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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연구 총정리〓/바울 서신

바울서신 // 제 7 강

by 【고동엽】 2022. 10. 23.

바울서신 // 제 7 강

 

김세윤 교수

 

고린도전후서 3, 로마서 1

 

1. 고린도전후서의 연속

오늘은 지난번에 하다만 ‘바울과 고린도와의 관계’중 12번을 이어서 하겠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의 문제가 다 평정이 된 것으로 생각하고 고린도전서 1장에서 9장까지를 써가지고 디도의 편에 보내서 디도로 하여금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헌금을 완수하도록 보냈는데, 그 사이에 고린도에 또 하나의 위기가 발생했어요. 그것은 고린도 교회가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서 걷는 헌금을 오해한 것 같아요. 그런데 이와 같은 오해는 왜 생겼느냐 하면, 밖에서 고린도 교회에 침투한 사람들이 바울의 사도직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고, 바울과 예루살렘 교회와의 관계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면서, “이 헌금은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것이 아니고 바울의 사악한 목적을 위한 것이 아니냐? 한마디로 바울이 사기꾼이 아니냐?” 한 것 같아요.

 

밖에서 고린도 교회에 침투한 자들은 자신들의 이스라엘 족보를 자랑하고, 예루살렘 지도자들의 위임을 자랑하면서 예루살렘 지도자들로 부터 권위를 위임 받았음을 자랑하고, 또 자신들의 영적 체험, 가령 환상이라든지 이적이라든지 등의 체험을 과대 선전하면서, 예루살렘 지도자들로 부터 사도적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내세우고 자신들의 엄청난 영적 체험을 과시했는데 이런 것들이 모두 고린도인들에게 상당히 호감을 주었던 것 같아요. 고린도인들 자신들이 힘을, 능력을 세상적인 관점에서 이해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이 권위주의적 행위라든가 또는 사도로서 마땅히 교회에 의해 부양되어야 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다든가 또는 엄청난 영적 체험을 자랑한다든가 이런 모든 것들이 그들의 능력의 표징으로 고린도인들에 의해 받아들여졌던 것 같아요.

 

우리 한국 교회하고 똑같죠? 목회자가 겸손하면 장로들이나 회중들이 막 올라타려고 그러죠. 목회자가 아주 목에 힘을 주고 권위주의로 나가고 그러면 회중이 “야! 저 뭐가 있나보다!” 하고서 그런 사람은 막 모셔요. 목회자가 좀 섬기는 자세로 나가면 막 깔아 뭉게고, 막 돌아다니면서 총회일이나 하고 간부일 열심히 하고 세상적으로 관직 있는 사람과 전화질이나 좀 하고 엉터리 학위나 둘러메고 거기다가 주의 종은 당연히 교회에서 잘 받아 모셔야 한다고 가르치고 또 필요하면 산속에 가서 뭐 들었다고 주장하고 아 이러면 틀림없이 성도들이 아주 좋아하고 그런 교회에 열심히 모여요. 또 여러분들 교회부흥, 뭐 성경적 세미나 하고 그러는데 그런 게 다 거짓말이고 지금 내가 가르친 대로 하면 돼요. 그러면 교회 부흥한다고. 틀림없이 그래 가지고 교회가 웬만큼 크면 당회장실을 크게 만들라고 구중궁궐로 저 깊숙한 방을 만들어 놓고 비서를 댓명 두면 거 뭐 틀림없이 부흥한다고... 바울같이 겸손하면 안돼요. 그러면 자꾸 무시해요.

 

열세 번째, 그래서 바울은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고후 10-13장 까지를 써서 이 거짓 사도들을 정면으로 공격한거예요. 이 편지는 앞의 고후 1-9장까지와 별개의 편지로 따로 보내졌다가 바로 앞서 보낸 편지, 그러니까 1장에서 9장까지와 나중에 합쳐졌거나 그렇다면 이 편지는 바울의 고린도 교회에 대한 5번째 편지다. 아니면 고후 2:1-9절까지를 쓴 직후로 아직 디도 손에 들려서 보내기 직전에 이와 같은 새로운 위기에 대해서 들어서 바울이 빨리 이 편지를(고후 1-13장) 써서 한 편지로 합본해서 디도 손에 들려 보냈거나, 하여간 1-9장까지와 10-13장 까지 사이에서는 내용적으로나 tone에 있어서 즉 바울의 어조에 있어서 현격한 차이가 있어요. 그리고 그 주제에 있어서도 상당한 차이가 있어요.

 

물론 고후 10-13장까지에서 다루는 문제가 바울의 사도직에 대한 회의, 도전, 특히 예루살렘 지도자들로 부터 안수 받고 위임 받고 초청장 받은 것이 없음에 대한 도전은 고후 3장에도 나오긴 나오지. 그래서 일면 연속점이 없지 않아 있어요. 그러나 고후 10-13장까지의 자기 사도직에 대한 변호와 거짓 사도들에 대한 공격이 주를 이루는 이 부분과 그 앞부분은 내용과 어종에서 현격한 차이가 있어요. 그래서 이렇게 다른 편지로 생각하던가 아니면 전후에 써가지고 합본해서 보냈거나 그렇게 생각할 수가 있겠다. 만약에 후자가 옳다면 그러니까 1-9장까지 써가지고 이제 막 보내려고 하는데 고린도 교회에 새로운 문제가 발생했다는 소식에 접해서 바울이 10-13장까지를 또 써가지고 합본해서 보냈다면, 우리는 이 고린도후서를 쓰는데 있어서 여러 날, 여러 주가 걸린 것으로 상상을 해야 돼요. 이 편지 하나를 쓰는데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그 당시 이 편지를 쓰는데 상당히 시간이 오래 걸렸지. 그런데 바울이 고후 1-9장까지를 쓴 뒤에 고린도에 새로운 위기가 발생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 고후 10-13장까지를 새로 아주 전투적인 언어로 써서 합본해서 보냈다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벌써 고후에 대해서 우리가 지금까지 토론한 것에 대해서 어떤 사람들은 고후가 3개의 편지로 되었다고 그렇게 본다. 하나는 1-9장까지, 하나는 10-13장까지, 또 하나는 무슨 편지? 소위 무슨 letter.

