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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서신 제 4 강

by 【고동엽】 2022. 10. 23.

바울서신 제 4 강

 

김세윤 교수

 

갈라디아서 3

 

   개혁신학교 1991년 2학기 강의 녹취록  - 송영찬 제공

 

 

1. 갈라디아서와 다른 서신들과의 관계

지난번에 어디까지 했어요? 갈라디아서와 살전, 살후의 전제에 까지 했다! 아! 그러니까 갈라디아서와 살전과의 관계속에서 갈라디아서는 데살로니가전서와 비교해 볼때 두 가지 문제가 있는데, 하나는 종말론이고 살전, 살후는 종말이 임박한 것으로 바울이 가르쳤기 때문에, 이 데살로니가 교회가 예수의 재림이 내일, 모레인줄 알고 그렇다면 뭐 일할 것도 없고 지금의 현 상태를 유지하면서 아무 일도 하지 말고 다만 예수가 오는 것을 기다리기만 한단 말이야. 그것들을 이제 바울이 교정을 해요. 아! 그런데 그런 context에서 “이제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 사람들이 인용하는 말도 나오는 거라구. 종말이 내일, 모레 이라면 일할 필요가 뭐가 있어? 그냥 가만히 있는 거지. 그래서 그런 임박한 종말의 열기로 가득찬 교회에 종말론을 조정한다.

그런데 왜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그런 열기를, 임박한 종말론의 열기를 가지게 되었느냐? 바울이 선교 초기에 데살로니가에서 종말의 임박성을 가르쳤지 않겠느냐? 그런데 바울의 편지 자체에서 보면은 고전 15장과 고후 5장을 분수령으로 해서 이때까지는 바울이 자신의 생전에 예수의 재림을 맞이할 것으로 풀이 하는데, 이때부터는 바울이 예수의 재림전에 자기의 죽음을 생각하는 고전 15장이라든지 빌립보서라든지 있는데, 그렇다면은 갈라디아서에서의 종말론을 보자.

갈라디아서에는 임박한 파루시아에 대한 강조가 별로 없단 말이야. 종말론에 대한 강조가 별로 없어요. 그러면은 분명히 갈라디아서는 요런 종말론적인 구조에서 이후 아니겠느냐! 이후에 연대를 잡아야 할 게 아니겠느냐? 이런 식의 논리예요.

그래서 이때 여러분에게 문제는 두 가지지. 처음에 초대교회에서는 종말론, 임박한 종말론의 열기로 가득찼다가 그 재림이 늦어지므로 점차 예수의 재림에 대한 기대가 식어가고 점차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구원의 사람들이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일반적인 초대교회의 神學의 전개과정, 종말론의 전개 과정이 항상 옳은거냐? 대개 다수 의견은 그렇게 전개되었다고 보는데, 꼭 그게 옳은게 아닐 수도 있다 그말이야.

가령 C.H. Dodd 같은 사람은 무엇이라고 말하느냐 하면, 예수의 종말론은 원래 실현된 종말론에 강조점이 있었는데, 그 파루시아가 금방 이루어지지 않으므로 점차 初代敎會에서 기독교 kerygma를 소위 유대 묵시 문학화 해 가지고 가령 요한계시록 같은 현상이 일어난다. 요한계시록 같이 기독교 종말론을 완전히 유대 묵시문학化한 그런게 일어난다. 이 요한계시록은 분명히 좀 늦은 문서란 말이야. 그렇다면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대로 처음에는 예수의 재림의 임박성에 대한 열기로 가득 찼다가 점점 이게 희미해 졌다는 그런 전개의 구조는 옳지 않을 수도 있다.

또 하나 보는 것은 이런 이른바 후기 편지서들 로마서나 이런 편지들에도 다 예수의 재림에 대한, 그런데 그 재림의 임박함에 대한 기대가 다 있어요. 로마서 13, 12-13장 같은데에, 빌립보서에도 있고 고후 13장에도 Maranata, 주여 오소서, 하는 기도가 있고, 그래서 이런 이른바 후기 문서들에도 예수의 재림에 대한 기대가 전혀 없는게 아니라 그래서 바울 편지 전체에 이 ‘벌써’와 ‘아직’의 aleady, but not yet의 아주 신약적인 종말론적 틀이 다 있다. “aleady-but not yet.” 모든 편지에 다 있다. 그러나 그때 그때 편지 상황에 따라 어느 것이 더 강조되느냐에 차이뿐이지 종말론에 데살로니가 교회의 종말론과 갈라디아 교회의, 갈라디아서의 종말론을 가지고 이 편지를 갈라디아서의 연대 잡는 것은 옳지 않다는 그런 주장이지.

또 하나의 issue는 무엇이냐 하면 이 칭의론(Justification)의 story가 대조가 되요. 살전, 살후에서는 이 story가 별로 강조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예요. 아! 그리고 살전, 살후, 그리고 고전, 고후에는 이 가르침이 분명히 전개되어 있지 않아요. 그렇다면은 어떤 가설을 가능케 하느냐 하면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서에 유대 주의자들과 싸우는 과정에서 비로소 이 교리를 발전시켰을 것이다.  그렇다면은 일단 연대 잡는데 있어서 갈라디아서는 살전, 살후, 고전, 고후보다 뒤에 쓰여진 걸로 봐야 될 것이며, 그보다 더 중요한 issue는 A. Schweitzer가 주장했던 대로 宗敎改革者들이 바울 神學의 중심으로 봤던, 이 Protestant 神學에서 바울 神學에 중심으로 봤던 이 칭의론의 구원론은 바울의 복음의 本質에 속한게 아니고, 이 유대주의 자들과 싸우기 위해서 임시적으로 개발시킨 하나의 論爭수단(kampflehre), 이 싸우기 교리, 싸우기 위한 교리 논쟁 수단에 불과하다. 그래서 A. Schweitzer는 그의 유명한 책 「바울의 神秘主義」 “The mestery the Paul" 이라는 책에서 바울의 엣날 19C에 宗敎史學파들 부터 관찰했던 문제, 곧 바울의 구원론에 두 가지 체계가 있다.

