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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버킷리스트 1위는?

by 【고동엽】 2022. 10.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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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버킷리스트 1위는?

 

▲최근 버킷리스트 라는 말이 많은 사람들의 화두가 되고 있습니다.

“Kick the Bucket”이라는 영어 숙어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자살하는 사람이, 양동이를 뒤집어 놓고, 그 위에 자기 발로 딛고 선 후에,

오랏줄을 목에 걸고 나서, 발로 양동이를 걷어차면, 대롱 대롱 매달려서 죽게 됩니다.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하는 행동’이라는 뜻입니다.

 

버킷리스트는, 그래서 죽기 전에 꼭 해보고 싶은 일을 적은 목록입니다.

가보고 싶은 여행지, 먹고 싶은 음식, 읽어야 할 책 등을

관련 기관이나 매체에서 열 개 혹은 백 개씩 선정해서, 버킷리스트로 발표합니다.

 

사람들은 그 리스트대로 따라 하기를 즐깁니다.

이런 시사상식을 모르는 사람들도, 개인적인 필생의 소망은 몇 가지씩 갖고 있습니다.

 

비슷하게 신자도, 신앙생활을 하며 이루고 싶은 일들이 있습니다. 예컨대,

-천국 가기 전까지 성경통독 100회 하기,

-40일 금식을 해보기,

-노후에 아프리카 선교를 가거나,

-평생 모은 돈을 사회에 기부하여 장애인 센터를 건립하기.

등의 일생의 소망을 품습니다.

 

그리 거창하지 않아도

-주일학교 교사나,

-중보기도 모임 인도자가 되고 싶다는 소박한 꿈도 꾸기도 합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본문에서, 모든 신자의 버킷리스트에 첫째로 오를 항목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육신이 부활되는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고전15:21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22.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23.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26절)이라고 했지 않는가요?

신앙의 궁극적인 목표가 부활이라는 뜻입니다.

 

그럼 당장 두 가지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우선 예수님의 재림은 언제일지 모르는 먼 장래의 일입니다.

 

-또 육신의 부활은, 신자가 계획, 준비, 노력, 달성할 성격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죽기 전에 이뤄야 할 리스트와 무관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버킷리스트를, 내가 다 이뤘다면? .. 결국은 허무합니다.

 

▲최근 TV에서 남미 볼리비아의 우유니 사막을 소개하는 여행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습니다.

해발 약 3,500 미터 고원에 끝도 없이 평평하게 펼쳐진 사막에

새하얀 소금 가루가 깔려 있는 곳입니다.

세계 모든 여행가들의 버킷리스트에 으뜸으로 손꼽히는 곳입니다.

 

봄철 우기에 비가 바닥에 조금 깔릴 정도로 오면,

그 물이 하늘을 완벽하게 반사해서

하늘과 땅의 경계가 없어진 것 같은 착시 효과가 생깁니다.

 

그 사막 위에 서있는 자는, 하늘에 올라 붕붕 떠다니는 것 같은

신비한 체험을 할 수 있다고 합니다. TV 화면으로만 보아도 너무 아름답고 신비로워서

죽기 전에 한 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만약 내가, 기가 막히게 선정한 버킷리스트의, 그것도 백 가지 항목을

죽기 전에 10년 이상의 시간을 투자해서,

모두를 완벽하게 성취한 후의 기분은.. 과연 어떨까요?

(이게 버킷리스트의 최대 약점입니다.)

 

분명히 큰 보람과 성취감과 기쁨이 생길 것입니다.

문제는 그 즐거움이 오래 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차츰 허전한 느낌이 조금씩 밀려들어오다가,

결국에는 처음 느꼈던 희열보다 더 큰 공허감이 엄습하지 않겠습니까?

 

축구광이, 월드컵 기간 내내 열광하다가

두 주간의 시즌이 끝나면, 이제 무슨 재미로 살아가지.. 하고 한탄하듯이 말입니다.

 

버킷리스트라는 용어 자체도 의미심장합니다.

문자 그대로 죽기 전에 꼭 해야 할 일들이니까

다 하고나면 남은 것은.. 죽는 일뿐이지 않겠는가요? 허무하기 그지없습니다.