 

바울이 이 고린도 교회에 가서 모욕을 당하고 쓴 눈물의 편지가 고후 10-13장까지의 일부에 담겨있다고 본다고. 그리고 또 먼저 쓴 편지, 바울이 제일 먼저 쓴 편지(고린도 교인들이 오해한 편지)가 고후 6:14-7:1까지에 남아있다고 보는 견해가 있어요. 벌써 우리는 이런 토론으로 어떤 학자들은 고후가 서너 개의 편지들로 원래 바울이 고린도에 보낸 3개의 편지가 합쳐져서 오늘의 고린도후서를 이루었다고 하는 그런 견해가 있어요. 그래서 고후의 중요한 문제 중의 하나가 이 unit의 문제야. 이 편지가 원래 하나의 편지였느냐? 아니면 지금 이야기하는 1장 9절과 10장 13절까지의 두개의 편지로 보느냐? 아니면 고후 6:14-7:1까지 거기에 바울의 고린도 교회에 처음 보낸 편지 조각이 있느냐? 그렇다면 3개의 편지지... 또 고후 10장-13까지의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가서 모욕을 당하고 와서 눈물을 흘리며 고통스런 편지를 썼다고 하는데 그 편지가 일부 남았느냐? 그렇다면 4개의 편지가 되는거죠. 이렇게 고린도후서가 하나의 편지, 또 두개의 편지, 세 개, 네 개의 편지 조각이냐가 상당히 어려운 문제예요.

 

이런 것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도놀드 거쓰리나 킴멜의 책을 읽어보면 자세한 토론이 있으니까 읽어봐요. 아마 가장 무난한 견해는 바울이 고린도후서 1-9장 까지를 먼저 쓰고 조금 있다가 10-13장까지를 썼는데 어쩌면 별개의 편지로 볼 수도 있고, 그러나 연달아서 아니면 합본해서 보냈을 수도 있어요. 이 부문에 있어서... 그러니까 이 마지막 편지에 있어서 10-13장까지에서 바울은 이 침투자들은 다른 예수를 선포하는 자들로, 갈라디아에 침투한 자들은 뭐라고 해요? 다른 복음을 선포한 자들, 그 다른 복음이란 있을 수 없어? 그러니까 이것은 복음도 아니라고 해요. 그러면 고린도에 침투한 거짓 선생들에게도 다른 예수를 선포하는 자들이라. 고후 11:4에 “다른 예수를 선포하고 다른 영을 가지고 다른 복음을 선포하는 자들.”이라고 정죄하고 있어요.

 

그들의 엄청난 이 주장 즉, 사도로서의 그들이 주장하는 자격들, 곧 그들이 사도의 표징들이라고 주장하는 이것들에 의거해서 볼 때에 바울 자신이 조금도 뒤떨어짐이 없으나 자신은 그들이 내세우는 족보라든가 --이스라엘인이고, 히브리인이고,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하는-- 그 구약의 특수 구원사적 족보라든가, 또는 외적인 인간에 의한 권위의 예루살렘 사도들에게 안수 받고, 사도직함을 받고 무슨 추천장 받고 하는 그 외적인, 인간적인 권위의 위임이라든가 또는 심지어 성령의 신비스러운 체험까지도 사도의 진정한 표징들이 될 수 없고 “오로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과정 중에 그리고 성도들을 섬기는 과정 중에 고난 받음이 사도의 진정한 표징”이라고 바울은 내세웠어요. 왜냐하면 그것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이며 이 사도의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이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사도의 삶은, 사도는 그리스도의 대표로서 그리스도를 그 삶에서 나타내야 된다고요. 십자가에 못박히고 부활한 그리스도의 삶이 이 사도의 삶에서 시위되어야 된다고... 거꾸로 말하면 사도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시위해야 한다고 할 수 있어요. 그래서 “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냐? 나도 그렇다. 그들이 히브리인의 자손이냐? 나도 그렇다.” 그래서 이 족보나 구약의 옛 언약에 의한 평가를 내리면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그들에게 꿀림이 없다 이거예요. 그들이 무슨 영적인 엄청난 체험을 이야기하는데 그 점에 있어서도 전혀 꿀림이 없다. 나도 기사와 이적과 표징을 행했으며... 자기도 심지어 3층천에까지 간 일이 있어. 그러니까 그런 건 난 말하고 싶지가 않은데 너희들이 나를 강요해서 내가 잠시 바보가 되어서 이따위 소리 한다고, 전혀 말하고 싶지 않은데, 그러니까 오늘날 뭐 천당 갔다 왔다고, 지옥 갔다 왔다고 하는 사람들은 바울의 정신에 완전히 위배된 사람이에요.