두 가지 전혀 서로 통합될 수 없는 체계가 있다.

①하나는 神秘主義적 체계라 하기도 하고, 또는 聖禮主義적 체계라고도 해요. Secramentalistic System이라고도 해. 이게 무엇이냐 하면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한다는 의미,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해서 그와 함께 죽고, 옛 사람에 죽고, 새 사람으로 부활해서 그리스도 안에 있음(  ) 그리하여,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리스도의 운명에 동참해서 옛 죄인이 죽고 새 사람으로 부활하여 구원을 얻는 자는 이 그리스도와 연합하시사, 그런데 어떻게 체험하느냐? 洗禮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聖晩餐을 통해서 지탱이 된다는 그리스도와 연합함을 섬긴다는 이런 구원론의 체계와 ②또 하나는 이 法的체계(juridical system) 곧 칭의 사상,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無罪선언됨(Justification). 義人이라 선언됨이 바울의 구원론의 두 체계가 있는데 이게 서로 통합될 수 없다고 19C  宗敎史學파들이 계속 관찰해 왔어요.

그래서 종교사학파들은 바울의 이 神秘주의적, 聖禮주의적 구원론의 체계는 아마 헬라 思想에서 왔을 것이다. 헬라의 神秘宗敎의 영향으로 거기서 얻은 Category로 그리스도의 구원을 설명하게 해서 바울이 발달시켰을 거다. 이 법적 체계는 유대교적 영향으로 바울이 발달시켰을 거다. 이런 식으로 종교사학적으로 하나는 헬라 宗敎의 영향, 하나는 유대敎 精神의 영향으로 바울 일은 전혀 별개의 서로 통합되지 않은 구원론의 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봤다구. 그런데 Schweitzer 주장은 이 두 체계가 있는데 이 체계도 헬라 사상에서 온게 아니고 유대 묵시 사상에서 왔다는 것이 첫째 Schweitzer의 나보다 먼저 앞서간 종교 사학파들과 다른 관점으로,

둘째로 Schweitzer의 관점은 이제 이런건 W. Wrede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지, Wrede의 영향을 받아서 이게 바울의 중심 구원론 체계도 여기 요것은 바울의 부차적인 구원론의 체계로서 갈라디아서의 유대주의자들의 도전에 응해서 그들과 하나의 논쟁 수단으로 비로소 발달한 거다(법적 체계). 그래서 무엇이라고 표현했느냐 하면 신비주의적 체계는 바울의 구원론의 주 분화구이고, 화산이 폭발할 때 분화구, 바울의 구원론을 표현하는 분화구이고, 법적 체계는 그때에 같이 곁산도 폭발하는 이 부차적 분화구에 불과하다 라고 독일말로 Nebenkrater라고 주장 했어요.

그 이유가 몇가지 있다구. 왜 그렇게 주장하는가? 이유가, 그중에 하나가 이런 그 관찰이라구, 바울의 편지 중에 칭의론, 법적 체계의 구원론은 사실 갈라디아서, 로마서 밖에 안 나온다구. 빌립보서 3장에 조금 있고 살전, 살후, 고전, 고후 어디에 있느냐? 이게 하나의 중요한 issue, 이유고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여기에는 바울의 윤리가 성립될 수 없단 말이야. 요 체계, 법적 구원론 체계위에는, 바울의 윤리가 성립될 수 없다. 바울의 윤리는 신비주의적 체계에 성립이 된단 말이야. 그래서 가령 로마서를 보란 말이야. 바울이 그의 福音을 이런 식으로 전개를 한다구. 5장까지, 그러니까 요 복음에 도전이 왔을때(법적 체계) 6:1에 뭐라 그래? “우리가 은혜로 의롭다 함을 받으면 죄를 더 짓자.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가 더 클 거아니냐!” 뭐 이런 식으로 우리가 믿음으로만 義人된다면 죄를 더 짓자 말이야? 그래서 윤리와 상충된, 그래서 이 바울이 칭의론적이 구원론에 대한 윤리적 관점에서 도전이 있을때 바울이 어떻게 대답을 하느냐? 금방 신비주의적 체계로 대답을 한다구.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義를 입은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해서 그리스도의 주권의 영역에 있는 사람인데 어떻게 거짓으로 불 순종 할 수 있느냐. 금방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 안에 있음. 그리스도의 주권 영역에 있음”으로 대답을 한다구.

그것을 Schwietzer는 뭐라고 그러느냐면, 신비주의적 체계, 구원론 체계는 바울 신학에 다양한 면을 다 통합할 수 있는 힘이 있지만 법적체계는 통합을 못한단 말이야. 윤리를 통합 못해. 그래서 이 사람의 주장은 이게(신비주의적) 원래 바울의 신학의 체계이고, 주 분화구고, 법적체계는 갈라디아 교회에서 유대주의자들과 싸우기 위해서 논쟁이 있었단 말이야. 자, 시간적으로 후에 속하는 것으로서, 바울 구원론에 본질적인 체계가 못되고 구원론의 본질적인 체계가 못되고 부차적인 체계에 불과하다. 이렇게 주장을 한 거예요. 그 뒤에 이 자체는 큰 문제라. 이 자체는 신학적인 큰 문제예요. 계속해서 그 뒤에 이 문제가 계속 토론이 돼요. 지금까지 토론을 해요. 지금까지 종교사학파나 주관서의 말이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아요.

