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누가복음 3장 1-14절)
옛날 영화에서 임금님이 행차하신다거나 혹은 개선식 따위의 대형 행사가 막 시작되려 할 때에 트럼펫 같은 금관악기들이 힘찬 소리로 '짠짜라 짠'하고 연주를 하는 것을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이것은 소위 '팡파르'(fanfare)라고 부르는 것인데 우리나라말로 정확하게 번역하기가 마땅치 않아서 그냥 외래어로 쓰고 있습니다.
그런 팡파르는 그 뒤를 이어 무슨 주인공이 등장한다든지 아니면 장엄하고 화려한 예식이 거행될 것을 예고해 주는 취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팡파르를 듣게 되면 반사적으로 '지금 곧 무슨 중요한 인물이 등장하려나보다,'라든지 혹은 '무언가 멋진 구경거리가 생기겠구나.'하고 기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펼치고 있는 본문의 말씀이 바로 '누가복음의 팡파르'가 울려 퍼지는 장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장과 2장에는 예수님의 탄생과 유년 시절에 관한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지만, 이제 이 3장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예수님의 공생애가 시작됩니다.
그 1절과 2절에 "1디베료 가이사가 위에 있은지 열 다섯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왕으로, 2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고 기록했습니다.
온 세상을 향하여 구원의 복음이 선포되기 시작되는 장면에서 누가는 "하나님의 말씀이... 요한에게 임한지라"라는 말로써 이제 곧 등장하실 주인공 예수님과 이어서 전개될 구속 사역을 위한 팡파르를 울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 역사적인 순간의 배경에는 당시 로마 황제였던 "디베료 가이사," 유대 총독이었던 "본디오 빌라도," 주변 지역의 분봉왕들이었던 "헤롯, 빌립, 루사니아," 그리고 각각 전임과 현직 대제사장이었던 "안나스와 가야바"의 이름들이 나타났습니다.
이들은 당대 세계를 주름잡던 로마 황제와 그 휘하의 총독, 그리고 로마제국 아래 각 지역에 자치적인 분봉왕으로 임명되어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던 자들, 그리고 또한 대제사장의 자리를 차지하고 백성들 위에 종교적으로 군림하고 있던 자들로서 실로 쟁쟁한 인물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역사의 진짜 주인공은 아니었습니다.
진짜 역사의 핵심 사건과 그 주인공은 "하나님의 말씀이 요한에게 임한지라"는 팡파르가 울려 퍼짐으로써 비로소 나타나게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곧 부활절이 다가오고 있는 시절에 우리들 역시 이 팡파르의 소리를 함께 들으면서 하나님 구속사의 주인공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과연 어떻게 예비하고 맞이해야 하는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우리는 자신의 '심령 속에서 겸손히 회개함'으로써 주님의 초림을 맞이해야 합니다.
이것이 세례요한의 팡파르가 우리 귀에 들려주는 첫 메시지입니다.
본문 3절에 기록하기를 "3요한이 요단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요한의 세례는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라고 했는데, 이런 세례는 우리에게는 당연한 것으로 이해되는 것이지만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아주 생소한 세례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원래 세례를 이방인에게만 주었습니다.
즉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을 믿겠다는 사람이 나타나면 그 개종의 표시로써 세례를 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원래 이스라엘인으로 태어나고 할례를 받았던 유대인들 자신은 그 어떤 개심의 의식이나 새 사람이 되었음을 선언하는 세례 같은 것은 전혀 필요하다고 여기지도 않았고 따라서 행하지도 않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은 바로 그처럼 방심하고 있던 유대인들을 향하여 "너희들 역시 죄 사함을 얻기 위해서는 회개가 꼭 필요한 사람이다."라고 그들 귀에다 대고 깜짝 놀랄 나팔소리를 터뜨렸던 것입니다.
세례요한의 이런 메시지는 나중에 8절의 말씀에서도 재확인됩니다.
거기서 그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너희는)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고 했습니다.
