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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인 명설교편◑/이정익목사 명설교(385편)

확신과 의심의 전염성

by 【고동엽】 2022. 10. 23.

확신과 의심의 전염성

 

 

 

 

 

 

 

 

                                    20:24-29

 

 

 

 

 

 

 

 

                  열두 제자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

 

 

 

                  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면 내 손 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지난 주간은 부활주일이었습니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는 중심도 없고 생명도 없고 내용도 없어집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참 우여곡절 끝에 이루어졌습니다. 이 부활의 전후과정에서 발생된 일들이 참 많습니다. 그중 제자들이 가장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습니다. 부활이 있기 전후과정에서 발생된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줍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그 모습을 보면서 배울 것도 참 많습니다. 배우는 것은 꼭 성공의 모습에서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실패의 모습에서도 많은 것을 배우게 됩니다.

 

 

 

우선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과 부활사건이 일어나는 과정에서 제자들은 별명 하나씩을 얻었습니다. 베드로는 “겁쟁이”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베드로는 여러 번 호언장담하는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장담을 한 번도 감당하지 못하고 자주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여러 번 실망시켰습니다.  언제나 말이 앞서는 사람은 베드로처럼 실수하기가 쉽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 고난 받고 부활하시기까지 그 과정에서 스타일을 구겼습니다.

 

 

 

또 가룟 유다는 “배반자”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유다는 그의 이름에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겼습니다. 그 오명을 씻을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아마도 이 세상 종말 때 까지 가룟유다라는 이름은 배반자로 불릴 것입니다. 마가는 “도망자”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홑이불을 쓰고 예수님 뒤를 좇아가다가 누군가가 붙잡으니까 겁이 나서 몸을 두르고 있던 홑이불을 벗어 던지고 알몸으로 도망가 버렸습니다. 그 모습을 생각만 해도 웃음이 나옵니다. 마가는 두고두고 그때를 생각하면 얼굴이 붉혀지고 부끄러웠을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또 한사람의 제자가 나옵니다. 그 이름이 도마입니다. 이 도마는 “의심 많은 자“라는 별명이 붙었습니다. 도마가 자리에 없는 사이 부활하신 예수께서 다녀가셨습니다.  나중에 제자들이 “너 없는 사이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다녀가셨다“고 말했을 때 도마는 서운해 한 것이 아니고 기다렸다는 듯이 “나는 그 옆구리 창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보지 않고는 믿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냥 “그랬느냐”라고 하든지 “너희들이 잘못 본 것 아니냐”고 말하든지 아니면 “왜 내가 없는 사이에 다녀가셨느냐”고 아쉬워하든지 해도 뜻이 전달된 것인데 “내가 직접 창자국과 못자국에 내 이 손가락을 넣어보지 않고는 믿을 수 없다” 고 말했습니다.

 

 

 

의심은 있을 수 있습니다, 불신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반대도 있을 수 있고 이유도 붙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도마의 불신은 너무 지나칩니다. 믿지 못하겠다고 말을 해도 될 것인데 이렇게 철두철미하게 부정할 것이 무엇입니까.  그래서 “도마”라는 이름이 불신앙의 상징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름도 잘 지어야 합니다. 원래 도마의 이름은 “디두모”였습니다. 그 말은 “이중적“이라는 뜻입니다.  도마는 이중적인 사람입니다. 나중에 8일 만에 또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도마에게 “네 손가락으로 이 창자국에 넣어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도마에게 한마디 하셨습니다. “믿음이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그 순간 얼마나 송구하고 부끄러웠겠습니까. 그때 도마가 그렇게 대답했습니다. “주님! 주님은 나의 주님이시고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또 한마디를 했습니다.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더 복되도다”  

 

 

 

 

이렇게 보면 제자들은 참 어설프고 미숙하고 무지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미숙하면 신중하기라도 했어야 하는데 베드로는 수제자라고 하면서도 경박하기까지 했습니다. 가룟유다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저속했습니다. 마가는 너무나 철없는 행동을 했습니다. 도마는 너무 분별없는 행동을 했습니다. 그래서 모두 씻을 수 없는 실수를 했습니다. 여기서 몇 가지 교훈을 받습니다.

 

 

 

 

 

 

 

 

하나는 “때로 이런 실수, 실패도 다 나쁜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때로 실수나 실패는 상당히 좋은 결과를 주기도 합니다. 베드로는 그때 수제자답지 않게 덤벙대고 실수하는 그 실수 때문에 후에 속죄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사역에 임했습니다. 그는 평생 죄송한 마음으로 살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 뒤로 열심히 일하고 속죄하는 마음으로 살았을 것입니다. 한번 집회에서 3천명이 회개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앉은뱅이를 일어나게 했습니다. 많은 무리를 주께로 돌아오게 했습니다. 그리고 죽을 때는 십자가를 거꾸로 지고 죽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는 그 실수 때문에 더 노력하고 힘써서 그 실수를 만회하려고 누구보다 애를 많이 썼습니다. 그 결과 베드로는 마침내 성숙한 수제자로서의 역할을 다 해 냈습니다. 하나님은 합동해서 유익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가룟 유다는 그 죄와 실수를 어떻게 회복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유다도 실수한 후에 상당히 고민하며 생각을 많이 했을 것입니다. 그러다 방법이 없으니까 스스로 목을 매서 죽음으로 속죄하려 했을 것입니다. 그는 죽음으로서 그 죄와 실수를 속죄하려 했을 것입니다. 자살은 좋은 방법이 아니지만 자신의 실수와 죄를 책임지려 했다는 점은 평가할 만합니다. 그리고 마가는 그 홑이불 사건 이후에 고민을 많이 했을 것입니다. 자신의 졸렬한 행동을 만회할 방법을 찾아보았을 것입니다.