최근에 바울 신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논쟁을 불러 일으킨 E.P.Sanders같은 사람도 사실 이런 부류지. 이런 걸 어떤 영국책에서는 Participation 구원론이라 그래.  Participation 그리스도의 운명에 동참함. 참여해서 구원을 얻음.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함. 세례라 그러지. 지금까지 이렇게 주장한 사람이 있어.

그러나 사실은 내가 내 책에서도 보여줄려고 그랬지만, 이 체계가 서로 통합될 수 없는 별개의 체계가 아니고 같은 하나라, 하나. 한 동전의 양면에 불과해요. 그것은 믿음이,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의미가 무엇이냐?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가 의를 얻는데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의미가 무엇이냐 하면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 두 체계는 사실은 하나의 체계라. 그러나 이것은 神學적인 서론에서 더 증명을 해야 되지. 그래서 지금 살전, 살후와 고전, 고후에 이 칭의론이 안 나오고, 그런데 바울의 이 구원론이 두 체계가 있는데, 두 체계가 있는 것을 전제하고 그 다음에 이제 살전, 살후, 고전, 고후에 칭의론이 전제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 갈라디아는 어떻게 연대를 잡는다구? 이보다 후에 비로소 갈라디아 문제가 터진걸로 보고 갈라디아 문제에 응하기 위해서 칭의론을 발달시킨 것으로 본단 말이야. 그렇다면 갈라디아가 뭐 보다 중요해? 로마서 직전에 쓰여진 걸로 봐야 된다 이말이예요. 알겠어요?

그런데 여기에 대한 답이, 그러나 이 논리에 대한 이러한 논리에 대한 답이 두가지로 나오지 두 세 가지, 네 가지까지도 나온다구. 첫째는 이 갈라디아 1-2에서 바울은 칭의론적 복음의 정의가 갈라디아에서 자기가 갈라디아 문제가 커지기 전에 선포했을 뿐만 아니라 갈라디아에 유대주의자들이 침투해서 비로소 거기에 응해서 이 교리를 발달시킨 것이 아니고, 자기가 어쨌다는 거야? 자기가 갈라디아에 처음 가지고 그때 이미 선포했다 이 말이야. 그래서 거기에 대해서 유대주의 자들이 시비를 걸어서 그곳 갈라디아 문제가 발생한 거라구. 더 나아가서 그 칭의론적 복음은 다메섹 도상에서의 계시에 의한 것이라고. 그래서 처음부터 자기 사도직에 시발점부터 견지했던 복음이라는 것을 바울이 강조한다구. 갈라디아서 1-2장.

둘째로 이 문제는 아까 문제와 연결이 되는데 바울의 이 주장이 옳아야만 갈라디아 교회에서의 유대주의의 문제가 발생했음을 이해 할 수 있어. 바울이 이런 은헤로만, 믿음으로만 의인됨에 구원론을 펴지 않았다면 아예 갈라디아 문제가 발생하지 않은 것이라구. 유대 주의자들이 거기와서 시끄럽게 않는 것이라구.

세째로 이 교리는 이른바 살전 1:9-10, 바울이 농축된 상태로 하나의 formula로, 하나의 formula와 같이 그것을 길게 설명은 하지 않지만 하나의 formula로 가령 또는 고전 1:30, 고후 5:21, 이 세 곳이 대표적인 곳이지. 살전 1:9-10, 고전 1:30, 고후 5:21, 더 나아가서 고전 2:5, 15:14-17, 고후 1:24 등도 참조하고 또는 고전 1:21, 3:5, 14:22, 15:7, 11 등도 참조하라. 하여간 우선 살전 1:9,10을 읽어봐요. “저희가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구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 들어간 것과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 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말하니 이는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그게 지금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선포한 복음의 요약인데 10절 후반부 우리가 누구를 기다려 하늘로 부터 온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데 그가 우리를 어떻게 한다? 하나님의 진노에서, 하나님의 심판에서 우리를 구출한다. 이게 바로 칭의론이라. 하나님의 심판에서 무죄 석방을 받아 구원받음. 그런데 지금 우리가 믿으면 최후 심판때에 무죄 선언이 벌써 여기에서 이루어지며 여기에서 벌써 이루어지는 무죄선언, 의인됨이 최후의 심판때 확인이 되는거라 알겠어요?

그래서 살전 1:9,10. 데살로니가 교회에 선포한 바울의 복음의, 이걸 바울은 길게 설명하지 않아요. 왜 설명하지 않아요? 데살로니가 교회에서 이게 지금 문제가 된게 아니야. 뭐가 문제가 돼? 종말론이 문제가 돼, 재림이 언제냐가 문제가 돼! 그러니까 바울은 그 문제만 다루는 거야. 그러나 요 유대인과 관계해서 자기가 선포한 복음을 상기시킴에 이 하나님의 심판에서 의인으로 판정받아 구원 받음을 아주 농축적인 관계로 말하고 있어 고전 1:30을 누가 한번 읽어 봐요. “너희는 하나님께로 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한 의라 그 category, 그 다음에 고후 5:21 아주 중요한 절 읽어봐요.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formula야 말로 바울의 칭의론을 가장 효과있게 함축해서 표현하는 문장이라. 고전의 교리로 따른다면 말이야. 앞에까지 말이야. 그가 했던 말이 성립이 안돼요. 더 나아가서 요새 와서 사는 사람들이 강조하다시피 고전, 후에서의 큰 문제가 뭐냐면 이 지혜를 얻어 구원 얻으려는 태도... 인간들은 어느 종교에서나 종교를 떠나서 어떠한 人間의 이념이나 사고에서 두개의 구원의 길을 항상 설정한다구. 하나는 지혜이고 하나는 행위(선행), 그렇지 않아요? 모든 종교가 지혜와 선행을 통해서 구원을 깨달아서 각종 불교나 모든 종교에서 깨달음, 지혜를 터득해서 우주의 이치를 터득했어. 또 이 선행을 통해서 업적을 쌓았어.