 

바울은 그런 체험을 말하고 싶지 않다고 너희들이 지금 억지로 나를 강요한다고 그런 체험을 마치 뭐 큰 특권이나 얻은 양 떠벌리고 다니는 사람들은 신약 성경의 기본 정신에 위배된 사람들이라고.  바울이 뭐라고 해요? “내 이런 말 하고 싶지 않은데, 내가 너희들 때문에 잠깐 바보가 되어서 할 수 없이 이런 말 하는데, 좀 참아 달라. 좀 참고 들어 달라.” 그래놓고는 “내가 다시 바보가 되었다.”고 그렇게 말해요. 근데 하여간 그런 성령의 체험이나, 성령의 능력의 발휘, 기사나 이적, 그런 것들로 봐도 그들이 다 그런 것들을 사도의 표징들로 내세운다고 조금도 꿀림이 없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사도의 표징이 아니고 무엇이 진정한 의미의 사도의 표징이냐? 그리스도를 위해서 고난 받고, 이 사도직의 고난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함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시위이기 때문에,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표로서 말로만 아니라 삶에 있어 그 몸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내세워야 한다. 바울은 뭐래요?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지니고 다닌다고 말하죠.

 

사도의 진정한 표징, 그래서 아주 그 역설적인 논지로 표현이 되어 있는데 이 십자가의 신학(?) 이른바 고린도 교인들의 또 고린도에 침투한 거짓 사도들의 영광의 신학에 반한 바울의 이 십자가의 신학의 전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핵심을 설파하는 것이며 오늘 우리에게도 큰 교훈을 주는, 모든 그리스도의 종들에게 진정한 자기와 자기 사역의 성격과 방향을 결정케 하는 아주 중요한 교훈으로 가득차 있어요. 거짓 사도들과 이 세상적으로 판단하는 고린도의 그리스도의 영광의 신학에 반해서 바울은 자기의 이 고난 많은 사도적 삶을, 십자가 신학을, 하나의 시위로, 삽화(illustration)로 내세우고 있어요. 여러분들 한번 토론해 봐요. 진정한 주의 종이 누구냐? 주의 종의 진정한 표징이 뭐냐? 오늘 우리 한국의 개신교의 목회자들이 중세의 카톨릭 사제주의의 목회자적 자기애를 따르고 있어요. 날이 갈 수록 그래요.

 

자꾸 이 하나님과 평신도의 중보자로 자기들을 이해하며 구약 제사장에서 자기애를 도출하는 이것이 사제주의지... 그래서 권위주의적 행패를 하며 섬기는 자보다는 군림하는 자들의 자세를 취하며 우리 종교개혁의 결과중의 하나가 바로 이러한 사제주의의 타파인데, 바로 그러한 종교개혁의 후예들인 우리 개신교의 목회자들이 중세의 타락한 카톨릭 신부들의 사제주의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어요. 아주 위험한 지경에 있어요. 그래서 지금 바울이 고후 10-13장까지에서 펼치는 진정한 주의 종의 표징이라는 것이 뭐냐에 대한 진정한 토론이 있어야 돼요. 여러분들 한번 토론해 봐요. 이렇게 해서 고후는 신약 성경에서 아니 고대 문학 전체에서 가장 개인적이고 personal한, 가장 감동적인 문서가 된거예요. 그리스도의 두 오심 사이에 존재하는 그리스도인들의 고난과 영광의 이 역리적(paradox) 실존을 잘 그리고 있어요. 고후 12:1-10까지 누가 읽어봐요.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내가 그리스도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 사년 전에 그가 세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치 아니하리라 내가 만일 자랑하고자 하여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참말을 함이라 그러나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 두노라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하려 하심이니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내가 약할 그때에 강하다. 나의 약함 속에 그리스도의 강함이, 그리스도의 능력이 완성된다. 인간인 바울이 스스로의 강함에 있을 때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타날 수 없어요. 그가 스스로 완전히 비웠을 때에 그의 삶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드디어 나타나는 거라. 내가 약할 때 내가 강하다. 이런  paradox가 바울의 사도의 표징으로 내세우고 있어요. 자기의 그 사도적 삶 --사도는 그리스도의 대표라는 그의 사도적 삶-- 에서 그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부활이 시위될 때에 그때 비로소 사람들은 바울을 보고 그리스도를 알게 된다는 그런 그 역리를 지금 말하고 있어요.

 

 

2. 로마서에 대해서

자, 그러면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한 목적, 로마서의 쓰여진 연대라든지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아요. 다만 로마서의 서론적인 문제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바울이 로마서를 왜 썼느냐?” 하는 문제다.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 우린 로마서에서 “바울이 로마와 로마 교회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를 다루게 돼요. 바울이 로마서를 쓴 목적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옳게 해석하기 위해서는 아주 중요한 문제다. 그래서 이것에 대한 토론이 참 많아요. 거기 9page 보면 Kummel의 신약서론을 보고 그 다음에 거기 여러책들 있지 ???? 등의 논문들이 있다. 그런데 이 논문들이 편리하게 K.P. Donfried가 편집한 The Romans Debate 책에 모아져 있어요. 그 외에도 Drane의 글이라든지, 로마서 주석에, 특히 최근의 주석에 아주 자세하게 나와 있어요.

바울이 로마서를 왜 썼는가에 대한 토론이 참 많아요. 중요하기 때문에, 의견이 많이 갈리기 때문에 그래요. 여러분들 하나씩 지금 가지고 있는 것, 이것은 원래 칼빈세미나에 갔을 때의 강의 노트인데 학생들이 번역을 해놓았어요. 그런데 번역이 상당히 틀려가지고 내가 손으로 써 넣었어요. 자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한 목적.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한 직접적인 목적은 로마서의 서론과 결론 부분에서 명확히 보여준다. 로마서 1장 10-15절과 15장 14-33절까지. 집에가서 다시한번 읽어봐요. 여기에 바울은 로마서를 수록한 목적을 분명히 밝혀요. 그걸 좀 설명해 보면 먼저 로마서 15장 14절 부터 33절까지를 먼저 읽죠.