당시 "아브라함의 자손"이란 신분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마치 무슨 '구원의 보증서'처럼 여겨지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훌륭한 믿음의 조상이며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택하여 주셔서 이스라엘 민족의 첫 사람이 되었으며 또한 천하만민의 복의 근원이 될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그 의미를 곡해하여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닌 자들은 무조건 다 심판하시고 반면에 아브라함의 혈통적 자손 된 자들만 자동적으로 다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잘못된 '선택 개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아브라함이 우리의 조상이다.'라는 생각 속에서 완전히 방심하고 안주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그런 사고방식으로 인하여 유대인들은 스스로 회개의 필요성을 자각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믿겠다고 하면 세례를 주고 개심의 선서를 하게 하면서도, 자기 자신들은 이미 저절로 구원 보장의 딱지를 완전히 끊어 높은 사람처럼 착각하며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바로 이와 같은 유대인들의 방심을 흔들고 그 교만을 깨뜨리기 위하여 그처럼 또렷한 나팔 소리를 광야에서 불기 시작했던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런 팡파르가 울려 퍼짐으로써 벌어지기 시작할 일을 두고 본문 4절 이하 6절까지의 말씀에서는 "4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바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5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6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으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팡파르처럼 울려 퍼지면 그 때부터 본격적으로 "주의 길을 예비"하는 움직임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이미 700여 년 전에 예언을 했었습니다.
그 움직임은 그동안 울퉁불퉁했던 것, 꾸불꾸불했던 것들이 똑바로 되고 평탄케 되는 변화들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사람이 무슨 도로 공사하는 것처럼 주님의 길을 예비해야 한다는 뜻은 물론 아닙니다.
그 길이란 이 세상의 지형적인 길 공사가 아니라 바로 사람의 마음을 정비하는 것이었습니다.
메시아가 오시기 전까지 사람의 심령과 속에는 높고 낮은 것, 뒤틀려서 원래 형체를 찾을 수 없는 것, 올바른 방향을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정도에서 벗어난 것 - 이런 "첩경"들만 가득했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바로 이처럼 사람 마음속에 뒤엉켜 있던 '교만과 무지'의 "산들과 골짜기들"을 향해 복음의 팡파르를 불면서, 그 심령들을 "하나님의 구원을 볼" 수 있는 상태로 예비시키려고 했던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에 이런 세례요한의 팡파르가 울리자말자 구속사의 주인공 되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우리 인생 가운데 친히 왕림해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죄인의 마음을 당신께로 돌리시기 위하여 이미 온갖 자연계시와 여러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던 하나님께서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신, 실로 위대한 구세주의 등장이었습니다.
원래 눈으로 볼 수 없었던 하나님이 우리 앞에 가시적인 인간의 모습으로 이처럼 똑똑하고 분명하게 당신을 계시해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 믿는 것이 그렇게 잘 안 되는 것이겠습니까?
바로 그 사람의 마음의 길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걸리고 가로막는 지형, 구불구불하고 울퉁불퉁한 노선, 뒤틀리고 곁으로 빠져나가버린 길, 사람으로 하여금 예수님을 영접하는데 장애가 되는 것들이 바로 그 본인의 심령 속에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곧 방심과 교만이라는 장애물들입니다.
"나는 굳이 예수 안 믿어도 평소에 늘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양심적으로 살고 있으니까 회개할 것도 없고 무슨 십자가의 공로를 의지해야 할 필요도 없다."라고 교만해 하는 심정들이 바로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실로 '높은 산'입니다.
"종교란 것은 결국 사람을 착하게 살도록 하자는 것이니 불교를 믿든지 기독교를 믿든지 아니면 무종교라 할지라도 그저 선하게만 살면 다 같은 정신을 따르는 것이며 다 같은 구원에 이르는 것이다."라는 사고방식이 오늘도 뭇 사람들의 마음속에 박혀서 펴질 줄을 모르는 '굽은 길'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그저 몸만 교회에 출석하면서 "나는 교인이니까 천당이 만일 있다고 하면 어떻게 구원받게 되겠지."하고 영적으로 방심 상태에 있는 것 역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다.'라고 했던 유대인들과 조금도 다름이 없습니다.
자기 아들딸들은 유아세례 받게 할 줄 알면서도 정작 자기 자신은 정말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는 받지 못하는 자들도 꽤 많이 있을 것입니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의 심령이 이런 '첩경'들로만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 교만의 산들과 방심의 골짜기들이야말로 이 세상에 이미 오신 예수님을 구세주로 받아들이고 영접함에 있어서 가장 발에 걸리는 방해물들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오직 '겸비'로써 그 '크고 작은 산'들을 깎아 버리고 '회개'로써 그 '깊은 골짜기'를 메워야만 합니다.