이것이 세속화된 형태도 마찬가지, 세속화된 형태도 과학 문명을 발달시켜서 人間의 삶을 풍요롭게 함으로 부족함이 없이 하려는 모든 人本 주의와 모든 문명 낙관 주의가 人間의 지혜를 개발해서 인간에게 부족함이 없는 상태를 만들려고 했어. 또 이 선행, 人間을 잘 교육시켜서 이웃을 사랑하고 또 자기 것을 나누어 먹게 하고 이런 선행을 통해서 구원을 얻으려고 하는, 그래서 종교에서 또는 계속 비 종교적인 신념이나 사상에서 항상 지혜와 선행이 구원의 두 방침들로 설정이 돼요. 그런데 헬라 사람들 이걸 강조했다구(지혜), 그래서 이 선행을 강조한 종교에서는 자연히 공로 사상으로 발달한다구. 공로 사상으로 --율법을 잘 지켜서 공로를 쌓아서-- 하나님으로 부터 그 반대 것으로 “의인으로 인정이 되고 구원을 얻음” 이게 유대교에서 강조점이라. 유대교도 둘다 다 있다구. 그러나 이것 선행이 그래도 강조점이라면, 헬라 종교에서는 이것이 강조점이라. Platon 체계나 일반화된 헬라 종교나 신비 종교나 영지주의나 모두 지혜를 강조한다구.

그래서 고린도 사람들은 헬라, 전형적인 헬라 사람들로 지혜를 통해서 구원을 얻는다고 보았고, 이제 바울이 선포한 복음을 헬라 철학의 일파 정도로, 그래서 다른 헬라 철학이나 종교들이 가져다 주는 지혜와 비교할 만큼 또 하나의 지혜를 가져다 주는 것으로 봐서 그 지혜를 따라서 구원 얻는다고... 그들에게 바울이 무엇을 가르친 거예요? 人間의 지혜를 통해서 구원을 얻는게 아니고 무엇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십자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만.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인간적으로 보면 아주 어리석은 것이고 약한 것이란 말이야. 지혜와 정 반대 되는 것이다. 人間은 그 지혜를 쌓아서 구원 얻는게 아니고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구원 받는다는 그 가르침을 고전, 후에서 강력히 전개해요. 고전1-4까지. 그러나 고후에서 나중에 바울의 사도직에 대한 도전도 이런 지혜 사상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라. 헬라적인 사상, 갈라디아서, 로마서에서는 선행으로 구원을 받음. 율법을 따라서 선행을 따라서, 공로를 따라서 구원을 받는다에 대해서 이 sola gratia(은혜로만), solus christos(그리스도로만) 그 소리는 무슨 소리인고니, 하나님의 은혜로만, 그리스도를 내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만, 그것은 우리가 어떻게? 믿음으로만(sola fide) 받아들인 거예요.

이게 이제 바울의 칭의 사상인데, 이 사상이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에서는 이런 식으로 표현이 되었다구. 義라는 catrgory로 표현이 되었다면, 주로 표현이 되었다면 고전, 후에서는 어떻게? 지혜라는 catrgory로 표현이 되었다구.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지혜란 거예요. 그래서 이 바울의 복음이 그리스도로만 곧 은혜로만, 믿음으로만의 복음이 갈라디아 교회에서 유대주의자들 문제에 직면해서 비로소 義라는 categary로 처음 개발된게 아니고, 바울이 갈라디아서 1-2장에 주장하는 바와 같이 그의 다메섹 도상에서의 계시에 의해서 처음 부터 도입했던 것으로 그때 그때 그 청중들의 주 관심. 그들이 무엇으로 구원을 얻으려 나의 주 관심에 따라 바르게 적용이 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에서는 유대주의자들의 공로사상에 율법주의와 공로 사상에 대항해서 어떤 category로 義라는, 고린도 교회에서는 어떤 category로 지혜를 얻어서 인간의 지혜를 개발해서 구원을 얻으려는 것에 대항했어요. 그래서 고린도 교회 아까 이야기 한대로 고전 1:30이라든지, 고후 5:21이라든지 아주 농축된 상태로 義라는 category로 선행을, 인간이 선행을 쌓아서 구원을 얻는다는 것에 대해서 다 내안에 이거든 그리스도로만 믿음으로만 의인됨의 교리를 가르칠 수가 있음을 보여준다구.

그러나 그 교회에서 주된 문제는 어떻게 해서 의를 얻느냐? 그 문제가 아니고 어떻게 지혜를 얻어서 지혜로 구원 받느냐에 대해 있으나, 자연히 지혜라는 category를 써서 이 복음을 전제할 수 밖에 없는거라. 그런 차이만 있는 것이지 이 Schweitzer를 바울의 다른 편지들과 상관시켜서 갈라디아를 연대 맺음에 있어서 바울의 다른 편지들과 상관 시켜서 연대 맺으면 갈라디아가 자꾸 어떻게 되는거야? 지금 이 로마서와 가까이 뒤에 써진 편지로 연대를 잡는다구. 그렇다면 아주 늦어져서 52년내지 55년 이쯤에 쓰였다고 봐야 한다구. 그러나 우리가 아까 전에 갈라디아 내에서의 증거와 사도행전과의 관계에서 남부 갈라디아설에 증거한다면 48-49년쯤에 쓰였다고 봐야된다.