바울이 지금 이 편지를 어디서 쓰고 있느냐 하면 고린도에서 쓰고 있어요. AD 57년경에 로마에 편지를 쓰고 있어요. 로마서 15장 19절에 뭐라고 해요? 자기의 지금까지의 사도적 사역을 뭐라고 요약해요? 예루살렘에서 부터 빙 둘러서 일루리곤까지 (오늘의 알바니아 유고슬라비아 그쪽, 즉 마게도니아 일루리곤까지) 내가 복음을 편만히 전했다. 곧 복음으로 가득채웠다. 또 거기에 ?라는 전치사가 나오지? 예루살렘에서 시작을 해서 빙 둘러서 일루리곤까지 내가 복음을 완전히 전했노라. 그래서 이 지역에 내가 더 이상 일할 곳이 없었다. 전부터 내가 로마를 방문해서 너희들의 도움을 받아가지고 ? 선교여행을 가려고 여러번 계획했었는데 그때마다 길이 막혔었다. 그런데 이제 드디어 갈 수가 있다. 지금 바울이 그렇게 말하고 있어요. 아마 바울이 일루리곤에 당도했을 때 여기서부터 넓이뛰기를 하면 로마에 당도할 정도였어요. 그리고 여기서부터 로마에 갈려고 바울이 했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그동안에 갈라디아인들의 문제, 고린도 교회의 문제, 특히 고린도 교회의 문제가 바울을 몇년동안 요 지역에 잡아둔거란 말이예요. 그런데 이제 드디어 고린도 문제가 다 평정이 되었어요. 고린도 전후서를 통해서 우리가 보는 바와 같이 드디어 고린도의 문제가 다 평정이 되었어요. 그래서 심지어 바울은 사기꾼으로 몰았던 고린도인, 바울이 자기들과 같이 있을 때는 아주 샌님인척 돈에 관해서는 깨끗한척 하면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집에 취직을 해서 공짜로 돈을 번다고 해 놓고서는 에베소에 가서는 자기 똘마니들, 디모데니 디도를 자꾸 보내가지고 예루살렘을 빙자해서 자꾸 돈 내라고 한다고 고린도인들이 그렇게 바울에게 공격을 보내고 자기가 사도직에 결함이 있기 때문에 예루살렘 사도들로부터 안수 받음도 없고 초청장도 없고 그러니까 요새말로 교단의 인정이 없지. 그래서 우리와 같이 있을때는 차마 여러분들이 헌금해 가지고 나를 부양하라는 소리를 못하고는 구로동 공장에 가서 취직해 가지고 밥벌어 먹고 밤에 와서 성경 가르친다고 해 놓고는 아 에베소에 가 가지고는, “자 예루살렘의 성도들을 위해서 헌금을 하자!” 하니까 아가야에서도 하고 마게도니아도 하고 또 갈라디아 교회 아시아 교회도 다 하니까 여러분들도 동참하라는 명목으로 선교헌금 자꾸 거두어 들인다고... 지금 뭐 무슨 소련 선교한다고 자꾸 돈 내라고 하고 거짓말로 아프리카 선교한다고 자꾸 돈내라고 하죠.

그렇게 지금 고린도 교회가 오해를 하고 고린도 교회에 갖가지의 문제가 발생했죠. 그래서 바울이 --우리가 본 바와 같이--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네번, 다섯번 쓰고 자기 스스로 고린도 교회에 갔다가 봉변만 당하고 와서는 화가 나가지고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편지를 쓰고 그것도 안되어서 디도, 디모데를 보내고 난리가 났죠. 이 디도가 돌아오는 줄로 알고 여기까지 마중나갔다가 안 오니까 “아 육로로 오는가 보구나.” 마게도니아에서 아마 빌리보까지 가서 거기서 또 만나가지고 “아 이제 살게 되었구나.” 이래서 바울이 지금까지 몇년동안 2-3년동안 자기의 로마제국의 ?로의 선교여행을 포기하고 이 문제 평정한다고 여기에 머물러 있었어요. 그런데 그 뒤에 평정이 있었어. 그래서 바울을 사기꾼으로 몰았던 고린도 교회까지도, 아가야 교회까지도, 헌금에 기꺼이 동참했어요. 그래서 이제 헌금이 완성 되어서 아가야, 마게도니아, 아시아, 갈라디아 곳곳에서 헌금이 완성이 되었어요. 그래 가지고 각 교회의 대표들로 구성된 큰 헌금단을 조직해 가지고 지금 어디를 가려고 해요? 예루살렘을 가려 해. 가서 헌금을 전달하고 그러면은 이제 로마 제국의 동반구에서의 자기의 선교사업이 완성이 되는 거예요.

그는 이제 “가벼운 마음으로, 기쁜 마음으로 로마를 가겠노라. 그래서 여러분들의 도움을 받아 가지고 서반아로 선교하러 가겠노라.”는 자기의 선교 계획을 발표하지. 로마서 15장. 자 로마제국의 동반구에서의 선교 사역을 완수한 후, 그는 서방에서의 자신의 선교의 한 새로운 국면을 착수하고자 하며 이를 위해 스페인으로 여행하고자 해요. 지원을 확보하고자 해요. 지금 로마 제국의 동반구에서의 선교를 위해서는 어떤 교회가 바울의 후원 교회였어요? 안디옥 교회가 후원교회였어요. 그런데 이제 바울이 자기의 선교지를 로마제국의 서반구로 옮겨감에 있어서 안디옥은 너무 멀어요. 그러니까 아무래도 서울의 큰 교회가 좀 지원을 해야 되겠다 이 말이예요. 그래서 로마 교회를 자기의 후원 교회로 얻으려고 바울이 이 편지를 쓰고 있는 거예요. “지금까지는 안디옥교회가 나를 위해서 물심양면으로 기도해 주고, 헌금해 주고, 후원해 주는데, 이제 로마 교회 당신들이 나를 좀 후원해 주라.”는 편지예요. 그러므로 바울에 의해 설립되지도 않았고 또 그를 개인적으로 알지도 못하는 로마 교회에 자신을 소개한다는 것은 바울에게 있어서 대단히 중대한 일이었다.