구세주의 초림과 함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는 복음의 나팔 소리가 이처럼 낭랑하게 우리 귀에 울려올 때 자신의 심령 속에 있는 모든 교만과 방심의 첩경들을 제거하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자복하고 회개함으로써 이 세상에까지 우리 죄인을 찾아와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영접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우리는 자신의 '생활 현장에서 새 열매'를 맺음으로써 주님 재림의 길을 예비해야 합니다.
이것이 세례요한의 팡파르가 의미하는 두 번째 메시지였습니다.
본문 7절부터 9절에 "7요한이 세례 받으러 나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8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9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세례 받으러 나오는 무리"라고 했는데, 다른 복음서의 말씀에 보면 이들 중에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그들 가운데서도 세례요한의 말을 듣고 어느 정도 수긍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 중에는 자기네들 역시 하나님 앞에서 회개가 필요한 존재임을 인정하고 그 표로 세례 받는 것까지는 할 수 있겠다고 해서 세례요한 앞에 찾아온 자들도 포함되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결정적인 것 하나가 모자랐습니다.
그것이 바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였습니다.
세례요한에게 있어서의 회개란 마음으로만 부끄러움을 느끼고 통회 자복하면 끝나게 되는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정말 마음속에서 그런 극적인 변화가 일어났으면 거기에는 당연히 행실의 열매가 그 증거로서 따라 나와야 마땅했습니다.
땅속에 있는 뿌리에서 이전과는 달리 좋은 양분을 빨아들이게 되는 변화가 생겨났다면 당연히 그 나뭇가지에서는 눈에 보이는 "열매"가 맺힐 수밖에 없듯이, 사람이 그 심령 속에 변화를 일으키고 중생의 작용이 일어나게 되면 자연히 그 행실도 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열매가 없으면 이미 그 뿌리에서부터 문제가 있는 것이 틀림없으며 그런 나무는 결국 "도끼"의 심판을 피할 길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바로 이 점에 있어서 결정적으로 실패했습니다.
그들로 율법도 알았고 양심도 있었고 또 회개기도도 할 줄 알았지만, 그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전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결국 그 모든 종교생활은 오직 거짓이요 위선이었음이 분명한 것이었고 그 결과는 이방 불신자들이 당할 것과 꼭 같은 심판이 될 뿐이었던 것입니다.
반면에 오히려 일반 대중들은 이런 세례요한의 외침에 더 귀를 기울였습니다.
10절부터 14절의 말씀에 기록하기를 "10무리가 물어 가로되 그러하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11대답하여 가로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하고 12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하여 와서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13가로되 정한 세 외에는 늑징치 말라 하고 14군병들도 물어 가로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가로되 사람에게 강포하지 말며 무소하지 말고 받는 요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고 했습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란 자신의 일상생활에서 구체적으로 변화가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그 중에서 제일 첫째로, 세례 요한은 '무언가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없는 자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했습니다.
옷은 한 벌만 있으면 살 수 있으니 두 벌 있으면 나누어 주고 음식도 마찬가지로 하라고 했던 것입니다.
사람이 중생 받기 전에는 그저 자기 것만 끝까지 움켜쥐고 사는 그 좁고 답답한 '골짜기 인생'에서 결코 벗어 날 줄을 모릅니다.
하지만 '나누어 주고 베풀 줄 아는 것' - 이것이야말로 진정으로 그 마음에 변화를 일으킨 사람이라면 꼭 나타내게 되어 있는 대표적인 현상입니다.
우리가 성도들 사이에서 먼저 남을 대접할 줄 알게 되고 구제에 힘쓰게 되며, 내게 먼저 받아 풍족하게 된 이 복음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기 위하여 전도하고 내게 주신 물질을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불쌍한 영혼들을 구원하는 선교를 위하여 바칠 줄 알게 되는 것은, 오직 진짜로 회개한 성도의 삶에 즉시 따라오게 되는 열매들인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두 번째로 세리들을 향하여 "정한 세 외에는 늑징치 말라"고 했습니다.
당시 로마제국 산하에서는 각 지역에 세리들을 임명할 때 독특한 방법을 썼습니다.