그래서 이 두개가(52-55년대, 48-49년대) 옳은 견해로 있는데 둘 중에 하나가 맞을 거다. 이 갈라디아서, 로마서의 신학적인 유사성과 종말론, 그리고 칭의론의 관점에서 갈라디아서를 고전, 후서와 살전, 후보다 늦게 연대잡는 사람들은 자연히 52-55년대 설을 받아서 주장해요.

그렇다면은 무슨 소리냐 하면 50년대 중반쯤에 바울의 신학에 종말론과 구원론에서 근본적인 변화가 있다는 이야기야. 그런데 그게 가능했겠느냐? 또 갈라디아서 1-2장이 그런 가능성을 제시하느냐. 그렇지 않다 이말이예요. 그러니까 자연히 우리는 이 처음설에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게 된다. AD 48-49년 쯤에는 바울은 벌써 한 50세쯤 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어요. 그리고 다메섹도상에서 사도직과 복음을 받은 이후 벌써 한 16년쯤 복음 선포 활동을 하였다고 봐야해요. 왜? 바울이 32-34년 이어간에 다메섹에서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므로 이 시점은 어느 시점이야? 그의 복음과 사도직을 받은 후 한 16년쯤 선교 활동을 한 사람이라구. 그리고 나이로 말할까 하면 50세쯤 된 사람이라. 이런 사람이 갑자기 종말론과 구원론에서 지금 이성이 드는 근본적인 변화를(전환을) 가졌겠느냐? 여러분들 어떻게 생각해요?  그런데 이제 좀 어렵단 말이야.

더 나아가서 바울은 자기의 칭의론을 중심으로 한 복음을 --갈라디아 교회에서 지금 문제거리인 이 복음을-- 다메섹 도상에서 하나님에 의해서 계시된 것이라고 주장을 한다구. 그러면 이 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후기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주로 어떻게 설명하느냐면, 이때쯤 바울이 갈라디아에서 유대주의자들에게 도전을 받고 비로소 자기의 다메섹 도상에서의 체험을 뒤돌아 봤을 때에, 다메섹 도상의 계시에 함축된 것을 이 때 비로소 펼치기 시작했다는 거야. 갈라디아서의 도전 때문에, 그러면 바울은 어떤 사람이예요? 이 기간동안 이 때는 어느때예요? 벌써 한 30-20년 동안을 바울이 통 자기의 다메섹 도상의 계시의 함축 의미를 모르고 있다가, 갈라디아에서 몇놈들이 와서 시끄럽게 하니까, 그때사 비로소 아차! 일이 이렇구나 하고 깨달았단 말이야. 우리가 바울 서신을 통해서 안다는 신학자 --주로 구약에 대해 해석함으로 자기 신학을 펴는 아주 활발한 마음을 가진 신학자-- 바울이 그런식의 사람이었겠느냐? 20년 동안이나 하나님의 계시의 내용을 전혀 묵상도 안해보고 잘 모르고 있다가, 단지 교회를 좀 시끄럽게 한다고 비로소 그때야 깨달았다? 이런 것은 맞지 않아요.

그래서 우리가 이 전기설(48-49년 AD)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렇다면 또 이 문제가 있다구. 전기설에 관심을 갖는, 그러니까 갈라디아서가 48-49년 이 어간에 쓰였다면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와 사이에 적어도 8, 9년의 간격이 있다는 말이야. 로마서는 한 57년쯤에 쓰였을 거라구. 그러면 어떤 사람들, 후기설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로마서와 같이 갈라디아서를, 갈라디아서와 로마서를 가깝게 연대 지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왜 로마서와 갈라디아서가 제일 가깝기 때문에-- 이 8, 9년 간격은 너무 길다. 로마서 직전에 쓰였다고 봐야 된다. 그런 한 50-40대의 사람이 8, 9년이라는 8, 9년은 엊그제 같다고 엊그제... 8, 9년동안에 사상적인 특별히 뭐 엄청난 진전이 있는 것이 아니란 말이예요. 변화가 있을 것도 아니고...

그래서 이 바울의 신학이 --칭의론을 포함한 바울의 신학이--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1-2장에 주장하는 바와 같이 그의 다메섹 도상에서 계시의 체험에서 유래하면서 갈라디아서가 쓰이기 전에 주된 특징들이 이미 형성이 된 후, 왜 갈라디아서에 있어서 쓰일때가 벌써 다메섹 도상에서 체험후 한 15-6년이라구. 그러니까 그 전에 이미 바울의 신학에 주된 특징들이 형성이 된거라. 그 뒤에 계속 이 큰 변화없이 지탱이 됐다고 봐야 된다 말이예요. 다만 그 편지의 수신인들의 상황에 따라 한때는 이러한 특징을, 다른 때는 저러한 특징을 강조했을 따름이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바울의 편지들이란게 다 이 무슨 조직신학 논문이 아니지. 그 교회의 문제에 응용하는 단편적인 바울의 복음 전개에 전체의 면을 보여주는게 아니고, 단편적인 문헌으로 그 교회에 가장 중요한 면만을 보여주는 것이 때문에, 바울의 신학에는 이미 다메섹 도상에서의 계시에 유래하면서 갈라디아서를 쓰기전에 이미 다 형성이 되었단 말이야. 그 후에 계속 이제 그런 상태로 지탱이된다. 다만 그 사이에 발생하는 문제들에 따라 한 때는 이 면을 어떤 때는 저면을 강조했을 따름이지, 그 바울의 신학이 편지 쓸때마다 살전에는 이렇고 갈라디아서를 쓸때는 저렇고 고전, 후를 쓸때는 또 이렇고 뭐 이런거 아니란 말이야.