자기 자신을 적절히 소개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이방인들을 위한 그의 사도직에 대한 해명뿐만 아니라 그가 전하는 복음에 관하여도 설명해야 했다. 왜냐하면 갈라디아, 고린도 그리고 기타 지역, 예를 들어 빌립보 같은 곳은 바울의 사도직과 그의 복음에 대적하는 도전들이 일어났었죠? 그래서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침투한 거짓 사도들의 복음을 부정하는 그들과, 또 고린도에 침투한 거짓 사도들(그의 사도직을 부인하는 자들)과 또 빌립보서 3장을 보면은 그의 복음에 반대되는 가르침을 하는 자들과 복음의 진리를 위해서 자기의 그리고 사도직의 권위를 위해서 죽기 살기 싸웠다고... 큰 신학적인 논쟁을 벌였죠?

아마 이 논쟁들을 들으면 듣는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거 바울 신학이 좀 문제가 있다고 하던데’ ‘거참 자유주의 신학이라고 하던데’ ‘모세 율법도 필요 없고 뭐, 윤리 그런 것도 필요없고 그저 믿기만 하면 된다고 하는 상당히 자유주의라고 하던데’ ‘거 바울 사도직에 좀 문제가 있다고 하던데?’ 누구나 들으면 바울이 고린도나 갈라디아나 빌립보에서 이렇게 그의 복음과 그의 사도직에 대해서 도전한 자들과 엄청난 논쟁을 벌인 것을 간접적으로 멀리서 들으면 그의 속 사정을 자세히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당연히 그런 의심이 가겠죠? “거 바울 신학이 너무 진보적이고 자유주의라.”고, “뭐 그 사람이 다메섹 도상에서 어떻게 사도가 되었다고 하는데, 자기는 그렇게 주장하는데, 예루살렘 원래 사도들은 인정 않는다지?” 그래서 로마인들에게도 소문이 굉장히 안좋게 났을 가능성이 많아요. 그의 신학, 그의 복음이 의심될 가능성이 많아. 더구나 “그 사람 가는곳 마다 싸움만 열심히 했다고 하던데, 아주 뭐 쌈쟁이라고 하던데, 성격이 아주 고약하고 글러 먹었다.”고 이렇게 소문이 고약하게 났을 가능성이 많다고...

그래서 로마서 내에서 그는 자신이 가르친 복음에 관한, 자신이 전하는 복음에 관한 체계적인 설명을 제시하며, 시종일관 유대인들과 유대파 기독교인들간에 비난을 시키고 이방인들에 대한 자신의 사도직을 해명하면, 그의 장래의 선교 계획을 설명함과 아울러 또한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도 자신의 사도적 권한을 조심스럽게 주장하는 예외적으로 긴 서론과 결론으로써 이를 대신한다. 그러니까 바울이 자기의 복음과 사도직에 대해서 좋지 않은 소문을 들어서 오해를 잔뜩 하고 있음직한 이 로마교회를 바울이 자기 후원 교회로 얻으려니까 자연히 어떻게 해야 돼요? 자기 복음을 체계적으로 설명해야 해.

그것에 도전하는 유대주의나 유대 기독교도들의 주장에 대해서 이 주장을 물리치며 자기 복음의 진리등을 체계적으로 로마 교회에 전달했죠? 또 자기 사도직의(이방인 사도직의) 권위를 주장했다고. 그래서 로마서가 이렇게 체계적인 바울의 편지가 된거란 말이야. 로마서의 또 하나 특징이 뭐야? 예외적으로 긴 서문과 결론, 어느 편지에도 이렇게 긴 서문이 있어? 롬 1:1-15까지의 긴 서문, 그 다음 이 결론 자기의 여행 계획을 길게 밝히는 이 15장의 후반부로... 이러한 로마서의 특징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바울이 자신과 자신의 복음을 소개하고자 하는 필요성 하나만으로서는 로마서의 모든 특성들을 다 설명할 수 없다.

그러니까 로마서를 쓴 직접적인 목적은 금방 드러나지? 그래 뭐라고? 로마 교회에 자신과 자신의 복음을 잘 소개해서 로마 교회를 자기 서방 선교의 후원 교회로 얻으려고 하는 것이 직접적인 목적이라고요. 그런데 그 한 목적 만으로는 로마서의 모든 특징을 다 설명할 수 없어. “다른 목적들이 있지 않나?” 하고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어. 그래서 본 서신의 보다 근본적인 저작 목적에 관련한 토론에 있으며, 이 토론의 중심적인 로마서를 통해서 바울이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몇가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돕기위한 것이었나? 아니면 로마 교회의 특수한 사정과는 별도로 그가 또다른 집필목적을 가지고 있었느냐? issue는 이 토론의 중심문제는 하나의 직접적인 목적은 학자들이 여러가지로 토론하는데 그 토론의 issue는 뭐냐 하면 이거야.

바울이 이 편지를 통해서 로마 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도울려고 했는가? 아니면 로마 교회의 상황과는 관계없이 도리어 자기의 상황과 관계되는 편지를 썼는가?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로마 교회가 갈라디아 교회같이 가령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 유대주의자들 간의 복음에 대한 상이한 이해로 갈등하고 있었느냐? 그래서 바울이 이 복음을 체계적으로 가르쳐서 이들간의 갈등을 해소하려고 노력했느냐? 이것이 로마서를 쓴 목적중의 하나냐? 아니면 로마 교회의 어떤 문제와는 관계없이 이 로마서를 썼느냐? 그게 이제 문제예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학자들 논쟁은 다음과 같은 4가지 factor들, 요소들로 논쟁을 한다고. 그러니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4가지 요소들을 잘 살펴봐야 한다.

