듣고 두려워 하여 와서 권하여 데리고 나가 성에서 떠나기를 청하니 두 사람이 옥에서 나가 루디아의 집에 들어가서 형제들을 만나보고 위로하고 가니라”

거기 이제 지진을 통한 바울과 실라의 석방, 그리고 간수의 가족의 구원이야기 여러분들 잘 알고. 그 다음에 이 바울이 로마 시민으로서 권리를 주장하는 것을 보게되요. “로마시민이 재판도 받지 않고 이렇게 두들겨 맞은 후 감옥에 갇히는 일이 어디있느냐?” 거기서 우리는 당시 로마 행정과 사법제도가 비교적 공정했음을 보여준다고. 우리 5공 정권들보다 훨씬 나았다구. 그래서 바울이 자기 로마 시민권을 당당히 주장하면서 인권의 보호와 권리를 행사하는데, 이것은 그 당시 로마 행정이, 로마법과 로마 행정이 비교적 공정했어요. 적어도 로마 시민들에게는 그랬다는 말이예요. 이것을 바울이 충분히 이용한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어요.

그의 선교의 하나의 조건이 로마 제국의 효율적인 도로망, 교통망도 하나의 조건이었지만, 로마제국의 군대와 행정관에 의한 비교적 공정한 법집행도 로마세계에서 바울의 당시 선교에 상당히 좋은 조건을 제공했던 거예요. 그런걸 우리가 여기서 볼 수가 있다구. 자 그러면 이 빌립보서의 이 빌립보 교회의 개척에 대해서 이렇게 사도행전 16장에 아주 상세히 기록이 되어 있어요.

자, 그럼 빌립보가 어떤 도시인가? 여기에 사도행전 16:12에 마게도냐의 첫 성이요, 로마의 식민지라. 마게도냐의 수도격이야. 그리고 로마의 식민지라. 이렇게 지금 정의되어 있지. 이 빌립보는 원래 Alexander 大王의 아버지인 마게도냐의 Philip 2세에 의해서 BC 360년쯤에 창건이 되어 가지고, 그 이름을 자기 이름을 따서 “빌립”이라고 정한거예요. 마게도냐의 王 Philip 2세가 Thrace족속들 한테 땅을 빼앗아 가지고 거기에 도시를 창건해서 자기 이름을 붙인거라. 그렇게 빌립보라는 도시가 성립이 되었는데, 창건이 되었는데, 이게 이제 로마제국 --전체 그리스이스와 마게도냐 전체가 로마 제국-- 의 식민지가 되면서 로마의 땅이 되었지. BC 168년에 로마 제국의 일부가 되었어요. 그랬다가 BC 42년에 Octavianus의 군대와 Burtus와 Casius의 공화국 군대간에 전투가 벌어져서, Octavianus의 승리 후에 Octavianus 휘하의 그 장교들과 군사들을 빌립보에 정착을 시켰어요.

그래서 이 빌립보를 로마의 특별식민지(Colonia)로 성립시키고 그곳의 시민들은 --빌립보의 시민들은-- 로마의 시민들이었으며 “ius italicum”문자 그대로 하면 “italia의 벗” 곧 이탈리아 반도 내의 로마인들에게 부여했던 전적 특권을 그들에게도 부여했다구. 그래서 빌립보 시민들은 로마의 시민들이지만 마치 로마 시내의 시민들과 똑 같은 특권을 누리는 시민들이었다 말이야. 그래서 Octavianus의 군대의 제대군인들이 두 차례에 걸쳐서 거기 정주하게 돼요. 한번은 Burtus와 Casius의 전투, 다른 한번은 이 Antonius군대와의 그 유명한 Actium해전 끝에(BC 31) --그 전쟁으로 Octavianus가 로마의 단독 통치자가 되지. 로마의 첫 황제 Augustus Octavianus-- 그 양전쟁에서 승리군인으로서 빌립보에 정착을 시켰다구. 그리고 그들에게 이런 특권을 주었단 말이야.

그러기 때문에 자연히 빌립보의 시민들은 로마의 시민으로서의 긍지가 대단했어요. 이것이 아까 우리가 본 대로 사도행전 16:12-40까지 잘 반영이 돼 있지. 바울에 대하여 뭐라고 起訴해요? “로마법과 로마의 풍습에 어긋나는 가르침을 한다.” 하는 것을 기소하지. 그러나 나중에 바울이 로마 시민권을 주장하자 그 앞에서는 꼼짝 못한다구. 로마 시민의 의식과 로마 시민으로서의 긍지가 대단히 강했다 말이야.