 

▲지금 인간의 욕심이 끝이 없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이 더 좋은 것, 더 큰 기쁨과 만족과 행복을 추구하려는 것이

나쁘거나 죄는 결코 아닙니다.

그런 욕심이 없다면 인간의 성장과 발전은 없습니다. 모든 생명체가 갖는 본성입니다.

그런 욕심이 있기에 성장할 수 있습니다.

 

버킷리스트를 작성하는 것은 물론, 달성 후에 공허감이 생기는 것

둘 다 그 생명력이 활발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버킷리스트를 달성한 후에 실망감이 생기는 것은

리스트의 항목을 잘못 선정했기 때문입니다.

 

모든 버킷리스트는 세상에서 이룰 일입니다. 또 모든 세상일은 유한합니다.

썩어 없어지지 않는 것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자기가 달성하고자 하는 소망과 목표가, 아무리 선하고 아름답고 진실한 것이라도

그 일 자체가 일시적/한시적이기에

그것으로 누리는 기쁨도 일시적/한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탐욕 때문만이 아닙니다.

 

 

◑인간의 욕망은 밑이 터진 웅덩이 와 같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실상 모든 인간에게 해당되지만)

두 가지 결정적 잘못을 저질렀다고 선포했습니다.

“생수의 근원되는 하나님을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하지 못할 터진 웅덩이”라고 했습니다. 렘2:13

 

버킷 리스트를 하나씩 성취하려고 노력하며 더 큰 기쁨을 얻으려는 것은

분명히 의미가 있습니다.

 

다만 잘못은, 자기들이 파고 있는 웅덩이가, 밑이 터진 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또 그렇게 된 까닭도, 생수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을 배제한 채

인간 혼자 스스로 시도했기 때문입니다.

 

▲흥미롭게도 ‘우유니 사막’을 소개한 담당 PD가

본인은 구체적으로 인식하지 못했겠지만

목사인 제가 듣기에는, 예레미야 선지자와 비슷한 고백을 했습니다.

 

‘나 PD가, 그날 밤 숙소에서 우유니 호수 쪽을 바라보니, 하늘의 별들이 호수에 반영되었다.

그 수많은 별들이, 땅에 쏟아져 내려온 것 같은 장엄한 광경이

낮에 보았던 풍경과 체험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오묘해서

계속 넋을 잃고 보았다.’

 

제 나름대로 그 PD의 말의 의미를 분석해 보았습니다.

한국에서 30시간이나 비행기를 타고 와선

우유니 사막/호수까지 자동차로 일박이일의 긴 여행을 했습니다.

 

낮에는 그 우유니 사막/호수를 보면서,

우선 자기 계획대로 버킷리스트를 달성했다는 성취감부터 느꼈을 것입니다.

또 땅과 하늘의 경계가 무너져, 자신이 하늘에 올라간 것 같은 감격도 잠시나마 누렸습니다.

 

그런데 밤에는, 낮에 햇빛에 가려 보이지 않던 별들이 일시에 나타났습니다.

사막 위에 쏟아져 내린 것은, 지구라는 울타리가 무너진 셈입니다.

인간이 속한 시공간을 넘어 우주 전체가, 자기 속에 충만하게 채워져 들어옴을 느꼈습니다.

그와 동시에, 그 광대한 우주에 비해, 자기는 너무나 미약한 존재임을 절감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씀에 비추면,

낮에는 자기가 하늘에 오른 것 같은 감격은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에 해당됩니다.

물을 저축할 수는 없어도, 잠시 담겼다가 빠져나가는 동안에,

일시적 갈증은 해소는 됩니다.

 

반면에 밤에는 자연과 지구를 넘어 전 우주 속에 자신이 완전히 파묻혔습니다.

자기가 계획하고 기대했던 일이 아니며, 스스로의 노력과 수고도 전무했습니다.

 

그 PD가 크리스천인지 알 수 없지만,

그는 전 우주를 지으시고 통치하시는 창조주이자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품 안에 잠겼던 것입니다. 진짜로 잊을 수 없는 체험을 한 것입니다.

 

인간이 자의적 노력으로 쟁취한 감격과,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는 그분의 경이는, 도무지 비교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5세기에 살았던 성 어거스틴은 젊었을 때에는 천하의 난봉꾼으로 방탕한 삶을 살았습니다.