첫째로 로마교회의 상황, 둘째 로마교회의 문제들, 세째 로마서의 일반적인 체계적 특성, 네째 마지막으로 29page의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할 당시의 바울의 상황, 이 네가지 요인들을 잘 생각해 보면 우리는 바울이 로마서를 쓴 또 하나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잘 알게 된다고. 자 그럼 그걸 하나씩 검토해 보는데.

첫째 로마교회의 상황. 로마 교회의 기원은 아주 모호하며 --로마 카톨릭 교회의 주장은 사도 베드로가 세웠다고 하지? 그러나 역사적으로는 아주 모호하다고-- 어떻게 발생했는지 잘 몰라요. 누가 세웠으며? 아마 그리스도인들이 로마에 그냥 여행하고 이주해 살면서 자연 발생적으로 생겼을 가능성도 있고 --어떤 사도가 세웠다기 보다는-- 하여간 누가 로마 교회를 세웠는지는 아주 모호하며, 그 교회의 상황에 관한 단서도 거의 없어요. 만약 로마서 16장이 바울이 쓴 로마서 원본의 한 부분이라면, 로마서 16장은 뭘로 가득차 있어요? 인사로 가득차 있죠. 누구 누구에 대한, 그런데 이게 사본학적으로 로마서의 원본에 부착된 편지였느냐, 부분이었느냐에 좀 문제가 있어요. 사본학적으로 로마서가 15장으로 끝나는 사본이 있어요. 즉 16장이 없는 사본이 있어요. 그래서 로마서 16장이 원래 로마서의 편지였느냐? 또하나 내용적으로 바울이 한번도 가보지 않은 교회에 왜 아는 사람이 그렇게 많아.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 로마서 16장은 바울이 로마서에 부친 인사장이 아니고 아마 에베소에 보낸 편지에 덧붙인 인사장일 거라고 해요. 아마 로마서 16장에 기록된 사람들은 다 에베소에 있는 바울의 친구들일 거라고 보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래서 로마서 16장이 로마서의 원본의 일부냐? 아니냐 하는 그 자체가 하나의 논란 거리예요.

만약에 16장이 바울의 로마서의 원본의 일부라면, 우리는 로마 교회가 어떤 사람들로 구성되었으며 어떤 상황에 놓여 있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어요. 그 16장으로 부터. 이 16장은 로마의 기독교 공동체가 아마 서로 다른 인종적, 지방적 배경을 가진 매우 다양한 가정 교회들로 구성된 복합적 모임이었음을 보여줘요. 이것 외에는 로마의 기독교 공동체의 특성이나 당시 사회 상황에 관해서 우리는 아무 것도 알 수 없어요. 이런 상황속에서 어떤 학자들은 (?) 같은 학자는 주후 1C 여간에 로마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에 관한 몇가지 단편적 정보로 부터 로마 교회의 상황을 추론해 내려고 노력해 왔어요.

몇몇 문헌적인 그리고 고고학적인 행적은 로마의 유대인 사회가 아주 잡다한 성격을, 아주 복잡한 다양한 성격을 지녔고, 많은 다양한 회당들이 공존하였으며, 그러니까 팔레스티나에서 최근에 이주해와 회당을 이룬 히브리인들의 회당도 있었고, 헬라말을 쓰는 헬라파 유대인들의 회당도 있었고, 헬라파 유대인들의 회당도 또 고린도에서 이주한 사람들, 아시아에서 이주한 사람들 각 지역마다 따로따로 회당을 이루는 다양한 공동체였어요. 이것들은 서로 다른 언어적, 문화적, 사회적, 신학적, 집단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었음을 암시해 준다. ?과 쟌브레인은 이것이 이렇게 다양한 유대 공동체가 공존한 것이 로마의 제4대 황제 클라디오가 칙령을 발포해서 로마로부터 유대인들을 추방한 칙령의 배경이었다고 생각해요.

이 클라우디오의 전기를 쓴 로마의 역사가에 의하면 황제 클라우디오가 어떤 크레토스(?) 때문에 (?)크레토스의 선동에 의해서 소요를 계속했던 유대인들을 로마로 부터 추방했다고 그래요. 근데 이 크레토스는 ‘유용한자’란 뜻이죠. 그래서 당시 노예들이 많이 가지고 있던 이름이예요. 노예들은 ‘크리스도스’라고 많이 붙였다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노예가 유대인들간에, 로마의 유대인들간에 선동을 해서 유대인들간에 싸움이 벌어졌다고 해요. 그래서 로마의 치안이 어지러워지니까 이 클라우디오가 유대인들을 저 로마 밖으로 몰아내는 칙령을 발표했다는 거야. 요새 학자들은 거의 가 이 크리스토스가 주는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한다는 거야. 그리스도 때문에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하냐 안하냐 이 문제 때문에 로마의 유대 공동체에서 일대 싸움이 벌어졌다고 해요. 그런데 이 ? 같은 이방인에게는 그리스도 같은 이런 이름이 있을 수 없다는 거예요. 이것은 헬라말로 그리스도에서 온 말인데 “기름붓다. 기름 부음을 받은 자”란 말이예요. 그래서 히브리어의 메시야의 직역이야. 문자 그대로 번역해봐요.