이 빌립보서의 짧은 便紙에 바울은 많은 정치적, 군사적 용어를 많이 사용해요. 가령 1:27, 3:12-15, 3:20ff, 4:3등에 보면 바울이 빌립보서內에서 특히 政治的, 軍事的 용어들을 참 많이 사용한다구. 그것은 이 빌립보의 도시의 성격과 많이 관계가 있는 거라. 빌립보인들이 바로 이와 같은 정치적, 군사적 용어들을 아주 쉽게 이해를 하게돼요. 그래서 바울이 이런 언어들을 많이 쓴다구.

사도행전 16:12-40, 바울이 아세아에서 마게도냐롤 건너가서 빌립보에 교회를 개척하는 것이 이제 잘 기록이 되어 있는데, 이것은 어느때냐 하면 AD 49년쯤 이른바 바울의 제2차 선교여행중에 발생한 거야. 主의 특별한 지시로 바울은 아시아의 선교지를 떠나서 유럽으로 건너가서 유럽 대륙에 처음 세운 교회가 이 빌립보 교회였다. 빌립보라는 도시는 로마제국의 서반부를 로마 제국의 동반부와 연결시킨 소위 “Via egnatia” 로마의 중요한 군사행정로에 놓여있는 중요한 도시였어요. 바울이 주로 이런 중요한 로마의 군사행정로를 따라서 선교를 했지. 거기에 놓여있는 중요한 도시가 빌립보였는데 그곳에서 유럽대륙에 있어서 첫 교회를 세우는 거다.

그러니까 빌립보에서의 교회 개척은, 교회창건은 바울의 선교전략에 있어서 하나의 전환점을 이루었다고 봐야 되고, 적어도 그 무렵에는 바울이 로마까지 갈 생각을 가지고 있었음을 암시해요. Via egnatia 길이 어디로 연결해? 로마로 연결한다. 그 길을 쭉 따라가면 로마라. 누가 한번 빌립보서 4:15절을 읽어봐요.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예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바울은 빌립보 교회가 마게도냐 뿐만 아니라 유럽 전체에서 또는 이 복음의 시초였음을 굉장히 의식하는 거야. 보는 바와 같이, 이 빌립보 교회에서의 바울의 첫 회심자들은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와 그의 가족, 간수와 그의 가족, 그리고 빌립보서에 언급된 에바브로 디도, 유오디아, 순두게, 클레멘트... 이런 자들인데, 이 이름들이 전부 이방이름들이라. 전부 이방 그리스도인들이어요. 그래서 빌립보 교회는, 거기는 회당도 없었고 무엇으로 시작을 해? 이방 그리스도인들로 시작을 해. 또 빌립보에서 바울의 로마 관리들과 처음 갈등을 일으켜요.

바울이, 아까 본대로 이 시민들의 고소, 로마법과 로마 풍습에 어긋난다는 고소들을 우리가 보게 되고, 로마 관리들이 그걸 어떻게 처리할지 아직 몰라요. 바울에 어떻게 처리할지 모른다구. 다만 바울이 로마시민이라는데서 사과를 하고 제발 조용히 떠나 달라고 사정 사정했어요. 그래서 바울이 떠난다구. 그래서 지금 이제 고린도에 당도해서는 Galio앞에서 정식으로 바울이 재판을 받고 무혐의로 바울이 기각당하지. 고소가... 그게 이제 선례라. 요새말로 하면 판례가 되는 거라구. 당분간. 근데, 그 전에 빌립보에서는 로마 교회와 로마의 관리들과 처음 갈등을 일으켰는데 로마의 관원들이 바울과 그 바울의 일당을 어떻게 처리할 줄 몰라요. 그래서 지금 그냥 흐지부지 제발 좀 조용히 나가 달라고 사정한거야.

이제 바울은 빌립보 교회와 특별히 따뜻한 사랑의 관계를 유지했어요. 그래서 바울은 예외적으로 빌립보 교회로부터는 자기 개인의 용도를 위한 재정적 지원을 받았어요. 1:3-5, 2:25, 4:10-14f. 근데 4장을 쭉 보면 4:10f를 보면 바울이 예외적으로 빌립보인들로 부터는 재정적인 지원을 받는데 있어서는 아주 불편해 해요. 바울의 원칙이 뭐야? 교회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일체 안받고 자기 손으로 생계를 벌어서 활동하는 거였는데, 빌립보 교회만은 이 일로 허락하는데 있어서 굉장히 불편해 한다구.

바울은 빌립보서 4:1에 빌립보인들을 뭐라고 불러요. “나의 兄弟들, 내가 사랑하고 사모하고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이요 나의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이렇게 그냥 자기 감정을 충분히 표현해서 빌립보인들을 부른 것을 보면, 이들과 아주 특별한 관계에 있었음을 보여준다고. 자 다음 시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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