그래서 총 결론적으로, 갈라디아서를 후기에 연대 잡으려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 갈라디아서는 아마 AD 48년경 예루살렘 사도회의 직전에 쓰였다고 봐야 된다. 안디옥과 그 주위의 교회들에서 유대주의 자들이 침투했던 바울의 교회들을 교란 시킨다는 소식이 바울에게 당도하자(다시합시다).. 예루살렘 사도회의 직전에 쓰였다고 봐야된다. 그 시점을 좀 더 정확히 말해 --그 상황을 좀더 정확히 말한다면-- 안디옥(시리아)과 그 주변의 교회들에 유대주의 자들이 침투해서 바울의 교회의 가르침에 반대를 하고, 남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까지 이들의 교란 활동을 확대하게 되자, 예루살렘 사도회의를 열어야 할 상황이 벌어지는 그 순간에 우선 바울이 이 갈라디아 교회에 편지를 써서 갈라디아의 그리스도인들이 이 유대주의 자들의 그 선전에 넘어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루살렘의 사도회의에 막 떠나면서, 일단 이 편지를 써서 거기에서 사고를 막으려고 한거다. 예루살렘 사도회의에 가서 이제 이들이 안디옥의 갈라디아에서 일으킨 문제, 할례 문제, 율법 문제를 정식으로 토론해서 사도회의 결의를 보게 된거다. 이렇게 우리가 생각해야 된다. 알겠어요? 아! 그렇다면은 이제 자연히 거꾸로 아까 Schweitzer의 이론도 따진다구. Schweitzer가 뭐라고? 칭의론은 바울의 구원론의 별 중요하지 않는 것이다는게 이유들 중에 하나가 무어라고? 바울의 일부 편지들에만 나온다.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에 나온다구. 그런데 이것들은 다 후기 편지들이다. 이게 살전, 후, 고전, 후에 안나온다. 이런게 하나의 이유였는데, 갈라디아서가 이렇게 전기 편지이면 --아주 최초의 편지이면-- 이 Schweitzer의 이론이 그만큼 약화되는 거야. 그래서 한 48년 사도회의 직전에 쓰였다고 본단 말이야. 그렇다면 갈라디아서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바울의 편지들 중에 제일 먼저 쓰여진 편지라.

그렇다면 바울이 갈라디아서 1장에서 주장하는 것과 맞아들아 간단 말이야. 뭐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의인된다는 복음이 어디서 받았다고 주장해? 다메섹 도상에서 받았다고 주장해. 그것과 맞아들어 간다구. 도중에 발달한게 하니고, 자 그 다음 그러면은 두번째로 살전, 후에 대한 서론, 여러분들 사도행전 17:1-10까지와 이 편지들을...

그리고 이 두 편지들을 자세히 꼭 읽고 한번 문단의 제목들을 달아와요. 그 다음의 이 F.F 부르스의 바울 신학책 있지 ?거기의 데살로니가 1-2에 대한 것을 보라구(영문단 p223-234)인데 여러분들 한번 한국어 번역되어 있으니까 그걸 읽고, 또 Guthrie의 신약개론 데살로니가 전후서를 읽어봐요. 이 데살로니가 전후서는, 이 제목이 두가지야. 영국판은  Paul the apostle love in heart set three. 좀 복잡하게 되어있고, 미국쪽은 Paul the apostle love three scripture.되어 있다.

 

2. 데살로니가 전후서

살전은 49-50년 쯤에 고린도에서 쓰여졌어요. 이것에 대해서는 별로 이견이 없다구. 이견이 없는건 토론할 필요가 없어요. 살후는 그 직후에 쓰였다고 보는데 이게 issue중에 하나가, 살후가 진짜 바울의 편지냐 아니냐 둘 중에 하나예요. 이게 진짜 바울의 편지라면 이 시기의 살전 직후에 쓰였다고 그래. 보수주의 자들은 살후를 바울의 편지라고 보고, 비판주의자들은 살후를 바울의 편지로 안보고, 비판주의자들은 이른바 바울서신 7개만 바울서신으로 본다구. 뭐냐하면 로마서와 고린도전후서와 갈라디아서와 빌립보서, 데살로니가전서, 빌레몬서 이렇게 7개만 바울의 진짜 편지로 보고 에베소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후서, 목회서신들(pastralc), 이런 것들은 바울의 진짜 편지가 아니고 바울의 제자들이 쓴 편지라고 본다구. 바울의 제자들이 바울의 이름으로 쓴 편지라구.

그래서 데살로니가후서가 바울의 진짜 편지냐 아니냐가 issue들 중에 하나라. 자, 하여간 우리는 데살로니가후서가 바울의 진짜 편지로 보니까 그 문제를 깊이 다루지  않겠는데, 여러분들 Guthrie책을 자세히 보면 이 토론이 되어 있다구. 데살로니가후서의 진의성에 대한, 거기 읽어봐요. 그 외의 중요한 issue, 이 두개의 공통 문제들에서 나오는 중요한 issue들은 이 데살로니가 교회내의 상황에 관계되는데, 첫째로 거기의 일부가 아마 유대인들이 꽤 있었는데 바울이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고 비겁하다고 바울에게 욕을 한거야. 그래서 데살로니가 전서 1장-2:12까지 자신의 도덕성에 대해서 방어를 해요. 그 다음 이제 외부에서의 핍박이 좀 있었던 것 같애. 2:14에서는 인내를 하도록 바울이 권면을 하고, 세째로는 데살로니가 그리스도인들의 과거 이방인 생활의 영향이 지속이 안되도록 그들의 이방인 환경, 이방 환경이 젊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우상 숭배라든지 음행이라든지의 영향을 주지 않도록 권고하고 있고(데살로니가전서 4:3-18).