그래서 구약적인 하나님께서 그의 일군으로 내세우기 위한 하나의 의식으로 기름붓는 그런 종교사적 배경이 없는 그런 배경을 모르는 헬라인들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어요. 그래서 플래토니우스가 크레스토스를 아마 이말이 요말이겠지? 이것은 당시 노예들이 많이 가지고 있는 이름이라고 바로 이 말이겠지 하고 이렇게 쓴거라? 이 뭐펠이나(?) 브레인은(?), 두 가지 사실을 연결시켜 놓았지? 하나는 일세기의 로마의 유대공동체가 아주 다양한 언어적, 신학적, 지방적, 사회적 계층들로 구분되어서 공존하고 있었다. 하나의 공동체가 아니고 서로 다른 공동체, 서로 다르면 뭐가 일어나겠어요? 마찰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어요? 마찰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어요. 그런 그 공동체로 존재했다는 사실 하나.

둘째 사실, 클라우오디오스가 유대인들을 로마로부터 다 추방했다는 사실. 이 두 사실을 지금 연결해서 로마의 교회가 어떤 상황에 있겠나를 지금 추론하려고 해요. 대개는 플래토니우스가 크레스토스를 크리스티아니(?) 교파의 창시자 크리스토스를 지칭한 것으로 잘못 기록한 것으로 간주해요. 이 칙령의 발효시기를 기독교 유대인은 아굴라와 브리스길라가 로마를 떠나 고린도로 갔을 때를 미루어보아 학자들은 대략 주후 49년으로 추정해요. 행 18장에 보면은 바울이 어떻게 이 고린도 교회를 개척해요? 고린도에서 누구를 만나? 로마에서 온 유대 그리스도인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만나지. 그들이 마침 천막업을 하기 때문에 바울이 거기에 동업자로 들어가요.

그런데 브리스길라, 아굴라가 왜 로마에서 고린도로 옮겨 왔느냐? 아마 그 클라우디오의 칙령, 유대인들을 다 몰아내는 칙령 때문에 이들이 짜가지고 고린도로 이주해 오지않았느냐? 그러면 이 칙령이 주후 49년 쯤에 반포되었을 것으로 본단 말이예요. 분명히 클라우디오의 제위 기간중에 로마의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관한 매우 심각한 논쟁이 있었고 당시 여러 회당들은 이에 대해서 서로 다른 입장들을 취했었던 것 같다.

크라우디오의 제위기간 동안에 로마인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관한 매우 심각한 논쟁이 있었고 당시 여러 회당들은 이에 대해서 서로 다른 입장을 취했었던 것 같다. 그 논쟁은 너무나도 심각해져 가지고 급기야는 사회 평화를 위협할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며 그리하여 클라우디오는 유대인들을 로마에서 내어 쫓아 버렸어요. 이렇게 해서 추방된 유대인들 중에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같은 유대파 그리스도인들도 있었다. 주후 54년 네로가 5대 황제로 즉위하고서야 비로소 그 추방령이 폐지되고 유대인들은 로마로의 귀환이 허용되었다. 로마로 돌아온 유대파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로마를 떠나 있는 동안 이방인들의 유력한 세력으로 성장해 버린 기독교 공동체 내에서 이제는 자신들이 소수가 되어버린 것이 틀림없다고 주장했어요.

원래 로마 교회는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다수였으나 클라우디오의 칙령에 의해서 유대인들이 로마에서 쫓겨났다가 7-8년후에 다시 로마로 돌아와 보니 그곳의 교회에 그동안 누가 다수가 되었어? 이방 그리스도인들이 다수가 되었단 말이야. 게다가 그들은 로마 사회의 극심한 반 유대주의 감정에 직면하게 되었다. 뭐펠(?)에 의하면 이들 유대파 기독교인들이야 말로 롬 14:1-15:13에 등장하는 약한 자이며, 따라서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한 목적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의 목전에서 유대파 그리스도인들의 지위를 향상시키고 다수 이방 그리스도인들이 유대파 그리스도인과 한 교회 안에서 함께 하도록 도와주며 그리고 기독교에 반대하는 대다수 유대인들에게까지 복음을 전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주장에 문제가 있어요. 그 문제가 뭐야? 그러나 롬 14:1-15:13절에 나오는 바울의 권면을 구체성을 결여하고 좀 일방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어요. 가령 고린도 교회에서 약한 자, 강한 자에게 주는 가르침과는 성격이 좀 달라. 비슷한 내용이면서도 고린도 교회에 대해서는 아주 구체적이라고... 로마서에서는 아주 일반적이고 원칙적인데 그런 것들을 고려하고, 이 로마서의 약한 자들과 유대파 그리스도인들을 동일시 하기에는 여러 어려움이 있음을 감안하는데 어려움이 있어.

그런데 로마서의 약한 자들은 채식주의자로 나타나 있어. 유대인들은 채식주의를 한 일이 없어요. 그래서 문제가 있다고. 로마서의 약한 자들은 정말 유대 그리스도인이었나? 뮈펠은 그게 유대 그리스도인들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랬을 것 같지가 않다 이말이예요. 그래서 이렇게 약한 자들과 유대파 그리스도인들을 동일시 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고. 이런 것들을 감안한 쟌 레인(?)은 이 리펠(?)이 주장한 것 같은 의견을 약간 수정해 가지고 이렇게 주장해요. 자신들의 다양한 회당적 배경에서 연유하는 유대 기독교인들 내부의 상이점들과 이제 주류가 되어버린 이방 기독교인들과 마찰등이 여러 가정 교회들과 기독 교회의 분열을 조장했다. 그 사실에서 큰 의미를 부여해서 쟌레인(?)은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한 목적이 다양한 그리스도인 분파들을 하나로 묶기 위함이었다. 뭐펠(?)은 그냥 이방 그리스도인들과 유대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로 묶기 위한 것이었다고 했는데 그건 너무 단순한거고,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또 유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다양한 분파가 있었던 모양이다.