즉 세리가 되고 싶은 사람을 공개 모집을 하고 그 중에서 자기 배당 지역을 통하여 가장 많은 세금을 로마 정부에 바치겠다고 입찰하는 사람을 세리로 임명해 주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세리로 임명되면 그 지역의 세금은 자기 마음대로 정할 수 있었고, 그렇게 해서 거둔 것 중에 로마 정부에 약속한 액수를 내고나면 나머지는 세리의 몫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한번 세리가 되면 문자 그대로 돈을 긁어모을 수 있는 것이었고, 자연히 고액의 세금 징수가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바로 그런 세리들을 가리켜 '정한 세금과 그에 합당한 수수료에 해당할만한 액수 이상의 세금을 부당하게 부과하지 말아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예수 잘 믿는 사람이라면 '외인에게서도 칭찬을 받는 자'가 되는 것이 또한 그 신앙의 열매입니다.
이전에는 탈세했더라도 신자가 되고 나면 사업을 할 때에 어디까지나 정당하게 벌어야 하며, 이전에는 상사 앞에서 눈가림만 했다 하더라도 예수님을 영접하고 나면 직장에서도 그 어떤 불신동료들보다도 더욱 성실하게 일해야만 합니다.
다시 말해서 참된 기독신자는 세상 사회의 도덕과 법 역시 불신자들보다 훨씬 더 잘 지켜야만 진정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셋째로 군병들에게는 "받는 요(料)를 족한 줄로 알라"고 했습니다.
짐작할 수 있듯이 군인이란 육체적으로 고되고 위험한 직종이면서도 월급은 적은 직장입니다.
자연히 그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사람들을 협박하거나 강요하여 부당한 과외수입을 얻으려 할 때가 많았습니다.
세례요한은 바로 그런 군인들을 향하여 '비록 너희들의 받는 보수에 비하여 하는 일은 어려운 것이라 할지라도 늘 만족하면서 살 줄 알아야 한다.'라고, 그들이 맺어야 할 회개의 열매를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었던 것입니다.
자신이 지금 누리고 있는 삶 역시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것인 줄을 깨닫게 되면, 그것에 만족하고 감사하는 자세 역시 당연히 따라오게 됩니다. 이전에는 매일 불만과 불평만 입에 달고 살던 사람이 일단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구원의 확신을 얻게 되면 갑자기 그 삶 속에서 기쁨이 넘치고 찬송이 끊이지 않게 되는 것이 바로 그 때문입니다.
그 전에는 전혀 감사의 조건이라고는 생각도 되지 않던 것들, 일용할 양식, 집, 가족, 직장, 이런 것들에 대하여 진심으로 감사가 나오게 되는 것은 오직 진짜로 중생 받은 신자들에게서만 나오게 되는 놀라운 '열매'들인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사람이 진심으로 회개하면 그 삶 속에서도 바로 이런 '열매'들이 나타나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 열매란 그 이전까지의 생활 전체를 통째로 뒤바꾸어 버리거나 다른 직업을 구해야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물질이 주어졌을 때 베풀 줄 알고, 가진 것이 없을 때에도 불평하지 않는 것 - 이런 간단한 것이 바로 회개한 자가 맺게 되는 열매입니다.
힘으로나 권위적으로 남들 위에 서게 되었을 때에도 그것을 내 욕심 위해 부당하게 오용하지 않는 것 - 그저 기초 상식에 불과한 이런 것들이 바로 중생 받은 자가 맺게 되는 현실적인 열매입니다.
그 무슨 일에 종사하고 있든지, 그 어떤 처지에 있든지 간에 바로 자기 자신이 영위하고 있는 생활의 현장 바로 그 안에서 이런 구체적인 변화들이 하나씩 둘씩 일어나게 되는 것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실로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이것 역시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만이 보여줄 수 있는 변화입니다.
왜냐하면 타락한 죄인의 인생은 이런 기본 양심적인 것조차 제대로 할 수 없을 정도로 구부러져 있고 험하기 짝이 없는 상태로 손상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오직 진심으로 회개하고 예수님 바로 믿게 된 자만이 신행일치의 열매를 맺으면서 그런 것들을 '평탄'하게 만드는 변화를 나타낼 수 있는 것입니다.
2천 년 전에 초림하셨던 예수님은 반드시 재림하실 것입니다.