 

 

 

 

그때만 생각하면 죽을 지경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후에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선교여행을 떠났고 후에는 좋은 제자가 되어 마가복음을 기록하는 공적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도마도 “내 손가락을 못자국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을 수 없다”고 아주 모질게 의심  한 그 실수 때문에 상당기간 고민했을 것입니다. 그는 너무 모질게 부정을 했습니다. 그 후 나타나신 예수께서 “너는 보고야 믿느냐”는 말씀 한마디에 그는 부끄럽고 송구해서 도망가고 싶었을 것입니다. 숨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모질게 다시 안볼 것처럼 행동하면 안 됩니다. 다시 먹지 않겠다고 침 뱉고 떠난 우물을 다시 와서 마시게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도마도 자신의 실수를 만회할 방법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전승에 의하면 도마는 인도에 가서 전도를 하다가 순교를 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인도는 힌두교권인데도 기독교인들이 참 많습니다. 그때 도마가 전도한 것 때문이라고 합니다. 실수나 실패가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합동해서 유익하게 하십니다.

 

 

 

 

 

 

 

 

또 “확신과 의심은 둘 다 전염성이 강하다는 것”입니다.

 

 

 

 

 

 

 

 

확신 있는 행동은 보는 사람들에게 상당한 긍정적 효과를 줍니다. 한 사람의 확신 있는 삶의 태도는 때로 많은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기도 합니다. 그리고 자신감을 주고 희망을 갖게하고 죽어가는 사람도 살려냅니다. 그래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확신 있게 살아가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나 한사람의 확신 있는 삶의 모습은 알게 모르게 많은 사람들의 삶에 희망을 주고 감동을 주고 생각하게 하는 효과를 주게 됩니다. 확신은 그만큼 중요하게 긍정적으로 전염시킵니다.

 

 

 

 

슈바이처가 아프리카에 가서 병원을 경영합니다. 그 병원에 어느 병자가 중병으로 입원을 합니다. 이 환자가 어느 날 병실 창문너머로 밖에 있는 밭에서 무엇인가 일하는 노인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노인은 열심히 밭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병자의 눈에 비친 그 노인의 모습은 아주 진지하고 거룩할 정도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병자는 그 노인이 누굴까, 저 노인은 누구이기에 저렇게 모습에서 진실함과 거룩함 까지 나타나는가 하고 생각하다가 자세히 보니 그분은 자신이 입원해 있는 병원의 원장 슈바이처이었습니다.  

 

 

 

그 순간 이 병자는 “저 분이라면 내 몸을 맡겨도 고칠 수 있을 것 같다”는 믿음과 신뢰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그 병자는 마침내 그 중병을 고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확신 있고 믿음이 분명한 태도를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게 되면 그 모습을 바라보는 많은 사람들에게 아주 긍정적인 암시를 주게 되고 영향을 끼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그리스도인의 역할은 바로 그 시대를 그런 모습을 살아가는 일입니다. 그것이 그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역할이고 사명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의심이나 불신도 전염성이 강합니다. 이 의심이나 불신은 때로 사람들을 죽일 수도 있고 건실하던 사람을 망가지게도 할 수도 있고 희망을 빼앗을 수도 있습니다. 이 확신과 불신은 둘 다 전염성이 강하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세는 가나안이 가까워올 때 각 지파별로 한명씩 소집하여 12명의 정탐꾼을 가나안에 들여보내 정탐하게 합니다.  12명이 적지를 들어가 비밀리에 정탐을 하고 돌아와 각각 보고를 했습니다.  12명의 정탐꾼 중에 10명은 낙심천만한 보고를 했습니다. “그 땅 사람들은 키가 크고 장대하고 그 땅은 듣던 것과는 다르게 젓도 꿀도 없는 험악하고 삭막한 땅인지라 우리가 살아가기엔 부적합하더라”고 보고 했습니다.

 

 

 

그 보고는 전혀 희망이 없는 낙심천만한 부정적인 보고였습니다. 지금까지 가나안만 목표삼고 그곳에 가기만 하면 모든 고난이 끝나는 줄 알고 고대하며 여기까지 걸어온 백성들은 순간 낙심하고 통곡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손에 돌을 들고 모세를 치려했습니다. 그러면서 백성들은 모두 울부짖었습니다. “누가 우리를 애굽에서 끌고 나오라 했느냐, 누가 우리를 이곳으로 끌어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라고 하더냐”하고 울부짖었습니다. 그때 누구보다도 낙심한 것은 모세였습니다. 그래서 모세도 하나님께 “왜 나에게 이런 시련주십니까“하고 울부짖었습니다. 불신은 이렇게 파급효과가 큽니다.