우리가 잘 알지는 못하지만 우리가 아는 유대인들은 채식주의자는 아니었는데 혹 다양한 유대 분파중 일부 유대 분파는 채식주의자 였는지도 모른다. 다양한 유대 그리스도인들간의 갈등, 그들과 이방인들과의 갈등, 이 갈등 구조를 좀 복잡하게 생각해야지 단순히 유대 그리스도인들 대 이방 그리스도인들로 생각하면 안된다. 이런 식으로 쟌레일?은 말한다고... 여기서 뭐펠?과 쟌브레인은 로마서를 쓴 목적을 무엇으로 결정하려고 해? 로마교회의 상황에 의거해서... 그렇다면 바울이 로마서를 왜 썼다고? 로마교회의 유대 그리스도인들과 이방 그리스도인들 또는 다양한 분파의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복음을 옳게 이해하고 또 옳은 복음 위에서 서로를 관용하고 하나로 묶기 위해서였다고.

둘째로, 로마 교회의 문제들, 지금 이야기한 로마 교회의 상황들 보다 좀더 구체적으로, 로마 교회의 문제들이 뭐였느냐? 그것과 로마서를 조금 더 직접적으로 대입시킬 수는 없느냐? 비록 40년대와 50년대에 로마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의 상황이 로마의 기독교 공동체의 상황에 영향을 미친 것은 틀림없더라도 그것으로 부터 로마서의 목적에 관해 뮈펠과 브레인이 이끌어내는 추론은 로마서에서 정말 바울이 유대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을 연합시키려 하거나 또는 다양한 유대 가정 교회들을 연합시키려 하고 있다는 사실이 주석적으로 증명되기까지는 여전히 추측으로만 남을 뿐이다. 로마서 자체에서 주석적으로 바울이 로마교회의 문제들을 해결하느냐 않느냐를 실제로 ?로 바꾸어 선구자적 저술 이후 상당수의 많은 학자들이 로마서에 나오는 바울의 다양한 논증들이 유대파와 이방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근본적인 문제들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왔다. 율법의 행위들에 의해 구원 얻는다는 유대인들의 교리에 대항하는 바울의 논쟁에 호소하여 어떤 학자들은 바울이 유대주의자들과의 투쟁을 위해서 혹은 유대파 그리스도인들의 신학을 바로 잡아 주기 위해서 로마서를 기록했다고 믿는다.

로마서를 왜 썼다고? 이 사람들에 의하면? 유대주의자들의 율법주의에 대항해서 올바른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 썼다. 반 율법 주의적인 결론을 끌어내는 것에 대항하는 바울의 논쟁에 근거해서, 또 아직도 유효한 유대인들의 구원사적인 특권들에 대한 바울의 주장에 근거해서, 그리고 이방 기독교인들의 교만에 대한 그의 경고에 의거해서, 또 다른 학자들은 로마서에서 바울이 이방 그리스도인들의 오류를 조정하거나 그들의 반 율법주의에 대항하여 투쟁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생각한다. 이건 전혀 상반된 견해죠? 일단의 학자들은 뭐라고? 아 바울이 은혜로만 믿음으로만 의인된다는 복음을 로마서에서 체계적으로 펼치지... 그것에 근거해서 뭐라고 주장해요? “아 유대주의자들을 교정하기 위해서 바울이 이 편지를 썼나보다.” 갈라디아서와 비슷한 목적이 있네요? 반면에 다른 학자들은 이 로마서에 또 뭐가 있어? 바울의 복음을 방탕주의로 해석하고, 야 은혜로 구원 받으니 죄를 더 짓자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로마서 6장에, 또 로마서 9장-11장까지 보면 육신적인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완전히 떨어져나간 존재가 아니고 그들이 결국 구원 받는다는 것을 펼치지. 또 이방인들이 교만해진 것을 경고하지. 이런 것을 볼 때 “아 바울이 이 교만해지는 이방인들 반율법주의로 나가는 이방인들을 교정하기 위해서 썼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단 말이예요.

14:1-15:13에 있는 강한 자와 약한 자들에 대한 바울의 권면과 아울러 양자의 특성을 취급하여 또 어떤 학자들이 바울이 복음을 위해서 유대파 또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로 연합시키려 한다고 주장해요. 사실 예일 대학 교수였던 리니?는 로마서 14:1-15:13까지에서 강한 자와 연약한 자의 다양한 fator를 지닌 서로 다른 다섯개의 집단을 발견할 수 있다고 보고 강한 자, 조금 덜 강한 자, 중간적인 존재, 덜 약한 자, 아주 약한 자 이렇게 다섯 종류의 그룹이 로마에 있었대. 그래서 로마서 전부를 이런 집단들의 문제를 해결해서 그들을 연합시키기 위한 시도로 설명하는데까지 나아갔다.

그러니까 지금 여기 세가지 견해를 이야기 했어요. 하나는 바울이 율법주의자들을 대항해서 그들을 교정하기 위해서 로마서를 썼다는 설, 이건 F.B.바우어에서 나온 설이지. 둘째로는 반 율법주의자들에 대항해서 이방 그리스도인들을 교정하기 위해서 썼다는 설, 셋째는 약한 자와 강한 자, 유대 그리스도인들과 이방 그리스도인들을 화합하기 위해서 썼다는 설인데 그것에 좀 지나친 대표자가 리니어예요. 약한 자, 강한 자가 두 그룹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다섯 그룹이나 있었다는 거예요. 자 오늘은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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