긍정적으로 표현하면, 당시의 버킷리스트를 다 달성했던 사람입니다.

 

그랬던 그가 어떻게 고백했는가요?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찾기 전까지는, 자기 영혼은 평강을 누릴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인간이 더 큰 기쁨을 추구하는 자체는 결코 나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배제한 채로는, 어떤 기쁨도 온전하고 영원한 기쁨이 될 수 없다는 것이

인간의 태생적 본성이자 한계라는 것입니다.

더 큰 불행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고 불쌍한 처지인가요? 버킷리스트만 해도,

그걸 열심히 달성한다는 것은, 역으로 말해 자기가 죽음을 향해 걸어간다는 뜻입니다.

‘죽기 전에 이룰 일’이므로, 빨리 죽으려는 셈이지 않는가요?

 

기쁨을 더 추구하는 욕심이, 생명력의 증거라고 했지만,

그 생명력의 실상도 날로 죽어가는 것입니다.

 

즉 삶과 죽음을 주관하는 하나님께로 향해 가는 것입니다.

이는 모든 세대 모든 인간이 알 수 있는 사실이자 진리이자 상식입니다.

그런데도 사람은, 죽어도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삼성의 고 이병철 회장은,

인간 세상의 버킷리스트로 따지면 이 분만큼 다 이룬 분도 없습니다.

 

죽음을 맞이하게 되자, 24가지 질문 리스트를 작성했습니다.

시공간을 초월한 영원을 주제로 하여

인간의 삶과 죽음에 관한 본질이 궁금해진 것입니다.

 

지구라는 틀 안에서는 풍광 좋은 여행지나 하고 싶은 일을 다 이룬 분입니다.

그가 이제 영원을 향해 가는, 자기 영혼의 여행에 관한 버킷리스트를 작성한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분은, 세상을 창조한 성경의 하나님부터 믿지 못했습니다.

그 하나님은, 죄 중에 빠져 인간이, 스스로 밑이 터진 웅덩이를 파면서

평생토록 갈증에 시달리는 모습을, 너무나 안타까이 여기셨다는 사실은, 더더욱 몰랐습니다.

그 불쌍한 인간을 구원한, 독생자 예수의 십자가 사랑은 전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죽을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자신의 전부를 바쳐서 죽어도 좋은,

그렇게 바칠만한 절대적 진리를 얻으려 시도했지만

거기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빠졌기에

아무리 해도 해답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영원을 향한 영혼의 버킷리스트마저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지 않고 스스로의 노력으로 달성하려니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최근에 버킷리스트가 화두가 되는 까닭이 무엇인가요?

웰빙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과거에는 먹고 사는 일 즉, 생존이 급선무였습니다.

한국이 이제 최소한 굶어 죽지는 않게 되자,

더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삶을 추구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나 아이러니하게,

버킷리스트를 다 성취하면.. 더 큰 절망이 생기지 않는가요!

 

버킷리스트는 인간이 달성할 수 있는 최고치, 최대치의 한계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그 리스트를 다 이루면, 분명히 이 세상에선 최고의 감동과 즐거움을 잠시 얻습니다.

지상 최고의 풍경과, 음식 맛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구라는 틀과, 인간의 태생적 한계는 벗어날 수 없습니다.

파스칼은 모든 인간의 내면에, 하나님이 아니고는 채워질 수 없는 빈 공간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피조물로서의 인간의 한계는, 하나님을 부인하고는 절대 극복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외면하고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천국과 지옥, 구원과 심판을 가르는 문제로 그치지 않습니다.

 

인간이 스스로 자기 인생을 평가해 봐도,

완전한 만족을 결코 얻을 수 없었다고 시인하는 셈입니다.

 

불신자의 입장에서 보면, 버킷리스트를 다 달성하는 자가 제일 부럽고

그 인생의 평가도 100점을 주지 않는가요?

 

그러나 막상 그 리스트를 다 이룬 자는, 죽음 밖에 남지 않았다고 실토한다면

실질적 의미에서 열심히 살고 있어도, 죽은 것이지 않는가요?

 

성경은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그 인간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더 큰 문제는 신자에게 있습니다.