그 다시 오실 주인 앞에 보여 드릴 달란트가 없는 종은 '악하고 게으른 종' 곧 그 '마음이 악하고 그 삶에서 게으른 종'이라는 책망을 듣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즉 그 행위에서 남긴 달란트가 없으면 이미 그 마음 자체에 주인을 경외하는 신앙이 없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당신의 종들과 회계하시러 반드시 다시 오실 우리 주님의 길을 '진정한 심령의 회개'에 필연적으로 따르게 되어 있는 '합당한 생활의 열매'로써 예비하고 기다리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님 여러분, 세례요한이 주의 길을 예비하기 위한 나팔을 불었을 때, 세상은 마치 높은 사람들 마음대로 흘러가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대통령, 장관, 재벌, 사회의 유명 인사 - 이런 사람들이 마치 이 역사의 주인공인 것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 이런 사람들은 그저 하나님께서 당신의 구속사 진행을 위하여 손가락 안에서 마음대로 쓰시는 엑스트라일 뿐이지 결코 주연은 아닙니다.
세례요한은 진짜 역사의 주인공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시라고, 그 주님을 바로 영접하는 길을 자신의 심령과 생활 속에서 준비해야 한다고 선포하는 팡파르를 울렸던 것입니다.
VIP가 우리 회사를 방문하게 되어도 준비할 것이 얼마나 많고 바쁜데, 하물며 만약 대통령이 내 집에 오신다고 한다면, 나를 만나려 오신다고 한다면 더욱 어떠하겠습니까?
미국의 링컨이 대통령 선거유세를 할 당시에 어떤 소녀가 링컨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수염을 기르시면 더 멋져 보이겠다.'고 조언을 했습니다.
링컨은 답장을 보내면서 그 소녀의 말대로 수염을 기르겠다고 약속하고 또 대통령에 당선되면 한번 찾아가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결국 대통령에 당선된 링컨은 어느 날 예고 없이 그 소녀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물론 그 소녀는 무척이나 기뻐했었지만, 그 소녀의 아버지는 두고두고 후회스러웠습니다.
그는 밖에 누가 왔는지도 모르고 문을 열어주러 나갔었는데, 뜻하지 않게 링컨이 자기 집 문 앞까지 와 있었고 자기는 면도도 하지 않은 덥수룩한 모습으로 미합중국의 대통령을 맞이하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소녀의 아버지가 만약 링컨의 방문을 미리 알았더라면 결코 그랬을 리가 없었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을 그처럼 무방비 상태로 당황스럽게 맞이하는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반드시 속히 오리라'고 이미 예고해 주셨으며, 그 주님의 재림을 어떻게 예비하고 기다려야 하는지도 분명하게 가르쳐 주셨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초림을 기다리면서 준비했었지만, 우리는 이미 한번 오셨던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성자의 화육강생은 죄인으로서는 감히 기대로 할 수 없었고 꿈에도 상상할 수 없던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몸소 '임마누엘'의 구세주로서 우리를 찾아와 주셨습니다.
그처럼 어려웠던 첫 번째 약속을 지키셨던 분이시니 두 번째 약속 역시 안 지키실 리가 없는 분이시며, 그러니 세례요한이 주님의 초림을 기다렸던 것보다는 우리가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이 훨씬 더 쉬운 일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오직 더 잘 예비하고 기다려야 할 뿐입니다.
그 재림하실 주님 앞에서 구부러진 길, 울퉁불퉁한 길을 남겨놓는다는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일입니다.
대통령이 오신다고 하면 내 집 앞길도 쓸고 집안 청소도 해야 하지만 우선 내 몸단장부터 해야 하는 것처럼, 다시 오실 왕 중의 왕을 만나 뵐 자들은 그 마음부터 곧게 펴고 그 생활 역시 새롭게 단장을 하고서 기다려야 마땅한 것입니다.
세례요한의 팡파르는 실로 간소한 것이었으며, 초림하신 구세주는 그처럼 '겸손하게 비하된 종'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재림 때의 팡파르는 천군천사들이 부는 '천지를 진동하는 나팔소리'가 될 것이며, 우리 주님은 구름을 타고 '영광의 심판주'로 다시 오셔서 우리의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게' 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길들은 이처럼 다시 오실 예수님을 위하여 얼마나 똑바로, 얼마나 평탄하게 준비되어 있습니까?
내 속에 있는 교만의 산들을 무너뜨리고 겸손히 회개할 줄 아는 심령, 교인된 것만 두고 안주하지 아니하고 신자로서의 합당한 열매를 구체적으로 맺는 생활 - 주님 재림의 나팔소리가 울려 퍼질 그날까지 날마다 자신의 신앙과 생활을 통하여 이런 '주의 길을 예비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출처/석기현목사 설교 자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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