그러나 이제 주된 이슈는 주의 재림에 관한 오해라. 근데, 이 주의 재림에 관한 오해는 왜 났느냐? 옳지 않은 종말론적인 열기에서 나타난다구. 데살로니가 그리스도인들은 주의 재림이 임박했다고 보고 그 재림을 열망했으나, 그 재림이 지체되어서 지금 큰 신앙의 혼란에 빠져서 있는거라. 특히 지금 자기들 중에 죽는 사람들이 발생한단 말이야. 재림을 다보고 구원을 얻어야 겠는데, 재림전에 임박했다고 하는데 재림이 일어나지 않고... 아, 그전에 노인들이 죽어간다 말이야.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주의 재림전에 곧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기 전에 죽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거냐? 주의 재림 때에 그들은 그 때까지 살아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어떤 불 이익을 당한거다, 손해를 본 거다, 이런 문제들로 여러분들이 들떠 있으면서 혼동 상태에 있었다구. 거기에 대해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전서 4:13-18에서 대답을 해요.

첫째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부활이 장차 있을 것임을 확신 시킨다구.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장차 부활할 것임을 확신시켜. 그러기 때문에 그의 재림때까지 생존하는 사람들이나 그전에 죽은 사람들이나 다 같이 주의 재림때에 주와 연합될 것이며, 그러니까 죽은 사람들은 부활하여서 하나님의 사람들은 자는 상태로... 뭐 누가 더 손해보고 누가 더 이익보고 하는 것 없음을 확신시킨다구. 그러나 “재림전에 죽어도 괜찮다. 걱정하지 말라.”고 바울이 그리스도의 부활에 근거해서 말한다. 이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주의 재림이 임박했다는 종말론적 열기 속에서 자기 주제의 능력을 잃고 생업을 다 포기하고 게으름을 부렸는데, 바울은 그들에게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두 오심 사이에서 사는 자들임을 상기시키고 벌써와 아직(aleady-but not yet)의 긴장, 종말론적인 긴장속에서 살아야 함을 상기시킴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책임있고 규율있고 적극적인 삶을 살도록 권면하고 있어요.(5:2-10)

이장림파 사람들은 이제 아무것도 않겠네! 92년 10월까지 2년 남았는데 90년으로 보자면 그렇지 1년 더 할 일 있나? 그 사람들 뭐하나 터미날에 가서 뭔가를 나눠주고, 사람들 많은데 가서 나눠주고 그냥 생업도 않고 있고 그거 아무것도 아니여! 이장림 섬기면서 뭐 저 책만 읽고 하지. 그럴꺼 아녀? 데살로니가 사람들 같이, 데살로니가 전서 후에 아마 (직후에 아마) 이 거짓 선생들이 일부 나타나서 스스로 사도적 권위를 주장하며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데살로니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의 날이 이미 왔다고 가르쳤던 것 같애요. 이 거짓 가르침으로 부터 또 다시 종말론적인 열기와 혼돈이 발생했는데, 그래서 이들은 더 생업을 다 포기해 버리고 혼돈에 빠져서(살후 3:1-13), 그래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후서라는 편지를 또 써서 이 주의 재림전에 일어나야 할 일들, 묵시적 시나리오를 살피고(살후 2:3-10), 다시 한번 데살로니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신의 모범을 따라 바울 자신의 모범을 책임있는 말들하고, 생업을 하고, 생업에 종사하라고 이렇게 권고하고 있었어요(살후 3:6-12), 그래서 이 데살로니가전, 후서가 이런 식으로 연결이 된 것 같다 이말이예요.

지금 곧 보겠지만 데살로니가 교회의 종말론과, 데살로니가 사람은 무엇때문에 문제가 돼? 가장 큰 문제가? 임박한 종말에 대해서 --그들의 신앙의 전체가 임박한 종말에 대해서-- 그래서 현재를 포기해 버리는 거야. 이따 보겠지만 고린도인들의 문제는 이미 자기들이 현재, 벌써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해서, 미래를 포기하고 망각해 버린거야. 데살로니가인들과 고린도인들이 종말론적인 관점에서 정 반대예요. 이 사람들은 아주 그래서 고린도인, 세속적인, 세상적인 그리스도인이 된다구. 이 사람들은 아주 현상과 관계없는 생업을 다 포기해 버리고, 현재를 다 포기해 버리고, 지금 여기서를 다 포기해 버리고 했단 말이야.

근데 이 잘못된 그리스도인의 종말론이 항상 이 양극단에서 왔다 갔다 한다구. 오늘날도 마찬가지. 이장림파가 데살로니가에 속한다면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구원 방종인데, 둘 다 옳지 않다.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의 종말론은 alredy-but not yet의 긴장속에서 살아야 된다구. 종말의 already but not yet의 긴장속에서 “하나님 나라가 벌써 왔다. 그러나 아직 완성이 되지 않았다. 우리 구원이 벌써 이루어졌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의 첫 열매를 벌써 누리는 자로서 종말의 구원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고 지금 우리는 이 신앙의 매임을 강조하는 말인데 이 안도함이 있어야 돼. 안도함. Gelassenheit. 한국말로 번역하기가 어려워요. Gelassenheit. 영어로도 번역하기가 힘들어요. 신앙에 좀더 안도함. 어린아이가 엄마 품에 안겨서 그냥 아무 걱정 없는 상태, 이게 Gelassenheit야.