 

▲문제는 예수 믿는 신자에게 더 많습니다. 성경통독을 백회 하거나,

평생 모은 돈으로 홈리스 구제 센터를 건립한 후에도

불신자보다 더 큰 잘못을 범할 수 있습니다.

실질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위한 목적이 될 때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드러내기보다, 그 업적이나 일을 달성하는 것 자체를 목표로 삼을 수 있습니다.

그럼 자기 자랑과 자신의 인간적 의밖에 남지 않습니다.

 

서두에 예수님 재림할 때의 육신의 부활이 신앙의 궁극적 목표라고 했습니다.

즉 버킷 리스트의 1위 항목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전혀.. 현실감이 없습니다.

그게 문제인 것입니다.

 

현재 기독교의 가장 큰 문제가 바로 이 점입니다.

대부분의 신자가 부활 생명을 소지했다는 확신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이 땅에서부터 이미 천국 안에 있는 자답게, 천국 같은 삶을 살지 않습니다.

유토피아처럼 살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하고 의로운 통치를 온전히 받고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너무나 불쌍해진 신자들.

 

오늘날의 교인들의 실상은 어떠한가요?

세례 받은 신자들도,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과 똑같은 버킷리스트를 작성해 놓고,

그걸 하나님의 힘을 빌려서 이루려고 합니다.

 

그것도 자기가 원하는 시기와 방식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하나님께 불평과 원망을 쏟아 붓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하나님만 경배하겠다고 했는데

하나님의 방식도 아닌 자기 방식대로 되지 않았다고 푸념하니

거룩한 성전에서 우상을 숭배하는 꼴이지 않는가요?

 

바울 사도는 신자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라고 했습니다. 고전15:9.

 

신자가 부활을 모르는 불신자처럼 살고 있는 모습,

부활의 참 생명을 누리지도 실현하지도 않는 것이.. 가장 불쌍하다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이 땅의 형통에만 몰두하니까

하나님은, 물론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도 가장 불쌍한 모습이 되었고,

그 신자 또한 가장 불쌍한 자가 된 것입니다.

 

쉽게 말해, 예수 믿는 사람이, 세상 사람과 똑같은 버킷리스트를 작성해 놓으니,

이것(세상 영화)도 못 취하고, 저것(영생과 부활)도 못 취하니

정말 사도 바울의 말씀대로, 가장 불쌍한 자가 되어 버린 것이.. 작금의 현실입니다.

 

만약 자기 신앙에,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완전히 빠져도

오직 자기 ‘세속적 버킷리스트’를 달성하기 위해서,

새벽기도를 드리거나, 일천 번제단을 쌓거나 하는 것은,

사도 바울이 말한바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자’가 되는 셈입니다.

 

▲결론을 말씀드리자면,

이런 부활의 생명, 부활의 영광은

설교를 듣고, 성경공부를 해야 하지만, 그것만으로 얻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내 어두운 눈을 열어주셔야 합니다.

내가 억지로 노력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내 삶에 얻어져야 하고,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자가 할 임무는,

양떼들에게, 그런 부활의 확신이 저절로 자기 삶에 나타나도록..

그래서 세상적 버킷리스트를 스스로 포기하도록..

(자기 양떼들이 신앙고백 하고, 세례 받았다고 만족하지 말고)

끊임없이 영적 성숙과 성령 인도함을 받는 삶으로 나아가도록.. 인도하는 일입니다.

 

▲정리하면

지금까지 어떤 피디가, 세상 모든 사람들이 방문하기 원하는 버킷 리스트

제 1위 여행지인

남미 우유니 호수를 방문했다가

오히려 밤에 그 우유니 호수에 비취는 별빛을 바라보고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얘기를 전해 드렸습니다.

 

우리 크리스천 하나님의 자녀들은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버킷 리스트’를 만들고, 그걸 실천하려고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건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대로, ‘터진 웅덩이에 불 붓기’ 이니까요.

 

대신에 비록 처음에는 현실감이 떨어지는 일이긴 하지만

‘현재 부활’, 매일 부활, 날마다 부활을 살아가려고 계속 연습하다보면

오늘 우리 삶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체험하게 되고,

 

그걸 체험한 사람만이, 결국은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의 부활 잔치에 동참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현재 부활 체험’이, 우리 크리스천들의 버킷 리스트 1위 항목이 되어야 한다는 설교를

전해 드렸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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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의 버킷리스트 1위는.. 목회 성공.