 

 

 

그때 나머지 두 명이 앞에 나섰습니다. 그리고 외쳤습니다. “아니다, 그 땅은 기름지고 넓고 아름다운 땅이다, 이 포도를 보라, 그 땅이 기름지다는 것은 이것을 보면 알 수 있지 않느냐. 그리고 그 땅 사람들은 키가 크지만 우리의 밥이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지 않느냐, 우리는 할 수 있다, 그 땅을 점령할 수 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느냐“고 확신 있게 나서서 강조했습니다.

 

 

 

 

그때 눈물을 흘리던 사람들이 비로소 용기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희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문제가 수습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날 모임은 가까스로 진정되게 되었습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하나님은 모세는 물론이고 그 10명의 보고자들도 물론이고 그날 불평하며 눈물을 흘렸던 모든 사람들을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그 광야에서 죽게 하셨습니다. 그런 불신, 불평, 병든 정신을 가지고는 가나안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희망적인 보고를 한 믿음의 사람 두 사람만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신앙의 세계에 살려면 먼저 이 희망의 눈을 가져야 합니다. 희망의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희망의 언어를 사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저 산 너머에 있는 넓은 가나안을 바라보는 안목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영적인 약속을 믿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가나안은 그런 희망과 소망과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이 없으면 들어갈 수가 없는 땅입니다. 이것은 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천국도 그런 믿음과 희망과 안목과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이 없이는 들어갈 수 없는 곳입니다.

 

 

 

도마는 제자로서의 자세가 건강하지 못했습니다. 도마는 아주 불신의 사람이었고 의심의 사람이었고 정신이 불건전한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이 부활해서 다녀가셨다고 하면 그 시간에 자리를 비운 자신을 탓하고 아쉬워해야지 그 못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보지 않고는 믿을 수 없다고 철두철미 부정을 하면 그것이 무슨 제자입니까. 불신도 불신 나름입니다. 불신도 도마처럼 이렇게 불신하면 안 됩니다. 이것은 제자의 자격도 없는 것입니다. 확신과 불신은 둘 다 이렇게 전염성이 강합니다. 여러분의 신앙은 어떻습니까. 여기 도마를 통해서 우리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신앙은 뒤를 보면서 이해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 한결같이 미숙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하고 실패를 하고 시행착오를 거쳐 갑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런 제자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미화하거나 가감 없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런 실패들을 통해서 결국 그들은 성숙해졌고 발전해 갔고 깊은 신앙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본문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메시지입니다.

 

 

 

베드로는 숫한 실수를 거듭합니다. 그 때에는 내가 왜 이럴까 하고 수없이 되물었을 것입니다. 그러다 결국 베드로는 그 실패들을 통해서 신중하고 깊이 있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마침내 예수 사후 아주 열정적으로 전도하는 수제자가 됩니다. 마가도 마찬가지 입니다. 마가도 그날 그런 어이없는 실수를 하는 바람에 평생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기게 되었지만 그 후 그는 자신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서 열정적인 전도자가 되었고 그 실수를 자신이 기록한 마가복음에 그대로 기록해서 자신의 용렬함을 스스로 고백하고 고발하는 자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도마도 마찬가지입니다. 도마도 베드로 못지않은 실수를 했습니다. 도마는 예수님의 부활을 그냥 부정한 것도 아니고 “내 이 손가락으로 못자국 상처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을 수 없다”고 아주 철두철미 부정하는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오셔서 네 손가락으로 이 상처에 직접 넣어보라고 했을 때 간장이 녹아드는 부끄러움을 느꼈을 것입니다. 여러분, 무슨 말을 할 때 이렇게 까지 철두철미하게 부정하며 말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 도마의 행동은 예수님께 보통의 실수가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도마는 결국 그 실수를 통해서 신실한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서 스스로 아무도 가지 않는 인도 땅으로 가서 선교하다 거리에서 사람들에게 칼을 맞고 온 몸이 찢겨지고 밟혀죽는 순교를 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신앙은 앞을 보면서 키우고 뒤를 보면서 이해하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지난날을 되돌아보면 숫한 시행착오가 있었던 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날을 되돌아보면 참 부끄러운 일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그런 시행착오를 거쳤기 때문에 오늘 우리의 모습이 만들어진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난다음 뒤를 돌아보니 나의 삶 순간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셨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신앙은 그렇게 해서 성장하고 이루어지고 커져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도 도마도 미약한 다른 제자들도 모두 그 후 성장했고 성숙한 제자들이 되어 주님 사후 그들은 할 일을 다 하는 제자들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의 신앙인 날로 성숙해져서 할 일을 다 하고 주님의 충실한 제자로 살아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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