그래서 이 종말의 구원에 대해서 그냥 안달하고 불안해 하고... 이것은 신앙이 아니란 말이야. 이 데살로니가인들의 신앙이 옳지 않단 말이야. 우리 개혁 신학 전통에서는 원래 이 예정론이 우리의 신앙에 Gelassenheit를 주기 위해서 전개되는 교리인데, 교리를 왜곡해 가지고 사람들로 하여금 “내가 예정 받았나? 그래서 내가 종말에 구원 받을 것인가, 안 받을 것인가?” 해서 안절 부절 안달을 한다구. 그건 예정론이 전혀 잘못 이해되서 그래, 그건 옳지 않단 말이야. 그런 신앙이 어디있어?. 반면에 신앙이 ...  Gelassenheit 돼 있어.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구원의 첫 열매를 받았기 때문에, 성령이 내주하는 성령의 --구원의-- 첫 열매를 받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언제 오든, 내일 오든, 아니면 천년후에 오든, 십만년 후에 오든, 우리 구원이 확실하다는 Gelassenheit가 있어야 돼.

그러나 우리가 받은 것은 기껏해야 첫 열매에 불과하고 우리 구원의 완성이 종말에 있어야 된다는 이 기대, 이 소망이 또 있어야 된다. 이 소망은 무엇을 하는거야? 이 종말론적인 완성에 대한 소망은 현재를 상대화 한거야. 현재를 상대화. 그러니까 지금이 전체가 전부가 아니야 . 지금 여기서 가치를 절대화해서는 안된단 말이야. 그러니까 고린도전서 7장에서 바울이 추구하는대로 주로 어떻게 살아야 해 ‘as if not’으로 살아야 돼. 결혼한 자는 마치 결혼하지 않은 것 같이, 부자는 부자 아닌 것 같이, 우는 자는 울지 않는 것 같이, 우리 삶이 현재를 종말의 완성의 기점으로 현재를 상대화 하며 현재 가치들 때문에 울고, 불고, 현 부자도 마치 구원을 다 받은양 방자해서도 안되고 좀 가난하고 출세하지 못했다고 출세라는게 뭐야? 세상에 나오는게 출세지. 그것 좀 못했다고 그냥 울고 불고 그냥 막 때려 엎어 버려야 한다고 믿는 이상한 사람들. 그것이 아니다 이말이예요. as if not 바로 그거란 말이야.

이 두 가지가 신앙의 Gelassenheit라 이거야. 안도함. 내가 설움 받는다고 좀 이 세상이 핍박이 심해지고 이 세상이 악해지고 해도, 하나님께서 나를 신실하게 한다는 것을... 반면에 그 안도함이 어떻게 돼 버리면 요렇게 되 버리면 안된단 말이야. 고린도인같이 우리가 받은 구원의 첫 열매에 불과하고 종말에서 완성된다.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 이건 같은 짓거리야. 상대적인 것이지. 이것은 미래의 종말에 구원의 완성이 되어서 현재를 더 많은 것 같이. 이런 그 소망과 책임있는 윤리의 삶. 이런걸 두렵고 떨림의 삶이라고 할 수도 있지.

그러니까 안도와 떨림의 그 긴장 이 속에서 잘 어울린단 말이야. 이것이 신약적인, 그리고 올바른 그리스도인적인 종말론이고, 우리 그 종말론적인 시점이어요. 그런데  이른바 정동 교회에서도 이 두 극단에 오락가락해... 여러분 저 산속에서 외치는 사람들 한테 가면 데살로니가 사람들과 같은 사람들이야. 그러나 이 시장에서 저기 그 교회는 주일날만 나오고 부동산 투기하고 뇌물 받아가지고 교회가면 십일조하는 나리 나부랭이들 이야기 들으면 고린도인들과 같고 우리 교회도 그래. 그렇죠? 여러분들 신앙은 어쩐지... 하여간 지금 데살로니가 사람들 같이 되어서는 안된단 말이야. 고린도인들과 같이 되어서도 안되고.... 자 그러면 시간 얼마 남았어요. 다 됐어?

이 다음시간에 고린도 전후서를 하겠는데 고린도 전후서의 서론은 이미 내가 어디다 써놨다구. 지금 여러분들 1학년들이지. 지금 2학년들이 지난학기에 내 고린도 전후서, 고린도전서 강해를 복사해 가지고 교재로 썼다구. 거기 첫 부분에 고린도 전후서에 대한 서론이 있어요. 고린도 전후서에 가장 큰 문제는, 서론의 문제는 바울과 고린도 교회와의 관계, 또 이 바울과 고린도 교회와의 그 복잡한 관계를 지적하면 고린도 전후서가 어떤 정황에 쓰였으며 고린도 후서가 하나의 책이냐, 두개의 책이냐, 아니면 두개의 편지의 다른 한 조각, 제 3의 편지가 삽입된 거냐. 고린도 후서에 소위 그 통일점 이런 것 까지 다 다루게 되고, 고린도 교회란게 어떤 고린도의 숭배지의 교회에 신들이 들어서 있었어요. 바울이 그걸 어떻게 막는가 이런 것을 정확하게 다 다루는 거라구. 이게 고린도 전후서의 서론에 있어서 중요한 문제야. 여러분들 그걸 구해가지고 오든가 아니면, 구해오면 진도가 좀 빨리 나갈거야. 추석에 영향 안 받겠죠. 그러니까 데살로니가 전후서 하고 고린도 전후서랑 다음 주 그 다음 주까지 다 읽고 각 문단마다 번호를, 제목을 달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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