 

▲유진 피터슨의 경고.

"목회자들이 빠져들기 쉬운 우상은

개인적인 차원의 것이 아니라, 소명의 영역에 속한 것입니다.

 

즉 목회자 자신이 직접 성취할 수 있는

목회자로서의 성공이라는 우상이 바로 그것입니다."

 

"목회자들은 말로는 목회가 거룩한 소명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사역하는 모습을 보면 성공이나 출세를 더 간절히 추구합니다.

목회자들의 실제 사역은, 신학의 진리나 영성의 지혜가 아닌

시장의 압력에 밀려 구체화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유진 피터슨의 "성공주의 목회신화를 포기하라"에서 인용.>

 

▲목회자로서 "성공"이란 무엇일까요?

교인 숫자가 많은 교회의 모습일까요?

명예와 더불어 큰 교회 건물과 많은 교인 숫자들,

과연 이것이 목회자의 진정한 성공인 것인가요?

 

특히 목회자 자신의 실력과 능력으로, 이러한 결과를 가지고 온 줄고 알고 있다면

이것을 가리켜 진정 "성공"적 목회를 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요?

 

나는 목회자로서 이러한 유혹(?)으로부터 시달림을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받고 있습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시달림이란, 목회자로서의 과연 "성공"이란 말을 사용함이 적합한지 의문이 들기 때문입니다.

 

물론 보이는 다른 목회자들의 사역 속에서의 양적 성장이

나로 하여금 진정한 "성공"이 무엇인가란 질문을 던지게 할 수는 있지만

 

그보다 과연 목회자로서 "성공"이란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는, 그 단어의 정의조차 찾고 있지 못하고 있는 듯 합니다.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목회자 자신이 직접 성취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고 생각하는

착각 속에 빠질 위험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안에, 또한 나를 통하여 성취하신 것이 분명치 않을 때에

이러한 착각 속에 충분히 빠질 수 있는 것입니다.

 

왜 분명치 않을 수 있는가요?

그 원인은 자기 자신의 실력과 능력 등을, 우상화하였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물론 목회 시작할 때부터, 이렇게 자기 자신을 우상화할 목회자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역 속에서 나름대로(?) 성과를 보고 있노라하면

주위 사람들의 칭찬으로 말미암아, 목회자 자신이 직접 성취하였다는 생각이

점진적으로 자신의 마음에 스며들므로

"성공"이라는 우상에 빠지게 되는 경향이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이러한 위험을 나는 경계하고 있는가요?

 

목회가 거룩한 소명이라면, 사명 자체의 거룩함도 잊지 말아야 하고,

그 소명을 주신 주님도 거룩하시다는 사실을 망각하지 말아야 할텐데

우리 목회자들은 이러한 사실을 너무나 쉽게 망각하고 있지 않는가 염려됩니다.

 

그 이유는, 거룩하지 못한 세상에서 목회 사역을 감당하므로

목회자의 소명조차도 거룩함을 잃어버리고 있고

세상에 성공과 출세에 오염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이러한 오염의 물결을 역류할 수 있는 목회자가 되려면

신적 디바인 소명감을 잃지 않기 위해

나에게 소명을 주신 거룩하신 주님을 바라보며

그 주님의 음성을 듣고 좇아야 할 것입니다.

 

세상의 음성을 차단하고, 주님의 거룩한 음성을 듣고 복종하므로써

세상의 성공주의를 포기해야 할 것입니다.

 

거룩한 소명의식의 회복과 더불어, 자신의 한계를 인정함으로써,

하나님의 무한하신 능력이 목회 현장에서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회 성공"이라는 말을 듣기보다

 

"목회 소명 완수", 즉 "Well done, My good and faithful servant"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라는 칭찬을, 주님으로 부터 듣는 목회자가 되도록      

주님이 주신 거룩한 소명을, 생명을 다하여 완수해야 할 것입니다.

 

"주여, 주님이 주신 거룩한 소명을 완수하게 도와주소서!  (펀 글)

 

출처 :https://rfcdrfcd.tistory.com/15975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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